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어떤 나라? ㅇㅅㅇ* 알려주세요>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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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4.08.19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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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숙제를 하려고 하는데요 ㅇ _ㅇ*

저도 지금 찾고 있지만

이게 더 빠를거 같아서요 ^ㅇ^

내공은 많이 없지만 그래도… ㅇ ㅅㅇ♡

영국에 대해서 조사해 주세요 >_



* 자연환경 (지형 및 기후)

* 역사

* 민족

* 언어

* 종교

* 자원과 산업

* 생활과 문화

* 관광 자원


이것들을 조사해 주세요 ^ㅇ^

그런데 주의 할점이 있답니다 >_

※ 막 퍼오지 마시구용 ㅇ_ ㅇ*

중1 수준에 맞게 알아들을수 있는 말만 가지고 와주세요 ^ㅇ^

번거로우시더라도 수고해주세요 ㅠ_ㅠ

꼭 해주세요 _♡

그렇다고 너무 쪼금 해주지 마시구요>_
성의를 보여주세요 ㅇ ㅅㅇ*

급해서 그러거든요 ㅠ 0ㅠ




히 - ♬

그럼 오늘도 좋은하루 되세요 >_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영국............
 
유럽 대륙 서쪽에 있는 섬나라.

위치--유럽 대륙 서쪽 북대서양

면적--24만 4101㎢

인구--5916만 4000명(2003)

인구밀도--242.4명/㎢(2003)

수도--런던

정체--입헌군주제

공용어--영어

통화--파운드

환율--1파운드 = 1.86$(2003.9)

1인당 국민총생산--2만 5120$(2003)


면적은 24만 4101㎢, 인구는 5916만 4000명(2003)이다. 인구밀도는 242.4명/㎢(2003)이다. 영국 연합왕국이라고도 한다. 정식명칭은 그레이트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이다. 영국을 흔히 잉글랜드(England)라고 하지만 잉글랜드는 그레이트브리튼의 일부이며, 그 밖에 웨일스와 스코틀랜드가 모여 그레이트브리튼을 형성한다.연합왕국의 유래는 엘리자베스 1세가 죽은 후 제임스 1세 치하에서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와 동군연합(同君聯合)을 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정식으로는 1801년의 합동법(合同法)에 따라 아일랜드가 그레이트브리튼과 연합왕국을 형성했을 때부터이다. 그후 1921년의 분리법(分離法)에 따라 에이레가 아일랜드 자유국이 되었을 때 북(北)아일랜드가 영국의 일부로 남음으로써 현재의 연합왕국이 생겼다.스코틀랜드에서는 잉글랜드와는 별개의 행정이 행하여지며, 구왕국시대의 수도 에든버러는 고유의 국립도서관·국립미술관·발권은행인 국립은행 등을 가지고 어느 정도 수도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점에서는 북아일랜드는 스코틀랜드만한 독자성이 없으나, 반대로 스코틀랜드가 고유의 의회를 가지지 못하고 런던의 상원(上院)에 16명, 하원에 71명의 대표를 보내는 데 비해서 북아일랜드는 수도 벨파스트에 별개의 의회를 가진다. 단지, 그 권한은 북아일랜드의 내부문제에 국한된다. 영국에는 제도로서의 국화(國花)는 없으나, 장미·엉겅퀴·클로버가 전통적으로 각각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민족적인 꽃으로 되어 있다. 국기인 유니온잭(Union Jack)은 1707년 잉글랜드·스코틀랜드가 정식으로 합동했을 때 흰 바탕에 붉은색으로 된 잉글랜드의 성(聖)조지 십자와 파란 바탕에 흰색으로 된 스코틀랜드의 성(聖)앤드루 십자가 합쳐졌으며, 아일랜드와의 합병 때 흰 바탕에 붉은색으로 된 아일랜드의 성(聖)패트릭 십자가 겹쳐져서 이루어진 것이다.국가(國歌) 《하느님, 국왕(여왕)을 지키소서  God Save the King(Queen)》는 16세기의 민요에서 비롯된다고 하는데, 1946년에 조지 6세가 가사를 부분적으로 수정한 다음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세계 최고(最古)의 국가이며, 그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 국가의 한 전형(典型)이 되어 있다. 영국연방(Commonwealth of Nations)은 일곱 바다에 군림한 대영제국(大英帝國)의 속령 중에서 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남아프리카공화국이 잇따라 자치권을 인정받았다가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26년의 영국의회 선언을 계기로, 영국국왕에 대한 충성의무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본국이 자치령과 대등한 지위에 선다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연합체를 구성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9년 인도가 대통령을 원수로 하는 공화국이 된 뒤에도 영국연방의 일원으로 남는 것이 인정되었으며, 그 후 파키스탄·가나·키프로스·나이지리아 등이 인도의 예를 따랐다. 또 그 후에도 식민지의 독립으로, 연방은 1991년 영국 본국을 포함하여 70개국이다. 1966년 노동당(勞動黨)의 윌슨 내각 때 식민지성(植民地省)이 폐지되었으며, 현재는 연방성(聯邦省)이 식민지행정을 겸하고 있다. 또 공화국 가맹제를 승인한 후로 영국 본국에 대한 충성 의무가 폐지되었으며, 연방의 성격은 원칙적으로 ‘평등한 제국(諸國)의 우호적 통합’으로 일변하였다. 연방제국과 본국 사이에 오랫동안 남아 있었던 주민 및 물자의 출입에 관한 특혜관세제도는 1973년 영국이 EC(유럽 공동체)에 가맹함으로써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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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 지형 ·지질

영국 제도(諸島)는 그레이트브리튼섬과 아일랜드섬을 중심으로 주위에 분포되어 있는 몇 개의 속도군(屬島群)을 포함하며, 유럽 대륙 북서쪽의 대륙붕에 위치한다. 영국 제도는 지질 및 구조상으로는 원래 유럽대륙의 일부를 이루는 것으로, 북서부의 스코틀랜드 고지(高地)와 웨일스의 중북부, 북아일랜드 등은 스칸디나비아와 이어진 산지이며, 고생대(古生代) 실루리아기(紀)·데번기(紀)에 대조산운동(大造山運動)을 일으킨 칼레도니아 산계의 일부에 해당한다.또 아일랜드의 남부, 웨일스의 남부, 콘월반도 등은 프랑스의 브르타뉴반도 및 오베르뉴고원과 동일한 계통이며, 고생대 말기의 2첩기(二疊紀)에 대조산운동을 일으킨 헤르시니아 산계의 일부에 해당한다. 이렇게 형성된 영국 제도는 플라이스토세(世)의 마지막 빙하기에는 대륙과 이어져 있었으며, 당시의 템스강(江)은 라인강의 한 지류로서 현재보다 훨씬 북쪽에서 북해(北海)로 흘러 들어갔다. 이와 같은 지질과 구조에 비하여 지형은 비교적 단순하며, 토지의 기복도 대체로 작아 최고봉인 벤네비스산(山)도 1,343m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영국의 지형은 가파르지 않은 산지와 고지로 된 ‘고지(高地) 영국’과 완만한 기복을 그리는 ‘저지(低地) 영국’으로 대별되며, 그 경계는 동해안의 미들즈브러 부근에서 남해안의 엑서터까지 그은 선과 거의 일치한다. 고지 영국이란 이 선의 북쪽 또는 북서쪽 부분으로 스코틀랜드의 고지·페나인산맥·레이크지방·웨일스·콘월반도 등이 포함된다. 해발고도는 400∼900m로 편마암·결정편암·사암·석회암·화강암 등의 단단한 암석으로 되어 있으며, 콘월반도를 제외하고 이들 산지에서는 양배암(羊背岩)·양군암(羊群岩)과 U자곡(字谷) 등 빙하의 침식작용으로 생긴 빙식지형(氷蝕地形)을 볼 수 있고, 또 스코틀랜드의 서해안에서는 깊은 피오르드가 발달해 있다. 이에 비하여 저지 영국은 영국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잉글랜드의 저지대를 말하며, 그 북서부에는 신적암(新赤岩)이라는 2첩기·3첩기의 사암과 점판암으로 된 평야가 전개되고, 북동부에는 두세 줄의 케스타가 있는 평야가 발달해 있다. 케스타란 암질에 따른 침식의 차이를 나타낸 지형으로, 석회암·사암 등과 같이 단단한 암석은 침식에 맞서 급사면을 이루며, 이암(泥岩)·점토층 등과 같이 무른 지층은 반대 쪽으로 완만한 사면을 형성한다. 고지 영국과 저지 영국의 경계 근처에는 영국 산업혁명의 모태가 된 석탄층이 널리 분포해 있다. 그 대부분은 고생대 석탄기에 생긴 역청탄이며, 주요탄전으로는 스코틀랜드 저지대의 래너크셔 탄전, 잉글랜드 북동 해안의 노섬벌랜드더럼탄전, 페나인산맥 동쪽 기슭의 요크셔 탄전, 노팅엄더비 탄전, 웨일스 남부의 남(南)웨일스 탄전 등이 있다. 영국의 주요 광물자원으로는 그밖에 철광석과 주석이 있다. 철광석은 요크셔의 클리블랜드 철광산을 비롯하여 페나인산맥의 가장자리와 웨일스 남부 등에 광상(鑛床)이 많으며 주석은 콘월반도에서 산출되는데, 현재는 부광(富鑛)이 적어지고 있다.





영국 : 기후

영국은 여름에 선선하고 겨울에 따뜻한 대륙 서해안의 해양성 기후의 전형이다. 이러한 기후는 주로 난류인 북대서양해류와 편서풍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며, 대륙 동해안에 비해 여름은 위도 20°가량 북쪽에, 겨울은 10°가량 남쪽에 위치하는 셈이 된다. 영국의 기상·기후를 결정하는 것은 아조레스섬 부근의 아조레스 고기압과 아이슬란드 부근의 아이슬란드 저기압 및 유럽 대륙에 중심을 가진 겨울의 고기압, 여름의 저기압 등이다.
영국 기후의 특징인 매우 변덕스러운 날씨는 이들 기압 변화에서 오는 것이며, 특히 아이슬란드 저기압에서 2차적으로 발생하는 이동성 저기압의 접근·통과에 따라 기상변화가 심하게 일어난다.  7월의 평균기온은 16.4℃로 스코틀랜드 서해안의 글래스고에서 15℃, 런던에서 17.6℃, 1월의 평균기온은 4.1℃로 글래스고 3.9℃, 런던 4.2℃로 연교차가 적으며, 매우 해양적이다. 단지 전체적으로는 이처럼 해양적이지만, 7월의 등온선이 동서로 뻗고 1월의 등온선이 남북으로 뻗는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장소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다.
영국의 북서부에서는 선선한 여름과 온화한 겨울, 북동부에서는 선선한 여름과 추운 겨울, 남서부에서는 더운 여름과 온화한 겨울, 남동부에서는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을 맞는다. 강수량의 분포에는 지형의 영향이 많다. 대서양에 면한 북부 및 서부 산지에서는 비가 많고, 동쪽 저지로 갈수록 비가 적어져 동서의 차이가 심하다. 비가 가장 많은 곳은 스코틀랜드 서해안으로 2,000∼4,700mm에 이르고, 그 남쪽의 페나인산맥이 1,500∼2,500mm, 웨일스 산지가 1,000∼1,500mm이며, 가장 적은 곳은 잉글랜드 동부로 600∼700mm이다. 전반적으로 비는 연중 고르게 내리지만 평균적으로 3월부터 6월까지가 가장 건조한 시기이고 9월부터 1월까지가 가장 많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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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 민족..언어..종교

