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작품(제목,화가,만들어진년도,간략한설명)지식인을 믿어요.

현대미술작품(제목,화가,만들어진년도,간략한설명)지식인을 믿어요.

작성일 2005.11.26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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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현대미술작품작품집

만들어야 하는데요,,,

어디에 가도 현대미술작품이

없더라구요.

제가 컴맹이라서 그런지..^^

제발 부탁드립니다.

현대미술작품의

제목,화가,만들어진년도,

간략한 설명 좀 찾아주세요..

이런것들이 나와잇는

사이트도 좋구요,,

저번에 고민거리가 있었는데

지식인으로 싹 괜찮아

졌거든요..^^

그러니까 이번일도

잘 풀리거라고,,,

지식인 여러분 믿을게요+_+♡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작품 이름: 모자를 쓴 여인
소재지: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작가: 앙리 마티스
제작시기: 1905년 제작. 오톤 살롱 전시회 출품
작품해설: 마티스는 모자를 쓴 여인을 그리기 전까지 반고흐의 폭발할 것 같은 열정적 화풍과 신인상파 화가인 쇠라의 점묘법을 접목시킨 그림을 그렸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끊임없는 모방과 습작을 통해 자신의 스타일을 변모시켜왔습니다. 그의 야수파로서의 시작이 되는 작품이 바로 '모자를 쓴 여인'입니다. 야수파의 시작이었던 앙드레 드랭의 영향을 받아 야성적이고 화려한 채색, 그림자의 부정, 의도적인 부조화의 창출 등을 바탕으로 하여 작품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모자를 쓴 여인의 대상은 자신의 아내였습니다. 그림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그림에는 그림자가 없습니다. 그림지라고 표현될 수 있는 부분이 검은색, 붉은 색, 보라색 등 강렬한 색채의 어울리지 않은 혼합으로 뭉그러져 있습니다. 이 그림을 그리고 나서 그는 많은 대중과 화가들의 비난을 받았다고 합니다. 지나치게 인위적이고 부조화스럽다고 말이죠.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던 여인을 이렇게 바꾸어놓았으니 말입니다. 모리스 드니는 '고통스러울만큼 현란한 그림', 레오 슈타인은 '어떤 그림보다도 거칠고 추하지만 강하고 밝은 그림'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이것은 빛이 주는 인상을 표현하던 인상파와도 다른 것입니다. 다분히 의도가 섞인, 빛과 색채만을 위한 그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덕분에 사실과는 많이 멀어졌지만 그림에는 뚜렷한 표정이 살아있게 되었습니다. 강렬한 색채의 충돌은 오히려 사람의 심리를 반영하는 듯, 마티스 부인의 표정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쩐지 실존적이고, 심층적인 그런 느낌 말입니다..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출처: 시공 디스커버리 , 개인적인 생각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우리나라

<나는 새 두 마리(유채/46×56cm/1962년 작), 김환기(1913×1974/한국)>

*김환기는 한국 근대 회화의 추상적 방향을 제시한 선구자로, 화면을 명쾌한 면 분할로 구성하고, 직선과 곡선, 색의 대조와 대비로써 경쾌한 그림을 그렸다. 작품의 경향은 초기의 기하학적인 추상에서 출발하여 한국적인 형태를 바탕으로 한 반추상의 세계를 보이다가 미국 이주 후에는 완전히 추상화로 전환하였다.(지도서 설명)
 

<밤 피에로(유채/150×200cm/1984년 작) 남관(1911×1990/한국)>

*청색의 변화 있는 바탕에 적·녹색 등이 어우러져 화면을 활기 있고 화려하게 만들고 있다. 또, 화면에는 환상적인 상들이 상쾌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침울하고 어두운 지난 날의 영상들은 생기 있고 동적인 상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작가는 1980년대에 이르러 생동적인 표현으로의 발전식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 죽음의 영상, 태고의 잔영, 피해의 흔적 등과 같은 어두운 세계가 점차빛이 있는 밝고 생기찬 세계로 전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지도서 설명)
 

