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급 함 ] 대 구 문 화 유 적 지

[ 급 함 ] 대 구 문 화 유 적 지

작성일 2012.08.09댓글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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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에 있는 문화유적지 가르쳐주시고, 추가 설명도 부탁드립니다^^(간단하게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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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문화유적지 33곳을 올려드려요^^

 

(대구의 문화유적지)

 

1.달성 태고정

 

종 목  보물  제554호 
지 정 일 1971.12.06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하빈면 묘리 638 
시 대 조선시대

 

이 건물은 조선 성종 10년(1479) 박팽년의 손자인 박일산이 세운 별당건축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불타서 일부만 남았던 것을 광해군 6년(1614)에 다시 지은 것이다. 일명 ‘일시루’라고도 한다. 현재 대청에는 임진왜란 후 치찰사로 온 윤두수의 한시를 새긴 현판과, 정유재란 후 명군 선무관이 남긴 액자 들이 있다.

 

네모난 모양의 단 위에 서 있으며 앞면 4칸 ·옆면 2칸 크기로, 동쪽 2칸은 대청마루이고, 서쪽 2칸은 방으로 꾸몄다. 대청 앞면은 개방되어 있는데 옆면과 뒷면에는 문을 달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대청 앞 기둥 사이에는 2층으로 된 난간을 설치하였다. 서쪽에는 온돌방과 부엌을 마련해 놓았는데 단순한 아궁이가 아닌 부엌을 한쪽 구석에 둔 것은 흔치않은 것이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건물이지만 가구나 세부가공이 정교한 편이다.

 

 

2.현풍 석빙고

 

종 목  보물  제673호 
지 정 일 1980.09.16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현풍면 상리 632 
시 대 조선시대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돌을 쌓아 만든 창고이다.

 

남북으로 길게 축조되어 있으며, 출입구가 개울을 등진 능선쪽에 마련된 남향구조이다. 돌의 재질은 모두 화강암으로 외부에서 보면 고분처럼 보인다. 입구는 길쭉한 돌을 다듬어 사각의 문틀을 만든 후 외부공기를 막기 위해 돌로 뒷벽을 채웠다. 외부는 돌을 쌓고 점토로 다져서 흙을 쌓아 올렸다. 잘 다듬어진 돌로 벽과 천장을 쌓았는데 천장에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를 4개 틀어올리고 그 사이사이에 길고 큰 돌을 얹어 아치형을 이루게 하였다. 천장에는 통풍을 위한 환기구가 두 군데 설치되었고 빗물에 대비한 뚜껑이 있다. 바닥은 평평한 돌을 깔고 중앙에 배수구를 두었다.

 

당시에는 얼음창고가 마을마다 설치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규모가 작은 현풍고을에 이러한 석빙고가 만들어진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1982년 석빙고 주위의 보수작업 때 축조년대를 알려주는 건성비가 발견됨으로써 조선 영조 6년(1730)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게 되었다.

 

 

3.대구 달성

 

종 목 사적 제62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대구 중구 달성동 294-1

시 대 삼국시대

 

평지의 낮은 구릉을 이용하여 쌓은 삼국시대의 성곽이다. 높이는 일정치 않으나 4m정도이며, 둘레는 약 1,300m이다.

 

성벽의 아랫부분에서 초기철기시대의 조개더미와 각종 유물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 지방의 중심세력이 성장하여 초기적 국가 형태를 이루면서 쌓은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경주의 월성처럼 평지에 낮은 구릉을 이용하여 쌓은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달성은 우리나라 남부지방에서 초기 성곽의 전형으로 평가되고 있다.

 

성벽은 주로 흙으로 쌓았고, 성벽 윗부분에는 큰 돌덩어리들이 군데군데 드러나 있어 후대에 수리한 것으로 보인다. 성안에는 조선시대 전기까지 군대의 창고가 있었고, 우물과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성의 서남쪽으로 연결된 구릉지대에는 돌방무덤(석실분)이 많이 흩어져 있고, 무덤에서 금동관을 비롯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대구 달성은 우리나라 성곽 발달사에 있어 가장 이른 시기의 형식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4.불로동 고분군

종    목  사적  제262호  
지 정 일  1978.06.23  
소 재 지  대구 동구  불노동 335  
시     대 삼국시대 

대구시 불로동과 입석동 구릉 서남면에 있는 수십기의 크고 작은 무덤들이다.

무덤의 지름은 15∼20m, 높이 4∼7m 정도가 보통이며, 내부구조는 냇돌 또는 깬돌로 4벽을 쌓고, 판판하고 넓적한 돌로 뚜껑을 덮은 직사각형의 돌방이 있으며, 그 위에 자갈을 얹고 흙을 덮었다. 껴묻거리(부장품)로 금제 혹은 금동제 장신구와 철제무기 무늬를 새긴 토기 등 많은 출토물이 있다.

이 무덤들은 대개 4∼5세기경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판단되며, 이 지역 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토착 지배세력의 집단무덤으로 추측한다.

불로동 무덤들은 위치가 구릉이라는 점, 무덤 내부가 돌무지 무덤과 비슷하게 깬돌로 지은 점, 그리고 돌방이 지나치게 가늘고 긴 점에서 낙동강 중류 지역 계통임을 알게 해 준다. 그러나 유물의 형태나 질이 신라와 유사하여 이 지역 세력의 복잡한 문화양상을 보여주기도 하다.
  

 

5.계산동 성당

 

종 목 사적 제290호

지 정 일 1981.09.25

소 재 지 대구 중구 계산동2가 71

시 대 대한제국시대

 

 1886년 로베트(Robert.A.P) 신부가 경상도 지역에 천주교를 전파하다가 1897년에 현재의 계산동 성당 자리에 있던 초가집를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였다. 1899년에 한식 목조 십자형의 성당을 지었으나, 다음 해에 화재로 불 타 1902년에 현재의 성당을 짓게 되었다.

 

설계는 로베트 신부가 하고 중국인이 공사를 맡았다고 한다. 당시 대구에서는 처음 세워진 서양식 건물로, 입구에 두 개의 종각에 우뚝 솟아 ‘뾰족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성당건축은 고딕양식이 가미된 로마네스크 양식이며, 화강석 기단 위에 붉은 벽돌을 쌓고 검은 벽돌로 고딕적인 장식을 하였다.

 

대구 지방에서 유일한 1900년대 성당 건축물로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6.진천동 입석

 

종 목 사적 제411호

지 정 일 1998.12.23

소 재 지 대구 달서구 진천동 470-38외

시 대 청동시대

 

입석은 큰 돌을 세워 놓은 것으로 선돌이라고도 하며, 고인돌이 있는 지역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진천동에서 선돌을 세운 주위로 석축을 네모난 형태로 둘러 쌓아 놓았고, 선돌 앞에서 제사의식을 지낸 것으로 짐작된다. 선돌 주위에는 고인돌이 여러 기 남아있다. 주변지역은 주택이 많이 들어서 있으나, 유적 보존을 위해 선돌 지역을 발굴조사하여 정비하였다.

 

고인돌과 선돌의 관계 및 서로의 기능적 성격을 통해 고대 문화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는 유적이다.

 

7.구 대구의학전문학교 본관

 

종 목  사적  제442호 
지 정 일 2003.01.28
소 재 지 대구 중구  동인동 2가 101 
시 대 일제강점기

 

구 대구의학전문학교 본관(현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본관)건물은 일제 강점기 때 대구지역 의료인 양성을 위해 지어진 건물로 1933년 공립 대구의학전문학교로 개교되었다.

 

이 건물은 구 도립대구병원(사적 제443호, 현 경북대학교 의과대학병원 본관)건물과 마주보며 배치되어 있다. 3층의 붉은 벽돌(조적조) 건물로 남향하며, 정면 중앙부에는 4층으로 된 사각탑(Turret)을 두고 옥상에는 옥탑을 설치하였다. 평면은 ‘산(山)’자 모양으로 중복도식이며, 현관 포치(Porch)를 중심으로 좌우대칭형이다.

 

건물의 외관 구성에 나타난 특징은 정면 중앙부 돌출 유리벽의 곡면처리 및 창 사잇벽과 옥상 파라팻부의 수평돌림띠는 정면성을, 옥상부의 사각탑과 창 사이의 수직벽은 수직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전체적으로 안정감과 웅장함을 느끼게 한다.

 

한국 근대 의학교육의 역사를 잘 보여주는 중요한 건물로,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며, 전체와 세부 구성이 치밀하고, 건축사적으로도 매우 수준 높은 건물로서 근대건축으로서의 건축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교육사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8.구 도립대구병원

 

종 목  사적  제443호 
지 정 일 2003.01.28
소 재 지 대구 중구  삼덕동 2가 50 
시 대 일제강점기

 

구 도립대구병원(현 경북대학교 의과대학병원 본관)은 일제 강점기 때 1928년 도립 대구의원으로 지은 2층의 붉은 벽돌(조적조) 건물이다.

 

이 건물은 구 대구의학전문학교 본관(사적 제442호, 현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본관)건물과 마주보며 배치되어 있다. 건물은 북향하여 동서로 길게 배치되었으며 지붕은 모임지붕 형태로 기와를 이었다. 평면은 ‘ㄱ’자 모양으로 중복도(中複道)의 양측에 각 실(室)을 남향과 북향으로 배치하였으며, 정면 우측의 익사에는 편복도를 설치하고 동향으로 실을 배치하였다.

 

건물 구성은 정면 중앙부의 현관 포치(Porch)를 중심으로 대칭을 이루고 창인방과 처마부를 화강석 수평돌림띠(Cornice)로 장식하여 르네상스적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건물의 외관구성에 나타난 특징은 네모반듯한 지붕을 이은 사각탑(Turret), 수직으로 긴 반원 아치(Arch)창, 페디먼트(Pediment), 지붕면의 도머(Domer)창, 난간벽의 치형 장식수법, 화강석 다듬돌로 구성한 수평돌림띠(Cornice) 등의 형태요소들을 적극적으로 채용하여 정면성과 대칭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 근대 병원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건물로, 우측 익사가 철거되고, 정면 좌측에 증축된 부분이 있으나, 전체적으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역사적·건축사적으로 높은 가치가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9.도동서원


종 목  사적  제488호  
지 정 일 2007.10.10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35번지 
시 대 조선시대


도동서원은 1605년(선조38) 지방 유림에서 한훤당 김굉필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서원으로 조선중기 전학후묘의 전형적 배치형식과 강당과 사당의 공포양식 및 담장 구성수법 등에서 건축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강당·사당과 이에 딸린 담장은 보물 제35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서원 전면에 위치한 신도비, 은행나무 등을 포함한 서원 전역을 국가지정문화재(사적)으로 지정하여 보존·관리하고있다. 

 

10.달성 삼가헌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104호 
지 정 일 1979.12.31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하빈면 묘리 800 
시 대 조선시대


충정공 박팽년(1417∼1456)의 자손들이 정착하여 온 박씨마을 묘골과 낮은 산 하나를 경계로 하여 자리잡은 조선시대의 주택이다. 넓은 터에 대문간채·사랑채·안채·별당·연못이 배치되어 있다. 충정공의 11대손인 삼가헌 박성수가 영조 45년(1769)에 사랑채를 짓고 자신의 호를 현판으로 걸어 '삼가헌'이라 이름지었다. 그 이듬해에는 삼가헌 서쪽편에 별당을 세우고 주변과 연못에 각각 국화와 연꽃을 심은 뒤 '하엽정'이라 불렀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건물이 사랑채이며, 안채는 사랑채를 거쳐야 출입을 할 수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대략 트인 'ㅁ'자형의 구조를 하고 있으며 안채로 드나드는 중문채와 곳간으로 연결이 되어있다. 사랑채는 'ㄱ'자형 평면으로 넓은 대청과 골방이 딸린 온돌방 2칸·마루방·청지기방을 두었다. 안채는 'ㄷ'자형으로 부엌·안방·대청·건넌방·개방된 툇마루 등으로 꾸몄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의 서쪽으로 장독대·곳간채·안변소가 자리잡고 있다.


원래 서당으로 쓰던 별당은 고종 11년(1874)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이 별당은 안채의 서쪽 넓은 터에 따로 자리잡고 있는 'ㄱ'자형 건물로 온돌방 3칸과 마루방 1칸으로 구성되었다. 왼편 끝방의 앞에는 1칸의 누마루를 꾸미고 그 옆 마루와 다른 방들 앞에는 툇마루를 놓았다.


전체적으로 볼때, 조선 중기에 건축된 지방 양반가의 특징을 잘 남긴 대표적인 주택이다.
 

