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문화재

사회 문화재

작성일 2007.09.17댓글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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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문화재를 알고 싶어요. 뭐 예를 들자면 개경에는 무슨 문화재가 있었고 라든지 말이에요 시간은 많아요.


#책읽는 사회 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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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유래

고려는 918년 왕건에 의해 건국되었다. 개성을 도읍지로 정하고 만월대는 궁궐이였다.

고려의 멸망은 선죽교의 유래와 함께 전달 할 수 있다.

 

고려의 문화재

개경 유적 유물

만월대 : 개성시 송악산(松嶽山) 남쪽 기슭에 있는 고려의 왕궁지(王宮址)

만월대

 

선죽교

고려 태조가 919년 송도(松都:개성시)의 시가지를 정비할 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선죽교는 1392년(태조 1) 정몽주(鄭夢周)가 이방원(李芳遠 : 조선 태종)에 의해 피살된 장소로 유명하다

 

 

고려의 인물

왕건

강감찬

정몽주

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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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은 태조 2년(919)에 고려왕조의 수도로 자리잡은 이후 江都 30여 년을 제외한 500년 가까이 국가 운영의 중심지인 동시에 생활공간이었다. 따라서 개경은 모든 고려사 연구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얼마 전에 치러진 성대한 '서울 정도 600주년 기념 행사'나, '1000년의 역사를 지닌 경주'에 대한 관심도와 비교해 보면, 개경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단편적이거나 기초적인 연구수준에 머물러 있는 실정이다. 이것은 개경이 조선 건국으로 몰락의 길을 겪었기 때문이며, 특히 한국전쟁 이후 북한 지역에 속하게 된 데에서도 연유할 것이다.
개경은 자연환경적으로 풍수지리설을 이용하여 건설되었고, 궁궐·태묘·사직 제도 등은 중국 도성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조선의 한양 건설에 영향을 미치고 있어 그 역사적 의의가 주목된다. 따라서 이에 대한 연구는 중세 도시사적 관점에서 우리 나라 중세사회를 이해하는 데 많은 단서를 제공할 수 있다.
개경에 대한 연구는 시기적으로 약 500년을 다루며, 정치·사회·경제·문화 등 다양한 방면을 종합적으로 연구해야 하는 만큼 광범위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대한 사료로서 현존하는 것이 적고 현지 답사도 행할 수 없는 실정이며, 기존 연구 성과도 매우 부족하다.
개경에 대한 직접적인 연구로는 이병도·고유섭·박용운·전룡철과 일본의 일부 학자 등의 연구 성과가 있다. 이 중에서 이병도·고유섭의 연구는 해방 이전 실제 답사와 고증을 통한 연구로 매우 중요하지만,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연구 성과로 보기는 어렵다. 전룡철의 연구는 해방 이후 북한에서 실제적인 지표 조사를 통한 것인 만큼 구체성을 띠고 있지만, 그 연구 분야가 한정되어 있다. 최근 박용운이 지금까지의 연구를 종합하는 연구성과를 내놓아 많은 참고가 된고 있다.
이외에도 개경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언급한 연구성과가 있지만, 대개는 개별적이고 분산적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개경에 대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연구가 필요하며, 특히 도시의 기능적인 면에서 개경이 다른 시기의 수도와 비교하여 어떤 다른 특성이 있는지를 검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개경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기초자료의 정리 및 효율적인 이용, 이를 통한 개경의 각종 시설물의 위치 비정과 복원작업이 필요하다. 이를 위하여 {고려사} {고려사절요} {고려도경}을 비롯한 각종 문집, 후대의 각종 자료를 수집 정리하여 자료집을 발간하고, 이를 이용하여 개경의 시설과 영역에 대한 복원지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 개경의 지명·구역·시설·영역·풍속 자료를 바탕으로 행정체계·경제(수취)구조·도시구조와 시설·문화 등을 조망하여 역사 도시로서의 구조와 기능을 종합적으로 규명하는 것은 앞으로의 과제가 될 것이다. 이것들은 중세도시 개경의 위상을 살펴볼 수 있는 내용들이다.
우리 '개경사연구반'은 위와 같은 과제를 안고 지난 3여 년동안 개경과 관련된 자료들을 정리하는데 노력해 왔다. 그 결과 개경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은 연구사를 이미 정리하였다(1999 [고려시기 개경사 연구동향] {역사와 현실} 34). 그런 가운데 개경 연구에 대한 접근 방법을 새롭게 강구하게 되었고, 우선적으로 다음과 같은 연구과제를 세우게 되었다.
첫째, 경기제도 안에서의 개경의 위상과 그 행정 체계이다. 이는 고려 시대 경기제의 성립 과정과 역사적 의의를 조명하는 것으로 개경의 역사적 위상을 살펴보는 것이다. 또한 개경 내부의 도시 구획은 어떻게 되었는지를 검토하는 것인데, 이는 개경의 오부방리제의 구획과 변화과정을 체계적으로 검토하고자 하는 것이다. 둘째, 개경의 내부 구조와 시설이다. 그 대상으로는 성곽·궁궐·사찰 등을 들 수 있다. 개경의 건설 과정을 성곽을 중심으로 살펴봄으로서 개경의 범주와 규모를 이해하고, 궁궐과 관아 등을 통해서는 고려의 국가적 위상 내지는 지향성을 알아보게 될 것이다. 사찰에 대해서는 종교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그 위치의 비정과 정치·사회·경제 등 그 기능적인 면에서의 의미를 종합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셋째, 상업 도시로서 개경의 면모를 주목하고자 한다. 개경의 시장 구조와 상업의 존재 형태, 그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 거주지를 살펴보는 것은 생활 공간으로서의 개경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제 그 동안의 연구결과를 [고려시대 개경의 구조와 기능]이라는 공동주제로 발표회를 갖게 되었다. 한 번의 공동 연구로 '개경사'에 대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연구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우리들은 개경이 사라진 도시가 아닌 전통시대의 도시를 새롭게 부활시키는데 계속 노력할 것이다. 분단의 고착화로 가지 못하는 땅으로 인식되었던 고려 왕조의 개경은 '600년 고도 서울'이나 '1000년 고도 경주'에 비하여 절대적으로 관심이 부족한 실정이다. 바람직한 개경사 연구를 위해서는 개경 지역을 직접 답사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러한 작업은 남북상호 학술교류의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통일의 밑거름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머지 않은 장래에 개경을 답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開京의 城郭整備 -皇城을 중심으로-

신 안 식 (명지대)





머 리 말

동아시아에 위치한 우리 나라는 중국 또는 북방민족과 오랜 동안의 투쟁을 벌이면서 살아왔다. 때문에 이들과의 투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효과적인 방어수단을 강구하게 되었고, 그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 築城이었다. 특히 수도는 정치·교통·군사·상공업 등 국가 운영의 중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규모 역시 都城으로서의 권위와 실제적인 기능성이 아울러 고려되었을 것이다.
고려시대의 開京은 宮城 ― 皇城 ― 羅城의 성곽체제로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이것에 관계된 자료는 매우 적어서 그 추정조차 어렵고, 따라서 연구성과 역시 적은 편이다. 이는 물론 성문의 명칭 정도만 소개된 자료의 한계성과 직접 발굴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경과 관련된 古地圖, 일제시기의 개경관련 지도와 고유섭의 답사기, 그리고 1980년대 북한의 연구성과 등이 그나마 개경의 윤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이를 토대로 최근에 朴龍雲은 개경의 시설·구조·행정·기능 등 종합적인 이해를 시도했고, 細野涉은 나성 성문의 명칭과 위치 등을 연구하는 가운데 그 윤곽을 복원해 보려고 하였다. 또한 건축사 분야에서도 개경 성곽에 대한 언급은 있었지만 위의 성과를 뛰어넘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 연구 성과는 개경 성곽의 윤곽과 성문의 명칭에 대한 차별 혹은 그 위치에 대한 관심을 주로 보여준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개경 성곽에 대한 도식적인 이해를 시도한 것이고, 그 기능적이고 국가 중심의 상징적 측면에 대한 이해는 미진하다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는 개경의 성곽 중에서 황성을 중심으로 그 구조적인 일면을 이해하고자 한다. 내용에서 주로 언급되는 시기가 태조대로부터 현종대에 집중된 것은 개경의 도성으로서의 권위와 기능성이 현종 20년 나성의 완성으로 재정비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 高麗前期의 築城

고려 건국을 전후한 시기의 대내외적인 상황은 새로운 사회의 성립을 위한 커다란 혼란이었다. 즉 대내적으로는 나말려초의 격심한 사회혼란을 겪고 있었고, 대외적으로는 당송교체기 중국사회의 변화와 발해 멸망이후 거란 등 북방세력의 새로운 위협 등이 태동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고려사회는 나말려초의 혼란을 점차 극복하면서 국가의 기틀을 갖추어갔다. 그러나 대외적인 위협은 동아시아에서 살아왔던 우리 역사의 커다란 과제였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평화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던 것으로, 이는 강력한 방어수단을 바탕으로 할 때 가능한 것이었다.
태조 왕건의 아버지 세조(王隆)가 궁예에게 송악의 勃禦塹城을 쌓게 했던 이유는 朝鮮·肅愼·卞韓 지역을 평정하려는 목적이었다. 이것은 비록 圖讖을 근거로 하였지만, 이후 고려 도성의 모태가 되었다. 그리고 태조대로부터 평양을 西京이라 하여 중요하게 다루었던 것과 북방 지역에 많은 성곽이 쌓여지는 것도 도성의 방어가 주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많은 외침 가운데 도성이 점령당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이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도 중요 지역의 성곽을 통한 방어력의 집중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고려의 성곽에 대해, "朝廷에서 간간이 사신을 보내어 그 나라를 무마하기 위하여 그 地境에 들어가면, 성곽들이 우뚝우뚝하여 실로 쉽사리 업신여길 수 없다."라는 기록을 통해서 그 실상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개경은 현종 20년 나성이 완성되기 이전에는 군사적으로 불리했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현종 즉위년에 나성 축조를 논의하였지만, 나성 축조가 거란의 개경 점령을 경험한 이후 현종 11년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따라서 궁성과 황성으로 이루어진 고려초기의 개경은 북방 지역의 방어력에 의지하였다고 할 수 있다.
성곽은 유사시에 수도·촌락·주민·경작지 등을 보호할 수 있는 시설이었다. 그 위치와 구조는 도시·군사적 기능이 고려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려전기에는 동아시아 정세의 변동 및 거란과의 긴장관계를 전후해서 대대적인 축성사업이 이루어졌다. 기록상으로 확인해 볼 수 있는 성곽 사례로는 태조대 30건, 정종대 7건, 광종대 13건, 경종대 1건, 성종대 9건, 목종대 13건, 현종대 20건 등이 새롭게 축조 혹은 수축되었다.
특히 개경 이북 지역의 성곽은 북방세력의 침략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들의 침략 예상경로는 이 시기의 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고려전기의 거란은 성종대로부터 현종대까지 대대적인 고려 침략을 감행하였다. 이들은 압록강을 넘어 '西北界 南路·北路'를 이용하여 고려 지역으로 들어왔다. 서북계 남로는 保州(義州) ― 興化鎭 ― 靜州 ― 龍州 ― 鐵州 ― 通州 ― 定州 ― 嘉州 ― 博州로 통하는 길이고, 서북계 북로는 保州(義州) ― 天摩 ― 龜州 ― 蓬山 ― 泰州 ― 博州로 통하는 길이었다. 이 두 경로를 통하여 安北府(安州) ― 肅州 ― 順安 ― 西京 ― 黃州 ― 鳳州 ― 金川 ― 開京으로 내려오거나,  安北府 ― 順川 ― 慈州 ― 江東 ― 遂安 ― 新溪 ― 開京으로 내려오는 방법이 있었다. 이들 경로는 이후 무인집권기의 蒙古軍과 고려후기 紅巾賊의 침략에서도 이용되었다.
따라서 태조대로부터 현종대까지 축조된 대부분의 성들이 북계·동계 지역에 위치하였던 것이다. 그 성곽은 단일 성곽 혹은 重城을 쌓아 二重城 구조로 이루어졌고, 城門·水口·城頭의 시설을 갖추었으며, 그 외곽에 遮城 혹은 堡子 등을 두어 主城을 보호하였다. 이러한 성곽구조는 도성과 기타 지역의 성곽 구조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開京은 宮城 ― 皇城 ― 羅城, 西京은 宮城 ― 皇城 ― 羅城, 그리고 江都는 宮城 ― 中城 ― 外城의 三重城으로 이루어졌다. 靑州는 內城 ― 羅城, 그리고 和州·龜州·麟州·靜州鎭은 重城 ― 外城의 二重城으로 이루어졌다. 그 밖의 州縣의 성곽은 단일 성곽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2. 開京의 皇城

고려전기 대대적인 북방 지역의 축성사업이 벌어졌던 반면 정작 도성을 정비하는 데에는 소홀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고려사} 兵志의 城堡條를 보면, 고려초기에 도성을 쌓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태봉의 성곽을 그대로 이용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낳게 한다. 개경 성곽의 역사적 유래는 신라 효소왕 3년(694)에 축성된 이래로 성덕왕 12년(713)의 축성, 896년 궁예의 명령으로 왕건이 쌓은 勃禦塹城, 고려 현종 20년(1029)의 나성 등의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개경의 지형은 북쪽에 天摩山(782m)·國師峰(764m)·帝釋山(744m), 동북쪽에 華藏山(563m), 동남쪽에 進鳳山(310m), 서북쪽에 萬壽山(228m) 등이 외곽지대를 둘러싸고, 북쪽의 松嶽山(489m)에서부터 남쪽의 龍岫山(177m)으로 연결되는 구릉들이 서로 연이어져 있다. 따라서 개경의 성곽은 이러한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궁성 ― 황성 ― 나성으로 이루어졌다. 나성이 수도의 군사적·기능적인 면을 보완한 성곽이었다면, 궁성과 황성은 초기 도성의 방어적·상징적·기능적 의미를 모두 내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 황성의 존재

개경의 궁성은 正宮인 本闕(本大闕·滿月臺 등으로도 불림)과 기타 국왕과 관련된 여러 시설들을 둘러싼 것이었다. 궁궐은 태조 2년 철원에서 개경으로 천도했을 때 태봉국 궁예의 궁궐을 이용하여 창건한 것으로 파악되지만, 그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궁성의 성문으로는 昇平門∇華門(麗景門)·西華門(向成門)·玄武門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승평문은 3문 형식으로 이루어진 궁성의 정남문이었다. 서화문은 궁성의 서쪽 문이었음은 분명하고, '숙종 10년 10월에 왕이 서경에서 돌아오던 도중 丙寅에 長平門 밖에 이르러 병으로 輦 안에서 죽었으므로, 西華門에 와서 發喪하고'라는 기록을 통해서는 황성의 長平門으로 이어지는 곳에 위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곳에는 洪灌의 碑가 세워져 있어 그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동화문과 현무문은 각기 동쪽·북쪽의 성문이었지만 그 위치는 확실하지 않다.
이러한 궁성을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 황성이었다. 황성은 그 축성 시기와 유래가 불명확하지만, 태봉의 勃禦塹城을 이용했을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高麗史} 권 56 志 10 地理 1, 王京開城府條(이하 '{고려사} 지리지'로 약칭)와 {高麗史} 권 83 志 37 兵 3, 圍宿軍條(이하 '{고려사} 병지'로 약칭)에서는 그 규모와 20개의 성문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도경}에서는 이를 王府 혹은 內城이라고 했고, 13개의 성문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동쪽 성문인 廣化門 이외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 冬 築松岳·牛岑二城 ({三國史記} 권 8 新羅本紀 8, 효소왕 3년)
㉡ 松岳郡 本高句麗扶蘇岬 (新羅改松嶽郡) 孝昭王三年築城 景德王因之 我太祖 開國爲王畿 領縣二 ({三國史記} 권 35 雜志 4 地理 2, 松嶽郡)
㉢ 築開城 ({三國史記} 권 8 新羅本紀 8, 성덕왕 12년 12월)
㉣ 開城郡 本高句麗冬比忽 景德王改名 今開城府 領縣二 ({三國史記} 권 35 雜志 4 地理 2, 開城郡)
㉤ 世祖說之曰 大王 若欲王朝鮮·肅愼·卞韓之地 莫如先城松嶽 以吾長子爲其主 裔從之 使太祖築勃禦塹城 仍爲城主 時太祖年二十 ({高麗史} 권 1, 태조)
㉥ 光化元年戊午春二月 葺松岳城 以我太祖爲精騎大監 伐楊州 見州 ({三國史記} 권 50 列傳 10, 弓裔傳)
㉦ 弓裔 取浿潟及漢山州管內三十餘城 遂都於松岳郡({三國史記} 권 11 新羅本紀 12, 효공왕 2년 7월)
㉧ 弓裔 移都於鐵圓 ({三國史記} 권 12 新羅本紀 12, 효공왕 9년 7월)
㉨ 我太祖 移都松岳郡 ({三國史記} 권 12 新羅本紀 12, 경명왕 3년)
㉩ 定都于松嶽陽 創宮闕 置三省 六尙書官 九寺 立市廛 辨坊里 分五部 置六衛 ({高麗史} 권 1, 태조 2년 정월)
㉪ 創法王·王輪等十寺于都內 ({高麗史} 권 1, 태조 2년 3월)

이 자료들은 고려 건국을 전후한 시기의 개경 지역과 관련된 것이다. ㉠과 ㉡은 같은 것으로 이해되고, 자료상으로 찾아지는 개경 지역의 최초 축성사례이다. ㉢과 ㉣도 같은 것으로 이해되지만, ㉠과 ㉡의 송악성과는 다른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경우를 염두에 둘 때, ㉤의 발어참성, ㉥의 송악성, ㉦의 松岳郡, ㉨과 ㉩에서 태조 왕건이 수도로 삼았던 松岳郡·松嶽陽 및 ㉪의 都內 등은 송악산 남쪽, 즉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있는 개경 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의 송악성과 ㉤의 발어참성은 송악산을 근거로 했을 것이라는 추정은 가능하지만, 또 한편으로 그 위치선정에서 차이가 있었거나 혹은 발어참성이 ㉠의 송악성을 수축·확대한 것일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태조 2년으로부터 400여 년간 고려 수도로서의 개경은 ㉤의 발어참성을 이용하여 수축을 거듭해 왔을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에서의 궁예가 송악군으로 천도하기 5개월 전에 수리한 송악성은 발어참성이었을 것이다. 또한 태조 왕건이 ㉧ ㉨의 철원에서 송악군으로 천도하고, ㉩의 궁궐과 행정관서의 정비도 발어참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 ㉥ ㉦ ㉨ ㉩ ㉪은 고려초기 도성의 내용을 보여주는 점에서 같은 의미로 파악된다.
고려초기 개경의 성곽체제가 언제 정비되었을 것인가는 보는 관점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광종 11년 3월에 개경을 皇都라고 하였고, 그 이듬해 4월에 '修營宮闕都監'을 설치하여 14년 6월까지 약 2년 동안 궁궐을 수리하였다는 자료가 주목된다. 이 때 개경 성곽의 정비도 이루어졌을 것으로 발어참성 역시 궁성을 에워싼 황성으로 개칭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현종 20년 나성이 완성되기 이전의 개경 성곽은 궁성(내성)과 황성(외성)의 二重城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개경에 비해 서경에서는 內城¬城·王城·皇城이라는 용어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서경의 성곽체제로 미루어 보아, 개경의 성곽체제는 초기에 궁성 ― 황성으로 이루어졌다가 현종 20년 나성의 축조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고려전기에는 성종대로부터 현종대까지 거란의 침략 혹은 국내의 변란 등으로 인해 개경 시설의 피해도 막대하였는데, 그 복구과정에서 황성에 대한 묘사가 나타나지 않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더위가 심하여 羅城 수리를 정지하였다.' '崔瑀가 羅城의 隍塹을 수리하는데, 家兵으로 役徒를 삼고 銀甁 300여 개와 쌀 2000여 석을 내어 그 비용으로 지불하였다.' '京都의 外城을 수리할 것을 명령하였다.' 등의 나성의 수축공사와 비교된다. 이런 점에서 현종 20년 나성이 완성된 이후에는 황성 용어의 위상에도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이해되는데, 다음의 자료들을 참고할 수 있다.

ⓐ 皇城 朱雀門 행랑에 벼락이 쳤다.({高麗史} 권 5, 덕종 3년 6월 己丑)
ⓑ 皇城 안 서쪽에 社稷壇을 새롭게 축조하였다.({高麗史} 권 7, 문종 6년 2월 辛巳)
ⓒ 이튿날 諫官들이 閤門에 엎드려 힘차게 간쟁하니, (李)俊儀가 술김에 巡檢軍을 시켜 그들을 陵辱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준의를 불러 위로하여 성을 풀게 하고, 간관들을 皇城에 가두었다.({高麗史} 권 19, 명종 원년 9월)

ⓐ의 朱雀門은 황성의 성문이 분명하다. 그런데 "(拓)俊京이 '일이 급하게 되었으니 앉아서 기다릴 수 없다'라고 하고, 이에 侍郞 崔湜, 祗候 李侯進, 錄事 尹翰 등과 함께 수십 명을 거느리고 밤에 주작문에 이르렀으나 들어갈 수 없었다. 翰을 시켜 城을 넘어 자물쇠를 부수고 문을 열게 하여 들어가서 神鳳門 밖에 이르니 아우성 소리가 땅을 울렸다."라는 기록을 통해서 보면, 주작문이 궁성의 남문으로도 묘사되었다. 신봉문은 궁성의 남문인 昇平門에서 毬庭을 지나면서 처음 만나는 문이다. 즉 척준경 일행이 신봉문까지 갈 수 있는 경로는 황성의 주작문 → 궁성의 승평문 혹은 좌·우동덕문 → 구정을 통해서 이다. 이것은 황성이 국왕을 중심으로 한 포괄적인 의미로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의 황성은 나성과 구별되는 용어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사직단이 황성 밖 혹은 나성의 서남 지역인 宣義門 안쪽에 위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에서는 諫官들을 가둔 황성이 어디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데, 이는 閤門이 궁성 내에 있던 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사실들은 황성이라는 용어가 나성의 완성 이후에는 개경 성곽의 일반명사로도 쓰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황성은 고려초기 개경 성곽의 구조를 정확하게 알아야 이해될 수 있는 것인데, 다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첫째, 고려초기에는 발어참성이 외성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광종대에 皇都라는 용어가 등장하면서 발어참성이 황성으로 개칭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나성이 이루어지기 이전의 개경이 궁성과 황성의 二重城으로 이루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둘째, 현종 20년 나성의 완성은 기존의 황성을 內城으로 한 三重城의 구축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이 경우 황성이라는 용어는 점차 개경 성곽 혹은 국왕과 관련된 일반명사로도 사용되었을 것이다.

2) 황성의 규모

황성의 규모는 일반적으로 발어참성의 하반부로 이해하는데, 이는 '皇城二千六百閒 門二十'이라는 {고려사} 지리지의 기록과 북한의 발굴 결과를 근거로 하고 있다. 앞서 註 20)에서 제시된 성곽의 규모를 참고로 한다면, 황성과 궁성의 둘레는 2 : 1, 넓이는 5 : 1 정도로 파악할 수 있으며, 그리고 황성의 성문은 평균 약 235m마다 1개씩 세워져 있는 셈이다. 또한 황성과 궁성의 북쪽 벽면 사이가 약 10m라는 발굴 결과가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 두 가지 상황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선 발어참성의 상반부를 황성의 방어적 성격 혹은 後苑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지만, 황성과 후원이 뚜렷하게 구별되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두 번째로는 황성의 북쪽 벽면에 대한 문제이다. 이것은 궁성의 북쪽 벽면을 중심으로 발어참성을 동서로 가른 성벽이다. 이것 또한 발어참성의 상반부와 하반부 즉 황성과 후원을 구별하기 위해 쌓은 것인지도 의문이다.
고려전기 개경의 구조를 그나마 정확하게 알려주는 기록으로는 송나라 사신 徐兢이 지은 {고려도경}을 들 수 있다. 이 기록은 인종 2년(1124)의 상황을 묘사한 것으로 고려전기 개경의 구조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이 기록에서는 개경의 성곽구조를 王宮 ― 王府 ― 王城으로 표현하였다. 王宮은 궁궐과 기타 왕과 관련된 여러 전각 등을 둘러싸고 있었다고 한다. 王府는 왕궁, 長慶宮,  林宮·扶餘宮 등의 별궁, 그리고 尙書省·中書省·樞密院·八關司 등을 포괄하였다고 한다. 王城은 나성을 표기한 것이다. 그런데 {고려도경}의 王府와 {고려사} 지리지의 '皇城 2,600間'과는 차이가 있다.

㉮ 廣化門 王府之偏門也 其方面東({高麗圖經} 권 4 門闕, 廣化門條)
㉯ 昇平門 卽王宮之正南門也({高麗圖經} 권 4 門闕, 昇平門條)
㉰ 福源觀 在王府之北 太和門內 建於政和間({高麗圖經} 권 17 祠宇, 福源觀條)
㉱ 安和寺 由王府之東北 山行三四里({高麗圖經} 권 17 祠宇, 靖國安和寺條)
㉲ 王府之東北 與春宮相距不遠 有二寺 一曰法王 次曰印經 由太和北門入則有龜山玉輪二寺({高麗圖經} 권 17 祠宇, 王城內外諸寺條)
㉳ 崧山神祠 在王府之北({高麗圖經} 권 17 祠宇, 崧山廟條)

이와 같은 자료들에서 보면, 사물의 방향 혹은 위치 등이 그 기준이 될 수 있는 보편적인 사물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의 광화문과 ㉯의 승평문은 각기 황성과 궁성의 정문이었다. 이것은 왕부와 왕궁이 구별되는 것이며, 아울러 왕부는 황성, 왕궁은 궁성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의 복원관이 왕부의 북쪽, ㉱의 안화사가 왕부의 동북쪽, 그리고 ㉳의 숭산신사가 왕부의 북쪽에 위치하였다는 것은 왕부의 북쪽 지역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에서 보면, 복원관은 황성의 북쪽 태화문 안에 있었다고 하는데, 예종이 '福源宮에서 친히 제사를 지내고 곧바로 安和寺로 행차하여 順德王后의 眞堂에 술잔을 올리고 눈물을 흘렸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안화사로 통하는 길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안화사는 松岳山 기슭 紫霞洞에 있었고, 자하동은 개경의 동북 지역으로 조선 태조 2년에 완성된 內城의 北小門으로 통하는 곳이다. 또한 ㉲의 '太和北門을 따라 들어오면 龜山寺·王輪寺가 있다.'라는 구절을 통해서는, 太和門(황성의 泰和門으로 이해됨)이 발어참성의 하반부에 위치하였다고는 이해할 수 없다.
㉳의 숭산신사는 나성의 北昌門을 나가 5리쯤에 위치하고 있었다. {고려도경}이 인종 2년을 편년으로 하였다면, 숭산신사 역시 나성을 기준으로 이해하는 편이 쉬울 것이다. 이것 역시 발어참성과 나성의 북쪽 일부 벽면이 겹친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이해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런데 ㉲의 법왕사·인경사가 왕부의 동북쪽에 있었다는 것은 ㉰의 '王府之北'과 ㉱의 '王府之東北'의 위치와 거리에서 차이를 발견할 수 있지만, 황성을 발어참성의 하반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다음의 '太和北門으로 들어오면 귀산사·왕륜사가 있었다'라는 것과 충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와 같은 점들을 고려하면, {고려도경}에서는 왕궁(궁성)·왕부(황성)·왕성(나성)을 구별하였지만, 황성(왕부)의 범위를 발어참성의 하반부만을 지칭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한편 황성을 발어참성 하반부로 추정할 수 있게 하는 {고려사} 지리지의 경우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황성을 발어참성 하반부로 파악한 것은 {고려사} 지리지의 '황성 2,600間'과 북한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한 것이다. 그러나 황성의 규모를 이해하는 데는 그것이 처음부터 고정된 것이 아니라, 개경 궁궐의 수축과정 혹은 나성 축조를 계기로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고려전기 개경 시설의 수축에 대해서는 태조 2년 송악산 남쪽에 궁궐을 창건한 이후, 광종 12년 4월부터 14년 6월까지의 궁궐 수리, 현종 2년 정월에 거란의 개경 시설의 파괴로 인하여 같은 해 10월부터 5년 정월 甲午까지의 궁궐 수리, 현종 11년 8월 庚子부터 14년 8월 壬子까지 大內의 수리 등의 기록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황성의 수축·재정비도 아울러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현종대에 나성 건설이 본격화되고 동왕 20년에 완성되는 점을 염두에 둘 때, 황성 역시 일정한 변화가 있었을 것임은 추정 가능한 것이다.
황성의 범위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에는 성문의 위치가 있다. {고려사} 지리지에서는 황성의 20개 성문을 확인할 수 있고, {고려사} 병지와 {중경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도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고, 참고로 나성의 성문도 정리해 보았다.


