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다른 신화를 베끼고 짜집기 했다는것에대해서..

성경이 다른 신화를 베끼고 짜집기 했다는것에대해서..

작성일 2006.03.26댓글 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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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이점에서 곰곰히 생각해봤습니다.

 

그리스신화를 표절했다는등 조로아스터교나 여러 이방종교들 짬봉해서

 

성경이 씌여졌다는등

 

음..정말 고민한끝에 해결점을 찾았지요

 

자 누구든지 종교는 창설할수 있습니다.

 

지금도 가능하지요 성경을 조잡해서 만들던지 다른 신화나 전설등을 가지고

 

짜집기 해서 종교를 창설할수 있습니다.

 

그때 고대 당시에도 수많은 종교들이 있었겠죠..저마다 각자 자기 종교가 옳다

 

저종교는 우리꺼 베꼇다 등등..

 

그럴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근데 갑자기 드는생각

 

그런데 그 수많은 종교가 절대 흉내낼수 없는게 뭐냐면 그건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절대 그걸 흉내낼수가 없을것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지 않았다면 아직도 수많은 종교가 자기가 옳다 아니다 주장할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걸아시고 예수님을 보내신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예수가 역사적 인물이었다는것은 부정할수없을것입니다.

 

기독교를 부정하는분은 그것자체도 부정하더군요..

 

그것역시 다른종교가 절대 흉내낼수없는것이기 때문이죠

 

우리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고 다시 부활하신 예수님 이건 그 어떤종교도 흉내낼수없는것이기에 예수님은 당당히 내가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다 라고 말씀하신것입니다.

 

음..그럼 이런생각들을 하시겠죠? 예수님을 신격화시킨거 아니냐?

 

누가그랬을까요?

 

신격화라..멀쩡한 예수를 신격화 시킬이유가 있을까요? 그것이 신격화라면

 

신약의 모든 내용이 거짓이라는건데.. 원수를 사랑하라 이웃을 네몸같이 아껴라

 

갖가지 기상천외한 비유들.. 그리고 제자들의 어리석음과 유대인들의 멍청함과 아담의 범죄부터 예수의 대속죄로 인해 구원받는 그 엄청난 논리를 꾸며낼수 있을까요?

 

또 거짓을 위해 순교의 위험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파할이유가 있을까요?

 

또한 신약을 뒷받침 하는 유대 역사서나 신약에 나오는 성령의 은사가 지금도 존재하는데요?

 

결국 구약까지만 보면 니종교 내종교 옳다 아니다 분쟁을 끊으신게 바로 예수님으로서 진리를 증명하신거죠

 

지금도 제2의 예수님을 꿈꾸며 예수님 행세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들이 과연 부활할까요?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었기때문에 2000년이지난 지금에도 세계곧곧에 복음이 전파된거지 단순한 거짓말이었다면 거기서 끝났겠죠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그리스도..그분이 진리라는 증거입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예수가 인도에 가서 불자가 되었다는 엉뚱한 책을 쓴자가 있고 그 내용을  믿는 자들이 있는데 성경을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타 종교와의 연관성도 그렇습니다.

 

예수교는 유일신교이며 토템이나 우상숭배를 배타하는 종교입니다.

죽은자에 대한 제사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전혀 성경사상과 맞지 않는 소리들 입니다.

조로아스터교는 창시자 조로아스터의 이름을 딴 주전1천년경 페르시아에서 생긴 것으로 불을 숭배했다기 보다 신들을 이끄는데 이용한 것입니다.

 

페르시아에서 시작된 미트라(태양과 정의의 신)교는 황소의 목을 잘라 제물을 바침으로해서 세상을 새롭게 창조했다고 했습니다.

이런 사상은 성경과 전혀 다른 사상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하고 증언했으며 십자가 죽음 후 부활을 했습니다.

이런 것을 어디서 모방했을까요? 

예수의 삶을 모방할려면 다른 예수의 삶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다른 책들과 다른것이 본다고 믿어지는 것도 아니고 이해되는 것도 아닙니다(사29:11-).

성령하나님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의 기록이므로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깨달아 질수 도 믿어질수도 없는 글입니다(벧후1:21.딤후3:16).

예수 또한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믿을 수 없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고전12:4).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성경이 다른 신화와 유사성이 있다고하여 다른 신화를 베끼고 자집기 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은 성경 자체의 분석이 미흡했기 때문입니다.

 

곧 성경은 성경대로의 확고한 체계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체계에 잘못이 있어 다른 신화와 연관성이 있다면 그렇게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체계는 언약과 복음입니다.

곧 성경은 언약과 복음입니다.

 

이 언약과복음에 의하여 하나님의 실체를 알게 하며 예수님을 알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알게 하시는 것을 떠나서 성경을 이해하려 하면 불가능합니다.

 

성경에는 언약이 있고 각 언약에는 메시야가 있습니다.

이 언약과 메시야의 관계에 의하여 하나님과 에수님은 증거됩니다.

 

언약에는 열조의 언약과 율법의 언약과 다윗의 언약이 있습니다.  열조의 언약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영원히 가나안 땅을 준다는 것입니다.  (창 17:8)

 

그리고 율법의 언약은 율법을 지켜 행하면 열조의 언약대로 가나안 땅에 살 것이나 범하면 저주를 받아 열국에 흩어집니다.

 

그리고 다윗의 언약은 다윗과 그의 후손에게 영원히 왕위를 준다는 것입니다. 이 중에서  율법의 언약이 저주로 이루어지면 열조의 언약과 다윗의 언약에 차질이 생깁니다.

 

열국에흩어지면 나라와 보좌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열조의 언약과 다윗의 언약은 영원하고 율법의 저주는 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저주가 끝나면 열조의 언약과 다윗의 언약이 회복됩니다.  곧 흩어진 열국에서 돌아오고 다윗의 보좌에 왕이 세워집니다.  

 

이상과 같은 언약에서 열조의 언약의 메시야는 아브라함의 씨로 그는 대적의 문을 얻고 천하 만민이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율법의 언약의 메시야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그의 말을 듣는 자는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됩니다.

 

그리고 다윗의 언약의 메시야는 다윗의 언약을 이루실 자로 다윗의 나라를 회복하며 그 보좌에 왕으로 오십니다.

 

이상과 같은 메시야가 역사상에 나타난 것은 율법의 언약의 메시야로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하러 오신 초림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대적의 문을 얻는 아브라함의 씨인 메시야는 흩어진 열국에서 고토로 돌아올 때 대적을 멸하며 도적 같이 오시는 것입니다.

 

이 열조의 언약의 메시야는 도적 같이 오심으로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이스라엘이 나라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현재 이스라엘은 나라를 얻었습니다.  이것은 율법의 저주로 흩어진 열국에서 열조의 언약에 의하여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다음의 다윗의 언약의 메시야는 다윗과 같은 왕으로 오시는 메시야입니다.   이 메시야는 왕으로 오시는 재림의 메시야입니다.

 

곧 다윗성인 현재의 예루살렘을 이방인으로부터 도로 찾으며 오시게 됩니다.

왕으로 오시는 메시야는 영광 중에 오시게 됩니다.

 

이와 같이 율법의저주로 열국에 흩어졌다가 열조의 언약에 의하여 돌아오는 것을 보면 하나님을 알라는 것입니다.

 

역사는 이것을 증명합니다.  유대인은 열국에 흩어졌다가 지금은 돌아와 나라를 세운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증명되는가?

예수님은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상의 세 언약의 메시야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율법의언약의 메시야로 예수님은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율법의 저주에서의 구원은 율법의 심판에서의 구원입니다.  율법의 저주는 열국에 흩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언약의 메시야는 열국에 흩어지기 전에 오십니다.

 

성경에는 유대인이 열국에 흩어진 것이 여러번 있으나 다니엘서에 의하면 최후의 것이 로마에 의하여 흩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언약의 메시야는 로마에 의하여 열국에 흩어지기 전에 오십니다. 곧 로마의초기에 오십니다.

 

이는 로마에 의하여 열국에 흩어지기 전에 오신 예수님은 이와 일치합니다.

그리고 율법의 저주로 열국에 흩어졌다가 유대인을 괴롭힌 열국을 심판하러오십니다.

 

이 모습이 계시록에서 짐승을 심판하러 오시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곧 도적 같이 오시는 예수님으로 도적 같이 오시니 사람들이 알지 못합니다.

 

이 메시야가 열조의 언약의 메시야입니다.

다음으로  오시는 것이 다윗의 언약의 메시야로 왕으로 오십니다.

 

이 왕은 현재의 예루살렘에서 이방인을 쫓아내며 오시는 것으로 현재로는 미래입니다.

그리고 에수님은 친히 책을 쓴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천사들을 보내어 요한에게 보여준 계시록은 예수님이 하나님게 받아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진위에 의하여 예수님을 알게 됩니다.

 

계시록은 예언서입니다.  예언은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입니다.  곧 하나님은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계시록의 예언이 율법과 선지자들과 일치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계시록은 두 선지자를 등장히시킵니다.

 

이에 앞서 두 거짓 선지자의 이름을 알려줍니다.

곧 말람과 이세벨입니다.  이들과 관련된 선지자는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이 모세와 엘리야의 글과 일치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글은 율법의 저주로 열국에 흩어져 알지 못하던 목석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 우상이 계시록 13장의 짐승의 우상이요 짐승의 일곱 머리와  열 뿔은 율법의 저주로 흩어진 열국이요 유대인을 괴롭힐 나라들입니다.

 

그리고 엘리야의 예언은 3년 반 동안 비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곧 계시록에 등장하는 42당이요 1260일이며 세 때 반입니다.

 

그러므로 두 선지자들의 글과 일치하며 다음과 같이 다니엘서와 일치합니다.

계시록의 짐승의 일곱 머리와 열 뿔은 다니엘서 7장의 네 짐승과 관련이 있습니다.

 

곧 다니엘서 7장의 네 짐승의 머리와 뿔의 합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입니다.

그리고 세 대 반도 다니엘서 7:25에 처음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은 다니엘서와 일치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주신 계시록이 선지자들의 글과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은 성경적인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역사책에 세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은 성경과 일치합니다.