<군마(수묵 담채/149×320cm) 김기창 (1914∼2001/한국)>

*고개를 뻔쩍 들거나 고꾸라질 듯 달리는 말들의 생명력과 달리는 준마의 약동성이 잘 표현되어 있고, 갈기나 몸매의 붓선과 말들의 야성적인 모습이 예리하게 나타나 있다. 짙은 빛깔과 엷은 빛깔의 말이 알맞은 비율로 조화를 이뤄 수묵을 위주로 한 담채인데도 풍부한 생각을 느낄 수 있다.(지도서 설명)
 
한국의 현대 미술은 전통적인 미의식을 바탕으로 현대 미술의 다양한 특성을 폭넓게 수용하면서 발전하고 있다. 국제전에 많은 미술가들이 참여하는 등 다른 나라 미술과도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으며, 여러 가지 재료와 기법의 개발로 새롭고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다른나라

[샤갈-나와 마을]

 

[레오나르도 다 빈치-모나리자] 

 

외국 미술품의 특징

  전체적으로 색감이 부드럽고 온화한 느낌.

  약간의 신비한 느낌도 있다.

  현대적인 그림.

  무엇인가 아주 아름답고

  부유한 느낌과 여유로운 느낌을 준다.

  그림 주제는 딱히 정해진 것은 없고

  언제나 다양한 것을 그린다.

  채색이 아주 이상하고 ..

슬픈 삶, 그림_이중섭 
 

이중섭 作 <흰소> 1954, 30x41.7cm, 합판에유채. 홍익대학교 소장

 

이중섭이야말로 <빈센트 반 고흐>만큼 유명하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럼에도 다시 조명해 봄은 이 글을 통해 화가와 그 정신의 산물인 그림을 이해하고 조금이라도 더 미술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길 바라기 때문이다. 대향(大鄕) 이중섭(李仲燮: 1916∼1956)은 그야말로 ‘국민화가’라는 호명에 걸맞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대중 화가이다. 얼마 전 필자가 몸 담은 미술월간지에서 우리나라 성인 남녀를 대상으로 ‘가장 잘 알고 있는 미술인’에 대해 설문조사한 결과 약 70% 이상이 이중섭을 알고 있다고 할 만큼 그의 대중적 인지도는 상당하다. 하지만 폭넓은 사랑을 받는 인기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이중섭의 예술세계는 그의 비극적인 생애에 가려 제대로 조명되지 않아왔다.

 

1916년 평남 평원군 부농의 집안에서 태어난 그가 세상에 남긴 삶의 발자취라야 고작 40년이다. 빈곤과 절망의 대명사처럼 인식되고 있는 이중섭이지만 그가 처음부터 가난하고 힘들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로서는 여간해서 어려웠던 일본 유학도 다녀왔을 만큼 여유가 있었으며 민족주의자이자 선각자였던 임용련과 백남순 부부를 만나 누구보다 먼저 신지식을 습득했던 혜택 받은 자이기도 했다. 살아생전 화단의 평판도 좋았으며 1938년 이후 각종 상을 휩쓸면서 ‘천재’라는 타이틀을 획득함은 물론 촉망받는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히기도 했다.

 

그런 그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것은 내외적인 요인 때문이었다. 일본강점기에 겪어야 했던 민족감정과 울분, 모든 것을 해체시켜버린 6?25 동란, 월남하며 거처도 없이 떠도는 과정에서 떠나버린 일본인 아내와 아들의 사망, 그리고 가난…. 그 모든 것들이 인간 이중섭을 괴롭혔지만 그러한 수난들이 없었다면 그의 인간애적인 부분은 보다 희석되었을 지도 모른다.