위의 도표에서 살펴보면, {고려사} 지리지에는 황성의 선의문과 나성의 선의문이 같이 드러나고, {고려도경}에서는 나성의 正東門으로 선인문이 표기되어 {고려사} 지리지·병지의 황성의 선인문과 겹치고, {고려사} 지리지·병지의 황성의 통덕문과 {고려사} 지리지의 나성의 통덕문이 또한 겹치는 반면 {고려사} 병지의 나성의 성문에는 통덕문이 표기되지 않았다. 그리고 황성의 현무문과 궁성의 현무문이 겹친다.
나성의 선의문은 사신이 출입하는 등 개경의 중요 관문이었고,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나성의 4大門 중의 하나로서 선의문을 지적하였다. 그런데 황성의 선의문은 {고려사} 지리지 이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점은 황성의 성문 명칭이 현종 20년 나성의 완성으로 재정비되었을 것이지만, {고려사} 지리지의 황성과 나성의 성문 명칭의 판단기준 시기에서 차이가 날 수도 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다음의 宣仁門도 같은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햇빛이 붉은 장막을 친 듯하였다. 康兆의 군사가 宮門에  入하매 왕이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태후와 더불어 울부짖으면서 法王寺로 出御하였다. (생략) 왕이 宣仁門으로부터 나올 때 侍臣들이 처음에 모두 걸어서 따르다가 이에 이르러 비로소 말을 타고 따르는 자가 있었다. 歸法寺에 이르러 御衣를 벗고 음식을 바꾸어서 올렸다.

법왕사는 延慶宮 동쪽에 있었던 것인데, 연경궁의 위치 여하에 따라 선인문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 목종이 연경궁에 머물다가 선인문을 나와 귀법사로 갔다면, 연경궁은 황성 내에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목종 때는 아직 나성이 축조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서의 선인문은 황성의 성문이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나성의 선인문은 {고려도경} 이외의 기록에서는 확인할 수 없다.
통덕문은 현종 10년 정월에 거란의 침입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이 시기는 아직 나성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역시 황성의 성문이었음이 분명하다. 또한 {고려사} 병지의 통덕문에는 圍宿軍이 배치되었고, 延秋門(迎秋門)과 玄武門 사이에 있는 것으로 보아 황성의 성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황성의 서쪽 성벽이 뒤에 나성의 서쪽 성벽의 일부와 겹쳤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황성과 궁성의 현무문이 일치하는 것도 황성의 북쪽 벽면(발어참성을 동서로 가른 성벽)과 궁성의 북쪽 벽면이 겹칠 수도 있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게 한다. 전룡철은 황성의 이 북쪽 벽면에서 5개의 성문 흔적을 발견하였다고 하지만, 이런 성문 흔적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이 성벽은 필요했을 것이다. 발어참성의 상반부는 송악산으로부터 뻗어 내리는 구릉이 대부분이었을 것으로, 궁성에 대한 군사적 방어 혹은 재해 예방시설 등이 필요했을 것으로도 판단된다. {고려사} 병지에서 보면, 황성의 성문 중에서 水口門을 가진 성문은 광화문과 선인문이었다. 개경의 수로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렀기 때문에 나성의 수구문이 동쪽에서 동남쪽으로 위치하였고, 황성의 수구문 역시 그러했던 것이다. 따라서 궁성의 북쪽 벽면과 마주보는 벽면이 반드시 황성의 북쪽 벽면이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고 여겨진다.
결국 황성의 규모는 {고려사} 지리지와 오늘날의 발굴결과를 토대로 한다면 발어참성의 하반부였다고 할 수 있겠지만, 현종 20년 나성이 완성될 때까지 약 100여 년 동안 황성이 개경의 외성 역할을 했다는 점을 도외시 할 수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려사} 지리지의 표현방식에서도 차이가 나는데, 나성은 '城周·羅閣·高·厚' 등으로 묘사하는 반면, 황성은 '皇城二千六百閒'으로 묘사할 뿐이었다. 이것은 황성의 규모가 정확하지 않았기 때문으로도 이해되겠지만, 그 변화 상에 대한 상세한 자료가 남아있지 않았을 가능성도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3) 황성의 성문

{고려사} 병지의 麗景門과 向成門은 궁성의 東華門과 西華門의 명칭을 인종 16년에 고친 것이다. 이것은 {고려사} 병지의 성문 명칭이 인종 16년 이후의 것으로서 {고려사} 지리지의 황성·나성의 성문 명칭과 차이가 날 수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앞에서의 도표를 참고하면, 황성의 남훈문·선의문·통덕문·화평문·북소문이 {고려사} 병지에서는 빠져있고, 迎秋門과 延秋門, 金耀門과 金曜門, 泰和門과 太和門 등 명칭의 차이도 발견된다. 또한 나성의 통덕문이 {고려사} 병지에서는 빠져있고, 德 門과  德門, 乾福門과 乾陽門 등 나성의 성문 명칭도 차이가 난다. 따라서 {고려사} 지리지의 황성 성문의 명칭은 현종 20년 나성이 완성되기 이전의 것으로 여겨지고, 나성이 완성된 이후에 재조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황성 성문의 위치에 대해서는 이를 알려주는 기록이 현재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물론 '宣義門은 곧 王城의 正西門인데, 西는 金方으로서 五常에선 義에 속하기 때문에 이름하게 된 것이다.' '廣化門은 王府의 偏門인데, 동쪽으로 향했고, 모양과 제도는 대략 宣義門과 같다.' '王府의 內城은 13門으로 둘러싸여 있다. 각기 扁額이 게재되었는데, 방향에 따라 의의를 나타내었다. 廣化門이 正東의 문으로 긴 거리와 통했다.' '宣仁門으로 나와 歸法寺에 이르러' '숙종 10년 10월에 왕이 서경에서 돌아오던 도중 丙寅에 長平門 밖에 이르러 병으로 輦 안에서 죽었으므로, 西華門에 와서 發喪하고' 등의 기록을 통해서 몇몇 성문의 위치 혹은 방향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선의문·장평문은 서쪽 방향, 광화문·선인문은 동쪽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한편 {고려도경}에서 황성의 성문을 13개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기록이 인종 2년(1124)의 상황을 묘사한 것이라면, 현종 20년 나성의 완성으로 황성에 대한 재정비가 있었을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그 재정비에는 나성과 겹치는 서쪽·북쪽 벽면의 성문 혹은 중복된 성문 명칭의 조정 등이 있었을 것인데, 황성과 나성의 通德門 혹은 宣義門·宣仁門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고려사} 지리지와 병지에서 확인되는 황성의 宣仁門이 {고려도경}에서는 나성의 성문으로 표현되었고, {고려사} 지리지의 나성 성문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고려도경}의 기록이 정확하다면, 황성의 선인문은 나성의 완성과 더불어 개칭되었을 것이고, 나성의 선인문도 {고려도경}의 편년인 인종 2년 이후, 인종 16년에 殿閣과 宮門의 명칭이 변경되는 그 사이에 다른 명칭으로 변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점에서 {고려도경}의 왕부 13문은 황성과 나성이 겹치는 서쪽·북쪽 벽면을 제외한 나머지 성문을 언급한 것으로도 생각된다.
전룡철에 의하면 발어참성의 하반부 즉 황성의 성문 흔적을 동쪽 벽면에서 3개, 서쪽 벽면에서 1개, 남쪽 벽면에서 2개, 북쪽 벽면에서 5개 등 11개를 확인했다고 한다. 이것은 황성을 발어참성의 하반부로 설정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점들을 참고로 하면, 황성 성문의 위치는 다음과 같이 4가지로 나누어서 추정해 볼 수 있다. 첫째, 성문의 명칭에서 고려될 수 있는 방향을 추정해 보면, 동쪽 방향으로는 (1) 廣化門 (2) 通陽門 (14) 上東門 (17) 宣仁門 (18) 靑陽門, 남쪽 방향으로는 (3) 朱雀門 (4) 南薰門, 서쪽 방향으로는 (7) 迎秋門 (8) 宣義門 (9) 長平門, 북쪽 방향으로는 (13) 泰和門 (19) 玄武門 (20) 北小門 등이다. 이 경우는 {고려도경}의 '王府의 內城은 13門으로 둘러싸여 있다. 각기 扁額이 게재되었는데, 방향에 따라 의의를 나타내었다. 廣化門이 正東의 문으로 긴 거리와 통했다.'라는 점을 염두에 둔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황성의 성문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재료가 될 것이다.
둘째, {고려사} 지리지 황성의 성문 나열순서가 일정한 원칙에서 비롯되었음을 염두에 두고, 그리고 황성의 범위를 발어참성 하반부로 상정했을 때의 경우이다. 20개의 성문을 4벽면에 평균해서 배치하더라도 그 용어와 성문의 위치가 도저히 균형을 이루지 못한다.
셋째, {고려사} 지리지의 성문 나열순서가 일정한 원칙에서 비롯되었고, 그리고 황성의 범위를 발어참성 전체를 전제로 했을 때의 경우이다. 전룡철의 11개 성문 흔적을 참고로 하면, 발어참성의 하반부 동쪽에 (1) 廣化門 (2) 通陽門을, 남쪽에 (3) 朱雀門 (4) 南薰門 (5) 安祥門을, 서쪽에 (6) 歸仁門 (7) 迎秋門 (8) 宣義門을, 궁성의 북쪽 벽면과 마주보는 북쪽 벽면에 (9) 長平門 (10) 通德門 (11) 乾化門 (12) 金耀門 (13) 泰和門을 비정하고, 나머지 (14) 上東門 (15) 和平門 (16) 朝宗門 (17) 宣仁門 (18) 靑陽門 (19) 玄武門 (20) 北小門은 발어참성 상반부로 배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에도 두 번째와 마찬가지로 균형을 이루지 못한다.
넷째, {고려도경}과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서의 성문 나열순서가 동쪽 성문으로부터 언급되었던 점을 고려하고, 궁성의 북쪽 벽면과 황성(발어참성)의 동서 횡벽이 서로 겹쳤음을 가정하는 경우이다. 이것은 첫째의 경우를 참고로 해서, 우선 (19) 玄武門 (20) 北小門을 궁성의 북쪽 벽면과 황성의 동서 횡벽이 겹치는 성벽에 위치시키고, 발어참성 하반부 동쪽에 (1) 廣化門 (2) 通陽門을, 남쪽에 (3) 朱雀門 (4) 南薰門 (5) 安祥門 (6) 歸仁門을, 서쪽에 (7) 迎秋門 (8) 宣義門 (9) 長平門을 배치시킬 수 있다. 그리고 발어참성 상반부의 서쪽에 (10) 通德門을, 북쪽에 (11) 乾化門 (12) 金耀門 (13) 泰和門을, 동쪽에 (14) 上東門 (15) 和平門 (16) 朝宗門 (17) 宣仁門 (18) 靑陽門을 배치할 수 있을 것이다. 전룡철의 발굴 결과 발어참성 하반부 동쪽 벽면의 성문 흔적이 3개라고 한다면 (18) 靑陽門이 하반부의 (1) 廣化門 위쪽에 위치해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 때에는 宣仁門이 상반부의 동쪽 성문이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황성의 성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명칭이 현종 20년 나성이 완성되기 이전에 붙여진 것이었고, 황성의 규모도 궁궐수축 등의 여러 정황의 변화에 따라 재조정되었을 것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맺 음 말

개경 성곽 연구의 과제





고려전기 개경의 오부방리 구획과 영역

홍 영 의 (국민대)





1. 머 리 말

王京의 특별구역으로 설정된 개경의 5부방리의 가장 큰 특징은 고려전기부터 首都를 둘러싸고 있는 京畿의 관할관청인 開城府와는 별도의 행정조직과 운영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은 다른 군현에서는 찾을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이다. 개경에서 5부방리를 실시한 것은 王京이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서 구심점이 되기 위해서는 왕경 내의 거주민에 대한 관리와 운영이 중요시되었기 때문이다. 즉 王宮을 중심으로 여러 관서, 창고 등 국가통치를 위한 핵심시설이 위치하고 있었던 까닭에 이를 운영해 나가기 위해서는 다양한 신분층의 開京民을 관리하는 제도로 기능한 것이 5부방리제였던 셈이다.
개경의 5부방리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5부방리와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성곽형태와 궁궐의 내부구조에 대한 모습을 복원 유추한 것, 군현제도 안에서 京畿地域이 차지하는 정치제도적인 면과 사회경제적인 역할이 開城府와 그 구역에 대한 운영과 어떤 연관을 맺고 있었는가를 살펴 본 연구가 있어 왔다. 또한 村落의 기능과 구조를 검토하는 가운데 行政村으로서의 開京의 里를 주목하였고, 경제생활 단위로서 개경내의 京市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한편 5부방리의 행정조직과 운영방식 및 내부구조에 대하여 주목하기 시작하면서 개경의 도로와 행정구획 및 市廛지역, 개경 거주민의 분포 등에 대한 검토와 아울러 사료의 종합적 검토와 복원을 통하여 개경 전반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즉 개경이 수도로 정해진 연혁과 시설, 개경과 개성부와의 관계, 개경의 부방리제, 개경의 행정체계와 그 기능, 개경의 호구 등이 다루어졌다.
이상의 개경 연구는 도로와 행정구획 등 도시구획과 행정체계, 그리고 경제생활의 한 단위인 시장의 기능과 역할 그리고 위치와 변화 같은 기초적인 측면에 한정되어 있다. 따라서 개경의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아직 해결되어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5부방리의 구획과 영역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하는 문제이다.
개경의 5부방리의 구획은 기본적으로 京畿制의 변천에 따라서 개경의 5부방리제가 어떻게 변해갔는지를 살필 필요가 있다. 아울러 지금까지의 연구시각은 고려초에 형성된 5부체제가 고려말까지 그대로 존속되었다고 보고 있는데, 이것은 개경이라는 수도의 도시 발전을 고려하지 않은 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고려후기에는 戶等制가 9等戶制에서 3等戶制로 변하였고, 5부의 관원의 성격도 바뀌었기 때문에 당연히 5부체제의 변화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개경의 영역은 정치 행정 단위로서의 都城과 도성의 외부공간인 도성 밖 즉, 四郊로 이루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검토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교의 공간적 기능이 도시사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에 대한 검토는 개경 내에서 행정구조의 주축을 형성한 部·坊·里의 내부구조와 영역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기존의 연구와 자료를 바탕으로 5부방리의 복원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하고자 한다.

1. 5부방리의 구획

고려시대 開京의 五部坊里는 태조 2년(919) 開州가 처음으로 수도로 정해지면서 설치된 이래 成宗 6년과 顯宗 15년 두 차례에 걸쳐 개편을 보았다.『高麗史』권56 지리지 1 王京開城府條에는 五部坊里制가 완결된 형태, 즉 5부 35방 344리의 모습을 갖추는 시기는 顯宗 15년(1024)으로 되어 있다. 즉,

① "王京 開城府는 원래 고구려의 扶蘇岬인데 신라 때에는 松嶽郡으로 고쳤으며 고려에 와서 태조 2년에 수도를 송악산 남쪽에 정하면서 開州라 하고 여기다 궁궐을 새로 세웠다【세주생략】……市廛을 세우고 방리(坊里)를 구분하여 5部로 나누었다……②成宗 6년에 5개 部의 방리를 개편하였다……③顯宗 15년에는 다시 서울 5부의 방리를 개편하였으며【필자주 ; 5부35방344리】"

여기에서 5부방리가 세차례에 걸쳐 정비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그 첫 번째 단계가 위에서 알 수 있듯이, 開州가 수도로 정해지는 태조 2년 정월로서 坊里를 구분하여 5부로 나누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내용에서는 궁궐의 명칭만이 보일 뿐 방리에 대한 구체적인 명칭이 보이지 않고 있어서 우리의 주목을 끈다.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현종 15년에 이루어진 5부방리의 개편 때 보여지는 坊名이 이 내용에서는 보이지 않을 뿐더러, 태조대부터 성종 때 이전의 사료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때 정해진 방명을 단순히 고려사 편찬자가 임의대로 삭제한 것일까, 아니면 5부만 확정하고 어느 시점에서 점차 방명을 조정한 것일까.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우선 다음의 사료를 주목해보자.

① "市廛을 세우고 坊里를 구분하여 5부로 나누었다"
② "松嶽의 남쪽에 도읍을 정하였다. 궁궐을 건축하고 3省 6尙書官 9寺를 설치하였으며, 市廛을 세우고 坊里를 구분하였으며 5부를 나누고 6위를 두었다"
③ "松嶽의 남쪽에 도읍을 정하였다. 그 郡을 승격시켜 開州라 하고, 市廛을 설치하고 坊里를 구획하여 5부로 나누고 6衛를 설치하였다"
④ "태조 2년에 5부를 두었다【동남서북중 5부이다】"

위의 ①·②·③의 경우로 보아서는 5부와 함께 방리가 구분된 것으로 이해된다. ④의 경우는 5부(東西南北中)만을 언급하고 있다. 이 경우는 물론 백관지의 내용이므로 방리의 상급부서만을 언급한 것일 수 있다. 따라서 ①·②·③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드린다면, 태조 2년 정월에 방리명까지 확정된 것으로 믿어야 한다. 그러나 다음의 사료는 그러한 가능성을 희박하게 한다.

"3월에 法王寺·王輪寺 등 10개 사찰을 都內에 창건하고, 兩京(開京, 西京)의 石塔과 廟宇에 있는 肖像들 가운데 廢缺된 것은 모두 수리하게 하였다"
"이해에 法王·慈雲·王輪·內帝釋·舍那를 창건하고, 또 大禪院(普濟寺)·新興·文殊·(圓)通 地藏寺를 창건하였다"

는 기록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즉, 태조 2년 정월에 방리를 구분하여 5부를 구획한 다음, 두달 뒤인 태조 2년 3월에 法王寺·王輪寺를 비롯하여 慈雲寺·內帝釋院·舍那寺·大禪院(普濟寺)·新興寺·文殊寺·(圓)通寺·地藏寺 등을 都內에 창건하고 있다. 法王寺·王輪寺·慈雲寺 등은 태조 7년에 창건된 興國寺, 태조 19년에 창건된 內天王寺 등과 함께 현종 15년에 정리된 방명인 法王坊·王輪坊·慈雲坊·舍那(乃)坊·興國坊·內天王坊으로 추정되는 사찰이다. 따라서 위의 사료만으로는 태조 2년 정월에 방리를 구분하였다고 보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따라서 방리의 구획은 태조 2년 정월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때부터 점진적으로 구획사업이 진행된 것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그러므로『高麗史』의 찬자가 이 시기의 방명을 태조 2년조에 실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성종 6년에 개편된 5부방리는 어떠한 이유에서 이루어졌고, 그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5부방리가 개편되는 성종 6년을 전후로 한 內外의 官制와 조직이 집중적으로 재정, 정비되는 것과 아울러 그 계연성을 추적해야 한다. 주지하듯이 성종은 초년부터 百官의 官制를 고치고, 왕들 가운데 처음으로 籍田에서 親耕을 행하는 한편, 12牧의 설치와 官制(3省 6部 7寺의 설정) 정비, 酒店의 설치와 5년의 호구조사의 실시, 그리고 6년에는 詔書를 敎書로의 개칭, 각종 公文 樣式을 제정하는 한편으로 諸村의 大監, 弟監을 村長, 村正으로 고치고 있다. 이러한 제도의 집중적인 정비를 바탕으로 5부방리제를 개편 획정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5부방리의 획정 목적은, 우선 수도의 구획과 영역을 정리하려는 1차적 목적 이외에 전국적인 군현제 정비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성종 14년의 開城府의 설치를 통하여 赤·畿縣의 분할과 10道制의 실시를 도모한 것으로 파악되며, 이렇게 정비된 5부방리는 현종 15년에 다시 정리, 획정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현종 15년의 5부 35방 344리의 획정작업은 국내외의 어려운 여건과 함께 진행되었다. 성종 때부터 위협적 존재였던 契丹의 침입으로 都城이 함락되어 궁궐이 불타기도 하였고, 개경에서 일어난 上將軍 金訓, 崔質의 亂(현종 5)으로 현종 자신이 西京으로 피신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이 때문에 還都 후 개경과 관련해서 실시된 여러 정책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우선, 현종 9년 開城府의 屬縣인 開城縣과 長湍縣을 主縣으로 승격시켜 尙書都省에 직접隸屬케 하였다.

"현종 9년에 (開城)府를 없애고 縣令을 두어 貞州·德水·江陰 등 3개 현을 관할하고 또한 長湍縣令이 松林·臨津·兎山·臨江·積城·坡平·麻田 등 7개 현을 관할하게 하면서 모두 尙書都省에 직속시켰는데 이것을 京畿라고 하였다"

성종 14년에 설치된 開城府가 현으로 격하되고 赤畿縣 13개가 12개로 1현이 줄어들고 있다. 그 하나가 바로 松岳縣으로 짐작되는데, 개경 5부를 형성하였던 송악현은 현 그 자체가 소멸되어 중앙의 직할을 받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현종 1년에 착수된 羅城建設이 20여 년만인 현종 20년에 완성되면서 수도의 정비는 일단락 되었다. 이에 따라 이 시기부터 都城內와 도성 밖 그리고 이른바 교외지역인 東郊·西郊·北郊·南郊(城東·城西·城北·城南)의 지역적 구분이 명확하게 사료에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종의 수도정비 작업의 이유로는 都城의 성곽(皇城)만으로는 외적 방어가 어렵다는 점, 거란의 침입으로 황폐화된 도성을 복구해야 하는 필요성, 그리고 도성 내부의 통제를 강화하려는 목적에서였다. 특히 城郭의 보수와 내부정비 또한 비용이 만만치 않은 것이어서 왕경 개성부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는 京畿地域의 인원과 물자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현종대의 京畿制의 개편과 5부방리의 구획 획정을 바탕으로, 문종 16년 이후는 開城府의 복설과 함께 5부방리의 관직을 확정지으면서 경기체제와 개성부의 행정조직을 마련 정비하게 되었던 것이다.
  
2. 5부방리의 영역

개경 영역의 기본구조는 대체로 왕의 활동공간인 宮城, 그를 둘러싼 皇城과 5부방리의 영역을 포함한 도성, 그리고 城外 지역에 해당하는 四郊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고려초부터 이러한 영역이 구획되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궁궐은 태조 2년(919) 철원에서 개경으로 천도했을 때 태봉국 궁예가 머물던 궁궐을 그대로 개보수한 것으로 파악되지만, 그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황성 역시 그 축성시기가 불명확하지만, 태봉의 발어참성을 그대로 이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광종 11년 3월에 개경을 皇都라 하였고, 그 이듬해 4월에 '修營宮闕都監'을 설치하여 14년 6월까지 약 2년동안 궁궐을 수리하였다는 기록은 이를 뒷받침해준다. 아마도 이때 기존의 궁궐을 수리하는 동시에 그 동안 궁성으로 이용하였던 발어참성 역시 황성으로 개칭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현종대 나성이 완성되기 이전의 개경의 영역은 궁궐과 황성을 중심으로한 주변지역이었을 것이다. 바로 이 지역에 5부방리가 획정되었을 것이다. 성종 6년에 개정된 5부방리의 경우 구체적인 자료가 없어서 확인할 수 없지만, 고려 전 시기에 걸쳐 5부방리의 편제를 가장 잘 알려주는 것은 현종 15년에 획정된 다음의 내용이다.

"顯宗 15년에는 다시 서울 5부의 방리를 개편하였다【東部는 坊이 7개 里가 70개이다. 그 7개의 방은 즉 安定坊·奉香坊·令昌坊·松令坊·楊堤坊·倉令坊·弘仁坊이며, 南部는 방이 5개 리가 71개인데, 그 5개의 방은 즉 德水坊·德 坊·安興坊·德山坊·安申坊이며, 西部는 방이 5개 리가 81개인데, 그 5개의 방은 즉 森松坊·五正坊·乾福坊·鎭安坊·香川坊이며, 北部는 방이 10개 리가 47개인데, 그 10개의 방은 즉 正元坊·法王坊·興國坊·五冠坊·紫雲坊·王輪坊·堤上坊·舍乃坊·師子岩坊·內天王坊이며, 中部는 방이 8개 리가 75개인데, 그 8개의 방은 즉 南溪坊·興元坊·弘道坊· 溪坊·由岩坊·變羊坊·廣德坊·星化坊이다】"
  
위의 내용에서 볼 때, 개경의 구획은 5부 - 35방 - 344리로 편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의 표와 같다.

