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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의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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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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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용두사지 철당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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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국보  제41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 48-19 
시 대 고려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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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에 행사가 있을 때, 그 입구에는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이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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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간이 서 있는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는 예전에 용두사라는 절이 자리잡고 있던 곳이다. 용두사는 고려 광종 13년(962)에 창건되었으나 고려말의 잦은 전쟁과 난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고, 절이 있던 터는 청주시내의 가장 번화한 거리로 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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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간은 밑받침돌과 이를 버티고 있는 두 기둥이 온전히 남아 예전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두 기둥은 바깥면 중앙에 세로로 도드라지게 선을 새겨 단조로운 표면에 변화를 주었다. 그 사이로 원통 모양의 철통 20개를 아래위가 서로 맞물리도록 쌓아 당간을 이루게 하였고, 돌기둥의 맨 위쪽에는 빗장과 같은 고정장치를 두어 당간을 단단히 잡아매고 있다. 특히 세 번째 철통 표면에는 철당간을 세우게 된 동기와 과정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원래는 30개의 철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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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간을 세운 시기는 절의 창건과 때를 같이 하는 고려 광종 13년(962)으로,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어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또한 당간이 남아 있는 경우가 드문 우리 문화재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이곳과 함께 공주 갑사, 안성 칠장사의 세 곳에서만 철당간을 접할 수 있어 보기 드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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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청주에는 이 유물과 관련된 일화가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예로부터 청주에는 홍수에 의한 재난으로 백성들의 피해가 많았는데, 어느 점술가가 이르기를 큰 돛대를 세워 놓으면 이 지역이 배의 형상이 되어 재난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결국 이곳에 돛대 구실을 하는 당간을 세워 놓으니 재난을 피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청주를 주성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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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계유명전씨 아미타불삼존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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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국보  제106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명암동 87 국립청주박물관 
시 대 통일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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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연기군 비암사에서 발견된 이 삼존석상은 4각의 긴 돌 각 면에 불상과 글씨를 조각한 비상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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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은 가장자리를 따라 테두리를 새기고, 그 안쪽을 한 단 낮게하여 아미타삼존상을 조각하였다. 커다란 연꽃 위의 사각형 대좌에 앉아 있는 본존불은 얼굴 부분이 갸름한 모습이며, 신체는 건장하면서 안정된 자세를 이루고 있다. 부처가 설법할 때의 손모양을 하고 있는 손은 비교적 크게 표현되어 삼국시대 이래의 전통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양 어깨를 감싼 옷은 사각형의 대좌를 거의 덮고 있으며, 대좌 밑의 좌우에는 사자상을 배치하였다. 둥근 머리광배는 3줄의 동심원 안에 연꽃을 장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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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 등위의 연꽃무늬 대좌 위에 서 있는 협시보살상은 본존불 쪽으로 몸을 약간 튼 자세로, 얼굴은 훼손이 심하여 알아볼 수 없으나 연꽃이 새겨진 둥근 머리광배가 남아 있다. 본존불과 협시보살의 어깨 사이에는 나한상이 얼굴만 내밀고 있으며, 협시보살상의 양 옆에는 인왕상이 서 있다. 불상 위로는 불꽃무늬가 새겨진 광배가 이중으로 있으며, 안쪽의 광배에는 5구의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다. 광배 밖의 좌우 공간은 한층 더 낮추어 비천상을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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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측면의 하단에는 정면을 향하고 있는 용머리를 조각하고, 그 위로는 연꽃 위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을 표현하였다. 뒷면은 4단으로 나누어 각 단마다 5구씩의 작은 부처가 앉아 있는 모습을 조각하였으며, 불상 사이사이에 사람의 이름과 관직을 새겨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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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이 정교하면서도 장엄하고, 세부 양식에 있어서도 옛 형식을 남기고 있는 점이 계유명 삼존천불비상(국보 제108호)과 비슷하며, 만든 연대는 삼국통일 직후인 문무왕 13년(673)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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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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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기축명아미타여래 제불보살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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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보물  제367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명암동 87 국립청주박물관 
시 대 통일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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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암사에 있는 3점의 비상 가운데 하나이다. 배 모양의 큰 돌에 조각을 하였는데, 앞면에만 조각이 있고 뒷면에는 4줄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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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면에는 부처와 보살의 모습이 여러번 변하는 듯하여 마치 극락세계의 장면을 돌 위에 새긴 것과 같다. 맨 밑에는 연꽃을 둘러 석상 전체의 대석으로 삼고 그 위에 난간과 계단을 놓았다. 그 위에는 물결무늬로 연못을 표현했고, 난간 좌우에는 사자를 서로 마주보게 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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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 중앙에 큰 연꽃이 있고, 그 위에 본존인 아미타불이 앉아 있다. 좌우에는 서 있는 자세의 여러 불상이 나열되어 있어 엄격한 좌우대칭 수법을 따르고 있다. 크게 새긴 본존불의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오른손은 뚜렷하지 않으나 왼손은 가슴 아래에 들고 있다. 본존 좌우에는 보살상이 있고 그 사이에 열반의 경지에 이른 성자인 나한의 상반신만 표현하였다. 보살상 옆에는 사나운 귀신인 야차상이 한손을 들어 천궁을 받들고 있으며, 그 옆에는 수호신인 인왕상이 있다. 본존 위에는 반원 모양으로 5구의 작은 부처가 새겨졌고, 그 위에는 다시 7구의 작은 부처가 표현되어 있다. 이 불상들 사이에는 나뭇가지와 잎이 표현되었고, 구슬과 장신구가 새겨져 극락의 화려한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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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신문왕 9년(689)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삼국시대 불상 요소와 새로 들어온 당나라 요소가 혼합된 통일신라 초기 불상양식의 좋은 예로 본존이 아미타불인 점으로 미루어 당시 신앙의 흐름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을 주고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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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미륵보살반가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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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보물  제368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명암동 87 국립청주박물관 
시 대 통일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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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돌로 만든 이 석상은 그 생김새가 탑비를 닮았다 하여 비상이라 불리는데, 아래쪽의 대좌, 중앙의 사면석, 위쪽의 덮개돌이 모두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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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자형을 이루고 있는 이 비상은 정면에 왼발을 내리고 오른발을 왼쪽 다리에 올린 반가상을 크게 새기고 있다. 오른손을 들어 뺨에 대고 생각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반가상은 머리에 화려한 관을 쓰고 있으며 목걸이와 구슬장식을 갖추고 있다. 양 측면에는 두손에 보주를 들고 정면을 향하고 있는 보살입상이 새겨져 있는데, 반가상을 본존으로 삼아서 3존 형식을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뒷면에는 보탑을 크게 새겼는데 이 보탑으로 보아서 정면의 반가상이 미륵보살을 형상화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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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각형의 대좌에는 중앙에 둥근 화병을 놓고 그 좌우에 꿇어 앉은 공양상을 조각하였는데, 대좌의 양 측면에도 정면을 향해 꿇어 앉은 공양상을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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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석상은 삼국시대 우리나라에서 유행한 미륵신앙을 배경으로 크게 발달한 반가사유상 양식의 귀중한 유품이며, 만든 연대는 조각솜씨로 미루어 보아 충남 연기군 비암사에서 함께 발견된 계유명전씨아미타불삼존석상(국보 제106호)과 같은 673년으로 추정된다. 백제가 멸망한 지 얼마되지 않은 시기에 그 영역에서 조성된 이들 석상은 백제의 석조미술 수준을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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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순성좌리4등공신록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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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보물  제716호  
지 정 일 1981.03.18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개신동 산48 충북대학교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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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신녹권이란 공이 있는 신하에게 왕의 명을 받들어 공신도감에서 발행하는 공신임명증서를 말하는데, 이 녹권은 조선 성종임금이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데 도와준 신료를 공신에 임명하고 그에 상응하는 녹을 내린 것을 기록한 문서이다. 이 문서는 4등에 임명된 숭정대부행호조판서 김길통에게 내린 것으로, 여기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좌리공신은 1등 7명, 2등 12명, 3등 18명, 4등 36명으로 총 인원은 73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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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이것은 공신 개개인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공신의 수와 같이 발행되었으나 전하는 것은 거의 없어, 현재는 3등 공신에 임명된 이숭원의 녹권과 김길통의 녹권이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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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에 기록된 인물들을 통해 성종 대의 정치세력의 일면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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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용화사 석불상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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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보물  제985호  
지 정 일 1989.04.10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사직동 216-1 용화사 
시 대  고려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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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화사 법당 상량문(건축공사의 시작과 끝, 참여자의 이름을 기록한 글)에 의하면 이곳은 1902년에 만든 절로, 엄비의 꿈에 청주에서 7구의 석불이 나타나 집을 지어달라고 간청하자, 사람을 보내어 청주 서북쪽의 냇가에서 이들 석불을 발견하였다는 유래가 있다. 그리하여 용화사를 세우고 미륵보전에 7구의 석불을 모시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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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구의 불상과 2구의 보살상으로 되어있는 석불들은 모두 거대한 불상이라는 점이 주목되는데 최고 5.5m, 최저 1.4m이다. 이들 중 왼쪽 3번째의 불상은 머리 위에 솟아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유난히 크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신체는 전체적으로 양감이 풍부하며 가슴 부위에 卍 자가 양각되어 있다. 왼쪽 5번째 불상은 독특한 옷주름이 있고, 뒷면에는 거대한 나한상이 조각되었는데 이는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 머리 부분과 양 손을 나중에 보수한 석조여래입상은 머리 위에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큼직한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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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구의 불상들은 모두 양 어깨를 감싼 옷을 입고 있는 입상과 좌상으로 얼굴과 세부기법, 특히 옷주름 표현과 손모양 등을 감안할 때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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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류두공부시언해권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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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보물  제1051-3호 
지 정 일 2004.05.07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866 청주고인쇄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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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시인 두보(712∼770)의 두공부시를 성종 때 홍문관전한 유윤겸 등이 왕명을 받들어 제주를 참정하고 한글로 역편한 것이다. 두공부시라 제명한 것은 두보가 공부원외랑의 벼슬을 지냈기 때문이며, 분류는 송조의 분문집주두공보시를 참고하고 서명에 관기한 것이다. 그리고 원(元)나라 때 편찬된 찬주분류두시를 원본으로 두보의 시 1,647편 전부와, 다른 사람의 시 16편에 주석을 달고 한글로 언해한 책으로 흔히 ‘두시언해’로 통칭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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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조선 성종 12년(1481)에 을해자 및 을해자 병용 한글자로 간행된 것이 그 초간본이다. 권두의 서명은 ‘분류두공부시 권지이십일’로 되어 있으며, 별도의 저자 표시는 보이지 않고 있다. 판식은 사주단변이며 반엽을 기준으로 8항 17자를 기본으로 하여 작은 자와 한글 활자를 함께 배열하고 있고, 판심부에는 ‘두시’의 판심제와 장차가 새겨져 있다. 한글에는 방점이 남아 있어 임란 이전의 국어현상을 반영하고 있다. 모두 45장으로 되어 있으며 상태가 양호한 편이나, 전후의 표지가 모두 개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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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성리대전서절요권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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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보물  제1157-2호 
지 정 일 2004.05.07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866 청주고인쇄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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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조선 중기의 문신 김정국이 성리대전을 요약하여 4권으로 편집한 후, 그 당시 나주 관청에 보관해 있던 금성목활자를 기본으로 하고 부족한 것은 새로 보충하여 성리대전서절요 400부를 간행한 것이다. 권말에 있는 김정국의 후서에 보면, 그 인출경위는 절요자 김정국이 중종 33년(1538) 여름 호남관찰사의 명을 받고 부임한 이후, 도사 김회백과 의논하여 금성인 나주목에 있던 목활자에 부족자와 결자를 새겨 보완하여 그해 가을에 간행하였던 사실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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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모두 4권 4책으로 편성되어 있는데, 권1의 권두에는 서문이, 그리고 권4의 후미에는 김정국의 후서가 수록되어 있다. 권1의 서문이 끝나고 장을 바꾸어 권두서명이 나타나고 이어서 바로 ‘태극도총론’편으로부터 본문이 시작된다. 권두제면의 반엽을 기준으로 판식의 특징을 살펴보면, 변란은 사주단변이나 간혹 쌍변의 경우도 보인다. 반엽은 모두 10항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한 항은 19자씩 배자되어 있는 상태이다. 중앙의 판심부는 상하로 대흑구가 보이고 있는데, 그 사이로 상하내향 흑어미가 새겨져 있으며, 흑어미 안으로 판심제 ‘성리대전’과 권장차가 새겨져 있다. 각 책의 권두에는 신선로와 종형의 장서인이 날인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본래 유명인사가 소유했던 장서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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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4의 말미에 후서(後序)가 수록되어 있는데, 후서 끝에 ‘가정무술추 문소김정국근지’란 기록이 보이고 있어, 이 책이 바로 중종 33년(1538)에 간행된 것을 알 수 있다. 전책(全冊)의 표지의 상태가 비교적 양호하며, 본문의 경우도 충식이 전혀 나타나지 않은 상태인 점으로 보아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전체분량은 권1은 64장, 권2는 56장, 권3은 62장, 권4는 67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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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운천동 출토 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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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보물  제1167호 
지 정 일 1993.09.10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명암동 산81 국립청주박물관 
시 대 통일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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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시 운천동에서 금동불상과 징 모양의 금고와 함께 출토된 동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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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길이가 78㎝, 종 몸체 높이 64㎝, 입지름 47.4㎝인 중간 크기의 종으로 위·아래 단에 어떠한 문양도 없이 단순하게 처리된 것이, 오히려 이 종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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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형의 유곽 너비부분에는 3구의 비천상과 당초문, 3보 문양으로 꾸몄고, 그 안에 9개의 돌출된 유두가 있다. 종 몸통에는 2구의 비천상이 조각되어 있다. 연꽃으로 장식한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2개 가지고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덩굴무늬가 새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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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용통은 일부 없어졌으나, 종의 고리부분인 용뉴는 한 마리 용이 입을 벌리고 목을 구부리고 있는 형태가 완전히 남아 있어, 통일신라시대 말기(8∼9세기 경)의 종임을 짐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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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보살사 영산회괘불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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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 목  보물  제1258호 
지 정 일 1997.08.08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시 대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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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 뜰에 걸어 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화를 말하며, 영산회상도는 그 중에서 석가가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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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사영산회괘불탱은 길이 6.13m, 폭 4.26m로 삼베 위에 그린 것이며, 붉은색을 주로 사용하였고 녹색·황색 등 중간색을 넣어 밝은 화면을 보여준다. 남아 있는 글을 통해 조선 인조 27년(1649)에 경기도·충청도 등지에서 활약했던 신겸, 덕희, 경윤 등이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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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에 앉아 있는 석가모니 본존불은 사각형의 얼굴에 이목구비가 근엄하고 엄격한 표정을 지니며 당당한 신체에서는 중후한 모습을 풍긴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 걸치고 있는 모습이며, 오른손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하단의 8대보살, 중단의 10대제자 등은 석가불 주변을 빽빽하게 에워싸며 좌우대칭의 구도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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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존불의 얼굴이 또렷하고 신체가 당당하여 화면을 압도하는 듯하며, 선명한 색채·화려한 문양·석가를 둘러싼 무리들의 세밀하고 단아한 묘사로 당대 불화의 대표작으로 높이 평가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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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수보살계법·범망경보살계본합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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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보물  제1407호 
지 정 일 2004.05.07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866 청주고인쇄박물관 
시 대 고려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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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후진의 구마라즙이 번역한 범망경노사나불설보살심지계품 권하와 이 경전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지는 보살계도량이나 수계법회 등의 절차와 규범인 북송의 연수가 집한 수보살계법, 그리고 진나라 혜사가 찬한 수보살계의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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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망경』은 승조의 후서에 따르면 112권 61품으로 구성된 범문이 있었으나 전체는 한역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책은 상하 2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 하권만 따로 뽑아 보살계본으로 삼아 불교도의 신행 규범으로 삼고 있다. 내용은 보살이 지켜야 하는 10가지 무거운 계와 십선계 등 보살이 지녀야 할 몸가짐과, 말씨와 마음자세 등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실천덕목을 담고 있다. 신라시대부터 한국불교 종단의 조직 및 유지에 큰 영향을 미친 경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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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종이 앞·뒷면에 모두 인쇄되어 있는 등 인쇄상태 및 인쇄조건, 그리고 발문의 내용 등으로 보아 1306년 이후에 고려인들에 의해 원나라에서 판각하여 원나라 종이로 찍어낸 판본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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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금강반야바라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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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보물  제1408호 
지 정 일 2004.05.07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866 청주고인쇄박물관 
시 대 고려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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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목판본으로 구마라즙이 번역한 금강경을 바탕으로 육조 혜능이 금강경에 대해 해석한 내용을 붙인 것이다. 『금강반야바라밀경』은 줄여서 ‘금강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모든 법이 실체가 없으므로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라는 공사상을 중심사상으로 하고 있다. 제10의 <장엄정토분>에서는 청정한 마음으로 외적인 대상에 집착함이 없이 ‘마땅히 머무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 것’을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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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혜능 및 여러 고승들을 깨닫게 한 유명한 구절이다. 우리나라에서 조계종의 근본경전으로 반야심경과 함께 가장 많이 읽히는 경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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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충렬왕 31년(1305) 청주 원흥사에서 개판된 점이 주목되는데, 곧 원흥사의 육구, 박지요거사 등이 발원한 사찰판이다. 이는 1377년의 흥덕사 간행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이전에 간행된 판본으로서, 청주지역이 우리나라 인쇄문화의 발흥지임을 나타내는 중요한 자료라는 점에서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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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대방광불화엄경소권48,6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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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보물  제1409호 
지 정 일 2004.05.07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866 청주고인쇄박물관 
시 대 고려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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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대승경전의 하나인 화엄경(주본)을 저본으로 당나라 징관이 주소하고 여기에 송나라 정원이 주해한 교장류의 일종이다. 일반적으로 ‘대방광불화엄경’은 줄여서 ‘화엄경’이라고 통칭되기도 하며,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중심사상으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화엄종의 근본경전으로 ‘법화경’과 함께 한국 불교사상을 확립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경전이다. 이러한 화엄경에 화엄학의 대가인 당나라 징관이 주소한 화엄경소를 송나라 정원이 주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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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판본은 저자인 정원이 의천에게 상인 서전을 통해 보낸 목판으로 주본 화엄경을 주해한 주소본 120권을 찍어낸 것 가운데 권48, 64, 83에 해당하는 것으로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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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는 상즙으로 염색한 종이를 사용하였고, 중앙의 제첨은 금니로 그리고 그 안에 표지서명 또한 금니로 기재하였다. 판식의 특징은 상하단변으로 계선이 보이고 있으며, 한 행은 15자씩 배자되어 있다. 한 장은 5면씩 접혀 있으며, 점련부분에는 판수제가 기입되어 있어 작업과 관리의 편리를 위한 의도로 고려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지질은 저지만을 사용하여 만들었으며, 표면의 광택과 묵즙의 번짐을 방지하기 위해 도침한 흔적이 보이는 상품의 고려지이다. 그런데 권83의 말미에 ‘가정 31년(1552) 임자…시봉…’라는 묵서가 남아 있는데, 인출기로 보기 어렵고 소유를 나타내는 장서기로 생각된다. 자체는 송판에서 유행한 전형적인 구양순체로 보이며, 인쇄면의 필획이 살아 있어 비교적 초기에 인출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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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주본 화엄경소 120권 가운데 3책으로서 당시 대각국사 의천의 불서 수집 상황과 더불어 송과 일본으로 이어지는 문화교류를 알게 하는 소중한 자료가 되는 불경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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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신경행청난공신교서 및 관련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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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보물  제1380호 
지 정 일 2003.08.21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명암동 산81 국립청주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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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행(1559∼1623)과 관련된 문적으로 신경행 청난공신교서를 비롯하여 유서, 시호서경(2점), 증시교지, 조은신공시장, 청난원종공신록권, 이십공신회맹록, 이십일공신회맹록 등 모두 8종 9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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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행은 조선 선조 10년(1577) 문과에 급제하여 한산군수가 되었으며, 충청도병마절도사 등의 벼슬을 하였다. 선조 29년(1596) 7월에 이몽학이 충청도 홍산에서 난을 일으켰을 때 이를 평정하는데 세운 공으로 청난공신이 되어 영성군에 봉해졌다. 죽은 뒤에 예조판서에 증직되었고, 시호는 ‘충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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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행 청난공신교서는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신경행에게 내린 것으로,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선무공신 및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한 호성공신과 함께 선조 37년(1604)에 발급되었다. 이 교서는 녹훈 사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청난공신 포상 규정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교서의 양식과 문체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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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는 선조 41년(1608) 6월 16일에 신경행을 충청도병마절도사로 임명하면서 제1부의 밀부를 내린 유서이다. 유서 가운데 제1부를 내린 것은 매우 희귀한 것으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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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서경(2점)·증시교지·조은신공시장 등은 신경행이 ‘충익’이란 시호를 받는 과정을 알 수 있는 문서들이다. 시호서경은 사헌부 시호서경과 사간원 시호서경이 있는데, 순조 11년(1811) 6월에 증예조판서 신경행의 시호를 충익으로 정하는 것에 대하여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동의한 문서이다. 증시교지는 순조 12년(1812) 1월에 신경행에게 충익의 시호를 내리는 교지이다. 조은신공시장은 신경행이 시호를 받기 위하여 그가 살았을 때의 한 일을 가선대부 김이영(1755∼1845)이 지은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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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난원종공신록권은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선조 38년(1605) 4월 16일에 공신도감에서 신경행의 아들인 주부 신면에게 내려준 녹권이다. 이 녹권은 공신에 대한 대우와 포상규정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조 원종공신관계 연구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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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밖에 이십공신회맹록 및 이십일공신회맹록은 신경행과 관련있는 자료들로, 당시 20공신·21공신과 그 자손들의 동향 및 당시의 정치상황 등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이십공신회맹록은 숙종 6년(1680) 남인이 대거 실각하여 정권에서 물러난 경신대출척에 공을 세운 보사공신이 복훈되어 추록한 것을 계기로 숙종 20년 6월 20일 보사공신을 중심으로 역대의 공신 및 그 적장자들이 모여서 회맹제를 행하고 참여인을 수록한 명단이다. 이 회맹록에는 신경행의 4세손인 신득중이 기록되어 있다. 이십일공신회맹록은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분무공신의 녹훈을 계기로 영조 4년(1728) 7월 18일에 개국공신 이하 각 공신의 적장손들이 모여서 회맹제를 행하고 그 참여자를 수록한 명단이다. 이 회맹록에는 신경행의 6세손인 신광우가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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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행 청난공신교서 및 관련문적은 서지학·역사학 연구 및 조선조 공신관계 연구에 중요한 자료인 동시에 신경행 전기자료이기도 하므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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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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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상당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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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사적  제212호 
면 적 703.114㎡
지 정 일 1970.10.01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 산28-1 
시 대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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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산 계곡을 둘러 돌로 쌓아 만든 산성으로 백제 때 부터 이미 이곳에 토성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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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는 통일신라 초기에 김유신의 셋째 아들이 서원술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쌓여진 것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한다. 상당이란 이름은 백제 때 청주목을 상당현이라 부르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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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성은 임진왜란 때에 일부 고쳤으며 숙종 42년(1716)에 돌성으로 다시 쌓은 것이다. 성벽은 네모나게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았으며, 비교적 잘 남아있으나 성벽 위에 낮게 쌓은 담(여장)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성 안에 5개의 연못과 3개의 사찰, 관청건물, 창고 등이 있었는데, 현재는 문과 치성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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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 오르면 서쪽으로 청주·청원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여 서쪽 방어를 위해 쌓여진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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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흥덕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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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사적  제315호 
면 적 69,730㎡
지 정 일 1986.05.07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866 
시 대 통일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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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운천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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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발굴조사 때 금당터·서회랑터·강당터·부속건물들이 있던 건물터가 확인되었고 ‘흥덕사’라고 새겨진 쇠북(금구)조각이 나와 절의 이름이 흥덕사였음을 알 수 있었다. ‘대중 3년명’이라 새겨진 기와와 기타 유물들로 보아 늦어도 9세기에 지어져 고려 후기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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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미·기와조각·그릇 들과 청동제품이 많이 출토되었고, 현재 남아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직지심체요절』을 찍은 곳으로서 그 가치가 중요한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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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신봉동 백제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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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사적  제319호 
면 적 190,461㎡
지 정 일 1987.07.18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신봉동 산7 
시 대 삼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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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시내를 남동에서 북서쪽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무심천 서북쪽 기슭의 동쪽 비탈진 곳에 분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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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기의 고분이 조사되었는데 106기는 흙을 판 후 무덤을 쓴 널무덤(토광묘)이고, 1기는 널방과 널길을 가진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이다. 널무덤은 야산 전체에 걸쳐 분포하며, 봉분은 거의 깎여 나가 남아있지 않다. 출토 유물로는 여러가지 토기류·옥과 같은 장신구류·철로 만든 칼이나 도끼같은 무기류·말갖춤(마구류)과 그 밖의 숟가락 등이 나왔다. 90-1호 널무덤에서는 갑옷이 출토되어 백제철갑의 실물을 볼 수 있어 주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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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봉동 고분군은 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상당한 기간동안 만들어진 고분군으로, 대체로 4∼5세기경의 백제 고분군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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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봉동은 백제의 동쪽 변방지역으로 다른 유적에서 볼 수 없는 마구류·무기류가 많이 출토되어, 백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또한 돌방무덤은 서울지역의 백제 초의 것과 공주지역의 돌방무덤과 비교되는 자료로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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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정북동 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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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사적  제415호 
면 적 35483㎡
지 정 일 1999.10.28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정북동 351-1번지 외 
시 대 삼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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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호천변 평야의 중심에 있는 평지에 흙으로 쌓은 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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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든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상당산성고금사적기』에 궁예가 상당산성을 쌓아 도읍을 삼았는데, 견훤이 산성을 빼앗아 정북동 토성으로 짐작되는 토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어, 후삼국 쟁란기인 9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전반에 이루어졌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출토된 유물과 성의 위치, 주변 여건이 초기 성곽시설의 모습을 보이고 있어 더 오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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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길이는 675m이고 높이 3.5m, 폭은 8∼13m 정도 된다. 성안에서는 주거지, 기둥구멍, 길, 돌무더기 등이 확인되었고, 성 밖에서는 성을 둘러싸 보호하는 물길인 해자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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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성의 구조와 출토 유물들로 우리나라 초기의 토성 축조 연구에 큰 도움을 주는 중요한 토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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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민속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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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청주 출토 순천김씨 의복 및 간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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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중요민속자료  제109호 
지 정 일 1979.12.28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개신동 산48  충북대학교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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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봄, 청원군 석병산에 있는 채무이와 그의 부인 묘를 이장하게 되었을 때 관에서 나온 것으로 의복과 당시 채씨 집안에 오고간 서간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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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무이(1537∼1594)은 명종 10년(1555) 생원을 시작으로 세자 익위사대직을 지낸 인물로 그는 임진왜란 중인 선조27년(1594)에 죽었고 그의 둘째 부인인 김씨는 임진왜란 전에 죽은 것으로 보여 이곳에서 출토된 의복과 서간류는 임진왜란 전의 유물로 분류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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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복은 김씨 부인이 평소에 착용하였던 것으로 겹누비철릭 1점, 겹누비바지 2점, 겹회장저고리 2점, 직령 겹두루마기 1점, 목면 겹저고리 1점, 모시 치마 1점, 베적삼 1점, 모시철릭 1점, 토기 1점 등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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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시철릭은 흰색의 세모시로 된 겉옷으로 치수는 등솔기에서 소매끝까지의 화장길이 144㎝, 뒤품 40㎝, 소매길이 104㎝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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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는 길이 63㎝에 2㎜의 잔주름이 있으며 겉자락 6폭, 뒷자락 7폭, 안자락 2폭으로 총 15폭으로 만들어진 특이한 치마이다. 잔주름은 눌러 덧 박았는데 그 박음질 솜씨가 매우 섬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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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시 1점은 겉은 가는 명주이고 안은 굵은 명주이며 속에는 얇게 솜을 넣었다. 크기는 52㎝ ×39㎝로 비교적 큰 편이며 양쪽 부리에는 1㎝간격으로 곱게 선을 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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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릭은 조선시대 문무관리들이 외국에 사신으로 파견되거나, 국난을 당했을 때, 왕을 호위할 때 착용했던 옷으로 소매가 넓고 웃옷과 치마가 연결되어 있으며 허리에 주름이 있는 옷이다. 웃옷인 저고리는 몽땅하고 겨드랑이에 다른 천을 댄 무가 있으며 저고리 소매 뒤의 회장과 소매끝에 덧댄 천인 삼수가 상당히 넓다. 깃은 겹깃으로 고색을 띠고 있는데, 신라와 고려의 저고리를 상고하는데 도움이 되고있다. 저고리와 연결된 치마의 주름은 잔주름으로 되어있고 조선 초기의 포로서 깃모양이 직각으로 각진 직령이다. 특히 여기서 주목할만한 점은 여자도 철릭을 입었다는 사실과 철릭의 초기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복식사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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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도 만장 3점, 은장도, 돗자리, 목관, 표주박 1점씩이 출토되었는데 특히 언문서간 185점이 함께 출토되어 16세기 언어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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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청원 구례손씨 묘 출토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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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중요민속자료  제116호 
지 정 일 1981.11.11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개신동 산48  충북대학교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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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충북 청원군에 거주하는 변종화씨가 조상의 묘들을 이장할 때, 그의 11대 조부인 변유인(1566∼1641)의 둘째 부인인 구례 손씨의 묘에서 미이라화된 시신과 함께 발견한 의복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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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의복의 주인인 손씨의 생몰년대는 알 수 없으나 변유인씨와의 연령차를 10세로 보고 50세 때 죽었다고 가정한다면 1576년에서 1626년 사이에 해당되므로 임진왜란 전후시기의 유물로 볼 수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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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고리는 비교적 길이가 길고 소매 끝에 한삼을 단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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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주저고리는 사각모양의 목판깃을 하고 있고 앞쪽에는 고름이 달려 있는데 장식적 의미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너비 2㎝의 단순한 끈 모양으로 매는 용도로만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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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색단속곳과 겹솜바지는 요즘 한복 속에 입는 속바지와 같은 모습이지만 소색 단속곳은 허리에 끈과 밀방이 달려 있고 겹솜바지는 아래가 터져있다. 그밖에 옷감을 반폭씩 이어 붙힌 겹회장저고리와 트임이 75㎝나 되는 누빈창의 그리고 몽고의 영향을 받은 듯 보이는 소모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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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유물들은 임진왜란 전후의 옷으로 우리 복식의 옛 모습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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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청원 전 박장군 출토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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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중요민속자료  제117호 
