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냐세요 ^^
우왕 디자이너에 대한 숙제라 ㅠ 재밌겠네요
ㅋㅋ
국외
Ralph Laruen
본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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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lph Lifschitz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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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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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디자인협회주관 5개 상 모두 수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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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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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로 랄프 로렌 최고경영자 |
신뢰와 품격을 파는 [Polo]의 창시자, 랄프로렌
가장 미국적인 외형에 영국적 풍미를 겸비한 브랜드 [Polo]는 디자이너 랄프 로렌(Ralph Lauren)에 의해 탄생되었다.
랄프 로렌은 1939년 미국 뉴욕의 브롬스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농구와 야구를 좋아하고 데이트를 즐기는 평범한 소년이었으나 화가였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색채 감각만은 남달랐다.
뉴욕 시립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던 랄프 로렌은 학업을 중단하고 의류 회사인 ‘브룩스 브라더스(Brooks Brothers)’의 어시스턴스 바이어로 일하며 패션계에 첫 발을 내딛게 된다.
랄프 로렌이 처음으로 디자인한 것은 폭이 넓은 넥타이였다.
1967년 자신의 라벨을 붙인 넥타이를 가지고 유명 백화점인 블루밍데일에 찾아갔을 때 백화점 측은 그의 넥타이를 받아주지 않았다.
당시에는 폭이 좁고 어두운 아이비 리그 스타일의 넥타이가 유행이었기 때문에 폭이 4.5인치(약 11cm) 나 되는 랄프 로렌의 넥타이가 성공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로렌은 자신의 디자인에 대한 고집을 버리지 않았고, 몇 개월 후에 블루밍데일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된다.
특유의 폭이 넓은 넥타이는 최고급 소재와 남다른 디자인 덕에 유명 인사들의 눈길을 끌었다. 곧 상류사회에서 ‘신분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진 이 넥타이는 빠른 속도로 팔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성공으로 재능을 인정받은 랄프 로렌은 브룩스 브라더스사의 사장인 노먼 힐튼의 지원을 받아 ‘폴로패션(Polo Fashion)’이라는 회사를 차리게 된다.
말을 타고 스틱을 높게 치켜든 이미지로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Polo]라는 이름은 유럽의 전통 스포츠인 폴로경기에서 유래했다.
이 경기는 말을 탄 경기자가 자루가 긴 말렛(mallet)이라는 나무망치로 공을 치며 몰고 들어가 상대방 골대에 공을 넣는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1862년 인도에 파견되었던 영국 기병이 이 경기에 흥미를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와 선보였는데 이를 계기로 폴로경기는 당시의 상류층인 신사, 군인 계급의 고급 스포츠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와 같은 귀족적인 스포츠에 매력을 느낀 랄프 로렌은 자신의 브랜드에 ‘Polo’라는 이름을 도입하게 된다. 평일에는 우아하면서도 편안한 수트를 입고, 주말에는 캐주얼한 차림으로 별장에서 자연을 즐기는 상류층의 라이프 스타일을 반영한 [Polo]의 디자인은 미국인들의 내면에 잠재해 있는 과거에로의 동경과 서부 대초원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나의 감각은 전통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다. 또한 나는 그러한 세계 속에서 생활하고 즐기는 것을 존중한다.
그리고 그 세계 속에서 이것 저것을 끌어낸다.”
영국의 상류사회의 전통을 바탕으로 한 [Polo]는 단순히 옛 것을 모방하는 트래디셔널이 아니라 시공을 초월하여 느낄 수 있는 전통과 고급스러움을 추구한다.
변하지 않는 가치 - Ralph Lauren’s Style
현재 미국을 대표하는 단 한명의 디자이너를 꼽으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랄프 로렌이다. 랄프 로렌은 이제 미국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패션 디자이너이지만 그는 시시각각 변하는 유행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유행에 따라 변하지 않으며 세월이 흘러도 언제나 자연스럽게 격식을 갖추어 새롭게 입을 수 있는 패션을 보여준다.
“작년에 샀던 재킷에 올해 산 셔츠를 받쳐 입을 수 있고, 또 내년에 바지 하나를 사서 같이 입을 수 있다.” 는 그의 코디 전략은 소비자들에게 믿음과 신뢰를 심어주며 그들의 지갑을 기꺼이 열게 했다.
