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자연환경과 행정구역 특징좀 알려주실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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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3.10.21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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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살 은주는 왜 유서를 써야 했나-

 

 

이상흔 조선뉴스프레스 인터넷뉴스부 기자

  

입력 : 2013.10.21 10:27

수정 : 2013.10.21 15:41 

 

 

함경북도에 은덕에서

서울까지 생사를 넘나든 9년간의 탈북 이야기

 
 
미국 샌디에고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할 때의
김은주씨. 은주씨는 최근 북한에서의 굶주림 경험과 목숨을 건 탈북 등9년간의 탈북이야기를 담은
 <열한 살의 유서>를 펴냈다.

 

 

 

 

 

 

 

 

 

 

 

 

 

 

 

 

 

 

 

 

 

 

 

 

 

 
1997년 6월 22일,KBS의 <일요스페셜>이란 방송을 본 국민은 경악했다.
그동안 말로만 들어오던 북한의 대기근 현실이 생생한 영상을 통해 안방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강변에서 탈진한 채 쓰러진 어머니와 그 품을 파고드는 젖먹이 아이,
영양실조로 금방이라도 쓰러질듯한
깡마른 꽃제비들이 장마당의 더러운 시궁창에 떨어진 밥알을 주워 먹는 모습,
이들을 철저히 외면하는 주변 사람들,
한 바가지의 옥수수 가루와 나뭇잎으로 목숨을 이어가는 식구들,
그리고 살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다가 경비원에게 사살당한 채 강을 떠다니는 시신들···.

한마디로 ‘
인간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북한은 김일성이 죽기 전인(1994년)인 1992년부터 이미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었고,
1997~98년에는 기근이 거의 절정에 달했다.
비공식 통계에 의하면 1997년에 이미 중국에는 20만 명에 이르는 북한 식량난민들이 넘어와 있었다.
하지만 북한 당국은 이런 대기근의 참상을 외부에 철저하게 숨겨왔다.
대다수의 우리 국민도 이날KBS가 방영한 영상을 보기 전까지는
북한의 식량난과 대량아사를 그저 ‘먼 나라’ 이야기처럼 느끼곤 했었다.
 
 
1997년 KBS '일요스페셜'에 소개된
    북한 꽃제비.

 

 

 

 

 

 

 

 

 

 

 

 

 

 

서강대 4학년 졸업반인 김은주(27)씨는

1997년과 98년의 대량 아사(餓死) 시기에 모질게 살아남은 소위 ‘꽃제비’ 중의 한 명이다.

서강대 부근 한 커피숍에서 만난 은주씨는 키가 또래 친구들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작았지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저 평범한 대학생의 모습이었다.

인터뷰 내내 보인 밝은 모습에서 굶주림과 목숨을 건 탈북,

그리고9년간의 힘겨운 타국 생활을 견뎌낸 과거가 숨겨져 있다는 게 쉽게 연상이 되지 않았다.

◇11살의 유서, ‘엄마 기다리지 못해서 미안해. 엄마 용서해’
함경북도 은덕에서 태어난 은주씨는 11살 때인 1997년 11월 아버지를 영양실조로 잃었다.

아버지를 잃은 은주씨 가족에게 남은 삶은 ‘지옥’ 그 자체였다.

목숨을 보전하는 것만이 은주씨와 언니,

그리고 어머니 세 모녀의 유일한 목표가 되었다.

은주씨 어머니는 처음에는 집안에 남은 세간을 팔아서 연명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한계에 부딪혔다.

은주씨와 언니는 학교도 다닐 수 없었고 온종일 먹을거리를 찾아다니는 데 모든 시간을 쏟았다.

심지어 아파트에 키우던 토끼 철조망에 토끼배설물과 함께 굳어 있던 나물 쪼가리까지 골라서 먹었을 정도였다.

그렇게 한 달을 버티던 어느 날

은주씨 어머니는 언니를 데리고 중국인이 많이 드나들던 나진ㆍ선봉(경제특구) 지역에 가서

음식을 구해 오겠다며 집을 나섰다.

어머니가 은주씨에게 남긴 음식은 옥수수 30알 정도(두부 한모 살 수 있는 돈) 였다.

어머니는 “

옥수수를 하루에 열 알씩만 먹으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텅 빈 집안에는 11살의 야윈 은주씨만 남아 있었다.

하루,

이틀,

사흘···.

식량을 구하러 간 어머니는 엿새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어린 은주씨였지만,

자신이 분명 죽어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은주씨는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에 대한 서운함과 원망하는 마음,

그럼에도 보고 싶은 어머니에게 마지막 힘을 모아 유서를 남겼다.

‘엄마 죽을 것 같아요.

엄마 기다리지 못해서 미안해.

엄마 용서해.’

열한살의 은주씨는 그렇게 유서를 썼다.

그리고는 차디찬 방다박에 이불을 덮고 누워서 죽음을 기다렸다.

몇 시간 후 흐릿한 의식 속에 인기척이 들렸다.

마치 기적처럼 어머니와 언니가 돌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 손에는 은주씨의 목숨을 구할만한 것이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어머니는 “

다 같이 죽자”며 추운 아랫목에 딸 둘을 눕히고 같이 이불을 덮고 누웠다.

나진ㆍ선봉에 가서도 음식을 구하지 못했으니 마지막 희망까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굶주림으로 새로운 묘지가 즐비한 북한의 어느 야산.
그나마 이렇게라도 묻힐 수 있으면 행운이다.
은주씨는 장마당에서 죽은 이들을 손수레에 싣고
한 구덩이에 몰아서 묻는 장면을 수없이 보았다고 한다.

그렇게 아침이 밝았다.

하지만 세 모녀의 목숨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전날 같이 죽자던 어머니는 무엇인가 결심했는지 ‘

위대한 수령’과 ‘친애하는 지도자’의 초상화가 든 액자를 떼어냈다.

어머니는 돌이킬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었다.

어머니는 두 영도자의 사진은 불태우고,

액자를 내다 판 얼마간의 돈으로 음식을 마련했다.

집에 마지막 남은 세간인 농까지 땔감으로 쪼개서 팔고 나자 더는 팔 것이 없었다.

세 모녀는 구걸하거나,

땔감을 구해 팔고,

풀을 뜯고,

버섯을 캐고,

쌀과 옥수수를 훔치려고 들판을 헤매며 모진 목숨을 연명했다.

꽃제비가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언제까지나 버틸 수는 없었다.

은주씨 어머니는 마침내 북한 땅에서는 더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탈북을 결심한다.

무슨 정치적인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살고자 하는 본능이 이들 세 모녀를 조국과 고향을 떠나도록 만들었다. 당에 대한 배신의 대가가 두려웠지만,

굶어 죽는 것보다는 강을 건너다 총에 맞아 죽는 것이 나았다.

1999년 세 모녀는 두 번의 시도 끝에 두만강을 건너 북한을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두만강을 무사히 건넜지만…

 
 
김은주씨의 탈북 이야기를 다룬 <열한 살의 유서>
 
 
 
 
 
 
 
 
 
 
 
 
 
 
 
 
 
 
은주씨는 자신과 가족이 겪은 이야기를 엮어 지난 10월 4일
 <열한 살의 유서>(씨앤아이북스)라는 책으로 출간했다.
원래 은주씨의 이야기는 프랑스의 일간지
<르 피가로>의 세바스티앙 팔레티 서울특파원을 통해 지난해 초 프랑스에서
‘북한 지옥탈출 9년’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이어 노르웨이에서도 출간되었고,
유럽의 관심을 끌자 한국에서 역으로 번역 출판이 된 것이다.
은주씨 말이다.

“저도 저와 가족의 이야기가 책으로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제가 겪은 일이 여느 탈북자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에요.
책을 쓰게 되면 우리 가족의 이야기가 공개될 수밖에 없다는 것도 걱정했었습니다.
하지만 고통받는 북한 주민을 생각하면 우리 탈북자들이 마냥 침묵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북한 인권이 개선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작은 목소리라도 내야 합니다.
개인과 가족에게는 아픈 기억이지만 북한 사람들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그날까지
작은 힘이라도 보태야 해야 하기에 저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게 되었어요.”

강을 무사히 건넜지만, 그곳에는 또 다른 ‘지옥’이 펼쳐졌다.
이들을 반기는 사람도,
음식을 주는 사람도 없었다.
죽음을 각오한 탈북이었지만,
낯선 중국에서 사는 것은 배고픔 하나만을 해결할 수 있을 뿐 그 외의 모든 것은 잃어야만 했다.
생계가 막막했던 세 모녀는 결국 인신매매에 걸려 어느 중국인 농부의 집으로 팔려갔다.
두 딸을 지키기 위해 은주씨 어머니는 원하지 않은 사람과 살아야 했고, 그곳에서 아들(은주씨 남동생)을 낳았다.

은주씨는 “의붓아버지와 함께 산 3년 동안 ‘북한에서 온 거지’라는 말까지 들으며 참고 견뎌야 했다”고 한다.
배고픔은 해결 되었지만 인간으로서의 대우는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럴 때면 뒷산에 올라가 하늘의 별을 향해 아버지를 부르며 목 놓아 울었다.
하지만 그런 생활도 3년이 가지 않았다.
2002년 3월 30일,
마을 주민 누군가의 밀고로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북한으로 넘겨졌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거지’, 조국에서는 ‘인간쓰레기’ 취급

 
2012년 2월 23일 서울 종로구 효자동 주한 중국대사관 앞에서 탈북자 김은주씨가 ‘
중국 인민들에게 전하는 호소문’을 읽으며 감정이 북받치는 듯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은주씨는 “탈북자들의 죄는 배고픔을 느낀 것뿐”이라며“
중국 정부가 탈북자 강제 북송을 중단하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조선DB.
‘중국 아이까지 낳았는데 조금의 아량은 베풀어 주겠지.’

헛된 기대였다.
중국 변방대(북송할 탈북자들을 모아 놓는 곳)에 갇혀 있는 5일 동안 체포된 탈북자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우리는 세상에 쓸모없는,
그들을 귀찮게 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어요.
그들은 온갖 욕설을 퍼부었고,
남자들을 가두어 둔 에서는 맞아서 괴로워하는 신음이 들렸습니다.
맞아야 하는 정당한 이유도 없었어요.
어쩌면 ‘
정당함’이란 단어 자체가 우리에게 해당하지 않는 것이었어요.”

