고전극

고전극

[ classical drama , 古典劇 ]

요약 일반적으로 근대극 이전의 극.

입센 이후의 유럽 희곡을 근대극이라 하고, 그 이전의 것을 고전극이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구분 및 호칭은 학문적인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 ·로마시대부터 일관된 흐름을 이루는 유럽 희곡을 몇 개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면, 입센 이후의 극은 그 중 한 시기에 불과하다.

유럽에서 고전극이라는 말은 그리스 ·로마의 고대극을 가리키고, 나아가 그 영향을 강하게 받은 희곡, 즉 16∼18세기의 고전주의 희곡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이러한 견지에서 보면 셰익스피어는 영국문학의 고전일는지는 모르지만 고전극을 모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고전극은 아니다. 이에 반하여 아디슨의 《카토》(1713)는 평범한 작품이기는 하지만 고전주의 희곡의 이론과 규칙에 합치한 것이기 때문에 고전극의 범주에 든다.

모든 문화 중에서 연극은 고대의 유산을 가장 늦게 받아들여 16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겨우 고대극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영국과 에스파냐의 연극은 이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오히려 중세 연극의 기초 위에서 르네상스 연극을 발전시켰다.

고대극의 본을 뜬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도 16세기에는 거의 볼 만한 작품을 남기지 못했다. 그것이 17세기에 이르러 하나의 체계를 이루게 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론에 바탕을 둔다. ① 비극과 희극은 명확하게 구별되고, 그 중간적인 장르는 허용되지 않는다. 비극은 고대의 영웅이나 왕후를 주인공으로 삼고, 희극은 현대의 폐습 ·악풍을 그린다. ② 시간 ·장소 ·행위(줄거리)가 일치되어야 한다(3일치의 법칙). ③ 극은 현실의 모방이므로 ‘진실다워야’ 한다. ④ 극은 지나치게 잔학하거나 장난치는 것이어서는 안 되며, 관중의 고상한 취미를 존중해야 한다. ⑤ 용어는 장중 ·우아해야 한다. 여기에서 ①∼③은 아리스토텔레스 및 고대극을 잘못 이해한 데서 나온 것이고, ④ ⑤는 당시 관객의 주류인 상류사회의 기호에서 생긴 법칙이다. 이상과 같은 원칙은 작가들의 상상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한 것이었기 때문에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으나 절대군주제의 비호로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프랑스 연극이 빠져 있던 심각한 혼란상태를 생각하면 이 이론이 해악(害惡)만 남겼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사실상 아리스토텔레스의 곡해에서 연유하였다 하더라도 이 이론 덕택으로 코르네유나 라신, 몰리에르가, 16세기 작가들이 빠져들었던 노예적인 고대극 모방에서 해방되어 그들의 천재성을 자유롭게 신장시킬 수 있었다. 고전주의 이론가들은 이러한 규칙만을 터득하고 있으면 그것으로 걸작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또 이 규칙이 작품의 우열을 결정하는 유일한 기준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코르네유와 라신 및 몰리에르의 걸작은 이러한 규칙을 작가의 내면적인 자율로 만든 천재적인 재능의 소산이다.

그들의 작품에는 이 이론이 예견하지 못했던 작중 인물의 심리적 추구, 성격의 묘사가 내포되어 있다. 줄거리의 단일화는 외면적 사건을 극도로 제한할 것을 작가에게 요구하였으나 이는 그들의 관심을 비극에서는 주인공의 심리적 위기, 희극에서는 행위의 발동력으로서의 성격의 탐구로 돌리는 결과가 되었고, 또 시간과 장소의 제한은 그들 인물을 예리한 위기의 한 순간에서 포착하는 방향으로 돌리게 되어 그들의 작품은 지극히 드라마틱한 것이 되었다. 18세기에 들어서자 뛰어난 비극작가는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몇몇 사람이 문학사에 이름을 남기고 있으나, 그들도 코르네유나 라신의 드라마투르기(Dramaturgie:각본기법)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론가들의 규칙에 따라 그것을 이해했기 때문에 생명력 없는 형식주의에 빠졌다. 영국과 독일도 프랑스 비극의 아류(亞流)밖에는 낳지 못하였다.