이러한 Polo Style의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단연 ‘폴로셔츠’ 이다.
100% 순면 소재에 왼쪽 가슴에 말을 탄 폴로선수가 그려진 [Polo]의 오리지날 ‘폴로셔츠’는 처음에 24가지 컬러로 소개되었다.
‘폴로셔츠’는 원래 선수들이 경기 때에 입던 단색의 순면 셔츠에서 온 것이다.
이에 영감을 얻어 랄프 로렌이 새롭게 내놓은 ‘폴로셔츠’는 칼라 달린 순면셔츠의 대표명사가 되었다.
‘폴로셔츠’는 이제 누구나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대중적인 셔츠이며, 언제 어디에서도 누구에게나 어울리도록
다양하게 연출할 수 있다는 매력으로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1968년 남성복 라인인 [Polo by Ralph Lauren]으로 본격적인 의류 사업을 시작한 [Polo]는 1971년 남성복의 정신을 이어 여성의류 [Ralph Lauren]을 발표했다.
로렌은 여성복에서도 그 만의 스타일을 고집했는데, 스포츠웨어나 파티드레스에 상관없이 남성복을 그대로 응용하였다.
[Ralph Lauren]은 중성적인 특징, 절제된 성적 매력으로 ‘랄프 로렌 풍의 여자’라는 스타일로 받아들여졌고 오히려 섹시한 헐리우드의 스타들에게까지도 큰 인기를 끌고있다.
랄프 로렌은 1971년 비버리 힐즈의 로데오 가에 미국 디자이너 최초로 독립매장을 오픈했고 1981년에는 런던, 1986년 파리 매장을 열어 유럽에 매장을 가진 최초의 미국 디자이너가 되었다.
기본적으로 그는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디자인을 좋아한다.
랄프 로렌은 영미 상류 사회의 전통적 라이프 스타일, 미국 개척시대의 웨스턴 스타일, 오래된 필름, 헐리우드의 스타 야구 선수들의 유니폼, 부유한 집안의 상속자 등 다양한 라이프 스타일로부터 받은 영감을 혼합하여 나름의 패션 스타일을 만들어 간다.
온 가족과 함께 보낸 여름휴가, 옛 학교 친구들과 학교 운동장에서 뛰어 놀던 모습, 할아버지 생신에 모인 친지들과 함께하던 가족놀이 등의 다양한 이미지가 담긴 그의 옷은 남녀노소에 구별없이 잘 어울리며 행복과 여유를 담아내는 것이 특징이다.
미국 Life Style의 창조자
랄프 로렌은 일찍이 생활 양식을 제시한 디자이너였다.
세계 주요 도시에서 아침에 출근을 하는 사람들은 옷장을 열어 폴로의 옥스포드 셔츠를 꺼내 입고 폴로 타이를 맨다.
폴로향수를 뿌리고 출근하며 밤에는 폴로 이불 속에서 잠이 든다.
이처럼 랄프 로렌은 의류 뿐 아니라 생활 전반에 걸친 모든 것에 자신의 철학을 도입하는 데에 정성을 다하여 완벽한 토탈 패션을 구현하고 있다.
직장에서 입는 남성 수트에서부터 넥타이는 물론 1973년에는 스포츠에 열광하는 도시 젊은이들을 타겟으로 한 [Polo Sport]
1983년에는 인테리어 코디네이션 [Ralph Lauren Home Collection]의 침대 시트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이미지를 연출하고 있다.
이는 당시로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신선한 충격이었고, 사람들은 로렌의 통일화된 상품을 살 때면 어떤 계층과 지위에 속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비싼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Polo]의 이미지를 사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단지 옷을 파는 것이 아니라, 꿈과 비전, 개인적인 품격을 파는 것’ 이라는 그의 의도가 적중한 것이다.
