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역사 인물과 인물들에 관한 간단한 소개

수학역사 인물과 인물들에 관한 간단한 소개

작성일 2009.08.06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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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초6 인데요...

방학숙제에 수학신문 만들기가 있는데 수학에 관한 인물들을 조사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지식인 여러분이 찾아주셨으면 합니다.

 

 

 

 

~내공은 많습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참고 하세요....

 

가우스(Carl Friedrich Gauss :1777-1855)

놀랄만한 수학적 재능을 지닌 가우스는 18세기와19세기에 걸쳐 수학의 거상으로 버티고 서 있다. 그는 19세기의 가 장 위대한 수학자이며 아르키메데스.뉴턴과 더불어 3대 수학자로 꼽힌다.

가우스는 1777년 독일의 브룬스빅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고집세고 교육적 식견이 없는 육체 노동자였다. 어머니는 비록 교육을 받진 못했지만, 그가 공부하는데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평생 동안 자식의 업적을 자부심으로 간직하며 살았다.
가우스는 어렸을 때부터 보기드문 신동이었다. 그는 세살 때 아버지의 부기장부에 있는 계산착오를 지적했다고 한다.

가우스가 국민학교에 다니던 10세 때, 선생님은 학생들을 조용히 하게 하려고 1부터 100까지 더하도록 시켰고 가우스는 거의 즉시 답을 제출하였다. 마침내 모든 학생이 답을 제출하였을 때 선생님은 가우스 혼자만이 아무런 계산도 없이 5050을 정확하게 답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가우스는 등차수열의 합1+2+3+… +98+99+100을 단지 100+1=101, 99+2=101, 98+3=101 등등 으로 계산하면 50개의 쌍이 나오므로 답은 50×101, 즉 5050이라고 암산하였던 것이다. 말년에 가우스 는 자기는 말보다 계산을 먼저 배웠다고 농담을 하곤 했다. 가우스는 19세의 나이로 자와 컴퍼스를 가지고 정 17각형을 작도할 수 있음을 발견했는데 이것이 바로 일생을 수학에 바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가우스의 가장 위대한 단행본은 현대 정수론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중요한 책인 <수론 연구, Disquisitiones arirhmeticae>이다.
가우스는 천문학, 측지학, 전기학에서도 두드러진 공헌을 하였다. 1801년 새로운 방법을 도입하여 빈약한 자료를 가지고 당시 막 발견된 케레스(Ceres) 소행성의 궤도를 계산하였다. 807년 그는, 죽을 때까지 그 직에 있었던 괴팅겐 대학의 수학교수와 천문대장이 되었다.1821년 하노버의 삼각측량을 하였고, 자오선을 측정하고, 회광기(또는 일조계)를 발명하였다. 1831년 전기학과 자기학의 기초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동료 베버(Wilhelm Weber, 1804-1891)와 공동연구를 시작하여 1833년에는 전자석식 전신기를 고안하였다.

가우스는 1812년에 초기하급수에 관한 논문에서 최초로 급수의 수렴성을 체계적으로 고찰하였다. 곡면론에 관한 가우스의 걸작<일반 곡면론, Disquistiones generales circa superficies curvas>은 1827년에 발간되었고, 이로 인해 공간에서의 곡면에 관한 기하학의 연구가 시작되었다.

"수학은 과학의 여왕이고 정수론은 수학의 여왕이다."라는 유명한 얘기는 가우스가 한 말이다. 가우스는 흔히 다음과 같이 회자된다. "그는 너무 큰 거인이어서 우주를 한눈에 들여다 보았다."과학적 저술에 있어서 가우스는 완전주의자였다.대성당도 건축장의 마지막 조각이 치워질 때까지는 대성당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결과에 도달하기 위한 분석의 모든 흔적을 제거하면서 논문을 완전하게 하고, 간결하게 하며, 다듬고, 설득력 있게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
가우스는 1855년 2월 23일 괴팅겐 천문대에 있는 그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그 직후 하노버의 왕은 가우스에 경의를 표하는 기념 메달을 만들도록 하였다. 이 70mm 메달은 오래지 않아(1877년) 하노버의 유명한 조각가이며 메달 제작자인 브레머(Friedrich Brehmer)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거기에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하노버의 왕 조지 5세가

수학의 왕에게


이후부터 가우스는 '수학의 왕'으로 일컬어진다

 

 

갈루아(Evariste Galois :1811-1832)

1811년 파리 근교에서 작은 마을의 시장의 아들로 태어나 그는 15세 때부터 비상한 수학적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두번이나 에콜 폴리네크니크에 입학하려 했으나, 그의 천재성을 전혀 감지못한 시험관의 형식적인 요구를 채울수 없어 입학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 후 또 다른 충격을 받았는데, 성직자로 부터 박해를 받고 있다고 느낀 아버지가 자살한 것이었다. 참을성 있는 갈루아는 결국 1829년 교사가 될 준비를 하려고 에콜 노르말(사범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민주주의에 찬동하여 1830년 혁명의 소동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수 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하였다. 그는 석방 직후 21세가 채 안 된 1832년에 애정문제로 인한 권총결투에 유인 되어 살해되었다.
갈루아는 당시 수학 교과서를 소설을 읽듯이 쉽게 통달하고, 계속해서 르장드르, 야코비, 아벨의 중요 논문을 읽고 나서 자신의 수학을 만들어 냈다. 17세때 매우 중요한 결과를 얻었으나, 프랑스 과학원에 보낸 두 논문이 보관 잘못으로 분실되어 좌절감만 더해 주었다. 방정식에 관한 짧은 논문이 1830년에 발간되었는데 이것은 매우 일반적인 이론에 확실한 근거가 된 결과를 낳았다. 그가 결투하기 전날 밤, 십중팔구 살해되리라고 믿은 그는 한 친구에게 학술상의 유언장을 썼다. 이 유언장은 발표되지 않은 발견 중의 일부에 관한 것인데, 이것은 후에 몇몇 위대한 수학자에 의하여 군론에 포함된다는 것이 판명되었으며, 소위 방정식의 갈루아 이론이라 불린다. 군론 개념에 기초를 둔 방정식의 갈루아 이론은 유클리드 도구만을 가지고 기하학적 작도를 할 수 있는 가능성에 의한, 그리고 근에 대한 대수방정식의 해의 존재 가능성에 대한 기준을 제공한다.
갈루아는 본질적으로 군(Group)의 연구를 창시하였으며, 군이라는 말을 최초로(1830년) 사용하였다. 군론에 대한 연구는 그 후 코시와 후계자들에 의하여 치환군의 특별한 형태로 수행되었다.

 

 

갈릴레오(Galileo Galilei :1564-1642 )

갈릴레오는 1564년 미켈란젤로가 죽은 날에 피사에서 가난한 플로렌스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17세 되던 해, 부모는 의학을 공부시키려고 그를 피사 대학으로 보냈다. 하루는 피사의 성당에서 예배를 보던 중 높은 천장에 매달린 큰 청동 램프에 정신을 빼앗겼다. 램프는 불을 켜기 쉽게 하려고 옆으로 끌어당겨져 있었는데 놓았을 때 그것은 점차로 진폭이 작아지면서 앞뒤로 진동하였다.그는 자신의 맥박수를 이용하여 시간을 재었는데 진동주기가 진폭의 크기와 관계없음을 발견하고 놀랐다. 그 후에 실험을 통해서 진자의 길이에만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과학과 수학에 관한 갈릴레오의 흥미가 바로 이 문제에서 비롯되었으며 대학에서 기하학 강의를 수강하면서 더욱 고무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그는 의학을 포기하고 그 대신 훌륭한 재능을 지난 과학과 수학분야에 전념하는 것에 대한 부모의 허락을 얻어냈다.
갈릴레오는 25세 때 피사 대학의 수학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낙하 물체의 공개 실험을 했다고 전해진다. 얘기에 의하면 학생, 교수, 성직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피사의 사탑 꼭대기에서 하나가 다른 것의 열 배 무게인 두 금속 물체를 떨어뜨렸다. 그 두 금속 물체는 실제로 같은 순간에 땅에 떨어졌는데 이 사실은 무거운 물체는 가벼운 물체보다 빨리 떨어진다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부정한 것이다. 갈릴레오는 마침내 그 유명한 식 s=gt²/2 에 따라서 물체의 낙하거리는 낙하시간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법칙을 얻어냈다. 그러나 눈으로 확인된 갈릴레오의 실험도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가르치는 다른 교수들의 믿음을 깨지는 못했다. 대학의 권위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부정하는 갈릴레오의 무엄한 오만에 충격을 받아서 그 곳에서의 생활을 불편하게 만들었고 결국 1591년 교수직을 사임하기에 이르렀다. 이듬해 그는 파두아(Padua) 대학의 교수로 채용되었는데, 그 곳은 과학적 연구에 보다 호의적인 분위기였다. 여기에서 거의 18년 동안 갈릴레오는 실험과 강의를 계속했고 널리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1609년경 정탐 안경의 발명 소식이 갈릴레오에게 전해지자 그는 곧 리퍼쉐이가 만든 것보다 훨씬 우수한 정탐 안경을 만들었다.
갈릴레오는 연구를 거듭하여 지난번 것보다 더욱 강력한 네 개의 (멀리를 뜻하는 그리스어 tele와 보다를 뜻하는 skopos로 부터 telescope라 명명된) 망원경을 더 만들었다.
그는 목성의 네 개의 빛나는 위성을 발견하였고, 큰 물체 둘레를 작은 물체가 돈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뚜렷하게 확증시켜 주는 관찰을 하였다. 갈릴레오는 또 그의 망원경으로 태양의 흑점, 달 표면의 산, 금성의 위상, 토성의 고리 등을 관찰하였다. 그러나 이 발견은 태양은 완벽하며 지구와 사람은 우주의 중심에 있다고 주장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를 받아들이고 있던 많은 성직자의 편협한 반대를 한 번 더 불러일으킬 따름이었다. 한 성직자는 심지어 갈릴레오를 목성의 네 개의 위성을 망원경 안으로 끌어들인 점을 들어 고소하기까지 했다.
마침내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뒷받침하는 책을 출간한 다음 해인 1633년에 종교 재판소에 소환되었는데, 거기에서 이 늙고 병든 사람은 고문의 위협 아래 과학적 발견들을 철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책은 200년 동안이나 금서 목록에 올라 있었다. 양심을 위증함으로써 늙은 학자의 삶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무해한 과학적 연구는 계속하도록 허용되었으나 그는 실망하였고 종교 재판소의 감시 아래 실제 죄수인 채로 1642년 1월에 자신의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실험과 이론의 조화로서의 과학의 현대정신은 갈릴레오의 은혜를 입은 바 크다. 그는 자유낙하 물체의 역학을 세웠고, 후에 뉴턴이 그의 과학을 건설할 수 있었던 일반적인 역학의 기초를 쌓아 올렸다. 그는 진공 상태 안에서 투사된 물체의 경로가 쌍곡선 형태라는 것을 깨달은 최초의 사람이었고, 운동량을 포함하는 법칙들을 추측하였다. 그는 최초의 현대식 망원경과 한때 매우 유행했던 부채꼴 모양의 컴퍼스를 발명하였다. 19세기 칸토어(Cantor)의 집합론의 근본적인 관점이며 현대 해석학의 발전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 무한집합들 사이의 상등 개념을 이미 그가 깨닫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갈릴레오의 명제들이 역사적으로 커다란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갈릴레오는 그와 동시대인인 유명한 케플러를 질투했었던 것같다. 왜냐하면 케플러가 1619년경 행성 운동의 세 가지 중요한 법칙을 발표하였으나 이것은 갈릴레오에 의하여 완전히 무시되었기 때문이다.
갈릴레오는 생애 내내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다. 따라서 그는 과학자로서 관찰과 추론에 의하여 어쩔 수 없이 얻게 된 견해가 자신이 독실한 신자라고 여기는 교회의 성경에 위배되어 유죄판결을 받은 것을 알고 괴로워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과학과 성경 사이의 관계는 스스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 때때로 많은 과학자들이 이러한 곤경에 처하곤 했다. 예를 들어 19세기 중엽 다윈의 진화론을 성경의 창조론과 조화시키기는 어려웠다.

 

골드바흐(Christian Goldbach :1690-1764)

골드바흐의 추측'을 비롯해 정수론의 발전에 공헌한 수학자이다. 1725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제국 아카데미에서 수학, 역사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2년 뒤 표트르 2세의 개인 교사가 되어 모스크바로 갔고, 1742년부터는 러시아 외무부에서 일했다.

 

괴델(Godel, Kurt :1906-1978)

오스트리아 태생의 미국 수학자.
엄밀한 수학체계라도 그 안에는 그 체계 내의 공리(公理)에 기초하여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존재하므로 산술의 기본공리들은 모순이 될 수 있다는 ‘괴델의 정리’를 발표하였다. 이 정리는 모든 수학에 대한 확고한 기초를 마련해주는 공리를 세우려던 지난 100년간의 노력에 결말을 주었다. 빈대학교 교수를 지냈고, 후에 미국으로 이민하여 프린스턴고등연구소의 교수를 역임하였다.
현대 수학의 고전으로 꼽히는 《집합론 공리와 선택공리, 일반화된 연속체 가설 사이의 무모순성》을 저술하였다.

 

구르사(Goursat, Edouard-Jean-Baptiste :1858-1936)

프랑스의 수학자. 랑자크 출생. 툴루즈 이과대학 강사(1881∼85)
파리 이공과대학 연습교사(96 이래), 소르본 대학의 미·적분학 교수(97)를 지냈다. 함수론·미분방정식론·불변식론(不變式論)·곡면론 등 분야에 대한 공헌이 크다.
주요저서로는 《Th?rie des fonctions alg?riques et de leurs int?rales》(Appel과의 공저, 1896) 《Cours d analyse math?atique》(1905) 등이 있다.

