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
1936년 4월 6일 충청북도 중원에서 태어났다. 1960년 동국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55∼1956년 《문학예술》에 이한직의 추천을 받아 시 《낮달》 《갈대》 《석상》 등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다. 건강이 나빠 고향으로 내려가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 현대문학사, 희문출판사, 동화출판사 등에서 편집일을 맡았다. 한때 절필하기도 하였으나 1965년부터 다시 시를 창작하였다. 《원격지》(동국시집, 1970), 《산읍기행》(월간다리, 1972), 《시제(詩祭)》(월간중앙, 1972) 등을 발표하였다. 이때부터 초기 시에서 두드러진 관념적인 세계를 벗어나 막연하고 정체된 농촌이 아니라 핍박받는 농민들의 애환을 노래하였다.
그의 작품세계는 주로 농촌 현실을 바탕으로 농민의 한과 울분을 노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론가 백낙청은 1973년 발표한 시집 《농무》의 발문에서 ‘민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고 받아 마땅한 문학’이라는 점에서 이 시집의 의의가 있다고 하였다. 이후부터 그는 우리 민족의 정서가 짙게 깔려 있는 농촌 현실을 바탕으로 민중들과 공감대를 이루려는 시도를 꾸준히 하고 있다. 1973년 제1회 만해문학상, 1981년 제8회 한국문학작가상을 수상하였다.
시집에 《새재》(1979), 《달넘세》(1985), 《남한강》(1987), 《우리들의 북》(1988), 《길》(1990) 등이 있고, 평론에 《농촌현실과 농민문학》(1972),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1982), 《역사와 현실에 진지하게 대응하는 시》(1984), 《민요기행》(1985), 《우리 시의 이해》(1986) 등이 있다.
목계장터
신경림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시집 {농무}, 1973 / 1979년 시집 {새 재}
▶ 감상의 초점
이 시는 신경림의 시 세계의 한 아름다운 거점이 되고 있는 '목계 장터'를 제재로 하고 있다. '목계'는 남한강안(南漢江岸)의 수많은 나루터 중에서 가장 번잡했던 곳이다. 목계를 중심으로 한강마을 사람들의 억센 생명력을 고도의 상징과 비유를 통해 형상화시키고 있다.
▶ 성격 : 비유적, 상징적, 관념적
▶ 구성 :
① 떠나는 삶 ― 방랑(1-7행)
② 머무르는 삶 ― 정착(8-11행)
③ 떠나는 삶(12-14행)
④ 떠나고 머무르는 삶(15-16행)
▶ 제재 : 민중들이 삶
▶ 주제 : 삶의 갈등과 그 극복 의지
<감상의 길잡이>(1)
신경림 시인이 민요에 대한 관심을 보여 왔던 한 시기 가운데 가장 빼어난 성과를 이룩한 작품이다. 4음보의 가락을 주조(主調)로 하여 '하고', '하네', '-라네' 등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며 방랑과 정착의 심상이 교차하는 가운데 이 시는 생동감 있게 전개된다.
특히, 목계 나루를 무대로 한 풍물과 그에 따른 어휘들이 토속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여 끊임없이 떠돌 수밖에 없는 뿌리 뽑힌 민중들의 삶의 정서를 물씬 풍기게 한다. 목계 나루는 서울로 가는 길목에서 큰 장터를 이루었으나. 근대화되면서 점점 퇴색해 갔다. 화자는 바로 이 대목에 서서 갈등을 느낀다.
방랑인가 정착인가. '구름', '바람'으로 대표되는 방랑의 심상과 '들꽃', '잔돌'로 표상되는 정착의 심상 사이에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해야 한다. 그의 마음은 '산 서리 맵차'고 '물 여울 모진' 이 세상에서 차라리 천치(天痴)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고 싶지만, 몸은 끝없이 떠돌 수밖에 없는 처지였을 터이다.
<감상의 길잡이>(2)
이 시는 '목계 장터'를 중심으로 떠돌이 생활을 하는 민중들의 삶과 생명력을 노래하고 있다. '목계'는 1910년대까지 중부 지방의 각종 산물의 집산지로 남한강안(南漢江岸)의 수많은 나루터 중 가장 번창하기도 했지만, 1921년 일제의 식민지 수탈 정책의 일환으로 충북선이 부설되자 점차 그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 시의 표현상 특징은 전통적인 민요의 리듬을 연상시키는 4음보를 주된 율격으로 하면서, '하고', '하네', '라네' 등의 어미를 반복적으로 구사하여 생동감 있는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방랑과 정착의 이미지가 교체되어 나타나고 있으나, 마지막 부분에서 1·2행을 변주, 반복하여 주제를 강조하는 안정된 구조를 보여 주고 있다.
이 시는 표면상 1인칭 화자의 독백으로 진술되어 있다. 그러나 그 독백은 화자 개인의 삶의 애환을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 떠돌이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민중의 고뇌라는 일반화된 삶의 현실을 대변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 시가 '목계 장터'라는 생활 현실의 공간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시적 화자가 보고 듣고 체험한 사실들이 시적 표현의 바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구름'·'바람' 등으로 표상되는 떠남과 '들꽃'·'잔돌' 등으로 표상되는 정착의 이미지 사이의 대조적 표현은 퇴색해 가는 목계 나루에서 방랑과 정착의 기로에 서 있는 농촌 공동체의 시대적 삶과 화자의 개인적 삶 사이의 갈등을 선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이 시는 16행의 단연시로서 의미상 5단락으로 나누어진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단락 : 1∼4행 : 하늘 ― 구름, 땅 ― 바람(잔바람)
2단락 : 5∼7행 : 방물 장수
3단락 : 8∼11행 : 산 ― 들꽃, 강 ― 잔돌
4단락 : 12∼14행 : 떠돌이
5단락 : 15∼16행 : 하늘 ― 바람, 산 ― 잔돌
1∼7행에서, 하늘과 땅은 날더러 구름이나 바람, 혹은 '방물 장수'가 되라고 하고, 8∼14행에서는, 산과 강이 날더러 들꽃이나 잔돌, 혹은 '떠돌이'가 되라고 한다. 이를 보면, 8∼14행이 1∼7행의 변주이며, 15∼16행은 1∼2행의 반복으로, 이 시가 정교한 기하학적 구조를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단락은 화자가 갖는 유랑의 운명에 대한 인식을 보여 준다. '구름'과 '바람'은 화자가 삶에 대해 갖는 비탄, 또는 삶의 주체로서의 자유에 대한 의지를 뜻하며,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는 그 곳에 전해져 내려 오는 전설에서 취재한 표현이다. 2단락은 방물 장수로서의 떠돌이 삶을 노래한다. '아흐레 나흘'은 목계장이 서는 4일과 9일을 말하며,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 장수'에서 가을볕마저도 서럽게 느끼며 살아야 하는 그의 비애가 잘 드러나 있다. 3단락은 나약한 민초로서 살아가는 삶을 제시하며, 4단락은 고달픈 삶의 애환과 소망을 보여 준다. '산서리 맵차'고 '물여울 모진' 삶의 시련을 피해 '풀 속에 얼굴 묻고' '바위 뒤에 붙'어 안식을 얻고 싶지만, 현실은 언제나 그를 '떠돌이가 되'어 살아가게 할 뿐이다. 그러므로 '천치로 변해 / 짐부리고 앉아' 쉬고 싶다는 역설적 표현은 화자가 처한 곤궁한 삶을 대변하고 있다. 5단락은 운명과 존재성을 함께 제시하며 시상을 마무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