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갈비의유래

돼지갈비의유래

작성일 2013.04.12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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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돼지갈비의 유래 를 40분까지알려주세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돼지갈비는 일제시대 말에 시작된 걸로 알고있는데

갈비뼈의 갈비에서 유래된 말로 갈비뼈 부근 고기라는 뜻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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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비는 늑골, 갈비뼈, 쇠갈비로 요리의 재료로 예날 음식 책에서는 그음을 빌려
'갈비'라는 하자를 만들어 쓰기도 하였으며, 서울에서는 가리구이, 가리국, 가리찜이라고도 불렀다. 갈비란 아언각비(조선시대 실학의 태두인 다산 정약용이 지은 어원 연구서)에서는 우협을 갈비라하고 갈비에 붙은 고기에서 고기만 떼어서 파는 것을 갈비색임이라 하는데, 이것으로 국을끓이면 맛이 매우 좋다. 그리고 갈비 끝에 붙은 고기를 쇠가리라고 하는데 이것을 푹 고아서 국을 끓이면 좋다. 라고 하였다. 예전에는 갈비를 고깃간에서 짝으로만 팔았는데, 소의 갈비의 한쪽을 말하므로 한 마리에서는 두 짝이 나온다.

구이는 인류가 불을 사용 할 수 있을 때 부터 제일 먼저 실시한 근본적인 조리법으로서 그릇이 필요한 조리법보다 먼저 발달한 조리방법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구석기 시대 중기의 평양시 승호구역 화천동 동굴 2호 퇴적층에서 50 ~ 60cm 정도의 둥그스름한 우등불 자리가 발견되었으며, 여기에 남은 재자리는 10cm안팍의 것인데, 재속에 타다남은 짐승뼈들이 있었다. 금우산 동굴유적지에는 직경이 50 ~ 60cm의 원형을 이룬 잿무지가 두곳에서 발겨노디었는데, 잿무지 속에 불에 탄 흙,숫부스러기, 뼈가 있었다.

불을 지핀 유적이 발견된 것은 물론 난방이나 또는 사냥꾼들이 몸을 녹이던 자리였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한편 이 시대의 생활인들은 짐승의 뼈를 모닥불에 익혀서 먹었음을 알 수 있다.

구이란 근본적으로 볼 때 꼬챙이에 꿰거나 석쇠, 적쇠로 직화구이하는 '적'과 꼬챙이를 쓰지 않고 철판이나 돌위에서 간접 불로 굽는 구이(번)로 나눌 수 있겠는데 여기서의 적과 구이의 근원적인 차이는 없고 다만 관습적인 구분을 하고 있다.

고사통에서보면 중국에서 한 대로부터 양자, 과적이라는 숙육법이 향연의 내용을 성대하게 하였는데 이는 북방에서 중원에전래된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양은 서북의 유목민족을 가리킨 것이며, 과는 동북의 부여계 민족을 가리킨 것으로 볼때 과적은 우리나라 상고인들의 육류조리법이라고 하겠으며 중국 한대에 전래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삼국시대 이전에는 일찍이 농경문화가 발달한 농업국이지만 [위지]동이전 고구려조에 의하면 좋은 밭이 없어서 식량이 부족한 상태였으므로 농경외에도 사냥, 어로, 목축 등이 식량획득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리하여 일찍부터 고기음식이 발달하여, 선사시대부터 맥적이라는 고기구이가 발다랗였다.

중국 진나라 시대의 [수신기]란 책에 '맥적은 다른 민족의 음식인데 옛날부터 중국 사람들이 몹시 좋아하여 중요한 잔치에 먼저 내놓는다'고 하였다.

구이는 소가리 안심, 등심, 염통, 콩팥, 간 등을 엷게 저며서 안팎을 칼질해서 연하게 한 다음 양념장에 재어 놓았다가 식사직전에 구어서 더운 때에 먹게 하는 것이다. 약포와 편포와 같은 쇠고기를 양념하여 햇볕에 말려 가지고 구이로 할 수 있다.