 

11.달성 조길방 가옥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200호 
지 정 일 1984.12.24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가창면 정대1리 350 
시 대 조선시대

 

깊은 산골 경사가 급한 산간마을에 자리한 초가로, 현 소유자의 9대조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지은 집이라고 한다. 사랑채는 60여년전에 확장하였고, 아래채는 30여년 전 무너진 것을 다시 지은 것이다. 산 전체가 서향으로 경사져 있고 그 안에 마을이 숨듯이 자리하여 집들은 자연히 모두 서향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15호 가량의 집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6호만 남아있고, 이 집이 이 마을에서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높은 축대 위에 지은 안채를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사랑채, 왼쪽에는 아래채가 부속건물처럼 낮게 마주보고 배치되어 있다. 안채의 앞면 벽에는 크기가 매우 작은 여닫이 문 1짝이 있는데, 출입보다는 채광과 통풍을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초가로는 보기 드물게 오래된 건축으로, 특히 안채 창호문의 규모와 성격은 주택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12.둔산동 경주최씨 종택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261호 
지 정 일 2009.06.19
소 재 지 대구 동구  둔산동 386번지 일원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인조 때의 학자 대암 최동집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지은 집이다.


대구 지방에 있는 조선시대 주택 중 가장 오래되었으며, 살림채와 재실·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숙종 20년(1694)에 지은 안채와 광무 9년(1905)에 다시 지은 사랑채가 살림채를 구성한다. 사랑채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동천서원을 없앨 때 철거한 자재의 일부를 사용하여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살림채의 오른편에 있는 보본당은 영조 18년(1742)에 지은 사당으로, 제사지내는 재실로 사용하고 있다. 그 뒤편에 있는 2동의 사당은 최동집과 조선 정조 때의 학자인 최흥원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재실·가묘·별묘 등이 조화를 이룬 큰 규모의 주택으로 조선시대 양반 주택과 그 생활 양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3.선화당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

지 정 일 1982.03.04

소 재 지 대구 중구 포정동 21 경상감영공원

시 대 조선시대

 

 선화당은 경상도 관찰사가 공적인 일을 하던 건물로 원래 안동에 있던 것을 조선 선조 34년(1601)에 김신원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그 뒤 현종 11년(1670), 영조 6년(1730), 순조 6년(1806) 3차례에 걸친 화재로 타버렸다.

 

지금의 건물은 순조 7년에 윤광안이 다시 지은 것이다. 그 후 경상북도 도청으로 사용되다가 1969년 도청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자 1970년 중앙공원을 만들면서 현 모습으로 고치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관청건물은 남아있는 것이 많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귀중한 자료이며, 경상감영의 상징이 되는 건물이라는 데 가치가 있다.

 

14.징청각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호

지 정 일 1982.03.04

소 재 지 대구 중구 포정동 21 경상감영공원

시 대 조선시대

 

경상도 관찰사가 살림채로 쓰던 건물이다. 조선 선조 34년(1601)에 선화당, 응향당 등 여러 건물과 함께 지었으며 그 뒤 여러 차례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경상도 관찰사가 살림채로 쓰던 건물이다. 조선 선조 34년(1601)에 선화당, 응향당 등 여러 건물과 함께 지었으며 그 뒤 여러 차례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면 8칸·옆면 4칸으로 넓이가 무려 227㎡나 되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징청각은 선화당과 함께 대구시내에 남아있는 유일한 관아건물로 중요한 문화재이다.

 

15.봉무정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8호 
지 정 일 1984.07.25
소 재 지 대구 동구  봉무동 939 
시 대 조선시대


조선 고종 12년(1875)에 봉촌 최상룡이 행정사무를 볼 수 있도록 마을사람들과 의논하여 지은 것이다.


원래 이 자리에는 달성군 공산면 4개 마을(강동·독좌·위남·단산)에서 쓰던 초가 사무소가 있었다. 이 4개 마을을 합쳐 봉무동으로 행정구역이 바뀌자 초가를 헐고 이 건물을 지었다.


강당을 중심으로 동쪽에 덕교재, 서쪽에 예용재가 있다. 강당은 농민들의 계몽과 마을 규약 등을 가르치고, 선비들이 모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덕교재와 예용재는 마을사람들이 모여 의논하던 곳이다.


화강석의 둥근 초석 위에 둥근 기둥을 세운 5칸 규모의 집으로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옆면에 내림지붕을 달았다.


봉무정은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을 대표하는 건물이며, 이 시대 공공건물의 예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6.성재서당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9호 
지 정 일 1984.07.25
소 재 지 대구 동구  미대동 169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인조(재위 1623∼1649) 때 선비 채명보(1574∼1644)가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그 뒤 후손들이 선생의 덕행을 널리 기리고자 새로 짓고 ‘성재서당’이라 이름을 고쳤다.

 

채명보의 휘는 선견, 자는 명보, 호는 양전헌이며 본관은 인천이다. 광해군 9년(1617)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서궁유폐사건이 일어나자 선비들과 함께 상소를 올려 잘못된 점을 지적하였다.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 때에는 향병을 모집하기도 하였으며, 인조 4년에 희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받지 않았다. 고향으로 돌아와 성재정을 짓고 선비들과 학문을 논하면서 만년을 보냈다.
 

 

17.도곡재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2호 
지 정 일 1974.12.10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하빈면 묘리 692 
시 대 조선시대

 
도곡재는 학생들의 공부를 위해 사용되던 집이다.


처음에는 조선 정조 2년(1778)에 대사성인 서정공 박문현이 살림집으로 세운 건물이나, 정조 24년(1800) 경에 도곡 박종우의 공부방으로 사용되면서 그의 호를 따서 도곡재라는 이름을 붙였다.


앞면 4칸·옆면 1칸 규모이며, 후대에 퇴칸을 달고 대청을 넓혀 누처럼 꾸몄다.


도곡재는 태백산지역 살림집의 일반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소박한 건물이다.
 

 

18.하목정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6호 
지 정 일 1984.05.21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하빈면 하산리 1043-1 
시 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낙포 이종문이 조선 선조 37년(1604)에 세운 정자이다. ‘하목정’이라는 정자의 이름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곳에서 잠깐 머물렀던 인조(재위 1623∼1649)가 훗날 낙포의 첫째 아들인 이지영에게 직접 써준 것이다. 또한 일반 백성들의 주택에는 서까래 위에 덧서까래인 부연을 달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지만, 인조가 명령하여 이 집에는 부연을 달았다고 한다.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사랑채로 이용되었던 이 집은 전체적으로 T자형 구조로 되어있어서 처마곡선도 부채 모양의 곡선으로 처리되었다. 내부에는 김명석·남용익 등 많은 유명인들이 쓴 시가 액자가 걸려있다.
 

 

19.신숭겸장군 유적

 

종 목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호 
지 정 일 1982.03.04
소 재 지 대구 동구  지묘동 526 
시 대 조선시대

 

고려의 개국공신인 신숭겸을 기리는 유적이다.

 

신숭겸(?∼927)은 평산 신씨의 시조로서, 918년 배현경, 홍유, 복지겸 등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의 건국에 이바지한 인물이다. 고려 태조 10년(927) 대구 공산에서 후백제 견훤의 군대와 싸우다가 태조가 적군에게 포위되어 위급해지자, 태조의 옷을 입고 변장하여 맞서다가 전사하였다.

 

태조는 그의 죽음을 애통히 여겨 그의 시신을 거두어 광해주(지금의 춘천)에 묻고 순절단, 지묘사, 미리사를 세워 명복을 빌었다.

 

조선 선조 40년(1607)에 경상도관찰사 유영순이 지묘사의 자리에 표충사를 지어 신숭겸을 모셨으며, 후에 이 서원에 사액을 내려 관리하였다. 고종 8년(1871)에 서원철폐령으로 표충사가 없어지자, 후손들이 표충재를 새로 지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20.봉무토성

 

종 목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4호 
지 정 일 1988.05.30
소 재 지 대구 동구  봉무동 산26,27 
시 대 삼국시대


토성이 있는 곳의 서남쪽은 금호강에 접한 높은 절벽이며, 동북쪽의 일부만 제외하고는 전면에 가파른 경사가 형성되어 있다.


토성의 둘레는 약 350m 정도인데, 성벽의 높이와 너비가 소규모여서 군사적인 목적보다는 도피용 산성으로 판단된다. 토성의 남동쪽으로 약1㎞ 떨어진 낮은 구릉에는 봉무동 무덤들과 불로동 무덤들이 있고, 금호강을 사이에 두고 검단동 토성과도 연결되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이곳에는 팔공산과 금호강을 배경으로 하는 대규모의 집단이 형성되어 있었고, 이들 세력이 봉무토성을 축조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성내에서 발견된 토기 조각들로 볼 때 3∼4세기경인 삼국시대의 토성으로 보인다.
 

 

21.용암산성

 

종 목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5호 
지 정 일 1988.05.30
소 재 지 대구 동구  도동 산35,36 
시 대 삼국시대


용암산성은 해발 380m의 산꼭대기에 가파른 경사를 이용하여 쌓은 성으로, 안심과 하양으로 이어지는 통로상에 있어, 지형상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성벽의 둘레는 약 1㎞이며, 성의 서쪽과 남쪽의 산기슭에서 능선으로 이어지는 완만한 경사지에는, 인공적으로 절벽을 만들어 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절벽 앞에는 문터로 보이는 입구가 있으며, 성 안의 동북쪽에는 우물터가 있다. 성 안에서 신라 토기조각들이 발견되는 점으로 미루어,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성으로 추측된다. 임진왜란 때 대구지방의 의병들이 이 성에 모여 활동했다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그 후대까지 계속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22.팔거산성

 

종    목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6호 
지 정 일  1988.05.30 
소 재 지  대구 북구  노곡동 산1 
시     대 삼국시대

 

대구광역시 북쪽 팔공산의 지맥 끝자락에 위치한 산성으로, 성안에 평지와 계곡을 품고 산꼭대기를 둘러 쌓았다. 산의 생김새가 함지를 엎어놓은 것과 비슷하여, 이 산을 함지산 또는 방티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해발 300m가 넘는 가파른 경사를 이용하여 흙과 잡석을 섞어 쌓았다. 산성의 서쪽 기슭 아래에 4∼5세기경에 만들어진 무덤들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팔거산성 역시 이 무덤을 쌓은 세력 집단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23.대덕산성


종 목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7호

지 정 일 1988.05.30
소 재 지 대구 남구  대명동 산224, 226, 227 
시 대 통일신라


대덕산성은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에 있는 대덕산 정상에서 북쪽의 안지랭이 계곡을 감싸며 쌓은 포곡식 산성으로 ‘앞산산성 ’이라고도 부른다. 포곡식 산성은 성곽이 하나 또는 여러 개의 계곡을 감싸고 축성된 것으로, 장기간 전투에 사용하기 위해 쌓은 성을 말한다.

 

옛 기록에 의하면 성불산의 옛 성이 수성현에 있었으나, 지금은 산의 능선과 비탈부근에 깬 돌로 성을 쌓은 흔적만이 남아 있다. 성의 둘레는 3,051척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범위는 약 3㎞에 달한다.

 

자연 암벽을 최대한으로 이용한 산성으로 성 안에서 발견된 옛 그릇조각과 기와조각으로 보아, 통일신라에서 고려시대까지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24.사월동 지석묘군


종 목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9호  
지 정 일 1992.09.08
소 재 지 대구 수성구  사월동 469 
시 대 청동시대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지상에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 놓은 탁자식과, 땅 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대구시 수성구 사월동에 있는 이 고인돌은 바둑판식으로 4기가 무리지어 있다. 덮개돌의 길이는 1.7∼2.37m, 너비는 1.1∼1.6m이며 받침돌 높이는 0.7m∼1.27m 정도이다.


무리지어 있는 고인돌을 마을에서는 ‘칠성바위’라 부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과거에는 모두 7기의 고인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5.예연서원


종 목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1호 
지 정 일 1995.05.12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유가면 가태리 538번지일대 
시 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곽재우(1552∼1617)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곽재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조직하여 경상도 일대에서 활약하여 큰 공을 세운 인물로 붉은 옷을 입은 장군이라는 뜻의 ‘홍의장군’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광해군 10년(1618)에 ‘충현사’로 처음 세웠고 현종 15년(1674)에 규모를 확장하여 서원의 모습을 갖추었다. 숙종 3년(1677) 나라에서 인정한 사액서원으로 ‘예연’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폐쇄되었고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소실된 것을 1977년과 1984년에 걸쳐 복원하였다. 현재는 곽재우의 재종숙으로 정유재란 때 공을 세운 곽준의 위패를 추가로 모시고 있다.


