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를 내라고 강요할 때마다 주로 인용하는 성경구절이 말3:10과 마23:23입니다.
십일조를 주장하는 목회자들은 이 구절을 근거성구로 거론하면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하라고 했으니
십일조도 행하고 의인신도 행하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그들이 곧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마23:23의 저주는 그런 주장을 하는 목회자들에게 임하는 것이니
마태복음 23장은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부른 저주의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 글을 참조바랍니다.
십일조를 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곧 서기관과 바리새인이며
그들이 곧 소경된 인도자이니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사는 불쌍한 일용직 근로자는 무시하고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외제차 타고 다니고 호화주택에 사는 부자들에게는 굽신굽신 거린다는 것입니다.
낙타 타고 다니는 자는 예나지금이나 부자입니다.
십일조와 의인신 얘기를 하다가 왜 갑자기 하루살이와 낙타 얘기를 하신 것입니까?
지금 저주의 대상이 되고 있는 존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입니다.
그 주제를 놓치면 안됩니다.
일용직 근로자는 십일조 낼 돈도 없지만 부자는 십일조를 많이 내기 때문에
그런 부자들을 인도하고 있는 자가 소경인 서기관과 바리새인이며
십일조라는 돈 때문에 그런 저주받을 인종 차별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의인신만 지키면 되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종이니 율법은 물론 지켜야 하는 것이고
율법보다 더 중요한 의인신도 물론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서기관과 바리새인같은 악인들을 위해서 제정된 법률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같은 저주받은 종들은 반드시 지켜야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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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를 내라고 강요할 때마다, 거의 반드시 인용되는 성경구절이 말라기입니다. (말라기 3장)
그러나 이 말씀은 패역한 종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지 의로운 아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 말3:10는 말3:9에 연결된 것이며
말일에 나타날 패역한 이스라엘 12지파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어떤 개인이 십일조를 내지않음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온 나라가 십일조와 돈을 빼돌리고 횡령하는 도적질을 했기때문에 그것을 질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라기 3장을 인용하면서 개인의 십일조를 연결시키면 안되는 것입니다.
말라기서는 패역한 이스라엘에게 하신 말씀이지
십일조를 내지않는 어떤 개인에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나라 전체가 십일조를 도둑질했다는 것은
말일에 나타나는 패역한 교회의 치리자들이
십일조를 받아서는 개인의 주머니로 횡령했다는 뜻입니다.
너희같은 패역하고 악한 족속이 세운 나라가 십일조를 정상적으로 사용하여
가난하고 불쌍한 신자들을 도와줌으로 부의 평준화를 이룬다고?
그런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약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복을 산처럼 부어주겠다.
십일조를 횡령하지말고 십일조를 가난한 사람에게 사용해서 부의 평준화를 이루어봐라.
그리고나서 내가 복을 주나 주지않나 시험해봐라.
이러한 반어법적인 말씀이니
말3:10은 십일조를 자신의 주머니에 횡령하는 교회의 치리자를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불륜6걸같은 사람들도 간통했을 뿐 아니라 성도들의 십일조를 자신들의 주머니에 횡령했습니다.
불륜6걸에 대하여는 다음 글을 참조바랍니다.
말3:10은 성도들의 헌금 수십억을 자신들의 호주머니로 횡령함으로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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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들은 헌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고 분명히 선포하셨습니다.
잘사는 신자가 형편이 어려운 신자를 도와주는 실업수당같은 것이 헌금의 개념입니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 글을 참조바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리새인에 대한 저주의 노래를 여러 차례 불렀으니
누가복음 11장에도 바리새인에 대한 저주의 노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11장은 바리새인의 집에서 부른 저주의 노래입니다.
예수님이 식사 초대받아 바리새인의 집에 갔는데
바리새인이 장로들의 유전을 강요하기 때문에
그런 바리새인을 책망하면서 저주의 노래를 부른 것입니다.
식사하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한다는 것은 모세의 율법이 아니고 장로들의 유전이었으니
장로의 유전이란 신앙이 오래된 사람들이 제멋대로 만들어낸 율법을 의미합니다.