 

이에 대한 것은 이사야서 53장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는 멸시를 당하여 사람들에게 버림을 당하였다는 것입니다.

 

멸시로 인하여 버림을 당한 자를 그 누가 역사에 기록할 것인가?

역사에 기록이 찾기가 힘든다는 것은 곧 성경의 권위를 높여줍니다.

 

이상과 같이 하나님과 예수님은 존재하며 실존의 인물이었습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일단 예수는 허구의 인물입니다..예수가 실존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으며 예수를 증거한다는 단하나의 증거인 성경조차도 예수에 대해서 정확히 모릅니다..4대복음서에 예수에 대해서 나오는데 탄생배경..탄생시점..족보등이 다 다릅니다...외경까지 치면 수많은 예수버전이 있죠..

 

그리고 예수신화는 그이전부터 떠돌던 신화였습니다..

 

대표적으로 수학시간에 배우는 피타고라스 아시죠?피타고라스의 정리로 유명한 수학자..

 

이 피타고라스는 이미 예수 500년전사람인데...이미 동정녀에게서 태어났고 부활신화를 가지고 있으며 각종기적을 일으켰다는 신화를 가지고 있습니다..피타고라스는 신비주의 종교의 교주였고 바로 수를 연구하는 종교였거든요..거기서 피타고라스의 정리라든지 음악의 음률이라든지 이런걸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구약하고 신약은 내용이 다르고 구약에서는 예수를 알지도 못하고 예수같은 예언자를 보낸적도 없습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예언자란건 다윗같은 메시아이고 유대인을 실질적으로 보호하고 이끄는 그런정치적 유대왕을 말하는거지..예수처럼 유대인을 미워한 반유대적 인물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신약조차도 예수턴생부터 보면 다윗하고 연결지어서 자신이 구약의 다윗같은 인물이라고 주장하는게 나옵니다...

 

허나 뒤로 갈수록 다윗하고 달라지죠...정치적 색깔을 빼면서 성경목록을 정한거죠...

구약을 믿는 유대교에서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건 구약에서 말한 메시아는 다윗이지 예수가 아닙니다..성격도 전혀 다르고요..

 

 

그리고 로마역사를 공부해보셨는지 모르겠지만 기독교를 공인한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신자도 아니었고 기독교를 특별히 좋아한 사람도 아닙니다..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 시대에는 왕권이 불안정하던 시기였어요..동시에 왕이 6명이나 서로 왕이라고 자처하던 왕권불안의 시대였고 그걸 평정한게 바로 콘스탄티누스였습니다...콘스탄티누스는 왕권강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기독교를 이용해서 예수와 자신을 동일시해서 왕권을 강화하려고 한사람입니다..

 

정치적 목적으로 기독교를 이용하기 위해서 공인한것이지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그건 콘스탄티누스의 행동이나 유물등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태양신 종교였던 조로아스터교의 로마버전인 솔인빅투스의 신자였고 콘스탄티누스의 유물을 보면 오!나의 태양 나의 무적  이런식의 글자가 새겨진 유물등을 확인해볼수 있고 콘스탄티누스가 세례를 받은건 죽기 전날에 받았고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신자였던 기간은 일생에 하루였씁니다..죽기전날에 세례받고 그다음날 죽었거든요..

 

평생을 태양신 숭배자로 있었던게 콘스탄티누스였고 그러다보니 기독교에다가 태양신 종교의 의식들을 넣은겁니다..

 

일요일 칙령...이거 또 말하면 안식교같은데서 주장한다고 말하시겠지만 전 무교이고 일요일 칙량은 콘스탄티누스가 황제의 명으로 내린 명령이자 법률이었습니다..

 

원래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가 원래의 기독교의 안식일이었는데 태양신 종교의 주일이었던 일요일로 콘스탄티누스가 바꾼것이고..태양신 상징이었던 십자가로 바꾼것하며..

 

기독교를 완성한 사람은 태양신 숭배자였던 콘스탄티누스였습니다...

 

왕권강화를 위해서 기독교를 이용하다보니 니케아 공회란걸 열어서 삼위일체를 통과시키고 예수를 신으로 승격시키고 이랫던거죠..그걸 강제로 통과시켜서 자신의 왕권강화에 이용하려다보니 죽인사람도 여럿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원래부터 없었고 지금도 없습니다...실존의 증거라든지 정황자체가 없습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퍼진건 로마덕분이지..로마가 기독교를 공인안했으면 그당시 여러종교들처럼 흐지부지 하다가 끝났죠..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자기들 멋대로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역사공부를 하시면 참..거짓이 가려질겁니다...좀더 세뇌되기 전에 참과 거짓을 판단할수 있는 시기에 빨리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참고로 허구의 인물인 예수가 그당시 기록에 나올리가 당연히 없으니 기원후 1~2세기에 예수실존에 대한 문제가 나오자 역사적 기록물에다가 예수기록을 끼워넣고 조작까지 하는 사태가 벌어졌죠...대표적인게 요세푸스 고대사..빌라도 보고서등의 조작문서가 있죠...요세푸스 고대사는 서점에도 있으니까 읽어보시면 됩니다..단번에 조작이란게 딱 나옵니다..빌라도가 유대인을 탄압하는 사건에 갑자기 예수가 등장하게 됩니다..그러면서 유대교인인 요세푸스가 기독교인것처럼 예수를 찬양하는 구절이 등장하죠..요세푸스 책을 몇권만 읽어보면 실소가 터질겁니다..전혀 요세푸스다운 글도 아니고 전혀 엉뚱한 사건에 예수가 등장하거든요..단번에 조작으로 예수기록을 끼우넣었다는걸 확인해볼수 있습니다..요세푸스 고대사말고도 예수실존을 증거하려고 조작해넣은 기록물들이 꽤 됩니다...

타키투스의 기록도 한번 확인해보시면 무슨내용인지 알고나면 실소가 나올겁니다....

 

타키투스의 기록은 112년도에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소문을 듣고 로마황제에게 로마에 "빌라도 시대에 처형당했다는 크리투스라는 사람이 만든 미신의 종교가 로마에 퍼지고 있다.."이런식의 내용을 로마황제에게 전하는 내용입니다..그건 예수실존의 증거기록이 아니라 112년도에 기독교인들이 떠들던 소문을 듣고 그냥 그런소문이 있다는걸 로마황제에게 전하는 식의 내용입니다..

 

예수실존을 증거한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의 증거자료들이란건 다 그런식입니다..아니면 말고식이죠

 

예수는 허구의 인물입니다..미련가지실 필요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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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푸스의  증언

 

성경이외에도 예수에 대해서 그의 행적을 증거하는 역사적 사료가 존재하는가?

그러나 이상스러운점은 예수생존시기에 수많은 저술가의 저술에서 예수에 대한 자료를 전혀 찾을수가 없다는 점이다.

예를들어,유대인 역사학자로서 많은 저술을 남겼던 필로 (Philo of Alexandria. BC 20~AD 50)는, 그 당시 결코 주류를 이룰 수 없었던 미미한 종교 분파인 '떼라퓻' 또는 '에세네'파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록한 바 있는데, 그의 온 저서를 통하여 예수가 언급된 곳은 없다는 것이다.

4복음서에는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시에 수많은 군중들이 "호산나"를 외쳤고, 예수의 오병이어 기적때에는 모인 남자만 하더라도 5천명에 이르렀다고 한다.(여자와 아이들까지 합치면 수만명이 될 것이다)

이렇게 대중의 지지를 받은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에 대해서 어째서 기록이 없는 것인가?

그리고 저스투스(Justus of Tiberia), 노인 플리니(Pliny the Elder)등, 그 외 수십명의 예수와 동시대의 유대인 저술가 들이 있는데,  그들의 저술은 현대의 한 도서관을 채우기에 충분한 양 이었지만, 모두 예수에 관한 언급에는 실패 하고 있다.

예수가 로마의 저술가들에게 언급되고 있는 것은 그의 사후, 수세기가 지나서 크리스트교도들이 로마인들의 사회이슈가 되면서  예수에 대해서 세간에 떠도는 이야기가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대표적인 그런 저술로서는 로마의 역사가 타시투스 (Tacitus)의 저서 'Annals'에서 기독교인들에 대해 언급을 들수 있다.

AD 64년의 로마의 대 화재 발생시, 네로 황제가 기독교인에게 책임을 돌린것에 대한 언급중, 기독교인(Christian)이라는 단어가 '티베리우스' 황제 통치시 '빌라도'에게 처형 당한 '크리스투스(Christus)'라는 인물에게서 비롯 되었다는 것을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저술은 AD 112년에 저술된 것이므로, 그가 시중의 기독도들의 주장을 그대로 옮겨 적었을 따름이다.

또한 그는 '크리스투스'외 에도 많은 이방 신들에 대 해서 마치 그 들이 실체로 존재한 양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역시 예수의 실존성에 대한 자료는 불충분하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에 대해서 불충분한 자료와는 달리 주목받고 있는 저술이 하나있다.

바로 유대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Flavius Josephus. AD 37년 ~ AD 101 년)의 저술이다.

(1) 요세푸스 증언의 실체

요세푸스의 첫 번째 저서로는 '유대 전쟁사'가 있으며, 여기서 그는 AD 66~73 년에 일어난 독립 투쟁사를 기록 하고 있다.

이 기록이 아주 세밀한 것은, 본인 자신이 그 전쟁의 와중에 중요 인물로 활동 했기 때문이다.

이 책중 어디에도 예수에 대한 언급은 없다.

두 번째로 그의 자서전이 있다.

자신의 출생 배경 부터 시작 해서 로마에 항복하고 그들의 세력에 포섭된 자신의 합리화와 미화를 꾀하고 있다.


세 번째의 책으로 '유대 고대사(Jewish Antiquities)'가 있는데 예수에 관한 유일한 자료가 이 책의 복사본들에 들어 있다.

이 책은 아담과 이브로 시작되어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 시대, 출애굽을 망라하며 독립 전쟁 직전 (AD 66) 까지의 유태인 역사를
서술 하고 있다.

