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를 설명해 주세요

십일조를 설명해 주세요

작성일 2008.04.24댓글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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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가 십일조를 언급했다는 말을 들은적은 없습니다.

 

또  구약  말라기서에는  제사장 계급의 생활비라고 나와있다   하더군요.

 

예수는 바리세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 하여  기피하고,  경계하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십일조의 역할을 부정한 것 아닙니까?

 

예수의 제자들은 각자 자신의 생업을 따로 가지고,

 

전도 활동을 하였습니다.

 

지금의 목사라는 사람들도   자기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생업을 가지고,

 

목사 활동을 하여야   예수의 가르침에 맞는 것 아니까요?

 

십일조를   신약 시대인 지금 왜 강요하는 지 이해가 잘 안갑니다.

 

꼭  필요하다면   구약처럼  목사의 생활비로  십일조를 거두어야 되는 것 아닐까요?

 

전체 액수를 떠나서....

 

예를 들어   10000 명의 신도  교회이고   십일조를  평균  15만원  잡으면

 

그 교회 목사  한 달  생활비는   15 억원 되겠읍니다만은...

 

그러나  예수는  바리세인을 부정하였으니,

 

십일조의 근거 자체가 없는 것 아니까요?

 

 

십일조를 거두어  교회 살림에 쓴다는 것은  성경 어디에도 없는 것 같습니다.

 

 

위  질문을  진지하게 대답해 주실  목사님 또는  전도사님이 꼭 계시기 바라고,

 

그분의 블로그에  참석하길  기대합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저기...

 

제가 아직은 나이가 무지 어립니다 14살 인데요 저두 엄마 배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녓습니다

 

그런데 제가 초등학생때 들엇는데 부자가 십일조를 하는데 엄청난액수 엿습니다

 

하지만 어떤 거지는 단 10원이라도 십일조를 하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10원을 낸사람을 구원을 해주신다고 들엇습니다

 

바로이런것이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그런거져 하나님께 저의 마음을 보여드리는것을 보여드리는 걸수도 잇습니다 제가 아직 나이가 어려서 잘모르겟습니다

 

어째뜬..

 

십일조는 자기가 엄청나게 힘들어서 번돈과 같을 수있습니다 특히 어른같은 경우에는말이져 월급 을 힘들게벌고나서 십일조를 합니다

 

한마디로 나의 한달중에서 힘들엇던 것들을 십분에 일을 내서 그 마음들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보면되겟죠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십일조 바르게 읽기(1) - 하나님을 시험하는 십일조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라기 3장 10절)"


하나님을 시험하자고? 뭐 십일조로?

성경에는 하나님을 시험하면 죽을 수 있기(고전 10:9) 때문에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출 17:2, 민 14:22, 시 78:18, 행 5:9, 히 3:9 등)고 경고하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은 시험을 당하지 않으신다(약 1:13)고 가르치고 있는데, 개역 성경의 말라기 3:10에서만은 유일하며 또 아주 담대하게 '하나님을 시험하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찍이 십일조로 하나님을 시험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십일조로 하나님을 시험해 보았던 '임상결과'를 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카네기가 그랬고, 록펠러가 그랬고... 어느 교회 모 장로님이 그랬으며 요즘 우리교회 모 집사님이 십일조 하면서 복 받아 성공했다는 십일조 무용담을 또 듣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면 안되고 심지어 저주받아 죽는다고 해도... 이 '십일조'는 얼마나 용한지 그 모든 말씀을 다 무색케 합니다.

그래서 오늘 한국 교회들의 십일조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나 또 야곱보다 한 수 위 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가나안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자신을 영접하러 나온 멜기세덱에게 그 전리품 중 십분 일을 주었으며(창 14:20), 야곱은 아버지를 속여 장자의 축복을 차지하고는 형의 보복이 두려워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하다 벧엘에서 꿈을 꾼 후,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창 28:20-22)"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전리품을 취했던 복을 이미 받은 후 그 중의 십분 일을 드렸고, 야곱은 복 받을 것을 미리 예상하고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일종의 '십일조 약정 헌금'만 하고 있는데 반하여 오늘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아예 축복의 선수금으로 미리 배팅을 한 후 그 배팅이 가시화 되는가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복 받고 나서 드렸고, 야곱은 복 받으면 드리겠다고 약속만 했지만 우리는 아예 미리 선수금을 드리고 있으니 얼마나 더 큰 믿음의 백성들입니까? 그래서 특히 '신년축복 대성회' 뭐 이런 집회에 가면 아예 이렇게 부추깁니다. "얼마만큼 복 받으시길 원합니까? 그 액수대로 미리 십일조를 드리십시오. 그리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시험해 보십시오. 내가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복을 쏟아 부어 주시나 안 주시나? 주시겠습니까? 안 주시겠습니까?" "주십니다! 아멘!!" 그래서 축복 선수금으로 십일조를 드려서 하나님을 시험해 보자고 까지 합니다. 참으로 기가 찰 노릇입니다.

그런데 말라기서의 이 말씀으로 전해지는 십일조의 메시지는 이같이 복을 쏟아 부어 주시겠다는 희망의 메시지만은 아닙니다. 또 한편으로는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이라'는 말씀과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8절)?'는 말씀으로 인하여 난처하고 두려운 말씀으로 둔갑하기도 하는, 아주 절묘하게 양날의 칼을 세운 말씀으로 우리에게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길 잃은 양들이 참으로 힘든 어려움 끝에 길 찾아 집으로 돌아오면 이번에는 파렴치한 십일조 도둑으로 몰려서 또 다시 집을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솔직한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우리가 십일조 도둑이었을까요? 그렇다면 도대체 얼마를 어떻게 해야 '온전한 십일조'가 될까요? 그리고 참으로 십일조만큼은 하나님을 시험할 수도 있는, 그렇게도 중요한 축복의 통로일까요? 늘 그래왔듯이 본문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객관적이며 꼼꼼하게 무엇보다 문맥을 따라 바르게 읽는다면 그 답들을 찾을 수 있겠지요.



십일조 도둑놈 찾기

우선 십일조 도둑놈 찾기를 먼저 하는 것이 논리적인 순서로 보아 좋을 것 같습니다. 과연 누가 십일조 도둑일까요? 제게 있어 성경을 추리하는 일차적인 작업은 늘 문맥입니다. 우선 말라기서 전체의 문맥과 흐름을 통해 추적하고 추리해 보면, 말라기는 B.C. 약 430년경에 기록된 책으로, 전체적인 메시지는 제사를 잘못 드리고 있는 제사장들에 대한 책망이 그 주제입니다. 본격적인 메시지가 시작되는 1:6에서부터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라고 말씀하시며 경고의 대상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라기 선지자가 지적하고 있는 제사장들이 저지른 죄악을 보면, 그들은 '더러운 떡을 하나님의 단에 드리고(1:7)', '눈먼 희생 즉 저는 것 병든 것으로 제사를 드렸으며(1:8)', '떼 가운데 수컷(즉 제사 드리기에 가장 좋은 것)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흠 있는 것으로 사기를 쳐서 제사를 드리고(1:13)' 있는 것이 당시 제사장들의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선 극도로 분노하신 음성으로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1:10)'고 까지 말씀하고 계십니다. 제발 좀 그 엉터리 제사들을 집어치우라는 말씀이시지요.

그리고 이어지는 2장 1절에서도 '너희 제사장들아 이제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하노라'라고 분명히 제사장들에게 말씀하고 있으며,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며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인데(2:7)' 말라기 당시의 제사장들은 '정도에서 떠나 많은 사람으로 율법에 거치게 하고(2:8)' '율법을 행할 때에 사람에게 편벽되이 하였으므로(2:9)', 즉 율법을 편파적으로 적용하며 오히려 거짓된 길을 가르치고 있었기에 심지어 하나님께선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2:3)'이라는, 지극히 격노하신 음성으로 제사장들에게 경고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2장의 후반부인 10-17절은 이방인과의 결혼으로 언약을 욕되게 한 점과 남자들에 의한 일방적인 이혼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데 역시 그 곳에도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자(12절)'들이 지목되고 있으며 '너희의 헌물을 돌아보지 않겠다(13절)' 는 제사장과 제사에 대한 경고의 말씀은 역시 동일하게 거듭되고 있습니다.

십일조 말씀의 전문맥인 3:1-6은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 특히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사자(3:1)'에 대한 약속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자는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며(3:3)' , '의로운 제물을 여호와께 드릴 것이며(3:3)' 그 사자의 사역으로 인하여 '유다와 예루살렘의 헌물이 다시 여호와께 기쁨이 될 것(3:4)'이라고 강조되고 있습니다. 결국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말라기 당대에 철저하게 실패하고 있는 제사장 사역이 '그 사자'를 통하여 다시 회복될 것임이 약속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후문맥인 4장의 내용 역시 전체가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 미래에 임할 '여호와의 날(4:1,5)'과 특히 3:1에서 언급했던 '내 길을 예비할 사자'가 좀 더 구체적으로 '선지 엘리야(4:5)'라고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엘리야의 사역 역시 '자녀들을 아비에게로 인도(4:6)'하지 못하고 있는 당시의 제사장들의 실패에 대한 경고이며 미래에 임할 엘리야로 인하여 자녀들을 아비에게로 바르게 인도하는 사역이 회복 될 것이라는 소망의 말씀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즉 말라기서는 십일조 본문(3:7-12)의 전후에 미래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 주어지고 있는데, 그 약속은 '주의 길을 예비할 사자인 엘리야'에 대한 소망이며 그 소망은 한결같이 제사장 직과 사역이 온전하게 회복될 것에 대한 소망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문맥의 한 가운데 3:8-10절의 십일조에 대한 말씀이 놓여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라기서는 현재의 상황에 대한 묘사와 그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나 나아가 미래의 소망에 대한 말씀까지도 철저하게 제사장과 그 사역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결국 말라기서 전체 문맥과 본문을 전후한 근접 문맥 모두 이 말씀의 경고 대상이 제사장 일 것임을 충분히 추측케 합니다.

그럼 이제 도적질을 지적하고 있는 바로 그 구절, 즉 말라기 3장 8절을 좀 더 꼼꼼히 보면서 도적놈을 찾아보겠습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도적질을 지적하고 있는 그 말씀입니다. 자세히 다시 한번 이 말씀을 보십시오. 그리고 이제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먼저 던지겠습니다. 이 말씀에서 지적하고 있는 '도적질한 하나님의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정말로 십일조입니까? 그것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십일조와 헌물'이라고 지적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도적질한 하나님의 것은 십일조와 헌물입니다. 십일조라고만 기록되었으면 십일조는 원래 하나님의 것이니 이것을 도적질했다는 것은 십일조를 떼어먹었다는 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헌물이 같이 나오고 있으며 헌물은 십일조와 달라도 한참 다릅니다. 헌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바쳐진 것입니다. 즉 쉽게 말하면 지금 우리가 일반적으로 드리는 그냥 헌금입니다. 당연히 헌물은 바쳐지고 나서야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것이지요. 헌물은 십일조와 달리 원래부터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헌물을 충분히 바치지 않았다 하여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다고 까지는 할 수 없습니다. 헌금 적게 냈다고 '이 도적놈아'라고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헌물을 도적질 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제사장들뿐입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성전에 바쳐 하나님의 것이 된 십일조와 헌물을 제사장들이 도적질했다고 보는 것이 올바른 해석일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이 헌물들을 어떻게 도적질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이미 1장에서 상세하게 지적한 바 있습니다. 떼 가운데 수컷이 있음에도 불구하고(1:13) 당시의 제사장들은 더러운 떡(1:7)과 저는 것, 병든 것의 눈먼 희생(1:8)으로 제사를 드리며, 오히려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하며 코웃음하면서(1:13) 제사를 멸시하고 자기들의 잇속만 챙겼던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제사를 드리기 전 제물들을 일일이 골라내어서 눈먼 것, 병든 것들은 골라낸 후 흠 없고 온전한 것으로만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일들이 귀챦았던 것이며 또 수컷들 즉 좋은 것은 자신들이 착복하기 위하여 숨겨두었던 것입니다. 대강대강 형식적인 제사를 드리고 돈만 챙기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가득했던 그들의 모습을 충분히 그려볼 수 있으며, 오늘 우리 시대에도 자신을 마치 제사장인 것처럼 착각하는 무리들 중에서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일이기에 뭐 그리 새삼스럽지도 않습니다. 흠 없는 제물이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 하는데 흠 있는 것으로 슬쩍 대체하고 좋은 것은 자신들이 챙겼으니 이것이 바로 도적질인 것이지요.

그리고 '도적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 '카바'는 영어 커버(cover)와 같은 뜻으로 '덮다, 속이다, 속여 빼앗다'라는 뜻입니다. 결국 그들은 좋은 것들을 cover하여 자신이 챙기고 백성들과 하나님을 속였던 것입니다. 도적놈들은 바로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리고 8절에는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라는 반문이 나오는데, 왜 이런 반문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백성들은 결코 이런 반문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흠 있고 모자른 재물을 가지고 나온 자신들의 죄를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어떻게 생각하면 백성들이 가지고 온 제물을 하나님께 드린 죄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억울한 심정으로 '백성들이 흠 있는 것을 가져왔는데 왜 우리더러 도적놈이라 하느냐'고 항변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도적질의 주체가 어디까지나 제사장들이기 때문에 이런 변명이 통하지 않는 것이며 오히려 하나님께선,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2:3)"고 극도로 분노하신 음성으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물론 백성들의 잘못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책임은 제사장에게 있었으며 그들이 도적놈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당시의 역사적인 상황도 그 도적놈들이 바로 제사장들이었음을 확신케 하고 있습니다. 십일조에 대한 도적질이 말라기서에는 구체적인 사건으로 나와 있지 않지만, 말라기 선지자가 살았던 시대의 또 다른 기록인 느헤미야서에는 13:4-14에 아주 구체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B.C. 445년부터 433년까지 유대 총독으로 재임했던 느헤미야는, 무너졌던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 성전 제사를 회복하면서 십일조를 철저하게 거두어 레위인과 제사장의 양식으로 성전의 곳간에 정상적으로 보관하는 대 개혁을 이루어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가 총독으로 예루살렘에 있을 때는 온 백성들이 레위인과 제사장들을 기뻐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그런데 아닥사스다 왕 32년에 느헤미야가 바벨론으로 다시 복귀함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모든 것이 원래대로 변하고 맙니다. 당시의 대제사장이었던 엘리아십이 성전 곳간에서 십일조를 비롯한 헌물들을 빼돌리고 그 방을 자신과 친분관계에 있었던 이방인 암몬 사람 도비야에게 내어주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기가 차고 피가 거꾸로 솟을 일입니다.

십일조 양식이 보관되어 있어야 할 성전 곳간에 십일조 양식은 온데간데없고, 성벽 재건 때도 그 일을 방해하며 적대적인 위협을 했으며, 느헤미야 시대의 유대인들과는 원수간이라 할 수 있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제는 대제사장과 결탁하여 성전 곳간을 차지하고 앉았으며 그래서 도적질 당한 십일조를 인하여 보수를 받지 못한 레위인과 성전에서 노래하던 자들은 오히려 거리로 내쫓겼으니... 이런 상태인데도 계속 십일조를 내야합니까? 우리가 그 시대를 살았더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결국 백성들이 십일조 내기를 즐겨하지 않고 또 눈먼 것 저는 것으로 십일조를 냈던 원인 제공을 누가 하고있습니까? 설사 당시의 백성들이 십일조를 제대로 안냈다손 치더라도 그 원인은 바로 대제사장이 앞장선 제사장들에게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이 실제적으로 십일조를 빼돌려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였고 오히려 원수의 배를 불리고 있던 상황에서, 백성들이 십일조를 낼 의욕을 갖지 못했으며 또 내고 싶지도 않았던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현상이 아니었겠습니까? 요즘 같은 시대였다면 분명히 '십일조 거부 국민연대'가 탄생하여 오히려 십일조 거부 운동이 당연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느헤미야가 총독으로 있었을 때에는 십일조를 떼어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느헤미야 12장 44절을 보면, '십일조를 모든 성읍 밭에서 거두어' 성전 곳간으로 가져다 들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당시의 십일조는 세금 비슷한 성격으로 거두어들였기에 십일조 징수인들이 아예 타작 마당으로 직접 찾아가 징수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큰 차이가 없었던 고만고만한 땅들에서 이미 소출이 훤히 드러나 있는 밭에서 직접 징수했던 십일조는 사실 속일 수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십일조가 레위인과 제사장들을 위하여 바르게 쓰여질 줄 알았기에 기쁨으로 드렸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변한 지금, 백성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십일조를 내기는 하면서도 십일조를 제사장들이 빼돌릴 것을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비록 그들 중 십일조를 내지 않거나 속여 내는 자가 있다손 치더라도, 실제적인 십일조 도적놈은 대제사장을 필두로 한 제사장들이며 또 백성들로 하여금 십일조를 도적질하도록 그들이 빌미를 마련해준 것은 자명하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다시 돌아왔을 때, 상황은 다시 역전되고 있는 모습을 우리는 느헤미야서의 마지막에서 볼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이 사실들을 알고는 크게 분노하여 그 방에서 도비야를 내어 쫓고 노략당했던 물품들을 다시 들여놓은 후 전국의 레위인들을 다시 불러들여 성전 일을 섬기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다시 십일조는 회복되었습니다. 성경은 "이에 온 유다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곳간에 들이므로(13:12)..."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충직한자로 인정받는 자'들을 다시 세워 그들로 하여금 십일조를 관리하며 분배하는 일을 맡겼습니다(13:13). 결국 말라기서의 문맥과 그 본문의 실제적인 의미를 보아서도 그렇지만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살펴보면 더욱 뚜렷이 확신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도둑놈들 그리고 강도의 굴혈에서

그러나 살펴본 바와 같이 본문 말씀의 진정한 의미가 이렇게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 교회들의 강단 설교에서 언제나 십일조 도둑으로 몰렸던 것은 성도들이었지 스스로 제사장이라 생각하는 오늘날의 목사들이 아니었습니다. 아직 한번도 이 말씀을 제사장이라 생각하는 자신들에게 적용하는 설교를 저는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이런 걸 두고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 하며,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하지요. 꼭 그 꼴입니다. 계속해서 밝혀가겠지만 십일조 자체가 이미 우리에겐 적용할 수 없는 율법의 준수사항임이 분명하고 또 십일조로 인한 비리와 잘못들은 항상 제사장 자신들이 빌미를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성전이 무너지고 제사장과 레위인이 사라진 지 2000년이 다 되어 가는 오늘날까지 성전을 들먹이며 자신들을 제사장이며 레위인이니 하며 거들먹대며 사기치며 속이고, 거기다가 한 술 더 떠 잘못 해석된 말씀을 들이밀며 십일조 도둑으로 성도들을 몰아서 헌금을 착복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들을 참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이 시대의 유일한 가치 척도는 돈이며 우리 시대의 유일한 종교는 그 돈을 숭배하는 맘모니즘이라는 데 이의를 다실 분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그렇게도 강조하신 것이 바로 이 시대의 가치관이요 종교인 물질숭배에서 벗어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모습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빙자하여 물질 숭배에 빠져 있는 모습, 바로 그 모습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선명하며, 거짓된 십일조 강요가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그리고 십일조의 잘못을 알고도 많은 분들은 십일조가 없으면 교회가 어떻게 운영되느냐고 항변하는 소리들을 저는 들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생각들이야말로 얼마나 인본주의적이며 물질주의적입니까? 돈이 교회를 움직입니까? 하나님의 일을 돈이 합니까? 예, 실지로는 다들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더 잘하기 위해서 돈이 필요하고 그러니 좀 모순은 있지만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의 주인은 돈이며, 지금은 하나님이 아니라 돈이 일하는 시대라고. 이 얼마나 악하고 패역한 소리며, 믿음이 없는 소리입니까? 진정한 하나님의 일이 돈이 없어서 안되는 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사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성전건축을 빙자하여 초 호화판 교회를 짓고 그것이 끝나면 교육관 짓고 그 다음에는 아예 그린밸트에 수양관과 묘지를 짓고... 그래서 압력넣고 뇌물쓰고... 과연 이 짓들이 진정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너무나도 분명한 우리 시대의 선악과는 '돈'입니다. 그리고 돈을 믿는 믿음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가장 심각한 불신앙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 불신앙의 한 가운데 바로 오늘 한국교회들의 '십일조'가 서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도적들이 모인 모임은 강도의 굴혈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이 길어지기에 더 언급하진 않겠습니다만 예수께서 당시의 성전을 돌아보시고 뒤집어엎으시며 그곳을 '강도의 굴혈'로 정의하신 것은 실로 가장 적확한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강도들의 굴혈은 강도 짓 한 것들을 모아 저장하는 장소입니다. 그리고 강도들의 굴혈은 강도 짓을 마치고 그곳으로 돌아와 한숨쉬고 안심하며 서로 격려하며 위로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강도들의 굴혈은 철저하게 계급사회로 유지되면서 강도 짓을 더 담대하고 잘할 수 있게 부추기는 두목의 훈시를 듣고 새로운 내일의 강도 짓을 준비하는 곳입니다. 물론 철저하게 자기들만의 세계를 유지하며 배신자는 조직의 쓴맛을 보게됩니다. 예루살렘의 성전도 도둑과 강도들이 모이면 강도의 굴혈이 되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겠지요. 망하기 전 성전의 모습은 강도의 굴혈이었음을... 역사는 반복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십일조

십일조 도둑이 과연 누구인지가 분명히 밝혀졌기에 이제는 남은 문제인 '온전한 십일조'와 '시험'에 대하여 살피겠습니다. 일차적으로 누구에게 주신 말씀이겠습니까? 예, 10절의 이 말씀 역시 일차적으로는 제사장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즉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의 곳간에 바르게 들임으로 시험해야 할 사람은 바로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온전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콜'인데 이는 앞선 9절에 나왔던 '너희 곧 온 나라가...' 할 때의 그 all의 의미입니다. 히브리어 '콜'은 단순히 '모든'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 분량을 다 채웠다는 의미의 '온전함'으로 쓰이는 단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역시 이 말씀이 일반 백성에게 대한 책망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자의적이고 잘못된 번역입니다. '온전한 십일조'는 백성들에게 십일조를 떼먹지 말고 다 드리라는 의미에서 강조된 말씀이 아니라, 제사장들을 향하여 백성들이 바친 십일조를 도적질하지 말고 '모두 다' 성전 곳간으로 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십일조를 도적질했던 제사장들에게 일차적으로 주신 경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 왔습니까? 성도들을 향하여 모든 소득을 철저하게 계산하여 정확한 십일조를 드리라고 윽박질렀지요. 그런데 과연 누가 정확한 십일조를 드릴 수 있습니까? 그리고 도대체 얼마가 그야말로 '온전한' 십일조입니까? 월급을 받으면 세금을 공제하기 전 명목상의 임금으로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까? 아니면 세금 공제 후 실제 수입으로 드려야 합니까? 어떤 사람은 월급을 타서 십일조를 하고 나머지 돈으로 정기적금을 들었는데 그 적금을 타면 다시 또 십일조를 해야 합니까? 어떤 교수는 지방으로 가서 특강을 하고 강의료를 받았는데 가는 동안 비행기 값이며 식사비는 제외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또 빚을 지고 있는 사람은 빚을 먼저 갚아야 합니까? 아니면 십일조를 먼저 해야 합니까? 아니면 남편이 믿지 않는 한 주부가 남편 몰래 남편의 월급에서 십일조를 드렸다가 발각되어 남편이 교회를 향하여 그 돈을 다시 돌려달라고 할 경우가 있었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모든 논란들이 '온전한 십일조'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오늘 우리들의 솔직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십일조는 근본적으로 '돈'으로 드린 것이 아니며 오히려 돈으로는 드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건 다음 글에서 밝혀드리죠. 아무튼 결국 어떻습니까? 율법처럼 지키게 될 때에 나타나는 자연스런 결과가 바로 이런 것들이며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하곤 합니다. 우리는 율법의 시대에 살지 않고 은혜의 시대에 살기 때문에 지금은 십일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십의 이나 심지어 십의 구까지 드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십일조가 율법이라는 걸 알기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그래서 십 이조나 십 삼조까지 드리자는 겁니다. 도대체 이런 엉터리 논리가 어디있습니까? 십일조가 폐지된 율법이라고 분명히 말해놓곤 결론은 십 이조나 십 삼조를 드리자니? 구약에 따르면 십일조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것이었기 때문에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이조, 십삼조를 바치는 것은 율법에 의하면 오히려 부정한 것을 바치는 것에 해당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일 뿐입니다. 결국 이같은 현상들은 '온전한 십일조'에 대한 몰이해와 돈에 환장한 교회들이 낳은 넌센스일 뿐입니다.

'나를 시험하여'라는 말씀도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엉터리 적용의 또 하나 중요한 예입니다. 이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할 때 '시험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된 히브리어 '나싸'와는 전혀 다른 말인데, 말라기 3:10의 말씀에선 '나싸'가 아니라 '빠한'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으며, '빠한'의 원 뜻은 '증명하다(prove)'입니다. '나싸'는 헬라어 '페이라조'인데 이는 글자 그대로 '시험하다(test, tempt)'의 뜻이지만 '빠한'은 '마음의 상태를 증명하다'라는 뜻으로 헬라어로는 '도미카조'라고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 헬라어, 영어 모두 이 두 단어를 명확히 구분하여 사용하며 번역하고 있으나 우리 성경은 구분 없이 모두 '시험하다'라고만 번역함으로써 혼동을 일으키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 대하여 마음을 증명한다라는 의미는 하나님 앞에 인간의 마음을 드러냄으로써 그 상태를 증명해 보인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문맥을 따라 그 뜻을 바르게 새겨 보면, 하나님께선 지금 제사장들을 향하여 그들이 십일조를 바르게 관리, 사용하며 또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온전하게 드림으로 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고 섬기기를 원하는 그들의 마음을 증명해 보이라고 촉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이같은 의미로 사용된 좀 더 명확한 예는 고후 13:5인데,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이 말씀에서 '페이라조'와 '도미카조'가 모두 사용되고 있으며 뒤에 나오는 '확증하라'가 바로 '도미카조', 즉 마음을 증명해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라기 3:10의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는 십일조를 많이 바치라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말씀이며 물론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하면 안됩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5장 10절에서도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도 물론 확증하라는 뜻의 '도미카조'가 사용되었으며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란 그 앞 절에서 이미,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으로 나타나는 빛의 열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성경에서 하나님을 시험하라는 말씀은 모두가 마음으로 그리고 삶으로 입증하고 확증하라는 뜻의 말씀이지 하나님을 향하여 뭔가 흥정을 하라고 사용된 경우는 한번도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시험하면 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우리는 십일조로 하나님을 흥정하고 시험하라고 부추킴을 받았으니... 그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뿐만 아니라 10절의 후반부 말씀인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라는 말씀도 잘못된 번역입니다. 원래 한글 개역 성경에도 '쌓을'이라는 단어는 원문에 없다는 뜻으로 아주 작은 글씨로 써놓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원문에 없는 그 작은 글씨를 언제나 가장 큰 소리로 읽고 또 가장 큰 소리로 강조하였지요. 결국 말라기 3:8-10은 기복주의적인 가치관을 전제로 성경이 번역된 아주 고약한 번역의 대표적인 경우라 할 것입니다. 당시의 그 도적놈 제사장들이지만 그들이 돌이키고 그 마음과 삶으로 다시 신실함을 증명한다면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선 용서하시고 오히려 그들을 향하여 다시 복을 내리시겠다는 은혜의 말씀인데, 오늘 한국 교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돈으로 팔아먹고, '십일조를 온전히 바치면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신다 그러니 십일조로 하나님을 시험하자'고 거짓되고 왜곡된 사실을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속여 선포하였으니, 그 엄청난 죄악을 어찌 감당할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의 일 점 일 획을 누구보다 중히 여기며 또 성경 외에 더하거나 감하는 일을 저주라고(계 22:18-19) 우리는 알고 있으며 또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은 이단들에게서나 발견되는 현상일 뿐 우리는 아니다고 사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글 을 쓰면서 늘 다시 느끼며 던지는 질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정말 그러한가라는 것입니다. 조금만 문맥을 살피고 조금만 본문을 꼼꼼히 보면 너무나 많은 부분에서 그렇지 않다라는 것이 사실 너무 쉽게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참으로 우리는 내 눈의 들보는 알지 못하고 형제의 티만 찾으며 살아왔습니다. 성경이 가장 경계하는 인본주의 물질주의의 들보가 바로 내 눈에 들어 있었는데 도대체 무엇인들 바로 볼 수 있었겠습니까?

아, 참으로 진리를 바르게 알고 싶으며 그 진리를 따라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진리라는 이름으로 또 우리는 얼마나 왜곡된 진리들을 지금껏 부추김 받았습니까? 겉으로는 하나님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인간들의 생각과 돈이 지배했던... 차마 우리들의 교회가 다 그랬다고는 말못하겠습니다. 그런데 너무 많은 모습들이 드러나고... 사실은 그랬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쉽게 말해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본질은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을 경배함으로 그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고 또 본질적임은 부연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장 본질적인 부분에서 '하나님은 십일조로 시험할 수 있다'는 하나님의 인식에 대한 왜곡된 지식이 입력되었으니 거기서 비롯된 다른 부가적인 산물들이야 뻔하지 않겠습니까?

호세야의 그 음성을 다시 들어야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
참으로 힘쓰고 애를 써서 바르게 여호와를 알아야 할 것이며, 그 길만이 우리가 살길임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돈이나 우리들의 얄팍한 행위의 그 어떤 것으로 시험할 수 있는 대상이 결단코 아닙니다. '십일조' 그 본질은 돈의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십일조는 그 어떤 다른 이유보다 하나님에 대하여 왜곡된 가르침을 증거하기 때문에 폐지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선 십일조를 통하여 무엇을 가르치고 싶으셨을까요? 그리고 우리가 십일조를 드려야 했다면 그 십일조를 통하여 과연 그 어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배웠어야 했을까요? 다음 글 <하나님을 알아 가는 십일조>에서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말씀을 중심으로 한발짝 더 십일조의 본질에 접근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아브라함과 야곱은 십일조를 드렸나?

십일조는 율법을 뛰어 넘는 행위이기에 오늘날에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은 아브라함과 야곱의 경우를 내세우며, 십일조는 이미 율법 이전부터 정해진 하나님의 법칙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먼저 십일조는 쉽게 말해 고대의 어느 나라에서건 시행되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널리 행해지던 보편적인 종교 관습이었고 또 조세제도였음이 역사적인 증거들로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십일조도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십시일반(十匙一飯)의 행위 그 자체는 특별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아브라함과 야곱의 경우는 기본적으로 그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은 가나안과의 전쟁 후 전리품 중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는데, 이는 전쟁에 지친 아브라함을 멜기세덱이 환대해 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보아야지 이를 공식적인 십일조로 확대 해석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리고 십일조는 토지와 땅의 소산으로 드리는 것이지 전리품은 십일조의 대상이 아닙니다. 민수기 31:25-30을 보면, 전리품은 500분의 1 또는 50분의 1일을 여호와께 바치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십일조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행위는 단순히 감사한 마음에서 고대의 관습을 따라 십분 일을 주었던 단회적인 한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릅니다.

그리고 야곱은 이번 글에서 인용했던 창 28:20-22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자기 소원을 이루어주시면 십분일을 바치겠다는 '조건부 십일조'라 할 수 있는데, 조건부 십일조 역시 십일조의 정신과는 달라도 한참이나 다른 것이며 오히려 야곱의 이와같은 행위는 결코 본받아서는 안될 모습일 뿐인데, 불행히도 오늘날 한국교회들은 야곱의 이와같은 행위와 비슷한 동기로 십일조를 강조하고 있지요. 결국 아브라함과 야곱의 행위에서 십일조의 기원을 찾는 것은 억지일 뿐이며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십일조 바르게 읽기(2) - 하나님을 알아 가는 십일조


진짜 십일조를 찾아서

그렇다면 하나님께선 십일조를 통하여 무엇을 가르치고 싶으셨을까요? 그리고 우리가 십일조를 드려야 했다면 그 십일조를 통하여 과연 그 어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배웠어야 했을까요? 지난 글에선 십일조 도둑놈 찾기를 통해 '하나님을 시험하는 십일조'의 문제를 풀어갔었는데, 오늘은 먼저 진짜 십일조 찾기를 통해 '하나님을 알아 가는 십일조'에 접근해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 진짜 십일조라니? 그럼 가짜 십일조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예, 물론 가짜도 있지요. 현재 한국 교회들에서 강조되고 있는 십일조가 바로 가짜 십일조입니다. 진짜 십일조는... 이제 한번 찾아볼까요?

우선 십일조가 세 가지 정도라는 것은 알고 계십니까?
이 세 가지 십일조들이 각기 다른 '세 개의 십일조'인지 아니면 '한 십일조의 세 가지 다른 국면'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저 성경에서 언급하는 순서대로 첫째, 둘째, 셋째 십일조라고만 이름 붙여서 언급하겠습니다.

"첫째 십일조"는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십일조로 "레위인과 제사장과 나눠먹는 십일조(레 27:30-33, 민 18:21-32)"입니다. 레위인과 제사장의 십일조는 레위기 27:30-33에서 언급된 후 민수기 18:21-32에서 좀 더 확장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땅과 거기 속한 모든 것이 여호와의 것이며 그 모든 소산들은 여호와의 은혜'임을 고백하면서 그 고백을 레위인들에게 십일조를 주는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것을 스스로 취하시는 십일조입니다. 또한 이것은 구별되어 성전을 섬길 직분을 맡음으로 땅 분배에서 제외된 레위인들을 위한 생계의 대책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레위인들 역시 자신들이 받은 십일조에서 다시 십일조를 떼어 제사장들에게 주어야했습니다. 이 십일조는 우리가 흔히 잘 알고 있고 또 교회에서도 가장 많이 들었던 십일조의 용도입니다.

"둘째 십일조"는 "축제에서 가족과 함께 나눠먹는 십일조(신 12:5-19, 14:22-27)"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십일조는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신 12:5, 11, 14:23)'으로 가지고 나와 '온 가족(12:7, 12, 14:26)'이 함께 먹고 즐기라는 명령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 제사의 큰 주제인 '여호와 앞에서의 음식 나눔'에 내포되어 있는 '거룩한 식사와 축제'라는 신학적 의미를 함의하고 있으며,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가 함께 축제하며 또 함께 나눠 먹는 정신은 신약의 애찬(love-feasts)과 성찬으로도 이어지고 있어서 언약 공동체 내에서 영속적 가치와 의의를 가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십일조는 유월절 등 절기 축제에 참여하는 경비와 또 함께 음식 나눔을 위하여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아무튼 중요한 것은 십일조를 제사장과 레위인만이 아니라 온 백성이 가족들과 함께 즐기며 나누어 먹음으로 참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에서 십일조는 레위인의 생계를 위한 것이다는 우리들의 일반적인 이해가 얼마나 편협한 것인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셋째 십일조"로는 "이웃과 나눠 먹는 십일조(신 14:28-29, 26:12-15)"가 또한 명령되고 있습니다. 이 십일조는 매 3년마다 한번씩 행하는 철저하게 나눔에 목적이 있는 십일조였는데, 수혜 대상은 레위인들과 객(이방인,개종자들)과 고아와 과부들이었습니다. 객과 고아와 과부들은 알다시피 구약에서 늘 언급되는 나눔과 구제의 대상이었기에 이 십일조는 특별히 약자를 보호하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기 위한 용도로 실시되었던 십일조였으며, 또한 성경을 자세히 보면 우리가 그토록 좋아하는 복에 대한 선포는 오직 이 십일조를 지키는 것에 대하여 선포되고 있음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십일조 하면 워낙 '복'을 밝히는 백성인지라 좀 강조하여 밝혀야겠습니다.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는 당연한 하나님의 것을 바치는 것이기에 오히려 안 지키면 저주만이 선포되고 있지만, 가난한 이웃을 위한 구제의 십일조는, 물론 이 십일조도 명령이지만, 이 십일조는 잘 지킬 때에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 14:29)"는 축복의 약속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 받기 위해 십일조 하시는 분은 전략적으로라도 반드시 구제의 십일조를 하셔야 그토록 원하는 복을 받을 수 있으므로 복 받기 위한 전략적 차원에서라면 이웃과 나눠 먹는 구제의 십일조를 하는 것이 훨씬 더 논리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세 가지 양상의 십일조가 구약 성경에 율법으로 언급된 십일조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둘째 십일조'와 '셋째 십일조'에 대하여는 지금 처음 들으시는 분도 꽤 있을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우리는 여지껏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는 잘 알고 있었는데 정작 십일조를 온 가족이 함께 나눠먹었다 라든지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는 삼 년에 한번씩 따로 다시 십일조를 했고 특히 그 십일조에만 사실은 축복이 선포되고 있음을 왜 우리는 여지껏 제대로 몰랐을까요? 서두에서 현재 한국 교회들에서 강조되고 있는 십일조가 바로 가짜 십일조라고 말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십일조는 정작 십일조의 일부분뿐이었고 또 레위인이 사라진 지금 우리가 십일조를 해야할 이유가 있다면 오히려 둘째 십일조와 셋째 십일조가 강조되어 십일조를 했어야 하는게 논리적으로 맞는데, 전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십일조와 관련되어 또 하나 잘못 알고 있는 점이 있는데, 십일조는 처음부터 성전 유지를 위해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성전 유지는 성전세로

위에서 이미 언급되었지만, 세 가지의 십일조 모두 '나눠 먹는다'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십일조는 철저하게 나눠 먹을 수 있는 음식에만 국한되었으며, 그야말로 '나눠 먹는 것',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성전 유지를 위해서는 '성전세(Temple tax)'가 있어서 그것으로 충당되었고, 건축을 할 때는 주로 자원하는 특별 헌금이나 헌물이 따로 드려졌습니다. 성경에는 성막을 만들었던 기록과 성전을 두 차례 건설하는 모습과 또 몇 번 성전을 보수하는 기록이 있지만 그 목적을 위해 십일조가 사용되었다는 언급이나 정황증거는 전혀 없습니다. 십일조는 그냥 나눠 먹는 것일 뿐이었으니까요.

