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대외적 대내적 동향을 좀 알고 싶어요.

북한의 대외적 대내적 동향을 좀 알고 싶어요.

작성일 2013.11.21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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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북한과 남한의 통일은 아직 시기상조다.' 라는것을 주제로 소논문을 쓰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소논문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단계에서 최근 북한의 동향을 제시하면서 시작할려고 해요

 

예를들면.

 

최근 5년간 북한과 남한의 관계는 상당히 불안한 위치에 있다. 2011년 연평도포격사건, 천안함 침몰사건등이

있었다. ... 따라서 우리는 지금 시점에서 통일에 대해 한번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런 방식으로 쓰려고 하는데 ... 에 들어갈 것이 꼭 현실적으로 일어난 남북 마찰이 아니라 북한이 외교관계에서

한국이나 미국,중국,일본등에 어떻게 하고 있고 이런것을 좀 알고 싶습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어떤 폭정도 영원히 못 가" …

 몽골 대통령 평양서 언급

 
[중앙일보]
 
 
입력 2013.11.16 00:53
수정 2013.11.16 08:58

 

지난달 방북 때 김일성대 특강

사형 폐지 등 거침없는 발언

 
“어떤 폭정(tyranny)도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지난달 31일 평양시내 동북쪽 금성거리에 위치한 김일성종합대학 한 강의실.
300여 명의 교수·학생에게 특강을 하던 차히아긴
엘베그도르지 몽골 대통령이 ‘폭정’이란 단어를 꺼냈다.
그러고는 “
인민은 자유로운 삶을 열망하며 이는 영원한 힘”이라고 말했다.
그는 “
사람들은 스스로에게서 해결책을 찾지만 자유가 없는 사람들은
외부로부터 자신들이 겪는 고통의 근원을 찾는다”고 강조했다.

엘베그도르지 대통령은 이어 핵 문제도 주제에 올렸다.
그는 “
21년 전 몽골은 비핵지대임을 공언했고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은 서면으로 몽골의 비핵국 지위를 인정했다”고 말했다.
또 “
몽골은 정치·외교적 그리고 경제적인 방법으로 국가의 안보를 확보하는 길을 택했다”고 설명했다.
엘베그도르지 대통령은 “
2009년 몽골이 사형제를 폐지했다”며 “
우리는 사형제의 완전한 폐지를 지지한다”고 덧붙였다.

주체사상형 양성을 목표로 하는 김일성대학에서 ‘
폭정’이나 ‘
인민 자유’ 같은 표현이 담긴 강연이 이뤄진 건 매우 이례적이다.
핵 문제나 사형제 같은 사안도 북한으로서는 껄끄러운 이슈다.
하지만 엘베그도르지 대통령은 거침없었다.
북한과 몽골이 과거 사회주의 우방국이었고,
몽골·북 경제관계가 김정은의 경제대국 건설 목표와 일치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교수·학생들에게 민감한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북한은 엘베그도르지 대통령의 김일성대 방문 사실만 공개했지 강의 내용 등 구체적 보도는 없었다.
그러나 몽골 대통령실이 홈페이지에 강의 동영상과 영문본 전문을 올리면서
보름이 지나 이런 사실이 알려지게 됐다.
대통령실은 외국 국가원수가 김일성대에서 강연한 건 처음이라고 밝혔다.
또 “
질문은 없었다”며 “
대통령이 떠날 때 교수·학생들이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고 소개했다.

엘베그도르지 대통령의 연설은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으로도 간주될 수 있는 대목이 적지 않다.
교수·학생이 상당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란 진단이다.
김일성대 서울동문회장인 김광진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위원은 “
놀라운 언급 내용이며 학생들은 그 속뜻을 간파했을 것”이라며 “
북한 당국이 수습 차원에서
해당 교수·학생들에게 외부에 발설하지 말라는 함구령을 내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엘베그도르지 대통령은 이번 방북 때
명목상 2인자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만났지만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하지 않았다.

이영종 기자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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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 소굴?
캄보디아 북한 식당은 지금...
 
북한 식당에서 경험하는 냉전 시대 아픈 현실
 
13.10.19 12:12l최종 업데이트 13.10.19 13:10l
 
 
 
북한 당국이 해외에서 운영하는 60곳의 음식점이 스파이 활동의 아지트이자,
외화를 획득하는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고 미국의 보수 성향 온라인 매체인
<워싱턴 프리 비컨>(WFB)이 15일(현지 시간) 보도했다.

이 매체는 미국 정부와 정보 당국은 북한이 네팔에서 캄보디아,
중국에 이르기까지 60개의 국영 레스토랑을 운영 중이라면서,
대부분 중국에 있는 이 국제 식당 네트워크가 북한 스파이의 소굴인 동시에
북한 정권에 매년 1억 달러 이상의
경화를 보내는 본거지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을 파악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또한 북한 식당은 중국에만 44개가 있으며 캄보디아 및 베트남에 각각 5곳,
그리고
방글라데시,
미얀마,
네팔,
인도네시아,
라오스에 한 곳씩 있으며,
이들 레스토랑은 연간 최대 180만 달러를 북한에 송금하고 있다고 이 매체는 주장했다.

이들 레스토랑 네트워크는 정찰 총국,
구체적으로는 북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경화 수집과
해외 스파이 활동을 총괄하는 정보 파트인 39국에 의해 관리되고 있고,
북한 해외 식당이 돈 세탁 등의 불법 활동에도 연관돼 있으며,
북한 정보 관리나 요원들의 회의 장소로도 활용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식당을 자주 이용하는 한국 여행객들을 염탐하는 것도 식당의 임무 중 하나로,
식당 여종업원 등은 여행객으로부터 기업 비밀 캐기에 중점을 둔 정보 수집 활동 훈련을 받고 있다는 게
탈북자들의 증언이라고 이 매체는 덧붙였다.

여느 식당과 다른 북한 식당 분위기

▲ 프놈펜 시내에 위치한 북한 식당의 전경 수도 프놈펜에 2곳,

   그리고 앙코르와트로 유명한 관광도시 씨엠립에 3곳 등

    캄보디아에는 5개의 북한 식당이 운영되고 있다.