 

굴베르그(Cato Maximilian Guldberg :1836-1902)

노르웨이의 화학자·수학자. 크리스티아니아(지금의 오슬로) 출생.
크리스티아니아대학에서 화학·수학·물리학을 공부한 후, 1861년에 왕립 육군사관학교의 수학 및 열역학 교사를 지냈다. 69년에는 모교인 크리스티아니아대학의 응용수학 교수가 되었다. 64년 의형(義兄)인 화학자 P.보게와 함께 ‘질량작용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이는 P.E.M.베르틀로와 생지르의 화학평형에 관한 실험결과(1862)를 바탕으로, 보게가 300회 이상의 실험을 하고 굴베르그가 이를 수식(數式)으로 정리하여 법칙화한 것이다. 처음에 쓴 노르웨이어 논문과 두 번째의 프랑스어 논문(67)은 학회의 인정을 받지 못했으며, 77년에 이 법칙을 독자적으로 발견한 J.H.반트호프의 영향을 받아 독일어로 쓴 세번째 논문(79)이 겨우 주목을 받았다.
굴베르그는 67~90년 분자론에 입각하여 기체·액체·고체의 일반상태식(一般狀態式)을 구하는 여러 가지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물리화학의 응용에도 관심이 있었으며, 또 75년에는 노르웨이에 미터법을 답변확정하게 하였다

 

 

그라스만(Hermann Gunther Grassmann :1809-1877)

그라스만은 독일의 슈테틴에서 1809년에 태어나서 1877년 그곳에서 죽었다.
그는 매우 폭넓은 지적인 취미를 가졌다. 수학뿐만 아니라 종교, 물리학, 화학, 독일어, 라틴어,역사, 지리학의 선생이었다. 그는 물리학에 관한 논문을 썼으며 독일어, 라틴어와 수학 교과서를 저술하였다. 격동기인 1848년과 1849년에 정치적 주간지의 공동 발행인을 지냈다. 음악에 관심이 있어서 1860년대에는 일간지의 오페라 평론가를 지냈다.
독일 식물에 관한 문헌학적 논문을 준비하였고, 전도 신문을 편집하였으며 음성학의 법칙들을 연구하였고, 리그베다(Rig-veda)에 관한 사전을 펴냈고, 리그베다를 시로 번역하였으며 세 가지 소리로 민요의 화음을 만들었고, 위대한 논문 <광의 양론, Ausdehnungslehre>을 저술하였다. 그라스만이 그의 유명한 <광의양론>의 첫번째 판을 간행한 때가 1844년이다. 불행하게도 해설이 부족하고 설명이 모호하여 이 논문은 동시대 학자들에게 실제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다. 1862년 간행된 개정판에서도 더 나아진것은 없었다. 그라스만은 그의 논문이 관심을 끌지 못하자 실망하여 산스크리트어와 문학의 연구에 전념을 하기 위하여 수학을 포기하였는데, 이 분야에 수많은 훌륭한 논문을 기고하였다.
그라스만은 슈타이너(Jacob Steiner)의 뒤를 이어 베를린 실업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쳤던 1834년에서 1836년까지를 제외하고, 전 생 애를 고향 슈테틴에서 보냈다. 그는 대학 교수직을 희망하였으나 전적으로 중등 교육직에만 있었다. 부친은 슈테틴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수학과 물리의 교사였다. 아들 헤르만 그라스만(Hermann Grassmann) 역시 수학자가 되었다. 그의 부친은 수학에 관한 두 권의 책을 저술하였고 아들은 사영기하학에 관하여 논문을 썼다.

 

 

그레고리(James Gregory :1638-1675)

스코틀랜드의 수학자·발명가.
미적분학의 고안에 공헌하였으며, 반사망원경을 발명하여 이것을 저서 《Optica Promota》(1663)에 기재하기도 하였다. 또한, 기하학적 도형의 면적측정에 관한 독자적 방법을 발표하여 호이겐스와 논쟁을 벌였으며, 망원경에 관하여 아이작 뉴턴과 서신을 교환한 일도 있다.
세인트앤드루스대학(1669)과 에든버러대학(74) 교수를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Geometriae pars universalis》(68) 《Exercitationes geometricae》(68) 등이 있다.

 

 

그로탕디에크(Alexander Grothendieck :1928-)

수학자. 유년시절은 독일에서 지냈으나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하여 프랑스로 건너온 후로는 주로 그곳에서 활약하고 있으며 국적이 없다.
초기에는 선형위상공간, 특히 텐소르적(積)과 핵형공간(核型空間)의 이론으로 공헌을 하였으며, 대수기하의 기초를 거시적으로 일반화하여 리만베르 예상의 해결 열쇠이며 기본이기도 한 이론을 거대한 규모로 만들어낸 것이 가장 중요한 업적이다. 1968년경부터 현대의 산업사회와 군사적인 위협으로부터 지상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서바이벌 운동’을 제창하여, 이를 위하여 파리의 고등연구원 교수직까지도 사임하였으나 후에 서바이벌 운동에서도 손을 뗐다. 피루즈상(賞)을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Espaces vectoriels topologiques》(1958) 《El?ents de g?m?rie alg?rique》(60∼65) 등

 

 

 

그린(George Green :1793-1841)

영국의 수학자. 가업을 이어 빵 제조업에 종사하는 한편 수학을 독학했다.
학자들과는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연구 결과는 알려지지 않은 채 있다가, 그 일부분이 우연히 K.F.가우스에게 발견되었고 W.T.켈빈에 의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전자기현상(電磁氣現象)의 수학적 이론을 만들려고 시도, 퍼텐셜함수를 도입하여 ‘그린의 정리(적분정리)’를 유도하였고 그린함수를 결정하였다. 이렇게 하여 전자기학(電磁氣學)의 해석적 취급이 가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수학의 일부분으로서의 퍼텐셜론(論)을 향한 길이 열렸다.
저서로는 《전기학 및 자기학(磁氣學)의 이론에 수학해석을 응용하는 시도》(1828)가 있다.

 

 

남병길(Nam Byoung Kil :1820-1869)

남병길은 조선 시대 철종 때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이다. 그의 형인 남병철(1817~1863)과 함께 조선 후기 수학자 형제로 유명하다.

 

 

 

내시(John F. Nash :1920-)

미국의 수학자. 웨스트버지니아주(州) 블루필드 출생.
프린스턴대학에서 교환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1994년 J.하사니, R.젤텐과 함께 노벨 경제학상을 공동수상하였다.
60년대 중반부터 내시는 기업체간의 상호작용과 시장움직임을 예측하기 위해, 체스나 포커와 같은 일반적인 게임에서 적용되는 전략에 초점을 두고 연구하여 내시균형이라는 개념을 정립하였다. 게임에서 각 경기자들이 어떤 특정한 전략을 선택하여 하나의 결과가 나타났을 때, 모든 경기자가 이에 만족하고 더 이상 전략을 변화시킬 의도가 없을 경우를 균형이라 한다. 그런데 이 중 상대방의 최적전략에 대해서만 최적인 전략을 찾아내서 균형의 개념을 정립하는 것, 즉 내시균형은 상대방의 최적전략에 대한 본인의 최적전략이라는 성격을 띤다.

 

 

네이피어(John Napier :1550-1617)

그의 아버지가 겨우 16세 때 태어난 네이피어는 귀족 가문의 대저택인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근교의 머쉬스톤 성에서 대부분의 생애를 보냈으며 그 시대의 정치와 종교적 논쟁에 대부분의 정열을 쏟았다. 그는 격렬한 반천주교주의자였고 녹스 (John Knox)와 제임스 1세의 주장을 옹호하였다.
네이피어는 미래의 여러 가지 잔인한 전쟁무기들에 대하여 설계도와 그림을 곁들여 예언한 책을 저술하였다. 그는 미래에 4마일 반경 안의 1피트 크기 이상의 모든 생물을 없앨 수 있는 대포와 물속을 항해하는 기구가 만들어지고, 모든 방향으로 총알이 발사될 수 있는 움직이는 총구를 가진 전차가 발명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실제로 제 1차 세계대전 중에 이것들은 기관총, 잠수함, 탱크로 각각 실현되었다. 네이피어의 뛰어난 독창력과 상상력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정신적으로 이상한 사람으로 여겼으며 어떤 사람은 그를 마법사로 여기기도 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많은 일화들이 전해지고 있다. 언젠가 그는 그의 하인 중 누구든 도둑질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수탉이 그를 알아낼 수 있다고 얘기하였다. 그는 하인들을 깜깜한 닭장 속으로 들여보내 수탉의 등을 한 번씩 두드리게 하였다. 네이피어는 하인들 몰래 미리 그 수탉의 등을 까맣게 칠해 놓았는데, 죄가 있는 하인은 수탉의 등을 두드리기가 두려워서 깨끗한 손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또 이런 사건도 있었다. 네이피어는 이웃집 비둘기들이 자기 집의 곡식을 먹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이웃집 주인에게 비둘기가 날아오지 못하게 하지 않으면 비둘기를 울에 가두어 버리겠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비둘기를 잡는 것이 실제로 불가능하다고 믿은 이웃집 주인은 네이피어에게 잡을 수 있으면 잡아보라고 말하였다. 다음 날 이웃집 주인은 그의 비둘기들이 네이피어의 잔디밭에서 비틀거리고 있고 네이피어가 조용히 그것들을 커다란 자루 속으로 집어 넣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네이피어는 술에 담근 콩을 잔디에 뿌려서 비들기들을 취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는 정치적촵종교적 논쟁으로부터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수학과 과학의 연구로 자신을 유인하였는데 그 결과 비범한 네 가지 연구 결과가 현재 수학사에 기록되고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로그의 고안, (2) 직각구면삼각형을 푸는 데 이용되는 공식인 원형 부분의 법칙(The rule of circular parts), (3) 빗각구면삼각형을 푸는 데 유용한 네이피어의 유동식(Napier's analogies)으로 알려진 네 개의 공식 중 적어도 두 개의 삼각법의 공식, (4) 네이피어의 막대 (Napier's rods 또는 Napiers's bones)라 불리는, 수를 기계적으로 곱하고, 나누고, 제곱을 구하는 데 이용되는 기구의 발명 등이다.

 

 

 

노이만(독일)(Franz Ernst Neumann :1798-1895)

독일의 물리학자·광물학자·수학자. 브란덴부르크 출생.
1829년 쾨니히스베르크대학 교수가 되어 광물학 및 물리학을 강의하였다. 31년 열학(熱學)을 연구하던 중 고체의 분자열에 관한 노이만 법칙(노이만-코프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고체물질의 분자열은 이것을 조성하고 있는 원소의 원자열의 합과 같다는 법칙으로 고체원소의 원자열에 관한 뒬롱-프티의 법칙을 화합물까지 확장한 것으로, 통상 고체상태에서는 얻을 수 없는 기체의 고체상태에서의 원자열을 계산할 수 있게 되었다. 또 광학(光學) 연구도 하여, 《빛의 복굴절의 이론》(32)에서는 횡파로서의 빛의 매질(媒質) 안에서의 복굴절을 논하였고, 압력·온도의 영향하에서의 비결정질(非結晶質) 내의 복굴절에 대해 처음으로 연구하였다(1841). 전자기학 분야에서는 M.패러데이에 의해 발견된 감응전류(感應電流)에 대해 렌츠의 법칙을 출발점으로 하여 수학적 이론의 수립을 최초로 시도하여 역학(力學)의 퍼텐셜 개념을 도입, 전기저항에 관한 옴의 법칙과 결합시켜 일반적인 정식화(定式化)에 성공해 ‘감응전류에 관한 노이만의 법칙’을 고안해냈다.
78년 구함수(球函數)에 관한 논문 을 발표하였다.

 

 

노이만(헝가리)(Johann Ludwing von Neumann :1903-1957)

헝가리 출신의 미국 수학자. 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생.
은행가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수학에 재능을 보였다. 1919년 베를린대학 및 취리히대학에서 공부하고 부다페스트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27년 베를린대학 강사로 있다가 30년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대학 강사, 이어 수리물리학(數理物理學) 교수를 거쳐 33년 프린스턴고등연구소 교수가 되었다. 37년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고 43년 이후에는 미국 원자력위원회에서 활약하였다. 그의 연구는 수학기초론에서 시작하여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초설정 등 수리물리학적 과제를 대상으로 하고, 또한 수리경제학(數理經濟學)이나 게임의 이론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였다. 현대적 수학기초론의 출발점이 된 《집합론의 공리화(公理化)》(28)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초》(27) 《힐베르트 공간론》(27) 등은 모두가 20대에 이룬 업적이었다. 그리고 《게임의 이론》(28) 《에르고드이론의 연구》(32)를 집필하고, 또 《위상군론(位相群論)》에서는 《콤팩트 위상군에서의 힐베르트 제5문제의 해결》(33)이나 《군(群) 위의 개주기(槪週期) 함수론》(34)으로 군 위의 조화해석(調和解析)의 연구를 발전시켰다. 44년에는 O.모르넨슈테른과 《게임이론과 경제행동》을 저술하였으며, 그 이후에는 고속도 전자계산기(MANIAC:기상연구에 이용된 초기의 컴퓨터)의 연구·제작과 수치해석에 기여한 공로로 페르미상(Fermi賞)을 수상하였다. 그 외에 머리(Murray)와 함께 작용소환론(作用素環論)·연속기하(連續幾何)를 창시하였다. 45년에는 계산기계 연구소장, 54년에는 원자력위원이 되었다.