책 뒷 부분에 문제가 되는 예수 인용구가 있는데 그 것 들을 보기로 하자.

첫 번째의 구절이다.
"유태 지방의 행정 장관 "페스투스"의 사망 소식을 들은 황제는 "알비누스"를 그 후임으로 파송 한다. 그 와중에 "아그립파" 왕이
"조셉"의 대 제사장 직을 박탈하고 "아나누스"의 아들 또 다른 "아나누스"를 그 자리에 임명한다..... 그는 "사두개"파로 범법자를
다루는 데 매우 엄하였다. ............ 그는 지금이 기회라 생각하여 "산헤드린" (Sanhedrin - 바빌론 유배 이후 생겨난 제사장,
법관들의 회의로 종교적 문제, 사법, 형법을 다루는 최고 기관)을 소집 한다. "페스투스"는 죽었고 "알비누스"는 아직 노상에 있음을
기회로, 그는 즉 구세주라 칭함 받는 예수의 형제, "제임스 (야고보)"와 몇몇 다른 인물들을 산헤드린 앞에 소환한다. 그들을 정죄
하여 돌에 맞아 죽게 한다. 의식 있는 시민들이 이를 못마땅히 여겨 왕에게 탄원하고, 그중 몇은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오고 있는
"알비누스"에게 마중을 나가, 그에게 행정 장관의 동의 없이 소집 된 산헤드린의 불법성을 고한다. ..... "알비누스"가 대노하여
서신을 보내자, "아그립파" 왕은 "아나누스"의 대 제사장 직을 박탈하니 그가 대 제사장 직을 수행 한 지 3 개월 만이다. 그 뒤로
"댐네우스"의 아들 "예수"(다른 예수임 - 당시 예수라는 이름은 상당히 흔한 이름 이었음)가 대 제사장이 된다" ['유대 고대사' 20 번째 책 9장 1절]


문제의 구절만 다시 본다

"즉 구세주라 불리는 예수의 형제 제임스 (.... brought before them the brother of Jesus, who was called Christ, whose name was James)"

이 짧은 구절 속에 나타나는 예수는 성경 상에 나타나는 예수를 지칭 하고 있는 것 같다.
"구세주라 불리는" 구절과 "...형제 야고보" 의 구절이 그것을 입증 하고 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또 하나의 두 번째 구절을 보자,
'유대고대사'를 통 털어 예수 인용구는 이 두 구절 뿐 이다.

"그 무렵에 예수라는 사람이 있었다. 워낙 이적도 많이 행하고 훌륭한 선생이어서, 사람이라고 여길 수 가 없을 것 같다. 만약에
사람으로 분류 될 수 있다면 그는 분명히 현인이었다. 많은 유태인과 이방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에 심복 하였다. 그는 구세주 였던
것이다. 우리가 빌라도 총독을 움직여 그를 십자가에 매 달았지만, 그는 3일만에 부활하여 그를 따르는 무리 앞에 모습을 나타내
보이셨다. 구약의 많은 예언자들이 예언한 그대로 이루어 졌다. 크리스토의 이름에서 연유된 크리스찬이라는 무리들이 이런 연고로
오늘 날 까지 소멸되지 않고 있다." [유대고대사 18 번째 책 3장 3절]

성경에 나타나는 예수와 얼마나 정확히 부합되는 묘사인가?

하지만 그 구절들은 중세부터 현대에까지 끊임없는 조작시비를 불러일으킨 부분이다.

원래에 없었던 구절이 필사본으로 전해지는 동안 덧붙여 진 것이다.

이 구절들에 대한 끊임없는 논란의 역사적 배경을 골드버그"의 서술로 먼저 간단히 훑어 보자.


AD 93: '유대고대사'가 로마에서 발간되다.

93년에 발간된 원본들에도 문제의 구절이 들어 있었을까? 유대고대사는 그리스어로 쓰여졌다. 원본들의 권말에는 "티투스" 황제가
직접 서명을 해 주었고, 발간을 윤허 하였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이 원본들이 아니다. 원본들은 한 권도 남아 있지
않다. 우리 세대에 전해 내려 온 것은 이 원본을 베껴 쓴 복사 본들이다. 그나마 가장 오래된 복사본도 10 세기경의 것으로 추산 되고
있다. 거의 1000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손을 거쳤는지, 얼마나 충실되게 우리에게 전달 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과연 1 세기 말의
연대기와 10 세기에 만들어 진 복사본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을까? 복사기가 없었던 시절 이었음을 명심 하라.

220~250년경: 유명한 초기 기독교 변론자인 오리겐(Origenes. '오리게네스'라고도 불림)은 헬라적 신화를 차용해서 예수신화를
만들어 냈다고 비판하는 이교도들에 대항해서, 그리스도의 변증적(辨證的) 저술로서 '첼수스에 대한 반론(反論)'(Contra Celsus)을
썼다.

이책에서 그는 요셉푸스의 첫번째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두번째 구절은 아예 언급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요세푸스는 예수를 믿지 않았다"고 서술 한다.

324: 추기경 '유세비우스'가 처음으로 두번째 구절을 인용하는데, 이 내용은 현존하는 복사 본들의 내용과 거의 다름이 없다.

10 세기: 아랍 역사 학자이자, 아랍 기독교인이면서 추기경인 '아가피우스'가 두번째 구절을 인용 한다.

그런데 그의 인용구는 '유세비우스'의 인용 내용과는 조금 다르다.

기독교 취향이 훨씬 제거된 그의 인용 구를 쉽게 풀어서 다시 보자.

"유대인 통치에 관한 저술에서 유대인 '요세푸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이즈음 예수라 불리는 현자가 있었다. 그의 행실은
의로웠으며 고결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많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그의 제자가 되었다. '빌라도'가 그를 처형 하였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제자 직분을 버리지 않았다.
그들의 보고에 의하면 예수는 3일만에 부활 해 그들 앞에 나타내 보이셨다.
따라서 그는 아마도 선지자들이 예언 했던 구세주였던 것 같다"

16 세기: 1500 여년 동안 아무도 의심 하지 않아 오다, 16 세기에 들어 와서야 '조셉 스칼리거'라는 인물이 두 번째 구절의 진위를 의심 하기 시작 하였다.
너무나도 기독교 색채가 짙다는 것 이었다.

17 세기: '리차드 몬테규' 추기경이 '그는 구원자 였다'라는 구절이 훗 날 기독교인이 복사 과정에서 덧 붙여 쓴 것이라고 주장한다.

1737: '위스튼'이 '요세푸스'의 저술들을 번역하면서 '요세푸스가 유대인 기독교인 이었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두 번째 구절 전체가 원래 그에 의해 쓰여 졌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18 세기~ 20 세기 초반: 많은 학자들이 상기 구절이 전체 또는 부분적으로 위조 되었다고 주장한다.

1929: '대커리'가 위조설을 지지하면서, 또 '누가 복음'과 '유대 고대사'에 공통 점이 많음을 지적하고 '누가'와 '요세푸스'의 상면 가능성을 주장한다.

1931: '아이슬러'가 기독교 검열 하에 많은 부분의 삭제가 있었다며 그 나름대로 재수정 복구된 구절을 제시한다.

1941: '마틴'이 부분적인 위조를 지적 하고 나머지 부분은 정확 하다고 주장한다.

1954: '폴 윈터'가 위조된 곳은 세 곳 뿐이며 나머지는 정확 하다고 주장한다.

세 군데 위조는 "그는 구원자였다",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을까?'"의 두 구절과 뒷 부분의부활과 예언에 관한 구절이었다. 이 주장은 당시 많은 공감을 샀다.

1960: '콘젤만'이 누가 복음과 사도 행전에 내포된 신앙 관과 문제의 두 번째 구절간에 공통성을 발견하고, 두 번째 구절 전체가
기독교인에 의해 위조 됐다고 주장한다.

1963: '펠드만'이 거의 모든 부분이 정확 하다고 단정한다.

1971: '파인스'가 9~10 세기 아랍 및 시리아 본을 (상기한 '아가피우스'의 구절)발견하고, 이들 사본에는 "구원자" 운운의 구절과
"인간이라 부를 수...." 두 구절이 포함되어 있지 않음을 들어 이것이 위조되지 않은 원본 기록일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1973~1983: '렝스토푸'가 '요세푸스'의 저술을 집대성 재구성하여 용어 색인 체계를 만듦으로 학자들의 연구에 편리한 도구로 쓰이게 한다.

1984: '버즈올'이 '렝스토푸'의 색인 체계를 이용 하여 두 번째 구절의 문체를 분석하면서, '요세푸스'의 문체와 너무 다르므로 두 번째 구절 전체가 위조라고 주장 하다.

1991: '마이어'가 '폴 윈터'의 설을 지지 하다. 즉 세 군데 만 위조 됐다는 것이다. 그의 연구는 현재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 하고 있다.

1995: '골드버그'가 두 번째 구절과 누가 복음의 엠마오 노상의 이야기 (예수가 부활 해서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에게 나타난 이야기) 에 신기한 공통점을 발견한다. 따라서 두 번째 구절과 "엠마오 이야기"는 이제는 잃어 버린 어느 초대 기독교 문서에 공통적으로 근거를 두고 있다고 주장하다. 결론으로 그는 "구원자" , "사람일수..." 구절 두 개만 빼고는 전부 원본에 있었다는
것이다.

골드버그는 컴퓨터를 동원하고 통계학의 개념들을 이용 하여 흥미로운 결론을 이끌어 내고 있다. 물론 그의 연구 결과는 예수 신화설과 상치된다.

두 곳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원본 그대로 라면, 그 자체로 예수의 실체적 존재는 객관적인 역사 학자 요세푸스에 의해 증거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거의 모든 학자들이 부분적이건 전체적이건 위조가 있었다는 사실에는 동의하고 있다.
신화파에서는 전체가 다 위조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먼저 께름직 한 것은 '유대고대사' 복사 본들이 전부 기독교인들의 관리 하에 전수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초대 교부들과 기독교 변증가들은 왜 요세푸스의 저술을 인용하지 않았는가?
초대 기독도들은 그들의 교리에 대하여 각 종파로 부터 많은 도전을 받았다.
예수의 실존과 그의 놀라운 기적들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받았고, 이러한 과정은 본인들의 저술에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아무도 이 좋은 증거물을 제시 하지 않았다.

