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주

객주

[ 客主 ]

요약 경향(京鄕) 각지의 상품 집산지에서 상품을 위탁받아 팔아주거나 매매를 주선하며, 그에 부수되는 창고업 ·화물수송업 ·금융업 등 여러 기능을 겸하는 중간상인.

좁게는 행상, 넓게는 객지상인에 대한 모든 행위의 주선인이라는 뜻을 갖는 객상주인(客商主人)이다. 주된 업무는 위탁자와 그 상대방 사이에서 간접매매하고 그 대가로 구전을 받는 위탁매매업을 담당하였다. 이 외에도 부수업무로서 위탁자에게 무상 또는 실비로 숙박을 제공하는 여숙업무, 화물을 가진 사람이나 살 사람에게 대해 대금입체(貸金立替)·자금제공 등의 금융 편의를 위한 금융업무, 각종 물화(物貨)를 무상으로 보관하기 위한 창고업무, 그리고 화물운반을 위한 마차나 마방(馬房) 또는 선박을 알선하는 수송업무를 맡았다. 보통 객주라 하면 이들을 말하는데, 물산객주(物産客主) 또는 물상객주(物商客主)라 하였다. 물산객주는 일반적으로 위탁자의 일신상의 사무까지 돕는 후견인과 같은 지위를 가졌는데, 물산객주와 위탁자의 이러한 관계는 보통 여러 대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객주의 기원이나 연혁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객주의 일종이던 경주인(京主人) 또는 원우제(院宇制)가 고려시대의 문헌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에 와서 성황을 이룬 객주는 주된 업무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뉘었다. 중국상인만을 상대로 하던 만상객주(灣商客主)는 중국과의 상거래에서 유일한 관문이던 의주만(義州灣)의 상인을 말하며, 보상객주(褓商客主)는 봇짐장수인 보상이 등짐장수인 부상과 더불어 각지의 장을 돌아다니면서 그 지방의 객주를 단골로 정하여 오랫동안 거래하는 가운데 형성되었다. 그 밖에도 일반 보행자에 대한 숙박만을 본업으로 하던 보행객주(步行客主), 대금 등 금융의 주선만을 전문으로 하는 환전객주(換錢客主), 조리·솥·바가지·삼태기 등 가정일용품만을 취급하는 무시객주(無時客主) 등이 있었다. 또한 객주는 자신들이 취급하는 화물의 종류에 따라서도 그 유형이 나누어진다. 채소와 과일을 취급하는 청과객주(靑果客主), 어초·해초 등 물에서 나는 산물을 취급하는 수산물객주 또는 해산물객주, 곡물을 취급하는 곡물객주, 그 밖에도 약재·직물·지물(紙物) 등을 취급하는 객주가 있었다.

이러한 객주는 문호개방 이전에는 포구와 같은 교통중심지에 있었지만, 개항 뒤에는 각 개항장에도 생겨났다. 개항장객주는 내외국 상인들의 위탁판매를 통해 매매 쌍방으로부터 구문(口文)을 받는 한편, 어음의 인수와 할인을 통한 금융업을 영위하면서 자본을 축적하였다. 이들은 축적된 자본을 바탕으로 초기 외국무역의 담당자가 되어 새로운 자본가계급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개항지에 객주회·박람회를 조직하여 길드(gild)적인 동업조합의 기능을 발휘하며 원산상회소(元山商會所:1883)·의신상회소(義信商會所:1884)·순신창상회(順信昌商會:1884) 등 상회사를 설립하여 세금을 납부하는 대가로, 정부의 비호와 보호를 받고 수세청부(收稅請負)를 맡는 등 개항장 거래에서 매매주선권을 보장받는 특권적 상인으로 성장해 갔다.

1890년대 이후 외국상인들의 개항장 밖 내륙지방 행상이 본격화하면서 객주상회사가 위협을 받게 되자, 1899년 정부는 영업세 수입으로 정부재정을 보완하려고 인천·부산항 등지에 자본력이 강한 객주 25개소를 선정하여 그 지역의 상품매매 독점주선권을 주어 보호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상권보호책은 일본상인의 반발로 무너지면서 차차 그들의 금융지배 아래 예속되어갔다. 객주상회소와 같은 상인단체들은 특히 을사늑약이 체결된 뒤 일본상인이 각 지방에 정주함에 따라 급속히 식민지적 유통기구로 편성되어 갔다. 그 뒤 객주는 외세의 압력으로 관허제가 폐지되는 과정에서 외국자본과의 경쟁력 부족, 과중한 납세의무 등으로 몰락의 길을 걷다가 결국 1930년 일제에 의하여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