지 정 일 1981.11.11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개신동 산48  충북대학교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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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원군 노계산에서 대청댐 수몰지역 내에 있던 박장군 묘라고 알려진 무연고 분묘를 이장하던 중에 나온 의복들로 그 종류가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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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남자 겉옷의 일종인 중치막 2점, 직령포 2점, 관복, 구의, 도포, 동방형포가 각 1점씩 나왔는데 특히 저고리 11점, 적삼 2점은 조선전기와 후기를 잇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아울러 겹유고, 겹유바지, 상의에 딸린 치마가 각 1점씩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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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의 단배자와 숙종이후의 당의의 중간치인 조끼모양의 배자 저고리가 3점 있는데 이들의 길이는 각각 66㎝, 65㎝, 66㎝이다. 또한 소매의 끝단에는 다른 천으로 덧댄 삼수가 10∼15㎝정도 달려있고, 적삼의 경우는 39㎝정도이고 등솔기에서 소매끝까지의 화장길이는 119㎝나 되어 저고리 길이보다 소매가 더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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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모양이 둥글어 단령이라고 불리우는 옷에는 옆에 협삼이 달려있어 김위묘에서 나온 의복과 비슷하고 흰색의 무명으로 만든 구의의 앞 여밈은 두루마기와 같다. 앞길 98㎝, 뒷길 60㎝로 소매는 단령이나 창의나 모두 중간 크기로 되어있어 임진왜란 전후의 다른 포들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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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포는 현존하는것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도포가 문헌상 선조대에 비롯되었다는 말과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소매통이 32㎝로 밋밋하여오늘날과 같이 도포의 소매가 넓어진 것은 18세기부터 임을 알 수 있다. 구의는 백색 무명으로 되어있고, 직령포는 짙은 청색의 소매가 좁은 포로서 소매끝에는 33㎝의 삼수가 달려있는데 왼쪽 소매를 조각조각 이은 것이 이휴정묘에서 출토된 직령포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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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는 청색의 목면으로 지었으며 소매가 좁고 70㎝의 옆트임이 있다. 동방형포는 백색 명주로 만든 중들이 입던 옷의 일종인 납의로서 소매가 길고 저고리의 길이가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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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바지는 여자용으로 보이며 바지밑이 있고 바지부리의 넓이가 넓다. 치마는 진한 갈색의 모란무늬가 있는 치마와 백색 명주치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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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는 높이 17㎝, 아래직경 25㎝, 둘레가 50㎝인 청색 비단으로 된 모자와 흰색과 갈색과 명주로 된 작은 모자가 있다. 이밖에 누비치마와 흰색의 무명 홀이불과 천금(시신을 넣는 관의 뚜껑에 안에 덮는 이불), 멱목(시신의 얼굴을 싸던 천), 악수(시신의 손을 싸던 천) 등이 함께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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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유물들은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옷의 형태와 질감, 무늬 등으로 추정하여 볼 때 임진왜란 전후의 의복으로 보이며 당시의 사회상이나 의복 양식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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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중원 김위 묘 출토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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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중요민속자료  제118호 
지 정 일 1981.11.11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개신동 산48  충북대학교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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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충주댐 건설로 충북 청원군에 있던 조선중기의 문신인 김위의 묘를 이장할 때 미이라화된 시신과 함께 발견된 의복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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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토된 의복에는 외국에 사신으로 파견될 때나 왕을 호위할 때, 국난이 있을 때 입었던 철릭과 지금의 두루마기 모습과 비슷하지만 옷깃이 직선으로 곧아 직령포라고 불리는 옷과, 옷깃이 둥글어 단령이라 불리는 옷 그리고 옷의 일부가 트여져 있는 창의, 여름에 입기 위해 삼베로 만든 저고리인 적삼, 한복 속에 입는 바지인 속곳과 솜버선 그밖에 시신을 덮었던 명주로 만든 천금 등으로 목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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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삼베적삼 ②명주겹직령관복 ③자색명주철릭 ④무명누비속곳 ⑤명주누비속곳 ⑥무명잔누비창의 ⑦갈색겹유창의 ⑧무명솜버선 ⑨명주겹유창의 ⑩명주홑철릭 ⑪명주누비창의 ⑫명주누비솜속곳 ⑬명주겹철릭 ⑭명주유직령포 ⑮관복(단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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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옷들은 임진왜란때 현감을 지냈던 김위의 것으로 당시 의제를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깃이 둥근 단령과 깃이 직선으로 각이 진 직령이 함께 출토되어 그 이전까지 불분명했던 의복의 표리관계가 확실히 밝혀졌다. 즉 평상시에는 직령이나 창의를 입고 있다가 관청에 출근 할 때 단령을 위해 걸쳐 입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직령은 겹으로 되어있고 단령은 홑겹으로 만들어졌으며 소매는 좁은 편으로 조선초의 전형적인 의습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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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의 유물들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우리나라 복식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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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안동김씨 묘 출토 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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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중요민속자료  제217호 
지 정 일 1987.11.23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개신동 산48 
시 대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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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중부고속도로 건설로 경기도 광주군에 있던 안동 김씨 묘역을 옮길 때 출토된 의복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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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여류작가 허난설헌의 시아버지인 김첨과 15∼16세로 보이는 그의 딸, 김대경의 처인 원주 원씨의 유품으로 16세기말에서 17세기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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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토된 유물은 지금의 두루마기와 비슷한 모습이지만 깃이 사각형모양으로 각이져 있어 직령포라고 부르는 옷을 비롯하여 저고리, 치마, 속옷, 목도리, 보자기, 솜이불 등으로 관의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넣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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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흰색 명주에 솜을 넣어 4㎝ 간격으로 누벼 만든 솜바지와 전형적인 직령포 모습을 하고 있는 명주 겹누비와 명주 솜누비의 직령포 2점은 김첨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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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딸로 보이는 15∼16세 정도의 여자 미이라와 함께 ‘안동김씨지구 ’라고 쓰여진 명정이 나왔는데 몸판과 소매가 연두색이고 동정은 흰색인 명주저고리와 앞판에 연두색 비단을 조각조각 이어 붙힌 저고리 2점이 그녀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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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원씨의 것으로는 앞판과 소매가 연두색이고 소매 끝은 진한 갈색인 안고름과 겉고름이 달려 있는 무명저고리와 안에 솜을 넣고 15㎝ 간격으로 누빈 솜저고리 2점과 치마 3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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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 삼베와 무명으로 만든 속옷, 흰색의 명주 목도리, 갈색의 꽃무늬 보자기가 있고 옷의 형태로 보아 18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주인을 알 수 없는 명주 솜저고리가 함께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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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에 따라 양식이 달라지는 복식사에서 주인과 시기를 알 수 있는 것으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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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유형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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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충청도 병마절도사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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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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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일 1976.12.21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 92-6 
시 대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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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읍성 안에 있던 충청도병마절도사영의 출입문이다. 병영의 출입문은 보통 원문이라고 부르며, 좌우로 담장이 이어져 병영을 에워싸고 있다. 충청도병마절도사영은 당초 충남 해미현에 있다가 조선 효종 2년(1651)에 이곳으로 옮기었다. 1988년까지 ‘청녕각’으로 잘못 알려져 서원현감 이병정이 세운 것으로 여러 책자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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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네모진 높은 주춧돌 위에 세운 2층의 누문으로, 아래층의 중앙에는 문을 달아 출입하고 위층은 마루를 깔고 난간을 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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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서읍지와 청주읍지를 보면 정곡루가 병영에 있음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병영내에 누각은 통군루와 정곡루가 있을 뿐인데 ‘충청병영도’와 ‘청주읍성도’에 통군루는 문루 안쪽의 서편에 있는 2층 건물로 나타나 있어, 정곡루가 바로 문루의 명칭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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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병영이나 수영의 출입문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성곽건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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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용암사 비로자나불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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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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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일 1976.12.21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우암동 3 
시 대 통일신라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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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대학교 안 용암사에 있는 불상으로, 광배는 없고 대좌와 불신만이 남아있는 통일신라 후기의 전형적인 비로자나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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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로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큼직하게 표현되었다. 활모양의 눈썹, 큼직한 코, 굳게 다문 입 등은 양감있는 얼굴과 알맞게 조화되어 원만한 인상을 보여주고 있다. 두 귀는 거의 어깨까지 내려왔으며 목에는 부드러운 곡선의 3주름이 표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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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옷주름은 좌우대칭의 평행선으로 약간 도식화되었다. 단정하나 활력이 없고 약간 위축된 듯한 신체의 표현은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대좌는 상·중·하대로 구성되었는데 중대석의 각면에는 향로, 보살상 등이 조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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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 말 내지 10세기 초의 전형적인 석불좌상 양식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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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보살사 석조이존병립여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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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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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일 1976.12.21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용암동 7 
시 대 고려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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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판석에 두 불상을 나란히 돋을새김 하였는데, 하나의 광배에 두 불상을 새긴 이른바 일광이불상으로 두 불상은 크기와 양식이 비슷하며 귀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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갸름하고 고운 어린아이같은 얼굴에 천진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으며 신체에는 부드러운 굴곡이 잘 표현되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간략한 옷차림과 좌우로 엇바뀐 두 손의 표현 등에서 불상의 순진무구한 성격이 잘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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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력이 줄어든 단아한 묘사와 간략한 기법 등에서 고려시대의 석조병존불입상으로 생각되며, 이러한 병존불입상은 석가불과 다보불의 병존불좌상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도 있어서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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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청주 탑동 오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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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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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일 1976.12.21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탑동 251 
시 대 통일신라 후기∼고려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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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탑동에 서 있는 탑으로, 지금 자리에서 서쪽으로 40m 지점에 무너져 있던 것을 옮겨 세운 것이다. 이 탑으로 인하여 ‘탑동’이라는 마을 이름이 생겨났다. 형태로 보아 2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렸을 듯 하나, 지금은 기단부가 거의 없어지고 탑신부는 1층의 몸돌과 1, 2, 3, 5층의 지붕돌만이 남아 있다. 5층 몸돌과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탑을 복원할 때에 보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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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만 남은 기단은 윗면에 탑신의 1층 몸돌을 받치기 위한 두꺼운 괴임조각을 두었다. 탑신의 1층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의 조각을 두고, 4면에 불상을 새겼는데 동쪽은 약사여래상, 서쪽은 비로자나불상, 남쪽은 석가여래상, 북쪽은 아미타여래좌상인 듯하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5단씩이며, 네 귀퉁이가 치켜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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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통일신라의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는 듯하나, 잃어버린 석재들로 인해 웅장했었을 탑의 옛모습을 볼 수 없음이 안타깝다. 통일신라 후기∼고려 전기 사이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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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청주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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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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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일 1977.12.06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대성동 67 
시 대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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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훌륭한 유학자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며, 지방백성의 교육과 교화를 담당하던 지방국립학교이다. 조선초에 처음 지어졌으며, 숙종 9년(1683)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현재는 제사공간인 대성전과 교육공간인 명륜당을 비롯한 6동의 부속 건물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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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나라로부터 토지와 노비·서적 등을 지급받아 운영되었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에 교육기능은 없어지고 제사기능만이 남아 옛 모습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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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보살사 극락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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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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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일 1980.01.09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용암동 7 
시 대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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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사는 신라 진흥왕 28년(567)에 의신이 처음 지었으며, 청주 근교에서 가장 오래된 유서 깊은 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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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불을 모신 극락보전은 조선 초기에 지은 것으로 선조(재위 1567∼1608) 때 수리하였으며, 고종 9년(1872)에 다시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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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소박한 맞배지붕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배치된 다포식 건물이다. 안에는 석조이존병립여래상(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4호)과 지장보살상, 삼존불상이 모셔져 있다. 또한 왼쪽 벽에는 극락회상탱이, 오른쪽 벽에는 칠성탱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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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사 극락보전은 조선 초기 건물의 특징이 강하게 남아있는 불전건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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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보살사 오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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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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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일 1980.11.13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용암동 7 
시 대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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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사는 청주 근교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 신라 진흥왕 28년(567)에 의신이 창건하였다. 보살사 극락보전 앞에 자리한 이 탑은 1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갖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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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단은 3단의 괴임돌을 크기를 줄여 쌓아올린 모습이다. 맨윗돌의 괴임 윗면에는 아래로 향한 8잎의 연꽃무늬를 조각해 놓아 통일신라 후기나 고려의 석탑양식이 엿보인다. 탑신부는 1층 몸돌의 각 모서리에 기둥모양을 새겼고, 그 사이에 사각형과 원을 조각한 뒤 범자(불교문자)를 새겨 넣었다. 지붕돌은 두껍고 네 귀퉁이는 치켜올림이 전혀 없다. 꼭대기에는 노반(머리장식받침)이 생략된 채 복발(엎은 그릇모양 장식), 보륜(수레바퀴 모양장식), 보주(꽃봉오리 모양의 장식)가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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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단의 독특한 표현이나 탑신부의 몸돌이 얕고 지붕돌도 단순화되는 등 전체적으로 단순화 된 아담하고 소박한 석탑이다. 탑을 세운 시기 시기는 탑신의 2층 몸돌의 한 면에 ‘간희계미’라 새긴 기록을 통해 정확하게 조선 숙종 29년(1703)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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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청주동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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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0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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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일 1982.12.17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북문로1가동 171-3 
시 대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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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헌은 조선시대에 지방장관인 감사나 수령이 공무를 집행하던 곳으로 관청의 중심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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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청주목 관청건물은 동헌을 비롯해서 객관·향사당 등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건물 한 채만 남고 모두 없어졌다. 기록에 의하면 영조(재위 1724∼1776) 때는 근민헌이라 했으며 고종 5년(1868)에는 이덕수가 다시 지으면서 청녕각이라 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의 기와에 순조 25년(1825)에 관청을 지었다는 글이 있는 것으로 보아 현재의 건물은 그 때 다시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앞면 7칸·옆면 4칸으로 1층이며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으로 가장 화려한 팔작지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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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목사가 있던 관청의 동헌 건물로는 격식이 낮고 왜소해 보이나 조선 후기 지방 관청건축을 원형대로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현재는 군청사의 일부로 이용하고 있어 본래의 모습을 잃고 있으나, 관아의 전체구조를 알려주는 자료로서도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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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망선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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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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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일 1982.12.17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1가 154 
시 대 고려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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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청주관청의 하나로 관리들이 머무는 숙소인 객관 동쪽에 있던 취경루에서 유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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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공민왕 10년(1361)에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기념으로 청주에서 과거시험을 치르고 이곳에 방을 써붙였다는 기록이 있다. 세조 7년(1461)에 수리하였고 한명회가 현판을 ‘망선루’라 하였다고 한다. 그 뒤에 다시 고쳐서 근세에까지 유지되다가 1923년에 제일교회로 이건되었으며, 2000년 12월 중앙공원으로 옮겨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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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면 5칸·옆면 3칸이며, 나무로 지은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으로 가장 화려한 팔작지붕으로 누각형식이다. 현재 1층은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게 되었지만, 이 지방에서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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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정하리 마애비로자나불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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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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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일 1982.12.17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정하동 산9-1 
시 대 고려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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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정하동에 있는 바위면에 새긴 마애불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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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는 마치 모자를 쓴 듯하며, 머리 뒤에는 동그란 머리광배가 표현되어 있다. 신체는 균형이 잘 잡혀 있으며, 자연스럽게 흐르는 얇은 선의 옷주름 표현이 돋보인다. 왼손 검지 손가락을 오른손으로 잡을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런 특징적인 손모양은 동화사 비로암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244호)이나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과 비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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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사각형의 얼굴, 잘룩한 허리, 볼륨있는 무릎 등에서 통일신라시대의 특징이 엿보이는 고려 초기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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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청주 탑동 양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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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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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일 1983.03.30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탑동 94-17 
시 대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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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들이 주거용으로 이용하던 건물로 1904년에 땅을 사기 시작해서 각각 다른 시기에 6동의 건물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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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실은 주로 돌을 사용하여 외벽을 쌓았으며, 6동의 건물 중 한 건물의 주춧돌은 카톨릭 순교자들이 있던 청주감옥의 벽에서 가져다 사용하였다고 한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만들지 못했던 유리, 스팀보일러, 벽난로, 수세식 변기, 철물류와 같은 수입자재가 많이 사용된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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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과 양식을 혼합한 건물로서 지어진 연대에 따라 서로 다른 건축적 특징을 나타내며, 서양식 건물의 초기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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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운천동 신라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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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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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일 1983.11.30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명암동 산81 국립청주박물관 
시 대 통일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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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비란 어떠한 사건에 관련된 사실이나 자취를 기록한 것으로, 이 비는 청주지방에 있던 어느 사찰과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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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 규모는 높이 92㎝, 너비 91㎝로, 네모난 형태이다. 1982년 발견되기까지 산직마을의 공동우물터에서 빨래돌로 사용되었는데, 그 탓에 글자가 많이 닳아 있다. 비문은 북조풍의 해서체로 새겼으며, 비의 크기에 비해 글자가 크다. 비문의 내용은 알아보기 어려운데, 대체로 불법을 찬양하고 임금의 덕을 칭송하며 삼국통일의 위업을 기리는 호국불교의 내용을 담으면서, 절의 창건에 관련된 내용을 많이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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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 ‘수공 2년’의 중국 연호가 있어 통일신라시대 신문왕 6년(686)에 이 비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당시 청주지역이 행정, 군사, 문화적으로 중요한 곳이였음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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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조헌 전장기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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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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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일 1984.12.31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 92-6 
시 대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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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의병장인 조헌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로, 임진왜란 당시 그가 승리를 이루었던 이곳 청주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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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은 명종 22년(1567)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치면서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는데 힘을 다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승병장 영규와 힘을 합쳐 청주성을 탈환하기도 하였다. 왜적이 금산을 중심으로 충청도 일대를 거머쥐려 하자 승병장 영규와 7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에서 적과 싸웠는데, 적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었지만 인원이 너무 적어 결국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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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네모반듯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큼지막한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비몸 앞면 위쪽에는 비의 명칭을 가로로 새겼고, 그 아래에 세로로 비문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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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이 끝난 후 숙종 36년(1710)에 비를 세웠으며, 김진규가 비문을 짓고, 이수당이 글씨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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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신전동 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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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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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일 1985.12.28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신전동 180 
시 대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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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에 지은 집으로 안채의 천장부재에 건축공사와 참여자의 이름 등을 기록한 상량문이 적혀있다. ㅡ자형의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가 ㄷ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는 길게 다듬은 돌을 3단으로 쌓은 받침대 위에 둥근 주춧돌을 놓고 네모 기둥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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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이 세워진 연대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안채·사랑채·행랑채가 모두 갖추어져 전통 주거건축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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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순치명 석불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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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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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일 1985.12.28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용정동 522 
시 대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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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용정동에 있는 이 불상은 돌기둥을 이용하여 얼굴과 상체를 조각하여 석장승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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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에는 큼직한 원형의 백호를 도드라지게 새겼고, 눈썹은 길고 커다랗게 표현하였다. 반달 모양을 한 입은 눈과 함께 얼굴 전체에서 미소를 띠게 한다. 손은 모아서 턱 밑에 괴고 있는데, 양 팔을 수평으로 처리하여 미숙한 조각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하체는 조각을 하지 않은 상태이며 중간부분에 순치(順治) 9년(효종 3년, 1652) 11월 16일에 만들었다는 글씨를 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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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찰의 수호신 역할을 하는 석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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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청주한씨 시조 제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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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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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일 1990.12.14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운동동 369-6 
시 대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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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한씨 시조인 한란의 유적지에 세워놓은 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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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속에 묻혀버린 받침돌 위에 비몸과 지붕돌을 올리고 있는데 비몸이 약간 서쪽으로 기울었고 비문이 심하게 닳아 읽기 어려운 실정이다. 비문에는 한란의 내력을 자세히 서술하여 모든 후손들이 제사 때마다 읽고 알 수 있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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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조 38년(1605) 당시 청주목사였던 한백겸이 청주 한씨 시조인 한란의 유적을 고증하여 찾은 뒤, 후손들이 이 터를 기억하도록 비를 세운 것으로, 그의 동생인 이조참판 한준겸이 비문을 지었다. 이 때에 위토(位土:제사 또는 이와 관련된 사항들을 집행하는데 드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마련된 토지)를 마련하여 제단을 쌓고 담을 둘러 경계를 표시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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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역사지리학의 대가이며 청주한씨 후손인 한백겸에 의해 시조의 옛 터가 고증되어 세운 비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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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서기사 석조약사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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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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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일 1993.11.05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율량동 91 
시 대 고려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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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율량동 서기사에 있는 불상으로 왼손에 약그릇을 들고 있어 중생을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준다는 약사불을 형상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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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뒤의 광배는 따로 만들어 놓았고, 목은 부러져 있던 것을 시멘트로 보강하여 놓았다. 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낮게 솟아 있으며, 얼굴에는 살이 통통하게 올라 있다. 당당해 보이는 어깨에는 왼쪽에만 옷이 걸쳐 있고 평행선을 이루는 옷주름을 그리면서 팔목과 무릎 아래까지 덮고 있다. 살이 찐 가슴은 노출이 많고 젖꼭지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주목되며, 손모양은 오른손 끝이 땅을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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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연대는 고려 중기로 추정되며, 전체 높이는 86㎝, 어깨 폭은 42㎝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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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구룡사 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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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9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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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일 2009.03.06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 산29-2 
시 대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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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사사적비는 상당산성 남문 앞에 있는 비석으로 구룡사의 창건과 상당산성의 개축사실을 기록하고 있으며, 영조 40년(1764년) 은재거사가 비문을 짓고 글씨를 새겨 건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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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은 ‘구룡사 사적비’이다. 이 비석에 새겨져 있는 비문을 통해 구룡사가 숙종 46년(1720년)에 절도사 이태망과 홍서일이 군영의 건물을 신축하고 연못을 팔 때 함께 창건했다는 기록과 함께 도천 스님이 창건한 절이라는 건립경위와 1743년에 대방광극락보전을 완성했다는 사실을 기술하고 있다. 또 숙종 42년(1716년)에 절도사 유성추가 상당산성을 개축하고 삼남의 요충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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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의 기록에 의하면 구룡사는 상당산성 서남암문 안쪽에 있던 사찰이었으나 현재는 남아있는 건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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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산성 남문 앞에 세워져 있으며 사적비는 높이 133㎝, 폭 56㎝, 두께23㎝의 비신을 세우고 상부에 가첨석을 얹었다. 좌대는 101x55㎝, 가첨석은85x49x32㎝)이다. 보존 상태는 상당히 양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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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산성의 개축과 상당산성 내 사찰의 기록을 살필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유물로서,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 관리함으로서 상당산성 정비의 당위성을 부여하고 상당산성을 찾는 관람객에게 역사적 사실을 올바르게 알려줘야 할 필요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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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무형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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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청주농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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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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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일 1992.10.23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강서1동 169-5 
기능보유자  청주농악보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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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악은 농부들이 두레를 짜서 일할 때 치는 음악으로, 꽹과리·징·장구·북과 같은 타악기를 치며 벌이는 음악을 두루 가리키는 말이다. 굿·매구·풍장·금고·취군 등으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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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농악은 강서 1동 지동마을에서 걸립·두레·백중·연의적 농사풀이굿으로 사용되면서 전해져온 농악으로 쇠꾼들이 열지어 움직이는 진풀이, 법고놀이와 인사굿, 꽃봉오리굿, 채상굿, 갈지굿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른 지방보다 여러 채 굿의 변화가 다양하고 농악의 가락이 빠르며 진법놀이가 다양하고 돌모를 머리 뒤에 쓰고서 상모를 돌리는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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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상쇠인 이종환씨가 청주농악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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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배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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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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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일 1999.11.19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봉명2동 2419 
기능보유자  홍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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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첩이란 글씨나 그림에 종이·비단 등을 붙여 족자·액자·병풍 등을 만들어서 아름다움은 물론 실용성 및 보존성을 높여주는 전통적인 서화처리기법을 가리킨다. 일제 때 들어온 말로 오늘날에는 ‘표구’라고도 한다. 배첩장은 조선 초기에 도화서 소속으로 궁중의 서화처리를 전담하던 사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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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한나라 때가 기원으로 알려진 배첩은 중국 당나라 때에 한층 발전하여 정립단계에 이른다. 우리나라에 어떻게 전해졌는지는 모르지만 고구려 고분벽화의 병풍그림으로 보아 삼국시대 때 전해져서 한국 배첩의 기초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배첩은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쳐 꾸준히 발전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배첩장이라는 전문가가 등장할 만큼 성황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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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첩의 제작기법 내지 형태는 액자·병풍·족자·장정 및 고서화 처리의 다섯 가지이다. 액자는 비단재단 - 그림초배 - 재배 - 건조·액자틀 준비 - 조립의 작업과정을 거친다. 병풍의 한 폭 처리도 액자와 같다. 족자의 작업과정은 재단 - 초배 - 겹배 - 건조 - 삼배 - 건조 - 축목·반달부착으로 이루어진다. 장정은 표지나 속지에 손상을 입은 고서의 처리를 말한다. 고서화처리는 손상된 고서화를 되살려 내는 작업이기에 높은 안목과 세밀한 기술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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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첩장은 전통공예기술로 문화재적 차원에서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으며 충청북도 청주시에 살고 있는 기능보유자 홍종진씨가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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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단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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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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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일 2001.09.14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사직1동 255-17 
