맡길임 장흥임씨 돌림자

맡길임 장흥임씨 돌림자

작성일 2015.04.06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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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이름 끝에 규  아버지 가운데 종   우리대는  끝  수 

 

우리다음세대는  가운데 상     그 다음대는 헌  

 

이렇게 까지  알고 있는데요  

 

장흥임씨 몇대 손인지 무슨공파인지,  알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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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질문에 답변을 합니다.

님은 답변확정율이 하나도 없으시군요.

 

할아버지  이름 끝에 규  아버지 가운데 종   우리대는  끝  수 

 

우리다음세대는  가운데 상     그 다음대는 헌  

 

이렇게 까지  알고 있는데요  

 

장흥임씨 몇대 손인지 무슨공파인지,  알수 있을까요?

 

답변 : 님의 글을 읽어보고 답변을 합니다.

 

장흥 임씨는 각파별로 항렬표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파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조부님 :  28세 ○규(圭)자 돌림이시고,

부친님 : 29세 종(鍾)○자 돌림이시며,

님은 : 30세 ○수(洙)자 돌림입니다.

자식 : 31세 영(榮)○자 상(相)○자 돌림입니다. 헌자는 대종회에서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님은 장흥 임씨의 후손이시니 자긍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한글과 한문을 병용합니다.한문을 같이 쓰는 이유는 한문은 각기 다른 한자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점 양해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해당 자료에는 녹색 글씨로 표기합니다.

 

아래는 장흥 임씨에 대한 정보입니다.

 

 

장흥 임씨(長興 任氏)에 대()하여

 

1. 장흥 임씨(長興 任氏) 시조(始祖) : 임호(任灝)

2. 장흥 임씨(長興 任氏) 유래(由來) :

 

장흥 임씨(長興 任氏) 시조(始祖) 임호(任灝)는 중국(中國) 소흥부(紹興府) 출신(出身)의 임호(任灝)를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그는 송()나라 때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고, 고려(高麗)로 귀화(歸化)해 당시 정안(定安)이라 불리던 장흥(長興)에 세거지(世居地)를 마련하였다. 이것이 장흥 임씨(長興 任氏)의 시작(始作)으로 그 시기(始期)는 대체(對替)로 정종연간(1034~1046)으로 추정된다. 임호(任灝)의 아들 임의(任懿)는 문종(文宗) 대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한 후() 우승선(右承宣)을 시작(始作)으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좌리공신(佐理功臣) ()을 역임(歷任)하였다. 또한 그의 손자(孫子) 임원후(任元厚)는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고 정안부원군(定安府院君)의 칭호(稱號)를 받았는데, 관향(貫鄕)을 장흥(長興)으로 삼은 것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3. 장흥 임씨(長興 ) 본관(本貫) 연혁(沿革)

 

장흥(長興)은 전라남도(全羅南道)의 남()쪽에 위치(位置)하는 지명(地名)으로 원래(原來)는 백제(百濟)의 오차현(烏次縣)이었다. 757(신라 경덕왕 16)에 오아(烏兒)로 개칭(改稱)되어 보성군에 속()하였다. 고려(高麗)초에 정안현(定安縣)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현종(顯宗) 때에 장흥부(長興府)로 승격(昇格)되었다. 1265(원종 6)에 다시 회주목(懷州牧)으로 승격(昇格)되었다가, 1310(충선왕 2)에 장흥부(長興府)로 강등(降等)되었다. 1392(태조 1)에 수령현의 중령산에 성()을 쌓고 중심지(中心地)로 했으며, 1413(태종 13)에 장흥도호부(長興都護府)로 승격(昇格)되었고 1652(효종 3) 장흥현(長興縣)으로 강등(降等)되었다. 1895(고종 32) 지방제도(地方制度) 개정(改定)으로 장흥군(長興郡)이 되었고, 1896년 전라남도(全羅南道)로 이관(移關)되었다. 1914년 군면(郡面) 폐합(廢合)으로 웅치(熊峙회천(會泉) 2개 면()이 보성군(寶城郡)에 이관(移關)되었으며, 1936년 부동면(府東面)을 장흥면(長興面)으로 개칭(改稱)하고, 남상(南上남하(南下) 양면(兩面)을 용산면(蓉山面)으로, 고읍면(古邑面)을 관산면(冠山面)으로 개칭(改稱)하였다. 1942년 장흥면(長興面)이 장흥읍(長興邑)으로 승격(昇格)하였고, 1980년 관산면(冠山面)이 관산읍(冠山邑)으로, 대덕면(大德面)이 대덕읍(大德邑)으로 승격(昇格)하였다.

 

 

4. 장흥 임씨(長興 任氏) 계파(系派) 및 분파(分派)

 

장흥 임씨(長興 任氏)의 후손(後孫) ()에는 관산(冠山)을 본관(本貫)이라 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고려말(高麗末)까지 장흥부(長興府)의 치소가 관산에 있었고 장흥을 관산이라 부르기도 했기 때문이다.

 

대종회에서 종파를 분류함에 있어서는

대파(大派) 중파(中派) 소파(小派) 3단계로 분류하고 이하는 분류하지 않고 있습니다.

 

대파(大派) 3세조이신 문숙공(휘 원숙) 문충공(휘 원후) 문헌공(휘 원준) 3형제로 분류하고

 

중파(中派)

백담공(휘 희준) 송담공(휘 희순) 국담공(휘 희중) 연담공(휘 희보) 난실공(휘 희성) 5형제로 분류하며

 

소파(小派) 13세조이신 화동공(휘 백영)의 손입니다.

