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 ,기독교 에 대한 믿을수있을만한 진실 좀 알려주세요.

예수 그리스도 ,기독교 에 대한 믿을수있을만한 진실 좀 알려주세요.

작성일 2008.12.27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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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크리스마스가 생일인 그저 평범한 17살 되는 학생인데요.

 

저희 외가집쪽은 전부 기독교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데 그중에서도 장로교요 저희

 

어머니께서는 모테신앙이시고  그런데 제가 한가지를 알게되면 수백,수천가지가 궁금해지기

 

시작하는데요. 그중에서 몇가지 포인트를 찝어서 질문드리겟습니다.

 

1.     예수의 탄생의 진실에대하여...

 

성경책을 어느정도 보고 목사님께서 하시는말씀도 어느정도 듣고 하는데도 의심되는 점이 너무나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호와 다른말로는 조물주,창조주,영적인존재...등... 여러가지로 비유되시는 그러한 분의

 

아들로 태어나셔서 여러명의 제자를 두어 말씀을 전하시다가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못을 박혀 그 한몸을

 

희생하시고 12월 25일(제 생일인..) 에 부활하셨다고 하시는데.. 일단 이것부터 제가 기독교를 믿는데 가장 큰

 

의구점이자 과학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정도가 아니라서 믿는다는 것 자체가 힘드네요.

 

부활을 하시고 어디를 가셨고.. 왜 그러한 영적인 존재의 아드님으로 태어나셨는데 하필 많고 많은 생명중에

 

인간으로 태어나셨는지도 궁금하구요.

 

2.    성경책에 대해서..

 

제가 가장 궁금한 것 중에 하나인데요..

 

어떠한 사람들의 말로는 '성경책은 세계최고로 많이 팔린 판타지 소설이다'

 

이런말이있는데, 저도 솔직하게는 조금 지지를 하게됩니다. 일단 너무 내용이 판타스틱적이고

 

절대 이루어질수없는 일들이 너무 자주 아니 그책의 대부부분의 내용이 그러하니 도저히 믿을수가 없더군요.

 

이 성경책이 만약 구라라고 판정이된다면 지금 기독교를 믿고계신 수십억의 사람들은 어쩌나요

 

한사람의 사기극이로 수십억의 사람들이 일명 낚시질에 당하는건가요?

 

3.  타교들에 대해서..

 

이 세상에는 여러가지 교들이 존재하는데요, 대표적으로 불교,이슬람교,화교 등.. 기타 등등의 많은 교들이

 

존재하고있는데요. 각자들의 사후세계 또는 사후에 어떻게되는지의 내용이 각기각각 다 다른데요.

 

기독교가 옳다면 그 사람들은 구원 받지 못하는건가요? 만약 그 교 중에서 하나가 진실이라면

 

지금 수만은 사람들이 믿는 이 기독교는 사이비교가 되는게 아닌가요?

 

4. 하나님을 뵜다고 말씀하시는 목사님 또는 사람들에 대해서.

 

목사님들은 하나님에게 영감을 받아 그 것을 말씀으로 전해주시잖아요?

 

그렇지만 그 말이 어떻게 진실이고 거짓인지 알수있으며 그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게 진실인지는 어떻게

 

알수가 있나요. 솔직히 이해가 되지않습니다. 그저 말빨(?)좋으신 몇몇분들께서 많은 교인들은 현혹? 하는건 아닌가라는 생각도 가끔 듭니다.

 

5. 하나님은 인간을 남녀로 갈라 놓으셨는데..

 

저희 목사님들 곧 말씀을 전하시는분들께서 보면 전부 남자분들이신데 왜 여성들은 건사까지밖에 인정이 되지

 

않는거죠? 그리고 성경에서 보면 인간평등 남녀평등 이러한 말씀들이 있다고 하는데 이러한 경우는 어떻게

 

설명이 되는거죠? 기독교에대한 의구점이 아직도 풀리지않는 부분이 너무나 많습니다.

 

6. 마지막으로 사후세계에 대해서 ..

 

불교는 죽으면 환생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리스? 책을 보면 뭐 스틱스강? 그러한데에 가서 지하세계등 얘기가

 

많은데.. 기독교는 천당 곧 영원한 안식처에 간다는데.. 만약 간다하면 거기엔 수십억 수천년 전에 사람들도

 

다 같이 있는건가요? 그리고 지금의 가족들과도 재회할수있는 건가요? 죽은사람이 말이 없다니.. 뭐 궁금해도 알

 

방법이 없고 성경책 이러한것에만 나와있는데.. 신뢰가 안가니..답답합니다.. 해결좀 해줍사하고  글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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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질문이 많으시군요.

좋은 대답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1. 예수의 탄생의 진실에대하여...

성경책을 어느정도 보고 목사님께서 하시는말씀도 어느정도 듣고 하는데도 의심되는 점이 너무나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호와 다른말로는 조물주,창조주,영적인존재...등... 여러가지로 비유되시는 그러한 분의 아들로 태어나셔서 여러명의 제자를 두어 말씀을 전하시다가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못을 박혀 그 한몸을 희생하시고 12월 25일(제 생일인..) 에 부활하셨다고 하시는데.. 일단 이것부터 제가 기독교를 믿는데 가장 큰 의구점이자 과학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정도가 아니라서 믿는다는 것 자체가 힘드네요.

 

부활을 하시고 어디를 가셨고.. 왜 그러한 영적인 존재의 아드님으로 태어나셨는데 하필 많고 많은 생명 중에 인간으로 태어나셨는지도 궁금하구요.

 

우선 12월 25일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이 아니라 탄생하신 날로 정해진 날입니다. 물론 예수의 탄생과 관계가 없는 날이지만요.  

 

크리스마스는 4세기에 시작될 때부터 논쟁에 휩싸여 왔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의 탄생일에 관해 의문이 있었습니다. 성서에서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날이나 달을 명시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 가지 날짜들이 제시되어 왔습니다.

 

3세기에 일단의 이집트 신학자들은 그 날을 5월 20일로 정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보다 더 이른 날짜들, 이를테면 3월 28일이나 4월 2일 혹은 4월 19일을 선호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18세기 무렵에는, 예수의 탄생이 일 년 열두 달 모두와 각각 관련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12월 25일이 최종적으로 답변확정되었습니까?

 

대부분의 학자들은 12월 25일은 가톨릭 교회에서 예수의 탄생일로 정하였다는 데 동의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신 브리태니카 백과 사전」은 이렇게 말합니다. “가장 가능성 있는 이유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그 날짜를 ‘무적 태양의 탄신일’을 알리는 표가 되는 이교 로마 축제일과 일치시키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2세기 반이 넘게 이교도들에게 악랄한 박해를 받았던 그리스도인들이 왜 갑자기 박해자들에게 굴복하였습니까?

 

부패가 들어오기 시작하다

 

1세기에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회중으로 몰래 들어와 많은 사람들을 그릇 인도할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딤후 3:13) 이러한 대배교는 사도들이 사망한 후에 시작되었습니다. (사도 20:29, 30)

 

4세기에 소위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이 있은 후에, 엄청난 수의 이교도들이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형태의 그리스도교로 모여들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떠하였습니까? 「초기 그리스도교와 이교」(Early Christianity and Paganism)라는 책은 이렇게 기술합니다. “진정으로 진지하게 믿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비교적 소수의 그룹은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거대한 다수 속에 파묻혀 버렸다.”

 

바울의 말이 참으로 옳았음이 증명된 것입니다! 마치 이교의 부패가 진정한 그리스도교를 삼키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오염된 상태가 축일들을 축하하는 일에서보다 더 분명하게 나타나는 곳은 없었습니다.

 

사실상, 그리스도인이 지키도록 명령을 받은 유일한 기념 행사는 주의 만찬입니다. (고전 11:23-26) 로마 축제와 관련이 있는 우상 숭배 관습들 때문에,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축제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3세기의 이교도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들은 공공 행사장에 나오지 않으며, 공개 전시회에도 관심이 없고, 공개 연회를 거부하고, 신성한 경기들을 몹시 싫어하는 사람들이오.” 한편, 이교도들은 이렇게 우쭐대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연회와 노래와 경기로 유쾌하게 신들을 숭배하오.”

 

4세기 중엽에는, 그러한 불평이 수그러들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점점 더 많은 사이비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교의 우리 안으로 슬며시 들어오면서, 배교적인 사상이 널리 퍼졌습니다. 그로 인해 로마 세계와 타협하는 일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설명하면서, 「현대 그리스도교 내의 이교 사상」(The Paganism in Our Christianity)이라는 책에서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이교 축제들을 전통에 따라 받아들이고 그 축제들에 그리스도교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명확한 방침이었다.”

 

그렇습니다. 대배교가 해로운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소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교 축하 행사들을 기꺼이 용인함으로 인해, 이제 그러한 행사들이 그리스도교 사회 내에서 어느 정도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오래지 않아 그리스도인들은 이교도들만큼이나 많은 연례 축제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으뜸 가는 축제가 크리스마스라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닙니다.

 

국제적인 축일

 

그리스도교의 영향력 있는 교파가 유럽 전역에 널리 퍼지면서, 그와 함께 크리스마스도 퍼져 나갔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예수의 탄생일에 영예를 돌리는 기쁨을 주는 축제를 계속 존속시키는 것이 적절하다는 견해를 받아들였습니다.

 

그에 따라, 기원 567년에 투르 공의회에서는 “크리스마스부터 공현축일까지의 12일간을 신성한 축제 기간으로 공포”하였습니다.—「학교 및 가정용 가톨릭 백과 사전」(The Catholic Encyclopedia for School and Home).

 

머지않아 크리스마스는 북유럽의 세속 수확제의 특징들을 많이 흡수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게걸스럽게 먹고 마시는 일에 흥청망청 빠져 듦에 따라, 경건함보다는 흥겹게 즐기는 것이 더 보편적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방종에 대해 항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행실을 승인하였습니다. (비교 로마 13:13; 벧전 4:3)

 

기원 601년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잉글랜드에 있는 선교인 멜러터스에게 편지하면서, “그러한 고대의 이교 축제들을 중단시키지 말고, 단지 그러한 축제들을 지키는 이유를 이교적인 것에서 그리스도교적인 것으로 바꾸어 그러한 축제들을 교회의 의식에 맞추어 조절”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한때 이집트 정부의 고대 유물 감찰관이었던 아서 웨이겔은 그와 같이 알려 줍니다.