두 번째 구절은 324 년이 되어서야 '유세비우스' 추기경에 의해 처음으로 인용 되었다.
첫 번째 구절은 그전에 '오리겐'에 의해 230~250년 사이에 와서야 처음으로 인용 되었다.
유대고대사가 발간된 게 93 년경이니까 거의 140~250년이 흐른 셈이다.
그 사이에 기독교 변증가들은 연대기를 읽지 않았을까?
유대고대사는 초대 기독도들에게도 상당히 인기가 있었다.
그들은 열광적으로 그 책을 읽었고 소중히 여겼다.


초기의 기독교는 이방종교에 의해서 수많은 도전을 받아왔다.
무수한 도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인용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읽었던 사본에는 문제의 구절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2백년이 넘도록, 요세푸스의 저술을 잘알고 있던 초대 교부들은 상기의 증언 귀절을 모르고 있었다.
만약에 동 구절이 요세푸스의 저술에 있었다면 그들은 도전자들과의 논쟁에서 그것을 재빨리 인용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동 구절은 그 저술에 없었다.
요세푸스의 저서를 읽어 본 오리겐도 요세푸스가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고 서술했다.
동 구절은 기독교 최초 역사가 유세비우스 추기경에 의해 언급 되었다.
동 구절은 그의 조작으로 사료 된다.

"유세비우스는 신앙의 명분 아래 문서 변조를 지원 하였고 요세푸스외의 여러 저술가들의 책들도 변조 시켰다"[마샬 거빈 (Marshall
J. Gauvin)]
그리고, '오리겐'은 첫번째구절은 읽었는데 두 번째 구절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다.
따라서 두번째 구절은 그 후에 첨가 되었다고 보여진다.
또한, '요셉푸스'의 책 '유대전쟁사'는 '안티오코스'의 예루살렘 점령 부터 AD 70 년의 예루살렘 함락 까지의 내용을
'유대고대사'책에서 그대로 복사하고 있다.
'빌라도'가 군중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 등 다른 부분들은 거의 동일하게 서술 되었는데 '유대전쟁사'에서는 유독 상기의 예수 인용구들만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그리고, '유세비우스' 추기경이 처음으로 인용한 두 번째 구절은 '조셉 웰레스'에 의하면 유세비우스 본인 스스로의 작품 이었다고
한다. '조셉 웰레스'는 많은 연구 끝에 당시 교부들 사이에 유행하던 문서 변조의 행태를 캐어 낸 인물이다. 그는 문서 변조의
대표자로 '유세비우스' 추기경을 꼽았다.

유세비우스 자신도 그의 저서 복음적 증명(Evangelical Demonstration)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구세주에 관하여, 내가 이미 생산(?) 해낸 이 증거들 만으로도 충분 하다. 하지만 유태인 '요세푸스'를 여분의 증인으로 이용
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Eusebius, Evamgelical Demonstration, Book III. p.124)

유세비우스 자신도 그것이 조작이었음을 솔직히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요세푸스는 장황설을 늘어놓는 작가였다.
그는 보다 중요성이 적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광범위하게 썼다.
예수에 대한 이 구절이 이토록 짤막한 것은, 따라서, 이것이 거짓된 것이라는 강한 논증이다.
예수에 대한 부분만큼은 선행한 구절이나 뒤따르는 구절과 아무런 연관이 없으며, 그 구절은 유대인들에게 닥친 재앙에 관한 이야기들의 모음들 가운데에 나온다.
즉, 그부분의 위치는 그 역사가의 글에 공간을 만들기 위한 개작의 손길에 의해 나뉘어졌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요세푸스는 성서는 "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므로 일정한 계시의 기간에만 이루어 진 것이다. 즉 모세로 부터 아닥사스(Artaxerxes, 465 ~ 424 B.C.)왕 때까지 기록된 것"이라고 주장한 철저한 유대교인이었으며, 유대교의 제사장이었다.

요세푸스는 그의 저술에서 그 당시에 스스로를 메시아라고 자칭하는 자들이 많았다고 기술했으며, 철저한 유대교인이었던 그는 그들을 모두 사기꾼으로 간주했다.

"파두스가 유대의 총독이던 시대에, 튜다라는 이름의 어떤 사기꾼이 많은 수의 대중을 선동했다. 그는 대중들에게 소유물을 가지고 요단강으로 그를 따라오라고 선동했다. 그는 그가 예언자이며, 그의 명령에 따라 그 강이 갈라지고 그들을 쉽게 건너게 해 줄 것이라고 말했다"[유대고대사 20,97]

"이집트에서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 와서 자기가 예언자라고 선언하고, 대다수의 대중들에게 그를 따라 예루살렘에서 5퍼얼롱(furlongs) 떨어져 있는 올리브 산으로 나가자고 선동했다. 그는 그곳에서 그의 명령에 의해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는 것을 보여 줄 것이며, 그 때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대고대사 20,169~70,유대전쟁사 2,261~62.]

유대교의 사제였던 요세푸스는 메시아를 자칭했던 그들에 대해 사기꾼들로 평가했다.
그런데, 예수와 관계된 문제의 구절은 그가 예수의 신성과 기적,부활을 인정한 것으로, 요세푸스가 마치 기독교인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정도이다.
다시 말하자면, 독실한 유대인이 기독교를 믿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만약 요세푸스가 문제의 그 구절을 직접 기록했더라면, 예수도 위에서 언급한 사기꾼처럼 묘사했을 것이고, 역설적으로 그것이 예수의 실존성을 증거한 중요한 증거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역사와 이성의 모든 논증들은 그 구절이 염치없는 위조임을 증거한다.
이러한 이유로 정직한 기독교 학자들은 누구나, 그것을 첨삭된 것으로써 버려왔다.
Dean Milma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은 많은 추가적인 구절들과 함께 첨삭되었다.”

브리타니카 백과사전을 쓰며, Dean Farra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세푸스가 현재 있는 것과 같은 구절을 전부 썼다는 것은, 제대로 된 정신의 비평가라면 절대 믿지 않는다.”

Chambers' 백과사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요세푸스의 유명한 그 구절은 일반적으로 첨삭임이 인정된다.” [The Chambers Encyclopedia]


Warburton 주교는 그것을 “비열한 위조이며 매우 어리석은 것이기도 하다”며 비난했다.

 

 

 

 

<<빌라도 보고서>>


요셉푸스의 기록외에도 기독교인들이 만들어낸 조잡한 위조문서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빌라도 보고서'라는 것이 있다.

기독교인은 이문서가 빌라도가 로마황제에게 보고한 법정에서 만들어진 공식적인 문서라고 이며, 현재 터어키의 성'소피아'사원(寺院)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현재 '빌라도 보고서'라는 글이 인터넷의 곳곳에 퍼져있는데, 필자는 '빌라도 보고서'라는것에 대해서 자료를 수집하려고 했으나, 하나같이 전부 똑같은 카피글뿐으로써, 이 문서에 대한 어떠한 배경자료를 전혀 찾을수 없었다.

수많은 카피글에는 모두 판에 박힌 듯 "본 보고서의 내용은 '도날드 N.리드만'박사가 소정의 요금을 지불한 후 특별 허가를 얻어 읽고, 영어로 번역하여 '예루살렘'에서 간행(刊行) 되고 있는 월간'더 마운트 자이언 리포터(The Mount Zion Reporter '시온산 보고서'; June 1974)'에 게재한 것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라고 간단히 언급되어 있을뿐이었다.

보통, 이러한 문서들은 '외경'으로 분류되어 내용의 진위여부는 제쳐두고라도, 학술적으로 가치가 대단함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외경을 다룬책에서 조차 인터넷에 떠도는 '빌라도 보고서'는 전혀 언급되지도 않는다. 우선 1970년대에 터키의 소피아 성당에 있는 자료를 영어로 번역해서 영미권도 아닌, '예루살렘'에서 발행된 잡지에 게제 되었다는것부터가 좀 미심쩍다.
또한 내용자체도 황당하기가 그지없다.


문서의 전체내용은 빌라도가 기독교인처럼 느껴질 정도로 예수에 대한 찬양으로 가득하다.
로마총독이 쓴것인지,기독교인이 쓴것인지 구분이 안갈정도이다.
더구나 빌라도를 위해 전혀 맞지도 않는 상황까지 연출한다.

"백성들은 매우 거칠어서, 저 자신 순간순간마다 폭동(暴動)의 두려움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저는 폭동을 진압할 만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저의 지휘 하에 한 명의 백부장 (百夫長)과 그가 거느린 군대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자기의 통치지역을 방어할 만한 충분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다고 알려 온 「시리아」의 사령관(司令官)에게 증원군을 요청하였습니다."

로마의 총독이 백부장 한명과 그가 거느린 군대만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근거없는 이야기며, 유대인폭동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당시의 시대상황에서는 더더욱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었다.

또한 백부장이라는 군대계급은 오늘날의 '하사관'급의 계급이었다.
"이론적으로 100명의 지휘관이지만 실제는 50~100명이었다. 신분은 하사관으로, 그들이 장교의 계급으로 승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百夫長 (centurion)항목]

더구나 빌라도의 경우 수많은 폭동을 폭력으로 진압하고, 수많은 유대인을 십자가에 못박아 처형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빌라도가 로마총독이 되어 부임했던 '가이사랴'라는 곳은 오늘날의 발굴결과, 로마의 신전과 대규모의 수도관, 항구등의 대규모 유적이 발굴된 도시로, 로마총독이 100여명정도의 군대(그나마 지휘관인 백부장은 오늘날의 하사관급 계급)를 거느렸다는 것은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인가?