영국에는 이미 구석기시대·신석기시대에 인류가 정착하여 살았는데, 현재의 영국인의 조상은 청동기시대에 켈트어(語)를 가져온 알프스계(系) 켈트인(人)과 5∼6세기 경에 게르만어를 가져온 게르만 여러족(族), 그리고 11∼12세기에 잉글랜드를 지배한 노르만인이다. 기원 전후의 로마인이 잉글랜드를 정복하였고, 또 10∼11세기에 북방의 데인인이 북동 해안에서 침입해 들어왔으나, 언어와 인종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로마인은 지배자일 뿐 원주민을 동화시키지 못하였고, 데인인은 앵글로색슨과 같은 계통이어서 스스로 간단히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켈트인은 브리튼인과 게일인으로 대별되는데, 브리튼인은 주로 잉글랜드에, 게일인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 거주하였다. 로마인은 가장 먼저 브리튼인과 접촉했기 때문에 이 나라를 브리타니아(Britania)라고 불렀다.
아일랜드어·스코틀랜드어·콘월어(Cornish)·웨일스어(Welsh) 등은 모두 켈트계 언어이다. 한편, 게르만인은 라인계 앵글·색슨인과 유틀란트계 주트인으로 대별되는데, 이들 민족은 알프스계 선주민인 브리튼인을 구축·제압하고, 그들과 혼혈하여 후일의 영국인의 인종적 기초를 이루었다. 영어에 독일어와 비슷한 단어와 어미변화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은 이러한 앵글로색슨어의 기원 때문이다.
또 아일랜드인·스코틀랜드인·웨일스인이 아직도 잉글랜드인에 대해 지니고 있는 선입관 또는 자립적 감정은 앵글로색슨인에 의한 지배의 역사와 인종적 기원의 차이 때문이다. 그리스도교(敎)는 로마인의 정복과 더불어 들어왔다가 앵글로색슨인의 승리와 함께 사라졌으며, 그후 6세기 말부터 새로이 앵글로색슨 사회에 도입되었다. 노르만에 의한 정복은 영국사회를 변화시키고, 인종과 언어에서도 많은 변동을 가져왔다.
잉글랜드를 지배한 국왕·귀족·기사 등의 노르만은 모국어인 프랑스어를 사용하였으나, 나중에 노르망디에서 이주해온 일반인은 영국에 상공업을 도입하고 시읍(市邑)을 형성·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차츰 앵글로색슨인과의 혼혈, 프랑스어와 앵글로색슨어의 융합을 가져왔다. 그리하여 앵글로색슨 사회는 영국사회로 바뀌고, 앵글로색슨인은 영국인으로, 앵글로색슨어는 영어로 바뀌어나갔다.
한편, 켈트계 언어는 영어의 보급과 함께 콘월어처럼 완전히 사멸하거나(18세기 말), 웨일스어처럼 보존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급속히 쇠퇴해가고 있다. 다만 아직도 웨일스 지방의 인구 중 19%는 웨일스어를 사용한다. 영국에서 독립한 후 아일랜드어를 공용어로 한 아일랜드도 다년간에 걸친 영국인의 지배 때문에 일상어로서는 영어를 사용한다. 종교는 성공회가 50%, 개신교가 30%, 가톨릭이 11%, 기타가 9%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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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역사

영국 : 선사시대

선사시대의 영국에 관해서는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다. 브리튼섬이 유럽 대륙과 이어져 있던 5만 년 전에 이미 혈거수렵(穴居狩獵)의 종족이 살았으나, 빙하의 확대와 함께 떠난 것으로 보인다. 영국해협의 함몰로 대륙과 떨어지고 난 뒤 갈리아 ·발트해 연안 등의 지방에서 새 종족이 건너왔으며, 이어 신석기시대에 이베리아인 등 비(非)아리안계 인종이 이주하여 수렵 ·목축과 원시적인 농경에 종사하였다. 그후 청동기시대부터 철기시대 초기에 걸쳐 대륙의 켈트 제족이 침입하여 선주민을 제압하고 정착하였으며, 북부에 거주한 게일인보다 남부에 거주한 브리튼인이 진보한 문화를 가졌다. 그들은 물고기와 짐승고기 외에 밀 ·보리 ·귀리 등을 먹었으며, 짐승가죽 외에 삼[麻]과 양모의 직물을 착용하였다. 또 다신교를 믿고, 소부족으로 갈라져 서로 독립해 있었으며, 딘 또는 둔이라고 하는 방벽을 만들어 생활하였다. 런던(London)이라는 지명은 소택지의 성을 뜻하는 켈트어 린딘(Lyndyn)에 기인하며, 나중에 로마인이 이를 라틴어로 론디니움(Londinium)이라고 말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로마인의 점령

영국 브리튼섬의 켈트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로마의 지배였다. 갈리아 지사(知事)로서 프랑스에 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 지방의 종족이 브리튼인의 지지를 받아 저항했기 때문에 BC 55년과 BC 54년에 두 차례에 걸쳐 이 섬을 원정하였다. 브리튼의 부족들은 연합하여 대항하였으나 카이사르는 이를 격파하고 템스강 주변의 일부를 제압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후 본국의 정치 때문에 3개월 만에 떠났으며, 로마인의 본격적인 공격은 약 1세기 후까지 연기되었다.제정시대(帝政時代)의 클라우디우스는 43년 원정군을 일으켰고, 80년대에는 로마 군대가 스코틀랜드까지 침공하였다. 그후 로마인은 타인 하구(河口)에서 솔웨이만(灣)까지 브리튼섬을 동서로 횡단하는 장성을 구축하였으며, 현재의 잉글랜드 전체에 해당하는 지역을 약 4세기 동안 지배하였고, 런던이 상공업의 중심이 되었다. 당시의 유적은 여러 군데에 있는데, 런던 등지에 남아 있는 성벽의 일부와 바스에서 발굴된 온천이 특히 유명하다.랭커스터 ·맨체스터 ·윈체스터 ·체스터 ·레스터 ·글로스터 ·우스터 등의 지명의 어미는 당시의 병영지(兵營地)를 나타내는 라틴어의 성(城:Castra)에서 유래한다. 당시 켈트인의 비극으로는 이케니 부족의 여왕 보아디케아의 반란과 참패의 비화가 유명하다.





앵글로색슨 영국

영국은 4세기 후반까지 픽트인 ·스코트인 등 북방계 켈트인의 침입과 함께 게르만인의 침입이 시작되어 로마인의 지배를 위협하기 시작하였는데, 그후에도 색슨 ·앵글 ·주트 등의 게르만인의 침입이 잇따랐으며 대륙에서의 게르만의 민족이동, 특히 고트인의 로마침입에 따라 5세기에 로마의 군대가 철수하자 로마의 지배는 완전히 끝났다. 침입한 게르만인은 원주민인 브리튼인과 싸웠으며, 6세기 말에는 현재의 잉글랜드에서 북부와 동부를 앵글인, 템스강 이남을 색슨인, 켄트주(州)와 와이트섬을 주트인이 차지하고, 켄트 ·에식스 ·서식스 ·이스트앵글리어 ·마시어 ·웨식스 ·노섬브리어의 7개 왕국을 건설하였다. 로마시대의 그리스도교는 게르만적 다신교(多神敎)에 의해 구축되었으나, 7왕국 시대에 성(聖)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다시 도입되었다.생활의 중심은 농촌으로 옮겨지고, 로마시대의 도시는 일부를 제외하고 폐기되었다. 주민은 장로 ·자유민 ·노예로 나뉘었고, 노예는 죄인 또는 채무불이행자였다. 장로의 권력은 큰 것이었으며, 국왕을 세워도 절대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후일의 마그나 카르타는 이 전통에 기인한다. 부족은 혈족공동체였으며, 가장을 중심으로 한 일종의 공산생활(共産生活)을 하였다. 사우샘프턴(Southampton) ·버밍엄(Birmingham) ·햄스테드(Hampstead) 등의 지명의 어미는 가족이 사는 곳을 의미하며, stead는 독일어의 Staad(도시), ham은 독일어의 Heim(집)과 어원이 같다. 7왕국은 약간의 성쇠를 거쳐 9세기 전반에는 웨식스왕 에그버트에 의해 통일되어 잉글랜드 왕국이 성립하였으며, 전 잉글랜드가 그 지배에 복종하게 되었다. 잉글랜드란 앵글인의 토지라는 의미이다. 8세기 말부터 시작된 북방 데인인의 침입은 9세기 중엽부터 규모를 더하였으며, 웨식스 지배하의 각 왕국 중 동쪽의 여러 나라는 데인인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러나 에그버트의 손자 앨프레드와의 사이에 강화가 성립되었으며, 그후 그의 아들 에드워드, 손자 에셀스탠은 각각 데인 지방까지 세력을 확대하여 전 잉글랜드를 통일하였다. 그러나 10세기 말부터 데인인은 조직적 ·국민적 침입을 시작하였으며, 11세기에는 웨식스왕 에셀레드 2세가 노르망디로 망명하고, 데인인 카누트왕이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노르만정복

영국의 카누트가 죽은 뒤 데인 왕조는 2대에 걸쳐 계속되었는데, 그후 에셀레드의 아들 에드워드 참회왕이 노르망디에서 돌아와 앵글로색슨 계통의 왕가가 부활하였다. 그러나 1066년 에드워드가 죽은 뒤 의동생 해럴드 2세가 왕위에 오르자 노르망디공(公) 기욤이 왕위계승권을 주장하여 진격해 왔으며,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군을 격파, 윌리엄 1세(정복왕)가 되었다. 이것이 영국사에서 말하는 노르만정복(Norman conquest)이다. 그는 대륙의 봉건제를 답변확정하였으며, 앵글로색슨인의 토지를 노르만 제후에게 봉지(封地)로서 나누어 주었다. 또 전 잉글랜드의 토지 ·인구 ·가옥 등을 기재한 둠즈데이북(Domesday Book)을 작성하여 왕실재정의 기초를 굳히고 중앙집권적 봉건제를 시작하였다.둠즈데이란 그리스도교의 최후의 심판날을 의미하는데 이 장부의 기재사항이 최종적 권위라는 뜻에서 그렇게 명명하였다고 한다. 후일 지주와 지배계급에 반항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봉건적 억압을 ‘노르만의 멍에’라 하여 저주하고, 옛날의 앵글로색슨 사회를 이상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윌리엄 1세는 교황 그레고리우스와 대립하여 교회에 대한 국왕의 관리권을 주장하고 주법정(州法廷)과 교회법정을 분리하는 등 왕권을 신장시켰다. 교회재판권을 둘러싼 헨리 2세와 대주교 토머스 베케트의 싸움, 또 후일의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한 영국국교회(英國國敎會) 확립의 연원(淵源)도 여기에 있다. 헨리 1세가 죽은 뒤 즉위한 조카 스티븐과 딸 앙주 백작부인 마틸다 사이에는 왕위계승권이 계속되었는데, 스티븐이 죽은 후에는 결국 마틸다의 아들 헨리 2세가 프랑스에서 와서 왕위에 올랐으며, 이에 플랜태저넷(앙주)왕조가 시작되었다. 그는 내란으로 세력을 회복한 제후(諸侯)를 누르고, 재판제도의 정비, 관료제와 용병제(傭兵制)의 확립 등으로 절대적 권력을 장악하였다.그러나 십자군으로 유명한 다음의 리처드 1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조카 존왕[失地王]은 헨리 2세 이래의 대륙 영토의 절반을 잃고 중세를 과하는 등 실정을 거듭했기 때문에 귀족들은 1215년에 러니미드에서 존왕에게 49개조로 된 마그나 카르타(Magna Charta:대헌장)에 서명하게 하고, 왕권을 제한하였다. 이 헌장은 봉건제후의 권력 확보를 목적으로 한 것이지만, 런던 이하의 자유시(自由市)의 특권을 인정하고 자유민의 생명 ·재산을 보호하는 조항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영국적 자유주의의 기원으로 여긴다. 그러나 그의 아들 헨리 3세도 남은 대륙령(大陸領)을 상실하고 실정이 많았기 때문에, 귀족들은 주대표(州代表) 몽포르를 지도자로 내세워 반항하였으며, 그 밖에 시민대표도 포함시킨 회의를 열었다. 이것이 영국의회의 기원이며, 3명의 에드워드왕 시대에 더욱 발전하였다. 특히 에드워드 3세 때 주와 도시의 대표가 왕에게 청원서를 내고 이를 귀족과 고위성직자가 심의하는 관행이 생겼으며, 상하 양원제의 기초가 만들어졌다. 한편 플랜태저넷 왕조에서 대륙령을 잃었기 때문에 왕권을 웨일스와 스코틀랜드를 지배하려고 했는데, 웨일스는 곧 잉글랜드령이 되었으나 스코틀랜드는 1313년에 에드워드 2세군(軍)을 대파하여 독립을 확보하였다.