 

중세에 개혁 정신이 있었던 사람들은 그러한 지나친 일들에 대해 항의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들은 “과도하게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악습”을 금하는 많은 포고령을 발하였습니다. 페니 레스태드 박사는 자신의 저서 「미국의 크리스마스 역사」(Christmas in America—A History)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일부 교직자들은, 타락한 인류에게는 방종과 탐닉의 시기가 필요한데, 단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감독 아래 진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달라진 것은 거의 없었는데, 이교 관습들이 이미 크리스마스에 너무 깊숙이 스며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한 관습들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술가 트리스트럼 코핀은 그 점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자신들이 항상 해 오던 일들을 그대로 행하고 [있었으며] 도덕주의자들의 논쟁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유럽 사람들이 신대륙에 정착하기 시작할 무렵, 크리스마스는 잘 알려진 축일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가 식민지에서는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청교도 개혁가들은 이 축하 행사를 이교적인 것으로 여겼고, 1659년에서 1681년 사이에 매사추세츠 주에서는 이 축하 행사를 금지하였습니다.

 

금지령이 해제된 후, 크리스마스 축하는 식민지 전역에 널리 퍼지게 되었는데, 특히 뉴잉글랜드 지방의 남부 지역에서 그러하였습니다. 하지만 축일의 역사를 고려해 볼 때, 일부 사람들이 하느님의 아들에게 영예를 돌리는 일보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일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놀랄 일은 아닙니다.

 

특히 피해를 주었던 한 가지 크리스마스 관습은 술을 진탕 마시는 관습이었습니다. 줄지어 선 젊은이들의 대열이 부유한 이웃 사람들의 집으로 들어가 ‘장난을 칠까요, 대접을 할래요’ 하는 식으로 음식과 술을 거저 달라고 요구하곤 하였습니다. 집주인이 거절하면 대개 욕설을 퍼부었으며, 때로는 집 건물에 손상을 입히기도 하였습니다.

 

1820년대에는 상황이 악화되어 “크리스마스 무질서”가 “사회의 심각한 위협”이 될 지경에 이르렀다고 니센바움 교수는 말합니다. 뉴욕이나 필라델피아와 같은 도시에서는 부유한 지주들이 경비원을 고용하여 자기들의 재산을 지키기 시작하였습니다. 심지어 뉴욕 시는 1827/28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있었던 폭동 때문에 최초로 전문 경찰대를 조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가 새롭게 바뀌다

 

19세기에는 인류에게 전례없는 변화가 있었습니다. 도로망과 철도망의 출현으로 사람과 상품과 뉴스가 훨씬 더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산업 혁명은 수많은 일자리들을 만들어 냈고, 공장에서는 상품을 신속하게 생산하여 안정되게 공급하였습니다. 산업화는 또한 새롭고 복잡한 사회 문제들을 낳았으며,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방식에도 궁극적으로 영향을 미쳤습니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가족의 유대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축일들을 이용해 왔으며, 크리스마스 역시 그러합니다. 크리스마스를 장려하는 사람들은, 오래 된 몇몇 크리스마스 전통들을 선택적으로 수정함으로써, 크리스마스가 난폭하고 사육제와 같은 축제에서 가족 중심의 축일이 되도록 변경시켜 실효를 거두었습니다.

 

사실, 19세기 말엽, 크리스마스는 현대 미국 생활이 낳은 부작용에 대한 일종의 해독제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레스태드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축일 가운데서 크리스마스는, 종교와 종교적 감정을 가정으로 돌려놓는 그리고 일반 세상의 탐닉과 실패를 바로잡는 완벽한 도구였다.”

 

레스태드 박사는 이렇게 덧붙여 말합니다. “선물주기, 자선 행위, 심지어 다정하게 축일 인사를 주고받는 일, 그리고 거실이나, 나중에는 주일 학교 강당에 상록수를 세워 두고 장식하고 즐기는 일 등은 각 핵가족의 성원들을 서로에게로 그리고 교회와 사회로 연결시켜 주었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서로에 대한 사랑을 다짐하고 가족의 연합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수단으로 크리스마스를 축하합니다. 물론,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영적인 부면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탄생에 영예를 돌리려고 크리스마스를 축하합니다.

 

사람들은 교회의 특별 예배에 참석하거나, 예수의 탄생을 묘사하는 그림을 집에 걸어 두거나, 감사의 기도를 예수에게 직접 드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보십니까? 이러한 일들은 그분의 승인을 받을 수 있습니까? 성서에서 알려 주는 내용을 고려해 보십시오.

 

‘진리와 평화를 사랑하라’

 

예수께서는 지상에 계셨을 때, 추종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영과 진리로 숭배해야 합니다.” (요한 4:24) 예수께서는 이 말씀에 따라 사셨습니다. 그분은 항상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아버지이신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를 완벽하게 본받으셨습니다.—시 31:5; 요한 14:9.

 

여호와께서는 성서의 지면을 통해 자신이 모든 형태의 속임수를 미워하신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시 5:6)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그토록 많은 부면들에서 거짓이 눈에 띈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닙니까?

 

예를 들어, 산타클로스와 관련하여 지어낸 이야기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나라에서 널리 믿어지고 있는 것처럼, 산타가 왜 문으로 들어오지 않고 굴뚝으로 들어오는 것을 좋아하는지를 아이에게 설명해 주려고 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산타가 어떻게 단 하룻밤 사이에 그처럼 엄청나게 많은 집들을 방문할 수 있습니까?

 

날아다니는 순록에 대해서는 어떠합니까? 산타를 실재하는 사람으로 믿는 일과 관련하여 속아 왔다는 것을 아이가 알게 될 때, 부모에 대한 아이의 신뢰심이 손상되지 않겠습니까?

 

「가톨릭 백과 사전」은 명백하게 이렇게 기술합니다. “이교 관습들이 ··· 크리스마스에 모이게 되었다.” 그렇다면 가톨릭 교회와 그 밖의 그리스도교국의 교회들에서 그리스도교에서 기원하지 않은 관습들로 이루어진 축일을 계속 존속시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교의 가르침을 용인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께서는 지상에 계셨을 때, 사람들에게 자신을 숭배하라고 권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 너의 하느님을 숭배해야 하고, 오직 그분에게만 신성한 봉사를 드려야 한다.” (마태 4:10)

 

그와 비슷하게, 예수께서 하늘에서 영광스럽게 되신 후에도 한 천사는 사도 요한에게 “하느님을 숭배하여라” 하고 명령합니다. 이것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어떤 변화도 없었음을 지적해 줍니다. (계시 19:10)

 

따라서 이러한 질문을 해 보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자신의 아버지가 아니라 자신에게 돌려지는 모든 숭배심 깊은 정성을 승인하실 것인가?’

 

현대 크리스마스에 관한 실상이 매우 좋지 않아 보이는 것은 분명합니다. 대체로 크리스마스는 조작된 축일로서, 많은 증거들이 부패한 과거를 지적해 줍니다. 그러므로 건전한 양심에 근거하여 수백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은 크리스마스를 축하하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부활에 대한 신앙

 

성서에는 예수께서 지상에 출현하시기 전과 후에 있었던 여러 건의 부활을 언급합니다.(열왕 상 17:21, 22; 열왕 하 4:32-35; 요한 11:43; 마가 5:41, 42) 그러나 인류 전반에게 부활의 희망을 제시하는 가장 중요한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우리 각자가 사후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로부터 일으킴을 받으신 사실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을 비롯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조롱과 고통을 당한 것은 특히 이 가르침 때문이었습니다.—사도 4:1-3; 17:32; 23:6, 10; 24:18-21.

 

사도 ‘바울’은 ‘아테네’ 시의 많은 학자들 및 철학자들 앞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을 통하여 의로써 세계를 심판하실 날을 정하시고 또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음의 근거를 주셨[습니다.]”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인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 나시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못했다면, 우리의 선교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될 것입니다.”—사도 17:31; 고전 15:13, 14, 새번역.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증거

 

몇가지 증거를 고찰해 보면, 우선, 그리스도께서 죽임을 당하시고 매장되는 것을 본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분이 실제로 ‘유대’인 지도자들의 간청에 따라 ‘로마’인들에 의해 실제로 처형되었음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이전에 그를 죽이려던 시도가 있었습니다. (누가 4:28, 29; 요한 5:18; 8:59; 11:53) ‘유대’인 지도자들은 그를 죽일 것을 요구하면서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서 “그[예수의] 피를 우리와 우리의 자손에게 돌릴찌어다.” 하고 외치기까지 했습니다. (마태 27:25)

 

그들은 또 정치적인 위협으로 ‘빌라도’에게 압력을 가하였습니다. (요한 19:12)  확실히 ‘유대’인 반대자들과 특히 그리스도의 가장 격렬한 반대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은 그를 가짜 “죽음”에 처하는 것을 그대로 보고만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가 틀림없이 죽도록 조처할 것입니다.

 

아뭏든, 그 문제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났고 그는 선고를 받고 ‘로마’인들에 의해 사형을 당하였습니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기원 110년경)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그 이름은 행정관 ‘본디오 빌라도’가 ‘티베리우스’ 치세중에 처형된 그리스도로부터 유래하였다.”

 

‘유대’인 ‘탈무우드’에도 예수께서 (형주에) 달린 일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과 기타 비그리스도인 역사 기록은 예수의 반대자들도 결코 예수 혹은 예수의 죽음의 역사성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지해 줍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증거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는, 예수의 부활 후 그를 보았음을 공개적으로 증언한 사람이 적어도 네 사람이 있으며, 그들의 기록 중 하나는 그를 본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500명 이상이었다고 알려 줍니다. (마태 28:16, 17; 요한 20:19; 21:1, 2; 사도 1:15, 22; 고린도 전 15:6-8)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러나 이러한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쓴 성서 기록이다. 그 기록이 사실인지 우리가 어떻게 아는가?’ 하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허다한 사람들이 그 부활을 선포하는 데 그토록 열심이었던 이유를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그들의 적들도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열심히 증거하여 ‘‘예루살렘’과 ‘유대’, 아니, 세계를 뒤엎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사도 5:28; 17:6) 박해와 기타 요인으로 인하여 그들은 흩어졌고 이 가르침을 선포하여 ‘로마’에서 ‘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로마’ 세계가 그들의 열심을 주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진실성에 대해, 성서 학자 ‘A. J. 메이어스’의 다음과 같은 진술을 고려하여 보십시오.