이렇게 정황이 맞지 않게 언급된 것은 '빌라도 서신'의 배경을 알고나면 확실히 이해가 된다.
빌라도와 그의 아내를 악역의 역할에서 성인(聖人)으로 탈바꿈하기 위함이었다.
'빌라도 보고서'의 전문을 다 읽어보면 예수에 대한 찬양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폭동이 두려워서 그를 사형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빌라도의 아내는 예수를 위해 남편을 설득하려고 했다.
즉, 빌라도부부를 성인의 경지에 올리기 위해서 빌라도가 예수를 흠모했다는 것을 알려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모순점이 생긴다.
예수를 흠모했던 빌라도가 어떻게 예수를 사형에 처할수 있겠는가 하는문제이다. 폭동이 일어나려고 하면 로마군대로 진압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 빌라도 서신은 그의 부하가 100명남짓이었다고 보고서 앞부분에 미리 언급해둔 것이다.

"저는 예수 자신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보호의 손길을 그에게 뻗쳐 주었습니다....제가 생각하기로는 우리 조상의 종교는 예수의 종교로 대치될 것이며, 이 숭고한 관용의 종교는 「로마」제국을 허망하게 붕괴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가련한 저는 유대인의 말을 빌자면 하나님의 섭리요, 우리의 말대로 하자면 운명의 도구로 쓰여진 것일 것입니다."

위의 구절은 빌라도 보고서중에 가장 파렴치한 구절이다. 로마의 종교를 비하하고, 로마제국까지도 붕괴할것이라는 말을 감히 총독이 황제에게 보고했다는 것이 믿어지는가?

이것은 빌라도부부를 성인으로 올려놓기 위한 후대의 문서일뿐이다.



빌라도는 사마리아인 학살사건 때문에 말년에 로마로 소환되어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중세의 카톨릭 전승에 따르면 빌라도의 아내 프로클라는 기독교인이었으며 성인의 대열에 끼워져 있다. 이디오피아에서는 빌라도 부부가 성인으로 되어있다.(카톨릭과 이디오피아의 성인 축일표에도 빌라도 부부의 날이 있다) 또한 초대교회 서술가 떼르뚤리아누스는 빌라도를 성인과 비슷하게 취급했다. [윌리스 반스토운 / 숨겨진 성서(the other bible) 2권 / 이동진 역 /문학수첩 / p.365]






빌라도를 성인으로 올려놓기 위한 '빌라도 보고서'는 또 있다.

위에서 언급한 출처불명의 이상한 자료와는 달리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있고, the other bible에서 소개된 비슷한 내용의 '빌라도 서신'들은, 위의 빌라도 보고서와 거의 유사한 형태를 띄고 있고(빌라도를 성인으로 올려놓기 위해서), 비슷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내용이 각각 다른 유사문서들이 여러 가지 버전으로 현존하고 있다.

빌라도가 헤롯과 로마황제들에게 보냈다는 편지 모음으로 알려진 '빌라도 서신'은 현재 6세기~7세기의 시리아어 필사본으로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숨겨진 성서(the other bible)에서 빌라도 서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해 놓았다.

"티센도르프 박사는 그의 저서 '비경전 계시록들'에서 파리 필사본 가운데 그리스어로 된 사본을 구했는데 '본문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논의할 가치가 없다.'라고 말했다. 빌라도의 편지 뒤에는 후대에 필사자가 추가한 요약 구절이 들어있다.
거기 나오는 유스티누스는, 역사가 요세푸스가 자기와 동시대의 역사가라고 말한 티베리아의 유스투스로 이해된다.
우리는 이 요약된 구절의 진정성을 찬성하는 쪽으로 기울 수가 없다.
유스투스가 그리스도에 관해서 언급한 적이 없다고 포니우스가 증언하기 때문이다.
테오도루스라는 인물을 우리는 티베리우스 황제라고 이해한다." [윌리스 반스토운 / 숨겨진 성서(the other bible) 2권 / 이동진 역
/문학수첩 / p.347]

위조화폐의 경우에는 정밀성이 요구된다. 그러나 고대의 위조문서들은 메스메디아 부재나 지식의 일부층 독점등으로 오히려 그 위조의 수법이 유치찬란해도 무지자들은 그대로 믿을 수 있었다.

빌리도 서신이 얼마나 유치한 위조문서인지는 '빌라도 서신'을 읽어보기만 하면 금새 알수가 있다.
로마총독 빌라도가 공식적으로 왕들에게 보냈다는 공문서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에 대한 찬양으로 가득하다. (위에서 언급한 '빌라도 보고서'와 유사하다)
아예 한술 더 떠서 헤롯이 빌라도에게 보낸 서신중에는 "당신네 부부는 밤이나 낮이나 예수를 기억하면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정의로움을 받아들이십시오"라고 권하기도 한다.

한편, 빌라도가 헤롯에게 보낸 서신에는 백부장 롱기누스로부터 예수의 부활에 대한 보고를 받고, 빌라도와 그의 아내앞에 부활한 예수가 등장한후, 두 부부는 예수의 앞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했다고 한다. (이 편지들은 직접 전문을 다 읽어보면 너무도 기독교적인 찬양과 서술에 조잡한 위조를 한눈에 알아채게 만든다)

그리고, 빌라도가 로마황제에게 보낸 서신들은 위의 '빌라도의 보고서'와 유사한 성격의 문서이다.

이서신에도 후대의 필사자가 "빌라도는 개인적인 보고서와 함께 아래내용을 로마의 황제에게 보고했다"라면서 이것이 공문서임을
미리 언급하고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빌라도 보고서와 내용은 유사하지만 다른글이다)

그리고, '숨겨진 성서'에는 앞에서 소개한 '빌라도 보고서' 바로 뒤에, 내용은 유사하지만 또다른 '빌라도 보고서'가 실려있다.

즉, 필자가 아는 '빌라도 보고서'만해도 3가지나 된다.(인터넷에 떠도는글, 숨겨진 성서라는 책에 2개수록.)
전부 유사한 내용이지만 각각 다른 글들인 것이다. ('숨겨진 성서'에는 전혀 앞의 것과 유사하지 않은 로마황제에게 보내는 빌라도 보고서가 또하나 있다. 이것까지 합치면 4개)
빌라도는 똑같은 내용의 서신을 황제에게 계속해서 보냈단 말인가?

빌라도 보고서라 주장하는 여러 가지 버전의 글들을 보면 한눈에 그 조잡함을 느끼게한다.
한마디로 복음서의 축소판에 불과하며, 예수가 병자들을 치료한 기적을 서신의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복음서에 있는 나자로의 부활, 예수의 옷자락을 만진후 치유된 여인...등등 파렴치하게 복음서의 내용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예수의 기적이 실제로 있었던 것이라고 가정해도, 빌라도는 이런 기적들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것도 아닐텐데, 이런 기적행위들로 서신의 대부분을 할애해서 황제에게 보낸 공문서에 예수를 믿으라고 호들갑을 떨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이 서신을 그대로 읽으면, 마치 빌라도가 로마황제에게 예수를 믿어달라고 간청하는 듯하다.

그리고 이 '빌라도 서신'과 함께 언급되어 있는 '빌라도의 최후'는 더 가관이다.

빌라도의 최후 역시 두가지 버전이 있다.

첫번재는 빌라도를 성인으로 만든 '파라도시스'이다.
빌라도의 편지를 받은 로마황제는 "그렇게 위대하신 분을 죽였단 말인가?"라고 화를 내며,빌라도를 로마로 소환하여 그의 목을 베어버린다.
사형을 당하기전 빌라도는 기도를 했고, 그 순간 하늘에서 빌라도를 축복해 주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의 목이 떨어지자 천사가 빌라도의 머리를 받았으며, 그 모습을 본 빌라도의 아내 프로크라는 기쁨에 넘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또하나는, 빌라도의 처참한 자살버전이다.
빌라도의 편지를 받은 황제는 화가나서 그를 소환했으나, 빌라도는 예수의 옷을 걸치고 황제앞에 나타났다.
예수의 옷을 걸친 그를 볼때마다 이상하게 황제는 분노가 가라않았으나, 어느 기독교신자의 권유로 빌라도의 옷을 벗기니 다시 황제는 분노가 치밀어 빌라도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하지만 빌라도는 처형당하기전에 자신의 단검으로 자살해 버렸다.

빌라도 보고서는 여러 가지의 버전이 있으며, 담긴내용조차 도저히 공문서라고 볼 수 없는 기독교인들의 조잡한 문서일뿐이다.

차라리 빌라도 복음서라고 부르는게 더 나을것이다.

 

 

 

▶ 기독교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미트라의 전승


 

미트라의 기원은 고대 인도,이란의 민족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가는데, 조로아스터교와 합쳐져 미트라 숭배는 BC 3세기경에 페르시아에서 성행하였다.

따라서 페르시아의 발전에 따라 그리스로 건너가게 되었으며, 거기서 자연히 로마로 전파되어 밀교로서 특히 군인층에서 널리 신앙되었다.


미트라는 페르시아의 신이었지만, 헬레니즘 문화권에서 더욱 번창하였다.

미트라교에 대해서는 고대 페르시아의 아르탁세륵세스 2세(재위 BC 404∼BC 358)의 비문(碑文)에 그 이름이 보인다.


그러나 로마에 나타났던 미트라의 종교 형태는 이미 그 내용이 크게 변질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소(小)아시아나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토착종교와 혼성(混成)되었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의 폼페이우스(BC 106∼BC 48)황제의 동정(東征) 이후에는 로마제국의 수호신으로까지 격상되었다.


미트라의 비밀이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기독교와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고 그것의 비밀은 기독교의 근원에 어떤 빛을 비추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미트라의 전승은 기독교의 것에 비해 적어도 600년은 앞서고 있으며, 초대기독교와 같은 시기에 번성하였다.


이 종파는 엄청난 인기를 모았으며, 3세기에는 수백 개의 미트라에움(미트라를 숭배하는 지하 사원)들이 로마군이 주둔하고 있던 소아시아, 아프리카, 이탈리아, 그리스 독일과 스코틀랜드 국경에 퍼졌다.


미트라 신전에 건조되었던 우상(偶像)은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후에 많이 파괴되었지만, 당시의 건조물을 포함한 종교적 유적은 현재 유럽에 많이 남아 있다.