현종 15년의 5부방리제는 羅城의 축조와 함께 이루어진 것이었다. 나성의 축조가 완료된 시점은 현종 20년이지만, 그 논의자체는 이미 현종 즉위년에 이루어졌는데, 그간 유보되어 오다가 姜邯贊의 건의에 따라 재개되어 현종 20년에 완공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현종 15년의 5부방리제의 실시는 나성 축조 사업 계획이 완료된 후 성종 6년의 그것을 기초로 하여 재편 완성하였던 것이다.
5부의 구체적인 범위에 대해서는 자료의 부족으로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대략적인 위치를 살펴보면, 5부는 대체적으로 羅城의 南北門인 會賓門과 北城門을 잇는 선을 기준으로 하여 東·西部로 나누고, 다시 東西의 崇仁門과 宣義門을 잇는 선을 기준으로 하여 南·北部로 나눈 지역이었다. 中部는 이들 구획선이 교차하는 十字街 주변 지역이었다. 이는 도성을 크게 방위에 따라 4등분하여 각기 방위별로 동·서·남·북부로 나누고, 이들 도성 중앙부에 해당하는 지역을 중부로 편제한 것이었다. 中部는 市廛·寺院을 비롯한 別宮, 客舍, 官廳 등 여러 가지 공공시설이 밀집되어 있어서 도성 내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다. 중부의 위치를 추정할 만한 곳은 由岩坊인데, 이곳은 동서 방향대로의 북쪽 由岩山 부근에 비정된다. 또한  溪坊·廣德坊 등은 羅城의 서남쪽 성문인  溪門·廣德門과 일치하고 있어서 이 일대가 서쪽의 경계에 해당한다고 생각된다. 중부의 북쪽 경계는 興國寺 남쪽 지역으로 보인다. 흥국사 부근의 興國坊은 중부가 아닌 북부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부의 외곽 지역을 설정하는 것이 타당하다면, 東部의 경우는 방명에서 보이는 安定坊·弘仁坊을 참고할 때, 대체로 나성의 동쪽 문에 해당하는 安定門과 弘仁門을 경계로 설정된 것으로 보이고, 南部는 德 門·德山門을 중심으로 德 坊·德山坊이 설정된 것으로 보아 나성의 동남쪽에 해당한다. 또한 安申里가 城南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安申坊 역시 이 일대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西部는 五正門(宣義門)·乾福門 일대를 중심으로 五正坊·乾福坊 등이 설정된 것으로 보인다. 北部는 대체로 태조대부터 창건한 사찰을 중심으로 방명이 정해졌는데, 法王坊·興國坊·紫雲坊·王輪坊·舍乃坊·師子岩坊·內天王坊이 이에 해당한다. 이 지역들은 주로 황성 주변과 북쪽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坊名은 寺院의 이름이나 山川 내지는 그 이외의 어떤 다른 지형지물과 관련지어 붙여진 것이다.
1坊당 평균 10여 개의 里를 가진 35방명의 경우, 자료를 정리하여 검토하면, 대체로 현종 15년 당시의 방명은 예외적인 것을 제외하고는 고려전기까지 그대로 존속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고려후기 이후 새로운 방리명의 재조정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里는 중국 고대의 자연촌락 단위(自然村)에서 漢代를 거쳐 隋·唐代 이후 점차 인위적인 촌락조직의 기초단위(行政村)의 유형으로 사용되어온 개념이다. 고려시대 개경의 坊里制下의 里 역시 행정적인 편제의 성격을 갖는 行政村의 유형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특히 고려후기의 戶籍類에서 보이는 某部 某坊의 "第幾里"의 표현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다만 344개 각각의 里가 星化9里(1∼9리)와 洪道里(1∼6리)의 사례에서처럼 1개의 里名이 여러 개로 행정적 편제가 이루어진 것인지, 아니면 정부가 파악하는 1개의 里名만으로 행정적인 편제가 이루어져 344개의 리로 존재하게 된 것인지는 좀더 검토해야 할 문제이다.
里의 경우, 현종 15년 당시의 자료에서 생략되어 있어서 구체적인 명칭을 알 수 없다. 다만 국가가 행정적으로 파악할 때는 공식적으로 某部 某坊의 '第幾里'라고 썼을 것이며,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고유명사(○○里, ○○洞)로 불리기도 했던 듯 싶은데, 후자의 칭호들 역시 관청이나 궁궐 또는 산천 등의 지형지물에서 유래하는 것이 대부분으로서 이들도 그렇게 큰 변화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고려후기처럼 새로운 방명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里名도 새로이 등장할 개연성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郊는 周代의 제도에 따르면, 원래 都城으로부터 50리 이내의 곳을 '近郊', 또는  '郊內'라고 하여 城內의 6鄕과 합하여 國中이라고도 하였다. 또한 50리 밖으로부터 100리 안의 지역을 '遠郊'라 하였다. 都城 주변 100리 안의 近·遠郊 地域은 도성의 영향이 강한 지역으로서, 이 지역 내에 있는 邑을 京邑이라 하였으며, 그 바깥쪽의 땅은 公邑 또는 邦甸이라 하여 지방에 포함시켰다. 京邑지역에는 大邑(郡)을 두지 않는 것을 원칙이었다. 고려시대의 경우, 성종 14년에 宋制를 모방하여 王京을 중심으로 赤縣과 畿縣(13개)을 지정하여 開城府의 관할을 받도록 하였다. 고려의 赤縣과 畿縣은 시대에 따라 범위가 약간 바뀌었으나, 대체로 적현은 開城府 주위의 6縣(松嶽·開城·貞州·德水·松林·臨津)으로 구성되었고 기현 7縣(江陰·長湍·兎山·臨江·積城·坡平·麻田)은 적현의 바깥쪽에 있었다. 중국에서는 기현 가운데 離宮 또는 行宮이 있는 곳, 陵墓가 많은 곳 등을 별도로 선정하여 京都治所의 縣, 즉 적현으로 승격시켰는데, 고려의 적현 또한 그러한 이유에서 선정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개경을 중심으로한 4郊(東·西·南·北)는 도성인 羅城으로부터 적현의 경계지역에 해당한다. 朝鮮의 城底十里와 같은 개념으로서 도성 밖 城外지역인 4교의 기능은 대체로 冊封 使臣의 영접 및 軍隊 등의 전송, 각종 교통로의 중심지인  猊驛((내)성 서쪽 20리)·金郊驛(江陰縣 서남쪽 30리, 京師의 서북 30리)·桃源驛(長湍府의 남쪽 3리)·靑郊驛(保定門 밖 5리)의 기착지이자 행정문서의 전송 창구로 이용되고 있었다. 또한 군사가 주둔하거나 閱兵式과 함께 군사훈련의 장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祭祀 및 기원의 장소로, 왕의 사냥터이자 유흥장으로 자주 이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이 지역에는 五部點檢軍과 함께 네 지역을 정찰하는 四郊細作이 파견되어 교외지역을 순찰 감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지역이 어디에 해당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東郊와 西郊 지역의 대체적인 윤곽만을 확인할 수 있다.

"市裏檢點 : 장상 1명, 장교 2명, 군인 11명. 街衢監 : 행장교 2명, 螺匠 11명, 都典 11명, 군인 40명. 左右京裏檢點 : 장상 각각 2명, 장교 각각 2명, 군인 각각 8명. 五部檢點 : 장상 각각 2명, 장교 각각 2명, 군인 각각 8명. 四郊細作 : 장상 각각 2명, 장교 각각 1명, 군인 각각 7명. 安和의 생목 감시〔生木立〕장상 1명, 장교 1명, 군인 6명. 宮北 검점 : 장상 1명, 장교 1명, 군인 6명. 選軍 검점 : 장교 2명, 군인 32명. 獄直 검점 : 장교 4명, 군인 45명. 地倉 검점: 장교 2명, 군인 2명. 左倉 검점: 장교 2명, 군인 15명. 右倉 검점: 장교 5명, 군인 25명. 金吾衛 검점: 장교 2명, 군인 4명. 五正 검점 : 장교 1명, 군인 3명. 松岳左右樵人檢點 : 장교 각각 1명, 산직장상 각각 2명, 군인 각각 2명. 東郊의 炭峴±山·狄逾峴·小梓尾 등 生木 감시: 장교 각각 1명, 산직장상 각각 2명, 군인 각각 6명, 爐谷 생목 감시 : 장교 각각 1명, 산직장상 각각 1명, 군인 각각 6명. 西郊의 藥師院· 知巖·熊川·大峴·西普通亭의 골짜기·馬川·高寺 등 생목 감시 : 장상 1명, 장교 1명, 산직장상 2명, 군인 6명. 惡  생목 감시 : 산직장상 2명. 大廟 검점 : 장교 2명, 군인 10명이다"

의 내용은 개경 내외의 중요지역에 點檢軍을 파견하여 감시 정찰활동을 하였다는 것으로, 生木 監視軍으로 파견된 東郊의 炭峴(炭峴門 밖 太廟洞 일대)±山·狄逾峴(憲陵 - 光宗, 嶺南面 深川里 일대)·小梓尾 일대와 西郊의 藥師院(長湍府 서쪽 20리)· 知巖·熊川(開城府 남쪽 7리 : 陽陵里 熊川洞 일대)·大峴·西普通亭(永平門 - 都察門 밖)의 골짜기·馬川(현 靑郊面을 흐르는 馬尾川으로 沙川 支流)·高寺 일대가 우리의 주목을 끈다. 아마도 이 지역이 사교에 해당하는 東郊와 西郊 일대로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四郊 지역의 공간적 형태를 알 수 있는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고려정부의 사교에 대한 관심을 알 수 있는 다음의 몇 가지의 내용을 연결하여 그 대략을 짐작해 볼 수 있다.

① "문종 35년 8월에 制하기를, "西京 궁궐이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지고 헐린 곳이 많으니 工匠을 뽑아서 수리하라. 또 서울 동·서 각각 10여 리에 다시 터를 잡아 좌우 궁궐을 지어서 巡視할 적에 돌려가며 거처하는 곳으로 하라" 하였다"(『高麗史節要』권5 문종 35년 8월)
② "정종 원년 4월에 경성의 근처 名山에 나무하는 것을 금하고, 고루 나무를 심었다"(『高麗史節要』권4 정종 원년 4월)
③ "문종 7년 8월 정유에 御史臺에서 아뢰기를, "尙書工部를 통하여 '나성 동남쪽 둑을 높인 것은 서울 지세의 허술한 곳을 막기 위해서인데 이번에 하천이 범람하여 제방이 허물어졌으니 3∼4000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이를 수축해야 된다'고 하신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강변 일대가 모두 田畓이므로 농작물에 손해를 끼칠 우려가 있사오니 수확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소서"하니 왕이 이 제의를 좇았다"(『高麗史』권7 세가7 문종 7년 8월 정유)
④ "문종 13년 5월 병진에 명령을 내려 兩京 百官의 柴草地를 馬首嶺에 국한하고 禁標를 세워 규정을 위반하는 자에 대해서는 이를 엄격히 처벌하도록 하였다"(『高麗史』권8 세가8 문종 13년 5월 병진)
⑤ "공양왕 3년 3월에 中郞將 房士良이 상소하기를, "……지금 서울 사대문 밖에는 온 나라 대소신료 신민의 조상 무덤이 있는데 꼴 베는 이들이 해롭게 하고 사냥하는 자들이 불을 지르며 나물 밭을 만들거나 갈아 곡식을 심기도 합니다……"(『高麗史』권85 지39 형법2 금령 공양왕 3년 3월)
⑥ "공양왕 3년 5월에 京畿의 公田 및 私田의 四標 안에 荒閑地는 백성들이 땔나무를 하고 가축을 기르고 물고기를 잡고 사냥하는 것을 허락하며, 이를 금지하는 자는 그 죄를 다스린다"『高麗史』권78 지32 식화1 전제 과전법 공양왕 3년 5월)

위의 내용을 종합하면, ①은 서울 동·서 각각 10여 리에 좌우 궁궐을 지어서 巡視할 적에 돌려가며 거처하는 곳으로 한 것은 도성을 중심으로 사방 10리가 왕의 행동범위이자 郊內 지역에 해당하는 거리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거란 침입 때 이 지역(城外)에 거주하는 民家들을 城內로 들어오게 한 것으로 보아 都城民과 함께 파악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개경 근처 名山에 나무하는 것을 금하고, 고루 나무를 심었다고 한 점(②)은 郊內 지역에 대한 자연환경에 관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④의 兩京 百官의 柴焦地를 馬首嶺에 국한하고 禁標를 세워 규정을 위반하는 자에 대해서는 이를 엄격히 처벌하도록 하였다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였다. 즉 조선시대와 같은 四山禁標 지역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名山이 위치한 지역에 국한된 것이고, 郊內인 四郊지역은 땅이 평탄하고 비옥하여 경작할 수 있는 곳으로 지적되고 있었다. 특히 ③의 羅城 동남쪽 강변(沙川에 해당) 일대가 모두 田畓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아, 이미 도성 내는 인구집중과 宅地개발로 더 이상의 경작지가 부족해지자 강변지역으로의 토지개발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⑤의 경우처럼, 고려말에는 四大門밖에 있던 大小臣僚의 조상 무덤조차 꼴 베는 이들이 해롭게 하고, 사냥하는 자들이 불을 지르며 나물 밭을 만들거나 갈아 곡식을 심기까지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 지역에서 馬草의 생산과 운반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은 ⑥에서와 같이 京畿의 公田 및 私田의 四標 안에 荒閑地를 백성들이 땔나무를 하고 가축을 기르고 물고기를 잡고 사냥하는 것을 허락하며, 이를 금지하는 자는 그 죄를 다스린다고 한 점에서도 교내의 未開墾地에 대한 개발 목적을 파악할 수 있다. 특히 전쟁 등으로 인한 都城의 황폐화와 權勢家의 空地의 겸병문제는 사회적인 문제로 제기되기도 하였다. 都城의 宅地부족과 空閑地의 이용이라는 차원에서 도성내의 寺院들이 점차 郊外地域으로 나가고 있는 점도 그러한 목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5부방리 영역의 변화 시점 역시 도성밖으로의 寺院 창건과 開京民의 거주지역에 왕실의 대규모 궁궐(별궁·이궁)건설, 권세가와 중앙관료의 대저택 축조가 이루어지고 있는 시점을 염두해 둘 필요가 있다. 이는 결국 都城民의 宅地부족을 초래하였으며, 城內에 거주하는 일반관료와 주민들이 도성밖으로 거주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개경민이 거주하는 城外지역까지 5부방리의 영역에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같은 四郊地域은 성종 6년 5부방리제의 정리와 함께 구획되어 현종 15년 5부방리가 정비되고, 현종 20년 개경의 羅城이 완성되면서 대체적인 윤곽이 드러난 것으로 파악된다.

맺 음 말

고려시대 開京의 五部坊里는 太祖 2년에 설치된 이래 成宗 6년, 顯宗 15년 두 차례에 걸쳐 개편 구획되었다. 그러나『高麗史』권56 지리지 1 王京開城府條에 部坊里制가 완결된 형태, 즉 5부 35방 344리의 모습을 갖추는 시기는 顯宗 15년(1024)으로 되어 있지만, 그 대체적 윤곽은 이미 成宗 6년(987)에 잡혔다고 판단된다. 왜냐하면, 태조 2년 정월에 방리를 구분하여 5부를 구획한 다음, 석달 뒤인 태조 2년 3월 이후에 창건되는 10대 사찰(法王寺·王輪寺· 慈雲寺·內帝釋院·舍那寺·大禪院(普濟寺)·新興寺·文殊寺·(圓)通寺 地藏寺)과 태조 7년에 창건된 興國寺, 태조 19년에 창건된 內天王寺 등과 함께 현종 15년에 정리된 방명에서 法王坊·王輪坊·慈雲坊·舍那(乃)坊·興國坊·內天王坊으로 추정되는 사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방리의 구획은 태조 2년 정월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때부터 점진적으로 구획사업이 진행된 것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성종 6년에 이루어진 5부방리제의 정비는 성종 초에 이루어진 내외의 官制 정비와 성종 5년의 호구조사를 배경으로 5부방리제의 기본이 정해졌으며, 현종 15년의 5부방리제의 정리는 개경 지역의 확대와 羅城의 축조에 따라 개편된 것으로 보인다.
개경 영역의 기본구조는 대체로 왕의 활동공간인 궁궐, 그를 둘러싼 궁성(皇城)과 5부방리의 영역을 포함한 도성, 그리고 城外 지역에 해당하는 四郊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고려초부터 이러한 영역이 구획되지는 않았다.
5부의 구체적인 범위에 대해서는 자료의 부족으로 잘 알 수 없지만, 5부는 대체적으로 羅城의 南北門인 會賓門과 北城門을 잇는 선을 기준으로 하여 東·西部로 나누고, 다시 東西의 崇仁門과 宣義門을 잇는 선을 기준으로 하여 南·北部로 나눈 지역이었다.
35방명의 경우는 자료를 정리하여 검토하면, 대체로 현종 15년 당시의 방명은 예외적인 것을 제외하고는 고려전기까지 그대로 존속 사용되고 있었다. 坊名은 寺院의 이름이나 山川 내지는 그 이외의 어떤 다른 지형지물과 관련지어 붙어진 것이다.
里名의 경우, 현종 15년 당시의 자료에서 생략되어 있어서 구체적인 명칭을 알 수 없다. 다만 국가가 행정적으로 파악할 때는 공식적으로 某部 某坊의 '第幾里'라고 썼을 것이며,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고유명사(○○里, ○○洞)로 불리기도 했던 듯 싶은데, 후자의 칭호들 역시 관청이나 궁궐 또는 산천 등의 지형지물에서 유래하는 것이 대부분으로서 이들도 그렇게 큰 변화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고려후기처럼 새로운 방명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里名도 새로이 등장할 개연성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四郊지역은 성종 6년 5부방리제의 정리와 함께 구획되었다가 현종 15년 5부방리가 정비되고, 현종 20년 개경의 羅城이 완성되면서 대체적인 윤곽이 드러난 것으로 파악된다. 이 지역이 王京의 배후 기지로서 지배층의 관심이 집중되면서 개발과 보호라는 차원에서 지속적인 노력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현종대 이후부터 창건되는 사찰들이 교외에 집중적으로 분포되는 경향은 이를 뒷받침해 준다. 이러한 점은 도성내의 인구집중과 공간부족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되며, 그런 때문에 자연히 도성 밖에까지 5부방리의 영역으로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개경의 5부방리의 영역변화, 즉 5부방리의 확대과정은 경제단위의 확대, 인구의 증가, 행정체계의 고도화라는 도시의 발전적 측면에서 재검토해야 될 것으로 보인다.





고려전기 개경 절의 위치와 성격

박 종 진 (숙명여대)





머 리 말

고려시기의 불교는 종교적인 면에서 지배적인 사유구조였을 뿐만 아니라 종교 외적인 면에서도 사회생활 전반을 규제하는 틀이었다. 이런 점에서 고려시기의 절은 종교적인 기능만을 하는 장소가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으로도 중요한 곳이었다. 당시 개경에는 수많은 절이 있었는데, 조선중기의 한 기록에는 유명한 절만도 성내에 300곳이 있었다고 하였으며, 현재 절 이름을 확인 할 수 있는 것만도 100개가 넘는다. 개경 절에 대한 대체적인 정리는 고유섭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고유섭은 일제말 개경을 답사하면서 쓴 {송도의 고적}에서 개경의 주요 절에 대해서 위치와 고적, 관련 자료를 정리하였는데, 이후에는 이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려초 개경에 절을 세운 의미에 대해서는 개경의 풍수를 검토하면서 풍수의 비보사상과 연결하여 검토한 글이 있다. 이병도에 의하면 당시의 인식에서는 순조롭지 못한 수덕을 진압하고 개경 전체의 지덕을 비보하기 위해서는 어떤 신비한 힘 곧 佛力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를 위해서 설치한 것이 절이라고 보았다. 또한 태조대의 절 창건을 태조가 경주 중심의 불교기반을 개경으로 재편하는 과정으로 본 글이 있다. 이외에도 귀법사의 창건을 광종 후반기의 개혁정치와 관련하여 검토한 연구와 현화사 흥왕사의 창건을 현종 문종대의 불교정책 속에서 살핀 연구가 있다.
개경 절의 위치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는 아직 없다. 이에 대해서는 태조가 창건한 절의 위치를 비보사상과 연결하여 설명한 글이 있을 뿐이다. 한편 왕실 願堂으로 설치한 개경 절은 대체로 왕릉과 가까운 지역에 설치되었다는 견해가 있는데, 이 글은 개경 절의 위치를 절의 기능이나 성격과 연관지어 검토한 것으로 주목할 수 있다. 앞으로 개경 절의 위치는 풍수지리설과 비보사상, 지리와 교통, 절의 기능과 성격 등을 종합하여 정리할 필요가 있다.
고려시기 개경의 절은 종교적 기능 외에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다양한 기능을 가졌다. 개경 절에서는 왕실의 상례와 제례를 비롯하여 팔관회·연등회 등 국가차원의 행사가 진행되었으며, 왕이나 공신 등 지배층을 위한 행사뿐 아니라 광범위한 사회계층을 위한 의식도 하였다. 최근 개경의 절이 군대 주둔지·훈련장소·요새지·관문적 시설·정치회합장소·행궁 등으로도 이용되었음을 관련 자료를 통하여 정리한 글이 주목된다. 이 글은 처음으로 절의 군사적 정치적 성격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다만 개경 절의 위치와 성격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지는 못하였다.
고려시기 개경 절에 대해서는 불교사의 범주에서 절에 대해서 직접 간접 언급하거나 미술사나 건축사의 입장에서 고려시기의 절에 대해서 검토하기도 하였지만, 개경의 절 자체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는 없다. 고려시기 개경 절이 가졌던 의미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절 자체에 대한 분석, 절의 위치에 대한 사회 경제적 의미 분석, 절의 다양한 기능 분석 등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는 그 기초작업의 하나로서 고려전기 개경 절의 위치와 성격에 대해서 정리하려고 한다.

1. 개경 절의 창건시기와 위치

고려전기에도 개경에는 크고 작은 많은 절들이 세워졌겠지만, 이 글에서는 고려전기 개경주변에 설치된 절 중 창건연대가 확실하고, 그 위치를 어느 정도 판단할 수 있는 곳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그 기준에 따라 만든 것이 뒤에 첨부한 <표> [ 고려전기 개경의 절]이다. 따라서 이 표에는 창건연대는 {고려사}에서 확인되지만 위치가 불명확한 신중원(924), 묘지사(927), 광흥사(936), 숭선사(954), 홍화사(963), 유암사(963), 삼귀사(963), 중광사(1012) 등은 제외되었다. 그렇지만 태조 2년에 都內에 창건된 10개의 절은 그 위치가 분명하지 않은 것도 포함시켰다. 그것은 당시 도내는 황성 주변 곧 개경의 중심부로서 그 위치의 대강을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다만 태조 2년에 창건된 10개의 절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三國遺事} 王曆에는 당시 창건된 10개의 절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通'으로 표기되어 있는 절의 이름이다. 이 절의 이름을 圓通寺로 보는 견해와 靈通寺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일단 영통사는 개경의 동북쪽 나성밖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이 절을 영통사로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 절의 이름을 원통사로 본 견해에 대해서도 문제가 제기된 적이 있으므로 그 이름을 여기서 원통사로 단정하기도 어렵다. 일단 이 글에서는 도내에 창건된 이 절의 이름을 잠정적으로 통설대로 원통사로 표기하였다.
개경 절의 위치는 나성 축성이전까지는 황성 안과 밖으로, 나성 축성이후는 나성 안과 밖으로 분류하였으며, 그 위치는 황성 나성 등 성곽을 중심으로 간단히 그린 개경 지도에 [표]에 부여한 번호로 표시하였다. 위와 같이 정리한 표와 지도를 중심으로 고려전기 개경 절의 창건시기와 위치에 대해서 3시기로 나누어 개략적으로 살펴보겠다.

1) 태조대 창건한 절의 위치와 특징

태조대에는 개경에 많은 절이 창건되었다. '訓要十條'에 따르면 태조가 절을 세운 이유는 부처의 힘으로 국가의 基業을 굳건히 하려는 것이었는데, 그 위치는 도선이 정한 山水의 順逆에 따라 정하였다고 하였다. 이것은 풍수지리설에 따른 裨補寺院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런 절이 태조대에 전국에 500개가 지어졌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개경에 창건된 절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태조대 개경에 창건된 절 중 창건연대가 알려진 것만도 태조 2(919)년에 法王寺, 慈雲寺, 王輪寺, 內帝釋院, 舍那寺, 普濟寺(大禪院), 新興寺, 文殊寺, 圓通寺, 地藏寺 등 10개의 절을 비롯하여 태조 4(921)에 大興寺, 태조 5년에 廣明寺, 日月寺, 태조 7(924)년에 外帝釋院, 九曜堂, 신중원, 興國寺, 태조 10(927)년에 묘지사, 태조 12(929)에 龜山寺, 태조 13(930)년에 安和寺, 태조 18(935)년에 開國寺, 태조 19(936)년에 광흥사, 內天王寺, 賢聖寺, 彌勒寺 등 모두 25곳에 이른다. 이 수는 [표]에 작성된 고려전기 개경에 창건된 주요 절의 2/3에 해당될 정도로 많다.
우선 주목되는 것은 태조대 창건된 절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개경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궁궐주변과 송악산록에 위치하였다는 점이다. 이곳은 5부방리로는 북부에 해당된다. 특히 태조 2년에 10개의 절을 都內에 창건하였다고 하였는데, 도내는 대체로 皇城(勃禦 城) 안으로 생각된다. 태조 2년에 창건된 것 말고도 개경 북쪽 천마산과 성거산 중간에 위치한 대흥사(태조4)와 장패문 밖에 창건된 개국사(태조18), 탄현문 안의 현성사, 유암산 기슭의 미륵사 4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궁궐과 송악산 주변에 위치하였다.
태조대의 절 중 개경 중심부에서 벗어난 개국사·현성사·미륵사는 통일전후시기에 창건한 것이고, 대흥사는 개경에서 북쪽으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다. 따라서 태조대에 창건된 절은 대체로 개경 중심부에 위치하였다고 하여도 크게 틀리지는 않는다. 이들 절 이름은 법왕방, 자운방, 사나방, 왕륜방, 내천왕방, 흥국방 등 북부의 방명과 일치하는 것이 많은 것도 주목된다. 이는 나중에 방명을 지을 때 초기에 창건된 절 이름을 따랐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동시에 고려초기 절의 창건은 도시의 구획과 발전에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하였음을 알려준다.
태조초기에 창건된 절이 대체로 궁궐 주변에 위치한 것은 태조가 절을 설치한 목적, 곧 당시 절의 기능과 연관된 듯하다. 우선 태조는 이들 절에서 팔관회(법왕사), 연등회(왕륜사), 제석신앙(내외제석원), 무차대회, 미륵신앙(미륵사), 첨성의식(구요당) 등 주요 불교행사를 분담시키고 각 종파의 근거지로 삼았다. 곧 태조는 개경 중심부인 궁궐주변에 절을 설치하고, 그곳에서 중요한 불교행사를 주관하게 하였는데, 이 자체가 정치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태조대에 고려전기의 주요 절 2/3가 창건된 것은 이 때 국가의 사원정책 구도가 일단 확립된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당시의 절은 궁궐 옆에 위치하여 아직 제도적으로 완성되지 않은 궁궐을 보완하는 기능도 하였다.
태조대 창건된 절 위치의 추이를 보면, 처음에는 개경의 중심부 곧 궁궐 주변에 설치하였으며, 점차 송악산 위쪽(귀산사, 안화사), 동남쪽(개국사), 동북쪽(현성사), 남쪽(미륵사)으로 옮겨졌다. 그 이유는 우선 통일을 전후하면서 개경의 도시 구조의 틀이 잡히면서 개경 중심부에는 국가에서 지원 받는 큰 절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통일전후시기인 935년 936년에 개경의 동북쪽에 현성사를 동남쪽에 개국사를 설치한 것은 개경방비와도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특히 당시엔 아직 나성이 축성되기 전이기 때문에 황성을 제외하고는 뚜렷한 방어시설이 없었던 것도 이와 관련하여 주목된다. 특히 당시는 후백제를 견제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동남쪽에 대한 방어시설이 필요했을 것이다. 개국사가 설치된 자리는 나중에 나성의 동남쪽 문인 보정문(장패문) 밖으로 개경에서 동남쪽으로 내려가는 주요한 길목이었다. 따라서 이곳은 교통의 요지일 뿐 아니라 개경의 방어를 위해서도 중요한 지역이었다.

2) 광종대-현종대 창건한 절의 위치와 특징

광종-현종대에 창건된 절로는 광종2년(951)의 봉은사·불일사, 광종 5년의 숭선사, 광종 14년의 홍화사·유암사·귀법사, 목종 2년의 진관사·숭교사, 현종 3년의 (혜일)중광사현종 9년의 현화사 등이 있었다. 우선 광종대 창건된 봉은사는 황성의 남쪽, 불일사·귀법사는 나성의 동북쪽에 위치하였다. 태조의 원당으로 창건되어 대대로 연등회를 열었던 봉은사와 유암사는 비교적 궁궐과 가까운 위치에 지어졌지만 이 역시 황성 밖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반면 불일사와 귀법사는 궁궐의 동북쪽 즉 나성의 탄현문 밖에 지어졌으며, 목종대의 진관사와 숭교사는 용수산 기슭에 창건되었다. 이곳들은 대체로 개경의 동북쪽에서 남쪽에 이르는 산록으로 당시 개경의 동북쪽과 남쪽의 경계에 해당한다. 또한 이곳은 대체로 나성의 성곽이 지나가는 곳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창건된 절의 위치는 대체로 태조 후반기 이후의 추세와 비슷하다. 즉 개경의 도시정비가 진전되면서 개경 중심부에는 국가가 지원하는 큰 절이 들어서기 어려웠기 때문에, 봉은사 정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궁궐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지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한 개경 주변의 동북쪽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산록에 지어진 불일사·귀법사·진관사·숭교사 등은 개경의 외곽을 지키는 의미도 가졌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 때까지는 아직 나성이 축성되기 이전인 것을 고려하면 이 절들도 태조대의 현성사 개국사와 마찬가지로 개경 방어의 거점이었을 것이다. 한편 현화사는 현종이 자기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창건한 절로서 나성의 동북쪽 밖 곧 귀법사 동북쪽에 창건되었다. 이곳은 현종이 자기 아버지인 안종 욱의 능(건능)을 이장한 근처이기도 하다. 따라서 현화사는 왕실 원당으로서 정치세력·불교세력의 개편과 결집의 구심점이 되었음은 물론, 현화사는 귀산사·안화사·귀법사 등 산록에 위치한 다른 절과 마찬가지로 왕이 사냥하고 연회를 베푸는 왕실의 後苑으로도 이용되었다.