반면에 성전세는 출 30:11-16에 나타나 있는데, 성전을 위한 속전으로 20살 이상된 성인 남자가 반세겔을 드리도록 제정되었으며, 출 38;24-31에서 처음 거둬들인 성전세의 세목과 또 그 성전세가 성막 건축에 사용되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역대하 24장에 보면, 요아스 왕이 여호야다 제사장 생전에 성전 보수를 하기 위하여 성전세를 거두었음을 알 수 있으며, 요시야 왕은 성전 보수를 하다 율법책을 발견하고 본격적인 개혁에 착수하였는데 그때에도 성전세로 거둔 은으로(왕하 22:4) 성전을 보수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미 지난 글에서 대대적인 십일조 회복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느헤미야도 성전을 위하여는 십일조와는 다른 별도의 성전세를 거두었음(느 10:32)을 알 수 있는데, 느헤미야 시대에는 1/3세겔을 성전세로 바쳤습니다. 즉 성전세는 원칙적으로 1/2세겔을 바치도록 되어 있었으나 느헤미야의 시대와 같이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대에는 그 세를 감하기도 하는 융통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중요한 것은 십일조와 성전 유지는 상관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강조하는 이유는, 오늘날도 십일조를 꼭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많은 분들이 '성전 유지'를 위해 필요하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십일조는 성전 유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에 이 말은 설득력을 가질 수 없으며, 정히 그러하다면 지금도 예배당 건물 유지를 위해서 특별한 헌금을 하거나 아예 성전세처럼 일종의 회비를 내는 것이 훨씬 더 성경적이며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잘못된 성경해석을 들이밀며 왜곡된 관점과 의도를 가지고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은 종교적 횡포일 뿐 결코 정당하고 바른 목회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스스로 '돈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자인하며 고백하는 행위에 다름이 아니며, 결국은 돈 때문에 진리를 팔아먹는 행위라고 지탄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성전세는 세겔이라는 돈으로 드렸지만 십일조는 아예 돈으로 바칠 수도 없었습니다. 구약 성경 어디를 보아도 토지 소산과 가축 이외의 다른 소득에 대하여 십일조를 내라고 한 경우를 찾을 수 없을 뿐더러 돈으로 십일조를 낼 수도 없었습니다. 구약에서는 돈으로 십일조를 내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14:24-27을 보면, '둘째 십일조'인 축제의 십일조가 설명되고 있는데, 토지 소산과 가축의 십일조를 가지고 가기에 성소가 너무 먼 경우에는 일단 돈을 가지고 가서 성소가 있는 곳에서 다시 십일조에 해당하는 물품들을 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레위기 27:31에 보면 '사람이 그 10분 1을 속하려면 그것에 그 5분 1을 더할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다시 말해 돈으로 대신하려면 10분 3에 해당하는 금액을 내야 한다는 말이며, 더구나 제사장은 그 돈을 십일조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돈으로 십일조에 해당하는 물품을 사야만 했습니다. 쉽게 말해 돈으로는 안받겠다는 말씀이지요.

어찌보면 참 이상하고 비합리적인 법규정입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멀리 있는 사람이야 당연히 돈으로 바치는 게 훨씬 쉬울 것이며, 제사장들이 모든 돈을 거두어서 일괄 구입하여 분배하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 훨씬 더 합리적이며 경제적입니다. 그리고 예리하신 어떤 분들은 그 당시는 화폐 유통시대가 아니었다 할런지도 모르겠는데, 그것도 전혀 아닙니다. 이미 화폐는 아브라함 이전부터 널리 유통되고 있었고(창 23:12-16) 또 십일조보다 앞서 성전세는 이미 돈으로 내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돈으로 내려면 3배를 내라고 하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억지로라도 그것들을 이고 지고 끌고 성전까지 가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선 왜 이렇게 비합리적인 요구를 십일조에 하고 계실까요?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십일조는 단순히 하나님의 것이기에 바치라는 것 이상의 그리고 복 받기 위해 바치라는 것 이상의 하나님의 특별하신 의도와 목적이 있음을 충분히 암시하고 있습니다. "너는 그것을 성전까지 네가 직접 이고, 지고, 끌고 와서 예배와 축제를 드리며 바쳐야 하고 레위인들과 온 가족들과 그리고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 나눠먹어야 한다"라는 것이 십일조에 대한 정확한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토지는 다 여호와의 것이니

그럼 이제 그 시대로 돌아가 한번 상상을 해 보겠습니다.
구약 시대의 한 농부가 있어서 추수를 마친 후 지키는 절기인 수장절(초막절)을 지키고 또 십일조를 드리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그의 마을은 예루살렘과 사흘 길이나 되었기에 그는 결국 밀을 이고 지고 양을 몰고 가족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이 일년 동안 수고하여 수확한 농작물을 이고 지고 또 애지중지 자식처럼 키웠던 양을 몰고 예루살렘을 향했던 그 사흘길 동안 그 농부는 과연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아니 어떤 생각을 하길 하나님께선 기대하셨겠습니까? 올 한해도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풍성한 수확을 얻게 하신 것에 대한 감사일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억해야 할 것은 구약 시대에 모든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레위기 25:23에 보면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 임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토지 소산의 10분 1이 여호와의 것이라고 한 것은, 토지가 여호와의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우기 위함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 토지가 안식했던 안식년에는 모든 백성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십일조는 레위인을 위한 생계보장책 이전에,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주인이라는 신앙고백인 동시에 땅을 주시고 또 한 해 동안 그 땅에서 넉넉히 수확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토지 분배가 골고루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십일조를 내는 분량도 그리 차이가 나지 않았습니다. 즉 십일조를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내면서 생색을 내는 사람도 없었고 십일조를 적게 낸다고 부끄러워하는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모두 땅이 분배되어 있었기 때문에 십일조를 내지 못하는 사람도 원칙적으로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안식년 제도와 함께 '모든 토지는 다 여호와의 것'이라는 고백을 요구하셨던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악한 인간들이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것인 토지를 인간들 욕심에 따라 투기의 대상으로 삼은 결과 이 지구상의 무수한 백성들이 이제는 땅 한 평 없이 살아가는 현실이 펼쳐지고 있으며, 한국은 그 가장 대표적인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대형교회들을 필두로 대부분의 교회들은 십일조로 모은 막대한 돈으로 부동산 투기꾼 못지 않게 땅들을 사들여서 건물 짓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땅을 사들이고 값이 오르면 그 땅을 팔아서 더 큰 땅을 사고 건물짓고... 다른 명목의 헌금을 그렇게 사용했어도 좋지 않은 소리를 들을 일인데 하물며 십일조의 명목으로 들어온 헌금으로 땅을 사고 앉았으니, 십일조를 제정하신 하나님께서 얼마나 통탄해 하실 일이겠으며, 교회들 스스로가 이미 십일조를 무효화시킨 꼴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십일조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면 오히려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어서 무엇보다 토지 분배가 즉 부의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도록 역설하며 힘쓰는 것이 오히려 십일조의 정신을 오늘에 바르게 살리는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십일조는 토지나 부의 분배가 공정하고 공평하게 이루어져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고 있다는 증거여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들의 십일조가 참으로 이러합니까? 아니면 정확하게 그 반대입니까? 사실은 정확하게 그 반대입니다. 죄송한 인신공격이지만 강남에 몰려있는 그 유명한 한국 대형교회들의 출발이 강남 지역의 개발로 하루아침에 땅 부자가 된 졸부들에 의하여 급격하게 성장하였음은 모두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무조건 십일조를 많이 바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선포하며 땅 부자 졸부들의 양산을 합리화시키며 나아가 교회들 스스로가 그 졸부들의 대열에 합류하지 않았습니까? 형편이 이렇게 분명한데 도대체 왜 지금도 돈에 환장하고 땅에 환장한 그 교회들에다 십일조를 한단 말입니까? 분별하셔야 합니다. 최소한 내가 출석하는 교회가 나의 십일조를 가지고 축복의 도구로 협박하거나 땅 사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면 감히 제가 당부드리거니와 지금 당장 그 십일조를 그만두십시오. 그건 동일한 죄악에 동참하는 결과만 낳을 뿐입니다. 교회에 드리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 드린다고 말씀하실 겁니다. 맞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냈다고 스스로 안위함으로 누리는 그 값싼 평화에 안주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더 분명하고 좋은 길이 당연히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토지 소산의 십분 일은 하나님의 것이다'는 의미 속에는 안식년 제도와 같이 모든 토지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토지가 하나님의 것이다는 사상과 고백 속에는 또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회와 경제제도에 대한 기대와 이상이 담겨 있어서,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며 평균케 하려는(고후 8:13-15)'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상적인 사회의 경제 제도에 대한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단순히 하나님의 것이니까 바쳐야 한다는 이해와 적용은 충분하다고 보기 힘들며 더 구체적인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요구하고 계신 것이 매 삼 년마다 드렸던 '구제의 십일조'입니다.

물론 십일조 자체가 '나누어 먹는 것'이었고 그래서 음식에 국한 됐었다고 이미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토지 소산인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십일조로 바쳐야 한다고 줄기차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찾아서 꼭 확인해 보십시오. (신명기 12:17, 신명기 14:23, 느헤미야 13:5, 느헤미야 13:12) 한결같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올리브유)의 십일조를 바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품목의 공통점은 나누어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소와 양 떼들 중에서 취했던 십일조 역시 제사를 드린 후 함께 나누어 먹었던 음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는 그야말로 동물성과 식물성이 골고루 갖춰진 음식인 셈이지요.

왜 십일조는 한결같이 먹을 수 있는 음식만을 내어놓으라고 하셨을까요? 당연히 나눠 먹으라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일조는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나눠 먹어야 했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과 함께 나눠 먹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나눠 먹었던 십일조가 레위인들에게는 그 몫이 돌아갔던 것 같은데, 가난한 자들에게까지는 제대로 미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셋째 십일조'인 구제의 십일조를 다시 제정해서 아예 삼 년마다 한번씩 더 지켜야 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번 더 십일조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강조점이 어디에 있는 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십일조 정신은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먹이시옵소서(잠 30:8)"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 6:11)"라는 바로 그 기도들과 맞닿아 있었던 것입니다. 잠언 30장 아굴의 기도에서 '필요한 양식'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찢어진 내 몫'이라고 앞선 23호글 "한 나그네의 기도"에서 언급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큰 빵 덩어리를 함께 뜯어먹는 그들의 식습관이 반영된 의미이며, '찢어진 내 몫'은 또한 제 몫을 갖지 못한 이웃에 대한 돌아봄을 함의하고 있는 생각이다고 말씀드렸었지요. 그리고 이 기도가 예수님에게 이르면 아예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으로 좀 더 구체화됩니다. 즉 이 땅에 양식이 없어서 굶주리는 자가 없게 해 달라는 기도이며,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면 그러한 자들과 우리가 함께 나눠 먹겠다는 나눔의 기도인 셈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가 하나님의 것이다는 고백은 또한 동시에 하나님의 관심인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에게 그 십일조가 돌려져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고 그렇게 실현되길 실천한다는 고백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아 가는 십일조

성경의 모든 기록과 가르침은 주 너의 하나님을 알고 그를 경배하며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십일조를 하든 무엇을 하든 그것을 말씀하신 이유이며 또 우리가 순종함으로 해야 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십일조 제도를 이스라엘에게 주셨을 때, 그것을 실천함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깨닫기를 원하셨던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십일조를 행함으로 주 너의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을 경배함으로 그 백성답게 살라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나라에선 분배받은 기업이 없거나 또는 소외되고 가난함으로 눈물 흘리는 자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에선 땅이나 돈이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되며 오히려 함께 나누고 섬기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일조 제도를 통하여 그같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십일조를 바르게 행함으로 그와 같은 하나님의 관심을 알고 또한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행하고 있는 십일조를 통하여 '경제 정의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그리고 지금 우리가 행하고 있는 십일조를 통하여 '나눔의 삶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진정 십일조를 행하고 있다면 그 공동체는 반드시 '평균케 되는 원리'가 현실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습니까?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함을 입고 성령으로 충만했던 공동체는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듯이 십일조가 문제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는(행 2:44,45)' '평균케 되는 원리의 삶'이 문자 그대로 실현된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으며 이것이 예수의 피로 구속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모든 율법은 은혜 아래에서 완성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십일조가 추구했던 '평균케 되는 원리의 삶' 역시 이렇게 은혜 아래서 성령의 충만함으로 완성된 모습을 성경은 이미 우리에게 좋은 본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다시 십일조로 돌아갔습니까? 십일조는 이제 우리의 목표가 아닌데 왜 겨우 십일조가 다시 목표가 되었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헛되게 하는 일이며 스스로 성령으로 충만치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일일 뿐입니다. 예수를 알고 성령을 아는 사람은 결코 십일조의 그늘 밑에 안주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십일조 다 냈다고 스스로 자위하며 자신의 의를 쌓아갔던 그 옛날 바리새인들의 삶으로 왜 다시 돌아가고 있습니까? 그것들 때문에 우리 주께서 그토록 치열하게 싸우셨고 피흘리기까지 하셨는데 왜 그 피흘림을 계속 헛되게 하고 있습니까? 겨우 십일조 따위로 하나님의 뜻을 팔아먹고 겨우 십일조 따위로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너무나 한심합니다.

오늘 우리가 행하고 있는 십일조와 헌금을 통하여 '평균케 되는 삶의 원리'가 나타나고 있지 않다면 불행히도 그것은 가짜입니다. 그리고 물론 십일조 천 수 백년 했지만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평균케 되는 원리가 제대로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율법이었기 때문이며 그래서 예수께서 오셔서 그 율법들을 완성하신 것이며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십일조를 훨씬 넘어서서 하나님의 공동체 모두가 평균케 되기 위하여 사실상 내 모든 것을 내어놓는 것이, 은혜와 성령의 시대인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몫입니다. 그런데 율법인 십일조를 앞장세워 성령 충만한 공동체의 모습을 아예 포기하게 만든 것은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경고하신 '성령을 훼방하는 죄(막 3:28,29)'는 결코 멀리 있지 않으며 또 남의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진정 성령 받으셨으며 그 성령으로 충만하십니까? 다시 한번 심각하게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십일조에 대한 글을 쓰면서 우려하고 있는 점은,
첫째 마치 십일조 거부가 헌금 거부로 인식되어 엉터리 신자들의 면죄부를 줄 수 있다는 우려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지금껏 십일조 헌금을 참으로 순수한 마음으로 물질의 청지기라는 믿음의 고백으로 드리고 있는 대부분의 성도님들에게 혼란과 우려를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오늘날 한국교회의 잘못된 십일조는 일차적으로 목사들과 교회 구조에 있으며,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도 목사인 제가 앞으로 해야 할 사역에서 제 스스로의 사역에 대한 쐐기를 박기 위하여 쓰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주지해 주시길 바랍니다.

. 이번 글에서도 지적했지만 구속의 은혜와 성령의 사역은 분명히 십일조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서 바울이 말씀했던 것처럼,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갈 5:1)" 하지만 또한 동시에 이제는 "서로 짐을 져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해야하는(갈 6:2)" 어쩌면 더 무거운 짐을 질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제시한 이 원리는 율법을 넘어서야 하는 모든 일들에 언제나 원칙으로 제시되는 것 같습니다. 이번 기회에 십일조와 헌금에 대하여 좀 더 깊고 진지한 생각과 묵상들이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들의 지갑은 회개하지 않고 영혼만 회개하겠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십일조 바르게 읽기(3) - 예수께서 가르치신 십일조


십일조 노이로제 환자들

윗 글에서 보았듯이 십일조에 대한 규정들이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서 명확하게 일치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십일조가 세 가지 용도로 쓰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으며, 셋째만 다른 십일조로 보며 결국 두 가지 십일조가 있었다고 이해하는 자들도 있으며 또 물론 각각 독립적인 세 가지의 십일조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적인 열심히 많았던 바리새인들은 당연히 세 가지의 각기 다른 십일조를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의 가장 보편적인 종교인이라 할 수 있는 바리새인들의 십일조를 따른 다면, 사실은 매년 10의 2를 드려야 했으며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와 절기와 제사를 위한 십일조- 더구나 제3년에는 '구제의 십일조'를 포함한 세 가지 십일조를 다 드려야했기에, 매 3년째는 거의 십분 삼을 십일조로 내어야 했으며 실지로 그들은 그렇게 십일조에, 아니 십이조와 십삼조에 열심을 냈었습니다. 이 점을 보아도 역시 오늘 한국교회들의 십일조는 그 근거가 모호함이 다시 한번 더 분명해 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저것도 버리지 않는(마 23:23)" 십일조를 한다면 사실은 최소 2/10 이상을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더 나아가 토지 소산과 가축의 십일조뿐만 아니라 화폐를 포함한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쳐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한 예로 누가복음 18:12에 보면 자신의 종교행위를 자랑하며 기도하는 바리새인이 나오는데 그는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말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개역성경에는 '소득' 앞에 나오는 '판타(모든)'라고 하는 헬라어 단어가 빠져 있는데, 원래는 '판타'가 있어서 '모든 수입'이라고 해야 하며, 공동번역과 표준 새번역은 그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즉 이 바리새인은 다른 백성들은 토지 소산과 가축의 십일조만 드리지만 자기는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고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백성들은 1년에 한 번 속죄일에만 금식하지만 자기는 일주일에 월요일과 목요일 두 번이나 금식한다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바리새인들은 물건을 살 때조차도 산 값의 십일조를 떼어 놓았습니다. 왜냐하면 물건을 판 사람이 십일조를 떼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는데, 이 정도면 거의 십일조 노이로제 환자들 아닙니까?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논쟁과 마찬가지로 십일조 논쟁을 오랫동안 치열하게 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식물이 어느 정도까지 자랐을 때 십일조의 대상이 되는 지, 자생 식물이나 양념류도 십일조를 해야 하는 지, 또 자생 식물에서 씨를 얻었을 때도 십일조를 내야 하는지 등등을 따지고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한심한 짓들이지요. 그러나 이게 그 옛날 바리새인들만의 모습이라 생각하십니까? 은행 이자에 대해서 십일조를 해야 하는 지, 십일조를 제한 후 받은 용돈에 대해서도 자녀들이 또 십일조를 해야 하는 지... 그래서 한 라디오에서 상담하는 목사님은 바로 그렇게 골치 아프고 율법적(?)이 되기 때문에 아예 십이조를 하라고 권고하기도 하더군요. 그런데 그 같은 상담의 결과를 제시하는 것이 다만 그 목사님만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 역시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꼭 같은 십일조 노이로제 환자들을 양산하고 있음이 자명합니다. 한 사람을 전도하여 구원하기 위해 그렇게 애를 쓰고 나서는 그 다음부터는 십일조 도둑으로 몰아부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래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기쁨은 잠시이고 십일조 도둑의 불명예는 아예 영원하다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마태복음 23:15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도다." 여기서 '지옥 자식'을 '도둑 자식'으로 바꾸면 꼭 오늘 우리의 이야기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한 술 더 떠서 예수님께서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고 더 큰 소리를 칩니다. 그러면 아무리 '도둑 자식'이 되어도 꼼짝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일조를 하라고 하셨는데, 뭐 달리 더 할 말이 있겠습니까? '도둑'의 멍에를 쓰고라도 십일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진정 그렇게 가르치셨던가요?



이것이냐? 저것이냐?

예수께서도 십일조를 하라고 가르치셨다고 그토록 강조하고 있는 말씀은 누가복음 11:42과 마태복음 23:23입니다. 같은 내용이기에 마태복음 23:23을 기본 본문으로 택하여, 과연 예수께서 그렇게 가르치셨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늘 그래왔듯이 먼저 문맥을 봐야겠지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문맥을 보면 80%가 보입니다. 쉽게 알 수 있듯이 마태복음 23장은 그 한 장이 통째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이 전체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화 있을진저'로 시작하는 그 무서운 책망의 말씀에서 '십일조를 하자'는 그 엄청난 '긍정'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니 이거야말로 '귀 있는 자만 들을 수 있는' 엄청난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엄청난 긍정을 하자고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까? 그랬다면 바리새인들은 저주에 가까운 책망을 들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 뛸 만한 격려를 받은 셈이 되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첫 포문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23:2)"로 시작됩니다. 누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는가? 누가 율법을 알고 진리를 안다고 말하며 가르치려하고 있는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자칭 선생이며 지도자라고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는데, 과연 그들이 율법을 제대로 알고 있으며 과연 그들이 진리를 가르치고 증거하는 선생과 지도자의 자격이 있는지를 따져보자는, 아주 논쟁적인 서두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23장 전체는 이 서두에서 밝히신 논점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논쟁이 계속됩니다. 즉 그들의 성경해석이 옳은가 라는 것입니다.

십일조가 언급된 23:23의 말씀은 "화 있을진저!"라고 시작되는 7개의 문장 한 가운데 있습니다. 그리고 "화 있을진저!"라고 번역된 헬라어 '우아이(ouai)'는 구약의 선지서에서 자주 나타나는 표현으로 '고뇌 혹은 절망의 외침' 그리고 '확실한 저주와 심판의 선포'가 선언되어질 때 내뱉는 '선지자의 독설'적 표현으로, 그 당사자를 이미 저주와 심판 받아 죽은 자로 여기고 그들 앞에서 향을 피우고 곡(哭)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정도의 아주 강력하며 분명한 저주와 심판의 선언문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의 이 본문에도 7번을 거듭 "화 있을진저!"라고 선언하심으로 이 선언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가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7'이라는 그 숫자가 암시하듯이 완전한 저주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네 번째 화를 중심으로 첫 번째와 일곱 번째, 두 번째와 여섯 번째, 세 번째와 다섯 번째 화들이 상호 대칭적 관계를 이루어서 구조적으로도 '완벽한 화'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A. 첫째 화(13절) -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아니함
B. 둘째 화(15절) - 해를 더 끼치는 형식적인 열심
C. 셋째 화(16-22절) - 성경을 잘못 사용함
X. 넷째 화(23-24절) - 더 중한 것을 의도적으로 배척함
C'. 다섯째 화(25-26절) - 성경을 잘못 사용함
B'. 여섯째 화(27-28절) - 해를 더 끼치는 형식적인 열심
A'. 일곱째 화(29-33절) - 선지자를 배척하는 자들의 자손(즉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음)

이와같은 대칭적 구조에선 항상 가운데 있는(X) 말씀에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담겨 있으며, 이는 성경에서 자주 발견되는 구조입니다. 즉 첫째, 둘째, 셋째 화가 주로 그들의 외식과 위선을 '포괄적'으로 겨냥한 책망이었다면, 중심에 있는 네 번째 화는 그와 같은 외식과 위선을 낳은 '원인적' 이유 즉 '율법의 본질인 의와 인과 신을 버리고 형식만 의도적으로 취한'것에 대한 책망입니다. 그러므로 넷째 화인 23절의 말씀에서 십일조는 그저 '율법에서 더 중요한 의와 인과 신을 버린' 대표적인 잘못의 한 예로 든 것인데, 이 말씀에서 오히려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결론을 끌어오는 것은, 아! 정말 대단하다고 밖에는 할 수 없는... 솔직히 필요한 표현을 못찾겠습니다.

그리고 23절 그 말씀을 좀 더 자세하고 꼼꼼하게 살펴보면, 먼저 예수께선 그들이 하고 있었던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예로 들고 계신데 -누가복음에는 박하와 운향과 채소- 도대체 박하와 회향이니 운향과 근채니 이런게 무언지나 아십니까? 사전을 찾거나 영어 단어와 비교해 보시면 이것들이 민트, 허브 등의 향신료 종류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여기서 언급된 품목들은 위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 바리새인들이 십일조를 해야 하는가의 문제로 논쟁하던 바로 그 품목들인데, 하나같이 개인의 밭에서 정성 들여 김매고 키우고 하는 것들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씨만 뿌려 놓거나 아니면 들에서나 산에서도 구할 수 있는, 우리로 말하면 파, 마늘, 깻잎, 들깨 뭐 이런 양념 종류들과 심지어 들풀에 대한 십일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까지 당시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는데, 이것을 예수께서 기특하게 여기셔서 황당한 '양념'의 십일조를 마땅히 해야 할 것으로 인정해 주셨다는 주장도 말이 안되는 소리지만, "이것들도 버리지 말고 저것들도 행하라"고 목소리를 높이며 예수께서 십일조를 지지하셨으니 우리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주장은 오히려 황당하다못해 불쌍하기까지 합니다. 십일조를 강조할 구실을 찾긴 찾아야 할텐데... 고민하다 결국 찾아낸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었기에 앞 뒤 가리지도 않고, 게다가 가장 권위있는(?) 예수님의 말씀이니 더욱 금상첨화였겠지요. 그래서 냅다 예수께서도 십일조를 해라 하셨다고 소리 지른게 분명합니다.

그리고 헬라어 원문을 읽어보면 이 말씀에서 '이것'과 '저것'을 지칭하는 지시사가 단수가 아니라 복수형태라는 사실도 쉽게 알게 됩니다. 즉 복수형 '타우타(이런 것들)' , '카케이나(저런 것들)'로 되어 있는데, '이런 것들도 행하고 저런 것들도 버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은 '의와 인과 신'을 지칭함을 쉽게 알 수 있으니 그렇다면 '저런 것들'은 무엇을 가리키겠습니까? 표면적으로야 '박하와 운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가리키지만 그건 '십일조'라는 한 가지 아닙니까? 더구나 그런 십일조는 십일조 노이로제 환자들인 바리새인들이 지어낸 얼토당토않은 것이기에 그렇다고 수긍하기도 힘듭니다. 결국은 문맥 전체를 보는 것이 타당한데, 예수께서 말씀하고 계신 '버릴 수 없는 저것들'은 십일조를 포함하여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다양한 제사 행위 전체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예수께선 바리새인들의 형식적인 종교 생활 전체를 책망하기 위해 여러 왜곡된 신앙 행위들 중에서 특별히 십일조를 한 예로 드신 것 뿐입니다. 즉 예수께선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번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와 각종 예물을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이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었다는 것이며, 실지로는 그와 같은 뜻으로 하신 말씀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문맥인 23:16-22에 보면 예수께선 여전히 제단과 성전을 인정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께서 제단과 성전을 인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십일조를 비롯한 여러 제사 행위들을 인정하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께선 율법 아래 나셔서 난지 8일만에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으셨고 12살이 되었을 때는 율법에 따라 성인식 결례를 치르기 위해 성전으로 올라가셨으며, 유월절이나 여러 절기들을 지키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으로도 몇 번 올라가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베드로와 함께 성전세로 은전 1세겔을 바치기도 하셨습니다(마 17:24-27). 오히려 십일조는 예수께서 직접 바치셨다는 기록이 없지만 성전세는 자신의 몫인 반 세겔을 바친 기록이 있는데, 왜 한국교회서 성전세를 바쳐야 한다는 소리는 없는 지 모르겠습니다.

근데 아니나다를까 일종의 성전세를 요구하는 곳도 있긴 있습니다. 바로 제가 속한 장로교 합동 총회는 '세례교인 의무금'이라는 게 몇 년 전부터 생겨서 실시되고 있는데, 그 취지가 성전세와 비슷합니다. 말 그대로 세례 교인으로서 의무금을 총회에 낸다는 것인데, 1년에 5000-10000원을 '의무적으로' 내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례 교인이라고 의무금을 총회에 낸다는 발상 자체가 우선 황당합니다. 그게 구약 시대에 성전세를 냈던 것이나 아니면 중세 때 면죄부를 거두었던 논리하고 뭐가 다릅니까? 더구나 위대하신 우리 총회는 의무금을 노회별로 할당해서 독려하고 또 제대로 의무금을 안 낸 교회에는 행정적인 제약을 줘서 각종 증명서류들을 발급해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실지로 의무금을 안냈다고 한 개척교회 목사님은 소속 증명서를 거절당했으니까요. 아무리 썩어빠진 국가라도 아직 세금 안냈다고 국민에게 호적 등.초본을 발급해 주지 않았다는 소리는 들어보질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의무금이 신학교나 신학생들을 위해서 일정 부분 정확하게 쓰여진다든지 아니면 농어촌 교회들과 개척교회들을 위하여 쓰여진다든지 하는 명확한 사용근거라도 있으면 기꺼이 내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도 밝히지 않고 내랍니다. 그리고 안내면 조직의 쓴 맛을 보여 주겠다는 건데, 이건 완전히 조폭의 논리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고 그야말로 '강도의 굴혈'입니다. 그런데도 수십 수백 억이 집행되는 이러한 일들이 아무런 공론화의 절차없이 일방적으로 시행되고, 사정이 이래도 그대로 순응하며 착착 의무금을 내고 있는 모습은, 가히 '조직의 힘'이며 솔직히 저로서는 종교가 타락하는 최종 단계인 '집단 최면 현상'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성전세 때문에 글이 좀 샜습니다만, 아무튼 예수께선 살아 계셨던 동안에는 율법과 성전을 부정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십일조는 지적하고 계시지만 십일조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도 시대적인 문맥에서 파악해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상식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이 할례를 받았으니 우리도 할례를 받아야 하고, 예수님이 성전세를 내셨으니 성전이 없는 지금도 성전세를 내자고 할 것이며 그리고 나병 같은 병이 나았으면 예수님이 시키신 대로 지금도 제사장에게 아니면 목사에게 가셔 보여야 한다고 할겁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으니 우리도 안식일인 토요일에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그렇게 예배하는 '안식교'를 이단으로 분별하는 것은 잘 하면서 왜 십일조는 여전히 드려야 한다는 것인지 참으로 모르겠습니다.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그 말씀으로 억지를 부리며 기를 쓰며 십일조를 주장하는 분들에게 또한 꼭 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정이 그렇다면 그 십일조 행위를 통하여 예수께서 먼저 지적하셨던 '이것도 행하고' 있습니까?



예수께서 가르치신 십일조 - 의(義), 인(仁), 신(信)

예수께선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물질을 드리는 것 보다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을 먼저 행하라고 가르쳐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곧 이은 뒷 절에서 이 두 차이점의 간격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풍자하여 말씀하시길,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킨다'는, 제 기억으론 예수님의 말씀중 가장 엽기적인 표현으로 이 지독한 모순을 강조하여 비판하심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즉 들깨나 깻잎 따위를 십일조 하려는 그 사소한 일에는 목숨을 걸었지만 정작 중요한 본질인 정의(justice)와 자비(mercy)과 신의(faithfulness)는 안중에 없었던, 소탐대실(小貪大失)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목구멍으로 낙타를 삼키는 -더구나 낙타는 부정한 짐승으로 취급받던 동물이었습니다-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의 십일조와 그들의 종교 행위를 바라보셨던 예수님의 판단은 이와같이 분명한데, 다시 또 낙타를 삼키는 일을 강요하는 '소경된 인도자'들이 판을 치고 있는 우리들의 현실이 실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십일조의 본질 나아가 모든 율법의 본질은 예수께서 명확하게 지적하신 것처럼 의(justice)와 인(mercy)과 신(faithfulness)으로 설명할 수 있으며, 병행되는 구절인 누가복음에선 11:42에서는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지난 글(32호) "하나님을 알아 가는 십일조"에서 살펴보았던 세 가지의 십일조가 함의하고 있는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하기도 합니다.

십일조는 안식년 제도와 함께 땅의 주인되신 하나님께 대한 고백으로 우리의 모든 소유와 소산이 주께로부터 말미암았음을 고백하는 신(信, faithfulness)의 행위이며, 나아가 '경제 정의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알아 가는 방편이었으며 그 실천 윤리였기에 의(義, justice)의 행위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십일조는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의 나눔에 가장 기본적인 취지가 있었으며 또한 특별히 셋째 십일조를 따로 제정하실 만큼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 대한 사랑과 나눔을 강조하셨던 인(仁, mercy)의 행위로 '나눔의 삶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방편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같이 십일조를 바르게 행함으로 '평균케 되는 삶의 원리가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 즉 '의와 인과 신'이 그 중심되는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담긴 행위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소경된 인도자들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켜버림으로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사라져버리고 '박하와 회양과 근채'를 붙들어서 그 푸성귀 몇 포기에 자만과 위선과 탐욕을 담도록 인도하고 있었으니, 예수께서 분노와 안타까움으로 "화 있을진저!"를 일곱 번씩이나 외치셔야만 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기를 쓰며 강조하고 있는 오늘 우리들의 십일조는 과연 '의와 인과 신'을 행하는 '이것도 행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인과 신'이 지배 원리가 되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강자가 약자를 무참하게 짓밟는다거나 많이 가졌다고 해서 가지지 못한 자를 무시하고 유린하며, 그러고도 더 가지기 위한 불의와 불법만이 성행함으로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는...(딤후 3:2)" 삶으로 가득차 있다면, 그곳은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공정하고도 정당한 선의의 경쟁과 도리어 양보하고 손해보는 것까지라도 할 수 있는 미덕과 그리고 피차 신뢰하며 존중할 수 있는 진실과 사랑이 지배하는 사회가 바로 그 땅의 빛이요 소금이 있는 그리스도인의 사회입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하고 온유하며 청결하고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사람들이 있는 모임, 그곳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있는 사회이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 기도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십일조를 행하라고 명령하셨을 때는 바로 이와같은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고 그 소망이 구체적으로 이 땅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주신 조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한번 더 강조하셨던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나라' '우리가 꿈꾸어야 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는 바로 그렇게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율법의 행위인 십일조로는 그 소망을 한번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었고 그나마 성전이 완전히 붕괴됨으로 그 최소한의 명분마저도 사라진 지 이미 2000년이 지났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선 '의와 인과 신'이 이미 사라졌기에 성전을 거두어 가신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2000년이나 죽어있던 불씨를 다시 살려내며 역시 2000년전과 동일한 모습으로 '의와 인과 신'은 버리고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게' 하는 '소경된 인도자'는 또 누구입니까?

그리고 그렇다면 십일조 없는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의와 인과 신'이 지배하는 하나님의 나라,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빛으로 소금으로 살아가는,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리고 성전을 거두심으로 십일조를 그치게 하신 하나님께서 이젠 어떠한 방편으로 '의와 인과 신'을 원하시는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 하나님의 뜻인 '의와 인과 신'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방편으로 우리에게 주셨을까요? 다음 글 <헌금하는 사람, 연보하는 사람>에서 십일조에 대해 써 왔던 지금까지의 글에 대한 결론을 맺으며 십일조를 넘어서 의와 인과 신을 이루어가야 할 '연보'를 그 성경적 대안으로 제시하겠습니다.


*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둔다는 의미는?

예수님의 음성을 빌어 헌금을 강조하는 또 하나의 말씀은 마태복음 6:19-21입니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그래서 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 곧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고 적용하며 강조합니다. 그러나 과연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 곧 보물을 하늘에 쌓는 행위일까요?

그 말씀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하나님이 유지하시고 다스리시는 영역 즉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네 삶의 방향을 맞추라'는 말씀입니다. 즉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투자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이란 또 무엇입니까? 예수께선 요한복음 6:29-30의 대화를 통해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즉 밝혀주신 그대로 하나님의 일은 '믿음에의 투자' 즉 하나님과의 관계 개선에 투자하고 힘쓰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리고 '보물이 있는 곳'이란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또는 '우리의 가치관과 우선순위'에 대한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보물은 꼭 돈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그 어떤 것'으로 '보물=돈'이라는 공식은 사실 너무 단편적이며 물질주의적인 이해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보물은 돈이 아니라 우리 삶의 우선 순위와 가치관으로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본문의 바른 이해입니다. 즉 지금 예수께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을 아는 일에 너의 보물-너의 우선 순위와 가치관-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이어지는 뒷 절의 말씀을 또한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바로 뒷 절의 말씀은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을 것이니..." 라는 말씀인데, 아니 갑자기 웬 시력(?) 이야기가 나옵니까? 이 말씀은 눈 나쁜 자들을 상당히 기죽이는 말씀으로 들리는데 그렇습니까? 이 말씀은 앞에서 말씀하신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는 말씀에 대한 부연 설명의 말씀입니다. '마음'은 우리 존재의 중심이며 마음이 바르게 정해져야 인격 전체에 건강과 온전함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앞 말을 부연하고 이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자 예수께선 우리의 '심안'과 '육안'을 비교하고 계십니다. 눈이 성해야 온 몸이 밝을 것입니다. 즉 바른 관점을 가져야 모든 것이 밝게 보인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것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모든 것을 본연의 가치와 관계 속에서 보게 되지만, 반대로 땅에 속한 것을 보물로 삼은 자는 그 시각이, 그 가치관이, 그 우선 순위가 왜곡되어 사실상 모든 것을 오도하게 되고 영적 어두움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보물을 돈으로 보는 시각'이야말로 오히려 '눈이 나빠서 어두움에 빠져있는' 대표적인 모습일 따름입니다.

그래서 또 이어지는 24절은 더 분명하게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며, '땅'과 '하늘'중 네가 분명히 선택하라고 다시 다그치고 계시지요. 그리고 이어지는 25-34절의 말씀도 꼭 같습니다. 그래서 결국 6장은 19-34절까지가 같은 주제로 하신 말씀인데, '너의 가치관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이 그 주제이며, 이 모든 것의 결론적인 말씀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 -땅의 보물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이런 큰 문맥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그 말씀을 바르게 본다면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는 말씀으로 무작정 헌금을 강조하는 것이 얼마나 본문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이렇게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하며 아전인수격으로 오용하여 헌금만을 강조한 결과, 오늘 한국교회 성도들은 헌금은 잘하고 있는 지 모르겠지만 그 삶과 가치관은 전혀 변화가 없는 이상한 그리스도인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가치관과 삶의 자세가 하나님의 관점과 하나님의 나라에로 완전히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 바뀐 가치관과 삶의 자세로 열심히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산다면 내가 살아가는 삶 자체가 보물이 되어 하늘에 쌓이는 것이지 내가 낸 돈들이 하늘에 쌓여 천국 통장의 잔고가 늘고 내가 천국에서 더 복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을 갖는 것은 사이비 종교의 가르침이지 참된 예수님의 가르침은 분명코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으로 보물을 하늘에 쌓기 위하여 먼저는 나 자신의 삶의 자세와 모든 가치관들을 그리고 나아가 이 세상의 소중하고 중요한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진리 앞에 쳐서 복종시켜 이 모든 소중한 만물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도록 내가 맡은 자리와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입니다. 제발 좀 그 돈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는, 가장 비성경적이며 또 모든 악의 근원이기에 하나님께서도 미워하시는 바로 그 돈으로 하나님을 팔며 신앙을 팔고 있는 그 추악한 행위들을 그쳐야 합니다. 진리 안에서 자유와 평강 누리시길 바랍니다.



