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에 관한질문 (내공 겁니다!)

스웨덴에 관한질문 (내공 겁니다!)

작성일 2003.11.14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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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의 최근 뉴스와

전통문화(음식,옷등)을 알려주세요
간단하게도 되지만 자세히 답변 해주시면 정말 감사..^^;;

내공 10 겁니다..

될수있으면 빨리 부탁합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선사시대와 고대/ 중세시대/ 근대/현대


 

선사시대와 고대

스웨덴의 역사는 선사시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BC 12000년 경에 스웨덴의 최남단 지역이 얼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였으며 얼음이 북쪽으로 퇴출됨에 따라 얼음을 뒤쫓던 원시 부족들은 스웨덴에 정착하기 위하여 불을 사용하고 부싯돌로 도구를 만들고 점토로 그릇을 만드는 기술을 개발하였으며 최초로 가축을 사육하였고 작물을 경작하기도 하였다.  

BC 3000년경에는 농업이 시작되었고 BC 1500년경에는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초기 문명에서 금속의 일반적이고 광범위한 사용은 남방인들이 교류를 통해 북방인들에게 철을 알려주게 되어서야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다.

A.D.1세기 동안 Malaren호수 부근의 지역과 거기에 거주하는 Suiones, 즉 스베아인(Svears)들이 주도적 위치를 확보하기 시작하였다. 토지의 경작이 철기의 사용과 농부들이 촌락단위로 공동작업을 하였기 때문에 가속화되었다.

중세시대

웨덴이 위치해 있는 스칸디나비아는 상대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는데 A.D. 700-1000년경의 바이킹 시대가 도래되면서 고립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여행자들이 외국 상품과 지식, 새로운 기술과 사상, 남방화된 문명의 기여물들을 가지고 돌아오면서 문화 교류가 시작되었다.

현재의 스웨덴의 스톡홀름의 북쪽과 그 연안 지역은 당시 바이킹 세력의 전초 기지가 되었으며 대규모의 침략과 동쪽으로의 무역탐험을 위한 기점이 되었다. 바이킹들을 통해 스웨덴은 동방(러시아, 콘스탄티노플)과 영국제도 및 아일랜드를 포함한 서유럽과의 접촉을 계속 유지하였다.

바이킹 원정 이후에는 동방 접촉이 중단되었고 대신 서쪽과 남쪽으로 관심을 쏟게 되었는데 기독교가 영국과 북부 독일로부터 파견된 선교단의 도움으로 점차적으로 전파되었고 처음에는 목조로, 이후에는 석조로 교회가 세워졌다. 스웨덴은 로마카톨릭 교회의 거대한 조직에 편입되었는데 이와 동시에 영역도 더욱 확고하게 확립되었다.

정치에서는 경쟁적인 왕조들이 근본적인 단일체를 깨는 데는 성공하지 못하였고 통치자를 선출하기 위한 일정한 절차가 확립되었다. 또한 최고 가문으로 구성된 평의회가 국왕의 옆에 자리하게 되었다. 지역적으로는 촌락들이 확대되고 새로운 촌락들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각각의 세가마다 국경이 황야로 조금씩 더 뻗어나가게 되었다.

법체계 있어서는 13세기에 지방 법률이 그 시대의 톡특함과 명확성을 띤 법률로 편찬되었는데 이로써 모든 지방의 생활이 최고의 고양된 국면에서부터 가장 평범한 일상사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게 규정되었다.

이 시기에는 또한 사회 집단의 구분이 일어났는데 성직자에 부가하여 귀족계층이 출현하였고 이들은 대토지 소유자이거나 왕 혹은 군주를 수행하는 고위층으로 구성되었으며 귀족들은 중무장한 군사의 의무대신 세금을 면제 받았다.

마침내 농부와 임부들이 주종을 이루는 이 사회는 독일의 상업도시와 접촉하게 되었으며 한자동맹을 조직하게 되었다. 동맹의 최고 무역 중심지 중의 하나가 스웨덴 땅인 고트란트 섬에 있는 비스비 시에 있었는데 스웨덴은 그곳에 의해서 유럽 무역에 충분히 참가할 수 있게 되었고, 동, 철, 버터, 모피와 같은 생산물을 위한 국제적 시장을 획득하였다.

14세기는 문화 번영의 시기였는데 유럽 유형을 본뜬 스웨덴 기사시가가 창조되었고 계시작가이며 수도사와 수녀를 포함하는 새로운 수도회의 창시자인 성 Birgitta가 출현하였다. 1350년이 조금 지나 국민 법전이 편찬되었는데 부분적으로 지방 법률에 기초한 국민법전은 무엇보다도 먼저 평화와 개인의 안전을 보호하는 것을 첫째 목표로 하였다. 토지법은 왕과 평의회 그리고 시민들의 권한의 한계를 각각 정해 놓은 소헌법의 성격을 지녔다.

1397-1520년은 북부의 위대한 정치적 경험의 시기였는데 독일인의 팽창주의적 노력에 대항하여 북유럽 내부의 강력한 결속을 다짐하는 반동의 시기였다. 따라서 칼마르 연합이 탄생되었는데 수 십년간의 투쟁 후 실패하였다. 스웨덴은 금속을 위한 시장으로서의 한자 동맹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스웨덴 국내 상황도 왕의 폭군 권력에 대해 반발하는 경향이 대두되었다.

근대

덴마크와 스웨덴간의 격렬한 투쟁이 발생되었고 이후 칼마르 연합은 해체되었다. I5세기의 혼란 속에서 스웨덴 정치체제는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그것은 의회의 창설이었다. 국민을 대신하는 중요한 정치적 결정을 하였으며 심지어 농부들도 의회의 대표자가 되었다.

1513년부터 폭력의 시기가 시작되었는데 덴마크왕 Cristian II는 스웨덴 수도를 점령하고 이른바 '스톡홀름 대학살' 로 반대파들을 제거하는 대량 처형을 하였다. 그러나 Gustav Vasa에 의해 반란이 시작됐고 연합에 종지부를 찍었으며 스웨덴을 중세 말엽동안 대륙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유형의 국민국가로 만들었다.

1523-1560년까지 스웨덴의 왕위에 올라 많은 활약을 하였는데 1527년에 로마 카톨릭 교회의 수중하에 있는 모든 재산을 국가가 몰수하는데 필요한 조건을 의회에서 창출하여 국가재정의 안정화를 꾀하였다. 중세 말엽이래 왕실이 스웨덴 토지의 5.6%를 점유하고 있는 반면에 교회는 21%나 점유하고 있었다. 곧 교회 토지의 몰수는 국가 강화에 막대한 부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스웨덴 교회는 로마교회와 분리되었고 루터파적인 성격을 띄게 되었으며 국가 교회로 조직되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신의 분명하고도 진실된 말은 왕국 내에서만 설교되어져야 한다' 라는 의회의 포고령과 함께 대대적인 교회 재산 몰수와 정부 행정의 재조직이 시작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근대 문예의 토대가 이루어졌는데 성경의 완역과 스웨덴 종교개혁가 0laus Patri의 찬송가와 신학 저술이 이루어졌다.