 

소와 아이들을 사랑한 화가 

 

5세 이후 어릴 적부터 고구려시대 고분에 들어가 벽화를 바라보며 화가의 꿈을 키웠던 이중섭은 가난에 절어 절망하던 순간까지도 그림을 놓지 않았던 인물이다. 놀랍게도 민족동란의 참혹함 속에서도 그는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다. 그는 판잣집 골방에서 콩나물시루처럼 웅크린 상태에서도 그렸고, 대폿집 목로판이나 부두에서 일하다 말고도 그렸다. 잘 곳이나 먹을 것이 없어서 그렸으며 캔버스나 스케치북이 없으면 못이나 연필로 그렸다. 때론 허무해서 또 때론 외로워서도 그렸다. 피난시절 세상을 전전하면서도 유화 2백여 점과 은지화 3백여 점 등 총 5백여 점의 작품들을 그렸다. 이 같은 사실들은 그에게 있어 그림은 곧 생존과 생활과 생애의 전부였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사실 우리가 이중섭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곤 「소」그림들과 1950년부터 52년 사이에 그린「은지화」정도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현재 생존해 있는 지인들을 만나보면 이중섭은 실제로도 「소」를 참 잘 그렸고 자주 그렸다한다. 그가 소를 그린 이유는 저항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단순한 토속성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중섭 作 <소와 새와 게>종이에 연필. 유채 32.5× 49.8cm 1954년--->

 

이중섭과 일본유학시절을 함께 했던 한 노 화가는 얼마 전 필자를 만나“소에 관한한 누구도 이중섭을 따라올 수 없을 것”이라며“그는 어려서부터 보아온 우직한 소가 좋았고 그것을 그림으로서 자신의 항거적 마음을 강하게 표현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를 살던 이중섭이 소를 통해 강한 민족성을 표현했다고 보여 지는 대목이다. 그러나 정신병을 앓으며 가난에 허덕였던 말년에 그려진 소에는 분노와 좌절의 느낌이 물씬하다. 이 중 사망하기 2년 전인, 1954년 무렵 그려져 현재 홍익대박물관에 소장 중인 대표작 「흰 소」는 회색조의 배경에 검고 희 붓질로 된 독특한 작품이다. 검은 빛과 흰빛이 아울러진 거칠고 굵은 붓질은 거의 울분에 가깝다. 마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나 추사 김정희의 추사체와 흡사하다.

 

이중섭 作 <달과 까마귀> 종이에 유채. 29× 41.5cm 1954년 작

 

헌데 이중섭이 소보다 더 자주 그리고 애착을 보인 것은 다름 아닌 아이들이다.「은지화」나타난 아이들이 막연히 1946년 태어나자마자 죽은 첫째 아들을 그린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이중섭은 원래부터 아이들을 사랑했다. 초창기부터 그의 그림엔 아이들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봄의 어린이」도 그 중 하나다. 담배를 싸는 종이에 입혀진 금속막을 긁어 새기고 연필선으로 메운 것은 상감기법이나 화감암에 새긴 선묘와 연결 지을 수 있으며 구체적으로 민화나 분청사기에 실현된 여러 가지 기법을 종합하여 응용한 그림이기도 하다.

이것은 종이에 유채로 그려졌으며 아이들이 벌거벗은 채로 유쾌하게 뛰어 놀고 있는 동작들을 담고 있다. 허나 그림과 화가의 삶은 다른 것일까. 원산에 살던 그는 이 당시 부인이 일본인이라고 하여 친일파로 치부되는 고통을 겪고 문학가동맹에서 펴낸 공동 시집 응향(凝香)의 표지를 그렸다가 일본성이 짙다하여 문초를 받는 등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처지에 놓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중섭은 술을 자주 마시고 주정을 부리기도 했다.

 

아내와 자식에 대한 사랑

 

이중섭 作<봄의 어린이>종이에 유채. 32.6× 49.6cm 개인소장. 연대미상

 

혼란의 시기를 살던 이중섭은 앞서 말한 작품들 외에도 수 없이 많은 명작들을 남겼다. 아내 마사코가 남편 이중섭의 작품제작비와 생활비를 벌기위해 후배인 해운공사 소속의 승무원에게 일본서적을 외상으로 보내고 이익의 일부를 받기로 했으나 어김으로써 발생한 빚을 갚기 위해 개인전을 준비하던 중 그린 1954년 작「달과 까마귀」는 휘황한 보름달이 뜬 푸르른 하늘을 배경을 바탕으로 친구를 찾아 모여드는 까마귀를 그린 그림으로 마치 문인화의 진한 먹으로 툭툭 쳐내듯 일획으로 표현된 까마귀들이 인상적이다. 이 그림은 당시 이중섭의 절망과 외로움, 고통 등이 간접적으로 그려진 작품이다. 이밖에도 이중섭의 습작성과 마음을 알 수 있는 작품들도 다수에 달한다. 일본어로 쓰인 글 사이사이에 소년들을 아기자기하게 그려 넣은 엽서그림인화목(1951년경)은 현재 90매 가량이 남아 있는 그의 일본인 아내에게 보낸 편지그림 중 하나다.