북송되어서는 보위부에서 조사를 받았다.
조사 중 하나인 신체검사는 알몸 상태에서 진행됐고,
속옷부터 생리대까지 찢어가며 모든 곳을 뒤졌다.
 
   
  2005년 자유북한방송은 북한군 초소의 군인들이 탈북 여인을
   구타하며  취조하는 동영상을 입수해 방영했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오직 돈을 찾아내기 위한 것이었어요.
우리는 그런 모욕을 당하면서도 수치스러움을 느껴서도 안 되고,
수치스러워할 자격도 없는 존재였어요.
내가 나고 자라고,
그토록 그리워하던 내 나라에서 이런 ‘인간쓰레기’ 대접을 받은 것입니다.”

조사가 끝난 후에는 5~6평 남짓한 감옥에 갇혔다.
화장실에서 나는 냄새는 지독했다.
한쪽 벽은 쇠창살로 되어 있어 밤낮없이 감시원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은주씨는 “
인간으로서 부끄러움,
민망함과 감정은 북송 시작부터 금지된 대상”이라고 말했다.

15일 후 노동단련대로 이송되었다.
중국에서 젖도 떼지 못한 아이를 두고 북송된 은주씨 어머니는 극심한 젖앓이를 했지만,
감히 아프다는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견뎌야 했다.

“어머니는 강제노동과 젖앓이로 사상교육 받던 중 쓰러지셨어요.
정말 어머니를 잃는 줄 알고 너무나 두려웠지만 마음대로 울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죽음 어쩌면 당연하고 마땅한 것이었어요.
죽는다고 한들 누구하나 슬퍼해 줄 사람도 없었어요.”

은주씨 어머니는 수감자가 사온 주사를 맞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이후 은주씨 가족은 청진 도집결소로 이송됐다.
청진은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사시던 곳인데 모두 굶어서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도 집결소에 가서 새로운 사실을 알았어요.
우리가 북한 사람임을 증명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북한은 당시 식량난으로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기 때문에
3년 동안 소식이 없으면 죽은 걸로 간주하여 호적에서 삭제를 하였거든요.”

불행 중 다행으로 신분이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인해 은주씨 가족은 도망칠 기회를 얻었다고 한다.
마침 고향인 은덕에서 다른 죄수를 호송하러 안전원이 왔는데,
청진 보위부에서는 은주씨 세 모녀를 그 안전원에게 인도한 것이다.
2~3일 여정의 식비를 대며 일전 한푼 없는 세 명의 여성을 데리고 가야 했던
안전원의 난처한 입장을 은주씨 어머니는 역이용했다.
당시 북한은 죄수를 호송하기 위한 식량조차 호송 담당자가 마련해야 할 정도로 식량사정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은덕에서 온 보위부 요원을 설득했습니다.
어머니는 ‘
우리는 어차피 고향에서 사망처리된 사람들이다.
우리가 알아서 은덕까지 갈 테니 놓아주면 당신도 식량 부담을 덜 것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얼마간 설득하자 정말 그 사람이 우리를 놓아주었습니다.
말 그대로 기적이 일어난 것이죠.”

2002년 6월 다시 중국으로 탈출에 성공하여 강제북송의 고통을 끝났지만,
은주씨 가족의 마음속에 더는 고향에 대한 동경과 그리움은 남아있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북한에서 온 거지’ 대접을 받았고,
고향 북한에서는 ‘인간쓰레기’ 취급을 당했기 때문이다.

재탈북에 성공한 은주씨 가족은 돈을 모으기 시작했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2006년 브로커에게 1인당 2만 위안을 내고 몽골의 고비사막을 거쳐 울란바토르로 탈출,
이후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재탈북 후 따로 떨어져 도피생활을 하던 은주씨 언니는 2008년 한국으로 들어와 가족이 재회했다.

◇“어머니와 헤어지지 않았으니 우리는 운이 좋은 편”

 
 출판 일로 영국을 방문했을 때.
 
은주씨는 어머니가 중국인에게 팔려가고 강제로 새 시집을 갔는데 그것조차도 ‘운이 좋은 경우’라고 했다.

“탈북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브로커들에게 걸려들게 되어 있습니다.
인신매매에 팔려가 매음굴에서 매춘을 강요받는 경우도 많았거든요.
우리도 인신매매하는 자들의 손에 떨어졌지만,
지금 우리 가족이 함께할 수 있는 것은 엄청난 행운입니다.
제가 아는 아주머니의 딸이 16세였는데,
팔려간 중국 집에서 딸이 다시 팔려서 어디론가 사라졌어요.
브로커들은 어차피 돈이 목적이기 때문에 딸을 강제로 납치해서 다른 곳으로 팔아넘긴 것입니다.
이처럼 모녀지간도 나이가 차면 각자 따로 팔려가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나와 언니는 그나마 어렸기 때문에 어머니랑 항상 붙어 있을 수가 있었죠.”

은주씨는 한국에 온 후 서울 강서구에 있는 일반 고등학교(세현고)에 다녔다.
우리 나이로 스물두살의 늦은 나이에 고등학생이 된 것이다.

“북한을 탈출한11살 이후 중국을 떠돌면서 학교에 다녀 본 적이 없어요.
한국에 와서 진로를 선택할 때 고민도 많았어요.
또래보다 4~5살 많은데 과연 적응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어쨌든 고2에 편입했고,
배운다는 열정이 가득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힘들었어요.
열정과 상관없이 수업을 들어도 무슨 말인지 아는 것이 없으니까 너무 힘들었죠.
그래도 쉬는 시간마다 짬을 내서 영어를 가르쳐준 선생님 덕분에 따라갈 수 있었던 같아요.”

은주씨는 2009년 서강대에 입학해 중국문화와 심리학을 전공했다.
지금은 취업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아동심리학자가 되는 게 꿈이에요.
북한에서 중국에서 엄마 없이 자라는 아이들이나 버려진 어린 소년소녀들을 너무나 많이 보았어요.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기 때문에 이들의 마음을 치료하고 희망을 주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 꿈은 잠시 미뤄두고 일단은 취업을 할 생각이에요.”

-은주씨는 기억력이 정말 좋은 것 같네요.
어려웠던 시절을 그렇게 자세하게 기억하면 힘든 점도 있을 텐데.
“저는 탁아소에 다닐 때도 기억을 해요.
남한에서 삶은 대체로 큰 굴곡이 없는 삶이잖아요.
저도 이런 상황에서 살았으면 옛날 일을 세세하게 기억 못 할지도 모르겠지만,
탈북자로서 고향을 떠나면서 한시라도 고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어요.
중국에서 힘든 도피생활을 하면서 고향과 어릴 적 추억이 그리웠어요.
밤이면 우리 모녀 셋이 늘 고향 이야기를 하고,
북한 노래를 흥얼거리곤 했어요.”

-북한의 식량 위기는 1990년 중반부터 있었는데 왜 1997년 갑자기 집안 사정이 어려워졌나요?
“물론 이전부터 배급이 줄어들어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집은 어머니가 병원 식당에서 일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먹고살 만했습니다.
어머니가 늘 식당에서 쌀과 밥을 가져오다 보니까 크게 굶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199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배급은 거의 끊어졌고,
병원에서도 식량이 떨어져 환자들에게 밥도 못 주다 보니까 집에 가져올 양식이 없어졌습니다.
이때 아버지가 영양실조로 병이 나서 쓰러졌어요.”

◇당의 명령에 충성한 고지식한 사람부터 죽어나가
은주씨의 아버지는 1ㆍ21일 화학공장의 노동자였다.
무기를 만드는 공장이었지만,
식량난으로 배급이 제대로 공급이 안 돼 은주씨의 아버지는 영양실조로 몸이 쇠약해졌고,
늑막염으로 큰 고생을 했다고 한다.
병으로 공장에 나가지 못하니까 그나마의 배급도 완전히 끊어졌다.

“1995년 이미 외할아버지가 굶주림으로 쓰러지셨는데 노인과 어린이부터 차례로 죽어나갔습니다.
간혹 몇 개월마다 한두 킬로씩 배급이 나와도 그걸로는 버틸 수가 없죠.
식량난 당시 북한 체제에 충성하고,
당의 명령을 충실하게 따른 고지식한 외할아버지와 아버지 같은 사람들부터 가장 먼저 굶어 죽었습니다.
배급은 없는데 당에서 다른 살 방도는 주지 않으니까 그냥 꼬꾸라진 것이죠.”

-그런 상황에서 체제에 대한 불만은 없었나요?
“불만도 뭘 알아야 가질 게 아닙니까.
북한은 외부 정보가 다 차단되어서 뭐가 왜 잘못되었는지 사람들이 자각하지 못합니다.
당시에 우리가 못사는 것은 맞지만 ‘
미국놈과 남조선놈,
간첩 때문에 농사를 망쳤다’고 당이 선전했기 때문에 그렇게 믿고 있었어요.
설사 원망의 대상이 있다면 미국인데 미국을 어떻게 하겠어요.
당시 대부분의 북한 사람들은 굶어 죽으면서도 추호도 장군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먹을 것을 찾아 풀뿌리를 캐고 다니는 북한 어린이들.
하지만 굶주림과 싸우면서도 은주씨와 북한 주민들이 추호도 의심과 원망을 하지 않았던 ‘
위대한 장군님’은 밤마다 기쁨조에 둘러싸여 파티를 열고,
프랑스산 고급와인과 산해진미를 먹고 있었다는 사실을
당시 김정일의 요리사를 지낸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씨가 증언을 하면서 세상에 밝혀졌다.
은주씨도 이때 받은 배신감을 책에서 언급해 놓았다.

◇먹을 것을 구할 자유도 주지 않은 ‘자애로운 아버지’
-지금의 북한 식량 사정은 어떤가요?
굶어 죽는 사람은 많이 줄어들었다고 하는데.
“적어도 그때보다는 아사자가 많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확실할 거에요.
그렇다고 생활여건이 나아진 것은 아닙니다.
다만 1990년대 당시는 배급이 갑자기 끊기면서 사람들이 요령이 없었어요.
장사도 할 줄 모르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도를 모르고 있다가 그냥 굶어 죽은 겁니다.
하지만 그 후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스스로 살아갈 방도를 조금은 터득하면서
장사를 통해 식량을 얻는 방법을 찾은 것이죠.”