 

18세손 임자당(任子黨)을 지칭합니다.

 

따라서 대종회에서는 小派 13세조까지만 분류하고 그 이하 자손은 종파 분류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속파는 문헌공(휘 원준) 국당공(휘 희중) 화동공(휘 백영)파라 합니다.

 

 

5. 장흥 임씨(長興 任氏) 대표적(代表的) 인물(人物)

 

- 임극정(克正), 임유(: 초명은 克仁), 임극충(克忠), 임부() : 임의의 아들. - 임경순(景恂), 임경숙(景肅), 임경겸(景謙) : 유의 아들.모두 고려시대(高麗時代)에 정3품 이상(以上)의 벼슬을 지내고 학자(學者)와 명신(名臣)으로 유명(有名)하다.

 

임의(任懿, 1041(정종 7) ~ 1117(예종 12)

고려의 문신. 일찍이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번저(藩邸) 시절 선종(宣宗)의 주청으로 전첨(典籤; 제왕자부(諸王子府)의 관료로 從八品)이 되고, 선종(宣宗)이 즉위(卽位)하자 우승선(右承宣; 正三品 벼슬)이 되었다. 1095(肅宗 卽位) 형부시랑(刑部侍郞; 刑部에 소속된 正四品의 벼슬)으로서 요나라()에 가서 숙종(肅宗)의 즉위를 알리고 귀국했다. 1099년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 소속의 正四品)가 되고, 1100년 상서(尙書; 尙書省 正三品 벼슬)로서 송나라()에 파견되어 송나라 철종(哲宗)의 죽음을 조위(弔慰)했으며, 휘종(徽宗)으로부터 신의보구방(神醫補救方)을 기증(寄贈)받아 가지고 이듬해 돌아와 어사대부(御史大夫; 高麗朝 御史臺 正三品)가 되었다. 1103년 병부상서(兵部尙書; 兵部의 버금 벼슬로 正三品)를 거쳐 다음해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 御史臺의 으뜸 벼슬로 正三品)로서 왕을 남경(南京; 오늘날 서울)에 호종(扈從)한 후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1105년 추밀원사·이부상서(樞密院事吏部尙書)가 되었다. 이 해 예종(睿宗)이 즉위하자 상서좌복야·참지정사(尙書左僕射參知政事), 이듬해 개부의동삼사·주국(開府儀同三司柱國), 1107년 판상서형부사(判尙書刑部事)를 역임, 1109년 참지정사(參知政事)로서 윤관(尹瓘오연총(吳延寵임언(林彦) 등이 여진(女眞)토벌에 패전한 죄()를 극언(極言)했다. 이 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中書門下省 正二品)로서 동북면병마사겸행영병마사(東北面兵馬使兼行營兵馬使)가 되어 여진(女眞)에게 함경도(咸鏡道) 9()을 환부하려고 했으나 이미 최홍정(崔弘正) 등이 군··병기 등을 철수시켰으므로 아무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다음해 수태위·문하시랑평장사(守太尉門下侍郞平章事)로 치사(致仕)하고 좌리공신(佐理功臣)이 되었다. 인종(仁宗) 때 중서령(中書令; 中書門下省의 우두머리 從一品)에 추증(追贈), 시호(諡號)는 정경(貞敬)이다.

 

임원후(任元厚, 1089(선종 6) ~ 1156(의종 10)

고려의 문신. 초명(初名)은 원애(元敱 또는 원개(元凱; 長興任氏記蹟卷之一), 중서문하평장사(中書門下平章事) ()의 아들, 공예태후의 아버지,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를 거쳐 1127(仁宗 5) 예빈소경·어사잡단(禮賓少卿御史雜端), 이어 참지정사(參知政事), 1131년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1133년 참지정사·판한림원사(參知政事判翰林院事), 판공부사(判工部事), 1134(仁宗 12)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가 되었다. 묘청의 난이 일어나자 중군원수(中軍元帥)가 되어 김부식(金富軾)과 함께 이를 토벌(討伐), 1137년 동덕좌리공신(同德佐理功臣)에 오르고 검교태보·수사도·판비서성사(檢校太保守司徒判祕書省事)가 되었다.

 

妙淸妖說宰執皆傾信公獨擯之不從; 묘청이 괴이한 말을 하자 재집(宰執)들이 모두 기울어 믿게 되었다. (그러나) 공은 홀로 그것을 물리쳐 따르지 않았다.

 

장흥 임씨기적권지長興 任氏記蹟卷之一

 

이듬해 개부의동삼사·검교태부(開府儀同三司檢校太傅), 1139년 서경유수사(西京留守使), 다음해 판상서병부사(判尙書兵部事), 1142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감수국사(監修國史), 1146(毅宗 卽位) 문하시중(門下侍中; 中書門下省 首相職으로 從一品)으로 정안후(定安侯)에 봉()해지고, 1148년 수태위(守太尉)로서 정안공(定安公)에 진봉(進封) 된 뒤, ()를 두어 수령부(壽寧府)라 했다. 경사(經史)에 정통(精通)했고, 근검청백(勤儉淸白)했다. 시호(諡號)는 문정(文定 또는 文忠; 長興任氏記蹟卷之一)이다.