3) 현종 이후 창건된 절의 위치와 특징

현종대 나성 축조 이후에 창건된 주요 절로는 문종대의 흥왕사(문종 21;1067), 숙종대의 국청사(숙종 2;1097), 선종대의 홍호사(선종 10; 1093), 예종대의 경천사·천수사 등을 들 수 있다. 이 때 창건된 절은 모두 나성 밖에 위치하며, 일부는 개경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창건된 것도 있다. 예종대 경천사는 나성의 서남쪽 밖에 창건되었으며, 숙종대  국청사는 나성의 서쪽 밖에 위치하여 개경 서쪽의 관문 기능도 하였다. 또 예종대의 천수사는 나성의 동쪽 밖에 세워졌으며, 문종대의 흥왕사는 개경의 동남쪽에 있는 진봉산 기슭에 창건되었다. 이 때 세워진 절들은 나성 밖의 국방과 교통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즉 국청사는 개경의 서쪽 관문에 위치하였는데, 이 이곳은 교통과 방어의 요지였다. 천수사 역시 남쪽으로 내려가는 교통의 요지였다. 흥왕사는 문종이 덕수현을 이전하고 그곳에 절을 지으면서 많은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은 곳이다. 특히 흥왕사가 주목되는 것은 창건 후 얼마 되지 않은 문종 24년 6월에는 성을 쌓은 점이다. 이것은 흥왕사가 처음부터 남쪽의 이궁 역할을 하도록 설계되었음을 의미한다. 거란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왕이 개경 남쪽으로 피했던 경험을 가졌던 고려 왕실은 개경 남쪽에 왕이 피할 수 있는 거점이 필요하였고, 이것이 흥왕사의 창건과 함께 실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고려전기 개경 절의 창건 위치는 개경의 중심부에서 점차 사방으로 퍼졌으며, 더 나아가서는 나성 밖으로 나갔다. 이것은 개경이 황성에서 나성, 4郊로 확대되는 과정과 일치한다. 아울러 나성이 세워지기 이전에 교통과 방어의 거점 구실을 하던 절 대신 나성밖에 새롭게 세워지는 절들이 그 기능을 대신하게 되다. 결국 이런 흐름은 개경 절의 기능이 시기에 따라 부분적으로 변화하였을 가능성을 알려준다.

2. 개경 절의 위치와 기능

고려전기 개경 절도 불교 사원 본래의 종교적 기능을 하였을 것은 말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한 개경의 주요 절에서는 팔관회 연등회 등 국가 차원의 불교행사가 거행되었으며, 이 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에 개경 절은 자연히 교역과 만남의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 개경의 주요 절은 왕실이나 고위 관료의 원당으로 운영되었으며, 몇몇 주요 절에는 역대 왕의 眞殿이 설치되었다. 이런 경우 이들 절은 국가로부터 많은 경제적 지원을 받았으며, 진전이 모셔진 절에는 위숙군이 파견되었다. 이 외에도 개경 절에는 賑濟場이 설치되어 구휼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여기서는 이와 같은 개경 절의 전반적인 기능을 염두에 두면서, 그 위치와 관련된 절의 기능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1) 개경 중심부에 위치한 절

개경 중심부는 대체로 궁궐주변, 황성안팎, 개경의 십자로 주변을 말한다. 여기에 포함되는 대표적인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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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유람 (2005-03-04 17:16:05)  
..로는 태조 2년에 창건된 법왕사·왕륜사·보제사를 비롯하여 흥국사 봉은사를 들 수 있다. 이들은 봉은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태조대에 창건되었으며, 보제사와 봉은사를 제외하면 대체로 궁궐에서 가까운 황성 주변에 위치하였다.
이 절들은 연등회(흥국사, 봉은사), 팔관회(법왕사), 제석도량(내외제석원), 기우제(보제사) 등 주요 국가차원의 불교행사를 주관하였을 뿐 아니라 궁궐과 관청 기능을 대행하기도 했다. 흥국사, 법왕사, 왕륜사 봉은사 등에서는 주요한 정치 행사가 개최되거나 정치적 논의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것은 개국초 아직 궁궐이나 관청 등이 정비되지 못한 것이 하나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후 고려의 왕은 절에 자주 행차하여 한동안 머무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런 연유로 고려왕조 내내 개경의 절은 중요한 정치 공간으로 이용되었다. 다만 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기 때문에 체계적인 정리는 어렵다. 특히 고려전기에 국한하면 그 자료는 더욱 없다. 따라서 여기서는 고려 전체 시기의 단편적인 기록을 모아서 그 추세의 대강만을 살펴보려고 한다.
우선 이들 절에서는 국가차원의 중요 행사가 거행되었다. 국가차원의 행사라 할 수 있는 연등회 팔관회 제석도량 기우제 등이 봉은사·법왕사·내외제석원·보제사 등에서 거행된 것을 비롯하여, 왕이 흥국사에서 신년인사를 절에서 받기도 하였으며, 봉은사에서는 신년 축하예식의 연습이 거행되기도 하였다. 또한 이들 절은 왕의 정치 공간으로도 이용되었는데, 절에서 교서를 반포하거나, 죄인을 국문하고, 석방한 경우도 보인다. 또한 충선왕이 봉은사에서 측근에 선물을 내린 경우나 공민왕이 봉은사에서 태조에 존호를 올린 것, 제석원 봉은사 등에서 왕사 국사의 인사를 단행한 것도 절이 왕의 정치공간으로 이용된 예이다. 또한 이들 절은 선위하거나 폐위된 왕의 임시거처로 이용되기도 하였으며 왕태후의 요양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예들은 궁궐 주변의 절이 궁궐의 기능을 대신한 경우라 할 수 있다. 봉은사에서는 군인을 선발하기도 하였으며, 물가와 도량형 조정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흥국사에서 군기검사를 한 예도 있다. 이것은 절이 관청의 기능을 대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종초 만적은 반란을 모의하면서 흥국사와 보제사를 거사 장소로 정하기도 하였고, 고려말 개혁파들은 흥국사에서 중요한 정치적 회합을 갖기도 하였다. 이것은 흥국사 보제사가 모두 개경의 중심부에 위치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개경 중심부에 위치하였던 봉은사 흥국사 등은 주요 국가차원의 불교행사를 주관하였을 뿐 아니라 궁궐과 관청 기능을 대행하기도 했으며, 정치 공간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2) 나성 지역에 위치한 절

나성이 축성되기 이전에 나성 지역에 창건된 절로는 동남쪽의 개국사(935), 동북쪽의 현성사(936), 남쪽 용수산 기슭의 진관사(999), 숭교사(1000)가 대표적이다. 이 절들이 창건된 시기는 태조 후반과 목종대이다. 우선 태조 후반에 창건된 개국사 현성사의 위치는 개경에서 밖으로 나가는 주요 교통로였다. 즉 개국사가 설치된 곳은 개경에서 동남쪽으로 가는 길목이었으며, 현성사가 설치된 곳은 동북쪽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현종대 나성을 쌓으면서 개국사 근처에는 장패문이 현성사 부근에는 탄현문이 각각 세워졌다. 개국사는 현성사가 위치한 동북쪽 보다 교통상 더 중요한 곳이었다는데, 이는 남쪽으로 가는 육로의 길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곳에는 많은 사람과 우마가 오갔을 것이다.
이제현의 [개국율사중수기]에 의하면 이곳은 三鉗의 땅 곧 세가지의 꺼리는 땅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3가지 거리낌은 길과 길이 만나는 路鉗, 물과 물이 만나는 水鉗, 산과 산이 만나는 山鉗을 말한다. 결국 개국사가 설치된 곳은 길과 길이 만나는 교통로이며, 개경의 물이 모여드는 수구이며, 동서의 산세가 마주치는 곳이었다. 태조가 이곳에 개국사를 창건한 것은 이 3가지의 거리낌을 비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개국사는 실제로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개경과 남부지방을 연결하는 관문의 역할을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사례로 이곳에 賑濟場을 설치하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구휼을 행한 것이다. 이것은 임진 보통원에서 죽과 채소를 행려에 제공하였던 사례와 함께 사람이 많이 왕래하는 곳에 진제장을 설치 운영하였던 좋은 예이다. 이러한 교통로에 위치한 절의 기능은 주요 교통로에 위치하여 여행자들의 편의를 제공했던 불교시설인 院의 기능과 같은 것이다. 특히 개국사의 남쪽에는 남계원이 있었는데, 이 남계원은 개국사에 소속된 원으로 생각된다.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개국사의 기능이 커지면서 남계원이 개국사의 말사로 창건된 것으로 생각한다.
개국사와 현성사는 교통의 거점이었을 뿐 아니라 개경 방어에도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고 생각한다. 이 절들이 창건된 시기는 나성이 축성되기 이전이며, 당시는 후삼국 통일을 앞둔 시기로서 개경의 방어에 관심이 클 때이다. 특히 현성사는 당시 개경의 동북쪽 방어에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고종대 거란 유종이 침입하자 文豆婁 도량을 열어서 국가의 변란이 없어지기를 빌었으며, 강화도에 천도했을 때에는 왕이 자주 갔던 곳이다. 고종은 강화도에 현성사를 설치하고 그곳에서 몽고의 침략이 그치기를 기원하였는데, 이것은 현성사가 창건 초기부터 국방, 국가 보위와 관련이 깊은 절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명종대 개국사 주변에서 군사훈련을 하였던 것은 이곳이 교통의 요지일 뿐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거점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렇듯 태조 후반기에 창건된 개국사와 현성사는 개경의 동남쪽 동북쪽 관문에 위치하여 개경의 안팎을 연결하고 더 나아가서 개경을 방어하는 거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나성이 축성되기 이전 이들 절이 차지하는 의미는 그 이후보다 훨씬 더 컸을 것이다. 현종대 용수산 기슭에 창건된 진관사 숭교사는 현종이 부모의 원찰로 세운 것인데, 이 절들도 나성이 있기 전까지는 방어의 거점 역할도 하였다고 생각한다.
이 절들은 나성 축성 이후에는 개경을 방어하는 기능은 약화되었을 것이지만, 개국사·현성사 등 몇몇 절들은 나성의 성문을 보완하면서 개경의 관문 기능을 하였다. 명종 9년 11월 개국사에서 백좌회를 열어 국가의 전란을 방비하고자 하였던 것은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그 밖에 귀산사·안화사·귀법사 등 송악산을 비롯한 개경 주변의 산록에 위치한 절은 왕과 관료들의 휴양지로도 이용되었다. 이들 절들은 주로 왕과 관료들의 시회·연회 장소로 많이 이용되었고, 또 여름철 수련회(夏課) 장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3) 나성 밖에 위치한 절

나성 밖에 창건된 주요 절로는 불일사 귀법사 현화사, 흥왕사, 홍호사, 국청사, 천수사, 경천사 등이 있는데, 이들 중 불일사 귀법사를 제외하면 모두 현종대 나성 축조 이후에 창건되었다. 현종 20년 나성이 완성되면서 개경 정비가 일단락 되었으며, 이 때부터 도성 안과 밖(四郊)의 구분이 분명해진다. 결국 이후 창건된 절은 모두 성밖에 위치하는 셈인데, 이는 개경의 팽창과정 속에서 설명할 수 있다. 고려시기 개경의 '郊'는 책봉 사신의 영접, 군대의 전송, 각종 驛의 기착지이자 행정문서의 전송 창구, 제사 및 기원의 장소, 왕의 사냥터 등으로 이용되었다. 국가에서는 四郊의 주요 거점에 檢點軍을 파견하여 이 지역을 순찰 감시하였는데, 이 지역에 창건된 절은 확대된 개경을 의미하는 교외의 주요 거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중 교통의 거점으로 중요한 절이 서쪽의 국청사와 동쪽의 천수사였다. 서쪽의 국청사는 개경의 서쪽 관문으로, 중국쪽에서 오는 사신이나 개선 군인을 맞이하기도 하였으며, 외적의 척후병을 막아내기도 하였다. 충렬왕 즉위년에는 충렬왕과 원 공주를 맞이한 곳이기도 하다. 또한 이곳에서 군대가 주둔하기도 하였으며, 왕이나 관리들이 왕릉에 행차했다가 들러서 머물기도 하였다. 따라서 국청사는 동남쪽의 개국사와 마찬가지로 교통의 거점이지 개경 방어의 요새였다.
한편 개국사보다 더 동쪽에 위치한 천수사는 예종대 창건되었는데, 이곳 역시 개경에서 남쪽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파한집}에서 이인로는 강남에서 개경으로 오는 사람은 반드시 천수사에서 쉬었기 때문에 수레바퀴 말굽소리가 어지럽고 어부와 초동의 피리소리가 그치지 않았으며, 왕손 공자들이 벗을 영접하고 전송할 때는 천수사 문 앞에서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곳에는 조선초에 천수원이 설치되어 개경과 한양을 잇는 주요 교통로가 되었는데, 그것은 이곳이 고려시기부터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이었다. 이곳은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이었다. 이곳에서는 남쪽으로 내려가는 관리들의 전송과 개선장군의 환영이 이루어지고, 남쪽으로 내려갈 군대가 주둔하기도 하였다. 천수사보다는 조금 더 떨어져 있었던 임진의 보통원과 과교원(자제사)도 교통상으로 중요한 곳에 위치한 절이었다. 임진 보통원에서는 죽과 채소를 행려에 제공하였으며, 임진 과교원(자제사)에는 부교를 놓아서 교통의 편의를 제공하였다. 이들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절들은 교통 국방의 기능을 담당하였을 뿐 아니라,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기 때문에 이들 지역에서는 활발한 교역도 이루어졌을 것이다.
한편 문종대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나성의 동남쪽에 창건된 흥왕사는 개경 남쪽의 방어뿐 아니라 이궁의 기능도 했다. 앞에서 지적한대로 창건 과정에 왕의 관심과 왕실재정이 많이 투여되었으며(토지), 또한 창건 후 3년이 지난 문종 24년 6월에는 성을 쌓는 등 다른 절보다 훨씬 많은 공을 들였다. 비록 중기 이후의 일이지만 고종 18년 12월 몽고군의 공격을 받은 것은 이 곳이 개경 남쪽의 요새였기 때문이다. 특히 공민왕 12년 공민왕이 개경으로 돌아오면서 흥왕사에서 묵으려고 했던 것에서 흥왕사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듯 현종 이후 나성 밖에 창건된 국청사 흥왕사 천수사 등은 확대된 개경 곧 4교 지역의 거점이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개경의 동서 10여리 되는 곳에 터를 잡아 좌우 궁궐을 지어서 사방을 순행할 때의 거처로 삼으라는 문종 35년 8월 制의 내용이다. 그런데 그 이후 개경에 이궁이 만들어지는 것은 1174년(명종 4)이다. 따라서 이 때까지는 개경 주변에 이궁이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개경 주위에 임금의 행차가 수시로 머물 거점은 현실적으로 필요하였기 때문에, 결국 개경 서쪽의 국청사나 동남쪽의 흥왕사, 동북쪽의 귀법사·불일사·현화사 남서쪽의 경천사가 이궁의 역할을 하면서 아울러 개경 교외의 거점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추세였다. 그 밖에 이 절들은 주로 왕과 왕실의 시회 연회 사냥터 요양소 등으로도 이용되었다.

맺 음 말

이 글에서는 고려전기 주요 절의 창건시기와 창건위치의 상관관계를 살펴보고, 이를 토대로 고려전기 절의 위치에 따른 절의 기능을 살펴보았다. 이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고려전기 개경 절의 창건 위치는 개경의 중심부에서 점차 사방으로 퍼졌으며, 더 나아가서는 나성 밖으로 나갔다. 이것은 개경이 황성에서 나성, 4郊로 확대되는 과정과 일치한다. 아울러 나성이 들어서면서 나성이 세워지기 이전에 교통과 방어의 거점 구실을 하던 절 대신 나성 밖에 새로 세워지는 절들이 그 기능을 대신하게 되다.
개경 중심부에 위치하였던 봉은사 흥국사 등은 주요 국가차원의 불교행사를 주관하였을 뿐 아니라 궁궐과 관청 기능을 대행하기도 했으며, 정치 공간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태조 후반기에 나성 지역에 창건된 개국사·현성사는 개경의 동남쪽 동북쪽 관문에 위치하여 개경의 안팎을 연결하고 더 나아가서 개경을 방어하는 거점이 되었다. 특히 나성이 축성되기 이전 이들 절이 차지하는 의미는 그 이후보다 훨씬 더 컸을 것이다. 현종대 이후 나성 밖에 창건된 흥왕사 국청사 천수사 등은 확대된 개경의 교통의 거점이자 방어의 요새였으며, 왕의 순행시 이궁의 기능을 하기도 하였다.





개경의 시장과 주거

서 성 호 (외국어대)





머 리 말

어느 시기이든 시장과 주거는 도시 구획상의 중요한 고려 요소이며, 도시 주민의 삶의 형태나 질과 관련하여 중시된다. 전근대 시기에는 이러한 것들이 지배 집단의 이념이나 사회 체제를 반영하면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도시사 연구가 시기를 막론하고 많이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고려시기의 경우, 신라의 왕경 연구와는 달리 기초적인 발굴조사도 이루어지지 못하는 실정이다. 따라서 시대별로 차이는 있지만, 도시 구획의 기본 형태를 규정하는 이념적 기반이나 그 역사성에 대한 검토는 그를 위한 기초 작업 자체가 되어 있지 않은 실정이다. 고려 시기 개경의 시장과 주거 역시 자료나 연구 자체가 아직 초보 단계에 있고, 사실 관계도 밝혀야 할 부분들이 많다. 이 글은 시장과 주거에 대한 몇 가지 사항들과 관련하여 도시사적 관심의 범위로 제한하여 살펴보려 하며, 개경 상업의 유통 구조나, 상인의 존재 형태 등 상업사 일반의 중요한 문제를 직접 다루지는 못하였다.

1. 개경의 시장

1) 시장의 분포

개경의 대표적인 시장은 주지하듯이 시전이다. 시전의 위치는 十字街에서 廣化門으로 뻗은 南大街 좌우 연변이니, 십자가에서부터 광화문 아래 흥국사 남쪽까지 시전 행랑이 건설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이 남대가의 행랑 거리는 바로 대표적인 시장터였던 셈이다. 시전은 남대가에만 있지는 않았다. 다음 기록이 참고된다.

A-1.「楮市橋邊 民家三百餘戶火」(『고려사』53, 오행1 원종 12년 2월 戊申)

楮市橋는 필시 楮市, 즉 紙廛이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즉 지전은 바로 교량이 소재한 곳에 있었다. 문제는 그 교량의 위치이다. 다음 기사가 참고된다.

A-2.「今南大門外 幷城西上稱上紙廛 下紙廛 有橋焉 俗名水陸橋 或稱馬市橋 牧隱詩所云 馬市川邊 空白日是也 其紙廛之名 似起麗時 此卽麗史所謂楮市橋與」(『고려고도징』)

즉 조선후기 개성에는 紙廛들이 위치한 곳에 바로 水陸橋[일명, 馬市橋]라는 교량이 있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 지전이라는 명칭은 고려 시기의 지전에서 유래한다고 하면서 그 곳이 바로 고려시기의 저시교의 위치일 것이라고 하였다. 이로써 보면 A-1의 楮市橋는 수륙교이며, 곧 고려 시기 楮市, 곧 지전은 바로 이 지역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수륙교는 鶯溪가 후대에 건설된 內城안을 흐르다가 성밖으로 南流해 빠져나오는 지점에 놓인 다리이다(『開城全圖』).
楮市(지전) 가까이에는 馬市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松都志』(1648년)에 따르면, 수륙교가 馬前橋, 즉 馬廛橋이라 하였으며, 『고려고도징』에서도 같은 지적을 하고 있다(A-2). 『송도지』는 원래 수륙교로 불리던 곳이 당시에는 馬牛를 거래하는 시장이 되어 있다고 하였지만, 이 곳의 牛馬 거래는 오래된 일인 듯하다. 牧隱의 글에서 고려 당시 개경의 「馬市」가 하천변에 있음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馬廛橋(馬前橋)라는 조선후기의 교량 명칭은 고려 시기 馬市가 하천변에 위치하였던 데서 연유할 것이다. 『고려고도징』에서 牧隱의 시에 보이는 「川邊」의 「馬市」가 곧 마전교라고 한 것도(A-2) 참고된다.
牛馬의 거래가 하천변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개경 뿐만 아니라 조선 시기 한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태종 때 시전 배치에 대한 계획안에서도 牛廛과 馬廛 모두 長通坊 아래 川邊에 위치하도록 하고 있거니와, 실제 조선 후기의 牛廛·馬廛 모두 동대문안 淸溪川邊의 馬廛橋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우마류의 시전이 하천변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배설물의 악취나 그 처리 등 우마류의 특성과 관련한 것으로 보이거니와, 그 하천은 鶯溪와 淸溪川 등 개경과 한양의 도성 한복판을 貫流하는 明堂水인 것도 공통된다. 개경의 경우 牛市의 위치는 잘 알 수 없다.
앵계 주변에는 馬市( 및 牛市)와 함께 豚市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목종 때에 王輪寺丈六金像의 운반에 참여한 「豚市商人輩」들은 돼지를 거래하던 상인들이겠는데, 豚市의 위치와 관련하여서는 「猪橋」가 주목된다. 猪橋는 수륙교를 지나 남대문 남쪽을 東流하는 앵계에 놓인 교량으로서, 앵계는 저교를 지나면 烏川으로 불리게 된다. 오천은 黑川으로도 불리는데, 東流하다가 자하동에서 南流하는 白川과 훈련원터 근처에서 합류하고, 다시 東流하다가 북쪽의 선죽교를 거쳐 남류하는 물과 합쳐져 수구문(보정문 아래쪽)으로 빠져나간다. 蜈蚣山과 용수산에서 발원한 맑은 물의 앵계가 馬市를 거쳐 猪橋를 지나면서 오천(흑천)이라는 白川과는 대조적인 이름의 하천으로 명칭이 달라진 것은 馬市와 猪市로 인한 汚水의 放流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억측된다. 요컨대 豚市, 즉 猪廛은 猪橋 주변에 위치하였다고 생각된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남대가의 좌우 연로 이외에도 시전 지역은 있었다. 즉 남대문 바깥 인접한 지역으로, 도성 한가운데를 貫流하는 앵계의 연변에는 종이류를 취급하는 楮市, 그리고 牛馬와 돼지 등 가축을 매매하는 馬市, 牛市, 猪市 등이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馬市나 豚市(猪市)와는 종류가 다른 楮市가 이 곳에 있는 사실에서 보면 여타 업종의 시전들도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2) 상품

개경의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은 매우 다양한 종류에 걸쳐 있었다. 여기서는 당대 최대 도시로서의 개경의 특성과 관련된 상품을 중심으로 살피려 한다.
무엇보다도 개경은 생산에 직접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이 가장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곳이므로, 이들의 식생활을 위한 상품이 필수적으로 거래되었다. 특히 미곡 수요는 비농업 인구의 다수 밀집으로 인해 매우 컸다고 하겠다. 아울러 미곡류는 단지 양식으로서만이 아니라 布와 더불어 현물 화폐의 기능을 하였던 만큼 상업이 상대적으로 집중 발달한 개경 내에서 매우 중대한 교역 물품이었다고 생각된다. 실제로 시전과 非시전계를 포함하여 미곡류를 거래하는 시장은 상당히 광범하게 분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15세기초 개경 상황을 전하는 다음 기사의 표현을 통해서 짐작된다.

「閭閻萬井 禾嫁(ㅅ. 稼)百廛」(『朝鮮賦』)

萬井은 方百里의 땅, 즉 매우 넓은 지경을 뜻하며, 百廛은 많은 肆店, 또는 넓은 토지를 의미한다. 개경에는 농경지가 적으므로 百廛은 많은 肆店, 즉 점포를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즉 15세기의 개경에서 이루어지는 미곡류 거래를 과장된 修辭로 표현한 것이겠다. 왕경이 아닌 상태의 개경이 이러하므로 시기가 비록 앞서지만 고려 시기 왕경으로서의 개경 역시 미곡류는 중요한 상품의 하나였음은 분명하다. 다만 고려시기에는 아직 미곡의 거래처가 일정 장소로 한정되지는 않고 있어서 조선시기와는 대조를 보인다. 이는 미곡류에 대한 통제가 조선시기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느슨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미곡류와 함께 개경 주민의 일상 생활에 필요한 기초 필수품으로는 채소와 땔감, 그리고 마포나 저포를 중심으로 한 옷감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기초 필수품 외에도 일상 생활에 필요한 물품은 다양한 종류에 걸쳐 있었을 것이다. 예컨대 철로 만든 물품만 하더라도, 솥을 비롯하여 부엌칼, 망치, 못뽑이, 도끼, 가위, 작두, 인두 등 생활 용도에 따라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품목들이 많다. 이러하기에 개경에는 후술하듯이 전문적으로 철제품을 제작하는 鐵匠들의 취락이 있었던 것이다. 철 제품 외에 동합금 제품도 각종 식기류와 佛具류를 비롯하여 다양하였다.
개경의 주민 구성의 특수성을 반영하는 물품으로는 우선 식생활과 관련하여 육류나 과실류를 들 수 있다. 개경 주민의 구성으로 볼 때, 육류 소비율은 고려에서 최고 수준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개경에는 豚市(猪市)나 牛市와 관련이 있는 시전으로서 肉肆, 즉 고깃점들이 있었다. 왕실의 肉膳과 상류층의 식용을 위해 개경에서도 소나 돼지를 宰殺하여 牛肉이나 猪肉을 판매하는 肉肆가 있었던 것이다. 光宗이 罪業소멸을 위해 屠殺을 금하면서 肉膳을 위한 고기 역시 「市廛」에서 구입하여 쓰도록 한 「시전」은 牛肉廛이나 猪肉廛과 같은 肉肆에 다름아니다. 물론 牛肉廛이나 猪肉廛이니 하는 명칭은 기록에 보이지 않지만, 이러한 肉肆의 존재 자체는 명백하다. 그것은 무인정변 이래로 시장에서 가축을 도살하여 그 고기를 파는 무리까지 지방관에 많이 보임되었던 사실에서도 이 점은 확인된다. 이들 고기 파는 무리는 조선시대에 猪肉廛이나 懸房처럼 猪肉이나 牛肉을 파는 肉肆의 상인에 다름아닌 것이다. 지방 貢賦로 지정된 쇠가죽·쇠뿔·쇠근육 등을 平布로 대납할 수 있게 한 것도 사실 이 평포로써 개경에서 쇠가죽 등을 구입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기 때문이며, 이는 바로 牛肉廛과 같은 肉肆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육류 소비와 함께 개경 주민의 계층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과실류의 거래도 들 수 있다. 과실 종류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으나, 신라 촌락문서에서 특별한 관리 대상으로 파악한 잣이나 楸子 등 그 구입을 위해 상당한 경제적 여유를 필요로 하는 것들이 많았을 것이다. 비농업 소비 인구가 많은 개경의 과실류 거래는 국내 어느 지역보다 높은 비중을 차지하였을 것이다. 공물 납부를 보장하기 위한 목적도 있겠지만 국가에서는 백성들에게 특정 유실수의 裁植이 백성에게 「興利」의 원천이 됨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과실류의 상품성을 지적한 것이라 생각된다.
개경 주민의 특수성과 관련하여 물품 소비가 계층성을 띠는 것은 육류나 과실류 소비 외에 화장품이나 견직물류, 장신구류 등 여성들의 사치성 소비품들을 뺄 수 없다. 화장품의 경우 일부 품목은 후술하듯이 직접 개경 내에서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취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견직물류도 다른 지역에 비해 개경의 수요가 컸다고 보겠다. 이에 부응하여 중국으로부터 수입도 많이 되었지만, 綿紬류와 같이 상대적으로 低價의 견직물은 후술하듯이 도성 인근에서 이를 생산하는 전문 취락이 있을 정도였다. 장신구류는 그 재질이 다양하거니와, 예컨대 금박제품을 만들어 생계를 이어가던 사람들도 있었던 사실에서 그에 대한 개경 주민의 수요룰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 밖에도 고급 주택이나 사찰건물을 위한 기와류, 모자와 가죽신을 비롯한 피복류, 방서·방한구, 조명구 등 일반 농촌 지방과는 다른 도시 주민의 수요품의 종류가 매우 다양하였다.
개경은 행정의 최고 중심지였고, 그만큼 공적 인원들이 밀집 거주하는 곳이었다. 이러한 사정과 관련된 상품들도 있었다. 문방구류는 그 대표적인 것이다. 품관이나 서리 등은 그들의 公務 수행은 물론, 사적인 용무에서도 문방구류는 절대적인 필수품이라 할 것이다. 개경에서는 이러한 문방구류의 수요가 컸던 만큼 개경 시장의 주요 상품으로서 많이 거래되었고, 다른 어떤 지역에서보다 쉽게 구득할 수가 있었다.
개경의 특성과 관련된 상품으로는 酒類 자체와 음주 및 유흥 공간의 제공이라는 일종의 써비스도 포함된다. 음주 공간을 제공하는 것으로는 京市署 관할하의 官妓를 거느린, 公營의 것이 있었다. 이와 함께 민간에서 운영하는 民營(私營)의 것도 있었다고 여겨진다. 예컨대 「酒家」로 불리는 곳은 公營의 시설에 대한 표현으로는 잘 맞지 않은 듯하다. 「酒家」에 倡妓 즉 기생과 같은 자들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창기와 술이 함께 제공되는 곳이 개경에 있었을 개연성은 크다. 조선 후기 한양의 「野戱」의 주인공 「唐女」는 고려시기에 예성강 어구에 「來居」하던 「中國倡女」라 한다. 자료 비판을 해야겠지만, 이는 고려 시기 대내외 교역의 요지이던 예성강 주변에서 民營의 色酒業이 번성하던 상황에서 유래한 口傳으로 본다. 대개 이러한 업종은 일정한 점포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데, 개경 도성 내에서도 적지 않게 있었을 터이다.
이러한 써비스로는 茶 그 자체와 喫茶 공간을 제공하는 「茶店」도 있었다. 기록에는 이곳에서 망연히 午睡를 즐기다 깨어나는 詩人의 소회가 그려지고 있다. 이러한 「茶店」이라면 역시 관부에서 설치·운영하는 것이라기보다는 民營의 점포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酒家」나 「茶店」도 시전이라고 해야 할 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3) 점포

개경 시전의 명칭, 즉 市名은 그것이 판매하는 물품의 종류에 따라 붙여졌다. 그것은 앞서 본 楮市, 馬市, 豚市, 猪市, 그리고 油市 등에서 알 수 있다. 이처럼 판매 상품의 물종에 따라 시전 명칭이 붙여진 것은 조선 시기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시전의 명칭이 판매 물종에 따라 붙여졌음에도 그 판매 물종은 개별 시전 점포에 게시되지는 않았다. 다음 기사가 참고된다.