Gustav Vasa 이후 스웨덴의 국제 관계는 다시 혼란의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스웨덴은 뤼벡, 폴란드, 러시아와 반복 전쟁을 벌였고 에스토니아 점령 후 Baltic 해에서의 영향력을 확보하였고, 러시아 무역루트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하였다.

16세기 Gustav Vasa의 노력과 더불어 17세기 Gustav II Adolf 가 활약하였다. 스웨덴 이웃에 의해 행사되고 있던 활동 불능의 지배로부터 스웨덴을 해방하였고 팽창을 위해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하였다. 러시아 변경의 정복과 이전의 폴란드령 Livonia를 스웨덴 속령 에스토니아에 병합함으로써 제국을 동쪽으로 확대시켰다.

또한 카톨릭의 반종교개력의 정치적 팽창에 대항하는 전투적 성격을 부가하였고 이는 30년 전쟁의 와중에 있는 유럽의 전 나라를 포함하여 파급되었다. 폴란드에 대한 공격을 시작으로 동프러시아의 중요 도시를 점령하였다. 그 후 1631년에는 Habsburg가와 프랑스로부터 원조를 받은 카톨릭 동맹에 대항하여 Saxony의 Breitenfeid 전투에서 독일을 참패시킨다.

그 다음 겨울에 그는 Mainz 와 Frankfurt에서 평의회를 개최하였고 1632년 여름에 Bavaria를 가로질러 11월 6일 Lutzen에서 전사하게 된다. Gustav II Adolf 는 전쟁 내내 국민의 승인을 받았고 귀족, 성직자, 부르주아, 농민을 포함한 의회가 독일과의 전쟁의 필요성에 충분히 공감하였으므로 국민적 지지와 더불어 그의 정치적 천재성과 군사조작의 재능 및 전략 전술에 대한 진보적 사상의 융합으로 스웨덴이 그만큼의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후 16년 이상 독일과 전쟁이 계속 되었고 1648년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으로 스웨덴은 발틱 남부 연안과 북해의 수많은 중요 속령을 얻게 된다. 하지만 전쟁에 필요한 많은 양의 돈과 물자가 왕실 소유토지를 귀족에게 양도, 판매, 조차를 통해 확보되었으므로 귀족들이 스웨덴 토지의 약 72%를, 왕실과 자영농민이 28%를 보유하게 되는 현상이 벌어졌다.

귀족의 부와 정치적 영향력이 점차 커지자 중앙 정부와 자영 농민에게 위협의 원천이 되었다. Geustav lIAdolf 이후 Kristina여왕은 기선 제압을 위해 힘썼고 이후 Karl Gustav가 나섰으나 단명하고 Karl 즉위하나 섭정정치가 시작되어 귀족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지게 된다. 1672년부터 Karl의 직접통치가 시작되고 그는 남부 지방의 보유를 위해 덴마크와 혹독한 투쟁을 벌인다.

1679년 평화조약체결 이후 Karl 의 '감축'이 시작되는데 귀족의 토지 감축을 시도하여 왕실 35.6%, 귀족 32.9%, 자영농민 31.5%를 점유하게 된다. 국가 재산으로 나오는 수입으로 재정을 충당하게 하였고 자영농민의 지위를 환원하고 확보시켰다. 철 수출품 증대, 목타르 수출 등 경제 생활의 활기를 일으켰으며 상업, 재정, 방위, 법절차, 교회, 교육등에 유익한 영향을 끼쳤다.

Karl 하에 절대군주제가 발전되었고 따라서 왕의 평의회와 의회의 중요성의 감소되었다. 이후 Karl에 의해 독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1700년에 러시아, 폴란드-삭소니아, 덴마크의 공격이 시작되었으나 러시아, 덴마크를 대패시켰고 1706년에 폴란드와 평화조약을 체결한다.

1709년 러시아 심장부 정복을 단행하나 실패하고 터키로 망명, 1715년에 스웨덴으로 돌아오지만 러시아, 폴란드-삭소니아, 덴마크, Hanover-England, Prussia 연합에 대항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고 1718년 노르웨이와의 전쟁에서 전사후 스웨덴은 두 개의 小보유지를 제외한 많은 속국과 점령지를 상실하기에 이른다.

좌절이후 스웨덴에서는 실질적인 의회제도가 점차 발전되었고 해츠(Hats)와 캡스(Caps)의두 당이 생겼다.

해츠는 중상주의 정책을, 캡스는 국민경제 정책을 위주로 정책을 펼쳤다. 이 두 당은 번갈아 가며 정권을 잡았고 서로 경쟁하였으나 후에 스웨덴 헌법의 연속적인 진보에 큰 기여를 하였다.

이 시기에는 또한 경제적, 문화적 진보가 일어났는데 토지 개혁이 논의되었고, 과학의 미개척 영역의 진보에 대한 관심이 있었으며, 스웨덴 신문이 탄생되었다. 린네가 식물분류체계를 창조하였고 Emanuel Swedenborg가 독특한 종교철학을 창출하였다.

1771년 Gustav III가 즉위하게 되는데 강력한 왕권 추진으로 많은 혁명을 감수해야 했다. 1789-1809년은 '구스타프의 절대주의'시기로 왕권 강화 쿠데타를 거행하게 된다. 이 기간에 문학과 예술을 번성시켜 스웨덴 아카데미가 창설했고 않은 양의 드라마 작품을 집필됐다. 또 시민 권리의 평등화와 기본토지법령을 제정하게 된다.

1805년 Gustav IV Adolf 가 즉위하게 되고 열강 패권 경쟁에서 영국을 지지하게 되면서 나폴레옹의 반감을 사게 되었고 결국 핀란드를 러시아에 상실하고 내부적으로는 혁명에 휘말려 1809년 제거된다. 사회변화와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스웨덴도 예외일 순 없었다. 1815-1910년까지 250만에서 510안으로 인구가 증가했다. 19세기의 마지막 4반세기까지 스웨덴은 현저한 농업국가였는데 1850년에는 인구의 90%, 1900년에는 75%가 시골 생활에 의존하였다.

1827년 농업 근대화 법령이 입안되고 19세기 전반에 걸쳐 엔클로우저 운동이 일어나면 시골에 대 변화가 일어나 촌락의 분화, 농업의 근대화가 추진되었으나 시골 프롤레타리아가 형성되었고 인구의 급속한 증가로 그 빛을 발하게 된다.