경내 건물로는 사당과 강당 등 주요 건물과 제물을 준비하여 두던 고사, 숙소로 사용되던 동·서재 등이 있다. 사당은 곽재우와 곽준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건물이다. 강당은 유림의 회합장소와 교육 장소로 사용하던 건물로 중앙에는 마루를 구성하고 양 옆으로 온돌방을 배치한 구조이다.


해마다 3월과 9월에 제사를 지낸다. 경내에는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비석이 있어 흥미롭다.
 

 

26.초곡산성


종 목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7호 
지 정 일 2008.04.10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유가면 초곡리 산1번지 외 
시 대 삼국시대


초곡산성은 비슬산 유가사 서쪽 해발 700미터 산 정상에 위치하여 북동에서 남서방향으로 길게 타원형으로 자리 잡은 성으로, 성의 둘레는 1,700미터이며 산성 내에 분포한 고분군으로 보아 삼국시대 축성된 산성으로 여겨진다.


성곽의 형태는 꼭대기가 평탄하며 절벽인 자연지형을 이용한 퇴뫼식 산성으로 성내부에는 성문, 망루 등의 흔적뿐만 아니라 기와, 우물, 고분군 등이 확인되어 달성군 현풍면, 유가면 일대의 중요한 유적으로 역사적 가치가 있다.
 

 

27.남평문씨 본리 세거지

 

종 목  대구광역시  민속자료  제3호 
지 정 일 1995.05.12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401-2 
시 대 조선시대


문익점의 18대손 문경호가 터를 닦아 남평 문씨 일족이 모여 살던 곳이다. 원래 절이 있던 명당터를 구획하여 집터와 도로를 반듯하게 정리하고 집을 지었다. 지금은 조선 후기의 전통가옥 9채와 정자 2채가 남아 있으며, 도로에 접한 부분에는 나지막한 담을 쌓았다.


이곳의 대표적인 건물로는 수봉정사와 광지당·인수문고를 들 수 있다. 수봉정사는 세거지의 입구에 있는 정자로 정원을 매우 아름답게 꾸민 곳이다. 주로 손님을 맞고 일족의 모임을 열 때 사용하던 큰 규모의 건물이다. 광지당은 문중의 자제들이 학문과 교양을 쌓던 수양장소이다. 또 인수문고는 문중의 서고로, 규장각 도서를 포함한 책 1만여 권을 소장하고 있다. 처음에는 작은 규모였으나 후에 크게 늘려지었고, 도서열람을 위한 건물도 따로 지어놓았다.


주변경관이 아름답고 도로망도 편리하게 정리되어 있는 옛 마을이다.
 

 

28.귀암서원 숭현사

 

종    목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호
지 정 일  1982.03.04 
소 재 지  대구 북구  산격동 산79-1 
시     대 조선시대

 

구계 서침의 덕을 기리기 위해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서원이다.

 

서침은 고려말∼조선초의 변혁기에 향촌에 은거하며 학문 연구에 노력하였다.

 

귀암서원은 현종 6년(1665) 세웠고,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그 후 1924년 유림이 다시 지었다. 신명여고 운동장 오른쪽 언덕 아래에 북동쪽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경앙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유허비각이 있고 맞은편에 강당이 있다.

 

숭현사는 강당 바로 뒤에 3m쯤 떨어져 있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귀암서원 숭현사는 대구 시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서원 안에 있을 뿐 아니라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29.칠곡향교 대성전

 

종    목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6호 
지 정 일  1982.03.04 
소 재 지  대구 북구  읍내동 600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국립교육기관이다.

 

칠곡향교는 언제 처음 지었는지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조선 태조 원년(1392)에 세운 것으로 전한다. 대성전은 17세기 초에 세운 것으로 1907년에 크게 보수하였다.

 

현재는 제사 공간인 대성전과 동무, 교육 공간인 명륜당이 남아 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이며, 공자를 비롯한 그의 제자들과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30.독암서당

 

종 목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2호 
지 정 일 1984.07.25
소 재 지 대구 동구  봉무동 223-3 
시 대 조선시대

 

이 지역에 사는 경주 최씨 문중에서 세운 서당으로 조선 고종 2년(1865)에 세웠다. 원래는 현재의 위치가 아니었으나 1973년 도로공사로 인해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다. 서당의 이름을 독암이라 한 것은 서당 서쪽에 고려 태조 왕건이 공산싸움에서 견훤에게 패하자 혼자 피신해 앉아 있었다는 독좌암이 있어 거기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건물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문중에서 세웠으나 문중 자손들은 물론 인근 지역의 자제들까지 교육하여 이곳에서 유능한 학자를 많이 배출하였다.

 

31.첨백당

 

종 목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3호 
지 정 일 1984.07.25
소 재 지 대구 동구  평광동 970 
시 대 조선시대


우효중의 효행과 우명식의 충성심을 기리며, 광리에 거주하는 단양 우씨들의 교육을 위해 세운 건물이다.


첨백당이라는 이름은 우명식 선생의 묘소가 있는 ‘백밭골을 우러러보는 집’이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고종 33년(1896)에 지었고 1924년 새롭게 고친 적이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고, 집 가운데는 대청마루가 있는데 양쪽 툇마루보다 높게 놓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툇마루에는 난간을 아담하게 둘러 놓았다.
 

 

32.야수정

 

종 목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4호 
지 정 일 1984.07.25
소 재 지 대구 수성구  상동 139-1 
시 대 대한제국시대


1900년경 진씨 가문의 제사를 지내려고 지은 집(재실)으로 한·일 절충식 건물이다.


지을 당시에는 앞면 5칸·옆면 1칸 반의 규모였으나, 나중에 뒤쪽 부분 전체를 반칸씩 늘려 겹집처럼 되어 있다. 마루는 장마루를 깔고 마루 밑에 붉은 벽돌을 쌓았으며 유리창문을 사용했다. 천장도 일본식에 가까운 우물반자로 꾸며 놓았다.


20세기 초 건축 양식의 새로운 경향을 보이는 건물로, 전통 양식이 일본 건축의 영향을 받아 변화하여 가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33.고산서당

 

종 목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5호 
지 정 일 1984.07.25
소 재 지 대구 수성구  성동 산22 
시 대 조선시대


퇴계 이황(1501∼1570)과 우복 정경세(1563∼1633)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당이다. 처음 지은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이곳에서 이황 선생과 정경세 선생이 강의하였던 곳이라하여 1500년대로 추정하고 있다. 숙종 16년(1690)에는 서당 뒤편에 사당을 지어 서원이라 하였다. 고종 5년(1868)에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고종 16년(1879)에 서원 옛터에 강당만을 다시 지어 고산서당이라 하였다. 그 뒤 1964년 수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규모는 앞면 4칸·옆면 2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현재 사당 자리에는 이황·정경세 선생의 강학유허비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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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유형 및 무형문화재를 올려드립니다.

 

(대구의 유형문화재)

 

1.구미 선산읍 금동여래입상

 

종 목  국보  제182호 
지 정 일 1976.04.23
소 재 지 대구 수성구  황금1동 산41 국립대구박물관 
시 대 통일신라


1976년 경상북도 선산군 고아면 봉한 2동 뒷산에서 공사를 하던 중 금동관음보살입상 2구와 함께 출토되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불상들은 발견되기 70여 년전에 어느 농부에 의하여 부근 대밭골이라는 곳에서 발견되었다가, 몇년 뒤 현재의 장소에 다시 묻었던 것이라고 한다. 현재는 왼손과 왼발 일부가 없어지고, 얼굴과 가슴에 약간의 녹이 있으나 도금 상태는 좋은 편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자리잡고 있다. 네모진 얼굴에는 살이 올라 있으며, 예리한 선으로 눈·코·입을 표현하였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는데, 몸에 달라 붙어서 신체의 굴곡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옷자락은 배부분에서 평행한 U자형의 주름을 이루고, 다리 부분에서 좌우로 갈라져 대칭을 이루면서 발목까지 드리워졌다. 손은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이 앞을 향하도록 하고 있으며 왼손은 손끝이 땅을 향하게 하여 역시 손바닥을 보이고 있다.

 

몸의 형태나 세부 표현이 부드럽고 단순하며, 옷주름이 정리되어서 단정한 인상을 주고 있는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생동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아직 형태가 단순하고 자세가 굳어 있으며, 특히 날카로운 얼굴의 표현 수법에서 긴장감이 느껴지는 점으로 보아 만든 시기는 8세기 로 추정된다. 

 

 

2.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

 

종 목  국보  제183호  
지 정 일 1976.04.23
소 재 지 대구 수성구  황금1동 산41 국립대구박물관 
시 대 신라


경상북도 선산군 고아면에서 공사를 하던 중 금동여래입상(국보 제182호), 금동보살입상(국보 제184호)과 함께 출토되었다. 이 지역에서 삼국시대의 기와조각과 토기조각들이 많이 출토되어서 원래 절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보살상은 연꽃무늬가 새겨진 대좌 위에 오른쪽 무릎을 약간 구부린 채 자연스럽고 유연한 자세로 서 있다. 머리에는 꽃장식의 관을 썼는데, 관의 정면에는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다. 눈·코·입의 표현이 분명한 얼굴은 둥근 편으로 전면에 미소를 머금고 있다.

 

신체는 비교적 날씬한 편으로 균형이 잘 맞으며, 옷은 몸에 얇게 밀착되어 있다. 옷자락은 오른팔에 한 번 걸쳐 무릎 앞에서 둥글게 드리워지고, 다시 왼팔 위로 걸쳐 그 끝이 대좌 위로 내려뜨려졌다. 목에는 목걸이가 걸려 있으며, 어깨에서 시작한 구슬 장식은 길게 늘어져 X자를 그렸다. 불상의 뒷면에도 옷주름과 X자형의 구슬 장식이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은 위로 들어 연꽃 봉오리를 가볍게 들고 있으며, 왼손은 내려서 물건을 잡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으나 물건은 없어진 상태이다. 대좌는 7각형이며, 아래로 향한 연꽃잎이 새겨져 있다.

 

현재 꽃장식 관의 왼쪽 윗부분과 양 손 아래로 내려뜨린 옷자락 및 왼손 손가락 일부가 파손된 상태이며, 광배 또한 없어졌다. 얼굴과 오른손에 녹이 슬어있으나 도금 상태는 비교적 좋은 편이다. 전체적인 균형과 조각수법이 뛰어난 이 보살상은 삼국시대 후기 금동보살상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며 7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3.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


종 목  국보  제184호 
지 정 일 1976.04.23
소 재 지 대구 수성구  황금1동 산41 국립대구박물관 
시 대 신라


경상북도 선산군 고아면에서 공사를 하던 중 금동여래입상(국보 제182호), 금동보살입상(국보 제183호)과 함께 출토되었다. 이 지역에서 삼국시대의 기와조각과 토기조각들이 많이 출토되어서 원래 절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정면을 향해 꼿꼿이 선 보살상은 머리에 꽃으로 장식된 관을 쓰고 있으며, 관의 가운데에는 둥근 테두리 안에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다. 약간 길고 네모진 얼굴은 엄숙한 표정을 띠며, 어깨는 넓은 편이어서 근엄하고 딱딱한 느낌을 준다. 길고 굵은 목에는 복잡한 구슬 장식의 목걸이가 걸려 있고, 어깨로부터 늘어진 목걸이는 배부분에서 X자를 그리며 교차한다. 또 목걸이 장식의 연결부분마다 또다른 구슬을 걸쳐 매우 번잡하게 나타냈는데, 신라시대 보살상으로는 드물게 많은 장신구를 지니고 있어 주목된다. 오른손은 내려서 구슬장식을 가볍게 잡고 있으며, 왼손은 윗부분이 떨어져 나갔으나 정병과 연꽃가지를 들고 있었던 것 같다.

 

현재 광배와 대좌는 없어진 상태인데, 머리 뒤에는 광배 꼭지가 남아 있으며 발 아래에는 대좌에 꽂기 위한 기둥모양의 촉이 높게 달려 있다.

 

전체적으로 근엄하고 당당한 모습이며, 중국적인 요소가 강한 복잡하고 화려한 장신구의 표현이 매우 특이한 이 보살상은 7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시기 금동보살상으로서는 유례가 드문 작품으로 가치가 매우 크다.

 

 

4.동화사 마애여래좌상

 

종 목  보물  제243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대구 동구  도학동 산124-1 
시 대 통일신라

 

동화사 입구 오른쪽의 암벽을 다듬어서 조각한 불상이다. 지상에서 높이 위치한 이 불상은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한 개성있는 모습이다.

