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의 역사인물에 대해서 알려주세요..(20)

천안의 역사인물에 대해서 알려주세요..(20)

작성일 2009.07.03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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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역사인물의 이름과

생애, 했던 일들 등 여러가지를 알려주세요.. 내공20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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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안의 역사 인물 열분의 일생에 관한 전기를 올립니다.

 

 

◐1.   김시민(金時敏)  (1554∼1592)
    
김시민 장군은 임진왜란 중 가장 크게 왜군을 섬멸하여 제일차 진주전을 승리로 이끈 명장중의 명장이다. 임진왜란 중에 관군과 의병이 활약으로 여러 곳에서 왜병을 무찔러 크게 이긴 전쟁이 많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충무공 이순신의 한산도대첩 권율의 행주 대첩과 충무공 김시민의 진주대첩을 삼대 승리로 손꼽는다. 그 중에 왜병을 2만명 이상이나 도륙한 진주대첩은 왜추 풍신수길이 펄펄 뛰며 놀라게 한 대승리이다, 이 진주전을 지휘한 명장 김시민 장군이 바로 우리고장 출신이다. 장군은 고려시대 몽고와 연합하여 일본 원정할 때 고려측 도원수인 충렬공 김방경 장군의 12세손이며 기묘사화때 조광조 선생을 구하려고 노력하다가 옥고를 치른 강직한 학자인 구암 김충갑 선생의 셋째 아들로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잣밭에서 명종 9년에 태어났다.

장군의 관향(貫鄕)은 안동이며 자를 면오라 불렀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기골이 장대하여 대장의 제목으로 자랐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병정놀이를 좋아했으며 동네 큰 아이들이 많이 있으나 언제나 대장이 되어 지휘하였다. 나이 많은 아이들도 휘하에 넣어 복종하게 하는 억지가 있었다. 장군이 8살 때 길가에서 마을 아이들과 병정놀이를 하고 놀았다. 이때 마침 원님행차가 지나가려 하는데 병정놀이를 지휘하던 소년 하나가 나서며 "아무리 병정놀이라고는 하지만 대장이 군졸을 지휘하는데 진중을 마구 지나갈 수가 있는가"하며 목검을 짚고 호령하였다. 이때 군졸별매가 "네 이놈 사또 행차인데 어린놈이 앙탈이냐 썩 비키지 못하겠느냐"하며 호령하니 "내 놀이 대장이긴 하나 한 고을 사또가 감히 진중을 통과할 수 있느냐"하며 조금도 기가 꺾이지 않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원님이 말에서 내려 어린 대장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큰 재목이구나"하며 길을 비켜 지나갔다. 마을에 들려 대장 아이의 아버지를 찾으니 김충갑 선생이었다. 원님은 "저 귀여운 아드님이 큰 재목으로 성장할 것입니다."하며 극구 칭찬하였다. 그 원님도 사람의 싹을 알아보는 지인지감이 있는 훌륭한 사람이었다. 원님을 말에서 내려 비켜가게 한 이 소년의 일화는 이밖에도 상당히 많다. 그 중 하나 더 소개하면 이 소년이 9살 때의 일이다. 이 소년이 살고 있는 현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잣밭동리 어구를 백진천이 굽이돌아 흐르고 있다. 이 백진천 천변에 바위가 있으며 물에 잠긴 바위 속에 큰 굴이 하나있다. 이 굴속에는 큰 이무기 뱀이 살고 있었는데 수시 출몰하여 사람을 놀라게 하거나 가축에 해를 끼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무기가 무섭다는 소문이 돌아 동리 사람들이 발길을 못하는 등 공포감을 자아내어 심리적 피해가 있어 적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는 이 이무기를 신성시까지 하여 고사를 지내는 이도 있었다. 이때 장난꾸러기 소년 김시민은 이무기를 퇴치할 궁리를 하였다. 그가 뽕나무 활에 쑥대 화살로 뱀을 쏘다 잡는다는 고사를 읽고 내가 동네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 넣는 저 뱀을 잡아 보겠다고 결심하고 집안에 전해오던 활과 살을 가지고 이무기 바위 근처에 나타났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이무기가 물위로 떠오르지 않아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김소년은 다시 마을로 가서 동접 소년들을 데리고 바위 근처에 와서 그들에게 "너희들이 저 바위 위에 올라가 놀고 있어라, 그러면 이무기가 너희들을 해치려고 나타날 것이다. 그때 내가 활을 쏘아 이무기를 잡을 테다"하며 마을 소년들을 재촉하였다. 그러나 공포에 질린 소년들은 좀처럼 이무기 바위에 접근하려 들지 않았다. 김소년은 화를 버럭 내면서 "내 동리의 우환을 덜려고 하는데 너희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너희들부터 활을 쏘아야겠다"하며 위협하니 아이들이 거역하지 못하고 바위에 올라갔다. 이윽고 이무기가 사람의 냄새를 맡고 고개를 물위에 내놓고 아이들을 노려보았다. 이때 아이들이 기겁을 하여 바위에서 굴러 떨어지는 순간 활시위 소리가 나더니 화살이 날아 이무기를 명중시켰다. 연거푸 화살이 날아 이무기를 드디어 물 속에 가라앉고 말았다. 이무기 몸에서는 피가 흘러 냇물이 사흘이나 뻘갰다고 전한다.

9살난 소년이 동네의 우환을 제거하고 사람들이 편하게 통행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하찮은 미물 짐승을 신성시해 적지 않은 피해를 입는데 대한 경각심을 주어 미혹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이 소문이 인근 부락까지 널리 퍼져 큰 인물 났다는 칭찬 소리가 자자하였다. 장군은 문반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조국의 우환을 구하는 것은 무관이어야 한다는 굳은 신념아래 주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선조 17년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장군은 무과에 급제하자 훈련원주부를 제수 받아 봉직하였다.

장군이 부임해 보니 군기(軍器)는 녹슬고 군기(軍紀)는 해이하여 일조 유사시에는 쓸만한 병장기와 쓸만한 군인이 없음을 개탄하여 마지않았다. 조선 왕조 창업 200년이 다가오자 조야가 모두 문약에 흘러 무사와 안일을 바랄 뿐 보국안민의 경륜을 펴고자 하는 이가 없었다. 태조 창업으로부터 선조에 이르기까지 북변에 소규모의 침경을 받아 국경이 소란한 때는 여러 번 있었으나 백성이 모두 근심할 만한 국난은 아니었다.

이렇게 태평성대에 나약해진 군대는 국가의 위의를 갖추는 구색에 불과한 존재였다. 이를 본 김시민 장군은 이대로 두었다가는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들어 국방의 최고 책임자인 병조판서를 찾아 뵙고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소관이 훈련원에 몸담아 보니 군기가 녹슬고 군인이 해이합니다. 이 상태로 두었다가 국가에 변란이라도 있으면 속수무책이 될 터이니 대책을 강구하여야 하겠습니다」라고 공손히 사뢰었다. 이 말을 들은 병조판서는 「그대는 지금같이 태평성대에 군기를 보수하고 훈련을 강화하라니 올바른 정신으로 하는 소리인가 만약 훈련원 군사들을 조련하고 병장기를 만들면 백성들을 두려움 속에 몰아 넣는 결과가 되리니 망언이로다…」하며 젊은 혈기에 분별없는 소리를 한다고 질타하는 것이다. 김장군은 사리를 따져 간곡히 건의하였으나 병판은 조금도 굽히지 않고 질책으로 일관하였다.

김장군은 올바른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뿐더러 젊은 혈기의 철없는 소리라 하여 도리어 수모만 당하자 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서며 군모를 벗어 병조판서가 보는 앞에서 발로 짓밟아 버리고 나서 사직서를 써 던지고 훌훌히 일어섰다.

그 길로 벼슬을 버리고 강호에 낙척하여 여러해 동안 불우한 세월을 보냈다. 그 후에 다시 벼슬길에 나가서 군기시 판관이 되었을 때 정승 이헌국이 공을 보고 「국가에 특이한 그릇이 되리라」하고 임금께 천거하여 말하되 「외부에는 보내지 말고 내직으로 머물게 하였다가 사태를 봐서 급한 대로 쓰소서」하였고 정승 정언신과, 중봉 조헌같은 분들도 「김 아무개는 적을 방어하는 지모방략이 명중에도 으뜸이다」라고 하며 천거하였다. 그후 1590년(경인- 庚寅)에는 진주 판관으로 나가게 되었다. 이 진주 고을은 12년전에 공의 숙부인 제갑께서 진주목사로 와서 특수한 행정적 공로가 많아서 고을 백성들이 항상 사모하던차 그 조카가 판관으로 온다는 말이 전해지자 「김사도의 조카가 온다니 걱정이 없구나」하면서 모두들 기뻐하였다 한다.

공이 부임하여 행정의 공평정대 함이 먹줄과 같고 덕의를 베풀어 위엄을 세우니 예하 장졸과 관속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은덕에 감복하면서 평화스럽게 지낼 수 있었다.

공이 부임한 지 2년후인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때 소서행장은 종의지. 평신조 등을 거느리고 선봉이 되어 바다를 건너서 곧바로 부산을 함락시켰다. 그 때가 1592년 4월 12일 이었다. 그 다음날 아침에 왜병은 다시 동래로 들어가서 부사 송상현을 죽이고 그들은 승승장구하여 닥치는 대로 무찌르면서 노략질을 하는데 밀양 부사 박진이 중간 길을 끊으려다가 중과부적으로 막지 못하고 장수들이 모두 도망해 버려 그 흉봉을 막을 자가 아무도 없었다.

이러한 시기에 진주목사 이경이 마침 죽으니 순찰사 김성일은 공으로 하여금 "고을 일을 맡아서 목사의 직무를 이행하고 왜적을 막으라"고 명령하였다.

이리하여 공은 무기를 수리하고 군사 천여명을 수습해서 고양군수 이광악과 더불어 부대를 나누어 성을 지키고 있었다. 이를 본 도순찰사 김수의 말이 「진양은 성지가 견고하지 못해서 지키기 어려우니 영산으로 가서 그곳의 싸움을 도우라」함으로 공은 경기병 천여명을 거느리고 영산으로가 작원에서 적을 맞아 싸워 무찌르고 도망치는 왜놈의 장수를 베어 죽였다.

그러나 전봉사 윤탁, 함안군수 류승인이 거느린 백여명이 다 죽었고, 류승인은 홀로 살아 남아 강물에 뛰어들어 헤엄을 쳐서 간신히 위험한 왜군 진중을 벗어나 공을 찾아 왔는데 공이 의복을 갈아 입히고 함께 싸울 것을 약속하였다.