“그러므로, 간단히 말하여, 그리스도께서 부활되셨다는 사실은 500여명의 목격자들에 의해 증명되었는데, 이들의 경력이나 단순성 및 생활의 고결성으로 볼 때 그들은 그러한 이야기를 꾸며낼 수 없는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은 속이려는 어떠한 시도도 쉽게 발각될 수 있는 때에 살았으며, 그들의 증거로 소득은 하나도 없었고 손해만 있었으며, 그들의 사도적 생활에 나타난 도덕적 담대함은 그들의 소식의 객관적 진실성에 대한 마음 속의 확신이 있었다는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부활되었다는 사실은 속임수를 막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 회당이 침묵을 지킨 사실에 의해 웅변적으로 증명된다. 회당은 만일 속임수가 있었다면 쉽게 알아낼 수 있었을 것이며, 사도들의 증언에 대해서는 무언의 증인만 반대했으며, 간수의 근무 태만 혐의에 대해서는 벌하지 않았으며, 사도들의 증언에 대해서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위협하는 것 외에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사도 4장 17절)

 

마지막으로, 요컨대 교회의 기원을 이룬 그러한 신앙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모든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의 증언을 믿은 ‘유대’인과 비‘유대’인들이 수천 수백만명이 되는 사실로 볼 때 그리스도의 부활은 실제로 있었어야 타당하다. 왜냐 하면 부활없이 교회가 흥왕했다는 것은 부활 자체보다도 더 큰 기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와 비슷한 논증으로 우리는 부활이 사기였다는, 그리고 예수의 시체가 도난되었다는, 혹은 그것이 환각 혹은 공모였다는 예수의 적들의 주장의 허위성도 반박할 수 있습니다. 부활에 대한 증인들은 무덤을 지키도록 배치된 경비원들을 쓰러뜨리거나 매수할 수 있는 힘센 혹은 세력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음이 확실합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더구나 그들에게 개인적인 아무 소득도 없을 일을 놓고 공모했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들이 부활을 증거한 데는 이기적인 동기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 하면 그 증거 활동으로 그들은 고통과 죽음을 각오해야 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가장 잔인한 원수들이 있는 곳에서, 부정 수단이 쉽게 탄로날 수 있는 곳에서 증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유대’인들의 분노가 절정에 달했을 때 기다리지 않고 증거하였습니다. 만일 그것이 단순한 환상 혹은 상상이었다면, 그것은 그들이 기대한 어떤 것에 대한 환상 혹은 상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부활되어 나타나셨을 때, 절망과 좌절 가운데서 있었던 그들에게 그것은 커다란 놀라움이었고 의외의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들이 극히 횡포한 박해 가운데서도 중단하지 않고 담대히 증거한 것은 바로 그 부활 때문이었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이 문제와 관련하여, 또 다른 저명한 학자이자 고고학자인 ‘조오지 롤린슨’의 강력한 논증을 고려하는 것은 유익합니다. 그는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초기 귀의자들은 그들이 어느 때라도 그들의 종교로 인하여 순교당할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칼과 십자가와 야수와 형주의 위협을 받으면서 전파하고 가르쳤다. ··· 그리고 그리스도교를 옹호하는 초기 저술가는 모두, 그 옹호 행위로 인하여, 시민권을 위태롭게 하였으며, 비슷한 운명을 당할 수 있었다. 믿음에 생사가 걸려 있을 때 사람들은 신중한 고려없이 취미에 맞는 신조를 경솔히 신봉하지 않으며, 그 종교의 주장을 충분히 검토하고 그것이 진리임을 확신하지 않고는 박해받는 종파의 대열에 공개적으로 서지 않는다.

 

초기 귀의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의 역사적 정확성을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을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그들은 증인들을 시험하고 반대 심문할 수 있었고—그들의 몇가지 기록을 비교할 수 있었고—그들의 진술을 그들의 적들이 어떻게 반박했는가 질문할 수 있었고—당시의 이교 문서를 참조할 수 있었고—증거를 철저히 그리고 완전히 가려낼 수 있었다. 이 모든 것—그리고 증거가 누적되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은 먼 과거에 속한 어떠한 사건과 관련해서도 제시할 수 없는 많은 증거를 구성하며, 그리스도인 이야기의 진실성을 타당한 의심의 여지 없이 확증한다. 단 한 가지 면에서도 ··· 그 이야기에는 신화적인 특성이 없다.”

 

예언으로부터의 증거

 

또 다른 증거가 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 일이 있기 전에 예언되었다면, 그것은 부활이 실제로 있었다는 인상적인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증거, 특히 근 2,000년 전 ‘아브라함’ 시대로부터 메시야를 기대해 온 사람들의 손에 메시야가 죽임을 당할 것을 예언한 내용이 어떻게 조작될 수 있었겠습니까?

 

‘유대’인들이 여러 세기 동안 그들의 율법서와 그들의 민족의 역사 문헌으로 보존해 온 「구약 성경」에서 사전 증거를 발견하게 됩니다. 기원전 8세기에, 예언자 ‘이사야’는 예수께서 그의 동족, ‘유대’인들의 요청에 의해 죽임을 당하실 것을 묘사하였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 그가 ···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이사야 53:3-9.

 

하나님께서 그를 생명으로 다시 일으키실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예언자는 다음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가]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부활되어]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 나의 의로운 종이 ···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이사야 53:10, 11.

 

그보다 나중 예언자인 ‘다니엘’은 그의 희생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육십 이 이레 후에 [실제로 기원 33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 [‘유대’인들의 성전에서의]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니라.] [자기의 생명의 진정한 희생으로 대치함으로써]”—다니엘 9:26, 27.

 

‘다윗’ 왕은 예언적으로 ‘스올’ 즉 무덤으로부터의 부활에 대해 말하였으며, 사도 ‘베드로’는 그 예언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시켰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되신지 50일 후에, 그는 3,000명의 ‘유대’인들에게 연설하였는데, 그들은 그 예언이 예수께 적용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베드로’의 설명을 받아들였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 그[‘다윗’]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사도 2:24-32; 또한 시 16:10 비교.

 

또 사도 ‘바울’은 시편 40편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적용된다고 지적하였습니다. ‘바울’은 예수께서 침례받으시던 때에 “하나님이 ···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 보시옵소서 ···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고 묘사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부언하였습니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브리 10:5, 7, 10; 시 40:6-8.

 

확실히, 여러 세기 전에 말한 이러한 예언과, 예수의 죽음 및 부활 사이에는 주목할 만한 상호 관계가 있습니다. 관련된 모든 요인을 예수께서 조종하는 것 혹은 사도들이 그 이야기를 조작하는 것은 불가능하였을 것입니다.

 

예수 자신의 말씀

 

더우기, 예수께서는 침례를 받은 후 유월절에 자신의 다가오는 사망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시기 시작하셨는데, 물론 제자들은 그 사건을 목격한 후에야 돌이켜 보고 예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그들과 교제하시기 시작한 초기에 그러한 말씀을 하기 시작하셨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하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요한’은 이렇게 부언합니다.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한 2:19, 21, 22; 또한 마태 12:40; 16:21-23; 마가 8:31; 10:33, 34 비교.

 

부활에 대한 진리는 사망한 사람들과 죽음을 앞에 둔 온 인류를 위한 유일한 희망이므로,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곳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가장 큰 관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명을 사랑하며 건강과 만족이 수반된다면 생명이 무한히 연장되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매일 신문 보도를 보면서 평화, 질병 퇴치면에서의 진보 및 더 나은 경제 상태에 대한 좋은 소식을 듣기를 기대합니다.

 

그들은 일상 사건에 대한 증인들의 증언을 듣고 인간들이 쓴 역사 기록을 받아들이며, 심지어는 장래 계획의 기초로 삼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인류를 위한 행복한 생명의 희망과 약속이 걸려 있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풍부한 증거를 편견없이 검토해 보는 것은 얼마나 더 중요하고 지각있는 일이겠습니까!

 

 

2.    성경책에 대해서..

제가 가장 궁금한 것 중에 하나인데요..  어떠한 사람들의 말로는 '성경책은 세계최고로 많이 팔린 판타지 소설이다' 이런 말이 있는데, 저도 솔직하게는 조금 지지를 하게됩니다. 일단 너무 내용이 판타스틱적이고 절대 이루어질수없는 일들이 너무 자주 아니 그책의 대부부분의 내용이 그러하니 도저히 믿을수가 없더군요.

 

이 성경책이 만약 구라라고 판정이된다면 지금 기독교를 믿고계신 수십억의 사람들은 어쩌나요 한사람의 사기극이로 수십억의 사람들이 일명 낚시질에 당하는건가요?

 

이 질문도 만만찮은 질문이군요. 대답이 길 수 밖에 없군요.

 

성서는 일반적으로, 뛰어난 시적 아름다움을 지닌 위대한 문학 작품이자 인간 필자들의 놀라운 업적으로서 인정받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그보다 훨씬 더 큰 가치를 지닌 책입니다. 필자들은 자신이 기록한 내용이 다름아닌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직접 증언하였습니다.

 

바로 그 점이, 성서의 표현이 아름답고, 더욱 중요한 것으로, 성서가 생명을 주는 지식과 지혜의 책으로서 탁월한 가치를 지니게 된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자신이 한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증언하셨으며, 고대 히브리어 성경으로부터 많이 인용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였으며, 히브리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칭하였습니다.—요한 6:63; 딤후 3:16, 로마 3:1, 2.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예언자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고 증언하였습니다. 다윗(다비드) 왕은 “여호와의 신[“영”]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사무엘 하 23:2) 예언자들은 자신들의 말이 여호와로부터 나온 것임을 인정하였습니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주신 거룩한 말씀에 어느 것도 가감하지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바울의 기록들을 영감받은 것으로 간주하였으며, 유다는 베드로의 말을 영감받은 권위있는 근거로서 인용한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계시록의 필자 요한은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아 기록하였으며, 누구든지 이 계시된 예언의 말씀에 가감하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벧전 1:10-12; 벧후 1:19-21; 신명 4:2; 벧후 3:15, 16; 유다 17, 18; 계시 1:1, 10; 21:5; 22:18, 19.

하나님께 헌신한 이 종들은 모두 성서가 영감받은 것으로서 참되다고 증언하였습니다. 이 밖에도 성경의 확실성에 대한 증거들이 많이 있지만, 그중 일부를 다음의 9 가지로 소개합니다.

(1) 역사적 정확성.