 

얼굴은 부피감을 느낄 수 있는 비교적 풍만한 모습인데, 세부표현은 평면적이며, 짧은 목에는 3개의 주름이 있고, 어깨는 반듯하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무릎에 대어 손끝이 아래를 가리키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여 배꼽 앞에 놓았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데, 규칙적으로 얇게 빚은 평행의 옷주름선이 나타나있다.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는 끝이 날카로운 배(舟) 모양이다. 주변 가장자리는 타오르는 불꽃무늬를 그대로 이용하였고, 머리광배와 몸광배는 2줄의 선으로 표현하였다. 대좌는 구름 위에 떠 있는데, 구름무늬의 표현이 매우 사실적이어서 이 불상에 활기찬 생동감을 주고 있다.

 

원만한 얼굴, 장식성이 강한 대좌와 광배의 표현으로 볼 때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5.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종    목  보물  제24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대구 동구  도학동 산124 동화사  
시     대 통일신라 

민애왕(재위 838∼839)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만든 동화사 비로암 3층석탑(보물 제247호)과 동시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1.29m의 불상이다.

둥근 얼굴은 풍만하고 눈·코·입이 작아지고 있으며, 미소가 사라지고 단아한 모습이다. 어깨는 뚜렷하게 좁아졌으며, 가슴은 평평하고, 하체의 처리도 역시 둔화되었다. 이러한 위축되고 둔화된 표현은 9세기 중엽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불상양식이다. 손모양은 비로자나불이 일반적으로 취하고 있는 모습으로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싼 형태이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데, 규칙적으로 얇은 평행의 옷주름선이 있고, 아랫도리에 있는 U자형 무늬가 특이하다. 부처의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는 배(舟) 모양으로, 가장자리를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으로 표현하였다. 광배의 꼭대기 부분에는 삼존불, 양쪽에는 8구의 작은 부처가 배치되어 있다.

대좌와 광배를 갖추고 있으며 손상이 거의 없는 9세기에 유행하던 비로자나불상의 대표적인 예이다.



6.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종    목  보물  제247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대구 동구  도학동 산124 동화사  
시     대 통일신라

 

동화사 서쪽 언덕에 자리잡은 비로암의 대적광전 앞뜰에 세워져 있는 3층석탑으로,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이다.

기단의 각 층에는 네 면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겼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기 한 돌로 이루어져 있고,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본뜬 조각을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수가 층마다 4단이며, 처마는 곱게 뻗어 나가다가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머리장식받침)과 복발(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보주(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차례로 올려져 있다.

각 기단 위에 괴임을 여러 개 둔다거나, 지붕돌 네 귀퉁이의 들린 정도가 크지 않은 점 등에서 통일신라 후기의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는 단정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1966년 부처님의 사리를 담는 기구 일부를 도둑 맞았으나, 없어지지 않은 사리돌그릇에 통일신라 경문왕 3년(863)에 민애왕의 명복을 빌고자 이 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7.도동서원 강당 서당 부 장원


종 목  보물  제350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35 
시 대 조선시대


서원이란 훌륭한 사람들에게 제사지내고 유학을 공부하던 조선시대 지방의 사립교육기관을 말한다. 도동서원은 문경공 김굉필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조선 선조 원년(1568) 처음 세워 쌍계서원이라 불렀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져 선조 37년(1604) 지금 있는 자리에 사당을 다시 지었고 선조 40년(1607)에 임금님이 직접 도동서원이라고 쓴 현판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 8년(1871)의 서원철폐령의 대상에서 제외된 47개 서원가운데 하나이다.

 

행사와 교육의 중심 건물인 강당은 앞면 5칸·옆면 2칸 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는 간결한 형태로 기둥 위에만 있다. 좌우 끝 칸은 온돌방으로 꾸몄고 그 앞면엔 각각 작은 툇마루를 두었다. 가운데 3칸은 넓은 대청마루로 양쪽 툇마루와 통하도록 해 놓았다.

 

제사지내는 공간의 중심 건물인 사당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로 김굉필 선생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지붕과 공포를 쌓은 양식은 강당과 마찬가지로 맞배지붕이다. 앞면 3칸에는 각각 2짝씩 널문을 달았다. 강당을 둘러싼 담장은 기와를 이용해 쌓은 맞담으로 구성하여 매우 아름답다.

 

간결하고 검소하게 지은 전통 깊은 조선 중기 서원 건축물로 잘 보존해야 할 문화재이다. 


8.정도사지 오층석탑


종 목  보물  제357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대구 수성구  황금로 200(70번지) 국립대구박물관 
시 대 고려시대


원래 경상북도 칠곡군 정도사터에 있었던 5층 석탑으로, 1934년에 경복궁으로 이전하였다가 1994년에 국립대구박물관으로 다시 옮겨 세워 놓았다.

 

기단은 2단으로, 아래층 기단에는 각 면에 안상을 3구씩 조각하였는데 무늬의 바닥선이 꽃모양처럼 솟아오르고 있다. 위층 기단에는 각 면 중앙에 기둥 모양을 새겼고 각 기단의 맨윗돌은 약간의 경사를 이루었으며, 윗돌 윗면에 1단의 괴임을 두었는데 특별한 예에 속한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들이 각각 한 돌로 되어 있다. 1층 몸돌의 정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짝모양이 새겨져 있고, 2층 이상은 그 크기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지붕돌은 너비가 좁고 두꺼우며 네 귀퉁이가 위로 들려 있어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4단으로 줄었고 추녀 밑으로 낙수홈이 새겨져있다. 5층 지붕돌은 없어지고 몸돌 위에 머리장식받침인 노반만 남아있다.

 

2층 이상의 몸돌은 체감율이 적고 지붕돌이 좁아 두꺼운 느낌을 주지만, 석탑 표면에 손상이 없고 안상의 조각 또한 깨끗하고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다.

 

위층 기단에 탑 이름이 새겨져 있고, 끝에 ‘태평십일년’의 연호 및 연대가 있다. 또 옮길 당시에 탑내에서 녹유사리병·동합 2개 등의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특히 함께 발견된 기록문서에는 탑의 인연·시납, 공사의 사실 등을 기재하였고, 글 문투에 이두식이 많이 사용되고 있어 탑 자체의 연구와 아울러 이두 연구에도 좋은 자료이다. ‘태평십일년’은 고려 현종 22년(1031)에 해당된다.

  

 

9.용연사 석조계단


종 목  보물  제539호 
지 정 일 1971.07.07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옥포면 반송리 865 용연사 
시 대 조선시대


계단은 계(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를 수여하는 식장으로, 이 곳에서 승려의 득도식을 비롯한 여러 의식이 행하여 진다. 용연사 내의 한적한 곳에 자리잡은 이 계단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다. 임진왜란(1592) 때 난을 피해 묘향산으로 옮겼던 통도사의 부처사리를 사명대사의 제자 청진이 다시 통도사로 옮길 때 용연사의 승려들이 그 일부를 모셔와 이곳에 봉안하였다 한다.

 

돌난간이 둘러진 구역 안에 마련된 계단은 널찍한 2단의 기단 위로 종모양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은 네 모서리마다 4천왕상을 1구씩 세워두고, 위층 기단은 4면에 8부신상을 돋을새김하였는데, 뛰어난 조각솜씨는 아니지만 섬세하고 균형감이 있어 단조로운 구조에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조선시대에 유행한 양식을 보이고 있는 탑신은 별다른 꾸밈을 하지 않은 채 꼭대기에 큼직한 보주(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조각해 두었다.

 

절 안에 세워져 있는 석가여래비에는, 석가의 사리를 모시고 이 계단을 쌓았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을 통해 조선 광해군 5년(1613)에 계단이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구조가 섬세하고 조각기법이 예리하며, 특히 17세기 에 만들어진 작품으로서 당시의 석조건축과 조각을 연구하는데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0.달성 태고정

 

종 목  보물  제554호 
지 정 일 1971.12.06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하빈면 묘리 638 
시 대 조선시대

 

이 건물은 조선 성종 10년(1479) 박팽년의 손자인 박일산이 세운 별당건축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불타서 일부만 남았던 것을 광해군 6년(1614)에 다시 지은 것이다. 일명 ‘일시루’라고도 한다. 현재 대청에는 임진왜란 후 치찰사로 온 윤두수의 한시를 새긴 현판과, 정유재란 후 명군 선무관이 남긴 액자 들이 있다.

 

네모난 모양의 단 위에 서 있으며 앞면 4칸 ·옆면 2칸 크기로, 동쪽 2칸은 대청마루이고, 서쪽 2칸은 방으로 꾸몄다. 대청 앞면은 개방되어 있는데 옆면과 뒷면에는 문을 달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대청 앞 기둥 사이에는 2층으로 된 난간을 설치하였다. 서쪽에는 온돌방과 부엌을 마련해 놓았는데 단순한 아궁이가 아닌 부엌을 한쪽 구석에 둔 것은 흔치않은 것이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건물이지만 가구나 세부가공이 정교한 편이다.

 

 

11.도학동 승탑

 

종 목  보물  제601호 
지 정 일 1975.08.04
소 재 지 대구 동구  도학동 36 
시 대 고려시대

 

승탑은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곳이다. 동화사 안에 세워져 있는 이 승탑은 원래 동학동의 학부락에 쓰러져 있던 것을 이 곳으로 옮긴 것으로, 바닥돌 위에 올려진 기단과 탑신이 모두 8각을 이루고 있다.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기단은 아래받침돌과 가운데받침돌이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윗받침돌은 별개의 돌로 되어 있으며, 큼직한 연꽃무늬를 소박한 솜씨로 둘러 놓았다. 탑신의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의 조각을 두었고, 널찍하게 마련된 지붕돌은 윗면의 느린 곡선이 처마끝까지 펼쳐지고 있다. 꼭대기에는 아름다운 장식을 한 2단의 머리장식이 올려져 있다.

 

각 부분의 양식과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12.현풍 석빙고

 

종 목  보물  제673호 
지 정 일 1980.09.16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현풍면 상리 632 
시 대 조선시대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돌을 쌓아 만든 창고이다.

 

남북으로 길게 축조되어 있으며, 출입구가 개울을 등진 능선쪽에 마련된 남향구조이다. 돌의 재질은 모두 화강암으로 외부에서 보면 고분처럼 보인다. 입구는 길쭉한 돌을 다듬어 사각의 문틀을 만든 후 외부공기를 막기 위해 돌로 뒷벽을 채웠다. 외부는 돌을 쌓고 점토로 다져서 흙을 쌓아 올렸다. 잘 다듬어진 돌로 벽과 천장을 쌓았는데 천장에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를 4개 틀어올리고 그 사이사이에 길고 큰 돌을 얹어 아치형을 이루게 하였다. 천장에는 통풍을 위한 환기구가 두 군데 설치되었고 빗물에 대비한 뚜껑이 있다. 바닥은 평평한 돌을 깔고 중앙에 배수구를 두었다.

 

당시에는 얼음창고가 마을마다 설치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규모가 작은 현풍고을에 이러한 석빙고가 만들어진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1982년 석빙고 주위의 보수작업 때 축조년대를 알려주는 건성비가 발견됨으로써 조선 영조 6년(1730)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게 되었다.

 

 

13.대구 달성

 

종 목 사적 제62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대구 중구 달성동 294-1

시 대 삼국시대

 

평지의 낮은 구릉을 이용하여 쌓은 삼국시대의 성곽이다. 높이는 일정치 않으나 4m정도이며, 둘레는 약 1,300m이다.

 

성벽의 아랫부분에서 기철기시대의 조개더미와 각종 유물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 지방의 중심세력이 성장하여 기적 국가 형태를 이루면서 쌓은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경주의 월성처럼 평지에 낮은 구릉을 이용하여 쌓은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달성은 우리나라 남부지방에서 기 성곽의 전형으로 평가되고 있다.

 

성벽은 주로 흙으로 쌓았고, 성벽 윗부분에는 큰 돌덩어리들이 군데군데 드러나 있어 후대에 수리한 것으로 보인다. 성안에는 조선시대 전기까지 군대의 창고가 있었고, 우물과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성의 서남쪽으로 연결된 구릉지대에는 돌방무덤(석실분)이 많이 흩어져 있고, 무덤에서 금동관을 비롯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대구 달성은 우리나라 성곽 발달사에 있어 가장 이른 시기의 형식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14.불로동 고분군

종    목  사적  제262호  
지 정 일  1978.06.23  
소 재 지  대구 동구  불노동 335  
시     대 삼국시대 

대구시 불로동과 입석동 구릉 서남면에 있는 수십기의 크고 작은 무덤들이다.

무덤의 지름은 15∼20m, 높이 4∼7m 정도가 보통이며, 내부구조는 냇돌 또는 깬돌로 4벽을 쌓고, 판판하고 넓적한 돌로 뚜껑을 덮은 직사각형의 돌방이 있으며, 그 위에 자갈을 얹고 흙을 덮었다. 껴묻거리(부장품)로 금제 혹은 금동제 장신구와 철제무기 무늬를 새긴 토기 등 많은 출토물이 있다.