방신영의 [조선요리제법]에서는 적과 구로 누누되, 적은 한결같이 산적을 가르키고 있다. 이용기의 [조선무쌍요리제법]에서는 구이만드는 법을 "구의라는 것은 진한 간장에 양념을 잘할 뿐 외라 모닥불에 굽기를 잘하여야하는 것이라 보기에는 굽기가 쉬운 듯 하나 엇던 얌전한 부인이 잘 하리요 괄한 블에 약념 만드러 발가며 안팟을 태우거나 옴둑썹이를 만들면 엇지 얌전한 부인의 솜씨라 하리오 안팟 팟을 잘게 어여서 산적고묭에 뭇쳐서 쏫챵에 꾀여 재엿다가 석쇠에 잠간구어 쓰나니라"하여 적과 구의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적은 꼬챙이에 꿰어서 굽는 것이나 예외도 있어서 근원적인 뜻은 확연히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조자호의 [조선요리법]에서는 구이 속에 적과 구이를 아울러 다루고 있다.

그러나 구이에 대한 표현은 동서고금이 서로 달라서 중국에서는(불에 쬐어 말릴 --->고)라 하고, 광동지방에서는 '소'라고도 한다. 그러나 화북지방에서는 요즘 볶거나 튀긴 재료를 충분히 삶아낸 것을 '소'라하고, 간장으로충분히 삶아낸 것을 '홍소'라 한다.

한편 재료를 종이나 흙에 싸서 굽는 포, 재료를 종이나 흙에싸서 뜨거운 재에 묻거나 밀폐된 그릇속에서 가열하는 외중(건열찜, 찜구이)등이 있다. 이때는 재료의 수분이 수증기가 되어 밀폐된 공간 속에 남기 때문에 이른바[찜구이]가 된다.

또[임원십육지], [산림경제]에 (거가필용)을 인용하여 고기를 꼬챙이에 꿰어 조미하여옷을 입히고 구운 다음 면피를 벗기는 방법, 조미한 고기를 남비 속에 매어 달고 밀폐하여 건열하는 방법 곧 오븐구이 등이 설명되어 있다.

십정웅은 "고대 로마조리법의 가장 큰 특징은 고기를 먹을 때, 고기라도 초기는 우육은 적고 돈육이 많았지만 이 돈육을 구워먹을 때에도 우선 삶는다. 어떤 고기든지 삶게 된다. 질기기 때문에 삶는 것이 아니고 삶음으로써 국물을 얻기 위한 것이다. 삶은 고기를 불에 굽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날고기에 소금을 쳐서 직화를 쬐어굽는 것을 방자구이라 하는데 조선시대의 조리서에는 이러한 것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조선시대의 조리서에는 보다 구체적인 고기구이의 일반론을 여러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이를테면[임원십육지],[규합총서]등에는 고기를 직화를 쬐어 굽는데(지마:참깨)꽃의 가루를 고기 위에 바르고 구우면 기름이 흐르지 않는다고 하였고, 또 고기 굽는데 뽕나무를 땔감으로 쓰지 말라고 권하였다.

그리고 구이를 제상이나 큰상에 올릴 때는 본디 구이를 가르키는 말에 의하여 '적'이라 한다. 제사에는 황, 홍, 청 3색 종이를 오골오골 주름잡은 사지를 감아서 곱게 장식하여 쓴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고기구이는 맥적에서 유래된다.
그럼 맥적의 전래에 대해서는 진대의 [수신기]에는 맥적은 적의 음식이거늘 태조 이래로 중국 사람이 이것을 숭상하여 중요한 잔치에 이 음식을 먼저 내 놓으니 이것은 '적'이 땅을 침법한 전조이었다"고 기술하였다.

맥은 중국의 동북지방인 고구려를 가르키며 맥적은 고구려의 고기구이를 가르킨다. 또 [예기]주에는 '적'은 고기를 꼬챙이에 꿰어서 직화를 쬐어서 구이하는 것이라고 하였고, [의례]에는 '단적무의'이라고 하고 그 '주'에서 이미 조미되어 있으니 먹을 때 일부러 '의'에 찍어 먹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불고기의 조형이지만 석쇠가 나온 후에는 꼬챙이에 꿸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 뿐이다.

