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미국사회와 삶속의 청교도 혈통

현대 미국사회와 삶속의 청교도 혈통

작성일 2005.10.16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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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정도로 프리젠 테이션 해야하는데 너무 난감하네요...

도움주세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청교도 선구자 : 존 낙스 (1513~1572)

 

존 낙스는 1513년경 에딘버러(Edinburgh)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하딩톤(Haddington)에서 태어났다. 그는 성 앤드류(St. Andrews) 대학에서 교육받고, 이어 신부로 서품되었다. 30세쯤에 그는 프로테스탄티즘에 설복당했고, 그와 동시대 사람이었던 죠지 위샤트(George Wishart)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 위샤트는 복음 전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은 자였고, 1546년 성 앤드류의 화형장에서 순교했던 인물이다.

 

향후 13년 동안 낙스는 여러 곳을 여행했다. 그는 실패로 끝나 버린 앤드류 성 반란에 참여하였다가, 노예가 되어 프랑스의 노예선에서 노를 젓는 일에 19개월이나 보내야 했다. 그는 에드워드(Edward) 2세 치하 말기에 영국으로 오게 되었고, 크랜머의 1552년판 '공중기도서'(Book of Commom prayer)를 준비하는 최종 단계에 참여하여 일익을 담당했다.

 

1553년 메리 여왕이 즉위하자 그는 독일로 건너갔다. 한동안 그는 프랑크푸르트(Frankfurt)에 있는 영국의 망명자 교회의 목사로 있었는데, 거기서 그는 논쟁에 휘말려들게 되었다. 낙스와 여타의 사람들이 보다 철저한 개혁파 예배 의식을 소개함으로써 '공중 기도서'를 이탈하게 되었다.

 

하지만 유럽의 여러 다른 도시에서 망명온 보다 보수적인 자들은 이를 좋게 여기지 않았고, 낙스를 즉시 몰아내려고 리차드 콕스(Richard Cox)와 그이외 사람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들은 낙스에게 항의하며 "그대들은 영국 교회의 모습을 가져야 할 것이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하여 낙스는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모습을 지니라고 말씀하실 것이오"라고 대답했다.

 

이런 충돌은 엘리자베드 1세 치세시 '공중 기도서'를 견지하기를 원하는 자들과 대륙의 개혁파 교회들이 지니는 노선에 서서 보다 충실한 종교개혁을 요구한 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청교도(Puritan) 논쟁의 전조가 되었다. 콕스는 사람들에게 (낙스의 급진적인 교회 정치관을 환기시킴으로써) 프랑크푸르트로부터 낙스를 추방시켜야 한다고 조종하자, 그는 제네바로 건너갔다.

 

그는 칼빈의 제네바를 열렬히 찬미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그 곳에 머물면서 그의 유명한 '괴물같은 여인들의 통치에 대한 제1차 나팔소리'(First Blast of the Trumpet against the Monstrous Regiment of women, 1558)를 저술했다. 이러한 여성 통치자에 대한 비난은 영국의 여왕 메리 튜더(Mary Tudor)에게 향해진 것이었다. 1558년에 엘리자베드가 즉위했고 그녀는 낙스의 그런 저서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1559년, 낙스는 스코틀랜드로 다시 돌아왔고 그 곳에서 교회 개혁을 도왔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권징 조례'(Book of Discipline, 1561)와 '일반 예식서'(Book of Common Order, 1564)의 초안을 작성했다. 그는 또한 1560년 8월 중 4일에 걸쳐 '스코틀랜드 신앙 고백서'(Scots Confession)를 작성했던 '여섯 사람의 존'이라는 인물 중 가장 핵심이 되는 중추 인물이었다. 이 신앙 고백은 스코틀랜드 의회의 승인을 얻게 되엇고, 1647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Westminster Confession)가 답변확정되기 전까지 스코틀랜드 개혁파 교회의 신앙고백서가 되었다.

 

괴물 같은 여인들의 통치에 대한 제2차 낙스의 항거는 1568년 메리 스튜어트(Mary Stuart :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가 영국으로 쫓겨나는 날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그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을 관철시켰다. 그의 주저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사' (History of the Reformation of Religion within the Realm of Scotland)로서, 1644년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책이었다. 낙스는 1572년에 세상을 떠났다.

 

 

청교도의 선구자 : 존 칼빈 (1509~1564)


 

[유년기]


 

1. 출생
1509년 7월 10일 파리에서 동북쪽으로 약 60마일가량 떨어진 노용(Noyon)시(市)에 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Gerard Calvin)는 본래 노동자였으나, 부지런하고 조직적이 고 독립정신이 강해서 노용 감독구의 서기가 됐다. 그의 어머니(Jeanne Le Franc)는 그 성내에서 신앙의 인물로 존경받는 부인이었다.

2. 어린시절
칼빈은 노용(Noyon)에서 14살때까지 살며 지방학

교에서 열심있는 학생으로서 관심 있는 학과를 빠른 속도로 정복해 나갔고, 친구들로부터 같은 동료라기 보다는 선생님으 로 생각될 정도의 감탄과 칭찬의 말을 들었다. 한번 만난 사람과 한번 배운 학과는 모 두 기억하는 비상한 천재적 소질을 발휘하던 그는 우뚝솟은 성당의 영향력 아래서 유년 시절을 보내며 경건생활을 하였던 것은 그의 부모의 영광이었다.

 

3. 대학생활
1523년 존 칼빈은 파리로 가서 마르세대학에 등록하여 마두린 코디어(Mathurin Cordier)교수에게 라틴어를 직접 사용하는 것을 배우다가 그해 겨울에 몽테규대학으로 학교를 옮겼다. 코디어교수와는 짧은 만남이었지만 후일에 하나님의 교회에 유효하게 쓰임받을 훌륭한 준비였다. 몽테규대학으로 간 칼빈은 그곳에서 금욕주의의 학칙을 철 저히 준수하며 장기간 공부하는 습관을 익히고 논변술과 논박법을 배웠다.


 

[청년기]


1. 부르지대학
파리의 대학에서 5년의 훈련을 마친 뒤 1528년 칼빈은 신학연구자격시험에 통과하였 으나, 그의 부친의 권유로 법학을 공부하게 된다. (하지만 법조계로 방향을 바꾸었다고 해서 신학의 길을 아예 자른 것은 아니다.) 오르레안대학의 피터 타아잔 문하에서 법학 을 약 1년간 배웠으나 그는 부르지대학에서 강의하던 안드레아 일키아티 교수의 명성을 듣고 부르지대학으로 옮긴 수 멜케오어 볼마르 문하에서 강의하던 그의 연구를 계속하게 되었다. 칼빈은 볼마르 교수의 교육(언어, 문화, 고대문화연구, 신약원문연구)아래서 조 직적인 개혁수행하고 주석을 쓸 수 있는 기초를 잡은 것이다.