이때 순찰사가 하는 말이 「적은 이미 고성 쪽으로 향했다 하니 속히 가서 막아 길을 끊으라」하였다. 이에 공이 관군과 김대명이 모집한 병졸을 거느리고 바로 달려 고성을 향해 가는데 적은 이미 유리한 지점을 검거하고 있어, 전진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할 수 없이 후퇴하여 진주로 돌아오니 이미 있던 군사가 사방으로 흩어 졌다가 공이 돌아옴을 보고 다시 모여들었다. 공이 다시 사졸과 더불어 사수할 계획을 세웠는데 사천을 점령한 적병이 진주를 범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전병사, 조대곤, 사천현감 정득렬, 칠원현감 이방좌, 함안군수 류승인 등으로 천여명을 거느리고 바로 성밑에 이르렀다. 적은 벽이 견고하여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이튿날 진군하여 십수교에서 오리쯤 되는 곳에서 적을 만나 군사들과 같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적을 수없이 죽였다. 적이 물러가기에 이를 추격하다가 돌아왔다. 이때부터 사졸의 힘이 배가되었다.

공은 모든 군사와 더불어 고성의 적을 칠 약속을 하고 정예병을 뽑아 진주의 남쪽 영선현에 진을 치고 진군으로 하여금 수건을 물게 하여 소리를 죽임으로서 적에게 발견됨을 피하고 대둔령을 넘어 새벽에 이르러 큰 고함을 지르고 활과 총을 쏘았다. 이리하여 적은 죽은 병사가 많아 부칠 곳을 찾지 못하고 달아나 병영으로 들어갔다. 공이 승리의 기세를 타고 포위하였지만 적들은 어두운 밤에 가만히 도망해 끝까지 섬멸하지 못하였으나 공의 뛰어난 전술은 적에게 널리 알려져서 김충무공이 지키는 지경에는 감히 왜병이 얼씬도 못했다.

그래서 함장, 지례, 선산, 김해, 창원, 진해에는 적이 감히 침입하지 못하였고 더욱이 진해에서 적장 평소태를 사로잡아 판윤 김수에게 보내서 행재소로 치송하였다. 평소태를 생포하여 행재소로 압송되자 조정 상하의 사기가 일신하여 우리도 왜군을 격퇴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그리하여 공은 이번 공로로 통정대부 진주목사에 제수 되었다. 이때 의병장 김면이 거창을 지키고 있는데 여러 방면에서 적의 합세 공격을 당하다가 공이 사기를 크게 올렸다는 말을 듣고 와서 도와줄 것을 청하였다. 공은 이 청을 듣고 바로 정병 천여명을 인솔하고 거창으로 달려가서 김면과 더불어 금산의 적을 격파하고 드디어 적의 목을 수십금을 베었으며 그 다음날에도 다시 나가서 많은 적을 사살했다. 이 전쟁에서 공은 발에 칼을 맞아 부상을 입었다.

김면이 공의 부상을 슬퍼하고 울었다고 전한다. 적이 대군을 몰고 다시 지레의 사랑암을 지나려 할 때 면이 달리는 말에서 칼을 휘두르면서 공에게 하는 말이 「나라에서 특진으로 공을 대우한 것은 바로 이러한 때에 쓰라는 것이니 이제 죽음으로서 생을 마칠 것이며 물러서면 안 된다」고 하였다. 이에 공이 말을 달려 적을 쏘아 죽이니 모든 군사가 소리치며 덤벼 적을 퇴각 시켰고 개령과 금산의 적은 공의 위풍만 듣고도 서로 뒤이어 물러갔다.

9월 24일에 이곳 부근 십여읍에 주둔하고 있던 적은 합세하여 세갈래로 부대를 편성하고 노현의 아군을 습격하였고, 창원부를 침범하여 부사 류승인이 재차 패하여 죽은자가 8,599여명이나 되어 군심은 실망이 가득했고 사민은 풍지박산이 되었다. 적의 무리는 승세를 타고 회오리바람처럼 몰아쳐 왔다. 이리하여 11월 2일에는 함안을 함락시키고, 초3일에는 왜적의 선봉 기마병 수만이 길을 나누어 진부로 향해왔다. 적은 마령을 넘어 불천을 돌아 바로 진양을 무찌르려고 진주의 동쪽 봉우리 위에서 형세를 살피며 기치창검을 휘날리고 있었다. 적군은 김시민 장군을 꺾고 진양(진주)을 장악하여야 경상도를 지배하고 호남으로 진출할 수 있다는 계산에서 진주성 총공격이 개시된 것이다. 이때 공이 영(令)을 내려 말하되 「누구나 왜적을 보더라고 안본 체하고 탄환 하나 화살 한 개라도 헛되게 쏘지 말라」하고 적이 바로 볼 수 있는 곳과 또는 성안에서 통해 볼 수 있는 곳에 용대기를 세우고 많은 포장을 치고서 성안에 있는 남녀 노약자들에게 모두 남복을 시켜 군세의 웅장함을 보여주며 성세가 강함을 적에게 보였다. 또한 날래고 건장한 사람을 뽑아 산 위에 올라가게 하여 바라본 즉, 왜적 수만명이 고을의 동쪽에 있는 임연대에 진을 치고 대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11월초 6일 아침에는 일찍부터 적이 대탄으로부터 기마를 몰고 일시에 달려오는데 어떤 자는 긴 자루의 금부채를 휘두르고, 어떤 자는 흰 바탕에 황금색이 박힌 부채를 짊어지고 달려오며 또 갖가지 깃발을 바람에 휘날리며 쳐들어오는데 움직이는 그 광채가 귀신의 불 같이 반짝이었다. 갑주투구도 형형색색이어서 게우관을 쓰고 있는 자 피발가면을 쓰고 있는 자가 온갖 깃발을 등에 지고 오는데 그의 수효는 헤아리기조차 어려웠다.

침략해 오는 살기가 하늘까지 치솟고 기형과 이상이 사람의 눈을 놀래고 현혹하게 하였다. 이러한 부대가 세갈래로 오는데 한 부대는 동문밖 순천당에 진을 치고 성중을 내려다보고 또 한 부대는 개경문으로부터 동을 지나 봉명루 앞에 나열하고 또 한 부대는 향교 뒷산에서 바로 순천당산을 넘어 봉명루 아래에 있는 적으로 하여금 합세하여 한 진이 되고 그 밖에 각 봉우리에 둘러있는 적은 개미나 벌떼처럼 모여들었다. 장왜(將倭) 수백 명은 모두 흑색 훗옷을 입고 쌍견마를 타고 창과 칼을 가진 자가 앞뒤에 응위해 섰고 흰 장삼 같은 옷을 입은 여인들도 쌍견마에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순천당의 적의 수효도 수만 명이라 할 수 있었다. 이렇게 포진한 적이 성을 향하여 일제히 총을 쏘는데 그 소리가 우레와 같고 날아오는 탄환이 우박같이 쏟아졌다. 수십만의 왜병이 일시에 고함을 쳐 천지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성안에는 요동이 없으니 조용하기가 마치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적의 세력이 누그러지고 태만해져 큰소리로 외치면 밤이 다하도록 경계를 엄중히 하였다. 날이 밝자 성밖에서는 왜놈들이 큰 소리로 「경성이 이미 함락되고 팔도의 병력이 모두 해산하였는데 이제 진주성만 포위하고 있으니 어느 누가 어떻게 지킬 것이냐? 속히 항복하는 것이 상책이리라. 이제 개산 대장이 오면 너의 장수의 머리를 우리 깃대에 달 것이다」하고 외쳤다. 이에 성안 사람들이 분개하여 큰 소리로 꾸짖고자 하였다. 공이 이를 말리고 이튿날 대나무와 소나무 등을 베어 책을 두르고 성 위에서는 진천뢰와 같은 질려포를 쏘고 큰 돌멩이를 모았다가 성에 육박하는 적에게 굴리고 던져 적을 쳤고 도끼나 낫을 준비하였다가 산대를 배회하는 적을 파멸하였다.

또한 성안에서는 큰 가마솥을 준비하여 물을 끓여 적에게 뿌려 고개를 못들게 하고 풀로 허수아비를 만들어 활을 잡고 당기는 모양을 하게 하여 군대가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그때 성밖에서는 왜놈들이 흙을 쌓아 올려 진루를 만들고 있었다. 이를 본 공은 친히 현자총을 쏘아 적을 연발 명중 시켰으니 적이 놀래어 물러갔다. 그 후 초8일에는 적이 다시 몰려와 종일토록 쉬지 않고 방포를 하였다. 이때 공이 현자전으로 대항하였는데 그 위력이 어찌나 세었던지 죽편을 뚫고 다시 나무판자를 뚫은 후 적의 가슴에 꽂혀 절명케 하여 적들이 감히 산허리를 돌아 공격하지 못하였다.

초10일 사경이 되자 적군 수만 명이 별안간 육반전으로 동문시성을 향해 쳐들어오는데 긴 사다리를 메고 오는 놈, 방패를 지고 오는 놈, 또는 향교의 제기를 뒤집어쓰고, 혹은 멍석을 잘라서 머리에 쓰고, 시석을 피하면서 삼층가면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높이 들고 수만의 군사가 돌진하면서 총을 쏘는데 총알이 비오듯하고 그 소리가 우뢰와 같았다. 이때 공은 동문 북격대에 있으면서 태연한 자세로 진천뢰와 질려포를 쏘고 큰돌을 굴리며 화철을 던지고 혹은 끊인 기름을 마주 붓고, 혹은 끊는 물을 들어부으니 적이 화철을 밟고 활의 세례에 맞으며 불과 돌에 맞아 죽으며 머리가 타고 이마에 화살을 입은 자 수없이 많았다. 동편에서 이렇게 교전이 벌어지는 동안 한 부대는 북문 밖으로 돌격해 오는데 비호와 같아서 막을 자 없었다. 이에 공이 전만호, 최덕량, 군관 이술 신사복으로 하여금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막게 하였다. 적군은 다시 동문으로 진을 옮겨 격전했지만 얼마 후에 적세가 크게 무너져 물러갔다. 이때 패전한 왜병 우시등원랑은 그렇게도 참혹한 패전을 분개한 나머지 화가 치밀어 도중에 죽었다 하였다.

이 대첩이 진양만을 보전한 것이 아니라 호남, 호서의 내포가 모두 안전하였고 국가 중흥을 위한 군량과 무기가 모두 호남, 호서에서 반출되었으니 이야말로 국운의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진주전에서 왜군이 참혹한 학살을 자행한 것은 제1차 진주전의 보복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진주전의 전황은 경황 중에 자세히 기록해 둔 사람이 없어 조정에 바로 알려지지 않아 처음에는 전공을 사실대로 평가받지 못하였으나 차차로 참전자들의 단편적인 기록이 수집되어 백년 후에야 참다운 평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 단편적인 기록들이 수효에 있어 좀 과장된 점이 없지 않다. 만산 편야 덮어 오는 적을 수십만으로 표현한 것은 무리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후일 왜군 측 기록은 2만의 사상자를 냈다고 하였으니 이 기록대로만 하더라도 왜군의 최대손실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김시민 장군의 진주전이 임진전란 중에 제일 큰 전승인 것만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공이 이로 말미암아 경상감사 김성일의 장계에 의하여 가선대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진주목사를 겸하게 되었다. 공이 승리를 거두던 날, 성안을 순회하면서 검시를 하는 중 왜적 한 놈이 쌓인 시체 속에 숨었다가 총을 쏘아 공의 왼쪽 이마에 명중되어 곤양군수 이광악에게 적을 방어할 계획을 지시하고 관사로 돌아왔다. 관사에 와서 누워있던 공은 벌떡 일어나면서 「내가 적탄을 몸에 지니고 죽을 수는 없다」하며 나무못으로 빼게 하고 아우 시양을 불러 「네가 나의 일을 맡아 군무를 대행하다가 후임자가 오거든 발상하라」 이르고 눈을 감으니 향년 49세이고 임진 12월 26일이었다. 이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병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선조께서는 크게 애통해 하였다. 공이 크게 승리를 거둘 때는 경상도가 다 흩어져서 당시의 광경을 본 사람이 없어 분명한 기록이 없었으며 행재가 멀고 길이 끊어져서 장계가 조정에 올라가지 못했다. 그 충렬의 실적과 공훈을 자세히 올리지 못하여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있다가 난이 끝난 후 13년인 을사에 와서 임진년의 공신을 책훈 할 때 효충 장의 협력 선무공신 2등에 상락군을 봉하였다. 그후 전승의 실적이 나타남에 따라 백사 이항복의 말이 임진왜란에는 김시민의 공이 제일 크다고 칭찬하며 이정암과 동등하게 포상한 것은 잘못된 일이라 하였다.