 

유대인들은 애초부터 히브리어 성경의 정경들을 영감받고 전적으로 믿을 만한 기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므로 다윗 시대에, 창세기부터 사무엘 상까지에 기록된 사건들은 그 민족의 참된 역사이자 하나님께서 그들과 관계하신 내용으로 온전히 인정되었습니다. 시편 78편은 그 점을 예시하는데, 여기서는 그러한 세부적인 사건들 중 35건 이상을 언급합니다.


성서의 반대자들은 모세 오경에 대해, 특히 그 확실성과 저자에 대해 의문을 강하게 제기해 왔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모세를 모세 오경의 필자로 인정한 것 외에 고대 필자들의 증언도 있는데, 이들 중 일부는 유대인의 적이었습니다.

 

아브데라의 헤카타이오스, 애굽(이집트)의 역사가 마네토, 알레산드리아의 리시마쿠스, 유폴레무스, 타키투스 및 주베날리스는 모두 유대인과 다른 민족을 구별시켜 주는 법전이 모세에 의해 제정된 것이라고 말하며, 이들 대다수는 모세가 그의 법을 기록하였다고 명확히 지적합니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철학자 누메니오스는 얀네와 얌브레를 가리켜 모세를 대적한 애굽의 제사장들로 언급하기까지 합니다. (딤후 3:8) 이러한 저술가들은 그리스인들이 처음으로 유대 역사에 호기심을 갖기 시작한 때인 알렉산더 시대(기원전 제4세기)부터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시대(기원 제3세기)까지의 시기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이 외에도 많은 고대 저술가들이 모세를 지도자, 통치자 또는 율법 수여자로 언급합니다. 고고학적 발견물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주변 나라들과 관련되어 있는, 성서에 기록된 사건들의 역사적 정확성을 종종 뒷받침해 줍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 신약 성경에 관하여는 어떠합니까? 신약 성경은 구약 성경 기록을 확증해 줄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역사적으로 정확하고 믿을 만하며 구약 성경과 동일하게 영감을 받은 것으로 증명되었습니다.

 

그 필자들은 자신들이 기록한 바로 그 사건들의 목격 증인이자 흔히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자신들이 듣고 본 것을 알려 줍니다. 그들과 동시대의 수많은 사람은 그들의 말을 믿었습니다. 그들의 증언은 고대 작가들이 참조한 점으로 풍부히 확증됩니다. 이들 중에는 주베날리스, 타키투스, 세네카, 수에토니우스, 소(小) 플리니우스, 루키아누스, 켈수스 및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 등이 있습니다.


S.오스틴 앨리본은 「연합 성서 편람」(The Union Bible Companion)에서 이렇게 기술합니다. “아이작 뉴턴 경은 ··· 고대 저술 비평가로서도 유명하였으며, 성경을 매우 주의 깊이 조사하였다. 이 점에 대한 그의 결론은 무엇인가? ‘나는 여하한 세속 역사에서보다도 신약에서 확실성의 더욱 분명한 특징을 발견하게 된다’고 그는 말한다.

 

존슨 박사의 말에 의하면,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원로원 회의장에서 죽었다는 증거보다도, 복음서에 진술된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에서 죽으셨다는 증거가 더 많다. 참으로, 훨씬 더 많은 증거가 있다. 복음서 역사의 진실성을 의심한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카이사르가 원로원 회의장에서 죽었다거나, 800년에 교황 레오 3세에 의해 카롤루스 대제가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대관(戴冠)되었다고 믿을 만한 무슨 근거가 있는지를 물어보라. ··· 찰스 1세와 같은 인물이 산 적이 있었고 참수당했으며, 그를 대신하여 올리버 크롬웰이 통치자가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 아이작 뉴턴 경은 중력의 법칙을 발견한 사람으로 인정된다. ···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에 관해 단언된 바를 모두 믿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참되다는 역사적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 만일 이처럼 증거를 제시했는데도, 어떤 사람들이 여전히 믿으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들을 어리석게도 완고한 사람이거나 구제할 길 없이 무식한 사람으로 여기고 단념해 버린다.

 

그러면 성경의 확실성에 관한 증거들이 현재 풍부히 제시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못 믿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 분명히,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잘못되어 있다고 결론내리는 것이 타당하다. 즉 그들은 자존심을 꺾고 다른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을 믿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다.”

추종자들이 진리로 숭배하는 종교인 그리스도교의 탁월성을 강조하면서, 조지 롤린슨은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이것의 첫 단계였던 구약 시대의 제도를 포함—는 무엇보다도 그 객관성 또는 역사성에 있어서 세계의 다른 종교들과 구별된다.

 

그리스와 로마, 이집트, 인도, 페르시아 및 동양의 종교들은 일반적으로 순이론적인 체계이며, 역사적 근거를 진지하게 필수 조건으로 삼지도 않았다. ··· 그러나 성서의 종교는 그와 다르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유대인 제도든 그리스도인 제도든 어디를 살펴 보든 간에, 제반 사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절대적으로 사실에 근거를 둔 교리 체계를 보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교리 체계는 효력을 잃게 되며, 여러 실용적인 목적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인정받을 만한 것으로 밝혀져야 확립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2) 지리학적 및 지질학적 정확성.

 

많은 필자는 약속의 땅과 그 인접 지역들에 대한 성서 묘사의 놀라운 정확성에 관하여 논평해 왔습니다. 예로서, 동양 여행가인 A. P. 스탠리 박사는 이스라엘인들의 광야 여행에 관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설령 그들의 정확한 경로가 알려져 있지 않다 할지라도, 이 지방의 특징과 성서에 묘사된 여러 주목할 만한 예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매우 많기 때문에 그 예들이 역사적 사실이었다는 증거가 여전히 남아 있는 셈이다. ··· 이따금 발견되는 샘들, 우물들 및 시내들은 마라의 ‘물’, 엘림의 ··· ‘샘’, 호렙의 ‘시내’, 미디안에 있는 이드로의 딸들의 ‘우물’과 그 ‘구유’ 또는 물통에 관한 기록과 일치한다. 식물은 아직 모세가 기록한 역사로부터 추론해야 하는 부면이다.”

 

애굽에 관한 기록의 정확성은, 이 지역에 대한 일반적인 묘사—비옥한 농경지, 나일강과 그 하숫가의 갈대(창 41:47-49; 출 2:3), 물의 근원인 ‘강, 운하, 갈대 무성한 못, 호수’(출 7:19), 이곳의 ‘삼, 보리, 밀, 나맥’(출 9:31, 32)—에서뿐 아니라 여러 마을의 이름과 위치에서도 나타납니다.

일부 현대 과학자들은 성서에 나와 있는 지질학적 및 지리학적 기록을 깊이 신뢰하였기 때문에 그 기록을 지침으로 삼고 따랐으며 그리하여 큰 보람을 거두었습니다. 여러 해 전에 저명한 지질학자인 벤 토르 박사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 그 땅의 돌은 철이요”라는 성구를 규명하였습니다. (신명 8:7, 9)

 

그는 브엘세바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검붉은 광석으로 가득 차 있는 거대한 절벽을 발견하였습니다. 여기에는 1500만 톤으로 추산되는 저급 철광석이 매장되어 있었습니다. 후에, 기술자들은 60내지 65퍼센트의 순철을 함유하는 우수한 광석이 1.5킬로미터나 노출된 곳을 발견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재조림 사업의 저명한 권위자인 요세프 웨이츠 박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브엘세바 땅에 처음으로 심은 나무는 에셀 나무(위성류)였다. 그의 본을 따라서, 우리는 4년 전에 같은 지역에 200만 그루를 심었다. 과연 아브라함이 옳았다. 에셀 나무는 연 강우량이 약 150밀리미터도 채 못 되는 남부 지방에서 번성하는 몇몇 나무 중 하나임을 알게 되었다.”

 

노가 하레우베니 저 「성서에 나오는 유서 깊은 땅의 교목과 관목」(Tree and Shrub in Our Biblical Heritage)이란 책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족장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도착했을 때 그저 아무 나무나 심은 것 같지 않다. ··· 그는 다른 나무에 비해 더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는 나무를 택하였다. 더욱이, [에셀 나무는] 뿌리를 땅속 깊이 뻗어 지하수를 얻음으로써 더위와 오랜 가뭄을 견딜 수 있다. [에셀 나무가] 브엘세바 인근에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창세 21:33.


연대 및 지리학과 관련된 성서의 진술과 같은 세부점에 관하여, R.D.윌슨 교수는 「구약에 대한 과학적 조사」(A Scientific Investigation of the Old Testament), 213-14면에서 이렇게 기술합니다. “연대 및 지리학과 관련된 진술은 다른 어느 고대 문헌들이 알려 주는 것보다 더 정확하고 신뢰할 만하다. 전기 및 그 밖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들은 성서 이외의 문헌들이 제공하는 증거들과 놀랍게 일치한다.”

(3) 인류의 인종과 언어.

 

바이런 C.넬슨은 「그 종류대로」(After Its Kind)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흑인, 중국인, 유럽인이 아니라 바로 사람이 만들어졌다. 성서에서 아담과 하와로 알려 주는 두 인간이 창조되어, 유전과 변이에 의해 그들로부터 현재 지구상의 여러 인종이 나오게 된 것이다. 피부색이나 체격에 관계없이 모든 인종은 원래 한 종이다. 그들은 모두 같은 식으로 생각하고, 같은 식으로 느끼고, 신체 구조가 같고, 결혼으로 쉽사리 맺어지고, 같은 특성을 가진 후손을 출산할 능력이 있다. 모든 인종은 창조주의 손에 의해 온전히 만들어진 두 명의 공통 조상의 후손이다.” 이 말은 창세기 1:27, 28; 2:7, 20-23; 3:20; 사도 행전 17:26 및 로마서 5:12에 대한 증거가 됩니다.

고대의 언어들이 널리 퍼져 나가게 된 시발점에 관한 성서의 기록에 대해, 고고학자 헨리 롤린슨 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 기록을 전혀 참조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단지 여러 언어 갈래의 교차점을 찾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여전히 여러 갈래로 퍼져 나가게 된 시발점이 틀림없이 시날 평야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창 11:1-9.


(4) 실용성.