2. 파리의 왕립대학
1931년 파리의 왕립대학은 성경이 헬라어와 히브리어로 연구되었다. 법학을 권유하 던 칼빈의 아버지는 그해 병으로 돌아가셨다. 이에 칼빈은 파리로 돌아가 왕립대학에서 헬라어, 히브리어 공부를 하였다. 또한 그는 1932년 그곳에서 세네카의 관용론 주해서 를 출판하기로 했다.

3.프로탄테스트
인도주의적 색깔을 강하게 띄던 칼빈은 1532년 오르레안으로 갔다가 (학업을 위해) 이듬해 아시 파리로 돌아올 때 그는 프로테스탄테였다. 1532년에 그는 갑작스런 회개 를 경험한 것이다. 그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로 변하였다. 그는 즉시 복음사역자로서 그리고 종교개혁가로서 두가지 사명을 동시에 깨닫게 된 것이다. 칼빈은 그의 친구 니 콜라스 콥을 위하여 프로탄테스트 선언문을 쓰고난 후 힐책과 비난으로 은둔생활을 하였 는데 그곳은 앙굴렘(Angoulem)이었다. 칼빈은 이곳에서 "기독교 강요"의 체계를 세워 나갔다.


 

[사역기]


1. 기독교 강요
1536년 칼빈은 '기독교 강요' 초판을 프랑스의 신교들들의 박해에 대한 탄원서로서 프란시스1세에게 보내는 글로 썼다. 그의 글은 조직적이고 질서와 논리가 정연한 것이 특징이다. 오늘날로 개혁교회의 가장 큰 이정표가 된 것은 그 책의 성경에 대한 충실성 때문이다.

2. 제네바 개혁운동
하나님의 섭리속에 칼빈은 제네바의 개혁지도자 화렐과 만날 기회가 생겼다. 화렐의 "요나의 비유"를 통한 설득에 칼빈은 제네바에서 개혁운동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당시 극도로 타락한 제네바에 머물게 된 칼빈은 이름없는 종교 개혁가로서 종교개혁의 첫발을 내딛었다. 1536년 로잔에서 신교와 구교사이에 성찬문제로 토론회가 있을 때 칼빈은 교부신학을 자유로이 인용하여 신교의 주장이 성경적임을 갈파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 작했다. 1537년 제네바시의 소의회와 2백인 회의에서 그의 '요리문답'을 정식 답변확정되었 고 아이들을 비롯한 모든시민은 칼빈의 신앙요리 문답을 배우게 되었다. 하지만 어떤 시민들은 그를 이단으로 몰아갔고, 개혁자들은 끝까지 신앙고백을 강행하려다가 시정부 와 충돌하게 되었다. 습격, 협박등의 소용돌이속에서 결국 시의회의 가결에 의해 칼빈 과 화렐은 1538년 제네바에서 추방당하게 된다.

3. 스트라스 버그
칼빈은 바젤(Basel)로 갔다가 1538년 9월 프랑스 난민 교회에서 그의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는 신학을 강의하였으며 로마서 주석도 내었다. 그는 스트라스 버그에서 약 3년간 있으면서 매우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그 시기에 그는 결혼도 하였으며 기독교 강요 제2판도 내었다. 분주한 가운데 행복했던 칼빈에 비하여 제네바는 반대였다. 1540년경 반대파의 세력이 약해지고 부패는 더하여 져서 제네바시는 칼빈을 재초청하였다. 칼빈은 응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의 동역자 화렐의 간곡한 권유에 의해 1541년 다시 들어가게 되었다.

4. 다시 제네바로
다시 제네바로 돌아온 칼빈은 시의 전권을 장악하게 되자 그의 개혁 이상을 실현하기에 노력하였다. 칼빈이 제네바로 돌아와 처음행한 일은 시의회에 나가 법에 의지하여 교회를 다스릴 것과 교회법규를 제정할 것, 그리고 이 문제와 관련하여 자신에게 시 위원회의 고문위치를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교회법규"가 1541년에 대중앞에 낭독되고 정부와 시민에 위해 답변확정되었다. 하지만 1543년 시의회는 장로원으로부터 제명권을 박탈하고 1548년에는 칼빈의 모든 책은 출판전에 검열을 받도록 규정하였다. 1553년 추방을 각오하고 사실상 교회에 작별을 고하는 설교를 하였다. 이러한 칼빈의 계속된 투쟁은 1553년말 칼빈의 적수 세르베투스(Servetus)의 죽음으로 승리를 쟁취하였다. 세르베투스를 지지하던 자유파의 많은 지도자들은 제네바를 등지고 도망하였다. 장로원은 제명권을 찾았으며 그 결과 징계권 행사에 있어서 교회와 국가는 엄밀히 분리되었다.


 

[노년기]


1. 성취
1559년은 칼빈으로서 성취의 해였다. 제네바시가 그에게 시민권을 줌으로 경의를 표한 것 보다 더 가치를 준 것은 그가 학술원(Accdemy)설립허가를 받은 것이었다. 교육받은 지도자를 교회에 공급하고자 했던 칼빈의 꿈이 실현된 것이다. 그는 건강이 아주 나뿜에도 불구하고 연 200회의 강의와 200외의 설교를 하였다. 성경 각권을 주석하였고 '기독교 강요'를 계속 재편집하며 20편에 달하는 신학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그의 제작 전집은 총 59권에 달한다고 한다.

2. 죽음
1564년 그의 건강은 기울기 시작해서 그해 2월 마지막 강의와 마지막 설교를 하고 4월 마지막 예배에 참석하며 성찬에 참여 한 뒤, 1564년 5월 27일 칼빈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칼빈의 서거 소식은 제네바를 울음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칼빈의 유언에 따라 그의 장례식은 아주 간소하게 치뤄졌으며, 그의 무덤 역시 비석하나 없는 초라한 모습으로 소나무 곁에 묻혀 있을 뿐이다.

 

 

청교도 선구자 : 존 폭스 (1516~1587)

 

죤 폭스는 1516년 영국 동부의 링컨셔주 보스톤에서 태어났다. 대단히 학구적이었던 그는 16살 때에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옥스퍼드 대학에 진학하여 1537년 문학사 학위를 받았고, 1538년에는 모들린 단과대학의 특별연구원 후보가 되었으며, 이듬 해에 1539년에 특별 연구원이 되었다. 그는 1539년부터 1540년까지 논리학을 강의했고, 1543년 석사 학위를 받았다.

 

옥스퍼드 대학 시절 그의 절친한 친구로는 휴 라티머와 윌리엄 틴데일이다. 그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개신교를 강력히 지지했는데, 이 사실로 인해 1545년 폭스를 비롯한 다섯 명의 모들린 단과대학 특별연구원이 사임하게 된다.