 

임원숙(任元淑)

시호(諡號)는 문숙(文肅), 고려 예종(睿宗) 때 예부상서(禮部尙書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 등을 역임하고, 인종(仁宗) 때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임원순(任元順)

시호(諡號)는 문헌(文獻), [[1116]](睿宗 11)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뒤에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 文官 正一品 벼슬중서령(中書令; 中書門下省의 으뜸벼슬로 從一品상주국(上柱國; 으뜸 勳位 正二品평장사(平章事; 中書門下省 正二品 벼슬판형부사(判刑部事태자소부(太子少傅; 太子府에 둔 從二品 벼슬)에 이르렀으며, 선충안사좌리공신(宣忠安社佐理功臣동덕익성공신(同德翊聖功臣)으로 정안공(定安公)에 봉()해졌다.

 

임극충(任克忠)

고려의 문신(文臣), 공예태후(恭睿太后)의 오빠,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1148(毅宗 2)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1151년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를 역임, 이듬해 한림학사(翰林學士; 翰林院 正四品 벼슬)로서 동지동거(同知貢擧)를 겸했다. 1155년 추밀원사·한림학사승지·태자빈객(樞密院事翰林學士承旨太子賓客), 1157년 수사공(守司空), 1162(毅宗 16) 판상서형부사(判尙書刑部事), 1165년 태자소사(太子少師; 太子府에 둔 從二品 벼슬), 1170(明宗 卽位)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中書門下省 正二品職)가 되었다.

 

임극정(任克正)

고려 때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냈다.

 

임박(任薄)

고려의 문신. 공예태후(恭睿太后)의 오빠, 아버지가 죽은 뒤 의종(毅宗) 외척(外戚)에 대한 탄압이 심하여 20세에 이르도록 벼슬을 하지 못했으며, 명종즉위(明宗卽位) 후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를 거쳐 합문지후(閤門祗侯)에 올랐으나 사직한 후 문과(文科)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이르렀다. 이부상서·한림학사(吏部尙書翰林學士)에 추증(追贈)되었다.

 

공예태후 임씨

임유(任濡, 1149(의종 3) ~ 1212(강종 1)

고려의 학자(學者) 초명(初名)은 극인(克仁), 문하시중(門下侍中; 中書門下省 首相職으로 從一品 벼슬), 공예태후(恭睿太后)의 오빠. 명종(明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 1186(明宗 16)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금나라()에 다녀오고, 좌승선(左承宣)을 거쳐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는 동안 수차(數次)에 걸쳐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1197(神宗卽位)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1200년 수태부·문하시랑평장사(守太傅門下侍郞平章事), 이듬해 수태위·주국(守太尉·柱國)이 되고, 1211년 최충헌(崔忠獻)의 명()으로 한남공(漢南公) (; 康宗)을 추대(推戴)하여 즉위(卽位)케 했다. 학문에 조예가 깊었고, 만년(晩年)에는 불교를 깊이 믿어 대장경(大藏經)을 금서(金書)했다. 희종(熙宗)의 묘정(廟廷)에 배향(配享), 시호(諡號)는 양숙(良淑)이다.

 

임항(任沆)

어려서부터 문학(文學)에 능했고 덕망(德望)이 높았다.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벼슬이 예부시랑(禮部侍郞)에 이르렀으며, 일찍이 사신(使臣)으로 금나라()에 갔을 때 그의 풍의(風誼)에 감탄한 그곳 명사(名士) 주객시랑(主客侍郞) 이양(李陽)으로부터 환대(歡待)를 받았다.

 

임종일(任從一)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 中書門下省 正二品 벼슬)를 지냈다.

 

임익순(任益淳, 1163(의종 17) ~ 1227(고종 14)

고려의 문신(文臣). 공부상서(工部尙書) 극정(克正)의 손자, 음보(蔭補)로 벼슬에 나가 1189(明宗 19) 황려(黃驪; 驪州)의 수령으로 부임하여 병역(病疫)에 시달리는 백성을 구제(救濟)했다. 1211(熙宗 7) 호부 원외랑 겸 삼사 판관(戶部員外郞兼三司判官), 1212(康宗 1)에 안동도호부판관(安東都護府判官), 1215(高宗 2)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郞)에 이어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병부낭중(兵部郎中전중소감(殿中少監대부경(大府卿) 등을 역임했다. 1224(高宗 11) 판예빈성사(判禮賓省事)가 되고 이듬해 겸삼사사(兼三司使)에 임명되었다.

 

임경숙(任景肅)

고려의 학자, 평장사(平章事; 中書門下省 正二品 벼슬) ()의 아들로, 1227(高宗 14) 수찬관(修撰官)으로서 명종실록(明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238년 형부상서(刑部尙書)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 1240년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서 지공거(知貢擧), 1244년 좌복야(左僕射; 尙書省 正二品 벼슬)로서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1251(高宗 38) 동중서문하평장사·수문전대학사·판이부사(同中書門下平章事修文殿大學士判吏部事)로 치사(致仕)했다.

 

임경겸(任景謙)

고려(高麗) 때 공부상서(工部尙書)를 지냈다.

 

임효순(任孝順)

고려(高麗) 때 판도판서(判圖判書; 版圖司 소속의 正三品 벼슬)를 역임하였다.

 

임경순(任景恂)

고려 때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를 지냈다.

 

임찬(任儧)

고려 때 문하성사(門下省事)를 지냈다.