기능보유자  권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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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청이란 목조건물이나 공예품, 조각품 등에 청·적·황·백·흑 등 다섯가지 색으로 여러 가지 무늬와 그림을 그려아름답고 장엄하게 장식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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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단청은 건물이나 기물 등의 부식 방지와 재질의 조악성을 은폐하고, 종교 등 신앙적인 의례를 행할 때 이를 일반 잡기와 구분하도록 하는 기능도 있다. 단청은 불교나 유교가 성행하였던 중국·한국·일본 등에서 일찍이 유행하였으나 현재까지 그 전통이 이어지는 곳은 한국뿐이다. 한국의 단청은 삼국시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불교의 수용과 함께 더욱 발전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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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부터 관청에는 화사, 화원, 화공, 가칠장, 도채장이라 하여 궁전을 비롯한 객사, 사묘, 누정 등의 단청을 하였고, 사찰에서는 금어, 화승이라 하는 자체 화공집단이 있어 사찰건축과 불상, 불화, 조각 등의 제작도 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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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청의 종류는 가칠단청, 긋기단청, 모로단청, 얼금단청, 금단청으로 나누어지고 다시 세분하여 모로긋기단청, 금모로단청 등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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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청장 권현규는 1968년 어린 나이에 화승인 영봉스님에게 입문하여 사사를 받아 현재까지 30여년간 단청에만 전념한 장인으로, 단청은 물론 탱화에까지 안정되고 화려 장중한 느낌의 우수한 작품을 많이 남기고 있다. 그는 불교미술전람회에 수차 입상을 하였고, \'연등초에 대한 고찰\'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는 등 단청의 보존과 발전에 노력하고 있는장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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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궁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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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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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일 2006.11.24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봉명동 614
기능보유자  양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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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시장이란 활과 화살을 만드는 기능과 그 기능을 가진 사람을 말하는데, 활    을 만드는 사람을 궁장(弓匠), 화살을 만드는 사람을 시장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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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은 목전, 철전, 편전, 장군전, 세전 등이    있었으나, 현재 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유엽전이다. 유엽전의 길이는    85cm 가량이나 사람과 활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다. 재료는 대나무, 꿩깃촉, 소심줄, 부레풀등이 있어야 한다. 도구로는 톱, 줄칼, 송곳, 통풀, 화로, 나무집    게 등을 갖추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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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전주에서 출생한 양태현은 16세에 조명제(중요무형문화재 시장 보유자)    선생 문화생으로 입문하여 11년간 전수를 받았으며, 1983년 청주로 이주하여  현재까지 약 40년간 전통적인 죽시제작의 맥을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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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기념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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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동래부사 송상현 충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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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충청북도 기념물  제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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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일 1977.12.06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 산105 
시 대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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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사는 임진왜란때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선조 28년(1595)에 묘소를 동래에서 이곳으로 이장하고 광해군 2년(1610)에 사당을 창건하였으며 그 후 여러 차례 중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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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현의 호는 천곡, 시호는 충렬인데, 선조 9년(1576) 문과급제후 선조 24년(1591) 동래부사가 되었다. 임진란이 일어나 왜군이 동래성에 육박하자 군사를 이끌고 항전하다 왜병에게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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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사 뒷산에는 송상현의 묘소와 현종 원년(1659)에 세운 신도비가 있고, 사당 입구에 선조 28년(1595)에 건립한 충신문이 있다. 지금의 건물은 1980년에 중수한 건물로 정면 3간, 측면 2간의 겹처마 목조기와집인데 내부는 통칸 마루방에 3개의 분합문을 달고 앞퇴를 두었으며, 마당 앞에 삼문을 세우고 주위에는 석축담장을 쌓아 보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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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시에서는 천곡선생의 애국충절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2001년에 인근 부지를 확장 정비하여 전시관과 사당을 신축하였으며, 주변을 공원화하여 시민들이 역사와 함께 호흡하는 공간으로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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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청주 표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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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충청북도 기념물  제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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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일 1977.12.06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수동 6-11 
시 대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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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때 문신인 이봉상(1676∼1728)·남연년·홍림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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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4년(1728)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키고 청주로 침입하자 당시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있던 이봉상을 비롯하여 남연년, 홍림 등이 끝까지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그들이 죽은 뒤 충절을 높이 여겨 이봉상에게는 충민공, 남연년에게는 충장공이란 시호를 내리고 홍림에게는 호조참판을 증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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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7년(1731) 청주읍성 북문 안에 그들의 사당을 세웠다가 1939년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지었는데, 삼충사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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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연담공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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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충청북도 기념물  제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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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일 1977.12.06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명암동 산20-1 
시 대 고려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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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명암동에 위치한 고려 후기의 문신 연담공 곽예(1232∼1286)의 묘소이다. 고려 고종 42년(1255)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좌승지, 국자감 대사성, 문한학사, 감찰대부 등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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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종 때에는 왜구 침범을 꾸짖고 납치해간 우리나라 사람의 송환을 요구하기 위한 사신으로 일본에 다녀오기도 했다. 충렬왕 때 원나라 황제의 생일 축하 사절로 원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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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됨이 강직하고 소박하여 높은 지위에 이르러서도 옛날과 다름이 없었다고 한다. 글을 잘 짓고 글씨에도 능하여 독특한 서체를 이루어 당대의 명필가로 이름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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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에 묘소가 있었는데 이곳으로 이장했으며 묘역에는 2개의 묘비와 석인상,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 등이 있다. 묘비의 글은 면암 최익현이 지었으며, 신도비의 글은 지산 김복한이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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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청주 척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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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충청북도 기념물  제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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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일 1978.10.27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 92-13 
시 대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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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비는 조선 후기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온 백성에게 서양세력에 대한 경계심을 일깨우고자 서울과 전국 교통요지에 세우도록 한 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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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척화비는 1976년 2월 29일 석교동 노상하수구 뚜껑으로 있던 것을 발견한 것으로, 직사각형의 모습이며, 윗부분의 일부가 파손되어 있다. 앞면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라는 글을 새겨 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의지를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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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비를 세운 시기는 고종 8년(1871)인데, 후에 임오군란(1882)이 발생하고 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자 일본공사의 요구로 모두 철거되어, 지금은 이처럼 몇 기의 비들만 곳곳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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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신항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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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충청북도 기념물  제4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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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일 1984.12.31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용정동 120 
시 대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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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대학자이며 정치가인 율곡 이이와 고려 후기의 학자로서 성리학 발전에 공헌한 목은 이색을 비롯하여 경연·박훈·김정·송인수·한충·송상현·이득윤 등 아홉 선현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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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조 3년(1570)에 ‘유정서원’으로 세웠고 현종 원년(1660)에 나라에서 ‘신항’이라는 이름을 받은 사액서원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8년(1871)에 폐쇄되었다가 1957년 복원하였고, 1987년 새롭게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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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내 건물로는 사당과 강당 등 주요 건물과 비석이 안치된 비각, 관리인이 주거하는 수호사 등이 있다. 외삼문을 통해 경내로 들어서면 교육 공간인 강당이 있고 뒤편에 별도의 담장을 두른 제사 공간으로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강당은 교육 장소 겸 제관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사당은 낮은 기단 위에 조성된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안쪽에는 이이를 중심으로 좌우에 여덟 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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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3월과 9월에 제사를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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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송상현 묘소 및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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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충청북도 기념물  제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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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일 1984.12.31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 산1-1 
시 대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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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충신 천곡 송상현(1551∼1592) 선생의 묘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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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9년(1576)에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1591년 동래부사가 되었으며, 당시 잦은 왜구의 노략질과 왜적의 침입 소문에 대비하기 위하여 성곽을 수리하고 군사훈련을 시켰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래성에 침입한 왜병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의 충적을 기리어 이조판서의 관직을 내렸다. 그리고 충렬사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으며 충신문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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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촌 묵방산에 자리잡은 이 묘는 원래 동래에 있던 것으로 광해군 2년(1610)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주위에는 상석과 문인석 등이 세워져 있으며, 묘의 오른쪽에는 비석이 놓여 있다. 묘소 입구에는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는데, 송시열이 글을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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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방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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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충청북도 기념물  제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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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일 1990.12.14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방서동 588 
시 대 시대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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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방서동에 있는 우물로, 우물이 있는 이 마을은 네모난 샘이 있는 곳이라 하여 '방정마을' 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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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곳은 청주 한씨의 시조 한란이 살았던 곳으로, 어느해 가뭄이 들어 농사를 지을 수가 없게 되자, 한란이 3일 동안 기도를 드리다 쓰러져 의식을 잃었는데 꿈속에 북쪽 장수가 나타나 창끝으로 땅을 찌르자 맑은 물이 콸콸 나왔다. 너무 기뻐 소리를 지르다 깨어나 꿈속에서 보았던 곳을 파니 과연 많은 양의 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 뒤 문중 사람들과 함께 네모꼴로 큰 웅덩이를 파서 우물을 만들었는데, 이후 부터는 큰 가뭄이 들어도 물이 마르거나 죽지 않았다. 또한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을 토벌하고 이곳을 지나다 수십만군이 이 물을 먹었는데도 부족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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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을 만든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고, 1988년 우물보호를 위해 뚜껑과 담장을 새로 정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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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무농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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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충청북도 기념물  제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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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일 1990.12.14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방서동 210-4 
시 대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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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를 본관으로 하는 가장 대표적인 씨족인 청주 한씨와 관계된 정자의 옛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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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남쪽의 넓은 들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낮은 언덕 위에 정자를 짓고 농사에 힘쓰도록 권장하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정자는 폐허화 되고 숙종 14년(1688) 후손 한익저가 세운 유허비만 남아 있었는데, 1949년 후손들이 시멘트로 지었다가 1988년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의 목조로 다시 세운 것이다. 서쪽에 작은 대문이 있고 4면을 담장으로 둘렀으며 앞뜰 좌측에 무농정유허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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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가경동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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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충청북도 기념물  제1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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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일 2002.01.11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가경동 산54-1외 
시 대  청동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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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유적은 가경동의 홍골∼감나무실 사이의 구릉지역에 위치하고 있는데 대한주택공사에서 추진한 청주 가경4지구 택지개발사업과 관련한 구제발굴에서 그 실체가 드러난 곳이다. 현재는 공원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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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11. 22∼ 2001. 1. 15 충북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청동기시대 유구 1기, 백제시대 주거지 3기, 저장혈 7기,토광묘 13기, 조선시대 민묘 18기 등 많은 유구가 조사되었는데 백제시대의 철기 5점, 토기류 5점, 마구류 3점, 농공구류 11점 등의 유물이 함께 출토되었다. 또한 특이한 형태의 토광 목곽묘와 주거(생활)유구와 매장유구가 일정하게 가까운 간격을 두고 출토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앞으로 당시의 생활상 복원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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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유적은 이 곳이 청동기시대와 백제시대에 활발한 문화활동이 있었던 곳으로 신봉동백제고분군, 봉명·송절동 지역과 연계되어 청주지역의 초기역사와 관련하여 중요한 곳임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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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부모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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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충청북도 기념물  제1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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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일 2002.01.11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비하동 산10-1외 
시 대 삼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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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서부의 부모산(232m)에 있는 석축 산성이다. 1998년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의 지표조사 결과 중부 이남지역에서 처음으로 계단식 보축 성벽이 발견되었으며, 이는 서울 아차산성과의정부의 대모산성과 같은 형태로 신라계 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벽의 둘레는 1.135m이며, 성벽의 윗부분은 많이 무너졌으나 기저부는 온전히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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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의 너비는 6.4m이상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성벽의 높이 또한 비슷할 것으로 추정된다. 부모산의 주변에는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 유역에 발달한 구릉과 충적평야가 넒게 펼쳐져 있다. 또한 시야를 가리는 높은 산이 없어 산허리의 등산로를 돌아가며 청주 지역을 넓게 조망할 수 있다. 따라서 삼국시대 당시 이 지역이 매우 중요한 위치임을 알 수 있는데 북측과 서측의 산줄기를 따라 작은 규모의 보루성들이 부모산을호위하듯이 있어 그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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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내에는 연화사라는 전통사찰과 피난전설을 간직한 모유정이 있으며 북측에는 커다란 연못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유적은 청주의 초기역사를 말해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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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현풍곽씨 효자비・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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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충청북도 기념물  제1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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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일 2007.03.09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시 대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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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화재는 4대에 걸친 현풍곽씨 문중의 효열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정려로 효자 관련 유물(효자각, 효자비, 정려, 현판) 및 묘소 등이 비교적 온 전한 상태로 한 곳에 보존되어 있는 것은 매우 희귀한 경우로 조선 후기 청주 지역 이서층의 동향과 신분 변동을 살펴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 로 조선 후기(1885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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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여찬 효자비 높이 93cm, 곽진은 효자비 높이 103cm, 인천이씨 효부비 105cm, 곽원호 효자비 118cm, 곽여찬, 곽진은, 곽원호의 묘소 3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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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양수척 효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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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충청북도 기념물  제14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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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일 2009.03.06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운동동 131-3 
시 대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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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석은 조선시대의 효자 양수척의 효행을 기려 세운 비석이다. 방형대석 위에 높이 112cm, 폭 34cm, 두께 23cm의 규모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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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 전면에 ‘양수척효자비’라고 새겨져 있으며, 비신에 사용된 석재인 화강암이 풍화가 많이 되어 비문을 판독하기 어렵다. 전설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운동동 속칭‘비선거리󰡑에 살았던 양수척 형제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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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천민은 성도 없이 돌쇠, 마당쇠 등으로 불렸는데 성은 천민들의 집단인 양·소·부곡에서 양을 따서 양수척 효자비라는 비석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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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집 담장에 바짝 붙어 길거리에 세워져 있는데 풍화로 마모가 심하여 글씨 판독이 매우 어려운 상태이다. 비문은 ‘양수척효자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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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수척은 조선시대에 현재의 상당구 운동동 비선거리에서 두 아우와 함께 살았는데, 주위 사람들에게 평판이 좋지 않았고 늙은 어머니에게도 효도를 하지 않았다. 이를 걱정하던 어머니가 드러눕게 되자 고려장을 하려고 하였다고 한다. 이때 남일면 효촌리에 살던 경대유가 이 소문을 듣고 삼형제를 불러 꾸짖자 양수척 형제는 크게 감화되어 이후 노모에게 효행을 극진히 하였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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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모친이 중병으로 눕게 되자 청주성으로 들어가 한약을 지어 돌아오는 중에 홍수가 나서 월운천을 건너지 못하고 한탄하고 있는데, 갑자기 하천의 물이 갈라져 건너게 되었으며 약을 달여 모친의 병구완을 하였다고 전하여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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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민신분인 사람에게 효자비를 세워준 것은 매우 드문 예로서 시민들의 교육 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 좋은 유물로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할 필요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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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민속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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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열 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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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충청북도 민속자료  제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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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일 2004.07.09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가경동 768 
시 대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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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석은 1987년 충남 청양군 낙지리에 있는 산소를 사초하다가 묘 앞에서 사각형의 이색적인 옹기를 발견하여 파내면서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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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석의 주인공인 이제열(1635∼1712)은 조선 숙종대 사옹원참봉, 신계현령을 역임했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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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석은 총 7매로 길이 19∼22cm, 너비 12.9∼13.9cm로서 두께 1cm 내외의 것이다. 각 판은 11행 21자로 되어 있지만 마지막 7판만은 10행으로 끝맺고 있다. 자체는 행서로 자경은 8∼9cm의 크기를 갖고 있다. 제1에서 6판까지의 글씨는 옅은 청색을 띠고 있으나 제7판은 짙은 청색을 보인다. 제7판은 크기가 비교적 작고 자기판의 색깔과 빙열의 모양도 다른 판과 차이를 보이고 있어 여섯 개의 판과 함께 구워진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글씨체로 보아 동일인이 필서한 것으로 시기적으로 큰 차이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제작과정 중 한 판이 파손되어 다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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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석은 내용 중에 단종 복위와 관련하여 많은 모임이 있음을 보여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알 수 있는 사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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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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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성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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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문화재자료  제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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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일 1997.01.03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주성동 50 
시 대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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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성리학자인 목은 이색의 영정을 모셔 놓은 목은영당 부속 건물로 학문을 닦던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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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처음 지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창건 이후 여러 차례 보수하였고, 1966년 옛 모습에 가깝게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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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의 규모는 앞면 5칸·옆면 2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중앙에 대청마루를 두고 좌우로 온돌방을 설치했으며 큼직한 대들보는 서툰 듯하면서도 우아한 멋을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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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강당을 통해 많은 유학자들이 배출되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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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자재가 잘 보존되어 있어 조선시대의 목재 다루는 법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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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것대산(거질대산)봉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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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문화재자료  제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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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일 1998.11.20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용정동 산107-2 
시 대 고려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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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대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급한 소식을 전하던 옛날의 통신수단을 말하며,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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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남해의 금산 봉수에서 출발하여 서울 남산에 이르는 중간 길목에 자리잡은 이 봉수대는, 남쪽으로는 문의 소이산 봉수에서 연락을 받아 북쪽으로 진천 소을산 봉수에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거차대 봉수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이후의 지리서에는 거질대산봉수라고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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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대가 만들어진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봉수제도가 마련된 고려시대부터 이곳에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었고, 조선 고종 31년(1895) 봉수제도가 없어질 때까지 그 기능을 다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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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로 긴 타원모양으로, 둘레에 보호벽을 둘렀던 흔적이 남아 있으나, 무덤 1기가 봉수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성의 주변을 살펴 사태를 알리는 통신시설인 봉돈은 현재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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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한월동 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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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문화재자료  제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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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일 2002.08.16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방서동 197-1 
시 대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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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은 앞면 4.5칸, 옆면 5칸의 ‘ㄱ’자형 건물로, 88.69㎡(26.83평)의 크기이며, 본채는 앞면에 퇴를 두고, 왼쪽 익랑은 앞뒤로 퇴를 둔 무고주 납도리 오량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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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쪽 기단의 일부 석재는 사랑채에서 가져온 화강석 장대석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 외의 부분은 콘크리트로 보수하여 확인이 어렵다. 앞쪽의 디딤돌도 콘크리트에 타일을 붙여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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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인 구성은 본채 중앙에 2칸의 대청을 두고 양쪽에 방을 들였으며, 오른쪽 앞쪽은 퇴칸에 우물 마루를 깔았다. 왼쪽 익랑은 본채와 연결된 방 하단부에 주방과 욕실이 차례로 연결되어 있고 앞면 퇴의 우물 마루로 각 방이 연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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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손이 많이 된 상태이나 청주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 가옥으로 추정되며, 대들보에 새겨진 상량문(上樑文)에 “숭정후4경신”이라는 기록이 있어, 1860년(조선 철종 11)에 건립한 건축물로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한식 흙기와를 사용하고 있던 지붕의 해체 과정에서 망와에 ‘강희임오’란 명문이 확인되어 1702년(숙종 28)에 만들어진 기와가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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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임오’ 명문 기와의 발견으로 상량문의 기록처럼 1860년에 새로이 가옥을 신축하면서 기존에 다른 건물에서 사용되던 기와를 옮겨와 사용한 것인지, 아니면 1702년에 만들어진 가옥을 1860년에 고쳐 지은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앞으로 확인해야할 과제이다. 2005년 전면 해체하여 보수·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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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의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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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청주예술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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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별 충청북도 청주시
주최/주관기관 청주시 / 청주예술추진위원회
최초 개최년도 2003
개최기간 4월(4일-5일간)
행사장소  청주예술의 전당 및 청주시일원
축제성격 문화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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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제유래
벚꽃 개화기에 즈음하여 시내일원에서 열리는 청주시민의 날은 전통 민속놀이, 각종 공연 및 전시등 다채롭고 풍요로운 행사를 개최하여 시민의 정서함양과 화합을 도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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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의 목적
청주예술제를 통하여 지역예술의 활성화, 전통문화의 발굴 및 전승, 창작예술의 발전, 미래 예술 활성화 방향에 기여하고, 청주의 전문예술인이 중심이 된 독창적이고 전문적인 예술축제를 생활화 할 수 있는 청주시민의 축제로 승화시키고, 전시민의 화합의 장으로 개최하여 행복한 청주건설에 기여하고자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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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제의 특성
∘ 청주문화예술의 발전을 이끌어 갈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될 청주예술제는 우리 지역의 예술인들이 자기들만의 작업공간에서 뛰쳐나와 시민들에게 직적 다가가는 ‘전문적인 예술축제’를 지향한다. 무용, 연극, 미술, 음악, 국악, 문학, 건축 등 시민들과 함께 호흡하고 교감하는 예술제로 창의적 미래를 만들어 갈 예술기초 교육과 사회문화에 기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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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특성
- 천년고도 청주의 순수예술축제
- 중원예술의 맥을 잇는 창의적이며, 예술교육의 기초를 다지는 예술제
- 건축, 국악, 무용, 문학, 미술, 사진, 연예, 영화, 음악 등 각 전문적 예술무대가 시민들 가까이 찾아가는 예술행사
- 청주의 문화예술 저변 확대와 시민문화예술 항유에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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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제행사종목
∘ 개막식, 청주예술제 터다지기 한마당, 청주예술제 축하가요콘서트, 2004한∙중 문화예술 교류단 특별공연 交感, 망선루전국서예대회, 망선루전통문예행사, 예술축전, 청주예술제 축하음악회, 시민과 함께하는 애송시 낭송회, 창작무용 공연 비익을 위한 몸짓, 청소년디지털영화제, 지역예술발전을 위한 세미나, 예술체험행사, 정관 김복진 미술전시회, 중앙공원시화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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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청주직지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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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별 충청북도 청주시
축제 한글명 청주직지축제
최초 개최년도 2003
개최기간 9월중(4일간)
행사장소 청주예술의 전단,청주고인쇄박물관 일원
축제성격 전통민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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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제의 유래 및 특성
직지의 유네스코 등재일인 2001. 9. 4을 기념함으로써 그 의미를 소중하게 간직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됐고, 이에 따라 직지가 등재된 날을 기념하여 축제를 통해 직지의 창의적 정신을 발전시켜 나가고자 함.
- 2003년부터 매년(9.4일 전후) 청주직지축제 개최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직지 등재
- 세계기록유산분야 최초의 직지상 제정(제1회 2005년 9월4일 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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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특성
- 세계 현존 최고의 금속활자본 직지가 발간된 고장
- 충·효·예가 살아 숨쉬는 선비의 고장 (지방자치의 효시인 서원향약)
- 인간과 자연, 전통과 미래가 공존하는 살기 좋은 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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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제행사종목
직지상시상식, 세계기록유산보유국전통문화공연, 직지상수상자의 연구업적에 대한 심포지움, 동서인쇄문명교류 학술회의, 직지테마 경연대회 입상작 전시,현장학습 (5학년은 다모여라), 금속활자 재현/ 체험, 평생학습동아리전국대회 ,직지찾기전국사이클대회, 오페라직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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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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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최시기  10월(격년)
행사장소  청주예술의 전당 일원 및 시내행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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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제의 유래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을 인쇄한 역사적 맥락을 21세기 문화산업시대에도 계승ㆍ발전시키기고 세계인들에게 행복한 일상에 필요한 공예문화상품을 개발하고 이를 통해 국내 공예산업의 인프라 구축을 위해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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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제행사종목
국제공예공모전, 초대작가전, 공예산업관, 국제공예상품, 산업교류전 ㆍ주제공연, 중요무형문화재공연, 공예체험, 기타 이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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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쇠내골 사람들 행복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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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최시기  매년9월~10월
행사장소 금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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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제의 유래
기존의 지역축제와 차별화하여 점차 희미해져가는 이웃간의 정을 회복하고 우리마을 사랑하기- 금천동 주민이 하나 되는 축제를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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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제행사종목
체조,가족걷기대회,우리동네 사진찍기,가족사진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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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구룡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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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최시기 매년5월
행사장소 모충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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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제의 유래
- 축제를 통해 삶의 터(마을공동체)에 대한 애향심 고취
- 지역 특성을 살린 축제 주제로 상품성 제고
- 잊혀진 전통문화행사 재현으로 역사성 제고
- 지역문화역량 총결집 문화수준 향상
- 남녀노소, 온 가족이 참여하여 만들고 즐기는 한마당 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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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제행사종목
- 풍물 길놀이
- 줄다리기
- 효 실천 마당 : 경노잔치(위안공연:적십자사 연예인 봉사회
- 전통놀이마당 : 투호놀이, 줄넘기, 제기차기, 딱지치기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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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새해맞이 희망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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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최/주관기관 : 충청북도, 충북예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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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개최년도 :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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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최기간 : 2009.12.31.-2010.1.1
행사장소  청주예술의 전당 천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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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종류 : 문화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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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제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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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사다난했던 한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맞이하여 도민의 건강과 행복, 도정 발전을 기원하고 도민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화합의 한마당을 마련하기 위해 매년 12월31일 청주예술의 전당 천년각에서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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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행사종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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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놀이 및 사물놀이, 도민한마음 어울림마당, 연합합창단 축하공연, 제야의 타종, 신년메세지 낭독, 소망풍선 띄우기, 새해액운 쫓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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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의 문화재, 축제, 화보

