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외 유명 디자이너들 중에는 어떤 사람이 있나요?

국/내 외 유명 디자이너들 중에는 어떤 사람이 있나요?

작성일 2006.02.19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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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

저는 국/내 외 유명 디자이너들에 대한 자료가 필요해서

유명 디자이너들이 누가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제가 디자인을 전공하는 학생이 아니라서

디자이너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부족합니다.

또한 인터넷이나 서점, 도서관 등에서 조사했을 때에는

몇 몇의 같은 인물들만 소개되어 있어서

저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디자이너들의 이름만 알아도 되니

아시는 분들은 모두 답변 부탁합니다.

감사합니다 *^^*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05/06 F/W서울 콜렉션 참가 디자이너

 

신장경 손정완 김동순 이상봉 장광효 송자인 노승은

 

이규례 설윤형 최연옥 엑조 이주영 김선자 루비나 박윤수

 

오은환 류웅현 이문희 김규식 김철웅 박항치 김삼숙

 

지춘희 서은길 최창호 천애주 송지오 심설화 강희숙

 

홍승완...정욱준

 

해외가 더 유명하죠.

 

칼 라거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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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넬'등 3개브랜드 거느린 유행의 제왕...소장도서 23만권 ##.
세계 패션은 창의력 번뜩이는 천재들이 이끌어간다. 끊임 없이 새로 움을 제시해야 하는 세계. 제자리에 머물러 있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카이저 칼, 킹 칼, 제왕…. 사람들은 패션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58) 를 그렇게 부른다. 디자이너 세계에서 라거펠트만큼 다재다능하고 정력 적이며 자기관리에 철저한 인물도 드물다.

그는 몬테카를로 로마 브리타니 함부르크 베를린 파리,6곳에 저택을 두고있다. 그 집 6채에 소장한 책만도 23만권. 화려한 쇼와 모델과 파 티 대신, 그는 책에 파묻혀 지낸다.
오전 5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예술 관련잡지나 전기, 역사책들을 읽으며 디자인을 구상한다. 신문 잡지에 서평을 즐겨 기고하고, [샤넬] 홍보에 필요한 글과 사진도 직접 쓰고 만든다. 영어, 불어, 독일어, 이탈리아어에도 두루 능통하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톱 디자이너라면 자유분방할 법하지만 라거 펠트는 마치 성직자처럼 단정하기만 하다. 차림도 늘 검정 슈트에 흰 셔츠, 짙은 선글라스와 꽁지머리다. 수수께끼에 싸인듯, 조금은 그로테 스크해 보이는 이미지를 그는 즐긴다.

그 자신은 한결같은 데 비해 그의 디자인은 혁신적이다. 70년대 중반 [클로에] 디자이너 시절, 포스트 모더니즘을 도입해 하이패션과 스트리 트패션을 혼합시킨 시도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세련되면서도 캐주얼한 옷을 원하던 당시 분위기를 그는 정확히 파악했던 셈이다. 그는 의상이 정말 패셔너블해지려면 액세서리나 메이크업, 모델, 음악, 이미지와 환 상이 함께 가야 한다고 강조하며 슈퍼모델 시스템을 앞장서 도입했다.

그는 {패션은 파괴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큰소리친다. 그러면서도 냉철한 현실주의자다. {옷은 순간을 반영해야한다. 너무 빠르거나 늦으 면 소용이없다.} 브랜드 하나를 맡아 디자인을 책임지기도 벅찬 마당에 그는 3개 브랜드를 거느리고 있다.
세계적 여성복 브랜드 [샤넬](83년∼), 주로 모피제품을 생산하는 이탈리아 브랜드 [팬디](65년∼), 그리고 자 기이름을 내건 [칼 라거펠트](84∼)다.

25년 넘게 디자인해온 프랑스 브랜드 [클로에]는 올해초 전 비틀즈 멤버인 가수 폴 매카트니의 딸 스텔라 매카트니에게 넘겨줬다. 구두,모 자같은 액세서리 디자인은 물론 화장품회사 [엘리자베스 아덴]의 향수 개발담당이기도 하다.

38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사업가인 스웨덴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 이에서 태어난 라거펠트는 일찍부터 재능을 꽃피웠다.
13살때 어머니가 데리고 간 함부르크 예술학교장이 {당신 아이는 옷에만 관심이 있다}고 하자, 그는 초상화가가 되려는 꿈을 깨끗이 접고 이듬해 파리로 떠났다.
16살때 국제양모사무국 경연대회 외투디자인에서 1등을 차지한 것을 계 기로 55∼58년 디자이너 피에르 발망에게서, 58∼63년 장 파토에게서 도제수업을 받았다.