이후 1880년대에 대대적 이민이 시작되어 농업불황의 여파로 347만의 인구가 이민을 하여 미국에 정착하게 된다. 19세기 중반 무력에 이민이 감소하게 되는데 그것을 산업화의 영향 때문이었다. 근대적 제재소가 설립되고 철도 건설이 본격화되었으며 1870-1890년대에 이르러 농업에서 산업으로 그 양상이 변화되었다. 더불어 금속산업 및 제조활동이 활발해지게 되었다. 이른바 스웨덴 역사성 가장 중요한 경제혁명인 것이다.

사회적으로도 대중운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선거권 확대운동, 노동운동, 금욕운동 등을 토대로 발전시켰고 이것이 협동 운동으로 전환되어 스포츠를 조직화 하기에 이른다. 나폴레옹 전쟁 종결 후 1830년까지 스웨덴은 스태그플레이션과 큰 경제적 어려움으로 슬럼프에 빠지게 되었고, 1834년의 평가 절하 후 통화 가치가 안정되었다. Karl X Johan 은 엄격한 보수 정책을 추구하였는데 헌법에 의해 부여된 왕권을 남용하였고 의회를 무시하고 측근들을 정계 인사에 등용하였다.

1820년대에 자유주의적 대항이 개혁에 대한 점증하는 요구를 불러 일으켰고 1830년에는 자유주의 흐름에 일대 획기적인 약진을 이루었다. 1830년대 말엽에 절정을 이룬 점증하는 자유주의적 대항에 대한 투쟁이 일면에서는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고 거물급 반역자들에 대한 체포 등과 같은 행위로 나타났고 또 다른 일면에서는 예리한 비평, 데모, 거리폭동 등으로 나타났다.

그렇지만 반대자들의 압력이 마침내 왕이 양위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고 자유주의적 반대당이 주류를 이루었던 1840년의 의회가 소위 내각개혁을 강행하게 하였다. 1842년 의무 교육이 도입되었고 1845년에는 자유 기업이 도입되었다. 따라서 무역과 산업의 독점을 행사해왔던 길드는 철폐되었고 동시에 도시들이 중세 이래로 행사해 왔던 무역의 독점 또한 철폐되어 마침내 1864년에 통과된 법령에 의해 무역과 산업에 있어서 기업의 완전한 자유를 창출하게 되었다.

또한 많은 자유주의적 개혁이 도입되어 1845년에 남성과 여성의 상속의 동등한 권리, 1858년에 독신 여성의 권리, 1855-1864년 자비로운 형법개정, 1860년 종교적 자유, 1862년 지방자치 실시 등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이런 일련의 개혁들이 1844년 Karl XV Johan 사후 Oscar I세의 즉위기(1855-1864)에 행해진 것 들이다. 이후 Karl XV(1859-1872) 즉위기에는 권력이 추밀원으로 넘어갔고 J.h.Gripenstedt와 법무상 Louis De Geer의 지도하에 개혁의 과정을 완성하였다.

19세기 초엽부터 대표제에 대한 개혁이 단행되었고 1865-1866년경에 Louis De Geer의 제안에 의해 귀족, 성직자, 부르주아, 농민의 4계급으로 구성된 구의회를 동등한 권한을 가진 양원으로 구성된 의회로 대체하는데 동의가 이루어졌다.

그 후 20년 간 스웨덴 정치는 토지세의 철폐요구와 군사제도 철폐요구의 두 이슈로 지배되었다. 이것은 1873년의 '타협'과 연계되었고, 1892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해결이 되어 토지세를 철폐하고 1901년에 징병군대를 도입한 방위 개혁을 통해 완성되었다.

1880년대의 세계시장 곡가 하락으로 심각한 농업위기가 오자 1888년에 관세가 도입되었고 선거개혁이래 농민당에 지배되어오던 국회 제 2원이 보호주의파와 자유무역파로 분열되면서 1889년에 사회민주당, 1900년에 자유당, 1904년에 보수당의 출현으로 이어져 오늘날스웨덴 정치의 유력한 당들이 형성되게 되었다.

19세기 말엽까지만 해도 외교 정책을 군주의 개인 영역으로 간주되었는데 Karl Johan 시기에는 친러시아 정책이 외교 정책의 주요 기초였으나, Oscar I세 때에 1853년에 서구열강과 러시아간의 크리미아 전쟁을 계기로 친러정책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Oscar 1세 는 처음부터 서구 열강에 우호적 태도를 보임과 동시에 1855년 서구 열강과 '11월 협약'을 체결하였다.

1816년의 프러시아와의 오스트리아 전쟁과 1870-1871년의 독일과 프랑스의 전쟁에서 스웨덴은 중립을 지켰다. 1872-1907년 Oscar ll세 때는 친독일의 외교정책이 수립되어 양국간의 활발한 교류가 발생하게 되 었다. 1870년대 중반부터 스웨덴 정치는 러시아의 위협에 기인하여 독일과 밀접한 우호관계를 맺게 되는데 이 시기에 중립정책의 토대가 놓여지게 된다.

1814-1905년간 스웨덴은 노르웨이와 연합체계를 구축하게 되는데 양국간 국민들간의 합체를 시도하려한 스웨덴과 동등한 지위와 연합에서 완전한 독립적 위치를 요구하는 노르웨이의 입장 충돌로 인해 불협화음이 일어나기도 했다. 1825년 양국간 관세 철폐를 제외하고는 긍정적 결과가 없었다. 그러나 스웨덴 정치에 있어서는 중심 역할을 하게 되었다. 즉. 노르웨이는 의회주의를 요구하고 증대된 민주주의를 요구하였던 스웨덴 급진주의자들011게 하나의 모델로서 기여하였다.

연합 왕이 보통 스웨덴에 거주함에 따라 총독이 노르웨이에서 왕을 대표하였다. 총독직 문제에 대한 분쟁으로 의회와 정부는 논란이 빈번히 발생했고 1884년 탄핵 법정에서의 재판 이후 노르웨이는 의회적 수단으로 통치되는 최초의 나라가 되었으나, 연합은 외부적으로 스웨덴-노르웨이로 대표되었고, 노르웨이 외교 정책이 스웨덴 외무상에 의해 이끌어 졌다.

따라서 1880년대부터 노르웨이 외무상에 대한 요구가 점차 증가 되었고, 1898년에 이르러 노르웨이는 소위 연합의 상징물을 철폐함으로써 독립을 증명하였다. 이후 1905년 9뭘 Karlstad에서 스웨덴-노르웨이 연합은 법적으로 해체되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인구의 약 80% 정도가 여전히 농업에서 생계를 유지하고 많은 수의 이민자를 가졌던 스웨덴은 자본의 대량유입으로 1890년대부터 어느 정도 산업팽창이 시작되었다.

현대

스웨덴 경제의 전환점은 제 1차 세계 대전 직후와 전쟁 동안에 오게 되었는데 주로 외국자본의 지원으로 철도와 산업이 건설되었고 강철, 펄프, 성냥, 베어링, 등대, 분리기, 전화, 진공 청소기와 같은 스웨덴 일용품에 대한 세계적 수요로 인해 급작스럽게 부유국이 되었다.