청주의 문화재, 축제, 화보

작성일 2009.08.12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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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방학숙제중 하나 인데염.

하려고 합니다. 제발 써 주세염.

부탁 드립니다.

(되도록 구제적으로, 또 3개다 해주시면 좋고여 )   

 


#청주의 문화재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청주의 문화재

 

(국보)


1.용두사지 철당간


종 목  국보  제41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 48-19 
시 대 고려시대


절에 행사가 있을 때, 그 입구에는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이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당간이 서 있는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는 예전에 용두사라는 절이 자리잡고 있던 곳이다. 용두사는 고려 광종 13년(962)에 창건되었으나 고려말의 잦은 전쟁과 난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고, 절이 있던 터는 청주시내의 가장 번화한 거리로 변하였다.

 

이 당간은 밑받침돌과 이를 버티고 있는 두 기둥이 온전히 남아 예전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두 기둥은 바깥면 중앙에 세로로 도드라지게 선을 새겨 단조로운 표면에 변화를 주었다. 그 사이로 원통 모양의 철통 20개를 아래위가 서로 맞물리도록 쌓아 당간을 이루게 하였고, 돌기둥의 맨 위쪽에는 빗장과 같은 고정장치를 두어 당간을 단단히 잡아매고 있다. 특히 세 번째 철통 표면에는 철당간을 세우게 된 동기와 과정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원래는 30개의 철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당간을 세운 시기는 절의 창건과 때를 같이 하는 고려 광종 13년(962)으로,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어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또한 당간이 남아 있는 경우가 드문 우리 문화재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이곳과 함께 공주 갑사, 안성 칠장사의 세 곳에서만 철당간을 접할 수 있어 보기 드문 작품이다.

 

현재 청주에는 이 유물과 관련된 일화가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예로부터 청주에는 홍수에 의한 재난으로 백성들의 피해가 많았는데, 어느 점술가가 이르기를 큰 돛대를 세워 놓으면 이 지역이 배의 형상이 되어 재난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결국 이곳에 돛대 구실을 하는 당간을 세워 놓으니 재난을 피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청주를 주성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2.계유명전씨 아미타불삼존석상


종 목  국보  제106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명암동 87 국립청주박물관 
시 대 통일신라


충청남도 연기군 비암사에서 발견된 이 삼존석상은 4각의 긴 돌 각 면에 불상과 글씨를 조각한 비상 형태이다.

 

정면은 가장자리를 따라 테두리를 새기고, 그 안쪽을 한 단 낮게하여 아미타삼존상을 조각하였다. 커다란 연꽃 위의 사각형 대좌에 앉아 있는 본존불은 얼굴 부분이 갸름한 모습이며, 신체는 건장하면서 안정된 자세를 이루고 있다. 부처가 설법할 때의 손모양을 하고 있는 손은 비교적 크게 표현되어 삼국시대 이래의 전통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양 어깨를 감싼 옷은 사각형의 대좌를 거의 덮고 있으며, 대좌 밑의 좌우에는 사자상을 배치하였다. 둥근 머리광배는 3줄의 동심원 안에 연꽃을 장식하고 있다.

 

사자 등위의 연꽃무늬 대좌 위에 서 있는 협시보살상은 본존불 쪽으로 몸을 약간 튼 자세로, 얼굴은 훼손이 심하여 알아볼 수 없으나 연꽃이 새겨진 둥근 머리광배가 남아 있다. 본존불과 협시보살의 어깨 사이에는 나한상이 얼굴만 내밀고 있으며, 협시보살상의 양 옆에는 인왕상이 서 있다. 불상 위로는 불꽃무늬가 새겨진 광배가 이중으로 있으며, 안쪽의 광배에는 5구의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다. 광배 밖의 좌우 공간은 한층 더 낮추어 비천상을 새겼다.