 

옥스퍼드를 떠난 그는 워릭셔주 찰르코트에 있는 루시(Lucy) 가문의 가정교사로 일했다. 1547년 초 찰르코트 교회에서 아그네스 랜달과 결혼한 그는 생계를 위해 런던으로 왔다. 1548년이 저물어갈 무렵 폭스는 1547년에 처형된 서리(Surrey)의 백자 헨리 하워드(Henry Howard)의 자녀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가 되었다.

 

1550년 런던의 주교 리들리는 폭스를 성 바울교회의 부제(副祭)로 임명했다. 그리하여 그는 비록 목회자로서의 책임을 맡지는 않았지만 그곳에서 설교를 했으며, 그곳에서 개신교를 전파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그 동안 그는 신학 논문들을 출판하고, 많은 교회사 책을 읽었다.

 

1553년 7월 메리 여왕이 즉위하게 됨으로써 폭스에게는 불안한 시기가 시작되었다. 카톨릭 신자였던 늙은 노포크 백작은 감옥에서 풀려나자마자 자기의 손자들을 가르치고 있던 폭스를 해임했다. 폭스의 친구들은 대부분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영국을 떠나 유럽 대륙으로 갔으며, 폭스도 그들의 뒤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그는 위클리프 시대로부터 그 시대에 이르기까지 유럽에서 있었던 개혁자들의 박해에 관한 라틴어 논문의 첫 부분을 복사하여 가지고 갔었다. 이 책은 주로 위클리프와 후스를 다룬 것으로서, '행위와 불후의 업적'(Acts and Monuments)의 초안이 되었으며, 1554년에 출판되었다.

 

폭스는 프랑크푸르트에 약 1년동안 머무는 동안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 죤 낙스와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후 바슬레로 이사한 그는 극심한 가난으로 고생했다. 그는 열렬한 개신교 신자이며, 개신교 서적을 출판했던 요한 헙스터(Johann Herbst)의 인쇄소에서 원고조사계로 일했는데, 헙스트는 폭스에게 자기의 저서를 집필한 시간을주었다.

 

그 동안 폭스는 그린달을 통해 영국에서의 박해에 대해 보고를 받고 있었다. 브래드포드 사건이 그가 입수한 최초의 박해 사건이었으며, 크랜머의 심문에 관한 보고서를 입수했을 당시 폭스는 그것을 출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린달은 폭스에게 헨리 8세의 통치 말기까지 있었던 영국에서의 개혁자 박해에 관한 기사를 즉시 완성하라고 권했다. 그는 착실하게 작업하여 1551년에는 헨리 8세 통치 말기까지의 박해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다 기록했다. 라틴어로 기록된 이 저서는 1559년 9월 1일 옛날 그가 가르쳤던 학생으로서 이제는 백작이 된 노포크 백작에게 헌정되었다.

 

같은 해 폭스는 영국으로 귀환했으며, 당시 런던의 주교였던 그린달은 1560년 그를 사제로 임명했다. 그는 앞서 말한 저서를 영어로 번역하고 자기가 수집한 자료를 다듬는 일에 몰두했다. 그는 크랜머의 비서였던 랠프 모리스의 서류를 비롯하여 많은 새로운 자료들을 입수했었다.

 

'행위와 불후의 업적'은 1563년 3월 20일 출판되었다. 이 책은 출판되던 날부터 '순교자들의 책'으로 알려졌다. 폭스는 이 책의 출판으로 그는 크게 성공하였다. 그는 샐리스베리 성당에서 성직자록을 받았고, 1563년 5월 11일 심톤의 교구목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재정적인 문제로 고생했다.

 

1570년 성 금요일, 엘리자벳 여왕을 파문한다는 교황청의 교서가 발표된 뒤, 폭스는 그린달의 명령에 따라 성 바울 교회에서 강력한 설교를 하여 카톨릭 교회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다. '행위와 불후의 업적'은 1570년에 재판되었다. 성직자 회의에서는 이 책을 교회, 그리고 대주교, 주교, 집사, 부감독의 집에 반드시 비치하라고 결정했다.

 

1586년 폭스는 건강이 악화되어 많은 고생을 하다가 1587년 4월에 사망하여 런던에 있는 성 가일즈 교회에 매장되었다. 그의 아들 사무엘이 새긴 기념비가 지금도 그곳에 남아 있다.

 

폭스는 자신의 처지도 곤궁하고 넉넉지 못했으면서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행했으며, 언제나 명랑하게 살았다. 그의 아내는 18년을 더 살다가 1605년에 사망했고, 그들에게는 다섯 자녀가 있었다.

 

폭스는 많은 저서를 집필했는데 그 중에서도 후세 사람들에게 기억될 불후의 역적은 '순교사'이다.

 

 

청교도 선구자 : 윌리엄 틴데일 (1495~1536)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은 1495년경 웨일스(Welsh) 국경 마을 슬림브릿지(Slymbridge)에서 태어났다. 그는 맥댈런 대학(Magdalen College), 옥스퍼드 대학,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했고 1521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는 헬라어에 능통했으므로 성경을 읽으며 큰 은혜를 받았다. 그는 이러한 체험이 모든 사람들에게도 있기를 바랬다. 당시에는 4세기에 제롬(Jerome)에 의해 라틴어로 번역된 성경이 사용되고 있었지만 성직자들과 라틴어를 구사하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없었다. 성경은 성직자와 귀족들만의 책이었다. 그는 모든 평신도들이 성경을 자유롭게 읽고 성경의 근본적인 세계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 방법은 영국에서의 대중적인 언어인 영어로 성경이 번역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번은 한 고위 성직자가 "성경을 보통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영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단지 교황뿐이오. 교황의 법 없이 사는 것 보다 차라리 하나님의 법 없이 사는 것이 훨씬 더 낫소"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이 말을 듣고 틴데일은 "만일 하나님께서 내 생명을 지켜주신다면 수 년 안에 쟁기를 끄는 소년이 당신보다 더 많이 성경을 알수 있게 할 것이오"라고 응수하였다.

 

틴데일은 '뭄무스'라는 부유한 상인이 제공한 집에서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헨리8세는 성경 번역을 금지하였고. 고위 성직자들은 성경번역을 반대했고, '뭄무스'에게도 틴데일을 돕지 못하도록 강요하였다. 상황이 악화되자 틴데일은 영국을 떠나 독일의 함부르크로 갔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영국 카톨릭의 주교들과 성직자들은 첩자들을 고용하여 성경번역과 출판을 계속 방해하였다. 틴데일은 거기에서 신약번역을 착수하여 1525년 콜론(Cologn)에서 인쇄하여 4절판(quarto edition)으로 출판하였다.이것은 최초의 영문판 신약 인쇄본이었다.