세계 26개 기업에게 ‘신뢰와 품격’, ‘세계에서 가장 잘 팔리는 디자이너’라는 명성을 빌려주는 라이센싱 전략으로 현재 [Polo]는 전세계 4천 5백 개의 매장과 73개의 할인매장, 43개의 플래그쉽 샵(Flag_ship Shop)을 운영하며 연간 수 십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일상생활이 클래식하면서도 스포티해야 한다는 토탈 패션의 철학은 랄프 로렌 향수로 완성된다.
1978년 처음으로 발매된 랄프 로렌의 첫 번째 향수 [Polo]는 영화 ‘위대한 개츠비’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하였는데 아침 일찍 승마를 즐기는 캐주얼한 남성의 이미지를 담았다.
그 후 1992년 모험심을 컨셉으로 한 향수 [사파리], 1995년 활동적인 라이프 스타일의 [POLO SPORT] 1999년에는 로맨스의 본질을 일깨우는 새로운 개념의 향수 [Romance]를 발매했다.
2001년 새롭게 선보인 여성향수 [RALPH]는 그의 딸 딜런과 그녀의 친구들에게서 영감을 얻었는데 그들의 컬러풀한 라이프 스타일을 지향한다.
이와 같은 노력으로 97년 주식시장에 상장된 [Polo]는 인터넷 사이트인 ‘폴로닷컴(Polo.com)’을 통해 라이프 스타일을 제안하는 전문 미디어기업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Polo.com에서는 [Polo]가 그 동안 보여왔던 다양한 상품들을 인터넷으로 판매중이다.
짙은 감색 바지를 선택하고 사이즈를 입력하면, 흰색 셔츠를 코디해보라는 추천을 받을 수 있고 활동적인 [Polo Sport] 향수를 선택하면 광고에 등장했던 플로리다의 휴양지를 구경할 수 있다.
피부색이나 연령,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고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Polo]는 랄프 로렌의 끊임없는 열정의 산물이다. 그는 어떠한 디자인 교육도 받은 적이 없었지만 그 누구보다도 디자인에 대한 철학은 확고했다.
“디자인 세계에 있어 나의 목표는 최상의 꿈, 즉 최고의 현실세계를 이룩하는 것이다.” 그의 철학에서 나타나듯이 그의 디자인은 덧없이 지나고 마는 한시적인 유행이 아니다.
랄프 로렌은 그것을 입는 사람들의 삶을 반영하고 그들에게 랄프 로렌의 품격을 담아준다.
[Polo]는 전통과 고급스러움, 자기 성취를 추구하고 여가활동과 적극적 생활을 즐기는 현대인에게 패션을 통한 새로운 생활을 제안하고 있다.
- POLO 브랜드 라인 -
-남성
POLO by RALPH LAUREN- 영국식 트래디셔널리즘을 미국적인 스타일로 변화시켜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폴로의 대표 브랜드
POLO JEANS - 젊은층을 위한 폴로의 진브랜드.
POLO SPORT -액티브한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스포츠 라인
PRL - 빈티지한 워크웨어 스타일로 캐릭터브랜드
POLO GOLF - 폴로의 골프웨어 라인으로 프로페셔날 골퍼들에 의해 그 기능성이 입증됨.
RLX - 익스트림 스포츠를 위한 하이테크 스포츠웨어 라인
Lauren - 실용적이면서 고급스러운 정장라인.
PURPLE LABEL- 고가의 남성 정장 라인
-여성
RALPH LAUREN- 폴로의 트러디셔날 여성라인으로 고품격 캐쥬얼라인.
RALPH LAUREN SPORT- 캐쥬얼하고 이지한 스타일의 여성라인
POLO GOLF - 폴로의 골프웨어 라인으로 프로페셔날 골퍼들에 의해 그 기능성이 입증됨
POLO JEANS - 젊은층을 위한 폴로의 진브랜드.
RLX - 익스트림 스포츠를 위한 하이테크 스포츠웨어 라인
BLACK LABEL- 귀족적인 고품격 고가의 여성복 라인.