ⓒ 박정연

 


필자가 사는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에도 북한 식당이 3군데 있다.
TV에서만 보던 북한 사람들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점과
평양랭면 같은 북한 음식을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 교민들도 종종 찾는다.
솔직히 미국발 기사 내용처럼
식당 여종업원들이 여행객들로부터 정보를 얼마나 캐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 진위 여부를 떠나
북한 식당의 분위기가 여느 개인이 운영하는 일반 식당들과 사뭇 다른 것은 분명하다.
손님들이 들어올 때 마다 종업원끼리 서로 눈으로 수신호를 보내는 일도 자주 목격했다.
그래서 늘 뭔가 숨기거나 감시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이는 어쩌면 몇 년 전 사건의 '트라우마(?)'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천안함 피격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이 연거푸 발생했던 지난 2010년 당시,
현지 한인회가 주축이 되어 북한 식당 출입 금지 캠페인을 벌이고 규탄 성명서를 발표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신원을 알 수 없는
북한 사람들이 교민 식당과 업소를 무단 침입해 성명서와 포스터 등을 제거하고
남한 교민들을 협박한 일이 있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북한 식당 남자 종업원들이었다.
이런 사건이 대외적으로는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남북 관계가 냉온탕을 오갈 때마다 캄보디아에 사는
우리 교민들은 북한 식당을 사이에 두고 냉전 시대의 아픈 현실을 몸소 체험했다.

현재 앙코르와트로 유명한 관광 도시 씨엠립에도 2곳의 북한 식당이 더 있다.
운영 주체는 조금씩 다르지만 냉면을 비롯한 비슷한 메뉴의 북한 음식들을 팔고,
식사 후에는 북한 여성들의 춤과 노래 공연이
고정 레퍼토리로 30분 가량 하루 2~3번 정도 펼쳐진다는 점은 똑같다.

▲ 프놈펜 시내 북한 식당 여성들의 공연모습 연중 휴일 없이 매일 저녁마다 식사가 끝날 무렵,

    한복을 입은 북한 여성들의 공연이 30~40분가량 펼쳐진다.

    이들 여성들은 3년간 현지 북한 식당에서 일한 후 북한으로 복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박정연

 


▲ 프놈펜 시내 북한 식당 여성의 춤추는 모습 

    미모와 예능을 겸비한 평양 출신 젊은 여성들이 춤을 추고 있다.

ⓒ 박정연

 


▲ 전자 기타를 치고 있는 북한 여성 노래와 전통 무용 외에도 가야금과 전기 기타, 바이올린까지도 능수능란하게 연주를 한다.
ⓒ 박정연

 


북한 식당 여종업원과 교민들 사이의 불문율
이곳에 일하는 여성 대부분은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들이다.
거의 대부분 평양 출신이며,
소위 출신 성분이 좋다는 집안의 자제들이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예고나 2년제 예술전문대학을 갓 졸업한 그야말로 재능과 미모를 겸비한 여성들이다.
간드러지는 가창력에 화려한 율동, 피아노와 가야금,
바이올린 연주 솜씨까지 다재다능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처음 북한 식당이 생기던 당시만 해도 서비스는 고사하고,
남한 손님들을 경계하며 심지어는 쌀쌀맞게 대하던 그녀들이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자본주의의 속성을 이해한 듯 식탁을 오가며
한 병에 50 달러가 넘는 비싼 들쭉술과 산삼주를 권하기도 하고,
단골손님들에게는 스스럼없는 농담을 던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이 손님 테이블에 앉는 경우는 없다.
늘 서서 응대한다.
간혹 오가는 대화 속에서도 그저 "
그립다"는 말 외에 고향에 관해서는 더 이상 말이 없다.

북한 식당 여종업원들과 우리 교민들 사이에는 일종의 불문율이 있다.
그녀들이 그리도 위대하다는 조국의 현실에 대해선 일체 함구하는 것이다.
적어도 남북과 관련된 정치 얘기는 꺼내지 않는다.
대신 그녀들이 먼저 꺼내는 단어들은 따로 있다.
'우리 민족끼리'라는 단어라든지,
'조국 통일' 같은 표현들이다. 

그러나 늘 대화의 끝은 왠지 허무한 느낌이 든다.
아마 그녀들도 마찬가지로 공허한 느낌이 들 것이다.
'민족 통일'이라는 대전제에 대해서는 서로 같은 꿈을 꾸지만,
서로가 생각하는 통일의 방식은 너무나 다르다는 사실을 서로가 느낌으로 잘 알고 때문일 것이다.

작년에는 그 북한 식당 여종업원들 중 한 명이 남한으로 탈출했다는 소식이 교민 사회에 삽시간에 퍼졌다.
필자를 충격에 빠뜨린 건 자유를 찾아 떠난 그녀가 평소 북한 체제의 우월함에 대해 긍지를 갖고,
당돌하리 만큼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종업원으로 기억되기에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일이 뜬 소문이 아닌 사실임을 입증이라도 하듯,
탈북을 도왔던 북한 출신 한국 국적자가 프놈펜 경찰에 잡혀
인신매매범으로 몰려 곤욕을 치르다 풀려 났다는 소식이 교민사회를 넘어
 한국의 중앙 일간지와 KBS방송에서도 앞다퉈 보도한 적이 있다.

  

▲ 프놈펜 시내에 위치한 북한 대사관 전경 

    과거 노로돔 시하누크 전 국왕의 개인 사저를 개조하여   대사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김일성 주석과 친분이 매우 두터웠던 시하누크 국왕은

    북한측에 이 건물을 40년간 무상으로 임대해주었다.

ⓒ 박정연

 


▲ 프놈펜 메콩 강변에 나란히 펄럭이고 있는 태극기와 인공기 유유히 인도차이나 반도를 감싸 흐르는 메콩 강변에 펄럭이는

태극기와 인공기의 모습은 만감이 교차하게 만든다.

ⓒ 박정연

 


프놈펜 왕궁 앞 강변, 나란히 걸린 태극기와 만국기
오늘도 프놈펜 왕궁 앞 강변에는 100여개가 넘는 만국기들이 시원한 메콩강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우리나라 태극기가 북한 인공기와 함께 사이좋게 나란히 바람에 날리고 있다.
국제사회에선 둘 다 'KOREA'라는 영문 명칭을 쓰지만,
공식 국가명칭의 공식영문 약자로 우리는 R.O.K 북한은 D.P.R.K을 쓴다.

이런 알파벳 순서로 만국기를 게양하는 국제 관례를 따른다면
태국기와 인공기가 함께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좀체 힘들다.
어쩌면 여기에는 '
킬링필드'라는 오랜 내전을 겪으며,
민족상잔의 아픔을 너무나도 잘 아는
이 나라 국민들의 한반도 평화를 바라는 진실된 마음이 담겨 있는지도 모르겠다.