 

그러나 어느 인쇄공이 성경인쇄 사실을 밀고하여 신변에 위협을 느낀 틴데일은 '보름스'라는 지방으로 피신하였다. 그는 거기에서 신약을 8절판(octavo edition)으로 출판하여 3천 부를 비밀리에 영국으로 반입하였다. 반입은 위클리프의 일파인 롤라드파(Lollards)에 의해 이루어졌다. 통 속에 넣어 다른 상품처럼 위장하고, 밀가루 속에 숨기는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영국으로 반입한 것이다. 반입된 성경들은 발각되는 즉시 불에 태워졌다. 그렇지만 더 많은 성경이 계속 반입되었고 이제는 관리들도 그것을 막을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마침내 워햄(Warham) 대감독은 독일에 있는 상인을 통해 인쇄된 모든 성경을 사들여 불태워버리기로 작정하였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번역성경이 반입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패킹턴'이라는 포목상이 있었는데 그는 틴데일의 번역작업에 동조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번역성서의 출판과 배부를 위하여 많은 돈이 소요됨을 알고 있었다. 패킹턴은 한가지 꾀를 내었다. 그는 대감독의 생각에 동조하는 듯이 위장하여 성경을 사들이겠다고 하면서 틴데일이 독일에서 비싼 값에 팔기 때문에 자금이 많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대감독은 페킹턴의 요청에 "최선을 다해 전부다 매수하도록 하시오. 그 일에 얼마가 들던지 지불할 용의가 있소. 나는 그것들을 전부 불태워버릴 것이오."라고 반겼다.

 

그는 자신의 말대로 틴데일에게 값을 풍족히 치루고 성경을 매입하여 영국으로 가져왔다. 물론 틴데일은 성경을 판매한 풍부한 자금으로 성경 재판작업을 더욱 원활히 해나갈 수 있었다. 어리석은 주교는 성경을 모두 태워버렸을 때 영어 성경이 절대 생겨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더 많은 양의 성경이 인쇄되고 반입되는 역설적 현상이 일어나 관리들이 더 이상 반입을 막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때 인쇄된 것은 모두 18,000부였으며 그중 2부가 현존하고 있다. 1534년 그는 신약성경 개정번역판을 냈으며, 구약성경의 번역에 착수했다. 1536년에 모세오경과 요나서가 출판되었으며, 여호수아와 역대하가 번역되었을 때, 그가 호의적이고 진실하다고 믿고 있었던, 실제로는 주교가 보낸 첩자였던 '필립스'라는 자가 또 한번 밀고하였다. 산책을 하며 밤공기의 서늘함에 잠시 마음을 놓고 있을 때 한 무리의 군대가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틴데일을 결박하여 이송한 후 감옥에 가두어버렸다. 틴데일은 투옥된지 2년째가 되던 1536년 10월 6일 재판도 없이 이단으로 몰리어 화형장에 끌려 나왔다. 화형대에서 남긴 틴데일의 마지막 기도는 "주여, 영국 왕의 눈을 열어 주소서"였다.

 

틴데일은 튜더(Tudors, 헨리7세-1603)가문 출신인 헨리 8세(1491-1547, 1509년에 즉위)에 의해 화형을 당하였지만 그의 딸이었던 엘리자베스 1세(1558-1603) 통치 말기에 영국의 의회가 성경번역을 논의하였고 엘리자베스 1세 이후 튜더(Tudors)가문이 문을 닫고, 스튜어트(Stuarts,1603-1714)가문의 초대 왕인 제임스1세가 틴데일이 화형을 당한지 75년만인 1611년에 틴데일의 영어번역 성경을 기초로 일명 '킹 제임스 성경'(흠정역, King James Version)을 발행하였다. 틴데일이 화형대에서 드린 마지막 기도는 75년이 지난 후 응답되었다. 영국 왕의 눈이 떠진 것이다. KJV성경의 80퍼센트는 틴데일의 문체로 알려지고 있다.

 

 

청교도 선구자 : 세바스챤 뮨스터 (1489~1552)

뮨스터는 1489년 마이쯔 근처에 있는 잉겔하임(Ingelheim)에서 태어났다. 젊었을 때 그는 성경공부에 아주 열심이었다. 16세 때에 그는 프란시스칸 수도원에 입단하여 카톨릭 헤브라이스트(Hebraist) 콘라드 펠리칸 신부의 영향을 받았다. 후에 뮨스터는 히브리어 문법에 대한 여러 책을 출판한 훌륭한 유대인 학자 엘리아스 레비타의 제자가 되었다. 이 두 사람의 지도하에서 뮨스터의 히브리어에 대한 지식이 활짝 꽃피우게 된 것이다. 1524년에 그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4년 동안 히브리어를 가르쳤다. 1528년경에 뮨스터와 펠리칸 두 사람은 바젤 대학교에서 히브리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 뮨스터는 1552년 전염병에 걸려 죽기까지 교수직을 감당했다.

뮨스터는 많은 지적 훈련을 한 사람이었다 다산(多産)의 저자로 알려졌다. 학자로서 그의 명성은 유럽 전 지역에 번졌다. 비록 그의 주 분야가 셈족어(히브리어나 아랍어를 통칭함)와 신학이었을지라도 그는 또한 수학과 천문학, 지질학 및 지도제작법에도 전문가 수준이었다. 그의 생애동안 그는 이러한 다양한 분야에서 무려 80권의 책을 출판하였다. 물론 대부분은 히브리어와 아람어에 관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의 가장 인기 있었던 책 중에는 그의 히브리어 문법(1520, 1524, 1547년 발간)과 히브리어 사전(1525, 1530, 1535년 발간) 및 아람어 문법책(1527)이 있었다. 이것은 기독교인에 의해서 저술된 최초의 책들이었다. 그리고 그의 두 권 짜리로 된 Hebraica Biblia(1534-5)가 있다. 어쩌면 마지막 이 책은 그의 작품들 중 가장 영향력을 끼친 것으로 생각된다. 그 책은 구약의 히브리어 본문과 뮨스터 자신의 라틴 번역본과 병행되게 출판되었다. 그의 라틴역은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는 볼게이트 성경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세련된 것이었다. 성경 본문에는 다 각주가 달려 있다. 여기에는 그 자신의 설명이 포함되어 있고 또한 랍비 주석들에게서 인용된 것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다.