Lauren - 실용적이면서 고급스러운 합리적인 가격대의 여성복 라인
Giorgio Arm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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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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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orgio Arman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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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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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클래식의 원조로 '재킷의 왕'이라는 칭송을 받는 패션 디자이너 |
“쇼에 오르는 드라마틱한 의상 없이도
당신의 모습이 최신 유행 선상에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겠다”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실용적이고 고급스러운 모던 클랙식의 선구자다. 신체의 부드러운 실루엣과 그 속에 드러나는 우아함을 정교하고 관능적인 모습으로 풀어낸 심플한 재킷은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스타일이다. 접착심을 제거하고 고급스럽고 부드러운 소재로 1970년대 딱딱한 의상을 부드럽게 재구성한 그의 재킷은 느슨한 실루엣으로 편안한 착용감을 선사했다. 부드러움에 대한 그의 끊임없는 연구는 아르마니의 주된 디자인 요소가 되었으며, 그 결과 모든 세대가 입을 수 있는 스타일이 탄생했다.
패션계에 입문한 지 50년 만에 세계 각지에 5천여 명의 직원과 연간 13억 유로의
매출을 올리는 패션제국의 총수로 발돋움한 조르지오 아르마니. 그는, “사람을 옥죄는 딱딱한 옷은 버려라. 인체는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다”라며 어깨 패드를 뺀 부드러운 수트로 돌풍을 일으켰다.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디자인은 결코 화려하거나 특별하지 않다. 오히려 일체의 과장이나 기교를 절제해 넉넉함과 단아함이 돋보인다. 이것이 아르마니 스타일이 갖는 매력이다. 그는 인간이 의상에 속박되는 상태를 가장 경멸하며 인간과 의상이 하나가 되는 상태, 즉 완벽한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일체의 거추장스러운 치장이 배제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군더더기 없는 그의 디자인은 심플하고 모던하며 세련되고 엘레강스한 멋을 강조한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마라’라는 속담이 있다. 그러나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경우는 반대였다. 젊은 시절 무심코 들어선 길이 그의 인생을 바꾸었다. 아르마니는 원래 의학도였다. 1934년 이태리 북부 애밀리아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의사가 되기 위해 밀라노에 있는 의과대학에 입학했으나 1953년 중퇴했다. 다음해 리나 생티백화점에 취직한 아르마니는 그곳에서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방대한 경험과 실용주의 패션에 접근하는 시각을 키웠다.
학창시절 센스 있는 옷차림으로 주위의 시선을 받았던 아르마니는 친구들에게도
옷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을 정도로 패션 감각과 예술에 뛰어난 소질이 있었다. 우연한 기회로 백화점에서 일하게 된 그는 맨 처음 전시장 디스플레이를 맡았다. 그러나 그의 디스플레이는 너무 아방가르드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이로 인해 구매부로 자리를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르마니는 패션 감각을 인정받아 백화점내 신사복 부티크를 담당하게 됐다. 남성복 매장에서 일하던 그는 큰 기업그룹의 정규 디자이너가 되어 신사복과 부인복 디자인, 텍스타일과 기술에 관한 기본 테크닉을 배웠다. 당시의 경험은 그에게 정확한 재단과 소재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제공했으며 훗날 그가 환상적인 직물기술을 지닌 디자이너로 성장하는 발판이 됐다.
그는 1960년대 초반 니노 세루티에게 발탁돼 남성복 디자이너로 일했다. 하지만 그를 디자이너로 대성시킨 사람은 서지오 갈레티였다. “누구보다 멋진 옷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라는 서지오 갈레티의 격려에 힘입어 1970년 프리랜서로 독립한 그는 1974년 갈레티와 함께 회사를 세웠다. 그리고 그해 첫 진출한 1974년 밀라노컬렉션에서 아르마니 풍 재킷을 탄생시켰다. 어깨에 딱딱한 패드를 넣어 역삼각형으로 경직됐던 기존 재킷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꾼 것이다. 부드러운 어깨라인을 위해 패드를 없앴고 부드러운 소재로 넉넉하면서도 우아한 재킷을 제작했다.