왕위계승시대


프랑스에서는 샤를 4세가 죽은 뒤 카페 왕조가 발루아 왕조로 바뀌었는데, 이에 영국은 카페가(家)의 혈통을 가진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를 요구하면서 1337년 프랑스와의 전쟁을 개시하였다. 이것이 1453년까지 계속된 백년전쟁의 발단이며, 왕위계승전인 동시에 사실은 일찍이 상실한 앙주령(領)을 회복하고 최대의 양모시장인 플랑드르를 쟁탈하기 위한 전쟁이기도 하였다. 전반에는 영국군에 유리하게 전개되어, 한때는 프랑스령의 대부분을 점령하였으나, 헨리 6세 때 오를레앙 전투에서 패배한 후로는 계속 패배하여, 마침내 칼레 외의 모든 대륙령을 상실하고 전쟁은 끝났다. 백년전쟁의 2년 후에는 국내의 왕위계승권을 두고 1455년부터 30년간 내전이 계속되었다. 에드워드 3세의 셋째 아들의 아들인 랭커스터공(公)이 장남의 아들인 리처드 2세를 대신하여 즉위, 헨리 4세로서 랭커스터 왕조를 세운 이래로 그를 지지하는 랭커스터파와 에드워드 3세의 막내아들의 손자 요크공(公) 리처드를 옹립하는 요크파가 대립한 것이다. 이 전쟁은 양가의 문장(紋章)이 각각 붉은 장미와 흰 장미였기 때문에 장미전쟁이라 불렀다. 리처드가 전사한 후 요크파가 승리하자 헨리 6세는 망명하고, 에드워드 4세가 요크왕조를 열었다. 그의 아들 에드워드 5세 때, 왕이 어린 것을 틈타서 에드워드 4세의 동생 리처드가 왕과 그 동생을 런던탑에 가두고 왕위에 올라 리처드 3세가 되었는데, 랭커스터가의 유일한 왕위계승권자인 웨일스의 튜더가(家)의 헨리가 리처드 3세를 격파하여 헨리 7세가 되고, 튜더 왕조의 시조가 되었다. 그 동안, 노르만 때문에 앵글로색슨적 자유를 박탈당하고 농노화(農奴化)된 농민의 지위는 14세기에 들어서부터 차츰 향상되고, 농민의 계층문화가 진행되었다. 특히 1348∼49년의 흑사병은 인구의 1/4 이상을 죽이고, 남은 농민의 지위를 높였다. 영주계급(領主階級)은 농업노동력의 확보를 위해 억압을 강화하였으며, 이에 와트 타일러 등의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이 봉기는 실패했으나 농민의 감소로 부역의 폐지와 지대(地代)의 인하, 영주직영지(領主直營地)의 대출(貸出) 등이 부득이했으며, 장원(莊園)의 붕괴를 초래하였다. 한편, 14세기에 영국의 무역은 양모를 중심으로 발전하였으며, 머천트 스테이플러스가 일종의 상인 길드로서 무역독점권을 가지고 왕실재정의 한 기둥이 되었다. 그러나 곧 스테이플러스의 규제에서 벗어난 모험상인의 활약이 뚜렷해졌으며, 15세기에 들어서자 모험상인회사가 등장하여, 모직물 무역의 독점권을 가지게 되었다.


절대왕정에서 시민혁명으로

영국에서 장미전쟁으로 귀족세력이 쇠퇴하자 헨리 7세는 귀족이 가신단(家臣團)을 거느리는 권리와 재판권을 박탈하고, 향신(鄕紳)과 시민을 추밀원(樞密院)에 기용하였으며, 해운법을 제정하여 상인을 규제하고 왕실재정을 단단히 하는 등 절대주의 정권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이어 헨리 8세는 왕비 캐서린과의 이혼문제를 계기로 1534년 수장령(首長令)을 내리고 직접 교회의 수장이 되었으며, 이에 복종하지 않는 수도원을 해산시키고 그 영지를 몰수하였다. 그가 처형한 대법관 토머스 모어의 작품 《유토피아》가 양모가격의 등귀(騰貴)에 따른 인클로저운동과 함께 이들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유명한 일이다. 헨리의 아들 에드워드 6세 밑에서 섭정(攝政)이 된 서머싯공(公)과 그의 실각 후의 워릭 백작은 카톨릭에 따르던 교지(敎旨) 내용마저 신교화함으로써 헨리의 사업을 철저히 하였다. 그러나 에드워드의 사후에 즉위한 누이 메리는 교황과 화해하여 카톨릭으로 돌아갔으며, 수장령(首長令)을 폐지하고 신교도를 박해하였다.

메리의 사후에 즉위한 여동생 엘리자베스 1세는 두 종파의 반목에서 오는 정정(政情)의 곤란성, 특히 몰수 수도원령을 차지한 신흥계급의 반감에 대처하기 위하여 에드워드 6세 시대의 정책을 부활시켰으며, 새로이 수장령과 통일령을 제정하고(1559) 신앙개조(信仰箇條)를 정비하여 영국국교회를 명실공히 확립하였다. 여왕은 가신단의 해체, 수도원령의 몰수, 인클로저운동 등으로 생긴 빈민대책으로서의 구빈법의 제정, 도제조례(徒弟條例)의 제정 등 국내정책을 충실히 하는 한편 식민사업도 추진하였으며, 러시아회사 ·레반트회사 ·동인도회사의 독점권을 설정하는 등 중상주의(重商主義) 정책을 밀어나가고, 에스파냐 함대를 격파하여 절대왕정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절대주의는 엘리자베스시대를 정점으로 하여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여왕은 독신으로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사후에는 스코틀랜드왕 제임스가 혈연에 따라 잉글랜드왕을 겸하여 제임스 1세가 되고 스튜어트 왕조가 시작되었다. 그는 1605년의 가이 포크스 등 카톨릭 교도의 화약음모사건을 계기로 카톨릭을 탄압하였으며, 엘리자베스시대부터 세력을 키워온 칼뱅파(派) 청교도도 박해하였다. 청교도가 많은 의회와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의 제임스의 대립은 뒤를 이은 찰스 1세 시대에 이르러 더욱 두드러졌다.

1628년 의회가 공채(公債)나 조세(租稅)는 의회의 찬성을 요한다는 것, 함부로 백성을 체포 ·투옥하지 못한다는 것 등을 주요내용으로 한 권리청원을 통과시키자 왕은 의회를 해산시켰다. 왕은 재원조달을 위해 1640년에 의회를 소집하였으나 선출된 청교도가 이를 반대하자 곧 해산해 버렸다. 이것이 단기의회이다. 같은 해에 소집된 장기의회에서는 왕과 의회의 반목이 더욱 격화되었으며, 1642년부터는 의회파와 왕당파 사이의 국내전쟁이 일어났다. 이 내전은 1647년에 이르러 의회군의 승리로 돌아갔으나, 청교도는 온건주의 장로파와 급진주의 독립파 및 평등파로 분열하였다. 왕은 스코틀랜드의 장로파와 결속하고 각지의 왕당파의 지지를 얻어 다시 국내전을 일으켰다. 그러나 제2차 내전은 독립파와 평등파의 승리로 끝나 1649년 찰스는 처형되고 올리버 크롬웰을 지도자로 하는 공화정부가 성립하였다.

이 청교도 혁명으로 상원은 폐지되고, 장로파와 토지배분을 요구하는 빈농·군인·직인 등 평등파도 탄압되었다. 크롬웰의 정부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 대한 원정, 해운법에 의한 네덜란드의 제해권에 대한 도전, 에스파냐 함대의 타파 등 대외정책에서는 성공하였으나, 대내적으로는 엄격한 종교정책과 군사독재로 국민의 불만이 커졌다. 그가 죽자 1660년 의회는 신교의 자유, 마그나 카르타와 권리청원의 존중을 브레다 선언에서 맹세한 선왕의 아들 찰스를 망명처 네덜란드에서 맞아들이고 왕정을 부활시켰다.

새 의회는 소수의 장로파와 다수의 왕당파로 이루어졌으며, 다수파는 국교도만이 국왕이 될 수 있다는 심사율(審査律)의 제정을 비롯하여 국교주의의 재건에 주력하였으나, 카톨릭으로 개종하고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밀약을 맺은 찰스 2세와의 대립이 표면화하였다. 이윽고 의회는 카톨릭 교도인 왕제(王弟) 제임스의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휘그와 토리의 두 파로 분열·항쟁하였는데, 찰스가 죽자 신왕 제임스 2세는 카톨릭주의와 절대주의 정치의 부활을 꾀하여 휘그뿐만 아니라 토리와도 적대하였다. 두 파는 협정하여 1688년 제임스의 딸 메리와 그 남편 윌리엄을 네덜란드에서 맞아들여 여왕과 왕으로 만들었다(메리 여왕과 윌리엄 3세). 제임스는 프랑스로 망명하였으며, 이에 이른바 의회 내 국왕을 원칙으로 하는 명예혁명이 성립하였다. 왕은 의회의 승인 없이 법의 정지 또는 면제, 금전의 징수, 상비군의 유지 등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요내용으로 한 권리장전(權利章典)이 이듬해 1689년에 의회를 통과하였으며, 그때부터 이는 마그나 카르타, 권리청원과 함께 영국헌법의 근간을 이루었다.



정치혁명에서 산업혁명으로

영국의 정치혁명의 시대는 끝나고, 윌리엄 3세는 제임스가 프랑스의 지원으로 복위(復位)를 꾀하자 1690년 네덜란드·독일·에스파냐와 협력하여 1697년의 강화 때까지 프랑스와 싸웠다. 전비조달 방법으로 1692년에는 국채제도가 시작되었으며, 1694년에는 잉글랜드은행이 설립되었다. 또 전비재원·화폐개주(貨幣改鑄)·무역차액·법정이자율 등의 문제를 두고 중상주의 논객들 사이에 활발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윌리엄 치세의 말기인 1702년부터 의매(義妹) 앤의 치세인 1714년까지의 에스파냐 계승전쟁의 결과 영국은 에스파냐와 프랑스로부터 뉴펀들랜드·노바스코샤·허드슨만(灣) 지방·지브롤터·미노르카 등을 획득하였으며, 절대왕정 이래의 식민지체제를 확대하여 국내 상공업자의 이익을 증진하였다.

또 그 동안 동군연합을 이루고 있었던 스코틀랜드와 합동하여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되었다. 윌리엄과 앤 시대에 휘그와 토리는 교대로 정권을 잡았으나, 앤이 죽은 뒤 독일의 하노버가(家)에서 즉위한 조지 1세와 그의 아들 조지 2세의 치세는 휘그의 전성기였으며, 특히 1721∼1742년의 월폴 정권과 1756∼1762년의 대(大)피트 정권은 그 대표이다. 월폴은 책임내각제를 확립하였으며, 토리와도 협조하여 남해포말회사(南海泡沫會社) 사건 후의 경제재건에 성공하였다.