B.「京市署請 板寫各市名 幷畵販物其下 掛於各所  不相雜」(『태종실록』권5 3년 1월 戊午)

기사 B는 한양 천도 8개월 前 京市署의 건의 내용이다. 이에 따르면 시전의 市名을 板에 쓰고, 그 販物도 그 市名 아래 그림으로 그려서 내걸도록 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개경의 시전 점포들은 市名을 외부적으로 알 수 있게 간판 등으로 게시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 대신 각 점포에 고유한 商號가 있어서 이를 밖으로 게시하였을까? 통설은 다음 기사에 따라 점포마다 고유한 상호가 있었다고 본다.

C.「王城本無坊市 惟自廣化門至府及館 皆爲長廊 以蔽民居 時於廊間 榜其坊門 曰永通 曰廣德 曰興善 曰通商 曰存信 曰資養 曰孝義 曰行遜 其中實無街衢市井 至有斷崖絶壁  莽繁蕪 荒墟不治之地 特外示觀美耳」(『고려도경』권3 城邑 坊市 )

즉 廣化門∼府及館에 長廊이 있고 이 길의 「坊門」에는 永通, 廣德, 興善, 通商, 存信, 孝義, 資養, 行遜 등의 名號가 쓰여 있는데 이것이 바로 시전의 상호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廣化門∼府及館 거리의 長廊을 시전의 장랑으로 본 데서 비롯된 결론이다. 이들 명호를 상업 지구의 명칭으로 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廣化門∼府及館 거리는 광화문에서 동쪽으로 관부와 客館을 향하여 뻗은 도로로서, 십자가에서 북으로 廣化門을 향해 뻗은 南大街와는 다른 길이며, 따라서 이 곳의 장랑도 시전의 장랑과는 무관하다. 따라서 이들 명호는 상호가 아님이 분명하며, 外觀을 위한 건조물이라는 徐兢의 실지 판단이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남대가나 앵계 주변 시전 점포에 각기 고유한 상호가 있었다면 적어도 『고려도경』에는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점포 고유의 상호가 존재하였다면 그 자체로 고려시기 도시 상업의 흥미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일례가 되겠으나, 이를 확인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 존재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시전 점포의 외양과 관련하여 모든 시전의 점포가 행랑과 같은 시설물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馬市나 牛市, 猪市 등 가축 거래 시전은 그 성격상 하천변의 空豁地에 있어서 특별한 점포 시설이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동일 시명에 해당하는 시전이 여러 곳이었는지, 오직 한 곳인지가 문제이다. 조선시기의 경우 원칙적으로 「一物一廛」의 형태였다고 한다. 즉 쌀이나 어물, 實果와 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하나의 물종에 여러 개의 점포가 공인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선이나 고려시기 모두 하나의 물종을 판매하는 시전 점포가 원칙적으로 1개였는지는 의문이 있거니와, 고려시기만 보면 상인들의 집단성을 시사하는 일부 기록들이 있어서, 같은 물종을 취급하는 시전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특정 상인이 운영하는 1개의 점포로만 한정되지는 않았던 것이 아닌가 한다. 다음의 기록들을 보자.

B-1.「其古老所傳 章章播在人口者 則方丈六之入于寺也(목종대) 以大車載之 輓者無慮百萬人 塡咽道路 有豚市商人輩 亦發隨喜心 倂力推 」(『동국이상국집』권25 記  文 雜著 王輪寺丈六金像靈驗收拾記)
B-2.「史臣權敬中曰 自庚癸政亂以來 市井屠沽蹶張之伍 濫側外寄多矣」(『고려사절요』권13 명종 16년 8월)

기사 B-1은 목종 때에 주조된 장륙금상과 관련한 傳言인데, 이에 따르면 장륙상을 만든 후 왕륜사로 가져가는 과정에 「豚市商人輩」들이 「隨喜心」을 발휘하여 수레 미는데에 함께 참여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豚市商人輩」는 豚市의 상인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이는 개경 시내에서 돈시를 맡아보는 상인이 하나가 아니며, 곧 돈시 자체가 2개 이상인 것을 시사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기사 B-2는 무인 정변 이후 시장에서 가축을 도살하고 그 고기를 판매하는 상인들과 활쏘는 군졸들이 지방관에 보임되는 것이 많았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市井屠沽」는 물론 여러 업종의 상인들을 의미하는 일종의 비유법으로 쓰였겠으나, 그만큼 육류 판매에 종사한 상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나온 표현이기도 할 것이다. 업종에 따라 일률적이지는 않겠지만, 이러한 사례로 보아 동일 업종 시전의 점포도 2개 이상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한다. 다만 그런 경우에도 상인들이 어느 정도 조직화된 모습을 보였는지는 잘 알 수 없다.

2. 개경의 주거

1) 신분과 주거

개경에서의 주민들의 주거 생활에 대해서는 이를 신분에 따라 엄격히 통제하였다는 것이 통설이었다. 즉 신분별 주거 통제론이라 할 수 있는 이같은 이해는 개경의 성곽을 직접 답사를 통해 조사한 연구에서 비교적 구체적으로 제시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궁성·황성을 중심으로 길을 내고, 높은 성벽과 넓은 길, 장랑 등으로써 주민과 봉건 통치배들의 구역을 엄격 구분하였다고 한다. 또 1208년에 광화문-십자거리에 이르는 북부 거리의 좌우에 1008동에 달하는 통치계급의 집을 지었다고 하였다. 궁성·황성과 넓은 길, 장랑 등이 어떤 식으로 주민과 지배층의 주거를 엄격히 나누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으며, 1208년에 지었다는 1008동의 건물은 지배계급의 집이 아니라 시전 행랑이다. 이후에도 개경 주민의 주거에 대해서는 특별한 근거 없이 신분별 통제론이 인정되었다.
개경 주민과 신분의 관계에 대해서 그 결론부터 말하면 신분에 따른 주거의 통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주거에 대하여 그 주민의 신분에 따른 일상적인 주거 통제가 법제화된 것이 없을 뿐더러, 실제로도 신분별 주거 구분의 모습은 확인되지 않는다. 구체적인 주거 사례를 남긴 것이 대부분 품관층이어서 당시 대표적인 지배신분층의 주거와 일반 민의 주거를 비교할 수 있는데, 근래에 이를 통해 신분별로 주거가 엄격히 구분되지 않았음이 지적된 바 있다. 같은 결론을 뒷받침하는 사례들이 더 있어서 함께 소개한다.

① 東部 弘仁坊 …형부상서 盧卓儒 //民 勤孝
② 西部 香川坊 …정당문학 金 //民家
③ 南部 鶯溪坊 …海州牧使 庾自  , 上洛公 金方慶//民戶百餘家
④ (北部)「闕東」(만월대 동쪽) …侍中 王 , 前 政 金正純, 平章事 庾弼, 樞密院副使 金巨公// 民家 50여區
⑤ 東部 靈昌坊 孝子里 …典理判書 金光載// (復戶 대상 戶)

사례 ①·②·③·④는 품관층, 그것도 최고위급 품관층과 일반 민의 주거가 坊 단위로 구분되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⑤는 개경 행정 구획의 최소 단위인 里 단위로도 두 신분층의 주거가 전혀 구분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지배신분층과 일반 주민의 주거를 엄격히 구분·통제하는 원칙과 현실은 모두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주거에 대한 통제가 무당에 대해 특정한 이념적 목적 하에 이루어지는 경우는 있었다. 주지하듯이 고려 중기부터 무당의 성외 추방 조치들이 취해지는데, 이는 淫祀성행에 따라 유교적 입장에서 취해진 일종의 주거 박탈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무당들은 추방 당시 이외에는 대체로 일반 민들, 심지어 품관들과도 이웃하며 巫業에 종사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도성 내의 많은 巫覡 수요를 무시한 한 채 도성 내 주거를 박탈하는 것은 유교적 가치가 일방적으로 규정성을 지니지는 못하는 고려 사회의 분위기에서는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주민의 주거는 기본적으로 통제되지 않았다. 아울러 주거의 변경도 주민의 자유 의사에 의해 이루어졌다. 즉 매매와 借屋이라는 경제적 관계에 의해 주거는 언제든지 변경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민의 주거가 항상 안정적으로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신분제 질서 하의 고려 사회에서 권력은 주거를 위협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특히 왕실은 필요시에 타인의 주거를 언제든지 박탈할 수가 있었다. 의종 때에 離宮과 亭子를 조성하면서 많은 재상급 벼슬아치의 私第와 民家를 수용한 일은 이를 보여준다. 무인집정들처럼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들도 비록 불법적이지만 별다른 장애없이 타인의 주거를 박탈할 수 있었다. 이의민이 자신의 집을 짓기 위해 다수의 「民居」를 점탈한 것이나, 최충헌이 역시 私第 건설을 위해 남의 집 백여채를 수용한 일은 좋은 사례이다.
권력에 의한 주거의 위협은 가옥 매매시의 불평등한 거래 관계로도 나타난다. 비록 겉으로는 매매라고 하는 경제적 거래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사실은 훨씬 낮은 가격으로 가옥의 매매를 강요하는 것이 그것이다. 무인 집권층의 한 사람인 鄭存實이 紅 工 彦光의 집을 契約價의 3분의 2만 지불하고 차지하였던 일은 그 좋은 예이다.

2) 산업과 주거

개경 주민의 주거에서 신분에 따른 통제는 찾을 수 없었으나 다른 어떤 요인이나 경향성은 찾아질 여지가 있다. 개경의 주거지에 대한 발굴 성과가 거의 없고 주거 사례에 대한 기록들도 많지 않아 자세한 특징을 논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현재의 자료 수준에서 대략적인 윤곽을 보기로 한다.
우선 특정 부문 수공업에 전문적으로 종사하는 취락이 있었다. 조선후기 지도에는 십자가에서 보정문(장패문)으로 가는 관도의 남쪽 지대에 水鐵里가 보이는데('朝鮮陵墓分布圖'), 이는 바로 수철제품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鐵匠들이 많이 살던 취락일 것이다. 『숭람』에 「水鐵洞」이라 한 것이 그것일 것인바, 李齊賢의 私第가 있는 「鐵洞」일 것이다.
또 남대문 바로 동쪽 楓橋(烏川) 옆에는 조선시기 당시에 小闊洞♀花井里로 불리는 취락이 있는데, 이 곳에서 고려 당시에  脂를 제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 五冠山 아래 綿紬洞과 靈通洞도 서로 지역한 취락으로서 綿紬류의 직조와 浣布를 전문으로 하는 수공업 전문 취락이었다.
이처럼 철제품이나 화장품, 직물 등의 생산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특정한 취락에 집중 거주하고 있었던 것은, 그만큼 개경 주민에 의한 해당 생산물의 수요가 집중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른 업종의 경우에도 이러한 수공업 취락이 있었을 가능성을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개경의 주거에서 가장 큰 특징으로 간취되는 것은 상업과의 관련성이다. 무엇보다도 시전을 중심으로 한 시장 지역은 밀집 주거 지역으로 나타난다. 다음은 기록들은 시장 지역의 밀집된 주거를 보여주는 화재 사례이다.

·「京市署火 延燒一百二十戶」(『고려사』권53 五行1 火 문종 5년 2월 계사)
·「祭器都監藥店兩司樓門及市巷民家六百四十戶火」(동, 선종9년 3월丙辰)
·「市廛火 延燒民戶數十家」(동, 인종22년 11월 丙寅)
·「市街南里數百家火市街南里」(동, 고종23년3월 庚辰),
·「楮市橋邊民家三百餘戶火」(동, 원종 12년 2월 戊申)
·「 店洞一千餘戶 」(동, 충렬왕2년 윤3월 庚子)

위 사례들은 모두 市街에 가호들이 밀집하여 화재 발생시에 많은 집들이 延燒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지역의 주민의 대다수는 역시 시전을 중심으로 여러 형태의 상업을 경영하는 상인들일 것이며 이들을 보조하는 인원들 역시 상당수에 이르렀을 것이다. 말하자면 직장과 주거가 일치하거나 매우 근접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자신의 생업과 직결된 주거 형태로서 매우 당연한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주거 양태가 상업과 상당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비단 상인들이나 그와 연결된 유휴 인력들만은 아닌 것 같다. 품관층의 주거 사례를 보면, 전반적으로 시장이 있는 상업 지역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양상을 띤다.
품관층의 주거 사례는 80개 가까이 찾아지는데, 그 가운데 洞·里 수준으로 지역 비정이 가능한 것은 대략 29개이다. 나머지 사례는 그것이 속한 部와 坊을 알 수 없는 것들도 있고 또 많은 경우는 坊 단위까지만 알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개경의 도시구획은 條坊制나 그에 준하는 형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따라서 坊 수준에서의 주거 분석은 큰 의미가 없으며, 일단 동·리 단위로 확인되는 29개 사례를 보기로 한다. 전거는 생략하고 동·리와 사례 數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闊洞, 大闊洞, 八字洞(蘿 山 ≠빙고동 북쪽의 八字洞) 등 -- 3
·崇陽書院, 花園 동쪽(자남산 東) -- 5
·太平館址, 太平橋 南, 良 洞(落星洞 ; 태평관 西) 등 태평관 부근 -- 6
·妙蓮寺 부근 -- 1 ·善竹橋 부근 -- 3 ·南山(용수산 북) --1
·水鐵洞(낙타교-수구문 방향 官道 남쪽의 철로 중간 지역) --1
·용수산 동쪽 --1 ·不朝峴 일대 --1 ·郭莊洞 --1
·左倉洞 --1 ·柳洞 --1
·紫霞洞 --1, ·政丞洞[梨井里] --1 ·성균관(조선) 지역 --1 ·영창방 효자리 --1,

품관층의 주거는 이상에서 보듯이 여러 지역에 분포하고 있지만, 대체로 상업 지역과 비교적 가까운 곳들이 많았다. 이를 어떠한 의미로 보아야 할지는 아직 연구가 필요하지만, 분명한 것은 고려시기의 품관층의 주거가 상업 지역 자체 또는 그에 매우 인접한 지역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상업 지역이나 그 인접 지역에 대한 주거의 경향성은 원간섭기 고위 관원들의 행태를 전하는 기록에서 그 단초가 읽힌다. 이제현은 都評議使司 관원들의 주된 화제거리가 「閨房夫婦之事」와 「市井米鹽之利」였다고 적고 있다. 이같은 관원들의 모습은 매우 개인적인 욕구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어서 더욱 흥미로운데, 상업 이익에 대한 이러한 관심이 그냥 관심으로 그치지는 않은 것 같다. 李穡이 전하는 당시 사회의 일단은 그래서 주목된다. 즉 借屋을 무릅쓰는 주거 이동이 빈번하고 이것이 결국 富의 확대로 이어지는 것이 일반화된 추세인 것이다. 상업 이익에 대한 예의 도평의사사 관원들의 관심과 개인적 지향은 실제 주거 이동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富의 축적을 위해 借屋까지 마다않는 이러한 품관층의 주거 이동이 주로 시장 지역을 겨냥한 것임은 무인 집권층의 행태에서도 간취된다. 최충헌이 다른 사람의 집 백여가를 수용하면서까지 지은 私第는 闊洞에 위치하는데, 이 곳은 바로 남대가 市廛 행랑 거리의 바로 남쪽이며, 앞에 보았듯이  脂를 생산하던 취락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결국 이러한 私第 건설은 그 위치로 보아 희종4년의 시전장랑 개축과 함께 시전에 대한 통제·감독을 통해 私兵 등 정권 기반 유지 위한 재원 확보를 노린 것으로 해석된다. 무인 집권층의 시장 지향은 주거에 대한 강제적 廉價 매입에서도 나타난다. 앞에서 무인집권층의 정존실이 紅 工의 주거를 廉價로 뺏다시피 하였던 것도 결국은 工商의 부류가 거주하는 시장 지역의 경제성과 관련될 것이다.
이와 같은 품관층의 시장 지향성은 비단 무인집권층이나 상대적으로 상업 발전이 이루어진 고려 후기에 국한된 현상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고려 전기부터 「市朝」지역 거주는 개인의 家勢개선을 위한 재산 증식의 방도로 인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다음 기록이 참고된다.

「…公天性介潔 不□衆□家于東郭僻遠之地 不事生産 諸子請買第宅 稍近市朝 夫人又謂 子孫欲及平時頗立産業基址 獨奈何不爲 意乎 公答曰 以其負郭窮卷 本无資儲 不爲亂兵所掠 安用近於市朝 且多財則怠於爲善…」(『高麗墓誌銘集成』 咸有一墓誌銘)

咸有一의 주거는 「東郭僻遠之地」, 즉 도성 동쪽의 궁벽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주거 위치는 「生産」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의 아들들이 「市朝」가까이 집을 사서 옮기고자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조건을 벗어나서 「立産業基址」, 즉 집안의 경제적 기반을 세우기 위한 것이라 한다. 「近於市朝」가 곧 「多財」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함유일의 경우 특별히 청렴검속한 인품으로 인해 이와 같은 기록이 남겨지게 된 것이겠지만, 이로써 일반 품관들이 「生産」과 「多財」와 관련하여 「市朝」인접 주거를 강하게 지향하고 있었음을 살필 수 있는 것이다. 상업 지역에의 인접 주거가 상업적 이익과 연결될 수 있는 구체적인 과정과 환경에 대해서는 별도의 고찰이 이루어져야 하겠으나, 그 상관 관계는 분명히 읽을 수가 있는 것이다.

맺 음 말

본문에서 살핀 내용 가운데 특히 시장의 분포와 주거 양태에 관련하여 나름의 생각을 개진하려 한다. 고려 시기 개경 시장의 분포 양상은 坊市制 하에서 시장과 民居 엄격 구분하는 唐의 도시구획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십자가에서 광화문 아래 흥국사까지 이어진 남대가 이외에 남대문 밖 십자가에 가까운 앵계 연변에도 시전이 존재하였거니와, 이는 주작대로를 사이에 두고 각기 方形의 東市·西市가 대칭을 이루며, 역시 방형으로 구획된 일반 주거지와 구별되는 것과는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 점에서 볼 때, 최근 條坊制的 도시 구획이라는 주장이 유력한 신라 王京의 경우와도 비교 검토가 요청된다. 현재로서는 慶州의 경우, 문헌 기록상으로 통일 전의 「東市」, 통일 후의 「西市」·「南市」 등이 확인되고, 이를 문자상으로 해석할 때, 조방제의 도시 구획 속에서 역시 중국의 방시제에 유사하거나, 적어도 상당한 공간적 통제가 예상된다. 만약 그러하다면, 개경의 五部坊里 구획이 당·신라의 조방제적 형태와는 크게 다른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서 두 사회 간의 성격 차이가 있는지에 대한 검토의 필요성도 제기될 수 있다. 예컨대 條坊制와 엄격한 坊市制的 도시 구획의 사회로부터 그렇지 않은 사회로의 이행이라는 면을 상정한다면, 이는 사회 자체가 조방제와 방시제의 외적 형태에서 유추되는 人身에 대한 엄격한 파악·지배 단계(노동력 중심 단계)에서 그러한 점이 상대적으로 이완되고, 토지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제고되는 사회로의 진전이나, 폐쇄적 혈연집단이 지배하는 세습귀족의 사회로부터 개인적 능력이 중시되기 시작하는 士大夫의 사회(과거 관료), 또 그러한 변화 속에서 전반적인 개방성이 확대된 사회로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을 수 있다.
주민의 주거 양태도 이러한 변화와 관련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인간의 노동력과 그 혈연적 신분에 의한 규율이 엄격한 사회에서 지배층의 모집단이 확대되고 사람들의 결속 양태에서 혈연의 요소가 상대적으로 감소하게 되므로, 도시 구획에서 주민의 주거에 대한 신분별 통제의 조건이나 필요성은 감소하였을 것이다. 고려의 왕실이나 지배 관료 집단 자체가 본시 신라의 왕실이나 세습귀족과는 다른 출자를 가지고 있다. 또 그들의 유교적 정치 이념 또한 주자성리학이 지배하는 조선 시기에 비해 상당한 차이를 가지고 있으며, 상업에 대해 비교적 개방적인 입장의 불교나 고대 이래의 사유 체계와 갈등이 적은 편이다. 이러한 것들을 포함하여 주민의 주거 양태도 여러 면에서 깊이 있는 고찰이 요구되며, 특히 신라나 조선시기의 연구도 중요하다고 하겠다. 나아가 시장이나 주거 양태 모두 중요한 도시 구획 요소이므로, 궁궐 등 여타의 도시 구성 요소들과 더불어 총체적인 관점에서 연구가 이루어질 때, 고려 시기 도시 구획의 이념의 존재 여부나 그 경향성을 구명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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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은 태조 2년(919)에 고려왕조의 수도로 자리잡은 이후 江都 30여 년을 제외한 500년 가까이 국가 운영의 중심지인 동시에 생활공간이었다. 따라서 개경은 모든 고려사 연구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얼마 전에 치러진 성대한 '서울 정도 600주년 기념 행사'나, '1000년의 역사를 지닌 경주'에 대한 관심도와 비교해 보면, 개경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단편적이거나 기초적인 연구수준에 머물러 있는 실정이다. 이것은 개경이 조선 건국으로 몰락의 길을 겪었기 때문이며, 특히 한국전쟁 이후 북한 지역에 속하게 된 데에서도 연유할 것이다.
개경은 자연환경적으로 풍수지리설을 이용하여 건설되었고, 궁궐·태묘·사직 제도 등은 중국 도성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조선의 한양 건설에 영향을 미치고 있어 그 역사적 의의가 주목된다. 따라서 이에 대한 연구는 중세 도시사적 관점에서 우리 나라 중세사회를 이해하는 데 많은 단서를 제공할 수 있다.
개경에 대한 연구는 시기적으로 약 500년을 다루며, 정치·사회·경제·문화 등 다양한 방면을 종합적으로 연구해야 하는 만큼 광범위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대한 사료로서 현존하는 것이 적고 현지 답사도 행할 수 없는 실정이며, 기존 연구 성과도 매우 부족하다.
개경에 대한 직접적인 연구로는 이병도·고유섭·박용운·전룡철과 일본의 일부 학자 등의 연구 성과가 있다. 이 중에서 이병도·고유섭의 연구는 해방 이전 실제 답사와 고증을 통한 연구로 매우 중요하지만,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연구 성과로 보기는 어렵다. 전룡철의 연구는 해방 이후 북한에서 실제적인 지표 조사를 통한 것인 만큼 구체성을 띠고 있지만, 그 연구 분야가 한정되어 있다. 최근 박용운이 지금까지의 연구를 종합하는 연구성과를 내놓아 많은 참고가 된고 있다.
이외에도 개경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언급한 연구성과가 있지만, 대개는 개별적이고 분산적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개경에 대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연구가 필요하며, 특히 도시의 기능적인 면에서 개경이 다른 시기의 수도와 비교하여 어떤 다른 특성이 있는지를 검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개경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기초자료의 정리 및 효율적인 이용, 이를 통한 개경의 각종 시설물의 위치 비정과 복원작업이 필요하다. 이를 위하여 {고려사} {고려사절요} {고려도경}을 비롯한 각종 문집, 후대의 각종 자료를 수집 정리하여 자료집을 발간하고, 이를 이용하여 개경의 시설과 영역에 대한 복원지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 개경의 지명·구역·시설·영역·풍속 자료를 바탕으로 행정체계·경제(수취)구조·도시구조와 시설·문화 등을 조망하여 역사 도시로서의 구조와 기능을 종합적으로 규명하는 것은 앞으로의 과제가 될 것이다. 이것들은 중세도시 개경의 위상을 살펴볼 수 있는 내용들이다.
우리 '개경사연구반'은 위와 같은 과제를 안고 지난 3여 년동안 개경과 관련된 자료들을 정리하는데 노력해 왔다. 그 결과 개경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은 연구사를 이미 정리하였다(1999 [고려시기 개경사 연구동향] {역사와 현실} 34). 그런 가운데 개경 연구에 대한 접근 방법을 새롭게 강구하게 되었고, 우선적으로 다음과 같은 연구과제를 세우게 되었다.
첫째, 경기제도 안에서의 개경의 위상과 그 행정 체계이다. 이는 고려 시대 경기제의 성립 과정과 역사적 의의를 조명하는 것으로 개경의 역사적 위상을 살펴보는 것이다. 또한 개경 내부의 도시 구획은 어떻게 되었는지를 검토하는 것인데, 이는 개경의 오부방리제의 구획과 변화과정을 체계적으로 검토하고자 하는 것이다. 둘째, 개경의 내부 구조와 시설이다. 그 대상으로는 성곽·궁궐·사찰 등을 들 수 있다. 개경의 건설 과정을 성곽을 중심으로 살펴봄으로서 개경의 범주와 규모를 이해하고, 궁궐과 관아 등을 통해서는 고려의 국가적 위상 내지는 지향성을 알아보게 될 것이다. 사찰에 대해서는 종교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그 위치의 비정과 정치·사회·경제 등 그 기능적인 면에서의 의미를 종합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셋째, 상업 도시로서 개경의 면모를 주목하고자 한다. 개경의 시장 구조와 상업의 존재 형태, 그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 거주지를 살펴보는 것은 생활 공간으로서의 개경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제 그 동안의 연구결과를 [고려시대 개경의 구조와 기능]이라는 공동주제로 발표회를 갖게 되었다. 한 번의 공동 연구로 '개경사'에 대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연구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우리들은 개경이 사라진 도시가 아닌 전통시대의 도시를 새롭게 부활시키는데 계속 노력할 것이다. 분단의 고착화로 가지 못하는 땅으로 인식되었던 고려 왕조의 개경은 '600년 고도 서울'이나 '1000년 고도 경주'에 비하여 절대적으로 관심이 부족한 실정이다. 바람직한 개경사 연구를 위해서는 개경 지역을 직접 답사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러한 작업은 남북상호 학술교류의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통일의 밑거름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머지 않은 장래에 개경을 답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開京의 城郭整備 -皇城을 중심으로-

신 안 식 (명지대)