 

양 측면의 하단에는 정면을 향하고 있는 용머리를 조각하고, 그 위로는 연꽃 위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을 표현하였다. 뒷면은 4단으로 나누어 각 단마다 5구씩의 작은 부처가 앉아 있는 모습을 조각하였으며, 불상 사이사이에 사람의 이름과 관직을 새겨 넣었다.

 

조각이 정교하면서도 장엄하고, 세부 양식에 있어서도 옛 형식을 남기고 있는 점이 계유명 삼존천불비상(국보 제108호)과 비슷하며, 만든 연대는 삼국통일 직후인 문무왕 13년(673)으로 추정된다. 


(보물)


1.기축명아미타여래 제불보살석상


종 목  보물  제367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명암동 87 국립청주박물관 
시 대 통일신라


비암사에 있는 3점의 비상 가운데 하나이다. 배 모양의 큰 돌에 조각을 하였는데, 앞면에만 조각이 있고 뒷면에는 4줄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앞면에는 부처와 보살의 모습이 여러번 변하는 듯하여 마치 극락세계의 장면을 돌 위에 새긴 것과 같다. 맨 밑에는 연꽃을 둘러 석상 전체의 대석으로 삼고 그 위에 난간과 계단을 놓았다. 그 위에는 물결무늬로 연못을 표현했고, 난간 좌우에는 사자를 서로 마주보게 배치했다.

 

연못 중앙에 큰 연꽃이 있고, 그 위에 본존인 아미타불이 앉아 있다. 좌우에는 서 있는 자세의 여러 불상이 나열되어 있어 엄격한 좌우대칭 수법을 따르고 있다. 크게 새긴 본존불의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오른손은 뚜렷하지 않으나 왼손은 가슴 아래에 들고 있다. 본존 좌우에는 보살상이 있고 그 사이에 열반의 경지에 이른 성자인 나한의 상반신만 표현하였다. 보살상 옆에는 사나운 귀신인 야차상이 한손을 들어 천궁을 받들고 있으며, 그 옆에는 수호신인 인왕상이 있다. 본존 위에는 반원 모양으로 5구의 작은 부처가 새겨졌고, 그 위에는 다시 7구의 작은 부처가 표현되어 있다. 이 불상들 사이에는 나뭇가지와 잎이 표현되었고, 구슬과 장신구가 새겨져 극락의 화려한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신라 신문왕 9년(689)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삼국시대 불상 요소와 새로 들어온 당나라 요소가 혼합된 통일신라 초기 불상양식의 좋은 예로 본존이 아미타불인 점으로 미루어 당시 신앙의 흐름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을 주고 있는 작품이다.


2.미륵보살반가석상


종 목  보물  제368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명암동 87 국립청주박물관 
시 대 통일신라


곱돌로 만든 이 석상은 그 생김새가 탑비를 닮았다 하여 비상이라 불리는데, 아래쪽의 대좌, 중앙의 사면석, 위쪽의 덮개돌이 모두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T자형을 이루고 있는 이 비상은 정면에 왼발을 내리고 오른발을 왼쪽 다리에 올린 반가상을 크게 새기고 있다. 오른손을 들어 뺨에 대고 생각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반가상은 머리에 화려한 관을 쓰고 있으며 목걸이와 구슬장식을 갖추고 있다. 양 측면에는 두손에 보주를 들고 정면을 향하고 있는 보살입상이 새겨져 있는데, 반가상을 본존으로 삼아서 3존 형식을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뒷면에는 보탑을 크게 새겼는데 이 보탑으로 보아서 정면의 반가상이 미륵보살을 형상화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4각형의 대좌에는 중앙에 둥근 화병을 놓고 그 좌우에 꿇어 앉은 공양상을 조각하였는데, 대좌의 양 측면에도 정면을 향해 꿇어 앉은 공양상을 표현하였다.

 

이 석상은 삼국시대 우리나라에서 유행한 미륵신앙을 배경으로 크게 발달한 반가사유상 양식의 귀중한 유품이며, 만든 연대는 조각솜씨로 미루어 보아 충남 연기군 비암사에서 함께 발견된 계유명전씨아미타불삼존석상(국보 제106호)과 같은 673년으로 추정된다. 백제가 멸망한 지 얼마되지 않은 시기에 그 영역에서 조성된 이들 석상은 백제의 석조미술 수준을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예이다. 


3.순성좌리4등공신록권


종 목  보물  제716호  
지 정 일 1981.03.18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개신동 산48 충북대학교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공신녹권이란 공이 있는 신하에게 왕의 명을 받들어 공신도감에서 발행하는 공신임명증서를 말하는데, 이 녹권은 조선 성종임금이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데 도와준 신료를 공신에 임명하고 그에 상응하는 녹을 내린 것을 기록한 문서이다. 이 문서는 4등에 임명된 숭정대부행호조판서 김길통에게 내린 것으로, 여기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좌리공신은 1등 7명, 2등 12명, 3등 18명, 4등 36명으로 총 인원은 73명이다.

 

본래 이것은 공신 개개인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공신의 수와 같이 발행되었으나 전하는 것은 거의 없어, 현재는 3등 공신에 임명된 이숭원의 녹권과 김길통의 녹권이 유일하다.

 

이 문서에 기록된 인물들을 통해 성종 대의 정치세력의 일면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 보인다. 



4.용화사 석불상군


종 목  보물  제985호  
지 정 일 1989.04.10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사직동 216-1 용화사 
시 대  고려시대


용화사 법당 상량문(건축공사의 시작과 끝, 참여자의 이름을 기록한 글)에 의하면 이곳은 1902년에 만든 절로, 엄비의 꿈에 청주에서 7구의 석불이 나타나 집을 지어달라고 간청하자, 사람을 보내어 청주 서북쪽의 냇가에서 이들 석불을 발견하였다는 유래가 있다. 그리하여 용화사를 세우고 미륵보전에 7구의 석불을 모시게 된 것이다.

 

5구의 불상과 2구의 보살상으로 되어있는 석불들은 모두 거대한 불상이라는 점이 주목되는데 최고 5.5m, 최저 1.4m이다. 이들 중 왼쪽 3번째의 불상은 머리 위에 솟아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유난히 크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신체는 전체적으로 양감이 풍부하며 가슴 부위에 卍 자가 양각되어 있다. 왼쪽 5번째 불상은 독특한 옷주름이 있고, 뒷면에는 거대한 나한상이 조각되었는데 이는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 머리 부분과 양 손을 나중에 보수한 석조여래입상은 머리 위에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큼직한 것이 특징이다.

 

7구의 불상들은 모두 양 어깨를 감싼 옷을 입고 있는 입상과 좌상으로 얼굴과 세부기법, 특히 옷주름 표현과 손모양 등을 감안할 때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5.분류두공부시언해권21


종 목  보물  제1051-3호 
지 정 일 2004.05.07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866 청주고인쇄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당나라의 시인 두보(712∼770)의 두공부시를 성종 때 홍문관전한 유윤겸 등이 왕명을 받들어 제주를 참정하고 한글로 역편한 것이다. 두공부시라 제명한 것은 두보가 공부원외랑의 벼슬을 지냈기 때문이며, 분류는 송조의 분문집주두공보시를 참고하고 서명에 관기한 것이다. 그리고 원(元)나라 때 편찬된 찬주분류두시를 원본으로 두보의 시 1,647편 전부와, 다른 사람의 시 16편에 주석을 달고 한글로 언해한 책으로 흔히 ‘두시언해’로 통칭되기도 한다.

 

이 책은 조선 성종 12년(1481)에 을해자 및 을해자 병용 한글자로 간행된 것이 그 초간본이다. 권두의 서명은 ‘분류두공부시 권지이십일’로 되어 있으며, 별도의 저자 표시는 보이지 않고 있다. 판식은 사주단변이며 반엽을 기준으로 8항 17자를 기본으로 하여 작은 자와 한글 활자를 함께 배열하고 있고, 판심부에는 ‘두시’의 판심제와 장차가 새겨져 있다. 한글에는 방점이 남아 있어 임란 이전의 국어현상을 반영하고 있다. 모두 45장으로 되어 있으며 상태가 양호한 편이나, 전후의 표지가 모두 개장되어 있다. 


6.성리대전서절요권1∼4


종 목  보물  제1157-2호 
지 정 일 2004.05.07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866 청주고인쇄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이 책은 조선 중기의 문신 김정국이 성리대전을 요약하여 4권으로 편집한 후, 그 당시 나주 관청에 보관해 있던 금성목활자를 기본으로 하고 부족한 것은 새로 보충하여 성리대전서절요 400부를 간행한 것이다. 권말에 있는 김정국의 후서에 보면, 그 인출경위는 절요자 김정국이 중종 33년(1538) 여름 호남관찰사의 명을 받고 부임한 이후, 도사 김회백과 의논하여 금성인 나주목에 있던 목활자에 부족자와 결자를 새겨 보완하여 그해 가을에 간행하였던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 책은 모두 4권 4책으로 편성되어 있는데, 권1의 권두에는 서문이, 그리고 권4의 후미에는 김정국의 후서가 수록되어 있다. 권1의 서문이 끝나고 장을 바꾸어 권두서명이 나타나고 이어서 바로 ‘태극도총론’편으로부터 본문이 시작된다. 권두제면의 반엽을 기준으로 판식의 특징을 살펴보면, 변란은 사주단변이나 간혹 쌍변의 경우도 보인다. 반엽은 모두 10항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한 항은 19자씩 배자되어 있는 상태이다. 중앙의 판심부는 상하로 대흑구가 보이고 있는데, 그 사이로 상하내향 흑어미가 새겨져 있으며, 흑어미 안으로 판심제 ‘성리대전’과 권장차가 새겨져 있다. 각 책의 권두에는 신선로와 종형의 장서인이 날인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본래 유명인사가 소유했던 장서로 보인다.

 

권4의 말미에 후서(後序)가 수록되어 있는데, 후서 끝에 ‘가정무술추 문소김정국근지’란 기록이 보이고 있어, 이 책이 바로 중종 33년(1538)에 간행된 것을 알 수 있다. 전책(全冊)의 표지의 상태가 비교적 양호하며, 본문의 경우도 충식이 전혀 나타나지 않은 상태인 점으로 보아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전체분량은 권1은 64장, 권2는 56장, 권3은 62장, 권4는 67장이다.


7.운천동 출토 동종


종 목  보물  제1167호 
지 정 일 1993.09.10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명암동 산81 국립청주박물관 
시 대 통일신라


청주시 운천동에서 금동불상과 징 모양의 금고와 함께 출토된 동종이다.

 

총 길이가 78㎝, 종 몸체 높이 64㎝, 입지름 47.4㎝인 중간 크기의 종으로 위·아래 단에 어떠한 문양도 없이 단순하게 처리된 것이, 오히려 이 종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사각형의 유곽 너비부분에는 3구의 비천상과 당초문, 3보 문양으로 꾸몄고, 그 안에 9개의 돌출된 유두가 있다. 종 몸통에는 2구의 비천상이 조각되어 있다. 연꽃으로 장식한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2개 가지고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덩굴무늬가 새겨 있다.

 

현재 용통은 일부 없어졌으나, 종의 고리부분인 용뉴는 한 마리 용이 입을 벌리고 목을 구부리고 있는 형태가 완전히 남아 있어, 통일신라시대 말기(8∼9세기 경)의 종임을 짐작하게 한다.

 

8.보살사 영산회괘불탱


 종 목  보물  제1258호 
지 정 일 1997.08.08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시 대 조선시대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 뜰에 걸어 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화를 말하며, 영산회상도는 그 중에서 석가가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보살사영산회괘불탱은 길이 6.13m, 폭 4.26m로 삼베 위에 그린 것이며, 붉은색을 주로 사용하였고 녹색·황색 등 중간색을 넣어 밝은 화면을 보여준다. 남아 있는 글을 통해 조선 인조 27년(1649)에 경기도·충청도 등지에서 활약했던 신겸, 덕희, 경윤 등이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중앙에 앉아 있는 석가모니 본존불은 사각형의 얼굴에 이목구비가 근엄하고 엄격한 표정을 지니며 당당한 신체에서는 중후한 모습을 풍긴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 걸치고 있는 모습이며, 오른손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하단의 8대보살, 중단의 10대제자 등은 석가불 주변을 빽빽하게 에워싸며 좌우대칭의 구도를 보이고 있다.

 

본존불의 얼굴이 또렷하고 신체가 당당하여 화면을 압도하는 듯하며, 선명한 색채·화려한 문양·석가를 둘러싼 무리들의 세밀하고 단아한 묘사로 당대 불화의 대표작으로 높이 평가되는 작품이다. 

 

9.수보살계법·범망경보살계본합본


종 목  보물  제1407호 
지 정 일 2004.05.07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866 청주고인쇄박물관 
시 대 고려시대


이 책은 후진의 구마라즙이 번역한 범망경노사나불설보살심지계품 권하와 이 경전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지는 보살계도량이나 수계법회 등의 절차와 규범인 북송의 연수가 집한 수보살계법, 그리고 진나라 혜사가 찬한 수보살계의로 되어 있다.

 

『범망경』은 승조의 후서에 따르면 112권 61품으로 구성된 범문이 있었으나 전체는 한역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책은 상하 2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 하권만 따로 뽑아 보살계본으로 삼아 불교도의 신행 규범으로 삼고 있다. 내용은 보살이 지켜야 하는 10가지 무거운 계와 십선계 등 보살이 지녀야 할 몸가짐과, 말씨와 마음자세 등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실천덕목을 담고 있다. 신라시대부터 한국불교 종단의 조직 및 유지에 큰 영향을 미친 경전이다.

 

이 책은 종이 앞·뒷면에 모두 인쇄되어 있는 등 인쇄상태 및 인쇄조건, 그리고 발문의 내용 등으로 보아 1306년 이후에 고려인들에 의해 원나라에서 판각하여 원나라 종이로 찍어낸 판본으로 추정된다.


10.금강반야바라밀경


종 목  보물  제1408호 
지 정 일 2004.05.07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866 청주고인쇄박물관 
시 대 고려시대


이 책은 목판본으로 구마라즙이 번역한 금강경을 바탕으로 육조 혜능이 금강경에 대해 해석한 내용을 붙인 것이다. 『금강반야바라밀경』은 줄여서 ‘금강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모든 법이 실체가 없으므로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라는 공사상을 중심사상으로 하고 있다. 제10의 <장엄정토분>에서는 청정한 마음으로 외적인 대상에 집착함이 없이 ‘마땅히 머무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 것’을 가르친다.

 

이는 혜능 및 여러 고승들을 깨닫게 한 유명한 구절이다. 우리나라에서 조계종의 근본경전으로 반야심경과 함께 가장 많이 읽히는 경전이다.

 

고려 충렬왕 31년(1305) 청주 원흥사에서 개판된 점이 주목되는데, 곧 원흥사의 육구, 박지요거사 등이 발원한 사찰판이다. 이는 1377년의 흥덕사 간행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이전에 간행된 판본으로서, 청주지역이 우리나라 인쇄문화의 발흥지임을 나타내는 중요한 자료라는 점에서 소중하다. 


11.대방광불화엄경소권48,64,83


종 목  보물  제1409호 
지 정 일 2004.05.07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866 청주고인쇄박물관 
시 대 고려시대


이 책은 대승경전의 하나인 화엄경(주본)을 저본으로 당나라 징관이 주소하고 여기에 송나라 정원이 주해한 교장류의 일종이다. 일반적으로 ‘대방광불화엄경’은 줄여서 ‘화엄경’이라고 통칭되기도 하며,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중심사상으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화엄종의 근본경전으로 ‘법화경’과 함께 한국 불교사상을 확립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경전이다. 이러한 화엄경에 화엄학의 대가인 당나라 징관이 주소한 화엄경소를 송나라 정원이 주해한 것이다.

 

이 판본은 저자인 정원이 의천에게 상인 서전을 통해 보낸 목판으로 주본 화엄경을 주해한 주소본 120권을 찍어낸 것 가운데 권48, 64, 83에 해당하는 것으로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표지는 상즙으로 염색한 종이를 사용하였고, 중앙의 제첨은 금니로 그리고 그 안에 표지서명 또한 금니로 기재하였다. 판식의 특징은 상하단변으로 계선이 보이고 있으며, 한 행은 15자씩 배자되어 있다. 한 장은 5면씩 접혀 있으며, 점련부분에는 판수제가 기입되어 있어 작업과 관리의 편리를 위한 의도로 고려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지질은 저지만을 사용하여 만들었으며, 표면의 광택과 묵즙의 번짐을 방지하기 위해 도침한 흔적이 보이는 상품의 고려지이다. 그런데 권83의 말미에 ‘가정 31년(1552) 임자…시봉…’라는 묵서가 남아 있는데, 인출기로 보기 어렵고 소유를 나타내는 장서기로 생각된다. 자체는 송판에서 유행한 전형적인 구양순체로 보이며, 인쇄면의 필획이 살아 있어 비교적 초기에 인출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주본 화엄경소 120권 가운데 3책으로서 당시 대각국사 의천의 불서 수집 상황과 더불어 송과 일본으로 이어지는 문화교류를 알게 하는 소중한 자료가 되는 불경이라 하겠다.


12.신경행청난공신교서 및 관련문적


종 목  보물  제1380호 
지 정 일 2003.08.21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명암동 산81 국립청주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신경행(1559∼1623)과 관련된 문적으로 신경행 청난공신교서를 비롯하여 유서, 시호서경(2점), 증시교지, 조은신공시장, 청난원종공신록권, 이십공신회맹록, 이십일공신회맹록 등 모두 8종 9점이다.

 

신경행은 조선 선조 10년(1577) 문과에 급제하여 한산군수가 되었으며, 충청도병마절도사 등의 벼슬을 하였다. 선조 29년(1596) 7월에 이몽학이 충청도 홍산에서 난을 일으켰을 때 이를 평정하는데 세운 공으로 청난공신이 되어 영성군에 봉해졌다. 죽은 뒤에 예조판서에 증직되었고, 시호는 ‘충익’이다.

 

신경행 청난공신교서는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신경행에게 내린 것으로,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선무공신 및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한 호성공신과 함께 선조 37년(1604)에 발급되었다. 이 교서는 녹훈 사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청난공신 포상 규정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교서의 양식과 문체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유서는 선조 41년(1608) 6월 16일에 신경행을 충청도병마절도사로 임명하면서 제1부의 밀부를 내린 유서이다. 유서 가운데 제1부를 내린 것은 매우 희귀한 것으로 가치가 있다.

 

시호서경(2점)·증시교지·조은신공시장 등은 신경행이 ‘충익’이란 시호를 받는 과정을 알 수 있는 문서들이다. 시호서경은 사헌부 시호서경과 사간원 시호서경이 있는데, 순조 11년(1811) 6월에 증예조판서 신경행의 시호를 충익으로 정하는 것에 대하여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동의한 문서이다. 증시교지는 순조 12년(1812) 1월에 신경행에게 충익의 시호를 내리는 교지이다. 조은신공시장은 신경행이 시호를 받기 위하여 그가 살았을 때의 한 일을 가선대부 김이영(1755∼1845)이 지은 글이다.

 

청난원종공신록권은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선조 38년(1605) 4월 16일에 공신도감에서 신경행의 아들인 주부 신면에게 내려준 녹권이다. 이 녹권은 공신에 대한 대우와 포상규정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조 원종공신관계 연구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그밖에 이십공신회맹록 및 이십일공신회맹록은 신경행과 관련있는 자료들로, 당시 20공신·21공신과 그 자손들의 동향 및 당시의 정치상황 등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이십공신회맹록은 숙종 6년(1680) 남인이 대거 실각하여 정권에서 물러난 경신대출척에 공을 세운 보사공신이 복훈되어 추록한 것을 계기로 숙종 20년 6월 20일 보사공신을 중심으로 역대의 공신 및 그 적장자들이 모여서 회맹제를 행하고 참여인을 수록한 명단이다. 이 회맹록에는 신경행의 4세손인 신득중이 기록되어 있다. 이십일공신회맹록은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분무공신의 녹훈을 계기로 영조 4년(1728) 7월 18일에 개국공신 이하 각 공신의 적장손들이 모여서 회맹제를 행하고 그 참여자를 수록한 명단이다. 이 회맹록에는 신경행의 6세손인 신광우가 기록되어 있다.

 

신경행 청난공신교서 및 관련문적은 서지학·역사학 연구 및 조선조 공신관계 연구에 중요한 자료인 동시에 신경행 전기자료이기도 하므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사적)


1.상당산성


종 목  사적  제212호 
면 적 703.114㎡
지 정 일 1970.10.01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 산28-1 
시 대 조선시대


상당산 계곡을 둘러 돌로 쌓아 만든 산성으로 백제 때 부터 이미 이곳에 토성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곳이다.

 

『삼국사기』에는 통일신라 초기에 김유신의 셋째 아들이 서원술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쌓여진 것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한다. 상당이란 이름은 백제 때 청주목을 상당현이라 부르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지금의 성은 임진왜란 때에 일부 고쳤으며 숙종 42년(1716)에 돌성으로 다시 쌓은 것이다. 성벽은 네모나게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았으며, 비교적 잘 남아있으나 성벽 위에 낮게 쌓은 담(여장)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성 안에 5개의 연못과 3개의 사찰, 관청건물, 창고 등이 있었는데, 현재는 문과 치성이 남아있다.