 

확실성에 관한 다른 증거들을 얻을 수 없다 하더라도, 성서의 의로운 원칙과 도덕 표준만으로도 성서가 하나님의 정신의 산물임을 식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욱이, 성서의 실용성은 일상 생활의 모든 부면에 미칩니다. 다른 어느 책도 인류를 포함한 만물의 기원에 대해 그리고 땅과 사람에 관한 창조주의 목적에 대해 이치적인 견해를 제시하지 못합니다. (창세 1장; 이사야 45:18)

 

성서는 사람이 죽는 이유와 악이 존재하는 이유를 알려 줍니다. (창세 3장; 로마 5:12; 욥 1, 2장; 출 9:16) 또한 공의의 가장 높은 표준을 알려 줍니다. (출 23:1, 2, 6, 7; 신 19:15-21) 또한 사업 거래 (레위 19:35, 36; 잠언 20:10; 22:22, 23; 마 7:12), 깨끗한 도덕적 행실 (레위 20:10-16; 갈 5:19-23; 히 13:4),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레위 19:18; 잠언 12:15; 15:1; 27:1, 2, 5, 6; 29:11; 마태 7:12; 딤전 5:1, 2), 결혼 (창 2:22-24; 마 19:4, 5, 9; 고전 7:2, 9, 10, 39), 가족 관계 및 남편, 아내, 자녀의 의무 (신 6:4-9; 잠언 13:24; 엡 5:21-33; 6:1-4; 골 3:18-21; 벧전 3:1-6), 통치자에 대한 합당한 태도 (로마 13:1-10; 디도 3:1; 딤전 전 2:1, 2; 벧전 2:13, 14), 정직한 노동 그리고 주인·종 및 고용주·고용인 관계(엡 4:28; 골 3:22-24; 4:1; 벧전 2:18-21), 올바른 교제 (잠언 1:10-16; 5:3-11; 고전 15:33; 딤후 2:22; 히 10:24, 25), 불화를 해결하는 일 (마 18:15-17; 엡 4:26) 및 우리의 일상 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다른 많은 문제들에 관한 올바른 교훈을 베풉니다.

성서는 신체 및 정신 건강에 관한 귀중한 지침도 알려 줍니다. (잠언 15:17; 17:22) 근년에, 의학 연구 결과 인체의 건강이 참으로 정신 태도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연구 결과에 의하면, 화를 잘 내는 사람은 흔히 혈압이 매우 높습니다. 일각에서는 분노가 심장 발작, 두통, 비(鼻)출혈, 현기증 또는 발성 능력 상실을 일으킨다고 보도하였습니다. 하지만 성서는 오래 전에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니라.]”—잠언 14:30; 비교 마태 5:9.


(5) 과학적 정확성.

 

성서가 과학 논문은 아니지만, 과학적 문제를 다룰 경우 정확하며, 참된 과학적 발견 및 지식과 일치함을 알 수 있습니다. 동물을 포함하는 창조의 순서(창세 1장)에 관한, 그리고 지구가 둥근 구체이며(이사야 40:22) 지구가 “공간”에 달려 있다는 성서 기록은 이러한 사실에 대한 과학적 발견보다 앞선 것입니다. (욥 26:7)

 

현대 생리학은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라는 성경 진술이 참됨을, 즉 한 종류의 육체의 세포 구조는 다른 종류의 것과 다르며 사람은 고유한 “육체”를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였습니다. (고전 15:39) 동물학 분야에서, 레위기 11:6은 토끼를 되새김질하는 동물로 분류합니다. 이 점에 대해 한 때 조소한 적이 있었지만, 과학은 이제 토끼가 음식을 되새김질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는 진술은 현대에 와서 의학의 기본 진리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레위 17:11-14) 모세의 율법은 어떤 짐승과 새와 물고기가 사람이 먹기에 “정한”지를 알려 주었으며, 위험한 식품은 제외시켰습니다. (레위 11장)

 

율법은 군대가 진을 치고 있을 때 사람의 배설물을 덮을 것을 요구하였는데, 이것은 이질이나 장티푸스와 같은 곤충 매개 질병을 막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신명 23:9-14) 오늘날에도, 일부 지역에서는 사람의 배설물 처리가 부적절하기 때문에 심각한 건강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러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위생에 관한 성서의 교훈을 따른다면 훨씬 더 건강해질 것입니다.

성서는 “위장을 위해서” 그리고 “병”을 위해서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권합니다. (딤전 5:23) 캘리포니아 대학교, 의과 대학의 의학 교수 샐버토 P. 루시아 박사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포도주는 인류 역사 전체를 통하여 계속 사용되어 온 가장 오래 된 식사용 음료이자 가장 중요한 의약품이다.”

(6) 문화와 관습.

 

A.렌들 쇼트는 「현대의 발견과 성서」(Modern Discovery and the Bible)에서 사도 행전에 관해 이렇게 기술합니다. “로마의 관습은, 안전하게 다스릴 수 있는 한, 지방 행정 제도를 존속시키는 방법으로 광대한 제국의 여러 도를 다스리는 것이었다. 그 결과 서로 다른 지역의 관헌들은 서로 다른 여러 칭호로 불리었다. 관찰력이 예리한 여행자나 기록들을 열심히 조사하는 연구생이 아니라면, 아무도 이 모든 상류층 사람들을 정확히 호칭할 수 없을 것이다. 누가가 항상 정확성에 있어서 완벽을 기하고자 애썼는가 하는 점은 그의 역사적 감각에 대한 가장 예리한 시험 방법 중 한 가지다. 몇몇 경우에는, 주화나 비문의 증거만이 누가의 기록을 확인하는 데 필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었는데, 인정받는 로마 역사가들은 그처럼 난해한 영역에 감히 뛰어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는 헤롯과 루사니아를 분봉왕이라고 부른다. 요세푸스도 그렇게 칭한다. 야고보를 칼로 살해하고 베드로를 투옥한 헤롯 아그립바는 왕으로 불린다. 요세푸스는 아그립바가 로마에서 가이우스 카이사르(칼리굴라)와 친밀해졌으며, 칼리굴라가 황제가 되었을 때 왕의 칭호를 받게 된 것을 알려 준다. 구브로(키프로스)의 행정관, 서기오 바울은 총독으로 불린다. ··· 구브로는 그 시기보다 얼마 전에 제국의 한 도가 되었으며, 지방 장관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구브로 주화가 알려주듯이, 바울 시대에는 희랍어와 라틴어로 모두, 행정관의 정확한 칭호가 총독이었다. 구브로 북쪽 해안의 솔로이에서 발견된 한 희랍어 비문에는 ‘총독 바울의 재임 기간에’라고 시대가 표시되어 있다. ···

 

데살로니가 도시의 유력자들은 아주 특이한 칭호인 폴리타르크스[도시 통치자들, 사도 17:6]로 불리었다. 그것은 고전 문학에도 알려지지 않은 칭호였다. 만일 비문에 나타난 사실이 없다면, 그 칭호는 누가가 그것을 사용한 것 외에는 우리에게 아주 생소할 것이다. ··· 아가야(아카이아)는 아구스도(아우구스투스) 치하에서는 원로원 의원이 관할한 도였는데, 디베료(티베리우스) 치하에서는 직접 황제의 관할하에 있었다. 하지만 글라우디오(클라우디우스) 치하에서는 타키투스가 알려주는 바와 같이, 원로원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므로 갈리오의 정확한 칭호[사도 18:12]는 총독이었다. ··· 마찬가지로 누가는 지리 및 여행담에서도 능숙하고 정확하다.”

바울의 편지들은 그 시대의 배경을 정확하게 반영하며, 바울이 기록된 사건들의 목격 증인이었음을 알려 줍니다. 예를 들어, 빌립보는 수비대 주둔지로서 그 시민들은 특히 그들의 로마 시민권을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바울은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훈계하였습니다. (사도 16:12, 21, 37; 빌립보 3:20)

 

에베소(에페수스)는 마술과 영매술로 유명한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악귀에게 희생되지 않도록 무장하는 방법에 관해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훈하였고, 동시에 로마 군인의 갑주를 정확하게 묘사하였습니다. (사도 19:19; 에베소 6:13-17)

 

포로들의 행렬을, 일부는 벌거벗긴 채로, 이끌고 승리의 행진을 하는 로마 정복자들의 관습이 예로 사용되었습니다. (II 고린도 2:14, 「새번역」 참조; 골로새 2:15, 「새번역」 참조) 고린도 전서 1:22에서는 유대인과 헬라(그리스)인의 상이한 관점이 지적되었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그리스도인 필자들은 모세 오경의 필자인 모세의 정확성을 반영합니다.

 

이에 관해 조지 롤린슨은 이렇게 말합니다. “민습(民習) 연구의 관점에서 볼 때, 동양의 생활 양식과 관습 일반에 관한 모세 오경의 정확성에 의문을 품을 여지는 전혀 없다.”

(7) 성서 필자들의 솔직성.

 

성서 전체에 걸쳐, 필자들의 거리낌없는 솔직함은 성서의 신빙성에 대한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예로서, 모세는 자신의 죄에 관해 그리고 자신과 형 아론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심판에 관해 솔직하게 말합니다. (민수 20:7-13; 신명 3:23-27)

 

다윗이 범한 두 번의 죄와 그의 아들 솔로몬의 배교 역시 공개적으로 폭로되어 있습니다. (삼하 11, 12, 24장; 열왕 상 11:1-13) 요나는 자신의 불순종과 그 결과에 대해 기록합니다. 모두 유대인인 히브리어 성경 필자들이 거의 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이자 그들 민족의 참된 역사로서 소중히 여기고 받아들인 바로 그 기록에서,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이유로 이스라엘 전 민족을 정죄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 필자들도 그에 못지않게 솔직하였습니다. 4복음서 필자들은 모두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부인한 사실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안디옥(안티오크) 그리스도인 회중에서 베드로가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한 신앙상의 심각한 잘못에 주의를 환기시켰습니다.

 

성서 필자들이 충실히 기록하기 위해서 아무도, 심지어 자신까지도 예외로 하지 않았음을 알게 될 때, 성서가 진리라는 확신이 강화됩니다.—마태 26:69-75; 마가 14:66-72; 누가 22:54-62; 요한 18:15-27; 갈라디아 2:11-14; 요한 17:17.


(8) 필자들의 일치 조화.

 

성서는 1600여 년에 걸쳐 약 40명의 필자에 의해 기록되었지만 아무런 부조화가 없습니다. 성서는, 없애려는 가장 맹렬한 반대와 가장 강력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부수가 널리 배포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성서가 과연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서가 참으로 “가르치는 일과, 책망하는 일과, 사물을 바로잡는 일과, 의로 징계하는 일에 유익”하다는 점을 증명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딤후 3:16.