최근 개성 공단 조업 재개와 더불어,
4년 만에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지는가 싶더니,
지난 달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는 인터넷 기사를 접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이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북한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남북 통일은 참으로 요원하다고들 말한다.
최근 이산가족 상봉이 무산되는 바람에 다시 남북간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북한 식당을 찾는 교민들도 많이 줄어든 편이다.

하지만 그들도 언젠가는 함께 가야할 우리 핏줄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오직 정략적인 목적으로 남북 관계를 교묘히 이용하려 드는
김정은과 북한 당국의 태도가 그저 한심스럽고 안타까울 뿐이다.

4000여km 인도차이나 반도를 감싸고 유유히 흐르는
메콩강변에 펄럭이는
저 태국기와
인공기처럼,
우리 민족이 보다 진실된 대화와 타협의 자세로 서로의 마음을 보듬고,
이제라도 통일을 향한 진지한 발걸음을 한 걸음씩이라도 떼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재외동포신문에도 게재될 예정입니다.


 
 

그렇줄 알았어요

북한은 원래 그래요

완전한 사기극이예요

진정성이  안보여요  

뉴스

"평양 간다"니까, 북한 여인이 내 손을 덥석...

[재미동포 아줌마 또 북한에 가다①]

 
수양딸·조카 만나러 평양 가는 길
 
13.09.25 13:48l최종 업데이트 13.09.25 14:43l
 
 

지난 세 차례 북한 여행을 다녀온 뒤 내게는 북한에 두고 온 수양딸과 수양조카가 생겼다.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정을 나눈 그들이 다시 보고 싶어서,
더 많은 북한 동포들과 소통하고 싶어서 올해도 다시 북한에 다녀왔다.
지난 8월 15일부터 8월 26일까지 한 차례
그리고 9월 4일부터 13일까지 또 한 차례 북한을 여행했다.
새 연재 '재미동포 아줌마 또 북한에 가다'를 통해
북한 동포들의 지금과 북한의 여러 명소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 기자말

2011년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에 이끌려 내 삶 속에서 전혀 일어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던 북한 여행을 하게 됐다. 
북한 여행 이전에 나는 북한이라는 나라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내 종교적 신념을 다해 노력해봐도 결코 사랑할 수 없는 그런 나라였다.

그런 내가 2012년 5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40일 동안 북한을 여행했다. 
정말 아름다운 여행이었다. 
북한 여행을 통해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민족의 비극적 운명을 체험하고 민족애를 느꼈다.
그리고 통일을 염원하게 됐다.
세상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여행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동시에 조국이 분단돼 있다는 현실에 가슴 아파해야 했던 '
내 생에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여행'이었다.

남편의 제의로 떠난 첫 여행.
솔직히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북한으로 출발하기 전에 '
북한사람들은 과연 우리와 얼마나 다를까' 
'그 이질감의 골은 얼마나 깊을까' 등의 호기심만 있었다.
그러나 첫 여행을 통해 이질감은커녕 '
그들은 우리와 어쩌면 이렇게 똑같을까'라는 동질감만 느끼고 돌아왔다. 
동질감을 느끼면서도 조국이 분단돼 있다는 생각에 고통은 배가됐다.

북한 여행 중 내 관심은 '
북한이 얼마나 못 사느냐'가 아니라 '
이들이 우리와 함께 한 공동체를 이루고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민족적 정서를 공유하고 있을까'에 쏠려 있었다.
우리가 지난 시절 경험해서 잘 알고 있듯이,
잘 살고 못 사는 것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그러나 남북한 동포들이 이질감 때문에 함께할 수 없다면 통일은 한낱 꿈에 불과할 것이다.

나는 북한에서 '
우리는 오랜 역사와 문화를 통해 이뤄진, 
변하려야 변할 수 없는 민족적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발견했다. 
어려서 받은 반공 교육 때문에 북한 사람들에게 선입견을 갖고 있던 나는
그런 사실을 깨닫고 한동안 당황하기까지 했다.

평양에 두고 온 수양딸 그리고 수양조카

▲  평양에 두고 온 나의 수양딸 김설경
ⓒ 신은미

 


▲  평양에 두고 온 난의 수양조카 방현수
ⓒ 신은미

 


지난 세 차례 여행 동안 우리 부부에게 수양딸(김설경)과 수양조카(방현수)가 생겼다.
이제 나 자신이 이산가족이 돼 이곳 미국에서 그들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러던 중 수양딸 설경이가 지난해 10월에 결혼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설경이는 회사의 회식 때 처음 남편을 만났는데 첫눈에 반했다고 했다.
결혼하면 집에서 살림만 하고 싶다며 빨리 아기를 갖고 싶다고 했으니
아마도 지금쯤 임신 중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남편은 설경이에게 "
쿠쿠 밥솥을 들고 결혼식에 가겠다"고 말했지만
우리 부부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대신 아쉬운 마음을 담아 곧 태어날 아기에게 필요한 물건들과
설경이의 가족들에게 전할 선물을 준비해 평양가는 길에 올랐다.
설경이의 신혼집에도 들르고,
조카 현수네 집에도 들러 그간 누리지 못한 가족의 정을 듬뿍 나누려 한다.

지난 여행 중 나를 "
오마니"라고 부르며 친딸같이 나를 챙겨주던 설경이. 
그리고 "
이모,
이모,
통일이 되면 내가 개 한 마리 목에 터억 걸치고 이모 찾아
서울로 갈게"라고 하던 현수를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지며 그리움에 목이 메어왔다.

사라져 가는 이산가족

▲  평양의 설경이와 현수에게 전달할 선물이 방안에 널려있다.
ⓒ 신은미

 


수양딸·
수양조카를 둔 나도 이럴진대 친형제·친부모와 헤어져 수십 년을 살아온
남북의 이산가족들의 마음은 어떨지….
가족이 헤어져 서로의 생사도 모른 채 산다는 것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피붙이도 만날 수 없다니,
이보다도 더 잔인한 인권 말살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안될 일이다.