피트는 7년전쟁에서 프랑스 식민지를 공격하였으며, 1763년의 강화로 캐나다, 미시시피 동쪽을 영유하는 영국 제국의 길을 열었다. 1760∼1820년의 조지 3세 재위기간에는 토리 정권이 계속되었는데, 이 시대는 산업혁명으로 영국 산업자본주의가 성립한 시기이기도 하다. 사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에 걸쳐 산업의 전분야가 일변하였다. J.하그리브스의 제니 방적기, R.아크라이트의 수력방적기, S.크롬프턴의 뮬 방적기, E.카트라이트의 역직기(力織機) 등이 잇따라 발명된 데다 J.와트의 개량 증기기관도 가세하여 면공업의 비약적 발전이 달성되었다. 또한 새 기술은 제철·채탄에도 파급하였고, 나중에는 철도부설에까지 이르렀다.

농촌에서도 제2차 인클로저운동, 비료개량, 탈곡기의 보급 등에 따라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그 동안 농촌의 탈곡기 파괴 운동과 도시의 방직기 파괴 운동 등이 있었으나, 이러한 반항도 자본주의의 진전을 막지 못하였다. 사회과학면에서도 J.벤담의 정치학, A.스미스, D.리카도의 경제학 등 자유주의 사상이 중상주의를 대신하여 새시대의 요청에 따랐다.

프랑스가 18세기 말의 정치혁명으로 기도한 사회를, 영국은 경제혁명에 의해 실현하였다고 할 수 있다. 1832년의 선거법 개정, 1846년의 곡물법 폐지, 1849년의 해운법 폐지 등은 모두 산업자본의 이익을 표현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산업자본의 발전은 노동자의 희생을 전제로 하였기 때문에 노동자의 단결도 불가피하였다. 1799년의 단결금지법, 1819년의 피털루사건 후에 있었던 6법 등의 탄압 입법도 시대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으며, 1837년의 공장법, 1847년의 10시간법 등 보호입법이 실현되었다. 노동조합의 결성도 진행되어 1834년에는 전국 노동조합대연합이 만들어졌다.

매년선거·비밀투표·보통선거 등의 요구를 내건 차티스트는 1830년대와 1840년대에 걸쳐 대청원운동(大請願運動)을 벌였는데 그 결과, 선거법은 1867년과 1884년의 개정을 거쳐 소시민과 노동자에게도 참정권을 부여하였다. 조지 3세 시대의 영국의 발전은 조지 4세, 윌리엄 4세 시대를 거쳐 1837~1901년에 이르는 빅토리아 여왕시대에 절정에 달하였다.

국내적으로는 글래드스턴의 자유당과 디즈레일리의 보수당 등 2대 정당간의 정권교체에 의한 전형적 의회정치가 행해지고, 선거법 개정과 1871년의 노동조합법 제정 외에 교육·군사·사법 제도의 개정 등 근대화 정책이 추진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 등 백인식민지의 자치령화를 실현시키면서도 한쪽에서는 인도를 식민지화하고, 아편전쟁과 애로호(號) 사건을 계기로 중국시장에도 진출하였으며, 기타 수에즈운하를 매입하고 이집트를 보호령화하는 등, 영국 제국주의를 발전시켰다


대영제국의 붕괴

영국의 제국주의적 발전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하였다. 독일과 미국 등 후진국의 세계시장 진출과 더불어 1873년에는 공황과 불황이 잇따라 일어났으며, 이에 따라 수출은 감퇴하고, 실업인구는 증대하였다. 또 숙련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직업별 노동조합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자 비숙련노동자의 조직과 사회주의운동이 고개를 들었다. 1884년에는 쇼와 웹 등의 페비언 협회, 모리스와 하이드맨 등의 사회민주연맹이 결성되었으며, 1893년에는 번즈와 하디 등의 독립노동당이 형성되었다.

1900년에는 노동조합과 사회주의 단체의 대표들에 의한 노동자선거위원회가 실현되어 1906년에 노동당이라 개칭되었으며, 그 해 선거에서 29명의 의원을 당선시켰다. 자유당 내각은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노동쟁의법 ·노인연금법 ·국민보험법 등의 사회정책 입법을 하였으며, 특히 1908년의 재무장관 로이드 조지의 예산안은 대토지 소유에 대한 중세(重稅)를 사회정책의 재원으로 삼았기 때문에 지배계급에 충격을 주었다. 이 법안은 하원을 통과한 후 상원에서 부결되었으며, 자유당 정부는 1911년 상원의 권한을 크게 제한하는 국회법을 성립시켰다.

독일의 확장정책으로 지위를 위협받은 영국은 프랑스·러시아와 손잡고 대항하였으나 1914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1917년 독일의 잠수함작전과 러시아혁명으로 인한 러시아의 연합국 이탈 때문에 영국은 한때 궁지에 몰렸으나, 참전한 미국과의 협력으로 1918년 독일에 승리했다. 그러나 이 전쟁으로 미국과 자치령 등의 지위가 향상되고, 상대적으로 영국의 지위가 저하되었다. 특히 1931년의 웨스트민스터 조례(條例)는 본국 의회의 입법이 자치령의 동의 없이는 자치령에 적용되지 않음을 승인하였으며, 이에 대영제국은 사실상 붕괴의 길을 걷게 되었다.

노동당은 전후의 불황을 배경으로 착실한 약진을 계속하였으며, 1922년의 선거에서는 142명의 당선자를 내어 보수 ·자유 양대 정당의 대립을 무너뜨렸다. 노동당은 1923년에는 191명의 의원을 확보, 1924년에는 처음으로 소수당이면서도 노동당 단독내각을 성립시켰다. 1926년에는 보수당 정부하의 노동자 총파업이 패배하여 총파업은 불법화되었으나, 1928년에는 여성참정권이 확대되어 남자와 대등한 정치적 권리가 실현되었다. 1929년에는 노동당이 제1당이 되어 제2차 노동당 내각이 탄생하였다.

1929년의 세계공황은 세계의 정세를 일변시켰다. 미국은 사회자본의 증가로 공황을 극복하였고, 영국은 연방제국과 경제블록을 결성하여 이를 타개하였다. 그러나 이 공황으로 독일 ·이탈리아·일본 등의 군국주의 경향이 두드러졌으며, 1930년대 독일에는 나치스 정권이 대두하여 또 다른 확장정책을 노골화하였다. 보수당 정부의 J.체임벌린 총리는 독일에 대한 융화정책을 계속하고 전쟁 회피에 주력하였으나, 1939년에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략하자 프랑스와 함께 대독(對獨)전쟁에 돌입하였다.

1940년에 영국은 처칠 총리의 거국일치 내각을 만들었으나 프랑스가 항복한 후의 전국은 갈수록 불리해졌다. 그러나 1941년의 독일·소련전(戰) 발발, 미국·일본 개전에 따른 미국의 참전으로 전황은 유리하게 돌아갔으며, 1943년에 이탈리아를 항복시키고, 1945년에 독일 ·일본을 항복시킴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 종결에 성공하였다. 노동당은 독일 항복 후의 선거에서 처음으로 절대다수의 의석을 얻었으며, 포츠담회담에서 처칠 대신 새 총리 애틀리가 참석하였다.

노동당 정부는 잉글랜드은행·민간항공·탄광·철도·철강업 등을 잇따라 국유화하고, 국민건강보험제도의 철저화로 복지국가정책을 취하였으나, 전쟁에 따른 경제적 곤란, 식민지의 연이은 독립, 미·소 양 블록의 긴장으로 인한 재군비 등 때문에 정권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으며, 1951년의 처칠 정부하에서 사회보장제도는 완화되고 국유화 정책도 역전되었다. 1955년 처칠이 은퇴하자 그 뒤를 이은 이든 정부는 이듬해의 수에즈 사건으로 국위를 더욱 손상시켰다.

이어 H.맥밀런, A.F.흄의 두 보수당 정부도 미국과 소련의 발전 때문에 영국의 국제지위 향상과 경제발전을 실현시킬 수 없었으며, 1964년에는 정권을 윌슨의 노동당 정부에 넘기고 말았다. 또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공동시장의 발전으로 영국은 유럽 내의 상대적 지위마저 저하되었다. 이러한 현실을 앞에 두고 영국에서는 노동당 정부에 이어 E.히스 보수당 정부도 EC 여러 나라와 가맹교섭을 속행하였으며, 마침내 영국연방 국가와의 관계, 농업보호문제, 국민감정 등 곤란한 문제를 남기면서도 EC 내의 한 나라로서의 활로를 찾았다.


자원과산업


산업


영국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었던 제조업은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만 서비스분야가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서비스분야는 1950년에 국내총생산(GDP)과 고용 구조면에서 50%를 차지하였으나 1996년 현재 GDP의 63%, 노동인구의 80%를 차지한다. 제조업의 비중은 1950년에 GDP의 1/3이었으나 1996년 약 1/5 이하로 내려갔다. 농업 및 임수산업 분야의 종사 인구는 1996년 현재 전체 인구의 약 1.4%이고 GDP의 1.7%를 차지한다

금융업

영국의 금융분야는 국내총생산(GDP)의 25%, 고용의 17%를 차지한다. 영국은 세계최대 외환거래시장으로 뉴욕의 18%보다 훨씬 많은 32%의 거래가 이루어지며, 외국주식 거래센터도 533개사나 있다(전세계의 65%). 또 국제채권발행의 54%, 채권거래의 65%를 점유하고 있다.

금융조직은 국립은행으로서의 잉글랜드은행을 중심으로, 주로 보통은행의 업무를 하는 예금은행, 저축업무 위주의 신탁저축은행 및 정부금융기관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밖에 세계 금융시장의 중심인 영국 고유의 할인업자와 인수업자(머천트 뱅크) 등의 기관이 있다. 잉글랜드은행은 원래 사적 은행으로서 설립되었다가 중앙은행으로서의 기능을 가졌으며, 1946년 국유화되었다. 그 업무는 중앙은행으로서의 업무이며, 은행권의 발행, 정부예금의 보관, 공채의 발행, 시중은행에 대한 예금·대부 업무, 공정이율의 조정과 공개시장 조작에 의한 금융정책 등이다. 예금은행은 예금 및 단기대부 업무를 주로 맡아본다.


광업..에너지

영국은 세계 제9위의 산유국으로 에너지 산업은 국내총생산(GDP)의 약 5%를 차지하며 국내 에너지 수요의 1/3 이상을 공급하고 있다. 석탄과 철이 영국산업의 발전의 주춧돌이었으나 근래는 에너지원의 전환과 자원의 노화로 그 역할이 경감되었다. 탄전은 동(東)미들랜드·요크셔·북동부 해안지역을 비롯하여 광범위하게 분포해 있으며, 전성기(1913)에는 2억 9000만t의 생산과 9500만t의 수출을 기록하였는데, 그후 차츰 쇠퇴하여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석탄 부족 사태마저 일어났다.

이에 따라 1946년에는 석탄업을 국유화하고 석탄청(石炭廳)을 만들어 합리화와 근대화에 힘쓴 결과 생산이 서서히 증가되었으나, 1950년대 후반부터 다시 에너지원 전환의 영향을 받아 폐광이 속출하고 생산이 감퇴하기 시작하였다. 1976년에는 연간생산량 1억 2000만t, 수출 144만t에 이르렀으나 1989년 생산은 9829만t에 지나지 않고 수요 충족을 위해 1만 3000t 정도를 수입하였다.

석탄업은 아직 소비량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전체 산업 중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한편, 철광석은 대부분이 동미들랜드와 링컨셔에서 생산된다. 석탄·철광석 외의 주요 광산물로는 석회암·점토·초크·화성암·암염(岩鹽)·납·주석 등이 있다. 석탄은 주로 발전에 사용되는데, 영국의 발전은 69.38%(1999)가 화력발전이지만 원자력공사의 원자력발전도 1999년에는 총발전량의 26.687%에 이르렀다. 원자력은 장기적인 측면의 에너지 수급에서 중요한 비중을 가지고 있다. 전력사업은 가스사업과 마찬가지로 국유화되어 있다. 1967년에 발견된 북해유전은 1975년부터 본격적 생산을 개시하였으며, 매장량은 약 30억t으로 추정된다.