그는 84년 신화적 패션 디자이너 가브리엘 샤넬의 후계자로 지목받 으면서 정상에 섰다. 그는 전통과 혁신을 중재하는 균형감각을 [샤넬] 에서 십분 발휘하고 있다. [샤넬]의 핵심요소들, 즉 견고한 천, 독특한 트위스트, 상식과 패러독스의 혼합을 그대로 지키면서 발랄함과 유머를 가미하는 수완이 빛난다.

일부에서는 라거펠트가 {가죽부츠를 신고 들어와 샤넬의 정신을 망 치고 있다}고 혹평한다. 하지만 그가 디자인을 맡으면서 고객 연령대가 50대 중반에서 20대로까지 젊어지고 매출도 연5억달러로 불었다.
{과거 를 회상하고 존경한다면 창작은 불가능하다.} 예순을 바라보면서도 라 거펠트는 그런 이유로 회고록은 쓸 생각조차 하지않는다.



비비안 웨스트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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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수록 파격 `톱' 디자이너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92년 켄싱턴궁으로 엘리자베스 여왕을 방문하 면서 속옷도 걸치지 않은 채 속이 비치는 드레스를 입었다.
카메라 플 래시탓에 나체에 가까운 모습이 드러났고, 그런 사진이 여러 신문을 장식했다. 당시 51세였다. 이듬해엔 그에게서 패션을 배우던 26살 연 하 제자와 결혼해 지금도 금슬좋게 살고 있다.

웨스트우드는 나이가 들수록 과격해지는 사람이다. 평범한 이웃집 아주머니처럼 생겼지만, 파격적이고 섹시한 옷을 만드는 데에는 추종 을 불허한다.

컬렉션을 열 때마다 기상천외한 발상으로 모든 이가 놀라고 즐거워 한다.
커다란 엉덩이 장식(버슬)을 단 스커트, 거대한 깃털 목도리, 화려 한 무늬를 새긴 코르셋, 짧은 속바지에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긴 부츠, 블라우스 위에 브래지어 입기, 스커프를 둘러 쓰고 중산모 덧쓰기….

그의 패션은 고정관념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아예 깨부순다.

그도 어느 시점까지는 외모만큼이나 평범한 맞벌이 주부였다. 대학 을 나와 교사 생활을 하다 21살때 일찌감치 결혼했다.
상대는 댄스홀 매니저였던 데레크 웨스트우드. 공업지대 더비셔에서 공장 근로자 딸 로 태어난 그는 17살 될 때까지 미술책이나 영화 구경 한번 한 적이 없다.
예술적 소양을 감지할 부분이라곤 어릴 때 멋부리기를 좋아했 다는 것과, 교사 생활중 틈틈이 보석 디자인을 해서 벼룩시장에 내다 파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다 결혼 3년 만에 예술학교 학생이던 말콤 맥라렌을 만나 사랑 에 빠지면서 인생이 1백80도 달라졌다.
전 남편과 맥라렌에게서 각기 얻은 아들 둘을 키우면서 교직을 계속하던 그는 71년 맥라렌의 제의로 런던 킹스로드에 펑크족을 겨냥한 가게 [렛잇락(Let it rock)]를 내고 디자이너로 변신한다.
{나는 우연히 디자인을 하게 됐지만 그 일을 즐 겼다}고 그는 과거를 돌아본다. 현대문명을 거부하고 저항하던 펑크족 들은 과격한 문구를 써 넣거나 찢어진 티셔츠 따위를 만들던 웨스트우 드에게서 패션 출구를 찾았다.

79년 [해적]을 주제로 파리컬렉션에 화려하게 진출하면서 그는 세계 패션에 새로운 낭만주의 물결을 일으켰다.
82년 [야만] 컬렉션에서는 서구패션사에 처음으로 비대칭 겹쳐입기를 제시했다. 그해 남미 인디언 에서 영감을 얻은 [버팔로 걸]에서는 스커트와 속치마를 겹쳐 입히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웨스트우드가 디자이너로서 한 단계 더 올라서게 된 것은 아이러니 컬하게도 펑크 패션에 이론적 배경을 제공했던 맥라렌과 손을 끊으면서 부터다. 그는 {맥라렌이 말로만 펑크를 외치고 있다}고 비판하며 {진짜 펑크 옷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맥라렌과는 20년 넘게 동지처럼 지냈 지만, 맥라렌이 여배우와 가까워지면서 84년 완전히 결별했다.