식사하기 전에 손을 씻어야한다는 장로의 유전에 대하여는 마태복음 15장에서 설명되고 있습니다.
유전이란 전하여 내려오는 전통을 말하는 것이니 (遺傳, 전할 유, 알릴 전)
장로들의 유전이란 신앙생활이 오래된 자들이 만들어낸 전통을 의미합니다. (장로 = elder)
지금으로 치자면 십일조, 주일헌금, 출석체크.... 이런 것들이 장로들의 유전입니다.
장로의 유전에 관하여는 다음 글을 참조바랍니다.
예수님은 장로의 유전을 강요하는 바리새인에게 저주의 노래를 불러주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저주의 노래와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버전입니다.
현대판 바리새인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겉으로는 성의라고 하는 거룩한 가운을 걸치고 거룩한 단상에 서서 설교하지만
속으로는 수십억씩 헌금을 횡령하고 유부녀와 간통하여 가정을 파괴하고....
교회의 헌금으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현대판 바리새인들에게 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도들의 헌금으로 대형교회 짓고, 외제차 타고 다니고, 대형 아파트에 살면서 호의호식하지 말고
헌금을 가난한 사람 도와주는데 쓰라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이 명령을 왜 안듣는 것입니까?
예수님 명령을 안듣는 사람이 현대판 바리새인 맞지요?
구제하면 깨끗해 진다는데, 구제하지않으니 더럽지요?
더러운 현대판 바리새인인 것입니다.
42절에서 십일조는 저주받을 바리새인들이나 하라고 했지요?
더러운 바리새인들에게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라고 했으니
바리새인들은 공의 사랑도 하고 십일조도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공의 사랑만 하면 되고 십일조에 대한 의무는 없습니다.
십일조는 더러운 바리새인이 행해야하는 율법입니다. 하나님 아들들에게는 상관없는 율법입니다.
무덤은 보통 둥그렇게 봉분을 쌓아 만듭니다.
그런데 그냥 평평하게 만들어놓은 무덤은 평지처럼 보입니다.
현대판 바리새인들의 교회가 평토장한 무덤인데
겉으로는 아름답고 거룩한 교회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영이 죽은 사람들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무덤에 관하여는 다음 글을 참조바랍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저주를 퍼부었더니
식사 초대를 한 바리새인과 함께 했던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너무 심하지 않느냐고 항의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모욕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까?
바로 눅11:45에 해당되는 율법사 바리새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항의에 저주의 노래를 멈추거나 완화한 것이 아니라
한층 더 심한 저주의 노래를 계속해서 퍼부었습니다.
성경의 역사는 참형상이 아니요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이니 (히10:1)
2천년전 장로의 유전을 강요하던 바리새인은 그림자요
오늘날 장로의 유전을 강요하는 바리새인이 저주받을 대상의 참형상이기 때문입니다.
현대판 바리새인들은 교회와 성경을 차지하고 앉아서
자신들이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듯 행세하고 있습니다.
온갖 주석책을 만들어내어 성경을 해석하고 있지만 잘못된 해석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거짓 교리로 가득합니다.
이 저주받을 율법사들은 모세의 율법이 폐기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첫 페이지에 십계명을 인쇄한 성경책을 텍스트로 삼아 설교하고
십일조 율법을 강요하는 현대판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렇지만 십일조를 비롯한 모세의 율법은 폐기된 것이 확실합니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 글을 참조바랍니다.
바리새인이 가지고있는 지식의 열쇠는 가짜이기 때문에
자신도 성경의 지식에 들어가지 못하고
또한 그들을 따라가는 신자들도 성경에 지식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장로의 유전을 저주하고 바리새인 및 율법사에게 이렇게 심하게 저주의 율법을 퍼부으니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혈안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논쟁을 벌이며 여러가지 말로 비위를 건드리고
그러면서 뭔가 책잡아서 그것을 빌미로 죽이려고 말의 길목을 지키려 애를 썼지만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님은 그들과의 모든 논쟁에서 이긴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살인자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집에서만 저주의 노래를 부른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저주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앞에서 링크로 설명한 마태복음 23장 저주의 노래 )
예수님은 장로의 유전과 바리새인, 율법사가 자신의 원수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