이 시기의 첫 몇십 년 동안에 시작되었던 경제적 진보는 스웨덴의 계속되는 내적 발전의 토대를 구현하였고 산업화로 인해 공업 노동자들이 급증하고 도시들이 증대되었다. 이촌향도 현상으로 인구의 50%이상이 도시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도 평등선거권에 대한 압력이 증대되었고 1909년 의회의 동의로 효력이 생기게되었다.

1911년 자유주의적 계획의 포인트로 군사비지출 감소가 대두되었는데 1914년 2월 농민대회가 조직되어 국방강화를 요구하자 Gustav는 '알뜰연설'에서 군사방위의 강화를 약속하였다. 1914년 여름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스웨덴은 중립을 천명하였으나 이것은 곧 교전국과의 자유무역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스웨덴의 자유무역 주장은 독일에게만 유리하게 되자 연합국들의 반발로 무역이 중단되고, 1917년 미국의 참전과 무제한적 잠수함전으로 내부적 반감이 고조됨으로 인해 새 외교정책이 도입되었고, 1918년 5월 영·미와의 협정 체결로 무역의 길을 다시 열게 된다.

1917년 총선거에서 좌익 정당인 사회 민주당과 자유당의 승리로 보수주의 정부가 사임했고 결국 Nils Eden의 자유-사회민주정부와 함께 의회주의가 스웨덴에서 명확한 인식을 확보하게 되었다.

새 정부는 헌법 개정을 제안하여 여성 투표권과 지방선거에서 50등급 폐지, 제 1원의 선거제를 보완할 보편, 평등선거권의 도입을 주장하였는데 제 1원의 보수당 다수가 거부하였으나 당시 독일의 패전소식으로 고조된 압력과 인주주의에 대한 노동자들의 요구와 공화국의 도입하에 1918년 11월 답변확정하게 된다.

1918-1920년 사이에 수행되었던 헌법 개정은 스웨덴에서 민주주의 도입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18년까지는 스웨덴 정치는 계급사회 유지를 지지하는 우파와 인주주의 및 동등한 시민권을 요구하는 좌파로 분리되었고, 1920년 이후부터는 사회 민주당과 공산당간에, 자유당과 보수당간에 분리 노선이 생기게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1920년대는 정치적 침체의 시기였으나 경제적으로는 발전의 시기였다. 전쟁 후 디플레이션 극복으로 무역이 활기를 띄었고 재목제품, 펄프, 강철, 제조품을 세계적으로 수출하여 대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30년대 초기에 디플레이션으로 임금감소, 실업증가의 방생에 의해 노동투쟁 등 고통을 겪었다. 그 결과 자유당정부가 사임하고 사회민주당 행정으로 대체되면서 사장정책이론의 건설을 내걸고 거대한 공공 노동자를 출현시켰다.

1930년대의 경제적 위기를 타국에 비해 급속히 극복하여 임금 수준의 회복, 실업률 감소, 무역 조건의 강화 등을 달성하면서 다시 한번 급속한 팽창의 시기를 누렸다. 1930년대는 정치적 준비 기간으로서 재정정책, 노인 연금, 사회봉사, 의료보호, 교육 등의 개혁 법안들이 입안되었고 사회보장, 계급분화의 평등을 목표로 추진하였다.

세계 제 1.2차 대전 동안 스웨덴의 외교정책은 발틱지역에서의 지위 확보와 독일의 위협에 있었다

1차 대전 이후 스웨덴의 안보는 안전하였고, 1925년에 국가 방어시설 감소를 구축하고, 1920년에 국제 연맹에 가입하였고 Finland와 친선관계를 맺었다. 그후 히틀러의 독일 재무장이 시작되자, 1936년 방위를 다시 강화하고 Holland, Belgium, 스위스를 포함한 다른 스칸디나비아 국가들과 밀접한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중립 노선을 따랐다.

1939년 9월 세계 제 2차 대전 발발과 함께 핀란드, 노르웨이에 대한 지원 문제를 두고 내부에서 지지운동이 일어났으나 끝까지 중립을 지켰고, 독일의 요구에 일부 허락만 하였다. 전쟁의 막바지에 이르러 스웨덴은 점점 더 인도주의적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핀란드 유아보호, 노르웨이 피난민 보호, 유태인 수용, 헝가리 유태인들의 처우 개선 요구, 포로 수송 등이 그것이다.

전쟁말엽 사회민주당 내에 기대가 고조되었고 장기간의 토론 후 1930년대에 입안된 개혁법안들이 수행 준비가 되었고 1939년 사회민주당, 농민당, 자유당, 보수당의 대표들로 구성되었고, 1945년에 사회민주당 정부로 대체되었다.

1946-1950년의 개혁의 시기가 도래하여 노인연금, 아동수당, 건강보험, 임대수당, 교육개혁, 대학과 고등교육 및 연구기관의 증설을 답변확정하여 복지사회가 크게 실현되었다. 그러나 이런 개혁들은 경제적 연쇄결과가 뚜렷해짐에 따라 공공지출의 증대를 불러왔다.

1950년대 초 한국 전쟁 동안에 가격인상, 인플레추세로 벼락 경기가 절정에 이르렀고 실업이 증가하게 되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농민당과 협력하여 1951년 연합정부를 구성하고 노동자 연금문제를 개혁한 뒤 1957년 붕괴하게 된다.

1950년대 후반부에 연금이슈가 정치적으로 크게 대두되면서 최초의 국민투표가 실시되어 사회민주당의 의무보충연금도입법안이 46%의 지지를 얻었으나 과반수가 안되서 거부되고 이후에 제 2원이 해산된 새 의회에서 통과되어 수행되었다. 1960년대에 이르러 무역이 안정되기에 이른다.

헌법의 근대화 요구에 동의하여 심의 위원회가 1955년에 임명되어 1970년에 양원의회가 일원의회로 대체되고 1974년 새로 입안된 정부기구가 의회에 의해 답변확정되어 왕의 권한이대표의 의무와 의례적 성격으로 격하되었다. 따라서 의회 의장이 새 정부의 조각을 관장하게 되었고 수상이 내각회의에서 의장 역할을 했다.

1945년이래 스웨덴의 외교정책은 엄격히 중립적이었고 NATO 가입을 사절하였으며, 단지 UN에 많이 참여하여 자치화를 일으키고 식민지의 독립승인에 노력하였다. 스웨덴의 무역정책을 종종 영국과 밀접한 협력관계를 추구하였다. EFTA설립, 북유럽 이사회의 설립으로 유럽내의 자유북유럽 노동 시장이 창출되기에 이른다.

1970년대에 일원체제하에 최초로 선거가 실시되었고 사회민주당은 절대적 다수를 잃었다. 1973년 선거에서는 의석수가 타당과 동등하게 되었고, 1976년 선거 때는 비 사회주의당에 지게된다. 곧 44년간의 사회인주당 헤게모니의 종말이 온 것이었다. 이후 3당 연합정부가 비 사회주의당들에 의해 형성되었다.