영국 언론들은 그를 [영국 패션계의 여왕] [펑크의 1인자] [살아있 는 국보]라 칭송한다.
지난해 [크리스티앙 디오르]와 [지방시]의 대표 디자이너로 영국의 젊은 디자이너 존 갈리아노와 알렉산더 매퀸이 발탁 된 것도, 웨스트우드가 길을 닦아 놓은 덕분이라고 칭찬한다. 하지만 그는 등뒤에서 자기를 비웃는 영국보다는 [예술]을 알아 주는 파리를 주 무대로 삼았다.

그는 말을 꺼냈다 하면 동문서답에 중구난방이다. 갖가지 다른 화제 를 연이어 끄집어내는 그를 당해 낼 재담가가 드물다.
러셀과 헉슬리, 루소, 볼테르같은 철학가 이야기를 즐겨 인용해서 [아마추어 학술가]로 도 알려져 있다. 그는 현대 문명을 쓰레기라고 매도한다. 영화는 {실패 한 커뮤니케이션 방식}이라며 일절 보지 않는다. 집에는 TV를 들여 놓 지 않는다.

그는 엘리트주의자다. {공작은 매와 섞이지 않는다. 제비는 굴뚝새 와 함께 날지 않는다}며 평등주의에 반기를 든다.
[남과 달라야 한다, 이른바 현대적인 것은 모조리 배척한다]는 생각이 남다른 패션을 만들 어 내는 원천인지도 모른다.


조르지오 아르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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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함없는 스타일 꾸준한 인기..한해 매출 17억달러 ##.
젊어 무심코 들어선 길, 갈등끝에 그길을 벗어나 많은 이가 다른 길을 간다. 성가한 뒤, 돌아보면 그가 이룬 것들에는 흔히 처음 가던 길의 흔적이 역력하다. 조르지오 아르마니(63)가 그랬다.

아르마니는 원래 의학도였다. 밀라노 외곽 피아첸차에서 운수회사 매니저 아들로 태어난 그는 비교적 유복한 형편 덕분에 베간 의대에 진학했다. 2년쯤 다니던 어느날, 피를 보는게 지겨워졌다.
대학을 때 려 치우고 그는 밀라노 대형백화점 리나센티에 남성복 바이어 조수로 들어갔다. 평생 업이될 남성복에 대한 안목을 이때 키웠다.

그는 80년대부터 세기말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단순하고 고전적인 수트]로 세계 패션을 호령하고있다.
지난해 매출 17억달러. 6개 의상 라인과 24개 라이선스 사업, 전세계에 2천개 넘는 매장, 런던과 밀라 노에 있는 카페,피렌체 레스토랑에서 벌어들인 돈이다.

하지만 그 성공엔 외과 메스 놀림처럼 꼼꼼한 손길이 있다. 그는 컬렉션에 나가는 옷은 물론, 매장 디스플레이, 레스토랑 종업원이 끼 는 장갑에까지 빠짐없이 신경을 쓴다.
그가 직접 디자인하는 품목은 1년에 3천가지가 넘는다. 그는 오전8시부터 저녁 8시까지 일하는 [일 중독자]다.

그렇듯 그는 매우 집요하고 신중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의사와 닮은 직업정신을 지녔다. 그리고 [변화]를 싫어한다.
[혁신]을 생명으로 아 는 패션 디자이너로선 금기 같은 성격을 타고난 셈이다.
하지만 숨가 쁘게 유행이 돌변하는 속에서 그는 역설적이게도 한결같은 색상과 스 타일로 세계 패션을 제패했다.

그의 옷은 베이지나 회색같은 중간톤, 클래식하고 심플한 스타일로 대변된다. 80년대 전성기만큼은 못하지만, 그의 옷은 여전히 높은 인 기를 누린다.
성공한 비즈니스 맨들이 가장 입고 싶어하는 옷, 외모 보다 재능과 지적 분위기로 승부하겠다는 할리우드 스타들이 즐겨 찾 는 브랜드가 바로 [아르마니]다.

그는 64년 남성복 디자이너 니노 세루티에게 발탁돼 수업을 받는 다. 하지만 그를 디자이너로서 대성시킨 사람은 11살 어린 건축학도 세르지오 가레오티였다.
{당신은 누구보다 멋진 옷을 만들수 있다}는 격려에 힘입어 70년 프리랜서로 독립한 그는 75년 카레오티와 함께 회사를 세웠다. 그리고 그해 첫 진출한 75년 밀라노컬렉션. 아르마니 풍 재킷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어깨에 딱딱한 패드를 넣어 역삼각 형으로 경직됐던 기존 재킷을 아르마니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꿨 다. 어깨 패드를 없애 부드러운 어깨선을 살렸다.
흐르는듯 부드러운 소재로 넉넉하면서도 우아한 재킷을 탄생시켰다. 사람들은 그를 [남 성복의 샤넬]이라 불렀다.