남성복 컬렉션으로 대성공을 거둔 그는 1975년 ‘조르지오 아르마니’사를
설립하고 여성복 라인을 런칭한다. 여성복 라인은 남성복과 같은 외형을 여성의 바디에 맞게 재해석한 것으로 아르마니가 좋아하는 뉴트럴 컬러를 사용했다. 1980년 그의 디자인은 또 한번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상류사회의 새로운 문화를 수용하는 워킹우먼에게 ‘파워수트’라는 의상을 제안한 것. 포멀한 비즈니스웨어로 손색없던 ‘파워수트’는 권위와 존경을 이끌어내는 아르마니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고, 이로 인해 아르마니는 데뷔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적인 톱 디자이너의 대열에 서게 되었다. 사방에서 아르마니를 카피한 재킷들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밀라노는 세계 패션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그는 이 업적으로 1982년 타임 지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디자이너가 표지모델로 등장하기는 1947년 ‘뉴 룩’을 선보였던 크리스찬 디올에 이어 두 번째였다.
아르마니는 할리우드 영화 <아메리칸 지골로>에서 주연 리처드 기어의 의상을 맡으며 돈과 명성을 거머쥐기 시작했다. ‘단순함과 우아함’으로 요약되는 그의 의상을 입기 위해 할리우드 유명 배우와 세계적 명사들은 아르마니 고객 리스트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사업 영역도 진과 언더웨어, 아동복, 시계, 안경에 이르기까지 확장됐다. 1981년 남성복, 여성복 외에 젊은 층을 겨냥한 서브 브랜드 엠포리오 아르마니를 런칭했고, 1982년에는 향수 분야에도 진출해 ‘지오, 아쿠아 지오, 일르, 엘르’ 등을 제작했다. 아르마니는 왕성한 활동으로 1979년 니만 마커스상에 이어 1983년 미국 패션디자이너협회(CFDA)상을 수상하게 됐다.
현재 아르마니는 한 해 매출 약 17억 달러, 전세계에 2천 개가 넘는 매장,
밀라노에 있는 카페와 피렌체 레스토랑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미국 포브스 지 ‘2004 세계 갑부 순위’ 247위에 당당히 올랐고, 중국 상하이에 대형 점포를 개설하는가 하면 가구, 호텔업 등에도 진출하는 등 아성을 굳히고 있다.
그는 변화를 싫어한다. 혁신을 생명으로 아는 패션 디자이너로서는 치명적인 단점이 될 수 있지만 이러한 신념은 숨가쁘게 돌아가는 패션 트렌드 속에서 한결같은 색상과 스타일로 세계 패션을 제패할 수 있던 원동력이 되었다.
1990년대 초 세계적 불황기에는 유행을 타지 않는 그의 옷이 연간 20%씩 성장세를 타기도 했다. 전세계적으로 남녀를 불문하고 옷 입는 스타일을 변화시킨 대대적인 것으로 작용하였다. ‘과장을 배제하고, 편안함을 강조하며 단순함에서 우러나오는 우아함을 반영한다.’ 아르마니의 이 단순한 패션 철학이 패션계에 혁명을 가져다준 것이다.
‘편안하고 품격 있는 옷’, 이것이 바로 그가 평생을 추구해 온 패션 이념이다.
국내
이상봉
세계인에게 한글을 입히다
디자이너 이상봉
<이코노미스트 사회, 매거진 | 2007.01.30 (화) 오전 9:15>
▶1983년 중앙디자인콘테스트 수상, 1999년 서울패션인상 올해의 디자이너상, 2005년 베를린 에스모드 심사위원, 2006년 파리 ‘후
즈넥스트’에서 한·불 120주년을 기념해 ‘한글 패션 전시’ 특별전 개최“세계인에게 한글을 입히겠습니다.” 세계적인 디자이너 이상봉
(주)이상봉 대표의 포부가 당차다. “머지않아 세계 곳곳에서 한글이 새겨진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을 볼 수 있을 것”이란다. 미국
대학 이름이 새겨진 티셔츠나 읽기도 어려운 불어가 박힌 옷이 익숙한 우리에게는 생소한 얘기다.
이 대표의 자신감에는 근거가 있다. 지난해 9월 세계 패션의 중심지인 프랑스 파리에서 ‘한글 패션’으로 대성공을 거둔 것이다.
유럽 최대 패션·액세서리 박람회에서 개최됐던 한글패션 특별전의 성공으로 프랑스는 물론 미국이나 러시아 등에서 그의 ‘한글
옷’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특히 러시아에서 인기가 좋아 연예계 스타들까지 한글옷을 입고다닌다”고 했다.