십일조 바르게 읽기(4) - 헌금하는 사람, 연보하는 사람


헌금하는 사람

혹 여러분이 출석하시는 교회의 헌금 종류가 몇 가진지 헤어보신 적 있습니까? 십일조헌금, 일반감사헌금, 각종 절기감사헌금, 건축헌금, 선교헌금 등의 봉투는 아마 거의 대부분의 교회가 기본으로 비치하고 있을 것 같고... 좀 더 많으면 구제헌금, 장학헌금, 주정헌금, 생일감사헌금, 신년 감사헌금 등이 아마 추가되고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근데 왜 헌금을 하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신 적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헌금하라고 한번이라도 말씀하신 적이 과연 있습니까? 죄송하지만 성경에선 한 군데서도 헌금하라는 말씀을 찾을 수 없습니다. 알다시피 우선 십일조가 있지만 십일조는 돈을 드리는 것이 철저하게 아니었음을 이미 살폈고 돈을 드렸던 것으로 성전세가 있었지만 성전세는 그 이름에서 이미 알 수 있듯이 일종의 세금이었고 강제적이며 의무적인 성격이었기에 헌금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각종 제사들 역시 제사를 원하는 사람은 자신의 형편에 맞는 제물을 준비해 오는 것이었지 돈으로 제사 준비를 했던 것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제물에 대해서도 처음 그 법을 명령하고 있는 율법서에서나 이러 이러한 제물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시고 있을 뿐 다른 말씀들 특히 선지서에 이르면 "제발 그런 헛된 제물들을 가져오지 말라(사 1:11-15)"는 말씀이 오히려 주된 음성이지, 왜 내게 제물을 바치지 않았느냐고 다그치신 적은 한번도 없음이 분명합니다. 결국 하나님께 돈을 드린다는 생각은 결코 성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어, 그래요? 그래서 컴퓨터 성경으로 '헌금'이라는 단어를 검색해 봤습니다. 성경에서 '헌금'이라는 단어가 몇 번쯤 나올 것 같습니까? 신.구약 전체를 통틀어 '헌금'이라는 단어는 단 두 번만 나옵니다. 그것도 누가복음 21:1-4의 한 사건을 설명하는 가운데 두 번 나오는 것이 전부이니 사실은 단 한번 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더 바를 것 같습니다. 지금 성경을 펼쳐서 확인해 보십시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연보궤에 드린 것과 부자들이 헌금한 것을 비교하여 예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바로 그 본문에서입니다. 그리고 그 본문을 자세히 보시면 '연보궤'라는 단어가 나오며 그 연보궤에 부자들은 '헌금'하고 있다는 뉘앙스로 글이 쓰여져 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과부에 관해서는 단순히 '넣었다'라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는데 반하여 부자들에 관하여는 1절과 4절에서 두 번 다 '헌금'이라고 그 돈의 성격을 밝히고 있습니다. 부자들은 헌금하고 있었습니다. 정치 헌금을 하는 것과 또는 어떤 단체에 기부 헌금을 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는 '헌금'을 그들은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누가복음에서만 단 두 번 사용되고 있는 이 헌금도 결코 긍정적인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판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면 결국 성경엔 헌금이 없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선 헌금을 요구하신 적도 없고 헌금을 인정하신 적도 없습니다. 즉 하나님께 돈을 드린다는 의식을 가지고 헌금을 하는 것은 성경에서 비롯된 생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에는 연보궤가 있었습니다.
성전의 바깥뜰인 여인의 뜰에는 각각 다른 용도가 표시된 열세 개의 나팔 모양을 한 연보궤가 늘어서 있었는데 성전에 예배하러 왔던 사람들이 성전 입구에 서 있는 이 연보궤에 연보를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부자들은 연보궤를 돌아가면서 주루룩 주루룩 소리가 나도록 -특히 모양이 나팔 모양이고 당시는 다 동전이었기에 그 소리가 아주 요란했다고 합니다- 각종 동전들을 집어넣으며 자신의 행위를 과시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을 누가는 '연보'가 아니라 '헌금'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문맥을 보면 사실 누가가 하고 싶었던 말은 헌금이 아니라 탈취물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를 또한 읽을 수 있습니다.

바로 앞 전문맥인 누가복음 20:45-47을 보십시오.
예수께선 특별히 서기관들에 대하여 경고하시면서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한다(47절)"고 말씀하고 있는데, 바로 뒷 장면에서 그렇게 가산을 탈취 당한 과부는 그래도 자신의 전 재산인 두 렙돈을 연보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기관들이 어떻게 과부의 가산을 삼켰을까요? 간단합니다. 서기관들은 레위인이었기에 십일조를 받았는데 마땅히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들에게까지 전달되어야 할 십일조를 자신들이 다 챙긴것이지요. 그래서 당시에는 일부 소수가 십일조를 독점하였기에 같은 레위인이라도 권력을 쥐지 못했던 레위인들은 거의 거지 신세로 살아가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간단한 예로 예수님의 제자였던 레위 마태가 있지않습니까?
그의 본 이름은 레위이며(막 2:14) 마태는 제자가 된 후 예수께서 주신 이름입니다. 그가 가진 이름 '레위'는 물론 함부로 가질 수 없는 이름입니다. 그것은 그가 레위 지파였음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그는 세리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십일조로 생활을 했어야 할 레위인의 입장에서 세리가 된다는 것은 분명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죽했으면 그가 세리의 일을 하고 있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하신 "나를 따라오라"는 단 한마디의 말씀에 그는 당장 그 세리의 자리를 박차고 예수의 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이것이 당시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서기관들을 포함한 부자들은 불의한 돈을 가지고 오히려 행세하며 헌금하고 있었지만 그 헌금은 예수께서 인정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가난하고 약탈당한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했고 오히려 자신보다도 못한 이웃을 생각하여 두 렙돈을 연보했던 과부의 연보만 예수께서 인정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황당하고 가관인 것은 이같은 성경의 말씀을 갖고 오늘날 설교하는 자들의 태도입니다. 다 아실 겁니다. 뭐라고 설교하고 있는지. "이 과부를 봐라. 아무리 가난해도 헌금은 꼭 해야한다. 이 궁색한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할 수 있었다면 대부분의 우리들은 더 많은 헌금을 해야 마땅하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복을 내리신다". 과연 이렇게 설교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강조되는 것이 "많이 넣는" 부자들의 헌금이지 적게 넣는 가난한 자들의 헌금이 분명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본문을 갖다 대든 오직 헌금 많이 해서 복 받자는 결론을 끄집어내는 이런 왜곡된 설교들이야말로 오늘 한국교회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뒤에서 다시 강조하겠지만 헌금을 많이 하면 복 받는다는 생각 자체가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하는 비성경적인 생각입니다. 그건 하나님을 맘몬으로 대체하는 또 다른 우상숭배를 강요하는 행위이지 결코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돈 몇 푼이 필요하신 분이 아니며 그 같은 행위로 하나님을 시험해서도 안될뿐더러 하나님께선 한번도 헌금을 원하신 적이 없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께 돈을 드리는 것 만큼 왜곡되고 거짓된 가르침은 없습니다. 구약에선 왜 한번도 헌금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고 또 오히려 돈으로 십일조나 헌물을 드리지 못하도록 특별한 조치까지 취하고 있을까요? 신에게 돈을 주는 행위는 돈 받고 복을 팔았던 당시 이방신들의 일반적인 모습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을 향하여 돈 드리는 행위를 원치 않고 오히려 경멸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령 죄를 속하는 희생 제물을 돈으로 대신해서 드릴 수 있다고 한다면 제사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뿐더러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히 9:22)'는 구속의 원리를 가르칠 수 없었기 때문에 돈으로는 결코 제물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십일조 역시 토지의 소산으로만 바치게 했던 이유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관심은 돈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 알아가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가장 일반적인 종교 행위였던 돈으로 드리는 헌금을 오히려 거절하셨던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 헌금을 많이 드림으로 축복을 받는다는 논리는 얼토당토 않고 오히려 그 반대로 돈이나 얄팍한 인간들의 행위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자멸을 재촉하는 길이라면 오히려 맞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가 단호히 거부하는 것은 그릇된 동기로 하나님께 돈을 드리는 행위를 말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이 성경에선 오히려 헌금이라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기에 그 헌금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지금도 우리가 헌금을 하면서 하나님께 드린다는 생각으로 헌금을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꼼꼼히 새겨 읽으십시오. 하나님께 드린다는 생각으로 헌금을 하시면 안됩니다. 구약시대가 아니라고 해서 이제는 돈을 드려도 된다는 근거가 전혀 없고 또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의 속성상 돈을 숭배하는 맘모니즘이 더욱 더 견고한 이 시대의 가치관이 된 지금, 그 돈으로 하나님이 평가되고 인간의 삶이 평가되기를 하나님은 더욱 더 원치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돈을 드릴 수는 없지만 교회의 사역을 위하여 그야말로 '헌금'하는 것은 오히려 정당합니다. 지상의 교회는 땅에 속한 한 기관이요 일정한 비영리 조직이기에 헌금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위하여는 헌금하지만 그것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헌금하는 것은 일종의 기부행위요 또 내가 속한 조직과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책임이기에 그저 기꺼운 마음으로 하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드린다는 생각이 개입되면 그 순간 그것은 자기 의가 되고 자신의 행위를 하나님 앞에서 과시하는 것이 되기에 바리새인들의 행위처럼 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온전한 마음과 믿음의 삶이지 돈이 아닙니다. 돈은 그저 교회를 위하여 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위하여 드리면 됩니다. 그리고 십일조와 헌물들을 대신하여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헌금'이 아니라 '연보'입니다.



연보하는 사람

앞선 누가복음에서도 등장했었지만 예수님 당시의 성전에도 연보제도가 있었으며, 구약에선 역대하 34:9,14에서 '연보'한 돈으로 성전을 수리하는 일에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연보는 물론 십일조와 성전세와는 다른 돈으로 요즘 헌금으로 비교한다면 일종의 건축헌금인 셈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의 성전에는 이렇게 성전건축을 위한 연보, 구제를 위한 연보 등의 각각 다른 항목이 적힌 13개의 연보궤가 놓여 있었고 성전에 출입하던 백성들은 자유롭게 연보 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율법서에서 구체적으로 연보하라는 명령을 찾을 수는 없지만 꽤 오랜 시간동안 관례적으로 연보를 해 왔던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시대로 이르면 신약성경에선 '연보'라는 단어가 12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헬라어로는 조금씩 단어가 다르지만 한글로는 다 연보라고 번역하고 있고 단어는 달라도 그 행위들은 다 연보였습니다. 즉 아직까지는 '연보'라는 단어가 특정한 고유명사를 갖진 못했으나 연보한다는 행위는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선 연보(捐補)라는 말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연보(捐補)'의 연(捐)은 원래 '버린다'의 뜻으로 사용된 말인데 '주다, 바치다, 내놓다, 기부하다'라는 뜻으로 발전했습니다. 즉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림으로 타인에게 내 놓거나 바치거나 기부한다는 뜻인 셈입니다. 그리고 연보의 '보(補)'는 원래 '깁다'라는 뜻을 가진 말인데 '고치다, 보태다, 돕다'라는 뜻으로 발전했습니다. 결국 한자로 된 연보를 원래의 단어 뜻대로 해석하면, 자기 것을 버려서 헤어지고 떨어진 곳을 기워준다는 뜻이 됩니다. 참 좋은 뜻의 단어이며 원어의 의미도 잘 살린 아주 좋은 단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한글번역은 일관되게 '연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교회에서도 과거에는 연보를 드린다고 했지 헌금을 드린다고 한 것은 사실 최근의 일입니다. 한국 땅에 처음 복음이 전파되고 모두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구성되었을 때 우리는 의례히 '연보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모두들 살림살이가 조금씩 나아지고 특히 좀 산다는 사람들 중심으로 교회가 구성되기 시작하면서 슬그머니 연보는 사라지고 어느 듯 헌금으로 대체된 것이 한국 교회사에 나타난 헌금제도의 변천사입니다. 결국 연보궤에 헌금을 넣는 서기관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약 성경에 나타난 연보는 우선 고전 16:1,2에 "성도를 위한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 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는 말씀을 먼저 기억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 두 번 사용되어 연보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로기아'인데 영어로는 collection, 즉 모금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연보는 당시 흉년을 만나 어려움에 처했던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기 위한 모금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이 구절을 근거로 매 주일 모일 때마다 '헌금'을 하지만 자세히 보시면 그렇게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매 주일 교회에다 헌금을 하라는 말이 아니라 일주일에 한번씩 스스로 저축을 해 두었다가 바울이 오면 따로 연보하지 말고 지금껏 자신들이 저축한 그것으로 연보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을 보면 '저축하라'는 단어 뒤에 'by himself'라는 '자기 스스로, 혼자서'라는 어구가 있어서 이 말이 공적인 헌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적인 준비를 뜻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요즘 식으로 이해하면 초기 교회야 지금의 구역모임과 비슷했으니까 매 주일 첫 날에 각 가정에서 가정 헌금 형식으로 연보를 모아두었다가 그 모아진 것을 가지고 바울이 왔을 때 연보를 해서 예루살렘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즘 같으면 바울같은 '대부흥사'가 왔는데 큰 부흥회를 개최하여 아마도 넘치게 헌금을 거둘 수 있었을 테지만, 바울은 오히려 성도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했고 또 연보의 참된 의미를 살리기 위하여 그런 즉흥적이며 충동적인 헌금을 못하도록 오히려 "내가 갈때에 연보하지 않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론 그 연보의 사용처도 기근을 당한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기 위한 것이었기에, 오늘 한국 교회들의 헌금은 이런 여러 점에서도 성경의 가르침과는 달라도 한참이나 다르며 성경에서는 그 모델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살펴 볼 단어는 헬라어 '하프로테토스(고후 8:2, 9:11, 9:13)' , '하드로테스(고후 8:20)' , '유로기아(고후 9:5)'로 단어들은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영어로는 generosity, generous gift, liberality gift로 번역되고 있는, 모두가 구제를 염두에 둔 관대한 나눔의 의미를 담고 있어서 '연보'의 의미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바울에 의하여 주로 언급된 연보들을 정리해 보면 몇 가지로 뚜렷해지는 연보의 원리들을 세워볼 수 있습니다. 이같은 원리들을 제시하는 성경 구절들을 꼭 찾아서 읽어보십시오.

① 연보는 있는 대로 형편대로 하면 됩니다. (고후 8:11-12)
② 연보는 준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고후 9:5)
③ 연보는 마음에 정한대로(자율적으로) 해야 합니다. (고후 9:7)
④ 연보는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고후 9:7)
⑤ 연보를 통하여 평균케 되는 삶이 나타나야 합니다.(고후 8:14-15)

연보가 십일조를 대체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와같은 연보의 원리가 십일조의 원리인 '의와 인과 신'의 원리와 같기 때문입니다. 특히 십일조를 통하여 나눔의 삶이 실현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경제적으로 함께 평균케 되길 하나님은 원하셨기에, 연보는 십일조의 가장 기본적인 그 뜻을 이룰 수 있도록 오늘 우리에게 주신 방편이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로 공유함으로 평균케 되는 것은 구속의 역사에서 항상 따라오는 첫 원리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와 즉 구속함 받아 광야에서 배웠던 첫 원리가 만나를 통해 "많이 거둔자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않는(고후 8:15)" 평균케 된 삶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광야에서 하나님은 율법을 주심으로 광야에서 누렸던 그 평균케 된 공유의 삶이 지속될 수 있도록 안식년과 십일조의 제도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결국 율법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룰 수 없었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사역이 필요했던 것이며 십자가와 부활의 사역으로 성령을 주신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던 구속받은 그 성도들의 삶은 또한 어떻습니까?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보여 주듯이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있는(행 2:45, 4:32)", 역시 공유의 삶이며 평균케 되는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구속의 진리를 가르쳤던 바울 사도가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케 하려 함이라(고후 8:14)"고 지적하며 연보를 권고하고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가르침이며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적용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개혁할 때가지 맡겨 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에는 십일조라는 말이 더 이상 나오지 않으며 그리고 헌금이라는 말도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당연한 것이 십일조와 헌물은 제사 제도에 종속된 것이기 때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제사 제도와 성전이 필요 없게 되었고 또 실지로 사라진 지금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9:9-10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장막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예물과 제사'는 폐지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 값을 십자가상에서 대신 치러주실 때, 우리가 일생 동안 바쳐야 할 십일조와 헌금까지도 다 바치심으로 십일조 예물과 헌금 예물을 폐지하셨습니다. 그냥 폐지하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심으로 폐지하셨습니다. 왜 이 사실을 믿지 않습니까? 처음부터도 그랬지만 이제는 참으로 하나님께 돈을 일체 바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왜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여전히 그 잘난 돈 몇 푼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며 스스로의 무덤을 파고 있습니까? 도대체 우리의 믿음이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믿는 다는 말입니까? 참으로 믿는다고 하면서 왜 여전히 나의 행위로 뭔가를 과시하고 이루어보려고 합니까? 제발 좀 예수 믿고 삽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구원에 관한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예물과 제사는 이미 다 이루어졌습니다.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히 7:12)"
모든 것이 이미 다 변했고 모든 것이 이미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십일조는 이미 폐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돈을 드릴 이유는 처음부터 없었거니와 물론 지금은 더더욱 없습니다. '개혁할 때가지 맡겨 둔 것'들이 개혁된 지는 이미 지나도 한참을 지났으며, 모든 것이 이미 다 이루어졌고 다 변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헌금한다고 말함으로 자멸의 구덩이를 제발 파지 파십시오. 헌금은 그냥 교회의 운영과 선한 사업들을 위하여 그대로 하면 됩니다. 그것 자체가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재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빌 4:18)"입니다. 빌립보서의 이 말씀도 빌립보 성도들이 복 받을려고 충동되어서 바친 헌금들이 아니라 바울의 선교사역을 돕기 위한 연보였고 선교헌금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와같은 연보들은 분명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헌금을 필요로 합니다. 그 헌금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동기가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동기가 아니라 바울과 그의 선교 사역을 단순히 돕겠다는 선한 동기였기 때문입니다. 제 말은 하나님께 한다는 거짓 가르침에 속아 억지로나 또는 생색내며 헌금하지 말라는 것이며, 이제는 그 십일조와 헌금에서 마땅히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고 말했던 바울의 말씀처럼 이제는 자유해야 하며 더 이상 십일조와 헌금이라는 또 다른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어지는 6장에서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고 말씀함으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기복주의와 무속신앙으로 점철된 인간 종교의 역사는 끊임없이 신에게 뭔가를 제공함으로 신으로부터 그에 따른 수혜(복)를 입을 수 있다는 패러다임을 유지해 왔습니다. 구약에서 그토록 경고하고 있는 우상 숭배가 바로 그러한 이방종교들의 패러다임에 대한 경고였으며,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그토록 강력한 비판을 받았던 것도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들의 행위를 내세우며 자기 의에 빠진 모습들 때문이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요구하셨고 예수께서 다시 반복하신 말씀들은 이와같은 일반 종교의 패러다임에 대한 전복(顚覆)이었으니 즉, 네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을 이웃을 향하여 나타내라는 것이었으며, 십일조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의 고백인데 그 표현은 레위인과 객들과 과부와 고아들과 나눠 먹는 것으로 표시되어야 했습니다. 즉 돈은 신(神)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나누라는 가히 모든 종교의 페러다임을 깨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께 뭔가를 드리고 싶다면 그것을 하나님께 바치지 말고 그것을 오히려 네 이웃에게 주라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였으며 물론 동일하신 예수님의 메시지였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께 돈을 바치라고 말씀하신 적이 한번도 없으며, 예수님의 줄기찬 메시지는 "네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마 19:21, 막 10:21)"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 6:38)"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복 받는 유일한 조건이 있다면 사실 이 말씀 속에 있습니다. 십일조를 철저히 하고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주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주어야 하냐면 눅 6:38 그 말씀의 전문맥을 보면 '원수'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 달라며 교회에 바친다고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원수에게 주는 것이 오히려 복의 조건인데, 그토록 복을 좋아하고 갈구하면서 왜 이 말씀은 큰 소리로 가르치지 않는 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예수를 만나고 성령으로 충만했던 하나님 백성들의 모임은 이 말씀이 문자 그대로 이루어져, 흔들어 넘치도록 안겨 주셨으며 그 가운데 한 사람도 핍절한 자가 없지(행 2:44-45, 4:32-35) 않았습니까? 심지어 고넬료는 이방인었고 로마의 군대장관이었으며 아직 성령을 알기 전이었지만 그의 '구제와 기도(행 10:31)'를 하나님께서 기억하시지 않았습니까?

교회는 구제단체가 아니고 자선기관이 분명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주라!"고 명령하시는 예수님의 음성 앞에서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토록 원하셨던 하나님 나라에 속한 하나님 백성들의 공동체는, 인색한 인간의 본성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었기에 율법으로는 되지 못하였고 결국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이며, 초대교회의 역사가 보여 주듯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음으로 마침내 가능하지 않았습니까? 성령의 충만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지니 하나님이 원하셨던 대로, 하나님께 돈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돈을 나누는 모습으로 변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구원을 받고 성령과 동행하는 우리에겐 우리에게 복으로 주시는 물질들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일만이 남게 된 것이며, 이것이 진정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며, 이 일을 행하는 도구가 바로 연보입니다.

그러므로 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연보를 통하여 이웃에게 나눠져야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에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기준이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45)"는 말씀이 아니었습니까? 거기 심판대에 선 자들은 하나님을 몰랐던 자들이 아닙니다. 염소의 자리인 왼편에 선 자들의 대답(25:44-45)을 들어보면, 그들은 하나님을 대접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자들이 아니라 그들이 몰랐던 것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하는 것이다'는 바로 이 사실을 몰랐기에 그들은 결국 염소의 자리에 서게 된 것이었습니다.

종말의 심판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마태복음 25장에는 세 비유가 등장합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열 처녀의 비유와 달란트의 비유 그리고 양과 염소의 비유인데, 한결같은 공통적인 메시지는 하나님을 알되 잘못 알고 있는 자들이 심판대 앞에 서 있다는 사실입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신랑이 온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들은 신랑이 이렇게 더디 올 줄은 몰랐던(25:5)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주인을 알았지만 그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몰랐고(마 25:24-26) 그저 자신의 생각대로 그 주인을 판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염소의 자리에 선 그들도 하나님을 대접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접하는 방법, 즉 그것이 바로 이웃을 향하여 '주는' 것이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한국교회 성도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섬기길 원하는 지 목사인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성도님들이 다 그런 순수한 마음으로 어려운 형편에도 하나님께 헌금하는 일에는 늘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래서 더욱 화가 나는 것입니다. 그 순수함을 등쳐먹으면서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들은 엉뚱한 길로 인도하는 소경된 인도자들(마 23:13)' 아니 그 사기꾼 인도자들에게 분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헌금하라고 엉터리로 가르치며 협박까지 하면서 정작 오늘 우리가 연보 해야 할, 우리에게 보내신 하나님인, 우리의 이웃들을 향하여는 귀 막고 손 접게 만들었던 그 인도자들에게 분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거룩하신 우리 하나님을 복채를 챙기는 우상신으로 전락시키는 발람의 후예들이 교회에서 판을 치게 해서는 안되며, 하나님께 돈을 바친다는 샤마니즘적인 관념을 우리들의 머리 속에서 하루 빨리 뽑아 내야 합니다. 그래서 참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하며 그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물론 대부분의 교회들이 어쨌든 많이 헌금된 그 돈을 바르게 잘 쓰고 있으며 특히 이웃을 향한 섬김과 구제의 손길에도 사실은 다른 종교들보다 훨씬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통계도 가지고 있습니다. 실지로는 불교와는 비교할 수도 없고 카톨릭 보다도 사실은 개신교가 월등히 더 많은 돈을 나눔과 구제에 지출하고 있습니다. 물론 총액을 기준으로 한 것이기에 가장 돈이 많은 교회가 앞섰고 전체 헌금 중 비율로 따진다면 그렇지도 않지만. 아무튼 그런데 왜 교회는 이웃을 향해 귀 막고 있다고 일반적으로 평가되고 있겠습니까? 꼭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설교를 통해 선포되는 메시지들의 기복적인 편향성이 그런 인식을 낳은 것 같으며 특히 대형 교회들의 행태가 그러한 문제들의 중심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실지로는 80%에 육박하는 목사님들과 사역자들이 생계의 곤란을 겪으면서 사역하고 있고 대부분의 성도들이 어렵고 힘들게 헌금하고 있는 형편을 보면, 저의 이런 글이 필요할까 싶은 생각을 수 백번도 더 했습니다. 그런데 결론은 그렇기 때문에 바르게 밝혀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열심히 헌금하고 있지만 그 열심들이 바른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면(롬 10:2) 결국은 헛되기 때문이며 또 참으로 어렵고 힘들게 사역하는 많은 사역자들에게 바르게 사용되는 연보의 몫이 돌아가서 그들에게 힘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부자들의 교회가 되어 버린 교회에서, 헌금 많이 못한다는 부끄러움을 안고 그러나 신실하고 소박한 믿음으로 꿋꿋하게 신앙 생활하는, 참으로 작고 소중한 성도들에게도 이제는 바르게 사용되는 연보의 몫이 돌아가서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게 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참으로 잠시나마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게 해 줄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예배 잘 드리면 된다고 우기시는 분도 있겠지만 결코 그것만이 아닙니다. 성경이 너무나 명확하게 보여 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은혜와 자유의 복음을 소유하고 있는 한국교회가 헌금과 십일조라는 장애물 때문에 전도의 문이 닫혀 수많은 영혼들을 잃게 된다면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무엇보다 '복음'이 온전하게 '복음'으로 선포되는 것이 중요하며 그것만이 예수의 피로 구속받은 우리의 유일한 소명이며 자랑이며 소망이라고 저는 믿기 때문입니다. 기울어 가는 교회를 바라보며 그 기둥을 다시 부둥켜 안고 세워야 할 소임을 부여받은 작은 목사로서 참으로 잠 못 이루는 밤들을 보내며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답은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잊혀진 것, '복음을 다시 복음되게 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물론 비록 정답을 알아도 그 여정이 순탄치는 않겠지만 '복음'이 진정 '복음'되어야 한다는 이 정당성 앞에 무릎꿇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옭아맸던 그 무수한 속박들을 끊는 자유입니다. 그래서 그 자유를 가지고 이제는 예수의 가르침 앞에 순복하는 또 다른 굴종입니다. 그것이 내 힘으로는 될 수 없는 일들이기에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아름다운 굴종입니다. 이 복음의 진리 안에서 함께 은혜와 자유와 평강 누리시길 바랍니다. 예수께서도 십일조를 하라고 가르치셨다고 그토록 강조하고 있는 말씀은 누가복음 11:42과 마태복음 23:23입니다. 같은 내용이기에 마태복음 23:23을 기본 본문으로 택하여, 과연 예수께서 그렇게 가르치셨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늘 그래왔듯이 먼저 문맥을 봐야겠지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문맥을 보면 80%가 보입니다. 쉽게 알 수 있듯이 마태복음 23장은 그 한 장이 통째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이 전체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화 있을진저'로 시작하는 그 무서운 책망의 말씀에서 '십일조를 하자'는 그 엄청난 '긍정'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니 이거야말로 '귀 있는 자만 들을 수 있는' 엄청난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엄청난 긍정을 하자고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까? 그랬다면 바리새인들은 저주에 가까운 책망을 들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 뛸 만한 격려를 받은 셈이 되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첫 포문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23:2)"로 시작됩니다. 누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는가? 누가 율법을 알고 진리를 안다고 말하며 가르치려하고 있는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자칭 선생이며 지도자라고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는데, 과연 그들이 율법을 제대로 알고 있으며 과연 그들이 진리를 가르치고 증거하는 선생과 지도자의 자격이 있는지를 따져보자는, 아주 논쟁적인 서두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23장 전체는 이 서두에서 밝히신 논점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논쟁이 계속됩니다. 즉 그들의 성경해석이 옳은가 라는 것입니다.

십일조가 언급된 23:23의 말씀은 "화 있을진저!"라고 시작되는 7개의 문장 한 가운데 있습니다. 그리고 "화 있을진저!"라고 번역된 헬라어 '우아이(ouai)'는 구약의 선지서에서 자주 나타나는 표현으로 '고뇌 혹은 절망의 외침' 그리고 '확실한 저주와 심판의 선포'가 선언되어질 때 내뱉는 '선지자의 독설'적 표현으로, 그 당사자를 이미 저주와 심판 받아 죽은 자로 여기고 그들 앞에서 향을 피우고 곡(哭)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정도의 아주 강력하며 분명한 저주와 심판의 선언문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의 이 본문에도 7번을 거듭 "화 있을진저!"라고 선언하심으로 이 선언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가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7'이라는 그 숫자가 암시하듯이 완전한 저주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네 번째 화를 중심으로 첫 번째와 일곱 번째, 두 번째와 여섯 번째, 세 번째와 다섯 번째 화들이 상호 대칭적 관계를 이루어서 구조적으로도 '완벽한 화'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A. 첫째 화(13절) -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아니함
B. 둘째 화(15절) - 해를 더 끼치는 형식적인 열심
C. 셋째 화(16-22절) - 성경을 잘못 사용함
X. 넷째 화(23-24절) - 더 중한 것을 의도적으로 배척함
C'. 다섯째 화(25-26절) - 성경을 잘못 사용함
B'. 여섯째 화(27-28절) - 해를 더 끼치는 형식적인 열심
A'. 일곱째 화(29-33절) - 선지자를 배척하는 자들의 자손(즉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음)

이와같은 대칭적 구조에선 항상 가운데 있는(X) 말씀에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담겨 있으며, 이는 성경에서 자주 발견되는 구조입니다. 즉 첫째, 둘째, 셋째 화가 주로 그들의 외식과 위선을 '포괄적'으로 겨냥한 책망이었다면, 중심에 있는 네 번째 화는 그와 같은 외식과 위선을 낳은 '원인적' 이유 즉 '율법의 본질인 의와 인과 신을 버리고 형식만 의도적으로 취한'것에 대한 책망입니다. 그러므로 넷째 화인 23절의 말씀에서 십일조는 그저 '율법에서 더 중요한 의와 인과 신을 버린' 대표적인 잘못의 한 예로 든 것인데, 이 말씀에서 오히려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결론을 끌어오는 것은, 아! 정말 대단하다고 밖에는 할 수 없는... 솔직히 필요한 표현을 못찾겠습니다.

그리고 23절 그 말씀을 좀 더 자세하고 꼼꼼하게 살펴보면, 먼저 예수께선 그들이 하고 있었던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예로 들고 계신데 -누가복음에는 박하와 운향과 채소- 도대체 박하와 회향이니 운향과 근채니 이런게 무언지나 아십니까? 사전을 찾거나 영어 단어와 비교해 보시면 이것들이 민트, 허브 등의 향신료 종류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여기서 언급된 품목들은 위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 바리새인들이 십일조를 해야 하는가의 문제로 논쟁하던 바로 그 품목들인데, 하나같이 개인의 밭에서 정성 들여 김매고 키우고 하는 것들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씨만 뿌려 놓거나 아니면 들에서나 산에서도 구할 수 있는, 우리로 말하면 파, 마늘, 깻잎, 들깨 뭐 이런 양념 종류들과 심지어 들풀에 대한 십일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까지 당시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는데, 이것을 예수께서 기특하게 여기셔서 황당한 '양념'의 십일조를 마땅히 해야 할 것으로 인정해 주셨다는 주장도 말이 안되는 소리지만, "이것들도 버리지 말고 저것들도 행하라"고 목소리를 높이며 예수께서 십일조를 지지하셨으니 우리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주장은 오히려 황당하다못해 불쌍하기까지 합니다. 십일조를 강조할 구실을 찾긴 찾아야 할텐데... 고민하다 결국 찾아낸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었기에 앞 뒤 가리지도 않고, 게다가 가장 권위있는(?) 예수님의 말씀이니 더욱 금상첨화였겠지요. 그래서 냅다 예수께서도 십일조를 해라 하셨다고 소리 지른게 분명합니다.

그리고 헬라어 원문을 읽어보면 이 말씀에서 '이것'과 '저것'을 지칭하는 지시사가 단수가 아니라 복수형태라는 사실도 쉽게 알게 됩니다. 즉 복수형 '타우타(이런 것들)' , '카케이나(저런 것들)'로 되어 있는데, '이런 것들도 행하고 저런 것들도 버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은 '의와 인과 신'을 지칭함을 쉽게 알 수 있으니 그렇다면 '저런 것들'은 무엇을 가리키겠습니까? 표면적으로야 '박하와 운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가리키지만 그건 '십일조'라는 한 가지 아닙니까? 더구나 그런 십일조는 십일조 노이로제 환자들인 바리새인들이 지어낸 얼토당토않은 것이기에 그렇다고 수긍하기도 힘듭니다. 결국은 문맥 전체를 보는 것이 타당한데, 예수께서 말씀하고 계신 '버릴 수 없는 저것들'은 십일조를 포함하여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다양한 제사 행위 전체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예수께선 바리새인들의 형식적인 종교 생활 전체를 책망하기 위해 여러 왜곡된 신앙 행위들 중에서 특별히 십일조를 한 예로 드신 것 뿐입니다. 즉 예수께선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번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와 각종 예물을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이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었다는 것이며, 실지로는 그와 같은 뜻으로 하신 말씀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문맥인 23:16-22에 보면 예수께선 여전히 제단과 성전을 인정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께서 제단과 성전을 인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십일조를 비롯한 여러 제사 행위들을 인정하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께선 율법 아래 나셔서 난지 8일만에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으셨고 12살이 되었을 때는 율법에 따라 성인식 결례를 치르기 위해 성전으로 올라가셨으며, 유월절이나 여러 절기들을 지키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으로도 몇 번 올라가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베드로와 함께 성전세로 은전 1세겔을 바치기도 하셨습니다(마 17:24-27). 오히려 십일조는 예수께서 직접 바치셨다는 기록이 없지만 성전세는 자신의 몫인 반 세겔을 바친 기록이 있는데, 왜 한국교회서 성전세를 바쳐야 한다는 소리는 없는 지 모르겠습니다.

근데 아니나다를까 일종의 성전세를 요구하는 곳도 있긴 있습니다. 바로 제가 속한 장로교 합동 총회는 '세례교인 의무금'이라는 게 몇 년 전부터 생겨서 실시되고 있는데, 그 취지가 성전세와 비슷합니다. 말 그대로 세례 교인으로서 의무금을 총회에 낸다는 것인데, 1년에 5000-10000원을 '의무적으로' 내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례 교인이라고 의무금을 총회에 낸다는 발상 자체가 우선 황당합니다. 그게 구약 시대에 성전세를 냈던 것이나 아니면 중세 때 면죄부를 거두었던 논리하고 뭐가 다릅니까? 더구나 위대하신 우리 총회는 의무금을 노회별로 할당해서 독려하고 또 제대로 의무금을 안 낸 교회에는 행정적인 제약을 줘서 각종 증명서류들을 발급해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실지로 의무금을 안냈다고 한 개척교회 목사님은 소속 증명서를 거절당했으니까요. 아무리 썩어빠진 국가라도 아직 세금 안냈다고 국민에게 호적 등.초본을 발급해 주지 않았다는 소리는 들어보질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의무금이 신학교나 신학생들을 위해서 일정 부분 정확하게 쓰여진다든지 아니면 농어촌 교회들과 개척교회들을 위하여 쓰여진다든지 하는 명확한 사용근거라도 있으면 기꺼이 내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도 밝히지 않고 내랍니다. 그리고 안내면 조직의 쓴 맛을 보여 주겠다는 건데, 이건 완전히 조폭의 논리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고 그야말로 '강도의 굴혈'입니다. 그런데도 수십 수백 억이 집행되는 이러한 일들이 아무런 공론화의 절차없이 일방적으로 시행되고, 사정이 이래도 그대로 순응하며 착착 의무금을 내고 있는 모습은, 가히 '조직의 힘'이며 솔직히 저로서는 종교가 타락하는 최종 단계인 '집단 최면 현상'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성전세 때문에 글이 좀 샜습니다만, 아무튼 예수께선 살아 계셨던 동안에는 율법과 성전을 부정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십일조는 지적하고 계시지만 십일조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도 시대적인 문맥에서 파악해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상식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이 할례를 받았으니 우리도 할례를 받아야 하고, 예수님이 성전세를 내셨으니 성전이 없는 지금도 성전세를 내자고 할 것이며 그리고 나병 같은 병이 나았으면 예수님이 시키신 대로 지금도 제사장에게 아니면 목사에게 가셔 보여야 한다고 할겁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으니 우리도 안식일인 토요일에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그렇게 예배하는 '안식교'를 이단으로 분별하는 것은 잘 하면서 왜 십일조는 여전히 드려야 한다는 것인지 참으로 모르겠습니다.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그 말씀으로 억지를 부리며 기를 쓰며 십일조를 주장하는 분들에게 또한 꼭 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정이 그렇다면 그 십일조 행위를 통하여 예수께서 먼저 지적하셨던 '이것도 행하고' 있습니까?



예수께서 가르치신 십일조 - 의(義), 인(仁), 신(信)

예수께선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물질을 드리는 것 보다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을 먼저 행하라고 가르쳐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곧 이은 뒷 절에서 이 두 차이점의 간격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풍자하여 말씀하시길,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킨다'는, 제 기억으론 예수님의 말씀중 가장 엽기적인 표현으로 이 지독한 모순을 강조하여 비판하심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즉 들깨나 깻잎 따위를 십일조 하려는 그 사소한 일에는 목숨을 걸었지만 정작 중요한 본질인 정의(justice)와 자비(mercy)과 신의(faithfulness)는 안중에 없었던, 소탐대실(小貪大失)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목구멍으로 낙타를 삼키는 -더구나 낙타는 부정한 짐승으로 취급받던 동물이었습니다-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의 십일조와 그들의 종교 행위를 바라보셨던 예수님의 판단은 이와같이 분명한데, 다시 또 낙타를 삼키는 일을 강요하는 '소경된 인도자'들이 판을 치고 있는 우리들의 현실이 실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십일조의 본질 나아가 모든 율법의 본질은 예수께서 명확하게 지적하신 것처럼 의(justice)와 인(mercy)과 신(faithfulness)으로 설명할 수 있으며, 병행되는 구절인 누가복음에선 11:42에서는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지난 글(32호) "하나님을 알아 가는 십일조"에서 살펴보았던 세 가지의 십일조가 함의하고 있는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하기도 합니다.

십일조는 안식년 제도와 함께 땅의 주인되신 하나님께 대한 고백으로 우리의 모든 소유와 소산이 주께로부터 말미암았음을 고백하는 신(信, faithfulness)의 행위이며, 나아가 '경제 정의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알아 가는 방편이었으며 그 실천 윤리였기에 의(義, justice)의 행위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십일조는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의 나눔에 가장 기본적인 취지가 있었으며 또한 특별히 셋째 십일조를 따로 제정하실 만큼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 대한 사랑과 나눔을 강조하셨던 인(仁, mercy)의 행위로 '나눔의 삶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방편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같이 십일조를 바르게 행함으로 '평균케 되는 삶의 원리가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 즉 '의와 인과 신'이 그 중심되는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담긴 행위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소경된 인도자들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켜버림으로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사라져버리고 '박하와 회양과 근채'를 붙들어서 그 푸성귀 몇 포기에 자만과 위선과 탐욕을 담도록 인도하고 있었으니, 예수께서 분노와 안타까움으로 "화 있을진저!"를 일곱 번씩이나 외치셔야만 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기를 쓰며 강조하고 있는 오늘 우리들의 십일조는 과연 '의와 인과 신'을 행하는 '이것도 행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인과 신'이 지배 원리가 되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강자가 약자를 무참하게 짓밟는다거나 많이 가졌다고 해서 가지지 못한 자를 무시하고 유린하며, 그러고도 더 가지기 위한 불의와 불법만이 성행함으로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는...(딤후 3:2)" 삶으로 가득차 있다면, 그곳은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공정하고도 정당한 선의의 경쟁과 도리어 양보하고 손해보는 것까지라도 할 수 있는 미덕과 그리고 피차 신뢰하며 존중할 수 있는 진실과 사랑이 지배하는 사회가 바로 그 땅의 빛이요 소금이 있는 그리스도인의 사회입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하고 온유하며 청결하고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사람들이 있는 모임, 그곳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있는 사회이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 기도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십일조를 행하라고 명령하셨을 때는 바로 이와같은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고 그 소망이 구체적으로 이 땅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주신 조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한번 더 강조하셨던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나라' '우리가 꿈꾸어야 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는 바로 그렇게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율법의 행위인 십일조로는 그 소망을 한번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었고 그나마 성전이 완전히 붕괴됨으로 그 최소한의 명분마저도 사라진 지 이미 2000년이 지났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선 '의와 인과 신'이 이미 사라졌기에 성전을 거두어 가신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2000년이나 죽어있던 불씨를 다시 살려내며 역시 2000년전과 동일한 모습으로 '의와 인과 신'은 버리고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게' 하는 '소경된 인도자'는 또 누구입니까?