2000년 북한은 노동당 창건 55주년을 기념하며 ‘고난의 행군’이 끝났다고 선언하였다.
하지만 국제인권단체는
2000년 이후에도 60만명 이상이 아사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국내외 인권기구는 1990년대 중반에서
2000년까지 소위 말하는 고난의 행군 시기에는 약 200만명에서 300만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은주씨 책에는 고난의 행군시기 아사자가 50만명이나 100만명이라고 했는데요.
“어느 국제기구 통계를 인용한 것인데,
아사자 통계는 저도 정확하게 알기가 어렵습니다.
기준을 잡는 시점에 따라 큰 차이도 나고요.
굶어서 죽는 것도 죽는 것이지만,
못 먹어서 영양실조와 심지어 얼어 죽는 것도 모두 굶어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사람이 든든하게 먹으면 쉽게 얼어 죽지 않거든요.
그렇게 계산하면 수백만 명의 아사자가 틀린 말은 아닐 거에요.”

김정일은 소위 고난의 행군시기 김정일은 체제유지에 필요한 약 500만 명에게만 식량을 주고,
나머지 주민에게는 배급을 끊어 버렸다.
그러면서도 식량을 얻기 위해 탈북한 자들을 가혹하게 처벌했다.
사실상 주민들을 굶겨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주민들의 목숨이 낙엽처럼 떨어질 때도
김정일은 북한 전 주민을 3년간 먹이고도 남는 옥수수 600만톤을 살 수 있는 돈을
김일성의 시신 보존처리 비용으로 사용했다.
김은주씨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북한에서는 굶어 죽을 자유조차 없습니다.
자살을 하는 것도 반역자가 되기 때문에 할 수도 없어요.
‘자력갱생’하라고 했는데 못했으니 그것도 죄라면 죄인 것이죠.
북한 당국은 그 상황에서 먹고 살기 위해 탈출을 한 주민들을 잡아다가 혹독한 처벌을 했습니다.
말로는 ‘
아버지가 자식을 어떻게 버리겠는가’ 하면서 실제는 그 반대의 행동한 것이죠.
자식을 먹여 살리지 못하는 아버지라면
자식이 스스로 먹고살기 위해 식량을 구할 자유는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한마디로 ‘
너는 내 밑에서 죽으라’는 건데 그게 어떻게 아버지입니까.”

◇“북한을 변화시키는 데는 남한 드라마가 최고”
-당시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는 대가로 남한과 미국에서 엄청난 식량이 들어가기 시작했는요.
“탈북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면 2% 정도가 남한과 미국에서 보내준 구호식량을 ‘보았다’고 대답한답니다.
 ‘받았다’가 아니라 그저 ‘보았다’는 것이죠.
중간에서 간부들이 다 빼돌렸는지 평양에만 주었는지 모르지만,
탈북자 중에 그걸 받았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평양과 지방은 그야말로 다른 세상입니다.
극과 극이죠.”

-두 번째 탈북을 하고, 왜 바로 남한으로 올 생각을 하지 않았나요?
“우리는 조선족처럼 합법적으로 남한으로 시집을 갈 수도 없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회를 보며 돈을 모았고
2006년 알고 지내는 언니가 친구가 브로커를 소개해주어서 그를 통해 남한으로 온 것입니다.”

-중국에서 팔려간다는 것은 돈을 받고 간다는 뜻인가요?
“탈북자들이 자기가 돈을 받으면 팔려가는 게 아니죠.
인신매매 당사자들은 돈을 구경 못합니다.
돈은 브로커들이 가져가죠.

북에서 온 여자들에게 브로커들이 ‘
당신들이 살길은 시집가는 길밖에 없다’고 집요하게 설득을 해요.
그렇게 설득당해서 가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는 그냥 자기들끼리 어디론가 팔아버립니다.
많은 북한 처녀들이 중국 농촌의 나이 많은 남자에게 팔려가서 갇혀 지내거나,
반강제로 애를 낳고 살고 있습니다.”

은주씨는 “
한국으로 오기 위해 몽골에 도착했을 때 21살에 세 번이나 팔려 다니며 애까지 낳은 후
탈출한 여자를 직접 만났다”며 “
나는 그 친구를 보면서 중국에 있는 탈북 여성들의 삶을 더 깊이 절감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국제구호 단체가 찍은 영양실조로 고통받고 있는 북한 어린이들.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난민 어린이와 다를 바가 없다.
-북한 주민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가장 좋은 방법이 중국을 통해서 한국의 드라마나 외부 정보를 지속적으로
북한으로 들여보내서 내부로부터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북한 체제를 심하게 비난하는 선전물은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지만,
남한의 드라마는 문화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북한 주민들이 빨리 그리고 쉽게 받아들일 수 있어요.
드라마를 보면서 북한 주민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외부 세계랑 비교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봅니다.”

-북한의 일반 주민들이DVD를 사서 보기에는 비용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북한에는 미디어가 지하시장 형태로 존재합니다.
그러니까 중국을 통해서 저렴한 비용 혹은 무료로 남한 드라마를 북으로 되도록 많이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그러면 최소한 공짜는 아니더라도 더 좀 더 싼 값으로 더 많은 사람이 접할 수 있으니까요.”

◇통일비용만 생각하는 남한 친구들이 야속하기도
은주씨는 “
남한의 또래 대학생들이 북한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며 “
한편으로 이해는 가지만 서운한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나마 탈북자와 북한에 대해서 관심이라도 가지는 친구가 있으면 고마워서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고 노력합니다.
정작 뉴스에는 북한관련 소식이 하루도 빠짐없이 나오지만,
우리나라 대학생과 청소년은 북한에 대해 거의 무관심해요.
북한에 대해 듣고 싶어하는 친구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이야기해주는데 그런 친구가 많지는 않아요.
그 점이 아쉬워요.”
 

 
 
 
 
 
 
 
 
 
 
 
 
 
 
 
 
 
 

 
 
 
 
 
 
 
 
  
-남한의 친구들의 통일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친구들과 통일 이야기를 하면 일부 친구들은 대뜸 ‘통일비용’에만 초점을 맞춰요.
이런 모습이 너무 이기적으로 보일 때가 많죠.
서운해야 한다고 해야 하나 씁쓸하다고나 해야 하나.
아무튼 무척 안타까워요.
친구들이 ‘
왜 내가 내는 세금으로 통일비용을 부담하느냐.
다음 세대가 하면 되지’라고 말할 때는 정말 할 말이 없어요.”
은주씨는 “
북한은 재건이 필요하고,
우리는 기술력이 있으니까 통일이 되면 일자리도 늘어나고 내수시장도 확보되며,
더욱이 지하자원을 잘 활용할 수 때문에 늦어도 10년이면 북한의 경제가 남한 수준으로 회복할 수 있다”며 “
젊은 친구들이 통일을 무조건 부담이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좀 더 멀리 보는 안목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기자는 영양실조에 걸린 북한 어린이들의 사진을 은주씨에게 보여주었다.
은주씨는 “
나는 사진이 아니라 북한에 있을 때 매일 이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았다”며 다음과 말했다.

“이모의 아들도 영양실조로 걷지를 못했어요.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죠.
한국에 와서 마음이 씁쓸한 것이 바로 이런 북한 어린이들의 모습을 보는 거에요.
깡말라 죽어가는 아프리카 어린이들과 피부색만 다른 것이 지금 북한의 어린이라고 생각하면 되거든요.
하지만 먼 곳에 있는 아프리카 어린이는 도울 수 있지만,
형제·자매인 북한의 어린이는 도와줄 길이 없잖아요.
그 점이 제일 안타깝죠.”

은주씨는 “
남한에서 북한과 통일 교육에 대한 체계적이고 실질적인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며 아쉬워했다.

“현재 남한의 학교에서 하는 북한 관련 교육이 북한의 실상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그저 한민족을 강조하는 막연하거나 피상적인 교육에 그치고 있습니다.
그나마 지금 일부 학교에서 탈북자들을 강사로 활용하는 교육을 진행 중인데,
이것도 교장의 재량에 따라 강의를 하거나 하지 않거나 선택할 수 있습니다.
모든 초중고에서 탈북자들이 직접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교육을 할 수 있도록
의무적이고 체계적인 시스템이 마련되면 좋겠어요.”

은주씨는 “
북에서 꽃제비 생활을 할 때 엄마가 있어서 살아남을 수 있다”며 “
엄마가 없었으면 장마당의 유령이 되었을 것”이라며 거듭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감사를 드러냈다.

 
 인터뷰 후 은주씨가 서강대 캠퍼스를 배경으로 활짝 웃고 있다.
  북녘땅에서는 은주씨처럼 해많은 영혼이 지금 이 시간에도 수없이 사라지고 있다.
“어머니는 한겨울 추운 바닥에서 잘 때도 항상 저를 끌어안고 주무셨고,
바닥에 작은 비닐이라도 깔아주었어요.
그래서 그나마 이렇게 살아있습니다.
당시에 많은 부모가 입을 하나 덜려고 자식을 버린 경우가 많은데,
우리 어머니는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었잖아요.”

은주씨는 “
지금 이 순간에도 자유와 인권 유린의 현장에 있는
북녘 주민을 생각하면 분통함을 억누를 길이 없다”고 말했다.

“배고픔으로부터 인간으로서 주어진 생명을 지키려고 한 것이 무슨 잘못인가요?
그런데도 탈북자들을 배신자니 뭐니 하며 혹독한 처벌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자유와 인권이 상실된 비참함을 겪었기에 그 중요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탈북자로서 북한의 인권과 자유를 실현하는데 의무를 다할 것입니다.”

- 더 많은 기사는 '조선pub'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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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술 마시는 평양여성...

이런 모습 처음이야

 

 

[재미동포 아줌마, 또 북한에 가다②]

 확 달라진 평양

 
13.10.01 14:22l최종 업데이트 13.10.01 14:34l
 
 
지난 세 차례 북한 여행을 다녀온 뒤 내게는 북한에 두고 온 수양딸과 수양조카가 생겼다.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정을 나눈 그들이 다시 보고 싶어서,
더 많은 북한 동포들과 소통하고 싶어서 올해도 다시 북한에 다녀왔다.
 
지난 8월 15일부터 8월 26일까지 한 차례
그리고 9월 4일부터 13일까지 또 한 차례 북한을 여행했다.
새 연재 '재미동포 아줌마 또 북한에 가다'를 통해
북한 동포들의 지금과 북한의 여러 명소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 기자말

▲  고려항공 비행기에서 <로동신문>을 받았다.
ⓒ 신은미

 


"안녕하십니까."