 

정상에 오르면 서쪽으로 청주·청원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여 서쪽 방어를 위해 쌓여진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2.흥덕사지


종 목  사적  제315호 
면 적 69,730㎡
지 정 일 1986.05.07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866 
시 대 통일신라


청주 운천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이다.

 

1985년 발굴조사 때 금당터·서회랑터·강당터·부속건물들이 있던 건물터가 확인되었고 ‘흥덕사’라고 새겨진 쇠북(금구)조각이 나와 절의 이름이 흥덕사였음을 알 수 있었다. ‘대중 3년명’이라 새겨진 기와와 기타 유물들로 보아 늦어도 9세기에 지어져 고려 후기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치미·기와조각·그릇 들과 청동제품이 많이 출토되었고, 현재 남아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직지심체요절』을 찍은 곳으로서 그 가치가 중요한 유적이다. 

 

3.신봉동 백제고분군


종 목  사적  제319호 
면 적 190,461㎡
지 정 일 1987.07.18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신봉동 산7 
시 대 삼국시대


청주시내를 남동에서 북서쪽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무심천 서북쪽 기슭의 동쪽 비탈진 곳에 분포하고 있다.

 

107기의 고분이 조사되었는데 106기는 흙을 판 후 무덤을 쓴 널무덤(토광묘)이고, 1기는 널방과 널길을 가진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이다. 널무덤은 야산 전체에 걸쳐 분포하며, 봉분은 거의 깎여 나가 남아있지 않다. 출토 유물로는 여러가지 토기류·옥과 같은 장신구류·철로 만든 칼이나 도끼같은 무기류·말갖춤(마구류)과 그 밖의 숟가락 등이 나왔다. 90-1호 널무덤에서는 갑옷이 출토되어 백제철갑의 실물을 볼 수 있어 주목되고 있다.

 

신봉동 고분군은 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상당한 기간동안 만들어진 고분군으로, 대체로 4∼5세기경의 백제 고분군이라 할 수 있다.

 

신봉동은 백제의 동쪽 변방지역으로 다른 유적에서 볼 수 없는 마구류·무기류가 많이 출토되어, 백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또한 돌방무덤은 서울지역의 백제 초의 것과 공주지역의 돌방무덤과 비교되는 자료로서 평가된다. 


4.정북동 토성


종 목  사적  제415호 
면 적 35483㎡
지 정 일 1999.10.28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정북동 351-1번지 외 
시 대 삼국시대


미호천변 평야의 중심에 있는 평지에 흙으로 쌓은 성이다.

 

만든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상당산성고금사적기』에 궁예가 상당산성을 쌓아 도읍을 삼았는데, 견훤이 산성을 빼앗아 정북동 토성으로 짐작되는 토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어, 후삼국 쟁란기인 9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전반에 이루어졌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출토된 유물과 성의 위치, 주변 여건이 초기 성곽시설의 모습을 보이고 있어 더 오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성의 길이는 675m이고 높이 3.5m, 폭은 8∼13m 정도 된다. 성안에서는 주거지, 기둥구멍, 길, 돌무더기 등이 확인되었고, 성 밖에서는 성을 둘러싸 보호하는 물길인 해자를 확인했다.

 

토성의 구조와 출토 유물들로 우리나라 초기의 토성 축조 연구에 큰 도움을 주는 중요한 토성이다.

 

(중요민속자료)

 

1.청주 출토 순천김씨 의복 및 간찰

 

종 목  중요민속자료  제109호 
지 정 일 1979.12.28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개신동 산48  충북대학교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1977년 봄, 청원군 석병산에 있는 채무이와 그의 부인 묘를 이장하게 되었을 때 관에서 나온 것으로 의복과 당시 채씨 집안에 오고간 서간류이다.

 

채무이(1537∼1594)은 명종 10년(1555) 생원을 시작으로 세자 익위사대직을 지낸 인물로 그는 임진왜란 중인 선조27년(1594)에 죽었고 그의 둘째 부인인 김씨는 임진왜란 전에 죽은 것으로 보여 이곳에서 출토된 의복과 서간류는 임진왜란 전의 유물로 분류되고 있다.

 

의복은 김씨 부인이 평소에 착용하였던 것으로 겹누비철릭 1점, 겹누비바지 2점, 겹회장저고리 2점, 직령 겹두루마기 1점, 목면 겹저고리 1점, 모시 치마 1점, 베적삼 1점, 모시철릭 1점, 토기 1점 등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시철릭은 흰색의 세모시로 된 겉옷으로 치수는 등솔기에서 소매끝까지의 화장길이 144㎝, 뒤품 40㎝, 소매길이 104㎝이다.

 

치마는 길이 63㎝에 2㎜의 잔주름이 있으며 겉자락 6폭, 뒷자락 7폭, 안자락 2폭으로 총 15폭으로 만들어진 특이한 치마이다. 잔주름은 눌러 덧 박았는데 그 박음질 솜씨가 매우 섬세하다.

 

토시 1점은 겉은 가는 명주이고 안은 굵은 명주이며 속에는 얇게 솜을 넣었다. 크기는 52㎝ ×39㎝로 비교적 큰 편이며 양쪽 부리에는 1㎝간격으로 곱게 선을 대었다.

 

철릭은 조선시대 문무관리들이 외국에 사신으로 파견되거나, 국난을 당했을 때, 왕을 호위할 때 착용했던 옷으로 소매가 넓고 웃옷과 치마가 연결되어 있으며 허리에 주름이 있는 옷이다. 웃옷인 저고리는 몽땅하고 겨드랑이에 다른 천을 댄 무가 있으며 저고리 소매 뒤의 회장과 소매끝에 덧댄 천인 삼수가 상당히 넓다. 깃은 겹깃으로 고색을 띠고 있는데, 신라와 고려의 저고리를 상고하는데 도움이 되고있다. 저고리와 연결된 치마의 주름은 잔주름으로 되어있고 조선 초기의 포로서 깃모양이 직각으로 각진 직령이다. 특히 여기서 주목할만한 점은 여자도 철릭을 입었다는 사실과 철릭의 초기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복식사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밖에도 만장 3점, 은장도, 돗자리, 목관, 표주박 1점씩이 출토되었는데 특히 언문서간 185점이 함께 출토되어 16세기 언어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2.청원 구례손씨 묘 출토 유물

 

종 목  중요민속자료  제116호 
지 정 일 1981.11.11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개신동 산48  충북대학교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1979년 충북 청원군에 거주하는 변종화씨가 조상의 묘들을 이장할 때, 그의 11대 조부인 변유인(1566∼1641)의 둘째 부인인 구례 손씨의 묘에서 미이라화된 시신과 함께 발견한 의복들이다.

 

이 의복의 주인인 손씨의 생몰년대는 알 수 없으나 변유인씨와의 연령차를 10세로 보고 50세 때 죽었다고 가정한다면 1576년에서 1626년 사이에 해당되므로 임진왜란 전후시기의 유물로 볼 수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저고리는 비교적 길이가 길고 소매 끝에 한삼을 단 것이 특징이다.

 

남명주저고리는 사각모양의 목판깃을 하고 있고 앞쪽에는 고름이 달려 있는데 장식적 의미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너비 2㎝의 단순한 끈 모양으로 매는 용도로만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소색단속곳과 겹솜바지는 요즘 한복 속에 입는 속바지와 같은 모습이지만 소색 단속곳은 허리에 끈과 밀방이 달려 있고 겹솜바지는 아래가 터져있다. 그밖에 옷감을 반폭씩 이어 붙힌 겹회장저고리와 트임이 75㎝나 되는 누빈창의 그리고 몽고의 영향을 받은 듯 보이는 소모자 등이 있다.

 

이들 유물들은 임진왜란 전후의 옷으로 우리 복식의 옛 모습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3.청원 전 박장군 출토 유물

 

종 목  중요민속자료  제117호 
지 정 일 1981.11.11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개신동 산48  충북대학교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충청북도 청원군 노계산에서 대청댐 수몰지역 내에 있던 박장군 묘라고 알려진 무연고 분묘를 이장하던 중에 나온 의복들로 그 종류가 다양하다.

 

조선시대 남자 겉옷의 일종인 중치막 2점, 직령포 2점, 관복, 구의, 도포, 동방형포가 각 1점씩 나왔는데 특히 저고리 11점, 적삼 2점은 조선전기와 후기를 잇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아울러 겹유고, 겹유바지, 상의에 딸린 치마가 각 1점씩 출토되었다.

 

조선초의 단배자와 숙종이후의 당의의 중간치인 조끼모양의 배자 저고리가 3점 있는데 이들의 길이는 각각 66㎝, 65㎝, 66㎝이다. 또한 소매의 끝단에는 다른 천으로 덧댄 삼수가 10∼15㎝정도 달려있고, 적삼의 경우는 39㎝정도이고 등솔기에서 소매끝까지의 화장길이는 119㎝나 되어 저고리 길이보다 소매가 더 길다.

 

깃모양이 둥글어 단령이라고 불리우는 옷에는 옆에 협삼이 달려있어 김위묘에서 나온 의복과 비슷하고 흰색의 무명으로 만든 구의의 앞 여밈은 두루마기와 같다. 앞길 98㎝, 뒷길 60㎝로 소매는 단령이나 창의나 모두 중간 크기로 되어있어 임진왜란 전후의 다른 포들과 비슷하다.

 

도포는 현존하는것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도포가 문헌상 선조대에 비롯되었다는 말과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소매통이 32㎝로 밋밋하여오늘날과 같이 도포의 소매가 넓어진 것은 18세기부터 임을 알 수 있다. 구의는 백색 무명으로 되어있고, 직령포는 짙은 청색의 소매가 좁은 포로서 소매끝에는 33㎝의 삼수가 달려있는데 왼쪽 소매를 조각조각 이은 것이 이휴정묘에서 출토된 직령포와 비슷하다.

 

창의는 청색의 목면으로 지었으며 소매가 좁고 70㎝의 옆트임이 있다. 동방형포는 백색 명주로 만든 중들이 입던 옷의 일종인 납의로서 소매가 길고 저고리의 길이가 길다.

 

무명바지는 여자용으로 보이며 바지밑이 있고 바지부리의 넓이가 넓다. 치마는 진한 갈색의 모란무늬가 있는 치마와 백색 명주치마가 있다.

 

모자는 높이 17㎝, 아래직경 25㎝, 둘레가 50㎝인 청색 비단으로 된 모자와 흰색과 갈색과 명주로 된 작은 모자가 있다. 이밖에 누비치마와 흰색의 무명 홀이불과 천금(시신을 넣는 관의 뚜껑에 안에 덮는 이불), 멱목(시신의 얼굴을 싸던 천), 악수(시신의 손을 싸던 천) 등이 함께 출토되었다.

 

이 유물들은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옷의 형태와 질감, 무늬 등으로 추정하여 볼 때 임진왜란 전후의 의복으로 보이며 당시의 사회상이나 의복 양식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4.중원 김위 묘 출토 유물

 

종 목  중요민속자료  제118호 
지 정 일 1981.11.11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개신동 산48  충북대학교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1980년 충주댐 건설로 충북 청원군에 있던 조선중기의 문신인 김위의 묘를 이장할 때 미이라화된 시신과 함께 발견된 의복들이다.

 

출토된 의복에는 외국에 사신으로 파견될 때나 왕을 호위할 때, 국난이 있을 때 입었던 철릭과 지금의 두루마기 모습과 비슷하지만 옷깃이 직선으로 곧아 직령포라고 불리는 옷과, 옷깃이 둥글어 단령이라 불리는 옷 그리고 옷의 일부가 트여져 있는 창의, 여름에 입기 위해 삼베로 만든 저고리인 적삼, 한복 속에 입는 바지인 속곳과 솜버선 그밖에 시신을 덮었던 명주로 만든 천금 등으로 목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삼베적삼 ②명주겹직령관복 ③자색명주철릭 ④무명누비속곳 ⑤명주누비속곳 ⑥무명잔누비창의 ⑦갈색겹유창의 ⑧무명솜버선 ⑨명주겹유창의 ⑩명주홑철릭 ⑪명주누비창의 ⑫명주누비솜속곳 ⑬명주겹철릭 ⑭명주유직령포 ⑮관복(단령)

 

이 옷들은 임진왜란때 현감을 지냈던 김위의 것으로 당시 의제를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깃이 둥근 단령과 깃이 직선으로 각이 진 직령이 함께 출토되어 그 이전까지 불분명했던 의복의 표리관계가 확실히 밝혀졌다. 즉 평상시에는 직령이나 창의를 입고 있다가 관청에 출근 할 때 단령을 위해 걸쳐 입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직령은 겹으로 되어있고 단령은 홑겹으로 만들어졌으며 소매는 좁은 편으로 조선초의 전형적인 의습을 보여주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의 유물들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우리나라 복식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5.안동김씨 묘 출토 의복

 

종 목  중요민속자료  제217호 
지 정 일 1987.11.23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개신동 산48 
시 대 조선시대


1985년 중부고속도로 건설로 경기도 광주군에 있던 안동 김씨 묘역을 옮길 때 출토된 의복들이다.

 

조선의 여류작가 허난설헌의 시아버지인 김첨과 15∼16세로 보이는 그의 딸, 김대경의 처인 원주 원씨의 유품으로 16세기말에서 17세기의 것으로 보인다.

 

출토된 유물은 지금의 두루마기와 비슷한 모습이지만 깃이 사각형모양으로 각이져 있어 직령포라고 부르는 옷을 비롯하여 저고리, 치마, 속옷, 목도리, 보자기, 솜이불 등으로 관의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넣은 것으로 보인다.

그 중 흰색 명주에 솜을 넣어 4㎝ 간격으로 누벼 만든 솜바지와 전형적인 직령포 모습을 하고 있는 명주 겹누비와 명주 솜누비의 직령포 2점은 김첨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딸로 보이는 15∼16세 정도의 여자 미이라와 함께 ‘안동김씨지구 ’라고 쓰여진 명정이 나왔는데 몸판과 소매가 연두색이고 동정은 흰색인 명주저고리와 앞판에 연두색 비단을 조각조각 이어 붙힌 저고리 2점이 그녀의 것으로 보인다.

 

원주 원씨의 것으로는 앞판과 소매가 연두색이고 소매 끝은 진한 갈색인 안고름과 겉고름이 달려 있는 무명저고리와 안에 솜을 넣고 15㎝ 간격으로 누빈 솜저고리 2점과 치마 3점이 있다.

 

그 밖에 삼베와 무명으로 만든 속옷, 흰색의 명주 목도리, 갈색의 꽃무늬 보자기가 있고 옷의 형태로 보아 18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주인을 알 수 없는 명주 솜저고리가 함께 출토되었다.

 

시대에 따라 양식이 달라지는 복식사에서 주인과 시기를 알 수 있는 것으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충청도 병마절도사 영문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5호

지 정 일 1976.12.21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 92-6 
시 대  조선시대


청주읍성 안에 있던 충청도병마절도사영의 출입문이다. 병영의 출입문은 보통 원문이라고 부르며, 좌우로 담장이 이어져 병영을 에워싸고 있다. 충청도병마절도사영은 당초 충남 해미현에 있다가 조선 효종 2년(1651)에 이곳으로 옮기었다. 1988년까지 ‘청녕각’으로 잘못 알려져 서원현감 이병정이 세운 것으로 여러 책자에 기록되어 있다.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네모진 높은 주춧돌 위에 세운 2층의 누문으로, 아래층의 중앙에는 문을 달아 출입하고 위층은 마루를 깔고 난간을 둘렀다.

 

호서읍지와 청주읍지를 보면 정곡루가 병영에 있음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병영내에 누각은 통군루와 정곡루가 있을 뿐인데 ‘충청병영도’와 ‘청주읍성도’에 통군루는 문루 안쪽의 서편에 있는 2층 건물로 나타나 있어, 정곡루가 바로 문루의 명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병영이나 수영의 출입문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성곽건축이다. 

 

2.용암사 비로자나불좌상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호

지 정 일 1976.12.21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우암동 3 
시 대 통일신라시대


청주대학교 안 용암사에 있는 불상으로, 광배는 없고 대좌와 불신만이 남아있는 통일신라 후기의 전형적인 비로자나불상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로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큼직하게 표현되었다. 활모양의 눈썹, 큼직한 코, 굳게 다문 입 등은 양감있는 얼굴과 알맞게 조화되어 원만한 인상을 보여주고 있다. 두 귀는 거의 어깨까지 내려왔으며 목에는 부드러운 곡선의 3주름이 표현되었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옷주름은 좌우대칭의 평행선으로 약간 도식화되었다. 단정하나 활력이 없고 약간 위축된 듯한 신체의 표현은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대좌는 상·중·하대로 구성되었는데 중대석의 각면에는 향로, 보살상 등이 조각되어 있다.

 

9세기 말 내지 10세기 초의 전형적인 석불좌상 양식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3.보살사 석조이존병립여래상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4호

지 정 일 1976.12.21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용암동 7 
시 대 고려시대


커다란 판석에 두 불상을 나란히 돋을새김 하였는데, 하나의 광배에 두 불상을 새긴 이른바 일광이불상으로 두 불상은 크기와 양식이 비슷하며 귀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갸름하고 고운 어린아이같은 얼굴에 천진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으며 신체에는 부드러운 굴곡이 잘 표현되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간략한 옷차림과 좌우로 엇바뀐 두 손의 표현 등에서 불상의 순진무구한 성격이 잘 나타나고 있다.

 

탄력이 줄어든 단아한 묘사와 간략한 기법 등에서 고려시대의 석조병존불입상으로 생각되며, 이러한 병존불입상은 석가불과 다보불의 병존불좌상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도 있어서 주목된다.

 

4.청주 탑동 오층석탑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5호

지 정 일 1976.12.21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탑동 251 
시 대 통일신라 후기∼고려 전기


청주 탑동에 서 있는 탑으로, 지금 자리에서 서쪽으로 40m 지점에 무너져 있던 것을 옮겨 세운 것이다. 이 탑으로 인하여 ‘탑동’이라는 마을 이름이 생겨났다. 형태로 보아 2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렸을 듯 하나, 지금은 기단부가 거의 없어지고 탑신부는 1층의 몸돌과 1, 2, 3, 5층의 지붕돌만이 남아 있다. 5층 몸돌과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탑을 복원할 때에 보충한 것이다.

 

일부만 남은 기단은 윗면에 탑신의 1층 몸돌을 받치기 위한 두꺼운 괴임조각을 두었다. 탑신의 1층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의 조각을 두고, 4면에 불상을 새겼는데 동쪽은 약사여래상, 서쪽은 비로자나불상, 남쪽은 석가여래상, 북쪽은 아미타여래좌상인 듯하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5단씩이며, 네 귀퉁이가 치켜올라갔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의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는 듯하나, 잃어버린 석재들로 인해 웅장했었을 탑의 옛모습을 볼 수 없음이 안타깝다. 통일신라 후기∼고려 전기 사이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5.청주향교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9호

지 정 일 1977.12.06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대성동 67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훌륭한 유학자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며, 지방백성의 교육과 교화를 담당하던 지방국립학교이다. 조선초에 처음 지어졌으며, 숙종 9년(1683)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현재는 제사공간인 대성전과 교육공간인 명륜당을 비롯한 6동의 부속 건물이 남아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로부터 토지와 노비·서적 등을 지급받아 운영되었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에 교육기능은 없어지고 제사기능만이 남아 옛 모습을 지키고 있다.

 

6.보살사 극락보전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56호

지 정 일 1980.01.09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용암동 7 
시 대 조선시대


보살사는 신라 진흥왕 28년(567)에 의신이 처음 지었으며, 청주 근교에서 가장 오래된 유서 깊은 절이다.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보전은 조선 초기에 지은 것으로 선조(재위 1567∼1608) 때 수리하였으며, 고종 9년(1872)에 다시 지었다.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소박한 맞배지붕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배치된 다포식 건물이다. 안에는 석조이존병립여래상(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4호)과 지장보살상, 삼존불상이 모셔져 있다. 또한 왼쪽 벽에는 극락회상탱이, 오른쪽 벽에는 칠성탱화가 있다.

 

보살사 극락보전은 조선 초기 건물의 특징이 강하게 남아있는 불전건축이다.

 

7.보살사 오층석탑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5호

지 정 일 1980.11.13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용암동 7 
시 대 조선시대


보살사는 청주 근교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 신라 진흥왕 28년(567)에 의신이 창건하였다. 보살사 극락보전 앞에 자리한 이 탑은 1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갖춘 모습이다.

 

기단은 3단의 괴임돌을 크기를 줄여 쌓아올린 모습이다. 맨윗돌의 괴임 윗면에는 아래로 향한 8잎의 연꽃무늬를 조각해 놓아 통일신라 후기나 고려의 석탑양식이 엿보인다. 탑신부는 1층 몸돌의 각 모서리에 기둥모양을 새겼고, 그 사이에 사각형과 원을 조각한 뒤 범자(불교문자)를 새겨 넣었다. 지붕돌은 두껍고 네 귀퉁이는 치켜올림이 전혀 없다. 꼭대기에는 노반(머리장식받침)이 생략된 채 복발(엎은 그릇모양 장식), 보륜(수레바퀴 모양장식), 보주(꽃봉오리 모양의 장식)가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기단의 독특한 표현이나 탑신부의 몸돌이 얕고 지붕돌도 단순화되는 등 전체적으로 단순화 된 아담하고 소박한 석탑이다. 탑을 세운 시기 시기는 탑신의 2층 몸돌의 한 면에 ‘간희계미’라 새긴 기록을 통해 정확하게 조선 숙종 29년(1703)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8.청주동헌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09호

지 정 일 1982.12.17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북문로1가동 171-3 
시 대 조선시대


동헌은 조선시대에 지방장관인 감사나 수령이 공무를 집행하던 곳으로 관청의 중심건물이다.