머 리 말

동아시아에 위치한 우리 나라는 중국 또는 북방민족과 오랜 동안의 투쟁을 벌이면서 살아왔다. 때문에 이들과의 투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효과적인 방어수단을 강구하게 되었고, 그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 築城이었다. 특히 수도는 정치·교통·군사·상공업 등 국가 운영의 중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규모 역시 都城으로서의 권위와 실제적인 기능성이 아울러 고려되었을 것이다.
고려시대의 開京은 宮城 ― 皇城 ― 羅城의 성곽체제로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이것에 관계된 자료는 매우 적어서 그 추정조차 어렵고, 따라서 연구성과 역시 적은 편이다. 이는 물론 성문의 명칭 정도만 소개된 자료의 한계성과 직접 발굴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경과 관련된 古地圖, 일제시기의 개경관련 지도와 고유섭의 답사기, 그리고 1980년대 북한의 연구성과 등이 그나마 개경의 윤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이를 토대로 최근에 朴龍雲은 개경의 시설·구조·행정·기능 등 종합적인 이해를 시도했고, 細野涉은 나성 성문의 명칭과 위치 등을 연구하는 가운데 그 윤곽을 복원해 보려고 하였다. 또한 건축사 분야에서도 개경 성곽에 대한 언급은 있었지만 위의 성과를 뛰어넘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 연구 성과는 개경 성곽의 윤곽과 성문의 명칭에 대한 차별 혹은 그 위치에 대한 관심을 주로 보여준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개경 성곽에 대한 도식적인 이해를 시도한 것이고, 그 기능적이고 국가 중심의 상징적 측면에 대한 이해는 미진하다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는 개경의 성곽 중에서 황성을 중심으로 그 구조적인 일면을 이해하고자 한다. 내용에서 주로 언급되는 시기가 태조대로부터 현종대에 집중된 것은 개경의 도성으로서의 권위와 기능성이 현종 20년 나성의 완성으로 재정비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 高麗前期의 築城

고려 건국을 전후한 시기의 대내외적인 상황은 새로운 사회의 성립을 위한 커다란 혼란이었다. 즉 대내적으로는 나말려초의 격심한 사회혼란을 겪고 있었고, 대외적으로는 당송교체기 중국사회의 변화와 발해 멸망이후 거란 등 북방세력의 새로운 위협 등이 태동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고려사회는 나말려초의 혼란을 점차 극복하면서 국가의 기틀을 갖추어갔다. 그러나 대외적인 위협은 동아시아에서 살아왔던 우리 역사의 커다란 과제였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평화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던 것으로, 이는 강력한 방어수단을 바탕으로 할 때 가능한 것이었다.
태조 왕건의 아버지 세조(王隆)가 궁예에게 송악의 勃禦塹城을 쌓게 했던 이유는 朝鮮·肅愼·卞韓 지역을 평정하려는 목적이었다. 이것은 비록 圖讖을 근거로 하였지만, 이후 고려 도성의 모태가 되었다. 그리고 태조대로부터 평양을 西京이라 하여 중요하게 다루었던 것과 북방 지역에 많은 성곽이 쌓여지는 것도 도성의 방어가 주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많은 외침 가운데 도성이 점령당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이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도 중요 지역의 성곽을 통한 방어력의 집중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고려의 성곽에 대해, "朝廷에서 간간이 사신을 보내어 그 나라를 무마하기 위하여 그 地境에 들어가면, 성곽들이 우뚝우뚝하여 실로 쉽사리 업신여길 수 없다."라는 기록을 통해서 그 실상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개경은 현종 20년 나성이 완성되기 이전에는 군사적으로 불리했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현종 즉위년에 나성 축조를 논의하였지만, 나성 축조가 거란의 개경 점령을 경험한 이후 현종 11년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따라서 궁성과 황성으로 이루어진 고려초기의 개경은 북방 지역의 방어력에 의지하였다고 할 수 있다.
성곽은 유사시에 수도·촌락·주민·경작지 등을 보호할 수 있는 시설이었다. 그 위치와 구조는 도시·군사적 기능이 고려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려전기에는 동아시아 정세의 변동 및 거란과의 긴장관계를 전후해서 대대적인 축성사업이 이루어졌다. 기록상으로 확인해 볼 수 있는 성곽 사례로는 태조대 30건, 정종대 7건, 광종대 13건, 경종대 1건, 성종대 9건, 목종대 13건, 현종대 20건 등이 새롭게 축조 혹은 수축되었다.
특히 개경 이북 지역의 성곽은 북방세력의 침략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들의 침략 예상경로는 이 시기의 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고려전기의 거란은 성종대로부터 현종대까지 대대적인 고려 침략을 감행하였다. 이들은 압록강을 넘어 '西北界 南路·北路'를 이용하여 고려 지역으로 들어왔다. 서북계 남로는 保州(義州) ― 興化鎭 ― 靜州 ― 龍州 ― 鐵州 ― 通州 ― 定州 ― 嘉州 ― 博州로 통하는 길이고, 서북계 북로는 保州(義州) ― 天摩 ― 龜州 ― 蓬山 ― 泰州 ― 博州로 통하는 길이었다. 이 두 경로를 통하여 安北府(安州) ― 肅州 ― 順安 ― 西京 ― 黃州 ― 鳳州 ― 金川 ― 開京으로 내려오거나,  安北府 ― 順川 ― 慈州 ― 江東 ― 遂安 ― 新溪 ― 開京으로 내려오는 방법이 있었다. 이들 경로는 이후 무인집권기의 蒙古軍과 고려후기 紅巾賊의 침략에서도 이용되었다.
따라서 태조대로부터 현종대까지 축조된 대부분의 성들이 북계·동계 지역에 위치하였던 것이다. 그 성곽은 단일 성곽 혹은 重城을 쌓아 二重城 구조로 이루어졌고, 城門·水口·城頭의 시설을 갖추었으며, 그 외곽에 遮城 혹은 堡子 등을 두어 主城을 보호하였다. 이러한 성곽구조는 도성과 기타 지역의 성곽 구조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開京은 宮城 ― 皇城 ― 羅城, 西京은 宮城 ― 皇城 ― 羅城, 그리고 江都는 宮城 ― 中城 ― 外城의 三重城으로 이루어졌다. 靑州는 內城 ― 羅城, 그리고 和州·龜州·麟州·靜州鎭은 重城 ― 外城의 二重城으로 이루어졌다. 그 밖의 州縣의 성곽은 단일 성곽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2. 開京의 皇城

고려전기 대대적인 북방 지역의 축성사업이 벌어졌던 반면 정작 도성을 정비하는 데에는 소홀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고려사} 兵志의 城堡條를 보면, 고려초기에 도성을 쌓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태봉의 성곽을 그대로 이용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낳게 한다. 개경 성곽의 역사적 유래는 신라 효소왕 3년(694)에 축성된 이래로 성덕왕 12년(713)의 축성, 896년 궁예의 명령으로 왕건이 쌓은 勃禦塹城, 고려 현종 20년(1029)의 나성 등의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개경의 지형은 북쪽에 天摩山(782m)·國師峰(764m)·帝釋山(744m), 동북쪽에 華藏山(563m), 동남쪽에 進鳳山(310m), 서북쪽에 萬壽山(228m) 등이 외곽지대를 둘러싸고, 북쪽의 松嶽山(489m)에서부터 남쪽의 龍岫山(177m)으로 연결되는 구릉들이 서로 연이어져 있다. 따라서 개경의 성곽은 이러한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궁성 ― 황성 ― 나성으로 이루어졌다. 나성이 수도의 군사적·기능적인 면을 보완한 성곽이었다면, 궁성과 황성은 초기 도성의 방어적·상징적·기능적 의미를 모두 내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 황성의 존재

개경의 궁성은 正宮인 本闕(本大闕·滿月臺 등으로도 불림)과 기타 국왕과 관련된 여러 시설들을 둘러싼 것이었다. 궁궐은 태조 2년 철원에서 개경으로 천도했을 때 태봉국 궁예의 궁궐을 이용하여 창건한 것으로 파악되지만, 그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궁성의 성문으로는 昇平門∇華門(麗景門)·西華門(向成門)·玄武門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승평문은 3문 형식으로 이루어진 궁성의 정남문이었다. 서화문은 궁성의 서쪽 문이었음은 분명하고, '숙종 10년 10월에 왕이 서경에서 돌아오던 도중 丙寅에 長平門 밖에 이르러 병으로 輦 안에서 죽었으므로, 西華門에 와서 發喪하고'라는 기록을 통해서는 황성의 長平門으로 이어지는 곳에 위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곳에는 洪灌의 碑가 세워져 있어 그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동화문과 현무문은 각기 동쪽·북쪽의 성문이었지만 그 위치는 확실하지 않다.
이러한 궁성을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 황성이었다. 황성은 그 축성 시기와 유래가 불명확하지만, 태봉의 勃禦塹城을 이용했을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高麗史} 권 56 志 10 地理 1, 王京開城府條(이하 '{고려사} 지리지'로 약칭)와 {高麗史} 권 83 志 37 兵 3, 圍宿軍條(이하 '{고려사} 병지'로 약칭)에서는 그 규모와 20개의 성문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도경}에서는 이를 王府 혹은 內城이라고 했고, 13개의 성문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동쪽 성문인 廣化門 이외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 冬 築松岳·牛岑二城 ({三國史記} 권 8 新羅本紀 8, 효소왕 3년)
㉡ 松岳郡 本高句麗扶蘇岬 (新羅改松嶽郡) 孝昭王三年築城 景德王因之 我太祖 開國爲王畿 領縣二 ({三國史記} 권 35 雜志 4 地理 2, 松嶽郡)
㉢ 築開城 ({三國史記} 권 8 新羅本紀 8, 성덕왕 12년 12월)
㉣ 開城郡 本高句麗冬比忽 景德王改名 今開城府 領縣二 ({三國史記} 권 35 雜志 4 地理 2, 開城郡)
㉤ 世祖說之曰 大王 若欲王朝鮮·肅愼·卞韓之地 莫如先城松嶽 以吾長子爲其主 裔從之 使太祖築勃禦塹城 仍爲城主 時太祖年二十 ({高麗史} 권 1, 태조)
㉥ 光化元年戊午春二月 葺松岳城 以我太祖爲精騎大監 伐楊州 見州 ({三國史記} 권 50 列傳 10, 弓裔傳)
㉦ 弓裔 取浿潟及漢山州管內三十餘城 遂都於松岳郡({三國史記} 권 11 新羅本紀 12, 효공왕 2년 7월)
㉧ 弓裔 移都於鐵圓 ({三國史記} 권 12 新羅本紀 12, 효공왕 9년 7월)
㉨ 我太祖 移都松岳郡 ({三國史記} 권 12 新羅本紀 12, 경명왕 3년)
㉩ 定都于松嶽陽 創宮闕 置三省 六尙書官 九寺 立市廛 辨坊里 分五部 置六衛 ({高麗史} 권 1, 태조 2년 정월)
㉪ 創法王·王輪等十寺于都內 ({高麗史} 권 1, 태조 2년 3월)

이 자료들은 고려 건국을 전후한 시기의 개경 지역과 관련된 것이다. ㉠과 ㉡은 같은 것으로 이해되고, 자료상으로 찾아지는 개경 지역의 최초 축성사례이다. ㉢과 ㉣도 같은 것으로 이해되지만, ㉠과 ㉡의 송악성과는 다른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경우를 염두에 둘 때, ㉤의 발어참성, ㉥의 송악성, ㉦의 松岳郡, ㉨과 ㉩에서 태조 왕건이 수도로 삼았던 松岳郡·松嶽陽 및 ㉪의 都內 등은 송악산 남쪽, 즉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있는 개경 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의 송악성과 ㉤의 발어참성은 송악산을 근거로 했을 것이라는 추정은 가능하지만, 또 한편으로 그 위치선정에서 차이가 있었거나 혹은 발어참성이 ㉠의 송악성을 수축·확대한 것일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태조 2년으로부터 400여 년간 고려 수도로서의 개경은 ㉤의 발어참성을 이용하여 수축을 거듭해 왔을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에서의 궁예가 송악군으로 천도하기 5개월 전에 수리한 송악성은 발어참성이었을 것이다. 또한 태조 왕건이 ㉧ ㉨의 철원에서 송악군으로 천도하고, ㉩의 궁궐과 행정관서의 정비도 발어참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 ㉥ ㉦ ㉨ ㉩ ㉪은 고려초기 도성의 내용을 보여주는 점에서 같은 의미로 파악된다.
고려초기 개경의 성곽체제가 언제 정비되었을 것인가는 보는 관점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광종 11년 3월에 개경을 皇都라고 하였고, 그 이듬해 4월에 '修營宮闕都監'을 설치하여 14년 6월까지 약 2년 동안 궁궐을 수리하였다는 자료가 주목된다. 이 때 개경 성곽의 정비도 이루어졌을 것으로 발어참성 역시 궁성을 에워싼 황성으로 개칭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현종 20년 나성이 완성되기 이전의 개경 성곽은 궁성(내성)과 황성(외성)의 二重城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개경에 비해 서경에서는 內城¬城·王城·皇城이라는 용어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서경의 성곽체제로 미루어 보아, 개경의 성곽체제는 초기에 궁성 ― 황성으로 이루어졌다가 현종 20년 나성의 축조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고려전기에는 성종대로부터 현종대까지 거란의 침략 혹은 국내의 변란 등으로 인해 개경 시설의 피해도 막대하였는데, 그 복구과정에서 황성에 대한 묘사가 나타나지 않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더위가 심하여 羅城 수리를 정지하였다.' '崔瑀가 羅城의 隍塹을 수리하는데, 家兵으로 役徒를 삼고 銀甁 300여 개와 쌀 2000여 석을 내어 그 비용으로 지불하였다.' '京都의 外城을 수리할 것을 명령하였다.' 등의 나성의 수축공사와 비교된다. 이런 점에서 현종 20년 나성이 완성된 이후에는 황성 용어의 위상에도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이해되는데, 다음의 자료들을 참고할 수 있다.

ⓐ 皇城 朱雀門 행랑에 벼락이 쳤다.({高麗史} 권 5, 덕종 3년 6월 己丑)
ⓑ 皇城 안 서쪽에 社稷壇을 새롭게 축조하였다.({高麗史} 권 7, 문종 6년 2월 辛巳)
ⓒ 이튿날 諫官들이 閤門에 엎드려 힘차게 간쟁하니, (李)俊儀가 술김에 巡檢軍을 시켜 그들을 陵辱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준의를 불러 위로하여 성을 풀게 하고, 간관들을 皇城에 가두었다.({高麗史} 권 19, 명종 원년 9월)

ⓐ의 朱雀門은 황성의 성문이 분명하다. 그런데 "(拓)俊京이 '일이 급하게 되었으니 앉아서 기다릴 수 없다'라고 하고, 이에 侍郞 崔湜, 祗候 李侯進, 錄事 尹翰 등과 함께 수십 명을 거느리고 밤에 주작문에 이르렀으나 들어갈 수 없었다. 翰을 시켜 城을 넘어 자물쇠를 부수고 문을 열게 하여 들어가서 神鳳門 밖에 이르니 아우성 소리가 땅을 울렸다."라는 기록을 통해서 보면, 주작문이 궁성의 남문으로도 묘사되었다. 신봉문은 궁성의 남문인 昇平門에서 毬庭을 지나면서 처음 만나는 문이다. 즉 척준경 일행이 신봉문까지 갈 수 있는 경로는 황성의 주작문 → 궁성의 승평문 혹은 좌·우동덕문 → 구정을 통해서 이다. 이것은 황성이 국왕을 중심으로 한 포괄적인 의미로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의 황성은 나성과 구별되는 용어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사직단이 황성 밖 혹은 나성의 서남 지역인 宣義門 안쪽에 위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에서는 諫官들을 가둔 황성이 어디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데, 이는 閤門이 궁성 내에 있던 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사실들은 황성이라는 용어가 나성의 완성 이후에는 개경 성곽의 일반명사로도 쓰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황성은 고려초기 개경 성곽의 구조를 정확하게 알아야 이해될 수 있는 것인데, 다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첫째, 고려초기에는 발어참성이 외성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광종대에 皇都라는 용어가 등장하면서 발어참성이 황성으로 개칭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나성이 이루어지기 이전의 개경이 궁성과 황성의 二重城으로 이루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둘째, 현종 20년 나성의 완성은 기존의 황성을 內城으로 한 三重城의 구축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이 경우 황성이라는 용어는 점차 개경 성곽 혹은 국왕과 관련된 일반명사로도 사용되었을 것이다.

2) 황성의 규모

황성의 규모는 일반적으로 발어참성의 하반부로 이해하는데, 이는 '皇城二千六百閒 門二十'이라는 {고려사} 지리지의 기록과 북한의 발굴 결과를 근거로 하고 있다. 앞서 註 20)에서 제시된 성곽의 규모를 참고로 한다면, 황성과 궁성의 둘레는 2 : 1, 넓이는 5 : 1 정도로 파악할 수 있으며, 그리고 황성의 성문은 평균 약 235m마다 1개씩 세워져 있는 셈이다. 또한 황성과 궁성의 북쪽 벽면 사이가 약 10m라는 발굴 결과가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 두 가지 상황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선 발어참성의 상반부를 황성의 방어적 성격 혹은 後苑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지만, 황성과 후원이 뚜렷하게 구별되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두 번째로는 황성의 북쪽 벽면에 대한 문제이다. 이것은 궁성의 북쪽 벽면을 중심으로 발어참성을 동서로 가른 성벽이다. 이것 또한 발어참성의 상반부와 하반부 즉 황성과 후원을 구별하기 위해 쌓은 것인지도 의문이다.
고려전기 개경의 구조를 그나마 정확하게 알려주는 기록으로는 송나라 사신 徐兢이 지은 {고려도경}을 들 수 있다. 이 기록은 인종 2년(1124)의 상황을 묘사한 것으로 고려전기 개경의 구조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이 기록에서는 개경의 성곽구조를 王宮 ― 王府 ― 王城으로 표현하였다. 王宮은 궁궐과 기타 왕과 관련된 여러 전각 등을 둘러싸고 있었다고 한다. 王府는 왕궁, 長慶宮,  林宮·扶餘宮 등의 별궁, 그리고 尙書省·中書省·樞密院·八關司 등을 포괄하였다고 한다. 王城은 나성을 표기한 것이다. 그런데 {고려도경}의 王府와 {고려사} 지리지의 '皇城 2,600間'과는 차이가 있다.

㉮ 廣化門 王府之偏門也 其方面東({高麗圖經} 권 4 門闕, 廣化門條)
㉯ 昇平門 卽王宮之正南門也({高麗圖經} 권 4 門闕, 昇平門條)
㉰ 福源觀 在王府之北 太和門內 建於政和間({高麗圖經} 권 17 祠宇, 福源觀條)
㉱ 安和寺 由王府之東北 山行三四里({高麗圖經} 권 17 祠宇, 靖國安和寺條)
㉲ 王府之東北 與春宮相距不遠 有二寺 一曰法王 次曰印經 由太和北門入則有龜山玉輪二寺({高麗圖經} 권 17 祠宇, 王城內外諸寺條)
㉳ 崧山神祠 在王府之北({高麗圖經} 권 17 祠宇, 崧山廟條)

이와 같은 자료들에서 보면, 사물의 방향 혹은 위치 등이 그 기준이 될 수 있는 보편적인 사물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의 광화문과 ㉯의 승평문은 각기 황성과 궁성의 정문이었다. 이것은 왕부와 왕궁이 구별되는 것이며, 아울러 왕부는 황성, 왕궁은 궁성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의 복원관이 왕부의 북쪽, ㉱의 안화사가 왕부의 동북쪽, 그리고 ㉳의 숭산신사가 왕부의 북쪽에 위치하였다는 것은 왕부의 북쪽 지역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에서 보면, 복원관은 황성의 북쪽 태화문 안에 있었다고 하는데, 예종이 '福源宮에서 친히 제사를 지내고 곧바로 安和寺로 행차하여 順德王后의 眞堂에 술잔을 올리고 눈물을 흘렸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안화사로 통하는 길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안화사는 松岳山 기슭 紫霞洞에 있었고, 자하동은 개경의 동북 지역으로 조선 태조 2년에 완성된 內城의 北小門으로 통하는 곳이다. 또한 ㉲의 '太和北門을 따라 들어오면 龜山寺·王輪寺가 있다.'라는 구절을 통해서는, 太和門(황성의 泰和門으로 이해됨)이 발어참성의 하반부에 위치하였다고는 이해할 수 없다.
㉳의 숭산신사는 나성의 北昌門을 나가 5리쯤에 위치하고 있었다. {고려도경}이 인종 2년을 편년으로 하였다면, 숭산신사 역시 나성을 기준으로 이해하는 편이 쉬울 것이다. 이것 역시 발어참성과 나성의 북쪽 일부 벽면이 겹친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이해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런데 ㉲의 법왕사·인경사가 왕부의 동북쪽에 있었다는 것은 ㉰의 '王府之北'과 ㉱의 '王府之東北'의 위치와 거리에서 차이를 발견할 수 있지만, 황성을 발어참성의 하반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다음의 '太和北門으로 들어오면 귀산사·왕륜사가 있었다'라는 것과 충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와 같은 점들을 고려하면, {고려도경}에서는 왕궁(궁성)·왕부(황성)·왕성(나성)을 구별하였지만, 황성(왕부)의 범위를 발어참성의 하반부만을 지칭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한편 황성을 발어참성 하반부로 추정할 수 있게 하는 {고려사} 지리지의 경우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황성을 발어참성 하반부로 파악한 것은 {고려사} 지리지의 '황성 2,600間'과 북한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한 것이다. 그러나 황성의 규모를 이해하는 데는 그것이 처음부터 고정된 것이 아니라, 개경 궁궐의 수축과정 혹은 나성 축조를 계기로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고려전기 개경 시설의 수축에 대해서는 태조 2년 송악산 남쪽에 궁궐을 창건한 이후, 광종 12년 4월부터 14년 6월까지의 궁궐 수리, 현종 2년 정월에 거란의 개경 시설의 파괴로 인하여 같은 해 10월부터 5년 정월 甲午까지의 궁궐 수리, 현종 11년 8월 庚子부터 14년 8월 壬子까지 大內의 수리 등의 기록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황성의 수축·재정비도 아울러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현종대에 나성 건설이 본격화되고 동왕 20년에 완성되는 점을 염두에 둘 때, 황성 역시 일정한 변화가 있었을 것임은 추정 가능한 것이다.
황성의 범위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에는 성문의 위치가 있다. {고려사} 지리지에서는 황성의 20개 성문을 확인할 수 있고, {고려사} 병지와 {중경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도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고, 참고로 나성의 성문도 정리해 보았다.


위의 도표에서 살펴보면, {고려사} 지리지에는 황성의 선의문과 나성의 선의문이 같이 드러나고, {고려도경}에서는 나성의 正東門으로 선인문이 표기되어 {고려사} 지리지·병지의 황성의 선인문과 겹치고, {고려사} 지리지·병지의 황성의 통덕문과 {고려사} 지리지의 나성의 통덕문이 또한 겹치는 반면 {고려사} 병지의 나성의 성문에는 통덕문이 표기되지 않았다. 그리고 황성의 현무문과 궁성의 현무문이 겹친다.
나성의 선의문은 사신이 출입하는 등 개경의 중요 관문이었고,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나성의 4大門 중의 하나로서 선의문을 지적하였다. 그런데 황성의 선의문은 {고려사} 지리지 이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점은 황성의 성문 명칭이 현종 20년 나성의 완성으로 재정비되었을 것이지만, {고려사} 지리지의 황성과 나성의 성문 명칭의 판단기준 시기에서 차이가 날 수도 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다음의 宣仁門도 같은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햇빛이 붉은 장막을 친 듯하였다. 康兆의 군사가 宮門에  入하매 왕이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태후와 더불어 울부짖으면서 法王寺로 出御하였다. (생략) 왕이 宣仁門으로부터 나올 때 侍臣들이 처음에 모두 걸어서 따르다가 이에 이르러 비로소 말을 타고 따르는 자가 있었다. 歸法寺에 이르러 御衣를 벗고 음식을 바꾸어서 올렸다.

법왕사는 延慶宮 동쪽에 있었던 것인데, 연경궁의 위치 여하에 따라 선인문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 목종이 연경궁에 머물다가 선인문을 나와 귀법사로 갔다면, 연경궁은 황성 내에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목종 때는 아직 나성이 축조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서의 선인문은 황성의 성문이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나성의 선인문은 {고려도경} 이외의 기록에서는 확인할 수 없다.
통덕문은 현종 10년 정월에 거란의 침입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이 시기는 아직 나성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역시 황성의 성문이었음이 분명하다. 또한 {고려사} 병지의 통덕문에는 圍宿軍이 배치되었고, 延秋門(迎秋門)과 玄武門 사이에 있는 것으로 보아 황성의 성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황성의 서쪽 성벽이 뒤에 나성의 서쪽 성벽의 일부와 겹쳤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황성과 궁성의 현무문이 일치하는 것도 황성의 북쪽 벽면(발어참성을 동서로 가른 성벽)과 궁성의 북쪽 벽면이 겹칠 수도 있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게 한다. 전룡철은 황성의 이 북쪽 벽면에서 5개의 성문 흔적을 발견하였다고 하지만, 이런 성문 흔적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이 성벽은 필요했을 것이다. 발어참성의 상반부는 송악산으로부터 뻗어 내리는 구릉이 대부분이었을 것으로, 궁성에 대한 군사적 방어 혹은 재해 예방시설 등이 필요했을 것으로도 판단된다. {고려사} 병지에서 보면, 황성의 성문 중에서 水口門을 가진 성문은 광화문과 선인문이었다. 개경의 수로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렀기 때문에 나성의 수구문이 동쪽에서 동남쪽으로 위치하였고, 황성의 수구문 역시 그러했던 것이다. 따라서 궁성의 북쪽 벽면과 마주보는 벽면이 반드시 황성의 북쪽 벽면이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고 여겨진다.
결국 황성의 규모는 {고려사} 지리지와 오늘날의 발굴결과를 토대로 한다면 발어참성의 하반부였다고 할 수 있겠지만, 현종 20년 나성이 완성될 때까지 약 100여 년 동안 황성이 개경의 외성 역할을 했다는 점을 도외시 할 수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려사} 지리지의 표현방식에서도 차이가 나는데, 나성은 '城周·羅閣·高·厚' 등으로 묘사하는 반면, 황성은 '皇城二千六百閒'으로 묘사할 뿐이었다. 이것은 황성의 규모가 정확하지 않았기 때문으로도 이해되겠지만, 그 변화 상에 대한 상세한 자료가 남아있지 않았을 가능성도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3) 황성의 성문