2012년 4월 평양의 해방산호텔에서 목격했던 재미동포들의 이산가족 상봉 장면이 떠오른다.
헤어졌던 가족이 두 손을 꼭 잡은 채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막아보려 고개를 젖혔지만,
마르지 않는 눈물은 주름살 가득한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제 남과 북의 이산가족들이 한 분 한 분 세상을 떠나고 있다. 
그런데 고작 100명씩 만나는 이벤트성 만남으로 그 많은 이산가족들이 언제 다 재회할 수 있단 말인가.
해외동포 이산가족들은 누구나 원하면 언제든지 북한에 가 헤어진 가족을 만날 수 있는데
왜 남과 북의 이산가족에게는 그게 허용되지 않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통일의 날이 진정한 광복의 날"
평양으로 향하고 있는
오늘은 2013년 8월 14일. 
한국시각으로는 8월 15일 광복절날이다.
비행기 안에서 "
통일의 날이 참다운 광복의 날"이라고 말씀하시던 재미동포 의학자 오인동 박사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일본제국주의의 만행에 희생된 조선이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지금까지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현실이 오늘따라 더 가슴을 깊게 후벼판다.
이런 날에 평양에 두고 온 수양딸과 수양조카를 만나러 간다.
우울함과 기쁨이 교차한다.

생각해 보니 내가 북한에 갈 때마다 남북관계·북미관계는 최악이었다.
2011년 10월 첫 여행 때는 천안함·연평도 사건 후유증으로,
2012년 두 차례의 여행 때는 김정일 위원장의 서거에 이은 로켓 발사로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인공위성 발사와 3차 핵실험·한미합동 군사훈련과 개성공단 문제 등으로
남북관계·북미관계가 위태위태한 상황이다.

이런 정황 속에서 또다시 북한에 간다고 하니 주위에서는 난리도 아니었다. 
"이제는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구나!"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친지분들을 뒤로한 채 우리 부부는 북한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내 핸드백 안에는 비행기 안에서 다시 읽으려고 넣어둔 북한 방문기가 들어 있다.
아쿠다가와상 수상자며 우리에게 <풀하우스> <온에어> 등으로 잘 알려진
재일동포 작가 유미리의 <평양의 여름 휴가 : 내가 본 북조선>
한국어판이었다. 
스스로를 '
뿌리없는 풀'이라 불렀던 유미리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마음이 조국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유미리는 북한에 가기 전 열 차례 정도 조부모의 고향인 한국에 다녀갔다고 한다.
그런 그녀가 왜 한국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북한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써내려간 걸까.

로스앤젤레스를 떠난 우리는 베이징으로 가는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인천공항에 내렸다.
이곳에서부터 평양까지는 비행기로 불과 몇십 분밖에 걸리지 않는데,
우리는 지금 그곳을 가기 위해 중국에 가야만 한다.
남한에서 평양에 가는 길은 베이징을 통한 길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북한에 갈 때마다 들른 인천공항에서 안타까움과 슬픈 감정을 삼켜야만 했다.

인천.
한국전쟁 때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상륙작전을 했다고 학교에서 배운 곳이다. 
공항이 있는 곳마저 현대사의 비극이 서려 있는 역사의 현장이라니.
수양딸과 수양조카를 만날 수 있다는 흥분은 이내 사라지고 마음속에는 우울함만이 가득하다.

베이징의 북한 레스토랑 '천지'

▲  베이징의 북한 레스토랑 '천지'
ⓒ 신은미

 


침울함과 함께 도착한 베이징.
거리는 차와 매연으로 숨쉬기조차 불편하다.
시장경제에 익숙해진 중국인들은 바쁘게 그리고 빠르게 움직인다. 
남을 배려하지 않는 무질서와 다툼이 보인다.
솔직히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북한도 경제가 발달하면 이렇게 변해갈까. 
아니면 아름답기 위해서는 가난해야만 하는걸까.
언젠가 북한도 분명 경제가 발달할 것이다.
매번 북한에 갈 때마다 경제가 나아지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동포들의 생활이 조금씩 향상되는 것을 볼 수 있어 흐뭇했다. 
그러나 사람만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의 그 순수함을 그대로 간직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베이징의 한 호텔에 여장을 풀어놓은 우리는 저녁식사를 위해,
떠나기 전에 미리 알아 둔 북한식당 '천지'를 찾았다. 
최근에 생겼다는 고급 레스토랑인데 내부는 조선식과 중국식을 혼합해 놓은 듯하다. 
손님 대부분은 중국인들이다.

▲  공연중인 북한 레스토랑 '천지'의 여직원들
ⓒ 신은미

 


이곳에서 여러 가지 북한 요리를 주문하니
여느 북한식당들과 마찬가지로 예술단이 나와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며,
춤을 선사한다.
내 전공이 음악인지라 나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공연을 관심 있게 지켜봤다. 
실력이 보통이 아니다.
저런 솜씨는 적어도 대학에서 전공하지 않으면 갖출 수 없는 실력이라고 느꼈다.

외국 노래들도 많이 불러 깜짝 놀랐다.
그룹 아바(Abba)의 <댄싱 퀸>(Dancing Queen)을 원곡보다 더 아름답게 불러
나도 모르게 공연자들과 어울려 춤을 추기까지 했다.
평양 모란봉 악단을 떠올리며 변화하는 북한의 모습을 그려보기도 했다.

공연자들은 연주가 끝나고 얼른 옷을 갈아입은 뒤 웨이트리스 일까지 겸하는데,
외국어 실력이 상당하다.
각자가 맡은 외국어가 있는지 영어·중국어·일어로 유창하게 손님을 접대한다. 
이들의 재능이 아깝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연주를 마친 한 공연자가 우리 일행에 다가오더니 내게 말을 걸었다.

"저,
혹시 작년에 재미동포 예술단으로 평양에 오시지 않았습네까?"
"네,
그랬어요."
"맞았네요.
공연 장면을 록화 중계로 보았습네다.
해외동포가 우리 노래를 부르니 얼마나 가슴이 뭉클했는지 모릅네다."
"참, 잘도 기억하시네요.
북경엔 언제 오셨어요?"
"한 6개월 됐으니 2년 반 정도 있으면 조국으로 돌아갑니다.
저,
녀사님,
언제 또 만나게 될지 모르니 우리 노래 한 곡 불러 주십시요."

나를 알아보는 북한 사람이 있다니!
나는 이미 통일 조국에서 살고 있는 느낌이다.
지난해 4월,
재미예술단 자격으로 평양에 가 공연했을 당시 서양의 노래를 부르지 않고
북한 노래를 부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북한 노래,
그야말로 나 자신의 생애를 뒤돌아보게 한 노래 <생이란 무엇인가>를 불렀다.