그리고 그렇다면 십일조 없는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의와 인과 신'이 지배하는 하나님의 나라,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빛으로 소금으로 살아가는,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리고 성전을 거두심으로 십일조를 그치게 하신 하나님께서 이젠 어떠한 방편으로 '의와 인과 신'을 원하시는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 하나님의 뜻인 '의와 인과 신'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방편으로 우리에게 주셨을까요? 다음 글 <헌금하는 사람, 연보하는 사람>에서 십일조에 대해 써 왔던 지금까지의 글에 대한 결론을 맺으며 십일조를 넘어서 의와 인과 신을 이루어가야 할 '연보'를 그 성경적 대안으로 제시하겠습니다.


*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둔다는 의미는?

예수님의 음성을 빌어 헌금을 강조하는 또 하나의 말씀은 마태복음 6:19-21입니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그래서 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 곧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고 적용하며 강조합니다. 그러나 과연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 곧 보물을 하늘에 쌓는 행위일까요?

그 말씀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하나님이 유지하시고 다스리시는 영역 즉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네 삶의 방향을 맞추라'는 말씀입니다. 즉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투자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이란 또 무엇입니까? 예수께선 요한복음 6:29-30의 대화를 통해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즉 밝혀주신 그대로 하나님의 일은 '믿음에의 투자' 즉 하나님과의 관계 개선에 투자하고 힘쓰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리고 '보물이 있는 곳'이란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또는 '우리의 가치관과 우선순위'에 대한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보물은 꼭 돈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그 어떤 것'으로 '보물=돈'이라는 공식은 사실 너무 단편적이며 물질주의적인 이해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보물은 돈이 아니라 우리 삶의 우선 순위와 가치관으로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본문의 바른 이해입니다. 즉 지금 예수께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을 아는 일에 너의 보물-너의 우선 순위와 가치관-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이어지는 뒷 절의 말씀을 또한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바로 뒷 절의 말씀은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을 것이니..." 라는 말씀인데, 아니 갑자기 웬 시력(?) 이야기가 나옵니까? 이 말씀은 눈 나쁜 자들을 상당히 기죽이는 말씀으로 들리는데 그렇습니까? 이 말씀은 앞에서 말씀하신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는 말씀에 대한 부연 설명의 말씀입니다. '마음'은 우리 존재의 중심이며 마음이 바르게 정해져야 인격 전체에 건강과 온전함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앞 말을 부연하고 이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자 예수께선 우리의 '심안'과 '육안'을 비교하고 계십니다. 눈이 성해야 온 몸이 밝을 것입니다. 즉 바른 관점을 가져야 모든 것이 밝게 보인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것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모든 것을 본연의 가치와 관계 속에서 보게 되지만, 반대로 땅에 속한 것을 보물로 삼은 자는 그 시각이, 그 가치관이, 그 우선 순위가 왜곡되어 사실상 모든 것을 오도하게 되고 영적 어두움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보물을 돈으로 보는 시각'이야말로 오히려 '눈이 나빠서 어두움에 빠져있는' 대표적인 모습일 따름입니다.

그래서 또 이어지는 24절은 더 분명하게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며, '땅'과 '하늘'중 네가 분명히 선택하라고 다시 다그치고 계시지요. 그리고 이어지는 25-34절의 말씀도 꼭 같습니다. 그래서 결국 6장은 19-34절까지가 같은 주제로 하신 말씀인데, '너의 가치관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이 그 주제이며, 이 모든 것의 결론적인 말씀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 -땅의 보물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이런 큰 문맥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그 말씀을 바르게 본다면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는 말씀으로 무작정 헌금을 강조하는 것이 얼마나 본문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이렇게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하며 아전인수격으로 오용하여 헌금만을 강조한 결과, 오늘 한국교회 성도들은 헌금은 잘하고 있는 지 모르겠지만 그 삶과 가치관은 전혀 변화가 없는 이상한 그리스도인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가치관과 삶의 자세가 하나님의 관점과 하나님의 나라에로 완전히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 바뀐 가치관과 삶의 자세로 열심히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산다면 내가 살아가는 삶 자체가 보물이 되어 하늘에 쌓이는 것이지 내가 낸 돈들이 하늘에 쌓여 천국 통장의 잔고가 늘고 내가 천국에서 더 복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을 갖는 것은 사이비 종교의 가르침이지 참된 예수님의 가르침은 분명코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으로 보물을 하늘에 쌓기 위하여 먼저는 나 자신의 삶의 자세와 모든 가치관들을 그리고 나아가 이 세상의 소중하고 중요한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진리 앞에 쳐서 복종시켜 이 모든 소중한 만물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도록 내가 맡은 자리와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입니다. 제발 좀 그 돈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는, 가장 비성경적이며 또 모든 악의 근원이기에 하나님께서도 미워하시는 바로 그 돈으로 하나님을 팔며 신앙을 팔고 있는 그 추악한 행위들을 그쳐야 합니다. 진리 안에서 자유와 평강 누리시길 바랍니다.



십일조 바르게 읽기(4) - 헌금하는 사람, 연보하는 사람


헌금하는 사람

혹 여러분이 출석하시는 교회의 헌금 종류가 몇 가진지 헤어보신 적 있습니까? 십일조헌금, 일반감사헌금, 각종 절기감사헌금, 건축헌금, 선교헌금 등의 봉투는 아마 거의 대부분의 교회가 기본으로 비치하고 있을 것 같고... 좀 더 많으면 구제헌금, 장학헌금, 주정헌금, 생일감사헌금, 신년 감사헌금 등이 아마 추가되고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근데 왜 헌금을 하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신 적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헌금하라고 한번이라도 말씀하신 적이 과연 있습니까? 죄송하지만 성경에선 한 군데서도 헌금하라는 말씀을 찾을 수 없습니다. 알다시피 우선 십일조가 있지만 십일조는 돈을 드리는 것이 철저하게 아니었음을 이미 살폈고 돈을 드렸던 것으로 성전세가 있었지만 성전세는 그 이름에서 이미 알 수 있듯이 일종의 세금이었고 강제적이며 의무적인 성격이었기에 헌금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각종 제사들 역시 제사를 원하는 사람은 자신의 형편에 맞는 제물을 준비해 오는 것이었지 돈으로 제사 준비를 했던 것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제물에 대해서도 처음 그 법을 명령하고 있는 율법서에서나 이러 이러한 제물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시고 있을 뿐 다른 말씀들 특히 선지서에 이르면 "제발 그런 헛된 제물들을 가져오지 말라(사 1:11-15)"는 말씀이 오히려 주된 음성이지, 왜 내게 제물을 바치지 않았느냐고 다그치신 적은 한번도 없음이 분명합니다. 결국 하나님께 돈을 드린다는 생각은 결코 성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어, 그래요? 그래서 컴퓨터 성경으로 '헌금'이라는 단어를 검색해 봤습니다. 성경에서 '헌금'이라는 단어가 몇 번쯤 나올 것 같습니까? 신.구약 전체를 통틀어 '헌금'이라는 단어는 단 두 번만 나옵니다. 그것도 누가복음 21:1-4의 한 사건을 설명하는 가운데 두 번 나오는 것이 전부이니 사실은 단 한번 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더 바를 것 같습니다. 지금 성경을 펼쳐서 확인해 보십시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연보궤에 드린 것과 부자들이 헌금한 것을 비교하여 예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바로 그 본문에서입니다. 그리고 그 본문을 자세히 보시면 '연보궤'라는 단어가 나오며 그 연보궤에 부자들은 '헌금'하고 있다는 뉘앙스로 글이 쓰여져 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과부에 관해서는 단순히 '넣었다'라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는데 반하여 부자들에 관하여는 1절과 4절에서 두 번 다 '헌금'이라고 그 돈의 성격을 밝히고 있습니다. 부자들은 헌금하고 있었습니다. 정치 헌금을 하는 것과 또는 어떤 단체에 기부 헌금을 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는 '헌금'을 그들은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누가복음에서만 단 두 번 사용되고 있는 이 헌금도 결코 긍정적인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판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면 결국 성경엔 헌금이 없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선 헌금을 요구하신 적도 없고 헌금을 인정하신 적도 없습니다. 즉 하나님께 돈을 드린다는 의식을 가지고 헌금을 하는 것은 성경에서 비롯된 생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에는 연보궤가 있었습니다.
성전의 바깥뜰인 여인의 뜰에는 각각 다른 용도가 표시된 열세 개의 나팔 모양을 한 연보궤가 늘어서 있었는데 성전에 예배하러 왔던 사람들이 성전 입구에 서 있는 이 연보궤에 연보를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부자들은 연보궤를 돌아가면서 주루룩 주루룩 소리가 나도록 -특히 모양이 나팔 모양이고 당시는 다 동전이었기에 그 소리가 아주 요란했다고 합니다- 각종 동전들을 집어넣으며 자신의 행위를 과시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을 누가는 '연보'가 아니라 '헌금'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문맥을 보면 사실 누가가 하고 싶었던 말은 헌금이 아니라 탈취물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를 또한 읽을 수 있습니다.

바로 앞 전문맥인 누가복음 20:45-47을 보십시오.
예수께선 특별히 서기관들에 대하여 경고하시면서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한다(47절)"고 말씀하고 있는데, 바로 뒷 장면에서 그렇게 가산을 탈취 당한 과부는 그래도 자신의 전 재산인 두 렙돈을 연보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기관들이 어떻게 과부의 가산을 삼켰을까요? 간단합니다. 서기관들은 레위인이었기에 십일조를 받았는데 마땅히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들에게까지 전달되어야 할 십일조를 자신들이 다 챙긴것이지요. 그래서 당시에는 일부 소수가 십일조를 독점하였기에 같은 레위인이라도 권력을 쥐지 못했던 레위인들은 거의 거지 신세로 살아가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간단한 예로 예수님의 제자였던 레위 마태가 있지않습니까?
그의 본 이름은 레위이며(막 2:14) 마태는 제자가 된 후 예수께서 주신 이름입니다. 그가 가진 이름 '레위'는 물론 함부로 가질 수 없는 이름입니다. 그것은 그가 레위 지파였음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그는 세리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십일조로 생활을 했어야 할 레위인의 입장에서 세리가 된다는 것은 분명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죽했으면 그가 세리의 일을 하고 있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하신 "나를 따라오라"는 단 한마디의 말씀에 그는 당장 그 세리의 자리를 박차고 예수의 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이것이 당시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서기관들을 포함한 부자들은 불의한 돈을 가지고 오히려 행세하며 헌금하고 있었지만 그 헌금은 예수께서 인정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가난하고 약탈당한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했고 오히려 자신보다도 못한 이웃을 생각하여 두 렙돈을 연보했던 과부의 연보만 예수께서 인정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황당하고 가관인 것은 이같은 성경의 말씀을 갖고 오늘날 설교하는 자들의 태도입니다. 다 아실 겁니다. 뭐라고 설교하고 있는지. "이 과부를 봐라. 아무리 가난해도 헌금은 꼭 해야한다. 이 궁색한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할 수 있었다면 대부분의 우리들은 더 많은 헌금을 해야 마땅하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복을 내리신다". 과연 이렇게 설교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강조되는 것이 "많이 넣는" 부자들의 헌금이지 적게 넣는 가난한 자들의 헌금이 분명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본문을 갖다 대든 오직 헌금 많이 해서 복 받자는 결론을 끄집어내는 이런 왜곡된 설교들이야말로 오늘 한국교회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뒤에서 다시 강조하겠지만 헌금을 많이 하면 복 받는다는 생각 자체가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하는 비성경적인 생각입니다. 그건 하나님을 맘몬으로 대체하는 또 다른 우상숭배를 강요하는 행위이지 결코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돈 몇 푼이 필요하신 분이 아니며 그 같은 행위로 하나님을 시험해서도 안될뿐더러 하나님께선 한번도 헌금을 원하신 적이 없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께 돈을 드리는 것 만큼 왜곡되고 거짓된 가르침은 없습니다. 구약에선 왜 한번도 헌금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고 또 오히려 돈으로 십일조나 헌물을 드리지 못하도록 특별한 조치까지 취하고 있을까요? 신에게 돈을 주는 행위는 돈 받고 복을 팔았던 당시 이방신들의 일반적인 모습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을 향하여 돈 드리는 행위를 원치 않고 오히려 경멸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령 죄를 속하는 희생 제물을 돈으로 대신해서 드릴 수 있다고 한다면 제사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뿐더러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히 9:22)'는 구속의 원리를 가르칠 수 없었기 때문에 돈으로는 결코 제물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십일조 역시 토지의 소산으로만 바치게 했던 이유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관심은 돈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 알아가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가장 일반적인 종교 행위였던 돈으로 드리는 헌금을 오히려 거절하셨던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 헌금을 많이 드림으로 축복을 받는다는 논리는 얼토당토 않고 오히려 그 반대로 돈이나 얄팍한 인간들의 행위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자멸을 재촉하는 길이라면 오히려 맞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가 단호히 거부하는 것은 그릇된 동기로 하나님께 돈을 드리는 행위를 말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이 성경에선 오히려 헌금이라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기에 그 헌금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지금도 우리가 헌금을 하면서 하나님께 드린다는 생각으로 헌금을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꼼꼼히 새겨 읽으십시오. 하나님께 드린다는 생각으로 헌금을 하시면 안됩니다. 구약시대가 아니라고 해서 이제는 돈을 드려도 된다는 근거가 전혀 없고 또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의 속성상 돈을 숭배하는 맘모니즘이 더욱 더 견고한 이 시대의 가치관이 된 지금, 그 돈으로 하나님이 평가되고 인간의 삶이 평가되기를 하나님은 더욱 더 원치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돈을 드릴 수는 없지만 교회의 사역을 위하여 그야말로 '헌금'하는 것은 오히려 정당합니다. 지상의 교회는 땅에 속한 한 기관이요 일정한 비영리 조직이기에 헌금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위하여는 헌금하지만 그것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헌금하는 것은 일종의 기부행위요 또 내가 속한 조직과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책임이기에 그저 기꺼운 마음으로 하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드린다는 생각이 개입되면 그 순간 그것은 자기 의가 되고 자신의 행위를 하나님 앞에서 과시하는 것이 되기에 바리새인들의 행위처럼 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온전한 마음과 믿음의 삶이지 돈이 아닙니다. 돈은 그저 교회를 위하여 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위하여 드리면 됩니다. 그리고 십일조와 헌물들을 대신하여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헌금'이 아니라 '연보'입니다.



연보하는 사람

앞선 누가복음에서도 등장했었지만 예수님 당시의 성전에도 연보제도가 있었으며, 구약에선 역대하 34:9,14에서 '연보'한 돈으로 성전을 수리하는 일에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연보는 물론 십일조와 성전세와는 다른 돈으로 요즘 헌금으로 비교한다면 일종의 건축헌금인 셈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의 성전에는 이렇게 성전건축을 위한 연보, 구제를 위한 연보 등의 각각 다른 항목이 적힌 13개의 연보궤가 놓여 있었고 성전에 출입하던 백성들은 자유롭게 연보 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율법서에서 구체적으로 연보하라는 명령을 찾을 수는 없지만 꽤 오랜 시간동안 관례적으로 연보를 해 왔던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시대로 이르면 신약성경에선 '연보'라는 단어가 12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헬라어로는 조금씩 단어가 다르지만 한글로는 다 연보라고 번역하고 있고 단어는 달라도 그 행위들은 다 연보였습니다. 즉 아직까지는 '연보'라는 단어가 특정한 고유명사를 갖진 못했으나 연보한다는 행위는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선 연보(捐補)라는 말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연보(捐補)'의 연(捐)은 원래 '버린다'의 뜻으로 사용된 말인데 '주다, 바치다, 내놓다, 기부하다'라는 뜻으로 발전했습니다. 즉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림으로 타인에게 내 놓거나 바치거나 기부한다는 뜻인 셈입니다. 그리고 연보의 '보(補)'는 원래 '깁다'라는 뜻을 가진 말인데 '고치다, 보태다, 돕다'라는 뜻으로 발전했습니다. 결국 한자로 된 연보를 원래의 단어 뜻대로 해석하면, 자기 것을 버려서 헤어지고 떨어진 곳을 기워준다는 뜻이 됩니다. 참 좋은 뜻의 단어이며 원어의 의미도 잘 살린 아주 좋은 단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한글번역은 일관되게 '연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교회에서도 과거에는 연보를 드린다고 했지 헌금을 드린다고 한 것은 사실 최근의 일입니다. 한국 땅에 처음 복음이 전파되고 모두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구성되었을 때 우리는 의례히 '연보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모두들 살림살이가 조금씩 나아지고 특히 좀 산다는 사람들 중심으로 교회가 구성되기 시작하면서 슬그머니 연보는 사라지고 어느 듯 헌금으로 대체된 것이 한국 교회사에 나타난 헌금제도의 변천사입니다. 결국 연보궤에 헌금을 넣는 서기관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약 성경에 나타난 연보는 우선 고전 16:1,2에 "성도를 위한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 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는 말씀을 먼저 기억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 두 번 사용되어 연보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로기아'인데 영어로는 collection, 즉 모금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연보는 당시 흉년을 만나 어려움에 처했던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기 위한 모금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이 구절을 근거로 매 주일 모일 때마다 '헌금'을 하지만 자세히 보시면 그렇게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매 주일 교회에다 헌금을 하라는 말이 아니라 일주일에 한번씩 스스로 저축을 해 두었다가 바울이 오면 따로 연보하지 말고 지금껏 자신들이 저축한 그것으로 연보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을 보면 '저축하라'는 단어 뒤에 'by himself'라는 '자기 스스로, 혼자서'라는 어구가 있어서 이 말이 공적인 헌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적인 준비를 뜻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요즘 식으로 이해하면 초기 교회야 지금의 구역모임과 비슷했으니까 매 주일 첫 날에 각 가정에서 가정 헌금 형식으로 연보를 모아두었다가 그 모아진 것을 가지고 바울이 왔을 때 연보를 해서 예루살렘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즘 같으면 바울같은 '대부흥사'가 왔는데 큰 부흥회를 개최하여 아마도 넘치게 헌금을 거둘 수 있었을 테지만, 바울은 오히려 성도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했고 또 연보의 참된 의미를 살리기 위하여 그런 즉흥적이며 충동적인 헌금을 못하도록 오히려 "내가 갈때에 연보하지 않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론 그 연보의 사용처도 기근을 당한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기 위한 것이었기에, 오늘 한국 교회들의 헌금은 이런 여러 점에서도 성경의 가르침과는 달라도 한참이나 다르며 성경에서는 그 모델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살펴 볼 단어는 헬라어 '하프로테토스(고후 8:2, 9:11, 9:13)' , '하드로테스(고후 8:20)' , '유로기아(고후 9:5)'로 단어들은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영어로는 generosity, generous gift, liberality gift로 번역되고 있는, 모두가 구제를 염두에 둔 관대한 나눔의 의미를 담고 있어서 '연보'의 의미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바울에 의하여 주로 언급된 연보들을 정리해 보면 몇 가지로 뚜렷해지는 연보의 원리들을 세워볼 수 있습니다. 이같은 원리들을 제시하는 성경 구절들을 꼭 찾아서 읽어보십시오.

① 연보는 있는 대로 형편대로 하면 됩니다. (고후 8:11-12)
② 연보는 준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고후 9:5)
③ 연보는 마음에 정한대로(자율적으로) 해야 합니다. (고후 9:7)
④ 연보는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고후 9:7)
⑤ 연보를 통하여 평균케 되는 삶이 나타나야 합니다.(고후 8:14-15)

연보가 십일조를 대체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와같은 연보의 원리가 십일조의 원리인 '의와 인과 신'의 원리와 같기 때문입니다. 특히 십일조를 통하여 나눔의 삶이 실현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경제적으로 함께 평균케 되길 하나님은 원하셨기에, 연보는 십일조의 가장 기본적인 그 뜻을 이룰 수 있도록 오늘 우리에게 주신 방편이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로 공유함으로 평균케 되는 것은 구속의 역사에서 항상 따라오는 첫 원리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와 즉 구속함 받아 광야에서 배웠던 첫 원리가 만나를 통해 "많이 거둔자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않는(고후 8:15)" 평균케 된 삶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광야에서 하나님은 율법을 주심으로 광야에서 누렸던 그 평균케 된 공유의 삶이 지속될 수 있도록 안식년과 십일조의 제도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결국 율법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룰 수 없었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사역이 필요했던 것이며 십자가와 부활의 사역으로 성령을 주신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던 구속받은 그 성도들의 삶은 또한 어떻습니까?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보여 주듯이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있는(행 2:45, 4:32)", 역시 공유의 삶이며 평균케 되는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구속의 진리를 가르쳤던 바울 사도가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케 하려 함이라(고후 8:14)"고 지적하며 연보를 권고하고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가르침이며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적용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개혁할 때가지 맡겨 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에는 십일조라는 말이 더 이상 나오지 않으며 그리고 헌금이라는 말도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당연한 것이 십일조와 헌물은 제사 제도에 종속된 것이기 때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제사 제도와 성전이 필요 없게 되었고 또 실지로 사라진 지금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9:9-10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장막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예물과 제사'는 폐지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 값을 십자가상에서 대신 치러주실 때, 우리가 일생 동안 바쳐야 할 십일조와 헌금까지도 다 바치심으로 십일조 예물과 헌금 예물을 폐지하셨습니다. 그냥 폐지하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심으로 폐지하셨습니다. 왜 이 사실을 믿지 않습니까? 처음부터도 그랬지만 이제는 참으로 하나님께 돈을 일체 바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왜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여전히 그 잘난 돈 몇 푼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며 스스로의 무덤을 파고 있습니까? 도대체 우리의 믿음이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믿는 다는 말입니까? 참으로 믿는다고 하면서 왜 여전히 나의 행위로 뭔가를 과시하고 이루어보려고 합니까? 제발 좀 예수 믿고 삽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구원에 관한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예물과 제사는 이미 다 이루어졌습니다.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히 7:12)"
모든 것이 이미 다 변했고 모든 것이 이미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십일조는 이미 폐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돈을 드릴 이유는 처음부터 없었거니와 물론 지금은 더더욱 없습니다. '개혁할 때가지 맡겨 둔 것'들이 개혁된 지는 이미 지나도 한참을 지났으며, 모든 것이 이미 다 이루어졌고 다 변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헌금한다고 말함으로 자멸의 구덩이를 제발 파지 파십시오. 헌금은 그냥 교회의 운영과 선한 사업들을 위하여 그대로 하면 됩니다. 그것 자체가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재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빌 4:18)"입니다. 빌립보서의 이 말씀도 빌립보 성도들이 복 받을려고 충동되어서 바친 헌금들이 아니라 바울의 선교사역을 돕기 위한 연보였고 선교헌금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와같은 연보들은 분명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헌금을 필요로 합니다. 그 헌금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동기가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동기가 아니라 바울과 그의 선교 사역을 단순히 돕겠다는 선한 동기였기 때문입니다. 제 말은 하나님께 한다는 거짓 가르침에 속아 억지로나 또는 생색내며 헌금하지 말라는 것이며, 이제는 그 십일조와 헌금에서 마땅히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고 말했던 바울의 말씀처럼 이제는 자유해야 하며 더 이상 십일조와 헌금이라는 또 다른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어지는 6장에서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고 말씀함으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기복주의와 무속신앙으로 점철된 인간 종교의 역사는 끊임없이 신에게 뭔가를 제공함으로 신으로부터 그에 따른 수혜(복)를 입을 수 있다는 패러다임을 유지해 왔습니다. 구약에서 그토록 경고하고 있는 우상 숭배가 바로 그러한 이방종교들의 패러다임에 대한 경고였으며,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그토록 강력한 비판을 받았던 것도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들의 행위를 내세우며 자기 의에 빠진 모습들 때문이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요구하셨고 예수께서 다시 반복하신 말씀들은 이와같은 일반 종교의 패러다임에 대한 전복(顚覆)이었으니 즉, 네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을 이웃을 향하여 나타내라는 것이었으며, 십일조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의 고백인데 그 표현은 레위인과 객들과 과부와 고아들과 나눠 먹는 것으로 표시되어야 했습니다. 즉 돈은 신(神)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나누라는 가히 모든 종교의 페러다임을 깨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께 뭔가를 드리고 싶다면 그것을 하나님께 바치지 말고 그것을 오히려 네 이웃에게 주라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였으며 물론 동일하신 예수님의 메시지였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께 돈을 바치라고 말씀하신 적이 한번도 없으며, 예수님의 줄기찬 메시지는 "네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마 19:21, 막 10:21)"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 6:38)"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복 받는 유일한 조건이 있다면 사실 이 말씀 속에 있습니다. 십일조를 철저히 하고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주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주어야 하냐면 눅 6:38 그 말씀의 전문맥을 보면 '원수'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 달라며 교회에 바친다고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원수에게 주는 것이 오히려 복의 조건인데, 그토록 복을 좋아하고 갈구하면서 왜 이 말씀은 큰 소리로 가르치지 않는 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예수를 만나고 성령으로 충만했던 하나님 백성들의 모임은 이 말씀이 문자 그대로 이루어져, 흔들어 넘치도록 안겨 주셨으며 그 가운데 한 사람도 핍절한 자가 없지(행 2:44-45, 4:32-35) 않았습니까? 심지어 고넬료는 이방인었고 로마의 군대장관이었으며 아직 성령을 알기 전이었지만 그의 '구제와 기도(행 10:31)'를 하나님께서 기억하시지 않았습니까?

교회는 구제단체가 아니고 자선기관이 분명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주라!"고 명령하시는 예수님의 음성 앞에서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토록 원하셨던 하나님 나라에 속한 하나님 백성들의 공동체는, 인색한 인간의 본성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었기에 율법으로는 되지 못하였고 결국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이며, 초대교회의 역사가 보여 주듯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음으로 마침내 가능하지 않았습니까? 성령의 충만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지니 하나님이 원하셨던 대로, 하나님께 돈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돈을 나누는 모습으로 변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구원을 받고 성령과 동행하는 우리에겐 우리에게 복으로 주시는 물질들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일만이 남게 된 것이며, 이것이 진정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며, 이 일을 행하는 도구가 바로 연보입니다.

그러므로 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연보를 통하여 이웃에게 나눠져야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에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기준이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45)"는 말씀이 아니었습니까? 거기 심판대에 선 자들은 하나님을 몰랐던 자들이 아닙니다. 염소의 자리인 왼편에 선 자들의 대답(25:44-45)을 들어보면, 그들은 하나님을 대접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자들이 아니라 그들이 몰랐던 것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하는 것이다'는 바로 이 사실을 몰랐기에 그들은 결국 염소의 자리에 서게 된 것이었습니다.

종말의 심판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마태복음 25장에는 세 비유가 등장합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열 처녀의 비유와 달란트의 비유 그리고 양과 염소의 비유인데, 한결같은 공통적인 메시지는 하나님을 알되 잘못 알고 있는 자들이 심판대 앞에 서 있다는 사실입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신랑이 온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들은 신랑이 이렇게 더디 올 줄은 몰랐던(25:5)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주인을 알았지만 그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몰랐고(마 25:24-26) 그저 자신의 생각대로 그 주인을 판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염소의 자리에 선 그들도 하나님을 대접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접하는 방법, 즉 그것이 바로 이웃을 향하여 '주는' 것이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한국교회 성도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섬기길 원하는 지 목사인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성도님들이 다 그런 순수한 마음으로 어려운 형편에도 하나님께 헌금하는 일에는 늘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래서 더욱 화가 나는 것입니다. 그 순수함을 등쳐먹으면서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들은 엉뚱한 길로 인도하는 소경된 인도자들(마 23:13)' 아니 그 사기꾼 인도자들에게 분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헌금하라고 엉터리로 가르치며 협박까지 하면서 정작 오늘 우리가 연보 해야 할, 우리에게 보내신 하나님인, 우리의 이웃들을 향하여는 귀 막고 손 접게 만들었던 그 인도자들에게 분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거룩하신 우리 하나님을 복채를 챙기는 우상신으로 전락시키는 발람의 후예들이 교회에서 판을 치게 해서는 안되며, 하나님께 돈을 바친다는 샤마니즘적인 관념을 우리들의 머리 속에서 하루 빨리 뽑아 내야 합니다. 그래서 참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하며 그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물론 대부분의 교회들이 어쨌든 많이 헌금된 그 돈을 바르게 잘 쓰고 있으며 특히 이웃을 향한 섬김과 구제의 손길에도 사실은 다른 종교들보다 훨씬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통계도 가지고 있습니다. 실지로는 불교와는 비교할 수도 없고 카톨릭 보다도 사실은 개신교가 월등히 더 많은 돈을 나눔과 구제에 지출하고 있습니다. 물론 총액을 기준으로 한 것이기에 가장 돈이 많은 교회가 앞섰고 전체 헌금 중 비율로 따진다면 그렇지도 않지만. 아무튼 그런데 왜 교회는 이웃을 향해 귀 막고 있다고 일반적으로 평가되고 있겠습니까? 꼭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설교를 통해 선포되는 메시지들의 기복적인 편향성이 그런 인식을 낳은 것 같으며 특히 대형 교회들의 행태가 그러한 문제들의 중심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실지로는 80%에 육박하는 목사님들과 사역자들이 생계의 곤란을 겪으면서 사역하고 있고 대부분의 성도들이 어렵고 힘들게 헌금하고 있는 형편을 보면, 저의 이런 글이 필요할까 싶은 생각을 수 백번도 더 했습니다. 그런데 결론은 그렇기 때문에 바르게 밝혀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열심히 헌금하고 있지만 그 열심들이 바른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면(롬 10:2) 결국은 헛되기 때문이며 또 참으로 어렵고 힘들게 사역하는 많은 사역자들에게 바르게 사용되는 연보의 몫이 돌아가서 그들에게 힘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부자들의 교회가 되어 버린 교회에서, 헌금 많이 못한다는 부끄러움을 안고 그러나 신실하고 소박한 믿음으로 꿋꿋하게 신앙 생활하는, 참으로 작고 소중한 성도들에게도 이제는 바르게 사용되는 연보의 몫이 돌아가서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게 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참으로 잠시나마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게 해 줄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예배 잘 드리면 된다고 우기시는 분도 있겠지만 결코 그것만이 아닙니다. 성경이 너무나 명확하게 보여 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은혜와 자유의 복음을 소유하고 있는 한국교회가 헌금과 십일조라는 장애물 때문에 전도의 문이 닫혀 수많은 영혼들을 잃게 된다면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무엇보다 '복음'이 온전하게 '복음'으로 선포되는 것이 중요하며 그것만이 예수의 피로 구속받은 우리의 유일한 소명이며 자랑이며 소망이라고 저는 믿기 때문입니다. 기울어 가는 교회를 바라보며 그 기둥을 다시 부둥켜 안고 세워야 할 소임을 부여받은 작은 목사로서 참으로 잠 못 이루는 밤들을 보내며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답은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잊혀진 것, '복음을 다시 복음되게 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물론 비록 정답을 알아도 그 여정이 순탄치는 않겠지만 '복음'이 진정 '복음'되어야 한다는 이 정당성 앞에 무릎꿇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옭아맸던 그 무수한 속박들을 끊는 자유입니다. 그래서 그 자유를 가지고 이제는 예수의 가르침 앞에 순복하는 또 다른 굴종입니다. 그것이 내 힘으로는 될 수 없는 일들이기에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아름다운 굴종입니다. 이 복음의 진리 안에서 함께 은혜와 자유와 평강 누리시길 바랍니다. 

 

헌금과 성도의 헌신적인 삶
십일조와 관련된 성경 구절을 중심으로………………………………………………… (글 : 오광만 교수)


I. 서론

구약 성경에 십일조를 내야 할 것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본문이 많이 있다. 이것을 근거로 오늘날도 여전히 많은 교회와 목회자들이 성도들에게 십일조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이에 대한 반발로 요즈음 젊은 성도들 사이에서는 십일조 무용론까지 주장하는 실정이다. 구약에 명확하게 기록된 십일조에 대한 본문을 신약의 관점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것을 우리는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순종할 것인가? 아니면, 이것은 옛 시대 독특한 상황에 국한되는 잠정적인 명령으로 이해할 것인가?

지금까지 십일조 옹호론자들은 십일조가 성경의 권위에 기초하고 있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교회에서 실행되어 왔으며, 특히 이것은 교회의 재정 수입의 중요한 한 부분을 담당해왔다고 주장한다. 특히 이들의 경우에는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몇몇 본문(창 14:20; 28:22; 말 3:10)만을 근거로 십일조가 성도들의 당연한 의무라고 믿는다. 창세기 본문은 십일조가 모세 율법 이전에도 실행되었기 때문에 율법이 폐지된 후에도 십일조의 유효성을 주장하는 근거를 제시하는 성구로 이해되고 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 역시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오늘날에도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수입의 십분의 일을 주의 사업을 위해 드리라고 명령했으며, 또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십일조 시행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부과된 당연한 의무라는 것이 십일조 옹호론자의 입장이다. 십일조는 반드시 지불해야 하는 빚 또는 세금과 같다. 이 의무를 감당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는 말라기 3장에 의거하여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그래서 소위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판단 기준으로 십일조가 중요한 잣대로 사용되며, 다음과 같은 입장이 그들에게 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 일종의 신성한 세금과 같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되갚기를 바라시는 것은 우리의 수입의 십분의 일이다. 당연히 하나님의 것인 그 분량을 하나님께서는 내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린다. 나는 하나님께서 책정하신 신성한 세금을 내야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이 세금을 납부하기 전에는 나는 그분에게 아무것도 바치지 못한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이 주장의 근거를 구약 성경, 특히 항상 말라기 3장을 그들은 인용하며, 십일조의 요구가 무조건적인 구속력을 지닌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오직 이 구절에 의존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정말 이것이 성경적일까? 십일조가 신약 시대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청지기의 규율과 규범이 되는가?

한국의 대부분의 교회 역시 십일조를 지나칠 정도로 강조한다. 그리고 십일조 납부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목표요 교회의 직원이 되는 표준으로 간주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교회는 십일조 이외에 다양한 명목의 헌금을 신자들에게 부과한다. 월정헌금, 주정헌금, 감사헌금, 특별 감사헌금(생일, 입학, 졸업, 결혼, 회갑, 장례, 심지어 새해맞이<신년> 감사헌금까지), 서원헌금, 일천번제 헌금, 건축헌금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많다. 모든 삶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라고 한다. 이 헌금들이 복 받기를 바라는 성도들에게는 즐겁게 질 만한 것이고, 이것을 통해 감사를 금전적인 가치로 환산하는 것에 대해서 배우게 될는지는 몰라도 각종 명목의 헌금은 대부분의 성도들에게 짐이다. 이 쯤 되면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를 가르치는 교육적인 목적보다는 헌금 징수 그 자체에 더 관심이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러나 실제로 교회의 헌금 강요 그 자체보다는 헌금과 관련하여 헌금에 대한 구약과 신약의 다른 점, 왜 헌금을 하는지 또 헌금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교회에서 가르치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 전적인 헌신과 청지기의 삶에 대해서는 거의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에 십일조가 언급된 것을 헌금에 대한 표준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헌금에 대한 지침으로 삼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헌금의 의미나 청지기 직에 대한 교훈이 없이 헌금 내는 것만을 요구할 경우 성도들은 율법주의의 위험에 빠질 수가 있다. 통계에 따르면 교회의 70%가 목회자의 생계비 유지도 어려워 할 정도로 경제적 자립이 이룩하지 못하였다고 하지만, 대형 교회의 경우에는 성도들로부터 거두어들인 돈으로 점점 부유해지고, 교회의 재정은 그 돈을 감당하지 못할 만큼 넘쳐나지만 정작 하나님께 바치며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가 돈으로 고백한 자신의 신앙의 내용과는 거리가 멀다.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윤리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샤마니즘에 근거한 물질적인 복을 받기 위해 헌금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심지어 터놓고 그렇다고 주장하는 교회나 성도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 십일조는 교회의 사역에 헌신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의미 있는 방법일 수가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그것은 보다 충만한 계시인 신약성경에 비추어 재고해보아야 할 여지가 있는 헌금이다. 십일조를 내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그리스도인의 윤리, 청지기의 삶, 하나님께 전적인 헌신의 삶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나는 이 글에서 십일조와 관련된 구절을 중심으로 십일조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그 결과 그리스도인의 청지기의 삶의 문제를 지적하려고 한다. 이 글은 성경의 구속사적인 패턴에 따라 주해를 할 것이며, 십일조와 관련된 본문의 배경적 연구를 통해 본문의 균형 잡힌 의미를 도출해내도록 할 것이다.


II. 본 연구의 방법론과 관점

먼저, 나는 성경이 역사를 통해 점진적으로 계시되었다는 것과 통일성 속에 다양성이 있음을 전제로 한다. 신약에 충만히 드러난 계시의 내용은 구약에 암시되어 있고, 구약의 교훈은 신약에서 분명하게 밝혀진다. 성경은 이처럼 희미한 계시에서 분명한 계시로 나아가는 계시의 역사, 즉 구속사이다. 그리스도는 구속사의 중심이시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는 그 전에 주어진 계시는 준비 단계로 주어졌고, 그리스도께서 그 의미를 확연하게 알려주어야 그 의미가 확연히 드러난다.

히브리서 1:1-2이 이 사상을 잘 전해준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였으니.” 휴스(P. E. Hughes)는 이 구절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신 계시의 독특성과 최종성은 옛 질서를 성취할 뿐만 아니라 그것과 대조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탁월한 선지자이시며, 그분이 오심으로써 과거의 모든 예언과 약속들은 절정에 도달하였다(고후 1:20). ……그래서, 구약 계시가 부분적이고 불완전하고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난 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의 최종자이시며 완성자라는 점에서 구약 계시와 대조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계시의 점진성을 암시하는 내용을 본다. “(계시의) 점진성”에 대해 브루스(F. F. Bruce)는 이렇게 말한다. “점진성은 약속에서 성취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 이전 시대의 계시의 일련의 모든 행위들과 다양한 모양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의 충만함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분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야만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은 ‘예’가 되며, 이로써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충만함을 보증한다. 하나님의 계시의 이야기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이르는 점진적인 이야기이지만, 그리스도를 넘어서는 (계시가) 더 이상 진전되지 아니 한다.” 이 설명에서 우리는 성경 저자들이 성경 전체의 계시가 그리스도에게 이르기 전에는 불완전하고 부분적인 것이었다는 것과 그 안에서라야 이전에 주어졌던 계시의 의미가 충만히 드러나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구속사의 점진성에 대한 내용은 구약의 의식법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설명한 히브리서 7-10장에 잘 표현되었다. “전엣 규율이 연약하고 소용없는 것이므로 폐하고”(히 7:18). 그리고 8:13에서도 계속해서 다음과 같은 지적을 읽을 수 있다.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가는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옛 언약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충만한 모습으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의식법과 관련하여 옛 언약은 율법이 장차 오는 좋은 것의 그림자에 불과하고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그 효력을 상실하였고(히 10:1), 새 언약이 옛 언약을 대체하였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새 언약의 시작이다(히 9:15-17. cf. 7:22, 27; 10:9, 10, 12).