당장 사방에서 아르마니를 흉내낸 재킷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밀 라노는 세계 패션 중심지로 떠올랐고, 그는 이 업적을 인정받아 82년 [타임]지 표지를 장식했다. 디자이너가 표지모델로 등장하기는 47년 [뉴 룩]을 선보였던 크리스티앙 디오르에 이어 두번째였다.

그는 여성복에도 카디건처럼 편안한 재킷을 도입했다. 80년대이래 여성들이 여성다움을 잃지 않으면서 포멀한 비즈니스 웨어를 입게 된 데에는 아르마니 몫이 크다.
동업자 가레오티는 좀 더 젊은 고객을 위한 [엠포리오 아르마니](81년), 향수 [아르마니](82년)로 경영폭을 넓혀갔다. 덕분에 아르마니는 디자인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하지만 85년 가레오티가 암으로 떠나자 큰 도전을 받는다.지안니 베르사체를 비롯한 경쟁 디자이너들로부터 맹렬한 추격을 받으며 경영까지 떠맡 아야 했다.

포멀 웨어로 이름을 냈으면서도, 아르마니 자신은 예순 넘도록 티 셔츠와 청바지를 즐겨 입는다. 젊은 시절 우상이 반항적 영화배우 제 임스 딘이었다는 술회와 관련이 없지않다.

아르마니는 사업가로도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90년대 초 세계적 불황기에는 유행을 타지 않는 그의 옷이 연간 20%씩 성장세를 타기도 했다.
[사람들을 미치지 않게 만들면서, 잘 차려 입었다는 만족감을 줄 수 있는 편안하고 품격있는 옷]--그가 평생을 추구해온 패션 이념 이다.




장 폴 고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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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도 스커트 입을 수 있어 ##.
장 폴 고티에(45)는 악동이다. 프랑스 패션계의 앙팡 테리블이다. 패션계에 숱한 [악동]이 명멸했지만, 그는 벌써 20년동안이나 그 이름을 달고 다닌다. 그는 치마를 입고 다니기를 즐긴다. 평소 {남자들도 사무실에서 스커트를입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 다. {나는 프랑스적이라기보다 영국적}이라고 말해온 것처럼 전통적인 스코틀랜드식 체크무늬 스커트를 두르고 다닌다. 여기에 선원풍 가로줄무늬 셔츠와, 정강이까지 올라오는 부츠를 곁 들인다. 그가 만들어 내놓는 옷만큼이나 기괴한 차림이다. 끊임없이 기존 질서에 도전하고 새로운 방식을 모색해온 그를 상징 하는 차림이기도 하다. 어린 아이처럼 천진난만하면서도 마성을 함께 머금은 웃음도 이 악 동의 트레이드 마크다. [재미는 내 천성이며, 내가 만든 옷에 일관돼 온 주제이자 특징]이라고 웃음은 말한다. 고티에식 혁신은 극도로 보수적인 토양에서 자랐다. 그가 디자이너로데뷔한 70년대 후반, 프랑스의 거대 패션산업은 거 의 질식상태였다. 유명패션 하우스들은 옷이 아니라 라이선스를 팔아 연 명했다. 이때 폭발적 충격으로 새 기운을 불어넣은 게 고티에다. 한쪽 어깨 없는 턱시도, 짧은 발레 스커트, 레이스 코르셋, 트렌치 코트에 미니 스커트를 입은 제임스 본드스타일, 앞 단추가 15개나 달린 에드워드식 슈트, 꼭 끼는 라이크라 팬츠, 무릎에서부터 목까지 이어지는 지퍼, 코트 위에 스웨터 겹쳐 입기, 재킷밑에 속치마 입기…. 다른 디자이너들이 고상한 살롱에서 쇼를 할 때 그는 도살장, 지하 철, 농구장을 무대로 삼았다. 패션은 고상하고 우아하게 행세하다, 미디어를 통해위에서 아래로 흘러 내려가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는 정반대로 접근했다. 자유 분방한 거리패션, 그것도 영국 펑크족 거리패션을 고급 의상과 예술로 끌 어 올렸다. 그는 디자이너로 타고났다. 52년 파리 남부 교외에서 회계사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그는 조숙한 아이였다. 어릴 때부터 옷과 어른들 세계에 관심이 많았다. 어린 고 티에는 인형을 원했다. 하지만 부모는 장난감 자동차와 곰 인형을 안겼 다. 그는 훗날 가수 마돈나에게 입혔던 원추형 브래지어를 만들어 그 곰인형에 입히며 놀았다. 웨딩드레스도 지어 입혔다. 10살때부터는 마음에 드는 옷을 고르려고 벼룩시장을 뒤졌다. 그는 {미용사이자 간호사였던 할머니로부터 아름다움을 아는 감성 을 물려받았다}고 회상했다. 그는 심장이 약한 탓에 다른 아이들처럼 뛰어놀지 못했다. 그래서 학교에서도 의상 스케치로 시간을 보냈다. 18살때 스케치 3백7점을 유명 디자이너에게 보냈다가, 피에르 카르댕이 우연히 그 스케치를 보고 조수 로 불러들였다. 그는 19살때 영국을 방문하면서 시커먼 눈 화장에 머리를 자주색으 로 물들인 영국 펑크족에게서 신선한 자극을 받는다. 평생 갈 방향을 이때 확실히 잡은 셈이다. 이후 파두를 비롯한 보수적 디자이너 밑에 서 도제수업을 받다 76년 24살에 독립해 첫 쇼를 열었다. 파리컬렉션 에는 78년 진출했다. 그는 이후 파리패션계를 뒤흔드는 성공에 힘입어 남성복(84년), [주 니어 고티에](88년),[고티에 진](92년), 향수(93년)로 사업을 확장했다. 94년엔 [키카], [잃어버린 아이들 도시]에서 의상을 맡아 영화와 인연을 맺더니, 최근 뤽 베송감독의 [제5원소]에서 기상천외하고 미래적 인 옷으로 눈길을 사로잡았다. 여주인공 몸을 아슬아슬하게 가린 붕대패션, 브래지어를 응용한 매 혹적인 스튜어디스 유니폼, 여장 남자가 입는 표범무늬 올인원 등이 영화 를 보는 즐거움을 더해줬다. 그는 여전히 엉뚱하고 천방지축이다. 92년 LA쇼때 전원 아마추어 모델을 쓰더니, 지난 4월 파리 여성기 성복 쇼에선 몽땅 흑인 모델을 기용했다. 프랑스의 외국인 이민 규제 책에 항의하는 뜻에서였다. 지난 1월 진출한 오트쿠튀르(맞춤복)에는 남성복을 함께 내놓았다. 여성복 일색이던 오트쿠튀르 역사에서 유례 없는 일이다. 그의 옷과 행각에는 [선정적] [무례] [일탈] [고상하지 못한]이라 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하지만 그 뒤에 그는 [남녀와 인종을 구분 하지 않는 평등]이라는 신념을 깔고있다.