1973년 오일파동으로 스웨덴은 현재도 실업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 1950~1970년 초기까지의 산업과 제조업의 빠른 확대는 생활 수준의 견고한 개선의 결과를 낳았으나 1970년대 중반 이래로 하향세를 보였다.

그후 정치적 논쟁은 빠른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경제적 문제와 스웨덴 국가 예산 적자에 대해 집중되었는데 이것은 1970년대 초 이래로 세계의 공업과 원료 생산을 특징지었던 구조적인 변화로 인함이다. 그 결과 1980-1983년동안 실업의 급증이 나타났다.

1982년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이 승리하게 되어 정치의 양극화로 치닫게 되었고, 1985년에는 사회주의 정당이 다수의 의석을 보유하게 되고 자유당은 비 사회주의 반대당 중에서 지도적 위치를 접하게 된다. 1986년 2월 28일 수상 Olaf Palme의 암살로 스웨덴은 외교정책의 역할이 공적 논쟁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영향력도 감사하게 되었다.

오늘날 스웨덴은 높은 생활 수준과 잘 발달된 사회보장제도로 특징지어진다. 그러나 무역과 산업의 일부분은 쇠퇴하였다. 외교관계에 있어서 스웨덴은 열강들간의 분쟁에서 중립적 태도를 취하고 있고 환경문제에 대한 국내외적인 활발한 기여와 개발도상국가들에 대한 원조가 오늘날 스웨덴 정치의 현저한 이슈 중의 하나이다.

 

스웨덴의 역사와 문화

 

1. 선사 시대

스웨덴의 역사의 여명은 스웨덴을 덮고 있던 빙하가 녹아 내리기 시작하여 남방으로부터 민족이 이동해 온 때부터 시작된다.

B.C. 3000년께 유랑 어민과 수렵민들이 스웨덴에 정착하여 곡식을 가꾸고 가축을 기르기 시작하였다. 처음 그들은 돌과 흙으로 만든 연장을 사용하였으며, 그후 점차로 청동과 구리, 철로 만든 연장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바위에 새겨진 유적을 통하여 알 수 있으며, B.C. 1800~1500년께 사용했던 동기로 미루어 보아 이 민족은 대략 지중해 방면으로부터 이동해 왔다고 추측된다.

그후 800~1000년대에 바이킹은 스칸디나비아 반도뿐만 아니라, 멀리는 흑해와 지중해까지 석권하여 북구인의 위력을 유럽 전역에 광범위하게 확장하였다. 이는 스웨덴 역사상의 한 분기점으로 기록되고 있기도 하다. 바이킹 시대로부터 현재까지의 스웨덴의 역사는 매우 복잡하고 독특한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은 스웨덴 역사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중세부터의 역사를 크게 5개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겠다.

 

2. 중세

중세 이전부터 스베아란드 지방의 멜라랜(M aren) 호수 주변에 살고 있던 스베아족은 촌락을 형성하고 집단 생할을 하였으며, 점차로 다른 부족을 흡수·지배하게 되었으니 그들의 해상 활동은 바이킹 시대에 절정을 이루었다. 이 때 바이킹은 콘스탄티노플에 이르는 해로를 지배하면서 유럽과 동방 사이에서 무역을 행하였다. 그 당시 덴마크 영토였던 스웨덴 남부 지방에서 살고 있던 바이킹족은 서부 유럽과 영국의 도서 지방 침입에도 참여하였다.

바이킹족을 해적으로만 보는 경향이 지배적이나 그들의 해상 약탈은 부분적인 현상이었으며, 실제는 당시 극도로 한랭한 기후 때문에 물자의 교류와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서 남쪽으로 민족 이동을 시도한 것이라고 평가하는 역사 학자도 있다. 볼가 강이나 드네프르 강 유역에 스웨덴계 바이킹의 대규모적인 식민지가 건설된 것은 그것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증거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노브고로트와 키예프는 역사적으로 유명하며, 콘스탄티노플까지 모피를 가지고 아라비아인들과 교역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당시 가장 세력이 컸던 종족은 중부 지방의 스베아족과 남부 지방의 예타족이었으나, 600년께 스베아족이 예타족을 정복하여 부족 국가를 이루고 수도를 감믈라 웁살라로 정했다. 830년에는 안스가르라고 불리는 프랑스 수도사가 최초로 기독교 선교사로 스웨덴에 도착하였으며, 영국과 독일 북부로부터 온 카톨릭 선교사들은 많은 원주민을 개종시켜 성당을 세우고 교구를 설치하였다.

바이킹의 활동은 11세기에 종료되었으며 이 시기에 전국적인 통일의 기운이 일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여러 지방에서는 각기 별개의 지방 법률을 보유하였으며, 왕족들은 권력 투쟁에 열중하고 있었다. 정치가이며 새 왕조를 연 비르예르 얄(Birger Jarl)은 13세기 중엽에 법률을 통일하는 기초 작업을 끝내고 스톡홀름을 건설하여 수도로 정했다. 전국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법률은 1350년에야 답변확정되었다.

한자 동맹(Hansaneatic League) 시대에 들어가서는 스웨덴과 유럽 북부 상업 도시 사이에 무역이 증대되었고, 한자 동맹의 상인들은 고틀란드의 중심 도시인 비스비(Visby)와 수도 스톡홀름에 정착해 있었다. 이 시기에 한자 상인의 경제적·정치적 지배가 강화되어 스웨덴은 잠시나마 독일인의 세력하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 스톡홀름 원로원의 반수 이상을 독일인이 차지한 사실은 그 당시의 정세를 역력히 설명해 주고 있다.

3. 독립 대국

스칸디나비아 3국은 14세기 초반에 통합되기 시작하였다.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1319년부터 한 왕의 통치를 받았으며, 이어서 1397년에는 덴마크를 포함한 스칸디나비아 3국이 한 사람의 왕에게 지배를 받게 됨을 의미하는 역사적·국제적인 칼마르 동맹(Karlmarunionen)이 결성되었다. 이 동맹은 한자 동맹의 지배권에 대한 방파제로서 결성된 것이었으나, 왕위권이 덴마크에만 부여되었던 관계로 스웨덴인들의 불만이 고조되었으며 점차 덴마크인들을 외국의 압제자로 간주하게 되었다.

1430년대에는 스웨덴의 농민 지도자 엥엘브렉트(Engelbrekt)가 덴마크 통치자들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며, 칼마르 동맹과 이 기구의 외교 정책에도 반항하였다. 그후 덴마크와의 완전한 분리를 요구하는 소리가 고조되었으며, 1521년에는 스웨덴의 젊은 귀족인 구스타브 에릭손 바사(Gustav Eriksson Vasa)가 또다시 반란을 일키고 성공함으로써, 스웨덴은 완전히 독립된 왕국을 건설하게 되었다. 15세기에는 귀족, 성직자, 상공인, 농민 등 4개 계급의 대표자들이 모인 스웨덴 역사상 최초의 의회가 구성되었다.