이 무렵 이탈리아에서는 주목할 만한 두 사람의 고전주의 작가, 즉 《버림받은 디도네》 《티토 황제의 자비》 등을 쓴 P.메타스타시오와 《마리아 스투아르다》 《비르지니아》 《메로페》 《사울》 등을 쓴 V.알피에리가 나타났다. 산산조각 나 있던 이탈리아는 국민적 통일에 있어 로마의 전통에 희망을 걸었다. 알피에리의 비극은 자유정신과 폭군에 대한 증오가 넘쳐 흐르는데, 형식은 고전극이지만 내용은 슈투름 운트 드랑(Sturm und Drang:疾風怒濤)의 극과 같았다.

대혁명 후의 프랑스에서 마리 조제프 셰니에(1764∼1811)가 같은 정신으로 로마사(史)에서 취재한 고전비극을 썼으나 걸작이 없었던 것은, 작가의 재능 탓만 아니고 이 시대에는 프랑스 상류계층의 자유 ·공화 정신이 이미 입에 발린 말에 지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희극은 비극에 비하면 훨씬 나은 상태여서 몰리에르의 후계자인 르나르와 르사지 등은 오늘날 여전히 각광을 받고 있다.

18세기 마리보의 희극은 엄밀히 말하여 고전주의적인 것은 아니고, 콤메디아 델라르테에서 온 판타지의 요소가 낭만주의로 통하는 감상성이 다분하지만 《세빌랴의 이발사》 《피가로의 결혼》을 쓴 보마르셰는 그보다 훨씬 고전주의적이어서 몰리에르의 전통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영국은 17세기에 《시골 아낙네》 등을 쓴 위철리와 《세속 풍습》 등을 쓴 콩그리브, 《방탕아》 등을 쓴 새드웰 등도 몰리에르의 아류를 낳았고, 18세기에는 《연적》 《험구학교》 등을 쓴 셰리던 등을 배출하였다. 보마르셰에 이어 18세기의 가장 주목할 만한 희극작가로 《에라스무스 몬타누스》 《산의 에페》 등을 쓴 덴마크의 홀베르와 《주막집 안주인》 등을 쓴 이탈리아의 골도니가 있다.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그 여파가 독일에 파급되기까지의 10∼15년, 괴테와 실러는 일련의 고전비극을 창작하였다. 전자의 《타우리스섬의 이피게니에》(1787) 《토르쿠아토 타소》(1790), 후자의 《메시나의 신부(新婦)》(1803)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 희곡은 여명과 더불어 이미 드러나기 시작한 근대사회의 모순을 휴머니즘에 의하여 관념적으로 해결하려 한 것으로, 고대극적 수법(간소한 줄거리, 시적인 대사 등)으로 인간심정의 내면적인 비극을 그렸다. 그러나 이 같은 관조적인 휴머니즘은 나폴레옹 침입으로 독일이 부득이 유럽의 전쟁에 휩쓸려 들어갔을 때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었다.

그후 클라이스트의 《펜테질레아》(1808), 그릴파르처의 《사포》(1817) 《금빛 양모피(羊毛皮)》(1822) 《바다의 물결, 사랑의 물결》(1831)과 같이 고대세계를 무대로 한 작품이 나타났으나 이것들은 고전극보다 낭만주의극 범주에 들어간다. 다시 근대에 이르러 와일드의 《살로메》(93), 호프만스탈의 《엘렉트라》(1903)와 《오이디프스와 스핑크스》(1906), 하이젠클레버의 《안티고네》(1917)와 같이 고대세계에서 취재한 희곡이 없지는 않으나, 이것들은 현대의 분열적 ·도착적 심리에 고대적 의상을 입힌 것에 지나지 않아 고대극이라고 할 수 없다.

그보다 1930년 이후 프랑스에 나타난 지로두의 《앙피트리옹 38》(1929) 《트로이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1935) 《엘렉트르》(1937)와 사르트르의 《파리》(1943), 아누이의 《유리디스》(1942) 《앙티고느》(1944) 등과 같은 것들이 고전극에 가깝다. 이 흐름의 선두에 나선 사람은 클로델이다.

그는 자연주의에 대한 반격의 근거지를 그리스의 비극시인인 아이스킬로스에서 찾고 간결한 줄거리와 시적 대사로 《마리아에의 고백》(1912) 《비단 구두》(1926), 기타 가톨릭적인 영혼의 비극을 써냈다. 지로두나, 《죽은 여왕》(1942) 《산티아고의 성(聖) 기사단장》(1947)의 작가 몽테를랑이나 사르트르, 아누이도 그로부터 흘러나온 것으로, 고대사회를 무대로 하건 안 하건 극한적(極限的)인 한계상황(限界狀況)에 놓인 인간을 그린 그들의 비극은 그리스 비극에 가까운 것을 지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