크리스티앙 라크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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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반대되는 것들이 조화를 이룰 때 매혹된다 ##.
생제르맹 데프레에 있는 크리스티앙 라크르와(46)의 저택은 희한한 물건들로 꽉 차있다. 증조할머니에게서 물려받아 삐걱거리는 나무 테 이블, 일본산 색동 도자기접시, 조개껍질로 만든 후추병.. 세계 곳곳 에서 수집한 기념품과 어려서부터 받은 선물들이 집안을 어지럽게 채 웠다. 동서양, 과거와 현재, 원시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을 마구 섞어 놓고 아름다움을 즐기는 생활. 곧 그의 패션 스타일이다. 그는 {정반대되는 것들이 조화를 이룰 때 매혹된다}고 말한다. 그 래서 천조각을 기워 만드는 패치워크가 조화의 극치라고 찬양한다. 그 렇듯 그의 눈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 없다. 혼합을 두려워하는 건 패션이 아니다. 누구나 자기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에 자신감을 가 지라고 고무한다. 패션은 [자기 개성을 보여주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우아한 유행만 따른다면 지구상에 똑같은 사람만 남을 것이다. 스스로 감각을 믿어야한다. 취향에는 높낮이가 없으니까.}. 그의 패션을 주도하는 컬러는 오렌지, 빨강, 살구색. 화려하다. 집 시들이 즐겨 쓰는 울긋불긋한 색들, 들소의 선정적인 검정도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초반기엔 무대의상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오페라 [타락 한 천사]와 [카르멘] 의상을 만들었다. {감각적인 색이 긴장을 풀어준 다}고 그는 믿는다. {아침에 붉은색 옷을 입은 소녀와 마주치면 15분쯤은 기분이 상쾌 하다}는 그다. 크리스티앙 라크르와는 프랑스 남부 카톨릭 중류가정에서 나고 자 랐다. 어릴 적 그는 [그림]에 집착했다. [느낌을 자유롭게 표출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검정색 정장을 입고 학교에 다니던 이 보수적 시골가정의 소년은 점점 프랑스 중상류층의 위선적인 고고함을 싫어하 게 됐다. {위선은 예술가의 적이다. 남들이 우아하다고 말하는 것을 따르느니 자기만의 미적 충동에 따라 마음대로 꾸미는 것이 낫다.} 그 래서 그는 [토탈 룩]이라는 말을 싫어한다. [개별 룩]이 있을 뿐이다. 그는 72년 소르본대학에서 미술학을 전공했다. 원래는 박물관 관리 자를 꿈꾸다가 78년 우연하게 에르메스 디자인숍에서 액세서리 디자이 너로 일하면서 페션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몇년동안 디자이너숍들을 거치며 일하다 87년 [크리스티앙 디오르]가 후원하는 재단 아래 [크리 스티앙 라크르와 쿠튀르]를 설립했다. 화려한 색상과 과감한 디자인에 사람들은 이내 매혹됐다. 그는 액세서리 라인(89년), 바자르 라인(94년), 홈 컬렉션(95년)으 로 영역을 넓혀갔다. 96년엔 입기 편하고 실용적인 크리스티앙 라크르 와 진을 만들었다. 그는 시즌마다 특수한 기법과 소재를 선보이면서 모순되는 이미지 를 조화하려고 애썼다. 지난 7월 파리에서 열린 97년 가을겨울 맞춤복 컬렉션에서는 [여성의 상반되는 이미지]를 한꺼번에 보여줬다. 드레스 실루엣은 부드러우면서 어깨선은 강렬하게 강조했다. 자극적인 진분홍 스판셔츠 위에는 야성미 넘치는 양털로 장식한 투박한 자켓을 입혔다. 매력적이면서도 당당하고 강인한 여성의 모습이 한몸에서 느껴지게 했 다. {방황하는 도시인과 원시인의 매력을 섞어서 보여주려는 것}이라 고 그는 설명했다. 사람들은 그가 미니멀리즘 반대편에 선 낭만주의 흐름을 이끌고 있 다고 칭송한다. 하지만 라크르와는 감각을 자극하는 모든 것을 소재로 삼는 것만이 자기 패션철학이라고 말한다. 그에게는 꽃무늬든 파충류 표피든, 금색이든 녹슨 색이든 자신있게 그대로 표현하는 솔직함이 있 다.