제조업

영국 제조업은 전통적으로 영국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 되어 왔으며 현재도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만 전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50년대의 1/3 이상에서 1990년대에는 약 1/5 이하로 감소되었다. 제조업의 기초를 이루는 제철업은 웨일스와 요크셔의 험버강(江) 유역이 선철·조강에서 모두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다음이 북부 지역이다. 강철 생산량만으로는 스코틀랜드와 서(西)미들랜드의 비중도 크다. 철강업은 1967년 7월 다시 국유화되었고, 전국생산액의 90%를 차지하는 대규모 철강회사 14개사는 ‘영국철강공사’로 통합되었다가 1980년 대처 정부에 의해 폐쇄되었다.

제조업 중에서 최대의 종업원을 가진 기계공업은 무역면에서도 수출총액의 상당량을 차지하는 중요한 부문이다. 자동차공업에서는 일본·독일과 함께 굴지의 수출국이며, 그 중심은 코번트리·버밍엄·옥스퍼드·런던 주변·리버풀 등이다. 자동차 다음으로는 트랙터·항공기·원동기·중전기(重電機)·공작기계·산업기계가 생산·수출 양면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화학공업에서는 합성염료·화학제품·약제·테트라에틸연(鉛)·화장품 등이 주요 수출품이며, 생산의 중심은 런던과 머지강(江) 유역이다. 일찍이 영국산업을 대표한 섬유공업은 크게 후퇴하였다. 스토크온트렌트의 요업(窯業), 셰필드의 날붙이공업, 미들랜드의 피혁공업, 템스강 유역의 제지업, 클라이드강·타인강·웨어강 각 유역의 조선업 등이 국제적으로 유명하다.




영국 : 생활

영국은 아침에 구운 청어나 베이컨을 먹고, 디너는 7시 반 이후에 먹으며, 밤늦게 홍차·비스킷·샌드위치 등으로 서퍼를 먹는 것이 영국 특유의 식생활이다. 그러나 청어는 식탁에서 사라지고 있고, 특히 도시에서는 저녁식사 시간이 빨라지고 있으며, 양식도 간소화되어 하이티(high tea)가 되었고, 서퍼의 습관도 쇠퇴하는 경향이다. 음료로는 커피보다 홍차, 특히 우유를 탄 홍차가 압도적이지만, 커피나 레몬티 등 대륙 양식도 즐긴다.

영국에서는 주택비 상승, 노인 독거 및 미혼 증가로 인하여 가족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어, 20세기 초 무렵은 평균가족수가 4명인데 비하여 현재는 2.5명이다. 가옥형태는 잉글랜드에서는 대체로 단독주택이며 20% 정도가 아파트에 산다. 스코틀랜드는 작은 정원이 있는 단층의 작은 석조가옥들이 많고 인구의 절반 이상이 지방당국이 지은 저렴한 아파트식 공영주택에 살고 있다.

식·주생활만이 아니라 여러 면에서 영국의 생활양식은 변모하고 있다. 흔히 말하는 대로, 영국인의 생활태도가 전통을 사랑하고 변화를 싫어하며, 매우 보수적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아직도 귀족제도가 남아 있고, 런던시내 오피스가(街)에 근무하는 사람은 지금도 1년 내내 중산모자를 쓰고 검은 옷을 입으며, 우산을 가지고 다닌다. 판사는 여전히 가발을 쓰고, 일요일에 극장은 문을 열지 않는다.

유럽 대륙의 여러 나라는 물론 영국연방에서도 우측통행으로 바꾸는 나라가 생겨도 좌측통행을 고집하고 있으며, 같은 술집에 들어가는 데도 중류계급과 노동자는 입구를 달리할 정도로 고전적인 계급의식을 가진다. 그러나 이와 반대되는 면도 간과할 수 없다. 1945년 독일이 항복하자 제2차 세계대전 중의 국민적 지도자 처칠의 보수당을 아무 미련 없이 노동당 정부로 바꾼 것도 영국인이요, 세계에서 최초로 제트기를 날리고 그후에도 항공기 개발에서 세계의 첨단을 걷고, 또 어느 나라보다도 앞서서 원자력의 평화이용을 달성한 것도 영국인이며, 전통적인 화폐 제도를 1971년에, 도량형 제도를 1975년에 바꾼 것도 영국인이다. 그들에게는 보수와 진보의 묘한 혼합이 있으며, 그것이 영국인의 생활 전체를 일관하고 있다. 경제적 자유주의의 모국이면서도 다른 자본주의 국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사회보장체계를 확립하였다. 거칠지 않고 예의바르면서도 16, 17세기에는 해적행위를 감행하고 어려운 싸움을 승리로 이끄는 활력을 가졌다. 욕을 들을 정도로 타산적이면서도 전쟁 중 암시장이 없었다.

철저한 개인주의자이면서도 사교와 사회생활의 명수이기도 하다. 그리고 놀라울 정도의 애국자들이다. 불합리한 체계와 제도가 생활 구석구석까지 도사리고 있으면서도 권리·의무의 관념으로 생활을 합리화한다. 웬만한 나라에서는 국회의원쯤 되면 전국의 무료승차권을 당연한 것처럼 가지지만, 영국의 국회의원은 선거구와 국회가 있는 런던 사이의 무료승차권만 가진다. 마찬가지로 영국의 철도나 버스 종업원에게 주는 무료정기권은 거주지와 근무지 구간에서만 유효하다.

계급 질서에 유순하게 따르는 것 같으면서도 중앙과 지방의 정치에 고도의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필요하면 즉각 정권을 교체시킨다. 이러한 태도들은 여러 세기의 경험을 통해 터득한 경험주의적·현실주의적인 생활의 지혜일 것이다. 아침부터 고기를 먹는 사실로도 알 수 있듯이 단백질 섭취량이 많으며, 1인당 주거면적도 넓다. 모든 도로는 완전포장이며, 보도와 차도의 구별이 뚜렷하다. 전등·전화·상수도는 물론 하수도와 도시가스도 나라 구석구석까지 마련되어 있으며, 시내지역에서는 전화선과 전기선도 지하에 들어가 있다. 이처럼 영국의 생활정도는 서유럽 제국과 비교해도 상당히 높은 편이다.



교육

영국의 교육제도는 영국의 계급질서를 반영하고 있다. 상류계급과 중류계급 중·상층부의 자녀는 초등학교 단계부터 사립학교에 다니고, 일반계급의 어린이는 공립학교에 다니는 것이 보통이다. 사립학교 중에서도 특히 엘리트 코스는 남자 중등교육을 위한 퍼블릭스쿨이다. 퍼블릭스쿨은 전에는 초등학교 고학년 상당의 학령을 포함하고 있었으나, 의무교육제가 확립된 후로는 초등학교 단계가 없어졌으며, 그 대신 퍼블릭스쿨 진학을 목적으로 하는 특정 자녀의 초등학교인 프리패러토리스쿨이 설립되었다. 고등교육기관에도 사회적 지위의 상하가 있으며, 옥스퍼드대학교와 케임브리지대학교가 최고의 지위를 차지한다.

따라서 프리패러토리스쿨에서 퍼블릭스쿨을 거쳐 두 대학 중의 하나에 진학하는 것이 최고의 코스가 된다. 두 대학의 오랜 칼리지가 성직자 양성을 주목적으로 한 것처럼 퍼블릭스쿨도 처음에는 전국에서 영재를 뽑아 장학금제도로 종교교육을 베풀 목적으로 설립되었는데, 나중에 성격이 변하여 이제는 수도원적인 환경에서 기거를 같이하는 규율과 단련을 중시하며, 사회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인격형성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두 대학의 오랜 칼리지가 고유의 스포츠를 가지고 있는 것도 스포츠로 규율·인내·공정성을 터득시키려는 전통에 의한 것이다.

13세기에 설립된 윈체스터, 14세기 이래의 이튼을 비롯하여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퍼블릭스쿨들이 적지 않으며, 그밖에도 부유한 가정의 자녀를 기르는 중등교육기관으로서 사립 기숙학교가 많은데, 이들도 넓은 의미의 퍼블릭스쿨에 포함된다.

의무교육의 역사는 짧다. 1870년에 교육법이 제정되어 공립학교가 설립되기 시작하였으나, 노동자계급의 자녀에게 실용과목을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중류 이상의 자녀는 수업료를 내는 사립학교에 다니는 것이 관행이었다. 1876년에 초등교육이 의무제가 되고, 1902년에는 처음으로 전국적으로 통일된 중등교육제도가 생겼으며, 1944년에는 무상 의무교육이 중등교육까지 연장되었다. 의무교육 기간은 5~16세이다.

취학연령은 5세이며, 최초의 1년은 유아과정으로 되어 있다. 3~4세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의무교육이전의 유아교육도 공·사립 유아원에서 널리 이루어지고 있다. 11세 이상 12세 미만의 아동에게 일레븐플러스라는 능력시험을 주 단위로 치르게 한 다음 합격자만 그래머스쿨로 진학하고, 나머지는 실업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의무과정의 세컨더리모던스쿨 또는 테크니컬스쿨에 진학하는 복선형(複線型) 교육제도가 시행되어 왔다. 실업중등교육을 받게 되는 학생수는 전체의 3/4에 가까우며, 도중에 보통 중등학교로 전학하는 길도 열려 있으나, 예외조치일 뿐이다. 그래머스쿨은 7학년제이며, 일반적으로 상급학년이 될수록 전문화가 진행된다. 중등교육의 능력사정을 위하여 전국적 ·일률적인 일반교육자격시험 GCE가 있다. 이는 보통 수준 자격과 상급 수준 자격으로 나뉘어 있으며, 각 대학의 각 학과는 상급 수준의 필요과목을 지적하고 이에 합격한 사람만을 입학시킨다.

대학별 입학시험은 없으며,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각 칼리지가 GCE 자격 외에 칼리지별 고사를 과하는 것이 유일한 예외이다. 일레븐플러스 시험은 일생의 진로를 너무 일찍 구분하는 것으로 후숙형(後熟型) 자녀에게 불공정하다는 비판과 계급차를 조장한다는 지적 등이 있어, 실업중등학교와 보통중등학교를 종합한 콤프리핸십스쿨이 설립되었으나 소수에 그치고 보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1964년의 총선거에서 노동당이 중등교육제도 재편성 문제를 논제의 하나로 삼고, 그후 노동당 정부의 교육·과학성이 이를 실제 일정에 올린 뒤부터 각주의 교육당국에서는 중등교육을 개혁하려는 움직임이 촉진되었다. 그 결과 일레븐플러스 시험은 차차 폐지되어 나가고, 실업중학교는 단독 또는 그래머스쿨과 합병하여 종합중학교로 바뀌는 경향이 커졌으며, 많은 아동이 초등학교 단계에서의 능력차와 관계없이 자유로이 적성교육을 받을 수 있다. 다만, 이 개혁은 퍼블릭스쿨처럼 재정적으로 자립한 사립학교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대학은 일반교육과정과 전문교육과정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대학은 어디까지나 전문교육의 장(場)으로 여기고 있으며, 유럽형에 속한다. 대학조직은 칼리지제(制)·스쿨제·학부제(學部制)로 대별되는데, 스쿨제는 단일 전문교육기관이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는 칼리지형이지만, 학과교육은 칼리지를 횡단하는 학부 단위로 행해진다. 전문교육을 위한 칼리지도 있으며, 사실상 스쿨을 가지고 있는데, 대학 전체로서의 학부조직은 없고 칼리지 자체가 학부를 가진 것도 있다.