 

이중섭이 최초로 보낸 것은 편지가 아닌 엽서다. 1950년 말에 원산에서 보낸 것으로 이 엽서에는 물고기 꼬리를 한 소가 바다에서 솟아나오는 모양을 하고 있다. 「화목」에서는 이중섭이 황소보다 더 많이 그렸던 아이들이 가득 나온다. 1951년 일본으로 떠난 아내와 두 아들을 그리워하며 수채화와 펜으로 그린 이 편지는  순진무구한 존재의 상징인 어린이를 주제로 사랑과 삶의 사연들이 동심처럼 진득하게 묻어 나온다. 반면 자신이 살아야 했던 혼탁한 현실에서 판치던 변절과 거짓을 극복하고자 하는 갈망의 표현도 깃들어 있다. 이중섭은 1951년 한 해 동안 무려 80점 가량을 아내와 자식들에게 그려 보냈다. 

 

절망과 고통 속에 발화한 그림

 

이중섭 作 <화목> 편지에 수채 및 펜. 20× 27cm 1951년경-아이와 아내를 그리워 하며 쓴 편지그림

 

이중섭의 대표작이라는 것들의 대부분은 그가 남하한 이후 그려진, 즉 1956년 사망하기 이전까지의 약 5년 정도 사이의 것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공교롭게도 죽음을 바라보며 걷던 이 5년 정도의 시기가 그림에 있어서는 최대 절정기였다. 39세였던 1954년 그린「소와 새와 게」를 보면 이중섭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지친소의 모습과 새들의 어수선함은 이중섭의 심적 괴로움과 시대의 암울함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다 40세이던 1955년, 이중섭은 서울 미도파 갤러리와 미국공보원에서 개인전을 개최하고 허무하게 다가오는「싸우는 소」를 비롯한 유화와 은지그림을 비롯한 소묘 등을 전시하지만 은지그림이 춘화라고 하여 철거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전시를 해도 그림 값을 떼이기 일쑤였다. 그는 술로 연명하다 빈털터리가 되어 자학과 기진맥진, 이때부터 영양부족과 극도의 신경쇠약으로 정신분열 증세를 보인다.

 

성가병원에 1달, 서울 이종사촌 집에서 머물다가 다시 수도육군병원에 입원하고 또 다시 성베드로 병원으로 옮겼다가 1956년 청량리뇌병원에 입원, 정신이상이 아니라는 진단을 받고 퇴원했으나 곧 서대문 적십자병원에 들어가 9월 6일 홀로 숨을 거둔 천재화가 이중섭. 이처럼 삶의 절망과 죽음 앞에서 오히려 강하게 불타올랐던 그의 그림들은 완숙미를 더했고, 마음 깊은 곳의 아픔들이 명작으로 옮겨져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그림만큼은 행복하게.

 

"나의 사랑하는 남덕 군"

 

살아서나 죽어서나 그리 행복하지 못했던 40년 짧은 생을 살다간 이중섭. 오는 9월이면 작고 50주년을 맞이 하게 되지만 얼마 전까지도 유족들과 감정협회 간 거세게 일었던 작품진위논란은 그와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주변인들을 안타깝게 했다. 무엇이든 법적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성질머리들을 관찰하며 과연 사후의 이중섭에게 어떤 영광과 의미가 있었는지 되묻게 된다. 그가 남긴 발자취나 생전 그토록 목매어 찾았던 가족들의 이야기는 온데 간데 없고, 또한 미술계 거장으로서, 혹은 사람 냄새 물씬한 그의 인간적인 측면은 도외시된 채 오로지 그를 둘러싼 물욕들이 여기저기서 포착되니 참으로 씁쓸한 노릇이다.