1523년에 왕위에 오른 구스타브 바사는 근대 주권 국가로서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그는 1527년에 기독교에 대한 개혁을 단행하여 카톨릭 교회와 절연하고 개신교(프로테스탄트)를 받아들였다. 1560년에 그가 사망한 후, 그의 세 아들이 차례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1611년에 왕위에 오른 구스타브 바사의 손자인 구스타브 아돌프 2세(Gustav II Adolf)는 북방의 사자로 불렸는데, 그는 리보니아를 정복해 스웨덴 동부를 발트 해 유역까지 확장하고 중앙의 행정력을 개선, 강화하였다. 1630년에는 독일로 진격하여 30년 전쟁에 개입하였다. 그는 청교도의 한 선교사로서 브라이트펠트(Breitenfeld) 전투에서 카톨릭 연방을 패배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나, 1632년 뤼첸(L zen)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그후 스웨덴은 1648년 웨스트파리아 조약에 의하여 독일 북부의 광대한 영토를 얻게 되어 유럽의 새로운 강대국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어서 칼 구스타브 10세(Karl X Gustav)는 덴마크를 패배시켜 현재의 남부 스웨덴 지방을 덴마크로부터 획득하였다. 이 때가 스웨덴이 군사적으로 가장 용맹을 떨쳤던 시기이다. 한편, 핀란드는 1100년께부터 해안 지대를 중심으로 장기간 스웨덴의 세력하에 놓여 있었다.

이와 같이 대국이 된 스웨덴도 1700~1721년의 북방 대전쟁에서 덴마크, 러시아, 폴란드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젊은 칼 12세(Karl XII)는 용감히 싸워 러시아군을 대파하고 덴마크와 폴란드를 항복시켰지만, 볼타바(Poltava) 전투에서 러시아에 크게 패한 후, 터키로 도주하여 1718년에 사망하였다. 결국 핀란드를 제외한 발트 해 남부와 서부에 있는 많은 영토, 그리고 북부 독일의 영토를 상실하여 스웨덴은 유럽의 강대국 대열에서 급속히 탈락하였으며 이로써 스웨덴의 대국 시대는 막을 내렸다.

4. 번영과 융성

1718~1772년까지는 스웨덴 의회의 역할이 상당히 두드러진 기간이었다. 이른바 하타르(Hattarna) 당과 뫼소르(M sor) 당으로 불리는 두 정당이 서로 정권을 장악하려 하였으며, 그들의 투쟁은 의회를 구성한 네 개의 계급간에 전개되었다. 왕의 절대 권한이 상당히 약화되었기에 정당들은 이 시대를 자유주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불안정한 정치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에는 경제적·정치적으로 상당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농업의 근대화와 함께 철광 생산이 증대되고, 외국 무역이 급속히 번창하였으며, 신문이 처음 발간되고 과학도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다가 1772년에 즉위한 구스타브 3세(Gustav III)는 의회의 권한을 파기하고 새로운 전제 왕권을 행사하였다. 그는 주로 음악, 미술, 문학 등을 진흥시키는 데 노력하여, 이 시기에 스웨덴은 문학과 예술 부문에서 꽃을 피웠다. 스웨덴 한림원과 왕립 오페라 극장, 그 밖의 문화관들이 이 시기에 설립되었다.

구스타브 3세가 1792년에 암살당한 후, 그의 아들인 구스타브 4세는 1805년에 러시아와 한편이 되어 나폴레옹에 선전 포고를 했으나, 그후에 러시아는 나폴레옹과 강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결과 러시아는 당시 스웨덴 영토였던 핀란드를 잃게 되었다(1809년). 국민들은 왕의 퇴위를 강요하게 되어 구스타브 4세는 폐위되었다. 이 때 왕과 의회의 세력 균형을 꾀하고자 권력의 분립을 기초로 한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으며, 나폴레옹 휘하의 명장 베나도트를 스웨덴 왕위에 오르도록 초청하였다. 베나도트는 즉위하여 칼 요한 14세(Karl XIV Johan)가 되었으며, 그가 바로 스웨덴 현재 왕가의 시조이다.

5. 근대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공격했을 때, 국민들은 프랑스의 원조를 받아 핀란드 영토를 러시아로부터 되찾을 것을 기대했으나, 나폴레옹의 대국주의와 프랑스 군의 약점을 잘 알고 있던 칼 요한 14세는 국민의 기대와는 반대로 러시아를 공격하는 모험을 저지르지 않고 오히려 노르웨이를 양도받는 조건으로 1813년에 반나폴레옹 군에 가담했다. 스웨덴 군대는 그 당시 덴마크 군대와 동맹을 맺은 나폴레옹 군대와 최후의 전투를 하여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쟁은 스웨덴 역사상의 마지막 전쟁이었으며, 이로 인하여 1814년 스웨덴은 덴마크로부터 노르웨이를 양도받았다. 노르웨이 국민들은 이에 강력히 반발하였으나, 결국 1815년에 스웨덴과의 합병에 마지못해 동의하게 되어 1905년까지 합병이 지속되었다.

나폴레옹이 패배하고 나서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평화로운 가운데 발전이 계속되는 기간이었다. 농업을 발전시켜 농민들은 점차 경제적·사회적·정치적 지위를 강화해 나갔으며, 위생 시설과 식품 공급의 개선으로 사망률이 낮아짐과 동시에 급속히 인구가 증가하였다. 그러나 인구의 급격한 증가로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는 농민 계층이 늘어났으며, 그들의 생활은 점차로 비참해졌다. 그리하여 1860년대에서 1914년 사이에 스웨덴 인구 가운데서 약 100만 명이 신천지를 찾아 미국으로 이주해 갔다. 이와 함께 사회 전반에 걸쳐 수많은 개혁이 단행되었다. 낡은 철강 공업은 점차로 근대화되었고, 제재업이 급속히 발달하였다. 1842년부터는 무상 초등 교육 제도를 확립하였고, 상업 은행 제도를 실시하게 되었으며, 1850년대에는 국유 철도의 건설이 시작되고, 지방 행정 조직의 근대화가 이루어졌다. 1865년에는 4개 신분의 신분제 의회가 해체되고 처음으로 양원제 의회가 답변확정되었다.

1870년대에 이르러 가난한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하였으며, 국민의 대다수가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스웨덴은 처음으로 산업화의 물결을 체험하게 되었으며, 제재소와 펄프 공장 그리고 철강 회사들이 제품을 대량으로 생산하게 됨에 따라 국민들의 생활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다.