 

 

뇌더(Amalie Emmy Noether :1882-1938)

일반적으로 여자 수학자 중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여겨지는 뇌더(Amalie Emmy Noether)는 1882년 독일의 에를랑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막스 뇌더(Max Noether, 1844-1921)는 에를랑겐 대학교의 뛰어난 수학자였다. 막스 뇌더는, 같은 대학교에 속해 있으며 뇌더가족의 절친한 친구인 고르돈(Paul Gordon, 1837-1921)과 마찬가지로 대수학자였다. 그 대학교에서 공부한 에미 뇌더도 대수학자가 된 것은 당연하다. 그녀는 1907년 고르돈의 지도 아래 박사논문<삼항쌍 이차형식에 대한 완전한 불변계에 관하여, On Complote System of lnvarianta for Ternary Brquadratic Porns>썼다. 1910년 고르돈이 퇴임하자 소거이론과 불변량 이론에 특히 관심을 가진 다른 대수학자 피셔(Ernst Fischer, 1875-1959)가 1년 후 그 자리를 계승하였다.
그가 뇌더에 끼친 영향은 미우 겼고, 그의 지도 아래 그녀는 고르돈의 논문의 연산적 측면에서부터 힐베르트의 추상 공리적 접근까지 열심히 공부하였다.
에를항겐을 떠난 후 뇌더는 피팅겐에서 공부하였는데, 그녀는 여자 강사를 반대하는 몇몇 교수들의 반대를 극복하고, 1919년에 자격시험을 통과하였다. 1922년 피팅겐의 특별교수가 되었고, 게르만 국가혁명의 월권 아래 많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학술활동이 금지된 1933년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그 직후 독일을 떠나 펜실메이니아에 있는 브라이언 모어 대학의 교수직을 얻고, 프린스턴의 고등 연구소의 연구원이 되었다. 그녀의 일생에 있어서 미국에 있는 기간이 아마 가장 행복하고 가장 풍요한 시기였을 것이나 그녀는 창조력이 최고조에 달한 1935년에 53세의 나이로 죽었다.
뇌더는 가난한 간사였고 교수법도 부족했지만, 추상대수학 분야에 족적을 남긴 놀랄 만한 숫자의 학생에게 영감을 주었다. 추상적 환과 이데알 이론을 연구한 그녀의 제자들은 현대 대수학의 발전에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그녀의 장례식에서 아인슈타인은 그녀를 열렬하게 칭찬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녀를 막스 네더의 말로 표현했을때 에드먼드 란도 (Edmund Landau)는 '막스 네더는 에미 네더의 아버지'라고 응수했다. 에미 네더 탄생 100주년 기념 행사가 1982년 브라이언 모어 대학에서 열렸다

 

 

뉴만(John von Neumann :1903-1957)

뉴만은 게임이론이라는 유명한 수학의 한 분야를 발전시킨 미국의 수학자였다( 903 - 1957 ).
그는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자라 베를린과 부다페스트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는 1930년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1933년 이후로는 뉴저지의 프린스턴에 있는 The Institute for Advanced Study (응용 학문 연구소)에 합류했다. 그는 1937년에 미국 시민이 되었으며 2차 대전 중에는 The Los Alamos 원자 폭탄 프로젝트에 고문으로 일했다. 1955년 3월에는 미국 원자력 위원회 (U.S. Atomic Energy Commission)의 위원이 되었다. 뉴만은 세계적으로 뛰어난 수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양자 역학 이론, 특히 연산에 대한 환(ring)의 개념(뉴만 대수로 알려져 있다)에 대한 중요한 공헌으로 주목받았다. 또한 주로 통계학과 수치 해석 등의 응용 수학 분야에서 이루어진 그의 선구자적인 업적은 그를 더욱 빛나게 했다. 그는 또한 초고속 전자 컴퓨터를 고안한 것으로 유명한데 1952년 신축적인 저장 프로그램을 이용한 최초의 컴퓨터, 매니악 I (the Maniac I)을 만들어 냈다.
1956년, 원자력 위원회는 전자 컴퓨터의 고안과 이론에 대한 지대한 공로를 인정하여 그에게 엔리코 페르미 상(The Enrico Fermi Award)을 수여했다.

 

 

뉴턴(Issac Newton :1642-1727)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은 갈릴레오가 죽은 해인 1642년 성탄절에 울즈돕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뉴턴이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농부였으며 그래서 그도 농사에 전념해야 했다. 그러나 어린 그는 기계 모형을 고안하는 것과 실험하는 것에 뛰어난 재능과 즐거움을 나타냈다. 그래서 생쥐의 힘으로 동력을 얻어 밀을 빻아 밀가루를 만드는 장난감 방앗간과 물의 힘으로 작동하는 나무시계를 만들었다. 그 결과 학교 교육을 더 받게 되어 18세 때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하였다. 이 시기에 스타우브리지 박람회에서 우연히 산 점성술에 관한 책을 읽고 수학에 관심을 집중하게 되었다. 그는 유클리드의 <원론>을 읽었는데 그것이 너무 명백하다는 것을 알았고, 그러고 나서 데카르트의 <기하학 ,La geometrie>을 보았는데 다소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또한 오트레드의 <수학의 열쇠, Clavis>, 케플러와 비에트의 책, 그리고 월리스의

<무한의 수론, Arithmetica infinjtorm>을 읽었다. 이런 수학책들을 읽고 난 후 수학을 창조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려 23세 때인 1665년 초에 일반화된 이항정리를 알아냈고, 오늘날 미분학으로 알려진 유율법(流率法 )을 만들었다. 그 해와 이듬 해 동안 런던에 페스트가 유행하여 대학이 휴교에 들어가서 울즈돕으로 내려와 지냈다. 이 기간 동안에 미분학을 곡선의 임의의 점에서의 접선과 곡률반경을 구할 수 있는 정도까지 발전시켰다. 그는 또한 다양한 물리학 문제에 흥미를 갖고 광학에 관한 첫번째 실험을 하였으며 만유인력이 기본 원리를 공식화하였다.
뉴턴은 1667년 케임브리지로 돌아와서 2년 동안 광학 연구에 매달렸다. 1669년 배로가 뉴턴을 위하여 루카스 교수직을 사임함으로써 18년간의 대학 강의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병적일 정도로 논쟁을 싫어하여 그의 발견들은 발견한 후 오랫동안 발표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 발표를 미루는 습관 때문에 나중에 미적분학의 발견의 전후에 관련하여 라이프니츠와 부적절한 논쟁을 겪게 된다. 이 논쟁 때문에 뉴턴을 지도자로 지지하는 영국 수학자들은 대륙과의 수학 교류를 단절하였고 이로 인해 영국의 수학 발전이 거의 100년이나 늦어졌다.
1673년 부터 1683년까지의 뉴턴의 대학 강의는 대수학과 방정식론에 전념된 것이었다. 그가 달의 운동에 대한 연구와 관련하여 지구의 반지름의 새로운 측정법을 사용함으로써 만유인력 법칙을 증명한 때가 바로 이 시기인 1679년이다. 그는 또한 태양과 행성을 무거운 질점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는 가정에서 만유인력 법칙이 케플러의 행성운동 법칙과 양립함을 확증하였다. 1703년 영국 학술원장에 피선되어 매년 재선되었으며 죽을 때까지 그 직에 있었고 1705년에는 나이트 직위를 받았다. 그는 1727년 84세의 나이에 만성적이고 고통스러운 병으로 세상을 떠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뉴턴의 가장 위대한 저서는 말할 것도 없이 <프린키피아>인데, 거기에는 완전한 역학계와 천체 운동현상의 완전한 수학적인 공식화가 처음으로 나타난다. 이 책은 과학사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고 가장 많은 찬사를 받은 책임이 분명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아마도 유율법에 의하여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리들은 군데군데 약간의 단순한 극한 개념을 써서 순전히 고전적인 그리스 기하학을 이용하여 증명되었다는 점이다. 상대성 이론이 발견되기 전까지 모든 물리학과 천문학은 뉴턴이 이 책에서 만든 좌표계의 가정 위에 세워졌다.
뉴턴은 그 시대의 수학자들 사이에 알려진 다양한 난제 중 어느 것도 풀지 못한 적이 없었다. 그 중 하나는 라이프니츠가 제기하였는데 그는 곡선족의 직교궤도를 구하여 풀었다.
뉴턴은 숙련된 실험가이자 뛰어난 분석자였다. 수학자로서 그는 거의 전 분야에서 이제까지 배출된 학자 중 가장 훌륭하다고 평가되고 있다. 물리학적 문제에 대한 통찰력과 수학적으로 다루는 능력은 아마 어느 누구도 결코 추월할 수 없을 것이다. 라이프니츠가 "태초부터 뉴턴이 살았던 시대까지의 수학을 놓고 볼 때, 그가 이룩한 업적이 반 이상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 그의 위대성에 관한 많은 증명서들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라그랑주는 "뉴턴은 최상의 행운아이다. 왜냐하면 단지 한 번만 우주의 체계를 세울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했다.
이러한 찬사에 비하여 자기 업적에 대한 자신의 평가는 다음과 같이 겸손하다." 나는 내가 세상에 어떻게 비쳐질지 모른다. 하지만 내 자신에게 나는 진리의 거대한 바다가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은 채 내 앞에 놓여 있고, 나는 그 바닷가에서 놀며 때때로 보통보다 매끈한 조약돌이나 더 예쁜 조개를 찾고 있는 어린애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언젠가 선배들에게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멀리 보았다면 그것은 단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라고 겸손하게 설명하였다.
뉴턴은 가끔 하루에 18 내지 19시간을 집필하였고, 놀랄 만한 집중력을 가졌었다고 전해진다. 그가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넋이 빠지는 것을 입증하는, 꾸며낸 듯한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 줄거리는 이렇다. 뉴턴이 몇몇 친구를 초대하여 저녁을 대접할 때, 포도주 한 병을 가지러 방에서 나갔다가 딴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어 자기가 왜 나왔는지조차 잊어버리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중백의를 걸쳐 입고 교회당으로 가벼렸다.
또 한 일화로, 뉴턴의 친구인 스턱켈리 박사가 닭요리로 저녁을 먹기로 그를 방문하였다. 뉴턴은 외출중이었으나 식탁에는 이미 요리된 닭이 뚜껑 덮힌 접시에 차려져 있었다. 저녁 약속을 잊어버린 뉴턴은 약속시간을 너무 지체하였고 스턱켈리 박사는 마침내 뚜껑을 열고 닭요리를 먹고 나서 뼈를 뚜껑 덮힌 접시에 담아 놓았다. 뉴턴이 나중에 와서 친구와 인사하고 식탁에 앉아서 뚜껑을 열었으나 뼈 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는 "아참, 우리가 이미 저녁을 다 먹었다는 것을 잊었군,"이라고 말했다.
또 한 일화로, 어느날 뉴턴이 그란담으로부터 말을 타고 집으로 오고 있을 때 마을 건너편에 있는 스피틀리게이트 언덕을 오르려고 말에서 내렸다. 언덕을 오르는 동안에 말이 미끄러 떨어졌는데도 빈 고삐만이 손에 끌려 가고 있는 것을 뉴턴을 몰랐다. 언덕꼭대기에 올라서 다시 말 안장 위로 뛰어 오르려고 했을 때에야 비로소 뉴턴은 그 사실을 알았다.

 

 

 

 

 

 

니코마코스 (Nikomachos :50-150?)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아라비아의 게라사 출생. 신(新)피타고라스 학파이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산술서 《산술입문》을 저술하였다. 이 책에서 수론(數論)의 기초, 특히 수의 성질과 분류를 취급하고 있다. 중요한 것으로는, 세제곱수는 연속되는 모든 홀수의 합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법칙의 발견이 있다. 즉,

1^3=1, 2^3=3+5, 3^3=7+9+11,···

이 책은 그 후 아풀레이우스, 보에티우스에 의해 라틴어로 번역되어, 중세에는 산술서로서 유클리드기하학과 함께 매우 높이 평가되었다. 음악에 관해서도 저서《화성학(和聲學)》을 남겼다.

 

 

다르부(Jean Gaston Darboux :1842-1917)

프랑스의 수학자. 파리에서 공부하며 C.에르미트의 지도를 받았다.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로 장기간 재직하면서 프랑스의 수학계를 이끌었으며 수학 및 천문학 잡지 《Bulletin des sciences math?atiques et astronomiques》의 창간에 힘썼다. 19세기 초엽부터 기하학이 걸어온 좌표적·해석적 경향을 계승하여, 해석학과 상미분방정식론 또는 군론 등을 기초로 하여 기하학을 발전시켰으며, 그의 주요 저서인 《일반곡면론강의(一般曲面論講義)》(4권, 1887∼96)는 미분기하학의 명저로 알려져 있다. 곡면론과 미분방정식론의 관련, 도형의 연속적 변형, 가동좌표축(可動座標軸)의 도입, 허원소(虛元素)의 사용, 또 사원좌표(四圓座標), 오구좌표(五球座標)의 도입 등에서 창의성을 발휘하였고, 또 G.F.B.리만에 관한 이해도는 독일의 F.클라인과 비견된다고 한다.
그는 행정적·교육적 수완도 뛰어나 J.H.푸앵카레의 전기도 썼다.