 

조선시대의 청주목 관청건물은 동헌을 비롯해서 객관·향사당 등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건물 한 채만 남고 모두 없어졌다. 기록에 의하면 영조(재위 1724∼1776) 때는 근민헌이라 했으며 고종 5년(1868)에는 이덕수가 다시 지으면서 청녕각이라 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의 기와에 순조 25년(1825)에 관청을 지었다는 글이 있는 것으로 보아 현재의 건물은 그 때 다시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앞면 7칸·옆면 4칸으로 1층이며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으로 가장 화려한 팔작지붕이다.

 

청주목사가 있던 관청의 동헌 건물로는 격식이 낮고 왜소해 보이나 조선 후기 지방 관청건축을 원형대로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현재는 군청사의 일부로 이용하고 있어 본래의 모습을 잃고 있으나, 관아의 전체구조를 알려주는 자료로서도 매우 중요하다.

 

 

9.망선루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0호

지 정 일 1982.12.17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1가 154 
시 대 고려시대


고려시대 청주관청의 하나로 관리들이 머무는 숙소인 객관 동쪽에 있던 취경루에서 유래한 것이다.

 

고려 공민왕 10년(1361)에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기념으로 청주에서 과거시험을 치르고 이곳에 방을 써붙였다는 기록이 있다. 세조 7년(1461)에 수리하였고 한명회가 현판을 ‘망선루’라 하였다고 한다. 그 뒤에 다시 고쳐서 근세에까지 유지되다가 1923년에 제일교회로 이건되었으며, 2000년 12월 중앙공원으로 옮겨 세웠다.

 

앞면 5칸·옆면 3칸이며, 나무로 지은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으로 가장 화려한 팔작지붕으로 누각형식이다. 현재 1층은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게 되었지만, 이 지방에서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10.정하리 마애비로자나불좌상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3호

지 정 일 1982.12.17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정하동 산9-1 
시 대 고려시대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정하동에 있는 바위면에 새긴 마애불로다.

 

머리에는 마치 모자를 쓴 듯하며, 머리 뒤에는 동그란 머리광배가 표현되어 있다. 신체는 균형이 잘 잡혀 있으며, 자연스럽게 흐르는 얇은 선의 옷주름 표현이 돋보인다. 왼손 검지 손가락을 오른손으로 잡을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런 특징적인 손모양은 동화사 비로암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244호)이나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과 비교된다.

 

직사각형의 얼굴, 잘룩한 허리, 볼륨있는 무릎 등에서 통일신라시대의 특징이 엿보이는 고려 초기의 작품이다. 

 

 

11.청주 탑동 양관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3호

지 정 일 1983.03.30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탑동 94-17 
시 대 조선시대


선교사들이 주거용으로 이용하던 건물로 1904년에 땅을 사기 시작해서 각각 다른 시기에 6동의 건물을 지었다.

 

지하실은 주로 돌을 사용하여 외벽을 쌓았으며, 6동의 건물 중 한 건물의 주춧돌은 카톨릭 순교자들이 있던 청주감옥의 벽에서 가져다 사용하였다고 한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만들지 못했던 유리, 스팀보일러, 벽난로, 수세식 변기, 철물류와 같은 수입자재가 많이 사용된 건물이다.

 

한식과 양식을 혼합한 건물로서 지어진 연대에 따라 서로 다른 건축적 특징을 나타내며, 서양식 건물의 초기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12.운천동 신라사적비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4호

지 정 일 1983.11.30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명암동 산81 국립청주박물관 
시 대 통일신라


사적비란 어떠한 사건에 관련된 사실이나 자취를 기록한 것으로, 이 비는 청주지방에 있던 어느 사찰과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다.

 

비의 규모는 높이 92㎝, 너비 91㎝로, 네모난 형태이다. 1982년 발견되기까지 산직마을의 공동우물터에서 빨래돌로 사용되었는데, 그 탓에 글자가 많이 닳아 있다. 비문은 북조풍의 해서체로 새겼으며, 비의 크기에 비해 글자가 크다. 비문의 내용은 알아보기 어려운데, 대체로 불법을 찬양하고 임금의 덕을 칭송하며 삼국통일의 위업을 기리는 호국불교의 내용을 담으면서, 절의 창건에 관련된 내용을 많이 적었다.

 

비에 ‘수공 2년’의 중국 연호가 있어 통일신라시대 신문왕 6년(686)에 이 비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당시 청주지역이 행정, 군사, 문화적으로 중요한 곳이였음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13.조헌 전장기적비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6호

지 정 일 1984.12.31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 92-6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의병장인 조헌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로, 임진왜란 당시 그가 승리를 이루었던 이곳 청주에 자리하고 있다.

 

조헌은 명종 22년(1567)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치면서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는데 힘을 다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승병장 영규와 힘을 합쳐 청주성을 탈환하기도 하였다. 왜적이 금산을 중심으로 충청도 일대를 거머쥐려 하자 승병장 영규와 7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에서 적과 싸웠는데, 적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었지만 인원이 너무 적어 결국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비는 네모반듯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큼지막한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비몸 앞면 위쪽에는 비의 명칭을 가로로 새겼고, 그 아래에 세로로 비문을 적었다.

 

왜란이 끝난 후 숙종 36년(1710)에 비를 세웠으며, 김진규가 비문을 짓고, 이수당이 글씨를 썼다. 

 

 

14.신전동 고가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5호

지 정 일 1985.12.28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신전동 180 
시 대 일제강점기


1926년에 지은 집으로 안채의 천장부재에 건축공사와 참여자의 이름 등을 기록한 상량문이 적혀있다. ㅡ자형의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가 ㄷ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는 길게 다듬은 돌을 3단으로 쌓은 받침대 위에 둥근 주춧돌을 놓고 네모 기둥을 세웠다.

 

건물이 세워진 연대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안채·사랑채·행랑채가 모두 갖추어져 전통 주거건축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15.순치명 석불입상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50호

지 정 일 1985.12.28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용정동 522 
시 대 조선시대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용정동에 있는 이 불상은 돌기둥을 이용하여 얼굴과 상체를 조각하여 석장승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마에는 큼직한 원형의 백호를 도드라지게 새겼고, 눈썹은 길고 커다랗게 표현하였다. 반달 모양을 한 입은 눈과 함께 얼굴 전체에서 미소를 띠게 한다. 손은 모아서 턱 밑에 괴고 있는데, 양 팔을 수평으로 처리하여 미숙한 조각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하체는 조각을 하지 않은 상태이며 중간부분에 순치(順治) 9년(효종 3년, 1652) 11월 16일에 만들었다는 글씨를 써 놓았다.

 

우리나라 사찰의 수호신 역할을 하는 석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6.청주한씨 시조 제단비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9호

지 정 일 1990.12.14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운동동 369-6 
시 대 조선시대


청주 한씨 시조인 한란의 유적지에 세워놓은 비이다.

 

땅 속에 묻혀버린 받침돌 위에 비몸과 지붕돌을 올리고 있는데 비몸이 약간 서쪽으로 기울었고 비문이 심하게 닳아 읽기 어려운 실정이다. 비문에는 한란의 내력을 자세히 서술하여 모든 후손들이 제사 때마다 읽고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조선 선조 38년(1605) 당시 청주목사였던 한백겸이 청주 한씨 시조인 한란의 유적을 고증하여 찾은 뒤, 후손들이 이 터를 기억하도록 비를 세운 것으로, 그의 동생인 이조참판 한준겸이 비문을 지었다. 이 때에 위토(位土:제사 또는 이와 관련된 사항들을 집행하는데 드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마련된 토지)를 마련하여 제단을 쌓고 담을 둘러 경계를 표시해 놓았다.

 

17세기 역사지리학의 대가이며 청주한씨 후손인 한백겸에 의해 시조의 옛 터가 고증되어 세운 비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17.서기사 석조약사여래좌상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74호

지 정 일 1993.11.05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율량동 91 
시 대 고려시대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율량동 서기사에 있는 불상으로 왼손에 약그릇을 들고 있어 중생을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준다는 약사불을 형상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몸 뒤의 광배는 따로 만들어 놓았고, 목은 부러져 있던 것을 시멘트로 보강하여 놓았다. 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낮게 솟아 있으며, 얼굴에는 살이 통통하게 올라 있다. 당당해 보이는 어깨에는 왼쪽에만 옷이 걸쳐 있고 평행선을 이루는 옷주름을 그리면서 팔목과 무릎 아래까지 덮고 있다. 살이 찐 가슴은 노출이 많고 젖꼭지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주목되며, 손모양은 오른손 끝이 땅을 향하고 있다.

 

만들어진 연대는 고려 중기로 추정되며, 전체 높이는 86㎝, 어깨 폭은 42㎝이다.

 

18.구룡사 사적비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99호

지 정 일 2009.03.06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 산29-2 
시 대 조선시대


구룡사사적비는 상당산성 남문 앞에 있는 비석으로 구룡사의 창건과 상당산성의 개축사실을 기록하고 있으며, 영조 40년(1764년) 은재거사가 비문을 짓고 글씨를 새겨 건립했다.

 

비명은 ‘구룡사 사적비’이다. 이 비석에 새겨져 있는 비문을 통해 구룡사가 숙종 46년(1720년)에 절도사 이태망과 홍서일이 군영의 건물을 신축하고 연못을 팔 때 함께 창건했다는 기록과 함께 도천 스님이 창건한 절이라는 건립경위와 1743년에 대방광극락보전을 완성했다는 사실을 기술하고 있다. 또 숙종 42년(1716년)에 절도사 유성추가 상당산성을 개축하고 삼남의 요충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비문의 기록에 의하면 구룡사는 상당산성 서남암문 안쪽에 있던 사찰이었으나 현재는 남아있는 건물이 없다.

 

상당산성 남문 앞에 세워져 있으며 사적비는 높이 133㎝, 폭 56㎝, 두께23㎝의 비신을 세우고 상부에 가첨석을 얹었다. 좌대는 101x55㎝, 가첨석은85x49x32㎝)이다. 보존 상태는 상당히 양호하다.

 

상당산성의 개축과 상당산성 내 사찰의 기록을 살필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유물로서,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 관리함으로서 상당산성 정비의 당위성을 부여하고 상당산성을 찾는 관람객에게 역사적 사실을 올바르게 알려줘야 할 필요성이 있다.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1.청주농악


종 목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1호

지 정 일 1992.10.23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강서1동 169-5 
기능보유자  청주농악보존회


농악은 농부들이 두레를 짜서 일할 때 치는 음악으로, 꽹과리·징·장구·북과 같은 타악기를 치며 벌이는 음악을 두루 가리키는 말이다. 굿·매구·풍장·금고·취군 등으로도 불린다.

 

청주농악은 강서 1동 지동마을에서 걸립·두레·백중·연의적 농사풀이굿으로 사용되면서 전해져온 농악으로 쇠꾼들이 열지어 움직이는 진풀이, 법고놀이와 인사굿, 꽃봉오리굿, 채상굿, 갈지굿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른 지방보다 여러 채 굿의 변화가 다양하고 농악의 가락이 빠르며 진법놀이가 다양하고 돌모를 머리 뒤에 쓰고서 상모를 돌리는 것이 특징이다.

 

현재 상쇠인 이종환씨가 청주농악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어 있다.
 


2.배첩장


종 목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7호

지 정 일 1999.11.19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봉명2동 2419 
기능보유자  홍종진


배첩이란 글씨나 그림에 종이·비단 등을 붙여 족자·액자·병풍 등을 만들어서 아름다움은 물론 실용성 및 보존성을 높여주는 전통적인 서화처리기법을 가리킨다. 일제 때 들어온 말로 오늘날에는 ‘표구’라고도 한다. 배첩장은 조선 초기에 도화서 소속으로 궁중의 서화처리를 전담하던 사람을 말한다.

 

중국 한나라 때가 기원으로 알려진 배첩은 중국 당나라 때에 한층 발전하여 정립단계에 이른다. 우리나라에 어떻게 전해졌는지는 모르지만 고구려 고분벽화의 병풍그림으로 보아 삼국시대 때 전해져서 한국 배첩의 기초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배첩은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쳐 꾸준히 발전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배첩장이라는 전문가가 등장할 만큼 성황을 이루었다.

 

배첩의 제작기법 내지 형태는 액자·병풍·족자·장정 및 고서화 처리의 다섯 가지이다. 액자는 비단재단 - 그림초배 - 재배 - 건조·액자틀 준비 - 조립의 작업과정을 거친다. 병풍의 한 폭 처리도 액자와 같다. 족자의 작업과정은 재단 - 초배 - 겹배 - 건조 - 삼배 - 건조 - 축목·반달부착으로 이루어진다. 장정은 표지나 속지에 손상을 입은 고서의 처리를 말한다. 고서화처리는 손상된 고서화를 되살려 내는 작업이기에 높은 안목과 세밀한 기술을 필요로 한다.

 

배첩장은 전통공예기술로 문화재적 차원에서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으며 충청북도 청주시에 살고 있는 기능보유자 홍종진씨가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3.단청장


종 목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9호

지 정 일 2001.09.14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사직1동 255-17 
기능보유자  권현규

 

단청이란 목조건물이나 공예품, 조각품 등에 청·적·황·백·흑 등 다섯가지 색으로 여러 가지 무늬와 그림을 그려아름답고 장엄하게 장식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단청은 건물이나 기물 등의 부식 방지와 재질의 조악성을 은폐하고, 종교 등 신앙적인 의례를 행할 때 이를 일반 잡기와 구분하도록 하는 기능도 있다. 단청은 불교나 유교가 성행하였던 중국·한국·일본 등에서 일찍이 유행하였으나 현재까지 그 전통이 이어지는 곳은 한국뿐이다. 한국의 단청은 삼국시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불교의 수용과 함께 더욱 발전되어 왔다.

 

옛날부터 관청에는 화사, 화원, 화공, 가칠장, 도채장이라 하여 궁전을 비롯한 객사, 사묘, 누정 등의 단청을 하였고, 사찰에서는 금어, 화승이라 하는 자체 화공집단이 있어 사찰건축과 불상, 불화, 조각 등의 제작도 겸하였다.

 

단청의 종류는 가칠단청, 긋기단청, 모로단청, 얼금단청, 금단청으로 나누어지고 다시 세분하여 모로긋기단청, 금모로단청 등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단청장 권현규는 1968년 어린 나이에 화승인 영봉스님에게 입문하여 사사를 받아 현재까지 30여년간 단청에만 전념한 장인으로, 단청은 물론 탱화에까지 안정되고 화려 장중한 느낌의 우수한 작품을 많이 남기고 있다. 그는 불교미술전람회에 수차 입상을 하였고, '연등초에 대한 고찰'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는 등 단청의 보존과 발전에 노력하고 있는장인이다.


4.궁시장


종 목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16호

지 정 일 2006.11.24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봉명동 614
기능보유자  양태현


궁시장이란 활과 화살을 만드는 기능과 그 기능을 가진 사람을 말하는데, 활    을 만드는 사람을 궁장(弓匠), 화살을 만드는 사람을 시장이라 한다.

 

화살은 목전, 철전, 편전, 장군전, 세전 등이    있었으나, 현재 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유엽전이다. 유엽전의 길이는    85cm 가량이나 사람과 활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다. 재료는 대나무, 꿩깃촉, 소심줄, 부레풀등이 있어야 한다. 도구로는 톱, 줄칼, 송곳, 통풀, 화로, 나무집    게 등을 갖추어야 한다.

 

전북 전주에서 출생한 양태현은 16세에 조명제(중요무형문화재 시장 보유자)    선생 문화생으로 입문하여 11년간 전수를 받았으며, 1983년 청주로 이주하여  현재까지 약 40년간 전통적인 죽시제작의 맥을 잇고 있다.

 

(충청북도 기념물)

 

1.동래부사 송상현 충렬사

 

종 목  충청북도 기념물  제16호

지 정 일 1977.12.06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 산105 
시 대 조선시대


충렬사는 임진왜란때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선조 28년(1595)에 묘소를 동래에서 이곳으로 이장하고 광해군 2년(1610)에 사당을 창건하였으며 그 후 여러 차례 중수하였다.

 

송상현의 호는 천곡, 시호는 충렬인데, 선조 9년(1576) 문과급제후 선조 24년(1591) 동래부사가 되었다. 임진란이 일어나 왜군이 동래성에 육박하자 군사를 이끌고 항전하다 왜병에게 살해되었다.

 

충렬사 뒷산에는 송상현의 묘소와 현종 원년(1659)에 세운 신도비가 있고, 사당 입구에 선조 28년(1595)에 건립한 충신문이 있다. 지금의 건물은 1980년에 중수한 건물로 정면 3간, 측면 2간의 겹처마 목조기와집인데 내부는 통칸 마루방에 3개의 분합문을 달고 앞퇴를 두었으며, 마당 앞에 삼문을 세우고 주위에는 석축담장을 쌓아 보호하고 있다.

 

청주시에서는 천곡선생의 애국충절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2001년에 인근 부지를 확장 정비하여 전시관과 사당을 신축하였으며, 주변을 공원화하여 시민들이 역사와 함께 호흡하는 공간으로 조성하였다 

 

2.청주 표충사 

 

종 목  충청북도 기념물  제17호

지 정 일 1977.12.06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수동 6-11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기 때 문신인 이봉상(1676∼1728)·남연년·홍림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영조 4년(1728)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키고 청주로 침입하자 당시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있던 이봉상을 비롯하여 남연년, 홍림 등이 끝까지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그들이 죽은 뒤 충절을 높이 여겨 이봉상에게는 충민공, 남연년에게는 충장공이란 시호를 내리고 홍림에게는 호조참판을 증시하였다.

 

영조 7년(1731) 청주읍성 북문 안에 그들의 사당을 세웠다가 1939년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지었는데, 삼충사라고도 부른다. 

 

3.연담공 묘소

 

종 목  충청북도 기념물  제20호

지 정 일 1977.12.06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명암동 산20-1 
시 대 고려시대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명암동에 위치한 고려 후기의 문신 연담공 곽예(1232∼1286)의 묘소이다. 고려 고종 42년(1255)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좌승지, 국자감 대사성, 문한학사, 감찰대부 등을 역임하였다.

 

원종 때에는 왜구 침범을 꾸짖고 납치해간 우리나라 사람의 송환을 요구하기 위한 사신으로 일본에 다녀오기도 했다. 충렬왕 때 원나라 황제의 생일 축하 사절로 원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별세하였다.

 

사람됨이 강직하고 소박하여 높은 지위에 이르러서도 옛날과 다름이 없었다고 한다. 글을 잘 짓고 글씨에도 능하여 독특한 서체를 이루어 당대의 명필가로 이름이 높았다.

 

원래는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에 묘소가 있었는데 이곳으로 이장했으며 묘역에는 2개의 묘비와 석인상,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 등이 있다. 묘비의 글은 면암 최익현이 지었으며, 신도비의 글은 지산 김복한이 지었다. 

 

4.청주 척화비

 

종 목  충청북도 기념물  제23호

지 정 일 1978.10.27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 92-13 
시 대 조선시대


척화비는 조선 후기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온 백성에게 서양세력에 대한 경계심을 일깨우고자 서울과 전국 교통요지에 세우도록 한 비이다.

 

이 척화비는 1976년 2월 29일 석교동 노상하수구 뚜껑으로 있던 것을 발견한 것으로, 직사각형의 모습이며, 윗부분의 일부가 파손되어 있다. 앞면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라는 글을 새겨 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의지를 밝히고 있다.

 

척화비를 세운 시기는 고종 8년(1871)인데, 후에 임오군란(1882)이 발생하고 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자 일본공사의 요구로 모두 철거되어, 지금은 이처럼 몇 기의 비들만 곳곳에 남아 있다. 

 

5.신항서원 

 

종 목  충청북도 기념물  제42호

지 정 일 1984.12.31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용정동 120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기 대학자이며 정치가인 율곡 이이와 고려 후기의 학자로서 성리학 발전에 공헌한 목은 이색을 비롯하여 경연·박훈·김정·송인수·한충·송상현·이득윤 등 아홉 선현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조선 선조 3년(1570)에 ‘유정서원’으로 세웠고 현종 원년(1660)에 나라에서 ‘신항’이라는 이름을 받은 사액서원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8년(1871)에 폐쇄되었다가 1957년 복원하였고, 1987년 새롭게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 건물로는 사당과 강당 등 주요 건물과 비석이 안치된 비각, 관리인이 주거하는 수호사 등이 있다. 외삼문을 통해 경내로 들어서면 교육 공간인 강당이 있고 뒤편에 별도의 담장을 두른 제사 공간으로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강당은 교육 장소 겸 제관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사당은 낮은 기단 위에 조성된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안쪽에는 이이를 중심으로 좌우에 여덟 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해마다 3월과 9월에 제사를 지낸다.