 

임익(任翊, ? ~ 1301(충렬왕 27)

고려의 문신(文臣). 동지추밀원사·한림학사승지(同知樞密院事翰林學士承旨) 경겸(景謙)의 아들로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1277(忠烈王 3) 좌찬덕(左贊德), 1279년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대사성(大司成판합문사(判閤門事), 밀직부사·동수국사(密直副使同修國史)에 이어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로 치사(致仕)했다. 일찍이 왕명(王命)으로 선원록(璿源錄)을 지었고, 1295(忠烈王 21)에는 동수국사치사(同修國史致仕)로 왕명(王命)을 받아 사관수찬관(史官修撰官) 김병(金賆)과 함께 원나라() 세조(世祖)의 사적(事蹟)을 찬()했다. 박학(博學)하고 전고(典故)에 밝았다. 시호(諡號)는 광정(匡靖)이다.

 

임급(任伋)

1368(恭愍王 17)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뒤에 광정대부(匡靖大夫; 文官으로 從二品)에 올랐으며, 이부상서(吏部尙書판삼사사(判三司事문하좌찬성사(門下左贊成事)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다.

 

임방부(任邦富)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 中書門下省 正二品 벼슬)를 지냈다.

 

임방수(任邦壽)

고려(高麗) 때 태자태부(太子太傅; 東宮에 속하여 世子 敎育을 맡아보던 從一品 벼슬)를 지냈다.

 

임서원(任瑞原)

고려(高麗) 때 전공판서(典工判書)를 역임하였다.

 

임홍헌(任洪憲)

고려(高麗) 때 태자태부(太子太傅; 東宮에 속하여 世子 敎育을 맡아보던 從一品 벼슬)를 지냈다.

 

임인정(任仁貞)

고려 때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냈다.

 

임보(任寶)

고려 때 예빈시랑(禮賓侍郞)을 지냈다.

 

임서종(任瑞宗)

1380(禑王 6)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지냈으며, 1392(朝鮮太祖 1) 조선개국(朝鮮開國)에 공()을 세워 순성보조개국원종공신(純誠輔祚開國原從功臣)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고, 뒤에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이르렀다.

 

임헌(任獻)

조선태조(朝鮮太祖) 때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399(定宗 1)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뒤에 예조참판(禮曹參判대사헌(大司憲부제학(副提學) 등을 역임하였으며, 품계(品階)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다.

 

임약(任約)

조선 때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다.

 

임종선(任從善)

1419(世宗 1)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에 등용(登庸) 된 후 사간(司諫직제학(直提學) 등을 지냈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그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전라도(全羅道경상도(慶尙道)의 관찰사(觀察使), 경상도병마절도사(慶尙道兵馬節度使) 등을 역임하였다. 시문(時文)에 능하였다.

 

임정(任挺)

조선 때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지냈다.

 

임석명(任錫命)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 五衛에 둔 從四品 西班 武官職)을 지냈다.

 

임규(任揆)

조선조(朝鮮朝) 때 예조좌랑(禮曹佐郞)을 역임하였다.

 

임중경(任仲卿)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임회(任會)

조선 때 판관(判官; 從五品 벼슬)을 지냈다.

 

임득창(任得昌)

조선 성종(成宗) 때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사신(使臣)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뒤에 온성도호부사(穩城都護府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명성이 높았고, 청렴결백(淸廉潔白)했다.

 

임광세(任光世)

()는 현숙(顯叔), 조선 성종(成宗) 때 음보(蔭補)로 충순위(忠順衛)를 거쳐 통례원좌통례(通禮院左通禮)에 이르렀다. 뒤에 손자(孫子) 임발영(任發英)의 공()으로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추증(追贈), 관산군(冠山君)에 추봉(追封)되었다.

 

임충세(任忠世)

()는 신숙(信叔), 조선 때 부사맹(副司猛; 五衛에 딸린 從八品)을 지냈다.

 

임은(任誾)

()는 석공(碩公), ()는 죽담(竹潭), 1472(成宗 3) 성균진사(成均進士)가 되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學問)에 전심(專心), 후진교육(後進敎育)에 힘썼다. 특히 경사(經史)에 밝았다.

 

임근(任謹)

()는 경중(敬仲), ()는 백헌(柏軒), 조선 중종(中宗) 때 효행(孝行)으로 관찰사(觀察使)의 추천을 받아 강릉참봉(江陵參奉)을 지냈다. 뒤에 그가 죽었을 때 왕()이 특별히 제관(祭官)을 보내어 치제(致祭)케 하였다. 이때 왕명(王命)으로 홍문관(弘文館) 응교(應敎; 正四品 벼슬) 조홍진(趙弘鎭)이 왕()이 하사(下賜)한 제문(祭文)과 비문(碑文)을 찬()했으며, 현감(縣監) 박민헌(朴敏獻) 등이 함께 치제(致祭)하였다.

 

임희준(任希駿)

()는 덕기(德驥), ()는 백담(伯潭), 조선(朝鮮) 때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다.

 

임희훈(任希訓)

()는 덕일(德馹), ()는 송담(松潭),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임희중(任希重)

()는 대수(大受), ()는 국담(菊潭), 조선 명종(明宗) 때 생원(生員진사시(進士試)에 모두 합격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심(專心)하였고, 임억령(林億齡)과는 막역(莫逆)한 사이로서 누차 학행(學行)으로 천거(薦擧)되었으나 벼슬에 오르지 않다가 잠시 좌통례(左通禮)를 지냈다. 뒤에 다시 은퇴, 후진교육(後進敎育)과 학문연구에 전심했고, 그의 저서 인재책(人才策)은 유명하다. 경서(經書)에 밝았고, 문장에 뛰어났으며, 천문(天文지리(地理병법(兵法수학(數學) 등에도 정통했다. 특히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많은 일화가 전한다.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임희보(任希普)

()는 거규(巨奎). ()는 연담(蓮潭), 조선 때 만호(萬戶; 從四品 武官職)를 지냈다.