 

 

달랑베르(Jean Le Rond d Alembert :1717-1783)

프랑스의 수학자·물리학자·철학자.
계몽사조기(啓蒙思潮期)를 대표하는 문인의 한 사람으로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며, 그 종신서기(終身書記)였다. 그는 섭정 오를레앙공(公) 시대에 저명한 살롱을 가진, 사교계의 꽃 드 탕생 후작부인의 사생아로 출생하여, 생후 곧 노트르담 성당 옆의 작은 교회 계단에 버려졌다 한다. 근처에서 살던 유리 직공 달랑베르의 아내가 주워다 길렀다. 그의 이름은 그가 20세 때 스스로 지은 이름이다. 그의 친아버지인 데투시 장군이 그를 경제적으로 돌보았고, 죽은 후 거액의 유산을 남겼으며 또 장군의 유력한 친지가 그를 비호하여 23세에 아카데미 회원에 선출되었다. 12세 때 콜레즈 드 카틀 나시옹에 입학하여 신학·법률·의학을 공부하였으나, 얼마 후 철학·수학·물리학으로 방향을 바꾸었고, 특히 역학(力學)에서는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주저 《역학론:Trait de dynamique》(1743)은 26세 때 공간(公刊)한 것인데, 그는 이 저서에서 그 당시에 프랑스에서 주류를 이루던 데카르트주의를 배척하고, 물체와 그에서 독립된 공간을 생각하는 뉴턴주의의 입장을 취하였다. 또, 물체의 운동을 정역학(靜力學)의 경우와 같은 평형상태(平衡狀態)로 옮겨서 고찰하는 ‘달랑베르의 원리’를 설명하고, 역학의 일반화의 기초를 닦아 해석역학으로의 전개를 마련함으로써 역학발전의 한 단계를 이룩하였다. 이 밖에 세차(歲差)와 장동(章動)의 문제(49), 달의 운동론에 관련된 3체(三體)문제의 연구 등, 천체역학 방면에도 공헌하였다.
사상가로서도 계몽사상가의 중심인물로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였으며, 특히 D.디드로와 공동으로 편집·간행한 《백과전서》는 유명하다. 이 전서에서 수학·물리학·천문학 항목을 집필하였으며, 이 점은 백과전서파의 주장이었던 수학과 자연과학에 역점을 둔 데서 비롯되었으며, 이 《백과전서》의 주류를 이루는 부분이었다. 그가 쓴 서론 속에 이 취지를 강조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동시에 F.베이컨의 사상을 기초로 과학의 기원과 역사적 발전을 고찰하고, 과학의 분류를 시도함으로써 과학편(科學編)에 큰 전망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그의 철학적 입장은 감각적 인식론에 머물러 종교적 견해에는 많은 의문을 제시하면서도 디드로처럼 철저하지도 못해 일종의 물심이원론에 시종하였다.

 

 

데데킨트(Dedekind, Julius Wilhelm Richard :1831-1916)

독일의 수학자. 괴팅겐대학교를 졸업하고, 여러 대학의 교수를 거쳐 브라운슈바이크고등기술학교에서 강의하였다.
1871년 대수적(代數的) 정수론(整數論)에 ‘이데알’ 개념을 도입하여 추상대수학에의 단서를 개척하였다. 72년 《연속과 무리수》에서는 ‘절단(切斷)’에 의하여 무리수를 정의함으로써 실수의 연속성의 개념을 명확히 하였다. 그의 무한의 개념과 실수의 구조에 대한 개념연구는 현대수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저서로 《대수적 정수론에 대하여》가 있다.

 

데자르그(Gerald Desargue :1593-1662)

캐플러가 죽은 지 9년 후인 1639년에 대단히 독창성이지만 거의 주목받지 못했던 원추곡선에 관한 논문이 파리에서 발표되었다.그것은 공학자이며 건축가이고 한때 프랑스 육군 장교였으며 1593년에 리용에서 태어나 1662년경 그 논문은 다른 수학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 채 잊혀졌고 모든 발행본들은 사라졌다.두 세기 후 프랑스 기하학자 샤슬레 (Michel Chasles, 1793-1880)가 지금까지 표준처럼 되어 있는 그의 기하학의 역사를 집필할 때, 데자르그의 논문의 가치를 평가할 방법이 없었다.그러나 6년 후인 1845년에 샤슬레는 데자르그의 제자인 라 이르(Philippe de la Hire, 1640-1718)에 의하여
만들어진 그 논문의 필사본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고 그 때부터 그 논문은 종합 사영기하학의 초기 발전단계에서의 고전 중의 하나로 간주되었다.
데자르그의 이 얇은 책이 처음엔 무시된 것을 설명하는 여러이유들이 제시될 수 있다. 그것은 2년 먼저 데카르트에 의해 소개된 더 유명한 해석기하학에 의해 빛을 잃었다.기하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 새로운 강력한 도구를 발전시키는 일과 무한소를 기하학에 응용하려는 시도에 정력을 쏟고 있었다.또한 데자르그는 보통과 다른 저술 방식을 택했다.그는 약 70개의 용어들을 소개했는데, 대부분 알기 어려운 식물학에서 따온 것이었고 그중 단 하나 '대합'(involution)만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아이러니컬하게도 재합은 비평가들이 그것을 날카로운 비평과 조소를 위해 뽑아낸 데자르그의 특수용어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보존되었다.
데자르그는 원추곡선에 관한 책 외에도 다른 책들을 썼는데, 그중 하나는 어린이들이 노래를 잘 하도록 가르치는 법에 대한 논문이다.그러나 그를 17세기 종합 기하학의 가장 독창적인 기여자로 손 꼽히게 한 것은 원추곡선에 관한 얇은 책이다.케플러의 연속성의 원리로 시작되는 이 책은 대합, 조화영역, 호몰로지, 극과 극선, 투시도 등 오늘날 사영기하학 수강생들에게 친숙한 주제들에 대한 많은 기본 정리들의 대부분을 발전 시켰다.흥미 있는 한 개념은 극과 극선의 개념이 구까지 또 어떤 다른 2차곡면으로까지 확장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데자르그는 얼마 안 되는 2차곡면만을 알고 있었고 아마도 대부분의 이 곡면은 1748년 오이럴가 완전히 열거할 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것 같다.다른 곳에서 우리는 데자르그의 중요한 두 삼각형의 정리를 발견할 수 있다."만일 두 삼각형이 동일한 평면 위에 있든 아니든 간에, 대응하는 꼭지점을 연결하는 직선이 한 점에서 만나도록 위치해 있으면 대응하는 변의 교점은 동일 직선상에 있고 또 그 역도 성립한다."
데자르그는 파리에서 살고 있던 30대에 일련의 무료 강의를 통하여 동시대인에게 상당한 감명을 주었다.그의 논문은 데카르트에의해 인정받았고 파스칼은 그의 영감의 많은 부분의 근원을 데지르그에게 돌런 적이 있다.라 이르는 상당한 노력으로 아폴로니우스의 <원추 곡선론>의 모든 정리들이 데자르그의 중앙 투시법에 의한 원으로부터 유도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했다.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17세기에는 새로운 기하학이 거의 세워지지 않았고 그 분야는 제르곤, 퐁스러, 브리앙송, 듀팽, 샤슬레, 슈타이너 같은 사람들에 의해 크게 발전된 19세기 초반까지 동면에 들어갔다.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

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1596년 루트(Tours) 근교에서 태어나서 여덟 살 때라 플레쉬에 있는 예수회 학교로 보내졌다. 바로 거기에서 (처음에는 몸이 약해서)그의 평생 습관이 된 아침에 늦게 까지 침대에 누워 있는 버릇이 길러졌다. 후에 데카르트는 아침 휴식중의 명상시간을 가장 생산적인 시간으로 여겼다. 1612년 데카르트는 학교를 떠나 곧장 파리로 가서 메르센과 미도르주와 더불어 얼마간 수학연구에 전념했다. 1617년 그는 오렌지공 모르스 왕자의 군대에 입대하여 몇 년간의 군생활을 시작했다.
군생활을 마치자마자 독일,덴마크, 네덜란드, 스위스,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4,5년을 보냈다. 몇 년동안 파리에 다시 정착해 있으면서 수학연구와 철학적 명상을 계속하였으며 한동안 광학기구를 제조하기도 하다가 당시 국력이 최고조에 달한 네덜란드로 이주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거기서 20년간 살면서 철학, 수학, 과학에 몰두했다. 1649년 크리스티나 여왕의 초대를 받고 마지못해 스웨덴으로 갔다. 몇 개월 후 폐렴에 감염되어 1650년 초에 스톨홀롬에서 세상을 떠났다. 위대한 철학자이며 수학자는 스웨덴에 묻혔으며, 유품을 프랑스로 옮기려는 노력은 실패했다. 데카르트가 죽고난 17년 후에 오른손 뼈를 제외한 유골은 프랑스로 돌아와 파리에 있는 지금의 판테온에 다시 안장되었다. 오른손 뼈는 당시 유골의 수송을 맏았던 프랑스 재무장관이 기념품으로 보관하고 있다.
데카르트가 저술을 완성한 것은 네덜란드에서 20년간 체유하는 동안이었다. 우주에 대한 물리적 설명서인 <천체론, Le monde>을 집필하는 데 처음 4년을 보냈으나, 교회측이 갈릴레오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신중히 고려한 끝에 포기하고 미완성인 채로 놔두었다. 그는 <방법서설, Discours de la methode pour bien conduire sa raison er chercher la verite dans les sciences> 이라는 제목의 모든 과학에 관한 철학적 논문의 집필로 방향을 전환했는데, 이 책은 굴절광학, 기상학, 기하학의 세 부록을 달고 있다. <방법서설>은 부록과 함께 1637년에 출간되었으며, 해석기하학에 대한 데카르트의 공헌은 세 권의 부록 중 마지막 권에 나타나 있다.
<방법서설>의 유명한 세 번째 부록인 <기하학, La geometrie>은 약 1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이며, 그 자체가 세 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제 1권은 대수적 기하학의 약간의 이론을 설명하고, 전 그리스 시대에서의 발전상을 그리고 있다. 그리스인들은 한 변수는 임의의 선분의 길이에, 두 변수의 곱은 직사각형의 넓이에, 세 변수의 곱은 직육면체의 부피에 대응시켰다. 그리스 시대에서는 그 이상의 발전은 없었더. 반면에 데카르트는 X2을 넓이라기보다는 1:X=X:X2의 비례에서 네 번째 항으로 생각하고, X를 알 때 쉽게 계산될 수 있는 적당한 선분의 길이를 표시하는 것으로 제안했다. 이 방법으로 우리는 단위선분을 이용하여 한 변수의 몇 제곱이나 몇 개의 변수의 곱을 선분의 길이로 나타낼 수 있고, 변수값이 정해재면 유클리드 도구를 사용하여 실제로 선분의 길이를 그릴 수 있다.
데카르틀가 해석기하학을 만들게 된 동기를 설명하는 몇몇 전설같은 이야기가 있다. 그중 하나는 꿈에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1616년 11월 10일 성 마틴 이브에 다뉴브 강둑 위에 있는 군대의 겨울막사에서 야영하고 있는 동안, 그의 전 인생을 변화시켰다고 그가 말하는 기이하고 생생 하며 조리 있는 몇 편의 꿈을 꾸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 꿈들이 인생에 있어서 목표를 명확히 해 주고, "경이로운 과학"과 "놀라운 발견"을 밝히는 데 그의 미래의 모든 노력을 다하기로 결심하게 해 주었다. 데카르트는 무엇이 경이로운 과학이며 훌륭한 발견인지는 결코 명백히 밝히지는 않았으나, 일부 사람들은 그것이 해석기하학 또는 대수학의 기하학에의 응용, 그리고 모든 과학적 방법의 기하학에의 적용일 것이라고 믿고 있다. 18년 후에야 비로소 그의 착상의 일부를 <방법서설>에 상술했다. 다른 이야기는, 뉴턴의 떨어지는 사과 이야기와 같이, 데카르트가 천정을 기어다는는 파리를 보고 해서기하학에 대한 착상을 떠올렸다는 것이다. 파리의 경로는 인접한 두 벽으로부터 파리까지의 거리를 연결시키는 관계만 알면 나타낼 수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이 두 번째 이야기는 비록 출처가 의심스러울지라도 상당한 교육적 가치가 있다.

 

 

드 모르간(Augustus De Morgan :1806-1871)

드 모르간은 1806년 마드라스에서 (한쪽 눈이 먼 상태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동인되 주식회사와 관련하고 있었다. 그는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공부했으며 수학 학위시험에서 4등으로 졸업한 후 1828년 새로 설립된 런던 대학교(후에 유니버시티 칼리지로 개명된)의 교수가 되었는데, 그곳에서 논문과 제자를 통하여 영국수학계에 큰 영항을 미쳤다.그는 철학과 수학사에 관한 책을 많이 탐독하고, 대수학의 기초, 미분학, 논리학, 확률론에 관한 논문을 썼다. 그는 매우 명쾌한 해설가였다.그의 재치있고 재미있는 책 <역설 모음집, A Budger of Paradoxes>은 여전히 재미 있는 읽을거리이다. 그는 집합론에서의 쌍대의 원리를 밝히면서 집합의 대수에 관한 부울의 연구를 계승하였는데, 소위 드 모르간 법칙이 이것의 한 예이다.
부울처럼 드 모르간은 수학을 기초 연산의 집합에 종속되는 기호의 추상적 연그로서 간주하였다. 드 모르간은 학문적 자유와 종교적 관용을 거리낌없이 말하기 잘하는 명수였다. 그는 플루트를 멋지게 연주하고, 사람들과 항상 쾌활하게 교제하고, 대도시 생활을 매우 좋아했다. 그는 퀴즈와 수수께끼를 매우 좋아하여 나이나 태어난 해를 묻는 질문에 "나는 X2년에 X살이다." 라고 대답하곤
했다.그는 1871년 런던에서 죽었다.