이정암은 임진왜란때 문신으로 개성방어에 공을 세운 사람이다. 당시 김시민장군의 공로가 바로 전해지지 않아 이정암과 동등한 공로로 평가한 사람이 많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담 김시양은 당시의 삼대첩에서 노량의 이순신 다음으로 높은 공을 세웠다고 하였는데 혹은 김시민의 진주의 공이 이충무공 이상의 공이라고 찬양하는 이도 있었다. 당시에 의주까지 몽진하여 천리 밖의 진주 일을 자세히 듣지 못하여서 1등으로 책훈하지 못한 것이 아쉬운 일이다.

후일에 국사를 기록하는 사람들이 서로 논쟁하여 오다가 110년만인 숙종 조에 와서 비로소 영의정인 녹천, 이유의 장계에 의하여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상락부원군에 봉하게 되었으며 충무공의 시호와 시장이 내리었다.

이리하여 임진왜란의 책훈공신 18명중에 최고의 증직이 내린 것이다. 김시민 장군의 공적이 그때서야 인정을 받게된 것이다. 따라서 부조의 대우에도 마음을 써 김공의 부친 김충갑은 보조공신좌찬성 상락군에 봉해졌으며 조부 김석은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또한 논공행상이 숙종때 이루어진 관계로 이미 세월이 흘러 당시 김시민 장군의 후손은 고손 김가교의 생존시였다. 다정다감한 숙종은 김시민 장군의 전공에 깊은 감명을 받아 후손에까지 은전을 베푸니 김시민 장군의 자제 김치는 이미 행직으로 동래부사와 경상감사를 역임하였으며 청백리로 뽑히어 본인의 현직으로도 족한 분이며 손자 김득신은 우리나라 8대 문장으로 손꼽히는 대문장가로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방랑을 좋아하여 벼슬이 높지 못하였다. 조정에서 김득신을 안풍군으로 습봉하고 가선 대부로 증직하였다. 만약 일찍 선조대에 논공행상이 제대로 이루어져 숙종때 재론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4대 습봉의 영전이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조정에서는 특별 사면권을 주는 철권을 내려 후손을 더욱 돈독히 예우하였다. 국가의 공신을 이렇게 예우한 사례도 전무후무한 일이다.

그리고 충무공하면 이순신 장군을 연상하는 이가 많으나 충무공은 무인으로 국가에 몸과 마음을 받쳐 헌신하신 분에게 내리는 시호로 조선시대에 아홉 분이 충무공의 시호를 받았다. 따라서 충무공이 이순신 장군을 지칭하는 고유 명사가 아니므로 충무공 이순신, 충무공 김시민등으로 바로 호칭을 해야 할 것이다.

또한 후세 사람들이 김시민 장군의 공적을 흠모하여 사우를 여러 곳에 세웠는데 진주의 충민사, 괴산의 사우, 목천의 사우등인데 목천사우는 훼철된 후 오늘까지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10여년전부터 윤치영을 회장, 김재호를 위원장으로 하는 김시민 장군 기념 사업회가 발족되어 독립기념관에 어록비를 세우는 등 활발하게 사업을 전개 중에 있다.

 

 

◐2.   김응명 일가   
    
김응명은 자는 시보요 본관은 강릉이다. 목천에서 대대로 살아왔다. 마침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감역으로 출사하고 있었다.

부친 광렬은 이조참판으로 선조 임금을 호가하였다. 광열의 아들 삼 형제가 모두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장자는 철명이오 중자는 순명이며 끝 아들이 응명이다.

도중에 적을 만나 조관의 복장을 한 광렬을 보자 왜군은 살해하고자 하였다. 적수관원인 이들 문관출신 사부자는 대항할 길이 없었다. 적의 공격이 부친에게 향하자 철명과 순명이 아버지를 가리니 무도한 왜군은 삼부자를 일격에 살해하고 말았다. 이 광경을 목격한 응명이 대항하자 왜군이 또 응명마저 죽이려 하였다. 이때 노왜가 만류하여 일가를 멸문하는 것은 병가의 꺼리는 바라 하였다.

살아남은 응명은 삼부자의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으로 돌아오니 난시에 이만저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모친 성씨는 남편 광렬의 흉사를 전해듣고 자결하여 하종 하였다. 그후 세월이 흘러 정유년이 되자 왜군이 재침하였다.

응명은 부친과 형들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많은 의병을 모집하여 남원으로 향하였다. 도착해 보니 이미 남원은 함락되어 내외 접응이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다. 응명은 접응하는 세력이 없이 적을 치다가는 무고한 희생만 치르므로 의병을 거두어 돌아왔다. 정유재란은 남원을 고비로 왜군이 철군했으므로 김응명의 병정은 전투다운 전투는 하지 못하였다.

그후 응명이 고창현감으로 부임하여 많은 치적을 올리었다. 그후 조정에서는 충효열을 구현한 가문이라 하여 정문을 내리고 증직의 영전을 베풀었다.

응명은 자식을 잘 훈도하여 모두 문한으로 이름을 날리었으니 조카 외에 형 순명이 부제학에 이조참판이 되었다. 기종은 정묘호란 때 원수로 출전하여 큰공을 세웠으며 응명의 장자 익종은 광해군의 혼정에 분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온 기개 높은 인물이다. 손자 만중은 세마로 학문이 높았다. 다음 차자 찬종과 손자 만강과 만정, 증손 일청, 현손 운경이 모두 사마 급제하여 진사 풍년이 들었다.

이 모두가 응명이 닦은 공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향리의 부러움을 샀다.
※ 대록지에는 기종이 정묘호란 때 도원수라 하였으나 이괄 난의 종사관이 옳은 듯하다.

 

 

◐3.   김인복과 조계남   
  
임진왜란의 7년 풍진에 공을 세워 각종 공신에 봉해져서 영예가 후세에 빛난 이들이 수없이 많이 있으나 대부분 현관이거나 양반 선비들이 녹훈되었지 간뇌도지(肝腦塗地)한 하졸과 이서와 백성의 진충보국한 공은 제대로 포상이 이루어지지 않아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조선시대는 신분사회라 공적에 대한 논공행상에서 신분을 기초로 하므로 같은 공적이라도 신분고하에 따라 상작이 달랐다. 천인이 큰 공적을 세우면 상훈이 고작 면천과 급복에 그치고 사인이 공을 세우면 작품을 내리며 사대부는 봉군하는 등 많은 차별이 있었다. 그러나 한시대의 국난을 극복할 때 허구 많은 사서인의 희생이 뒷받침한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임진왜란시 왜군은 동래에서 상륙하여 파죽지세로 서울을 향하여 진군하였으므로 주역이 현재의 충청북도를 통과하여 북상하였으나 우리 고장에도 왜군의 말발굽이 미친 곳이며 관군과 의려가 빈번히 왕래한 곳이라 군량의 조달과 통신의 편의를 조달하기 위하여 매우 소중한 지역이었다. 특히 정유재란 때는 우리고장 직산현과 평택사이에서 큰 전투가 벌어져 왜군의 예봉을 겪었으니 소사전투로 불리우는 큰 싸움이다. 육전에서 삼대 전첩으로 꼽히는 큰 승첩이었다. 임진 정유의 양난 때 직산현의 이서인, 김인복과 조계남이 난리가 일어나자 전후 좌우로 수응하여 임기응변으로 잘 대처하여 국난을 극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김인복과 조계남은 같은 이서 동료로 교분이 두터운 사이였으며 두분 모두 지려가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임진란에 수령 방백들이 난리가 나자 손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무너진 곳이 많았다. 그래서 수령들이 파직되는 사례가 많았으나 직산현감은 모두 큰 공적으로 영진 하였으니 이서인 김인복과 조계남의 도움에 힘입은바 컸었다.

김인복은 직산현에서 여러대 아전으로 복무한 세리 가문에서 태어나 숙명처럼 직산현의 아전이 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큰그릇의 제목이었으나 중인으로 태어나 아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임진란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성실껏 소임을 다하여 능숙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임진년에 선조 임금이 의주로 파천하신 후 수륙양로가 모두 적병에게 막혀 통신할 길이 없었다. 이때 충청도 관찰사 허욱이 장계를 의주행재에 올리고자 하나 적진을 뚫고 가서 진봉 할 만한 인물을 구하지 못하였다. 사람마다 두려워서 감히 간다고 하는 자가 없었다. 마땅히 관원이 가야 하나 모두 그 소임이 자기에게 떨어질까봐 몸을 사리는 이도 있었다. 또한 이 어려운 일을 맡아 할만한 사람도 쉽게 물색되지 못하였다.

이때 동료 조계남이 김인복에게 말하기를 나라를 향한 성의는 어찌 현우와 귀천의 사이가 있겠는가. 내 생각컨데 그대의 충성심과 용기로 보아 장계를 의주행재에 전달하고도 남을 능력이 있으니 이번에 의주에 다녀옴이 좋겠다고 권하였다. 조계남은 이어서 그대가 의주에 가서 양호의 적정을 알려드리면 그 동안 고을 일은 내가 그대 몫까지 해낼 터이니 어서 떠나도록 하라고 권하였다. 조계남의 간곡한 부탁에 감동한 김인복은 쾌히 응락하고 감사에게 의주 가기를 지원하였다. 감사 허욱은 김인복 같은 훌륭한 인재가 자원하니 기쁜 마음으로 장계를 써 주었다. 김인복은 처음은 육로로 의주에 가려 하였으나 곳곳에 왜군이 흩어져 있으므로 갈 수가 없어 해로를 택하기로 하였다.

해로라 하더라도 큰 배로 편하게 의주에 갈 수는 없었다. 그만한 장비가 없을 뿐 아니라 해로에도 적군이 출몰하므로 우선 경양포에서 출발하여 작은 배로 섬과 섬으로 건너가서 강화에서 머무르다가 다시 해로로 의주에 도달하였다. 천신만고 끝에 의주에 이르러 장계를 탑전에 바치니 임금과 조정대신들은 감감하던 양호의 소식을 전해 듣고 매우 기뻐하였다. 그뿐 아니라 도주에 마련한 마랑까지 헌납하니 조정에서는 궁색한 판에 아주 반가워하였다.