그러나 의회는 물론 행정부와 일반 관리들은 새로운 산업 시대의 요구에 주저할 뿐만 아니라 이에 저항하였으며 새 시대에 따른 정치 개혁을 외면하였다. 이에 대하여 하층 계급에서 이른바 민중 운동이 일어났다. 공업화에 따라 노동자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였으나 그 당시 이들은 투표권을 갖지 못하였다. 노동자들은 강력한 조합과 정당을 결성하여 보통 선거권을 얻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여, 마침내 1918년에 그 뜻을 이루게 되어 일반·보통 선거권이 인정되었다.

노르웨이와는 1814년 연합 왕국을 형성하였으나 이 동맹은 평화적으로 해소되었으며, 스웨덴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모든 전쟁으로부터 중립을 지키기 위하여 의식적으로 비동맹 정책을 답변확정하였다. 스칸디나비아 3국은 1차 세계 대전중 협력하여 모두 중립을 유지하였다. 스웨덴의 비동맹 정책은 이 기간중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1차 세계 대전 후 스웨덴은 점차로 근대적인 의회 민주주의 체제를 발전시켜 나갔으며, 1920년에는 사회 민주 노동당(Socialdemokratiska arbetarpartiet) 내각이 발족된다. 그러나 정권의 빈번한 교체로 인한 다수당 체제의 문제와 의사 진행 과정에서의 미숙함이 드러나기도 하였다.

1930년대는 스웨덴이 복지 국가로 발돋움한 시기였다. 세계 경제가 침체되었던 이 무렵, 1932년에 실시된 총선거에서 국민 다수의 새로운 지지를 얻은 사회 민주당이 농민당(Bondef bundet)과 연립 정부를 구성하였으며, 침체된 국내 경제를 타개하기 위한 공익 사업을 계획하고, 농민 소득을 보조하며, 어린이를 위한 양육비를 책정하는 등 제반 개혁을 단행하여 사회 보장 제도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사회 민주당은 단독으로 혹은 다른 정당과 연합하여 1932~1976년까지 44년 동안 정권을 장악하였다.

2차 세계 대전중에는 사회 민주당의 페르 알빈 한손(Per Albin Hansson)이 4개 정당의 연립 정부를 이끌면서 대외적으로 독일과 연합군에게 적당한 회유 정책을 쓰면서 평화를 유지하였다.

6. 전후 시대

2차 세계 대전은 종료되었으나 국제 정세는 여전히 불안한 상태였다. 1944년 9월 소련에 항복한 핀란드는 1947년에 대소 상호 우호 원조 조약을 체결, 강력한 소련의 영향하에 놓이게 되었으며, 대전중 덴마크로부터 독립한 아이슬란드를 포함하여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등 4개국은 새로운 북구 블록을 형성하였다.

북구 제국은 2차 세계 대전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서 소국 단결의 필요성을 통감했던 것이다. 이들은 모두 전쟁 전이나 전후를 통해서 사회 민주주의 정당이 집권한 국가였다. 이들 정당의 정책은 어디까지나 온건한 중도주의적인 것이었으며, 자유와 민주주의의 승리를 구가하면서 정치적 민주주의 단계를 넘어선 경제적 민주주의의 단계로 진입했다.

2차 세계 대전중 소련과 나치 독일의 침공으로 점령당했던 덴마크와 노르웨이는 전후의 불안한 국제 정세와 소련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1949년 4월에 발족한 NATO(북대서양 조약 기구)에 가입했으나 스웨덴은 계속 중립을 고수하기 위해 NATO에 가입하지 않았다. 스웨덴은 어느 나라와도 동맹을 체결하지 않는다는 전통적인 중립 정책을 100년 이상이나 유지하고 있다.

타게 에르란데르(Tage Erlander)가 수상으로 재임한 1946~1969년까지의 기간중에 스웨덴에서는 경제적 번영과 함께 많은 사회 개혁이 이루어졌다. 연금 제도를 보완한 것을 비롯하여 사회 보장의 충실한 실시와 제반 복지 향상을 위한 정책이 추가로 수립되었다. 1971년 구성된 단원제 의회에서도 팔메(Palme) 수상이 이끄는 사회 민주당이 계속 정권을 장악하였다. 1973년 9월에 실시된 총선거에서 사회 민주당과 비사회계 블록간의 의회의 세력 분포는 175 대 175로 균등하게 나타났으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덕망 있는 학자이던 구스타브 아돌프 6세(Gustav VI Adolf)가 서거하였고 그의 손자인 칼 구스타브 16세(Karl XVI Gustav)가 왕위를 물려받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30년부터 장기 집권해 오던 사회 민주당은 1976~1982년까지 잠시 실권했다가 1982~1991년까지 재집권하였으며, 이 사이에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던 팔메 수상이 비명에 가고 그후 계속된 경제 사정의 악화와 국내외 정세의 변화로 1991년 9월 총선에서 다시 비사회계 정당으로 정권이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1994년의 총선 결과 사민당은 또다시 재집권에 성공하였고, 1998년의 선거에서도 재집권의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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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완동물도 EU여행땐 여권있어야
내년부터 주인과 함께 유럽연합(EU) 회원국을 여행하는 애완동물들은 여권이 있어야 한다. 유럽연합은 27일 개나 고양이 등 애완동물을 동반한 여행객들과 동물의 편의를 위해 내년 7월3일부터 역내를 여행하는 애완동물들에게 EU 여권을 발급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EU 로고가 새겨진 지갑 크기의 이 여권에는 동물의 신원확인을 위한 마이크로칩과 광견병 예방접종 확인 도장과 같은 의료기록은 물론 문신 등 신체적 특징도 기재된다. 사진은 선택사항이다. 이 조치가 시행되면 애완동물들은 지금까지 EU 15개국이 각각 발급하던 동물 의료기록 등 까다로운 서류 대신 여권을 가지고 역내 국경을 넘을 수 있다. 애완동물 여권은 개·고양이·담비 등을 대상으로 하며 쥐·파충류·물고기 등은 대상에서 제외된다.

그러나 영국·스웨덴·아일랜드 등은 EU 동물여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며 자국의 입국절차를 준수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미국·캐나다·일본 등을 여행할 때도 이 여권이 동물들의 입국에 필요한 절차를 대신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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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생활상-

1. 인종·언어·국민성
스웨덴의 인종은 스웨덴인이 95%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 외에도 우랄 알타이어계에 속하는 핀(Fin) 족이 약 2만 명 정도 북부 국경 부근에 살고 있다. 스웨덴인은 게르만인의 한 갈래로 다른 인종과의 혼혈 정도가 적으며 매우 순수한 북유럽인이다.

언어 역시 북부 지방의 순수 토착민인 라프(Lapp) 족을 제외하고는 북게르만어파의 일종인 스웨덴어를 사용하고 있다. 신장은 평균 171cm이며 머리 생김새는 폭이 좁고 앞뒤가 긴 장두형으로 사지가 길며, 피부는 백색, 머리카락은 대체로 금발이고, 벽안을 가진 사람이 많다.