미우치아 프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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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도로 단순한 미니멀리즘 ##
미우치아 프라다(47)는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정치집회와 여권운동을 쫓아다녔다. 디자인이나 재단을 배운 일도 없다. 누구처럼 어려서부터 멋내기를 좋아했던 것도, 그림 그리기를 즐겼던 것도 아니다. 그는 말로 디자인을 한다. 디자인팀을 모아 자기가 생각하는 스 타일을 전달하고 거기에 맞는 소재와 재단법을 함께 찾는다. 그는 그렇게 해서 장식을 배제하고 극도로 단순한 미니멀리즘 의상으로 90년대 유행을 이끌어왔다. 하지만 정작 [유행]에는 관심이 없다. 한순간 유행으로 그치고말 옷보다는 사람들이 두고두고 편하게 입 을 옷 만드는 게 목표다. {내가 입고 싶은 옷을 만든다.}. 전문 디자이너 수업을 쌓지않은 만큼 그는내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에 충실하려 애쓴다. 그렇게 해서 철저하게 입는 사람 위주로 옷을 만든 다. 그는 스스로를 디자이너, 크리에이터같은 예술가라기보다 [옷만드는 사람]이라고 딱 잘라 말해버린다. 프라다가 패션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전적으로 가업을 잇기 위해 서였다. 할아버지 마리오는 1913년 밀라노에 고급 가죽가게를 차려 독 창적인 여행가방을 만들었다. 20~30년대 전성기를 구가했던 [프라다]가게는 마리오가 58년 세상 을 떠나자 쇠퇴기를 맞는다. 가업에 관심이 없었던 프라다의 아버지는 그나마 아내에게 가게를 맡겼다. 그의 할아버지는 {여자는 집에 있어야 한다}며 며느리와 손녀가 가 게에 얼씬도 못하게 했었다. 50년 밀라노에서 태어난 미우치아는 그렇듯 보수적인 가풍속에 회 색과 감색 옷을 입고 자랐다. 어머니는 분홍옷에 빨간 구두를 신긴 적이 한번도 없었다 한다. 프라다는 밀라노 대학을 졸업한 뒤 가업이 망할 지경에 이르자 할 수 없이 경영일선에 나섰다. 생소한 분야였지만 {생각만큼 어렵지는 않 았다}고 프라다는 말한다. 그는 할아버지가 트렁크를 감싸 보호하는 데 썼던 포코노나일론으 로 가방을 만드는 기발함을 발휘했다. 낮과 밤, 정장과 캐주얼 어떤 상황에도 잘 어울리는 이 실용적 가 방은 프라다의 성가를 높이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좋은 사업 파트너를 만난 것도 행운이었다. 투스카니에서 가방 제조업을 하던 4살 연상 페트리지오 베르텔리는 사업 전반에 적확한 조언을 했다. 그의 힘을 얻어 프라다는 할아버지 시대의 낡은 스타일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방들을 만들었고, 80년대 초에는 세계 유명 백화점에 가방들을 납품하기 시작했다. 85년에는 신발 라인을 확충하고 자체 부티크를 만들어 나갔다. 베 르텔리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집어내 취사 선택해내는 프라다 의 능력을 간파하고, 옷을 만들어 보라고 권했다. 두사람은 87년 결혼해 형제를 뒀다. 88년 드디어 밀라노 여성복 컬렉션 진출. 하지만 첫 쇼는 {디자이너 개성이 실리지않은 채 과장되고 상업적} 이라는 혹평을 들었다. 스태프들 의견에 마음이 흔들렸던 탓이다. 이때 프라다는 {앞으론 내 본능이 가리키는 대로 디자인하겠다}고 굳게 마음먹 는다. 프라다의 옷은 그의 개성, 그리고 생활과 바로 맞물려있다. {아이를 기르며 직장 다니는 여자라면 거울을 들여다 보고 있을 시 간이 없을 것이다.} 그런 여자가 복잡한 옷을 만들거나 살 리 없다. {아침에 일어나면서 [오늘은 섹시해야지]하고 생각하는 여자도 거 의 없다.} 숱한 디자이너들이 여성의 섹시함을 강조하지만, 실제 상황은 다르다고 그는 말한다. 그의 옷에는 남성적, 여성적 요인이 자연스럽게 녹아있다. {아직도 정치에 미련이 남아있다}는 그는 {여자들이여, 자신을 알 라}고 외친다. 자신을 알면 어떻게 자신을 표현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다는 얘기다. 지난해 매출은 7억6천만달러. 10대 후반~20대 후반 여성을 겨냥 한 [미우미우](93), 남성복 [프라다 우오모](95), 언더웨어 [프라다 인 티모](97), 스키웨어(") 에 이어 화장품, 향수, 홈컬렉션으로 영역을 확 대해갈 기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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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제이콥스=루이비통 수석디자이너였고~자기이름 브랜드를 가지고 있으며