“한글로 확실하게 차별화를 이룬 것입니다. 오리엔탈리즘으로 무장한 고만고만한 아시아 디자이너들과 달랐던 것이지요. 한글 디
자인을 하다 보니 옷에 시와 편지를 적어 넣을 수 있는 또 다른 매력도 있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 적혀 있나’ 궁금해 하는 외
국인에게 시의 내용이나 한글의 역사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지요. 한국 문화를 대표로 알릴 수 있어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나라 길거리에서 ‘한글 옷’을 입은 사람을 만나기란 드물다. 그는 “우리는 한글의 아름다움을 모르고 산다”며 “외
국인은 안 그런데 우리가 한글 옷을 어색해 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그조차 “프랑스인의 독려가 없었다면 한글 옷을 만들 수 없었을 것”이란다. 우선 한글이 옷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고 외국인이
과연 낯선 한글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디자이너 이상봉, 프랑스에 한글을 쓰다
[뉴시스 2007-02-26 15:48]
디자이너 이상봉, 프랑스에 한글을 쓰다
【서울=뉴시스】
패션디자이너 이상봉씨가 세계 패션계에 한글을 알렸다.
25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2007~2008 가을·겨울 기성복 패션쇼 마지막을 ‘한글옷’차림으로 장식, 객석의 박수를 이끌어냈다.
이날 이씨의 옷에 ‘그려진’ 한글은 시인 천상병(1930~1993)의 ‘귀천’이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로 이어지는 시를 서예가 조성주씨가 써 넣었다.
이씨는 자신의 패션작품에 ‘기하학적 문양’과 ‘추상화’로서의 한글을 적으며 국제무대에서 주목받고있다.
그 동안 소리꾼 장사익, 화가 임옥상씨의 한글 서체를 의상 무늬로 전용해왔다.
신세대 디자이너들「미래형 PC는 바로 이런 것」
류준영 기자 ( ZDNet Korea ) 2007/04/19
미래 컴퓨터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19일 인텔코리아와 삼성전자가 공동 주최한 ‘대한민국 PC 디자인 공모 대전 2007’의 최종 수상작들이 ‘한국정보통신대전’(KIS,
Kora IT Show 2007)’에서 일반에 공개됐다.
이번 공모전에는 총 644점의 PC 디자인이 접수됐으며, 이중 6개 작품이 수상했다. 미래의 PC는 생활 공간과 어울리는 하나의
장식품으로써 실용성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 이날 수상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국내 유명 디자이너 작품 눈길
이번 공모전에는 이상봉 패션 디자이너, 김원철 건축 디자이너, 설은아 웹 디자이너, 리처드 정 자동차 디자이너 등 다양한 분야의
유명 디자이너들이 참여했다.
이날 여성 관람객들의 관심을 집중적으로 받은 작품은 이상봉 디자이너와 김원철 건축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모델.
이상봉 디자이너의 ‘외출’
이상봉 디자이너의 작품인 ‘외출’은 외관상으로는 핸드백처럼 보이지만 핸드백을 열면 작고 슬림한 노트북PC가 장착돼 언제
어디서라도 사용이 가능하다.
김원철 디자이너의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Mirror)’는 친근하게 PC에 접근할 수 있도록 붙박이 형식의 PC를 디자인했다.
차가운 PC의 이미지를 따뜻한 질감을 통해 상쇄시키기 위함이다.
이상봉 디자이너는 이날 전시회에서 “나도 한때 '컴맹'이었는데 이번 작품을 계기로 뒤늦게나마 컴퓨터를 더욱 자세하게 알게
됐다”며 너스레를 떤 후 “외출(작품명)은 남자의 조그마한 손가방에서 아이템을 찾는데 컴퓨터가 갈수록 소형화되면서
이도 패션의 범주 안에 놓이게 됐다.”라며 “패션은 생활이며, PC는 그 패션에 가장 가까이 있다”고 말했다.