고려항공 비행기 안으로 들어서자 스튜어디스가 차분한 목소리로 인사를 한다.
인사 소리를 듣고 갑자기 귀가 번뜩했다.
"안녕하십네까"가 아니라 분명히 "안녕하십니까"로 들렸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세 번이나 북한을 여행했으면서도 
평양사람들은 '~니까' 대신 '~네까' 그리고 '~니다' 대신 '~네다'고 발음한다 믿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스튜어디스는 분명 '
안녕하십니까'라고 말했다.

▲  이륙을 위해 앉아있는 고려항공 스튜어디스
ⓒ 신은미

 


이륙을 기다리는 동안 다시 한 번 확인해 보기 위해 또 다른 스튜어디스에게 말을 걸었다.

"평양에 몇 시에 도착하지요?"
"4시에 도착 예정입니다."

틀림없이 '~입네다'가 아닌 '~입니다'였다.
나는 왜 지금껏 평양 사람들의 발음을 잘못 들은 걸까.
아마도 선입견 때문이었을 게다.
 
방송이나 출판물들을 보면 대부분 북한사람들의 말투를 그런 식으로 표기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내 머릿속에 잘못 각인돼 있던 것이다.
 
이렇듯 선입견이란 무서운 것이다.
지금까지 북한에서 "
안녕하십니까"라는 말을 수백 번도 더 들었을 텐데
그말이 "
안녕하십네까"로 들렸으니 말이다.

아마 북한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도 마찬가지일 게다.
잘못된 선입견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고 머릿속에 남아있으니 사실을 봐도 사실로 보여지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나 또한 북한을 여러 차례 여행했음에도 오늘날까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다.

설경이를 만날 수 없다니요...

▲  북한의 관광 비자
ⓒ 신은미

 


비행기가 압록강을 넘어가고 있다는 기내방송이 흘러나온다.
이제 북한의 영공으로 들어간다는 생각을 하니 설경이,
그리고 현수와의 만남을 성사시키기 위해 유엔 주재 북한 대표부를 접촉했던 일이 뇌리에 스친다.

우리는 원래 북한의 '조선국제려행사'를 통해 19박 20일의 비자를 요청했다.
그러나 올해부터 미국 국적자에게는 9박 10일 이상의 비자를 발급하지 않는다고 한다.
게다가 문제가 또 생겼다. 
 
이번 북한여행의 주목적이 설경이와 현수를 만나고 그들의 집을 방문하는 것인데,
관광 비자로 입국하는 사람들에게는 관광 외 다른 어떤 일정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세 차례에 걸쳐 북한여행을 했음에도 이런 기초적인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한 통신사 미국 특파원과의 인터뷰를 통해 
설경이와 현수네 집을 방문할 것이라고 이야기까지 했으니 나도 참 무지하고 순진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떻게 해야 수양딸과 수양조카의 집을 방문할 수 있겠냐'는
내 다그침에 조선국제려행사는 매우 난감해하며 "
혹시 가능할 지 모르겠으나 해외동포 이산가족을 담당하는 '
해외동포위원회'에 접촉해 보라"고 전했다.

그러자 지난 연재 '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를 읽고 "글을 잘 읽었다"며
내게 메일을 보내온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는 유엔에 파견 나와 있는 북한외교관이며 참사라는 직함을 갖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메일을 보내 우리 사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나 전화로 돌아온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자꾸 약속장소 바꾸는 북 외교관... 왜?
"신 녀사님의 사정은 익히 알겠습니다만 실제 이산가족이 아니기 때문에 그 일은 좀 곤란합니다.
실제 이산가족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한데 그렇지가 않으니…."
"참사님, 아무리 수양딸,
수양조카라고 해도 그렇지요. 
관광비자로는 만날 수가 없다, 
실제 이산가족이 아니기 때문에 해외동포 위원회로서도 어쩔 수가 없다뇨….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어요."

"녀사님의 심정은 충분히 리해합니다.
그러나 공화국에도 지켜야 할 법이 있으니 리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말도 안돼요.
세상에 이런 법은 없어요,
참사님!"

"녀사님,
조국은 전쟁이 끝난 이래 지금까지도 일종의 전시 상태에 있습니다.
미국의 군사적 위협과  경제 제재 속에 우리 인민들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 법도 생겨난 게니 리해해 주십시오."
"저,
있지요…. 
직접 만나뵙고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 혹시 찾아가도 괜찮으신지요?"

"뭐, 오신다면 얼마든지 만날 수는 있습니다만 이런 일로 먼 캘리포니아에서 여기까지 오신다니까 좀…."

우리 부부는 난감한 심정을 안고 그 참사를 만나기 위해 뉴욕으로 향했다. 
만나는 장소를 정하는 데도 여러 번 전화 통화를 해야만 했다.

우리는 복잡한 뉴욕의 도심을 피해 교외의 한적한 곳에서 만나기를 원했다.
그런데 장소를 제의하면 전화를 끊고 다시 연락을 하겠다고 나오는 것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이유는 바로,
북한 외교관들은 맨해튼 콜럼버스 서클을 중심으로
반경 25마일(약 40킬로미터)를 벗어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우리가 장소를 제의하면 그곳이 활동 반경 내에 있는지를 확인해야 했던 것이다.

나는 이런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아무리 외교관계가 없다고는 하나 
유엔이라는 국제기구에 파견된 일국의 외교관들을 이렇게 대할 수가 있단 말인가.
북한은 미국인들에게 관광마저도 허락하고 있는데 말이다.

우리는 북한 외교관들의 활동 반경 내에 있는 뉴욕 한인타운의 한 한국음식점에서 만났다.
남편과 동갑인 이분은 원래 평양외국어대학 교수였다고 한다.
 
겉보기에도 이분은 외교관이라기보다 학자라는 인상을 더 짙게 풍겼다.
술 몇 잔이 돌자 그분이 내게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최선 다해보겠다"는 말, 희망을 품었다

▲  북한의 일반 비자
ⓒ 신은미

 


"작년에 신 녀사님께서  <오마이뉴스>에 게재하신 연재 기행문을 빠짐없이 잘 읽었습니다.
정치적인 것을 떠나 객관적인 입장으로 민족을 생각하시는
녀사님의 글속에서 동포애를 많이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조선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그런 글이었지요."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해요.
저는 남쪽에서 태어났고 지금도 남쪽의 시각에서 북을 바라보려고 하는 경향이 강하게 남아있어
객관성을 유지하기가 상당히 힘들 때가 있어요.
혹시 글에서 북을 불편하게 한 점이 있더라도 양해해 주세요."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충분히 리해합니다.
물론 글속에서,
북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들도 있었지만, 
녀사님 말씀대로 남쪽의 시각으로 바라보시기 때문인데 그야 어쩔 수가 없지요.
전혀 개의치 마십시오. 
그런데 설경이하고 현수와 정이 참 많이 드신 모양입니다."
"그럼요,
여러날을 함께 다니며 마음이 통하다 보니 정이 듬뿍 들 수밖에요.
그런 설경이가 결혼을 하고 지금 아이를 가져 산달이 됐다고 하는데, 
너무 궁금하고 보고 싶어 찾아가려고 합니다.
가는 길에 현수네 집도 들리면 좋겠고요."

"아, 그러셨군요.
우리 민족은 정이 많아 만나서 몇 마디만 하면 금방 통하는데 수십 일을 함께 다니셨으니
아마 정이 많이 드셨을 겁니다."
"네,
그러니 제발 부탁드려요,
참사님."

"아,
이거 참 곤란하네….
그러면, 우선 관광 비자로 입국해 '
조선국제려행사'와 관광을 하세요.
그리고 설경이와 현수네 집 방문을 하기 위해 
해외동포로서 일반 방문 비자를 따로 신청하도록 해보십시오. 
사실 남쪽 출신의 해외동포가 관광객의 신분으로 북을 방문하고
북의 동포와 수양 가족 관계를 맺어
그 집을 방문한다는 일은 제가 알기로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하여간 충분히 리해했으니 제가 평양에 이 사실을 알리겠습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 해보겠다'는 
그 외교관의 말에 한 가닥 희망을 안고 캘리포니아로 돌아왔다. 
일단 그분의 말대로 관광비자를 갖고 조선국제려행사와 열흘간의 관광을 먼저 한 다음,
서울에 가서 열흘을 지낸 뒤 또다시 일반 비자로 북한에 들어가
설경이와 현수네 집을 방문하기로 일정을 수정하고 수속을 밟았다.

미국에서 준비한 설경이와 현수의 선물만도 한 트렁크나 되는데 이 짐을 들고 북한을 들락날락해야 한다니…. 그 불편함은 이루 설명할 수 없었다. 그나저나 다시 간다고 해도
과연 설경이와 현수네 집 방문을 허용해 줄 것인지 불길한 예감마저 들었다.

평양 순안공항은 변한 게 없구나

▲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내리고 있다.
ⓒ 신은미

 


지난했던 과정을 생각한지 얼마나 됐을까.
비행기에서 곧 순안공항에 도착하니 벨트를 착용하라는 방송이 흘러나온다. 
공항에 내리면 누가 우리를 맞아줄까.
만일 설경이와 현수가 우리를 맞아준다면 그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으리라.

2013년 8월 17일,
1년 3개월 만에 다시 찾은 순안 공항은 여전히 시골의 시외버스 터미널 같은 임시 청사였다. 
지금까지 내가 눈여겨본 북한의 건물들은 마술이라도 부린 듯 삽시간에 완성됐는데,
순안공항만은 예외다.

공항은 그 나라의 얼굴이자 외국인에게 첫 인상을 심어주는 장소인데
2년이나 지난 지금도 그대로니 대체 언제쯤 공사가 끝날는지….
관광객들이 예전보다 훨씬 더 많아져 발 디딜 틈이 없다. 
 
짐을 실을 카트가 모자라 '카트 확보 쟁탈전'이라도 벌어진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남편이 한마디 한다.

"아니,
관광객 맞을 준비나 제대로 해놓고 사람들을 받든가 말든가 해야지.
좋은 이미지를 심어줘야 관광객들이 돌아가서 알릴 거 아냐. 
첫 도착부터 생존 경쟁을 해야 하니 원!"