성서의 영감성은, 여호와의 이름이 그리스도 휘하의 하나님의 왕국에 의해 거룩하게 된다는 주제를 성서가 철저히 일관성 있게 강조한다는 점에서도 나타납니다.

(9) 증인들의 충절.

 

초기 그리스도인들—그리스도인 성경 필자들과 그 밖의 그리스도인들—의 증언을 중요시할 만하다는 점에 대해 조지 롤린슨은 이렇게 말합니다.

 

“초기 개종자들은 자신의 종교 때문에 어느 때든지 죽임을 당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 그리스도교를 옹호하는 초기 작가들은 누구든지 자신이 옹호한다는 사실로 인하여 대중의 세력과 용감히 맞서야 하였고, 자신을 그리스도인과 비슷한 운명에 처하게 하였다.

 

믿음이 생사를 결정짓는 문제가 될 때, 사람들은 마음에 드는 처음의 신조를 쉽게 지지하지 못한다. 더욱이 사람들은 박해받는 종교에서 공언하는 주장을 심사 숙고한 다음 그것이 진리임을 확신하기 전에는 공개적으로 그 종파의 일원으로 자처하지 못한다.

 

초기 개종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인의 이야기가 역사적으로 정확한지를 확인하는 수단이 우리 자신들에게보다 훨씬 많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당시 증인들에게 자세히 알아보고 캐물어 보며—증인들의 여러 가지 기록들도 비교해 보며—증인들의 진술에 대해 적대자들은 어떻게 반박했는지를 알아 보며—그 시대의 이교 기록들도 참조하며—증거를 철저히 완전하게 조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 이 모든 것이 종합되어—그리고 기억할 점은 증거가 누적되어—먼 옛날 사건에 관한 것이라면 거의 수집할 수 없을 일단의 증거가 구성되어, 합리적인 의문의 여지 없이 그리스도인의 이야기가 진리임이 확증된다.

 

어느 단 한 가지 부면에도 ··· 그리스도인의 이야기에는 신화적인 특징이 없다. 그 이야기는 단 한 가지 이야기로서, 변함없이 전달되지만, 신화는 계속 변하고 여러 형태를 취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이야기는 당시의 대중 역사와 끊을 수 없이 밀접히 연관되어 있고, 그 이야기의 구석구석에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대중 역사가 나타나지만, 신화는 대중 역사를 왜곡하거나 대치한다.

 

그리스도인의 이야기는 평범한 세부점들로 가득 차 있지만, 신화는 그 점을 애써 피한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이야기에는 가장 평범하고 단순한 형태의 실용적인 교훈이 풍부히 들어 있지만, 신화는 우화식으로 가르친다. ··· 꾸밈없는 진심, 성실, 공들인 정확성, 진리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 신약 필자들의 가장 뚜렷한 특성이다. 그들은 분명히 공상이 아니라 사실을 다룬다 ··· 그들은 그 당시에 ‘매우 분명하게 믿은 것들의 확실성을 우리가 알 수 있도록’ 기술한다.”—비교 누가 1:1, 4.

성서가 다루는 한 가지 매혹적인 분야는 하나님의 예언에 관한 것입니다. 성서의 확실성은 수많은 예언의 성취로 가장 뚜렷하게 증명되어 왔습니다. 그러한 예언 성취는 모두 장래를 예언하는 면에서 여호와의 놀라운 예지력을 나타내줍니다.

 

이 예언의 말씀은 참으로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이며, 왕국 예언이 모두 하나님의 영원한 의로운 신세계에서 성취될 때까지 생존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예언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강화시키게 됩니다.  

 

3.  타교들에 대해서..

이 세상에는 여러가지 교들이 존재하는데요, 대표적으로 불교,이슬람교,화교 등.. 기타 등등의 많은 교들이 존재하고있는데요. 각자들의 사후세계 또는 사후에 어떻게되는지의 내용이 각기각각 다 다른데요.

 

기독교가 옳다면 그 사람들은 구원 받지 못하는건가요? 만약 그 교 중에서 하나가 진실이라면 지금 수만은 사람들이 믿는 이 기독교는 사이비교가 되는게 아닌가요?

 

모든 종교의 경전 중에서 성서는 기록연대, 배포언어수 및 배포부수, 내용의 실용성, 과학적 요소 등 어떤 면으로 떠져봐도 단연 탁월하다할 수 있습니다. 신이 참으로 존재한다면 자신의 책이 모든 면에서 뛰어나게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따라서 누구나 자기 신앙의 확실성에 대해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지셨던 견해는, 여러 가지 길, 여러 가지 종교가 있지만 모두 구원으로 인도한다는 현대의 관용적인 견해와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그와는 달리, 예수께서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비좁아서 그것을 찾아 내는 사람들이 적[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참그리스도인은 그 길을 발견했다고 믿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다른 종교를 찾을 것입니다.—마태 7:14.

 

그러나 성서의 참진리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외치는 것처럼 편협하지 않습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은 성서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 세기 전에 살았던, 예수를 믿지 않았던 수많은 사람(타종교인 포함)이 부활되어 돌아올 것이며 생명의 기회를 받을 것입니다.(로마 24:15)

 

 현재 살아 있는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큰 환난” 전에 진리와 의를 지지하는 입장을 취할 것이며, 그들도 구원받을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께서는 서로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정확히 보시고 자비롭게 심판하십니다. 그분은 심판하는 일을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 아니라 예수의 손에 맡기셨습니다.—마태 7:1-5; 24:21; 25:31.

 

 

4. 하나님을 뵜다고 말씀하시는 목사님 또는 사람들에 대해서.

목사님들은 하나님에게 영감을 받아 그 것을 말씀으로 전해주시잖아요?  그렇지만 그 말이 어떻게 진실이고 거짓인지 알수있으며 그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게 진실인지는 어떻게 알수가 있나요. 솔직히 이해가 되지않습니다. 그저 말빨(?)좋으신 몇몇분들께서 많은 교인들은 현혹? 하는건 아닌가라는 생각도 가끔 듭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

 

성서 요한복음에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느니라.]” 고 알려줍니다. (요한 1:18)

출애굽기 33:20을 보면 "나(여호와 하나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에 보면 여러 경우에 하나님을 보고 그분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소개합니다. 한가지 예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물질화한 천사 대변자를 두고 마치 여호와 하나님과 직접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했던 경우를 봅시다.  이 천사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원하셨던 것을 그대로 말하였으며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직접 대표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서의 기록은 “여호와께서 ···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창세 18:1.

 

하나님의 천사 대변자는 전화나 라디오가 우리의 말을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전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소식을 정확히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모세, 마노아 및 그외의 사람들이 어떻게 마치 하나님께 이야기하는 것처럼 물질화한 천사와 이야기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이 천사들을 볼 수 있었으며 천사를 통해 반영된 여호와의 영광을 볼 수 있었지만 하나님을 볼 수는 없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본 것은 천사 대표자들이었지 하나님 자신이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본 방법

 

모세는 한때 하나님을 보고 싶어하는 열망을 표현하였습니다. 출애굽기 33:18-20을 보면 이러합니다.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모세]게 보이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모세가 보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던 것은 그분의 지나가는 영광이었습니다. 출 33:21-2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내용 및 사도 요한이 말한 내용과 일치하게, 모세는 하나님의 형체 곧 물질적 형태를 전연 보지 못했습니다. 모세가 본 것은 지나가는 하나님의 임재의 잔광에 불과했습니다. 그러한 경우였는데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보호해 주셔야 했습니다. 분명히, 모세가 본 것은 하나님 자신이 아니었습니다.

 

출애굽기 33:11에서 알려 주듯이 모세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이야기했을 때, 그는 여호와와 눈에 보이는 접촉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표현은 모세가 하나님을 본 방식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과 의사 소통한 방식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한다는 것은 쌍방 대화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보지 않고도 전화로 쌍방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다른 예언자들의 경우는 흔히 환상을 통한 것이었지만, 모세가 하나님과 이야기하면서 그분에게서 교훈을 받았을 때의 의사 소통은 환상을 통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점이 민수기 12:6-8에 나타나 있는데, 그 기록은 이러합니다.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리라.]”

 

무슨 의미로 모세는 “여호와의 형상”을 보았는가?

 

모세는 자신과 아론 및 그외의 특정인들이 시내 산 위에 있을 때 “여호와의 형상”을 보았습니다. 출 24:10의 기록은 이러합니다.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그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를 보고 살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모세와 그외의 사람들은 어떻게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았습니까? 11절은 이러한 말로 그 점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참 하나님의 환상]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 이와 같이 모세와 그외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본 것은 환상을 통해서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뵜다고 말하는 목회자나 또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성서와 일치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5. 하나님은 인간을 남녀로 갈라 놓으셨는데..

저희 목사님들 곧 말씀을 전하시는분들께서 보면 전부 남자분들이신데 왜 여성들은 건사까지밖에 인정이 되지

않는거죠? 그리고 성경에서 보면 인간평등 남녀평등 이러한 말씀들이 있다고 하는데 이러한 경우는 어떻게

설명이 되는거죠? 기독교에대한 의구점이 아직도 풀리지않는 부분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문제에 관하여 몇 군데의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교회 정책’을 변경하여 여성 “교역지” 혹은 “사제” 임명을 허용하였습니다. 이러한 교회들 중에는 ‘루터’교, 감독교, 장로교 그리고 영국 국교회가 들어 있습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1977년  1월 27일 ‘바티칸’은 단지 남자들만 사제가 될 수 있다는 ‘로마 가톨릭’교의 입장을 재천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즉각적으로 진보주의적인 많은 ‘가톨릭’교인들은 여자 사제의 임명을 위해 논쟁을 계속하겠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이러한 모든 점들을 고려할 때 자연히 ‘수백년 동안 남자들만 교직자로 임명되어 왔는데 최근에 와서 왜 이러한 논쟁이 있게 되었는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주로 여성 해방 운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남녀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여자들도 꼭 같은 자격을 갖추고 있으며 “전통의 변화가 불가피하게 보인다”고 주장합니다.

 

사실상 그 논쟁에서는 “전통의 폐지” 여부가 중대한 문제로 보입니다. 그러나 첫째 관심사는 ‘하나님께서 회중을 가르칠 책임을 누구에게 주셨는가?’ 하는 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전통을 조사해 볼 것이 아니라 성서의 견해를 고려해 봅시다.