 

드 무아브르(Abraham De Moivre :1667-1754)

확률론에 기여한 사람들 가운데 중요한 한 사람이 1685년 낭트 칙령이 폐지된 후 보다 정치적 환경이 좋은 런던으로 이주한 프랑스 신교도인 드 무아브르(Abraham De Moivre, 1667-1754) 이다. 그는 영국에서 가정교사로 생활하였고 뉴턴과 친한 친구가 되었다.
드 무아브르는 보험 통계수학의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수명에 따른 연금, Annuities upon Lives>,

확률론에 관한 새로운 자료들을 많이 담고 있는 <우연설, Doctrine of Chances> , 순환급수, 활률론, 해석적 삼각법에 기여한 <해석기요, Miscellanea analytica> 등으로 해서 특히 주목받고 있다. 드 무아브르는 통계학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활률적분과 정규 도수곡선을 처음으로 취급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잘못 명명된 스털링 공식(Stirling formula), 은 드 무아브르가 유도한 것이며 이는 큰 수의 계승을 어림 셈하는데 매우 유용하다. 드 무아브르 이름으로 알려졌고 모든 방정식론책에서 발견되는 낮익은 공식

(cos x+i sin x)n=cos ns+i sin nx,
i=√-1

은 n이 자연수인 경우에 잘 알려진 드 무아브르 공식이다. 이 공식은 해석적 삼각법의 시금석이 되었다.
드 무아브르의 죽음에 관해 전해지는 재미있는 우화가 하나 있다. 이야기에 따르면 드 무아브르는 매일 전날보다 15분씩 더 자야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 등차수열이 24시간에 이르렀을 때 드 무아브르는 죽었다.

 

 

드로비슈(Moritz Wilhelm Drobisch :1802-1896)

독일의 철학자·수학자. 라이프치히 출생.
J.헤르바르트의 제자이자 1842년 라이프치히대학 교수이다. 논리학적으로는 형식논리학에서 존재와 사유(思惟)의 일치로서의 형이상학적 논리학으로 이행(移行)하고, 심리학적으로는 수학적 심리학의 입장에 섰다.
주요저서는 《신논리학:Neue Darstellung der Logik nach ihren einfachsten Verh隨tnissen》(1836) 《헤르바르트의 철학체계:Beitr隣e zur Orientierung ?r Herbarts System der Philosophie》(43) 《수학적 심리학:Erste Grundlinien der mathematischen Psychologie》(50) 등이다.

 

 

 

디리클레(Peter Gustav Lejeunc Dirichlet :1805-1859)

다리클레는 1805년 뒤렌에서 태어났고, 브레슬라우와 베를린 교수직을 계속해서 역임했다. 1855년 가우스가 세상을 떠나자 가우스 후임으로 괴팅겐의 교수로 인명되었는데, 이것은 전에 가우스의 제자였고 평생 스승을 존경한 매우 재능 있는 수학자에 대한 알맞은 예우였다. 괴팅겐에 재직하는 동안 가우스의 미완성 연구를 끝내려 했으나, 1859년에 요절함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독일어와 프랑스에 능통한 디리클레는 두 나라의 수학과 수학자 사이의 섭외 역할을 훌륭히 해내었다. 그의 가장 각광받는 수학적 업적은 아마도 함수개념을 일반화 시키게 만든 작업인 푸리에 급수의 수렴에 관한 예리한 분석일 것이다. 그는 가우스의 보다 나해한 방법 중의 일부를 쉽게 이해시키는 데에 많은 공헌을 했으며 그 자신의 정수론에 뚜렸한 기여를 하였는데, 그의 멋진 <정수론 장의, Vorlesungen uber Zahlentheorie>는 아직도 가우스의 정수론 연구의 가장 명쾌한 입문 중의 하나이다. 디리클레는 야코비의 절친한 치눅이자 해설가이며 양아들이었다. 그의 이름은 수학전공 학생들에게 디리클레의 급수, 디리클레 함수와 디리클레 법칙으로 알려져 있다.
디리클레와 그의 위대한 스승 가우스에 관한 감동적인 일화가 하나 전해진다. 가우스 박사 학위를 받은 만 50년 후인 1849년 7월 16일 괴팅겐에서 50주년 축하를 바당ㅆ다. 축하행사의 진행 도중의 어느 시점에서 가우스가 그의 <수론 연구>의 원본 한 장으로 파이프 담배에 불을 붙이게 되어 있었다. 그 자리에 참석해 있던 디리클레는 그것이 신성한 것을 모독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오싹해졌다. 마지막 순간 그는 대담하게 가우스의 손에서 논문을 빼앗아 일생 동안 기념으로 보관하였는데, 그의 사후에 편집자가 그의 논문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디리클레는 고결하고, 성실하고, 인간적일고, 겸손한 성질을 지닌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야코비와는 달리 젊은 사람들의 심정을 헤라일 수 없었던 것 같다. 디리클레의 아들이 그의 선택받은 아버리로부터 항상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을 급우들이 부러워했을때, 아들은 다음과 같은 가엾은 대답을 했다. "오! 우리아버지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알고 있지 않다." 디리클레의 장난꾸러기 조카엥제는 자서전에서 국민학교에 다니던 6,7세 때 삼촌에게 받았던 수학교육은 그의 생에에서 가장 무서운 경험이었다고 썼다.
디리클레는 가족들과 편지 왕래하는 일에 매우 미지근하였다. 그는 첫 아기를 얻었을 때, 영국에 살고 있던 장인에게 편지하는 것을 잊었다. 나중에 알게 된 장인을 디리클레가 적어도 2+1=3이라고 쓸수는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낟. 이 재치 있는 장인이 다름아닌 철학자 모제스 멘델스존의 아들이자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의 아버지인 에이브러햄 멘델스존이었다. 디리클레의 뇌는 가우스의 것과 마찬가지로 괴팅겐 대학의 생리학과에 보존되어 있다.

 

 

 

디오판토스(Diophantus :3세기경)

대수의 발전에서 대단히 중요하고 또 그 이후의 유럽 수론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준 사람이 바로 알렉산드리아의 디오판수스(Diophantus)이다. 헤론처럼 대오판투스도 그 출생시기와 장소가 분명하지 않다. 물론 그가 헤론과 동시대인일 것이라는 약간의 증거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그를 3세기경의 인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리스 명시선집>에도 그의 생애에 대한 풍자적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가 알렉산드리아에서 활약했다는 사실 이외에는 어떤 것도 확실하게 전해 내려온 것이 없다.
디오판투스에게는 세 개의 저작이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산학, Arithmetica>
<다각수에 관하여, On Polygonal Numbers>
<계론, Porisms>
<산학>은 디오판투스의 가장 중요한 저술로서 모두 13권의 책으로 되어 있으나 그중 여섯 권만이 현존하고, <다각수에 관하여>는 단지 일부만이 현존해 있으며 <계론>은 분실되고 말았다. <산학>은 대수적 수론을 해석적 논법으로 쓴 책으로서 디오판투스를 이 분야에서 천재로 만들어준 책이다. 이 저작의 현존하는 부분은 약 130여 개의 다양한 문제의 해를 다루고 있으나 대체로 1차 또는 2차방정식과 관계된 것이다. 매우 특별한 3차방정식 문제도 하나 풀려 있다. 제Ⅰ권은 미지수가 하나인 정 방정식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고 나머지 책에서는 두 개 또는 세 개의 미지수를 갖는 2차 또는 종종 고차의 부정 방정식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들이 일반적인 해법으로 풀리는 것이 아니라 각 문제마다 그때 그때 특별한 방법으로 해가 구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디오판투스도 단지 양의 유리해만을 인정하고 있고 대부분의 경우에 하나의 답만으로 만족했다.
단지 유리해만을 구하는 부정 대수문제는 흔히 디오판투스문제로 일컬어져 왔다. 현대에 와서는 해의 조건을 정수로 제한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디오판투스가 이러한 종류의 문제를 처음 만든 것은 아니다. 더구나 그가 부정방정식을 푼 최초의 인물도 아니고 2차방정식을 기하하적이 아닌 방법으로 처음 푼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생략속기법의 대수적 표기를 이용한 최초의 인물이었음은 틀립없다.
디오판투스는 미지수, 미지수의 6승까지의 멱, 뺄셈, 등식, 역수 등에 대하여 생략포기를 사용했다. 그는 살았던 그리스 시대에는 주로 기하학만이 연구되었고 산수와 대수가 분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디오판투스가 약자(또는 문자)를 도입함으로써 대수는 산수로부터 확실하게 구분되어 갈라지게 도니다. 두 학문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구분되어 갈라지게 된다. 두 학문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문자의 사용 여부이다. (또 하나는 음수를 수로 인정하느냐 하는 점이다.)
디오판투스의 이러한 공로와 수학에 대한 열정을 문제 하나로 대신한 그의 묘비명은 참으로 멋진 생각이 아닐수 없다.

 

 

디외도네(Dieudonne, Jean :1906-)

프랑스의 수학자. 릴 출생.
에콜 노르말 졸업 후, 1946~47년 상파울루대학 교수를 지낸 것을 제외하고, 37~52년 낭시대학 조교수·교수를 지냈으며, 미국 미시간대학(52~53), 노스웨스턴대학(53~59년) 등에도 있었다. 그 후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파리 교외의 고등과학연구소 교수(59~64), 니스대학 교수(65~70년)를 역임하였다.
1복소변수함수론의 연구에서 출발하여 30년대에는 ‘부르바키’의 창립자 중 한 사람으로서 현대수학의 여러 분야에 업적을 남겼는데, 특히 함수해석에 관계된 뛰어난 저술가였고, 68년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의 일원이 되었다.
저서에 6권의 《해석요론(解釋要論)》이 있다.

 

 

딩글러(Hugo Dingler :1881-1954)

독일의 철학자·수학자. 뮌헨 출생.
1920년 뮌헨, 32년 다름슈타트의 각 대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주로 자연과학 및 수학의 인식론적 기초를 연구하였으며, 측정장치에 의한 측정결과의 제약(制約)을 강조함으로써 근대적 이론물리학과 대립하게 되었다.
주요저서로서는 《자연철학의 기초:Die Grundlagen der Naturphilosophie》(1913) 《자연철학의 역사:Geschichte der Naturphilosophie》(32) 《방법론적 철학:Grundriss der methodischen Philosophie》(49) 등이 있다.

 

 

라그랑쥬(Joseph Louis Lagrange :1736-1813 )

라그랑주는 이탈리아 튜린의, 전에는 부유했던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배경을 가진 가문에서 태었으며, 11명의 형제중 막내였고, 성년이 되도록 생존이 유일한 아이였다. 튜린에서 공부하고 젊은 나이에 그 곳 시관학교에서 수학 교수로 복무했다. 1766년 오일러가 베를린을 떠났을 때 프레더릭 대체가 '유럽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 그의 궁정에 '유럽에서 가장 위대한 수학자'가 있기를 희망한다고 라그랑주에게 편지를 보냈다. 라그랑주는 그초청을 받아들여서 오일러가 혼란스러운 정치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라그랑주는 새로 설립된 에콜 노르말, 그 후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교수직을 수락했다.

전자의 학교는 얼마 안 있어 없어졌지만 후자의 학교는 많은 현대 프랑스의 위대한 수학자들이 그 곳에서 공부하고 그 곳에서 교수직을 가졌지 때문에 수학사에서 유명하게 되었다. 말년에 라그랑주는 고독과 절망감에 매우 시달렸는데 그는 56세 때 그보다 거의 40세 가까이 어린 소녀를 만나 사귀기 시작하면서 여기에서 벗어났다. 그녀는 친구인 천문학자 레모니에(Lemonnier)의 딸이었다. 그의 불행을 자주 접한 그녀는 그에게 매우 헌신적이고 적임인 친구였으며 남편을 위로하여, 살고 싶은 욕망을 일깨워 주는 아내였다. 세상에서 받은 상 중에서 가장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부르럽고 헌신적인 어린 아내라고 그는 정직하고 순수하게 주장했다.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 시도는 1797년 그의 위대한 저서 <미분의 원리를 포함하는 해석함수론, Theorie des fonctions analytiques contenant les principes du calcul differentiel>에서 행해졌다. 여기서 주요한 개념은 테일러 급수에 의한 함수 f(x)의 전개식이다. b에 관한
f(x+b)의 테일러 전개에서 도함수 f´(x), f″(x), ···은b, b/2!···의 계수로서 정의 된다. 오늘날 매우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표기f´(x), f″(x),···은 라그랑주가 만든 것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의 수많은 위대한 프랑스 수학자와 매우 친밀했던 나폴레옹은 "라그랑주는 수리과학 분야에서 치솟은 피라미드이다."라고 말함으로써 라그랑주에 대한 그의 평가를 요약했다.

 

 

라마누잔(Srinivasa Ramanujan :1887-1920)

인도의 수학자.
어렸을 때부터 수학에 관심을 가져오다가 15세 때 대학 도서관에서 빌린 수학책을 통해서 재능이 있음을 알았으나 집안이 가난한데다 신분이 낮고 학력이 없어 어려운 연구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영국의 수학자 G.H.하디(1877∼1947)에 의해서 특이한 재능이 높이 평가되어 정부의 연구비를 지원받게 되었고, 1914년 영국으로 건너갔다. 그때까지 그는 근대수학이라는 것을 모르고 연구하였고, 또 추론(推論)에는 많은 오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적 방법에 의한 깊은 명찰과 직관과 귀납으로써 뛰어난 결과들을 많이 도출해 내었다. 그 뒤에 영국에서 발표된 연구 가운데는 현대 정수학(整數學)의 깊은 부분에 관계되는 중요한 예상이 몇몇 남아 있다. 특히 자연수 n의 분할수(分割數) p(n)에 관한 것이 유명하다.
18년 30세의 젊은 나이로 로열 소사이어티 회원으로 뽑혔다. 19년 인도로 귀국하였으나, 병으로 32세에 세상을 떠났다.