또다시 언제 터질지 모르는 '걸어 다니는
폭탄 아저씨'와 함께 여행을 해야 한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정신을 바짝 차렸다.
군복 같은 청색 유니폼을 단정히 차려입은 한 아가씨가 어디에서 났는지 얼른 카트를 가져다줬다.
남편이 내뱉은 말이 온 공항청사에 메아리치고도 남았을 것이다.

▲  순안공항 임시청사 모습. 2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게 없다.
ⓒ 신은미

 


그래도 전기 사정이 좋아졌는지 짐을 실은 컨베이어가 멈추지 않고 계속 돌아간다.
겨우 카트 두 개를 확보해 짐을 싣고 세관 앞에 섰다.
올해부터는 휴대전화도 갖고 들어갈 수 있어 세관 통과가 훨씬 간편해졌다.

이번에도 역시 지난 방북 때와 마찬가지로 세관신고서만 들여다볼 뿐 가방을 열어보지 않는다. 
북한법은 남한 제품의 반입을 허용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렇게 세관 통과가 간단할 줄 알았더라면 남한제품들을 사서 가져올 걸 그랬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내가 평양에 갈 때마다 북한 동포들에게 남한 제품들을 전해주고 싶어했던 이유는,
최고 품질의 남한 제품을 북한 동포들에게 자랑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저 북한 동포들에게 남한 동포 노동자들의 손길이 묻어있는 물건을 전해주고 싶어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 번째 북한여행을 통해 평양 순안공항의 세관이 전혀 까다롭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우리는 북한의 법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래서 매번 안내원들과 북한의 동포들에게 전해 줄 선물을 살 때면 혹시라도
'한국산'이라는 꼬리표가 붙어있지 않나 노심초사하며 상표를 확인하곤 했다.

세관을 통과하자 낯익은 얼굴이 우리를 반긴다. 
북한 조선국제려행사 간부,
'머리 빠지는 것이 제일 스트레스 쌓이는 일'이라던 40대 초반의 '대머리' 리정 선생이다.

"아이구,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어서 이리 짐 주십시오."

그는 처음 보는 두 사람과 함께 우리의 짐을 받는다. 
리정 선생과 함께 나온 두 사람은 앞으로 열흘 동안 우리와 함께 할 안내원이다. 
무척 반갑고 친근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비아냥거리는 듯한 말을 해버렸다.

"아니, 높으신 분이 어떻게 몸소 나오셨어요?"
"두 분께서 이리도 자주 우리 조선국제려행사를 리용해 주시니 제가 직접 영접해야지요.
오시느라 힘드셨지요?"

둘째 수양딸 리설향

▲  공항 주차장에서. 왼쪽부터 박영길, 리정, 나, 리설향.
ⓒ 신은미

 


그러던 중 선하고 곱게 생긴 아가씨가 리정 선생과 나의 대화를 차분하게 지켜보다
눈이 마주치자 작고 조용한 목소리로 인사를 한다.

"안녕하십니까.
리설향입니다."

이번 우리의 여행에 함께할 여성 안내원이다. 
직감적으로 내 둘째 수양딸이 될 것임을 감지했다.
가까이서 보니 맑고 큰 눈망울이 어느 순정 만화의 여주인공을 보는 듯하다.
갓 24세가 된 이 아이의 이름이 외양과 참 잘 어울린다.
첫째 수양딸의 이름은 '설경'.
묘하게도 두 아이의 이름이 '설'를 쓴다.

▲  설향이의 아이디 카드
ⓒ 신은미

 


옆에 서서 빗을 꺼내 머리를 빗고 있던 아저씨가 콧소리 섞인 목소리로 불평을 하며 악수를 청한다.

"아까부터 두 분에게 잘 보이려고 머리도 빗고,
헛기침도 하고, 안 바르던 향수도 바르고 왔는데….
설향이 향기에 취하셔서리 저는 박대하시기나요?"

첫눈에 봐도 마음이 넉넉하고 넉살 좋은 이웃집 아저씨 스타일이다.
이름은 박영길.
원래는 일본어·중국어 안내원인데 "
요즈음이 제일 바쁜 관광철이라 영어과 안내원이 모자란다"며
우리 부부에게는 영어가 필요 없으니 대신 나왔단다.
그러더니 갑자기 한마디 한다.

"누나라 불러도 되디요?"
"아니,
내가 몇 살인 줄 알고 나를 누나라고 부른단 말이에요?"
"아, 새 손님을 맞는데 그 정도는 알고 나와야디요.
저는 올해 쉰하나입니다. 
제 바로 위의 누나가 년년생인데 신 녀사님과 동갑입니다."
"알았어요.
그럼 확실히 하세요."

그는 남편에게도 인사를 하며 '
형님'이라 불렀는데 그 모습이 마치 언젠가 봤던
영화 속의 '조폭'들이 공항에서 만나 인사하는 장면 같아 웃음이 터진다.

차에 다가가자 운전기사 아저씨가 환한 웃음으로 우리를 반긴다. 
운전기사 아저씨는 35세애기 아빠다.
이름은 리철남.
큰 눈이 웃을 때면 초승달처럼 모습을 감춘다.
 이번 여행에서 두 놀부 형님들(남편과 박영길) 사이에서
흥부 같은 아우(운전기사)가 힘든 일을 다 하게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나라도 잘해줘야지.

우리는 열흘간 우리와 함께할 '삼천리'표 자동차에 올랐다.
1년 3개월 만에 다시 찾은 평양거리는 훨씬 활기 넘쳤다. 
녹음이 우거진 여름철이라 온 거리가 싱그럽게 푸르다.

평양이 변하고 있다

▲  잔디가 보이는 평양 거리. 예전에 비해 훨씬 환해졌다.
ⓒ 신은미

 


▲  차가 부쩍 많아진 평양 시내
ⓒ 신은미

 


특히 평양 시가지는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도로변을 따라 잔디를 심어놓아 눈에 띄게 환해졌다. 
 
'어두운 공산국가 거리' 이미지를 벗어던진 느낌이다. 
게다가 전에는 보지 못했던 고층 건물들도 많이 보인다.
 
자동차,
특히 승용차와 영업용 택시가 그새 부쩍 늘었다.
평양 공기가 좋다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되려나 보다.

평양에 왔음을 실감케 해주는 광경은 역시 뭐니뭐니해도 거리의 여성 교통안전원이다.
그런데 교통량이 많아져 곳곳에 신호등이 설치됐으니
언젠가 이 여성 교통안전원들도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호텔에 도착한 우리는 바로 로비에 있는 커피숍으로 갔다. 
웨이트리스가 우리를 알아보며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고려호텔 종업원들이 우리를 알아보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이라 그 감동은 예전만 못하다. 
되레 '이제 나도 북한사람이 다 된 것이 아닌가' 싶어 겁(?)이 덜컥 날 뿐이다.
나는 조선국제려행사 리정 선생에게 책 한 권을 꺼내줬다.

"제가 세 차례 이곳을 방문하고 난 뒤
서울에 있는 <오마이뉴스>라는 인터넷 매체에 기행문을 연재했어요.
 
연재가 끝나고 책이 나왔는데,
바로 이 책이에요. 
남한의 문화관광체육부에서 우수문학도서로 선정하기도 했는데,
책 속에 조선국제려행사가 잘 소개돼 있으니 회사에 가져다 놓으세요."
"아,
바로 이 책이군요.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북경에 나가 있는KITC 대표로 부터 이야기 들었습니다."
"KITC가 뭐예요?"
"우리 회사말입니다.
Korea International Travel Company의 략자, KITC.
우리는 우리 회사 조선국제려행사를 부를 때 KITC라고 부릅니다."

서슴없이 영어를 쓰는 이들의 모습에서 북한의 외국어 열풍을 감지한다. 
리정 선생은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녀사님께서 우리 조국을 '아름다운 사람들이 사는 가난한 나라'라고 쓰셨다면서요?
우리 인민들은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에이,
그리고 '가난하다'가 뭡니까, 녀사님.
고저 '경제적으로 좀 부족하다' 이렇게 쓰셔야지."

남편이 "
어쨋든 알갔어,
알갔어"라며 평양말을 흉내내며 끼어들었다.

"여보,
빨리 그 대머리약 좀 꺼내드려."
"선생님!
'대머리약'이 뭡니까.
'머리 빠지지 않는 약', 이렇게 좀…."
"아,
이 사람! '대머리약'이나 '머리 빠지지 않는 약'이나 그게 그거지, 원…. 
그리고 젊은 사람이 머리가 그게 뭐야.
어서 가져가 발라봐.
더 이상 벗겨지지 않게."

설향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고소하다는 듯 박장대소한다.
이 모습을 보고 있자니 수양딸 설경이가 생각이 나 물어봤다.

"설경이는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
"지금 해산달이 다 되어가 오늘내일 합니다.
 
그러지 않아도 두 분께서 설경이네 집에 가시고 싶어 하신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관광객으로 오셔서는 불가능합니다.
일반 방문비자로 다시 오실테니 그때 가보시도록 해보세요."
"알고 있어요."
 
 
▲  커피숍에서 리정 선생의 설명을 듣고 있는 나, 그리고 설향이(왼쪽)
ⓒ 신은미

 


내가 시무룩하게 대답하자 분위기라도 전환하려는지 얼른 접대원을 불러
대동강 맥주와 탈피(마른 명태)를 주문한다.
'탈피' 소리를 들으니 이번엔 또,
별명이 '탈피'인 수양조카 현수가 떠오른다.

"현수는 지금 어디 있어요?"
"로력동원 나가서 한 달 정도 있어야 평양으로 돌아옵니다."
"네? 동원을 나가 한 달이나 있어야 돌아온다고요?"
"9월에 다시 오셔도 아마 현수는 못 만날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부인하고 애라도 꼭 만나고 가야 해요."
"그때 가서 보십시오."

평양 '가스 맥주'를 아십니까

▲  평양의 한 가스 맥줏집
ⓒ 신은미

 


'로력동원'을 나간 곳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가능한 한 그곳에 찾아갈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달래 듯 대동강 맥주를 들이켰다.
 
나는 술을 별로 즐기지 않지만,
대동강 맥주의 맛은 일품이다. 
남편은 대동강 맥주 예찬에 여념이 없다.
옆에서 영길 아우가 한마디 거든다.