그러나 이 사실이 이제는 구약 전체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구약과 신약은 여전히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규범과 표준이다. 구약과 신약은 동일하게 교회의 신앙과 생활에 충분하고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두 성경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원리와 요구는 동일하다(신 6:5; 레 19:18; 마 22:37이하; 요 13:34, 35).7) 그래서 율법을 지켜야 하는 우리의 의무는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마 5:17-20). 그러나 그 방식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전체 율법이 여전히 구속력이 있지만,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우리는 새 언약과의 관계성 속에서 옛 언약을 살펴보아야 한다. 실체에 대해 그림자, 원형에 대해 유형으로서의 특징을 지닌 두 언약의 관계를 명심해야 한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관계와 관련하여 율법을 도덕법, 의식법, 시민법 등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경에는 율법을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단순히 “율법”이라고 지칭하며, 율법이 이런 식으로 나뉜다고 분명하게 언급되거나 지적된 곳은 없지만, 성경 저자들이 지적한 내용을 비교해보면 이 세 가지로 구분하여 이해되며, 특히 종교 개혁자들과 그들이 만든 신앙고백에 이런 사실이 명기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9장 3-5항에는 구속사에서 율법이 작용했던 역할에 따라 율법을 다루면서 율법을 세 부분으로 구별하여 언급되어 있다. 그래서 율법 전체가 여전히 규범적이지만, 동시에 율법 전체는 새 언약의 사건 때문에 적용에 변화가 있게 되었다.

나는 율법의 세 유형 중에서 십계명과 관계된 도덕법이나, 대인관계의 법을 규정한 시민법과는 달리 십일조를 의식법에 분류하는 것이 바르다고 생각한다. 구약의 십일조는 전형적인 의식법의 하나인 헌물이나 예물 드림과 관련되었기 때문이다(레 27:30, 33; 민 18:20-32; 신 12:6, 11, 17; 14:22-29; 26-12; 말 3:8).9) 십일조가 의식법으로 분류되고 그런 특성을 지녔다고 해서 십일조의 도덕법적 특성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이 다른 사람을 돕거나 하나님께 드린다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곡식의 십분의 일을 드린다는 행위 자체와 관련해서는 십일조를 구약의 다른 예물 드림, 제물 드림과 관련된 의식처럼 의식법으로 분류하는 것이 바르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은 의식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하나님은 이(도덕법) 외에도 이스라엘 사람에게와 그 후에는 교회의 의식에 관한 율법을 주시기를 원하셨다. 여기에는 몇 가지 독특한 의식에 관한 것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예배에 관한 것인데 그리스도와 그의 은총 행동 고난 그리고 공로를 예표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또한 어떤 부분은 도덕적 의무에 관한 여러 가지 교훈이 있다. 모든 의식에 관한 율법은 신약 성서 시대에 있어서는 폐기되었다”(갈 2:4; 골 2:14, 16, 17; 단 9:27; 엡 2:15, 16. 히 7-10장; 막 7:18, 19).

그러므로 실체가 아직 오지 않은 상황에서 옛 언약 하에서 살던 하나님의 백성은 장차 올 좋은 것들의 그림자(히 10:1)인 상징적인 예언, 유형, 의식을 통해서만 그리스도를 알았다.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그분과 더불어 새 언약의 계시가 임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는 데 있어 그러한 그림자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 이런 것들은 과거에는 본질적인 것이라고 생각되었을는지 모르나 이제는 더 이상 불필요한 것이 되었다. 적극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충분한 중보자로 계시되고, 옛 언약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가 되었기 때문이다(롬 10:4; 갈 3:24). 십일조가 의식법에 속하는 것이고 의식법이 분명하게 폐지되었다면 다른 교리와 마찬가지로 십일조도 구속사의 흐름 속에서 이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의 역사적인 흐름을 추적하면서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할 것이다(cf. 행 15:5, 10).

구속사의 절정이요 완성인 예수님의 오심으로써 하나님의 통일적인 계획과 연속성 속에서 거대한 불연속성이 생겨났다. 하나님의 일관성 있는 목적과 사역에서 진리의 통일성을 다루면서 미크(James Meek)는 그의 신학석사 학위 논문에서 유형론의 패턴에 나타난 이 일관성과 관련하여 이렇게 지적했다. “(구속사에서 하나님의 사역의 패턴들 간의) 이러한 유사성들이 장차 올 것에 관하여 분명하게 예언하지는 않았지만 과거에 속한 것들에 나타난 패턴이 장차 올 것 안에서 성취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구속사에서 하나님의 목적의 작용은 각각의 시대가 그 시대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일 단락이 되면서, 그 다음 시대는 이 전에 있던 것보다 한 걸음 더 발전한다.”

이 지적에 따르면, 이전 시대에 속한 의식법은 그것이 시행되던 시대에 국한되거나 잠정적인 특성을 지니며, 그것 자체에는 완전케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cf. 히 10:1).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령께서 친히 의식법을 대신할 더 좋은 것을 증거하신 것이다. 이전의 모든 의식법의 부족한 것을 완전케 하고, 잠정적인 것을 영원한 것으로 바꾸기 위해 예수께서 자신을 드리셨다(히 10:16, 17; 렘 31:33, 34). 첫 (의식)법은 낡아지는 것이요 없어질 것이며(히 8:7, 13), 약하고 무용한 것이기 때문에(히 7:18), 그것은 새로운 질서가 오기 전까지만 적용되는 법이다(히 9:10). 이제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외적인 규정은 더 이상 소용이 없게 되었으며, 제하여지며(히 7:18; 10:5-7), 그리스도의 완전한 희생 제물과 두 번째 언약이 이를 대신하게 되었다(히 10:9).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외적인(또는 형식적인) 율법들은 내적인 율법으로 바뀌었다(히 8:10; 10:16; 렘 31:33, 34).

이러한 원리에 따라 시편 기자는 의식적인 율법과 도덕적인 율법 간의 차이를 잘 파악하면서 그들이 매일 드리는 제사를 대신하여 “한 몸을 드리실” 분의 오심을 대망하였다(시 40:6-8; 51:16-19; cf. 삼상 15:22과 렘 7:22-23). 시편 기자의 말은 어떤 것의 폐지와 다른 것의 출현 및 계속을 예상하였으며,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전 것을 폐지하고 온전한 것을 가져오신 분이신 것을 지적한다(히 10:6-7).

그래서 구약의 유형을 해석하면서 이에 대한 신약의 원형과의 관계는 그것이 등장하는 구속사적인 맥락에서 연구해야 하며, 구속사에서 그것이 등장하는 독특한 시기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에 비추어 해석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보스(Gerhardus Vos)가 지적한 것처럼, “상징화된 것들과 유형에 의해 예표된 것들은 다른 것들이 아니다. 이 둘은 실제로 동일한 것들이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구원의 발전 단계에서 낮은 단계에서 왔다는 것이고, 다시 나중 시기에서 보다 높은 단계로 등장한다는 것뿐이다.”

갈라디아서 4:3과 골로새서 2:20에서 바울은 의식법을 “초등학문”(first rudiments of the world) 또는 “세상의 기본적인 원리”(basic principles of the world)라고 명명하였다. 그러므로 앞에 고찰한 바에 의하면, 유형화된 것이나 또 이전 시대에 속한 것만을 가지고는 어떤 교리를 세우는 데 사용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유형이 미래에 대해 불확실한 지침인 것처럼, 그것은 교리를 세우는 데에도 불확실한 지침서인 것이다. 유형은 반드시 원형(또는 대형), 즉 신약에 비추어 해석해야 한다. 이것을 근거로 필자는 다음 장에서 십일조 본문을 주해할 것이다. 또한 본 주해는 옛 언약과 새 언약간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패턴을 염두에 둘 것이다.


III. 십일조에 관한 본문 탐구


A. 구약의 자료

1. 창세기 14:18-20

창세기 14:18-20은 “십일조”가 처음으로 언급된 본문이다. 아브라함이 전쟁으로 포로가 된 조카 롯을 구출하고 돌아오는 길에 발생한 사건이 본문의 배경이다. 아브라함은 개선의 귀향길에 소돔 왕과 멜기세덱을 동시에 만났다. 멜기세덱의 존재는 신비였고 심지어 그가 왕으로 있는 “살렘”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도 모호하다.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승리하여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맞았고 그에게 축복하였다. 이에 대해 아브라함은 전리품 중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바쳐 그의 호의에 보답한다는 내용이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은 율법 이전에 있었던 십일조 제도 때문이 아니라, 당시 성소나 왕에게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이 고대에 널리 퍼졌던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의 승리자가 전리품을 다 가질 수 있었던 것이 관례였고 아브라함도 그럴 수가 있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제사장이요 왕인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드림으로써 멜기세덱이 선포한 축복과 하나님을 찬양한 것을 암묵리에 받아들이고 그의 제사장과 왕으로서의 위엄을 인정한 것이다. 또한 이것은 어쩌면 창세기 12:1-3에 언급된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라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일 것이다.

그 후 멜기세덱에게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준 아브라함은 전리품의 나머지 부분을 소돔 왕에게 주었다(창 14:21-24). 이 나머지를 소돔 왕에게 준 것과 처음 것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준 것은 같은 종류의 주는 행위가 아니다. 사실 여기서 멜기세덱과 관련하여 강조된 것은 멜기세덱이 가지고 있던 왕 됨과 제사장 됨이다.

왕으로서 멜기세덱은 후에 등장할 다윗 왕조의 원형이요(시 110편) 선구자였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복 빎을 받고 그에게 십분의 일을 바친 것은 예루살렘과 다윗 왕조인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인정하고 거기에 자신을 복종시킨 것을 암시한다.

제사장으로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이 십분의 일을 바침으로써 멜기세덱이 보유하고 있는 성소를 인정한 것이 된다. 그가 드린 십분의 일은 당대에 유행하던 성소에 드리던 정기적인 공물 또는 조세였음이 분명하고, 이것은 그 후 이스라엘 농부가 가나안 땅을 사용한 대가로 십분의 일을 바치던 풍습의 기원을 설명하는 것일 수 있다. 이러한 행위는 아브라함이 그가 믿던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멜기세덱이 보유하고 있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의 자격을 연결하는 것임을 암시한다.

특히 멜기세덱이 지니고 있던 제사장 직이 그 후에 나타날 완전한 제사장 직과 관련하여 본문의 의미를 밝혀준 본문은 히브리서 7:1-9이다. 히브리서 7:1-9은 창세기 14:18-20을 해석하면서, 십일조를 드리고 받은 예에서, “의의 왕”이며 “평강의 왕”인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린 아브라함으로 인해 아브라함이나 레위인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으므로, 멜기세덱은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구약을 지배하였던 제사 제도를 주관했던 레위인보다 더 크시고 위대하다는 것을 주장한다. 설령 아브라함의 후손들 중 제사장들이 백성들에게 십일조를 받는다 하더라도 그들은 아브라함의 본으로 말미암아 그들보다 높으신 또 다른 분에게 십분의 일을 드리고 그분에게서 복 빎을 받았다는 전례를 남긴 것이다.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제사장이시다. 롱게네커(Richard Longenecker)는 본문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지적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율법과 혈통과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인물에 근거한 영원한 제사장 직의 선례와 원형으로서 멜기세덱을 답변확정하였다.” 그리고, 히브리서 저자는 선례와 원형을 확정하고 난 후 이런 용어로써 예수님의 대제사장 되심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후대의 관점에서 볼 때 창세기 14장은 사실 예수님이 어떻게 아브라함보다 높으신 분인지를 알려주는 말씀이다.

이런 과정에 비추어 볼 때 창세기 14:18-20은 어떤 의미에서 십일조를 언급한 성경의 다른 본문과 상당히 다르다. 첫째, 본문의 십일조는 구약의 다른 본문의 땅에서 나는 소출이 아니라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과 관련되었다(히 7:2, 4).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 후에 십분의 일을 반복해서 드렸다는 언급이 없고, 그 때 그 행위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장차 오실 메시아의 모형인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높으신 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이다.

둘째, 본문의 상황이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자진해서, 그가 주도권을 잡고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드렸다. 어떤 종교적인 의무가 아니라 당대의 문화 또는 풍습에 따라 드린 것이다. 본문은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이 소득의 10%로 드리는 표준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고대에서 자기 소유의 십분의 일이 제의와 정부 유지를 위해 바치는 고대의 널리 퍼져 있던 풍습 때문이었다. 이런 식의 풍습은 당시 가나안, 페니키아, 아랍, 카르타고 그리고 리디아에서 실행되었으며, 헬라인들과 로마인들도 관례적으로 전쟁의 전리품 중에서 십분의 일을 기증하였다.


2. 창세기 28:20-22

성경에 두 번째로 등장하는 십일조에 대한 언급은 창세기 28:20-22이다. 본문은 야곱이 하란으로 피난을 가면서 하나님께 단을 쌓고 맹세한 내용이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피난 생활 동안 자신과 함께 해주신다면 하나님을 자신의 개인적인 신(또는 하나님)으로 삼겠으며, 그분께 예배하겠다고 맹세하였다(21절). 또한 야곱은 만일 하나님께서 훗날 자신을 건강하고 갑부가 되게 하여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자기가 얻은 재물에서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하였다(22절).

여기서도 야곱에게는 십일조를 바치는 데 어떠한 종교적인 의무도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직까지는 십일조 제도의 종교적인 제도가 확립되지 않았다. 야곱의 말 속에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부과한 의무를 수행해야한다는 생각에서 십분의 일을 바치겠다는 암시가 전혀 없다. 그는 단지 자원해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음식과 의복을 주어) 보호하고 여행 중에 지켜 무사히 귀환하게 하는 등 자기에게 은총을 베풀 경우 그가 여호와를 자기의 하나님으로 삼고 지금 그가 있는 곳을 하나님의 집으로 여기겠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것 가운데 십분의 일을 드리겠다고 맹세한 것이다.24)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에게서 본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과 제의와의 연결을 본다.

야곱이 한 맹세의 성취와 관련하여 우리는 창세기 35:7에서 야곱이 제단을 쌓았다는 것에서 배울 수 있다. 카일과 델리취(Keil and Delitsch)는 “야곱이 하나님께 십일조도 드렸을 것이라”고 제안하지만, 우리로서는 야곱이 여러 다양한 종류의 가축과 생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맹세한 약속을 어떻게 성취할 수 있었으며, 정말 성취했는지 알 길이 없다. 적어도, 창세기를 기록한 저자는 이 부분에 대해 침묵한다. 즉, 십일조 법칙 여부가 그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뜻이다. 사실, 성경 어디에서도 야곱이 전에 맹세한 대로 십일조를 바쳤다든가, 그렇게 하려고 어떤 절차를 밟았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 게다가 이 후에 하나님께서 야곱이 한 약속의 말을 꼬투리 잡아 십일조를 했는지 또는 십일조를 바치기를 요구하였다는 암시를 전혀 찾을 수 없다. 또한, 구약에서는 야곱이 한 말을 근거로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 십일조를 주장하거나 야곱 시대에 십일조 제도가 존재했다고 가르치는 근거를 삼는 본문이 없다.

그로부터 400년이 지나서야 십일조 체계가 모세 율법에 등장하고, 그것도 한 나라 전체가 공동으로 생활하던 시기에 접어들면서, 많은 지파들이 땅의 소산을 얻을 수 없는 특정 지파의 생활을 지지하기 위해 다른 의식법이나 시민법과 함께 주어지는 모세 율법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모세 율법에 십일조가 언급된 곳은 레위기 27:30-33, 민수기 18:21-32, 신명기 12:4-19, 14:22-29과 26:12이다.


3. 레위기 27:30-33

레위기 27:30-33에는 곡식과 가축의 십분의 일을 “거룩한 것”으로 따로 떼어 놓으라는 명령이 있다. “여호와에게 속하였다”는 것이 그 근거이다. 여기에는 동물의 십분의 일도 포함되었는데, 바치는 사람이 자기 임의대로 선발하지 못하도록 막대기 밑을 통과하는 가축의 열 번째를 바치게 했다. 그것을 어기는 사람에게는 벌금으로 20%까지 바치도록 하였다. 콜스(Cowles)는 본문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이 본문은 여호와께서 짐승의 초 태생과 관련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신 또 다른 계명에 연이어 등장한다(예를 들어 출애굽기 13:2, 12-15; 22:22, 29-30; 34:19; 레위기 27:6; 민수기 3:13; 8:16, 17; 18:15; 신명기 15:19; 누가복음 2:3). 이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에게 속한 것으로 여겨야 하는 것들이다. 만일, 십일조 계명이 오늘날도 구속력이 있는 말씀이라면 왜 가축의 모든 초 태생을 여호와에게 돌려야 한다는 계명에 대해서는 주의를 하지 않는가? 두 계명이 동시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두 계명 모두 같은 근거로 하나님께 바칠 것을 요구하는 계명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레위기 27장의 문맥에서 십일조는 이스라엘의 모든 개인에게 부과된 일반적인 십일조가 아니라 어떤 계층, 예를 들어 땅 주인들에게만 부과된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흥미로운 것은 십일조가 땅 주인의 순수 수입의 십일조가 아니라 전체 추수한 분량의 십일조라는 점이다. 이것은 이 땅이 원래 하나님의 것이며 이스라엘은 그 땅에서 일하는 품꾼이었다는 전제에서 주어진 명령이다. 하나님께서는 레위기 25장에서 이 부분을 분명하게 언급하셨다.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레 25:23).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품꾼이 됨이라”(레 25:55). 그래서 레위기에 각종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일에 대한 규정이 제시된 후 본문에서는 가나안 땅에서 나는 것(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심지어 소나 양이라도)은 십분의 일 분량을 하나님께서 의당 받으셔야 하는 것으로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십분의 일은 이 땅을 빌려 쓴 대가로 지불하는 토지 사용료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4. 민수기 18:21-32

민수기 18:21-32에는 십일조의 의미가 무엇이며, 이스라엘의 십일조가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주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명기되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레위인에게 친히 주시는 기업이다(20, 21절). 제사장은 배제되고 레위인이 이스라엘의 모든 십일조를 받는 유일한 사람들이다.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민 18:21). 이것은 다른 지파들에게 땅을 기업으로 주는 대신 아론의 후손들은 이스라엘 땅에서 기업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분깃과 기업으로서 “여호와께 속한 것”을 받게 되리라는 것이다(민 18:20). 다시 레위인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받은 것의 십의 일을 여호와께 예물로 드려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낸 십일조의 십일조인 셈이다.

주의 것을 드리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고 십일조를 받는 레위인도 “주의 것”을 받았기 때문에 다시 주께 돌려드린다는 표로 받은 십일조의 십분의 일을 아론 제사장에게 돌려드려야 했다. 당연히 십분의 일의 십분의 일은 아론 제사장의 기업인 셈이다.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받는 모든 것의 십일조 중에서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고 여호와께 드린 그 거제물은 제사장 아론에게로 돌리되”(18:28). 이 최종 십분의 일은 “아름다운 것, 곧 거룩한 것”으로 여겨졌다(민 18:29. cf. 민 18:12-13). 그리고 남은 십분의 구(아홉)는 성막이나 성전에서 봉사하는 직원들인 레위인에게 주어야 한다(18:30). 말하자면, 밭에서 나는 소출이 없는 레위인이 회막에서 일한 대가(보수)인 셈이다(민 18:31).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린 것을 하나님께서 다시 레위인에게 주신 기업으로 표현된, 농산물의 십분의 일을 구별해 드리는 제도를 통해 땅이 없거나 땅에서 나는 곡식을 얻지 못하는 레위인은 공동체의 보호에 맡겨졌던 것이다.

민수기 본문은 레위기 27장 본문과 달리 십일조 규정을 농산물에만 한정한다(18:27, 30). 이 십일조는 제사장들을 위한 예물과는 달리 어디서든지 먹을 수 있었다(18:31). 하지만 레위기 18장과 민수기 27장 본문에서 십일조에 대해 가르치는 공통된 내용은 그것이 레위인의 생계유지를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단순한 구제가 아니라 레위인과 나누는 교제였다.


5. 신명기 12:4-19

신명기에서는 십일조에 대해 다른 관점이 강조되고 있다. 본문은 가나안 여러 족속들이 여기 저기 아무 곳에서나 제단을 쌓는 것과는 달리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한 곳을 정하여 그곳에서 제물을 드려야 하는 예배의 중앙화 문제를 다루는 12장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십일조를 비롯하여 여러 제물들을 드릴 때 모이는 중앙 장소가 있었다. 백성들은 모두 그곳으로 가서 거기서 십일조 음식을 먹어야 했다(신 12:5-7). 본문은 영원한 예배 장소에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어야 하는 성스러운 식사를 강조한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지정한 장소에서 레위인과 함께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와 네 우양의 처음 낳은 것과 너의 서원을 갚는 예물과 너의 낙헌 예물과 네 손의 거제물”을 먹어야 했다. 여기에 열거된 예물들은 원칙상 자기 고향이나 집안이나 다른 어느 곳에서 먹어 없애서는 안 되는 것들이다(신 12:17, 18).

신명기 본문에서도 십일조는 농산물에 한정하고, 다른 소득이나 재산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이것은 당대의 십일조가 식료품과 관련되어 있고, 그것도 백성들이 아니고는 달리 식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레위인을 생각하라는 의미가 더 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너는 삼가서 네 땅에 거하는 동안에 레위인을 저버리지 말지니라”(신 12:19). 이렇게 공동 식사를 하면서, 그들이 그것을 짐으로 여기지 않고 기쁘게 한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는 네 자녀와 노비와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함께 그것을 먹고 또 네 손으로 수고한 모든 일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는 말씀 때문이다(신 12:18). 레위인과 아울러 언급된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지위가 낮고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다. 추수의 당사자만 추수한 것으로 즐거워하지 말고, 주변 사람들과 그것을 나누어 함께 즐거워하라는 말씀이다. 소출의 십분의 일 사용은 이런 사람들과의 나눔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 신명기 14:22-29; 26:12-15

신명기 14:22-29에서는 신명기 12장에 언급된 규율이 다시금 강조되었다. 아주 오래 전에 실시된 풍습인 농산물의 십분의 일을 내는 것이 일종의 제사였기 때문에 그것을 중앙 성소로 가져와야 했던 것이다. 중앙 성소로부터 먼 곳에 사는 사람들은 소비할 곡식들을 돈으로 바꾸되 반드시 그 액수에 해당하는 음식물을 하나님께서 지정한 장소에서 다 소비해야 하며, 그것도 자기 가족만을 위해 소비하지 말고 소득이 없는 레위인과 함께 그리해야 했다(14:27, 29). 레위인이 분깃이 없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이며(14:23),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것을 즐거워하는 길이다. “무릇 네 마음에 좋아하는 것을 그 돈으로 사되 우양이나 포도주나 독주 등 무릇 네 마음에 원하는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네 성읍에 거하는 레위인은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니 또한 저버리지 말지니라”(신 14:26-27). 그렇다면 십일조는 처음부터 열한 지파가 레위 지파에 속한 사람들 여러 명을 먹여 살리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십일조를 받은 중앙 성소의 책임자들은 레위 지파에 속한 사람들 모두에게 균등하게, 골고루 나누어 주어야 했다.

이런 풍습은 매 삼년마다 소위 “불쌍한 사람들”의 먹을 것 공급을 위해 추수의 십분의 일을 사용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이들 중에는 레위인, 나그네, 아버지가 없는 아이들(고아), 남편이 없는 여자들(과부들)이 해당되었다. 이런 십일조는 성소로 가져가지 않고 자기 마을에서 소비하였다(14:28). 여기 열거된 3년 차 십일조 수혜자들은 사회보장의 형식으로 공동체에서 복지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다.

이런 유의 십일조에 대해서는 신명기 26:12-15에 보다 자세하게 명기되었다. 삼년마다 같은 마을에 사는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그 해 소득의 십분의 일을 사용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다 지키었다”고 선언하였다(신 26:14-15). 성소가 아니라 자기가 사는 지역에서 선언하였는데, 추측컨대 자기 집에서 이러한 선언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선언에는 세 가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첫째 자기가 삼년마다 드리는 십일조와 관련된 율법을 성취했다는 것(26:13b, 14b), 둘째 그 십일조를 죽은 자에게 주지 않았다는 것(26:14b), 그리고 셋째 이스라엘과 가나안 땅에 복을 주실 것(26:15) 등이다. 특히 14절에 언급된 십일조를 죽은 자에게 주지 않았다는 고백의 내용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일치된 의견이 없지만, 이것이 의식상 정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드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리킨다는 폰라트의 제안이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된다(cf. 호 9:24; 학 2:13).

여기서 신명기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은 십일조를 드림으로써 율법을 성취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십일조를 드리는 자는 토지와 관련하여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 실천 등 자기의 의무를 다한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써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관계가 올바르다는 것이 증명되며, 그가 하나님과 한 약속을 지킴으로써 하나님께서 그가 드린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요약하자면, 모세오경에는 몇 가지 다른 십일조에 대한 언급이 있다. 레위기에서는 십일조가 곡식과 가축을 포함하는 반면, 민수기와 신명기에서는 십일조가 밭에서 생산되는 것에 국한되었다. 하지만 두 경우 모두 부분으로서 전체를 대표한다는 원리(pars pro toto)가 적용되었다. 그가 자기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땅에서 농사지어 주인에게 돌려준다는 것과 십일조는 땅의 기업을 받지 못한 사람이나 땅은 있어도 그곳에서 나는 소출을 먹지 못하는 사람들(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을 그들에게 주어 나누어 먹는 다는 의미가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나눔을 통해 더불어 사는 행위의 실천을 의미했다.

특히, 신명기의 문맥에서는 이스라엘은 십일조를 여호와께 드려 가난한 자들과 함께 먹어 소비하는 것으로써 여호와를 경외하는 법을 배웠다(신 14:2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들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라셨다(신 8:2, 11, 14, 18; 12:6, 12, 18; 14:23; 16:3; 26:10, 13-15).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로서 그들이 행할 행동 중의 하나였다(신 14:2, 21; 26:18; 27:9, 10; 28:9, 10).


7. 모세오경 이외의 자료들

모세오경 이외에 십일조가 언급된 곳은 사무엘상 8:15, 17; 역대하 31:5, 6, 12; 느헤미야 10:37, 38; 12:44-47; 13:5, 12; 아모스 4:4; 말라기 3:8-10이다. 이 본문들은 율법으로 주어진 십일조에 대한 교훈이 실제로 가나안 땅에서 삶을 사는 이스라엘의 구체적인 삶에서 어떻게 시행되었는지를 알려주는 본문들이다.


ㄱ. 사무엘상 8:15, 17

사무엘상 8장은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갖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 백성들을 경고하는 본문이다.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왕이 등극하게 되면 왕은 백성에게서 땅의 소산물과 가축 중에서 십분의 일을 취할 것이라고 왕권 제도를 도입하게 될 경우에 발생할 수 있는 백성들이 과중한 세금으로 인해 당하게 되는 부담을 설명한다. 사무엘이 지적한 왕이 백성들에게서 거두어들이는 십분의 일은 고대 여러 나라들 중에서 관례화되어 있던 부가적인 시민 세에 관해 언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할 필요도 없이 이것은 모세오경에서 레위인이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는 십일조와 아무 관계도 없을뿐더러 종교적인 의미도 지니지 않았고 오히려 창세기 14장의 경우처럼 정치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이해된다.


ㄴ. 역대하 31:5, 6, 12

역대하 31장은 히스기야 왕의 종교개혁을 언급하고 있다. 유대 왕 히스기야는 오랫동안 사람들에게서 잊혀져 왔던 제사장들과 레위인을 섬기고 생활을 지지해주는 것과 관련하여 개혁을 감행하였다(2-4절). 이런 개혁은 새로울 것이 없고 전부터 있어왔던 것을 회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예를 들어 레위기 27장; 민수기 18:20-32; 신 12:15, 16; 14:24), 상당한 기간 백성들은 레위인을 비롯하여 가난한 자 돕는 것을 잊고 지냈다. 백성들은 히스기야의 요구에 따라 곡식의 십일조를 풍성히 가져왔고 레위인에게 이것을 나누어 주었다(31:11-19). 이에 대해 제사장 아사랴가 “우리가 족하게 먹었으나 남은 것이 많다”(31:10)고 말한 것으로 보아 그들이 그 전에 가난에 허덕였다는 것과 십일조가 생계비와 관련된 것을 알 수 있다. 백성들은 적어도 이 시점에서 제사장들이나 레위인들이 먹고 남음이 있을 정도로(5, 10절) 그들의 소산의 십분의 일을 가져왔다.


ㄷ. 느헤미야 10:37-39; 12:44-47; 13:5, 12

위의 본문들은 앞서 언급된 십일조와 다른 유의 십일조의 내용을 소개한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느헤미야는 레위인과 제사장들에게 백성들이 예물로 드리는 밭의 소산물을 받고 십일조의 십분의 일을 여호와의 집(성전)에 갖다 놓으라고 명령한다. 백성들이 포로 귀환 후 이 의무를 잊거나 무시했기 때문에 제사장들을 비롯하여 레위인에게 스스로 십일조를 거두어 그 중의 십분의 일을 다른 여러 예물들(헌물들)을 받아 넣어두는 곳간에 두어 레위인과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생계를 지원하도록 하였다(느 10:37-39). 그 곳간을 성전 옆에 두어 십일조의 사용이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의 생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소비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거두어들인 십분의 일 중의 십분의 일을 성전 창고에 있는 각 방에 두어 백성들이 포로 귀환 후에도 성전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다. 이제 체계적인 십일조와 헌물 관리하는 것을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12:44-47에서는 성전에서 일하는 일꾼들을 위해 율법이 요구한 거제물, 처음 익은 곡식, 십일조 등을 여러 마을에서 수집하여 성전 창고에 쌓으라고 한다.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왜 주어야 하는지도 분명하게 언급되었다. “저희(제사장들과 레위인)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결례의 일을 힘썼으며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도 그러하다”(느 12:45). 민수기 18장의 규정이 여기에 반영되었다.

그러나 포로 후 이런 조처가 있었지만 십일조의 혜택을 받아야 할 레위인은 정작 생계 문제 때문에 성전을 버리고 자기들의 밭으로 도망가는 일이 발생하였다(느 13:10). 그래서 제의가 중단이 되고 하나님의 성전은 관리하는 사람이 없이 방치되었다(느 13:11). 이렇게 된 것은 백성들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것을 관장하던 제사장이 성전 창고에 모아둔 십일조를 횡령했기 때문이었다.

느헤미야 13:7-9은 이런 상황이 발생하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소상히 밝히고 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사람들이 십일조를 내지 않아서가 아니라 십일조를 관리하는 사람들의 횡령과 분배 체제의 문제였다. 당시 엘리아십 제사장과 도비야라는 사람이 서로 공모하여 레위인과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생계를 위해 성전 옆에 마련한 성전 창고에 있던 십일조를 비롯한 식량과 예물들을 자기들의 개인 창고로 옮겨감으로써 그 식량이 바닥났다. 그래서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생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최초로 제사장에 의한 십일조 도적질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말 3:8, 9과 비교). 느헤미야가 이런 잘못을 지적하여 시정되자 다시 레위인의 생계를 위한 십일조가 성전 창고에 쌓이기 시작하였다(느 13:10-13).

이렇게 하여 포로 후기 시대에 와서 이 시대에는 레위인 보호 장치와 같은 십일조가 세금과 같이 정기적으로 드려져 그것이 레위인의 생계를 지원하는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ㄹ. 아모스 4:4

아모스 선지자는 사마리아인들이 자행한 하나님에 대한 배역 행위를 열거하면서 그들이 예전 그들의 성소 자리인 벧엘에서 제의를 행하는데 심지어 그들의 성전 제의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는 전적으로 자기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행동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구체적인 일례로 아모스는 십일조와 관련된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꼬집는다. “삼 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려보려무나”라는 비아냥거리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전혀 융통성이 없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율법주의를 비웃는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종교 의식과 같은 것으로도 복을 받을 수 있다면 더 많은 복을 받기 위해 삼 년마다 행하던 십일조를 삼 일에 한 번씩이라도 하면서 복을 얻으려 하였고, 아모스는 이것을 비꼬았던 것이다.

코울스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들의 악한 생활 때문에 그들이 드리는 십일조가 여호와 앞에 가납되지 않는데도 그들은 십일조를 꼬박 꼬박 드렸다. 그것이 하나님에게 자동적으로 복 받는 비결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설령 그들이 십일조를 드린다고 하더라도 그의 생활이 항상 악하므로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그들은 주장할 수 없었다.” 이렇듯 십일조를 단순한 종교행위와 복을 받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은 명백한 종교적인 타락이다.


ㅁ. 말라기 3:7-12

구약성경에 언급된 십일조와 관련된 마지막 언급은 말라기 3:8-12이다. 본문은 십일조 강조론 자들이 가장 강력하게 지지하고 인용하는 본문이다. 심지어 이 본문을 근거로 복을 받는 비결까지 제시되기도 한다. 이 본문은 특히 말라기 전체의 맥락에서,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3장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 십일조 옹호론자들은 주로 “십일조”라는 용어가 단독적으로 등장하는 9절과 10절만을 인용하는 경향이 있다.

말라기는 백성들이 마땅히 하나님의 것인 “십일조와 예물”을 도적질하였다고 지적하였다(3:8-9). 십일조 옹호론자인 사무엘 영(Samuel Young)은 이 본문을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헛되이 섬기는 맥락에서 이해하면서(말 2:17; 3:14),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스라엘이 십일조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고 드리지 않는 것은 널리 퍼져 있던 전적인 부패였다. 고대에는 드리는 것이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었기 때문이다. 부주의한 드림과 반짝 드리고 마는 것은 헛되고 널리 퍼진 죄악의 증후이다.” 한편 이것은 맞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계속해서 레위인이 사람들에게 잊혀져 왔고 그들은 기업의 땅에서 이무 것도 먹을 수가 없어서 가난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말라기 선지자 역시 백성들에게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 하였다”고 백성들의 양심을 자극하여 죄를 깨닫게 한 듯 보인다(3:7).

그런데 과연 말라기 본문에서 하나님의 책망의 말씀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를 향한 말씀일까? 말라기를 자세히 읽어보면 몇 군데(말 1:2; 3:9) 그 대상이 모호한 것을 제외하고는 말라기의 말씀의 직접적인 대상이 “제사장들”이라는 게 분명하다(1:6; 2:1, 7). 이들은 특히 하나님께서 성전 제의와 관련하여 레위인과 세운 언약을 파기하면서(2:4, 5, 8)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을 더럽힌 사람들이다. 더욱이 그들은 더러운 떡을 드리고(1:7) 병든 짐승들을 제물 삼아 제사를 드림으로써(1:8)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혔다(1:10). 그런데도 이 사실을 몰랐거나 뻔뻔하게 그것이 번폐스러운 것을 피하기 위해 그런 것이라고 이유를 댔다(1:13).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을 저주하시고 그들의 복을 저주하리라는 말씀을 내리신다(2:2). 다시 말해서 말라기 3:8-9의 모호한 표현인 “도적질하다”는 말을 제외하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것을 바치지 않았다고 꾸짖으시지 않는다. 오히려 이사야 1:11-13처럼, 말라기 시대에도 사람들이 하나님께 끊임없이 바치는 일을 행하였다(말 1:8, 10, 14. cf. 3:3, 4). 더욱이 본문은 단지 “십일조”의 문제만이 아니라 의식법의 대표적인 “예물”이 함께 언급된 것으로 보아(말 3:8) 십일조 역시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치는 의식법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제사장들의 문제이다. 계속해서 말라기 2장은 제사장들의 도덕적 부패와 이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의 내용이 담겨 있다.

말라기 3장에는 성전에서 일하는 당사자들의 더러움을 씻기 위해 하나님께서 레위인을 깨끗케 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의로운 제물을 드리게 하실 하나님의 계획이 언급되었다(3:1-3). 3장은 계속해서 이스라엘 사회에서 헌물이 원래 수혜자에게로 돌아가고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였던 사람들에게 심판이 내려질 것을 선포한다(3:4-6). 3:7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즉 회개하라는 요청으로 시작된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십일조와 헌물” 도적질 한 것을 다시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구절 역시 1, 2장에서 제사장들에게 행한 심판 내용의 연속이다. 그들이 2장에서 “저주”의 언도를 받은 것은 하나님의 것, 좀더 구체적으로 십일조와 예물을 도적질한 것임이 밝혀졌다(3:8). 이것은 제사장뿐만 아니라 온 나라가 그리하였다고 과장법을 사용했지만(3:9), 그것이 성전에 있는 창고와 관련이 되었기 때문에 백성들보다는 이 일의 당사자가 성전과 관련이 있는 제사장, 레위인, 지도자들일 가능성이 크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너희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라는 강한 말로써 그들의 죄를 지적하신다. “도적질하다”(qaba)라는 단어는 성경에 자주 사용되는 단어가 아니라서 정확한 의미를 찾기가 쉽지는 않다(cf. 잠 22:23). 몇 가지 이해가 가능한데, “훔치다”(표준새번역; “to take forcibly, defraud,” NEB), “속이다”(공동번역; “to cheat,” Jerusalem Bible), “강탈하다”(to rob, NIV, RSV) 등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자기의 의무를 하지 않은 소극적인 의미를 지니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것을 강제로 빼앗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잠 22:23).46) 이런 의미에서 카일 델리취(Keil-Delitsch)는 본문의 의미를 약화시켰다고 생각된다. “이스라엘은 십일조와 헌물을 전혀 하나님께 드리지 않든지,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을 그리로 넣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것을 훔치려 했다”는 말은 지나치게 소극적인 의미로 본문을 이해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당대의 탓을 일반화시켜 백성들에게 전가한 것으로 본문을 이해한 대표적인 예이다.

소득 없이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생계를 위해 마련된 성전 옆 곡식 창고가 비어 있어 레위인이 가난에 허덕일 정도로 백성들이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종들은 더 이상 생활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들은 사역을 그만두고 자기가 밭을 갈아 생계를 마련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말라기에 언급된 십일조는 헌물(테루마, terumah)과 떼어놓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십일조와 헌물 모두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생활 유지를 위해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출 25:1-7; 레 6:20; 15:17-21; 18:8, 11, 19).