 

 

라메(Lam? Gabriel :1795-1870)

프랑스의 수학자·물리학자.
초기에는 러시아의 광산기사로 근무하였고, 1832년 귀국한 후 파리 에콜폴리테크니크(공과대학) 물리학 교수, 51년 파리대학 교수가 되었다. 주로 탄성체이론(彈性體理論)·열전도론(熱傳導論) 등 응용수학적 분야의 연구를 추진, 이들의 전개에 공헌하였다.
36년 타원체의 온도평형(溫度平衡)의 문제를 풀기 위하여 라메의 방정식과 라메의 함수를 도입하였고, 52년 등방성(等方性) 탄성체의 탄성률로서 ‘라메의 상수’를 도입하였다.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rm Leibniz :1646-1716)

17세기의 위대한 세계적 천재였으며 미적분법의 발명에서 뉴턴의 경쟁자였던 고트프리드 빌헬름 라이프니츠(Gottfried Wilberm Leibniz)는 1646년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독학하여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보통교과서를 다 공부하여 수학, 신학, 철학, 법학의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일반 특성, characteristica generalis> 의 첫번째 착상을 벌전시키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훗날 부울(George Boole, 1815-1864)의 기호 논리로 꼬츄피우고, 또 훨씬 후인 1910년에는 화이트헤드와 러셀의 <수학의 원리, Principia mathematica>를 꽃피운 뿌리가 되었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젊다고 하는 표면적인 이유 때문에 법학박사학위를 거절당한 그는 뉴렘베르크로 이사했다. 그 곳에서 그는 역사적 방법에 의한 법 교육에 관한 탁월한 글을 써서 마인츠 체후에게 헌납했다. 이 일로 해서 마인츠 제후는 그를 법령 재편찬위원회에 임명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대사관원으로 보내게 되는데, 처음에는 마인츠 제후를 위해 1676년부터 그가 죽을 때까지는 하노비에서 브룬스빅 공의 지위를 위해 봉사했다.
1672년 외교적 업무로 파리에 있을때 라이프니츠는 그 곳에 살고 있던 호이겐스를 만났는데, 이 젊은 외교관은 그 과학자를 설득하여 자기에게 수학을 가르쳐 주도록 하였다. 그 이듬해 라이프니츠는 정치적 임무를 띠고 런던으로 파견되었는데, 그 곳에서 올덴버그와 사귀었으며 영국학 술원에 계산기를 만들어 보내기도 하였다. 파리를 떠나기 전에 브룬스빅 공의 사서라는 유리한 직책에 취임하기 위하여 라이프니츠는 이미 미적분학의 기본 정리를 발견하고 이 주제에 관한 개념의 대부분을 개발하였으며, 미분법의 수많은 기본 공식을 만들어 내었다.
그의 일생을 마감하는 7년간은 미적분의 발견에서 뉴턴과 독립적으로 했느냐에 관해 뉴턴 사이에서 발생한 다른 사람들의 논쟁으로 해서 한층 비참하게 되었다. 1714년 그의 군주는 최초로 영국의 게르만 왕이 되었으나 라이프니츠는 하노버에 남겨저 무시되었다. 2년 후인 1716년에 죽었을 때 그의 장례식에는 단지 그의 충실한 시종만이 참석하였다고 전해진다.
라이프니츠는 천부적으로 낙천주의자였다. 가기 생애 동안 대립하는 종파를 하나의 일반적인 교회로 재결함시키려는 희망을 가졌을 뿐 아니라, 이진살술의 상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에 의하여 전 중국을 기독교화하는 방법을 가질 수도 있다고 느꼈다. 신은 1로 무는 0으로 나타낼 수도 있기 때문에 아진법에서 모든수가 0과 1로 표현되는 것과 똑같은 신은 무에서부터 모든것을 창조했다고 추측하였다. 이러한 생각에 매우 흡족한 라이프니츠는 그생각이(특히 과학을 좋아했던) 중국의 현 황제와 나아가 중국의 모든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바람으로 중국 수학위원회 위원장인 예수회 수사 그리말디에게 그것을 알렸다. 라이프니츠의 종교적인 환상의 또 다른 예는 허수가 기독교 성경의 성령-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중간쯤이 양서류의 일종과 닮았다고 한말에서 엿볼 수 있다.
인간으로서 유일하게 가지고 있었던 그이 재능에 대한 마지막 찬사로 라이프니치에 대한 설명을 마친다. 연속과 이산이라는 수학적 사고의 넓고 대조적인 두 영역이 존재하는데, 라이프니츠는 수학의 역사에서 사고의 이 두 가지 성질을 완전하게 가졌던 유일한 사람이다.

 

 

라플라스(Pierre-Simon Laplacc :1749-1827)

라플라스(Pierre-Simon Laplace)는 1749년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그는 수학적 능력이 뛰어나서 일찍이 좋은 교사직을 얻었고, 정치적인 기회주의자로서 프랑스 혁명의 불확실한 기간 동안 정권을 잡는 어떤 정당에라도 비위를 맞추었다. 그의 가장 뛰어난 업정은 천체역학, 활률론, 미분방정식, 측지학 분야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기념비적인 두 작품, <천체 역학론, Traite de mecenique Celeste>(5권 1799-1825)과 <활률의 해석적 이론, Theorie analytique des probailites> (1812)을 발표하였는데, 각각 해박한 비전문가적인 해설이 붙어 있다.
그에게 '프랑스의 뉴턴'이란 별칭을 붙여준 다섯 권으로 된 <천체 역학론>은 라플라스 자신의 업저과 함께 그 이전의 모든 발견을 포함했고, 이로 인해 라플라스는 이 분야에서는 필적할 만한 사람이 없는 거장이 되었다. 이 논문과 관련해서 종종 말해지는 몇몇 일화를 다시 말하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나폴레옹이 그의 논문에 신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까다로운 지적을 했을 때 라플라스는 "폐하, 저는 그 가설이 필요치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미국의 천문학자 나다니엘 보우디취는 라플라스의 논문을 영역할 때 "나는 라플라스 가 '따라서 그것은 명백하다'고 한 부분을 여러 시간 힘들여 부족한 부분을 공부하여 왜 그것이 명백한 가를 알아내지 않고서는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고 언급했다. 라플라스의 이름은 우주 발생의 성운설, 퍼텐셜 이론의 소위 '라플라스 방정식(이 어느 것도 라플라스가 만든 것은 아니지만), 소위 '라플라스 변환' 그리고 행렬식의 '라플라스 전개'와 연관되어 있다. 라플라스는 뉴턴이 죽은 지 꼭 100년 후인 1827년에 죽었다. 어떤 보고에 의하면 그의 마지막 말은 "우리가 아는 것은 미미하고 모르는것은 무한 하다."였다.
라플라스에 관한 다음 이야기는 흥미롭고 직장을 구하려는 사람에게 귀중한 충고를 제공해 준다. 라플라스가 젊어서 수학 교수직을 얻기 위하여 파리게 도착했을 때 저명한 사람이 쓴 추천서를 달랑베르에게 제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온 라플라스는 역학의 일반원리에 관한 재기 있는 편지를 달랑베르에게 썼다. 이것이 취직의 문을 열어 주었고 달랑베르는 "귀하는 내가 당신의추천서를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을 아셨군요. 당신은 자신을 더 잘 소개했기 때문에 다른 것은 필요치 않군요." 라고 답장하였다. 며칠 후 라플라스는 파리의 육균 사관학교의 수학 교수에 임명되었다 .
라그랑주와 라플라스는 종종 서로 대조를 이루곤한다. 무엇보다도 볼(W.W.Rouse Ball)이 다음과 같이 요약했듯이 그들의 방식에서 두드러진 대조를 이룬다. "라그랑주는 형시과 내용 둘 다에 완벽하고 신주아ㅎ게 전개과정을 설명하기 때문에 그의 논증은 일반적이지만 이해하기 쉽다. 반먼에 라플라스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고 과정에 무관심하며, 그의 결과가 옳다는 사실에 만족해 하며 그것 을 증명하지 않거나 틀리게 증명하여 방치한다." 또한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수학에 대한 견해에서도 현격한 대조를 이룬다. 라플라스에게 수학은 단지 자연 현상을 셜명하는 데 사용하는 하나의 도구이고 라그랑주에게는 하나의 빼어난 예술이고 그 자체가 존재이유이다.

 

 

란다우(Edmund Landau :1877-1938)

독일의 수학자. 베를린 출생.
1909년 괴팅겐대학 교수가 되었으나, 33년 나치스의 유대인 박해로 대학에서 쫓겨났다. 그 후에는 베를린으로 돌아가서 생활하였으며, 그 동안에 케임브리지대학 등의 초청으로 국외를 여행한 일도 있다. 저서나 논문이 많은데, 특히 해석적 수론(解析的數論)과 함수론에 크게 기여하였다. 초기의 저서 《소수분포론(素數分布論)》(1909)에서는 역사적으로 이론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 자신의 최신의 기여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설명하였으나, 10년대 후기의 저서나 논문에서는 간결한 문체를 사용하였다.
수학논문의 이와 같은 문체를 란다우슈틸(Landau-Stil)이라고 부른다

 

 

람베르트(Jhoann Heinrich Lambert :1728-1777 )

람베르트(Jhoann Heinrich Lambert, 1728-1777)는 당시 스위스의 영토였던 뮐루즈(일사스)에서 태어났다. 람베르트는 매우 재능 있는 수학자였다. 가난한 재단사의 아들인 그는 대부분 독학으로 공부했다. 훌륭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결과들을 매우 주의를 기울여 엄밀하게 입증하였다. 사실상 람베르트는 π가 무리수인 것을 엄밀하게 증명한 최초의 수학자였다.
람베르트는 도형 기하학, 혜서의 궤도 결정, 지도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평면도법 이론 (이 평법도법 중 많이 사용되는 하나에는 현재 그이 이름이 붙어 있다.) 등 수많은 주제의 수학에 주목할 만한 공헌을 한, 다방면으로 박식한 학자였다. 한때 그는 언젠가 라이프니츠가 개설한 종류의 수리논리를 여구하려 했다. 1766년 그는 <평행서느이 이론, Die Theorie der Parallellinien>이란 제목의 유클리드 평형공준을 고찰한, 사후에 출판된 논문을 썼는데 그것으로 인해 그는 비유클리드 기하학 발견의 선구자 중의 하나에 속하게 되었다.
람베르트는 잠깐 동안 프로이센 학술원에서 오일러의 조교로 있었다. 언젠가 프레더릭 대제가 람베르트에게 "그대는 어느 분야의 과학에 유능한가"라고 묻자 람베르트는 짧막하게 "전부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전해진다. 람베르트는 가우스가 태어난 해인 1777년에 죽었다.

 

 

램지(Frank Plumpton Ramsey :1903-1930)

영국의 수학자·철학자.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수학을 배우고 그 대학에서 강사를 지냈다. A.화이트헤드와 B.러셀에 의한 명제함수이론의 수정과 거기에 나타나는 타입이론의 간략화를 주장하였다. 또한, L.비트겐슈타인의 초기사상의 영향을 받아, 토폴로지이론과 설명이론을 발전시켰다.
주요저서로 《수학의 기초와 논리학적 논문들:The Foundations of Mathematics and Other Logical Essays》(1931)이 있다.