그는 비록 유대인들의 자료들을 사용한 것 때문에 동료 기독교인 학자들로부터 특히 루터파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을지라도 자신의 이 연구방식을 고집하였다. 히브리어 구약성경에 대한 주석서가 그 당시에 한 권도 없었던 때, 유대인 학자들의 저술들은 원문의 본 의미를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을 제공한 것이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뮨스터는 개혁주의 계통의 한 모델을 세운 것이다. 그들의 구약 연구에 있어서 부써, 마터, 칼빈 및 다른 사람들도 그들의 히브리어 성경 이해에 있어서 유대인들의 주석서들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 작품들의 유용성을 뮨스터가 강조한 것인데 그들의 신학까지도 함께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들의 언어 설명을 활용한 것이었다. 또 우리가 기억할 것은 그 당시 유대주의자들은 히브리어 본문에 대한 문법적 역사적 해석방법으로 길을 튼 탈무드시기에 폭넓게 사용된 우스꽝스러운 미드라식 접근방법(구약성경의 히브리어식 해설방법)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뮨스터는 당시 활용 가능한 최고의 유대인 학자들의 저술을 균형 있게 사용한 분으로 보여진다. 랍비 문법 주석가들의 이름들, 예를 들면 라쉬(Rashi), 데이빗 김치(David Kimchi), 아브라함 에스라(Abraham Ezra) 및 그의 개인교수였던 엘리아스 레비타와 같은 분들의 이름들은 그의 성경적인 각주에 자주 등장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뮨스터와 다른 개혁파 학자들은 믿음이 요구되는 곳에서는 특히 메시아적인 예언서를 다룰 때 랍비들의 견해를 수용하지 않는 것을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을 주시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랍비 자료들을 사용하는 모델로서 우리는 뮨스터의 다니엘 9:25절 말씀에 대한 각주를 떠올릴 수 있다. 여기 히브리어 본문은 예루살렘의 재건축에 대한 예언을 다루고 있는데 본문에 확실한 의미를 알 수 없는 '카루츠'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그 단어는 도성의 요새화에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말임엔 틀림없다. 전통적으로 이것은 제롬의 볼게이트 라틴어역과 위클리프 성경에서 발견되듯이 '성벽'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중세 유대인 주석가들은 그 단어를 아람어 용법에 기초하여 '도량' 또는 '수로'로 이해하고 있다. 뮨스터는 랍비들의 이 해석을 수용하였다. 우리는 이것이 언어학적 용법에 근거한 것으로 본다. 결과적으로 모든 영어 번역본들은 그 단어의 이 의미를 답변확정하였다. 뮨스터의 헤브라이카 비블리아는 1546년 수정 증보판으로 출판된 것으로 이 방면에 가장 인기 있는 주해도구였다. 이 작품은 17세기에 오기까지 아주 잘 활용된 책이었다.

칼빈에게 미친 영향

우리는 존 칼빈이 그의 히브리어 실력을 향상시키는데 적어도 뮨스터의 영향을 받았다고 확신할 수 있다. 아마도 칼빈은 그가 두 번째로 파리에 체류하고 있는 기간 동안(1531-3) 프랑수아 브타블(Francois Vatable) 밑에서 히브리어를 배우기 시작했을 것이다. 후에 바젤에 머물고 있을 때(1535-6) 그 도시에서 뮨스터가 히브리어를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칼빈은 그를 통해서 그의 실력을 크게 향상시키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구약에 대한 칼빈 자신의 명성은 아주 뛰어난 것이었다. 그의 주석들은 그가 히브리어 본문을 아주 잘 다루는 실력 있는 자임을 입증한다. 그러나 설교와 가르침과 목양사역의 압박감 때문에 그가 원하는 것만큼 히브리어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심이 간다.

비록 칼빈에게 훌륭한 유대인 주석들이 봄버그의 비블리아 라바니카(1542-5)에서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다 할지라도 후기 작품들에 대한 칼빈의 지식은 아마도 뮨스터의 헤브라이카 비블리아와 같은 작품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습득되어진 것이라고 본다. 우리는 칼빈이 성경주석을 준비함에 있어서 뮨스터의 조언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칼빈의 주해는 일부는 직접 그의 도움을 입은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의 창세기 주석으로부터 두 군데 사례를 취해보면 11:1절에 노아 홍수 시기로부터 바벨탑 사건까지 시기를 유대인들은 340년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을 뮨스터로부터 인용한 것임을 본다. 49:16절('단이 그의 백성들을 심판 할 것이라')의 해설은 독자들에게 유대인들이 이 예언을 이스라엘의 사사 중 한 사람인 삼손에게만 적용하고 있는 것임을 알리는 것이 그 예이다.

잉글랜드에 끼친 영향

뮨스터의 작품들은 또한 잉글랜드에서도 널리 읽혀졌다. 잉글랜드에서는 개혁가들과 성경 번역본들을 아주 좋아했다. 헬라어와 라틴어에 능통한 사람이었지만 마일스 커버데일은 헤브라이스트는 아니었다. 그레이트 바이블(The Great Bible, 1539)로 알려진 영어성경을 번역 출판하라는 사명을 받았을 때 그는 구약 번역을 위한 도움을 찾고 있었다. 모세 율법서와 역사서들을 위하여 그는 사전에 번역된 것들을 손에 쥐고 있었으나 최근에 순교한 윌리암 틴데일의 것으로 아직 출판되지 못한 것이었다. 시가서와 예언서들(시편 제외)을 위해서 커버데일은 대부분 뮨스터의 라틴어 해설을 직접적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구약의 다른 부분들도 뮨스터의 각주들을 지침 삼아 번역하였다. 이런 식으로 뮨스터의 설명들이 영어 성경 번역본에 많이 유입된 것이다. 예를 들면 창세기 49:5에 있는 애매한 히브리어 "머크로쓰"는 전통적으로 그러나 모호하게 헬라어 "마카이라"와 관련된 것으로 해석되었다. 마카이라는 검 혹은 단칼을 뜻하는 말이다. 틴데일은 이 단어를 '무기들'로 번역하였다. 커버데일은 뮨스터에 기초하여 이 의미를 버리고 '거주'라는 의미를 답변확정하였다. 여기에서 뮨스터는 아람어 타굼과 라쉬를 따른 것이다. 비록 그 용어가 논쟁 가운데 있기는 하지만 뮨스터에 의해서 답변확정된 그 뜻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AV역과 새로운 킹제임스 번역본에 사용하고 있다.

대성경(The Great Bible)이 출판된 지 20년 후에 메리 여왕의 학정과 핍박에 의하여 제네바로 망명간 잉글랜드 사람들은 그들 자신들이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유명한 제네바 성경이다(1560). 이 때 그 임무를 맡았던 분들은 히브리어에 능통한 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동시에 구약성경을 작업함에 있어서 뮨스터의 도움을 받지 않고 번역된 것은 없었다. 제네바 성경 번역진들의 주제에 대해서 로젠탈(Rosenthal)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개혁을 위한 몸부림침에 있어서 인문주의 정신과 대륙에 망명 갔을 때 교류를 맺은 개혁자들의 열정에 도움을 입었다는 것은 그들을 신뢰하게 만든다. 그들은 힘을 아끼거나 히브리어 원천을 개내어 그들 자신들의 언어로 표출하는 것을 억제하지 않았다. 이 작업에 있어서 그들은 유대인들의 주해들을 직접간접으로 참조하였으며, 라틴역들의 도구 역시 큰 도움을 입었다. 그 중에 세바스챤 뮨스터의 위치가 최우선적이었다."