{고려사} 병지의 麗景門과 向成門은 궁성의 東華門과 西華門의 명칭을 인종 16년에 고친 것이다. 이것은 {고려사} 병지의 성문 명칭이 인종 16년 이후의 것으로서 {고려사} 지리지의 황성·나성의 성문 명칭과 차이가 날 수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앞에서의 도표를 참고하면, 황성의 남훈문·선의문·통덕문·화평문·북소문이 {고려사} 병지에서는 빠져있고, 迎秋門과 延秋門, 金耀門과 金曜門, 泰和門과 太和門 등 명칭의 차이도 발견된다. 또한 나성의 통덕문이 {고려사} 병지에서는 빠져있고, 德 門과  德門, 乾福門과 乾陽門 등 나성의 성문 명칭도 차이가 난다. 따라서 {고려사} 지리지의 황성 성문의 명칭은 현종 20년 나성이 완성되기 이전의 것으로 여겨지고, 나성이 완성된 이후에 재조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황성 성문의 위치에 대해서는 이를 알려주는 기록이 현재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물론 '宣義門은 곧 王城의 正西門인데, 西는 金方으로서 五常에선 義에 속하기 때문에 이름하게 된 것이다.' '廣化門은 王府의 偏門인데, 동쪽으로 향했고, 모양과 제도는 대략 宣義門과 같다.' '王府의 內城은 13門으로 둘러싸여 있다. 각기 扁額이 게재되었는데, 방향에 따라 의의를 나타내었다. 廣化門이 正東의 문으로 긴 거리와 통했다.' '宣仁門으로 나와 歸法寺에 이르러' '숙종 10년 10월에 왕이 서경에서 돌아오던 도중 丙寅에 長平門 밖에 이르러 병으로 輦 안에서 죽었으므로, 西華門에 와서 發喪하고' 등의 기록을 통해서 몇몇 성문의 위치 혹은 방향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선의문·장평문은 서쪽 방향, 광화문·선인문은 동쪽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한편 {고려도경}에서 황성의 성문을 13개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기록이 인종 2년(1124)의 상황을 묘사한 것이라면, 현종 20년 나성의 완성으로 황성에 대한 재정비가 있었을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그 재정비에는 나성과 겹치는 서쪽·북쪽 벽면의 성문 혹은 중복된 성문 명칭의 조정 등이 있었을 것인데, 황성과 나성의 通德門 혹은 宣義門·宣仁門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고려사} 지리지와 병지에서 확인되는 황성의 宣仁門이 {고려도경}에서는 나성의 성문으로 표현되었고, {고려사} 지리지의 나성 성문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고려도경}의 기록이 정확하다면, 황성의 선인문은 나성의 완성과 더불어 개칭되었을 것이고, 나성의 선인문도 {고려도경}의 편년인 인종 2년 이후, 인종 16년에 殿閣과 宮門의 명칭이 변경되는 그 사이에 다른 명칭으로 변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점에서 {고려도경}의 왕부 13문은 황성과 나성이 겹치는 서쪽·북쪽 벽면을 제외한 나머지 성문을 언급한 것으로도 생각된다.
전룡철에 의하면 발어참성의 하반부 즉 황성의 성문 흔적을 동쪽 벽면에서 3개, 서쪽 벽면에서 1개, 남쪽 벽면에서 2개, 북쪽 벽면에서 5개 등 11개를 확인했다고 한다. 이것은 황성을 발어참성의 하반부로 설정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점들을 참고로 하면, 황성 성문의 위치는 다음과 같이 4가지로 나누어서 추정해 볼 수 있다. 첫째, 성문의 명칭에서 고려될 수 있는 방향을 추정해 보면, 동쪽 방향으로는 (1) 廣化門 (2) 通陽門 (14) 上東門 (17) 宣仁門 (18) 靑陽門, 남쪽 방향으로는 (3) 朱雀門 (4) 南薰門, 서쪽 방향으로는 (7) 迎秋門 (8) 宣義門 (9) 長平門, 북쪽 방향으로는 (13) 泰和門 (19) 玄武門 (20) 北小門 등이다. 이 경우는 {고려도경}의 '王府의 內城은 13門으로 둘러싸여 있다. 각기 扁額이 게재되었는데, 방향에 따라 의의를 나타내었다. 廣化門이 正東의 문으로 긴 거리와 통했다.'라는 점을 염두에 둔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황성의 성문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재료가 될 것이다.
둘째, {고려사} 지리지 황성의 성문 나열순서가 일정한 원칙에서 비롯되었음을 염두에 두고, 그리고 황성의 범위를 발어참성 하반부로 상정했을 때의 경우이다. 20개의 성문을 4벽면에 평균해서 배치하더라도 그 용어와 성문의 위치가 도저히 균형을 이루지 못한다.
셋째, {고려사} 지리지의 성문 나열순서가 일정한 원칙에서 비롯되었고, 그리고 황성의 범위를 발어참성 전체를 전제로 했을 때의 경우이다. 전룡철의 11개 성문 흔적을 참고로 하면, 발어참성의 하반부 동쪽에 (1) 廣化門 (2) 通陽門을, 남쪽에 (3) 朱雀門 (4) 南薰門 (5) 安祥門을, 서쪽에 (6) 歸仁門 (7) 迎秋門 (8) 宣義門을, 궁성의 북쪽 벽면과 마주보는 북쪽 벽면에 (9) 長平門 (10) 通德門 (11) 乾化門 (12) 金耀門 (13) 泰和門을 비정하고, 나머지 (14) 上東門 (15) 和平門 (16) 朝宗門 (17) 宣仁門 (18) 靑陽門 (19) 玄武門 (20) 北小門은 발어참성 상반부로 배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에도 두 번째와 마찬가지로 균형을 이루지 못한다.
넷째, {고려도경}과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서의 성문 나열순서가 동쪽 성문으로부터 언급되었던 점을 고려하고, 궁성의 북쪽 벽면과 황성(발어참성)의 동서 횡벽이 서로 겹쳤음을 가정하는 경우이다. 이것은 첫째의 경우를 참고로 해서, 우선 (19) 玄武門 (20) 北小門을 궁성의 북쪽 벽면과 황성의 동서 횡벽이 겹치는 성벽에 위치시키고, 발어참성 하반부 동쪽에 (1) 廣化門 (2) 通陽門을, 남쪽에 (3) 朱雀門 (4) 南薰門 (5) 安祥門 (6) 歸仁門을, 서쪽에 (7) 迎秋門 (8) 宣義門 (9) 長平門을 배치시킬 수 있다. 그리고 발어참성 상반부의 서쪽에 (10) 通德門을, 북쪽에 (11) 乾化門 (12) 金耀門 (13) 泰和門을, 동쪽에 (14) 上東門 (15) 和平門 (16) 朝宗門 (17) 宣仁門 (18) 靑陽門을 배치할 수 있을 것이다. 전룡철의 발굴 결과 발어참성 하반부 동쪽 벽면의 성문 흔적이 3개라고 한다면 (18) 靑陽門이 하반부의 (1) 廣化門 위쪽에 위치해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 때에는 宣仁門이 상반부의 동쪽 성문이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황성의 성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명칭이 현종 20년 나성이 완성되기 이전에 붙여진 것이었고, 황성의 규모도 궁궐수축 등의 여러 정황의 변화에 따라 재조정되었을 것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맺 음 말

개경 성곽 연구의 과제





고려전기 개경의 오부방리 구획과 영역

홍 영 의 (국민대)





1. 머 리 말

王京의 특별구역으로 설정된 개경의 5부방리의 가장 큰 특징은 고려전기부터 首都를 둘러싸고 있는 京畿의 관할관청인 開城府와는 별도의 행정조직과 운영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은 다른 군현에서는 찾을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이다. 개경에서 5부방리를 실시한 것은 王京이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서 구심점이 되기 위해서는 왕경 내의 거주민에 대한 관리와 운영이 중요시되었기 때문이다. 즉 王宮을 중심으로 여러 관서, 창고 등 국가통치를 위한 핵심시설이 위치하고 있었던 까닭에 이를 운영해 나가기 위해서는 다양한 신분층의 開京民을 관리하는 제도로 기능한 것이 5부방리제였던 셈이다.
개경의 5부방리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5부방리와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성곽형태와 궁궐의 내부구조에 대한 모습을 복원 유추한 것, 군현제도 안에서 京畿地域이 차지하는 정치제도적인 면과 사회경제적인 역할이 開城府와 그 구역에 대한 운영과 어떤 연관을 맺고 있었는가를 살펴 본 연구가 있어 왔다. 또한 村落의 기능과 구조를 검토하는 가운데 行政村으로서의 開京의 里를 주목하였고, 경제생활 단위로서 개경내의 京市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한편 5부방리의 행정조직과 운영방식 및 내부구조에 대하여 주목하기 시작하면서 개경의 도로와 행정구획 및 市廛지역, 개경 거주민의 분포 등에 대한 검토와 아울러 사료의 종합적 검토와 복원을 통하여 개경 전반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즉 개경이 수도로 정해진 연혁과 시설, 개경과 개성부와의 관계, 개경의 부방리제, 개경의 행정체계와 그 기능, 개경의 호구 등이 다루어졌다.
이상의 개경 연구는 도로와 행정구획 등 도시구획과 행정체계, 그리고 경제생활의 한 단위인 시장의 기능과 역할 그리고 위치와 변화 같은 기초적인 측면에 한정되어 있다. 따라서 개경의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아직 해결되어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5부방리의 구획과 영역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하는 문제이다.
개경의 5부방리의 구획은 기본적으로 京畿制의 변천에 따라서 개경의 5부방리제가 어떻게 변해갔는지를 살필 필요가 있다. 아울러 지금까지의 연구시각은 고려초에 형성된 5부체제가 고려말까지 그대로 존속되었다고 보고 있는데, 이것은 개경이라는 수도의 도시 발전을 고려하지 않은 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고려후기에는 戶等制가 9等戶制에서 3等戶制로 변하였고, 5부의 관원의 성격도 바뀌었기 때문에 당연히 5부체제의 변화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개경의 영역은 정치 행정 단위로서의 都城과 도성의 외부공간인 도성 밖 즉, 四郊로 이루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검토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교의 공간적 기능이 도시사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에 대한 검토는 개경 내에서 행정구조의 주축을 형성한 部·坊·里의 내부구조와 영역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기존의 연구와 자료를 바탕으로 5부방리의 복원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하고자 한다.

1. 5부방리의 구획

고려시대 開京의 五部坊里는 태조 2년(919) 開州가 처음으로 수도로 정해지면서 설치된 이래 成宗 6년과 顯宗 15년 두 차례에 걸쳐 개편을 보았다.『高麗史』권56 지리지 1 王京開城府條에는 五部坊里制가 완결된 형태, 즉 5부 35방 344리의 모습을 갖추는 시기는 顯宗 15년(1024)으로 되어 있다. 즉,

① "王京 開城府는 원래 고구려의 扶蘇岬인데 신라 때에는 松嶽郡으로 고쳤으며 고려에 와서 태조 2년에 수도를 송악산 남쪽에 정하면서 開州라 하고 여기다 궁궐을 새로 세웠다【세주생략】……市廛을 세우고 방리(坊里)를 구분하여 5部로 나누었다……②成宗 6년에 5개 部의 방리를 개편하였다……③顯宗 15년에는 다시 서울 5부의 방리를 개편하였으며【필자주 ; 5부35방344리】"

여기에서 5부방리가 세차례에 걸쳐 정비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그 첫 번째 단계가 위에서 알 수 있듯이, 開州가 수도로 정해지는 태조 2년 정월로서 坊里를 구분하여 5부로 나누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내용에서는 궁궐의 명칭만이 보일 뿐 방리에 대한 구체적인 명칭이 보이지 않고 있어서 우리의 주목을 끈다.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현종 15년에 이루어진 5부방리의 개편 때 보여지는 坊名이 이 내용에서는 보이지 않을 뿐더러, 태조대부터 성종 때 이전의 사료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때 정해진 방명을 단순히 고려사 편찬자가 임의대로 삭제한 것일까, 아니면 5부만 확정하고 어느 시점에서 점차 방명을 조정한 것일까.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우선 다음의 사료를 주목해보자.

① "市廛을 세우고 坊里를 구분하여 5부로 나누었다"
② "松嶽의 남쪽에 도읍을 정하였다. 궁궐을 건축하고 3省 6尙書官 9寺를 설치하였으며, 市廛을 세우고 坊里를 구분하였으며 5부를 나누고 6위를 두었다"
③ "松嶽의 남쪽에 도읍을 정하였다. 그 郡을 승격시켜 開州라 하고, 市廛을 설치하고 坊里를 구획하여 5부로 나누고 6衛를 설치하였다"
④ "태조 2년에 5부를 두었다【동남서북중 5부이다】"

위의 ①·②·③의 경우로 보아서는 5부와 함께 방리가 구분된 것으로 이해된다. ④의 경우는 5부(東西南北中)만을 언급하고 있다. 이 경우는 물론 백관지의 내용이므로 방리의 상급부서만을 언급한 것일 수 있다. 따라서 ①·②·③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드린다면, 태조 2년 정월에 방리명까지 확정된 것으로 믿어야 한다. 그러나 다음의 사료는 그러한 가능성을 희박하게 한다.

"3월에 法王寺·王輪寺 등 10개 사찰을 都內에 창건하고, 兩京(開京, 西京)의 石塔과 廟宇에 있는 肖像들 가운데 廢缺된 것은 모두 수리하게 하였다"
"이해에 法王·慈雲·王輪·內帝釋·舍那를 창건하고, 또 大禪院(普濟寺)·新興·文殊·(圓)通 地藏寺를 창건하였다"

는 기록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즉, 태조 2년 정월에 방리를 구분하여 5부를 구획한 다음, 두달 뒤인 태조 2년 3월에 法王寺·王輪寺를 비롯하여 慈雲寺·內帝釋院·舍那寺·大禪院(普濟寺)·新興寺·文殊寺·(圓)通寺·地藏寺 등을 都內에 창건하고 있다. 法王寺·王輪寺·慈雲寺 등은 태조 7년에 창건된 興國寺, 태조 19년에 창건된 內天王寺 등과 함께 현종 15년에 정리된 방명인 法王坊·王輪坊·慈雲坊·舍那(乃)坊·興國坊·內天王坊으로 추정되는 사찰이다. 따라서 위의 사료만으로는 태조 2년 정월에 방리를 구분하였다고 보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따라서 방리의 구획은 태조 2년 정월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때부터 점진적으로 구획사업이 진행된 것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그러므로『高麗史』의 찬자가 이 시기의 방명을 태조 2년조에 실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성종 6년에 개편된 5부방리는 어떠한 이유에서 이루어졌고, 그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5부방리가 개편되는 성종 6년을 전후로 한 內外의 官制와 조직이 집중적으로 재정, 정비되는 것과 아울러 그 계연성을 추적해야 한다. 주지하듯이 성종은 초년부터 百官의 官制를 고치고, 왕들 가운데 처음으로 籍田에서 親耕을 행하는 한편, 12牧의 설치와 官制(3省 6部 7寺의 설정) 정비, 酒店의 설치와 5년의 호구조사의 실시, 그리고 6년에는 詔書를 敎書로의 개칭, 각종 公文 樣式을 제정하는 한편으로 諸村의 大監, 弟監을 村長, 村正으로 고치고 있다. 이러한 제도의 집중적인 정비를 바탕으로 5부방리제를 개편 획정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5부방리의 획정 목적은, 우선 수도의 구획과 영역을 정리하려는 1차적 목적 이외에 전국적인 군현제 정비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성종 14년의 開城府의 설치를 통하여 赤·畿縣의 분할과 10道制의 실시를 도모한 것으로 파악되며, 이렇게 정비된 5부방리는 현종 15년에 다시 정리, 획정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현종 15년의 5부 35방 344리의 획정작업은 국내외의 어려운 여건과 함께 진행되었다. 성종 때부터 위협적 존재였던 契丹의 침입으로 都城이 함락되어 궁궐이 불타기도 하였고, 개경에서 일어난 上將軍 金訓, 崔質의 亂(현종 5)으로 현종 자신이 西京으로 피신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이 때문에 還都 후 개경과 관련해서 실시된 여러 정책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우선, 현종 9년 開城府의 屬縣인 開城縣과 長湍縣을 主縣으로 승격시켜 尙書都省에 직접隸屬케 하였다.

"현종 9년에 (開城)府를 없애고 縣令을 두어 貞州·德水·江陰 등 3개 현을 관할하고 또한 長湍縣令이 松林·臨津·兎山·臨江·積城·坡平·麻田 등 7개 현을 관할하게 하면서 모두 尙書都省에 직속시켰는데 이것을 京畿라고 하였다"

성종 14년에 설치된 開城府가 현으로 격하되고 赤畿縣 13개가 12개로 1현이 줄어들고 있다. 그 하나가 바로 松岳縣으로 짐작되는데, 개경 5부를 형성하였던 송악현은 현 그 자체가 소멸되어 중앙의 직할을 받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현종 1년에 착수된 羅城建設이 20여 년만인 현종 20년에 완성되면서 수도의 정비는 일단락 되었다. 이에 따라 이 시기부터 都城內와 도성 밖 그리고 이른바 교외지역인 東郊·西郊·北郊·南郊(城東·城西·城北·城南)의 지역적 구분이 명확하게 사료에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종의 수도정비 작업의 이유로는 都城의 성곽(皇城)만으로는 외적 방어가 어렵다는 점, 거란의 침입으로 황폐화된 도성을 복구해야 하는 필요성, 그리고 도성 내부의 통제를 강화하려는 목적에서였다. 특히 城郭의 보수와 내부정비 또한 비용이 만만치 않은 것이어서 왕경 개성부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는 京畿地域의 인원과 물자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현종대의 京畿制의 개편과 5부방리의 구획 획정을 바탕으로, 문종 16년 이후는 開城府의 복설과 함께 5부방리의 관직을 확정지으면서 경기체제와 개성부의 행정조직을 마련 정비하게 되었던 것이다.
  
2. 5부방리의 영역

개경 영역의 기본구조는 대체로 왕의 활동공간인 宮城, 그를 둘러싼 皇城과 5부방리의 영역을 포함한 도성, 그리고 城外 지역에 해당하는 四郊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고려초부터 이러한 영역이 구획되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궁궐은 태조 2년(919) 철원에서 개경으로 천도했을 때 태봉국 궁예가 머물던 궁궐을 그대로 개보수한 것으로 파악되지만, 그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황성 역시 그 축성시기가 불명확하지만, 태봉의 발어참성을 그대로 이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광종 11년 3월에 개경을 皇都라 하였고, 그 이듬해 4월에 '修營宮闕都監'을 설치하여 14년 6월까지 약 2년동안 궁궐을 수리하였다는 기록은 이를 뒷받침해준다. 아마도 이때 기존의 궁궐을 수리하는 동시에 그 동안 궁성으로 이용하였던 발어참성 역시 황성으로 개칭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현종대 나성이 완성되기 이전의 개경의 영역은 궁궐과 황성을 중심으로한 주변지역이었을 것이다. 바로 이 지역에 5부방리가 획정되었을 것이다. 성종 6년에 개정된 5부방리의 경우 구체적인 자료가 없어서 확인할 수 없지만, 고려 전 시기에 걸쳐 5부방리의 편제를 가장 잘 알려주는 것은 현종 15년에 획정된 다음의 내용이다.

"顯宗 15년에는 다시 서울 5부의 방리를 개편하였다【東部는 坊이 7개 里가 70개이다. 그 7개의 방은 즉 安定坊·奉香坊·令昌坊·松令坊·楊堤坊·倉令坊·弘仁坊이며, 南部는 방이 5개 리가 71개인데, 그 5개의 방은 즉 德水坊·德 坊·安興坊·德山坊·安申坊이며, 西部는 방이 5개 리가 81개인데, 그 5개의 방은 즉 森松坊·五正坊·乾福坊·鎭安坊·香川坊이며, 北部는 방이 10개 리가 47개인데, 그 10개의 방은 즉 正元坊·法王坊·興國坊·五冠坊·紫雲坊·王輪坊·堤上坊·舍乃坊·師子岩坊·內天王坊이며, 中部는 방이 8개 리가 75개인데, 그 8개의 방은 즉 南溪坊·興元坊·弘道坊· 溪坊·由岩坊·變羊坊·廣德坊·星化坊이다】"
  
위의 내용에서 볼 때, 개경의 구획은 5부 - 35방 - 344리로 편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의 표와 같다.

현종 15년의 5부방리제는 羅城의 축조와 함께 이루어진 것이었다. 나성의 축조가 완료된 시점은 현종 20년이지만, 그 논의자체는 이미 현종 즉위년에 이루어졌는데, 그간 유보되어 오다가 姜邯贊의 건의에 따라 재개되어 현종 20년에 완공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현종 15년의 5부방리제의 실시는 나성 축조 사업 계획이 완료된 후 성종 6년의 그것을 기초로 하여 재편 완성하였던 것이다.
5부의 구체적인 범위에 대해서는 자료의 부족으로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대략적인 위치를 살펴보면, 5부는 대체적으로 羅城의 南北門인 會賓門과 北城門을 잇는 선을 기준으로 하여 東·西部로 나누고, 다시 東西의 崇仁門과 宣義門을 잇는 선을 기준으로 하여 南·北部로 나눈 지역이었다. 中部는 이들 구획선이 교차하는 十字街 주변 지역이었다. 이는 도성을 크게 방위에 따라 4등분하여 각기 방위별로 동·서·남·북부로 나누고, 이들 도성 중앙부에 해당하는 지역을 중부로 편제한 것이었다. 中部는 市廛·寺院을 비롯한 別宮, 客舍, 官廳 등 여러 가지 공공시설이 밀집되어 있어서 도성 내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다. 중부의 위치를 추정할 만한 곳은 由岩坊인데, 이곳은 동서 방향대로의 북쪽 由岩山 부근에 비정된다. 또한  溪坊·廣德坊 등은 羅城의 서남쪽 성문인  溪門·廣德門과 일치하고 있어서 이 일대가 서쪽의 경계에 해당한다고 생각된다. 중부의 북쪽 경계는 興國寺 남쪽 지역으로 보인다. 흥국사 부근의 興國坊은 중부가 아닌 북부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부의 외곽 지역을 설정하는 것이 타당하다면, 東部의 경우는 방명에서 보이는 安定坊·弘仁坊을 참고할 때, 대체로 나성의 동쪽 문에 해당하는 安定門과 弘仁門을 경계로 설정된 것으로 보이고, 南部는 德 門·德山門을 중심으로 德 坊·德山坊이 설정된 것으로 보아 나성의 동남쪽에 해당한다. 또한 安申里가 城南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安申坊 역시 이 일대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西部는 五正門(宣義門)·乾福門 일대를 중심으로 五正坊·乾福坊 등이 설정된 것으로 보인다. 北部는 대체로 태조대부터 창건한 사찰을 중심으로 방명이 정해졌는데, 法王坊·興國坊·紫雲坊·王輪坊·舍乃坊·師子岩坊·內天王坊이 이에 해당한다. 이 지역들은 주로 황성 주변과 북쪽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坊名은 寺院의 이름이나 山川 내지는 그 이외의 어떤 다른 지형지물과 관련지어 붙여진 것이다.
1坊당 평균 10여 개의 里를 가진 35방명의 경우, 자료를 정리하여 검토하면, 대체로 현종 15년 당시의 방명은 예외적인 것을 제외하고는 고려전기까지 그대로 존속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고려후기 이후 새로운 방리명의 재조정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里는 중국 고대의 자연촌락 단위(自然村)에서 漢代를 거쳐 隋·唐代 이후 점차 인위적인 촌락조직의 기초단위(行政村)의 유형으로 사용되어온 개념이다. 고려시대 개경의 坊里制下의 里 역시 행정적인 편제의 성격을 갖는 行政村의 유형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특히 고려후기의 戶籍類에서 보이는 某部 某坊의 "第幾里"의 표현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다만 344개 각각의 里가 星化9里(1∼9리)와 洪道里(1∼6리)의 사례에서처럼 1개의 里名이 여러 개로 행정적 편제가 이루어진 것인지, 아니면 정부가 파악하는 1개의 里名만으로 행정적인 편제가 이루어져 344개의 리로 존재하게 된 것인지는 좀더 검토해야 할 문제이다.
里의 경우, 현종 15년 당시의 자료에서 생략되어 있어서 구체적인 명칭을 알 수 없다. 다만 국가가 행정적으로 파악할 때는 공식적으로 某部 某坊의 '第幾里'라고 썼을 것이며,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고유명사(○○里, ○○洞)로 불리기도 했던 듯 싶은데, 후자의 칭호들 역시 관청이나 궁궐 또는 산천 등의 지형지물에서 유래하는 것이 대부분으로서 이들도 그렇게 큰 변화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고려후기처럼 새로운 방명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里名도 새로이 등장할 개연성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郊는 周代의 제도에 따르면, 원래 都城으로부터 50리 이내의 곳을 '近郊', 또는  '郊內'라고 하여 城內의 6鄕과 합하여 國中이라고도 하였다. 또한 50리 밖으로부터 100리 안의 지역을 '遠郊'라 하였다. 都城 주변 100리 안의 近·遠郊 地域은 도성의 영향이 강한 지역으로서, 이 지역 내에 있는 邑을 京邑이라 하였으며, 그 바깥쪽의 땅은 公邑 또는 邦甸이라 하여 지방에 포함시켰다. 京邑지역에는 大邑(郡)을 두지 않는 것을 원칙이었다. 고려시대의 경우, 성종 14년에 宋制를 모방하여 王京을 중심으로 赤縣과 畿縣(13개)을 지정하여 開城府의 관할을 받도록 하였다. 고려의 赤縣과 畿縣은 시대에 따라 범위가 약간 바뀌었으나, 대체로 적현은 開城府 주위의 6縣(松嶽·開城·貞州·德水·松林·臨津)으로 구성되었고 기현 7縣(江陰·長湍·兎山·臨江·積城·坡平·麻田)은 적현의 바깥쪽에 있었다. 중국에서는 기현 가운데 離宮 또는 行宮이 있는 곳, 陵墓가 많은 곳 등을 별도로 선정하여 京都治所의 縣, 즉 적현으로 승격시켰는데, 고려의 적현 또한 그러한 이유에서 선정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개경을 중심으로한 4郊(東·西·南·北)는 도성인 羅城으로부터 적현의 경계지역에 해당한다. 朝鮮의 城底十里와 같은 개념으로서 도성 밖 城外지역인 4교의 기능은 대체로 冊封 使臣의 영접 및 軍隊 등의 전송, 각종 교통로의 중심지인  猊驛((내)성 서쪽 20리)·金郊驛(江陰縣 서남쪽 30리, 京師의 서북 30리)·桃源驛(長湍府의 남쪽 3리)·靑郊驛(保定門 밖 5리)의 기착지이자 행정문서의 전송 창구로 이용되고 있었다. 또한 군사가 주둔하거나 閱兵式과 함께 군사훈련의 장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祭祀 및 기원의 장소로, 왕의 사냥터이자 유흥장으로 자주 이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이 지역에는 五部點檢軍과 함께 네 지역을 정찰하는 四郊細作이 파견되어 교외지역을 순찰 감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지역이 어디에 해당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東郊와 西郊 지역의 대체적인 윤곽만을 확인할 수 있다.

"市裏檢點 : 장상 1명, 장교 2명, 군인 11명. 街衢監 : 행장교 2명, 螺匠 11명, 都典 11명, 군인 40명. 左右京裏檢點 : 장상 각각 2명, 장교 각각 2명, 군인 각각 8명. 五部檢點 : 장상 각각 2명, 장교 각각 2명, 군인 각각 8명. 四郊細作 : 장상 각각 2명, 장교 각각 1명, 군인 각각 7명. 安和의 생목 감시〔生木立〕장상 1명, 장교 1명, 군인 6명. 宮北 검점 : 장상 1명, 장교 1명, 군인 6명. 選軍 검점 : 장교 2명, 군인 32명. 獄直 검점 : 장교 4명, 군인 45명. 地倉 검점: 장교 2명, 군인 2명. 左倉 검점: 장교 2명, 군인 15명. 右倉 검점: 장교 5명, 군인 25명. 金吾衛 검점: 장교 2명, 군인 4명. 五正 검점 : 장교 1명, 군인 3명. 松岳左右樵人檢點 : 장교 각각 1명, 산직장상 각각 2명, 군인 각각 2명. 東郊의 炭峴±山·狄逾峴·小梓尾 등 生木 감시: 장교 각각 1명, 산직장상 각각 2명, 군인 각각 6명, 爐谷 생목 감시 : 장교 각각 1명, 산직장상 각각 1명, 군인 각각 6명. 西郊의 藥師院· 知巖·熊川·大峴·西普通亭의 골짜기·馬川·高寺 등 생목 감시 : 장상 1명, 장교 1명, 산직장상 2명, 군인 6명. 惡  생목 감시 : 산직장상 2명. 大廟 검점 : 장교 2명, 군인 10명이다"

의 내용은 개경 내외의 중요지역에 點檢軍을 파견하여 감시 정찰활동을 하였다는 것으로, 生木 監視軍으로 파견된 東郊의 炭峴(炭峴門 밖 太廟洞 일대)±山·狄逾峴(憲陵 - 光宗, 嶺南面 深川里 일대)·小梓尾 일대와 西郊의 藥師院(長湍府 서쪽 20리)· 知巖·熊川(開城府 남쪽 7리 : 陽陵里 熊川洞 일대)·大峴·西普通亭(永平門 - 都察門 밖)의 골짜기·馬川(현 靑郊面을 흐르는 馬尾川으로 沙川 支流)·高寺 일대가 우리의 주목을 끈다. 아마도 이 지역이 사교에 해당하는 東郊와 西郊 일대로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四郊 지역의 공간적 형태를 알 수 있는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고려정부의 사교에 대한 관심을 알 수 있는 다음의 몇 가지의 내용을 연결하여 그 대략을 짐작해 볼 수 있다.