 여성 스럽고 사랑스러운 디자인으로~많은 헐리우드 연예인들이 좋아하는 디자이너

 

존 갈리아노=자신의 이름의 브랜드와 크리스찬디올의 수석디자이너 천재적인 디자이너로 불리며 누구나 만들수 있는 옷은 만들지 않겠다고 함~

 

도나델타 베르사체=지아니베르사체가 죽고 동생인 도나델타 베르사체가 현 베르사체 디자이너 이고~그녀의 신념은 내가 입고싶은 옷을 만든다~

 

알렉산더 맥퀀=영국 세인트마틴의 졸업생(세인트마틴 정말 유명한 학교 이학교 졸업생 디자이너도 많고 존갈리아노도 세인트 마틴 졸업)지방시 수석디자이너 이자 자신의 이름으로 브랜드를 가지고 있으며~내가 제일 좋아하는 디자이너 파격적이고 신선함!

 

도나카란 =전형적인 미국 디자이너중 한명 남자는 캘빈클라인이 대표한다면 여자는 도나카란~심플하고 미국 여성들이 입고싶은 옷을 만들며~커리어우먼들이 좋아하는 디자이너~

 

마우치아프라다=밀라노에 있는 할아버지 가죽공장을 프라다라는 거대 기업으로

만든 디자이너!가죽가방말고 실용적인 가방을 만들기 위해 나일론으로 가방을

만들어 대히트~내가잘할수 있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다보니 성공이 따라오더라 말했다~세컨 브랜드는 미우미우 가격도 낮추고 디자인도 젊은 층을 겨냥!