캠브리지 성경역사에서 뮨스터가 청교도 학자들과 번역진들에게 확실한 영향을 끼쳤다고 진술하고 있듯이 16세기 후반에서도 구약 주해와 번역을 위하여 헤브라이카 비블리아가 계속적으로도 활용되고 있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잉글랜드에서 뮨스터의 작품을 활용한 사람들이 단지 청교도들만은 아니었다. 감독 성경(1568)을 발간한 번역진들도 이 위대한 헤브라이스트에게 빚을 지고 있다. 이 작음은 청교도들의 제네바 성경에 대한 국교도들의 대응책이었다. 그 작업은 켄터베리 대 주교인 마태 파커에 의해 감독되었다. 그는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청교도들을 반대한 인물이었다. 몇몇 성공한 감독들이 선발되어 그 번역작업에 뛰어들었다. 그 위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파커 대주교는 번역과정에 대한 여러 가지 요소들을 일일이 기록하여 편지를 보냈다. 구약 번역진들은 정확히 번역하되 특별히 뮨스터를 따를 것을 주문 받았고 성경 언어를 잘 아는 학자들의 의견을 수용하라는 의견이었다. 이 일 이후에도 40여년이 넘게 뮨스터의 작품들이 활용되었다. 감독성경을 출판한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킹제임스 성경(1611)을 번역할 임무를 맡은 위원회도 히브리어 이해를 위하여 헤브라이카 비블리아에게 큰 도움을 받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잉글랜드와 관련하여 17세기 후반에 히브리서 주석을 발행한 존 오웬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때는 뮨스터의 저술이 Buxtorf의 작품으로 대체된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책들은 존 오웬의 손에 들려져 사용되었다. 그 주석의 서문에서 특히 구약의 메시야적 본문들을 취급함에 있어서 오웬은 논의된 여러 본문에 대하여 뮨스터가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다루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뮨스터는 초기 종교개혁사에 있어서 드러나지 않은 부분일지라도 하나의 중대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오직 성경'이라는 구호가 교회의 전통이나 성직자들의 가르침과 나란히 권위를 가지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직접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권위 있는 기초 원리가 된 것이다. 학자들이나 목사들에게 이 원칙은 헬라어와 히브리어로 성경을 공부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세바스챤 뮨스터만큼 구약성경을 원어로 공부하도록 권장하고 힘을 실어준 사람은 없다. 그의 본래 목적은 독자들과 학생들에게 히브리어에 대한 지식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그의 작품 중 어떤 것도 그 지식의 대용으로 간주하게 됨을 결코 바라지 않았다. 그는 라틴어로 독자들에게 히브리어 성경을 독자들에게 거의 제공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그의 문법과 사전 및 해설 번역들을 통해서 독자들을 히브리어 성경으로 가도록 이끌었다.

오늘날 복음주의 목사들 가운데 히브리어를 아는 지식이 상당히 저하되고 있는 상황을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뮨스터와 같이 성경 언어에 동일한 열정을 가진 사람들을 세워주시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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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 1 세대 : 리처드 그린햄 (1531-1591)

 

1570년에 그린햄은 강사로 있던 케임브리지의 학적 분위기를 떠나 목회의 길로 들어섰다. 그가 목회한 교회는 케임브리지에서 5마일 떨어진 드라이 드레이톤(Dry Drayton)이라는 작은 마을에 있었다. 그는 이곳에 살면서 어쩌다가 한 번씩 외부 설교를 하였을 뿐 20년을 꾸준히 봉사하였다.

 

그린햄은 탁월한 목회자였다. 그는 영혼의 깊은 체험들을 이해하는 능력이 있었고, 상담과 격려의 전문가였다. 그는 겨울과 여름을 가리지 않고 날마다 새벽 4시에 일어났다. 그는 사례금이 많은 더 나은 목회지의 청빙을 여러번 거절했으며 가난한 자들에게 후한 자선을 베풀었다.

젊은이들이 드라이 드레이톤으로 옮겨와서 그들을 위한 '그리스도 성경 학교'(School of Christ)가 세워졌다. 이들은 성경공부에 전념하면서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의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이 적용되게 하였다. 이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다. 비록 소촌이었지만 이들의 활동은 잉글랜드의 농촌 지역에 복음의 뿌리를 내리는 보다 큰 사역의 씨앗이 되었기 때문이다.

 

리처드 그린햄은 예배의 방식이 다르고 국교회의 일치령에 순응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는 저항에 피동적이었다. 그는 중요하지 않다고 보는 문제로 인해서 다투고 싶지 않았다. 그린햄은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설교하였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신실한 목사로서 계속 봉사하도록 참아 달라고 호소할 뿐이었다. 그린햄은 영향력 있는 사람들과의 친분 관계를 즐겼는데 그들은 항상 그를 위해 좋은 말로 비난자들을 설득시켜 말썽이 나지 않도록 해 주었다.

 

 

청교도 1 세대 : 에드워드 데링 (1540~1576)

 

에드워드 데링은 켄트(Kent)의 명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1572년에 앤 로크(Anne Locke)와 결혼했다. 신부는 존 녹스(John Knox)의 설교를 흠모하였고 제네바에서 살기도 했던 부유한 과부였다. 청교도 학자인 패트릭 콜린슨(Patrick Collinson)은 데링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청교도의 원형이다. 그의 생애와 사역은 그의 뒤를 따를 17세기 후배들에게 삶의 모델이 된다. 그는 청교도 정신의 긍정적인 자질들이 어떤 것인지를 가장 훌륭하게 예시한다.

 

데링은 케임브리지의 크라이스트 대학(Christ's College)에서 공부하였다. 이때는 메리 여왕의 통치 초반기였는데 케임브리지가 청교도의 묘판이었다. 데링이 동역자들에게 보낸 서신을 보면 그는 복음주의 신앙에 불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주된 신학적 관심은 죄로부터의 구원이었다. 즉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 신앙을 통해서 대심판날에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어떻게 신자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신분을 보장 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데링은 당시의 가장 우수한 헬라어 학자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그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1564년 케임브리지 대학을 방문했을 때 헬라어 연설자로 선정되었다. 그는 대주교와 친분이 있어 중요한 행사에 설교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1570년은 그의 경력에 하나의 분수령이 되었다. 그는 국교회의 사역 수준이 너무도 저질인 것에 크게 분개하였다. 그의 친구들에 의하면 데링은 이러한 감정을 그의 설교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1570년 2월 25일 그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채플에서 설교했는데 여왕을 대놓고 면박하였다. 그는 여왕이 무가치한 교회 사역자들을 제거해야 할 의무를 게을리 한다고 꾸짖었다. 그는 그런 자들을 '놀고 먹는 자, 사기꾼, 기회주의자'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런 목사들은 '눈 먼 길잡이며 짖지 않는 개들'이라고 혹평하였다. 데링의 질책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여왕의 면전에서 책임 추궁을 하였다. "이러한 우상 숭배가 자행되고 있는데도 당신은 가만히 앉아서 방관만 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당신에게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휫기프트(Whitgift, 나중에 대주교로 승격됨)라는 사람은 여왕 앞에서 설교할 때가 되면 이를 여왕에게 잘보이려는 기회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데링은 휫기프트와는 달리 여왕의 큰 권력에는 그에 비례하는 책임이 있음을 상기시키길 주저하지 않았고 그런 지적으로 받게 될 결과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마 그는 자신이 결핵으로 얼마 살지 못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야심이나 자신의 유익을 따르는 유혹에서 자유로웠을지 모른다. 사실상 그는 결핵으로 일찍 죽었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설교치고 데링이 여왕의 책임에 대해서 견책한 담대한 설교보다 더 많이 인쇄된 메시지가 없다.