나란히 참석한 김원철 건축 디자이너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현 인류는 PC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지만 정작 가족들간의 대화는 이 때문에 단절되는 결과를 놓았다”며 PC 앞에 굳이 앉지 않더라도 가족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붙박이 스타일의 PC를 떠올리게 됐다”고 말했다.
또 김원철씨는 “이어령 박사(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낸 문학평론가)와 식사를 하던 중에 ‘PC의 모니터를 거울에 넣어보는 것은 어떻겠는가?’라는 의견을 듣고 그대로 적용시켜 봤다.”고 덧붙였다.
그 밖에 설은아 웹 디자이너의 '루나(Luna)'는 달을 모티브로 모니터가 마치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줄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그는 “모니터 속에 과일은 폴더이다. 유저 인터페이스를 나무에서 열리는 듯한 자연친화적인 아이콘에 담아 이미지로 형상화 했다.”고 설명했다.@
출처: 이상봉님 홈페이지
세계에 한국을 입히다 - 디자이너 이상봉!
IMF라는 국내 위기 상황에 오히려 세계에 눈을 돌려 한글과 한국적 디자인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 과정 이야기
전쟁과 같은 ‘프레타포르테 파리 컬렉션’의 생생한 백 스테이지 현장 담아
O패션 디자이너들의 꿈의 도시, 파리 프레타포르테 컬렉션에서 세계의 눈을 집중시키고 있는 디자이너 이상봉의 행보! 얼마 전 루브르 박물관에서 열린 [2007/08 프레타포르테 파리 컬렉션]을 인터뷰 다큐멘터리 EBS [시대의 초상]이 동행 취재해 전쟁터와 같은 패션쇼장의 생생한 백 스테이지 현장을 공개하며 이상봉 디자이너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저널리즘은 돈을 주고 살 수 있지만 바이어는 절대 돈을 주고 살 수 없어요.
언론은 개인적인 친분, 광고의 힘이 작용 될 수 있지만 바이어는 자기들 판단에
아니면 절대 구매를 안하죠.”
디자이너들이 아무리 고뇌하고 무대에 선보여도 패션쇼에서 보여지는 0.1초만의 찰라적 느낌을 대중들이 받아 들이지 못한다면, 그 옷은 죽은 옷이라고 말하는 이상봉! 그는 오늘도 치열한 전쟁터를 살고 있다.
O최근 문화나 패션이 ‘굴뚝 없는 공장’으로 불리면서 경제적으로 더 큰 부가가치를 높이고 있는 시점에서 패션디자인이 얼마만큼 국가의 경제적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지, 이러한 큰 가치를 수입브랜드에 점령당하지 않기 위해 우리의 고유한 세계적 브랜드를 만들어야 한다고 고뇌하는 이상봉!
패션은 인간이 존재하는 한 끊임없이 발전할거고 우주 시대가 됐든, 미래에도 끊임없이 패션은 우리에게 중요한 요소가 될 겁니다. 자기를 드러내고 싶고, 자기를 표현하고 싶은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O패션은 영원히 인간이 살아가는 한 존재할 거라고 말하는 이상봉에게 이제는 한국인으로서, 한국적인 것을 살린 독창적인 우리들의 문화를 세계에 입히겠다는 문화적 자긍심이 지속적으로 그에게 열정을 지피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1%의 가능성이 있어도 도전을 하는데 우리는 그 가능성보다 훨씬 큰 50% 이상의 가능성이 있는데 일류 브랜드로 세계를 향해 도전해 볼 가치가 있지 않습니까?”
O2000년대로 들어서면서 한글을 세계에 선보이고 다양한 산업에 적용시키며, 패션 한국의 영역을 넓혀온 디자이너 이상봉! 그는 유럽의 프랑스나 이태리가 선진국에 들어서게 된 요인을 패션이라고 말하며 이제 우리도 국가적인 경제 부가가치를 키우기 위해 각 분야에서 많은 협조와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패션분야는 언제든지 그 사회의 가장 빠른 영향을 받아요. 사회적인 사건,
돌발적인 상황, 기상이변… 예전에 레바논에서 주문을 받았는데 옷을 다
생산해서 주려고 했더니 전쟁 터져서 못 받겠다고 해서 양방간에 큰 손해를 입게 됐던 적도 있죠.”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