 

임희성(任希聖)

()는 중현(仲賢), ()는 난실(蘭室),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여러 내외직(內外職)을 거쳐 진도군수(珍島郡守)를 지냈다. 뒤에 아들 발영(發英)의 공()으로 호조판서(戶曹判書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 관흥군(冠興郡)에 추봉(追封)되었다.

 

임희진(任希璡)

()는 사현(士賢), ()는 국암(國巖), 조선 선조(宣祖) 때 진사(進士)가 되고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해남(海南)에서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누차 왜적(倭賊)과 싸워 공()을 세우고 이해 제2차 진주성 전투(2次 晋州城 戰鬪)에서 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전사했다.

 

임희사(任希駟)

()는 치원(致元), 조선 때 주부(主簿)를 지냈다.

 

임응룡(任應龍)

()는 희운(希雲), 1556(明宗 11)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장흥(長興이산(理山경원(慶原) 3()을 다스린 뒤 전라도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를 지내고 뒤에 제주목사(濟州牧使)로 부임(赴任),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임천감(任千鑑)

()는 경택(景澤), 조선 때 판관(判官; 從五品 벼슬)을 지냈다.

 

임준(任俊)

()는 경흡(景洽), 1561(明宗 16)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략장군(宣略將軍; 從四品 品階수문장(守門將) 등을 지냈다. 1592(宣祖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선조(宣祖)를 호종(扈從)하여 용만(龍灣)에 이르러 왜적(倭賊)을 만나 역전(力戰) 끝에 형() 천감(千監)과 함께 전사(戰死)했다.

 

임경백(任慶伯)

()는 자한(子翰), 조선 때 훈련원부장(訓練院副將)을 지냈다.

 

임숙견(任叔堅)

조선 때 현령(縣令; 東班 從五品 外官職)을 지냈다.

 

임만영(任萬英)

()는 홍백(弘伯), 조선 때 진사(進士)를 지냈다.

 

임천영(任千英)

()는 홍로(弘老), 조선 때 첨지중추(僉知中樞)를 지냈다.

 

임백영(任百英)

()는 홍언(弘彦), ()는 화동(花洞), 조선 때 학문(學問)과 무예(武藝)에 뛰어났으며, 특히 눈동자가 둘씩이었다고 한다. 1561(明宗 1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경연관(經筵官수찬관(修撰官) 등을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 文官 正三品 堂上官)에 오르고, 뒤에 김해도호부사(金海都護府使)를 역임하였다. 1592(宣祖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김익복(金益福박광전(朴光前) 및 동생 임계영(任啓英) 등과 함께 의거(義擧)를 협의(協議), 이때 그는 연로(年老)하여 직접 전장에 임()할 수 없으므로 동생 임계영(任啓英)에게 의병장(義兵將)을 위임(委任)하고 모든 전략(戰略)을 지시하는 한편, 가재(家財)를 풀어 군량(軍糧)을 보급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 문장(文章)과 병략(兵略)에 뛰어났다.

 

임발영(任發英)

조선의 무신(武臣). 희성(希聖)의 아들로 1568(宣祖 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그 후 무예(武藝)를 연마(硏磨), 추천(推薦)을 받아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1592(宣祖 25)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종묘서령(宗廟署令)으로서 묘주(廟主)를 모시고 왕()을 의주(義州)에 호종(扈從)했다. 의주(義州)에서 무과(武科)에 급제, 안주목사(安州牧使)가 되고, 이듬해 운량사(運糧使)로 군량수송(軍糧輸送)에 공()을 세웠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으로 예양군(汭陽君)에 추봉(追封),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임중진(任仲眞)

()는 거위(去僞), ()는 귀암(龜巖), 어려서부터 문학(文學)과 무예(武藝)에 뛰어났다.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달양(達梁)의 난()에 누차 적()을 격파한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경상좌도수군첨절제사(慶尙左道水軍僉節制使)를 역임(歷任)하였다.

 

임계진(任季眞)

()는 전여(銓汝), 조선 때 사과(司果; 五衛에 속한 正六品 武官職)를 지냈다.

 

임정(任廷)

()는 여필(汝弼), 조선 선조(宣祖)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감찰(監察)을 지냈다. 1592(宣祖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모집(募集), 우수사(右水使) 이억기(李億祺)를 따라 안골포 해전(安骨浦 海戰)에서 공()을 세우고 한산도 대첩(閑山島 大捷)에서 이억기(李億祺) 등과 함께 전사(戰死)했다.

 

임달영(任達英)

조선 선조(宣祖)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찰방(察訪; 驛站 管理하던 從六品 外官職)을 지냈다. 1597(宣祖 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모집(募集), 의병(義兵) 수백을 거느리고 소사(素砂전주(全州금산(錦山) 등지에서 누차(屢次) ()을 격파했다. 그 공()으로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에 올랐다.

 

임혼(任混)

()는 극초(極初), 조선 선조(宣祖)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훈련원판관(訓練院判官)으로서 1592(宣祖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이복남(李福男)을 따라 용성 전투(龍城 戰鬪)에서 많은 전과(戰果)를 올리고 이복남(李福男)과 함께 전사(戰死)했다.

 

임제(任濟)

()는 제부(濟夫), 조선 때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냈다.