이곳에서 마량이라 함은 말먹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겉보리를 말하는 듯 하다. 옛적에는 마량이라 하여 겉보리를 거두는 일이 있었다.

선조 임금은 김인복이 도착함을 듣고 친히 인견 하시고 어려운 일을 수행하였다 하여 상찬의 말씀을 내리고 직접 양호의 소식과 민정을 두루 물으시었다.

인복은 양호의 소식과 오는 도중에 겪은 일들을 소상히 아뢰어 참고하시도록 하였다. 선조께서 가상히 여겨 향역을 면케하시고 군자봉사를 제수하시니 크나큰 특전이었다. 김인복은 중인의 신분에서 품계를 가진 반열에 올랐으나 겸손한 본 마음은 항상 간직하였다.

그후 새로운 직책 때문에 향리에 돌아오지 못하고 계속 의주에 머물러 복무하였다. 그러나 그 후 3년여의 세월동안 활약상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알 길이 없다. 장계를 바친 후 삼 년 뒤에 군관이 되어 전라도 남해로 내려가 탐라도에 드나들며 활 재료를 수집해 군비를 충실히 하였다는 기록이 있을 따름이다.

직산현지에 따르면 선조 병신년(1596)에 남해현령 박대남의 군관이 탐라도에 가서 활 재료를 수집해 왔다고 하였다.

김인복이 군자봉사를 제수 받았으니 궁재를 수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요, 군자봉사는 종8품관이니 정6품관인 현령의 휘하에 있었다는 것은 사리에 맡는 일이나 군관이 되었다는 것은 의문이 가는 일이다. 어떤 일로 그의 휘하에 들어갔는지는 전혀 알 길이 없다. 장계를 봉정할 때 해로로 간 경험으로 미루어 제주도 해로를 이용하는 궁재수집의 소임을 맡긴 듯하다.

김인복은 낮은 품관으로 동분서주 하다가 왜군도 일단 철수하여 군무가 한가로와 지자 꿈에도 그리던 고향 직산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선조 27년 정유(1527)에 향리로 돌아오자 이내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이번 정유재란은 임진년 침입 때와 달리 왜군은 호남 곡창을 욕심 내어 전라도에 침입하여 호남이 적의 철제하에 들어갔다. 남원에서 직산현 출신인 이덕회장군이 절사한 것은 이때의 일이다. 정유재란 때에는 왜군이 서울까지 점령하지 못하였으나 삼남은 매우 소란하였다. 우리고장 직산현의 소사들에게 임진 정유의 3대육전으로 꼽히는 소사 전투가 벌어져 대승리로 장식하였으나 전쟁을 치른 직산, 평택 지방은 관가민옥이 모두 파괴되어 황폐하게 되었다. 이 소사 전투때 직산현을 위시한 인근 제읍에서 군량 조달에 매우 어려움을 겪었으나 직산 일읍은 좌우로 책응하여 궐함이 없었다. 이 모두가 김인복과 조계남 같은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난리에 직산 고을은 왜적의 침공을 받아 공용문서가 모두 흩어졌다. 아무도 거두는 이가 없었다면 소멸하고 말았을 것이다. 이때 김인복이 집에 돌아와 있다가 이제는 이서는 아니지만 직접 나서서 흩어진 문서를 거두어 모으고 불탄 것은 두루 염탐하여 기록으로 남기니 직산일읍의 맥이 다시 이어졌다.

김인복은 왜란이 끝난 후에도 고향 직산에 살면서 향역을 면하고 품계를 얻었으나 항상 변함없이 옛 마음으로 향리를 위하여 헌신 봉사하였다. 김인복을 의주 행재로 보내고 직산현의 난리 뒤치닥거리를 혼자 맡아 한 조계남은 이 고장에서 대를 이어 살아온 명문이었다. 조계남은 직산 조씨이며 백제 창업 공신 계백성 조성의 후예로 대대로 직산의 거족이었으나 조계남의 조부대에 이르러 가문이 영락하여 향역에 종사하게 되었다. 조계남은 어려서부터 총명한 기질로 대성할 재목이었으나 세습제인 아전이 되고 말았다. 조계남은 충직한 성품이라 그릇이 맞지 않는 구실을 맡았으나 항상 충실하게 소임을 다하였다. 군자봉사 김인복과는 쌍벽을 이루는 명리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서울을 점령할 때 왜군은 충북에서 경기도로 진입하여 서울로 진군하였으므로 천안, 직산이 주통로는 아니었으나 왜군이 간단없이 출몰하여 많은 곤혹을 치렀다. 이때 감사 허욱이 직산까지 와서 더 갈 수 없으므로, 삼남의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인재를 구하던 중 조계남의 천거로 김인복을 의주에 보내게 된 것이다. 조계남은 고향 직산을 지키며 최대 역량을 발휘하여 소임을 다하였다. 직산현은 삼로의 요충지로 왜군이 진퇴하는 길이 되고 거점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명나라 장졸이 수시로 왕래하였으며 본도의 순찰사와 병사와 삼남의 관군과 의병이 모여들어 크고 작은 충돌이 빈번하여 편할 날이 없었다. 이때마다 조계남이 동서좌우로 뛰어 군량을 조달하고 숙영을 도와 전쟁 수행에 큰 기능이 되었다. 당시 전란으로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하여 백성이 굶주리는 형편에 군량미를 내놓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노릇이다. 그러므로 다른 고을의 관원과 이서는 강제로 약탈하다시피 하였으며 백성도 빼앗기지 않으려고 모두 감추어 군량미 조달이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조계남은 비록 이서의 신분이지만 백성의 신뢰를 받고 있기 때문에 조계남의 말은 백성이 거절하지 못하여 당시 가장 어려웠던 군량이 조달을 무난히 해냈다.

따라서 직산 고을을 거쳐간 많은 조관들의 그의 인품에 크게 감동하여 「만산이 모두 고사목(枯死木)뿐인데 한 그루 푸른 나무가 있으니 바로 조계남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직산 고을의 관리 백성이 모두 피난하여 고을이 비어 있을 때도 조계남은 고을을 떠나지 않고 지켰다 한다. 이때 지인으로 있는 이응명과 관로 언향이 조계남과 함께 고을을 지켰다고 전한다. 한 고을에 허다한 선비가 있었지만 중인 신분과 이서와 지인 관로만 못하였으니 한탄스럽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지인 이응명은 중국어에 능하여 명나라 장졸의 접반에 임기응변으로 대처하였다. 훌륭한 민간 외교인으로 국난극복의 일익을 담당했다 할 수 있다. 또 한때는 현감이 관인을 잘못 간수하여 분실하고 말았다.

이에 조계남이 현감을 안심시키고 조정에 예물을 바치고 동인을 개주하여 현감의 문책을 모면하게 하였다. 이 관인은 한일합방으로 직산현이 폐지될 때까지 사용하였다 한다. 이와 같은 눈부신 활약으로 나중에 직산에 부임한 현감들이 공적을 인정받아 모두 영진하는 기회를 얻었다. 이웃 고을 목천현은 상하수미가 맞지 않아 5대의 현감이 재임 1년을 채우지 못하고 파직되었으나 직산현은 여러 현감이 영진하여 큰 대조를 이루었다. 그 사실로 선조 24년에 부임하여 선조 27년에 홍주목사로 부임한 박선은 김인복이 의주에 가서 현감을 극구 옹호한 덕과 조계남의 유능한 보좌로 이룩된 영전이라 할 수 있다. 종6품 현감에서 정3품 목사에까지 일약 승진한 것은 전시체제가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음에 부임한 이신의는 정유재란시 소사 전투를 겪고 난 후까지 재직하여 과만 후 일년을 연장하여 재임하다가 떠났다. 이 현감은 재직시 공로로 고을 선비들이 주선하여 선정비를 세웠다. 그러나 조계남은 살아 생전에 아무런 은전을 받지 못하였으니 후세 사람들이 모두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의 후손들의 말에 따르면 후세에 복호의 은전을 입어 향직을 면하고 사인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임진 정유왜란시에는 수많은 장수와 관원의 휘하에서 목숨을 바친 무명의 병사와 고심 전력한 분들이 허다 하나 양반 신분이 아닌 사람의 공적은 모두 인멸되어 상고하기조차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김인복과 조계남, 이응명의 사적을 발굴하여 임진국난에 중서 신분의 사람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음을 상기 하고자 하는 바이다.

 

 

◐4.   김충갑  
    
  김충갑은 안동김씨(구안동)로 자는 서초(恕初)요, 호를 구암(龜岩)이라 하였다. 김충갑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장래 큰 그릇이될 인물로 향리의 총망을 받았다. 차차 성장함에 스승을 택하여 학문을 닦았는데 처음에는 정암 조광조에게 사사하다가 정암이 기묘사화에 화를 입자 만년에는 퇴계 이황 문하에서 성리학을 닦았다.
대록지에는 구암이 명종 계묘에 사마의 양과에 급제하였다고 전하나 사실은 중종 38년 계묘에 급제한 것이다. 구암은 젊어서부터 절의가 굳은 선비로 스승 정암에게 사사함에 이르러 더욱 성리학을 깊게 연구하면서 대의의 실천을 다짐하였다.

그러나 정암이 중종 14년 기묘(1519)년에 남곤 심정의 모함으로 이상정치 실현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사사되고 말았다. 이때 정암을 따르던 조신들과 학자들이 연루되어 혹은 사사되고 혹은 귀양하고 혹은 삭탈 관직을 당하였다. 스승과 어진 사람들의 참혹한 처형을 보고 가만히 있을 구암이 아니었다. 구암은 이때 젊은 시절이었으며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백면 서생이었으나 정암을 구하는데 앞장섰다.

정암의 죽음에는 팔도 유생이 모두 칠기 하였지만 구암은 이들의 앞장에 서서 정암을 구하려다가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구암은 얼마 안되어 옥에서 풀려났으나 제척 인물이 되어 벼슬길에 나가기 힘들게 되자 향저가 있는 괴산을 오르내리며 불우한 나날을 보내었다. 이때 옥에서 풀려나 괴산으로 가는 도중에 천안군 병천면 가전리(잣밭)에 머무르다가 마침내 이곳에 살기로 결심하였다.

그래서 이곳 잣밭에서 아들 김시민 장군이 출생했고, 역학자 김치가 손자로 태어났으며 천하 문장인 김득신이 증손자로 태어났으니 구암이 천안 잣밭에 주거를 정한 후 크게 대창 하였다하겠다. 구암의 형제가 5형제인데 이들은 천안출신은 아니지만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현관으로 나아가 가문을 빛내었다. 구암의 직계 방계가 행직으로 대관은 없었지만 반열을 지키는데는 족하리만큼 대창하였다.