이 무덤들은 대개 4∼5세기경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판단되며, 이 지역 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토착 지배세력의 집단무덤으로 추측한다.

불로동 무덤들은 위치가 구릉이라는 점, 무덤 내부가 돌무지 무덤과 비슷하게 깬돌로 지은 점, 그리고 돌방이 지나치게 가늘고 긴 점에서 낙동강 중류 지역 계통임을 알게 해 준다. 그러나 유물의 형태나 질이 신라와 유사하여 이 지역 세력의 복잡한 문화양상을 보여주기도 하다.
  

 

15.계산동 성당

 

종 목 사적 제290호

지 정 일 1981.09.25

소 재 지 대구 중구 계산동2가 71

시 대 대한제국시대

 

 1886년 로베트(Robert.A.P) 신부가 경상도 지역에 천주교를 전파하다가 1897년에 현재의 계산동 성당 자리에 있던 가집를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였다. 1899년에 한식 목조 십자형의 성당을 지었으나, 다음 해에 화재로 불 타 1902년에 현재의 성당을 짓게 되었다.

 

설계는 로베트 신부가 하고 중국인이 공사를 맡았다고 한다. 당시 대구에서는 처음 세워진 서양식 건물로, 입구에 두 개의 종각에 우뚝 솟아 ‘뾰족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성당건축은 고딕양식이 가미된 로마네스크 양식이며, 화강석 기단 위에 붉은 벽돌을 쌓고 검은 벽돌로 고딕적인 장식을 하였다.

 

대구 지방에서 유일한 1900년대 성당 건축물로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6.진천동 입석

 

종 목 사적 제411호

지 정 일 1998.12.23

소 재 지 대구 달서구 진천동 470-38외

시 대 청동시대

 

입석은 큰 돌을 세워 놓은 것으로 선돌이라고도 하며, 고인돌이 있는 지역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진천동에서 선돌을 세운 주위로 석축을 네모난 형태로 둘러 쌓아 놓았고, 선돌 앞에서 제사의식을 지낸 것으로 짐작된다. 선돌 주위에는 고인돌이 여러 기 남아있다. 주변지역은 주택이 많이 들어서 있으나, 유적 보존을 위해 선돌 지역을 발굴조사하여 정비하였다.

 

고인돌과 선돌의 관계 및 서로의 기능적 성격을 통해 고대 문화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는 유적이다.

 

17.구 대구의학전문학교 본관

 

종 목  사적  제442호 
지 정 일 2003.01.28
소 재 지 대구 중구  동인동 2가 101 
시 대 일제강점기

 

구 대구의학전문학교 본관(현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본관)건물은 일제 강점기 때 대구지역 의료인 양성을 위해 지어진 건물로 1933년 공립 대구의학전문학교로 개교되었다.

 

이 건물은 구 도립대구병원(사적 제443호, 현 경북대학교 의과대학병원 본관)건물과 마주보며 배치되어 있다. 3층의 붉은 벽돌(조적조) 건물로 남향하며, 정면 중앙부에는 4층으로 된 사각탑(Turret)을 두고 옥상에는 옥탑을 설치하였다. 평면은 ‘산(山)’자 모양으로 중복도식이며, 현관 포치(Porch)를 중심으로 좌우대칭형이다.

 

건물의 외관 구성에 나타난 특징은 정면 중앙부 돌출 유리벽의 곡면처리 및 창 사잇벽과 옥상 파라팻부의 수평돌림띠는 정면성을, 옥상부의 사각탑과 창 사이의 수직벽은 수직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전체적으로 안정감과 웅장함을 느끼게 한다.

 

한국 근대 의학교육의 역사를 잘 보여주는 중요한 건물로,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며, 전체와 세부 구성이 치밀하고, 건축사적으로도 매우 수준 높은 건물로서 근대건축으로서의 건축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교육사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18.구 도립대구병원

 

종 목  사적  제443호 
지 정 일 2003.01.28
소 재 지 대구 중구  삼덕동 2가 50 
시 대 일제강점기

 

구 도립대구병원(현 경북대학교 의과대학병원 본관)은 일제 강점기 때 1928년 도립 대구의원으로 지은 2층의 붉은 벽돌(조적조) 건물이다.

 

이 건물은 구 대구의학전문학교 본관(사적 제442호, 현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본관)건물과 마주보며 배치되어 있다. 건물은 북향하여 동서로 길게 배치되었으며 지붕은 모임지붕 형태로 기와를 이었다. 평면은 ‘ㄱ’자 모양으로 중복도(中複道)의 양측에 각 실(室)을 남향과 북향으로 배치하였으며, 정면 우측의 익사에는 편복도를 설치하고 동향으로 실을 배치하였다.

 

건물 구성은 정면 중앙부의 현관 포치(Porch)를 중심으로 대칭을 이루고 창인방과 처마부를 화강석 수평돌림띠(Cornice)로 장식하여 르네상스적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건물의 외관구성에 나타난 특징은 네모반듯한 지붕을 이은 사각탑(Turret), 수직으로 긴 반원 아치(Arch)창, 페디먼트(Pediment), 지붕면의 도머(Domer)창, 난간벽의 치형 장식수법, 화강석 다듬돌로 구성한 수평돌림띠(Cornice) 등의 형태요소들을 적극적으로 채용하여 정면성과 대칭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 근대 병원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건물로, 우측 익사가 철거되고, 정면 좌측에 증축된 부분이 있으나, 전체적으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역사적·건축사적으로 높은 가치가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19.도동서원


종 목  사적  제488호  
지 정 일 2007.10.10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35번지 
시 대 조선시대


도동서원은 1605년(선조38) 지방 유림에서 한훤당 김굉필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서원으로 조선중기 전학후묘의 전형적 배치형식과 강당과 사당의 공포양식 및 담장 구성수법 등에서 건축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강당·사당과 이에 딸린 담장은 보물 제35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서원 전면에 위치한 신도비, 은행나무 등을 포함한 서원 전역을 국가지정문화재(사적)으로 지정하여 보존·관리하고있다. 

 

20.달성 삼가헌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104호 
지 정 일 1979.12.31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하빈면 묘리 800 
시 대 조선시대


충정공 박팽년(1417∼1456)의 자손들이 정착하여 온 박씨마을 묘골과 낮은 산 하나를 경계로 하여 자리잡은 조선시대의 주택이다. 넓은 터에 대문간채·사랑채·안채·별당·연못이 배치되어 있다. 충정공의 11대손인 삼가헌 박성수가 영조 45년(1769)에 사랑채를 짓고 자신의 호를 현판으로 걸어 '삼가헌'이라 이름지었다. 그 이듬해에는 삼가헌 서쪽편에 별당을 세우고 주변과 연못에 각각 국화와 연꽃을 심은 뒤 '하엽정'이라 불렀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건물이 사랑채이며, 안채는 사랑채를 거쳐야 출입을 할 수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대략 트인 'ㅁ'자형의 구조를 하고 있으며 안채로 드나드는 중문채와 곳간으로 연결이 되어있다. 사랑채는 'ㄱ'자형 평면으로 넓은 대청과 골방이 딸린 온돌방 2칸·마루방·청지기방을 두었다. 안채는 'ㄷ'자형으로 부엌·안방·대청·건넌방·개방된 툇마루 등으로 꾸몄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의 서쪽으로 장독대·곳간채·안변소가 자리잡고 있다.


원래 서당으로 쓰던 별당은 고종 11년(1874)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이 별당은 안채의 서쪽 넓은 터에 따로 자리잡고 있는 'ㄱ'자형 건물로 온돌방 3칸과 마루방 1칸으로 구성되었다. 왼편 끝방의 앞에는 1칸의 누마루를 꾸미고 그 옆 마루와 다른 방들 앞에는 툇마루를 놓았다.


전체적으로 볼때, 조선 중기에 건축된 지방 양반가의 특징을 잘 남긴 대표적인 주택이다.
 

 

21.달성 조길방 가옥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200호 
지 정 일 1984.12.24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가창면 정대1리 350 
시 대 조선시대

 

깊은 산골 경사가 급한 산간마을에 자리한 가로, 현 소유자의 9대조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지은 집이라고 한다. 사랑채는 60여년전에 확장하였고, 아래채는 30여년 전 무너진 것을 다시 지은 것이다. 산 전체가 서향으로 경사져 있고 그 안에 마을이 숨듯이 자리하여 집들은 자연히 모두 서향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15호 가량의 집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6호만 남아있고, 이 집이 이 마을에서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높은 축대 위에 지은 안채를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사랑채, 왼쪽에는 아래채가 부속건물처럼 낮게 마주보고 배치되어 있다. 안채의 앞면 벽에는 크기가 매우 작은 여닫이 문 1짝이 있는데, 출입보다는 채광과 통풍을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가로는 보기 드물게 오래된 건축으로, 특히 안채 창호문의 규모와 성격은 주택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22.둔산동 경주최씨 종택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261호 
지 정 일 2009.06.19
소 재 지 대구 동구  둔산동 386번지 일원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인조 때의 학자 대암 최동집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지은 집이다.


대구 지방에 있는 조선시대 주택 중 가장 오래되었으며, 살림채와 재실·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숙종 20년(1694)에 지은 안채와 광무 9년(1905)에 다시 지은 사랑채가 살림채를 구성한다. 사랑채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동천서원을 없앨 때 철거한 자재의 일부를 사용하여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살림채의 오른편에 있는 보본당은 영조 18년(1742)에 지은 사당으로, 제사지내는 재실로 사용하고 있다. 그 뒤편에 있는 2동의 사당은 최동집과 조선 정조 때의 학자인 최흥원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재실·가묘·별묘 등이 조화를 이룬 큰 규모의 주택으로 조선시대 양반 주택과 그 생활 양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23.선화당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

지 정 일 1982.03.04

소 재 지 대구 중구 포정동 21 경상감영공원

시 대 조선시대

 

 선화당은 경상도 관찰사가 공적인 일을 하던 건물로 원래 안동에 있던 것을 조선 선조 34년(1601)에 김신원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그 뒤 현종 11년(1670), 영조 6년(1730), 순조 6년(1806) 3차례에 걸친 화재로 타버렸다.

 

지금의 건물은 순조 7년에 윤광안이 다시 지은 것이다. 그 후 경상북도 도청으로 사용되다가 1969년 도청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자 1970년 중앙공원을 만들면서 현 모습으로 고치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관청건물은 남아있는 것이 많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귀중한 자료이며, 경상감영의 상징이 되는 건물이라는 데 가치가 있다.

 

24.징청각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호

지 정 일 1982.03.04

소 재 지 대구 중구 포정동 21 경상감영공원

시 대 조선시대

 

경상도 관찰사가 살림채로 쓰던 건물이다. 조선 선조 34년(1601)에 선화당, 응향당 등 여러 건물과 함께 지었으며 그 뒤 여러 차례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경상도 관찰사가 살림채로 쓰던 건물이다. 조선 선조 34년(1601)에 선화당, 응향당 등 여러 건물과 함께 지었으며 그 뒤 여러 차례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면 8칸·옆면 4칸으로 넓이가 무려 227㎡나 되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징청각은 선화당과 함께 대구시내에 남아있는 유일한 관아건물로 중요한 문화재이다.

 

25.영영축성비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호 
지 정 일 1982.03.04
소 재 지 대구 수성구  만촌동 산83-5 영남제일관 앞 
시 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허물어진 대구토성을 돌로 다시 쌓은 후 이를 기념하고자 세운 비이다.

 

비는 직사각형으로, 바닥돌 위에 비몸을 세운 간단한 모습이다. 비문에 의하면 성의 둘레는 2,145보이며, 네 개의 문을 만들고 성을 지키기 위한 군량, 전포 등을 갖춘 창고를 두었다. 석성의 공사기간은 6개월이며, 동원된 인원은 78,534명에 달한다. 성이 완성된 뒤에는 여러 장사들을 모아 활쏘기대회를 열어 상을 주었다 한다.

 

경상도 관찰사였던 민응수가 나라에 건의하여 영조 13년(1737) 대구 남문 밖에 세워두었으며, 민응수가 비문을 짓고, 백상휘가 글씨를 썼다. 광무 10년(1906)에 성은 헐리게 되었고, 비는 1932년 향교로 옮겨 보존되다가 1980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

 

 

26.대구부수성비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호 
지 정 일 1982.03.04
소 재 지 대구 수성구  만촌동 산83-5 영남제일관 앞 
시 대 조선시대 

 
조선 고종 때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해 온 김세호가 대구부성을 수리한 후 그 기념으로 세운 비이다. 대구부성은 영조 때 경상관찰사 민응수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는데 그 후 성이 훼손되어도 제대로 보수가 이루어지지 않던 것을 김세호가 수리한 것이다.