그런데 만일 이것이 백성들의 문제였다면 이처럼 강한 의미를 지닌 “도적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느헤미야 13장의 상황처럼 제사장이 레위인에게 돌아가야 할 창고의 물건을 제사장이 강탈하여 레위인이 성전 제의를 집행하는 데 어려움이 왔을 가능성이 더 많다. 예물과 십일조(민 18:24; 신 12:6, 11, 17; 느 10:37, 39; 12:44; 13:5)는 레위인과 성전 봉사자들에게 주어야 하는 것이고(레 27:30; 민 18:24)와 그 중의 십분의 일을 여호와의 전의 곳간에 쌓아놓아 제사장에게 관리하기를 요구하였었다(느 10:37, 38; 12:44-47; 13:12). 그런데, 느헤미야 때에 제사장 중에서 성전 관리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갈 예물과 십일조를 횡령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레위인들이 자기의 밭으로 도망가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느 13:4-9). 이것이 “도적질 한다”고 표현된 말라기의 문맥에 더 잘 어울린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그의 종들(레위인)과 동일시하셨으며, 그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성전 창고 강탈 행위를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으로 간주하셨던 것이다.

제사장들이 레위인의 몫을 자기들이 챙겼다는 것은 느헤미야에서뿐만 아니라 말라기 전체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실이다. 제사장들은 백성들이 드리는 좋은 헌물을 빼돌리고 흠이 있는 것으로 바꿔치기함으로써 재산을 축적했고(말 1:6-8, 14; 2:2, 14-16; 3:8-11), 동일한 방식으로 그들은 레위인에게 주어야할 성전 창고에 축적되어 있는 것을 착복함으로써 레위인이 의로운 제사 직을 수행하는 데 어려움을 주었다(cf. 말 3:3-6).

말라기 3:10은 십일조가 어떤 종류의 십일조인지를 암시하며 분위기가 느헤미야의 상황과 비슷하다. 본문에 언급된 십일조는 구체적으로 레위인을 비롯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창고에 저장해두어야 하는 십일조이다(cf. 느 10:37-39). 그리고 계속해서 출애굽부터 가나안 정착에 이르는 과거에 내리신 하나님의 복을 회고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으로” 지금도 하나님께서 과연 그들에게 “복을 주시는지 아니 주시는지를 시험해보라”는 말씀을 받는다.

여기서 “그것으로”가 가리키는 것이 무엇일까? 십일조를 가리킬까 아니면 창고에 음식을 넣어두어 필요한 사람이 사용할 수 있게 하라는, 즉 창고의 물건 빼돌리기를 하지 말라는 말씀일까? 문맥상 후자를 가리킨다는 것이 분명하다. 제사장들의 탐욕이 이런 문제를 일으켰다. 밴게메렌은 본문에 담겨 있는 문제가 탐욕, 이기심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 믿지 못함과 불순종이라고 지적하여, 본문의 상황이 제사장들의 문제인 것을 암시하였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은 레위 언약을 어긴 그들(말 2:5)이 신실하신 하나님과의 언약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구체적인 행위는 모든 부분에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기를 꺼려하는 사람들에게 심지어 하나님을 “시험하라”고까지 말씀하신다.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라기 선지자가 본문에서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것은 메시아 오심에 대한 약속이다. 제사장들과 레위인이 흠이 있고 의롭지 못한 예물을 하나님께 가져왔고(말 3:6-8, 13),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받지 않으셨지만(말 1:9-10), 메시아가 오셔서 그들을 깨끗하게 하고 씻으심으로써 의로운 제물을 드리실 것이다(3:3). 그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제물만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3:4), 열국의 제물도 받으시게 될 것이다(1:11. cf. 롬 9;25, 30; 11:11, 12, 25; 15:9-13; 16:26). 과거에 바쳤고 또 지금 말라기 시대에 바쳐지고 있는 헌물과 십일조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완전한 제물을 드리실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받으시는 것이 될 것이다(히 7:21-25; 8:1, 9-14, 23-25; 9:9, 12-14). 우리를 포함하여 만국(이방인)이 온전한 예물을 드릴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또 그분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말 1:11. cf. 3:12).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제사장과 제사 제도를 이해하는 열쇠가 될 뿐만 아니라 바른 헌물과 제물을 이해하는 열쇠이기도 하다.

구약성경에서 가르친 십일조에 대한 교훈을 요약하자면, 구약의 십일조는 그것이 이스라엘의 경륜인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제사장과 레위인과 이웃을 위한 의무인 한 여전히 유효한 것이었다. 구약성경에는 십일조에 대한 각기 다른 기원이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각의 경우를 신약의 상황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남는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구약의 십일조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돕는 것으로써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교훈을 배울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 재산의 일부분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며,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을 높이기 위해 드려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청지기 직의 한 면을 보여준다.


B. 성경 외적인 자료

신, 구약 중간기에 나온 자료들은 그 시대에 유대인들의 드림의 원칙에서 십일조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그러나 그것이 구약 성경과 유사한 것도 있지만 보다 세분화되든지 다른 의도로 빗나간 경우가 많다.

외경 토비트 1:6-9에는 세 종류의 십일조가 언급되어 있다. 제사장에게 드리는 첫 번째 십일조(cf. 민 18:20-32; 유디트 11:13), 예루살렘에서 소비해야 하는 두 번째 십일조(cf. 신 12:6-17; 14:22-27), 그리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한 세 번째 십일조(cf. 신 14:28, 29)가 그것이다. 백성들은 소출의 십일조(유디트 5:13)를 기쁜 마음으로 대제사장에게 드렸다(시락 35:6-11). 그들은 십일조를 거룩한 것으로 생각했다(마카베상 10:31). 십일조가 정치적인 세금과 함께 언급된 경우도 있었다(마카베상 3:49; 11:35). 이렇듯 외경의 십일조에 대한 언급은 구약의 십일조를 그대로 반영하였다.

요세푸스는 그의 책에서 위와 같이 세 종류의 십일조가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십일조는 레위인보다는 제사장들에게로 돌아갔다([고대사] xi,5,8; [아피온 반박문] I, 22; cf. 히 7:5).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는 십일조를 자기나 측근 사람들만 착복하는 바람에 많은 평제사장들은 빈곤에 허덕이거나 심지어 굶어죽는 일까지 있었다.

미쉬나(Mishnah)에 언급된 십일조에 대한 가르침은 마아세롯(Masseroth) 항목에 있는데, 거기서는 이스라엘이 십일조를 드려야할 일반적인 규정이 나열되어 있다. “알리기에 좋고 관상용으로 사용되는 것과 땅에서 자라는 모든 것은 십일조를 할 만한 것이다”(Masseroth 1:1). 이 말은 식사 목적으로 재배되는 모든 생산물은 반드시 십일조를 드려야 된다는 의미이다(1:1이하; 3:9; 4:6).

미쉬나는 가축의 십일조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두 번째 십일조라고 불리는(Masser Sheni 1:2) 가축의 십일조는 이스라엘 백성이 반드시 해야하는 의무 가운데 하나이다(Hagigah 1:4). 그것은 지극히 거룩하므로(Shekalim 1:7; 3:1) 팔거나 다른 것과 교환해서는 안 되었다(Masser Sheni 1:2). 미쉬나의 십일조에 대한 이해가 신약성경에 등장하며,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렸다”(마 23:23; 눅 11:42; 18:12).55) 이것은 바리새파 사람들이 십일조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얼마나 정확하게 십일조 내는 것에 관심을 가졌는지 보여준다.


C. 신약의 자료

신약성경에서는 십일조를 언급하고 있는 본문이 서너 구절밖에 되지 않는다. 마태복음 23:23; 누가복음 11:42; 18:12 그리고 히브리서 7:1-10이 유일한 본문들이다.


1. 복음서(마 23:23; 눅 11:42; 18:12)

공관복음에 기록된 십일조와 관련된 언급은 예수께서 엄격한 십일조를 내는 데 관심이 있지만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를 간과하고 있던 서기관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이 유일하다.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마 23:23a). 그리고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그러나 이것도 해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셨다(23:23b). 이 후반부의 말씀은 신약 시대에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주님의 공인된 말씀으로 이해되고 있다. 본문을 이후 시대에도 이와 똑같이 십일조 생활을 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본문을 올바르게 이해한 것일까?

비숴(Lukas Vischer)가 바르게 관찰하였다시피, “신약 성경 어디에도 해마다 십일조를 드리기를 요구하는 곳이 없다. 그리스도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그분의 제자들도 그런 요구를 알지 못했다.” 마태복음 23장에 언급된 십일조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 십일조를 주장하는 것이라면 왜 예수님과 그의 사도들이 십일조를 실행했다거나 적극적으로 실행하라고 가르친 언급이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본문을 예수께서 랍비들의 성경 해석을 지지하셨고 후대에도 그대로 행하라고 권장한 것이라고 이해해도 좋을까? 아니면 모세 율법에 명기된 십일조를 염두에 두시고 말씀하셨을까? 마태복음 문맥으로 보아서는, 후자(랍비들의 해석과 관련된 언급)가 더 그럴 듯해 보인다. 그 후 계속되는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화의 내용은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와 상관없이 그들의 율법에 대한 해석보다는 랍비들이 가르친 율법 행함과 관련되었기 때문이다(마 23:24이하). 그러므로 마태복음 23:23만으로 너무 성급하게 십일조가 신약 시대에도 신자들에게 부과된 의무 규정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본문의 말씀은 예수께서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바리새인들과 일상생황에서 자행되는 율법주의를 다루고 계신 맥락에서 주신 것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신명기 14:22-23의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드리라는 장로들의 유전(미쉬나)을 정확히 지키기 위해 가장 작은 식물이라도 엄격하게 지키려는 생각에서 채소와 박하와 향료의 십일조까지 하려 하였다. 물론 이것은 율법(특히 신명기 14:22-23)이 요구하거나 율법의 의도에서 벗어나고 과도한 율법 준수에 속하는 것이 틀림없지만 서기관들의 해석에 따르면 그것은 필수적인 것이었으니, 예수님도 그것 자체로서 나쁠 것이 없다고 생각하셨고 그런 행위 자체를 비난하실 의도는 없으셨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그들이 지키는 엄격한 십일조 자체에 대해서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셨다. 엄격하게 십일조를 하는 여부에 관한 것은 예수님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단지, 예수님의 비난의 핵심은 그들의 행위로 인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켰다는 것이다. 그들은 결과적으로 세부적인 것에 대한 이 과도한 열정으로 인해 율법의 더 중요한 것을 간과하였으며 성경에서 좀더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고 가르치는 일은 무시하였다. 그것은 “보다 무거운 것” 즉 “보다 핵심적이고”“가장 결정적인 것,” 또는 주변적이거나 사소한 것에 대해 “더 중요한 것”이었다. 율법이 요구하는 것은 참 종교의 강령인 정의, 자비, 신의 등인데 이것은 자비 또는 이웃 사랑이라는 말로써 요약될 수 있다. 이것은 제의 지킴보다 더 중요하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의 핵심은 유대주의 자체 내에서 더 중요한 것을 간과하는 한 율법의 수 많은 자세한 것을 지키는 행위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바리새주의가 관심을 갖는 세심한 율법주의는 “기껏해야 약간 선심 쓰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 뿐이다.” 이런 종교 행위에는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자비가 발붙일 곳이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여기서 외적인 규정을 폐지하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진정한 내용과 의미가 이러한 모든 규정의 기초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다. 본문 다음에 바로 이어지는 말씀에서 예수께서 지적하셨듯이 바리새인들이 부차적인 것에 집중하고 우선적인 것을 잊고 그것을 행하지 않는 것은 마치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것과 같다(마 23:24). 하루살이와 낙타 둘 다 유대인에게는 부정한 동물이지만, 그들은 부정한 하루살이를 걸러내면서, 하루살이보다 덩치가 훨씬 더 큰 부정한 동물인 낙타를 삼키는 모순을 저질렀던 것이다(레 11:4).

이런 의미에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는 지적은 예수께서 정말 두 가지를 실행할 것을 권하였느냐의 여부에 대한 문제 또는 예수께서 구약과 예수님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문제에 우리의 관심을 돌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 안에 있는 자료의 “상대적인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카슨은 이 말 속에 예수님은 바리새인으로서 마땅히 행했어야 하는 것-정의 자비 신의-을 서술하시는 것뿐이지(Jesus describes what the Pharisees should have done-justice, mercy and faithfulness), “저것도”로써 바리새파 사람들이 어떤 것이든 십일조를 꼬박꼬박 내듯이 엄격하게 십일조를 낼 것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말하자면 이것은 언어의 표현 방식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의도는 뱅크스(Banks)가 잘 요약하였듯이 “너희가 하고 싶다면 그런 사사로운 규칙들을 지켜라. 하지만 정말 문제시되는 것들을 간과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것도 버리지 말라”는 것을 그대로 취한다면 예수님은 율법주의, 엄격한 십일조를 인정하시는 것이 된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단지 엄격한 십일조 준수와 자비를 요구하는 율법 사이에 어떤 모순이 있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는 말씀이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심지어 가장 작은 식물에까지 십일조를 하기를 원한다면 잘 하는 짓이고 좋은 일이지만, 동시에 율법의 가장 중요한 것들 즉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복지에도 관심을 기울이라”는 의도가 내포된 말씀이다. 서기관들이 생각하는 사소한 것들은 그것이 원리와 상충만 되지 않는다면 그들이 관심을 가지고 하는 행동은 정당성이 인정된다. 당대의 신학자로서 서기관과 그들이 만든 신학에 따라 생활 속에 율법을 그대로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들인 바리새파 사람들은 가벼운 것(즉 사소한 것)에 목숨 걸었다. 그러나 이런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공의를 간과하였다. 십일조를 비롯하여 율법이 요구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과 이웃 사랑, 즉 구제라고 한다면 속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는 것이 주님의 의도이다(눅 11:41). 결국 슈바이저가 잘 지적하였듯이 “십일조를 지켜야 한다는 명제는 제거된다.”

이와 같은 마태복음의 중심 사상은 누가복음에서도 다르지 않다. 마태복음과 동일한 말씀이 누가복음 11:42에도 나오는데, 마샬은 마태의 문맥과 누가의 문맥의 다름을 직시한다. “마태는 신학자인 서기관과 율법 실행자인 바리새인 모두를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한 반면 누가는 실행자인 바리새인만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십일조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마땅히 행해야 할 것과 (덜 중요하지만) 실제로 행하고 있는 것 사이의 대조”인 것이다.

특히 예수님은 누가복음 18:12, 14에서 바리새인이 자기가 “십일조를 엄격하게 하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믿는 것의 허점을 지적하셨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의 행위가 조금도 의롭지 않았다. 그런데도 예수께서 당장에 십일조 행위를 금하거나 그것을 폐하지 않은 이유가 어디 있을까?

마샬은 바리새인들의 정결 예법을 분명히 파기하신 예수께서 십일조 율법을 이런 식으로 견지하지는 않으셨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정결 예법에 관한 구전(장로의 유전)을 거부한 것과 이웃 사랑과 같은 인간애를 목적으로 하는 구약의 십일조 원리를 견지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단커(Danker)는 신약 계시의 흐름을 보다 폭넓게 이해하면서 다음과 같이 쓴다. “누가가 이 글을 여기에 언급한 것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조상의 풍습을 행하지만,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그 점에 있어 자유로웠으며(행 15장),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는 갈라디아서 2:10은 의식적이든 아니든 간에 일반적인 관심사로서 가난한 자는 모든 사람들이 책임을 가지고 도와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서였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는 신약 교회에게는 유대인들에게 요구하던 십일조가 적용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cf. 약 1:27).

이런 의미에서 이 본문은 신약 시대가 아니라 구약 시대의 맥락에서 예수께서 십일조에 대해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의 구속 사역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시점에 있고, 여전히 구약의 엄격한 요구들이 유효한 시기에, 바리새파 사람들이 십일조를 드리는 데 충실해야 한다는 것은 옳다. 십일조는 의식법적인 문제이고, 그 당시 모세 율법의 명령들은 유행하고 있었다. 성전 예배도 진행 중이었으며, 제사장들과 레위인은 그들의 생활 유지를 위해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치는 십일조에 의존하고 그것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십일조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구속 사역이 완성되기 전에 하신 그분의 다른 비슷한 말씀에 비추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가나안 여인에게 자신은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에게만 보내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을 때(마 15:24. cf. 롬 15:8), 그분은 구약 시대의 용어로써 말씀하신 것이다. 신약 시대에는 복음의 우주성(보편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구 시대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요 3:16; 롬 9:25, 30; 11:11, 12, 25; 15:9-13; 16:26).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에는 당시 옛 언약이 여전히 유효하고 사람들 사이에 보편화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cf. 히 9:15-17). 예수님의 사역은 “때가 찼다”는 선언과 함께 새 시대의 도래를 선언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으나(막 1:15), 옛 시대로부터 새 시대로의 실제적인 전환점은 그분의 죽으심, 부활, 승천,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써 분명하게 표현되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요 19:30). 옛 언약자의 죽으심이 새 언약을 유효하게 만든 것이다(히 9:17). 우리는 유월절 어린양 되신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기 때문에 새로운 떡덩이가 되었다(고전 5:7). 구약 성경의 가장 아름다운 성취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 이후 오신 오순절 성령 강림이다(행 2:1-4. cf. 1:4, 5, 8. 이 본문을 요한복음 14:16, 17, 26; 15:26; 16:7-13과 비교해보라). 성령께서 오신 것과 예수께서 실제로 영광을 받으신 것은 그분의 죽으심으로써 가능하였다(요 12:16, 23; 13:31, 32; 17:1에는 예수님의 죽으심이 영광을 받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죽으시기 전에는 자신을 (의식법을 비롯한) 율법의 규정에 복종하셨으며(갈 4:4), 그분의 가르침 중 많은 부분은 구약의 요구의 정당성을 지지하면서, 구약 시대의 문맥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특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와 비슷한 부탁을 하신 것도 구약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마 10:6). 그래서 십일조와 같은 의식법과 관련된 언급들은 새 언약에서는 반드시 적용될 것은 아닌 것이다.

더욱이 “십일조가 신약의 어디에서도 폐하여지지 않았다”는 주장을 할 때 생각해야 할 것은 동일한 것이 안식일과 제사 제도에 대해서도 그러하다는 사실이다. 성경에서 명확하게 “폐지되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의 폐지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거나, 십일조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그런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다. 같은 원리로 십일조와 관련해서는, 위에 언급한 예들과는 별도로 또한 어느 곳에서도 십일조를 의무적으로 드려야 한다고 신약에서 요구한 곳이 없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구약의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 상황(성직자, 가난한 자 구제 등등)과 관련하여 신약 성경은 다른 면에서 그들을 생각할 것을 가르친다. 이것은 특히 바울에 교회에게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연보할 것을 부탁한 것과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하다. Dictionary of the Apostolic Church에 “Tithe” 논문을 기고한 저자 윌리스(Willis)는 이렇게 주장한다. “사도들과 그 직계 후계자들 시대에는 기독교회 내에 거룩한 목적을 위해 바치는 소유의 십분의 일 또는 십일조가 행해지지 않았다는 것은 보편적으로 인정되었다.” 비숴는 이에 동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들(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지금까지 지녀왔던 것보다도 고상한 삶의 기준이 있었고 그것을 가장 깊은 도덕적 영적 상황에 옮겨놓았다. ‘완전한 율법’(약 1:25), ‘자유케 하는 율법’이 어느 곳에서나 지배하였으며(갈 5;1, 13; 벧전 2:16; 요 8:32 등등), 하나님의 다른 은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기쁨의 자유함은 신약 교훈의 특징이었다. 그들은 형제에 대한 사랑과 도덕적 의무를 의식하고 있다는 표현으로 삶을 살았다.”


2. 바울 서신

바울 서신에는 “십일조”라는 용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헌금과 관련하여 사도 가운데 가장 교훈을 많이 내린 사람은 바울이다. 바울은 물질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문제(고전 16:1-3; 고후 8-9장; 엡 4:28)와 기독교 사역자들의 생활 지지와 관련하여 사용하는 문제를 언급하였다(고전 9:9-11. cf. 딤전 5:1-18; 갈 6:6). 이 두 부류의 사람을 위해 자기 수입의 얼마를 떼어 그들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일은 권할 만한 일이고 좋은 일이며, 바울은 이런 일을 할 때 넉넉하게 하라고 권하였지만(고후 9:6; 8:1-5), 그는 결코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를 하라고 제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바울은 복음 전하는 자로서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전 9:14)는 사실을 지적했으나, 정작 자신은 교회에 그것이 교회가 당연히 해야 할 의무라고 요구하지 않고(고전 9:15, 18), 자비량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5:18에서 감독이 복음을 전하면서 수고비를 받아야 할 것을 언급했지만 구약의 기업이 없던 레위인들이 하던 방식이 아니라 개략적으로만 언급하였다.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또한 바울 사도는 가난한 자를 교회가 생각하고 도와주어야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예루살렘의 가난한 교회를 돕기 위해 사용되는 돈을 수집하기 위해 오래 전에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지방(특히 고린도)에 알리고 그들이 가난한 자들을 생각할 것을 호소하였지만 어떤 구체적인 방법이 있어 그대로 따를 것을 지시하지는 않았다(롬 15:25-27). 그는 한 두 차례 그가 이방인 교회에서 거둬들인 연보를 예루살렘에 갖다 주었고 그것이 그 교회에 큰 기쁨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행 11:27-30; 21:17-21). 마지막으로 일 년 전에 연보할 것을 부탁한 고린도 교회에게 그가 부탁한 대로 연보를 거두러 몇 사람을 보낸 상황에서도(행 19:21, 22; 고후 8:6; 9:2, 4) 형제 사랑의 표현으로 드리는 연보를 “체계적”으로 하기 위해 “자기 수입에 맞추어 일정량의 돈을 따로 떼어 매주 돈을 거두는 것이 좋다”(私譯)고 권하였지 정확한 비율을 제시하지 않았다(고전 16:1, 2).76) 그리고 여기서 바울은 동일한 교훈을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에도 가르쳤다고 쓴다. 고린도 교회에게는 이런 식으로 드리는 헌금의 정신을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고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후 9:7)고 썼다. 이것을 바울은 “참 연보” 즉 넉넉히 주는 선물(“generous gifts,” NIV)이라고 규정하였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할 마음이 있는 사람이 드리는 헌금을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 하시리라”고 말함으로써 현대 교회가 일괄적으로 “십분의 일”을 부과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헌금 방법을 실시하였다(고후 8:12).

바울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구약의 십일조 정신과 비슷한 “물질 걷는 것”을 표현하면서, “십일조”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대신 “연보”(collection, λογεια)라는 새로운 용어를 소개하고 시종 일관 이 용어를 사용한다(고전 16:1-3; 고후 8:2, 4, 20; 9:5, 11, 13 ). 이 단어에 붙여진 의미가 몇 가지 있다. “은혜”(χαρις, 고전 16:3), “성도 섬기는 일”(διακονια, 고후 8:4; 9:1), “동정” 또는 “나눠 가짐”(κοινωνια, 롬 15:26, 27) 등이다. 이 모든 용어들은 자원해서 하는 행위와 자유로운 의지의 행동 등 (하나님께 바치는) 세금이나 십일조 등과 같이 일괄 정액의 물질적인 소유물을 강요에 의해 억지로 내는 것과는 거리가 먼 물질 나눔의 정신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신약에서는 물질을 내는 새로운 원리를 마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얼마를 낼지를 전적으로 개인이 정한다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9:7은 이 정신을 잘 표현한 본문이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그가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인 자신이 하나님(또는 그리스도)의 종이며(롬 6:16; 고전 7:22; 엡 6:6; 벧전 2:16), 자신이나 자신의 소유가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인식 때문이다(고전 6:20).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청지기 직이 동시에 강조되었다.


3. 히브리서(히 7:1-10)

히브리서에 언급된 십일조의 경우, 히브리서 저자는 7장 본문에서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아브라함과 레위를 언급한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독자들에게 그런 것을 본을 삼아 십일조를 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이것은 단지 고대의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세금을 비롯한) 일정량의 소유물을 바치고 대신 그는 그 사람으로부터 복 빎을 받는다는 위계질서를 언급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론의 제사장보다 높으신 분으로 이해해야 하는 당위성을 알리려는 것이다.


4. 야고보서(약 1:27; 2:15-17)

신명기에 언급된 가난한 사람을 돕는 십일조와 같은 상황이 야고보서의 본문에 언급되었다. 야고보는 그의 편지를 받는 사람을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약 1:1)라고 언급을 하였으나 구약 시대에 이들을 돕기 위해 요구했던 십일조를 언급하지 않는다. 이것은 가나안이라는 특정 장소에서 언약 공동체들의 결속을 다지는 십일조의 의미가 신약 시대에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IV. 결론


① 전적인 헌신의 삶

신약 시대는 어떤 요구나 약속에 있어 물질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그 강조가 바뀌었다. 이것은 제사나 예물을 드리는 제도에서도 마찬 가지이다. 그림자의 시대에서 행해지던 제사와 예물은 새 언약 하에서 드림(giving)의 체계나 그 의의가 상실되었다(골 2:17; 히 8:5; 10:1). 사실, 신약성경에는 우리가 돈을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을 표한다고 가르치는 구절이 없다. 이와 관련하여 옛 시대와 새 시대 간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다. 연속성은 드림의 원리에 있다. 그것은 우리 자신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불연속성은 십일조 제도와 같은 드림의 의무와 관련된 것이다. 특히, 우리 자신 전체가 하나님의 것이므로, 구약 시대에는 레위인에게 땅의 기업을 주지 않은 상황에서 나머지 열 한 지파가 이들의 생계를 보호해주어야 하는 의무가 있었던 반면, 땅의 기업과 관계없는 신약 시대에서는 구약과 동일한 의무를 부과할 수 없는 것이고, 실제로 우리가 바울 서신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도들은 교회에게 십일조를 부과하지 않았다.

나는 드림의 연속성 문제를 신약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개념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히브리서에서 십일조를 언급한 7장에서 저자는 그의 논의의 결론을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히 7:19)과 연결시키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해졌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케 구원하실 수 있나니”(히 7:25).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cf. 히 9:9; 10:1, 11) 우리는 율법 그 자체에 의존하여 우리 자신을 전체적으로 드릴 수가 없다. 우리가 자신을 온전한 제물로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 가능하다.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의 중보자(히 9:15)와 모든 세대를 위한 한 영원한 제물이 되어(히 10:12)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온전케 하는 제사를 단번에 드리심으로써(히 10:10, 14) 우리는 당당하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다(히 10:19, 22. cf. 13:15). 이제 신약 시대에는 드린다는 원칙과 그 정신이 의식법으로든지 외적으로 표현된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표현되었다(히 10:16. cf. 8:6; 롬 11:27; 렘 31:33). 바울의 “그리스도 안” 개념에는(롬 6:21, 14; 7:4, 6) 우리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이 강조되어 있다(빌 1:13; 3:9; 4:7). 그리스도에게 발생된 것이 우리에게도 발생했으며(롬 5:11; 8:1, 17), 우리의 참된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바로 찾을 수 있다(고전 1:3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물질의 특정한 분량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 존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고, 또 드려야 한다.

로마서 12:1에 이 진리가 대단히 잘 표현되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라.” 몸은 자기의 총체이며 전인격의 표현이기 때문에(창 2:7. cf. 롬 5:12; 8:23; 빌 3:21) 단순히 돈만 아니라 우리의 전체 삶이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어야 한다(히 13:15, 16). 우리의 전 인격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몸으로써 하나님을 우리의 영화롭게 해야 한다(고전 6:19, 20. cf. 사 43: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실로 원하시는 것은 우리 소유의 어떤 부분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 전체를 드리는 것이다(고전 10:31; 골 3:17, 23). 우리가 거룩하게 되어야 할 것은 부분이 아니라 우리 자신 전체이다(벧전 1:15, 16. cf. 2:9, 10). 우리가 드리는 몸은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이며 성령의 성전이다(고전 6:15, 19). 그리스도의 몸이 성전이고(엡 2:20. cf. 요 2:21) 그분이 성령으로써 모든 그리스도인들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요 7:37-39) 우리는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영원히 거룩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요 4:24).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인 성전으로 온전한 예배를 드리셨던 것처럼(히 9:11, 23이하)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함께 연합하여 주안에서 거룩한 성전이 되어간다(엡 2:21, 22; 고전 6:19). 그러므로 신약 시대에는 십일조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예물로 드리도록 창조함을 받았다(롬 8:22; 약 1:18). 이것은 우리의 모든 것을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주님의 말씀을 잘 실현하는 것이다(마 10:8). 누구에게 줄 것인가? 교회에 정해진 율을 바침으로써가 아니라 그의 삶 전체에서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을 다른 사람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한다.

신약 성경은 이 광범위하고 충분한 헌신, 드림, 제사에 관한 교훈 이외에 돈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도 가르친다. 성경에서 돈의 사용과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있다. 재물은 먼저 가족의 필요를 공급하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딤전 5:8; 고후 12:14; 딤전 6:7-10). 가장의 책임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또한 재물은 교회의 사역자들의 생활과 복음 사역 지지를 위해(마 10:10; 고전 9:9, 14; 갈 6:6; 딤전 5:17, 18), 궁핍한 가운데 처한 하나님의 백성들과(롬 12:13; 고후 9:1이하)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 써야 한다(갈 2:10; 마 26:11).


② 헌금 방법에 대한 제안

그래서 나는 오늘날 십일조 문제를 다룸에 있어 교회는 회중들에게 단지 그들의 수입의 십분의 일만이 아니라 그들의 전체 삶으로써 자신을 하나님께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 청지기 직에 대해 부지런히 가르쳐야 한다고 확신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신 것처럼(고후 8:9) 또한 그들에게 교회는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을 가르쳐(고전 3:16; 엡 2:21, 22) 교회가 서로 경쟁하거나 분리되지 않도록 지도해야 한다(고전 12:12-27). 모든 지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에 속했기 때문에 지체들이며(롬 12:4, 5), 그들은 포도나무의 가지들이며(요 15:1-8), 하나의 성전이고(벧전 2:4-5) 각각은 교회를 세워나가는 데 있어 서로에 대해 책임이 있는 존재들이다(갈 6:2, 10).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부자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돈으로써 교회를 위해 좋은 일을 하는 데 더 많은 책임이 있고(딤전 5:17, 18; 마 19:23, 24; 막 10:22-25), 지혜가 있는 사람은 두뇌를 사용하는 데에서, 말씀을 깨달은 사람은 가르치는 일에 있어, 손재주가 있는 사람은 그 재능을 사용하는 데 있어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책임이 있는 것이다. 어떤 교인이 교회에 돈을 적게 내고 심지어는 거의 낼 수 없는 상황이라도 그들이 자신들의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 사람 역시 교회를 세워가기 위한 교회의 중요한 일원이 되는 것이다(cf. 막 12:43-44). 이것이 다른 지체를 위해 은사를 사용하는 구체적인 예이다(고전 12;24, 25). 야고보서 2;15-17이 좋은 예이다.

만일 교회가 회원들에게 십일조를 내기를 강요한다면 그들이 모든 관심이 재물에 쏠려 있게 되고 강제적, 타의에 의해 물질을 내놓게 되는 문제가 발생하는데, 이럴 경우 그들에게서 전적인 희생의 삶을 살기를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실제로 많은 교회가 이 문제에서 시험을 받는다. 성경은 물질을 내는 문제와 관련하여 자원하여(고후 8:11, 12), 넉넉하게(고후 8:2), 준비해 두었다가(고전 16:2), 기쁨으로(살전 1:6; 2:14) 하기를 가르친다. 신약 시대의 삶의 특징은 자발성과 자유함에 있다(요 8:32; 갈 5:1). 우리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가난한 자를 도울지(살전 5:14), 우리의 사랑을 어떤 방식으로 다른 사람에게 표현할지를 배워야 한다. 이것은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더 복되다”는 주님의 교훈에 표현된 것이다(행 20:35). 그래서 교회는 회중들을 격려하여 억지로 또는 강제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에 따라 즐겁게 바치도록 권유하는 것이 필요하다(행 11:29; 고전 8:3; 고후 9:7). 사람마다 물질을 내는 액수는 다르지만 전체적으로 공평함이 있다는 원리를 알려야 할 것이다(고후 8:13, 14).

성경은 우리에게 가난한 형제에게 물질을 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참 믿음의 외적인 표현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롬 12:13; 15:17; 약 1:27; 2:15-26). 궁핍한 형제에게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참 사랑(요일 3:17)과 살아 있는 믿음의 여부를 시험하는 일이다(약 2:15, 16).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이다(히 13:16). 이것이 바로 자신을 넉넉하게 주신 예수님의 본을 따르는 삶이다(고후 8:2).

신약 시대에도 여전히 “우리가 적어도 수입의 10%는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돈을 주를 위해 사용하는 최소한의 표준이다”고 주장하면서 십일조 바치기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십일조에 대한 주경학적, 구속사적 연구의 결과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십일조가 신약 시대에는 폐지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그것은 구약 시대에 속한 것이며, 어떤 종류든 액수를 정하여 성도들을 구속하거나 의무를 부과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져다준 자유함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예수님은 의식법을 비롯한 율법의 멍에 때문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마 23:4)에게 쉼을 주려고 오셨다. 바울이 주장하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때의 충만(종말의 때)에 살고 있는 신약의 성도들에게 더 이상 율법의 멍에를 매게 해서는 안 된다(갈 4:14; 5:1, 2; 골 2:17, 20-23). 그것은 다시 율법의 멍에 아래로 그들을 끌고 가는 행동이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 하리라”(갈 5:18). 교회에 돈을 바치는 문제만 놓고 볼 때 십분의 일을 바치든 형편이 어려워 백분의 일을 바치든 아니면 형편이 넉넉하여 이분의 일만 바치든 그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자유와 가정의 형편과 교회의 형편에 달려 있다. 베드로가 아나니아에게 한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라는 말은 교회의 어느 누구도 성도에게 재산의 처분, 헌금 액수 바치는 문제와 관련하여 강제할 수 없음을 시사해주는 말씀이다(행 5:4). 할 수 있는 대로, 능력대로 바치는 것이 신약의 원리이다.

교회에서 십일조나 헌금과 관련하여 오해되고 있는 것들을 불식시키기 위해 교회에서는 (무슨 세금 내듯이) 돈을 바친다는 암시 주는 것을 피하는 것이 필요하다. 헌금 시간은 사실 우리의 모든 것을 바치는 시간이다. 그것은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전체를 바치는 것이어야 한다. 십일조나 헌금이라는 용어는 이런 면에서 율법적인 의미와 돈을 낸다는 의미를 풍기기 쉽다. 이런 용어 대신에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의미의 “드림”(봉헌)이나 “헌신” 또는 “헌상”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것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예배드리는 도중에 자신 전체를 드리는 시간을 갖는 것을 권한다. 

 

율법의 십일조, 예수도 안했다.
율법 아래서도 목수는 십일조를 하지 않았다 …………………………………………………… (글 : 신 완 식 ㆍ. ㆍ. ㆍ.?)


1. 목사는 레위 족속이 아니고 제사장도 아닙니다. 일차적으로 십일조는 율법시대에 주어진 것인데 지금은 율법이 완성된 복음의 시대요 은혜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왜 십일조만 시행하고 할례는 시행하지 않나요? 여성들은 예배 시간에 왜 머리에 두건을 쓰지 않나요?

2. 교회는 성전이 아니고 예배는 제사가 아니며 헌금은 제물이 아닙니다. 요즘도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 등을 하고 있나요?

3. 아브라함이 드린 것은 자신이 거둔 땅의 소산인 농작물이나 소유한 가축에서 드린 것이 아니고 전리품입니다. 구약시대 성도들이 드린 것은 결코 전리품이 아닙니다. 십일조는 반드시 개인의 소유에서 나온 소득에 근거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멜기세덱에게 드린 것은 오직 유일회적인 일이요 정기적으로 행한 구약시대의 십일조와는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4. 야곱의 서원은 십일조를 드리기 전에 한 것이고 반드시 ‘If~’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지적하신 대로 그가 실지로 했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물론 그 시대에는 성전도 제사장도 율법도 생기기 전이고요.

5. 구약시대에 드린 십일조 품목에 ‘돈’은 절대로 없었습니다. 지금은 돈만 받지요?

6. 구약시대에도 십일조 의무를 면제 받은 직업들이 있습니다. 수확을 위한 바구니를 만든 상인들, 들판에서 일하는 종들이 신는 신발을 만든 사람들, 추수 수확을 위해 마차를 만든 목수들, 들판에서 일하는 종들이 물을 길어 나르도록 물통을 만든 도자기공들, 들판에서 일하는 이들을 위해 외투를 만든 여인들, 임금을 받고 들에서 일한 종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예수님은 목수였기(마 13:55, 막 6:3) 때문에 십일조 뿐 아니라 성전세도 내지 않으셨습니다(마 17:24-27).

7. 헌금은 반드시 자발적이어야 합니다(마 10:8하, 마 5:42, 롬 15:26-27, 눅 6:38 등). 즉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8. 바울, 베드로, 야고보, 요한, 유다가 쓴 성경에 십일조에 대한 언급이 전무 합니다. 즉 초대교회는 이미 십일조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요? 유럽 교회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제가 다니는 영국 교회도 공식적으로 십일조는 언급조차 않고 있어요. 물론 아프리카나 스리랑카 인도 등에서 온 이들 중에 하는 분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도 사실은 위의 내용들을 잘 모르고 있지요. 유럽 성도들은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십일조를 중심으로 헌금 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교회 인건비, 유지비, 구제비 등 실질적인 재정관련 사항들은 ‘십일조’를 강조함으로 해결할 게 아니라 목회자들이 구체적인 재정 필요 사항들을 교인들에게 알려서 그들이 기쁜 마음으로 동참할 수 있게 해야 하는 데 한국 교회처럼 그렇게 강조하니, 심각한 부작용이 생기는 것이지요. 저희 교회는 십일조 강조 하나도 안하고 저도 지금 십일조 안 해도 할 일은 다하는 교회랍니다. 구제와 선교를 위해 적극적으로 헌금을 하기 때문에 담임목사님은 제 기억으로 지난 5년 동안 꼭 한 차례 그것도 스쳐 지나가는 말로 헌금에 대한 언급을 했습니다. оо님께서 참조하신 성경주석을 쓴 이는 위의 기본적인 사실을 모른 채 의례적인 논리를 따라 쓴 것 같습니다.


한국도 머지않아 십일조 문제를 극복해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지금처럼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영국 교회도 100여 년 전까지는 했으나 지금은 안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구태의연하게 대처할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한국 교우들은 유럽 교회는 죽었다고 하는 데 그런 측면도 있으나 영국은 ‘병든 한국 교회’와는 전혀 다른 측면에서 살아있는 교회랍니다.


