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려놓으신 질문들을 다 읽어보기는 했지만, 인터넷상에 짧게 짧게 쓰여진 글들이라 제가 질문자님을 충분히 잘 이해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제 답변이 원하시는 것에서 너무나 많이 벗어나 았다면, 쪽지를 주시거나 다시 질문을 올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나이가 고 1이라고 하셨지요? 제가 처음 성경을 읽은 때가 고1 이었습니다. 물론 전에도 본 적이 있었지만, 주의깊게 읽은 정도는 아니었고 제 손으로 성경을 사서 본 것이 고 1때였습니다. 벌써 옛날 일이 되었지요.
제가 성경을 보게 된 이유는 신앙을 가지기 위해서는 아니었습니다. 전에 다른 질문의 답변에서 말씀드렸듯이, 저는 정말 우연한 기회에 현대어 복음서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 책이 어떤 구성이었냐면, 내용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 4개의 복음서에서 중복되는 부분을 제외하고 순서에 맞게 내용을 배치하여 예수라는 사람의 일생을 한 번 둘러볼 수 있게 해 놓은 것이었습니다. 번역은 반은 한국어로 반은 영어로 되어 있어서, 실은 영어공부를 하려고 보게 된 것이었죠.
그런데 한 번 읽기 시작하니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특별히 공부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성경만 보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얼마나 빨리 보고 싶었으면 그냥 서점으로 가서 성경을 사서 봤겠습니까?
그런데 제가 그렇게 열심히 성경을 본 것은 신앙적인 문제때문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예수라는 사람이 하는 말들이 제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라는 분이 하시는 말씀 하나 하나가 제 양심을 찔렀고, 저는 올바른 삶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처음에 신적인 존재를 향해 무엇인가를 바란다거나, 증거를 얻으려는 마음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단지 너무나도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을 찌르는 예수의 말에서 그 분의 완벽함을 깨닫게 되었고, 그 분께 더 많이 가르침을 받고 싶은 마음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았고, 예수라는 인물도 허구라면 내가 지금 얻는 교훈도 결국 허구가 아닌가?"
"나는 단군 신화는 당연히 허구로 여기면서 왜 예수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의심을 가지지 않았는가?"
예수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의문이 생기면서부터는 전처럼 성경을 읽을 수가 없었고, 그 뒤로 저의 가장 큰 관심사는 '믿음'이라는 단어였습니다.
질문자님께서는 '믿음'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정의내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자분들 중에서 많은 분들이 '믿음'을
'신을 무조건 인정하고 따르는 것'
이라고 정의하시곤 합니다. 질문자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인물들을 천천히 살펴보시면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무조건 인정하고 따라갔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누구의 예를 들면 좋을까요?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우는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볼까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어려운 명령들에 순종함으로서 믿음의 본을 보인 유태인의 조상입니다. 셈 족에서 유태인이 갈라져 나온 시작이 아브라함에서부터였지요.
아브라함이 그의 믿음을 증명한 첫 번째 사건은 자신의 고향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동을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지방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거주지를 벗어나면 생존이 불가능한 불모지가 많았고, 보통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죽을 때까지 사는 것이 일반적인 생활 방식이었기 때문에, 갑자기 다른 지방으로 이사를 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 곳이 이미 다른 민족이 터를 잡고 사는 곳이라면 그 민족과 싸워 이겨야 땅을 차지할 수 있는 상황이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미 노년기에 접어 들 나이에 그 곳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어디어디로 가라'
라는 명령도 아니라
'일단 떠나라, 그러면 그 다음에 차차로 갈 길을 알려 주겠다'
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자기의 생활 터전을 버리고 생존이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외딴 곳으로 하나님의 명령에만 의지해서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무조건' 길을 떠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길을 떠날 만한 충분한 '증거'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그 '명령' 자체가 증거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신의 명령을 직접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직접 신의 음성을 듣고 길을 떠난 것이기에 거부할 수 없는 완벽한 증거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여행을 계속하였고, 여러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깊은 신뢰가 쌓여있었기에 그는 외아들 이삭을 죽여서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에까지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성경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 한 분을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등장하는 눈먼 거지입니다.