 

‘인간 이중섭’. 우리는 살아 생전 그가 지녔던 소망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창작의 원천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이중섭 생전 삶의 희망은 가족에게 있었다. 그림을 비롯한 그의 모든 것의 최종 종착지는 아내 이남덕을 포함한 가족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말년으로 갈수록 그는 보고 싶은 가족 곁으로 미치도록 돌아가고 싶어 했으며 뼛속까지 사무치는 그리움에 몸서리를 쳤다. 하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죽어서나 살아서나 고단한 현실은 그를 끝내 가족 곁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했다. 그가 남긴 작품들은 물론이고 일본에 있는 가족에게 보냈던, 수없이 많은 편지와 엽서들을 보면 이중섭이 얼마나 가족을 보고 싶어 했는지 알 수 있게 한다. 언제나 “나의 사랑하는 남덕 군에게”라는 말로 시작하는 그 편지에는 읽는 이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할 만큼 진한 애정과 번민이 스며있다.

 

<--이중섭 결혼 사진. 1945년 5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괴로움과 자식들을 보고 싶어 하는 애틋함, 셈이 빠른 사람들로부터 이리저리 채여 생채기 난 상처를 애써 다독거리던 ‘인간적인 아픔’들이 눈물이 되어 그의 편지그림들과 글 속에 절절하게 녹아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럼 왜 일본에 갈수 없었을까? 피폐한 생활고 때문이었다.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인 일본으로 떠난 것도 그 이유였다. 이에 그는 돈을 모아야했다. 오로지 전시를 열어 돈을 많이 번 뒤 일본으로 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돈을 모아야했다. 지금의 많은 화가들도 그렇지만 그 역시 딱히 다른 재주는 없었기에 그에게 있어 돈을 모을 수 있는 방법은 그림뿐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중섭이 애타는 마음으로 준비한 전시회는 대성공을 거둔다. 언론의 호평은 이어졌고 전시장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중섭은 비로소 일본에 있는 가족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매우 들떴다.

 

그러나 요즘 세태로 볼 때 이중섭은 어수룩했다. 그림은 많이 팔았으나 수금을 하는 데는 젬병 이였기에 이리저리 떼이고 못 받아 막상 이중섭 수중에 들어 온 돈은 별로 없었다. 이중섭은 간절히 바랬던 일본행이 좌초되자 실의에 빠진 채 죽음을 택하기로 결심한다. 더 이상 가족을 볼 수 없다는 커다란 실망감에 사로잡힌 그는 마지막까지 놓지 않으려던 삶을 미련 없이 버리기로 한다.

 

길 떠나는 가족이 그려진 편지. 종이에 유채.10.5×25.7cm.1954년 개인소장-나중에 만나 함께 잘 살자는 내용이 담긴 편지--->


그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정신병원 어느 차가운 병실 귀퉁이에 쓰러져 쓸쓸하고 외롭게 죽음을 맞이한다. 우리가 추앙해 마지않는 근대미술의 대가 이중섭의 40년 짧은 생애는 그렇게, 애처롭게 막을 내린다. 단편적으로 보면, 그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주었던 것은 사랑하는 가족이었고 그를 죽인 것은 평소 어지간히도 간수하지 못하던 몇 푼의 돈이었다. 또한 그를 아끼는 주변인들이 그의 삶을 풍요롭게 했다면 되돌릴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준 사람들 역시 주변인이었다.

 

문제는 그에게 있어 상처뿐인 돈 이야기가 지금도 심심찮게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여전히 주변인들의 이야기가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이중섭의 이름으로 온통 도배되다시피 한다는 사실이다. 까놓고 말해, 얼마 전 법정공방으로까지 번진 이중섭 작품 진위논란을 보면 결국은 돈의 문제요 사람의 문제였다. 여기에 ‘인간 이중섭’은 온데간데없다. 오로지 경제적 가치로서의 이중섭만 존재하는 것 같아 안타까움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젠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이중섭, 그는 과연 작고 50주년을 앞두고 자신의 초상을 어떻게 그리고 있을까요>????

다른나라그림은;;; ㅈ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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