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도

가도

[ 街道 ]

요약 나라 안의 모든 공도(公道).

도(道) ·대로(大路) ·역로(驛路) 등으로도 불렀다. 도라고 부른 예는 양재도(良才道) ·삭방도(朔方道) ·평구도(平丘道) 등의 경우이다. 고려시대에는 전국에 걸쳐서 산예도(狻猊道:開城狻猊 ―白川金谷―延安深洞―康翎佐丘 등 10개역 관할) 등 22개의 간선 역로가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정치적 변천에 따라 변경이 많았다.

조선 전기 전국의 간선 가도망은 한성(漢城)을 중심으로 한 대로(大路) ·중로(中路)로 구별된 5대 간선가도가 도로정책의 기본이 되어 발달하기 시작, 17세기에는 이 5대 간선가도가 대 ·중 ·소로 다시 구별되고, 역참도 증가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로 ·소로가 훨씬 멀게 연장되었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에는 5대 간선가도를 기본으로 하여 한성―의주, 한성―서수라(西水羅), 한성―평해(平海), 한성―부산, 한성―통영, 한성―제주, 한성―보령(保寧), 한성―강화의 9대 간선가도로 발전하였다.

이상은 본간선(本幹線) 대로이고, 여기서 여러 요소에 지선(支線)이 통하였음은 물론이다. 이들 도로의 노정(路程)은 옛날에는 일정(日程)으로, 후대에는 이정(里程)으로 계산하였다. 대로의 거리 표시는 주척(周尺)을 사용하였는데 6자[尺]를 1보(步), 360보를 1리(里), 30리를 1식(息)이라 하였다.

거리 측정의 기점(起點)은 경복궁(景福宮) 앞의 원표(元標)였다. 그리고 대로의 폭은 지방과 도성 내가 다른데, 도성 내는 대로 너비 56자[營造尺], 중로 16자, 소로 11자로 하고, 도로 양측 도랑의 너비를 각 2자로 하였다. 한편 여행자에게 노정을 알리기 위하여 10리마다 소후(小堠), 30리마다 대후를 만들고, 거기에 지명과 이수(里數)를 표시하게 하였다. 그밖에도 5리마다 정자(亭子)를 세우거나, 30리마다 느릅나무버드나무를 심기도 하였다. 한편, 이들 가도에는 교통 ·통신의 수단으로 역(驛)과 원(院)을 두어 여행자에게 편의를 제공하였으며,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30리마다 역을 설치하고, 마필(馬匹)과 노무자를 갖추어, 공문(公文) ·진상품(進上品) ·관물(官物)을 전송하며, 공무여행자에게 마필을 제공하고, 그 숙소까지도 알선하여 주었다.

이러한 제도는 1899년 철도 경인선(京仁線), 1905년 경부선(京釜線)이 각각 개통되고, 1911년 자동차가 도입됨에 따라 전국의 구도로가 개수되기 시작하였으며, 철도와 병행하는 소위 신작로(新作路)가 생기게 되어, 그 발착지의 지명을 빌려서 경인가도(京仁街道) ·경부가도(京釜街道) ·경의가도(京義街道)라는 새로운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그들의 식민지정책으로 도로의 개수 ·정비를 추진하여, 1928년 말에는 1등도로(4간 이상) 총연장 2,818 km를 개수하였다. 1938년에는 조선도로령(朝鮮道路令)을 제정하여 종래의 1 ·2 ·3 등 및 등외 도로의 명칭을 없애고, 국도(國道) ·지방도 ·부도(府道) ·읍면도(邑面道)로 개칭하였다. 6 ·25전쟁 때에는 군사적 목적으로 많은 도로가 개수나 건설, 또는 정비되어 한국 도로 발달에 새로운 계기가 되었다.

1960년대에는 산업의 발달, 자동차의 국내 생산에 따라 고가도로 ·입체교차로 등이 설치되고 고속도로가 건설되어, 한국도로사상 획기적인 발전기를 맞게 되었다. 특히 1968년의 서울~인천 간, 1970년의 서울~부산 간, 대전~전주 간 고속도로 개통을 효시로 고속도로망이 형성되자 전국토가 1일 생활권에 들게 되었다.

참조항목

고속도로, 도로, , 파발

역참조항목

의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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