맨체스터를 비롯하여 19세기 이래의 대학은 학부제를 취하고 있는 것이 많지만, 이에 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영국 대학은 조직이나 운영이 각 대학의 자주성에 일임되고 있으며, 국가는 대학자금 배분위원회(UGC)를 통하여 자금을 제공할 뿐, 한 마디의 간섭도 하지 않는다. 또 대학은 한국처럼 교육부가 관할하지 않는다. 이러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각 대학은 학외(學外)시험관 제도를 두고 있으며, 어느 과목이든 위촉한 학외시험관의 성적 인정을 받고, 시험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유지하도록 한다.

각 지역별로 성인교육기관이 설립되어 있어 주·야간에 걸쳐 실생활에 필요한 각종 기술 및 외국어 등을 가르치고 있으며, 1971년 이후 오픈유니버시티가 설립·운영되어 성인교육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영국의 교육예산은 1000/2001년 정부예산의 12%에 해당하는 458억 파운드가 책정되었다.







영국 : 사회

영국의 최근 인구증가율은 연평균 0.3%(2001년 0.23%)로 낮으며, 인구밀도는 대체로 높다. 그러나 북아일랜드의 인구밀도는 잉글랜드의 약 1/3, 스코틀랜드는 약 1/5이며, 지역격차가 크다. 이는 자연조건의 차이에도 기인하지만, 역사적인 이유도 작용한다. 잉글랜드 자체에서는 전에는 산업혁명 이래의 공업화경향 때문에 인구가 남부에서 북부로 많이 이동했는데, 근년에는 반대방향의 이동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영국 전체로서는 안정된 기존사회에 만족하지 않고 밝은 앞날을 찾아 뉴질랜드·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 등지로 이주하는 젊은이가 많으며, 연간 3,000명 이상의 이 미국으로 가는 이른바 두뇌유출과 함께 사회문제화되어 있다. 한편, 속령과 구(舊)속령, 특히 서인도제도로부터의 인구유입도 뚜렷하다.

노동조합은 임금상승의 억제요소로서 이 유입을 환영하지 않는 눈치지만, 변함없는 노동력 부족이 유입의 조건이 되기 때문에 문제가 단순하지 않다. 노동뿐만 아니라 주택·인종, 기타 여러 사정에서도 유색 노동인구의 국내 이주는 사회문제를 일으키고 있는데, 역대 정부는 영국연방 국가로부터의 자유이동 원칙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규제를 가하려고 노력해 왔으나 뚜렷한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총노동인구 중 광공업 인구가 약 20%를 차지하는 데 비해 농업인구는 1%에 지나지 않아, 과거 1세기 남짓한 동안 산업구조의 변화를 여실히 반영하고 있다.

전후(戰後)에는 사실상의 완전고용에 가까운 상태가 계속되었으나, 1960년대 후반부터 실업률이 상승하기 시작하여 만성불황의 심화와 함께 1975년에는 4%, 1976년에는 5%를 넘었다가 대처 정권 이후로 실업률이 급격히 늘어났다. 1990년대 들어 집값 폭등으로 런던거리를 방황하는 걸인들이 속출했으며, 1992년 10월 정부의 탄광 폐쇄조치와 경제정책에 반대하는 약 20만 명의 광부들과 야당인사가 런던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2000년 실업률은 2.1%였다가 2001년 5.1%로 높아졌으나 경제성장지속에 힘입어 점차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영국의 발달된 사회보장은 법률적으로는 16세기 이래의 구빈법(救貧法), 사회적으로는 그리스도교주의 또는 인도주의에 입각한 자발적 자선의 전통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1908년의 무상노인연금제와, 실업보험 및 의무건강보험을 포함한 11년의 국민건강보험법을 직접적인 전사(前史)로 한다. 1909년의 왕립 구빈법위원회 소수위원보고서를 기초한 비아트리스 웹 부인과, 1911년의 입법과 관련된 재무장관 로이드 조지의 이름은 이 전사와의 관계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본격적인 사회보장제도가 답변확정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노동당 정부 때였으며, 그 기초이념을 제공한 것은 1942년의 베버리지보고였다.

1948년에 완성된 사회보장체계는 1945년의 가족수당법, 1946년의 국민보험법, 국민보험(산업재해)법, 1948년의 국민부조법 및 아동법 등의 소득보장제도와, 1946년의 국민보험사업법을 중심으로 한 의료보장제도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로써 출산·질병·노동재해·실업·노령·사망 등, 이른바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사회보장이 성립하였다. 특히 획기적인 것은 일반의(一般醫)진료·전문의치료·입원요양·질병예방·병후보호 등 모든 의료서비스를 전국민이 평등하게 무료로 받을 수 있도록 한 의료보장제도이다. 이에 따라 대부분의 병원은 공영화되었으며, 일반 개업의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보험의(保險醫)가 되었다.

그러나 1951년에 보수당 정부는 사회보장비의 국고부담을 줄이기 위하여 약제 처방 1개 항목당 2실링을 자기부담으로 하는 등 일부를 수정하였다. 이에 따라서 국민보험사업 수입 중에서 차지하는 국고부담의 비율은 처음에는 90%였다가 70%로 감소되었다. 그후 정권의 교체와 물가상승에 따라 사회보험제도의 내용과 금액에 변경이 가해지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공공비에 의한 사회서비스의 확충이 전통적인 사회질서에 영향을 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가령 공적장학금제도의 충실로 노동자계층의 자녀도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으며, 국비에 의한 일률적 자격시험제도에 따라 능력주의가 철저해지고, 문벌에 의한 우선 입학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영국이 여전히 공고한 피라미드 구조의 계급질서를 가진 사회라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며, 미국 사회와의 차이도 이 점에 있다. 미국에도 자본주의적 사회계급은 당연히 존재하지만, 건국 초부터 봉건제도를 경험한 바 없는 미국에 비하여 영국에서는 시민혁명이라는 혁명을 일찍이 17세기에 경험했으면서도 봉건제도와 봉건적 의식의 유물이 그후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것이다.

피라미드 구조의 정점을 이루는 것은 국왕·왕족·귀족 등으로 된 상류계급이다. 옛날 프랑스에는 10만 명이나 되는 귀족이 있었지만 대혁명으로 일소되었다. 그러나 이에 비해 소수에 지나지 않은 영국의 귀족은 명예혁명을 통하여 오히려 지위를 국가 부동의 질서로 확립시켰다. 다만, 귀족은 중세부터 내려온 가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양대 정당의 성립 이후로 각 시기의 정권이 상원에서 다수를 누리기 위해 만든 귀족도 있고, 훈공으로 작위를 받은 귀족도 많다.

현재 귀족은 공작·후작·백작·자작·남작의 5단계로 나뉜다. 귀족은 모두 세습이었으나 1958년에 1대제 귀족이 만들어졌다. 당시는 귀족수의 증가를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여겼는데, 그후에도 세습귀족은 만들어지고 있다. 또 1963년에는 작위를 반납하는 길도 열렸다. 대토지 소유를 기반으로 하는 귀족의 경제적 지위는 산업혁명 후의 사회가 겪은 경제적 변화와,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설정된 고율의 상속세 때문에 상실되었으나, 상공업의 지도적 지위를 차지하는 이른바 상업귀족이 많아, 귀족제도는 사회의 추이에 적응하여 이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귀족이 구성하는 상원의 정치적 권한은 줄어들어, 귀족은 사실상 명예 칭호에 가까운 것이 되었다. 귀족 외에 세습되는 준남작(準男爵)과 1대제의 나이트[騎士]가 있으며, 양쪽 다 ‘서(sir)’로 호칭된다. 정부의 조언으로 국왕이 각계의 공로자에게 주는 칭호이며, 근년에는 범위가 더욱 확대되고 있다. 칭호의 유무와는 관계없이 젠트리라고 불리는 계층이 지방의 상류계급을 구성한다.

젠트리는 젠틀맨의 총칭 또는 지위를 의미한다. 젠틀맨은 원래 지방에서 귀족 다음가는 토지소유자였으며, 컨트리 젠틀맨이라고도 불렸다. 치안판사, 교회의 렉터직(職), 보통선거제 이전의 하원의원의 모태(母胎)를 이룬 계층으로, 도시에서 재산을 모은 다음 지방에서 토지를 구하여 젠틀맨이 되려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사회적 지위가 높다. 영국의 공업화와 도시화 경향으로 상대적 지위는 하락하였으나 ‘기차와 자동차를 이기고 살아남은 존재’로 평가된다.

지방의 상대적 지위가 높았을 때 젠틀맨 다음가는 계층으로 요맨이 있었다. 젠틀맨보다 소규모 토지를 소유하거나, 사실상 소유권과 다름없는 토지보유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견실하고 안정된 생활로 영국사회의 중추를 이루었다. 그러나 사회의 변화에 따라 일부는 젠틀맨 또는 산업자본가가되었고, 대부분은 몰락하여 노동자가 됨으로써 사실상 소멸하였다. 현대에는 중류계급을 이루는 사람이 도시인구층에 많다.

중류계급은 다시 상중하의 세 계층으로 나뉘는데, 상층에는 교수, 일류 의사, 법률가·문필가·예술가, 관청이나 기업의 상급직원, 큰 노동조합의 임원 등이 속하고 하층에는 일반 공무원과 회사원, 의무교육의 일반 교직원, 소매상 등이 속하며, 중층에는 그 중간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속한다.

하류계급은 가장 광범위한 계층으로 광공업·농업·어업·수송업·서비스업 등의 노동자와 판매원·포터·급사 등이 속한다. 이러한 계급 질서는 반드시 소득의 크기와 비례하는 것이 아니며, 꽤 안정된 것이어서 계급간의 이동은 적다. 상중하의 각 계급 사이에서는 사교와 혼인의 범위, 생활관습과 거주지역, 유희와 스포츠의 종류까지도 대체로 확연히 갈리어 있었다. 그러나 장학금제도의 발달과 중고등교육의 보급과 변화, 이른바 대중사회화 현상의 심화 등으로 계급간의 유동성이 점차 커지고 있다.


영국인의 경험주의적·현실주의적 성격은 예술에도 반영되어 있다. 예술 중에서도 가장 추상적인 분야인 음악에 거장을 배출시키지 못한 것도 이러한 국민성 때문인 것 같으며, 웨스트민스터대성당에서 기리고 있는 헨델도 본래는 독일인이었다. 마찬가지로 음악과 관계가 깊은 오페라나 발레도 외국에서 수입되어 나중에 발전한 것으로 역사는 길지 않다. 이에 비해 문학과 연극에서 불멸의 전통을 지닌 것은 음악과 달리 현실적인 인간세계를 그리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희곡의 W.셰익스피어, 소설의 G.초서 모두 그 주제는 인간이 엮어내는 세계를 다룬 것이다. 공상문학의 전통도 있으나 가령 모어의 《유토피아》는 신랄한 현실비판을 모티프로 하고 있으며, D.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는 공상적 환경 속에서의 가장 현실적인 생활태도가 주제로 되어 있다. 전기문학에서 걸작이 생긴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영국민의 속물성을 날카롭게 비판한 문예비평가 M.아놀드는 “시에서야말로 영국의 영광이 있다”라고 말하고, 프랑스 비평가 텐은 “영국시보다 나은 시는 없다”고 했는데, 이러한 시도 그 주제는 인간 아니면 자연 세계에 있다.

미술 부문에서도 유화(油畵)이건 영국에서 특히 발전한 수채화이건 초상화나 풍경화에 걸작이 많다. 영화에서는 히치콕이 세계적으로 유명하며 현재 1,800여 개의 극장이 있으며 한 주에 약 190만 명이 영화를 관람한다.