 

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비문에는 공사에 관한 내용과, 유공자에게 상을 내린 일이 적혀 있다.

 

고종 6년(1869)에 세운 비로, 관찰사 김세호가 직접 비문을 짓고, 당시 공사 책임관이었던 최석로가 글씨를 썼다. 광무 10년(1906) 대구부성이 헐리면서 갈 곳을 잃었다가 1932년 대구향교 경내로 옮겨 놓았고, 1980년 영남 제1관문을 고쳐 세우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다.

 

 

27.북지장사 삼층석탑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호 
지 정 일 1982.03.04
소 재 지 대구 동구  도학동 620 북지장사 
시 대 신라

 

북지장사의 대웅전 동쪽에 나란히 서 있는 두 탑이다. 북지장사는 고려 명종 22년(1192)에 보조국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그 이후의 역사는 전하고 있지 않다.

 

탑은 2층 기단에 3층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두 탑의 규모와 형식이 거의 같다.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은 윗면에 약한 경사가 흐르고, 밑면의 받침이 4단이며,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있다.

 

땅속에 묻혀 있거나 주변에 흩어졌던 것을, 1981년 새로이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28.봉무정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8호 
지 정 일 1984.07.25
소 재 지 대구 동구  봉무동 939 
시 대 조선시대


조선 고종 12년(1875)에 봉촌 최상룡이 행정사무를 볼 수 있도록 마을사람들과 의논하여 지은 것이다.


원래 이 자리에는 달성군 공산면 4개 마을(강동·독좌·위남·단산)에서 쓰던 가 사무소가 있었다. 이 4개 마을을 합쳐 봉무동으로 행정구역이 바뀌자 가를 헐고 이 건물을 지었다.


강당을 중심으로 동쪽에 덕교재, 서쪽에 예용재가 있다. 강당은 농민들의 계몽과 마을 규약 등을 가르치고, 선비들이 모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덕교재와 예용재는 마을사람들이 모여 의논하던 곳이다.


화강석의 둥근 석 위에 둥근 기둥을 세운 5칸 규모의 집으로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옆면에 내림지붕을 달았다.


봉무정은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을 대표하는 건물이며, 이 시대 공공건물의 예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29.성재서당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9호 
지 정 일 1984.07.25
소 재 지 대구 동구  미대동 169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인조(재위 1623∼1649) 때 선비 채명보(1574∼1644)가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그 뒤 후손들이 선생의 덕행을 널리 기리고자 새로 짓고 ‘성재서당’이라 이름을 고쳤다.

 

채명보의 휘는 선견, 자는 명보, 호는 양전헌이며 본관은 인천이다. 광해군 9년(1617)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서궁유폐사건이 일어나자 선비들과 함께 상소를 올려 잘못된 점을 지적하였다.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 때에는 향병을 모집하기도 하였으며, 인조 4년에 희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받지 않았다. 고향으로 돌아와 성재정을 짓고 선비들과 학문을 논하면서 만년을 보냈다.
 

 

30.부인사 석등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6호 
지 정 일 1988.05.30
소 재 지 대구 동구  신무동 356 
시 대 통일신라


부인사 대웅전 앞에 놓여 있는 8각 석등으로, 네모난 바닥돌 위에 3단의 받침을 두어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과 지붕돌을 올린 일반적인 모습이다.


받침부분은 가운데기둥을 사이에 두고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윗받침돌에는 솟은 연꽃무늬를 대칭적으로 새겨 놓았다. 화사석은 다른 절터에 있던 것을 가져다 복원한 것으로 4면에 창을 두었다. 지붕돌은 처마가 길고 얇으며, 여덟 귀퉁이가 하늘을 향해 들려있다. 꼭대기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둥근 받침만 남아 있을 뿐 그 위의 머리장식은 모두 없어진 상태이다.


비록 받침의 가운데기둥에 약간의 금이 갔지만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으며, 조각도 섬세하고 부드럽다. 각 부재가 서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뛰어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다.
 

 

31.부인사 서탑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7호 
지 정 일 1988.05.30
소 재 지 대구 동구  신무동 356 
시 대 통일신라


부인사에 서 있는 3층 석탑이다. 부인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한 사찰로 추정되며, 절이 한창 번성할 때에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승려들만의 승시장이 섰었다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이 탑은 금당터 주변에 쌍탑으로 건립된 2기의 석탑 중 서쪽에 있는 탑으로, 1966년에 복원되었다.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는데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없어지고 그 받침돌만 남아있다. 기단은 각 면마다 기둥모양을 새기고 윗면에 2단의 괴임을 새겨 윗돌을 받치게 하였다. 탑신의 각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겼고, 지붕돌은 비교적 완만한 경사가 흐르며,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치켜올라갔다.


통일신라 후기 즈음에 세운 탑으로 추측된다.
 

 

32.도곡재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2호 
지 정 일 1974.12.10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하빈면 묘리 692 
시 대 조선시대

 
도곡재는 학생들의 공부를 위해 사용되던 집이다.


처음에는 조선 정조 2년(1778)에 대사성인 서정공 박문현이 살림집으로 세운 건물이나, 정조 24년(1800) 경에 도곡 박종우의 공부방으로 사용되면서 그의 호를 따서 도곡재라는 이름을 붙였다.


앞면 4칸·옆면 1칸 규모이며, 후대에 퇴칸을 달고 대청을 넓혀 누처럼 꾸몄다.


도곡재는 태백산지역 살림집의 일반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소박한 건물이다.
 

 

33.하목정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6호 
지 정 일 1984.05.21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하빈면 하산리 1043-1 
시 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낙포 이종문이 조선 선조 37년(1604)에 세운 정자이다. ‘하목정’이라는 정자의 이름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곳에서 잠깐 머물렀던 인조(재위 1623∼1649)가 훗날 낙포의 첫째 아들인 이지영에게 직접 써준 것이다. 또한 일반 백성들의 주택에는 서까래 위에 덧서까래인 부연을 달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지만, 인조가 명령하여 이 집에는 부연을 달았다고 한다.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사랑채로 이용되었던 이 집은 전체적으로 T자형 구조로 되어있어서 처마곡선도 부채 모양의 곡선으로 처리되었다. 내부에는 김명석·남용익 등 많은 유명인들이 쓴 시가 액자가 걸려있다.
 

 

34.신숭겸장군 유적

 

종 목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호 
지 정 일 1982.03.04
소 재 지 대구 동구  지묘동 526 
시 대 조선시대

 

고려의 개국공신인 신숭겸을 기리는 유적이다.

 

신숭겸(?∼927)은 평산 신씨의 시조로서, 918년 배현경, 홍유, 복지겸 등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의 건국에 이바지한 인물이다. 고려 태조 10년(927) 대구 공산에서 후백제 견훤의 군대와 싸우다가 태조가 적군에게 포위되어 위급해지자, 태조의 옷을 입고 변장하여 맞서다가 전사하였다.

 

태조는 그의 죽음을 애통히 여겨 그의 시신을 거두어 광해주(지금의 춘천)에 묻고 순절단, 지묘사, 미리사를 세워 명복을 빌었다.

 

조선 선조 40년(1607)에 경상도관찰사 유영순이 지묘사의 자리에 표충사를 지어 신숭겸을 모셨으며, 후에 이 서원에 사액을 내려 관리하였다. 고종 8년(1871)에 서원철폐령으로 표충사가 없어지자, 후손들이 표충재를 새로 지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35.봉무토성

 

종 목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4호 
지 정 일 1988.05.30
소 재 지 대구 동구  봉무동 산26,27 
시 대 삼국시대


토성이 있는 곳의 서남쪽은 금호강에 접한 높은 절벽이며, 동북쪽의 일부만 제외하고는 전면에 가파른 경사가 형성되어 있다.


토성의 둘레는 약 350m 정도인데, 성벽의 높이와 너비가 소규모여서 군사적인 목적보다는 도피용 산성으로 판단된다. 토성의 남동쪽으로 약1㎞ 떨어진 낮은 구릉에는 봉무동 무덤들과 불로동 무덤들이 있고, 금호강을 사이에 두고 검단동 토성과도 연결되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이곳에는 팔공산과 금호강을 배경으로 하는 대규모의 집단이 형성되어 있었고, 이들 세력이 봉무토성을 축조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성내에서 발견된 토기 조각들로 볼 때 3∼4세기경인 삼국시대의 토성으로 보인다.
 

 

36.용암산성

 

종 목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5호 
지 정 일 1988.05.30
소 재 지 대구 동구  도동 산35,36 
시 대 삼국시대


용암산성은 해발 380m의 산꼭대기에 가파른 경사를 이용하여 쌓은 성으로, 안심과 하양으로 이어지는 통로상에 있어, 지형상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성벽의 둘레는 약 1㎞이며, 성의 서쪽과 남쪽의 산기슭에서 능선으로 이어지는 완만한 경사지에는, 인공적으로 절벽을 만들어 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절벽 앞에는 문터로 보이는 입구가 있으며, 성 안의 동북쪽에는 우물터가 있다. 성 안에서 신라 토기조각들이 발견되는 점으로 미루어,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성으로 추측된다. 임진왜란 때 대구지방의 의병들이 이 성에 모여 활동했다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그 후대까지 계속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37.팔거산성

 

종    목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6호 
지 정 일  1988.05.30 
소 재 지  대구 북구  노곡동 산1 
시     대 삼국시대

 

대구광역시 북쪽 팔공산의 지맥 끝자락에 위치한 산성으로, 성안에 평지와 계곡을 품고 산꼭대기를 둘러 쌓았다. 산의 생김새가 함지를 엎어놓은 것과 비슷하여, 이 산을 함지산 또는 방티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해발 300m가 넘는 가파른 경사를 이용하여 흙과 잡석을 섞어 쌓았다. 산성의 서쪽 기슭 아래에 4∼5세기경에 만들어진 무덤들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팔거산성 역시 이 무덤을 쌓은 세력 집단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38.대덕산성


종 목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7호

지 정 일 1988.05.30
소 재 지 대구 남구  대명동 산224, 226, 227 
시 대 통일신라


대덕산성은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에 있는 대덕산 정상에서 북쪽의 안지랭이 계곡을 감싸며 쌓은 포곡식 산성으로 ‘앞산산성 ’이라고도 부른다. 포곡식 산성은 성곽이 하나 또는 여러 개의 계곡을 감싸고 축성된 것으로, 장기간 전투에 사용하기 위해 쌓은 성을 말한다.

 

옛 기록에 의하면 성불산의 옛 성이 수성현에 있었으나, 지금은 산의 능선과 비탈부근에 깬 돌로 성을 쌓은 흔적만이 남아 있다. 성의 둘레는 3,051척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범위는 약 3㎞에 달한다.

 

자연 암벽을 최대한으로 이용한 산성으로 성 안에서 발견된 옛 그릇조각과 기와조각으로 보아, 통일신라에서 고려시대까지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39.사월동 지석묘군


종 목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9호  
지 정 일 1992.09.08
소 재 지 대구 수성구  사월동 469 
시 대 청동시대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지상에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 놓은 탁자식과, 땅 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대구시 수성구 사월동에 있는 이 고인돌은 바둑판식으로 4기가 무리지어 있다. 덮개돌의 길이는 1.7∼2.37m, 너비는 1.1∼1.6m이며 받침돌 높이는 0.7m∼1.27m 정도이다.


무리지어 있는 고인돌을 마을에서는 ‘칠성바위’라 부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과거에는 모두 7기의 고인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40.예연서원


종 목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1호 
지 정 일 1995.05.12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유가면 가태리 538번지일대 
시 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곽재우(1552∼1617)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곽재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조직하여 경상도 일대에서 활약하여 큰 공을 세운 인물로 붉은 옷을 입은 장군이라는 뜻의 ‘홍의장군’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광해군 10년(1618)에 ‘충현사’로 처음 세웠고 현종 15년(1674)에 규모를 확장하여 서원의 모습을 갖추었다. 숙종 3년(1677) 나라에서 인정한 사액서원으로 ‘예연’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폐쇄되었고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소실된 것을 1977년과 1984년에 걸쳐 복원하였다. 현재는 곽재우의 재종숙으로 정유재란 때 공을 세운 곽준의 위패를 추가로 모시고 있다.


경내 건물로는 사당과 강당 등 주요 건물과 제물을 준비하여 두던 고사, 숙소로 사용되던 동·서재 등이 있다. 사당은 곽재우와 곽준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건물이다. 강당은 유림의 회합장소와 교육 장소로 사용하던 건물로 중앙에는 마루를 구성하고 양 옆으로 온돌방을 배치한 구조이다.