명종 1년(1546)에 구암이 별시에 등과 하여 관직에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 해는 명종 즉위를 경하 하기 위하여 특별 과거를 실시한 것이다. 구암은 기묘사화 후 제척 인물로 과거에 응시할 생각을 하지 않았으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중종 임금도 내심 조광조(정암)를 사사한 것을 후회하여 기묘 연루자의 추국과 제척은 중지하였었다. 그러던중 중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한 후 과거에 응시하여 괴원과 양사에 출사하였다. 괴원은 승문원을 말하며 양사는 사헌부와 사간원을 말한다. 괴원과 양사는 우선 학문이 높은 사람이어야 하며 또한 지조가 있는 선비라야 임명되는 곳이다. 그의 곧은 성미가 조정의 비리를 보고 그대로 넘어가지 못하여 평탄한 환로를 걷지 못하였다. 명종이 즉위하였으나 나이가 어리므로 친정을 하지 못하고 모후 문정왕후가 수렴 청정하였다.

그런데 문정왕후는 불교를 독실히 믿어 억불정책으로 나오던 국책을 바꾸어 승과를 회복하여 승려를 등용하였다. 그리고 명승으로 이름난 보우를 우대하여 자주 궁중 출입을 허용하였다. 불교를 배척하던 유생들의 마음이 편할리 없었다. 그래서 경골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보우를 배척하였으나 가납되지 않았다. 곧고 굽힐줄 모르는 성리학자 구암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구암은 성균관의 유생을 인솔하고 보우 배척 운동을 벌였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미움을 샀으나 유학자간에는 이름이 높아져 사림의 중견으로 부상하기에 이르렀다.

중종이 승하하고 중종의 아들이요, 윤임의 생질되는 인종이 즉위하였으나 재위 불과 8개월에 돌아가고 그의 이복 아우인 명종이 연소한 나이로 즉위하였다. 그래서 전술한 바와 같이 명종의 생모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된 것이다.

중종 년간부터 장경왕후의 아우인 윤임과 문정왕후의 아우인 윤원형간에 반목이 심하였는데 문정왕후가 수렴청정 하기에 이르러 윤임일파를 숙청하고 말았다. 이 사화를 을사년에 일어났다 하여 을사사화라고 한다. 윤원형의 전횡은 사적에 전해진 폭관이었으므로 윤임이 자연 사림의 동정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구암은 보우 배척뿐 아니라 을사당인의 배척에도 앞장서서 탄핵하였다. 당시 윤원형을 정점으로 하는 을사 당인의 세력은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데 구암은 을사당인을 탄핵하는 상소를 계속 올렸다.

그래서 문정왕후의 노여움을 사서 청주로 귀양가게 되어 구암의 관로는 막히고 말았다. 또한 구암의 매서(누이동생의 남편)인 이휘가 을사사화때 직간하다가 화를 입어 죽음을 당하였다. 이휘는 대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 수찬으로 출사하였다가 윤원형 일파의 비행을 묵과할 수 없어 수렴청정 하는 문정왕후께 직간 하다가 윤원형 일파에게 몰려 화를 당하였다.
구암은 이휘의 시체를 어루만지며 장송가 한수를 지어 시체옆에 놓았다. 그 장송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베엇네 베엇네
낙낙 장송을 베었네
베지 않고 길른다면
기둥(들보)감으로 자랄텐데
장차 큰 집이 무너지면
어디 나무 있어 기둥으로 쓸고

구암은 매서 이휘를 큰 인물로 여겨 애지중지 하였는데 사화를 겪으니 크게 애통해 마지않았다. 그리고 구암도 을사사화의 억울한 선비를 신원 하고자 을사당인을 탄핵하다가 청주에 귀양 갔음은 이미 서술한바이다. 구암은 명종 시대는 햇빛을 보지 못하고 불운한 세월을 보내다가 선조가 즉위하자 유서의 은전을 입어 벼슬길에 다시 나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간원 헌납에 이르렀다. 사간원 헌납은 청직 이지만 구암의 인품과 학문으로 보아 걸맞는 자리는 못되었다. 아마도 정암 조광조를 옹호하지 않는다면 또한 을사당인을 배척하지 않았다면 현직에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구암은 처가로 인연이 있어 목천현의 잣밭에 우지한 것이 안동김씨 세거지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구암의 후손뿐 아니라 일가 족척도 많이 목천현으로 이주해 왔다.

구암은 생전의 행직은 낮았으나 증직은 보조공신 상락군에 봉해졌으며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이증직의 이유는 자제 충무공 김시민이 부원군에 봉해졌기에 그 부친을 상락군에 봉했으며 충무공이 의정부 좌의정에 증직되었기에 좌찬성에 증진된 것이기는 하나 구암이 충주 향사에 모셔진 것만으로도 증직의 요인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구암공이 학문이 높고 인품이 고결하므로 충주 선비들이 조정에 아뢰어 서원을 세우고 봉사(奉祀)한 것이다. 조선왕조시대에 서원이 남설 되었다고는 하나 향사에 모셔진 인물이면 사표가 될만한 인물인 것이다.

 

 

◐5. 유몽인(柳夢寅)      
     
유몽인은 관향이 고흥이고 영밀공 유청신의 후손이며, 사간 충관의 손자이고 홍여군 당의 아들이다.

유몽인의 자는 응문, 호는 어우당이며 때로는 묵호자로 행세하기도 하였다.

어우당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문일지십의 천재였다. 그는 일찍이 만권의 책을 읽었다 할만큼 무수한 책을 모두 읽었다. 책이란 책은 입수되는 대로 모두 읽어 백과전서적 박학한 인물이었다. 그는 시문에 능할 뿐 아니라, 해서 초서 예서에 능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어우당은 당대의 기재로 알려졌다. 어우당은 일찍 진사과에 급제한 후 30세 되던 선조 22년(1589)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섰다. 그는 홍문관의 한림과 호탕을 거쳐 대사간 대사성 대사헌 등 삼사장관을 두루 거치고 도승지 한성좌윤(漢成左尹:서울시 부시장)을 역임하였다. 이어 이조참판 홍문관 예문관의 제학을 지냈다.

어우당처럼 청직과 화직을 고루 거친 이도 드물다. 또한 팔도어사를 거쳐 세 번이나 명예 사신으로 가서 조선의 문화를 널리 소개하였다.

어우당의 경쾌한 시문은 명조야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우당은 우계 성혼의 문하에 들어서 수학을 하였다. 우계는 어우당이 경솔하다 하여 항상 나무랐다 한다. 세월이 가는 동안 어우당의 재기와 우계의 침중이 잘 맞지 않아 우계는 어우당의 문하출입을 금하였다. 우계는 율곡과 더불어 정암 조광조의 뒤를 이은 기호학파의 종장으로써 명망이 높았기 때문에 우계문하에서 축출된 것은 어우당으로서는 치명적 타격일 수밖에 없었다.

어우당은 대북의 이이첨, 정인홍 등과 교분을 두터이 하였다. 그래서 어우당은 세인이 중복으로 지목하였다. 그 이유는 대북은 폐모론의 주동세력인데 어우당은 서인과의 대결에서는 대북과 같이 하였으나 폐모론에서는 이이첨과 의견을 달리하였다. 그래서 중복이라 하게 된 것이다.

폐모론 때문에 이이첨과 사이가 벌어져 어우당은 이조참판에서 물러나 금강산에 들어가, 고승과 교류하여 시간을 보냈다. 이때 석씨의 사상을 익힌 것을 서인들이 정도를 일탈한 것으로 비방하였으나 어우당의 진면목은 학문의 세계가 무변 방대함을 인식한 선국적 안목이다.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어우당은 이이첨과 사이가 멀어져 벼슬을 내놓지 않으면 안되었던 사실과 폐모론에 반대했기 때문에 죄를 입지 않았으나 등용되지 못하고 여기 저기 방랑하였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류응시의 고변으로 역모에 몰려 피신하여 다니다가 드디어 체포되었다. 당시 문초관인 이원익 신흠 김사언등이 어우당을 구해주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반정공신인 서인들의 미움을 사 구제되지 못하고 아들과 함께 사약을 받았다.

어우당이 문초를 받을 때 문초관이 인조를 왜 적극적 자세로 섬기려 하지 않는가 하고 물으니 대답대신 지필묵을 요구하여 지필묵을 주었더니 시 한 수를 써 건네주었다. 이것이 유명한 「상부가」이다.

상부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七十老孀婦」 칠십 늙은 과부가
「端居守空房」 단정하게 공방을 지켰네
「隣人勸之嫁」 이웃들이 개가를 권하니
「善男顔如槿」 선남은 용모가 근화같다네
「慣誦女史詩」 내훈을 습관처럼 외어 왔으며
「? 知任似訓」 임사의 교훈도 알고 있다네
「白首作春容」 흰머리에 화장을 하면
「寧不愧脂粉」 지분인들 부끄럽지 않으리오.

이글이 암시하는 뜻은 광해군을 섬기던 늙은 신하가 새 임금을 섬기려 아첨하는 것은 의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또한 어우당은 광해군을 섬기던 의로 새 임금 섬길 마음이 없을 뿐 새 임금은 훌륭한 임금이라 추켜세웠다. 이 글은 양시의 뜻이 있어 아무도 탓하지 않고 후세에까지 애송되어온 시다.

유몽인은 이 시로 의인의 대우를 받았으며 후일 신원될 때 의(義)자 시호를 받는 원인이 되었다. 어우당은 정조때 신원이 되었으며 시호를 의정공으로 내리었다. 광해군이 패륜의 폭군으로 몰려 쫓겨났음으로 아무도 그를 따르는 이가 없었는데 오직 유몽인만이 절개를 지녔다 하여 높이 평가한 것이다.

유몽인은 처벌될 때 모두 적몰되어 자손이 없었는데 신원된 후 유활로 출계하여 후에 병천 청절사를 지어 제향을 받들고 있다.

 

 

◐6  유의신    
     
유의신의 자는 언정(彦正)이요. 천안 원일면(지금 광덕)에서 1550년 12월 27일에 출생하였다. 의신은 어려서부터 효행이 지극하여 고향 사람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하였다. 공이 10세 때에는 어머니의 병세가 위독하여 사경에 이르렀을 때 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피를 어머니 입에 흘러 넣어 어머니를 살려내는 효성을 보였다. 그 후에도 몸이 약하신 어머니를 항상 곁에서 간호해 드리면서 책을 가까이 하고 학문을 배우고 익히는데 게을리 하지 않아 그의 학문은 날로 뛰어나 동네 어른들도 그의 학문을 따를 사람이 없었다.

드디어 의신이 고대하던 과거 날이 닥쳐왔다. 한편 의신은 병약하신 어머님이 몹시 걱정이 되었으나 기필코 장원 급제해서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고 마음껏 효도를 해야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고 과거에 임하였다. 그때가 바로 1583년 계미년(선조 癸未)이었다. 무과에 급제하여 금의환향하니 부모님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니 자식이 마냥 대견스럽게만 보였다.

후일 선조 24년에는 어전에서 시사회를 개최하여 무예를 겨루었는데 이때 의신이 거수를 차지하여 왕으로부터 푸짐한 상을 하사 받았고, 특히 변장에 제수되어 이진 권관이 되었다.