이 소경 거지는 태어나면서부터 눈이 먼 사람이었습니다. 경제적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구걸로 생계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라는 사람이 찾아와서는 눈을 뜨게 해주겠다며 땅에 침을 뱉어서, 그것으로 진흙을 반죽해서 눈에 바른 다음 실로암이라는 연못으로 가서 씻으라는 명령을 했습니다.
질문자님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갑자기 침을 뱉어서 더러운 진흙을 반죽하더니 그걸 내 눈에다 붙였습니다. 참 엽기적인 상황이지요. 그런데 그런 모습 그대로 실로암이라는 연못까지 찾아가서 눈을 씻으라고 하였습니다. 소경에게는 그렇게 길을 찾아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경은 왜 명령에 순종하였을까요?
그에게 무슨 증거가 있어서 순종하였을까요? 그에게 증거가 있었다면 어디선가 들은 예수에 대한 소문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확실한 증거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순종하였을까요?
이유는 그 소경이 더 이상 자기 힘으로는 문제를 해결한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아주 심각한데도 말입니다.
아마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실로암이라는 연못에 가서 눈을 씻은 후 눈이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믿음의 시작은 이 증거를 얻은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태어날때부터 단 한번도 본적이 없는 세상을 예수의 명령에 따른 뒤에 보게 되었습니다. 그가 가진 증거도 너무나 확실한 것이었습니다.
'믿음'이라는 단어는 이렇게 증거를 얻은 다음에 쓸 수 있는 말입니다. 제가 이 소경 거지를 가장 훌륭한 믿음의 표본으로 삼고 존경하는 이유는 그 다음의 그의 행동에 있습니다.
그는 눈을 뜨게 된 다음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바리새인들 앞에 가게 되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가 기적을 행하고 다니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경에서 '예수가 눈을 뜨게 해 준 것이 아니다'라는 다짐을 받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계속되는 소경의 대답은 "그분이 내 눈에 진흙을 바르신 다음에, 내가 눈을 씻었더니, 이렇게 보게 되었습니다." 였습니다.
설득을 해도 듣지 않자 바리새인들은 그 소경을 출회기키겠다고 협박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라. 우리가 알기로, 그 사람은 죄인이다"
당시 종교사회였던 유태지방에서 출회라는 형벌은 지금으로치면 주민등록말소나 다름없는 형벌입니다. 사회로부터 완전히 고립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협박에 소경을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눈이 멀었다가, 지금은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출회를 당하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이미 가진 증거를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소경에 거지니 최하 빈민층이었으며 교육도 받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종교 지도자요 정치인이요 법관이었던 바리새인들 앞에서도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을 지켰고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증거'를 따라가는 것이고, '믿음이 좋다'라는 말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 양심을 저버리고 증거를 부인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저도 이와같은 증거를 많이 가지고 있지만, 이 소경과 같이 떳떳하게 믿음을 지키지는 못합니다. 언제나 제 작은 이익이나 편의가 생기면 옳은 길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다른 길을 가곤 합니다. '믿음이 부족하다'라는 말은 이럴 때에 쓰는 말이겠지요?
질문자님께서 얼마나 많은 증거를 가지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께 대한 증거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두 가지로 제시합니다.