십일조는 무조건 소득의 십 분을 내는 것이 아니랍니다. 구약 시대에서는 반드시 소출과 가축에서 드렸고, 직업에 따라서 면제되는 것도 많았습니다. 어부와 목수가 그 대표적인 예지요. 그래서 예수님도 베드로도 십일조를 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십일조는 예루살렘 성전이 있고 제사장이 있으며 성전 제사가 있을 때 유효했던 제도로서 초대교회 때는 시행하지 않다가 중세에 들어 교회가 제도화 되면서 다시 시행된 제도입니다. 영국과 서구 교회는 더 이상 십일조에 대한 의무를 지지 않습니다. 이는 믿음의 부족 문제가 아니라 성서적인 근거 문제 때문입니다. 대신 그들은 십일조의 근본 취지인 극빈자, 장애인, 노인, 어린이, 여성 그리고 사회보장 및 복지에 대해 깊은 관심과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는 한국 교회와 성도들도 맹목적으로 십일조를 이야기 할 것이 아니라, 그 근본 취지와 뜻을 밝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십일조 한다고 복이 굴러 온다거나 하지 않으면 저주 받는 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감언이설에 불과 합니다. 저는 기득권의 욕심과 이익을 대변하는 왜곡된 성경해석이나 잘못된 설교를 지적하고 성경이 적시하고 있는 정확한 내용을 알려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참된 목회요, 진리말씀으로 영혼을 자유케하는 고귀한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가 사제중심의 브로커 종교체제나 사제만 행세하고 공공연히 착취하는 노예종교에서 벗어나 진리 안에서 자유롭고, 평등하며, 거룩하게 개혁되는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만약 십일조를 강조한다면 초대교회(초대교회는 십일조가 없었음)의 연보처럼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투명하고 공정하게 집행되도록 하는 장치가 필요합니다. 불완전한 사람이나.. 혹은 사제나 교주에게 무조건 ‘아멘’하는 것이나, 덮어놓고 맹종하는 일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뱀같이 지혜로와야 합니다. 무엇이 자유케하는 성경적 참 진리인지 무엇이 율법과 제도와 사람에게 종노릇하게 하는 사람의 계명인지 분별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할 것입니다.

  

『………… 농경 목축 사회에서 토지 소산과 가축이 '모든' 소득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따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이미 화폐가 유통되고 있었고(참고 - 농경 목축 시대였던 아브라함 시대와 전통적인 십일조가 처음으로 시행되던 모세 여호수아 시대에도 화폐가 중요한 교환 수단으로 유통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돈이 아닌 토지 소산과 가축의 십일조만을 오직 원하셨음, 창23:12-16, 신14:24-26) 다른 일거리나 매매 행위 등을 통해 여러 형태의 소득들이 있었음을 유의해야 한다. 왕정시대로 넘어갈수록 다른 종류의 소득들이 다양하게 나오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특히 성전세나 헌금, 다른 세금들은 돈으로 냈으나 십일조는 특별한 경우 이외에는 돈으로 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양식의 형태로 성전 곳간에 들여야 한다는 사실은, 십일조의 대상이 '모든' 소득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가나안 땅에서 토지 분배가 있은 연후의 토지 소산과 가축의 개념은 소득이나 부의 축적 수단이라기보다 양식의 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십일조는 레위인, 또는 가난한 자들과 양식을 나눠 먹는 구제의 정신 가운데서 행해졌다. 한 가족이 1년 동안 먹는 양식의 10분 1을 내어놓아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만들어 나갔던 것이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양식의 10분 1은 될지언정 '모든' 소득의 10분 1은 아닌 것이다. 적어도 말라기와 느헤미야 시대까지는 십일조가 토지 소산의 10분 1로 양식에 국한되었다는 것은 성경이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그러다가 바리새인과 랍비들이 더 많은 성전 수입을 위해 제사장들과 함께 십일조의 대상을 확대시키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토지 소산 이외에 박하, 회향 같은 특수(양념) 작물들도 십일조의 대상이 되도록 하였다.

무엇보다 십일조가 변질되기 시작한 것은 화폐 소득을 십일조에 포함시키고부터였다. 화폐 소득을 포함시키자 자연히 십일조의 대상이 '모든' 소득으로 확장되었다. 화폐와 박하와 및 향료의 십일조는 탈무드의 랍비들이 주문하는 내용이었으나 이는 성경의 의도를 크게 벗어나는 것이었다. (《성서 대백과》 제4권, p.752, 기독지혜사)

중세 교회에서도 4세기 무렵 십일조를 답변확정하고 나서 근 1000년 가까이 지난 13세기 무렵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십일조의 대상을 토지 소산에서 '모든' 소득으로 확대시켰다는 사실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다. 거의 독점 체제에 가까웠던 중세 교회가 왜 십일조의 대상을 토지 소산에서 '모든' 소득으로 확장시키는 데 1000년이나 걸렸을까. 그것은 중세 교회에서도 전통적인 십일조의 대상은 '모든' 소득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화폐 소득을 중심한 '모든' 소득이 십일조의 대상이 됨으로써 십일조가 변질되고, 그것이 전통적인 십일조 정신을 흐리게 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십일조가 나눔의 양식이 아니라 제사장들과 대제사장들의 치부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 (십일조를 넘어서 中..)

 

 

°(롬 3:30-31)“때문에 한분 그 하나님이 이 의롭다고 간주하심이 할례 받아도 믿음으로 부터요 할례 받지 않아도 그 믿음에 의해서라. 따라서 그 믿음 때문에 율법을 무익케 함이니, 율법을 세우지도 않고 |(율법의 고안품을)| 만들지도 아니하노라.”


‘(율법의 고안품을)’은 문맥의 의미에 맞게 첨가 한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의 율법적 흉내내기 장치(裝置)들론 ‘주일성수’, ‘십일조’, ‘성전건축(?)’..등등이 있을 겁니다.


하여, 주와 함께 걷는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또한 그런 믿음 안에서, 오늘날의 의식률(儀式律 : 주일성수, 십일조..등등)을 잘 지켜야만 신실한 크리스찬 이라고 평(評)하는 자들의 변은(딤전 6:5),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데서 온 무지의 소치(所致)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성전(성전되신 예수- 요 2:19-21, 행 6:14, 마 26:61, 막 14:58, 마 18:20) 안에서 안식일에도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마 12:5】, 주의 백성은 공동체 안에서(교회를 이룬 각 지체- 엡 2:19-22, 고전 12:27, 롬 12:4-5, 엡 1:22-23) 그들의 자손에게 할례를 베풀었으며【요 7:23】, 주와 함께한(성령이 내주하시는 성도의 몸- 고전 3:16, 고전 6:19, 고후 6:16, 히 3:6) 다윗은 그 종자들과 안식일에 성막(혹은 산당)의 진설병을 먹었습니다【삼상 21:1-6 / 레 24:8-9】.


따라서, 우리 유일하신 성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조항들은 이미 채워진(πληροω 플레로오 | 가득하게 하다, 채우다, 풍성하게 하다, 완성하다, 끝까지 채우다, 완벽하게 하다, 실재가 되게 하다, 수행하다 / 마 5:17) 하찮은 보조수단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은 참된 말씀을 따르고, 배워서 주께로 활발히 자라가는 것이지, 사람들의 손으로 지어낸 그런 고안품(εργον 엘곤 | 사업, 고용, 생산된 것, 손으로 만들어진 것, 예술, 제조업, 행동, 행위 / 딛 3:5)들로 자라나진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주의적 사고로 믿음의 크기를 잰다거나, 칭송한다거나, 자랑해 대는 것은 그들의 무지만을 더더욱 크게 알리는 허망한 노래일 뿐입니다.



“그러나 주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 계명의 의식적 부분이 폐지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스도 자신이 실상이시므로 그가 계시는 곳에서는 모든 상징이 사라지며, 그가 본체이시므로, 그가 나타나실 때에 그림자는 버려지기 때문이다. 즉, 그는 안식의 진정한 실현이시다.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와 함께 묻혔으며, 그와 연합하여 그의 죽음에 참여한 목적은 그의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생명으로 살려는 것이다(롬 6 : 4-5).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다른 곳에서 안식일은(골 2 : 16)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한다(골 2 : 17). 바꿔 말하면, 그리스도는 실상의 바로 본체시며, 여기에 대해서 바울은 이 구절에서 잘 설명했다. 이 일은 어느 하루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완전히 죽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할 때까지 우리의 일생을 통해서 있을 일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날을 미신적으로 지키는 것을 철저히 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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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거짓 선지자들의 너절한 이야기는 사라진다. 그들은 수 백년 전에 유대교적 견해를 사람들에게 감염시켰다. 이 계명의 의식적 부분만이(그들의 소위 제 칠일의 "정"만이) 지폐지된 것이고 도덕적 부분은-즉, 이레 가운데서 하루를 정하는 것은-남아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유대인들을 비난하는 의미로 날을 변경했을 뿐이고, 그 날을 거룩하다고 하는 생각은 여전하다. 유대인들이 생각한 것과 같이, 그날의 신비성에 중요성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이런 사상을 가르침으로써 이익을 얻는다. 자기들의 교회 규정을 고집하는 자들의 미신은 유대인 이상이요 세 갑절이나 더 유치하고 육적인 안식일 미신이다. 따라서 이사야가 당시의 사람들을 책망한 말은 현대의 그들에게도 그대로 해당된다(사 1 : 13-15, 58 : 13). 그러나 우리가 특히 견지해야 하는 일반적 교훈은 이것이다. 즉, 우리들 사이에서 경건이 소멸하거나 쇠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우리는 성회에 부지런히 출석하며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도을 수 있는 외면적 보조수단들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강요 Ⅱ, 8장 28 - 34 中 에서..

 

 

이스라엘에 왕정이 시작된 후 십일조는 어딧다가 냈나?

구약에 보면, 십일조의 쓰임새가 다양했습니다. 그 첫 번째로 이스라엘 모든 처음 난 자를 대속해【민 8:14-19, 민 3:12-13 / 출 13:13, 출 22:29, 출 34:20, 레 27:26-27, 민 18:15-16】 성막에서 봉사하는 레위인의 분깃으로 주어졌으며【민 18:21-32】, 혹 얼마는 정성 드린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먹기도 했고【신 14:22-27】, 또 그 ⅓은 구제(救濟)에 쓰였습니다【신 14:28-29, 신 26:12-15 / 레 25:1-7】.

그로부터 한참 후 이스라엘 민족이 왕을 세울 때부터 십일조는 왕한테 내라
【삼상 8:15, 17】한 성구도 있고, 실제로 왕이 걷어들인 기사도【왕상 4:7-19】 있습니다. 어떤 자들은 앞에서 말한 십일조를 ‘십삼조’{?}라 우기고는 소득에 십분의 삼을내라 하는데, 이는 자기 아는 것으로만 둘러대는 거짓말입니다. 만일 그렇다고 하면, 이 왕한테 내는 십일조까지 합해서 십의 사를 내야한다는 말도 되기 때문입니다.

왕도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자로써 이스라엘 각지파의 십일조를 걷어, 그 신하인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인 성전의 문지기, 창고지기, 찬양대, 수종자, 유사들에게도
【대상 24:20-26:32, 대하 19:11】 나눠줬습니다【대상 25:6, 느 11:22-24】. 분명 대제사장이나 제사장들도 왕의 신하라고 성경에는 씌여있습니다【왕상 2:35, 왕상 4:2-4】.

따라서,‘사회보장기금’과 ‘세금’에 성격이 강한 십일조두고 그 수납처(收納處)를 교회당으로만 한정시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또, 자기들 눈에 보이는 곳에다 십일조를 내지 않았다해서
【말 3:8-10】에 말씀을 들어 도둑으로 몰아붙이는 것 또한 결코 옳지 못한 행태(行態)입니다〈어찌 ‘하나님이 교회당 안에만 계시다’하겠습니까〉.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마 6:2-4, 마 25:34-40, 눅 14:12-14】 하셨으며, 걷둬드린 십일조 가운데 ⅓【신 14:28-29, 신 26:12-15 / 레 25:1-7】 은 구제(救濟)에 쓰여져야 한다는 율을 어기고 백분의 삼(3%)만으로 생색내는 자들이 더더욱 큰 도둑이기 때문입니다.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말 3:9】 여기서 ‘온 나라’라 했으니, 어찌 레위인들이라고 피해갈 수 있겠습니까?【느 13:4-14】 큰 도둑이 좀 도둑 정죄하는 짓(초등한 자가 범하는 우, 딤전 3:6)을 이젠 그만 그칩시다.

“사도들과 원로들이 안티오키아와 시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다른 민족 출신 형제들에게 인사합니다. 우리 가운데 몇 사람이 우리에게서 지시를 받지도 않고 가서, 여러 가지 말로 여러분을 놀라게 하고 정신을 혼란하게 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을 뽑아 우리가 사랑하는 바르나바와 바오로와 함께 여러분에게 보내기로 뜻을 모아 결정하였습니다.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또 유다와 실라를 보냅니다. 이들이 이 글의 내용을 말로도 전할 것입니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곧 우상의 제물과 피와 (피를 빼지 않고)목졸라 죽인 것과 음행에서 떠나 멀리하는 것입니다. 이것들만 삼가면 스스로 잘 해내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행 15:23-29】

또한,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졸라 죽인 것과 음행에서 떠나 멀리하는 것”말고는 다른 짐【계 2:24】으로 성도를 괴롭히지 않으려했던 ‘사도와 장로의 규정(δογμα)’에 따르지 않고, 사도로 부터 보냄 받은 바(사도적 계승) 없이 지식의 열쇠【눅 11:52】만을 갖고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신 성도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마 11:28) φορτιζω 프홀티조 G5412, 짐을 얹다, 짐을 싣다, (관습과 부당한 교훈의)짐을 지우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위에 군림하려는 자의 계략을 간파하여 속지맙시다. 주의 이름으로 구제(救濟)하기 보단, 자기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사치하고 치장하길 더 좋아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을 탐하며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데에【마 23:1-7, 막 12:38-40, 눅 20:45-47】 여념 없는 자들이 지운 짐을 이제는 벗어 던져버립시다.

 

 

과부의 두 렙돈 기사는 헌금강조용인가
'각주(脚註) 없이 성경 읽기' (눅 21: 1- 4)………………………………………………………… (글 : 오세용 2007. 09. 26)



누가복음 21장 1- 4절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과연 이 본문이 헌금에 관한 것일까, 헌금을 강조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신앙생활을 시작한 이래 들어온 설교들이 모두 그랬기에 그렇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본문을 들어 말씀하시기를 이 과부처럼 정성껏 혹은 가진 것 전부를 헌금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예수님께서 가난한 과부의 연보궤에 연보 넣는 것을 보시고 다른 사람들이 많이 넣는 것 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크게 그리고 공개적으로 칭찬했다.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주님께서 공개적으로 칭찬하신 일이 이것이니 우리가 헌금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칭찬해도 되지 않는가?”

또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진 소유의 비율을 볼 때 과부가 바친 헌금은 전부입니다. 다른 부자들은 많이 바쳤습니다. 과부가 바친 돈에 비하면 엄청난 액수의 거액입니다. 그런데 부자들의 바친 많은 금액은 한마디도 칭찬하지 않고, 이 과부가 바친 적은 것은 왜 칭찬하셨을까요? 우리 인간들은 단순히 액수의 많고 적음만 보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비율적으로 헌금액수로 보신 것입니다.”

그런 해석이 내리는 결론은 다음과 같이 명쾌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께서 하신 이 헌금 평가의 말씀을 성경에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가?
이 말씀은 또한 오늘 우리의 헌금 생활을 반성하라는 뜻이 있지 않겠는가? 저 가난한 과부를 본받자. 하나님을 우리 영혼의 구주로 참으로 믿고 그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가장 좋은 것을 그에게, 그를 위해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저 가난한 과부처럼 정성의 헌금을 하나님께 드리는 자들이 되자.”


이 본문이 과연 그러한 말씀인가 생각해보려고, 몇가지를 관찰하여 보았습니다. 본문 3절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두렙돈 헌금하는 과부를 본 후에 그 일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하신 대상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같은 내용의 본문이 마가복음(막 12: 41-44)에도 기록이 되어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에게 말씀하셨는가 하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곁에 불러 놓고서” (막 12 :43)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자, 얘들아 내가 오늘은 너희들에게 헌금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마…. 내가 오늘 성전에 갔더니…’  하면서  제자들에게 헌금은 이렇게 하라고 가르치셨을까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온 사람들입니다. 정말 그들은 금과 은도 없거니와 두벌 옷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헌금을 할래야 헌금을 할 돈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헌금을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기를, 앞으로 너희들이 성도들을 관리할 때에 그들에게 이렇게 헌금을 하도록  가르치라고 하실리도 없습니다.

또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당시로 돌아가 봅시다. 듣는 사람이 제자들이건, 아니면 다른 사람이든 유대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가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저 사람들은 다 넉넉한 가운데서 자기들의 헌금을 넣었지만, 이 여자는 구차한 가운데서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

그런 말을 들었다면, 예수님 앞에서 그 말씀을 듣고 있는 유대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먼저 했을까요? ‘아하, 저 여자가 생활비 전부를 헌금했으니 나도 헌금을 그렇게 해야겠다’ 라는 생각이 떠오를까요? 아니면 ‘아니, 그렇게 생활비 전부를 헌금해버리면 그 여자는 무얼 먹고 산다는 말인가?’ 라는 생각이 떠오를까요? 아마 유대사람이라면 당연히 첫 번째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잘 알고 있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고아와 과부는 특별 보호대상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과부를 돌보라고 말씀하신 것을 잘 알고 있는 유대인들이 그 과부가 가진 생활비 전부를 헌금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 ‘잘했다, 나도 그 여자를 본받아 헌금을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당시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모두가 ‘도대체, 그렇게 헌금을 해버리면 그 여자는 무엇을 먹고 산단 말입니까? 그 여자가 누구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도와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이런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서기관들은 무엇 하는 사람입니까? 어떻게 가르쳤길래, 그 여자가 자기 생활비 전부를 헌금을 한단 말입니까? 서기관들과 부자들은 과부가 그렇게 헌금을 하는 것을 보고도 가만 있었습니까?

따라서 본문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헌금을 중요시 여겨 사람들에게 헌금을 가르친 말씀이라고 가르친 것이라 한다면, 예수님을 이상한 분으로 만드는 결과가 되어버립니다. 이 본문은 결코 헌금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그런 용도로 사용한다면, 한마디로 예수님을 욕보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말씀을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문맥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럼 오늘 본문의 앞뒤 문맥을 한번 살펴봅시다. 누가복음 21장은 20장에 이어서 나오고 있으니 20장 마지막 구절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20장 45절-47절입니다. 47절, 그들(서기관)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고…

원래 성경이 쓰여질 때에는 장, 절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장을 나누고 절로 구분하여, 성경을 찾고 읽는데 편리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장에 기록되어 있다 하더라도 이 경우 본문의 말씀은 바로 앞에 나오는 말씀과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참고로, 같은 내용을 기록한 마가복음에서는 과부의 두 렙돈 기사가 12:41-44에 나오고, 그 다음 장인 13장 1- 3절까지는 성전이 무너진다는 기사가 나오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0장 45절부터 예수님은 다가올 심판, 예루살렘의 멸망, 말세의 징조 등에 대하여 말씀하시는데 맨 먼저 46절에서 율법학자들인 서기관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본문말씀의 바로 뒤(눅 21:5—6)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서 이 세 개의 구절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서로 연결이 되고 있습니다.
20장 45- 47 서기관 …과부
21장 1- 4절  과부 …두 렙돈 헌금
21장 5절  성전 ..미석과 헌물
21잘 6절 성전 ….무너짐

그러니 이렇게 말을 이어가며 뜻을 해석해야 합니다.
20장 47절 율법학자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21장 4절 (가산을 뺏긴) 과부들은 구차한 가운데서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털어 헌금을 하고….. ..
21장 5절 (그러한 과부들은 돌보지 않고) 성전은 과부가 헌금한 헌물로 호사스럽게 꾸며지고 ….
21장 6절 그러한 성전이 다 무너질 날이 올 것이다.

이렇게 연결이 되어, 과부들의 가산을 삼킨 율법학자들에게 경고하심으로 시작하여 성전이 무너질 것이다, 라는 무서운 경고의 말씀을 하시는 중인데 중간에 본문을 뚝 떼어내어 헌금을 잘 하라는 것이다, 라고 해석한다면 이 얼마나 엉뚱한 해석입니까?

그러니 오늘 본문 과부의 두 렙돈 헌금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헌금을 어떻게 하라고 가르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과부 즉 사회적 약자를 돌보지 않고, 또한 교회가 정작 해야 할 일은 제쳐두고 성전을 아름답게 치장하는 등 하지 말아야 할 일에 골몰하여 정신차리지 못하고 있는 교회를 향하여 경고하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 한국 교회의 현실을 돌아보면, 교회가 교회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특별히 본문 말씀이 교회 개혁을 위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되는데, 이러한 교훈을 찾기는커녕 이 본문을 거두절미하고 뚝 떼어 내어 성도들에게 헌금을 강조하는 말씀으로 오용하고 있으니, 정말로 한국교회가 얼마나 매(?)를 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사장들을 향한 말라기 선지자의 책망

말라기 3:8-10 은 술사(術士)의 주문이 될 수 있는가?…………………………………… (글 : ?  )


앞에서 함께 읽고 생각을 나누었던 것을 다시 한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부산의 C목사님은 누구나 흔히 그러는 것처럼 말라기서를 가지고 십일조에 대한 설교를 하셨는데 과연 말라기 선지자가 그런 뜻에서 말했을까요? 여기에서 그의 진정한 속 뜻을 알아보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의 말 한마디로 인하여 한국의 목회자들이 서로 엇갈린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라기 3:7-12절을 우선 읽어 봅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우리는 항상 성경을 읽을 때 읽고 있는 성경의 전체적인 내용과 문맥을 조심스럽게 먼저 살펴보고 읽는 습성을 길러야 합니다. 전체의 내용과 문맥을 무시하고 어느 한 구절을 인용하여 목소리를 높인다는 것은 엉뚱한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위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말라기 전체의 흐름을 파악해야 합니다.

말라기서가 기록된 시기는 스룹바벨 성전과 제사장들의 부패가 언급된 것으로 보아 성전재건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전 539 년경 바벨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 제국은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멸망될 때까지 고대 근동지역을 지배했던 나라였습니다. 포로지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은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의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아 성전을 재건하기도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성전을 재건하고 수 십년이 지나도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큰 영광이 나타나질 않았습니다. 거기에다 흉년과 기근이 들어 고통의 나날이 연속되었습니다. 드디어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는 자들의 형통을 부러워 하였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것은 헛된 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말라기 선지자는 그들의 의심과 불순종은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을 잘 모르는데서 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그들이 신실했는데도 불구하고 재앙이 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부패한 제사를 드리고 있었으며, 형식적으로 제사행위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하는 것은 흠 없는 것이어야 했는데도 제사장들은 좋은 것은 자기들이 차지하고 흠있는 것을 골라서 희생제사를 지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그렇게 해도 괜챦다고 가르쳤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기를 촉구했으며, 율법을 온전히 준행하면 율법에 명한 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말라기서는 주전 약 430 년경 부패한 제사를 드리고 있던 제사장들에 대한 책망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1장 6절을 보세요.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2장1절에도 "너희 제사장들아"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2장10절에 가면 "우리는"이란 말이 나옴으로써 유대 백성들을 향한 책망이라고 보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3장 8절로 가면 헌물을 도적질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헌물은 이미 백성들이 성전에 바친 것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제사장들을 향한 책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헌물
(תּרמה ㆍ תּרוּמה 테루마 | 기부금, 조세, 제물, 거제)이란 유대인들의 3대 절기에 바치던 것입니다. 헌물은 원래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헌물을 잘못 냈다고 해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백성들이 바쳐 하나님의 것이 된 것을 제사장들이 도적질했다고 보아야 맞습니다. 그러한 도적질에 대한 구체적인 행위가 1장에 나타나 있음이 그 증거입니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너를 가납하겠느냐”(말라기 1:7-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1:13-14)

위에 나오는 더러운 떡이나 눈먼 희생, 저는 것과 병든 것, 토색한 물건.. 등등은 백성들이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가지고 온 것들임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것들은 제사에 쓰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신15:21). 그러나 제사장의 입에는 율법이 있어 그러한 행위를 막는 것이 당연했지만 제사장들은 부패하여 대강 제사를 드리고 자기에게 돌아올 양식이나 돈만을 챙겼던 것입니다. 말라기 본문에 나타나는 '희생을 드린다'는 말은 백성들과는 상관이 없는 제사장들과 관련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제사장들의 부패상입니다. 하나님의 것에 대한 도적질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을 백성들이 아니라 제사장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말라기3장8절에 나오는 '너희'라는 주체가 누구입니까? 그들은 일반 백성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누구였는지를 알면 본문의 의미가 뚜럿하게 나타납니다. 말라기 3잘8절에서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라는 반문을 할 수 있는 자들은 결코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말라기 1:10과 2:3을 보면 더욱 선명해집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우리말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것' 또는 '나의 것' 또는 '주의 것'이란 단어들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번역을 해놓는 바람에 십일조에 대한 오해가 가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도적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바
(קבע 카바 | 강탈하다, (덮어)속여 빼앗다)'라는 단어는 영어의 Cover와 같이 '덮다' 또는 '속이다' 또는 '속여 빼앗다'라는 의미로써 백성들이 가져온 희생제물을 제사장들이 속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실 십일조에 대한 도적질은 굳이 말라기 시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말라기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느헤미야도 여기에 대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13:4-14까지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를 보면 백성들이 레위인들에게 주라고 바친 십일조를 제사장들이 중간에서 빼돌리고 성전 창고를 다른 곳에 사용한 예가 나오고 있습니다. 자연히 성전의 일을 돌보던 레위인들은 자기들에게 돌아오는 십일조를 중간에서 도적질하는 자들 때문에 받지 못해서 성전에 남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버렸으므로 성전은 피폐되었기 때문에 말라기 선지자가 이때 나타났던 것입니다.

느헤미야 총독은 급기야 십일조를 조직적으로 거두기 위하여 전국적인 감독체제를 갖추고 철저하게 십일조를 거두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느헤미야 10:38과 12:44에 나옵니다. 느헤미야는 감독들을 시켜 타작마다에 직접 가서 십일조를 거두게 했습니다. 백성들은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십일조를 바쳤습니다(느12:47).

그러나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없는 동안에 모든 것이 변하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온 느헤미야는 이 사실을 알고 도비야의 세간들을 모두 끄집어내서 밖에 내던지고 원래 있어야 할 것들을 있게 하여 성전을 회복했던 것입니다(느13;12).
느헤미야는 십일조를 중간에서 빼돌리는 제사장들을 모두 갈아 치우고 사람을 세워 십일조를 관리하도록 했습니다(느13:13).

이렇게 말라기서는 십일조를 빼돌린 제사장들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의 말씀입니다.
이런 책망의 말씀을 가지고 부요의 원칙이니 뭐니 하면서 하나님의 심정을 곡해하는 행위를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그저 난감할 따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부터 배우라
그분의 말씀을 알고 믿으라 ………………………………………………………………………………………… (글 : e-GOT 2007. 11. 11)



「작성자: lovesbabo (2007. 11 .10) ::: 마5:19  -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문 : 1. 이를 = 율법이 아닌지요? 2.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 - 율법을 행하며 가르치는 자라는 뜻이 아닌지요?」


앞뒤 성구는 무시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성구만 쏙~뽑아다가 자신의 논리에 맞춰 끼우는 문자적 도구화는 결코 좋지 못합니다. 그 구절이 뭔가를 설명하기 위한 부분이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이는 곧 오류와 왜곡을 낳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 마다 읽었던(행 15:21, 행 13:27) 율법과 선지자의 글들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분(요 1:14), 안식일의 주인이신 그분(눅 6:5, 막 3:28, 마 12:8), 참 성전 되신 그분(요 2:21)”인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가리키는 손과 같습니다(요 1:36, 마 3:13-17, 막 1:9-11). 즉 점 없고 흠 없는 자가되라는 율법의 결국도(눅 16:29.31) 주를 만나 죄사함 받고 두 번째 나타나실 때에 주께로 진정한 의인이라 인정받아 영생을 얻기 위한 것이기(신 4:29, 신 30:6) 때문입니다(요 11:25-26, 요 17:3). 오늘날의 신학의 역활도 결코 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딤전 4:5). “……그는(칼 바르트) 항상 복음을 새로이 가리키는 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세례요한의 손 이상이 되길 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그가 하나님과 이웃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 나름대로 노력한 것을(신학) 나중의 사람들이 훨씬 더 잘해 주길 바랬다.……” ― 이신건


율법과 선지자의 말한 것을 채워서(마 5:17) 다 이루실(마 5:18) 그분이야 말로, 말만하고 행치 아니하는 바리사이 해석자와 서기들(마 23:4, 눅 11:46)과는 달리 진정한 선생님이요 진정한 지도자요 하나님의 진정한 말씀이기(마 23:8-10) 때문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들은 그분을 증언하고 지향(志向)하며 그분의 모습을 묘사하고 표현하고 알리려했던 것일 뿐 실체는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율법과 선지자가 사소하고 작게 언급한 것도 본체인 그분은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코 버려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거기계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부터 배우라는 것입니다(마 5:19). 이렇게 말씀하신 후 예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문자적 해석을 뛰어넘는 그 이상의 해석을 내보이신 겁니다(마 5:21-48, 마 7:29, 막 1:22, 눅 4:22).


믿음이 더욱더 자라서 장성하고 싶으십니까? 그럼 믿음을 자라나게 못할 겉만 번지르르한 거짓 해석과 율법적 흉내내기인 ‘십일조, 주일성수, 새벽기도, 일천번제, 성전건축?…’등등에 하찮은 보조수단들을 떠나 하나님 말씀을 읽고 거기서 말씀하시고 계신 그분을 발견하여 그분께로 부터 배워 나가십시오. 믿음을 자라게 하시는 이는 바로 그 하나님뿐입니다(고전 3:6-7).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 번제물을 희생제물에 섞어 그 고기를 먹어치워라. 내가 너희 조상을 에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올 때 그들에게 번제물과 희생제물에 대하여 이야기하거나 명령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명령을 그들에게 내렸다. “내 목소리에 순종하여라.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길만을 온전히 걸어라. 그러면 너희가 잘되리라.” 그러나 그들은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제멋대로 사악한 마음을 따라 고집스럽게 걸었다. 그들은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하였다. 너희 조상들이 에집트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내 모든 종들, 곧 예언자들을 날마다 끊임없이 그들에게 보냈다. 그런데도 그들은 나에게 순종하거나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오히려 목덜미를 뻣뻣이 세우고 자기네 조상들보다 더 고약하게 굴었다. 네가 그들에게 이 모든 말씀을 전하더라도 그들은 네 말을 듣지 않을 것이요, 그들을 부르더라도 응답하지 않으리라.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이 민족은 주 그들의 하나님 목소리에 순종치 않고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은 민족이다. 그들의 입술에서 진실이 사라지고 끊겼다.” ’ (렘 7:21-26)


당신께서는 제사를 즐기지 않으시기에 제가 번제를 드려도 당신 마음에 들지 않으시리이다.” (시 51:16)

내 백성아, 듣거라. 내가 말하노라. 이스라엘아, 나 너를 거슬러 증언하노라. 나는 하나님, 너의 하나님이로다. 너의 제사 때문에 너를 벌하려는 것이 아니니 너의 번제야 늘 내 앞에 있도다. 나는 네 집에 있는 수소도, 네 우리에 있는 숫염소도 받지 않노라. 숲속의 모든 동물들이며 수천 산들의 짐승들이 내 것이기 때문이니라. 나는 산의 새들을 모두 알며 들에서 움직이는 생물들도 내게 속한 것들이로다. 내 비록 배고프다 하여도 네게 말하지 않으리니 누리와 그를 채운 것들이 나의 것이기 때문이니라. 내가 황소의 고기를 먹고 숫염소의 피를 마시기라도 한단 말이냐? 하나님께 찬미로 제사를 드리고 지존께 네 서원을 채워드려라. 그리고 불행의 날에 나를 불러라. 나 너를 구하여주고 너는 나를 공경하리라.” (시 50:7-15)

“저는 가련하고 고통 중에 있나이다. 하나님, 저를 도우시어 보호하소서.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노래로 찬양하리라. 송가로 그분을 칭송하리라. 이것이 주님께는 더 좋도다, 수소들보다 뿔 달리고 굽 갈라진 황소들보다. 가난한 이들이 이를 보고 즐거워하리라.” (시 69:29-31)


‘주 저의 하나님 당신께서는 저희를 위하여 기적과 계획 들을 많이도 행하셨으니 그 누구도 당신께 견줄 수 없나이다. 제가 알리고 말하려 해도 헤아리기에는 그것들이 너무나 많사옵니다. 당신께서는 희생과 제물을 즐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의 귀를 열어주셨나이다. 번제와 속죄제를 당신께서는 바라지 않으셨나이다.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나이다. “보소서, 제가 왔나이다. 두루마리에 저에 대하여 쓰여있나이다. 저의 하나님, 저는 당신의 뜻 행하기를 즐기며 제 가슴속에는 당신의 가르침이 새겨져있나이다.” 저는 큰 모임에서 정의를 선포하나이다. 보소서, 제 입술 다물지 않음을, 주님, 당신께서는 알고 계시나이다. 당신 정의를 제 마음속에 감추어두지 아니하고 당신 성실과 당신 구원을 이야기하며 당신 자애와 당신 진실을 큰 모임에서 숨기지 않나이다. 주님, 당신께서는 제게 당신의 자비를 거절하지 않으시니 당신 자애와 당신 진실이 항상 저를 지켜주리이다.’ (시 40:6-10)

그러한 까닭에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번제물과 속죄제물을 당신께서는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 두루마리 책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제물과 예물을”, 번제물과 속죄제물을 당신께서는 원하지도 기꺼워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고 말씀하시는데, 이것들은 율법에 따라 바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것을 치우신 것입니다. 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히 10:5-10)


‘자, 주님께 돌아가자. 그분께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 우리를 치셨지만 싸매 주시리라. 이틀 뒤에 우리를 살려 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어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게 되리라. 그러니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그분의 오심은 새벽처럼 어김없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비처럼,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시리라. 에브라임아, 내가 너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내가 너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너희의 신의는 아침 구름 같고 이내 사라지고 마는 이슬 같다. 그래서 나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들을 찍어 넘어뜨리고 내 입에서 나가는 말로 그들을 죽여 나의 심판이 빛처럼 솟아오르게 하였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신의이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예지이다.’ (호 6:1-6)

이스라엘아! 주 너의 하나님께 돌아오너라. 너는 죄악으로 비틀거리고 있다. 너희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주님께 돌아와 아뢰어라. “죄악은 모두 없애 주시고 좋은 것은 받아 주십시오. 이제 저희는 황소가 아니라 저희 입술을 바치렵니다. 아시리아는 저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저희가 다시는 군마를 타지 않으렵니다.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나님!”이라 말하지 않으렵니다. 고아를 가엾게 여기시는 분은 당신뿐이십니다.” ’ (호 14:1-3)


내가 무엇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고 무엇을 가지고 높으신 하나님께 예배 드려야 합니까? 번제물을 가지고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분 앞에 나아가야 합니까? 수천 마리 숫양이면, 만 개의 기름 강이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내 죄를 벗으려면 내 맏아들을, 내 죄악을 갚으려면 이 몸의 소생을 내놓아야 합니까?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이고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너에게 이미 말씀하셨다.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 (미 6:6-8)

“소돔의 지도자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고모라의 백성들아 우리 하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찐 짐승의 기름기에는 물렸다. 황소와 어린양과 숫염소의 피도 나는 싫다. 너희가 나의 얼굴을 보러 올 때 내 뜰을 짓밟으라고 누가 너희에게 시키더냐?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초하룻날과 안식일과 축제 소집 불의에 찬 축제 모임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 나의 영은 너희의 초하룻날 행사들과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그것들은 나에게 짐이 되어 짊어지기에 나는 지쳤다. 너희가 팔을 벌려 기도할지라도 나는 너희 앞에서 내 눈을 가려버리리라. 너희가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한다 할지라도 나는 들어주지 않으리라. 너희의 손은 피로 가득하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버려라. 악을 저지르기를 그만두고 선을 행하기를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주고 과부를 두둔해주어라.” (사 1:10-17)

“너희는 베델로 오너라. 그리고 죄를 지어라. 길갈로 오너라(거짓 산당 거짓 성당 거짓 교회당). 그리고 더욱더 죄를 지어라. 아침에 희생제물을 바치고 셋째 날에 십일조를 바쳐라. 누룩 든 빵을 감사 예물로 살라 바치고 큰 소리로 자원 예물을 공포하여라. 이스라엘의 자손들아 이런 것들이 너희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냐? 주 하나님의 말씀이다.” (암 4:4-5)

주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제물 바치는 것을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임금님이 주님의 말씀을 배척하셨기에, 주님께서도 임금님을 왕위에서 배척하셨습니다.” (삼상 15:22-23)


‘예수님께서 그 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 하였다.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 9:9-13)

註) ― 근동 특히 팔레스티나에서 식사는 사람들 사이의 일치가 가장 강하게 드러나는 때라고 생각하였다. 율법 준수에 온갖 정성을 기울이는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알지도 지키지도 못하는 “세리와 죄인”을 멸시할 뿐만 아니라 그들과 상종하는 것조차 피하였다. 더구나 그들과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죄인 곧 부정(不淨)한 자의 초청을 받아들이시어, 다른 많은 죄인과 함께 식사를 하신다. 이로써 그분께서는 유다교 랍비들의 중요한 거짓 규정을 의도적으로 깨뜨리신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 바리사이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들이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지 않았느냐? 또 안식일에 사제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범하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어 본 적이 없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다.’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 (마 12:1-7)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린 성전
한국교회가 설교 홍수 속에 있지만 말씀은 기근 ……………………………………………………… (글 : 정 병 선 2007. 11. 09)



본문: 마가복음 11장 12~25절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하신 예수님은 제일 먼저 성전에 들어가셨다. 이스라엘의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인 성전에 들어가셔서 구석구석을 둘러보셨다. 어떤 제자는 성전의 외형을 보고 그 규모와 위용에 놀란 나머지 ‘얼마나 굉장한 돌이며 건물이냐’고 감탄을 하였는데(막 13:1), 예수님은 성전의 외형을 보지 않고 내부와 구석을 살폈다. 겉을 보지 않고 속을 보았다. 그리고 날이 저물어 더 이상 성전에 있을 수 없게 되자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로 내려가 밤을 보냈다. 


이튿날 다시 예루살렘에 가려고 베다니를 떠나는 길에 배가 고파 먹을 것을 찾던 예수님은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멀리 있는 것을 보시고, 혹시 열매가 있을까 하여 가까이 갔다. 가보니 잎사귀만 무성할 뿐 열매가 없었다. 아직은 열매 맺을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열매 없는 나무를 향해 “이제부터 영원히 네게서 열매를 따먹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막 11:14)며 저주를 퍼부었다.


참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다. 아직 무화과 철이 아니라는 거야 예수님도 아실 터. 그런데 어찌하자고 저주를 퍼붓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된다. 그렇다. ‘철’을 ‘계절’로 이해하면 혼란이 생긴다. 하지만 여기서 사용된 ‘철’은 무화과 철을 가리키는 계절상의 용어가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때를 나타내는 종교적인 용어, 마가가 ‘때가 찼고 하나님나라가 가까웠다’(막 1:14~15)고 말할 때 사용했던 바로 그 용어(kairos)라는 사실을 알면 더 이상 헷갈리지 않는다.