 

6.송상현 묘소 및 신도비

 

종 목  충청북도 기념물  제66호

지 정 일 1984.12.31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 산1-1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기의 충신 천곡 송상현(1551∼1592) 선생의 묘소이다.

 

선조 9년(1576)에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1591년 동래부사가 되었으며, 당시 잦은 왜구의 노략질과 왜적의 침입 소문에 대비하기 위하여 성곽을 수리하고 군사훈련을 시켰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래성에 침입한 왜병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의 충적을 기리어 이조판서의 관직을 내렸다. 그리고 충렬사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으며 충신문을 세웠다.

 

강촌 묵방산에 자리잡은 이 묘는 원래 동래에 있던 것으로 광해군 2년(1610)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주위에는 상석과 문인석 등이 세워져 있으며, 묘의 오른쪽에는 비석이 놓여 있다. 묘소 입구에는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는데, 송시열이 글을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쓴 것이다. 

 

7.방정

 

종 목  충청북도 기념물  제84호

지 정 일 1990.12.14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방서동 588 
시 대 시대미상


청주 방서동에 있는 우물로, 우물이 있는 이 마을은 네모난 샘이 있는 곳이라 하여 '방정마을' 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곳은 청주 한씨의 시조 한란이 살았던 곳으로, 어느해 가뭄이 들어 농사를 지을 수가 없게 되자, 한란이 3일 동안 기도를 드리다 쓰러져 의식을 잃었는데 꿈속에 북쪽 장수가 나타나 창끝으로 땅을 찌르자 맑은 물이 콸콸 나왔다. 너무 기뻐 소리를 지르다 깨어나 꿈속에서 보았던 곳을 파니 과연 많은 양의 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 뒤 문중 사람들과 함께 네모꼴로 큰 웅덩이를 파서 우물을 만들었는데, 이후 부터는 큰 가뭄이 들어도 물이 마르거나 죽지 않았다. 또한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을 토벌하고 이곳을 지나다 수십만군이 이 물을 먹었는데도 부족하지 않았다고 한다.

 

우물을 만든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고, 1988년 우물보호를 위해 뚜껑과 담장을 새로 정비하였다.

 

8.무농정지

 

종 목  충청북도 기념물  제85호

지 정 일 1990.12.14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방서동 210-4 
시 대  조선시대


청주를 본관으로 하는 가장 대표적인 씨족인 청주 한씨와 관계된 정자의 옛 터이다.

 

청주 남쪽의 넓은 들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낮은 언덕 위에 정자를 짓고 농사에 힘쓰도록 권장하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정자는 폐허화 되고 숙종 14년(1688) 후손 한익저가 세운 유허비만 남아 있었는데, 1949년 후손들이 시멘트로 지었다가 1988년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의 목조로 다시 세운 것이다. 서쪽에 작은 대문이 있고 4면을 담장으로 둘렀으며 앞뜰 좌측에 무농정유허비가 있다.

 

9.가경동 유적


종 목  충청북도 기념물  제120호

지 정 일 2002.01.11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가경동 산54-1외 
시 대  청동시대


이 유적은 가경동의 홍골∼감나무실 사이의 구릉지역에 위치하고 있는데 대한주택공사에서 추진한 청주 가경4지구 택지개발사업과 관련한 구제발굴에서 그 실체가 드러난 곳이다. 현재는 공원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2000. 11. 22∼ 2001. 1. 15 충북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청동기시대 유구 1기, 백제시대 주거지 3기, 저장혈 7기,토광묘 13기, 조선시대 민묘 18기 등 많은 유구가 조사되었는데 백제시대의 철기 5점, 토기류 5점, 마구류 3점, 농공구류 11점 등의 유물이 함께 출토되었다. 또한 특이한 형태의 토광 목곽묘와 주거(생활)유구와 매장유구가 일정하게 가까운 간격을 두고 출토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앞으로 당시의 생활상 복원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 유적은 이 곳이 청동기시대와 백제시대에 활발한 문화활동이 있었던 곳으로 신봉동백제고분군, 봉명·송절동 지역과 연계되어 청주지역의 초기역사와 관련하여 중요한 곳임을 말해주고 있다.

 

10.부모산성 

 

종 목  충청북도 기념물  제121호

지 정 일 2002.01.11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비하동 산10-1외 
시 대 삼국시대


청주 서부의 부모산(232m)에 있는 석축 산성이다. 1998년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의 지표조사 결과 중부 이남지역에서 처음으로 계단식 보축 성벽이 발견되었으며, 이는 서울 아차산성과의정부의 대모산성과 같은 형태로 신라계 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벽의 둘레는 1.135m이며, 성벽의 윗부분은 많이 무너졌으나 기저부는 온전히 남아있다.

 

성벽의 너비는 6.4m이상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성벽의 높이 또한 비슷할 것으로 추정된다. 부모산의 주변에는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 유역에 발달한 구릉과 충적평야가 넒게 펼쳐져 있다. 또한 시야를 가리는 높은 산이 없어 산허리의 등산로를 돌아가며 청주 지역을 넓게 조망할 수 있다. 따라서 삼국시대 당시 이 지역이 매우 중요한 위치임을 알 수 있는데 북측과 서측의 산줄기를 따라 작은 규모의 보루성들이 부모산을호위하듯이 있어 그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성내에는 연화사라는 전통사찰과 피난전설을 간직한 모유정이 있으며 북측에는 커다란 연못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유적은 청주의 초기역사를 말해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11.현풍곽씨 효자비・묘소

 

종 목  충청북도 기념물  제139호

지 정 일 2007.03.09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시 대 조선시대

 

이 문화재는 4대에 걸친 현풍곽씨 문중의 효열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정려로 효자 관련 유물(효자각, 효자비, 정려, 현판) 및 묘소 등이 비교적 온 전한 상태로 한 곳에 보존되어 있는 것은 매우 희귀한 경우로 조선 후기 청주 지역 이서층의 동향과 신분 변동을 살펴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 로 조선 후기(1885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곽여찬 효자비 높이 93cm, 곽진은 효자비 높이 103cm, 인천이씨 효부비 105cm, 곽원호 효자비 118cm, 곽여찬, 곽진은, 곽원호의 묘소 3기

 

12.양수척 효자비

 

종 목  충청북도 기념물  제145호

지 정 일 2009.03.06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운동동 131-3 
시 대 조선시대


이 비석은 조선시대의 효자 양수척의 효행을 기려 세운 비석이다. 방형대석 위에 높이 112cm, 폭 34cm, 두께 23cm의 규모로 세웠다.

 

비석 전면에 ‘양수척효자비’라고 새겨져 있으며, 비신에 사용된 석재인 화강암이 풍화가 많이 되어 비문을 판독하기 어렵다. 전설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운동동 속칭‘비선거리󰡑에 살았던 양수척 형제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원래 천민은 성도 없이 돌쇠, 마당쇠 등으로 불렸는데 성은 천민들의 집단인 양·소·부곡에서 양을 따서 양수척 효자비라는 비석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개인집 담장에 바짝 붙어 길거리에 세워져 있는데 풍화로 마모가 심하여 글씨 판독이 매우 어려운 상태이다. 비문은 ‘양수척효자비'이다.

 

양수척은 조선시대에 현재의 상당구 운동동 비선거리에서 두 아우와 함께 살았는데, 주위 사람들에게 평판이 좋지 않았고 늙은 어머니에게도 효도를 하지 않았다. 이를 걱정하던 어머니가 드러눕게 되자 고려장을 하려고 하였다고 한다. 이때 남일면 효촌리에 살던 경대유가 이 소문을 듣고 삼형제를 불러 꾸짖자 양수척 형제는 크게 감화되어 이후 노모에게 효행을 극진히 하였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어느 날 모친이 중병으로 눕게 되자 청주성으로 들어가 한약을 지어 돌아오는 중에 홍수가 나서 월운천을 건너지 못하고 한탄하고 있는데, 갑자기 하천의 물이 갈라져 건너게 되었으며 약을 달여 모친의 병구완을 하였다고 전하여 온다.

 

천민신분인 사람에게 효자비를 세워준 것은 매우 드문 예로서 시민들의 교육 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 좋은 유물로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할 필요성이 있다.

 

(충청북도 민속자료)

 

이제열 지석

 

종 목  충청북도 민속자료  제15호

지 정 일 2004.07.09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가경동 768 
시 대 조선시대


이 지석은 1987년 충남 청양군 낙지리에 있는 산소를 사초하다가 묘 앞에서 사각형의 이색적인 옹기를 발견하여 파내면서 발견되었다.

 

이 지석의 주인공인 이제열(1635∼1712)은 조선 숙종대 사옹원참봉, 신계현령을 역임했던 인물이다.

 

이 지석은 총 7매로 길이 19∼22cm, 너비 12.9∼13.9cm로서 두께 1cm 내외의 것이다. 각 판은 11행 21자로 되어 있지만 마지막 7판만은 10행으로 끝맺고 있다. 자체는 행서로 자경은 8∼9cm의 크기를 갖고 있다. 제1에서 6판까지의 글씨는 옅은 청색을 띠고 있으나 제7판은 짙은 청색을 보인다. 제7판은 크기가 비교적 작고 자기판의 색깔과 빙열의 모양도 다른 판과 차이를 보이고 있어 여섯 개의 판과 함께 구워진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글씨체로 보아 동일인이 필서한 것으로 시기적으로 큰 차이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제작과정 중 한 판이 파손되어 다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 지석은 내용 중에 단종 복위와 관련하여 많은 모임이 있음을 보여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알 수 있는 사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문화재자료)

 

1.주성강당 

 

종 목  문화재자료  제17호

지 정 일 1997.01.03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주성동 50 
시 대 조선시대


고려말 성리학자인 목은 이색의 영정을 모셔 놓은 목은영당 부속 건물로 학문을 닦던 장소이다.

 

언제 처음 지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창건 이후 여러 차례 보수하였고, 1966년 옛 모습에 가깝게 복원하였다.

 

건물의 규모는 앞면 5칸·옆면 2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중앙에 대청마루를 두고 좌우로 온돌방을 설치했으며 큼직한 대들보는 서툰 듯하면서도 우아한 멋을 풍긴다.

이 강당을 통해 많은 유학자들이 배출되었다고 전한다.

 

건물 자재가 잘 보존되어 있어 조선시대의 목재 다루는 법을 잘 보여준다.

 

2. 것대산(거질대산)봉수지

 

종 목  문화재자료  제26호

지 정 일 1998.11.20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용정동 산107-2 
시 대 고려시대


봉수대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급한 소식을 전하던 옛날의 통신수단을 말하며,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경남 남해의 금산 봉수에서 출발하여 서울 남산에 이르는 중간 길목에 자리잡은 이 봉수대는, 남쪽으로는 문의 소이산 봉수에서 연락을 받아 북쪽으로 진천 소을산 봉수에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거차대 봉수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이후의 지리서에는 거질대산봉수라고 적혀있다.

 

봉수대가 만들어진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봉수제도가 마련된 고려시대부터 이곳에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었고, 조선 고종 31년(1895) 봉수제도가 없어질 때까지 그 기능을 다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동서로 긴 타원모양으로, 둘레에 보호벽을 둘렀던 흔적이 남아 있으나, 무덤 1기가 봉수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성의 주변을 살펴 사태를 알리는 통신시설인 봉돈은 현재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없다. 

 

3.한월동 고가 

 

종 목  문화재자료  제37호

지 정 일 2002.08.16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방서동 197-1 
시 대 조선시대


건물은 앞면 4.5칸, 옆면 5칸의 ‘ㄱ’자형 건물로, 88.69㎡(26.83평)의 크기이며, 본채는 앞면에 퇴를 두고, 왼쪽 익랑은 앞뒤로 퇴를 둔 무고주 납도리 오량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앞쪽 기단의 일부 석재는 사랑채에서 가져온 화강석 장대석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 외의 부분은 콘크리트로 보수하여 확인이 어렵다. 앞쪽의 디딤돌도 콘크리트에 타일을 붙여 사용하고 있다.

 

전체적인 구성은 본채 중앙에 2칸의 대청을 두고 양쪽에 방을 들였으며, 오른쪽 앞쪽은 퇴칸에 우물 마루를 깔았다. 왼쪽 익랑은 본채와 연결된 방 하단부에 주방과 욕실이 차례로 연결되어 있고 앞면 퇴의 우물 마루로 각 방이 연결되고 있다.

 

훼손이 많이 된 상태이나 청주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 가옥으로 추정되며, 대들보에 새겨진 상량문(上樑文)에 “숭정후4경신”이라는 기록이 있어, 1860년(조선 철종 11)에 건립한 건축물로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한식 흙기와를 사용하고 있던 지붕의 해체 과정에서 망와에 ‘강희임오’란 명문이 확인되어 1702년(숙종 28)에 만들어진 기와가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강희임오’ 명문 기와의 발견으로 상량문의 기록처럼 1860년에 새로이 가옥을 신축하면서 기존에 다른 건물에서 사용되던 기와를 옮겨와 사용한 것인지, 아니면 1702년에 만들어진 가옥을 1860년에 고쳐 지은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앞으로 확인해야할 과제이다. 2005년 전면 해체하여 보수·복원하였다.

 

청주의 축제

 

1.청주예술제
                  

지역별 충청북도 청주시
주최/주관기관 청주시 / 청주예술추진위원회
최초 개최년도 2003
개최기간 4월(4일-5일간)
행사장소  청주예술의 전당 및 청주시일원
축제성격 문화예술

 

▶ 축제유래
벚꽃 개화기에 즈음하여 시내일원에서 열리는 청주시민의 날은 전통 민속놀이, 각종 공연 및 전시등 다채롭고 풍요로운 행사를 개최하여 시민의 정서함양과 화합을 도모하고 있다.

 

▶축제의 목적
청주예술제를 통하여 지역예술의 활성화, 전통문화의 발굴 및 전승, 창작예술의 발전, 미래 예술 활성화 방향에 기여하고, 청주의 전문예술인이 중심이 된 독창적이고 전문적인 예술축제를 생활화 할 수 있는 청주시민의 축제로 승화시키고, 전시민의 화합의 장으로 개최하여 행복한 청주건설에 기여하고자 함

 

▶ 축제의 특성
∘ 청주문화예술의 발전을 이끌어 갈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될 청주예술제는 우리 지역의 예술인들이 자기들만의 작업공간에서 뛰쳐나와 시민들에게 직적 다가가는 ‘전문적인 예술축제’를 지향한다. 무용, 연극, 미술, 음악, 국악, 문학, 건축 등 시민들과 함께 호흡하고 교감하는 예술제로 창의적 미래를 만들어 갈 예술기초 교육과 사회문화에 기여한다.

 

▶ 지역특성
- 천년고도 청주의 순수예술축제
- 중원예술의 맥을 잇는 창의적이며, 예술교육의 기초를 다지는 예술제
- 건축, 국악, 무용, 문학, 미술, 사진, 연예, 영화, 음악 등 각 전문적 예술무대가 시민들 가까이 찾아가는 예술행사
- 청주의 문화예술 저변 확대와 시민문화예술 항유에 기여

 

▶ 축제행사종목
∘ 개막식, 청주예술제 터다지기 한마당, 청주예술제 축하가요콘서트, 2004한∙중 문화예술 교류단 특별공연 交感, 망선루전국서예대회, 망선루전통문예행사, 예술축전, 청주예술제 축하음악회, 시민과 함께하는 애송시 낭송회, 창작무용 공연 비익을 위한 몸짓, 청소년디지털영화제, 지역예술발전을 위한 세미나, 예술체험행사, 정관 김복진 미술전시회, 중앙공원시화전 등


2.청주직지축제
                  

지역별 충청북도 청주시
축제 한글명 청주직지축제
최초 개최년도 2003
개최기간 9월중(4일간)
행사장소 청주예술의 전단,청주고인쇄박물관 일원
축제성격 전통민속

 

▶ 축제의 유래 및 특성
직지의 유네스코 등재일인 2001. 9. 4을 기념함으로써 그 의미를 소중하게 간직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됐고, 이에 따라 직지가 등재된 날을 기념하여 축제를 통해 직지의 창의적 정신을 발전시켜 나가고자 함.
- 2003년부터 매년(9.4일 전후) 청주직지축제 개최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직지 등재
- 세계기록유산분야 최초의 직지상 제정(제1회 2005년 9월4일 시상)

 

▶ 지역특성
- 세계 현존 최고의 금속활자본 직지가 발간된 고장
- 충·효·예가 살아 숨쉬는 선비의 고장 (지방자치의 효시인 서원향약)
- 인간과 자연, 전통과 미래가 공존하는 살기 좋은 고장

 

▶ 축제행사종목
직지상시상식, 세계기록유산보유국전통문화공연, 직지상수상자의 연구업적에 대한 심포지움, 동서인쇄문명교류 학술회의, 직지테마 경연대회 입상작 전시,현장학습 (5학년은 다모여라), 금속활자 재현/ 체험, 평생학습동아리전국대회 ,직지찾기전국사이클대회, 오페라직지 등


3.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개최시기  10월(격년)
행사장소  청주예술의 전당 일원 및 시내행사장


▶ 축제의 유래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을 인쇄한 역사적 맥락을 21세기 문화산업시대에도 계승ㆍ발전시키기고 세계인들에게 행복한 일상에 필요한 공예문화상품을 개발하고 이를 통해 국내 공예산업의 인프라 구축을 위해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가 시작되었다.
 

▶ 축제행사종목
국제공예공모전, 초대작가전, 공예산업관, 국제공예상품, 산업교류전 ㆍ주제공연, 중요무형문화재공연, 공예체험, 기타 이벤트


3.쇠내골 사람들 행복축제

 

개최시기  매년9월~10월
행사장소 금촌동


▶ 축제의 유래
기존의 지역축제와 차별화하여 점차 희미해져가는 이웃간의 정을 회복하고 우리마을 사랑하기- 금천동 주민이 하나 되는 축제를 만들자


▶ 축제행사종목
체조,가족걷기대회,우리동네 사진찍기,가족사진찍기


4.구룡축제

 

개최시기 매년5월
행사장소 모충초등학교

 

 

▶ 축제의 유래
- 축제를 통해 삶의 터(마을공동체)에 대한 애향심 고취
- 지역 특성을 살린 축제 주제로 상품성 제고
- 잊혀진 전통문화행사 재현으로 역사성 제고
- 지역문화역량 총결집 문화수준 향상
- 남녀노소, 온 가족이 참여하여 만들고 즐기는 한마당 잔치


▶ 축제행사종목
- 풍물 길놀이
- 줄다리기
- 효 실천 마당 : 경노잔치(위안공연:적십자사 연예인 봉사회
- 전통놀이마당 : 투호놀이, 줄넘기, 제기차기, 딱지치기등


5.새해맞이 희망축제

 

주최/주관기관 : 충청북도, 충북예총

최초 개최년도 : 1999

개최기간 : 2009.12.31.-2010.1.1
행사장소  청주예술의 전당 천년각

축제종류 : 문화관광

 

▶ 축제의 유래 

다사다난했던 한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맞이하여 도민의 건강과 행복, 도정 발전을 기원하고 도민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화합의 한마당을 마련하기 위해 매년 12월31일 청주예술의 전당 천년각에서 개최

 

▶축제행사종목

길놀이 및 사물놀이, 도민한마음 어울림마당, 연합합창단 축하공연, 제야의 타종, 신년메세지 낭독, 소망풍선 띄우기, 새해액운 쫓기 등

청주의 문화재, 축제, 화보

... (되도록 구제적으로, 또 3개다 해주시면 좋고여 ) 청주의 문화재 (국보) 1.용두사지 철당간 종 목 국보 제41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 48-19...

청주시의 문화재,축제,화보를 자세하게...

... 저는 청주시에 살아서 청주시의 문화재,축제,화보를 조사해야하는데 잘 몰라서요. 청주시의 문화제,축제,화보 를 부탁할게요. 제발요~~~ 부탁합니다. 다다음주이면...

청주-우리고장 자치단체 고장의 경제를...

제가 청주에 살거든요 그런데 무서운 선생님이 우리고장 자치단체... 문화재를 보존하고, 시민을 위해 음악회, 전시회 등을 마련하며, 그 밖에 시민이 궁금해 하는 사항을 화보나...

직지심체요절에 대한 얘기

... 지금 청주시내 곳곳에는 “직지”라는 영어글자(Jikji) 와 한자(直指)가 마치 청주 = 직지 처럼 붙어 있다.... 또한 직지인쇄의 발상지인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일대 13만...

광주, 영암, 나주, 해남, 여수의...

... 그해 이초의 옥에 연루되어 청주옥에 갇혔다가 홍수로... 세계김치축제의 장소로도 유명하다. 8.포충사 종 목... 많은 문화재가 있다. 월출산의 입구인 도갑사를 지나 5km...

청주의 축제,화보 좀 찾아주세요

이제 촏잉 4학년짤 어린이인데요 방학 숙제로 문화재,축제,화보 수집해 오기가 있는데... 충북 청주에서 열리는 축제입니다. 하나씩 다 설명드릴수는없고... 링크는 불법같구요.....

직지를 찾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 지금 청주시내 곳곳에는 “직지”라는 영어글자(Jikji) 와 한자(直指)가 마치 청주 = 직지 처럼 붙어 있다.... 또한 직지인쇄의 발상지인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일대 13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