"형님, 여름에는 수요가 너무 많아 대동강 맥주가 아주 귀합니다.
공급이 채 따라오질 못하요.
지금 평양에는 가스 맥줏집도 많이 있습니다.
거기 맥주는 더 맛있습니다."
"가스 맥주가 뭐야?"
"맥줏집에서 맥주를 직접 자체 생산해 손님들한테 제공하는데 정말 시원합니다."
"뭐,
여기에 그런 데가 다 있다고?
말나온 김에 가서 한잔 할 수 없나?"
"가실라요?"
"응,
지금 당장."
"당장이요?
급하시기는…. 
그럼 우선 려장을 풀고 내려오신 다음에 식사를 하시고 가자요."

식사를 마친 우리는 '가스 맥주'집을 향해 호텔을 나섰다.
평양의 밤도 예전보다 훨씬 환해졌다.
일부 건물은 네온사인으로 뒤덮여 휘황찬란하다.

차에서 내려 어떤 건물로 들어가는데 도저히 맥줏집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도무지 간판이 없으니 이곳이 아파트인지 맥줏집인지 알 길이 없다. 
북한의 유흥업소가 다 이런 식이다.
선전이나 광고가 별로 필요 없는지,
아니면 하지 않는 건지….
대부분 업소에는 간판이 없거나 있어도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러나 막상 들어가 보면 깜짝 놀랄 만큼 잘 꾸며져 있다.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들어서서 보니 고급 술집 같이 꾸며놨다. 
그런데 정작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세련된
옷차림을 한 여성들끼리 앉아 맥주나 칵테일을 마시고 있는 장면이었다.
고급스러운 귀걸이를 한 여성들도 눈에 띄었다.
북한에 와서 여성들끼리 술집에 들어와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보기는 처음이다.

▲  두 여성이 평양 가스 맥줏집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 신은미

 


나는 화들짝 놀라 설향이에게 물었다.

"어머,
설향아,
이곳에서도 여자들끼리 술집에 와서 술을 마시네?"

"녀성들이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일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예절에는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렇게들 마시고 있잖아?"
"그야,
뭐,
자기들이 원해서 하는 일이니 누가 뭐라고 할 수가 없지요.
하여간 저는 이런데 와서 제 동무들과 저렇게 앉아 술을 마시지는 못하겠습니다."

이들의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다 설향이에게 다시 물었다.

"설향아,
혹시 담배를 피우는 여자들도 있니?"
"담배를요?
오마(어머),
시집 다 가려고….
어떻게 녀자가 담배를 피웁니까.
아직까지 조국에서 담배를 피는 녀자는 보지 못했습니다.
근데 남조선에서는 녀자들이 담배를 피우기도 하나요?"
"응.
많이들 피워."
"오마니도 담배 피우시나요?"
"아니."
"야아,
다행입니다.
저는 녀자가 담배 피우는 것은 도저히 못 보겠습니다."
"어쩌면 먼 훗날 여기도 남한처럼 될 지 몰라."
"아니요,
오마니.
여기서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설향이가 웃으면서 단호하게 말한다.

지금 이곳에서 즐겁게 술을 마시고 있는 저 여성들은 과연 누구일까. 
소위 고급 당 간부의 부인 또는 그 자녀들일까.
아니면,
이러한 광경은 평양사람들의 생활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생긴 자연스러운 현상일까.

무척 궁금해졌다. 
나는 영길 아우에게 앞으로 열흘 동안 가능하면 이런 곳에 자주 가자고 부탁했다.

도착한 첫날부터 놀라운 경험을 했다. 
내일은 황해도 쪽으로 관광을 간다는 일정을 전해 들으며 우리는 호텔로 돌아왔다.

 
 
 

"꼭 인민군 되고 싶다"는 북 청년
 우리 아들과 맞닥뜨리면 어쩌지?
 
아직도 진행중인 동족상쟁의 비극
 
13.10.23 20:38l최종 업데이트 13.10.23 20:39
 
 
 


지난 세 차례 북한 여행을 다녀온 뒤 내게는 북한에 두고 온 수양딸과 수양조카가 생겼다.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정을 나눈 그들이 다시 보고 싶어서,
더 많은 북한 동포들과 소통하고 싶어서 올해도 다시 북한에 다녀왔다.
지난 8월 15일부터 8월 26일까지 한 차례 그리고 9월 4일부터 13일까지 또 한 차례 북한을 여행했다.
새 연재 '재미동포 아줌마,
또 북한에 가다'를 통해 북한 동포들의 지금과 북한의 여러 명소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 기자말

땅거미가 드리우기 시작한 평양의 거리에 불빛이 밝혀진다.
흐르는 불빛을 타고 오늘의 짧은 여정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성불사 풍경소리를 뒤로하고 사랑스러운 북한 아이들과 어울렸다.
그리고 무르익어가는 재령평야를 바라보며 풍년을 기원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로 조선로동당에서 나를 보자고 하는지…. 
오늘 일정이 끝날 때쯤 걸려온 전화 한 통에 내 마음은 궁금증으로 요동친다.
왜 보자고 하는 걸까. 
북한에 관해 글을 잘못 쓸 경우 화를 입을 수 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는데,
정말 내가 쓴 북한 기행문에 무슨 문제라도 있었던 걸까.

그런데 다시 돌이켜 보니 그런 문제 때문은 아닌 것 같다. 
만약 내 글에 문제가 있었다면,
평양 수양딸 설경이네 방문을 위해 유엔 북한대표부 외교관을 만났을 때 뭔가 이야기가 있었을 것이다.
어디 그뿐일까. 
아예 내 북한 입국을 불허했을 것이다.

설향이의 안색이 안 좋아 보인다.
혹시 자기가 안내하는 손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걱정이라도 하는 걸까.

▲  북한을 찿은 외국인 관광객들. 북한법에 익숙치 못해 실수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 신은미

 


도대체 무슨 일인지 무척 궁금했지만, 솔직히 겁은 나지 않는다. 
그동안 북한 여행을 통해 이곳 북한이 어려서 배우고 들었던 것처럼 
비상식적이고 비이성적인 나라는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도 당연히 법이 있고, 이 나라 실정에 맞는 도덕이 있다.
단지 관광객들이 그 법이나 도덕에 익숙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겠지만,
사소한 실수로 법적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조금 심각하다고 생각되는 실수를 하더라도 대부분 정상 참작되는 일을 본 적이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북한이 미국보다 훨씬 더 관용이 있지 않나 싶다.
내가 살고 있는 미국은 외국인이든 자국민이든 법을 위반하면 가차 없이 벌금을 물거나 재판에 회부된다.
미국의 법이라고 모두 합리적이지는 않다.
또 타 문화권 사람들의 이해와는 거리가 먼 법도 있다.
그러나 '관광객이라 몰라서 그랬다'는 변명은 전혀 통하지 않는다.
되레 외국인 또는 유색 인종에게 더 까다롭기까지 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호텔에 닿았다.
영길 동생이 우리를 호텔 2층 회의실로 안내한다. 
자기들은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겠단다.
문을 열고 회의실 안으로 들어서니 인민복 차림의 두 사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중 상관으로 보이는 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왜 북한 가정집을 방문하려는지 묻는 조선로동당 관리
"안녕하십니까.
해외동포위원회 부국장입니다.
우리 때문에 서둘러 오신 건 아닌지요?"
"아니에요.
남편이 맥주를 한 잔 하고 호텔로 오고 싶어 했는데 일정을 바꿨을 뿐이에요."
"아, 그러셨습니까?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저…
신 선생님의 기행문을 읽었습니다."

'아, 드디어 내 기행문 이야기를 꺼내는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화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나는 내가 보고 느낀대로 썼을 뿐이다.
민족애와 통일을 향한 염원을 담아서. 
만약 내가 쓴 기행문이 내 또 다른 반쪽 나라 북녘땅에서 문제가 된다면,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자 가슴이 쓰리다. 
부국장이라는 이가 말을 잇는다.

"뉴욕의 대표부로부터 보고를 받았습니다.
왜 설경이네 집을 방문하시려는 건지요?"
"제 수양딸 설경이가 결혼을 하고 지금 산달이라고 들었어요.
어찌 안 보고 싶겠어요.
미국에서 가져 온,
가족들과 애기 선물이랑 그리고 상점에 가서 고기하고 미역이나 좀 사다 주고 떠나려고 해요."
"그러시군요. 잘 알갔습니다.
관광비자로는 수양딸을 만날 수 없어서 일반비자를 받아 9월에 다시 오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때까지 얼마나 애가 탈까 생각돼서 방조해드리기 위해 만나자고 한 것입니다."

순간 '방조'라는 말을 못 알아들어 설명을 부탁했다.
'도와준다'는 말이란다.

"감사합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다른 일은 또 없으십니까?"
"수양조카 방현수네 집도 갔으면 합니다."
"그 얘기도 들었는데 그 동무는 지금 세포 등판에 로력동원 나가 있어 한 달이나 있어야 돌아온다고 합니다.
그러니 못 만날 것 같습니다. 어쩌디요?"
"그러면 부인하고 딸이라도 만나 가져온 선물이라도 전하지요.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그 외 또 다른 일은?"

남편이 말을 꺼냈다.

"저는 유도선수 계순희의 열렬한 팬입니다.
혹시 계순희 선수를 만났으면 하는데 가능할는지요?"
"아, 계순희 선수 말입니까?
잘 알갔습니다."

부국장이라는 사람이 또 책 이야기를 한다.

"신 선생님 책은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일부 내용이 좀 잘못돼 있긴 하지만 조국에 대해 잘 모르고
또 외부의 시선으로 보아 그런게니 리해합니다.
남녘의 보수적인 집안에서 태어난 분이 조국과 민족 그리고
통일에 관심을 가져주어 한편으론 놀랍고 또 의아해지기까지도 했습니다.
그러나 책속에서 신선생님의 진정한 동포애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민족이나 통일은 사상이나 이념을 초월한다고 생각해요.
사실 저는 사상이나 이념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맞습니다. 민족은 모든 것을 초월합니다.
계시는 동안 즐거운 관광하시고 9월에 오시면 또 만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자,
그럼 이만.
오늘이 마침 제 딸아이의 생일이라서 저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은 일요일이라 관용차를 사용할 수가 없어 버스를 타고 가야 한다"며 두 사람은 서둘러 자리를 뜬다. 
일요일에 쉬지도 못하고 시간을 내줘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가정집 방문, 정말 가능할까
두 사람의 위치가 어느 정도의 사람들인지 전혀 알 수는 없으나,
첫인상은 좋았다.
청빈한 관리라는 생각이 든다. 
상당히 예의가 바르고 교양도 있는 사람들이다. 
뉴욕서 만난 북한대표부의 외교관도 그런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로비로 내려가자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영길 동생과 설향이가 자리서 벌떡 일어나 우리에게 다가온다. 
영길 동생이 다급한 목소리로 묻는다.