마가는 본문을 구성할 때 치밀하게도 ‘하나님의 때’를 의미하는 종교적 용어를 무화과나무 이야기에 도입함으로써 무화과나무 이야기에 종교적 차원을 부여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곧바로 이어지는 성전 이야기와의 연결 고리를 맺어준다. 다시 말하면, 본문은 무화과나무 이야기를 통해 성전 이야기를 읽어야 성전 이야기가 제대로 읽히고, 또 무화과나무 이야기도 성전 이야기를 통해 읽어야 제대로 읽히도록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강도의 굴혈이 된 성전


이튿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예수님은 다시 성전에 들어가셨다. 성전에 들어가자 성전 안에는 사람들이 붐볐다. 성전 뜰에는 희생 제사로 드릴 소·양·비둘기 등을 판매하는 자들과 각지에서 온 순례자들에게 성전세로 사용되는 세겔을 교환해주는 환전상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그야말로 종교적인 상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희생 제사에 쓰는 기구를 가지고 아무나 성전 안으로 지나다니는 등 성전은 말할 수 없이 무질서했다. 예수님은 그런 성전의 모습을 보시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어 환전상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었다. 성전이 상업적으로 운용되고, 종교적으로 기능화 되어버린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예수님은 가차 없이 상업상의 거래를 중단시키고 장사꾼들을 성전에서 내쫓았다. 그리고 성전을 가로질러 종교의식에 필요한 물건 운반하는 것을 금지시킴으로써 성전의 종교의식도 중지시켰다. 


그리고는 여느 때와 똑같이 가르치기 시작했다. 하나님나라의 비밀이 어떠한 것인지를 가르치는 가운데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불릴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렸다”(막 11:17)며 정곡을 찌르는 말씀도 서슴지 않았다. 아! 강도의 소굴이라!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님의 성전을 가리켜 ‘강도의 소굴’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아스럽기도 하고 충격적이기도 하다. 요즘 네티즌들이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부르는 것보다 더 노골적이고 신성모독적인 언사가 아닐 수 없다. 이 행동이 예수님의 행동이기 때문에 별 문제 없이 받아들이는데 익숙해 있지만, 세속화되었다고 하는 현대 교회에서조차도 누군가가 교회를 향해 ‘강도의 소굴’이라고 한다면 분명히 교회로부터 돌팔매질을 당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돌팔매질을 당할 언사를 내뱉었다. 왜 그러셨을까? 예수님은 여간해서 중심을 잃지 않으시는 분이신데 왜 이처럼 중심을 잃은 듯한 언행을 하셨을까? 


그 당시 유대 종교의 실상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성전은 특정한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되고 있었다.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환전상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자기들만의 상호 이익을 보장하는 일종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었고, 모든 이익은 그들의 몫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본래 성전은 만민이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하는 곳으로 만민에게 개방되어야 한다. 만민이 하나님께 나아와 하나님께 기도하는 소통의 중심지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이사야 선지자가 바라본 성전의 비전이었다. 그런데 이 위대한 성전의 비전을 저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물론 유대 종교의 외피를 보면 결코 피폐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성전을 떠날 때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성전을 보고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돌입니까! 얼마나 굉장한 건물들입니까!”(막 13:1)라며 감탄할 정도로 위용이 대단했다. 또 성전 마당이 시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종교적인 활동도 활발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성전세를 바치고, 희생 제사를 드리며, 말씀과 전통을 따르고 있었다. 결코 말라비틀어진 죽은 종교가 아니었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성전이 아니라 강도의 소굴이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오래 전에 말한 것 그대로였다.


“너희는 이처럼 내가 미워하는 일만 저지르고서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으로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우리는 안전하다’라고 말한다. 너희는 그런 역겨운 모든 일들을 또 되풀이하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다. 그래,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이 너희의 눈에는 도둑들이 숨는 곳으로 보이느냐? 여기에서 벌어진 온갖 악을 나도 똑똑히 보았다.”(렘 7:10~11).


그랬다. 예레미야가 지적한 대로 성전은 도둑들이 자기들의 정체를 숨기는 곳이 되어버렸다. 온갖 죄악을 범하고, 탐욕에 이끌려 과부의 가산을 강탈하고도 성전에 들어가기만 하면 숨길 수 있었고 포장할 수 있었다. 성전은 온갖 죄악을 저지를 수 있는 방패막이였다. 당시의 유대 종교는 잎은 무성한데 열매는 없는 무화과나무, 바로 그것이었다.


이익에 눈먼 종교지도자들과 진리 들을 줄 아는 백성


예수님이 하나님나라의 진리를 가감 없이 말씀하고, 성전 중심의 종교가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말하며 비참하게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을 예고하자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없애버릴 방도를 찾기 시작했다. 예수님이 주변부를 건드릴 때는 적의를 표출하지 않았지만 저들의 체제와 이익의 중심부를 뒤흔들고 위협한다고 생각될 때는 여지없이 사나운 발톱을 드러내며 죽일 방도를 찾는 것이 저들이었다.


저들의 관심사는 처음부터 백성들을 진리로 자유케 하거나 하나님나라의 비전을 향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저들의 관심사는 언제나 자기들의 이익이었다. 저들이 좇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이익이었다. 그런데 진리는 언제나 현실적 이익에 반한다. 진리가 이익을 동반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때문에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가려야 했다. 진리를 가리지 않으면 이익을 도모할 수 없기 때문에 이익을 쫓는 자는 진리를 쫓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진리를 가로막고 억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반면에 백성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다. 갈릴리와 이방에 살던 주변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랐던 것처럼 예루살렘의 군중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귀가 번쩍 뜨였다. 그렇다. 백성들은 우둔한 것 같지만 진리를 들으면 깨우친다. 백성들이 진리를 깨우치지 못하는 것은 듣지 못해서다. 이익에 집착한 종교지도자들이 포장된 진리, 왜곡된 진리, 자기들 이익에 부합되는 거짓 진리만을 말하기 때문에 진리를 듣지 못해서 깨우치지 못하는 것이지 진리를 정직하게 들려주면 백성의 귀는 열린다.


그러기 때문에 이익에 눈먼 지도자들은 백성들의 귀가 열리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백성들의 귀가 열리면 자기들의 거짓이 통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하여, 저들은 할 수만 있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백성들의 귀를 열어주는 자를 제거하려 한다. 참 진리를 듣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제도와 권력으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들에게 그랬고,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에게 그랬으며, 오늘의 교회도 할 수만 있으면 성도들의 귀를 막으려 한다. 진리를 가르치는 자들의 입을 막으려 한다. 그것도 언제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또한 진리의 이름으로.


만민이 기도하는 집


바로 이것이 교회의 역사요, 종교의 역사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귀를 틀어막고 입을 틀어막는 것이 성경이 증언하는 이스라엘 종교의 역사요, 교회의 역사였다. 하지만 감사한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막으려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람에게 말씀을 들려주신다는 사실이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는 절망 가운데서도 희망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막는다고 막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듣는 자가 있게 하시기 때문에 교회는 희망이 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시피 하나님나라는 만민에게 개방되어 있다. 듣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들을 수 있도록 은혜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지만 않는다면 누구나 하나님께 나와 듣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의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그렇다면 기도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기도는 소통이다. 기도는 소통의 종교적 표현이다.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이야말로 신앙의 전부이며, 알파요, 오메가다. 더 이상 무언가를 덧붙일 필요가 없다.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이면 충분하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도, 십자가에 죽으신 것도, 부활하신 것도, 우리가 하나님과 소통하게 하기 위함이다. 사람을 만드실 때 당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신 것도 피차 소통하기 위해서다. 하나님나라도 하나님과 만물이 소통하는 나라일 뿐 다른 무엇도 아니다. 때문에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씀은, ‘만민이 하나님과 소통하는 집’이라는 말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소통은 조직이나 제도로 되지 않는다. 훈련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성경 공부로 되는 것도 아니다. 이런 것들이 소통을 돕는 하나의 방편일 수는 있지만, 그런 것들로 소통이 열리는 것은 아니다. 소통의 길은 오직 하늘로부터 시작된다. 소통은 은혜요, 선물로만 존재한다. 그러기 때문에 소통인 기도는 자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종교적인 업적이 될 수도 없으며, 축복을 받는 도구로 동원될 수도 없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소통을 위해 주어진 은혜의 선물일 뿐이다. 기도-소통은 진실로 신앙의 본질이요, 하나님의 집인 교회의 본질이다.   


말라 죽은 무화과나무


예수님의 무화과나무 이야기는 비유이지만 단순히 비유만은 아니다. 비유이면서 동시에 사실이요, 사실이면서 동시에 예언이다. 실제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다음날 아침에 보니 저주를 받은 무화과나무가 정말 뿌리 채 말라 죽어 있었다. 베드로는 전날 일이 생각나 예수님께 말했다. “선생님, 저것 좀 보십시오. 선생님이 저주하신 저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렸습니다.”(막 11:21) 이 말을 할 때 베드로의 가슴이 어땠을까? 아마 놀라는 정도를 넘어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두려움 같은 걸 느꼈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와 능력이 어떠함을 보고 놀라기도 했겠지만, 말라 죽은 무화과나무가 뭔가를 암시하는 것 같다는 직감 때문에 더 놀라고 두려웠을 것이다. 


그렇다.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은 것은 이스라엘의 미래, 성전 신앙의 미래를 보여주는 예언이었다. 무화과나무가 죽은 것처럼 이스라엘의 미래, 성전 신앙의 미래 또한 그러할 것임을 암시하는 예언이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호하며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더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막 11:11)라고 외쳤지만, 실제로 다가오고 있는 것은 다윗의 나라가 아니라 말라 죽은 무화과나무와 같은 운명이 될 것임을 예언적으로 보여주었다.   


기도하는 집의 위력


성전을 중심으로 한 세력과 성전 신앙의 운명이 말라 죽은 무화과나무처럼 될 것임에 반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은 진정한 능력을 행사하는 참 자유의 집이 될 것임을 말씀하신다. 베드로가 말라 죽어버린 무화과나무를 보고 “선생님, 저것 좀 보십시오. 선생님이 저주하신 저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렸습니다”라고 충격적인 말을 하자, 예수님이 곧바로 기도 이야기를 하신다. 나는 이게 조금은 생뚱맞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곰곰이 묵상해보니 뜻이 통한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말을 듣고 대뜸 하신 말씀이 “하나님을 믿어라”(막 11:22)였다. 그리고 곧바로 “누구든지 이 산더러 ‘번쩍 들려서 바다에 빠져라’ 하고 말하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고 말한 대로 될 것을 믿으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막 11:23)고 했다. 연이어 용서를 말씀하셨다(막 11:25).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 가지는 믿음·기도·용서다. 그런데 믿음·기도·용서는 이미 도래한 새로운 공동체의 본질과 성격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증하는 요소다. 예수와 함께 시작된 새로운 공동체는 하나님을 믿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방편이나 방어막이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될 것이고, 기도하는 공동체로서 하나님과 막힘없는 소통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며, 피차 용서하고 용서받는 공동체로서 허물과 죄악과 비난이 더 이상 기를 쓰지 못하는 공동체, 그래서 지금의 성전 공동체와는 질적으로 다른 공동체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하셨다. 이사야 선지자의 비전이 결코 헛되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지게 될 것임을 말씀하셨다. 


특히 믿음의 기도는 산을 옮긴다고 말한다. 당신의 말씀이 무화과나무를 말라 죽게 한 것처럼 믿음의 기도는 산을 바다에 빠뜨릴 수 있다고, 믿음의 기도는 엄청난 능력을 발휘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 기도는 하나님을 믿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과 소통하는 바로 거기에 기도가 있다. 기도는 단지 내가 믿는 것도 아니고, 내가 확신하는 것도 아니며, 원하는 것을 얻는 방편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럴 때 기도는 산을 바다에 빠뜨릴 수 있다.


나는 여기서 산을 단지 눈에 보이는 산으로만 보고 싶지는 않다. 여기서 산은 단지 산이 아니다. 산은 세상의 높아진 것들을 통칭한다. 온 세상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는 세상의 우상들을 통칭한다. 모든 사람들이 오르기 원하는 욕망과 성공을 의미한다. 산처럼 견고하여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돈과 명예와 세상적 가치를 의미한다. 이 높고 견고한 산을 어느 누가 어떻게 바다에 빠뜨릴 수 있겠는가? 정말 정복할 수 없는 요새처럼 보인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한다. 높은 산을 바다에 빠뜨려버릴 수 있다고. 믿음으로 기도하는 자는 산을 허물어버릴 수 있다고. 하나님과 소통함으로서 하나님의 세계를 알고,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아는 자는 세상의 우상들을 발로 찰 수 있다고. 세상의 우상들로부터 넉넉히 자유할 수 있다고. 그렇다. 나는 바로 이것이 기도의 진정한 능력이라고 믿는다. 세상의 우상들 앞에 절절매지 않는 능력, 세상이 우러러 보는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여길 수 있는 능력, 그런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 기도의 저력이라고 믿는다.


기도의 홍수 속에 기도의 빈곤?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돈이나 권세나 외적인 거룩함에 있지 않다. 오직 기도에 있다. 아니다. ‘기도’조차도 많이 왜곡되고 오염되어서 ‘기도’라고 하면 자칫 뜻이 와전되어버릴 수 있다. 하여, ‘기도’보다는 ‘하나님과의 소통’이라고 하는 것이 본래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는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하나님과의 소통, 이것이 신앙의 본질이요, 교회의 근본이며, 능력의 근원이다. 하나님과 소통하지 않은 채로 종교적인 활동만 무성하고, 종교를 빙자한 상거래의 장이 되어버린 성전은 더 이상 예수의 하나님나라를 담아낼 수 없다. 그런 성전은 폐기되어야 마땅하다. 뿌리째 말라 죽은 무화과나무처럼.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막 13:2).


하지만 기도하는 집이 되면, 하나님을 움직이는 종교적 수단으로써의 기도가 아니라 소통으로서의 기도하는 집이 되면 비록 두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다 할지라도 높은 산을 바다에 던져버릴 수 있게 될 것이고,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 역사의 중심-하나님나라의 중심이 될 수 있다. 주님은 교회를 향하여 한 가지 기대를 갖고 계신다. 교회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기를. 그래서 세상의 높아진 것들을 허물어뜨리기를.


그런데 한국교회의 기도소리는 크고 높으나 세상의 높아진 것들을 허물어뜨리기는커녕 오히려 세상의 높아진 것들을 우러러보며, 그 앞에 무릎 꿇고 있다. 기도로 열심히 세상의 우상들을 손에 넣게 해달라고 조른다.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기도하는 교회라고 소문은 자자한데 산을 바다에 빠뜨리지 못하고 산으로 기어오르기 바쁘다. 무엇 때문일까? 진정으로 기도하는 집이라면 그러지 않을 텐데…. 사랑하는 한국교회가 설교의 홍수 속에 있지만 말씀의 기근이듯이, 기도의 홍수 속에 있지만 기도가 빈곤한 건 아닌지….

 

이것들 중 만들어진 것과 버리지 말아야할 것은 과연 무엇?
버릴 것과 버리지 말 것을 옳게 분별하라(마 23:23-24, 눅 11:42)………………………………………………… (글 :  e-GOT 2007. 10. 12)



¤【마 23:23-24】°화로다 바리사이 해석자들과 너희 서기들아, 박하와 양념과 회향의 십일조로 인해서 율법의 중요한 판정과 긍휼과 믿음은 내어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들을 만들어서할 의무가 있는 것도 내버릴 것도 아니다. 눈먼 인도자들이 날벌레는 걸러내나 낙타는 단숨에 삼키도다.

{° ουαι  υμιν  γραμματεις  και  φαρισαιοι  υποκριται  οτι  αποδεκατουτε  το  ηδυοσμον  και  το  ανηθον  και  το  κυμινον  και  αφηκατε  τα  βαρυτερα  του  νομου  την  κρισιν  και  το  ελεος  και  την  πιστιν (우아이 휘민 그람마테이스 카이 화리사이오이 휘포크리타이 호티 아포데카투테 토 헤뒤오스몬 카이 토 아네똔 카이 토 퀴미논 카이 압헤카테 타 바뤼테라 투 노무 텐 크리신 카이 토 엘레오스 카이 텐 피스틴, 화로다 바리사이 해석자들과 너희 서기들아, 그 박하와 그 양념과 그 회향의 십일조로 인해서 율법의 중요한 그 판정과 그 긍휼과 그 믿음은 내어버렸도다) ταυτα  | δε | [δε] | εδει  ποιησαι  κακεινα  μη | αφειναι | αφιεναι | (타우타 | 데 | [데] | 에데이 포이에사이 카케이나 메 | 압헤이나이 | 압히에나이 |, | 그러나 | 이것들을 만들어서할 의무가 있는 것도 | 내버릴 | 내버릴 | 것도 아니다) ° οδηγοι  τυφλοι | | οι | διυλιζοντες  τον  κωνωπα  την  δε  καμηλον  καταπινοντες (호데고이 튑흘로이 | | 호이 | 디윌리존테스 톤 코노파 텐 데 카멜론 카타피논테스, 눈먼 인도자들이 그 날벌레는 | | 그 | 걸러내나 그 낙타는 단숨에 삼키도다)}



¤【눅 11:42】°또한 화로다 너희 그 바리사이들아,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로 인해서 판정과 하나님의 사랑은 지나쳐버렸다. 그러나 이것들을 만들어서할 의무가 있는 것도 지나쳐버릴 것도 아니다.

{° αλλα  ουαι  υμιν  τοις  φαρισαιοις  οτι  αποδεκατουτε  το  ηδυοσμον  και  το  πηγανον  και  παν  λαχανον  και  παρερχεσθε  την  κρισιν  και  την  αγαπην  του  θεου (알라 우아이 휘민 토이스 화리사이오이스 호티 아포데카투테 토 헤뒤오스몬 카이 토 페가논 카이 판 라카논 카이 파렐케스떼 텐 크리신 카이 텐 아가펜 투 데우, 또한 화로다 너희 그 바리사이들아, 그 박하와 그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 로 인해서 그 판정과 그 하나님의 사랑은 지나쳐버렸다) ταυτα  δε  εδει  ποιησαι  κακεινα  μη  παρειναι (타우타 데 에데이 포이에사이 카케이나 메 파레이나이, 그러나 이것들을 만들어서할 의무가 있는 것도 지나쳐버릴 것도 아니다)}



앞의 두 구절을 해석하기 위해서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과연 율법에선 십일조를 누가 무얼 드렸는지와 또 십일조의 진정한 의미가 판정 긍휼 확신 하나님의 사랑임을 믿어야한다.


율법에서 말하는 십일조는, 하나님께 땅을 대여 받은 자들(레 25:23)과 십일조의 수혜자인 레위인들이(민 18:25-29) 내는 것이다. 이는 고대 이스라엘이 농경과 목축 사회였음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따라서 땅을 대여 받지 못한 노예, 어부, 물건을 만들어 파는 장인들.. 등은 십일조라는 율법의 의무에서 빠져있는 자들이다. 땅이 있어야 희년에(레 25:8-22) 맨 처음 대여 받았던 자의 자손이에게 땅을 되돌려주는 것이 가능해 지고(레 25:23-28, 민 27:6-11, 롯 4:1-12, 렘 32:8), 땅이 있어야 안식년(레 25:1-7)도 지킬 것이 아닌가? 또 땅이 있어야 그 소산물인 곡물과 과실과 굽이 갈리고 되새김질 하는 정결한 가축을 바칠게(레 25:30-33) 아니겠는가?


이런 이유로 한참 후대의 바리사이 해석자들은(υποκριτης 휘포크리테스 | 대답하는 사람, 해석자, 통역자, 배우, 연극배우, 위선자) 율법에서 빠진 이들 중 누구까지 십일조를 내야 되는지, 율법에서 빠져있는 이들 작물 중 어디까지 십일조를 해야 되는지 신학적으로 정립(Mishnah, 미쉬나 : 미쉬나는 대부분 기원 70-220년경에 생존한 랍비들의 토론에서 성립되어 있다. 이들의 율법적 토론은 점차로 집성되고, 탄나임으로서 알려지는 학자의계속적 노력에 의해 성문(成文)으로 되었다)하는데 논쟁하고 답하는 걸로 소일할 만큼 온 종일을 매진했다. 이런 해석자들의 연구를 모으고 편집하는 자가 바로 서기관들이다(γραμματευς 그람마튜스 | 서기, 필사자, 비서, 기록자, 성경에서는 모세의 율법과 성경을 배운 자, 해석자, 교사). 이들 모두에겐, 십일조의 본질을 이해하기 보다는 ‘십일조 할 것과 안할 것’을 결정짓는 세부조항의 확장이 더 중요했다. 연구하고 논의하며 가르치고 기록할 방향이 틀린 것이다.


~ ταυτα  | δε | [δε] | εδει  ποιησαι  κακεινα  μη | αφειναι | αφιεναι | (타우타 | 데 | [데] | 에데이 포이에사이 카케이나 메 | 압헤이나이 | 압히에나이 |, | 그러나 | 이것들을 만들어서 할 의무가 있는 것도 | 내버릴 | 내버릴 | 것도 아니다)’, ~ ταυτα  δε  εδει  ποιησαι  κακεινα  μη  παρειναι (타우타 데 에데이 포이에사이 카케이나 메 파레이나이, 그러나 이것들을 만들어서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지나쳐버릴 것도 아니다)(이것들은 만들어서 할 필요가 없고 이것들은 지나쳐버려서는 안 된다) 예수께서 지적하신 것이 바로 이것들에 관해서 이다.


박하(ηδυοσμον 헤뒤오스몬 | 달콤한 냄새, 박하), 양념(ανηθον 아네돈 | 아니스, 딜(향신료나 약재로 사용되는 식물)), 화향(κυμινον 퀴미논 | 회향, 쓰고 강한 맛과 향기로운 맛을 가진 씨를 가진 팔레스타인에서 재배되는 식물), 운향(πηγανον 페가논 | 운향풀, 약효를 지닌 약 60 cm(2 피트)정도의 관목), 모든 채소(παν  λαχανον 판 라카논 ; λαχανον 라카논 | 풀, 채소). . . . . . (και) 판정(κρισις 크리시스 | 분리, 절단, 분할, 선택, 판정, 판결, 재판관의 단체, 정의) 긍휼(ελεος 엘레오스 | 자비, 긍휼) 확신(πιστις 피스티스 | 진리에 대한 확신, 믿음, 충성, 충실, 성실) 하나님의 사랑(την  αγαπην  του  θεου 텐 아가펜 투 데우 ; αγαπη 아가페 | 형제의 사랑, 애정, 선의, 사랑, 자비, 사랑의 제사) 이러한 것들(ταυτα 타우타 | 이것들, 이러한 것들) 중에서 ‘필요 없이 만들어서하고 있는 것과 무심히 지나치지 말아야할 것’을 구분하라는 것이다.


너희들이 만든 세부 조항(유전, 의문)으로 걸러낸(διυλιζω 디윌리조 | 여과하다, 거르다, 여과기를 통해 쏟다, 물기를 빼다) 티끌만한 날파리를(κωνωψ 코놉스 | 포도주를 발효시켜 증발시키는 포도주 각다귀 또는 모기붙이) 가지고(레 11:20-23, 신 14:19) 의미 없이 말장난할 필요(εδει 에데이 | 필요하다, 의무가 있다, 옳고 적합하다)도 없고(κακεινα  μη 카케이나 메 ; κακεινος 카케이노스 | 그리고 그는, 그 역시 ; μη 메 | 아니다, 하지 않도록, ~도 아니다), 율법의 의미(본질)로 더 훨씬 무겁고 중한(βαρυς 바뤼스 | 무게가 무거운, (비유) 짐스러운, 엄한, 대단히 중요한, 잔인한) 낙타를(καμηλος 카멜로스 | 낙타) 너희는 잡아내지도 않았다(κακεινα  μη 카케이나 메 ; κακεινος 카케이노스 | 그리고 그는, 그 역시 ; μη 메 | 아니다, 하지 않도록, ~도 아니다)함이니, 바리사이 해석자와 서기들의 재앙이다(ουαι 우아이 | 아아, 슬프도다, 화로다). 하찮은 양념들의 십일조에 대해 훈계당하는 사람들의 잘못이 아닌, 무지와 무감각과 어둠에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너희 소경된 인도자의(οδηγοι  τυφλοι 호데고이 튑흘로이) 잘못을 혹독하게 질타하시니(마 7:3-5, 눅 6:39-42), 그렇게 박식하다 들먹거리던 율법사들이(νομικος 노미코스 | 법과 관련된 사람, 법에 정통한 사람, 신약에서는 모세의 율법 해석자나 교사) 욕으로(υβριζω 휘브리조 | 거만하다, 오만하게, 무례하게 행동하다, 거만하며 수치스럽게 행동하다, 나쁜 말로 상처를 입히다) 밖에 듣질 못한 것 아니겠는가(눅 11:45)?


십일조를 강요하면서도, 정작 옳은 선택(정의)과 올바른 믿음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하신 사랑을 내보일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들에 대한 베품과 나눔을 무시해버린 저기 유대 바리사이들 보다 더 악랄하게 장성치 못한 코흘리개에게 조차도 십일조의 짐을 지우는(φορτιζω 프홀티조 | 짐을 얹다, 짐을 싣다, (관습과 부당한 교훈의)짐을 지우다) 너는 도대체 누구냐?


결국 오늘날 농업에 종사하지 않는 대부분의 교인들에게 문자적 해석을 내놓고, 율법적 흉내 내기 조항을 들이댄 눈먼 인도자들의 날파리식 십일조는, 과거 농경사회였던 유대공동체를 삼켜버린(καταπινω 카타피노 | 단숨에 들이키다, 삼키다, 게걸스레 먹다, 몽땅 없애다, 파괴하다) 것처럼 여기서도 그 위력을 떨칠 허상들 중 하나란 말인가? 미개한 이천년 전 바리사이보다 못한 지금을 어찌해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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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들이 설교 때마다 거의 매번 되 뇌이는 십일조의 근거와 보상...

그리고 그들의 그러한 주장이 정당한지에  대해 정리해 봤습니다.

 

 

1. 십일조의 성경에서의 근거

 ...교단 목사마다 좀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다음의 구절을 인용 합니다.

 

1) 레위기 27:30
2) 레위기 27:32

3) 신명기22/27 ~ 31
4) 히브리서  7/ 2 (4)
5) 마태볶음 23/ 23
6) 말라기  3/ 8

 

레위기27

/27 부정한 짐승이면 너의 정가에 그 오분 일을 더하여 속할 것이요 만일 속하지 아니하거든 너의 정가대로 팔찌니라
28 오직 여호와께 아주 바친 그 물건은 사람이든지 생축이든지 기업의 밭이든지 팔지도 못하고 속하지도 못하나니 바친 것은 다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함이며
29 아주 바친 그 사람은 다시 속하지 못하나니 반드시 죽일찌니라
30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31 사람이 그 십분 일을 속하려면 그것에 그 오분 일을 더할 것이요


 

 

신명기/22
27 네 성읍에 거하는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니 또한 저버리지 말찌니라
28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29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말라기;3

/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9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히브리서7장 /

4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5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
6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약속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7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8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9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마태23/

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거의 대부분의 목사들은 , 위 성경 구절로  신도들을 겁주고,

신도의 의무라 몰아대며....울며불며  애원한후.... 

공통적으로 .. 당근을 내 미는데...그 당근은....십일조에 대한 보상 입니다.


 

 

2. 십일조 의 보상에 대한 성경의 근거.

 

말라기3/

9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12 너희 땅이 아름다와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렇다면 이들..우리나라 대부분 개신교 목사들의  십일조에 대한 주장은 ,

얼마만큼 정당 할까요????

이에대해서는  수많은 정당한  비판이 있기에 부족한 제가 직접 제 의견을 피력 하지는 않겟습니다.

그냥 백과 사전의 ...공인되고 보편적인 십일조에 대한 기술을  올리도록 하겟습니다.

 

백과 사전 기술들의 공통점은 근대 시민 혁명이후 ....벌서3백년전에....

서구 에서는 페지된 제도라는 것입니다.

 

왜 ...유독 우리나라 목사들만 저 구약의 낡은 조항으로 십일조를 강요 하는지?????

누구 알려줄분 안계셔요????

 

 

참조...두산 백과사전 ,위키백과와의 십일조 기술.
요약
중세 유럽의 교회에서 교구민()으로부터 수입의 1/10을 징수하였던 세.
본문

'10분의 1세', '10분의 1교구세'라고도 한다. 고대의 유대교도에게 수입의 1/10을 야훼신께 바칠 것을 명한 구약성서의 율법에서 연유한 것인데, 구약시대의 제사의식에 참예하는 유대인들은 형편에 따라 빵과 포도주를 들고 와서 나누어 먹는 정도였다. 서유럽에서 십일조가 처음에는 이를 그리스도교도가 하느님에게 자의()로 즐겨 바치는 경건한 신앙행위로 받아들여졌으나, 6세기 이후의 교회는 점차 신자에게 이를 강요하다가, 8세기에 이르러 카롤링거왕조의 피핀과 카를대제 등은 이를 아예 의무화하였다. 특히 10세기에 성행한 사유교회제()를 이용하여 세속 영주()들은 자신들의 영민()들이 바치는 십일조를 사유화하여 갔다.

교회는 라테란 공의회(, 1078) 및 1179년 그레고리우스의 교회제도개혁을 통하여 영주로부터 십일조를 환수하려 하였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그 대부분은 세속 영주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소교구()의 사제()는 그의 생활과 교회의 관리·유지를 명분으로 곡물·포도주·가축·사료(이상 대십일조), 아마()·가금()·채소(이상 소십일조), 개간지(:신십일조) 등에 십일조를 부과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실제로 수입의 1/14 또는 1/15밖에 되지 않았다.

이것도 앙시앵 레짐의 말기에 이르러서는 민중의 불평과 비난의 대상이 되어 1789∼1790년 대혁명의 과정에서 폐지되었으며, 영국에서는 1648년과 1688년에, 독일에서는 1807년에 각각 폐지되었다.

본문

'10분의 1세', '10분의 1교구세'라고도 한다. 고대의 유대교도에게 수입의 1/10을 야훼신께 바칠 것을 명한 구약성서의 율법에서 연유한 것인데, 구약시대의 제사의식에 참예하는 유대인들은 형편에 따라 빵과 포도주를 들고 와서 나누어 먹는 정도였다. 서유럽에서 십일조가 처음에는 이를 그리스도교도가 하느님에게 자의()로 즐겨 바치는 경건한 신앙행위로 받아들여졌으나, 6세기 이후의 교회는 점차 신자에게 이를 강요하다가, 8세기에 이르러 카롤링거왕조의 피핀과 카를대제 등은 이를 아예 의무화하였다. 특히 10세기에 성행한 사유교회제()를 이용하여 세속 영주()들은 자신들의 영민()들이 바치는 십일조를 사유화하여 갔다.

교회는 라테란 공의회(, 1078) 및 1179년 그레고리우스의 교회제도개혁을 통하여 영주로부터 십일조를 환수하려 하였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그 대부분은 세속 영주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소교구()의 사제()는 그의 생활과 교회의 관리·유지를 명분으로 곡물·포도주·가축·사료(이상 대십일조), 아마()·가금()·채소(이상 소십일조), 개간지(:신십일조) 등에 십일조를 부과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실제로 수입의 1/14 또는 1/15밖에 되지 않았다.

이것도 앙시앵 레짐의 말기에 이르러서는 민중의 불평과 비난의 대상이 되어 1789∼1790년 대혁명의 과정에서 폐지되었으며, 영국에서는 1648년과 1688년에, 독일에서는 1807년에 각각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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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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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는 헌상의 형태로서 잘 알려진 것으로서, 종교적인 또는 세속적인 기관에 납부하는 수입의 10퍼센트에 해당하는 조세이다. 이러한 조세는 이미 고대에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중세를 거쳐 근세 초기에까지 존속하였다.

[편집] 구약 시대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친다는 것에서 그 이름이 연유한다. 이는 구약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는 것으로 기원전 이스라엘에서부터 시행되던 제도이다. 이스라엘 민중이 실제로 십일조로 구별하던 분량은 수입의 1/10이 아니라 2/10 내지 3/10에 까지 이르렀다. 그 내역은 다음과 같다:

(1) 레위인들을 위한 것 (구약성경 민수기 18:21-24):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 레위인들은 성전에서 봉사하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이들 레위인들을 위해 다른 지파 사람들은 수입의 1/10을 떼어두어야 했다.
(2) 성전을 위한 것 (구약성경 신명기 14:22-27): 이스라엘 장정들은 1년에 세 번 성전에 모여야 했는데, 그 때 사용될 경비를 위해 수입의 1/10을 떼어두어야 했다.
(3)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십일조 (구약성경 신명기 14:28-29):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한 것으로 수입의 1/10을 떼어두어야 했다.

위에서 세 번째 십일조는 매년 했는지 아니면 삼 년에 한 번 했는지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다.[출처 필요]

[편집] 신약 이후 시대

신약성서에서는 십일조가 징수되지 않았고 자발적으로 가난한 이웃을 도왔다고 주장되고 있다. 그러나 예컨대 마태오 복음서 23장 23절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가 십일조를 계속 고수하였다는 주장도 강하다.하지만 마태오 복음서 23장 23절은 예수 그리스도가 당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바리새인,바리새파)들이 종교적 의무에는 충실하면서,그 의미는 실천하지 않는 것에 대한 비평이라는 해석도 있다. 기독교 초기에는 여러 교부들이 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십일조를 낼 것을 요구하였다. 주교에게 헌금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십일조는 최초로 카를 대제 시기에 언급되었고 완전하게는 1140년의 그라티아누스 교령집에 규율되어 있다. 자체적인 교회제도(영주의 보호 하에 있는 교회)와 세속 영주로서의 수도원에 의하여 십일조는 사실상 세속적인 조세납부 형태를 띄었다. 그 외에도 십일조는 종종 임대되었고 임차인은 십일조와 사실 상의 납세액의 차액을 받았다.

[편집] 중세와 근대

농부들은 수확의, 수공업자들은 생산의 십분의 일을 내야 했다. 유럽에서는 모인 십일조를 보관하기 위하여 마을에 큰 창고가 설립되었다. 종종 마을에서 교회 다음으로 큰 건물이었다. 십일조를 내야 하는 토지등을 십일조의무지라 한다. 어떤 수도원은 60개의 마을에 십일조의무지를 가지고 있었다. 중세에는 구약에서 기원하는 십일조가 확대되었다. 대십일조와 소십일조가 구별된다. 대십일조는 성경에 따라 곡물과 큰 가축을 내는 것이다. 소십일조는 추가적으로 기타 아채, 과일, 채소 등의 농작물과 작은 가축을 내는 것이다. 무엇에 대하여 소십일조가 부과되는지는 지역에 따라 달랐다. 그 외에도 십일조는 지역에 따라 큰 편차를 보인다. 즉 다음과 같은 종류들이 있다.

  • 압착된 포도에 내는 포도주십일조.
  • 수확된 건초에 내는 건초십일조.
  • 벌채된 목재에 내는 목재십일조.
  • 도축된 동물 내지 그로부터 만들어진 육류 생산품, 달걀, 우유 등에 내는 피의 십일조.
  • 새로운 개척지에 부과되는 신개척지십일조.

하지만 시민혁명으로 교회가 국가와 분리되면서,십일조는 유럽의 교회와 사회에서 정식으로 폐지되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종교도 사업임니다

그러니 종교를믿는 대금을 지불해야함니다 그래야 그에 종사하는 분들도 먹고 살갯지요?

십일조는 그대금으 일부임니다

교회도 매매가됨니다

헌금 십일조 업이 어떻게 운영자금 마련 하갯슴니가

부속유치원 ?선교원?

이건 일부일뿐임니다

부가세업는 사업임니다

25일 부가세 내야는데 모자라서 고민인  저로서는

부러울 따름임니다

ㅠㅠ

개신교를 욕하는건 절대아님니다

부러운건 부러운것 아님니까?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십일조의 기원

성경에 십일조의 기원은 이렇게 시작 되었습니다.

십일조는 약소국이 강대국에 조공으로, 또는 종교적 목적으로 바치 십분의 일 10퍼센트 입니다.

십분의 일을 바친 두 가지 사례가 성서에 나옵니다.

첫째는 것은 아브라함이 조카 롯의 소유물을 약탈해간 그돌라오멜과 그의 동맹자들에게 승리하고 얻은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준 경우입니다.. -창세 14:18-20

 

둘째는 야곱에 관한 것인데, 야곱은 자신의 소유물의 십분의 일을 하느님께 바치겠다고 베델에서 서원하였습니다.―창세 28:20-22.

이 두 가지 기록은 자원해서 십분의 일을 바친 사례일 뿐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야곱이 후손들에게 그런 본을 따르라고 명령을 하여 종교 관행이나 관습 혹은 법을 정했다는 식의 기록은 성서 어디에도 전혀 없습니다.

 

율법시대 십일조

그 후 십일조는 율법 계약이 발효됨과 더불어 제정된 것입니다.

십일조에 관한 모세 율법에 이스라엘에게 십일조에 관한 법을 주신 데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율법 아래서 십일조 마련의 주된 목적은 이스라엘의 성전과 제사직을 지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상속재산이 없는 레위인들의 제사직을 지원하는 마련이었습니다.

 

1세기의 십일조

예수께서 돌아가신 이후에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십일조 규정이 없습니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십일조를 내라는 명령을 받은 적이 결코 없었습니다.

대속희생으로 그리스도가 죽음으로 모세의 율법 계약이 성취되어 끝났을 때 십일조를 내야 하는 의무도 끝나게 되었습니다. - 에베소 2:15 골로새 2:13, 14

예수의 제자들이 십일조의 강제 규정을 강조하며 강요한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1세기에 다른 방법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복음전파활동과 물질적 기부 양면으로 그리스도인 봉사를 지원하라는 권고를 받았습니다.

교회의 비용을 충당하려고 특별히 정해진 액수를 내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에 따라” 헌금하고 “자기 마음에 작정한 대로” 내며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하지” 않아야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즐거이 주는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고린도 둘째 8:12; 9:7

사도 바울은 교회에게 재정적으로 무거운 짐을 부당하게 지우지 않으려고 노력한 면에서 본을 세웠습니다.―사도행전 18:3; 데살로니가 전서 2:9

이렇게 1세기에 제자들도 십일조에 생명을 걸 정도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았습니다.

최근 목자들이 사용하는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기록도 성경에 없습니다.

 

오늘날의 십일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십일조의 강제 규정이 없습니다.

오히려 목자들이 열심히 일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도록 권고합니다. 에베소 4:28

자신의 짐은 자기가 져야하며 자기가족을 부양하지 못하면 믿지 않는 이방인만도 못한 자라고 알려줍니다. -디모데전서 5:8

목회자는 신도들 위에 군림하지 말고 가장 작은 자로 섬겨야 합니다.

목회자도 열심히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는 방법을 솔선하여 그 모범을 신도들에게

보여주는 가르침이 오늘날 그리스도의 법 아래서의 십일조의 정신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십일조의 강제규정에서 해방되어있습니다.

 

출처 - 개인 성경연구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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