 

임충간(任忠幹, ? ~ 1644(인조 22)

조선의 무신(武臣). 탁영(卓英)의 아들로, 1592(宣祖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종묘령(宗廟令)이 된 숙부(叔父)를 따라 묘주(廟主)를 모셨고, 1600년 무과(武科)에 급제한 뒤 여러 고을의 현령(縣令)을 지냈다. 1636(仁祖 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임금을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호종(扈從), 이듬해 경상좌도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가 되고, 그 후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라 여러 지방의 목사(牧使)를 거쳐 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管)에 이르렀다.

 

임희(任喜)

()는 경숙(慶叔), ()는 이계(怡溪), 어려서부터 학문(學問)에 전심(專心), 특히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었고, 제자백가(諸子百家)에도 정통했다. 학행(學行)으로 추천되어 벼슬은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이르렀다. 이재(李縡)가 그의 행장(行狀)을 찬()했고, 유림(儒林)에서 보성(寶城)에 오현사(五賢祠)를 세워 제향(祭享)하고 있다.

 

임시윤(任時尹)

()는 화수(華叟), ()는 거곡(巨谷), 조선 때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임즙(任楫)

()는 경득(景得), ()는 제천당(濟川堂), 조선 때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은 학자(學者), 부모상(父母喪)을 당()했을 때 예절(禮節)에 따라 상례(喪禮)를 치르니 효행(孝行)과 학문(學問)이 당세(當世)에 저명(著名)하였다.

 

임대년(任大年)

()는 수경(壽卿), ()는 대은암(大隱庵), 평소 영달(榮達)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學問)에만 전심(專心)하여 학문과 덕행(德行)으로 명성(名聲)이 높았다. 특히 빈곤(貧困)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흉년(凶年)을 만날 때마다 돈과 곡식으로 구휼(救恤)했으며, 때로는 전장(田庄)까지 팔아서 제민(濟民)에 힘썼다. 숙종(肅宗) 때 이단하(李端夏)의 추천으로 백의(白衣)로서 찰방(察訪)에 임명되었으나 취임(就任)하지 않았다. 시문(詩文)에 능()했다.

 

임대유(任大有)

()는 이암(耳巖), 1607(宣祖 40)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고, 1634(仁祖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창의(倡義)하여 군무(軍務)에 종사(從事)했다.

 

임대진(任大晋)

()는 국사재(國士齋), 조선의 학자(學者)이다.

 

임려(任侶)

()는 중성(仲盛),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임만기(任萬紀)

()는 예겸(禮謙), 1665(顯宗 6)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숙종(肅宗) 때 오위장(五衛將양덕현감(陽德縣監영암군수(靈巖郡守장흥부사(長興府使위도첨절제사(蝟島僉節制使전라남도우후(全羅南道虞侯), 순천(順天나주(羅州)의 영장(營將), 평양중군(平壤中軍숙천부사(肅川府使) 등을 역임했다. 관직(官職)에 있는 동안 명관(名官)으로 이름났으며, 특히 청렴결백(淸廉潔白)하여 명성(名聲)이 높았다.

 

임자당(任子堂)

()는 세구(世構), ()는 보연(寶燕), 조선 때 학자(學者)이다.

 

임성(任誠)

()는 여현(汝賢), 조선 때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다.

 

임이열(任以說)

조선 때 판관(判官)을 역임하였다.

 

임홍주(任弘舟)

()는 의중(毅仲), 조선(朝鮮) 때 학자(學者)이다.

 

임상주(任相舟)

()는 강수헌(強睡軒), 1673(顯宗 14) 생원(生員진사(進士) 양시(兩試)에 합격하였고 경서(經書)에 능()했다.

 

임후창(任後昌)

()는 무백(茂伯),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임수창(任壽昌)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임최(任最)

()는 유선(惟善), 조선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임욱(任勗)

()는 군보(君輔), 조선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임경관(任鏡觀)

()는 광보(光甫), 1725(英祖 1)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장령(掌令; 司憲府 正四品 벼슬사성(司成; 成均館 從三品 벼슬) 등을 거쳐 옥구현감(沃溝縣監울진현령(蔚珍縣令서산군수(瑞山郡守진주목사(晋州牧使장흥도호부사(長興都護府使) 등을 역임하고, 대사성(大司成; 成均館의 으뜸 벼슬로 正三品)에 이르렀다. 여러 지방관직을 역임하는 동안 선정(善政)을 베풀어 포상(褒賞)으로 은마(銀馬)를 하사(下賜)받았다.

 

임재대(任載大)

()는 여후(汝厚),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 五衛에 둔 從四品 西班 武官職)을 지냈다.

 

임주원(任柱元)

()는 대재(大哉), ()는 낙은재(樂隱齋), 1735(英祖 11) 진사(進士)가 되고, 1762년 반궁(泮宮)에 있을 때 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을 효종(孝宗)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할 것을 건의하여 시행케 했고, 박남계(朴南溪)를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지 말 것을 건의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사직(辭職)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학문(學問)과 절의(節義)로써 명성이 높았다.

 

임장원(任長源)

()는 회일(會一), ()는 규암(葵庵), 1773(英祖 49)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1798(正祖 22)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왕()으로부터 극찬(極讚)을 받았고, 동부승지(同副承旨)에 특진(特進)되어 경연관(經筵官춘추관(春秋館)의 수찬관(修撰官)을 겸임(兼任)했다. 성리학(性理學)에 조예(造詣)가 깊었고, 문장(文章)에 뛰어났다. 성품(性品)이 충직(忠直)하여 정조(正祖)로부터 많은 총애(寵愛)를 받았으며, 당시 유학(儒學)의 종사(宗師)로 일컬어졌다. 예조참판(禮曹參判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에 추증(追贈)되었다.