 

예수께서는 여자들을 포함하여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나 다른 사람들과는 대조적으로 그분은 여자들을 존중하셨고 기꺼이 그들에게 가르침을 베푸셨습니다. 여자들은 충성스럽게 그분을 섬겼고 부활되신 후 그분을 먼저 보았던 사람들은 여자들이었습니다.—요한 4:27; 눅 10:39; 마 27:55, 56; 28:1, 9.

 

복음서 내용을 볼 때 예수께서 여자들이 구원의 “좋은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막으신 일이 없습니다. 사실상 오순절에 모인 약 120명의 남자와 여자들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부어진 후 ‘베드로’는 ‘요엘’의 다음과 같은 예언을 인용하였습니다.

 

“내[하나님]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사도 1:14; 2:1-18; 요엘 2:28, 29) 그러므로 초기 회중에서는 남녀들이 들으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새로운 소망을 즐거움으로 알려 주었습니다.

 

반면에 희랍어 단어 ‘디아코노스’가 성서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가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때때로 그 말은 여성이나 남성에 관계없이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란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바울’이 “일군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라고 말하였을 때 그러한 의미로 사용된 것이 분명합니다. (로마 16:1; 누가 8:1-3)

 

그러나 여러 구절에서 그 낱말이 회중에서의 임명된 지위 즉 봉사의 보조자를 언급하는 데 사용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공식적인 지위에 대한 자격 중에는 “집사는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야 한다는 점도 들어 있습니다. “장로” 혹은 “감독자”로 불리우는 영적 감독권을 가진 사람들과 관련해서도 동일한 점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회중 장로는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남자’이어야 한다. (딤전 3:2-4, 8, 12) 그러므로 회중에서의 인도하는 두 가지 지위(장로와 집사)는 침례받은 남자들이 얻게 됩니다.

 

이 점에 있어서 「신약 성경」의 입장은 명백합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습니다. “여자의 [회중을]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라.]” (딤전 2:11, 12) 그러나 그는 가르칠 능력을 가진 여자들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장성된 여자들이 “젊은 여자들”에게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디도 2:3-5)

 

여자들이 회중 밖에 있는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지만 회중 내에서 인도하도록 허락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어떤 사람들의 주장처럼 “반여성주의자”였습니까?

 

그러한 주장은 성서의 기본적인 가르침인 머리 직분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다음과 같은 기록은 ‘베드로’와 다른 성서 필자들의 기록과 조화됩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전 11:3; 벧전 3:1.

 

하나님에게는 위의 머리가 없습니다. 다른 모두에게는 위의 머리가 있습니다. 물론 많은 남자들이 그들의 머리 직분을 남용해 온 것을 고려할 때 일부 여자들이 동등을 열렬히 부르짖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실상 모든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이러한 머리 직분을 마련하셨습니다. 어떻게 그러합니까?

 

여호와께서는 생활에서 가장 긴밀한 관계로서 가족 관계를 마련하셨습니다. 모두의 행복과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 안정과 연합이 필수적입니다. 분명히 어떤 성원이 인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러한 책임을 남자에게 주셨습니다. 그분은 또한 남편이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몸 같이” 하도록 즉 아내를 아끼고 존중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에베소 5:28-33.

 

그러므로 여자가 가정에서 자기 남편의 인도를 구해야 한다면 여자가 어떻게 회중에서 남자들과 여자들에게 머리 직분을 행사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장로와 “여자 장로”가 서로 결혼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여자를 교직자로 임명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수께서 단지 그 당시의 지배적인 사회 관습 때문에 열 두 사도 중에 여자 사도를 포함시키지 않았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원래 목적과 일치하게 행하신 것입니다. ‘에덴’에서 죄를 짓기 전부터 ‘아담’은 ‘하와’의 머리였습니다.—창세 2:18, 22, 24; 고전 11:7-9.

 

이제 하나님의 이러한 원칙은 어떤 사람들의 주장처럼 여성의 발전을 막아 그들을 “2급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입니까? 오늘날에는 “복종”이란 낱말을 “열등함”과 연관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서와 그리스도인 생활은 여호와의 뜻에 복종함으로써 즉 그분의 마련 가운데서 우리의 위치를 구함으로써만이 우리가 행복을 발견할 수 있음을 지적해 줍니다.

 

사도 ‘바울’이 여성 문제와 관련하여 종종 잘못 이해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떻게 여자들이 사랑과 존경을 받아야 하는가를 자세히 기술한 외에도 여러 번 그는 자매들 각자의 이름을 들어 인사하고 칭찬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로마 16:3, 4, 6, 12)  여성 “사제”의 옹호자들이 많이 인용하는 구절도 그 동일한 사도가 기록한 것입니다.

 

그 구절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라디아 3:28.

 

문맥을 살펴볼 때 이 구절이 중요한 진리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천적 반열은 남자들로 한정되어 있지 않고 여자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이 사실은 무엇보다도 여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호의적인 견해—그리스도와 ‘바울’에 의해 충실하게 반영된—를 잘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있어 교회들의 견해가 다양하지만 그리스도인 여자들은 성서의 가르침에 고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할 때 그들은 “억압”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기뻐받으실 영적 제사”를 드리는 데서 참다운 행복을 발견하게 됩니다.  더욱 중요한 것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벧전 2:5, 새번역.


 

6. 마지막으로 사후세계에 대해서 ..

불교는 죽으면 환생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리스? 책을 보면 뭐 스틱스강? 그러한데에 가서 지하세계등 얘기가

많은데.. 기독교는 천당 곧 영원한 안식처에 간다는데.. 만약 간다하면 거기엔 수십억 수천년 전에 사람들도 다 같이 있는건가요? 그리고 지금의 가족들과도 재회할수있는 건가요? 죽은사람이 말이 없다니.. 뭐 궁금해도 알 방법이 없고 성경책 이러한것에만 나와있는데.. 신뢰가 안가니..답답합니다.. 해결좀 해줍사하고  글 올려봅니다.

 

드디어 마지막 질문이네요!!!

 

성서는 사람은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개역개정판> (전 9:5) 『산 자들은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며 그들이 다시는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니라』

또한 성서에서는 “더 이상 죽음이 없”을 때를 예언하고 있습니다.(계시 21:4) 그때가 오기까지는, 죽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가능한 한 오래 살려고 애씁니다. 하지만 자신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도 궁금하게 여깁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별하는 것은 매우 슬픈 일입니다. 이런 질문이 자연스레 생길지 모릅니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된 걸까? 고통을 당하고 있을까?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까? 우리가 도와줄 수는 없을까? 다시 만나게 될 수 있을까?’

 

이 질문들에 대하여 세상 종교들은 제각기 다른 답을 제시합니다. 우리가 선하게 살면 하늘에 가지만 악하게 살면 고초의 장소에서 불에 타는 고통을 당할 것이라고 가르치는 종교도 있고, 사람이 죽으면 영의 세계로 옮겨 가서 조상들과 함께 있게 된다고 가르치는 종교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죽은 사람이 지하 세계로 가서 심판을 받은 다음 환생한다고, 즉 다른 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고 가르치는 종교도 있습니다.

 

그 모든 종교의 가르침에는 한 가지 공통적인 기본 사상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의 일부가 육체가 죽을 때 살아남는다는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의 거의 모든 종교에서는 사람이 어떤 식으로인가 보고 듣고 생각할 수 있는 상태로 영원히 산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사람의 의식은 생각과 함께 모두 뇌의 작용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 뇌는 기능이 중단됩니다. 사람의 기억력과 감각과 의식은 어떤 신비스러운 방법을 통해 독자적으로 계속 기능을 발휘하지 않습니다. 뇌를 못 쓰게 되면 그러한 기능들도 살아 있을 수 없습니다.

 

죽으면 과연 어떻게 되는가?

 

뇌를 창조하신 분인 하나님께는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가 전혀 신비에 싸인 문제가 아닙니다. 그분은 진실을 아시며, 자신의 말씀인 성서를 통해 죽은 사람의 상태에 대해 설명해 주십니다. 성서의 가르침은 명백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살아 있는 상태의 반대입니다. 죽은 사람은 보거나 듣거나 생각하지 못합니다. 우리 몸의 단 한 부분도 몸이 죽을 때 살아남지 못합니다. 우리는 불멸의 영혼이나 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솔로몬은 살아 있는 사람은 자신이 죽을 것임을 안다고 말하고 나서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한다]”고 썼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이 기본적인 진리를 더 설명하면서, 죽은 사람들은 사랑하거나 미워할 수 없으며, “[무덤]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전도 9:5, 6, 10)

 

그와 비슷하게 시편 146:4에서도 사람이 죽으면 “그 생각도 ··· 소멸되고 만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멸성으로서, 몸이 죽을 때 살아남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누리는 생명은 양초의 불꽃과 같습니다. 불꽃은 꺼지면 어디로인가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없어져 버릴 뿐입니다.

 

예수께서 죽음과 관련하여 하신 말씀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죽은 사람의 상태에 관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자신이 잘 아는 사람인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우리의 친구 나사로가 쉬고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나사로가 잠자며 쉬고 있으니까 병에서 회복될 것이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나사로는 죽었습니다”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요한 11:11-14) 여기에서 예수께서 죽음을 쉼과 잠에 비하신 것에 유의하십시오. 나사로는 하늘에 있었던 것도, 불타는 지옥에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천사들이나 조상들을 만난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다른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는 꿈도 꾸지 않고 깊은 잠을 자는 것처럼 죽음의 상태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다른 성구들 역시 죽음을 잠에 비합니다. 예를 들어, 제자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었을 때 성서는 그가 “잠들었다”고 말합니다. (사도 7:60) 그와 비슷하게 사도 바울도 자기 시대에 일부 사람들이 죽어 “잠들어 있”다고 말하였습니다.—고전 15:6.

 

사람이 죽는 것이 하나님의 원래 목적이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사람이 땅에서 영원히 살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인간 부부가 기쁨이 넘치는 낙원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에게 완전한 건강을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좋은 것만 누리기를 바라셨습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자녀가 늙고 죽는 고통을 겪기를 바라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을 사랑하셨으며 그들이 땅에서 끝없는 행복을 누리기를 바라셨습니다. 성서는 사람과 관련하여 “[여호와께서] 그들의 마음 속에 한정 없는 시간을 넣어 두”셨다고 말합니다. (전도 3:11)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으시면서 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 욕망을 넣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길도 열어 주셨습니다.