설경이와 현수를 찾아 평양으로
베이징의 한 호텔에서 하루를 보낸 우리는 평양행 비행기에 오르기 위해 북한 고려항공 카운터로 간다. 
'고려항공'이라는 글자 아래 주욱 늘어선 줄에 달라붙어 차례를 기다린다.
수양딸과 수양조카를 만날 수 있다는 흥분이 다시 고개를 든다.
어제의 우울함이 한 순간에 사라진다.

체크인을 마치고 탑승구에 다다르자 귀국하는 북한 사람들과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벌써 도착해 탑승을 기다리고 있었다.
첫 북한 여행 때가 생각났다.
막상 김일성 주석의 배지를 달고 있는 사람들을 처음 보고 얼마나 놀라고 긴장했었는지….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그들과 함께 어울려 앉아 있으며 느끼는 감정이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다.
탑승을 기다리는 동안 옆자리에 앉아 있는 한 북한인 부부에게 말을 걸었다.

▲  해외근무를 마치고 귀국하는 한 북한동포 부부와 베이징 공항에서.
ⓒ 신은미

 


"평양에 가시나요?"
"네."
"저희도 평양에 가는 길이에요."
"아,
그렇습네까?
무슨 일로…?"
"관광 가는 중이에요.
그런데 사실은 평양에 수양딸과 수양조카가 살고 있어요.
그래서 그들도 만날 겸 가는 거예요."
"지금 오데 살고 있습네까?"
"미국이요."
"아,
재미동포시군요.
그런데 오떻게 해서 평양에 양딸과 양조카가 있습네까?"
"저희는 이미 평양에 세 차례나 관광을 다녀왔는데
그 사이 저희를 안내했던 사람들과 친척 관계를 맺었어요."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부인이 내 손을 덜컥 잡는다.
부인은 눈시울을 적시며 말을 이어간다.

"그랬군요.
우리 어서 통일을 해 오손도손 함께 살아야 합네다.
이렇게 만나면 다 한 식구가 되는데…."

▲  통일 이야기가 나오자 눈시울을 적시며 내 손을 잡으려는 북한동포
ⓒ 신은미

 


이 부인 역시 여느 북한동포들과 마찬가지로 통일 이야기를 꺼낸다. 
그런데 왜 북한동포들은 만나는 사람마다 통일 이야기를 할까. 
이들이 말하는 통일이 우리가 반공 교육을 통해 배웠던 '
적화 통일'을 의미할까.
그렇지 않음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런데 남한은 어떤가.
남한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통일에 대해 별 관심조차 없는 듯하고,
통일을 이야기하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기까지 한다.

어찌 됐든 참 해괴한 일이다. 
진보는 이념에 따라 움직이고 민족 문제는 보수가 챙기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남한의 경우에는 그 반대인 듯하다. 
소위 보수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은 민족 문제에 관심이 없는 듯하고,
진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민족 문제를 이슈로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김일성 주석 배지를 단 사람들을 보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주고받다니….
내게 이념적 변화가 생기기라도 한 걸까. 
내가 내 자신을 '보수적인 아줌마'라고 불렀던 것은 내가 이념적으로 보수라서가 아니라,
기독교(장로교) 가정에서 태어나 신앙 생활을 한답시고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어려서 받은 반공 교육에 따라 '
묻지마 반공'을 하는 것을 보며 주위 사람들이
나를 '꼴통 보수'라고 불러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방면에 무지해 이념이 파고들 자리가 존재하지 않는 내게
이념적 변화가 생겼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단지 내가 변한 것이 있다면
북한 동포들을 바라보는 마음의 눈이 달라졌다는 사실뿐이다.

▲  평양행 고려항공 탑승구의 전광판
ⓒ 신은미

 


이것저것 생각하니 머리가 복잡해지고 골치만 아프다. 
때로는 '생각하는 소크라테스'보다
'배부른 돼지'가 되는 게 속 편하고 좋다. 
평양에 살고 있는 수양딸 설경이와 수양조카 현수를 만날 생각만 한다. 기분이 좋아진다.

나 같은 보통 사람에게 민족이나 통일이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다.
그저 가고 싶을 때 가고,
보고 싶은 사람을 언제든지 가서 만날 수 있는 것.
이런 평범한 일인 것이다.

드디어 탑승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귀국하는 그 북한 부부와 함께
우리는 그리던 수양딸과 수양조카를 만나러 가기 위해 고려항공 비행기로 향했다.
태그:북한, 통일, 이산가족태그입력

 

 

 

 
 

조선로동당이 날 보잔다,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또 가다④] 북한의 농촌 그리고 장수산

 
 
13.10.16 16:12l최종 업데이트 13.10.16 17:45l
 
 
지난 세 차례 북한 여행을 다녀온 뒤 내게는 북한에 두고 온 수양딸과 수양조카가 생겼다.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정을 나눈 그들이 다시 보고 싶어서,
더 많은 북한 동포들과 소통하고 싶어서 올해도 다시 북한에 다녀왔다.
지난 8월 15일부터 8월 26일까지 한 차례
그리고 9월 4일부터 13일까지 또 한 차례 북한을 여행했다.
새 연재 '재미동포 아줌마 또 북한에 가다'를 통해
북한 동포들의 지금과 북한의 여러 명소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 기자말

▲  정방산 입구 개울에서 도시락을 먹으며... 설향이가 환한 미소를 짓는다.
ⓒ 신은미

 


성불사에서 내려와 보니 개울에서 밥을 짓던 아이들은 벌써 점심을 다 끝내고
개울물에 설거지를 하고 있다. 
우리 '벤또'를 그들의 식사와 바꿔 먹으려 했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아,
무척 아쉽다. 
아이들과 어울려 냄비를 둘러싸고 앉아 찌개를 한 숟갈 떠먹고 싶었는데….

개울가를 조금 지나치니 시멘트로 만든 테이블들이 마련돼 있다. 
우리는 그곳에 자리 잡고 호텔서 가져온 도시락을 펼쳤다.
무장아찌·
생선튀김·
닭날개조림·
장조림·
가자미식해·
삶은 달걀까지 진수성찬 도시락이다.
설향이도 즐거운지 삶은 달걀을 테이블 위에 '톡톡' 치며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미소를 짓는다.
어릴 적 소풍갈 때면 빠지지 않고 늘 엄마가 싸주시던 삶은 달걀!
그 시절이 떠올라 나 또한 입가에 미소를 머금는다.