특히 콘스탄티누스황제는 로마의 미트라 "솔 인빅투스"의 숭배자였고, 그의 영향아래 예수는 솔 인빅투스와 동화 되어 버렸다.


미트라는 신체적으로 동정녀 출생이라고 전해지는 지중해의 신들 가운데 가장 유명했다.

신체적 동정녀 출생은 바빌론의 이쉬타르 여사제들을 그럴듯하게 흉내 낸 것이다.


미트라는 아래의 특징을 예수와 공유하고 있다.


① 미트라는 12월 25일 처녀에게서 태어났다.

② 그는 위대한 방랑교사였다.

③ 그에게는 열 두 제자가 있었다.

④ 기적을 행했다.

⑤ 미트라는 태양신의 아들로서 미트라 성 삼위일체설을 형성하였다.

⑥ 그는 무덤에 묻혔으며 3일 후에 다시 일어났다.

⑦ 미트라 교도들은 그가 부활한 날에 축제를 베풀었는데, 그 날은 지중해의 여러나라에서 춘분축제 였으며, 나중에 기독교의 부활절이 되었다.

⑧ 사람들은 그를 선한 목자로 불렀다.

⑨ 그는 길이요, 진리요, 빛이요, 구세주 혹은 메시아로 여겨졌다.

⑩ 미트라를 기리는 거룩한 날은 예수가 나기 수 백년 전부터 sunday 즉 일요일이었으며 그 날은 또한 主의 날이기도 하였다.


최근에 20-30 명이 들어 설 수 있는 지하 동굴들이 "이탈리아"를 포함 해서 북쪽 으로는 "영국", 남쪽 으로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발굴 되었다.

당시 로마 군대가 주둔 했던 곳 에서는 어김 없이 발견되는 이 동굴들에는 이상한 인물과 장면을 묘사 하는 그림과 유물들이 공통적으로 발견 되었는데, 학자들은 이 동굴들이 '미트라'교의 예배 장소 임을 밝혀 내었다.

 

이 "미트라" 숭배의 흔적이 발견 된 지역은 영국, 이탈리아, 로마니아, 독일, 헝가리, 불가리아, 터키, 이란, 알메니아, 시리아, 이스라엘 및 북부 아프리카등이다.


밀교였던 관계로 그들의 경전과 여타 정보가 전무 했지만, 부분적인 정보들이 당시 역사가들의 서술이나, 기독도들의 그들에 대한 비판에서 엿볼 수 있다.


가장 오래된 정보는 "영웅전"으로 유명한 역사가 "플루타르크"의 진술이다.

BC 67년에 그는 다음과 같이 진술 하고 있다 "소 아시아 남 동부 해안의 '실리시아'에 미트라의 밀교 의식을 행 하는 큰 무리의 해적 떼가 있었다"

"실리시아"는 바울이 출생한 "탈수스" 도시가 위치한 지역 이었다.


가장 오래 된 유물들은 AD 1 세기 말의 것으로, 3 세기에 교세가 가장 확장 되었으며, 5 세기 초 기독교의 득세로 수그러 들었다.
신도들은 군인, 관료, 상인이 주를 이루었고 여인들은 배제 되었다.


5 세기경 기독교는 맹위를 떨쳐 많은 미트라의 지하 사원을 접수 하여 기독교 사원으로 개조 한 곳이 여기 저기 드러난다.

기독교 교회라고 생각 된 곳에서 채 지워지지 않은 예의 "미트라" 그림들이 발견된 것이다.

몇 단계의 의식을 거쳐야만 최고의 진리에 접 할 수 있었던 그 들의 가르침은 철저히 신도들 사이에 구전으로 전수 되었기에 학자들 사이에서 그들의 교의에 대해 학설이 분분 하였다.


'미트라' 라는 이름은 '페르시아' 어로 '계약' 을 뜻하고, 지역에 따라 '마이트로스', '미어', '메어' 등 으로 불리기도 한다.

힌두교의 "마에트라"는 불교와 결합해 미륵신앙으로 발전해 나갔다.

로마의 미트라 '솔 인빅투스'는 이란의 미트라에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 했다.

로마의 저술가들도 미트라의 근원이 페르시아에 있다고 서술 하였다.


오늘날 불교와 기독교, 부처와 예수를 비교해서 유사성을 증거하려는 불교학계의 서적이 여러번에 걸쳐서 출판된적이 있다.

이러한 관점은 '인도에서 예수의 생애' 라는 독일신학자 홀거 케르스텐의 주장이 유명한데, 실지로 부처와 예수는 상당부분 유사한점이 있다.


그러나 부처와 인도의 크리슈나와 예수가 어째서 유사성을 띄는가는 미트라를 통해서만 그 의문이 전부 해결될수 있다.

그것은 인도, 이란지역에서 발생되어 동서양 각지로 퍼져나간 미트라 숭배의 영향으로 볼수 있는 것이다.

당시 미트라를 비롯한 수많은 메시아 숭배사상은 영지주의(그노시스파)의 영향아래 있었다.

 

우리나라의 불교학 교수들은 도마복음서등에서 불교적인 색채가 짙다고 지적한바 있는데, 사실상 영지주의의 교리가 상당수 불교적인 교리와도 비슷하다.

이것은 미트라교 인도와 이란등지에서 발생한 종교였기 때문이었다.


미트라 교도들의 신자의 제례는 종종 맑은 샘물이 솟아나오는 바위굴 안에서 행해졌는데, 이러한 "미트라" 동굴에서 꼭 발견되는 하나의 그림이 있다.

한 인물이 황소의 목을 따는 그림인데, 이 그림이 페르시아의 미트라 에서는 발견 되지 않는 것에 의문을 품은 최근의 학자들은, 로마의 미트라가 이름 만 빌렸을 뿐이지 새로운 신앙 체계 임을 밝혀 내었다.


그리고 미트라는 사자상으로도 상징되었는데, 사자의 입에는 벌(Bee)이 물려져 있다.

그 벌은 '말씀'을 상징하는 것이었다(갈대아어에서 '벌'은 '로고스'(말씀)이란 뜻도 된다.


미트라는 '우라노스'(Ouranos, 빛을 비추는 자)로도 불리는데,우라노스는 '크로노스'(Kronos)와 동의어로서 크로노스는 '광선을 보내는 자' 혹은 '뿔이 나온 자'란 뜻을 가지고 있다. [Alexander Hislop / 두 개의 바빌론 / 193~194 쪽]


그들은 태양신의 아들인 미트라가 빛을 준다는 것을 타오르는 등불과 켜진 밀랍초로써 상징하게 하였고,(특히 밀랍초(wax-candle)를 사용토록 한 것은 밀랍이 벌에 의해 생산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태양신 숭배종교의 모든 의식에는 타오르는 등불과 밀랍 촛불의 행렬이 필수적 요소가 되었다 [Alexander Hislop / 두 개의 바빌론 / 194~197 쪽]


그는 '세상의 빛'으로 불리워 졌고, 예수와 마찬가지로 '미트라' 성 삼위 일체의 두 번째, 즉 아들의 존재로써 중개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의 생일은 12 월 25 일로 경축 되었으며, 만인의 죄를 대속 하기 위하여 죽었다가 3 일만에 부활 하였다.

그의 부활은 기독교의 부활절 주기(더 정확이 말하면 춘분이다)와 일치 하며 12 제자를 거느렸다고 전해진다.

 

미트라의 지하사원의 벽화에는 꼭 황소, 개, 까마귀, 뱀, 전갈들이 나타나며, 여러 곳의 그림 중 사자와 물잔도 종종 포함 되어 있으며, 뒷 배경으로 많은 별들이 그려져 있다.

'황소 도살자'의 돌에 새겨진 그림 미트라가 거대한 황소의 목에 칼을 찔러 넣고 있고, 피가 땅으로 쏟아지고 있는 투우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 벽화에는 태양 신의 아들인 미트라가 황소를 제압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로마의 미트라의 지하사원에는 황소 도살 장면이 항상 동굴 안에 놓여져 있었는데, 이것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리스-로마 세계가 우주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간략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고대인들은 태양과 달, 움직이는 별들(행성들), 혜성들, 그리고 기타 천체들이 고정되어져 있는 지구 주위를 움직이고 있는 천상의 신들이라고 믿었다.

태양신(Sol invictus)이 천상의 신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특별히 경배되었고 12월 25일 동지 동안 하늘의 가장 낮은 지점에서 매년 “다시 태어난다”고 생각되었다.

황도면(태양이 하늘에서 이동하는 길)이 12궁도를 형성하고 있는 열두 가지의 별-패턴 지대를 지나쳐가기 때문에, 태양은 열두 궁도의 신들을 “낳는” 혹은 그들의 아버지가 되는 신으로 생각되었다.


그리스의 천문학자 힙파르쿠스는 기원전 128년, 12궁도의 별자리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뒤쪽으로 천천히 흘러서, 동지에 다다른 태양의 위치와 비교할 때, 하늘의 새로운 위치에 나타난다는 놀라운 발견을 해 냈다.

매 2만 5천 년마다, 이러한 별자리들은 서서히 움직인다.

이는 오늘날, 지구가 그 축 위에서 “흔들리기” 때문에 일어나는 분점의 세차로 알려져 있는 현상이다.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무섭고도 놀라운 사건이었다.

지구가 움직이지 않으며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었던 힙파르쿠스는 세차가 천체 전체가 움직이는 것이라고밖에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즉, 힙파르쿠스의 발견은 전체 우주가 이전에는 아무도 알아차린 적이 없었던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폭로한 것에 해당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세차운동'은 심오한 종교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새로운 힘이 천체 전체를 움직일 수 있음이 탐지된 것이다.

이런 새로운 힘은 너무나 강력해서 우주 전체를 움직일 수 있는 새로운 신의 활동을 알려 주는 징표라고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힙파르쿠스가 이런 발견을 하던 당시, 태양신의 부활을 신호하는 춘분이 양자리 별자리에서 나타났다.