 

사람은 왜 죽는가?

 

그렇다면 사람이 죽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에 대한 답을 알려면, 땅에 한 남자와 한 여자만 살 때 있었던 일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호와 하느님은 보기에 탐스럽고 먹기에 좋은 모든 나무를 땅에서 자라게 하[셨다].” (창세 2:9)

 

그런데 한 가지 제한 규정이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만족할 만큼 먹어도 좋다. 그러나 선악에 대한 지식의 나무의 열매는 먹어서는 안 된다. 네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창세 2:16, 17)

 

이 명령은 순종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열매를 따 먹을 수 있는 다른 나무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자기들에게 완전한 생명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주신 분에게 감사를 나타낼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들이 그 명령에 순종한다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권위를 존중하고 그분의 사랑 넘치는 인도를 받고 싶어 한다는 표시가 될 것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첫 인간 부부는 여호와께 불순종하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사탄은 뱀을 통해 말하면서 하와에게 “너희는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느님이 말씀하셨다는데 그것이 정말이냐?” 하고 물었습니다. 하와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동산 나무들의 열매를 우리가 먹어도 된다. 그러나 동산 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에 관하여는, 하느님께서 ‘너희가 그것을 먹어서는 안 된다, 아니, 그것을 만져서도 안 된다. 그래야 너희가 죽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다.”—창세 3:1-3.

 

사탄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바로 그 날에 필시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필시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창세 3:4, 5)

 

사탄은 하와가 금지되어 있는 열매를 먹으면 자신에게 유익할 것이라고 믿기를 바랐습니다. 그의 말은, 하와가 옳고 그른 것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사탄은 열매를 먹으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여호와께서 거짓말을 하신 것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하와는 사탄의 말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 열매를 따 먹었습니다. 그다음에 남편에게도 그 열매를 주었고 그 역시 그것을 먹었습니다. 그들은 모르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이 하느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 바로 그 일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열매를 먹음으로 간단하고도 합리적인 명령에 고의적으로 불순종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그분의 권위를 업신여겼습니다. 사랑이 많은 창조주에 대한 그러한 불경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당신이 키워 주고 보살펴 준 아들이나 딸이 당신에 대한 존중심이나 사랑이 없음을 드러내면서 당신에게 불순종한다면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마음이 무척 아플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가 여호와를 반대하는 길을 택했을 때 그분도 무척 상심하셨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를 영원히 남겨 두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대로 죽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영들의 세계로 옮겨 간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아담에게 불순종에 대한 책임을 물으시고 나서 하신 말씀을 볼 때 그 점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 마침내 땅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것에서 네가 취하여졌기 때문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창세 3:19) 하나님은 아담을 땅의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창세 2:7) 그 이전에 아담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아담에게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아담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로 돌아갈 것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아담은 자기를 만든 재료인 흙처럼 무생명체가 될 것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오늘날까지 살아 있을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길을 택하여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었습니다. 우리가 죽는 것은 아담의 죄 있는 상태와 더불어 죽음이 그의 모든 후손에게 유전되었기 때문입니다. (로마 5:12)

 

이 죄는 아무도 피할 수 없는 끔찍한 유전병과 같습니다. 따라서 그로 인한 결과인 죽음은 재앙입니다. 죽음은 친구가 아니고 적입니다. (고린도 첫째 15:26) 여호와께서 우리를 이 무서운 적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대속물을 마련해 주신 것은 참으로 감사할 일입니다!

 

죽음에 관한 진리를 아는 것은 유익하다

 

죽은 사람의 상태에 관해 성서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위로가 됩니다. 이제까지 살펴보았듯이, 죽은 사람들은 고통이나 마음 아픈 일을 겪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들은 우리를 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며 우리를 도와줄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죽은 사람들과 이야기할 수도 없고 그들이 우리와 이야기할 수도 없습니다. 많은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죽은 사람을 도와줄 수 있다고 거짓된 주장을 하고, 그런 지도자들을 믿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돈을 바칩니다. 하지만 죽음에 관한 진리를 알면 우리는 그런 거짓말을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속지 않도록 보호를 받게 됩니다.

 

당신의 종교는 성서에서 죽은 사람들에 관해 가르치는 바와 일치하게 가르칩니까? 대부분의 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종교들의 가르침이 사탄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거짓 종교를 이용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몸이 죽은 후에도 자기들이 영들의 세계에서 계속 살 것이라고 믿게 만듭니다.

 

이것은 거짓말이며, 사탄은 이 거짓말을 다른 거짓말들과 혼합하여 사람들이 여호와 하느님으로부터 돌아서게 만들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러합니까?

 

일부 종교에서는 사람이 악하게 살면 죽은 다음에 불타는 고초의 장소에 가서 영원히 고통을 당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하느님께 불명예를 돌립니다. 여호와는 사랑의 하느님이시며 결코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고통을 당하게 하실 분이 아닙니다. (요한 첫째 4:8)

 

불순종하는 자녀를 벌주려고 자녀가 불 속에 손을 넣고 있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느낌이 들겠습니까? 그런 사람을 존경하겠습니까? 아니, 그런 사람을 알고 싶기나 하겠습니까? 전혀 그런 마음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그런 사람은 매우 잔인한 사람이라고 생각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불 속에서 영원히, 다시 말해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세월 동안 고초를 겪게 하시는 분이라고 우리가 믿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또한 사탄은 일부 종교를 이용하여, 사람은 죽은 후에 영이 되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그 영을 존경하고 공경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 가르침에 의하면, 죽은 사람의 영은 강력한 힘을 지닌 친구가 될 수도 있고 무서운 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거짓말을 믿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을 두려워하며 그들을 공경하고 숭배합니다. 그와는 달리, 성서는 죽은 사람들이 잠을 자고 있으며, 우리는 우리의 창조주이자 공급자이신 참 하느님 여호와만을 숭배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계시 4:11.

 

죽은 사람들에 관한 진리를 알게 되면 종교들이 가르치는 거짓말에 속지 않도록 보호를 받습니다. 또한 그 지식은 성서의 다른 가르침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1.     예수의 탄생의 진실에대하여...

초창기 기독교 구약만 있었음->교파간 충돌->신약만듬

->교파간 갈등(현재에도 수많은 교파간의 갈등있음)->많은곳을 수정,삭제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주교들이 "예수는 하나님이다"라는 교리를 답변확정

381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종교회의에서는"신은 성부, 성자, 성신으로 존재한다."는 교리를 답변확정

431년 에페소스에서 열린 종교회의에서는"마리아를 하나님 어머니로 숭배할 것"을 결의

--머리로 읽는 성서이야기 퍼옴--

*결국 예수는 인간인데 종교회의에서 신으로 만듬

*이스라엘이나 중동에서는 조금 아이러니 한데 여호아는 믿어도 예수는 믿지않음

 

2.    성경책에 대해서..

"아버지 와 딸을 근친 상간 " 창세기 19:31
"형수와 관계에서 시동생과의 질외사정"              창세기 38:6장
"남자 끼리 의 동성애" 창세기 16장
"여자 신체를 이용한 포르노 구절" 아가 7장
"가축.젖먹이의 아기 까지 죽이는 잔혹성              사무엘상 22:19
"박스 하나 손에 놓쳤다고 쳐 죽이는 잔혹성          역대상 13:10절
"죄인을 놔두고 엉둥한 사람을 죽이는 잔혹성        사무엘상 24장
"인신매매 가격을 정한 비윤리성 레위기 27장
"전리된 처녀는 분배를 정한  비윤리성
"대머리 라고  42명의 어린이를  죽이는 잔혹성      열왕기하 2:24
"시아버지인 유다와 며느리의 간통 창세기 38장 11절
"아브라함의 스와핑 창세기 12장
"아브라함이 여동생과 근친 결혼   
"남근을 짤라 바치는 변태적 성희롱
"입다 의 어린딸을 제물로 바치는 잔혹성              사사기 11장
"여성 간음 여부법 구별
"다윗의 유부녀 간통
"여자는 남자의 길비뼈로 만들었다는 여성 비하론
"장애인은 교회오지 말라는 장애인 모독                레위기 21장
"야위를 배신한딸의 인육을 먹게하고 친구끼리 잡아 먹겠 만든 저주  에레미아 19장 9절
"병들어 죽은 고기는 먹지말고 이 방인 에게 팔어라는 비윤리
"전투에서 패한뒤 부하에게 미루는  책힘 회피
"다윗이 부하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겁탈한뒤 솔로몬을 낳았다는 구절 묘사

---퍼온 내용임---

*도통 인간의 도덕적 기준으로는 이해할수 없는 이야기들로 구성 되여 있음

*물론 좋은 말도 간혹 있기는 함

*처음 교회 가면 이러한 것들은 숨김

 

3.  타교들에 대해서..

유일신을 믿기에 그들은 타 종교를 인정 안함

그들만의 것이 진실이라고 이야기함->대화 안됨

 

4. 하나님을 뵜다고 말씀하시는 목사님 또는 사람들에 대해서.

반복되 학습,암시,접신을 하려는 자기 의지가 결합함에 따라 느끼는 감정임(방언포함)

*현대 의학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해리성 정체감 장애 (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 "라 함

*물론 가짜로 여호아를 보았다고 거짓 증언하시는 분도 있을것이다.

 

5. 하나님은 인간을 남녀로 갈라 놓으셨는데..

성경에 보면 남여차별,장애인 차별이 잘 나와있음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 너희는 말할 권리가 없으며 오로지 복종하라. 무엇을 물을려면 너희 남편에게 묻도록 하라[고린도전 14: 34]

-아이들 중에 남자는 다 죽이고 남자와 동침하여 사내를 안 여자는 다 죽이고, 남자와 동침하지 아니하여 사내를 알지 못하는 여자들은 다 너희를 위하여 살려 둘 것이니라.[민수기 31: 17~18]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에베소서 5: 22]

-장애인,기타 병에 걸린사람은 여호아에게 가까이 할수없다[레위기 21; 16~21]

-등등

 

6. 마지막으로 사후세계에 대해서 ..

그들의 교리에 따르면 사후세계는 영원히 죽지 않기때문에 가능한 논리

*하지만 아무도 가본 사람이 없기에 증명하지 못함

*지옥에 대한 개념은 구약에는 없고 신약에 도입->그리스의 지옥개념 차용

*믿음을 강요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

 

 

대한 믿을수있을만한 진실 좀 알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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