▲  정방산 입구 개울에서 매미를 갖고 노는 아이들
ⓒ 신은미

 


저만치에서 어린 여자 아이들이 테이블에 뭔가를 올려놓고 노는 모습이 보인다.
어서 떠나자는 영길 동생의 재촉을 물리치고 아이들에게로 다가갔다.

가서 아이들을 보니 잡은 매미를 가지고 놀고 있다.
아이들이 수줍음을 많이 타서 그런지 말을 하지 않는다. 
몇 번이고 이름을 물어보니 겨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오늘은 여기서 이 아이들과 함께 동심으로 돌아가 매미나 잡으면서 놀다가 그냥 평양으로 돌아가고 싶다.

북한의 농촌에 원두막이 생긴 이유

▲  북한 농촌의 모습. 가정에 있는 '텃밭'의 모습이 보인다.
ⓒ 신은미

 


우리 일행을 태운 차는 장수산을 향해 논밭을 따라 쉼없이 달리고 있다.
빈 땅이 하나도 없다.
도로변에도 콩이나 참깨같은 작물들이 울타리를 이루고 있다.
사람의 발길이 닿는 곳이라면 가파른 산비탈까지 빽빽히 뭔가를 잔뜩 심어놨다. 
키가 큰 것이 옥수수같아 보인다.
북한의 식량 문제에 관심이 많은 남편이 영길 동생에게 물었다.

"올해 농사는 어떤가?"
"올해는 잘 됐습니다.
큰 물피해도 없고….
그동안 시험적으로 해오던 분조제를 올해 처음 전국적으로 실시했습니다."

영길 동생이 분조제에 대해 열심히 설명한다.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협동농장을 작은 단위로 나눠 한두 가족에게 경작하게 한 뒤,
수확물의 30%를 국가에 내고 나머지는 농민이 가진다는 이야기다. 
한마디로 수확물의 개인 소유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  논밭 위에 있는 원두막. 개인 소유가 인정되면서 늘어난 듯하다.
ⓒ 신은미

 


자동차가 시골 동네로 접어든다. 
온갖 작물들이 자라고 있다. 
울타리에는 호박 넝쿨·수세미 넝쿨이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고, 
앞마당에는 푸성귀들이 먹음직스럽게 터를 잡고 있다.
자기 집 마당의 경작지를 텃밭이라고 부른다는데 30평까지 가능하단다. 
텃밭 경작만 잘해도 1년 부식 거리는 해결될 것만 같다.
하여튼,
올해 북한의 농업생산량은 틀림없이 늘어날 것이라는 생각이다.
'소유' 만큼 더 큰 인센티브는 없다.

농업 생산량이 늘어나면 탈북자들도 줄어들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 1월 남한 입국 탈북자가 절반으로 줄었다는 뉴스를 들은 적이 있다. 
언론들은 그 이유로 '국경 경비 강화'를 꼽았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지난해 5월 연길에서 나진-선봉으로 들어가며 봤던 개천 같은
두만강은 아무리 경비를 강화해도 마음만 먹으면 쉽게 넘어갈 수 있어 보였다.
나는 남한 입국 탈북자 감소 현상을 북한의 식량사정 개선 그리고 생활수준의 향상과 연결해서 생각해본다.

북한 쌀의 60%, 이곳에서 나온다

▲  농촌에서 볼 수 있었던 각종 구호들
ⓒ 신은미

 


어쨌든 이곳 사람들의 표현을 빌려 얘기하자면,
북한은 제일 먼저 식량 증산에 '혁명적 사활'을 걸어야 한다.
그리고 주민들의 생활수준 향상을 위해 경공업 발전에 모든 힘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강성대국'이란 헛구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요즈음 상품의 다양화와 품질 향상으로 인해
북한산 제품들이 중국산 제품들을 조금씩 대신해 나간다"는
설향이의 말을 들어보면, 당연히 북한 정부도 이를 잘 알고 있으며 그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것 같다.
설향이가 나즈막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이야기한다.

"우리는 이제 군사강국을 이루어 어느 누구도 우리를 침략할 수 없을 겁니다.
남녘의 대통령께서 '머리 위에 핵을 이고 살 수는 없다'고 했다는데,
우리는 발밑에 미군의 핵을 깔고 수십 년을 살아 왔습니다.
올 봄에도 미국이 핵폭격기니 핵잠수함이니 이런 무시무시한 무기들을 동원해서
침략전쟁 연습을 해댔는데, 
우리 인민들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중국이나 러시아와 함께 외국 군대가 없는
남조선을 향해 허구한 날 핵전쟁 연습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남조선 동포들이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인민들 고생 많았습니다.
지금부터는 '
경제발전에 박차를 가해 인민들이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원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이곳에는 내가 본 북한의 어느 지역보다 논이 많다.
영길 동생의 이야기에 따르면 북한에서 생산되는 쌀의 60%가 이 지역에서 나온다고 한다.
갈라지는 길가에 '재령'이라고 쓰여진 교통표지판이 보인다.
아,
이곳이 바로 중학교때 지리 시간에 배운 북한의 곡창지대라는 재령평야였구나.

시골길을 따라 보이는 이곳 농촌의 모습은 내가 어려서 본 남한의 농촌 모습과 너무나도 흡사하다.
단지,
그 시절 남한 농촌의 가옥은 초가집이었는데 이곳의 가옥은 기와집이다.
그런데 일부 가옥들이 너무 오래되고 낡아 보인다.
그동안 힘든 경제로 인해 보수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인 것 같다.
그렇지만 이러한 기와집들이 농촌에 처음 지어졌을 당시의 북한은 매우 풍요로웠을 것이라 짐작된다.

▲  얼음과자를 파는 시골 아주머니.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 신은미

 


▲  북한의 '모범농장'
ⓒ 신은미

 


시골길 골목, 
오밀조밀한 노점상들이 보인다.
여름철이라 그런지 동네 아이들이 냉차·얼음과자통 주위를 맴돌고 있다.
할머니와 아주머니들은 커다란 양푼에 뭔가를 담아들고 나와 벌려놓은 채 담소를 나누는 데 여념이 없다.

팔러나온 닭과 새끼 돼지를 나무에 매어놓고 누워 있는 한 할아버지의 모습도 눈에 들어온다.
여자들 틈이라 낯설은지 멀지감치 떨어진 곳에서 편한 자세로 누워 계신다.
강 기슭과 개울가를 보니 아이들이 지칠 줄 모르고 물장구치며 놀고 있다.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긴다.