2.종교
스웨덴인들도 본래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자연 숭배 사상 등의 원시 종교를 믿고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 문화가 바이킹이 활동하던 시기인 9세기께부터 스웨덴에 서서히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스웨덴에서의 기독교 정착은 그리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웁살라(Uppsala)에 근거를 둔 우상 숭배자들이 강력히 저항하고 있었고, 또한 민중들이 가지고 있었던 북구 토속 신앙이 단시일에 소멸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 투쟁이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나, 결국 1150년께에 기독교가 승리를 거두어 스웨덴은 열렬한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이는 기독교를 신봉하던 호족과 왕실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한 결과이며, 1164년에는 웁살라에 처음으로 교구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1517년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 개혁은 스웨덴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스웨덴을 덴마크로부터 독립시킨 구스타브 바사 왕의 개혁 정책과 맞물려 그 동안 왕족과 결탁하여 권세를 누리던 승려 계층이 물러나게 되었고, 결국 스웨덴은 개신교를 받아들여 루터교에 따른 새로운 국가 교회를 건립하였다.

3. 축제


스웨덴에서는 매년 6월 23일 또는 그 전 토요일 저녁부터 하지 축제를 시작한다. 이 축제는 겨울이 길고 자연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 나라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크리스마스 못지않은 커다란 행사이다. 이날 저녁은 전국에 걸쳐 야외에서 백야의 하늘 아래 댄스 파티가 벌어진다. 이 하지 축제가 가장 성대하게 전통적인 형태로 시행되고 있는 곳은 달라나(Dalarna) 지방의 실얀 호반이며, 이 때에는 이 지방 사람뿐만 아니라, 국내외에서 많은 관광객이 모여들어 대성황을 이룬다. 이 밖에도 스웨덴은 독실한 기독교 국가로서 기독교 관련 행사는 모두 기념하여 공휴일로 지정하고 있다.


4. 인물


잉마르 베리만(Ingmar Bergman):세계적으로 매우 유명한 스웨덴의 감독으로, 대표작에는 `세 편의 기이한 사랑 이야기', `여름의 간주곡', `여성들의 비밀', `모니카', `제 7의 봉인', `여름밤의 미소' 등이 있다.

그레타 가르보(Greta Garbo):“가르보가 출연한 영화에서 가르보를 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말이 증명하듯 그녀는 뛰어난 연기로 형편 없는 대본과 감독을 구제한 스웨덴의 여배우이다.

군나르 뮈르달(Gunnar Myrdal):뮈르달은 1898년 스웨덴에서 태어난 경제학자로 1974년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베틸 올린(Bertil Gotthard Ohlin):1899년 스웨덴의 클리판에서 출생한 경제학자이자 정치학자로 1977년 국제 무역 및 국제 자본 이동 이론에 대한 연구를 인정받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였다.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August Strindberg):우리 나라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국제적으로 유명한 작가이며 대표작으로는 소설에 『빨간 방 R a rummet』(1879), 희곡에 「숙녀 줄리 Fr en julie」(1888) 등이 있다.

칼 본 린네(Carl Von Linn :우리에게 이미 그 이름이 친근한 린네는 세계적인 식물학자로서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마틴손(Martinsson):우리에게는 생소한 이름이지만 그는 북구 문학의 거장으로 오늘날 문학적 대국주의를 타파하고 세계의 각광을 받은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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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서쪽지역에는 스웨덴 음식이 많고, 동쪽지역에서는 러시아 음식을 맛볼 수 있다. 다른 현대적인 대도시에서와 같이 다양한 국제수준의 레스토랑도 찾을 수 있다. 이 지역 토속 진미로는 검은 소시지로 탐페레 지역의 특산물인가 있다. 피, 양파, 보리로 만드는 이 소세지는 붉은 월귤 나무 열매가 곁들어 진다. 청어, 연어등 다른 생선요리도 일품이다. 8월은 왕새우 대하가 제철이다. 이 왕새우 요리는 핀란드 보드카를 가미해 먹으면 특히 맛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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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입니다.
더 궁금하신 것이 있으시면
질문 해 주시기 바랍니다.

스웨덴에 관한질문 (내공 겁니다!)

스웨덴의 최근 뉴스와 전통문화(음식,옷등)을 알려주세요 간단하게도 되지만 자세히... 내공 10 겁니다.. 될수있으면 빨리 부탁합니다. 선사시대와 고대/ 중세시대/ 근대...

스웨덴에대해서

... 신고들어가고요 내공겁니다 부탁드릴게요 이번주 수요일까지 해 주세요 1. 대한관계 스웨덴은 한국 전쟁 당시에... 1967년 4월 12일 무역에 관한 의정서를 체결한 이후...

피온2 정착 스웨덴vsAS로마 질문 내공쩔~

... 그러나 스웨덴의 융베리선수는 카드를 구할수 없습니다 모두 사재기카드로 찾기가 어려우실겁니다 이브라히모비치도 은카는 상당히 비싼 걸루 알고있구요 그리고 그...

스웨덴 정부형태특징과 장점 단점을...

제곧네입니다 내공 150겁니다 님의 질문에 답변을 합니다. 스웨덴 정부형태특징과... 2000년 3월 당시 사민당 정부가 유로화 가입에 관한 국민투표 실시를 결정하여 같은...

공무원업무에 관한 질문이요 내공 겁니다

일반 동사무소 말고 고용노동부 고용노동청 소속 고용복지센터 직원이 상담자가 기초수급자인지 알수 있나요? 조회나 아니면 초기상담으로 기록된 내용이 있다면...

스웨덴에 대하여...

... 내공 55 겁니다!! 시간은 8시 10까지 입니다! 당연히 오늘... 29이고 질문자 채택, 네티즌채택인 답변이네요 도움이 되실거같아서요 ..! 전 출처밝혔습니다^^ 스웨덴 유럽 북부...

아이돌 생일카페에 관한질문 내공 겁니다

1. 보통 음료수? 간식 같은거 얼마인가요? (평균으로 알려주시옵서서) 2.생카에서 주는 비공굿은 직접 뽑아서 주는건가요? 3. 근데 그 비공굿들 주는거 불법 아닌가효? 4. 생카...

스웨덴 데스메탈, 가수, 밴드 좀...

... 들어봤는데요 내공이 쌓인밴드라 그런지 명곡은 많은데 솔직히 전 이 두개 빼곤 뭐가 좋은지 잘 모르겠어요 질문3. 스웨덴의 가수랑 밴드 좀 알려주세요^^ Kent...

KCVX, KSSX 에 관한 질문 내공겁니다.

요즘들어 부쩍 군사분야에 관한 관심이 많아져서 질문합... 질문이 좀 많네요..ㅡㅡ 내공 팍팍드림 1. LPX에 700명이... (이래서 미국이 무섭다는겁니다.. 물론, 미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