 

 

러셀(Be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1970 )

귀족집안의 자손인 러셀(Berrand Atrand Arthur William Russell)은 1872년 웨일즈의 트렐렉 근교에서 태어났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라니티 칼리지에서 공모 장학금을 받은 그는 수학과 철학에서 명성을 크게 떨쳤으며 공모 장학금을 받은 그는 수학과 철학에서 명성을 크게 떨쳤으며 화이트헤드 밑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주로 미국의 대학교에서 강의하였고 수학, 논리, 철학, 사회학, 교육학에 관한 책을 40권 이상 저술하였다.그는 실베스터, 드 모른간과 공동 수상한 영국학술원상 (1934), 메릿 훈장(1940), 노벨 문학상(1950)과 같은 많은 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거리낌없이 의견을 말하여 종종 논쟁에 휘말렸다. 제1 차 세계대전 중에 평화주의자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징병제도를 반대하여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쫓겨나고 4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1960년대 초에 핵무기에 반대하는 평화주의 운동을 이끌어 다시 잠깐 동안 투옥되었다. 뛰어난 지성과 능력의 소유자였던 그는 1970년 98세의 고령에도 끝까지 정신이 흐려지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

 

 

레기오몬타누스(Regiomontanus :1436-1476)

독일의 천문학자·수학자. 쾨니히스베르크 출생.
본명은 Johann Mller. 1452년 빈에서 포이어바흐로부터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을 공부하였다. 61년 스승의 사망 후 로마로 유학, 그리스어 원전 《알마게스트:Almagest》 등 여러 과학서적을 번역하였다. 68년 이들 원전을 가지고 귀국한 후, 뉘른베르크의 부호 B.발터의 도움을 얻어 71년 독일 최초의 천문대를 건설하고, 새로운 천문기기(天文器機)의 제작과 천체관측에 힘썼다. 그리고 관측자료를 토대로 54년부터 60년까지 《천체위치추산표(天體位置推算表)》를 편집하였다. 또한, 항성과 달 사이의 각거리를 측정하여 원격(遠隔) 2지점의 시간을 비교하는 방법(태음거리법)을 창안하였다. 이를 이용함으로써 원양항해에서의 경도결정이 가능하게 되었고, 대항해(大航海)시대의 막이 올랐다. 72년 핼리혜성을 관측하고, 이것을 처음으로 천체로 인정하였다.
75년 로마교황청의 초청으로 개력(改曆)위원회에 참여하기 위해 로마로 갔으나 급환으로 사망하였다

 

레비치비타(Levi-Civita, Tullio :1873-1941)

이탈리아의 수학자. 파도바 출생. 1898년 파도바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1918~38년 로마대학 교수를 지냈다. 무솔리니가 이탈리아의 대학교수에게 파시스트당 정부에 대한 선서를 요구하였지만 과학자로서의 양심 때문에 선서를 할 수 없다고 거부하였다. 스승인 리치와 함께 절대미분학(絶對微分學)을 창시하고 그 결과를 《절대미분학의 방법과 그 응용》(1900)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였다. 유클리드공간에서의 평행의 정의를 리만공간으로 확장하였다. 텐서 해석(解析)은 리만기하학의 연구에 적절한 방법이고 아인슈타인에 의한 일반상대성이론, 그리고 중력장의 이론에도 사용되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

이탈리아의 화가· 조각가. 회화· 조각· 건축 외에 과학· 음악 등 다방면에 재능을 발휘하였다.
1466년 피렌체에 가서, 베로키오의 공방에서 회화· 조각을 수업, 〈수태고지〉 등을 그렸다. 82년에는 밀라노에 가서, 성프란체스코성당의 제단화 〈암굴의 성모〉나 산타마리아데레그라체 성당에 벽화 〈최후의 만찬〉을 그렸다. 1500~06년에 다시 피렌체에서 활동, 군사· 토목 공사에 종사하고, 〈성모자와 성 안나〉 〈모나리자〉의 제작에 착수하였다. 17년 프랑수아 1세의 초빙으로 프랑스의 보아주에 가서 건축· 운하 공사에 종사하다가 죽었다.
과학적 연구는 수학· 물리· 천문· 식물· 해부· 지리· 토목· 기계 등 다방면에 이르며, 이들에 관한 수기(手記)나 인생론· 회화론 등이 많이 남아 있다.

 

 

레코드(Robert Recorde :약1510-1558)

로버트 레코드는 산술책 이외에도 천문학, 기하학, 대수, 의학 등에 관한 많은 저술을 하였는데 그중 몇가지 저작은 분실되고 말았다. 1551년에 출간되 천문학에 관한 저서 <지식의 성, Castle of Knowledge>은 영국의 독자들에게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처음으로 소개한 책이었고 역시 같은 해에 출간된 <지식의 오솔길, Pathewaie to Knowleage>은 유클리드의 <원론>의 초록집이었다. 특히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은 1557년에 출간된<지혜의 숯돌, whestone of Wittle>이라는 이름이 붙은 대수책으로 이 책에서 처음으로 오늘날의 등식기호가 사용되어 있다

 

 

로바체프스키(Nicolai Ivanovitch Lobache :1792-1856)

로바체프스키는 카잔 대학교에서, 대부분의 생애를 처음에는 학생으로서 후에는 수학 교수로서 마지막에는 학장으로 보냈고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관한 최초의 논문은 보야이의 논문이 인쇄되기 2,3년 전인 1829-1830년에 Kasan Bulletin 에 발표했다. 이 논문은 러시아에서는 거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러시아어로 쓰여졌기 때문에 실제로 다른 곳에서도 아무런 관심을 끌지 못했다. 로바체프스키는 이 최초의 논문을 다른 곳에 소개시키려 하였다.예를 들어 좀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려고 1840년 <평행 이론에 관한 기하학적 연구, Geoinetrische Untersuchungen zur Theorie der Parallellinien>라는 제목의 독일어로 소책자를 발간하고, 죽기 1년 전이며 장님이된 1년 후인 1855년에 <범기하학, Pangeometrie.이라는 제목의 프랑스어로 쓰여진 최종적이며 전선된 논문을 발간하였다.

당시에는 새로운 발표에 대한 정보가 매우 늦게 전파되었지 때문에 가우스는 1840년 독일어판이 나와서야 비로소 로바체프스키의 논문을 보았고, 야노스 볼리아이는 1848년까지 그 논문을 모르고 있었다. 로바체프스키 자신은 그의 논문이 널리 알려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가 발전시키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오늘날 종종 로바체프스키의 기하학(Lobachevskian geometry)이라 불린다.

 

 

르장드르(Adrien-Marie Legendre :1752-1883)

르장드르(Adrien-Marie Legendre, 1752-1833)는 많은 명제를 상당히 단순화하고 재정리 하여 유클리드의 <원론>을 교육적으로 개선하려 시도했던 매우 유명한 그의 책 <기하학의 원리, Elemen ts de geomerrie>로 기초 수학사에 이름이 알려졌다. 이 논문은 미국에서 매우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져서 금세기 기하학 교과서의 표준이 되었다. 실제로 1819년 하버드 대학교의 파라(Johe Parrar)가 르장드르의 기하학을 처음 영역하였다.
고등수학에서 르장드르의 주된연구는 정수론, 타원함수, 최소제곱법, 적분에 관하여 집중되었는데, 이것은 수준이 높아서 여기서 다룰 수 없다.

또한 수학적 표를 면밀히 계산하였다. 1794년에 나온 <기하학의 원리> 외에 르장드르는 최초로 정수론만을 다룬 859페이지짜리 책 두권 <정수론, Essai sur la theorie des nombres>(1797-1798)을 발간하였다. 그는 후에 포괄성과 권위에서 오일러의 유사 서술과 경쟁이되었던 세 권짜리 책 <적분학 연습, Exercises de calcul Integral>(1811-1819)을 썼다.
측지학에서 르장드르는 프랑스 삼각측량법으로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리(Lee :1842-1899)

노르웨이의 수학자. 노르드피오르데이드 출생. 크리스티아니아대학(현 오슬로대학)에서 수학한 후, 1869년 독일의 베를린으로 갔다. 그곳에서 F.클라인(1849∼1925)과 친교를 맺고 공동으로 수학연구를 하고 논문도 썼다. 그 후 71년 크리스티아니아대학으로부터 학위를 받고 이듬해에 이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73년 연속변환군의 연구를 시작하여 ‘리의 구면기하학(球面幾何學)’을 발견하였으며, 84년 이후 F.엥겔(1821∼96)과 협력하여 변환군 연구를 계속하였다. 86년 클라인의 뒤를 이어 라이프치히대학 교수로 부임하여 98년까지 강의하였다. 98년에 건강을 해쳐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변환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하여 해석적인 형태로 이 운동을 추구하여 기하학적 변환의 이론에 신기원을 이루어 놓은 것과 함께 변환의 일반이론의 기초를 확립함으로서 연속군(連續群)의 이론을 창시하였다. 이 연속군을 리군(群)이라 부르는 것은 그의 이름을 따서 붙인 때문이다. 또한 미분방정식론에의 공헌도 컸다.

저서에는 F.엥겔과의 공저인 《변환군론(變換群論):Theorie der Transformationsgruppen》(3권, 1893)과 G.셰파스와의 공저인 《연속군론(連續群論) 강의》 등이 있다.

 

리만(Geoorg Friedrich Bernhard Riemann :1826-1866)

리만은 1826년 하노버의 조그만 마을에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수줍음이 많고 허약했다. 그는 아버지의 검소하ㅈ 환경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대학과 괴팅겐 대학에서 좋은 교육을 받았다. 그는 후자의 학교에서 복소함수론 분야의 뛰어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에서 복소변수를 가지는 함수의 해석적인 성질과 해석학에 위상적인 고찰을 소개한 리만곡면의 매우 유용한 개념을 보증하는 소위 코시-리만 방정식(비록 리만시대 이전에 알려졌지만)이 나온다. 리만은 20세기에 더 일반적인 그베그 적분으로, 그 후 적분의 보다 더 깊은 일반화에 이른, 현재 우리가 림나적분으로 알고 잇는 것의 저으이에 의하여 적분가능성의 개념을 명백히 하였다.
후에 아인슈타인과 그 밖의 사람들이 라만의 공간과 기하학의 폭넓은 개념이 일반 상대성이론에 필요한 수학적 토양임을 알게 되었다. 리만 자신도 이론 물리학의 다방면에 공헌하였는데. 예를 들어 그는 충격파의 수학적인 논법을 최초로 도입했다.
수학문헌에서 소위 리만 제타함수(Riemann zeta funxtion)와 리만 가설(Riemann bypothesis)이 유명하다. 후자는 정수론에서의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와 비교되는 고전적 해석학에서의 유명한 미해결 추측이다.
리만은 1857년에 괴팅겐 대학교의 조교수로 임명되고, 1859년 한때 가우스가 차지했던 디리클렌의 교수직을 승계하여 정교수가 되었다. 리만은 40세의 젊은 나이에 건강을 회복하기 위하여 찾아간 북부 이탈리아에서 폐결핵으로 죽었다.

 

 

 

매클로린(Colin Maclaurin :1698-1746)

매클로린은 기하학 특히 고차원 곡선에 관하여 매우 유명한 논문을 썼으며, 고전 기하학을 물리 문제들에 응용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응용수학에 관한 그 많은 논문 중에는 상을 받은 조수의 수학적 이론에 관한 논문이 있다. 그의 <유율법 연구, Treatise of Fluxions>에는 회전하는 두 타원체의 인력에 관한 고찰이 실려 있다.
매클로린은 수학의 천재였다. 11세의 나이에 글라스고우 대학교에 입학이 허가되어 15세에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중력의 힘에 관한 학위논문의 훌륭한 공개 심사를 받았다. 19세에는 에버딘에 있는 매리스칼 대학의 수학 교수직에 선발되었고 21세에 최초의 중요한 책<기하학의 기본, Geometria organica>을 발간하였다.

27세에는 에딘버러 대학의 수학 교수의 조교가 되었다. 조교 수당을 얻는데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대학교가 이 뛰어난 젊은이를 고용할 수 있도록 뉴턴이 개인적으로 비용을 부담하였다. 오래지 않아 매클로린은 그가 돕던 교수를 승계하였다. 미분에 관한 논문은 그가 죽기 겨우 4년 적인 44세 때 나왔는데 이것은 뉴턴의 유율법에 관한 최초의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해설이며 미적분학의 원리들에 관한 버클리(Bishop Berkeley)의 공격에 대한 답으로서 매클로린이 쓴 것이다.

 

 

메나이크모스(Menaechmus :BC380-BC320)

BC 4세기 후반에 활약한 그리스의 수학자.
에우독소스(Eudoxos)의 제자로, 2개의 비례중항(比例中項)의 문제에 관한 해법을 하던 중, 원뿔곡선과 그 성질을 발견하였다. 다만 원뿔곡선은 평면이 원뿔의 모선에 대하여 항상 직각으로 자를 때 생긴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꼭지각이 예각일 때 타원, 직각일 때 포물선, 둔각일 때 쌍곡선이 생긴다고 하였다.
이 밖에도 ‘기하학 전체를 보다 완전한 것으로 만든 사람’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기하학 원리의 뜻, 정리와 문제의 구별, 명제의 전환 가능성 등에 관해 광범위하게 논하였다.

 

메넬라우스(Menellaus :)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천문학자·물리학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출생. 98년 로마에 천문대를 건립하였다. 저서로, 원의 현에 관한 저작(6권)이 있었다고 하나 없어지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는 아라비아어·헤브라이어·라틴어 등으로 번역된 《구면학(球面學):Sphaerica)》(3권)이 있다.
이것은 구면삼각형을 취급한 것으로, 유클리드의 평면삼각형에 대응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제1권에는 구면삼각형의 개념과 정의 등이 있고 제2권은 천문학의 입장에서 구면학을 취급하였으며, 제3권에는 ‘메넬라우스의 정리’를 비롯하여 유클리드의 《기하학원본》 제6권과 유사한 비례의 제명제(諸命題)가 있다.