한 가지는 자기의 끝을 살펴보는 일입니다. 끝을 살펴본다는 말은 자기의 죽을 때를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죽음이란 자기의 존재가 불확실하게 되는 시점을 말합니다. 존재의 끝을 생각해야하는 것은 그래야지만 존재의 시작 또한 생각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누구나 신의 존재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는 이유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의 현존이 아니고서는 자기가 처한 현실 세계의 시작을 설명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창조라는 말은 단지 물질의 시작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의 창조라는 개념은 '높음이나 낮음', '죽음과 삶' 현재와 미래'와 같은 추상적인 개념들 까지도 모두 포함합니다.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는 근본적인 원리를 말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지금 내 앞에 현실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 존재의 시작을 위해서 스스로 존재하는 자의 현존을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깨달음은 너무나 부족합니다. 그냥 '없을 수 없으니까 있다' 정도의 믿음일 것입니다. 존재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 존재의 성격이나 형상 등을 깊이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음으로 성경이 제시하는 방법은 신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순종은 위의 소경 거지와 같이 '자포자기'상태일 때에 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12사도중 으뜸인 베드로 사도의 예를 들겠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원래 갈리리 호수에서 어업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어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밤 새도록 새벽까지 열심히 낚시질을 했는데 물고기를 한 마리도 건지지 못했습니다. 아마 베드로 사도의 마음에는 깊은 실망과 슬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집에 돌아가려고 배를 해안가에 대고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사람이 오더니 자기 배에 올라 서서 해안가에 모인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아마 그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너무 힘들고 지쳐 있었을 테니까요.
그런데 예수라는 그 사람이 갑자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 보십시오"
갈릴지 호숫가에서는 주로 밤과 새벽에 앝은 물가에서 고기를 잡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시간은 늦었고, 깊은 데로 가 봤자 고기는 있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베드로 자신은 어부였고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고 말하는 예수는 고기잡는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려보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만, 선생님게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한번 그물을 내려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그렇게 그물을 내리게 된 이유는 '밤새도록 애를 썼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기 때문', 상황이 너무나 어려워서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마저 들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그 명령에 순종한 뒤 한 그물로 배 두척이 가라앉을 정도로 고기를 많이 잡는 증거를 얻었고 그 증거를 평생 붙잡고 살아 지금까지도 제 1사도로 불리고 있습니다.
증거는 순종한 사람의 소유물입니다.
저도 증거를 얻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처음 성경을 본 게 고등학교 1학년 때였는데, 하나님이 계시고 내 기도를 듣고 계시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을 게 대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저는 성경을 보고 그 내용이 늘 가슴에 남아있어서인지 믿음은 가지 않았지만, 그냥 너무나 어렵고 힘들 때마다 기도를 드리곤 하였습니다. 기도의 내용은 거의 이런 식이었습니다.
"나는 당신이 존재하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알 수만 있다면 당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확인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렇게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서야 당신께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얼마나 힘들면 존재한다고 생각되지도 않는 존재에게 도움을 구하겠습니까? 그러니 존재하신다면 내가 좀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6년간의 시간이 흘러 대학교 3학년이 된 어느 날, 문득 제가 드린 기도들을 하나하나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깨닫게 된 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제가 가진 증거들이 무었이었을까요?
고등학교 시절에는 소소한 기도들이 많았습니다. 대학 입시나 친구문제, 가정불화 등등이 있었습니다. 대학교 시절에는 집안 사정이 많이 좋지 않아 어려움이 많았는데 도저히 해결될 것 같지가 않아 괴로운 나머지 기도를 드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문제들은 다 해결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믿음의 시작이었습니다.
물론 너무나 막연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기도를 들으셨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아니라면 아닌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대학교 3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가게 되었습니다. 남들 다 가니까 그냥 나도 따라 간 군대였는데 생각보다 만만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어렵고 힘들게 군생활을 하던 어느 날 몸이 약간 안좋아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다지 큰 병은 아니었고, 저와 같은 병명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거의 3주 정도 있다가 부대로 돌아가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병원에 와 보니 집에 가는 사람들이 계속 눈에 보였습니다. 참 마음이 약해지더군요. 이렇게 마음이 약해지니 또 제 기도를 들으셨던, 혹은 들으셨던 것 같았던 분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이런 기도마저 드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제 병은 절대로 집으로 돌아갈 병이 아닙니다. 그런데 집에 가고 싶으니 어쩌겠습니까? 저는 당신께 도움을 구하고 싶은데 계시는지도 안계시는지도 확신할 수 없으니 도움을 구하기도 힘이 듭니다. 만약에 존재하신다면 저를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정말로 불가능한 상황이니, 들어주신다면, 이번엔 우연이 아니겠지요?"