 

임일원(任一源)

()는 효여(孝汝), 1754(英祖 30)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사서(司書설서(設書)를 거쳐 이조정랑(吏曹正郞장례원정(掌隷院正) 등을 역임하고, 뒤에 영해도호부사(寧海都護府使함경도도사(咸鏡道都事좌통례(左通禮경성도호부지평(鏡城都護府持平) 등을 역임하였다.

 

임제원(任濟遠)

()는 군즙(君楫), ()는 수암(叟巖), [[1755]](英祖 31)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전적(典籍감찰(監察)을 거쳐 병조(兵曹예조(禮曹호조(戶曹)의 정랑(正郞), 장령(掌令봉상시정(奉常寺正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 등을 역임하고, 외직(外職)으로 나가 만경현령(萬頃縣令양산군수(梁山郡守)를 지냈다. 청렴결백(淸廉潔白)하여 인망(人望)을 얻었고, 문장(文章)에 뛰어났다.

 

임용재(任龍材)

()는 인용(仁用), ()는 만회(晩悔), 1831(純祖 3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오위장(五衛將)에 특임(特任)되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올랐다. 1838(憲宗 4) 80세에 이르러 노인직(老人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임사국(任思國)

()는 성보(聖甫), ()는 뢰옹(懶翁), 조선 때 학행(學行)이 뛰어나 누차(屢次) 도천(道薦)되어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취임(就任)하지 않았다. 문장(文章)과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많은 저서(著書)를 남겼고, 좌승지(左承旨)에 추증(追贈)되었다.

 

임중현(任中鉉)

()는 윤화(允和), ()는 초운(樵雲), 1894(高宗 31) 성균진사(成均進士)가 되었다. 학문(學問)과 효행(孝行)으로 명성이 높았고, 평생을 세상과 인연을 끊고 학문(學問)에만 전심(專心)했다. 김윤식(金允植)이 그의 행장(行狀), 김복한(金福漢)이 초운당기(樵雲堂記), 박기양(朴箕陽)이 그의 묘갈명(墓碣銘)을 각각(各各) ()했다.

 

임태주(任泰柱)

()는 성재(誠齋), 어려서부터 학문(學問)에 전심(專心)하여 고향인 화순(和順)에서 일생동안 학문과 후진양성(後進養成)에 전념(專念)했다. 그의 문하(門下)에서 많은 학자(學者)가 배출(輩出)되었는데, 그는 특히 성리학(性理學)에 조예(造詣)가 깊어 당시 대표적인 성리학자(性理學者)로 추앙(推仰)되었다. 많은 저서(著書)를 남겼고, 장흥(長興)의 용강사(龍岡祠), 능주(綾州)의 칠송서원(七松書院)에 제향(祭享) 되었다.

 

임귀현(任龜鉉)

()는 성구(聖求), ()는 전은(田隱), 효행(孝行)이 뛰어나 고종(高宗) 때 누차(屢次) 천거(薦擧)되어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을 지냈고, 뒤에 노인직(老人職)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임기남(任琪南)

()는 응수(應叟), ()는 의재(毅齋), 한말(韓末) 고종(高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1894(高宗 31)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이 일어나자 수성대장(守成大將)이 되어 동학군(東學軍)과 격전(激戰) 끝에 박헌양(朴憲陽) 등과 함께 전사(戰死)했다.

 

임병관(任炳琯)

()는 문초(文初), ()는 죽파(竹坡), 고종(高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부사과(副司果)을 지냈다. 1894(高宗 31)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 때 아버지 임기남(任琪南)이 전사(戰死)하자 단신(單身)으로 적진(敵陣)에 뛰어들었다가 적탄(敵彈)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이때 그의 부인 박씨(朴氏)가 뒤따라 적진에 뛰어 들어가 시아버지 시체(屍體)는 들것에 싣고, 부상당한 남편은 등에 업고 적군(敵軍)을 헤치고 집에 돌아왔다. 그 후 일문(一門) 3(三節; ··)로서 세인(世人)의 많은 칭송(稱頌)을 받았다.

 

임병국(任柄國)

()는 민호(珉鎬), 1905(光武 9)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締結)되자 국권(國權)을 회복(恢復)코자 수백 장정(壯丁)을 규합(糾合)하여 거의(擧義)할 것을 결의하고 안규홍(安圭洪염재보(廉在輔송기휴(宋基休양동훈(楊東勳이관회(李貫會) 등과 합세, 1908 3 26일 왜적(倭敵) 영호(永戶, えいと평정부대(平井部隊, ひらい ぶたい)가 순천(順天)으로부터 보성(寶城)에 출동한다는 정보(情報)를 탐지(探知)하고 길목에 잠복(潛伏)하였다가 기습(奇襲)하여 대장 영호(永戶, えいと)와 평정(平井, ひらい)을 비롯하여, 많은 왜적(倭賊)을 죽이고 전리품(戰利品)을 노획하는 등 대첩(大捷)을 거두었다. 그 후 계속해서 문덕(文德복내(福內) 등지에서 수차(數次)에 걸쳐 교전하였으며 왜적(倭賊)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었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패()하고 왜적(倭賊)에게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宣告)받고 광주형무소에서 복역(服役)했다.