 

몽주(Gaspard Monge :1746-1818)

몽주는 그가 태어난 도시인 본(Beaunne )에 있는 오라토리오외의 대학에서, 또 16세에 물리학 강사가 되었던, 리용에 있는 그들의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고향의 대규모 지도를 정교하게 만든 덕분에 메지엘에 있는 병학교에 제도공으로 취직하게 되었다. 공급된 자료로부터, 계획된 요새의 포 위치를 찾아내라는 요청을 받고 몽주는 당시의 길고 지루한 산술적 과정을 빠른 기하학적 방법을 매체하였다. 3차원 물체를 2차원 평면에 적절히 사용하여 현명하게 표현한 것 중의 하나인 그의 방법은 군에서 답변확정하여 일급비밀로 분류하였다. 후에 그것은 화법기하학(iescriptive geometry) 으로 널리 가르쳐졌다. 몽주는 1768년 메지엘의 수학 교수, 1771년에 물리학 교수가 되었으며 1780년에는 파리 학원의 수리학 교수에 임명되었다.
몽주는 해군성 장관으로 재직하며 육군에서 사용하는 무기와 화약을 제조했다. 1795년 에콜 폴리테크 설립할 때 집정부하에서 주동적인 역할을 했고 그곳에서 수학 교수를 지냈다. 그는 나폴레옹과 친하게 지냈고 존경했으며 후에 실패로 끝난 1798년의 이집트 원정에 수학자 푸리에(Joseph Fourier, 1758-1831)와 함께 수행했었다. 프랑스로 돌아와서는 에클 폴리테크니크의 자리에 복귀하여 뛰어난 재능을 지닌 교수임을 입증했다. 그 곳에서 그의 강의는 젊고 유능한 많은 기하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는데, 그들 가운데는 미분기하학 분야에 기여한 듀팽(Charles Dupin, 1784-1873)과 사영기하학 분야에 기여한 퐁슬레(Jean Vivtor Poncelert,1788-1867)도였다.
화법기하학의 장사 외에도 몽주는 미분기하학의 아버지로 간주된다. 그의 논문 <해석학의 기하학에로의 응용, Application del'analyse a la geometrie 0>은 5판이나 발간되었고, 곡면의 미분기하학의 초기 연구의 가장 중요한 것들 중의 하나였다. 몽주는 여기에서 무엇보다도 3차원 공간에 있는 곡면의 곡률선의 개념을 소개했다. 미분기하학에 대한 몽주의 업적은 주로 곡면의 외적인 기하학에 관한 것이다.
몽주는 그가 태어난 도시인 본(Beaunne )에 있는 오라토리오외의 대학에서, 또 16세에 물리학 강사가 되었던, 리용에 있는 그들의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고향의 대규모 지도를 정교하게 만든 덕분에 메지엘에 있는 병학교에 제도공으로 취직하게 되었다. 공급된 자료로부터, 계획된 요새의 포 위치를 찾아내라는 요청을 받고 몽주는 당시의 길고 지루한 산술적 과정을 빠른 기하학적 방법을 매체하였다. 3차원 물체를 2차원 평면에 적절히 사용하여 현명하게 표현한 것 중의 하나인 그의 방법은 군에서 답변확정하여 일급비밀로 분류하였다. 후에 그것은 화법기하학(iescriptive geometry) 으로 널리 가르쳐졌다. 몽주는 1768년 메지엘의 수학 교수, 1771년에 물리학 교수가 되었으며 1780년에는 파리 학원의 수리학 교수에 임명되었다

 

 

 

뫼비우스(August Ferdinand Mobius :1790-1868)

뫼비우스 띠는 1865년 발견된 이래로 전문가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매력적인 관심사가 되어 왔다.
뫼비우스 띠는 한때 수학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으로 유명했지만, 세월이 흐른 뒤에는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원천으로 더욱 유명해진다.
뫼비우스 띠는 독일의 수학자이며 천문학자인 뫼비우스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 발견은 위상수학이라 불리는 완전히 새로운 수학분과의 모태가 되었다.
위상수학은 연속 변형 하에서도 변하지 않고 유지되는 표면의 성질을 연구한다.

 

민코프스키(Minkowski :1864-1909)

독일에서 활동한 러시아 출신의 수학자.
리투아니아의 코브노 근교 출생. 쾨니히스베르크대학에서 공부했다. 그 무렵부터 D.힐베르트와 평생에 걸친 친교를 맺기 시작했다. 1895년 쾨니히스베르크대학 교수가 되었고, 96년 취리히대학, 이어서 1902년 괴팅겐대학으로 옮겼다.
정수론에 기하학적 방법을 도입하여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연구로 유명하다. 일반적으로 ‘민코프스키의 시공세계(時空世界)’ 즉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의 4차원적 시공(時空)의 기하학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상대성이론의 시간·공간개념을 논하였고, 또한 물리법칙의 로렌츠군(群)에 대한 불변성을 해명하여 상대성이론의 형성에 공헌을 하였는데, 4차원세계의 기하학은 그 묘상화에 기여를 한 것이었다.
주요저서로 《수의 기하학:Geometrie der Zahlen》(1896), 《디오판토스 근사론(近似論)》(1907), 《공간과 시간:Raum und Zeit》(1909) 등이 있다

 

바이어 슈트라스(K.T.W. Weierstrass :1815-1897)

청년시절을 법학과 경제학의 공부로 보내 방향을 잘못 잡은 바이어슈트라스는 늦게 수학공부를 시작하였고, 4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베를린 대학교의 강사직을 얻어 중.고등학교 수업에서 벗어났으며, 1864년 그 대학교의 전암교수가 되어 마침내 모든 시간을 고등학교 수학에 전념할 수 있기까지는 또 8년이 걸렸다. 바이어 슈트라스는 중등교육에 바쳤던 세월을 전혀 후회하지 않았고, 후에 대학교 재직시 뛰어난 교수 능력을 발휘하여 이제까지 알려진 고등수학의 가장 훌륭한 강의자가 되었다.
바이어슈트라스는 초타원적분, 아벨함수, 대수적 미분방정식에 관한 많은 초기 논문을 썼으나, 가장 널리 알려진 수학적 업적은 몇급수를 써서 복소수함수론에 기여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것은 일찍이 라그랑주가 생각한 복소평면에 대한 확장이지만, 바이어슈트라스는 그것을 엄격하게 완성하였다. 대수학에서 바이어슈트라스는 행렬식을 소위 공준적으로 정의한 최초의 사람일 것이다.그는 정사각행렬 A의 향렬식을, A의 각 행의 성분의 동차선형이고, A의 두 행을 교환하면 부호만 바뀌며, A가 단위행렬이면 1이 되는 A의 성분의 다항식으로 정의 하였다.
바이어슈트라스는 매우 감화를 주는 선생이었고 매우 세심하게 준비된 강의는 많은 미래 수학자들에게 전형을 세워주었으며 '바이어슈트라스의 엄밀함'은 '극도로 주의깊은 추론'과 동의어가 되었다. 바이어슈트라스는 '탁월한 수학적 양심이었고, '현대 해석학의 아버지'로 알려지게 되엇다. 그는 라그랑주가 1797년에 미적분학을 엄밀하게 하려는 시도의 첫번째 발표를 한 지 꼭 100년 후인 1897년 베를린에서 죽었다.
이 수학의 엄밀화와 더불어 오늘날의 수학에서 매우 뚜렷해진 추상적 일반화 경향이 나타났다. 아마 19세기의 다른 어떤 수학자보다 독일의 수학자 리만이 현대 수학의 이 특징에 더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는 확실히 수많은 수학분야, 특히 기하학과 함수론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후학들에게 보다 높은 수준의 발전에 대한 생각을 이보다 더 풍부하게 물려준 수학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배로(Isaac Barrow :1603-1677)

배로는 케임브리지에서 교육을 마쳤으며 그리스어에 가장 능숙한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수학, 물리, 천문학, 신학에 걸쳐 두루 인정을 받은 매우 학구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육체적 강인성, 용감성, 반짝이는 재치와 꼼꼼한 성실성에 대한 재미있는 얘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그는 케임브리지에서 루카스 교수직에 임명된 최초의 사람이었는데 1669년 위대한 제자 뉴턴을 위해 관대하게 이 자리를 사임했다. 그는 1677년 케임브리지에서 일생을 마쳤다.
배로의 가장 중요한 수학적 업적은 <기하학 강의, Lectiones opticae et geometricae>인데 케임브리지에서 교수직을 사임한 해에 출간되었다. 이책의 서문에서 책 내용의 일부, 아마 광학을 다룬 부분은 뉴턴의 덕임을 인정하고 있다. 바로 이 책에서 요즘 교과서에 나오는 미소삼각형(differential triangle)을 사용하고 있는 현대 미분과정과 매우 비슷한 접근방법이 나온다. 다른 분야에서 나타나는 증거가 미약함에도 불구하고, 배로는 일반적으로 미분법과 적분법이 역연산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최초의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이 중요한 발견이 소위 미적분학의 기본정리이며 배로의<기하학 강의>에 소개되고 증명되었다

 

베비지(Charles Babbage :1791-1871)

그는 현대의 전자 컴퓨터를 내다보았던, 원칙적으로는 공학적 계산 기계를 고안하고 만들어 냈던 영국의 수학자이자 발명가였다.
그는 Devon에 있는 Teignmouth에서 태어났으며 캠브리지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1816년 왕립학회의 회원이 되었으며 왕립 천문학회와 통계학회인 Analytical의 창설 활동을 했다.
1820년 그는 간단한 수학적 계산을 할 수 있는 기계 장치인 Difference Engine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이 기계를 만들기 시작했으나 기금이 부족하여 완성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1991년 영국 과학자들은 그의 세부 도안과 설계 명세서를 보고 만들어 냈다. 이 기계는 베비지의 고안이 견고했다는 것을 증명하면서 소수점 이하 31자리까지 정확하게 계산해 냈다.
1830년에는 좀 더 정밀한 계산을 수행하도록 고안된 Analytical Engine을 만들기 시작했으나 이 장치 역시 만들어지지 못했다.
그의 저서인 "Economy of Machines and Manufactures(1832)"는 작동적 연구로 알려져 있는 연구 분야를 창시했다

 

 

보야이(Janos Bolyai :1802-1860)

보야이는 1832년 아버지의 수학책 부록에 그의 발견을 발표했다. 후에 로바체프스키가 1829-1830년경에 비슷한 발견을 발표했었다는 사실이 알려졌지만 언어의 장애와 새로운 발견에 대한 정보의 전파가 느렸기 때문에 로바체프스키의 논문이 서유럽에 알려지는 데는 몇 년이 걸렸다.

여러 사람이 다른 사람의 연구에 대한 정보를 어떻게 얻을 수있었는지 말해주는 복잡하고 알려지지 않은 이론을 여기에서 논의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아무튼 당시에는 이 문제에 관한 상당한 표절 시비가 있었다.
야노스(또는 요한) 볼리아이는 오스트리아 군의 헝가리 장교였고 , 시골 수학 교사이며 가우스의 오랜 친구인 파르카스(또는 볼프강)볼리아이의 아들이었다. 젊은 볼리아이는 의심할바 없이 평행공준에 대한 연구에, 일찍부터 이 문제는 관심을 보인 아버지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일찍이 1823년에 야노스 볼리아이는 그에게 직면한 문제의 실체를 이해하였으며 그 해 아버지에게 쓴 편지에서 그 연구에 매우 열줄하였으므ㅇㄹ 알 수 있다. 이 편지에서 자료를 정리할 시간과 기회를 찾을 수 있으면 바로 평행이론에 관한 연구를 발표하고 싶다고 밝혔고, "나는 무로부터 이상하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냈다."고 외쳤다. 아버지는 준비된 논문을 자신의 기초 수학에 관한 두 권으로 된, 약간 철학적인 책의 부록으로 실을 것을 주장하였다. 야노스가 고찰한 바를 확장시키고 정리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뎠으나 마침내 1829년 완성된 원고를 아버지에게 전했고 3년 후인 1832년 아버지의 책의 첫째 권에 26페이지짜리 부록으로 발간되었다. 야노스 볼리아이는 매우 많은 분량의 원고 더미를 뒤에 남겼으나 더 이상 아무것도 발표하지 않았다. 그의 주요 관심사는 평행공준과 독립이고, 따라서 유클리드 기하학과 새로운 기하학 모두에서 성립되는 명제의 집합을 뜻하는, 그가 '공간의 절대적 과학' (the absolute science of space)이라 부르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볼테라(Volterra, Vito :1860-1940)

이탈리아의 수학자·물리학자. 안코나 출생.
1883년 피사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이어 토리노대학(1893)을 거쳐 로마대학 교수로 취임하였다(1900).
수리물리학의 문제에 관한 업적이 있으며, 탄성이론에서 편미분방정식을 연구하였다. 변분(變分) 문제와 관련하여 N.H.아벨이 만든 방정식을 일반화하고, 이른바 ‘볼테라의 적분방정식’을 연구한 것은 유명한 일이다.
해석함수의 다가성(多價性)이 가산적인 데 불과하다는 것을 나타낸 ‘프앵카레-볼테라의 정리’ 등도 있으며, 현대수학의 중요한 분과인 위상해석학에서 선구적인 공헌을 하였다.

 

 

부울(George Boole :1815-1864)

부울은 1815년 영국의 링컨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하찮은 소매 상인이었고, 따라서 부울은 단지 국민학교 교육만을 받았으나 독학으로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익혔다. 후에 국민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는 동안에 라플라스와 라그랑주의 저서를 통하여 형식 논리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1847년에 부울은 <놀리와 수학적 해석, The mathematical Analysis of Logie>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발간하였는데, 드 모르간은 이것을 획기적인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이 책에서 부울은 수학의 본질적인 특성은 내용보다는 형식에 존재하며 수학은 (일부 사전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주장하는 것처럼) 단치 "측정과 수의 과학" 이 아니라, 보다 폭넓게 그 기호에 대한 정확한 연산법칙에 따르는 기호와 내적인 무모순성만 요구하는 법칙으로 이루어진 연구라고 주장하였다. 2년 후 부울은 새로 설립된 아일랜드의 콕에 있는 퀸스 칼리지의 수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1854년 부울은 1847년의 초기 저술을 확장시키고 다듬어서 ,사고법칙에 대한 고찰, Investigation of the Laws of Thought>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만들었는데, 여기에서 형식논리와 오늘날 부울 대수라 알려진 집합의 대수인 새로운 대수학을 확립하였다. 최근에 부울 대수는 전기 스위치 회로이론 등과 같은 수많은 분야에 응용되고 있다.
1859년에 부울은 <미분방정식론, Treatise on Differential Equations>, 1860년에는 <차분법론, the Calculus of finite differenes>을 발표하였다. 후자는 오늘날까지 그 분야에서의 표준 저서가 되고 있다. 부울은 1864년 콕에서 죽었다.

 

 

 

 

 

출처...본인 노하우 저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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