의신은 즉시 부임하여 진심으로 군졸들을 잘 보살피고 병기의 수리와 제조에 힘썼고, 평상시에 병기를 잘 갖추어 놓지 않으면 급할 때에 응할 수 없다고 말하며 유비무환의 정신을 항상 간직하고 있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구의 무리가 바다를 덮어 물밀 듯 들어오나 주장 전라 우수사 이억기는 황급히 관하 장졸을 불러 작전 계획을 세웠다. 이때 의신이 합리적이고 사리에 적당한 용병 계획을 세워 자세히 진언하니 이억기는 뛰어난 작전계획에 감탄하여 의신공의 계획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한편 전라 우수사 이억기는 내심으로 장하다고 여기면서도 의신의 심중을 시험해 보기 위하여 이제 우리가 얼마 되지 않는 군대와 약체로 큰 적을 당할 수 있겠는가? 적을 당하기 어려우니 헛되게 죽음을 택하지 말라고 당부를 하였다. 이에 의신공은 크게 반발하여 장부가 나라와 백성을 위해 칼을 뽑았는데 어찌 자신의 몸을 생각할 수 있으리요. 죽는 한이 있어도 적과 싸우겠노라고 하며 곧 칼을 빼어들고 뱃머리에 서서 자기 관하의 사졸에게 명령하여 말하기를, 자기 임지를 착실히 지키어 도망가기를 포기한 자는 내가 죽이지 아니할 것이나 사졸이 주장의(수사) 명령을 쫓는 자 있으면 모두 단칼에 목을 베이겠노라 하며 크게 노하니 모두들 엎드려서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한다. 이 광경을 본 주장 이억기는 크게 가상히 여기는 공으로써 선봉장을 삼으니 의신이 약간의 오합지졸로써 곧 큰 적을 가덕포 앞바다에서 맞아 죽음을 무릅쓰고 힘써 싸워 크게 이길 수 있었다. 이에 주장 (이억기)이 장계를 조정에 올리니 조정에서는 의신의 공을 가상히 여겨 훈련주부에 발탁하였다. 의신은 또다시 웅천포 싸움에서도 크게 승리를 거두어 그 공로로 훈련첨정에 승진되었다.

그 후 싸움마다 대첩을 거두다가 그 유명한 한산도 해전에 참전하였다, 이때에도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여 적을 무수히 사살하니 그 수가 부지기수여서 적의 시체가 바다를 덮었고 드디어 적세가 크게 꺾이었다. 이때에 홀연히 하나의 적이 쌓인 시체 속에서 기어 나와 총으로 왼쪽 겨드랑이를 맞추니 의신은 곧 손가락으로 탄환을 후벼 파냈다. 유혈이 낭자한 팔을 아랑곳하지 않고 남은 오른쪽 팔로 종일토록 싸웠으나 너무 피를 많이 흘리고 탄환 독이 점점 심하여 도저히 살지 못함을 생각하고 큰아들 연에게 모든 지휘권을 주면서 자기를 대신하게 하였다. 다음날 새벽에 의신공이 마침내 진중에서 순직하니 7월 11일이었다. 그때 연의 나이가 19세의 약관이나 부친의 소임을 능히 감당했다. 이제 군졸들도 크게 놀라며 그를 도와 열심히 싸웠다. 전후 연은 부친의 영구를 고향으로 모시어 장례를 치르니 그 숙성함과 효행에 세상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에 논공책훈할 때에 의신을 선무 원종 1등공신에 기록케하고 호조참의를 증직하였으며 부모에게 벼슬을 봉하고 자손에게는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연의 나이가 90에 이르도록 아버지가 비명에 가신 것을 뼈아픈 한으로 여겨서 일생을 장가들지 않았다 한다. 공이 어렸을 때에 어머니 병환에 손가락을 끊어 간호하던 모습을 회고 한 아버지 세옹은 공의 모든 유물을 찾아 어루만지며 눈물을 한없이 흘렸다고 한다. 또 연은 일생을 장가까지 들지 않았으니 이 얼마나 슬펐으면 이러했을까?

이 일은 또한 공의 평소 가정교훈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한 편 아쉬운 것은 공의 위국진면한 충성에 비하여 포상이 너무 낮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처절했던 최후의 순간을 조정에서 세세히 알았더라면 어찌 정삼품관을 증직하는데 그쳤으랴, 안타깝기 그지없는 노릇이다. 지금 천안시 광덕면에 충효정문이 서 있어 의신의 충절이 전해주고 있다.

유의신은 임진란에 출전하기전 선조 초년에 유장군의 고향 천안시 광덕에 산채를 설치하고 출몰하던 안수를 토명하였다고 전하다.


 

 

◐7.   박자응(朴自凝)     
      
  
박자응은 밀양 박씨로 자를 정언이라 하였다. 목천현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다. 과거에 응하여 급제하고 벼슬이 교리에 이르렀다. 교리는 홍문관의 5품관이나 옥당으로 불리우기도 하고 한림으로 불리우는 문관이며 누구나 선망하는 장래가 보장된 자리이다. 문한을 고루 갖춘 사람이라야 오를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의 양반사회에서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벼슬이 있으니 재상 중에는 홍문과 대재학이며 아래로는 교리옥당이 문관들이 선망하는 자리이다.

박자응은 처음부터 학문을 인정받아 환로가 순탄하였으나 때마침 광해혼조를 당하여 명과 절을 숭상하는 박자응인지라 화를 자초하지 않고서는 못배기었다.

때마침 선조계비 인목대비를 폐위하여 서궁에 유폐하니 이후부터 인목대비를 서궁이라 호칭하였다. 인목대비를 폐위하고 영창대군을 시해하니 이것을 폐모시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광해군이 모후를 폐한 사건으로 패륜군주가 되어 반정의 빌미를 주었다. 북인일파는 인목대비를 폐하고자 상소를 올리거나 조의에 부처 의논을 진행시켰다. 인목대비는 부원군 김제남의 따님으로 선조의 계비로 궁중에 들어와 영창대군 남매를 낳았다. 대비의 연령은 광해군보다 연하의 어머니였다. 직접 낳지 않았어도 아버지의 육례를 갖춘 계모이면 어머니가 되는 것이 유교사회의 엄격한 법칙이다. 인목대비는 연소하지만 사리가 분명하고 명석하여 어떤 실수를 저지를 분이 아니었다. 그러나 당쟁의 희생으로 폐모시제 사건이 진행된 것이다.

선조는 13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모두 후궁소생이며 영창대군이 적자로 처음 탄생하였다. 선조는 광해군을 못마땅히 여기던 중 적자를 탄생하였으니 폐세자 할 생각을 가지었다. 영의정 류영정 등에게 밀의하여 소문을 퍼뜨리게 하였다. 이때 이이첨과 정인홍이 폐세자의 불가함을 상소하였다. 선조는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이이첨과 정인홍에게 허위소문을 퍼친 혐의로 귀양명령을 내리었다.

이이첨과 정인홍은 차일피일 출발을 지체하다가 갑자기 선조가 승하하여 광해군의 명령으로 복직되었다. 선조가 돌아가자 재빠르게 왕위에 오른 후 정인홍과 이이첨을 등용하고 선조가 총애하던 서인세력을 몰아내었다. 우선 왕위계승에 불평이 많은 임해군을 죽이고 이이첨과 정인홍의 모사로 김제남을 역모로 몰아 처형하였다. 이에 나이 어린(8세) 영창대군을 강화에서 시해하였다. 이는 북인일파가 왕위에 불만을 느끼는 광해군을 충동하여 임금이 된 것이다. 폐모시제 사건을 일으켜 서인의 예기를 꺾고자 한 계책이다.

이 계책에 말려든 광해군은 패륜의 임금이 된 것이다. 폐모의에 참석치 않고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간 사람도 많았다. 박자응은 본시 적극적인 사람이라 조정에 있으면서 폐모의에 참석하지 않고 상소를 올려 부당함을 간하니 그 언사가 파격하였다. 그 내용을 살피니 "23적신이 국모를 폐하고자 하니 천인공노할 패륜이오니 전하께서 만약 용납하시면 과격한 유생이 수백 명 떼지어 강상을 바로 잡고자 하면 상감께서는 어찌하겠습니까?"하였다.

그후 어전에 등대했다가 폐모를 주장하는 흉소가 들어오자 박자응은 광해군의 면전에서 찢어 버렸다. 박자응은 광해군과 북인의 비위를 건드려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서궁에 대한 충성은 대단하여 항상 서궁쪽을 향해 앉으며 조석으로 기둥을 붙들고 탄식하였다.

또한 호를 읍백당이라 하였다. 흰 것을 잡아당긴다는 뜻으로 항상 결백을 견지한다는 정신을 표출한 것이다.

박자응이 인조반정 때까지 적소에 있다가 풀려났다. 그리고 다시 출사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박자응은 벼슬에 환멸을 느껴 고향 목천현 말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여생을 시주로 자오하며 여생을 마치었다.

 

 

◐8.   백문보(白文寶)   (1322∼1374)   
        
백문보는 고려말에 활약한 직산 명현이다. 백문보의 자는 화부(和夫)이며 사후에 충간공(忠簡公)의 시호를 받은 분이다. 생장시의 기록은 자세히 없으나 환로에 발을 들여놓은 다음부터 그의 강직하고 바른 안목은 여러번 정치에 반영되어 고려사를 장식하였다. 그의 활약상은 고려사에 충숙왕(忠肅王)때부터 우왕때까지 여러번 수록되어 있다.

백문보는 어려서부터 총명한데다 학문에 힘써 충숙왕때 과거에 급제하여 검열(檢閱) 우상시(右常侍)등 문한의직과 왕의 측근에서 모시는 직책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공민왕(恭愍王)때 전리판서(典理判書)가 되어 왕을 보필하였다. 전리판서는 고려 육조의 하나로 문관의 선임공훈 봉작등의 일을 맡은 관청이며 판서는 이 업무를 총괄하는 장관이다. 처음은 상서이부(尙書吏部)로 명칭 하다가 고려말기 직제 개편때 전리사(典理司)가 되었다. 사람을 뽑아쓰는 관청임으로 선부(選部)라고도 하였다.

고려왕조는 4백여년의 연륜을 거듭하는 동안 인재 등용때 많은 폐단을 야기하였다. 더욱이 무신의 집권이후 인재 등용의 제도가 무너졌으며 몽고의 간섭을 받아 더욱 인재 등용이 문란해 있었다. 이때 인재 등용을 맡은 전리판서가 된 백문보는 유능한 인재를 바로 등용하여 조정을 바로 잡아 보겠다는 굳은 의지로 공민왕에게 여러번 상소를 올려 인재 등용의 난맥을 논하고 과거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과거제도는 십과(十科)로 분리해 실시하므로 전문 관원을 뽑으며 또한 밀직사의 제학등 요직은 반드시 과거로 뽑은 인재로 등용할 것을 제의하였다.
밀직사(密直司)는 고려시대 왕명의 출납·궁중의 숙위와 군기(軍機)를 맡은 관청으로 제학은 밀직사의 요직이었다. 왕의 측근에 중요 정책 결정에 참여하고 왕실의 안위를 맡은 궁중 호위인 숙위의 임무를 맡은 사람은 적어도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백문보의 이와 같은 주장이 모두 답변확정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그가 전리판서로 있는 동안은 인재 등용이 참신해진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그리고 공민왕 10년(1361)에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몽진의 길을 떠났다.
이 난리로 개경에 있던 사초와 실록이 모두 불타 없어졌다. 이때 왕은 청주에 머물러 있으면서 공봉 곽추에게 명하여 나머지 서책을 경상도 해인사에 옮기도록 명하였다. 이때 백문보는 공민왕에게 경기에 있는 국가의 중요 문건을 하향 먼 곳으로 옮기면 난리가 잘 수습되지 않는 줄 알고 민심이 흉흉해 질터이니 중지하자고 건의하여 곧 중지케 하였다. 또한 백문보는 철저한 유학자이며 이상 정치를 실현하려고 노력한 학자이다.