우리는 고려시대에 접어들면서 불교의 영향을 받아 점차 소의 도살법이나 요리법이 잊혀졌으나 몽고사람의 지배아래 들어감에 따라 예 요리법인 맥적을 되찾게 되었고, 특히 몽고사람과 회교도가 많이 들어와 살던 개성에서는 설하멱이란 명칭으로 되살아나고, 이것이 오늘날의 부곡기에 연결된다. 이것의 내용을[산림경제]가 인용한[서원방]을 통하여알아보면 "육우를 썰어서 편을 만들고 이것을 도배로 두들겨 연하게 한 것을 대나무꼬챙이에 꿰어서 유장으로 조미해서 '유'가 충분히 스며들면 숯불에 굽는다고 하니바로 옛 맥적이고 지금의 불고기이다. 그런데 이것이 더욱 발전되어 구운 것을 급히 물에 한번 담갔다가 꺼내고 굽고 또는 물에 담그는 일을 세번 되풀이하고 기름을 바른 후에 또 굽는다. 그러면 매우 음연하고 맛이 좋다."고 하였다.

그리고 [음식디미방]의 가지누르미건에 "가지를 설하멱처럼"이란 말이 나오니1600년대 말엽에도 설하멱은 보편적인 요리품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히동죽지]에는 "설야적"은 개성부에 옛부터 내려오는 명물로서 만드는 법은 쇠갈비나 염통을 기름과 훈채로 조미하여 굽다가 반쯤익으면 냉수에 잠깐 담갔다가센 숯불에 다시 구워 익히면 눈오는 겨울밤의 술안주에 좋고 고기가 몹시 연하여 맛이 좋다"고 쓰여있다.

얇은 고기를 계속 굽기만 하면 타버릴 것이니 굽는 도중에 찬물에 넣었다가 건져서 구우면 연하게 속까지 잘 구워진다.

그런데 유한철은 불고기에 대하여 다음과같이 말하고 있다.
지금은 등심, 안심 숯불 소금구이가 제 1품으로 되어있으나 사실인즉 대퇴부육 안쪽에 붙은 사태가 제일 맛있고 어느 부분 고기보다 많이 먹힌다.(대퇴근앞쪽은 홍두께 살이라 하여 육회에 알맞다.) 사태 중의 최고는 아롱사태이다.
소금구이는 불에 살짝 붉은 기만 가시게 하곤 소금을 뿌려 먹는 것이 제격이다. 사태는 가운데에 심줄이 들어있는 둥근 육질로서 기름기가 거의 없고 썰어놓으면 동그란 모습이 된다. 입에 닿을 때 산뜻하면서도 고기맛이 제법이다. 부드럽기 한이 없다. 그리고 여기서 따로 뜯어낸 심줄을 떡심이라 한다.

그러면 불고기를 어째서 설야멱이라 하였을까? 송남잡식에 의하면 송 태조가 설야에 진을 찾아가니 숯불에다 고기를 굽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것이 눈오는 밤에 찾아갔다는 뜻으로 설야멱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설야멱의 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설도 있다. 중국에서 맥적 나아가서는 맥이 어느새 불고기의 대명사가 되었고 맥은 별다른 뜻이없이 음이 비슷한 멱으로 바뀌니 설야멱이란 말이 생겨난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구태어 본명을 따진다면 설야멱의 본 뜻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세시기에서는 설야멱을 일명 곶적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대나무 꼬챙이로 쇠고기를 꿰어서 굽는 것이다."고 하였다. 이로써 설야멱의 본뜻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또 국어대사전의 설적에 보면 송도설씨가 시작한 데서 나온 말로서 쇠고기나 소의 내장을 고명하여 꼬챙이에 꿰어 구운 음식"이라고 쓰여있다. 설적이 설야멱인 듯 한데 그 출처는 알 수가 없다.