그 기도를 드린 뒤 몇일 후 내시경 검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아파서 받은 게 아니라 그냥 입원 환자들에게 하는 형식적인 조치였습니다.
그런데 검사가 끝난 나음 날 아침 회진시간에 담당 군의관이 오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몸이 좀 아프네? 여기서 치료할 병은 아니고 집에 가서 치료 잘 받아라."
이것이 제가 가진 증거 중에 가장 큰 것이라면 가장 큰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 밖에도 많은 증거들이 있었습니다. 작은 것들은 수도 없이 많고, 다른 큰 것이라면 얼마 전 아버지께서 교통사고를 당하신 후 심근경색으로 중환자실에 계신 적이 있었는데, 의사는 돌아가실 수도 있으니 준비를 하라고 하였습니다.
심근경색은 응급실이나 중환자실에서도 1순위인 질병입니다. 백과사전에는 이렇게 나와 있더군요.
"첫번 발작 중에 사망하는 경우는 20% 이상이고, 수년 이상 생존하는 일은 드물다. "
아버지는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뭐라고 기도를 했겠습니까? 제 상황에서는 그렇게 기도가 잘 안되었었는데 아버지께서 아프시니 태도가 전과는 다를 수 밖에 없더군요.
그냥 무조건 살려달라고 엉엉 울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 후 몇일 뒤 아버지는 상태가 좋아지셔서 일반 병실로 옮기셨고 수술을 해야 한다기에 조금 더 좋은 병원에서 하려고 연세대학병원으로 옮겨서 담당교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보호자로 같이 따라갔었는데 몇가지 검사를 거친 후 만난 그 유명하다는 교수님의 첫 마디가 이것이었습니다.
"왜 오셨어요? 교통사고 환자가? 심근경색이라 손상이 좀 있긴 있네"
분명히 몇일 전까지는 응급수술이 필요하다고 해서 병원 이동 중에 응급차까지 부르려고 했던 상황이었는데, 지금까지 약만 드시고 잘 살고 계십니다.
이렇게 제가 가진 증거들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것, 더 쉽게는 내 기도를 듣고 있는 그 누군가가 현존한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이라는 것은 그렇게 증거를 가지게 되는 그 순간부터가 시작인 것 같습니다. 단지 시작했을 뿐입니다.
사람은 신이라는 존재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고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잘 깨닫기가 힘듭니다. 너무나 멀고 높은 곳에 계시는 분이시니까요.
그런데 성경은 사람이 신을 조금 더 명확하게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을 이렇게 제시합니다.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 안에 계신 외아들로서 하나님과 똑같으신 그분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 요한복음 1장 18절"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을 가리켜 '인자'라는 말을 자주 쓰셨습니다. 인자는 '人子' 쉽게 말해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Son of Man '이라고 번역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의 몸을 가진 존재로 성경에서 몸이라는 것은 존재의 방식을 말합니다.
전에 너무나 높고 멀리만 계셔서 알기가 너무나 어려웠던 그 분을 그 분의 외아들께서 사람의 몸으로, 사람들 곁에 다가와 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먹고 마시는 가운데 하나님을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제가 예수라는 존재를 통해 깨달은 사실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사람들끼리 서로 사랑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깨달은 하나님에 대한 전부입니다.
전에 제가 군대에 있을 때에 들은 이야기를 하나 해 드리겠습니다.
한 군종 목사님이 계셨는데, 처음 군대에 들어와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보통 군종 병과의 장교들은 개신교와 천주교 불교가 같이 훈련을 받게 되는데 그 날은 한여름이었고 산악행군 날이었습니다. 30kg짜리 완전군장을 메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산의 7부 능선 쯤 가장 가파른 곳을 올라가다가 몇 분간 쉬게 되었습니다. 그 때가 가장 힘든 때지요. 그런데 그 시점에 훈련소 성당에서 신부님이 지원해 주신 위문품이 훈련병들에게 도착했습니다. 훈련병들은 '뭘까? 뭘까?'하며 많은 호기심을 가지고 상자가 열리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나온 것은 바로 '텔레토비 쮸쮸바'였습니다.