여기저기 깨끗한 기와집들로 이뤄진 마을도 인상 깊다. 
설향이의 설명에 따르면 그곳은 모범농장이라고 한단다. 
앞으로 북한의 모든 농촌마을이 이런 모범농장들처럼 변한다면,
북한의 농촌은 조선의 고유한 특색이 잘 나타나는 아름다운 모습을 갖게 될 것이 분명하다.

설향이 아버지와 밤낚시를 할 수 있다면...
논이 많아 그런지 대형 저수지가 두 개나 보인다.
동녕저수지와 은파저수지. 
특히 은파저수지의 규모는 엄청나다. 
한쪽에서는 낚시를 하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남자가 미역을 감고 있다.

벌거벗고 멱을 감는 남자를 본 영길 동생이 그냥 못본 척 지나갈 리 없다.
이내 짓궂은 농담으로 순진한 설향이의 얼굴을 붉혔다.
남편이 영길 동생에게 "
주책 좀 그만 부리라"라고 한 마디 내던지더니 화제를 돌려 설향이에게 말을 건다.

"설향아,
여기 앉아서 밤낚시 하면 붕어 엄청 잡겠다."
"오마,
낚시 좋아하세요?
우리 아버지도 낚시를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어떤 날은 밤을 새고 들어오십니다.
고기는 잡아서 다 이웃들에게 갖다주시면서 말입니다."
"설향이 아버님이 낚시를 좋아하시는구나.
함께 낚시를 할 수 있다면 아마 최고의 여행이 될 텐데 말이야."
"관광 일정에 함경도 마전해수욕장이 들어있는데, 거기 가서 해보십시오."
"아니,
그게 아니고, 설향이 네 아빠와 함께 하고 싶다는 말이야.
갈라진 조국에서 그동안 떨어져 산 우리들의 이야기 등 밤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말이야. 
아마 그럴 수만 있다면 나에게는 최고의 관광이 될 것 같아. 
성불사 같은 곳 백 군데를 다니는 것보다 더…."

이를 듣고 있던 영길 동생이 끼어든다.

"형님, 참 이상하디요.
형님도 똑같은 말씀하시네요.
일전에 호텔에서 유럽 관광객과 얘기를 나누다가 그 사람한테 '
이번 여행 중 어디가 제일 좋았냐'고 물었더니 평양지하철이라는 기야요.
기래 제가,
'당신네 나라에는 지하철이 없냐'고 물으니까 하는 말이,
지하철을 타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만원 지하철에서 평양 사람들과 부딪혀 가며 
서로 쳐다보면서 웃었던 그 경험이 이번 여행에서 최고로 좋았다는 겁니다.
아니 기게 뭐가 좋다고, 참…. 
리해가 안됩니다."
"영길이,
바로 그거야.
여행을 가서 그 나라의 명승지를 보는 것도 즐겁지만, 
그보다 더 흥분되고 의미있는 일은 그 나라 사람과 앉아 세상 사는 일 등을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내는 거야. 
우리야 한민족이고 말도 통하니 가는 동안 차 안에서 이렇게 이야기도 하고 
또 차에서 내리면 주민들과 소통하며 지내지만,
외국인들은 어떻겠어?
인민대학습당 구경시키고 김일성광장에 풀어놓고,
주체사상탑에 올려보내고,
호텔로 다시 데려오고….
얼마나 답답하고 지루하겠어. 
생각을 해봐."
"아,
그러니까 '대민접촉', 이 말씀이디요?"
"대민접촉?
그래 그래,
대민접촉. 바로 그거야."
"가서 토의해 보갔습니다."

북한 주민들의 유머, 좀 짓궂구나
우리가 탄 차는 탐스럽게 익어가는 논밭을 지나간다.
설향이와 내가 차를 세우고 조금 쉬었다가 가자고 운전사 철남 동생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 생리 현상이 극에 달했다. 
설향이와 숨바꼭질하듯 일을 치르고 돌아오니 짓궂은 영길 동생이 한마디 한다.

"녀성들이 일보러 갈때 보면 거리만 봐도 나이를 알 수 있단 말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별 볼일 없는 늙은이들은 대충 가까이서 일을 치르는데
시집 안 간 처녀들은 꽤나 멀리가서 일을 보니까 말입니다.
해외동포도 별반 다르디 않구만요."
"그래,
나 별 볼일 없는 늙은이야!
영길 아우 한 번 당해 봐, 단단히 벼르고 있을 거야!"

북한에 오기 전, 
내가 생각했던 북한 사람들은 농담도 전혀 안 통하는,
매우 경직된 사람들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북한에 와서 사람들을 대해 보니 오히려 정반대였다. 
이들의 농담과,
이곳 사람들이 말하는 '
육담'(음담패설)은 대단했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짓궂게 말하는 영길 동생의 '
육담'은 미혼인 설향이를 무척이나 괴롭게 한다.

▲  장수산 절벽 위에 있는 절. 사진 가운데 절이 보인다.
ⓒ 신은미

 


어느덧 장수산에 도착했다.
입구부터 심상치 않다.
가파른 절벽에 조선 시대때 세워졌다는 절이 하나 '매달려' 있는데,
어떻게 저기에다 절을 지었을까 신기하다.
대체 사람들은 저런 곳에 어떻게 올라가 공사를 했는지…. 
콩알만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마치 절과 함께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만 같다. 
망원렌즈로 당겨보니 꽤 많은 사람들이 올라가 있다.
북한영화 <홍길동> 촬영을 이곳 장수산에서 했다는데,
저 절벽 위 절에서 많은 장면을 찍었단다.

▲  장수산 거북바위. 마치 거북이가 절벽 틈에 끼어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 신은미

 

 
설향이가 매표소에 가더니 해설원을 동반하고 돌아왔다.
장수산은 12구비로 이뤄져 있으며,
우리는 지금부터 걸어서 그 12구비를 감상할 것이란다.
남편이 "
자동차를 타고 차가 갈 수 있는데까지만 돌아보면 안될까요?"라고 간청해봤지만, 
해설원은 "
각기 다르게 펼쳐지는 풍경과 령험한 산의 기운을 직접 걸어가며 느껴봐야 한다"며
우리 부부의 팔을 끌어안고 장수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큰소리로 장수산에 얽힌 전설과 사연을 거침없이 쏟아내기 시작한다.