해마다 3월과 9월에 제사를 지낸다. 경내에는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비석이 있어 흥미롭다.
 

 

41.곡산성


종 목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7호 
지 정 일 2008.04.10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유가면 곡리 산1번지 외 
시 대 삼국시대


곡산성은 비슬산 유가사 서쪽 해발 700미터 산 정상에 위치하여 북동에서 남서방향으로 길게 타원형으로 자리 잡은 성으로, 성의 둘레는 1,700미터이며 산성 내에 분포한 고분군으로 보아 삼국시대 축성된 산성으로 여겨진다.


성곽의 형태는 꼭대기가 평탄하며 절벽인 자연지형을 이용한 퇴뫼식 산성으로 성내부에는 성문, 망루 등의 흔적뿐만 아니라 기와, 우물, 고분군 등이 확인되어 달성군 현풍면, 유가면 일대의 중요한 유적으로 역사적 가치가 있다.
 

 

42.신당동 석장승

 

종 목 대구광역시 민속자료 제2호

지 정 일 1986.12.05

소 재 지 대구 달서구 신당동 676

시 대 조선시대

 

마을 입구에 서 있는 돌장승이다. 장승은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보통 몸체에 그 역할을 나타내는 글을 새겨 그것에 따라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장승에는 이러한 기록이 없으며, 마을사람들에 의해 ‘장승비’라 불리우고 있다.

 

장승은 네모난 돌기둥을 다듬어 한 면에 얼굴을 새겨 두었다. 기둥 정상에는 모자 모양을 새기고, 얼굴에는 눈썹·눈 ·코·입을 새겨 놓았는데, 입은 약간 웃는 듯한 모습이며, 코는 약간 떨어져 나갔다. 손에는 여의주봉을 들고 있어 일반적인 장승과는 다른 모습이다. 기둥 정상의 모자 조각으로 보아 문관의 형상으로 보이나, 얼굴 각 부분의 표현이 소박하고 자비스러운 이미지를 풍기고 있어 미륵형 장승으로 보이기도 한다.

 

장승은 가슴에 새기는 기록과 생김새, 서 있는 자리에 따라 여러 의미를 갖는데 이 장승의 경우, 코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여의주봉을 들고 있는 외형상의 특징으로 보아 장승의 눈이나 코를 달여 먹으면 임신이 된다는 속설에 따라 아이 낳기를 원하는 여자들이 복을 빌던 대상이 되었거나, 잡귀나 질병으로부터 마을 전체를 보호하는 수호신으로서의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더불어 장승이 마을 입구에 자리하고 있고, 이 마을의 터가 예전에는 절의 입구였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마을의 보호와 함께 사찰 경내의 경건함을 지키는 수호역할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의 작품으로, 돌장승이 많이 존재하지 않는 대구 지역에서 복합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장승신앙의 한 형태로 남아 있다.

 

43.남평문씨 본리 세거지

 

종 목  대구광역시  민속자료  제3호 
지 정 일 1995.05.12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401-2 
시 대 조선시대


문익점의 18대손 문경호가 터를 닦아 남평 문씨 일족이 모여 살던 곳이다. 원래 절이 있던 명당터를 구획하여 집터와 도로를 반듯하게 정리하고 집을 지었다. 지금은 조선 후기의 전통가옥 9채와 정자 2채가 남아 있으며, 도로에 접한 부분에는 나지막한 담을 쌓았다.


이곳의 대표적인 건물로는 수봉정사와 광지당·인수문고를 들 수 있다. 수봉정사는 세거지의 입구에 있는 정자로 정원을 매우 아름답게 꾸민 곳이다. 주로 손님을 맞고 일족의 모임을 열 때 사용하던 큰 규모의 건물이다. 광지당은 문중의 자제들이 학문과 교양을 쌓던 수양장소이다. 또 인수문고는 문중의 서고로, 규장각 도서를 포함한 책 1만여 권을 소장하고 있다. 처음에는 작은 규모였으나 후에 크게 늘려지었고, 도서열람을 위한 건물도 따로 지어놓았다.


주변경관이 아름답고 도로망도 편리하게 정리되어 있는 옛 마을이다.
 

 

44.귀암서원 숭현사

 

종    목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호
지 정 일  1982.03.04 
소 재 지  대구 북구  산격동 산79-1 
시     대 조선시대

 

구계 서침의 덕을 기리기 위해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서원이다.

 

서침은 고려말∼조선의 변혁기에 향촌에 은거하며 학문 연구에 노력하였다.

 

귀암서원은 현종 6년(1665) 세웠고,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그 후 1924년 유림이 다시 지었다. 신명여고 운동장 오른쪽 언덕 아래에 북동쪽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경앙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유허비각이 있고 맞은편에 강당이 있다.

 

숭현사는 강당 바로 뒤에 3m쯤 떨어져 있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귀암서원 숭현사는 대구 시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서원 안에 있을 뿐 아니라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45.법장사 삼층석탑


종 목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5호

지 정 일 1982.03.04
소 재 지 대구 남구  봉덕동 산148 
시 대 통일신라


법장사에 있는 3층 석탑으로, 기단부는 파괴되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고 3층을 이루는 탑신만이 차례대로 쌓여 있다.

 

탑신의 1층 몸돌은 면마다 양쪽에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위층의 몸돌에 비해 지나치게 높아 보인다. 일부가 손상되어 있는 지붕돌은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하며,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두었다.

 

대체로 통일신라 석탑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는 듯 하나, 탑신의 1층 몸돌이 폭에 비해 지나치게 높아 불안정한 비례를 보이고, 지붕돌받침이 4단으로 줄어있는 등 전형 양식에서 조금 벗어나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탑이 있는 이곳은 원래 고산사가 자리잡고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사찰은 모두 불에 타고 탑만이 무너진 채 방치되어 오다가 1961년 법장사를 새로이 지을 때 탑도 함께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46.칠곡향교 대성전

 

종    목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6호 
지 정 일  1982.03.04 
소 재 지  대구 북구  읍내동 600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국립교육기관이다.

 

칠곡향교는 언제 처음 지었는지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조선 태조 원년(1392)에 세운 것으로 전한다. 대성전은 17세기 에 세운 것으로 1907년에 크게 보수하였다.

 

현재는 제사 공간인 대성전과 동무, 교육 공간인 명륜당이 남아 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이며, 공자를 비롯한 그의 제자들과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47.독암서당

 

종 목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2호 
지 정 일 1984.07.25
소 재 지 대구 동구  봉무동 223-3 
시 대 조선시대

 

이 지역에 사는 경주 최씨 문중에서 세운 서당으로 조선 고종 2년(1865)에 세웠다. 원래는 현재의 위치가 아니었으나 1973년 도로공사로 인해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다. 서당의 이름을 독암이라 한 것은 서당 서쪽에 고려 태조 왕건이 공산싸움에서 견훤에게 패하자 혼자 피신해 앉아 있었다는 독좌암이 있어 거기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건물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문중에서 세웠으나 문중 자손들은 물론 인근 지역의 자제들까지 교육하여 이곳에서 유능한 학자를 많이 배출하였다.

 

48.첨백당

 

종 목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3호 
지 정 일 1984.07.25
소 재 지 대구 동구  평광동 970 
시 대 조선시대


우효중의 효행과 우명식의 충성심을 기리며, 광리에 거주하는 단양 우씨들의 교육을 위해 세운 건물이다.


첨백당이라는 이름은 우명식 선생의 묘소가 있는 ‘백밭골을 우러러보는 집’이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고종 33년(1896)에 지었고 1924년 새롭게 고친 적이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고, 집 가운데는 대청마루가 있는데 양쪽 툇마루보다 높게 놓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툇마루에는 난간을 아담하게 둘러 놓았다.
 

 

49.야수정

 

종 목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4호 
지 정 일 1984.07.25
소 재 지 대구 수성구  상동 139-1 
시 대 대한제국시대


1900년경 진씨 가문의 제사를 지내려고 지은 집(재실)으로 한·일 절충식 건물이다.


지을 당시에는 앞면 5칸·옆면 1칸 반의 규모였으나, 나중에 뒤쪽 부분 전체를 반칸씩 늘려 겹집처럼 되어 있다. 마루는 장마루를 깔고 마루 밑에 붉은 벽돌을 쌓았으며 유리창문을 사용했다. 천장도 일본식에 가까운 우물반자로 꾸며 놓았다.


20세기 건축 양식의 새로운 경향을 보이는 건물로, 전통 양식이 일본 건축의 영향을 받아 변화하여 가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50.고산서당

 

종 목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5호 
지 정 일 1984.07.25
소 재 지 대구 수성구  성동 산22 
시 대 조선시대


퇴계 이황(1501∼1570)과 우복 정경세(1563∼1633)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당이다. 처음 지은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이곳에서 이황 선생과 정경세 선생이 강의하였던 곳이라하여 1500년대로 추정하고 있다. 숙종 16년(1690)에는 서당 뒤편에 사당을 지어 서원이라 하였다. 고종 5년(1868)에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고종 16년(1879)에 서원 옛터에 강당만을 다시 지어 고산서당이라 하였다. 그 뒤 1964년 수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규모는 앞면 4칸·옆면 2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현재 사당 자리에는 이황·정경세 선생의 강학유허비가 서 있다.

 

(대구의 무형문화재)

 

1.고산농악


종 목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호

지 정 일 1984.07.25
소 재 지 대구 수성구 내환동 467
기능보유자 정창화 (남, 상쇠)

 

농악은 농부들이 두레를 짜서 일할 때 치는 음악으로 꽹과리·징·장고·북과 같은 타악기를 치며 벌이는 음악을 두루 가리킨다. 농악을 공연하는 목적에 따라 종류를 나누어 보면 당산굿·마당밟이·걸립굿·두레굿·판굿·기우제굿·배굿 등으로 나눌 수 있고, 지역적 특징에 따라 분류하면 경기농악·영동농악·호남우도농악·호남좌도농악·경남농악·경북농악으로 갈라진다.

 

고산농악은 마을 개척시기부터 해마다 정월 대보름 마을제사를 지내는 한 과정으로 행해져온 것이라 전해진다. 농악의 과정은 농기구를 앞세우고 상쇠를 선두로 징·북·장구·상모·잡색이 농악이 행해질 곳으로 향하는 길매구, 상쇠의 지휘에 따라 가볍게 뛰며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다가 태극무늬를 만들며 시계방향으로 도는 덩덕궁이, 원을 돌며 상쇠의 지휘에 따라 뒤돌아가기와 두 개의 동심원을 그리는 둘석, 상쇠의 가락에 따라 원을 돌며 각자 춤을 추는 춤굿, 상모를 쓴 사람들이 원 가운데에서 서로 손을 잡고 작은 원을 돌면서 닭을 쫓는 닭쫓기, 농기구를 중간에 두고 원을 돌면서 좁혀 들어갔다가 다시 풀어 나오는 방석말이, 원이 풀어지면서 징·북·장구가 한 줄로 서고 상모 1명이 중앙에 마주보고 서서 쇠를 치는 모내기굿, 상모·장구·북·징의 순서로 같은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끼리 원 가운데에 나와 놀이를 하는 법고놀이로 진행된다.

 

고산농악의 특징은 고유의 전통적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향토색 짙은 농악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다른 농악놀이에는 없는 닭쫓기 마당이 있다는 점이다.


고산농악은 상쇠 장이만(남, 사망)에 의하여 쇠가락이 전승 보존되어 왔다. 장이만의 사망 이후 고산농악의 쇠가락은 정창화에 의하여 전승되어 왔다. 그는 고산농악의 전승지 내환동 태생으로 20여세부터 장이만에게 쇠가락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오래동안 고산농악의 종쇠로 활동해 온 정창화는 장이만이 사망한 이후 상쇠로서 지금까지 고산농악의 전승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2.날뫼북춤


종 목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제2호

지 정 일 1984.07.25
소 재 지 대구 서구 서구 평리2동 1097-23
기능보유자 김수배 (남, 설북)

 

날뫼북춤은 대구의 비산동 일대에서 전승되어 오는 북춤이다.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산 모양의 구름이 날아오다 어느 여인의 비명소리에 놀라 땅에 떨어져서 동산이 되었다는 전설에 의해 날아온 산이라 하여 ‘날뫼(飛山)’라 부르게 되었고, 옛날 지방관리가 순직했을 때 백성들이 이를 추모하기 위해 봄·가을에 북을 치며 춤을 추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날뫼북춤은 흰 바지저고리에 감색 전투복을 입고 머리에 흰 띠를 두른다. 북만이 연주악기로 사용되며, 경상도 특유의 덧배기가락(굿거리장단)에 맞추어 춤을 춘다. 연출과정은 덩덕궁이, 자반득이(반직굿), 엎어빼기, 다드래기, 허허굿, 모듬굿, 살풀이굿, 덧배기춤으로 구성되어 있다.