마침 덥고 힘든 참이었는데 훈련병들은 그 쮸쮸바를 정말 열심히 빨아 먹었습니다. 다들 목사에 신부에 스님(?)이 되실 거룩하신 분들이었는데 그 순간만은 모든 것을 잊고 열심히 쪽쪽 빠셨습니다. 나중에는 텔레토비 다리가 갈라져 있어서 그 사이에 쮸쮸바가 안 들어간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시간이 얼마 흘러 다시 그 코스로 훈련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다른 훈련이긴 했지만 그 코스 그대로 군장을 메고 올라가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날씨는 여전히 더웠고 이번에는 밥을 먹고 나서 정상 부근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에 훈련소 교회 목사님께서 보내신 위문품이 도착했습니다.
훈련병들은 정말로 기대를 많이 했습니다. "뭘까? 뭘까? 이번에는 텔레토비 말고 공룡처럼 큰 것으로!"
그런데 이번에는 더 비싸고 구하기 힘든 음식이 나왔습니다. 바로 양념통닭이었습니다.
군대를 안가시니 잘 모르시겠지만, 아무리 군대라도 한여름에 모래바람부는 산 정상에서 밥 먹은 뒤에 먹는 뜨거운 통닭은 별로 환영받지 못합니다. 목도 마르고 밥은 먹어서 배는 부르고, 끈적끈적한 양념에 모래는 자꾸 묻고... 결국 상당량의 통닭이 그대로 버려지는 군대에서는 참 있기 힘든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려주신 군종 목사님께서 훈련소를 마칠 무렵에 알게 되셨답니다. 성당 신부님은 자기들과 같은 훈련소 출신이었고, 목사님은 다른 훈련소 출신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아마 훈련소 성당 신부닝은 어느 시점에 어떤 것이 가장 필요한지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자기도 같은 훈련서에서 같은 훈련을 겪으면서 같은 어려움을 체험했기 때문이겠지요.
누군가 자기가 큰 여려움이나 고통에 처해있다고 생각될 때에 그 고통을 가장 잘 이해하고 동정하는 존재는 다름아닌 '예수'라는 분입니다.
그 이유는 그 분이 세상에 있을 때에 나와 같은 몸을 가지고 나와 같은 고통을 겪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제가 무엇인가 어려움을 호소할 때에 그것을 신적인 권위로 억누르거나 어려운 말씀을 하시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단지 "나도 그때에 너처럼 힘들었단다."라고 말씀하시며 저를 진심으로 동정해 주시는 분이었습니다.
질문자님께서도 이 분을 만나실 수 있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 분은 자기를 찾고자 하는 사람을 절대로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현대어성경을 구하실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정도 영어가 되신다면 NIV 성경도 좋습니다. 천천히 읽으시다 보면, 그리도 어려울 때마다 도움을 구하시다 보면, 어느샌가 질문자님의 마음 안에도 예수라는 분이 들어와 살고 계실 겁니다.
그리고 그 분의 명령에 순종해 보는 것도 좋겠지요. 그 분의 명령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 그것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의 몇구절을 적어 드리겠습니다. 사도 요한께서 증언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들에게 주는 나의 계명입니다 - 요한복음 15장 17절"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킵니다. 그렇게 하면 내 아버지께서도 그 사람을 사랑하실 것이고, 내 아버지와 나는 그 사람에게로 가서, 그 사람과 함께 살 것입니다. - 요한복음 14장 23절"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징벌과 관련이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자매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계명을 주님에게서 받았습니다. - 요한1서 4장 18~21절"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읽어보시는 것도 도움이 되실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에 내 안에 계시고,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해 줄 때에 그 사람 안에 계시고,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에 우리들 안에 계시는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