 

주요 유적지

 

삼군사(三君祠) 임광세(任光世) 전남 해남군

삼군사(三君祠) 임희성(任希聖) 전남 해남군

삼군사(三君祠) 임발영(任發英) 전남 해남군

운곡사(雲谷祠) 임근(任謹) 전남 해남군

오현사(五賢祠) 임희(任喜) 전남 보성군

자산재(慈山齋) 임희중(任希重) 전남 보성군

용강사(龍岡祠) 임태주(任泰柱) 전남 장흥군

추원재(追遠齋) 임희준(任希駿) 전남 장흥군

칠송서원(七松書院) 임태주(任泰柱) 전남 화순군

 

 

6. 장흥 임씨(長興 任氏) 세거지(世居地)

 

- 전남 담양군 남면 학석리

- 전남 무안군 현경면 해운리

- 충남 보령시 미산면 옥현리

- 전남 보성군 겸백면 은덕리

- 전남 보성군 벌교읍 일대

- 전남 보성군 복내면 입석리

- 전남 보성군 웅치면 용반리

- 전남 보성군 율어면 고죽리

- 전남 보성군 율어면 율어리

- 전남 보성군 율어면 이동리

- 전남 보성군 조성면 귀산리

- 전남 보성군 조성면 신월리

- 전남 보성군 조성면 우천리

- 전남 보성군 조성면 축내리

- 전남 보성군 회천면 일대리

- 전남 순천시 서면 비월리

- 전남 순천시 서면 운평리

- 전남 순천시 해룡면 대안리

- 충남 아산시 영인면 월선리

- 전남 완도군 신지면 신리

- 전남 장흥군 장평면 용강리

- 전남 해남군 계곡면 강절리

- 전남 해남군 계곡면 당산리

- 전남 해남군 계곡면 덕정리

- 전남 화순군 북면 남치리

 

 

7. 장흥 임씨(長興 任氏) 항렬표(行列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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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사이트

http://cafe.daum.net/ikh826

  

 

8. 장흥 임씨(長興 任氏) 인구수(人口數)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장흥임씨는 2,877가구 총 9,355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끝으로 님의 건강과 행복이 충만 하시기를 빌겠습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반갑습니다


長興任氏大宗會  宗務總長입니다


먼저

장흥임씨는 중화임씨로 까지 이어집니다

중화임씨 121세 임호께서 중국 송나라 절강서 소흥부에

서씨 할머니와 사이에 아드님  두분 임전 임관을 두시고

천관산 인근 임씨도에 도착

고려국에 귀하하시어  양원  군대부인 이씨와의 사이에

아드님 정경공 임의를 두셨습니다


따라서

장흥임씨 자손 모두는 정경공 임의  자손입니다


물론

임호께서는 시조입니다


1830년 경인대동보에서부터 

1세를 정경공 임의로 기록되었습니다


2005년 을유대동보에서는

1세를  정경공 아버지가 임호로 확인되시어

임호를 1세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1세의 기준에 따라서 세가 달라집니다


임호를 1세로 기준으로 하고 설명드리겠습니다


1세 임호

2세 임의

이후부터는 항렬만 기록하겠습니다

항렬에 따라 '0'들어갈 글자만 작명하게 됩니다


24세 0鉉 

25세 太0

26世 0모

27世 炳0

28世 0圭

29世 鍾0

30世 0洙

31世 榮0


이렇게 대종회에서 항렬을 정해놓았습니다

원리는 오행 木火土金水 순서로 되며

글자를 조금씩 달리 지을 수도 있으나

가급적 한 종족으로 항렬에 따라 작명하기를 권장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질문 있으시면  

장흥임씨대종회 카페에 올려주시고

연락주시면 종친님의 世系를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28세


  

맡길임 장흥임씨 돌림자

... 있는데요 장흥임씨 몇대 손인지 무슨공파인지, 알수 있을까요? 님의 질문에 답변을... 전장에 (臨)할 수 없으므로 동생 임계영(任啓英)에게 의병장(義兵將)을 위임(委任)...

장흥임씨 돌림자 좀 알려주세요

장흥임씨 돌림자 좀 알려주세요 할아버지는 병 아버지는 배 저는 돌림자를 넣지... 전장에 (臨)할 수 없으므로 동생 임계영(任啓英)에게 의병장(義兵將)을 위임(委任)하고...

맡길임씨 돌림자가어떻게되죠???

... 내밑의 돌림자까지 예측가능한가요??? 그리고 아버지가말씀하시길 경북의성군봉양면에 맡길임씨 종가가있는대... 추 : 조선(朝鮮), 시호(諡號) 정헌, 호조참판...

장흥 임씨인데 선조? 뭐 조상? 알려주세요

... 참고로 수풀 림(林)씨가 아니고 맡길 임(任) 에요 답변 : 님은 장흥 임씨(長興 任氏)... 돌림자를 몰라 세대 수는 찾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조부님 : ?세 ?자 돌림이시고...

장흥임씨 몇대손인가요?

장흥임씨 몇대손인가요? 맡길 임이고 저희 할아버지는 수자돌림 저희 아빠는 상자돌림... 전장에 (臨)할 수 없으므로 동생 임계영(任啓英)에게 의병장(義兵將)을 위임(委任)...

맡길임씨 본관질문여~

저는 맡길임씨구요.. 아빠가 독자신데다가 일찍 돌아가셔서 본관에 대한건 잘 모릅니다.... 흥자를 잘못보면 더불여자로 보게됩니다 님은 장흥임씨의 후손이. 맞는데. 돌림자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