고려말의 안향 백이정과 한가지로 유교의 이상 정치를 주장하였다. 고려말 문란해진 승려들의 생활과 정치 간여를 통박하여 그 폐단을 근절하도록 건의하였다.
공민왕은 백문보의 인품을 믿어 요직에 배치하였으나 불교 정책과 승려 대우 문제로 차츰 멀어져 갔다. 백문보는 공민왕의 태도와는 아랑곳없이 항시 정론으로 불교 폐단을 건백 하였다.
당시 공민왕은 승려 신돈을 신임하여 정치를 내맡길 정도의 왕이었으니 불교를 비판하는 이를 용납할 처지가 못되었다. 그러나 백문보의 인품이 정대하고 임금을 모시는데 지성이기 때문에 그의 건의는 무시할 수 없었다. 백문보는 승려 허가제를 실시하여 누구나 승려가 되는 길을 막았으니 조선시대에 들어가서 실시한 승려도첩제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백문보가 승려 허가제를 실시한 것은 불교를 억제하고자 한 정책이 아니라 승려의 질을 향상시켜 불교의 제 자리를 찾게 하자는데 목적이 있었는 듯 하다.
고려말 불교의 세력으로 보아 백문보의 승려 허가제가 실시에까지 이르렀으니 그의 주장이 불교 승려도 수긍이 가거나 이론을 제기 할 수 없는 완벽한 제도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공민왕이 홍건적을 물리치고 환안도감(還安都監)이라는 관청을 신설하고 환도에 따른 제반 정비를 맡겼다. 환안도감에서 하는 일은 환도에 따른 제반 복구 작업을 맡아 안녕 질서를 되찾는 작업을 하는 관청이다.
공민왕은 환안도감의 책무를 백문보와 평양군 김경직과 같이 맡아 처리하도록 하였다. 백문보는 문한(文翰)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 문적을 두루 정돈하였는데 이제까지 전해져 오던 전적이 모두 소실되었으므로 사관을 해인사에 보내어 두우통전(杜佑通典)을 가져다가 통전의 본을 따고 박충의 헌책을 받아 들여 새로운 의제(儀制)를 만들었다. 이 의제는 불교식 의식이 아니라 유교식 의제로 바꾼 것이다.

공민왕은 우왕의 왕자 시절에 백문보를 사부로 삼아 훈도하게 하였다. 백문보는 강직함과 문한으로 훌륭한 왕사 재목이 분명하나 우왕은 어려서부터 왕재가 못되어 후일 폐위가 되었으며 고려를 멸망의 구렁으로 몰아 넣었던 임금이다. 그것은 스승 백문보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지 않았으니 참으로 딱한 노릇이다. 백문보는 왕자 모니노(牟尼奴 : 우왕의 아명)를 바로 인도하려 무진 애를 썼으나 노력의 효과는 나지 않았다. 그러나 백문보가 조정에 바른 소리를 하면서 살았으나 신돈의 화를 당하지 않고 왕세자의 사부로 발탁되었으니 그의 고결한 인품과 정당한 행동은 간신도 어찌 하지 못한 것이다. 백문보가 신돈의 화를 당하지 않고 일생을 마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 할 수 있다.

 

 

◐9.  상국진, 마륙황     
    
우리고장 북면과 입장면에 차령산맥이 동서로 뻗어 산등성이가 연계가 되고 양쪽 골자기에 마을들이 있어 예로부터 옹기종기 모여 다정하게 살고 있다. 이 면계의 산을 위례산이라 부르고 이 산에 쌓은 산성을 위례성이라 한다. 역사학계에서는 이성을 직산 위례성이라 부른다. 직산 위례성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처음 도읍을 정한 곳이라고 옛 기록에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근래 직산 위례성의 입지로 보아 한 나라의 도읍으로 보기가 어렵다 하여 백제 초도 위례성을 다른 곳에 비정(批正)하는 학자들이 있어 앞으로 많은 연구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직산 위례성 주위에는 예로부터 온조왕이 남분할 때 온조왕을 모시고 백제를 건국한 열분 공신의 후예라는 이들이 지금까지 대를 이어 살아오고 있다. 십제 공신 중 한 분인 전섭의 후손들은 천안 전씨라 하여 천안지방에 널리 분포되어 살아오고 있다. 전섭은 후일 환성 군으로 봉군 되었으며 후손들이 그의 단소를 모셔 제향을 받들고 있다.

또 다른 십제공신 조성의 후예들은 직산 조씨로 행세하며 조성의 묘소를 정성껏 가꾸고 있다. 현재 삼국 초기에 장사 지낸 묘소가 지금까지 전해 온 것으로는 신라 박혁거세 왕릉이나 있을 정도이므로 조성의 묘소가 지금까지 전해온다는 것을 의심하는 이도 있으나, 그 후손들의 주장이니 다른 고증이 없는 한 굳이 이의를 제기할 까닭이 없다고 본다. 그리고 십제공신의 한 분인 마려의 후손들은 목천마씨로 관향을 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이 직산 위례성를 들러 싼 천안지방에 십제공신의 후예라는 이들이 이 고장을 관향으로 하여 오래토록 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직산 위례성 백제 초도설은 아주 무근한 주장은 아닌 듯 싶다.

동국여지승람 목천성씨조에 본 현에는 우, 마, 돈, 상, 장의 오성이 살고 있는데 언전에 따르면 고려가 개국한 이래로 누차 반란을 일으키므로 고려 태조가 이들을 미워하여 축성을 사성하고 천대하였다한다. 그후 세월이 흐른 다음 고려 조정의 노여움도 사라져 성씨를 정상으로 고치도록 허용하여 우씨(牛氏)는 우씨(于氏)로 돈씨(豚氏)는 돈씨(頓氏)로 상씨(象氏)는 상씨(尙氏)로 장씨(張氏)는 장씨(張氏)로 개칭하였으나 마씨(馬氏)는 원래 백제건국 십제공신 마려의 후손이라 하여 그대로 마씨라고 불렀다 한다. 이들 오성은 모두 목천을 관향으로 하여 그 후손들이 오늘까지 살아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오성반란이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다만 상씨, 마씨 가승과 만성보에 간단한 기록이 전할 따름이다. 이 오성 반란을 주도한 이는 그들의 가승에 전하는 인물이었던 상씨의 시조 상국진과 마씨의 시조 마륙황의 이름이 전할 따름이다. 이들이 단순한 반란이 아니고 의로운 반란이기에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현관인 장붕익과 김홍욱이 목주인의 기질을 칭찬하는데 오성고사를 예화로 들고 있다. 장봉익은 인조 반정공신 장유의 부친이며 김홍욱은 호가 학주로 전국 각 고을의 제영을 지었으며 강빈사건을 직관하다가 죽음을 당한 곧은 선비이다.

상씨 가승과 만성보에 따르면 상국진은 원래 백제의 유민으로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여 이 땅에 진군하였을 때 이에 반항해서 백제의 국권을 회복하려고 항쟁하였다. 상국진을 중심으로한 백제 유민들은 통일신라에도 계속 대를 이어 불복하다가 후삼국의 어지러운 틈을 타서 백제를 회복하려고 일어선 것이라 하였다. 이 반항군의 대표가 상국진이고 다음은 마륙황이었던 모양이다.

마씨는 백제 창업 십제공신의 후예로 백제의 교목세신 이었던 가문이니 신라에 대한 감정이 좋지 못했음은 지울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이들이 웅거한 근거지는 상왕산이라 불렀다. 현재 독립 기념관의 뒷산으로 흑성산이라 불리우는 산이다. 산정에 석성이 있는데 검은 돌로 쌓았다 하여 흑성산이라 한다. 산성을 쌓은 연대는 기록이 없고 축성법으로 보아 고대성임에는 틀림이 없다. 흑성산을 상왕산이라 함은 대록지 기록에도 일치한다. 대록지 단묘조에 기우제단이 상왕산에 있는데 '상왕산은 바로 흑성산이다'라고 기록되어있다.(大麓誌 檀廟條 祈雨祭檀 在象王山 郞黑城山)

목천마씨의 가승에는 십제공신의 후손 마륙황이 십제를 복구하려다가 실패하여 고려 태조의 노여움을 사 갖은 학대를 받았다고 전한다. 이 학대는 오래 지속되었으나 마륙황의 8대손 목천군이 고려 정종때 벼슬길에 나아가 문하시중 평장사가 되어 비로소 가문을 회복하였다 한다.

상씨 마씨만이 가승에 반란고사와 주동한 인물을 명백히 밝히고 있으며 목천 돈씨는 만성보에 오성고사만 인용되고 있을 따름이다.

우씨는 중국의 주무왕의 자손이라 하였을 뿐 목천 반란 사건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목천 장씨도 인동 장씨와 같은 계통이라 했지 오성반란을 인용하지 않고 있다. 이들 오성은 고려 초기 천인으로 학대를 받았기 때문에 후손들이 천적에 들었었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아예 감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오성반란 사건 이후 가문이 영락하여 기록이 없다가 중시조 이후에야 비로소 계보를 기록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반란의 근거지를 상왕산이라 한 것으로 보아 상국진을 십제의 왕으로 추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간다.

상국진을 위시한 오성이 십제를 회복한다고 선언하였다 하나 백제가 망한지 2백년 후의 일이므로 그저 혼란한 틈에 복고 감정에 호소하여 창업을 하고자 하였으나 그 세가 약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낙천하는 비운만 겪은 게 아닌가 생각한다. 영성지 성씨조에 덕흥부곡의 대성으로 상씨를 꼽고 있다. 고려시대 부곡은 천인집단이다. 그러므로 낙천한 상씨가 부곡의 장인으로 거주한 것이 분명하다.

목천 오성반란 사건과 상국진과 마륙황의 사적은 이것 이상 밝혀진 것이 없다. 다만 이정도의 기록마저도 현대에 이르러서는 아는 이가 없어 인멸될까 염려되어 상국진과 마륙황의 기록을 남겨두고자 한다.

우, 마, 돈, 상, 장의 고려 태조에 대한 반란 사건은 세종대왕지리지, 동국여지승람등 관찬 서적과 대록지환여승람 등 지지에 기록되어 있다.