 

날뫼북춤은 우리 조상들의 생활과 정서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민속춤으로 예능보유자 김수배씨가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기능보유자 김수배는 청도에서 태어나 어린시절부터 비산동에 살았으며 16세때 부터 날뫼북춤을 배워 오늘날까지 그 맥을 잇고 있다.


3.욱수농악


종 목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제3호

지 정 일 1988.05.30
소 재 지 대구 수성구 욱수동 192
기능보유자 김호성 (남, 상쇠)


농악은 농부들이 두레를 짜서 일할 때 치는 음악으로, 꽹과리·징·장구·북과 같은 타악기를 치며 벌이는 음악을 두루 가리키는 말이다. 굿·매구·풍장·금고·취군 등으로도 불린다.

 

욱수농악은 이 마을 동제당에서 해마다 정월 사흗날 행해지던 천왕받이굿에서 생겨난 농악이다. 농악의 과정은 길풀이로 행해지는 질매구질굿, 동제당 앞에서 신내림을 받는 천왕받이굿, 농악 연주자들이 원형을 지어 상쇠의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는 둥글데미, ㄷ자 대형에서 징·북·장구·법고잡이들이 각각 조별로 묘기를 보이는 마당놀이, 세로 2줄로 마주보고 앉은 연주자들을 상쇠가 Z형으로 빠르게 돌면서 징·북·장구·법고 열로 끊어 일으켜 풀어나가는 외따기, 상쇠가 흥겨운 어깨춤을 추는 덧배기, 상쇠·종쇠·잡색이가 중앙에 원을 만들고 징·북·장구·법고가 각각 4개의 원형을 그리면서 오방진을 만드는 오방진, 농기구를 가운데 놓고 연주자들이 달리면서 원형을 만들고 또 풀면서 태극형을 그리며 원형을 만드는 덕석말이로 진행된다.

 

욱수농악은 쇠가락이 비교적 빠른 가락이 많고 잔가락이 적은 영남농악의 특징을 가지면서, 특히 길굿의 가락이 독특하다. 또한 농악의 과정 중에서 외따기는 경상도 남부지방에서는 드문 형태를 가진 놀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기능보유자 김호성은 20세 전후부터 50여년간 쇠가락을 익혀 대구를 중심으로 한 남부지방의 독특한 쇠가락을 보유하고 있다.

 

4.천왕메기


종 목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제4호

지 정 일 1989.06.15
소 재 지 대구 서구 이현동 48-144
기능보유자 김수기 (남, 상쇠)


천왕메기는 비산동 일대의 주민들이 옛날부터 신으로 받들어 온 기천왕·중천왕·말천왕에게 매년 1월 에 해오던 지신풀이를 말한다. 지신풀이는 음력 1월에 지신(땅을 맡아 다스리는 신)을 진압함으로써 악귀와 잡신을 물리치고 마을의 평화와 풍년 및 가정의 다복을 축원하는 신앙적 마을행사로, 꽹과리·징·북·장구·쇠납 등의 민속악기를 선두로 소고패·양반·포수·머슴과 탈을 쓴 각시 등이 집집마다 다니며 지신풀이 노래를 부르면서 춤과 익살·재주를 부리는 것이다.

 

각 천왕들이 자리잡고 있는 곳에는 천왕나무와 사당 그리고 조산이 있었으며, 사당 안에는 천왕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행사의 과정은 대내림, 제사관 선출, 사당 앞까지 가면서 질굿하기, 사당문 앞에서 문굿을 벌임, 고사 지내며 축문읽기, 천왕메기, 판굿으로 이어진다. 보통 지신밟기는 집집마다 다니며 이루어지는데 비산동 천왕메기는 사당의 앞마당에서 흥겨운 음악과 춤을 추며 판굿을 벌이는 것으로 끝을 맺는 마을굿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기능보유자 김수기는 임문구로 부터 비산동일대에서 전승하는 쇠가락을 전수받아 계승하고 있다.


5.가곡


종 목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제5호

지 정 일 1989.06.15
소 재 지 대구 동구 신암3동 168-13
기능보유자 권측이 (여, 여창)


가곡은 시조시(우리나라 고유의 정형시)에 곡을 붙여서 관현악 반주에 맞추어 부르는 우리나라 전통음악으로, ‘삭대엽’또는 ‘노래’라고도 한다.

 

가곡의 원형은 고려가요에서 생겨난 만대엽·중대엽·삭대엽 순이나 느린 곡인 만대엽은 조선 영조(재위 1724∼1776) 이전에 없어졌고, 중간 빠르기의 중대엽도 조선 후기에는 부르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의 가곡은 조선 후기부터 나타난 빠른 곡인 삭대엽에서 발생한 것으로, 가락적으로 관계가 있는 여러 곡들이 하나의 노래모음을 이룬 것이다.

 

가곡은 시조시 한 편을 5장형식으로 구분하여 부르는데 전주곡인 대여음과 간주곡인 중여음을 넣어서 대여음, 1장, 2장, 3장, 중여음, 4장, 5장 순으로 반복한다. 매우 조직적이며 짜임새가 잘 되어 있다. 장단을 보면 느린 속도의 16박자와 ‘편장단’인 빠른 속도의 10박자가 있다. 연주는 거문고, 가야금, 해금, 대금, 단소, 장구 등으로 이루어진다.

 

가곡은 한국 3대 성악곡 중의 하나로, 판소리와 범패(梵唄: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하는 노래)가 대중적인데 비하여 전문가들에 의해서 전승되어온 예술적 가치가 높은 음악이다. 대구에 사는 권측이 씨가 그 맥을 이어가고 있으며, 영남지역에서 유일하게 가곡을 끝까지 부를 수 있는 사람으로 추측된다.

 

6.영제시조


종 목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제6호

지 정 일 1990.05.15
소 재 지 대구 달서구 송현2동 청구그린1차 APT 103-106
기능보유자 박선애 (여, 시조창)


시조창은 시조시(우리나라 고유의 정형시)를 가사로 하여 노래부르는 것을 말하며, ‘시절가’, ‘시절단가’, ‘단가’라고도 한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영조(재위 1724∼1776) 때 학자 신광수의『석북집』「관서악부」로 이세춘이 시조에 장단을 붙였다는 시가 나온다. 순조(재위 1800∼1834) 때 간행된『유예지』와『구라철사금자보』에서는 시조의 악보가 처음으로 나타난다. 그 후 가곡의 영향을 받아서 시조곡조가 보급됨에 따라 지역적 특징을 지니고 나뉘게 되었다.

 

영제시조는 경상도를 중심으로 한 시조창이다. 평시조와 사설시조가 가장 많고, 뚝뚝 끊어지게 불러서 경상도 특유의 액센트가 강하게 나타나며, 씩씩하고 웅장한 느낌을 준다. 악기 없이 장구나 무릎장단으로 일시적 연주를 하기 때문에 장과 중장, 끝장단에서 5박자가 줄어들기도 한다. 음계는 3음의 계면조(슬프고 처절한 느낌을 주는 음조)와 5음의 우조(맑고 씩씩한 느낌을 주는 음조)로 되어있다.

 

영제시조는 “영남시조가 좋다”라는 말에서 “영판좋다”라는 속담이 생겨날 정도로 음악성이 뛰어나며, 점잖고 격조가 높아 궁중에서까지 소중히 여기던 시조창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다른 지역의 시조창에 비해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어서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하게 되었다.


7.공산농요


종 목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제7호

지 정 일 1990.05.15
소 재 지 대구 동구 평광동 1288
기능보유자 송문창 (남, 선소리)

 

농요는 논이나 밭에서 일을 하면서 피로를 잊고 능률을 올리기 위해 부르는 노래로 ‘들노래’ 또는 ‘농사짓기소리’라고도 한다. 토속민요의 하나로 개인 또는 집단적으로 부르며 지방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공산농요는 노동요로서 먼저 선소리꾼이 노래를 부르면 농부들이 받아서 뒷소리를 받아 부르는 문답창 형식이다. 내용은 어사용(나무꾼노래)·망깨노래·도리깨·타작노래·모찌기노래·모심기노래·논매기노래·벼베기노래 등으로 되어 있다. 어사용노래는 나무를 베거나 풀벨 때 부르는 노래이고, 모찌기는 모를 찌으면서, 모심기는 모를 심을 때 부르는 노래이다. 논매기는 논을 매면서, 벼베기는 벼를 베면서 부른 노래이다. 모찌기노래와 모심기노래에는 여자들이 참여하는 것이 특징이며, 노래는 종류마다 가락에 분명한 차이가 있으나 어사용노래와 벼베기노래는 같은 가락이다. 현재 두레·품앗이 등은 사라지고 노래만 전해지고 있다.

 

공산농요는 소박한 농민들의 슬픔과 기쁨이 어린 향토색을 지닌 민요로 전승하고 보호하기 위해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기능보유자인 송문창은 공산지역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농사를 주업으로 하면서 젊은 시절부터 농요를 익혀 왔고 그의 천부적으로 뛰어난 가창력때문에 인근 마을까지 선소리꾼으로 불려 다녔다 한다.


8.판소리


종 목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제8호

지 정 일 1992.09.08
소 재 지 대구 남구 대명5동 1682-20
기능보유자 이명희 (여, 흥보가)


판소리는 소리꾼 한 명이 고수(북치는 사람)의 장단에 맞추어 창(소리)·아니리(말)·몸짓(너름새)을 섞어가며 긴 이야기를 엮어가는 것을 말한다.

 

판소리는 순조(재위 1800∼1834) 무렵부터 판소리 8명창이라 하여 권삼득, 송흥록, 모흥갑, 염계달, 고수관, 신만엽 등이 유명하였는데 이들에 의해 장단과 곡조가 오늘날과 같이 발전하였고, 지역에 따라 동편제(전라도 동북지역), 서편제(전라도 서북지역), 중고제(경기도·충청도) 등으로 나뉘어졌다.

 

동편제는 비교적 오음의 하나인 우성의 곡조를 많이 쓰며, 목소리를 무겁게 하고 소리의 꼬리를 짧게 끊는 굵고 웅장한 장식음으로 짜여졌다.

 

판소리가 발생할 당시에는 한 마당의 길이가 그리 길지 않아서 판소리 열두마당이라 하여 춘향가·심청가·수궁가·적벽가·배비장타령·변강쇠타령·장끼타령·옹고집타령·무숙이타령·강릉매화타령·가짜신선타령 등 그 수가 많았다. 현재는 판소리 다섯마당 또는 판소리 5바탕이라 하여 춘향가·심청가·수궁가·흥보가·적벽가 만이 전승되고 있다.

 

판소리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이명희 씨는 타고난 음성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국창 김소희 선생으로부터 판소리 다섯마당을 전수받았다. 이명희 씨의 창법은 송흥록 선생을 시조로 하는 동편제 계통으로 동편제 판소리의 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9.살풀이


종 목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제9호

지 정 일 1995.05.12
소 재 지 대구 동구 신암3동 167-1
기능보유자 권명화 (여, 살풀이춤)


예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해의 나쁜 운을 풀기 위해 굿판을 벌였는데 그곳에서 무당이 즉흥적으로 나쁜 기운을 푸는 춤을 춘 것을 살풀이춤이라 하며, 도살풀이춤·허튼춤·입춤·수건춤·즉흥무라고도 한다. 전해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신라시대의 도솔가는 도살풀이·살풀이라고 해석되며, 시나위(남도무악)는 향가 중 사승가의 맥과 통한다고 한다.

 

춤꾼은 고운 쪽머리에 비녀를 꽂고 백색의 치마저고리를 입으며, 멋스러움과 감정확대를 위해 하얀 수건을 든다. 살풀이장단에 시나위를 연주하되 피리, 대금, 장구, 아쟁, 북 등의 반주로서 춤을 춘다.

 

살풀이춤은 오랜 역사를 지닌 남도무속무용 계열의 춤으로 권명하씨가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권명화의 살풀이 춤은 그 전승의 계보가 뚜렷하며, 특히 영남지방의 살풀이 춤 사위를 잘 간직하고 있다. 권명화는 살풀이 춤의 극치를 이루어 우리나라에서 정상급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10.소목장


종 목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0호

지 정 일 1996.05.27
소 재 지 대구 동구 봉무동 797-9
기능보유자 엄태조 (남, 소목)


소목장이란 건물의 문, 창문이라든가 장롱, 궤, 경대, 책상, 문갑 등 목가구를 제작하는 기술과 그 기능을 가진 목수를 말하는 것으로 건축을 주로 하는 대목장(大木匠)에 대칭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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