관념이나 추상을 대상으로 하는 경향은 어느 예술분야에서나 그 역사가 짧다. 현대영국의 특징의 하나는 적극적인 예술진흥정책에 있다.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자인 영국인은 예술에 대한 국가의 규제가 두려워 정부의 조성(助成)을 기대하지 않았으나,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군대와 시민에게 문화적 위안을 제공할 필요성에서 조성정책이 시행되기 시작했으며, 정부원조의 음악·예술협의회가 설립되어 도시는 물론 어린이와 노인의 소개지에도 찾아가 음악·연극전시회를 개최하였다.

전후에는 영국예술협의회가 설립되었으며, 뒤이어 정부의 원조책으로 로열오페라하우스, 새들러스웰스 오페라발레단, 국립극장, 로열셰익스피어극단을 비롯하여 각종 교향악단과 지방의 레퍼토리 극장에도 조성금이 지급되고 미술전시회도 원조를 받고 있다. 윌슨 노동당 정부는 영국사상 최초로 예술담당 장관을 임명하여 예술진흥정책의 확충을 꾀하도록 하였다.

한편, 1948년의 지방자치법에는 각 자치체가 지방세 수입의 2.4%를 예술진흥비에 충당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다. 그리하여 버밍엄은 지방도시 중에서 가장 우수한 미술관을 유지하고, 일류 악단인 버밍엄시티 오케스트라에 재정원조를 하고 있으며, 맨체스터는 전액 시비(市費)로 운영되는 우수한 시민극장을 가지고 일류에 속하는 핼리오케스트라를 원조하고 있다. 또 청소년 예술활동도 중시되고 있으며, 국립청년극장과 국립청년오케스트라가 있고, 각종 교육기관에서도 교내 연극 등 기타의 예술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트라팔가 광장 (Trafalgar Square)
영국의 영웅 넬슨 제독이 트라팔가 해전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1841년에 완성된 광장으로 실물의 3배 크기인 560㎝의 넬슨 제독의 동상과 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영국의 국가 동물인 라이온상, 분수등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 영국다운 분위기를 한껏 느낄 수 있다. 라이온 동상은 대승을 기념하는 뜻으로 노획한 프랑스의 대포를 녹여서 만든 것으로 4면의 철판부조에는 트라팔가 해전, 나일강 해전, 덴마크·러시아·스페인 연합함대와의 전투기록이 담겨져 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Westerminster Abbey)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고딕 건축 사원으로 국회의사당의 서쪽, 파알라멘트 광장 남쪽에 위치해 있다. 웨스트민스터는 약 250여년에 걸쳐 1503년에 완성되었으며, 42명의 왕과 여왕의 대관식을 가진 곳으로 3천 여구의 시체가 묻혀 있다. 사원 입구에는 처칠의 묘, 무명용사의 기념무덤이 있는데 음악가의 묘소, 정치가의 묘소, 중심부, 성가대석, 엘리자베스1세의 묘, 헨리 7세의 예배당, 에드워드 예배당, 시인의 장, 스코트랜드 여왕 메어리의 묘, 회중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버킹검 궁전 (Buckingham Palace)
트라팔가 광장의 서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1873년 버킹검 공의 사저로 세워졌으며 영국 국왕의 공식적인 궁전이다. 궁전 내부는 공개되지 않고 있으며, 대규모의 왕실 소장품을 전시하고 있는 미술관을 구경할 수 있다. 유명한 왕실 근위병 교대식은 격일로 행해지며 오전 11시경부터 시작된다. 장대하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확히 72㎝의 보폭으로 걷는 모습은 또다른 재미를 제공하며, 여름에는 매일 11시에 교대식을 한다. 또한 엘리자베스 여왕의 여름 휴가 기간인 8월초부터 약 2달동안에는 특별히 버킹검 궁전을 개방하고 있으며 입장료는 수년 전 윈저성의 화재 복구비를 조달하는데 쓰여진다.
가는길 : 지하철 피카딜리 라인의 그린파크역이나 서클라인의 제임스 파크역에서 하차.
TIP : 근위병 교대식은 11시30분에 열리지만 적어도 30분전에는 도착되어야 한다.

국회의사당과 빅벤
화이트홀이 끝나는 템즈 강가에 있으며 전통있는 영국 의회 정치의 전당이다. 이 곳은 원래 궁전이었는데, 현재 건물은 대화제 이후 재건된 것이다.
고딕 양식으로 1천개 이상의 방을 갖추고 있다. 그 유명한 빅벤은 높이 95m로 아직도 손으로 태엽을 감는 전문적인 시간지기가 있다.
꼭대기 조그만 방에 불이 켜져 있으면, '의회중'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야경이 특히 아름답다. 국회의사당은 폭탄 테러 이후 입장이 어려워졌지만 방청 형식으로 입장이 가능하다.



대영 박물관 (British Museum)
세계 3대 박물관 중의 하나로 러셀 광장 맞은 편에 위치해 있는 세계적인 박물관이다. 특히 전성기의 그리스 문화와 고대 이집트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1759년에 세워 졌으며, 1823년부터 50년까지 약 30여년에 걸쳐서 83개에 이르는 크고 작은 방으로 건축되어 졌다. 대영 박물관은 4층 건물로 주요한 전시물은 주로 1, 2층에 전시되어져 있다. 3대 인기 전시물은 미라(방60호), 엘진 대리석(8호), 5천년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로제타 스톤(25호)이며 꼭 보아야 할 추천 전시물은 앗시리아 라마스 상(방 20호), 람세스 2세(25호), 파르테논 신전, 네레이트 제전(7호), 아메노피스 3세(25호), 목각의 관(25호)등 볼거리가 아주 많은 곳으로 꼭 방문할 것을 권한다.

영국이 온세계에서 약탈한 귀중한 문화 자료들이 있는데 이곳 굉장히

우아하고 이박물관 있는곳이 런던에서 가장 비싼 동네라고 하죵..

하이드 파크 (Hyde Park)
런던에서 가장 큰 공원으로 면적은 약 160만㎡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아름다운 연못과 주위의 수목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도시 한복판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아름다운 휴식처이다. 빅토리아 여왕을 위해 버킹검 궁전으로 가는 정문으로 만들어 놓은 마블아치 근처에는 스피커즈라고 불리는 곳이 있는데 주말에는 사상과 인종을 초월하여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를 펼치는 자유로운 연설이 이루어지고 있다. 서펜타인 연못에서는 보트놀이와 수영을 즐길 수 있으며, 여름에는 야외 음악회가 열리기도 한다.




세인트 폴 사원 (St. Paul's Cathedral)
1710년에 완공되었으며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 런던 사교의 사원이다. 정면에 위치해 있는 2개의 탑은 종루로 쓰이고 있으며, 왼쪽 탑에는 12개의 차임벨, 오른쪽 시계탑에는 영국연방에서 가장 큰 종이 있다. 세인트 폴 사원 내부에는 넬슨, 웰링턴을 비롯하여 위인이나 화가의 묘가 있다. 성당 본 건물의 수랑, 본당 회중석, 위스퍼링 갤러리, 돔과 골든 갤러리등은 매우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며, 꼭대기에 위치해 있는 골든 갤러리에서는 아름다운 런던 시내의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타워 브리지 (Tower Bridge)
템즈강 하류에 위치해 있는 빅토리아식 다리로 8년에 걸친 공사 끝에 1894년에 완공되었다. 중앙이 개폐식으로 되어 있어 큰 배가 통과할 때에는 90초에 걸쳐 무게 1,000t의 다리가 수압을 이용해 열린다. 타워 브리지는 크고 작은 고딕풍의 뾰족탑이 있어 마치 동화속에 나오는 중세의 성을 연상시킨다.





에딘버러 시내과 근교에 있는 스코틀랜드의 볼거리를 소개한다.

에딘버러 성
12세기 건축된 위풍당당한 성으로 에딘버러의 랜드마크가 되는 곳이다, 잿빛의 우중충한 벽돌로 높이 싸여진 이 곳은 한 때 난공불락의 요새로 유명했던 곳이며, 현재에도 군인들이 보초를 서고 있다. 성 내부에는 스코틀랜드 왕가의 보물들을 전시해 놓은 전시관과 선 마가렛 예배당이 있다.

홀리루드하우스궁(Palace of Holyroodhouse)
12세기에 지어진 성으로 중세시대에 조약돌로 포장한 로얄마일 길을 따라가면 다다르는 곳이다. 1566년 스코트랜드의 여왕이었던 메리여왕이 아들 제임스 6세를 낳은 곳이고, 여왕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구성하는 역사적 사건들이 발생한 곳이다. 여왕의 스코틀랜드 공식 거주지이기도 하다.

글라미드성
15세기 처음 건설된 스코틀랜드 남작의 성으로 영국의 황태후 엘리자베스 여왕이 그녀의 소녀시절을 보내고 또한 마가렛 공주가 태어난 곳이다.


스터링 캐슬(Stirling Castle)
비극의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었던 메리여왕이 대관식을 거행했던 성으로 지나간 유적을 볼수 있다. 영화 의 주 무대였던 곳으로 스털링은 '항쟁의 땅'이라는 뜻이다.
1314년 잉글랜드와 전쟁의 승리로 독립을 쟁취하고 스코틀랜드 중앙부의 중심도시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르네상스 건축물 중 가장 훌륭하다고 평가받는 스털링 성이 있고 스털링 대학이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스콘 궁전
퍼스시 근처에 위치한 역대 스코틀랜드 왕등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던 곳이고 스코트랜드 왕족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몰트위스키 산책길(Malt Whisky Trail)
하일랜드의 눈 덮인 산에서 흘러내리는 순수한 산수와 최상급 맥아의 신비로운 조화로 이루어진 스코트랜드 위스키의 진미는 어느 누구도 모방할 수 없다. 명물 위스키를 음미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로 그램피안 하일랜드를 가로지르는 몰트위스키 산책길을 걷는 것도 좋을 것이다.



수도 카리프와 근교에 있는 웨일즈의 볼거리를 소개한다.


카디프 항 주변
카디프 항의 내항에는 형대적인 상점, 세련된 카페들이 역사적 기념관 및 빌딩들과 한께 나란히 있다. 이곳에서는 거리의 많은 상점들과 백화점과 화려하게 꾸며놓은 아케이드에서 편리하고 들거은 쇼핑을 할 수 있으며, 저녁에는 클래식 음악감상, 극장, 나이트 클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놀이문화를 즐길 수 있다.

카디프 성
원래 로마인에 의해 성이 구축된 후 12 ~ 14세기 때 노르만 인들이 성을 공고히 했다. 그러다가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에 내부를 장식, 화려한 인테리어로 유명하게 되었다. 블랙타워에 들어가면 로마인과 노르만 인이 건축한 성벽 자취를 찾을 수 있다.

웨일즈 민속박물관
카디프에서 서쪽으로 약 6.5 km정도 떨어진 세인트 파간스에 위치해 있으며, 역 앞의 버스 스테이션에서 버스로 30분 이내에 도착 할수 있다. 웨일즈 각지에서 모아온 예날 농가나 작은 예배당, 물레방앗간 등이 재현되어 있어, 모든 고대와 현재 웨일즈의 생생한 역사를 느껴볼 수 있다.

웨일즈 국립 박물관
미술, 산업, 고고학 등 웨일즈에 관한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종합 박물관, 키디프 성 북동쪽에 위치해 있다. 인상파 화가들의 컬렉션을 볼 수 있는 곳이다.

Caernarfon 성
13세기 격동하는 웨일즈인을 경계하기 위하여 잉글랜드인이 쇠로 만든 종이 있다.





카에르필리 성 (Caerpilly)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요새라고 한다. Civil War 때 대부분 파괴되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거의 원래 모습으로 복구되었다. 도랑과 잔디에 둘러싸여 있는 매우 아름다운 성으로 전쟁때의 타격 때문이라고 생각되는, 무너져서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탑이 유명하다. 카디프에서는 Vallay Line이나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브렌하임 성
영국 국왕의 후원으로 설립된 이 성은 John Marlborough 공작과 공작부인인 Sarah를 위해서, 1705년에서 1722년까지에 거쳐 J. Vanbrugh 경이 설립하였다. 그후 앤왕비에게 헌정되었다.