 

◐10.  상진(尙震)    
   
사화가 빈번히 일어나던 시대에 15년간이나 정상의 자리를 지켰던 상 정승은 자가 기부(起夫)이고 호는 범허재(泛虛齋) 또는 송현(松峴)이라 하였다. 목천면에 우뚝솟은 흑성산 아래에 「상 정승골」이란 곳이 구전되어 오고 있는데 그곳(목천)이 상씨의 본관인 것이다.

상진의 아버지는 충청도 공주목 임천군 합하동(현재의 부여군 장암면 합곡리)에서 살았으며 안기도 찰방(경상북동 안동지방)을 지낸 성보이다. 부모가 늦게까지 슬하에 자식이 없자 보령군에 있는 성주산에서 치성을 드리고 얻은 아들인데 성종 24년에 태어났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매부 하산군 성몽정의 집에서 자랐다.

상진은 워낙 화기가 있고 인정이 두터워 성인과 같았다. 그러나 나이 열다섯이 지나도록 공부를 게을리 하여 누님의 속을 태웠고 함께 공부하는 동료들로부터 수치를 당하였으나 차차 철이 들면서 느낀바 있어 부지런히 공부하여 학문이 일취월장(日就月將)하였다. 그리하여 중종 11년(1516)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중종 14년(1519)에 별시에 합격하여 승문원의 부정자가 되더니 그후 그의 벼슬길은 순탄하여 경기도 관찰사,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명종 임금때에 영의정에 올랐다. 이때에 상진은 누차 사양했으나 명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명종 17년(1562)에는 70세가 됨으로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간청했으나 오히려 경연을 겸하게 하였고 나라에 큰 일이 있으면 반드시 자문하였다.
상진은 1564년에 나이 72세로 별세를 했는데 성안이란 시호를 받았다. 상 정승은 교훈이 되는 많은 일화를 남겼는데 그중 몇 가지만 들어 수록해 보고자 한다.

서울에서 벼슬살이 할 때 집으로 돌아오다가 금으로 만든 술잔을 길에서 주었다. 상 정승은 그 물건을 주인에게 찾아 주려고 대문 옆에 크게 방을 써 붙여 잃은 사람을 찾으니 금잔을 잃은 사람은 어느 대가집 종이었다. 이렇게 하여 종의 목숨을 구해 주니 당시 유명한 복술가 홍계관이 말하기를 「공은 수명을 15년 늘렸습니다」하였다 한다. 그래서인지 공은 당시로는 드물게 72세를 누리었다.

공의 증조부 영부는 임천(부여군 장암면)에 살면서 가세가 풍요하여 곡식과 돈을 대여해 준 기록문(차용증서)이 많았다. 하루는 이 기록문을 모두 불살라 버리고 하는 말이 「내 후손이 반드시 번창할 터인데 이것을 무엇에 쓰겠느냐」하였다. 공의 조부는 수사이고, 부친은 현감과 찰방을 지냈으며 공에 이르러 만인지상에 일인지하인 영의정이 되었으니 증조부의 말이 들어맞았다고 할 수 있다.

상 정승은 일찍이 남의 허물이나 단점을 말한 적이 없다. 어느 날 무더운 여름철에 찾아온 선비와 문을 활짝 열어놓고 밖을 내다보며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그때 어떤 사람 하나가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걸어갔다. 선비의 하는 말이 「저 사람 한쪽 다리가 짧군요」하니까 공은 「어찌 남의 단점을 말하리오, 다리 하나가 길다는 것이 듣기에 좋지 않느냐」고 하였다 한다. 이 말이 당시 명언이 되었다 한다.

다음으로 좌의정 오상이 어렸을 때 상 정승을 찾아 뵈온 일이 있었다. 이때 오상이 세상의 각박함을 한탄하여 글을 지어 상 정승께 올렸다.

「羲王樂俗 今如掃 희왕락속 금여소
只在春風 盃酒間」 지재춘풍 배주간
삼황오제 시대의 아름다운 풍류는 비로 쓸은 듯이 없어졌고, 봄바람만이 술잔 사이로 오락가락 한다.

상 정승이 이 글을 보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오생(吳生)이 대성할 줄 믿었는데 어찌 그리 말이 박하냐 하시며 오생이 대성하려면 싯구나 말이 후덕해야 된다고 하면서 즉시 퇴고하기를

「羲皇樂俗今猶在 看取春風盃酒間(희황락속금유재 간취춘풍배주간)」이라 하였다. 이는 삼황오제 때의 풍류가 지금도 남아 있어 봄바람이 술잔 사이로 오락가락 한다는 뜻이다. 얼마나 희망적이고 낙천적이며 여유가 있는 글인가?

상진은 70세에 노령으로 퇴관하고 송현에 살았는데 지금의 서울 중구 상동이 아닌가 한다. 그때 임금의 행차가 자주 공의 집 앞을 지나갔다 한다. 그때마다 늙은 공은 문안에서 부복하고 신하로서의 절개를 지켰다. 주위 사람들이 왜 이왕이면 문밖에 나가 부복하지 않느냐고 하였다. 이에 상 정승은 정색을 하면서 "임금의 행차에 신하가 부복하는 것은 마땅한 도리이나 임금의 눈에 띄어 괴임을 받으려하는 것은 임금을 섬기는 바른 도리가 아니다"하며 매양 하던대로 지켜 나갔다 한다.

공은 아들에게 내가 죽으면 너희는 나의 행장을 지을 때 다른 말은 쓰지 말고 「늙게 거문고 타기를 즐겨왔으며 거문고를 타다가 문득 임금의 은혜에 감읍하면서 여생을 보냈노라」고 쓰라 하였다.
공이 남긴 글과 말속에서 그의 덕성을 엿볼 수 있으려니와 그는 노비의 천한 지위에 있는 자라도 착함이 있으면 반드시 말과 안색으로 칭찬하였으며 항상 검소한 생활을 하여 15년간의 정승자리에 있으면서도 조복이외는 비단옷을 입지 않고 항상 포의처럼 생활하였다 한다. 또 조석에 반찬 그릇이 많으면 상밑에 내려놓고 말하기를
「옛 어른들은 식미를 중히 여기지 아니했거늘 항차 나 같은 사람이 식미를 택할 수가 있겠는가?」하였다 한다.
공은 비록 성격이 너그럽고 후하나 권세를 가진 간사스러운 신하를 배척함에는 그를 따를 사람이 없으며 그의 청빈한 정신은 정사의 기반이 되었다 한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에 정승이 약 500명 가량 배출되었었다. 그 중에서 정승으로 능력을 갖춘분은 그리 많지 못했다. 세줄을 타고 정승이된 사람, 간교와 아첨으로 자리를 얻은 사람 등 지탄을 받는 인사도 많이 있다. 그런데 정승다운 정승을 찾아본다면 세종때의 황희와 맹사성 그리고 상진 정승 세분 뿐이라 하였다. 상정승은 15년의 긴 세월을 정승으로 재직하였으며 당시 명종 임금때의 조정이 대윤:소윤의 싸움으로 어려운 시기였으나 태산과 같은 무게로 원만무애한 처신에 아무도 상정승을 헐어 말하지는 못하였다. 다만 상정승 집안에 알 수 없는 불가사의가 있다. 그것은 옛말에 「덕을 쌓는 집안에 복이 돌아온다.」고 하였는데 상정승과 같은 덕인의 후손이 그리 창달하지 못하였다. 그 불가사의는 설화가 우리고장에 구정으로 전해오고 있다. 그 설화는 다음과 같다.

상정승이 퇴관하여 향저에 머물러 계실때의 얘기라고 한다. 이때 상정승에게 혼인할 나이가 된 약관의 아들이 있었다 한다. 사방에서 혼담이 들어올 때의 일이다. 이때 상정승이 향저의 사랑방 대청에 앉아 있는데 한 양민이 허름한 차림으로 댓돌 아래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무슨 어려운 말을 하려하나 말이 잘 나오지 않는 모양으로 머뭇거리기만 했다. 상정승은 의아하게 생각하여 "무슨 사연이 있기에 그러느냐. 어서 말하여 보아라"하며 말하기를 재촉하였다. 후덕한 말씨였지만 매우 엄숙하였다. 그러나 그 양민은 얼른 말문을 열지 못하고 있다가 재삼 독촉을 받고서야 간신히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자기의 생각을 아뢰우기 시작하였다.

"소인에게 딸이 하나 있아온데 이제 과년이 되어 짝을 찾아 여위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합당한 혼처를 구하여 혼가를 시키려 하였는데 영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까닭을 물으니 외람스럽게도 정승댁 며느리로 들어가야할 몸인데 어디 함부로 혼담이냐고 하며 일언에 거절합니다. 소인이 이 가당치 않은 말에 어이가 없어 딸아이를 타일렀습니다. 우리집 가문이 어디 상정승댁과 혼인할 처지냐 언감생심 천벌을 받을려고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꾸짖었더니 딸년은 당돌하게도 제가 상정승댁 며느리로 들어가야 상정승댁이 계속 번창할 수 있으니 상정승댁에 가서 이 말을 전해 달라고 하며 식음을 전폐 하므로 딸년 죽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어 죽을 각오를 하고 와서 감히 입을 열어 사뢰옵니다."

상정승이 이 말을 듣고 "너의 딸아이가 분수를 모르는 생각을 하는구나 우리집 아들은 이미 성혼한 곳이 있으니 네 딸은 단념하고 좋은 곳 선택하여 출가시키도록 하여라"하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러나 그 사나이는 얼른 물러날 생각을 아니하고 다시 고개를 조아려 말하기를 "소인의 딸아이는 예사 아이가 아닙니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였으며 천수를 점치는 재주가 있어 제 운명을 점치는 능력이 있아오니 예사로 듣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때 상정승이 대답할 겨를도 없이 상정승을 모셨던 선비들과 청지기들이 우루루 모여들어 내몰며 "분수 모르는 주제에 엉뚱한 소리한다"고 혼내였다.

그후 양민은 여러차례 또와서 상정승 뵙기를 청했으나 청지기들은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여 아예 상정승께 알리지도 않았다. 그후 양민의 딸은 스스로 상정승댁에 찾아와서 며느리로 맞이해 줄 것을 애걸복걸하였으나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았다. 그러자 그 처자는 하늘을 향하여 허희탄식하며 말하기를 "내가 한미한 양가의 딸이기는 하나 처자의 몸으로 청혼했다가 거절을 당하고 어떻게 얼굴을 들고 살아 있을 수 있으리오. 이제는 상정승댁 가운도 그만이구나"하며 대문 기둥에 머리를 부딪쳐 혼절하고 말았다. 깜짝 놀란 상정승댁 사람들이 방에 누이고 치료했으나 깨어나지 않고 저 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후 상정승은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고 장마에 전답이 유실되어 가산이 허물어 졌으며 역병에 가족이 꺾이는등 환란이 거듭하여 가운이 영영 기울고 말았다.
이 구전되는 설화가 얼마나 사실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후덕한 상정승댁이 영화롭게 계승하지 못하니 이런 설화가 나왔음직하다.

상씨는 천안지방에 대를 이어 살아왔으나 그 손이 그리 많지 않으며 영달한 이도 적은 것으로 알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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