"누나, 무슨 일이야요?"
"설경이와 현수네 집 방문 일 때문이었어."
"아, 나도 그런 줄 알았디.
그렇디 않으면 저분들이 관광객을 만나자 할 리유가 없디.
그래 만나라고 하요?"
"알겠다고 했어.
그런데 저 분들은 높으신 분들인가?
저분들이 알겠다고 하면 되는 거야?"
"고럼. 근데 정말 허락해 줄른지가 문제디.
관광객한테 그렇게 해 준적이 아직까지 한 번도 없었으니까.
또 그런 일을 부탁한 관광객도 없었고."
"내가 동포지,
관광객이야?"
"기건 기런데,
누나는 지금 관광비자를 갖고 있지 않갔어.
조국에도 다 법이라는 것이 있는데.
아마 허락해도 9월에 일반비자를 갖고 들어올 때나 만나게 될끼야요."

유교적 전통 강한 북한... 변하고 있다

▲  가스맥줏집에서 맥주를 즐기는 젊은 남녀들
ⓒ 신은미

 


우리는 저녁식사를 뒤로 미룬 채 가스맥줏집으로 향한다. 
시간이 늦어 가까운 곳으로 행선지를 정한다. 
맥줏집 분위기는 지난 밤 갔던 곳과 비슷하다.
맥주를 발효시키는 통들을 손님들이 다 볼 수 있도록 개방해 놓은 게 특징이다.

여기서도 젊은 남녀들이 낭만적인 만남 그리고 맥주를 즐기고 있다.
이제 평양에서는 이런 장면이 점점 일반화되고 있는 듯하다. 
나는 여성들이 맥주를 마시고 있는 이러한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그간 여행을 통해 느낀 게 하나 있다면 북한이 유교적 전통에 너무 집착한다는 것이다.
지금 이런 변화를 젊은 지도자의 등장과 연관 지어 생각해본다.

지난 2012년 4월, 처음으로 북한지도자의 육성을 들어봤다. 
이후 그는 전례 없이 부인과 팔짱을 끼고 나타나곤 했는데, 
부인 또한 세련된 의상으로 서방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변화를 보며 직감적으로 북한에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나 마찬가지로 북한에도 소위 '꼴통'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집권을 해 거리에서 남성들의 헤어스타일이나 여성들의 복장을 단속하는 것보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모란봉악단 공연자들이 조선의 음악과 함께 외국의 음악도 연주하고,
그 공연을 지도자 부부가 앉아 인민들과 함께 감상하는 지금의 북한이 훨씬 더 보기 좋다.
그게 북한 인민들을 위해서도 다행이라 생각한다.

여성들이 공공장소에서 술을 마시는 일은 자본주의의 퇴폐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의 도덕에 어긋나는 일도 아닐 것이다.
'여자들이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야말로
봉건시대의 낡은 유습 아닐까. 단지 의문이 가는 것은 여성해방운동에 일찍 눈을 떴다는
북한에서 오늘날까지 남존여비의 유교적 전통이 뿌리 깊게 박혀있는가 하는 점이다.

평양 고급 맥줏집을 찾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  가스맥줏집, 손님들로 꽉 차있다.
ⓒ 신은미

 


이제 더 이상 북한 맥줏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여성을 보는 건 내게 '뉴스'도 아니고 놀랄 일도 아니다.
단지, '대관절 저 여성들은 과연 누구일까'라는 의문만 남았다.
사실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들 또한 어떤 부류의 사람들일까 궁금하다. 왜냐면 술값 때문이다.

두 명의 안내원과 운전기사 그리고 우리 부부 다섯이 안주와 함께 한두 잔씩 맥주를 마시고
20달러(한화 약 2만3000원)을 냈다.
물론 내가 살고 있는 미국이나 남한의 물가에 비하면 비교적 저렴한 가격이나
이곳의 경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20불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그러니 이런 곳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해질 수밖에. 영길 동생에게 물었다.

"여기에 오는 사람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이야?"
"아니,
어떤 사람들이라니요?
인민들이지."

더 이상 묻지 않는게 옳다 싶어 그만두기로 했다.
앞으로 계속 다니다 보면 알게 되겠지.
그런데 사람들이 계산할 때 외화를 쓰는 것 같았다.

"여기서 원화(북한 돈)는 안 받아?"
"여기는 외화만 받습니다."
"그러면 외화가 없는 사람들은 어떡해?"
"조선돈 아니면 전표를 받는 곳들이 많이 있습니다."
"전표? 전표라니?"
"아, 전표라는 것은 일종의 맥주 배급표입니다.
한창 더울 때는 하루에 1리터씩 마실 수 있는 표를 줍니다."

▲  가스맥줏집에서 맥주를 즐기는 젊은 여성
ⓒ 신은미

 


설향이는 "아버지는 술을 마시지 않아 맥주 배급표를 술 좋아하는 친구들에게 나눠준다"고도 한다.
영길 동생의 맥주 예찬은 계속된다.

"사실은 기곳 맥주가 더 맜있디요.
돗수도 쎄고.
대동강맥주회사에서 생맥주를 공급하는데 돗수가 더 높아요.
맥주를 드셔보신 장군님(김정일 위원장)께서
'로동자들에게는 기존의 맥주가 좀 약하니 돗수를 높히라' 하셔서
보통맥주보다 돗수가 더 높게 만들어졌는데 한 잔 주욱 들이키면 쫘악 오르는 게 정말 좋습니다."

술 좋아하는 남편이 귀가 솔깃해져 한마디 한다.

"야아,
그 맥주 정말 마셔볼만 하겠구만.
꼭 폭탄주 맛이겠다.
폭탄주보다 더 맛있겠네,
이미 함께 발효가 되었을 테니."

영길 동생이 의아해한다.

"폭탄주가 뭐야요? 폭탄으로 술을 만들아요,
아니면 술로 폭탄을 만들아요?"
"내가 나중에 만들어 줄 테니까 그때 돗수 높다는 그 대동강 생맥주와 비교해 봐."

대체 폭탄주가 뭘까 궁금해 하며 영길 동생은 연상 고개를 갸우뚱 한다.

변할래야 변할 수 없는 것, 민족의 동질감

▲  가스맥줏집에서 운전기사 철남 동생과 함께
ⓒ 신은미

 


북한 여행은 모두 패키지 여행이다. 
조선국제려행사에 지불하는 여행비는 베이징-평양 왕복 비행기표·호텔비·식사비·
국내선 비행기를 포함한 교통비와 관광지 입장료 등이 포함돼 있다.
열흘을 기준으로 대략 2500달러에서 3000달러 정도 한다. 
여행비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아리랑 공연 티켓(100~250달러),
고구려 고분석실 관람료(120달러 정도) 그리고 안내원과 운전기사를 위한 팁 정도다
(영국인이 운영하는 북한 관광 전문 누리집,
이곳에 가면 일정과 가격이 자세히 나와 있다... 바로 가기)

식사 때마다 맥주나 소주가 제공되지만,
오늘처럼 공식 일정에 없는 술집에 간다든가 혹은 여행사에서 제공하는 식사 대신
여행자가 원하는 식당에서 식사를 할 경우에는 본인이 그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하루 일정을 끝내고 안내원들과 운전기사에게 맥주를 대접하는 일은 우리들의 즐거운 여정 중 하나다.

이런 자리에서 나는 우리가 한 민족이요,
동포요,
형제자매라는 것을 더욱 실감하게 된다.
자녀교육·부부관계·부모님 모시는 일·직장·친구관계 등
사람 살아가는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자면 '
어쩜 이렇게 똑같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가 이내 이런 사람들이 수십 년을 떨어져 살며 서로가 총을 겨누고 있다는 현실을 체감한다. 
이 현실이 너무 허무해 가슴이 뻥 뚫어져 버리는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희망도 품는다.
누군가 아무리 우리를 갈라놓으려고 해도
우리는 서로 만나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 금세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우연히 만났던 재미동포 할머니가 생각난다.
그분은 "
이제 남과 북은 말도 점점 달라지고 이질감이 너무 커 함께 살 수 없다"는 말씀을 하셨다.
내가 물었다.

"할머니, 미국에 사시면서 언어가 불편하시지는 않으세요? 영어 잘 하세요?"
"내가 무슨 영어를 해.
여기서 수십 년을 살았지만 영어는 잘 안 되네."
"답답하시지 않으세요?"
"답답하지. 난 그래서 한국 텔레비전만 봐. 
한국 비디오 빌려다 보고."

"저도 여기서 박사공부까지 했지만 여전히 영어는 불편해요. 우리말이 너무 편하고 정겨워요.
미국은 정말 우리하고 다르지요?"
"다르고 말고.
이 사람들은 말도 안 통하고 생각하는게 우리하고는 아주 달라,
다르고 말구."
"한국으로 가셔서 사실 생각은 없으세요?"
"아냐,
난 여기서 살다 죽을거야."
"이렇게 말도 안 통하고 이질감이 큰 나라에서 계속 사실 수 있으시겠어요?"
"…."

이 재미동포 할머니께서는 말도 통하지 않고 문화도 전혀 다른,
그야말로 이질감이 극에 달하는 미국에서 잘 살고 계신다. 
과연 '
남과 북은 이질감이 커 함께 할 수 없다'는 말이 설득력 있을까.

아픈 몸을 숨긴 설향이

▲  가스맥줏집에서 아이스크림을 주문한 설향이. 알고보니 몸이 아팠단다.
ⓒ 신은미

 


맥줏집에서 나오니 벌써 오후 9시가 넘었다. 저녁식사가 너무 늦어졌다. 
설향이는 식당들이 문을 닫을 시간이라며 걱정을 한다. 
북한에는 밤새 영업을 하는 식당이 없다.
영업시간이 끝나면 문을 닫고 봉사원들은 퇴근한다.
그런데 설향이의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인다.

"설향아,
어디 아프니?"
"일 없습니다.
어제 밤 호텔의 냉방기가 너무 추웠나 봅니다.
온도를 높히고 잔다는 것이 그만 잠이 들어 버렸어요.
몸이 으실으실 춥고 떨리는데 인차(곧) 괜찮아 질겁니다."

