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신박해

경신박해

[ 庚申迫害 ]

요약 1860년(철종 11) 경신년(庚申年)에 일어난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
언제 1860년
무엇을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
임태영이 주동이 되어 조정의 명령도 없이 우포도대장과 짜고 사사로이 일으킴

1859년 12월 마지막 주에 시작되어 이듬해 9월까지 약 9개월 간 지속되었던 천주교도 탄압 사건이다. 1839년(헌종 5)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천주교도 색출에 공을 세운 금위대장 임성고(任聖皐)의 아들 좌포도대장 임태영(任泰瑛)이 주동이 되어 조정의 명령도 없이 우포도대장과 짜고 사사로이 일으켰는데, 포도대장의 탐욕과 천주교에 대한 개인적 적개심, 포졸들을 먹여 살릴 경제적 방편 등이 그 주된 원인이었다.

박해가 일어날 무렵 조선의 정치는 천주교에 대하여 비교적 관대한 정책을 유지하고 있던 시파(時派)인 안동김씨가 주도하고 있었으므로 천주교회는 순탄하게  교세확장을 도모해 나갈 수 있어 한 해에 약 1,200명 이상의 예비신자들을 모아들일 수 있었고 전국의 신자수는 약 16,700명에 달하였다.

박해는 서울에서 시작되어 지방으로 번져, 특히 전라도 쪽의 교우촌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주로 가장(家長)들, 재산이 있는 유력한 신자들이 체포되어 서울의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탐욕이라는 경제적인 동기에서 시작된 박해였기 때문에 포졸들의 방화 ·약탈 ·부녀자 겁탈의 사례가 너무 많아서 자연 천주교도들에 대한 주민들의 동정심이 일어났고, 당시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베르뇌 ·다블뤼 주교 등 서양인 선교사들을 검거하지 못하자 박해의 명분이 약화되면서 마침내 정국의 주도세력인 안동김씨로부터도 천주교도들의 재산약탈에 대한 비인도적인 처사에 대하여 비난을 받게 되었다.

안동김씨 세도가의 대표적인 인물 김병기(金炳冀)는 어전회의에서 양민을 피폐하게 하는 약탈행위에 대해 신랄하게 비난하면서 국왕에게는 과거에 몇 차례 있었던 천주교도 박해사건 때마다 정조 ·순조 ·익종 ·헌종의 불행한 죽음을 가져오는 등 왕실에 상서롭지 못한 선례를 남겼음을 지적하였다. 이에 철종은 음력 8월 옥에 갇힌 천주교도를 모두 석방하게 함으로써 박해는 종식되었다.

철종의 조부는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때 처 송씨(宋氏)와 며느리 신씨(申氏)가 천주교에 입교한 관계로 사사된 은언군(恩彦君) 인(경신박해 폰트 이미지 1)이었기 때문에 조부의 신원(伸寃)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천주교도로 인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매우 꺼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다분히 사적인 이유로 박해를 일으킨 장본인들을 좋아할 리 없었으며 박해가 시작된 지 약 6개월 만인 5월에 관련 포도대장인 임태영을 문책 사퇴하게 하고 좌포도대장에 허계(許棨), 우포도대장에 신관호(申觀浩)를 임명함으로써 이미 박해는 한풀 꺾여 종식의 조짐을 보였다.

그러나 이 박해로 인해 한때 천주교에 입교하려는 사람들이 격감하였고 중요한 교우촌들이 황폐화되어 신자들은 생계수단을 잃고 유랑하는 자가 많아져 교회에 큰 타격을 주었다. 박해 당시 유일한 한국인 성직자였던 최양업(崔良業) 신부는 경상도 죽림공소에서 포졸들에게 포위되어 한동안 갇혀 지내면서, 이번 박해로 박해 이전의 천주교의 인기가 몰락하고 정부에서 서양배를 멸시하고 적개심을 갖게 되었다고 지적하면서, 동시에 천주교가 좋은 종교라고 선전하면서도 공공연히 전파를 막는 것에 대해 백성들이 의혹을 품게 되었다고 보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