한편 `옹희잡지' `시의전서'에는 갈비, 염통 등을 양념하여 물에 담그지 않고는 그대로 직화에 쬐어 구워 낸다고 한다. 또 `시의전서'에는 우육을 저며 잘게 칼질하여 양념한 다음 직화에 쬐어 구이하는 것을 너비아니라 하였는데, 너비아니는 불고기의 궁중 용어로서 오늘날의 불고기를 뜻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설야멱의 기원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본디 중국에서는 직화구이의 지향성은 크게 생겨나지 않았으나 북부지방에서는 그렇지도 않다. 북경의 명물 요리품으로서 고양육, 고압 등을 들 수 있다. 고란 자는 옛 자전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전호사에 의하면 "고는 제백석이란 화가가 고안한 글자로서 적과 같은 뜻이고, 적양육은 본디 유목민족의 야외 연회용 요리의 일종인데 이 유목민족의 지역은 중국의 서북일대의 사막에 접한 지역과 현재의 동북 곧 구만주를 가리킨다. 이곳의 주민들은 오늘날 어느 정도 변했지만, 옛날은 거의 고기만 먹었다. 그들의 고육의 풍습이 언제부터 북경에 전해졌는지는 잘 모르나 원대부터라고도 하고 청대부터라고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려말기의 중국어 학습서인 `노걸대'에는 "우소를 사되 살찐 것은 말고 갈비 붙은 고기를 산다."고 하였다. 또 `고려사'에 의하면 "마이량이 소의 양(우장)을 즐겨 구워먹었다."고 쓰여 있다. 이로써 고려말에는 살코기뿐만 아니라 소의 양(소의 위)이나 갈비도 구워 먹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거가필용'에 돼지갈비구이의 설명이 나오는데, 이것은 우리의 설야멱식으로 굽고 있다. 따라서 `거가필용'의 설야멱식은 중국동북지방에서 배운 것이고 우리는 결국 려말에 거가필용을 통하여 이것을 되찾게 된것이 아닐까?
거가필용은 몽고계의 요리서이지만, 그 내용은 전부가 몽고계의 요리가 아니라 중국본래의 것과 회회요리, 여진요리등도 널리 포함되어있다.

몽고사람은 불의 신을 굳게 믿고 있어 고기를 불로 직접 구우면 불의신이 노한다고 하여 고기를 불에 직접 굽지 않는다. 양고고기는 뼈가 붙은 그대로 큰 솥에 넣어 맹물로 끓이는 것이 보통이다.
불에 굽는 요리는 만주족 기원의 요리인데, 이것을 해방전 일본인들은 북경의 고기구이를 몽고계의 요리로 착각하고 징기스칸이라고 하였다...

징기스칸이란 불고기식요리는 큰 석쇠위에 양고기와 쑥갓같은 냄새가 나는 야채를 곁들여 구워서 먹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고기는 어디까지나 동이곙릐 요리 곧 맥적에서 나온 것이다. 중국에는 요리 이름에 본디 징기스칸이란 것은 없다.

한편 동국세시기에서는 "서울 풍속에 화로에 숯불을 훨훨 피워놓고 번철에다 조미한 쇠고기를 구운면서 화롯가에 둘러앉아 먹는데 이것을 난로회라 한다. 세시잡기에 북경사람은 10월 초하루에 술을 걸러 놓고 저민 고기를 화로에 구우면서 둘러앉아 먹는데 이것을 난로회라 한다.

동경몽화록에는 10월 초하루에 난로회를 열었으니 지금의 풍속도 그러한 것이다. 숯부을 피워 놓고 요리하면서 먹으니 방안이 훈훈해져 추위를 막는 계절음식으로 눈내리는 추운 겨울밤에 먹는 설야멱도 난호회의 하나로 고기의 번철구이, 직화구이, 구이전골, 냄비전골 등도 난로회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송대의 중국에도 난로회라 하였다.

조신시대 중기의 이순록에는 난로회에 대하여 "근시 골식회가 있는데 이것은 고인이 사냥터에서 먹는 것으로서 화로를 둘러싸고 스스로 구워 다투어 먹었다."고 쓰여 있다.
이 골식회가 난로회의 하나인 것 같다.

이와 같이 난로회의 기운을 유목계의 야외 파티에서 찾을 수 있고, 결국 우리네 맥적에 연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진대의 수신기에 벌써 맥적이 등장하였다. 여기에서 이 야외 파티 요리를 우리는 숯의 발견으로 실내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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