 

 

비비안웨스트우드=영국의 영향력있는 할머니 디자이너~컬렉션을 열때마다 기상천외한 발상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동시에 즐거움을 선사한며..유행과는 상관없이 자신만의 스타일로 디자인을 한다~섹시하고 도발적인 디자인 ^^

 

소니아리켈=비비안웨스트 우드와 비슷한 외모의 여성디자이너~대부분의 디자이너가 모델 캐스팅을 모델에디터에게 선임하지만 아직도 직접 모델을 고른다.니트의 여왕이라 불리며 파리출신 디자이너

 

 

장폴고티에 =일본인이 사랑하는 디자이너~믹스앤 매치와 문화적인 풍자 유머러스한 주제와 퍼포먼스로 유명하며~자신도 패션계의 무서운아이라 했을정도로

천재적인 디자이너 중 한명~

 

이브생로랑=내 인생은 여성들과의 사랑의 역사다... 파리에서 패션을 공부햇고~크리스찬디올의인정을 받아 디올수석디자이로도 일햇다~오드리햅번의 패션으로 이브생로랑은 대중에게 많이 알려짐 

 

돌체앤가바나=도미니크 돌체와 스테파노 가바나두명의 남자 디자이너로써 패션을 위한 패션은 이미죽은 패션이라고 말한 이 디자이너는밀라노 출신이다~여성의 라인을 강조하는 옷이 많고

D&G라는 젊은층을 공략한 세컨 브랜드도 발표

 

드리스 반 노튼=벨기에 왕실 아트스쿨 졸업생 앤드워프는 졸업하기가 하늘에 별따기 이다~50명중 6명 정도가 졸업을 한다 ^^에스닉한 터치의 디자인 소재와 컬러를 중시하며

전통적인 요소에서 영감을 많이 받고 디자인 한다

 

발렌티노=이탈리아출신이지만 프랑스에서 공부를 했다.무채색의 많은 작품들로 알려지기 시작햇으며~많은 유명인사와 헐리우드 배우들이 주고객이다~특히 발렌티노의 이브닝 드레스는 정말 아름다움~

 

 

대충 생각나는 데로 적어 봤어여^^ 의상전공으로 예전에 디자이너들 공부했을때

ㅋㅋㅋ 정말 유명하고 더 많은 디자이너들이 있지만 대충 이정도만 ^^

국/내 외 유명 디자이너들 중에는 어떤...

... ^^ 저는 국/내 외 유명 디자이너들에 대한 자료가... 사람들은 패션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58) 를 그렇게 부른다.... 낮과 밤, 정장과 캐주얼 어떤 상황에도 잘 어울리는 이...

국내·외 유명 디자이너(내공추가)

... 국내외 유명 디자이너 각각한명씩 보고서... 사람들은 로렌의 통일화된 상품을 살 때면 어떤 계층과... ‘도대체 무슨 내용이 적혀 있나’ 궁금해 하는 국인에게 시의...

공기업은 공채 말고도 방법이 있나요??

... 진행하고 있나요? 공기업마다 다른가요?? 안녕하세요.... 만약 그렇다면 자격증은 어떤 순서로 따는 게... 누구나 사람이라면 걱정을 합니다. 내가 공부를 한다고 해서 NCS...

MBA내 디자인경영?(유학)산업디자이너

... 디자인경영으로 유명한 학교가 있나요 ? RCA에 작년에... 디자인경영하고 어떤쪽이 좋을까요? 3.우리나라에서... 진출한 디자이너 선배님들 좀 도와주세요... 저는...

시각디자이너 준비방법

... 어느것이 좋을까 생각중이였는데 시각 디자이너... 기 싶어요 실은 어떤건 좀 그럴듯 어떤건 놉..... 현재 일반고 다니는중인데 유리한 고등학교가 있나요 ? 고등학교...

무대디자이너에 대한 질문

... 중1입니다 -무대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어떤것들을... -무대디자이너가 방송국이나 소속사에서도 일할 수 있나... -무대디자이너유명하신분들은 누구신가요? 중1때 꿈을...

의상디자이너가 되려면?

... (1)의상디자이너를 할려면 어떤 자격증을 갗추고... 디자이너도 '(고)앙드레김'씨 처럼 유명해질수있나요?... 재단하는 사람. 이들 우리 나라에는 아직...

무대 디자이너에 대해서 알려주세욥

... 되려면 어떤 공부와 준비가 필요한지 궁금하신가요? Q1. 꼭 미술학원을 가야하나요? 아님 따로 가르쳐주는 곳이있나요? - 무대 디자이너가 되기 위한 설계 및 디자인 공부는...

(내공100) 웹디자이너를 할려고 하는데요

... 1.웹디자이너를 할라면 과목 어떤걸 위주로 점수를... 3.웹디자이너를 하는데 있어서 해두면 좋을것들은 뭐가 있나요? 4.대학은 어디가 유명한가요? 자세한 설명과 답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