양자리 전에는, 춘분이 황소자리에 있는 것으로 보였다. 천상의 신들 사이에서 일어난 이러한 천계의 움직임과 황소자리의 “죽음”은 어마어마한 충격을 일으켰다.

미트라는 황소를 도살할 정도로 강력하고 천계 그 자체를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는 천상의 세력이 되었던 것이다.

 

초대기독교나 그 전에 등장했던 조로아스터교에서와 마찬가지로, 미트라교에서는 세상이 선과 악의 끊임없는 전쟁터였다고 주장했다.

악마의 숙주들과 하느님을 섬기는 선민들 사이의 치열한 투쟁인 것이다.


 

신성이 육체들, 그리고 빛의 선한 운명을 망치는 어둠에 맞서 싸웠던 것이다.

미트라는 태양신의 신성한 아들이자 우주의 어둠에 대항해 싸웠던 선한 구원자를 나타낸 것이며, 그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악의 앞잡이들과 싸웠다.


미트라는 천체를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에, 우주의 바깥에 있는 것으로 보아졌다.

미트라의 조각이 알 모양의 petra genetrix, 즉 '생식 바위'로부터 뛰쳐나오는 벌거벗은 아기의 모습으로 그의 출생을 나타내고 있다.

미트라에움이 위치해 있던 바위 동굴들은 미트라가 출현한 '자궁'을 상징한다.

그가 바위에 감금되어져 있다가 탈출한 일은 그가 천체로부터 탈출해서 천계를 지배할 수 있는 우주를 초월한 힘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미트라의' 출생은 'solo aestu libidinis'(애욕의 열에 의해서만) 일어난 것으로 전해진다. 지구가 전형적인 인간을 낳았다

미트라는 12월 25일, 태양이 하늘에서 가장 낮은 날에 있는 동지 전날에 태어났다.

미트라의 출생에 새벽빛이 밝아올 때, 사제가 사원에서 나와 '신이 태어났도다!’하고 외쳤다고 한다.

 

그러나 기원후 5세기에 이르면 기독교가 힘을 얻고, 미트라교를 이단으로 선언하고 무자비하게 응징한다.

그 이전 시기에는, 기독교와 미트라교가 공존했으며 의심할 여지없이 서로에 대해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혼합과 영향은 기독교가 미트라교를 추월한 방식에서 명백해진다.

기독교는 미트라교의 추종자들을 자신들에게 편입시키는데 어려움을 겪지 않았으며 수많은 미트라에움들을 교회로 변신시켰다.

오늘날 많은 로마 교회들, 특히 로마의 성 클레멘타인 교회의 지하의 아치형 매장 토굴은 이것이 미트라에움들이었음을 잘 말해주고 잇다.


이렇게 두 종교가 로마에서 서로를 맞대고 존재하던 수 세기 동안, 지속적으로 미트라교가 그리스도교에 흡수되었기 때문에 두 종교 사이에서 볼 수 있는 많은 유사성들을 낳았다.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황제가 로마의 미트라 "솔인빅투스"의 숭배자였음이 그것을 잘 뒷받침해 준다.

미트라는 세상의 어둠과 악을 정복하기 위해 태양신 보낸 것으로 전해진다.


목동들만 출생의 과정을 지켜보는 가운데 12월25일날 동정녀에게서 태어난 미트라는 12제자를 거느리며 길, 진리, 빛, 말씀, 하느님의 아들, 착한 목동 등 다양하게 묘사되었으며, 종종 죄를 어깨 위에 짊어지고 어린양을 이끄는 것으로 그려졌다.

미트라의 추종자들은 12월 25일(동지)을 축하했는데, 종을 울리고, 축가를 부르고, 촛불을 켜고, 선물을 나누고, 빵과 물로 성찬례를 행했다.

 

또, 그는 죽은지 3일후에 부활했는데 이것은 당시의 (춘분)이었으며, 이스터 여신의 축제(봄의 여신축제, 이스터는 지구의 여신을 이르는 라틴어에서 딴 말)는 미트라의 부활절이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종교회의에서는 이날이 예수의 부활절이 되어버린다.

 

또, 미트라의 부활절 사이에는 정의와 사랑의 신인 오시리스를 찾는 40일이 있었다.

이 종파는 또한 불길한 금요일(예수가 처형된 성 금요일과 유사)을 지켰는데, 그 날은 지구를 비옥하게 한, 미트라의 희생적인 황소 도살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전투에서 지친 미트라는 상징적으로 시체로 표현되며, 신성한 바위 무덤에 안치된다.

이것은 후에 기독교의 부활절 전의 '예수의 고난주간'에 영향을 끼친다.

 

또, 미트라의 숭배자들은 태양의 에너지가 인간의 두뇌에 축적 된다고 믿었고 이것이 후광으로 나온다고 믿었다.

어것은 후에 중세시대의 성화에서 예수의 얼굴모습을 표현할 때 나타냈던 얼굴의 후광에 영향을 끼쳤다.


'미트라' 숭배자들은 천국과 지옥, 마지막 심판, 구원, 부활등의 교리를 믿었다.

마지막 성만찬의 이야기도 매우 흡사하다.

카톨릭의 성직자 계급 제도나 예배 형식 및 예배 시 쓰이는 도구들 즉 향불, 예배 의복 등등 모두 미트라와 흡사 하다.

십자가 목걸이, 염주알 등도 마찬가지 이다.


 

 

 

 

▶ 예수보다 150년 앞선 에세네파의 메시아


 

과학동아 1998년 8월에는 '사해사본'에 대해 소개하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이 사본이 유태교의 한 종파인 에세네파의 고문서라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 종교의
창시자는 '이스라엘의 구세주','정의의 교사','이사야의 고뇌에 찬 종','하나님의 아들' 등의
이름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괴로운 죽음을 맞을 운명에 처했다.
그는 고문을 받았으며 흉악한 제사장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힌다. 그러나 그는 다시 부활해
세계를 구원하고 최후의 심판을 기다린다. 그는 인내와 인간성과 형제애, 자선과 빈곤을
가르치며 새로운 계율과 정의와 세례, 그리고 성찬(聖餐)을 만든다.

 

이 사람이 누구냐고 퀴즈에 낸다면 거의 모두 '예수'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사해사본'에
적혀 있는 이 사람의 이름이 무엇인지 기록돼 있지 않다. 오직 '구세주'라고만 표기돼 있으며,
천국을 만들기 위해 최후 심판의 날까지 고민하는 사람을 구원해주는 인물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 사람을 예수라고 단정한다면 간단한 일이지만 문제는 이 구세주가 예수보다 1백50년 전에
살았다고 추정된다는 점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크리스찬이 믿는 예수는 오직 단
한사람의 인물이 아닌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의 가르침은 이미 그 이전에
다른 사람에 의해 설교된 것을 예수가 되풀이한 것이 아닐까." [과학동아 1998년 8월호]


 

1947년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의 사해 근처 쿰란의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문서는 유대교의 한
종파인 에세네파의 고문서이다.


에세네파에 대한 학술적인 기록은 사해문서가 발견되기 50년 전 1896년 기록에 나타난다.
캠브리지대 교수가 이집트 방문중 카이로에서 구입한 문서 가운데 벤 에즈라 유대교 회당에서
발견된 문서들 중에 중세시대 씌여진 '자도크 문서'(다마스커스 문서)라고 불리우는 기록을
보면 이 에세네파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이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다가, 후에 사해
동굴 4번에서 발견된 '공동체의 규칙'과 다른문서들을 비교 분석함으로써 1986년 처음 언급된
이 분파의 존재에 대한 가설이 옳았던 것으로 증명되었다.

에세네파에 대해서 언급하자면, BC 152년 요나단이 대제사장직을 찬탈하자 제사장이었던
'의로운 스승'은 저항하다가 모진 박해를 겪었다고한다.


요나단의 조카 요한네스 히르카누스가 통치 할 무렵(BC 135-104) '의로운 스승' 또는 그의
후계자가 추종자들을 데리고 사해 서북쪽에 있는 쿰란으로 가서 수도원을 세웠다.


이 수도원은 알렉산드로스 얀네우스 치세(BC 103-76)때 매우 번창했으나, AD 68년 6월
로마군에 의해 파괴 되었다.


쿰란 수도자들은 사악한 제사장들이 봉직하는 예루살렘 성전이 더럽혀졌다고 보았다.


외경을 다룬책인 '숨겨진 성서'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필사본에 나오는 '사악한 사제'는 마카베오 가문의 요나탄이나 시몬일 것이다.

선한사제는 '정의로운 스승'이다. '정의로운 스승'(정의로움을 가르치는 분)에 관해서는 그
동안 논쟁이 많이 벌어졌다.

 

듀퐁-조머 보고서는 쿰란문서,특히 정의로운 스승이 에세네파 안에 그리스도교의 싹이 있는
것을 보여준다고 주장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씨오더 H.가스터는 그러한 주장이 엉터리라고 반박했다. 구약과 신약 중간시기에 나온 많은
문헌이 묵시록적이고 메시아적인 점을 고려하면, 예수 그리스도(메시아)와 같은 인물의
출현이 의외는 아니었다.

유대교 비경전들의 메시아적 성격 때문에 그 문헌들을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열심히
읽었다.그리고 많은 부분이 수정을 거쳐 '그리스도교화'하였다.

심하게 말하자면 위조되어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증거하려고 했다. 에세네파나 다른 유대교
종파가 그리스도교의 출현과 연결된다는 보고 견해에 전혀 무리가 없다." [윌리스
반스토운/숨겨진성서 1권/ 이동진 역 / 문학수첩 / P264~265]


예수보다 150년앞선 에세네파의 메시아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동굴에서 금욕적인 종교 생활을 하던 에세네파는 유태교의 한 갈래로 영지주의적인 성격이
강했던 집단이었다. 이 무리는 구세주 또는 정의의 사도라고 불리는 사람이 이끌었다.

문헌에 따르면 이들은 두 종류의 메시지를 기다렸는데, 곧 빛의 아들들과 어둠의 아들들
사이에 종말 전쟁이 일어난다고 보았고, 결국 빛의 아들들이 승리하여 '다윗 계통의 임금
메시아'와, 사독 계통 '제사장 메시아'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다스릴 것이라고 믿었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율법과 제사와 같은 형식과 권위에 치우친데 비해, 에세네파는
신비주의와 금욕 생활을 내세워 유대 율법서를 지키고자 했다.