남편이 가방에서 감기약을 꺼내며 말한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야지….
어떻게 감쪽같이 있다가 이제야 쓰러지니,
설향아.
어서 이것부터 먹어."
"일 없습니다."
"일 없기는 인마,
어서 약 먹어."

옆에서 영길 동생이 자기는 설향이의 몸이 안 좋은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기들의 임무는 우리가 즐겁도록 안내하는 일이라,
설향이가 숨기고 있다가 호텔로 돌아가게 되니 긴장이 풀어져 더 아픈 것 같단다.
남편이 영길 동생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자네도 집에 가면 설향이 만한 딸이 있다드니 어찌 사람이 그런가,
어른이 돼가지고."

그리고 설향이에게 걱정 어린 야단을 쳤다.

"아프면 얘기를 해서 빨리 평양으로 돌아오든가 했어야지, 
그걸 숨기고 있다 큰일이라도 나면 어쩔라고 그러니,
이놈아."
"일 없습니다.
걱정을 끼쳐드려 안 됐습니다."

호텔에 도착한 우리는 3층 식당으로 향했다.
우리가 식사를 하기로 한 곳이다.
하지만 이미 문이 닫힌 뒤였다.
이 호텔 지하에는 다른 식당이 또 있었는데,
설향이는 우리를 그곳으로 데려간다.
가보니 세 손님이 스시바에 앉아 늦은 시각까지 술을 마시고 있다.
설향이가 봉사원에게 묻는다.

"지금 식사 일 없겠습니까?
두 분인데…."
"이미 끝났는데…."
"아,
이를 어쩌나….
해외동포 손님인데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봉사원이 잠깐만 기다려 보라며 주방으로 들어가더니 나오며 미소를 짓는다.
"어서 앉으십시오"라는 말과 함께.
설향이는 우리에게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 주무신 뒤 내일 오전 9시에 로비서 만나자고 한다.
그러자 남편이 설향이 저녁 식사를 걱정한다.

"너는 밥 어떻게 하구?"
"저는 그냥 올라가 자겠습니다.
영길 동지도 방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래,
밥맛도 없을 게다. 
어서 올라가 쉬고 내일 아침에 만나자."

평양냉면, 이렇게 먹는 겁니다

▲  평양 고려호텔 지하식당 냉면
ⓒ 신은미

 


웨이트리스가 나와 무엇을 주문하겠느냐고 묻는다. 
남편과 나는 냉면을 먹기로 이미 마음을 굳힌 터였다.

"저,
혹시 냉면 지금 되겠습니까?"
"랭면이요?
잠시 기다려 보시겠습니까?"

또다시 주방에 갔다 오더니 "
몇 그람 하시겠습니까?"라고 묻는다.
우리는 냉면 200그램을 주문한다.

북한에서는 냉면의 양이 세가지로 나뉘어 있다. 
100,
200
그리고 300그램이다.
양을 비교하자면,
200그램 냉면은 서울 냉면집에서 제공하는 그 양보다 조금 많은 정도다.

평양의 냉면은 정말 원조답다.
설탕을 넣지 않아 전혀 달지도 않는 게 묘하게도 감칠맛이 난다. 
육수는 대체 무엇으로 우려냈는지 그윽하고 깊은 맛을 말로 표현하기 쉽지 않다.
닭고기·
소고기·
돼지고기가 얹혀 있으니 그것으로 국물을 내어 조선간장(국간장)과 소금으로 간을 한 것 같다.
그런데 그 외에 무엇을 넣었는지 알 길이 없다.
요리하는 걸 좋아해 한 입만 먹어보면 재료를 알아맞추는 남편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겠다고 한다.

여러 차례 북한 여행을 하면서 우리는 평양냉면을 즐기는 방법 하나는 제대로 터득했다.
냉면이 나오면 우선 그릇을 높이 들고 쌓아올린 고명이 무너지지 않게 조심스레 기울여 국물을 마신다.
그다음 젓가락으로 고명을 한쪽으로 살짝 쓰러트린 후 그릇을 들고 다시 한 번 국물을 들이킨다.

▲  국수를 입에 매달고 평양냉면을 먹는 나. 평양냉면은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 신은미

 


이번에는 젓가락으로 면을 길게 들어 올려 국숫가락 위에 식초를 골고루 두른 후
국물에 겨자를 풀고 또다시 그릇채 국물을 마셔본다.
그런 다음 국수를 입에 넣고 으적으적 씹는다.
하지만,
국수는 끊어지지 않는다. 
국수를 입에 매단 채 그릇을 들고 국수와 국물을 함께 들이킨다.
지루하다 싶으면 고기 한 점 입에 넣으면 된다.
그래도 성이 안 차면 곁들여 넣어준 꿩고기 경단을 먹으면 된다.
달큰한 게 당기면? 냉면국물 머금은 배를 베어물어 입안 분위기를 전환하면 된다.

그릇을 다 비우고 나면 어떤 때는 냉면국물을 더 가져다 줄 때가 있다. 
아무것도 넣지 않은 채로 국물을 쭈욱 들이키면,
처음 냉면국물을 들이키던 그 입맛으로 다시 돌아간다.
자연스레 냉면에 대한 미련을 갖게 한다.
마지막으로 웨이트리스가 가져다주는 메밀차를 마시며 미련을 다독인다.

이날 지하식당에서 나는 냉면 한 그릇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다.
아 아름다운 '평양냉면의 밤',
아!
옆에서 이런 날 지켜보던 남편이 나를 흔들어 깨운다.
그만 먹고 올라가잔다.
나는 못내 아쉬워 한마디 던진다.

"여보,
평양냉면을 주제로 노래 한 곡 작곡해 이 행복감에 보답하고 싶네요.
그런데 내 노래의 멜로디나 가사가 사회주의 이념과 배치되면 어쩌지요?"
"아니,
냉면에 무슨 이념이 있고 사상이 있어?"

"너희가 혹시 마주치더라도 총은 절대 쏘지 마라"

▲  호텔로 누나의 약을 가져 온 설향이의 남동생 국철이(가운데)
ⓒ 신은미

 


식당에서 나와 호텔방으로 가려고 로비를 향하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아파서 일찍 쉬고 싶다던
설향이가 멋진 젊은 남성과 의자에 앉아 다정히 뭔가를 주고받고 있다.
그 광경을 목격한 남편이 흥분해 큰소리친다.

"어?!
쟤 좀 봐, 
아프다는 아이가 이 늦은 시간에 남자친구하고 뭐하는 거야."
"여보, 좀 조용히 하세요.
그나저나 남자아이가 듬직한 게 진짜 잘생겼다.
설향이 눈이 보통 높은 게 아니네요."

우리와 눈이 마주친 설향이와 남자아이가 일어나 우리에게 다가온다. 
설향이가 "제 동생입니다, 
제가 아파 집에서 약을 갖고 왔습니다"라며 동생을 소개한다.
"리국천입니다."
동생이 인사를 한다.
정말 남자답게 잘 생겼다.
너무나 늠름해서 말을 걸어보고 싶었다.

"'국천'이라 그랬나요?"
"네, 조국을 하늘처럼 받들라고 아버님께서 '국천'이라 지으셨답니다."
"아, 참 좋은 이름이네요.
그래 지금 뭘 하고 있어요?"
"평양외국어대 러시아어과 4학년입니다."
"곧 졸업이네요.
졸업을 하면 무얼 할 예정이에요?"
"군사복무를 할 예정입니다.
제가 원하면 직장을 가져도 되지만 저는 꼭 군사복무를 하고 싶습니다."

설향이가 자랑스러운 눈으로 동생을 바라보며,
자기 역시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남성과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한다. 
남동생을 유심히 바라보던 남편이 말을 잇는다.

"자네 꼭 역도산같이 생겼어.
역도산이 누구인 줄 아나?"

국천이가 웃으면서 대답한다.

"네, 그런 말씀 많이 듣습니다."
"아니,
자네가 역도산을 어떻게 알아?"
"조국에서 력도산은 꽤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제자 '
안토니오 이노끼'라는 일본의 레슬링선수가 가끔 평양에 오기도 합니다."

나는 역도산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듬직하니 잘 생긴 청년이다.
엘리베이터로 가는 길에 남편에게 물었다.

"여보,
우리나라에 '
역'씨 성도 있어요?"
"아,
참,
이 사람….
'역도산'은 말하자면 예명같은 거야.
본명은 나도 모르겠어.
일제 때 태어난 사람인데 고향이 아마 함경도일 거야. 
조선의 씨름꾼이었는데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씨름인 스모선수를 하다가
프로레슬링 선수가 된 유명한 사람이지. 
김일이라는 남한의 프로레슬러도 역도산의 제자일걸?"
"박치기로 유명했던 김일 선수는 어려서 많이 봐 저도 잘 알지요.
그런데 역도산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네요."
"모르겠지. 일본에서 활동하다 죽었으니까.
야쿠자의 칼을 맞고 죽었어."

아무리 잘 생겨도 그렇지 남편은 왜 하필이면 야쿠자의 칼에 맞아 죽은 사람에 국천이를 비유하는지….
엘리베이터가 내려오지 않아 기다리고 있는데 국천이가 "
선생님" 하고 부르며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와 인사를 한다.

"저도 이제 집으로 돌아갑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래 잘 가.
집에 가면 부모님께 우리 인사 전해드려요.
그리고 군대에 가면 몸조심 잘 하고."
"네, 명심하겠습니다.
부모님께선 벌써 두 분을 잘 아시고 계십니다.
누나가 하루에도 몇 번씩 집에 전화를 한답니다.
말씀 전하겠습니다."

방으로 돌아오는데 아들 생각이 난다.
내 아들은 이중국적자다.
내년에 대학을 졸업하면 서울에 가서 군에 입대하겠단다. 
어쩌면 내 둘째 수양딸 설향이의 동생 국천이와 나의 아들은 비무장지대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눌지도 모른다.
아, 
우리는 이런 비극의 역사를 언제까지 안고 살아야 하는가.
마음속으로 기도한다.

"얘들아,
혹시 너희들이 마주치게 될지라도 서로 총은 절대 쏘지마라."

무슨 이유인지 두 아이들이 비무장지대에서 꼭 마주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오늘 밤은 나의 국군 아들과 인민군 국천이 생각에 마음이 무겁다.
마음이 답답해 잠을 이루기가 힘들다.
먼 옛날 끝난 줄만 알았던 동족상쟁은 아직도 진행형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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