① "문종 35년 8월에 制하기를, "西京 궁궐이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지고 헐린 곳이 많으니 工匠을 뽑아서 수리하라. 또 서울 동·서 각각 10여 리에 다시 터를 잡아 좌우 궁궐을 지어서 巡視할 적에 돌려가며 거처하는 곳으로 하라" 하였다"(『高麗史節要』권5 문종 35년 8월)
② "정종 원년 4월에 경성의 근처 名山에 나무하는 것을 금하고, 고루 나무를 심었다"(『高麗史節要』권4 정종 원년 4월)
③ "문종 7년 8월 정유에 御史臺에서 아뢰기를, "尙書工部를 통하여 '나성 동남쪽 둑을 높인 것은 서울 지세의 허술한 곳을 막기 위해서인데 이번에 하천이 범람하여 제방이 허물어졌으니 3∼4000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이를 수축해야 된다'고 하신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강변 일대가 모두 田畓이므로 농작물에 손해를 끼칠 우려가 있사오니 수확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소서"하니 왕이 이 제의를 좇았다"(『高麗史』권7 세가7 문종 7년 8월 정유)
④ "문종 13년 5월 병진에 명령을 내려 兩京 百官의 柴草地를 馬首嶺에 국한하고 禁標를 세워 규정을 위반하는 자에 대해서는 이를 엄격히 처벌하도록 하였다"(『高麗史』권8 세가8 문종 13년 5월 병진)
⑤ "공양왕 3년 3월에 中郞將 房士良이 상소하기를, "……지금 서울 사대문 밖에는 온 나라 대소신료 신민의 조상 무덤이 있는데 꼴 베는 이들이 해롭게 하고 사냥하는 자들이 불을 지르며 나물 밭을 만들거나 갈아 곡식을 심기도 합니다……"(『高麗史』권85 지39 형법2 금령 공양왕 3년 3월)
⑥ "공양왕 3년 5월에 京畿의 公田 및 私田의 四標 안에 荒閑地는 백성들이 땔나무를 하고 가축을 기르고 물고기를 잡고 사냥하는 것을 허락하며, 이를 금지하는 자는 그 죄를 다스린다"『高麗史』권78 지32 식화1 전제 과전법 공양왕 3년 5월)

위의 내용을 종합하면, ①은 서울 동·서 각각 10여 리에 좌우 궁궐을 지어서 巡視할 적에 돌려가며 거처하는 곳으로 한 것은 도성을 중심으로 사방 10리가 왕의 행동범위이자 郊內 지역에 해당하는 거리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거란 침입 때 이 지역(城外)에 거주하는 民家들을 城內로 들어오게 한 것으로 보아 都城民과 함께 파악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개경 근처 名山에 나무하는 것을 금하고, 고루 나무를 심었다고 한 점(②)은 郊內 지역에 대한 자연환경에 관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④의 兩京 百官의 柴焦地를 馬首嶺에 국한하고 禁標를 세워 규정을 위반하는 자에 대해서는 이를 엄격히 처벌하도록 하였다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였다. 즉 조선시대와 같은 四山禁標 지역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名山이 위치한 지역에 국한된 것이고, 郊內인 四郊지역은 땅이 평탄하고 비옥하여 경작할 수 있는 곳으로 지적되고 있었다. 특히 ③의 羅城 동남쪽 강변(沙川에 해당) 일대가 모두 田畓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아, 이미 도성 내는 인구집중과 宅地개발로 더 이상의 경작지가 부족해지자 강변지역으로의 토지개발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⑤의 경우처럼, 고려말에는 四大門밖에 있던 大小臣僚의 조상 무덤조차 꼴 베는 이들이 해롭게 하고, 사냥하는 자들이 불을 지르며 나물 밭을 만들거나 갈아 곡식을 심기까지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 지역에서 馬草의 생산과 운반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은 ⑥에서와 같이 京畿의 公田 및 私田의 四標 안에 荒閑地를 백성들이 땔나무를 하고 가축을 기르고 물고기를 잡고 사냥하는 것을 허락하며, 이를 금지하는 자는 그 죄를 다스린다고 한 점에서도 교내의 未開墾地에 대한 개발 목적을 파악할 수 있다. 특히 전쟁 등으로 인한 都城의 황폐화와 權勢家의 空地의 겸병문제는 사회적인 문제로 제기되기도 하였다. 都城의 宅地부족과 空閑地의 이용이라는 차원에서 도성내의 寺院들이 점차 郊外地域으로 나가고 있는 점도 그러한 목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5부방리 영역의 변화 시점 역시 도성밖으로의 寺院 창건과 開京民의 거주지역에 왕실의 대규모 궁궐(별궁·이궁)건설, 권세가와 중앙관료의 대저택 축조가 이루어지고 있는 시점을 염두해 둘 필요가 있다. 이는 결국 都城民의 宅地부족을 초래하였으며, 城內에 거주하는 일반관료와 주민들이 도성밖으로 거주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개경민이 거주하는 城外지역까지 5부방리의 영역에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같은 四郊地域은 성종 6년 5부방리제의 정리와 함께 구획되어 현종 15년 5부방리가 정비되고, 현종 20년 개경의 羅城이 완성되면서 대체적인 윤곽이 드러난 것으로 파악된다.

맺 음 말

고려시대 開京의 五部坊里는 太祖 2년에 설치된 이래 成宗 6년, 顯宗 15년 두 차례에 걸쳐 개편 구획되었다. 그러나『高麗史』권56 지리지 1 王京開城府條에 部坊里制가 완결된 형태, 즉 5부 35방 344리의 모습을 갖추는 시기는 顯宗 15년(1024)으로 되어 있지만, 그 대체적 윤곽은 이미 成宗 6년(987)에 잡혔다고 판단된다. 왜냐하면, 태조 2년 정월에 방리를 구분하여 5부를 구획한 다음, 석달 뒤인 태조 2년 3월 이후에 창건되는 10대 사찰(法王寺·王輪寺· 慈雲寺·內帝釋院·舍那寺·大禪院(普濟寺)·新興寺·文殊寺·(圓)通寺 地藏寺)과 태조 7년에 창건된 興國寺, 태조 19년에 창건된 內天王寺 등과 함께 현종 15년에 정리된 방명에서 法王坊·王輪坊·慈雲坊·舍那(乃)坊·興國坊·內天王坊으로 추정되는 사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방리의 구획은 태조 2년 정월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때부터 점진적으로 구획사업이 진행된 것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성종 6년에 이루어진 5부방리제의 정비는 성종 초에 이루어진 내외의 官制 정비와 성종 5년의 호구조사를 배경으로 5부방리제의 기본이 정해졌으며, 현종 15년의 5부방리제의 정리는 개경 지역의 확대와 羅城의 축조에 따라 개편된 것으로 보인다.
개경 영역의 기본구조는 대체로 왕의 활동공간인 궁궐, 그를 둘러싼 궁성(皇城)과 5부방리의 영역을 포함한 도성, 그리고 城外 지역에 해당하는 四郊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고려초부터 이러한 영역이 구획되지는 않았다.
5부의 구체적인 범위에 대해서는 자료의 부족으로 잘 알 수 없지만, 5부는 대체적으로 羅城의 南北門인 會賓門과 北城門을 잇는 선을 기준으로 하여 東·西部로 나누고, 다시 東西의 崇仁門과 宣義門을 잇는 선을 기준으로 하여 南·北部로 나눈 지역이었다.
35방명의 경우는 자료를 정리하여 검토하면, 대체로 현종 15년 당시의 방명은 예외적인 것을 제외하고는 고려전기까지 그대로 존속 사용되고 있었다. 坊名은 寺院의 이름이나 山川 내지는 그 이외의 어떤 다른 지형지물과 관련지어 붙어진 것이다.
里名의 경우, 현종 15년 당시의 자료에서 생략되어 있어서 구체적인 명칭을 알 수 없다. 다만 국가가 행정적으로 파악할 때는 공식적으로 某部 某坊의 '第幾里'라고 썼을 것이며,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고유명사(○○里, ○○洞)로 불리기도 했던 듯 싶은데, 후자의 칭호들 역시 관청이나 궁궐 또는 산천 등의 지형지물에서 유래하는 것이 대부분으로서 이들도 그렇게 큰 변화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고려후기처럼 새로운 방명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里名도 새로이 등장할 개연성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四郊지역은 성종 6년 5부방리제의 정리와 함께 구획되었다가 현종 15년 5부방리가 정비되고, 현종 20년 개경의 羅城이 완성되면서 대체적인 윤곽이 드러난 것으로 파악된다. 이 지역이 王京의 배후 기지로서 지배층의 관심이 집중되면서 개발과 보호라는 차원에서 지속적인 노력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현종대 이후부터 창건되는 사찰들이 교외에 집중적으로 분포되는 경향은 이를 뒷받침해 준다. 이러한 점은 도성내의 인구집중과 공간부족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되며, 그런 때문에 자연히 도성 밖에까지 5부방리의 영역으로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개경의 5부방리의 영역변화, 즉 5부방리의 확대과정은 경제단위의 확대, 인구의 증가, 행정체계의 고도화라는 도시의 발전적 측면에서 재검토해야 될 것으로 보인다.





고려전기 개경 절의 위치와 성격

박 종 진 (숙명여대)





머 리 말

고려시기의 불교는 종교적인 면에서 지배적인 사유구조였을 뿐만 아니라 종교 외적인 면에서도 사회생활 전반을 규제하는 틀이었다. 이런 점에서 고려시기의 절은 종교적인 기능만을 하는 장소가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으로도 중요한 곳이었다. 당시 개경에는 수많은 절이 있었는데, 조선중기의 한 기록에는 유명한 절만도 성내에 300곳이 있었다고 하였으며, 현재 절 이름을 확인 할 수 있는 것만도 100개가 넘는다. 개경 절에 대한 대체적인 정리는 고유섭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고유섭은 일제말 개경을 답사하면서 쓴 {송도의 고적}에서 개경의 주요 절에 대해서 위치와 고적, 관련 자료를 정리하였는데, 이후에는 이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려초 개경에 절을 세운 의미에 대해서는 개경의 풍수를 검토하면서 풍수의 비보사상과 연결하여 검토한 글이 있다. 이병도에 의하면 당시의 인식에서는 순조롭지 못한 수덕을 진압하고 개경 전체의 지덕을 비보하기 위해서는 어떤 신비한 힘 곧 佛力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를 위해서 설치한 것이 절이라고 보았다. 또한 태조대의 절 창건을 태조가 경주 중심의 불교기반을 개경으로 재편하는 과정으로 본 글이 있다. 이외에도 귀법사의 창건을 광종 후반기의 개혁정치와 관련하여 검토한 연구와 현화사 흥왕사의 창건을 현종 문종대의 불교정책 속에서 살핀 연구가 있다.
개경 절의 위치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는 아직 없다. 이에 대해서는 태조가 창건한 절의 위치를 비보사상과 연결하여 설명한 글이 있을 뿐이다. 한편 왕실 願堂으로 설치한 개경 절은 대체로 왕릉과 가까운 지역에 설치되었다는 견해가 있는데, 이 글은 개경 절의 위치를 절의 기능이나 성격과 연관지어 검토한 것으로 주목할 수 있다. 앞으로 개경 절의 위치는 풍수지리설과 비보사상, 지리와 교통, 절의 기능과 성격 등을 종합하여 정리할 필요가 있다.
고려시기 개경의 절은 종교적 기능 외에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다양한 기능을 가졌다. 개경 절에서는 왕실의 상례와 제례를 비롯하여 팔관회·연등회 등 국가차원의 행사가 진행되었으며, 왕이나 공신 등 지배층을 위한 행사뿐 아니라 광범위한 사회계층을 위한 의식도 하였다. 최근 개경의 절이 군대 주둔지·훈련장소·요새지·관문적 시설·정치회합장소·행궁 등으로도 이용되었음을 관련 자료를 통하여 정리한 글이 주목된다. 이 글은 처음으로 절의 군사적 정치적 성격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다만 개경 절의 위치와 성격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지는 못하였다.
고려시기 개경 절에 대해서는 불교사의 범주에서 절에 대해서 직접 간접 언급하거나 미술사나 건축사의 입장에서 고려시기의 절에 대해서 검토하기도 하였지만, 개경의 절 자체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는 없다. 고려시기 개경 절이 가졌던 의미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절 자체에 대한 분석, 절의 위치에 대한 사회 경제적 의미 분석, 절의 다양한 기능 분석 등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는 그 기초작업의 하나로서 고려전기 개경 절의 위치와 성격에 대해서 정리하려고 한다.

1. 개경 절의 창건시기와 위치

고려전기에도 개경에는 크고 작은 많은 절들이 세워졌겠지만, 이 글에서는 고려전기 개경주변에 설치된 절 중 창건연대가 확실하고, 그 위치를 어느 정도 판단할 수 있는 곳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그 기준에 따라 만든 것이 뒤에 첨부한 <표> [ 고려전기 개경의 절]이다. 따라서 이 표에는 창건연대는 {고려사}에서 확인되지만 위치가 불명확한 신중원(924), 묘지사(927), 광흥사(936), 숭선사(954), 홍화사(963), 유암사(963), 삼귀사(963), 중광사(1012) 등은 제외되었다. 그렇지만 태조 2년에 都內에 창건된 10개의 절은 그 위치가 분명하지 않은 것도 포함시켰다. 그것은 당시 도내는 황성 주변 곧 개경의 중심부로서 그 위치의 대강을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다만 태조 2년에 창건된 10개의 절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三國遺事} 王曆에는 당시 창건된 10개의 절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通'으로 표기되어 있는 절의 이름이다. 이 절의 이름을 圓通寺로 보는 견해와 靈通寺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일단 영통사는 개경의 동북쪽 나성밖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이 절을 영통사로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 절의 이름을 원통사로 본 견해에 대해서도 문제가 제기된 적이 있으므로 그 이름을 여기서 원통사로 단정하기도 어렵다. 일단 이 글에서는 도내에 창건된 이 절의 이름을 잠정적으로 통설대로 원통사로 표기하였다.
개경 절의 위치는 나성 축성이전까지는 황성 안과 밖으로, 나성 축성이후는 나성 안과 밖으로 분류하였으며, 그 위치는 황성 나성 등 성곽을 중심으로 간단히 그린 개경 지도에 [표]에 부여한 번호로 표시하였다. 위와 같이 정리한 표와 지도를 중심으로 고려전기 개경 절의 창건시기와 위치에 대해서 3시기로 나누어 개략적으로 살펴보겠다.

1) 태조대 창건한 절의 위치와 특징

태조대에는 개경에 많은 절이 창건되었다. '訓要十條'에 따르면 태조가 절을 세운 이유는 부처의 힘으로 국가의 基業을 굳건히 하려는 것이었는데, 그 위치는 도선이 정한 山水의 順逆에 따라 정하였다고 하였다. 이것은 풍수지리설에 따른 裨補寺院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런 절이 태조대에 전국에 500개가 지어졌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개경에 창건된 절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태조대 개경에 창건된 절 중 창건연대가 알려진 것만도 태조 2(919)년에 法王寺, 慈雲寺, 王輪寺, 內帝釋院, 舍那寺, 普濟寺(大禪院), 新興寺, 文殊寺, 圓通寺, 地藏寺 등 10개의 절을 비롯하여 태조 4(921)에 大興寺, 태조 5년에 廣明寺, 日月寺, 태조 7(924)년에 外帝釋院, 九曜堂, 신중원, 興國寺, 태조 10(927)년에 묘지사, 태조 12(929)에 龜山寺, 태조 13(930)년에 安和寺, 태조 18(935)년에 開國寺, 태조 19(936)년에 광흥사, 內天王寺, 賢聖寺, 彌勒寺 등 모두 25곳에 이른다. 이 수는 [표]에 작성된 고려전기 개경에 창건된 주요 절의 2/3에 해당될 정도로 많다.
우선 주목되는 것은 태조대 창건된 절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개경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궁궐주변과 송악산록에 위치하였다는 점이다. 이곳은 5부방리로는 북부에 해당된다. 특히 태조 2년에 10개의 절을 都內에 창건하였다고 하였는데, 도내는 대체로 皇城(勃禦 城) 안으로 생각된다. 태조 2년에 창건된 것 말고도 개경 북쪽 천마산과 성거산 중간에 위치한 대흥사(태조4)와 장패문 밖에 창건된 개국사(태조18), 탄현문 안의 현성사, 유암산 기슭의 미륵사 4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궁궐과 송악산 주변에 위치하였다.
태조대의 절 중 개경 중심부에서 벗어난 개국사·현성사·미륵사는 통일전후시기에 창건한 것이고, 대흥사는 개경에서 북쪽으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다. 따라서 태조대에 창건된 절은 대체로 개경 중심부에 위치하였다고 하여도 크게 틀리지는 않는다. 이들 절 이름은 법왕방, 자운방, 사나방, 왕륜방, 내천왕방, 흥국방 등 북부의 방명과 일치하는 것이 많은 것도 주목된다. 이는 나중에 방명을 지을 때 초기에 창건된 절 이름을 따랐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동시에 고려초기 절의 창건은 도시의 구획과 발전에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하였음을 알려준다.
태조초기에 창건된 절이 대체로 궁궐 주변에 위치한 것은 태조가 절을 설치한 목적, 곧 당시 절의 기능과 연관된 듯하다. 우선 태조는 이들 절에서 팔관회(법왕사), 연등회(왕륜사), 제석신앙(내외제석원), 무차대회, 미륵신앙(미륵사), 첨성의식(구요당) 등 주요 불교행사를 분담시키고 각 종파의 근거지로 삼았다. 곧 태조는 개경 중심부인 궁궐주변에 절을 설치하고, 그곳에서 중요한 불교행사를 주관하게 하였는데, 이 자체가 정치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태조대에 고려전기의 주요 절 2/3가 창건된 것은 이 때 국가의 사원정책 구도가 일단 확립된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당시의 절은 궁궐 옆에 위치하여 아직 제도적으로 완성되지 않은 궁궐을 보완하는 기능도 하였다.
태조대 창건된 절 위치의 추이를 보면, 처음에는 개경의 중심부 곧 궁궐 주변에 설치하였으며, 점차 송악산 위쪽(귀산사, 안화사), 동남쪽(개국사), 동북쪽(현성사), 남쪽(미륵사)으로 옮겨졌다. 그 이유는 우선 통일을 전후하면서 개경의 도시 구조의 틀이 잡히면서 개경 중심부에는 국가에서 지원 받는 큰 절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통일전후시기인 935년 936년에 개경의 동북쪽에 현성사를 동남쪽에 개국사를 설치한 것은 개경방비와도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특히 당시엔 아직 나성이 축성되기 전이기 때문에 황성을 제외하고는 뚜렷한 방어시설이 없었던 것도 이와 관련하여 주목된다. 특히 당시는 후백제를 견제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동남쪽에 대한 방어시설이 필요했을 것이다. 개국사가 설치된 자리는 나중에 나성의 동남쪽 문인 보정문(장패문) 밖으로 개경에서 동남쪽으로 내려가는 주요한 길목이었다. 따라서 이곳은 교통의 요지일 뿐 아니라 개경의 방어를 위해서도 중요한 지역이었다.

2) 광종대-현종대 창건한 절의 위치와 특징

광종-현종대에 창건된 절로는 광종2년(951)의 봉은사·불일사, 광종 5년의 숭선사, 광종 14년의 홍화사·유암사·귀법사, 목종 2년의 진관사·숭교사, 현종 3년의 (혜일)중광사현종 9년의 현화사 등이 있었다. 우선 광종대 창건된 봉은사는 황성의 남쪽, 불일사·귀법사는 나성의 동북쪽에 위치하였다. 태조의 원당으로 창건되어 대대로 연등회를 열었던 봉은사와 유암사는 비교적 궁궐과 가까운 위치에 지어졌지만 이 역시 황성 밖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반면 불일사와 귀법사는 궁궐의 동북쪽 즉 나성의 탄현문 밖에 지어졌으며, 목종대의 진관사와 숭교사는 용수산 기슭에 창건되었다. 이곳들은 대체로 개경의 동북쪽에서 남쪽에 이르는 산록으로 당시 개경의 동북쪽과 남쪽의 경계에 해당한다. 또한 이곳은 대체로 나성의 성곽이 지나가는 곳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창건된 절의 위치는 대체로 태조 후반기 이후의 추세와 비슷하다. 즉 개경의 도시정비가 진전되면서 개경 중심부에는 국가가 지원하는 큰 절이 들어서기 어려웠기 때문에, 봉은사 정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궁궐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지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한 개경 주변의 동북쪽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산록에 지어진 불일사·귀법사·진관사·숭교사 등은 개경의 외곽을 지키는 의미도 가졌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 때까지는 아직 나성이 축성되기 이전인 것을 고려하면 이 절들도 태조대의 현성사 개국사와 마찬가지로 개경 방어의 거점이었을 것이다. 한편 현화사는 현종이 자기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창건한 절로서 나성의 동북쪽 밖 곧 귀법사 동북쪽에 창건되었다. 이곳은 현종이 자기 아버지인 안종 욱의 능(건능)을 이장한 근처이기도 하다. 따라서 현화사는 왕실 원당으로서 정치세력·불교세력의 개편과 결집의 구심점이 되었음은 물론, 현화사는 귀산사·안화사·귀법사 등 산록에 위치한 다른 절과 마찬가지로 왕이 사냥하고 연회를 베푸는 왕실의 後苑으로도 이용되었다.

3) 현종 이후 창건된 절의 위치와 특징

현종대 나성 축조 이후에 창건된 주요 절로는 문종대의 흥왕사(문종 21;1067), 숙종대의 국청사(숙종 2;1097), 선종대의 홍호사(선종 10; 1093), 예종대의 경천사·천수사 등을 들 수 있다. 이 때 창건된 절은 모두 나성 밖에 위치하며, 일부는 개경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창건된 것도 있다. 예종대 경천사는 나성의 서남쪽 밖에 창건되었으며, 숙종대  국청사는 나성의 서쪽 밖에 위치하여 개경 서쪽의 관문 기능도 하였다. 또 예종대의 천수사는 나성의 동쪽 밖에 세워졌으며, 문종대의 흥왕사는 개경의 동남쪽에 있는 진봉산 기슭에 창건되었다. 이 때 세워진 절들은 나성 밖의 국방과 교통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즉 국청사는 개경의 서쪽 관문에 위치하였는데, 이 이곳은 교통과 방어의 요지였다. 천수사 역시 남쪽으로 내려가는 교통의 요지였다. 흥왕사는 문종이 덕수현을 이전하고 그곳에 절을 지으면서 많은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은 곳이다. 특히 흥왕사가 주목되는 것은 창건 후 얼마 되지 않은 문종 24년 6월에는 성을 쌓은 점이다. 이것은 흥왕사가 처음부터 남쪽의 이궁 역할을 하도록 설계되었음을 의미한다. 거란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왕이 개경 남쪽으로 피했던 경험을 가졌던 고려 왕실은 개경 남쪽에 왕이 피할 수 있는 거점이 필요하였고, 이것이 흥왕사의 창건과 함께 실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고려전기 개경 절의 창건 위치는 개경의 중심부에서 점차 사방으로 퍼졌으며, 더 나아가서는 나성 밖으로 나갔다. 이것은 개경이 황성에서 나성, 4郊로 확대되는 과정과 일치한다. 아울러 나성이 세워지기 이전에 교통과 방어의 거점 구실을 하던 절 대신 나성밖에 새롭게 세워지는 절들이 그 기능을 대신하게 되다. 결국 이런 흐름은 개경 절의 기능이 시기에 따라 부분적으로 변화하였을 가능성을 알려준다.

2. 개경 절의 위치와 기능

고려전기 개경 절도 불교 사원 본래의 종교적 기능을 하였을 것은 말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한 개경의 주요 절에서는 팔관회 연등회 등 국가 차원의 불교행사가 거행되었으며, 이 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에 개경 절은 자연히 교역과 만남의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 개경의 주요 절은 왕실이나 고위 관료의 원당으로 운영되었으며, 몇몇 주요 절에는 역대 왕의 眞殿이 설치되었다. 이런 경우 이들 절은 국가로부터 많은 경제적 지원을 받았으며, 진전이 모셔진 절에는 위숙군이 파견되었다. 이 외에도 개경 절에는 賑濟場이 설치되어 구휼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여기서는 이와 같은 개경 절의 전반적인 기능을 염두에 두면서, 그 위치와 관련된 절의 기능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1) 개경 중심부에 위치한 절

개경 중심부는 대체로 궁궐주변, 황성안팎, 개경의 십자로 주변을 말한다. 여기에 포함되는 대표적인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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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유람 (2005-03-04 17:16:05)  
..로는 태조 2년에 창건된 법왕사·왕륜사·보제사를 비롯하여 흥국사 봉은사를 들 수 있다. 이들은 봉은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태조대에 창건되었으며, 보제사와 봉은사를 제외하면 대체로 궁궐에서 가까운 황성 주변에 위치하였다.
이 절들은 연등회(흥국사, 봉은사), 팔관회(법왕사), 제석도량(내외제석원), 기우제(보제사) 등 주요 국가차원의 불교행사를 주관하였을 뿐 아니라 궁궐과 관청 기능을 대행하기도 했다. 흥국사, 법왕사, 왕륜사 봉은사 등에서는 주요한 정치 행사가 개최되거나 정치적 논의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것은 개국초 아직 궁궐이나 관청 등이 정비되지 못한 것이 하나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후 고려의 왕은 절에 자주 행차하여 한동안 머무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런 연유로 고려왕조 내내 개경의 절은 중요한 정치 공간으로 이용되었다. 다만 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기 때문에 체계적인 정리는 어렵다. 특히 고려전기에 국한하면 그 자료는 더욱 없다. 따라서 여기서는 고려 전체 시기의 단편적인 기록을 모아서 그 추세의 대강만을 살펴보려고 한다.
우선 이들 절에서는 국가차원의 중요 행사가 거행되었다. 국가차원의 행사라 할 수 있는 연등회 팔관회 제석도량 기우제 등이 봉은사·법왕사·내외제석원·보제사 등에서 거행된 것을 비롯하여, 왕이 흥국사에서 신년인사를 절에서 받기도 하였으며, 봉은사에서는 신년 축하예식의 연습이 거행되기도 하였다. 또한 이들 절은 왕의 정치 공간으로도 이용되었는데, 절에서 교서를 반포하거나, 죄인을 국문하고, 석방한 경우도 보인다. 또한 충선왕이 봉은사에서 측근에 선물을 내린 경우나 공민왕이 봉은사에서 태조에 존호를 올린 것, 제석원 봉은사 등에서 왕사 국사의 인사를 단행한 것도 절이 왕의 정치공간으로 이용된 예이다. 또한 이들 절은 선위하거나 폐위된 왕의 임시거처로 이용되기도 하였으며 왕태후의 요양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예들은 궁궐 주변의 절이 궁궐의 기능을 대신한 경우라 할 수 있다. 봉은사에서는 군인을 선발하기도 하였으며, 물가와 도량형 조정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흥국사에서 군기검사를 한 예도 있다. 이것은 절이 관청의 기능을 대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종초 만적은 반란을 모의하면서 흥국사와 보제사를 거사 장소로 정하기도 하였고, 고려말 개혁파들은 흥국사에서 중요한 정치적 회합을 갖기도 하였다. 이것은 흥국사 보제사가 모두 개경의 중심부에 위치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개경 중심부에 위치하였던 봉은사 흥국사 등은 주요 국가차원의 불교행사를 주관하였을 뿐 아니라 궁궐과 관청 기능을 대행하기도 했으며, 정치 공간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2) 나성 지역에 위치한 절

나성이 축성되기 이전에 나성 지역에 창건된 절로는 동남쪽의 개국사(935), 동북쪽의 현성사(936), 남쪽 용수산 기슭의 진관사(999), 숭교사(1000)가 대표적이다. 이 절들이 창건된 시기는 태조 후반과 목종대이다. 우선 태조 후반에 창건된 개국사 현성사의 위치는 개경에서 밖으로 나가는 주요 교통로였다. 즉 개국사가 설치된 곳은 개경에서 동남쪽으로 가는 길목이었으며, 현성사가 설치된 곳은 동북쪽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현종대 나성을 쌓으면서 개국사 근처에는 장패문이 현성사 부근에는 탄현문이 각각 세워졌다. 개국사는 현성사가 위치한 동북쪽 보다 교통상 더 중요한 곳이었다는데, 이는 남쪽으로 가는 육로의 길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곳에는 많은 사람과 우마가 오갔을 것이다.
이제현의 [개국율사중수기]에 의하면 이곳은 三鉗의 땅 곧 세가지의 꺼리는 땅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3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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