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정식

계정식

[ 桂貞植 ]

요약 한국의 바이올린 연주자·지휘자. 국내 교향악단의 첫 지휘자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친일행적을 남겼다.
출생-사망 1904 ~ 1977
활동분야 예술
출생지 평양
주요저서 《동서양 음악사》《한국음악》

1904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숭실전문학교를 중퇴하고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도쿄[東京]의 도요음악학교[東洋音樂學校]를 다녔다. 하지만 중간에 자퇴를 하고 1924년 독일 뷔르츠부르크 바이에른 주립음악원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였다. 1934년 스위스 바젤대학교에서 조선의 궁중음악을 주제로 논문을 발표하고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35년 귀국하여 음악독주회를 열었으며 같은 해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가 되었다.

1941년 조선음악협회를 창립하는데 역할을 하였고 이사로 선출되었다. 조선음악협회는 음악의 발전을 위하는 명분으로 결성되었지만 일제강점기 동안에 일제의 침략정책을 홍보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1942년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음악회 심사위원, 지휘자 등의 자격으로 참여하였다. 이화여자전문학교가 주최하는 음악회에서는 알래스카주 남서부에 있는 애투섬(Attu Island)에서 전멸한 일본군 2500명의 영령(英靈)에게 바치는 노래를 작곡하여 연주하기도 하였다. 이때 수익금 전액을 일본 전함(戰艦)을 건조하는 기금으로 헌납하였다. 또한 음악으로 일제의 태평양전쟁을 지원하는 방법을 서술한 논문을 여러 차례 발표하였고 조선징병제실시를 적극 찬동하였다.

8·15 광복 후에는 현제명, 김성태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교향악단고려교향악단을 조직하였고, 1945년 10월 수도극장(현 스카라극장)에서 연주회를 열어 국내 교향악단의 첫 지휘자가 되었다. 현제명이 창립한 경성음악학원 교수가 되었으며 대한연주가협회 위원장이 되었다. 1956년 계정식음악학원을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1961년 미국으로 건너가 브루클린음악학교에서 음악교수로 활동하였다. 1974년 뉴욕에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