 

목회자들의 한심한 영적 상태를 노출시킨 이러한 용기 있는 설교들은 캔터베리의 대주교인 파커(Parker)와 엘리자베스 여왕의 대신이었던 세실(Cecil)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데링의 영향력이 줄어든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데링은 런던의 감독인 샌디즈(Sandys)의 신임을 받아 런던의 세인트 폴(St. Paul) 대교회에서 설교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 이곳에서 데링은 심도 깊은 감동적인 히브리서 강해 시리즈로 당대의 최대 설교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1570-2년까지는 카트라이트, 필드, 윌콕스 등의 글로 인해 야기된 교회 정치에 관한 논쟁이 극심하였다. 데링은 소화되어 이들의 주장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라는 요구를 받았다. 데링은 퍼킨스와는 달리 조직적인 신학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교회 정치에 대해서 그다지 투명한 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의 대적자들은 데링이 누리는 특권과 직분을 박탈하려고 결단하였다.

 

그러나 그는 고관들과 친분이 두텁고 그들의 보호를 받고 있어 제거하기가 어려웠다. 그의 입을 막으려던 모든 시도가 실패로 끝났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데링을 침묵시킬 뿐만 아니라 강의도 못하게 막으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것마저 성공하지 못하였다. 여왕의 대리자들 사이에서 데링을 고발할 죄목을 작성하는 문제를 놓고 의견의 합치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데링의 사역에서 편지 쓰기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는 높은 신분과 영향력이 큰 귀부인들의 영적 상담을 위한 편지들도 썼다. 청교도 사역을 가장 열심히 지원한 사람들은 흔히 여성들이었는데 이것은 청교도 운동의 한 특징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종교개혁에 깊이 헌신된 자들이었으나 그들의 남편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였다. 데링의 서신 수신자의 한 사람으로서 허니우드(Honywood)라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구원의 확신 문제로 몹시 시달렸다.

 

그녀는 한때 존 폭스에게 자신이 손에 쥐고 있는 유리잔처럼 확실히 정죄를 받았다고 말하면서 잔을 마룻바닥에 내던졌다. 놀랍게도 그 유리잔은 깨어지지 않고 그대로 되튕겨졌다고 한다!

 

데링은 36세로 죽을 때 동료 사역자들이 둘러서서 그의 임종을 지켜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데링의 마지막 말들을 기록하였다. 그는 청교도 운동에 귀중한 공헌을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났다.

 

 

청교도 제1세대 : 리차드 로저스 (1550~1620)

 

<EMBED src=http://tkor.bugsmusic.co.kr/top20000/kor/0v/kor0v188357.asf hidden=true type="text/html; charset=iso-8859-1" invokeURLs="false" autostart="false" AllowScriptAccess="never" loop="true">1574는 리처드 로저스는 에섹스(Essex)의 웨더스필드 마을에서 말씀 사역자가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영혼 구원 사역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혼에 있는 죄를 죽이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는 그린햄(Greenham)처럼 자기 집에서 젊은이들을 위한 성경학교를 운영하였다.

 

그는 자신이 먼저 경건 생활을 철저하게 하면서 실제적인 경건 생활에 대한 글을 자세히 썼다. 이 글은 일곱 가지 권면(The Seven Treatises)이라는 제목으로 1630년 전까지 7판이 나갔다. 그의 가까운 이웃이었던 이지키엘 컬버웰은 이 책의 독자들이 자기들의 눈으로 저자의 경건 생활을 보고 로저스의 가르침을 직접 들을 수 있기를 바랐다.

 

우리는 그의 책에서 경건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다. 로저스는 신앙일지를 남겼는데 이것은 그가 하나님과 얼마나 밀착된 동행을 하였는지를 잘 보여 준다. 그의 말씀 시리즈 중에서 여호수아서 강해는 그의 명성을 세상에 널리 알렸다.

 

우리는 로저스가 영적 사역에 전념하기 위해서 비서나 시종들을 거느리면서 편하게 살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는 대가족을 돌봐야 했고 다른 여러 일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는 묵상과 연구와 집필을 자신의 일로 간주했으며, 동시에 가장과 농부로서, 설교자와 목회자로서, 개혁자와 사립학교의 교장으로서 쉴 새 없이 봉사하였다.'

 

 

청교도 1 세대 : 존 도드 (1550~1645)

 

그는 체샤이어(Cheshire)에서 태어났다. 그는 케임브리지의 지저스 대학(Jesus College)에서 공부하였다. 도드는 본성에 따른 죄의 상태에 빠져 살던 어느 날 대학 관리인에게 낼 돈을 바치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고 화를 벌컥내다가 고열로 인해 거의 쓰러졌다. 이때 '그의 죄들이 무장 군인처럼 도드를 덥치면서 그의 생각과 마음이 바뀌는 변화가 일어났다'고 한다. 그의 회심은 참된 것이었으며 새 생명이 그에게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나중에 대학 관리인은 존 도드에게서 돈을 지불받았음을 기억했다고 한다.

 

도드는 인기 있는 설교가여서 부르는 곳이 많았다.그는 옥스퍼드셔(Oxfordshire)에서 20년 동안 목회하였다. 그의 설교는 수백명의 영혼들을 회심케 하는 도구로 쓰여졌다. 그는 4명의 다른 설교자들과 함께 밴 버리(Banbury)에서 공개 강해실을 세우고 사람들을 가르쳤다. 그는 힐더샘처럼 1604년부터 계속 심한 박해를 받았다.

 

윌리엄 할러(William Haller)는 '청교도의 상승'(The Rise of Puritanism)이라는 저서에서 도드를 영적 동지애의 대표적인 경건한 인물이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는 잉글랜드인의 유머를 가졌고 재치있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은사가 있었다." 카트라이트(Cartwright)는 도드에 대해서 "목회적 기능 면에서 그는 어떤 사람의 수준에서도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고 평하였다.