이 해설원 또한 '육담'에 능하다. 
12구비에 얽힌 사연 모두 '육담'이다.
설향이가 불평하듯 말한다.

"KITC(조선국제려행사)에다 장수산을 관광코스에 넣지 말라고 해야겠습니다.
외국손님들을 모시는데 이 해설을 부끄러워 어떻게 통역하라는 말입니까."

장수산은 굽이쳐 올라가는 계곡을 따라 여러 형상 뽐내는 기암절벽을 감상하다가
찬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시 한 수 읊으면 딱 좋은 산이다.
정이 많아 아쉬워 하는 해설원과 어렵게 작별을 하고 
우리는 평양으로 돌아가기 위해 차에 올랐다.

▲  벌써 조금씩 누렇게 익어가는 벼(사진 촬영은 지난 8월 말)
ⓒ 신은미

 


바짓자락을 둘둘 말아올린 채 곡괭이를 어깨에 멘 농부가 집으로 향하고 있다.
매년 봄·가을이 오면 농촌으로 '
로력동원'을 간다는 수양딸 설경이의 말이 생각난다
(관련기사 : 비통한 판문점... 느닷없이 북한 군인이 달려왔다).

"꾸부리고 모를 심다 허리를 펴면 땀이 주르르 흐르는데 심어논 모를 바라보면 정말 보람이 있습니다.
그러다 홍수라도 나서 다 자란 벼가 쓸려나가기라도 하면 그 쓰라린 가슴은 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헤르만 헤세였나. 
포도가 무르익어 향긋한 포도주를 담그게 햋볕을 쬐어달라고 신에게 기원했던
독일계 스위스 시인의 말을 빌려 나도 간절히 기도한다.

"신이여!
벼가 무르익어 황금 벌판이 출렁이도록 따스한 햇볕을 한 번만 더 내리 쬐어 주소서."

다시는 북한동포들에게 악몽과도 같았을 '
고난의 행군'이 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슴에 품으면서,
푸른 북녘의 들판을 바라보며 평양으로 가고 있다.

'조선로동당'에서 나를 보자고?

▲  "당(조선로동당)에서 누나를 보자고 하는구만요"라는 영길 동생의 말에 우리는 흠칫 놀랐다

      (2011년 10월 북한 여행 당시 평양 조선로동당 기념탑 앞에서 찍은 사진).

ⓒ 신은미

 


차안에서 남편이 "영길이,
우리 평양에 도착하면 '가스맥주집'에 가서 한잔하자"고 제안한다.

"어젯밤에도 가셨는데 또 가시렵니까?
아니,
평양의 맥주를 형님이 다 드시면 우리 인민들은 뭘 마시란 말입니까?"
"아,
이 사람이…. 
맥주 한잔 마시고 가자는데 허풍에다 생색은…."
"어제 갔던 데로 가시렵니까,
아니면 새로운 데로 가시겠습니까?"
"이왕이면 새로운 곳으로 가지."

어디로 갈까 설향이와 이야기를 주고받던 영길 동생이 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받고
심각한 모양새로 통화를 한다. 영길
동생이 전화를 끊더니 입을 연다.

"형님,
일단 호텔로 돌아가야겠는데요."
"무슨 일인데?"
"당에서 누나를 보자고 하는구만요."

나는 깜짝 놀라 영길에게 물었다.

"당이라니?"
"당 말입니다.
조선로동당."
"거기서 왜 나를…?"
"아니,
왜 놀라십니까?
당은 어머니의 품과 같은 곳이야요.
긴데 정말 이상하네.
왜 누나를 보자 기럴까."

무슨 일일까?
혹시 내가 지난 번에 쓴 북한 기행문이 잘못이라도 된 것일까?
궁금해 하는 우리를 태운 차는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평양시내로 진입하고 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안녕하세요. 국민과 함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열어가는 통일부에서 답변드립니다.

 

통일부에서는 홈페이지를 통해 주간단위로 북한의 대내외적 동향을 분석하여 제공하고 있습니다.

다음의 링크를 클릭하시면 북한동향이 올라오는 페이지로 연결됩니다.

http://unikorea.go.kr/CmsWeb/viewPage.req?idx=PG0000000352

 

또한 해당 게시판을 통해 일단위로 북한 방송동향을 분석하여 올리고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중요성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

외식산업창업의 중요성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 중요성에... 대내적으로는 주택가격 급등, 가계부채 증가 등 2001년... 있고, 대외적으로는 미국 경제의 더블딥(재침체)의 가능성...

북한의 사회 , 교육의 신문기사좀...

... 군사국가화 추구의 목적은 대내적으로 정권안정을 위한... 것이며 대외적으로 일반자원의 고갈 속에서 유일한... 최근 북한의 동향에서 읽을 수 있다. 한편 군사국가의...

북한의 현실은????

... 평양시가 깨끗해졌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것은 이러한 움직임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북한의 의도는 평양시 현대화를 통해 대내적으로 체제결속을 다지고 대외적으로...

북한에대하여..

안냥하세요 제가 나라에대하여 관심이 마나요..ㅎㅎ... 북한대내적으로 사회주의의 완전승리를... 수행하는 대외적 기능으로, 이상의 정권기관의 권리행사는 모두 법적...

북한 숙제 도와줘요

북한의 인구는 얼마나 되나요. 그리고 북한주민은 어떻게 살아가요? 북한 병력은 얼마나 되고 무기는 오래뇐 총인가요? 그냥 올리겠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 문화재

사회 문화재를 알고 싶어요. 뭐 예를 들자면 개경에는 무슨... 즉 대내적으로는 나말려초의 격심한 사회혼란을 겪고 있었고, 대외적으로는 당송교체기 중국사회의 변화와 발해...

고구려에 대해서 ㅠ_ㅜ★★부탁

고구려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 자세하게 알려주시면... 각 부(部)는 대내적인 자치권은 인정되었으나, 대외적인... 부내의 동향까지 왕실에서 통제하는 단계로 나아갔다....

신라 삼국통일의 외세 의존적 측면좀...

... 북한학계가 역사해석에서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기본논리의 하나는 대내적인 계급 관계이며, 다른 하나는 대외적... 견해로써 북한학 계의 동향을 서술하였고 그에 대한...

★100★신라의 삼국통일의 부정적...

... 북한학계가 역사해석에서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기본논리의 하나는 대내적인 계급 관계이며, 다른 하나는 대외적... 견해로써 북한학계의 동향을 서술하였고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