이들은 2차 성전시대 유대교에서 주세력이었던 사두가이파와 바리새파로부터 심한 공격과
체포, 구금등을 당한 반체제 세력이었다.

그들은 빛의 아들들(에세네파)이 어둠의 자식들에 대해 벌이는 40년의 성전을 치른 후 메시아의 도래가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었다.

그들은 AD 68년에 로마군과 맞서 싸워야 했으며, 사해동굴의 문서들은 이때 로마인들의
약탈을 피해 동굴 속에 감추어졌다.

쿰란 수도자들은 본래 제사장들이 지키던 정결법을 철저히 준수했다.

수도자들은 성(性)을 불결하게 여겨 독신 생활을 했으며, 재산과 예배, 독서와 식사를 모두
함께 했다.

초기 기독교의 형태가 불교에서 스님들이 머리를 깎고 수도에만 정진하던 것과 비슷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에세네파의 생활이 그랬다.

그들은 정결례와 금욕주의적 실천을 잘 지킴으로써 다가오는 신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기대했다.

또한 그들은 일반적인 유대교와는 달리 일요일을 중요하게 여겻다.

그리고 묵시 문학과 종말론적 기대에 찬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야말로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는 것이라고 기대했으며, 최후의 심판의 날이 오면 빛의 아들들이 어둠의
아들들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운다고 믿었다.

흰색 복장에서부터 종교의식에 따른 식사, 기도에서 두루마리의 제작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모든 일상사는 다가올 최후의 결전에 맞추어졌다.


에세네파는 오늘날의 유대교와 기독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여겨진다.

예를들어 에세네파는 성전에서 예배하는 대신 하루에 다섯 번 규칙적인 기도를 했고 이는 랍비
유대교에 그대로 전승되었다.

기독교에 끼친 영향은 신약성서에 '의로운 선생님'이라는 표현이나 산상수훈의 설교 내용은
쿰란의 사상을 비교할 때 이해하게 된다.

쿰란의 텍스트 속에는 "네 형제를 너 자신처럼 사랑하고, 가난하고 곤경에 빠진 사람을
도우라"는 구절이 있는가 하면 '정의의 스승'이 "나는 참회하는 자를 치유하며, 단순한 자를
위한 지혜이며, 마음이 약한 자의 위로"라고 말한 것으로 되어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
고유한 것으로 믿어지던 '성령','하나님의 아들','복음','새로운 약속(신약성서)' 등의 표현도
이미 존재하고 있다.

예수 가르침의 중요 부분 산상수훈의 묘사와 거의 같은 구절도 보인다. "지혜로운 자는 복이
있나니, 고난을 겪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며 가난한 자, 배고픈 자, 근심있는 자에게 영원한
삶을 약속하고 있다.

이미 예수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 그리고 신약성서 속에 그가 직접 말한
것으로 되어있는 교훈들이 여러 학자들 의 원전연구에 의해 와전 또는 허구적 첨가라는 의혹을
짙게 받고 있던 터에 이 문건들의 발견은 신학적 논쟁에 새로운 불을 지폈다.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기록된 사해사본에는, 헬라어로 기록된 기독교 신약성서의 “의로운
신(sidqat el)”, “율법의 일들(ma’aseh torah)”, “하나님의 교회(gehal el)”, “빛의
아들들(bene’or)”이라는 표현등도 발견되고 있다.

또한 에세네파가 초기 기독교에 미친 영향은 초대교회 조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초대 교회의 집단적 공동체 생활이나 떠오르는 아침해를 바라보며 하는 새벽기도 등이
그것이며, 초대교회의 지도자를 뜻하는 그리이스어 'Episcopus'는 감독을 의미하는
'overseer'라는 에세네파 직책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다.

에쎄네파에서 중요한 절기가 일요일이라는 것도 어쩌면 예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기독교의 신학자들 중에는 신약성서와 쿰란의 텍스트에서 유사점보다 차이점이 더
많음을 강조하기도 한다.

쿰란 텍스트연구로 정평이 난 하르트룻 슈테게만(독일) 같은 신학자는, 두 텍스트 사이의
유사성은 겉보기일 뿐이며 내용에서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쿰란의 텍스트 발견 50년을 맞아 이 문제를 깊이있게 다룬 독일의 슈피겔지는 "예수가 가르친
교훈을 당시 유대교 안에서 찾아볼 수 없다"던 종래의 주장은 이제 기독교 교리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결론내리고 있다.

일부의 학자들은 에세네파의 창시자인 '의로운 선생'이 복음서속의 야고보(James)혹은, 세례
요한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상 에세네파의 '의로운 선생'은 그가 실존했다고 하더라도 기원전 2세기정도의
인물이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쿰란에서 가까운 곳에 살았다는 것은 주목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이스라엘 정부 관광국 서울 사무소(I.G.T.O) http://www.israel.co.kr/ , 성서와 고고학 (2)
사해사본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쿰란의 사해문서중 가장 오래된것중의 하나인 '공동체의 규칙'은 초대 기독교와
중세시대의 수도원의 규칙서와 놀랍도록 닮아있다.

숨겨진 성서의 저자가 '공동체의 규칙'에 대해 해설한 것을 아래에 옮겨보도록 한다.

"'공동체의 규칙'은 카이로의 에즈라 공회당에서 1896~1897년에 발견된 '자도크
문서-다마스쿠스 문서'와 그 내용이 비슷하다.

쿰란 문헌의 12세기 필사본인 '자도크 문서'도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율법의 준수를 지시하는
규칙서인 것이다.

이러한 규칙서들과 유사한 것이 유대교 고대문헌들 가운데서는 찾아볼수가 없고 '다만 이와
비슷한 문헌들이, 기원 후 2세기에서 4세기 사이 그리스도교에서 '교회규칙'이라고 일컫는
것이 많이 나왔다.' (게자 베르메스, 사해문서, 71페이지참조)

에세네파와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를 시어도어 H.게시터는 다음과 같이 비교한다.(게스터,영어로 번역된 '사해문서' 35페이지 참조)


구성원들이 이 공동체를 부를 때 사용한 명칭은 팔레스티나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사용한
교회라는 명칭과 똑같다.

공동체에는 '거룩한 사람'이 12명 있어서 이 사람들이 전반적인 지도를 했는데, 그리스도교의
열두 사도와 놀랍게도 상응한다.

12명의 거룩한 사람 위에는 고위 지도자 3명이 있었는데 이것은 요한,베드로,야고버가 초기
그리스도교의 세 기둥으로 지정된 것(갈라디아서 2:9이하)과 같다.

공동체는 또한 '메바케림(감독자)'이라는 정규 조직이 있었는데, 메바케림은 그리스어
'에피스코피(주교)'와 같은 말이다. 공동체는 '사막에서 길을 준비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규정했는데, 이말은 세례자 요한이 자기 사명을 규정할 때 구약성서에서 인용해 온 것이다."



 

 

 

 

무조건  내가  믿는  종교가  옳다고  우기기  전에  제발  공부  좀  하세요.

남들은  다  아는  사실을  혼자  모르면서  떠드니까  '기독교인 = 무뇌아'라는  소리를  듣는  겁니다.

 

성경이 다른 신화를 베끼고 짜집기...

... 그리스신화를 표절했다는등 조로아스터교나 여러 이방종교들... 지금도 가능하지요 성경을 조잡해서 만들던지 다른 신화나 전설등을 가지고 짜집기 해서 종교를 창설할수...

성경이 천동설이라고 조롱하는 분에게...

... 제가 질문하는 내용은 성경 기록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 사용하는 천동설 상식에 대해서 질문하는... 배워온 신화나 전설을 히브리어로 짜집기 함.(민희식교수...

성경의 진실- [100]

... 하지만 별 시덥잔은 소리와 '성경의 진실'에 대해서 얘기하고있는... 또한 성경 자체가 진실됨 보다는 역사적 사실과 신화, 그리고 자기네들 종교를 짜집기 해서 만들어놓은...

성경에서 탐욕을 위한 구절만을 취하는...

... 예를 들어 십일조에 대해서는 확실한 구절이 있음에도... 제외한 다른 구절들을 짜집기해서 결국 십일조는... 멀리하는 ”말고는 다른 짐【계 2:24】으로 성도를 괴롭히지...

성경은 사실이다

... 왕궁에서만 자라서 세상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던... 성경의 기록을 신화처럼 여기던 과학자들에게... 발견했다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일이...

기독교 위축 이것도 신의 뜻인가요

... 이웃종교 신화 짜집기 이러고 돌아댕긴다 결과적으로... 일반인과 다른 능력있는 목사라도 혹은 신도라도... 또한 [밀린다왕문경]에는 석가모니가 부활했다는 얘기가...

재림했다는 예수와 대화 함 해 봤나요?

... 주변신화짜집기 예수의 구라질 역사가 시작되었다... 또한 [밀린다왕문경]에는 석가모니가 부활했다는... 알고는 다른 사람들은 먹지 못하도록 땅에 묻어라고 하고는...

안티기독교인들의 성경왜곡에 대한...

... 인구조사에 대해서도 긍정하고 있다. 이처럼 마태와... 또 그가 그일로 회개하거나 했다는 말이 없기에 죽음을... [민수기 11장 32-33절] >> 성경의 내용과 다른 말을 하고있다....

불교와 도교 주요개념

... 자신의 의견이 아닌 짜집기, 붙여넣기는 사절합니다... 에너지는 다른 에너지로 변환되어 공간내에 존재한다는... 또한 [밀린다왕문경]에는 석가모니가 부활했다는 얘기가...

정말로 성경에 이런구절들이 존재하나요?

... 안티들에 대해서 보다 정확히 잘 살펴보면 이들의... 조종 했다는 의미는 확실하다. 설사 강팍한 것이 바로의... 6~11) >> 위 구절 앞에서 성경이 말하는 "다른 신"이란 인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