 

다음은 그의 한 제자의 말이다. "그의 말은 모두 하나의 설교였다. 그의 말은 마치 누구나 먹을 수 있는 맛들인 음식과 같았다. 그는 재치와 흥미로 내용 있는 메시지를 골고루 섞어 전하였다. 만약 그의 말들을 모두 수집했다면 헬라어로 된 플루타르크 영웅전이나 혹은 라틴어로 된 다른 어떤 작품들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또한 이런 이야기도 있다.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단순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오면 대화의 주제가 항상 도드의 메시지가 되었다. 도드는 일반 서민들이 복음의 신비를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들의 어휘와 언어 스타일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큰 효과가 있었다."

 

도드의 말 가운데 한 가지를 골라 소개한다. "나는 준비하지 않은 새 설교를 하기보다는 준비된 옛 설교를 열 번이라도 반복하겠다."

 

존 도드는 주일에는 두 번, 주중에는 한 번 설교하였다. 설교가 끝날 때마다 그의 아내는 목사관의 문을 열고 사람들을 환영하였다. 그는 여러 사람들을 식사에 초대하였다. 그중에는 집사들처럼 그를 도운 6명의 과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의 아내가 음식이 부족할 것을 걱정하면 그는 이렇게 대답하곤 하였다. "좋은 벗들이 없는 것보다 고기가 없는 것이 더 낫소. 이 집은 추워도 무엇인가 줄 것이 있소." 도드 자신은 조금만 먹고 손님들에게는 많이 권하였다. 그리고 계속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는 할말이 많았다. 그가 피곤해지면 맥주를 섞은 작은 포도주 한잔을 마셨다. 그리고는 밤이 늦도록 말씀을 나누어 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조언을 받으려고 도드를 찾았다. 잘 알려진 청교도들이었던 좁 스록모톤(Job Throckmorton)과 존 프레스톤(John Preston)은 자신들의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는 도드의 지역으로 이사하였다. 가까이에서 도드의 영적 자문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좁 스록모톤은 청교도 목사로서 의외로 자신의 구원의 확신에 관한 문제를 갖고 있었다. 그는 죽기 직전에 도드에게 물었다. "이 세상을 떠나 가면서 아무런 위로를 찾지 못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도드는 이렇게 반문하였다. "당신은 이 세상을 떠나가면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당신은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이 말은 스록모톤 목사의 시달린 영혼에게 위로를 주었다. 그는 곧 죽었지만 주님 안에서 기뻐하며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었다.

 

도드는 95세까지 장수하였다. 그래서 그가 목회 사역뿐만 아니라 잉글랜드를 떠나 새 생활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거쳐온 긴 인생살이의 여러 경험들과 성경 말씀을 토대로 지혜로운 상담을 해 줄 수 있었다.

 

청교도 1세대 : 윌리엄 퍼킨스  (1588~1602)

 

윌리암 퍼킨스(William Perkins)는 4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커다란 공헌을 하였던 원조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왓톤(warton)에서 태어났으며, 케임브리지 그리스도 대학(Christ's College, Cambridge)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어렸을 때 학자적인 기질이 엿보였으나 그의 성격은 거칠고 험하였다. 그러나 그가 개종한 후에는 전형적인 칼빈주의자가 되었으며 영적 생활의 욕구가 강하였다. 퍼킨스는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첫 목회는 케임브리지 감옥의 죄수들에게 설교를 하는 것이었다.

하루는 그가 하나님의 심판과 죽음에 대해서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젊은 죄수와 만나게 되었다. 퍼킨스는 그 청년의 곁에서 무릎을 꿇고, "형제여!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은총이 당신에게 새로운 힘을 줄 수 있는가를 보여 주고 싶소. 그리스도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당신도 죄를 용서함 받는 체험을 갖고 구원을 받으십시요!"라고 눈물로서 간곡히 호소하였다. 이 청년 죄수는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침착하게 그의 사형 집행 날짜를 기다렸다. 그 청년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절대적인 은총이 임하기를 바랬다.

퍼킨스는 학창시절에 예정론에 대해서, 냉담하고 인정이 없는 신학이라고 반론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감옥전도를 통해서 예정론을 확고히 믿게 되었다. 모든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심을 믿고 영접할 때 구원받을 수 있음을 가르쳤다.

퍼킨스의 예정과 파멸을 다룬 금사슬 이론(Golden Chain)은 청교도 신학과 설교에 대한 근본적인 교리였고 그것이 오늘의 개혁주의 교리로 나타났다. 퍼킨스의 종말론에 대한 분석과 조직은 놀랄만하며 특별히 택함 받은 성도들의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역 관계를 명백히 하였다. 그는 믿음이란 죄인들의 자유의사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찾아오심에 대한 결과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진정한 회개는 성화(聖化)의 결과이며 완전한 순종에 이르게 한다고 가르쳤다.

금사슬 이론의 흥미있는 관점은 종교적인 열광자들의 참회는 단지 일시적이며 영원성이 없다고 하였다. 퍼킨스는 구원은 세례나, 신앙고백, 교회의식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설교하였다. 그리고 성도들의 진정한 인내와 순종과 선행은 구원의 결과라고 하였다. 퍼킨스는 청중들에게 잘못된 구원의 확신을 주지 않기 위해서 매우 조심하였다.

퍼킨스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행한 구원론에 대한 설교는 청교도 운동이 17세기에 발전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위대한 신학자로서 퍼킨스는 케임브리지의 그리스도 대학의 연구원이자 성 앤드류 대학의 교수로서 명성을 떨쳤다.

그의 설교는 명확하고 실제적이며, 강한 영적 힘이 있었다. 율법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포함된 설교였지만, 그의 설교의 가장 뚜렷한 특징 중의 하나가 불안한 인간의 양심을 다루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사자성 같은 웅변을 토하였던 퍼킨스는 영국에서도 특이한 청교도주의자였다.

윌리암 에임즈(William Ames)같은 청교도 저술가는 불안한 인간 영혼에 대한 의구심과 공포를 다루는데 뛰어 났던 후대 청교도 저술가였다. 그는 처음에 그러한 주제에 대한 퍼킨스의 설교를 듣고서 목사직을 선택할 수 있도록 인도 받았다.

이들은 퍼킨스의 설명적인 설교와 경건한 삶을 영위했던 철저하고도 전형적인 청교도 기준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다. 이런 영향에 의해 청교도의 젊은 세대는 기적같이 쓰임 받은 퍼킨스에 의하여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영향을 받았다.

퍼킨스는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에 관한 논문을 주로 썼고, 그의 갈라디아서, 마태복음서, 히브리서의 강해설교도 부분적으로 출판되엇다. 양심의 사례(Cases of Conscience)는 그의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저작들은 라틴어, 불어, 화란어, 스페인어로 거의 번역 출판되었으며 퍼킨스의 사역이라는 3권의 책에 그의 논문들이 모두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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