맥달란 칼리지 (Magdalen College)
옥스퍼드에서 가장 아기자기하게 볼만한 단과대학이다. 귀여운 오솔길과 사슴공원이 볼만하다. 여름 성수기에는 오전 11시에 개관하여 저녁 6시에 폐관하며, 그 외 시기에는 오후 2시에 개관한다. 그러나 시기를 막론하고 토요일, 일요일에는 정오에 열어서 저녁 6시에 닫는다.


머튼 칼리지 (Merton College)
옥스퍼드에서 제일 예쁜 정원을 갖고 있는 단과대학이다. 특히 이 대학의 도서관은 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최초의 웨일즈어 성경책을 소장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여름 성수기에는 오후 2시에 개관하여, 5시에 폐관하며, 주말에는 오전 10시에 개관한다.

보들리언 도서관 (Bodleian Library)
장서수로만 따져 대영도서관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영국 유수의 도서관으로써 옥스퍼드의 주요연구가 행해지는 곳이다, 그러나 소장되어 있는 도서들을 직접 열람해 볼 수는 없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오전 9시에 개관하여 오후 6시에 폐관하며, 토요일에는 같은 시간에 개관하여 오후 12시 30문에 닫는다.

쉘도니언 극장 (Sheldonian Theatre)
보들리언 도서관 옆에 있는 로만 스타일의 건물이다. 건물 그 자체보다는 건물에서 행해지는 공연이 더 볼만하다. 여름 성수기에는 거의 매일 옥스퍼드 시립교향악단의 연주회를 비롯하여 많은 공연들이 행해진다. 공연에 대한 정보는 여행 안내소에 문의하면 좋다.



킹스 칼리지(King's College)1441년에 헨리 6세에 의해 창설된 칼리지로 킹스 퍼레이드 거리에 면해 있는 데, 입구 오른 편으로 유명한 King's College Chapel이 서있다. 워드워드의 시에 나오는 화려한 성당 안 장식이 볼 만하며 16세기때의 작품인 스테인드 글라스도 인상적이다.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딕의 꽃'으로 칭송되는 예배당이다. 왼편이 킹스 칼리지 예배당의 전경이다.

퀸스 칼리지 (Queen's College)
헨리 6세의 왕비인 마가렛에 의해 1448년에 창설된 칼리지로 한때 이 대학의 후원자였던 헨리 6세 왕비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케임브리지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학으로 건물전체가 균형있게 짜여져 있다. 1749년에 건조된 '수학의 다리'는 수학적 이론에 의해 디자인되고 기하학적으로 구성되었다.

트리니티 칼리지 (Trinity College)
케임브리지 최대 규모의 대학이다. 16세기에 헨리 8세가 세웠는데, 뉴턴의 역학이 정립된 곳이기도 하다. 베이컨, 테니슨, 러셀, 바이런 등의 문인이 이곳 출신이며, 현재의 찰스 황태자도 이 학교를 나왔다. 중앙정원에 있는 분수는 바이런이 나체로 목욕한 곳으로 유명하며 이 대학 내에 있는 렌 도서관 Wren Library에는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책을 보관하고 있으며 뉴턴의 노트도 전시하고 있다.

세인트 존스 칼리지(St. John's College)
베네치아에 있는 탄식의 다리 The Bridge of Sighs를 모방한 아름다운 다리가 있다. 유명한 시인 워즈워드가 이 학교가 배출한 문인이기도 하다.

피츠윌리엄 박물관(Fitzwilliam Museum)
이곳 박물관 1층에는 이집트, 그리스, 중국 등 세계 각지의 미술품과 16세기 독일의 동전, 도기 등을 전시하고 있으며, 2층에는 미켈란젤로, 다빈치 등 근대 유럽 회화를 모아 전시하고 있다.
킹스 퍼레이드 거리를 따라 남쪽으로 500m 걸어 내려가면 트럼핑턴 거리 Trumpington St.가 나오는데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다.



셰익스피어 생가 Shakespeare Birth Place
헨리 거리 Henry St.에 오래된 민가가 남아있는데 셰익스피어가 청년 시절을 보낸 곳이다. 부유한 상인의 집안답게 외관은 물론 내부도 잘 보존되어 16세기 중산계급의 면모를 살펴 볼 수 있다. 현재 셰익스피어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그의 유품 및 책과 당시의 생활용구 등이 전시되어 있다.

뉴플레이스 이스테이트 New Place Estate
런던에서 돌아온 셰익스피어가 1597년부터 1616년 죽을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그의 거처였던 곳은 거의 파손되었지만 정원과 그가 손녀딸에게 물려준 나시 하우스 Nash House는 그대로 남아 있다.

왕립 셰익스피어 극장 Royal Shakespeare Theater
에이번 강변의 붉은 벽돌 건물로 셰익스피어 연극 전문 극장. 프로그램은 매년 3월에 갱신되어 11월까지 셰익스피어 극이 공연된다. 인기있는 공연은 일찍 표가 매진되므로 1~2개월전에 예약을 해두어야 할 정도다.

워윅 성 Warwick Castle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 북동쪽으로 9마일 떨어져있는 워윅성은 이 도시의 주요한 관광명소로 에이번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절벽에 세워진 성으로 잉글랜드에서 가장 기품있는 중세의 성으로 그 명성이 높다. 이성은 두 개의 치솟은 탑이 특징적인데 한 개는 1356년에 세워진 147feet 높이의 시저탑(Caesar's Tower)이고 다른 하나는 1380년에 세워진 128feet 높이의 사내아이의 탑(Guy's Tower)이다. 초기의 이러했던 성이 형태가 불규칙하게 된 것은 여러 전쟁을 거치면서 이 성을 지키던 자들이 여러 곳에서 화살을 쏠 수 있도록 성을 개조하고 증축했기 때문이다.
이 성을 지켰던 가장 강력했던 한 사람이 바로 15세기의 워윅 경(Earl of Warwick)경으로 성의 이름은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현재 성 내부는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는데 프라이빗 아파트먼트에는 밀랍 인형을 제작하여 재현해 놓았다. 루벤스, 반 다이크의 명화와 각종 갑옷과 검들을 컬렉션해 놓았으며, 특히 고문기구와 감옥은 중세 암흑시대를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입장가격은 £9.25 (단, 7월과 8월은 £9.95)
4월부터 11월까지는 매일 오전10시 ~ 오후 6시까지, 11월부터 3월까지는 오전 10시~오후 5시까지 개장한다.



캐번웍스 그리고 그곳의 캐번 클럽 Cavern Walks & Cavern Club
시내중심가인 매튜 거리 Matthew St.에 있는 쇼핑가로 비틀스가 무명 시절 출연했던 캐번클럽이 있는 곳이다. 공연장 Cavern Club은 지금도 전 세계 팝애호가들의 순례지가 되고 있다.
고별 공연 을 마친후 대야망을 품고 고향을 떠났던 그들의 꿈이 그토록 성공적이 될 줄은 아무도 예측못했다. 지금은 이곳에 쇼핑센터가 건립되었고 비틀스 관련 상품 판매점과 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앨버트 독 ALBERT DOCK
영국의 가장 유명한 옛유적물이며 영국북서지역에서 세번씩이나 최고이 최고의 대형관광명소라는 타이틀을 획득함. 주변에는 여러개의 특화된 상점들, 선물가게, 바, 레스토랑, 카페등이 즐비하며 비틀즈 스토리 The Beatles Story, 머지사이드 해양 박물관 Merseyside Maritime Museum, 리버풀 생활 박물관 Museum of Liverpool Life 그리고 테이트 갤러리 Tate Gallery 등과 같은 세계적인 명소와 함께있다.
매일 10시에 개장하며 여행자 안내소는 오전 10시에 오픈 오후 5시 30분에 닫는다. 장애자를 위한 시설도 잘 되어있다.
전화 : 0151-708 8854


리버풀 대성당 LIVERPOOL CATHEDRAL
영국에서 가장 큰 영국국교 성당으로 20세기 신고딕양식 건축물의 좋은 본보기가 된다. 타워에서 리버풀을 조망할 수 있고 독특한 교회식 자수품 컬렉션을 만날 수 있다.
매일 오전 8시에 열어서 오후 6시에 닫는다. 입장료는 무료이나 기부금을 내는 것은 각자의 자유다. 전망대로 올라가고 자수품 컬렉션을 관람하는데 2파운드, 유료주차시 1파운드 요금을 내야한다.
주소 : St. James Mount, Liverpool.
전화 : 0151-709 6271



요빅 바이킹 센터 Jorvik Viking Center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요크는 바이킹 도시로 유명하다. 요빅 바이킹 센터는 캐슬케이트 거리 Castlecate St.에 세워진 바이킹 마을로, 바이킹 최후의 거주지를 비롯해서 그들의 생활과 풍습을 복원하여 전시하고 있다. 전시관은 많은 영국전시관이 그렇듯 전기자동차를 타고 있으면 알아서 그 차가 전시장안을 움직이는 방식으로 되어있다. 예전 바이킹이 살던대로 전시장안을 꾸며서 그들의 생활상을 볼수도 있고 바이킹 배도 볼 수 있다. 이곳을 둘러보면 바이킹들이 꼭 거칠기만 한 민족은 아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그들의 생활에서 쓰이는 것들을 보면 상당한 수준의 공업제품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물쇠를 만들어 썼었고, 유리제품들도 꽤 있으며 꽤 정밀하고 독특한 아이디어의 제품들도 많다.

♬영국은 어떤 나라? ㅇㅅㅇ* 알려주세요...

... 보여주세요 ㅇ ㅅㅇ* 급해서 그러거든요 ㅠ 0ㅠ 히 - ♬ 그럼 오늘도 좋은하루 되세요 >_< 영국............ 유럽 대륙 서쪽에 있는 섬나라. 위치--유럽 대륙 서쪽 북대서양 면적...

영국은 어떤나라?

... 영국에 관한건 뭐든지... 다!! 알려주세요!! 어렵겠지만...ㅠㅠㅠㅠㅠ 영국에는 처음 이베리아 인들이 왔는데, 스톤 헨지를 세운 것 밖에 없고 그 다음 켈트족들이 이베리아...

영화[어떤나라] 줄거리 알려주세요^.^

... 만든영화인, [어떤나라] 의 줄거리 알려주세요 ^^+ 아,그리고 [어떤나라] 이 영화... 이 영화는 세계 처음으로 북한에 들어가 장편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화제를 모은 영국...

영국, 독일 나라 오행 좀 알려주세요

프랑스를 화라고 하는 사람이 있고 금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정확히 어떤 건가요? 영국은 수의 나라이고 독일은 금,수의 나라 인가요? 프랑스 금 독일 금, 수 영국 수...

로또 독일 캐나다 영국 일본

로또독일 캐나다 영국 일본중 중국 제일이월많이되는나라알려주세요전부 싸이트도요 봐보고싶어서요 궁금하네요 어떤로또이름도요최고로많이받는금액도요 로또독일 캐나다...

어떤 나라들이 있는지 알려주세요~~

ㅇ ㅓ느 나라가 주최했는지 알려주세요~ 올림픽 주최 국가는 다양합니다. 아래는... 영국 (런던) 10. 핀란드 (헬싱키) 11. 호주 (멜버른, 시드니) 12. 이탈리아 (로마) 13. 독일...

고등학교 자퇴 후 영국&호주 유학

영국이나 호주 대학 유학을 가고 싶은데 지금 상황으로써... 좋은 나라 알려주세요 그리고 파운데이션, 디플로마 그런게 있던데 검정고시 성적으로는 어떤 루트로 유학을 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