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퇴계 이황,율곡이이,세종대왕에 대하여.(참여 부탁)

이순신 장군,퇴계 이황,율곡이이,세종대왕에 대하여.(참여 부탁)

작성일 2007.12.27댓글 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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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요....

 

겨울 방학 숙제를 하려고 하는 데요...

 

한국은행에서 발행되는 돈 중 백 원,천 원,오천원,만 원별로 그 인물에 대해 정리해 봅시다.라는

 

 문제를 제가 하려고 하는데 인물들을 설명하는 게 많아서 질문을 드렸습니당.

 

제발 참여 좀 해 주셍요.>ㅁ<

 

 

내공 마니 드링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세종대왕>

세종(世宗, 1397년 음력 4월 10일/양력 5월 15일~1450년 음력 4월 8일/양력 5월 26일, 재위 1418년~1450년)은 조선의 제4대 이다. 는 도(裪), 는 원정(元正), 시호는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다. 태종원경왕후의 셋째 아들이다. 흔히 세종대왕이라 부른다.

세종대왕은 재위 기간 동안 국방과 과학 및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찬란한 업적을 많이 남겨 위대한 성군으로 추앙받고 있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했고, 10월 9일한글날로 정해졌다. 현재 대한민국의 10,000권에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출생

세종대왕은 1397년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1408년 12살에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고, 1413년 16살에 충녕대군(忠寧大君)이 되었다. 그 뒤 1418년에 맏형 양녕대군이 태종이 '법을 존중하지 않는 양녕이 군주가 된다면 무고한 사람들이 죽을 것'이라고 혀를 찰 정도로 심각한 비행[1]으로 왕세자에서 폐위되자 충녕대군의 학문과 높이 평가되여 일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종에 의해 22살에 새 왕세자로 책봉되었다가 같은 해 8월에 조선의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재위

먼저 황희, 맹사성 등과 같은 유능한 인재를 많이 등용하여 정치를 맡겨 깨끗하고 참신한 정치를 펼쳐 나갔다. 그러면서도 인사와 군사에 관한 일은 세종 자신이 직접 처리함으로써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었다. 아울러 국가의 행사를 오례에 따라 유교식으로 거행하였으며, 사대부에게도 주자가례의 시행을 장려하여 유교 윤리가 사회 윤리로 자리 잡게 만들었다.

세종은 학문적인 사업뿐만 아니라 국토 개척과 확장을 통하여 국력을 신장하는 일에도 힘을 기울였다. 1419년 6월 19일 이종무 장군으로 하여금 삼도에 소속된 9명의 절제사들과 전함 227척, 군사 1만 7천 명을 이끌고 거제도의 마산포를 떠나 왜구의 근거지인 일본대마도를 정벌하게 하였다. 대마도에 상륙한 조선군은 섬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왜구를 죽이고 집에 불을 질렀다. 그렇게 보름쯤이 지나자 대마도의 도주가 항복을 하였다. 이때 이종무는 왜구에게 잡혀갔던 조선 사람과 함께 붙잡혀 있던 명나라 사람도 구출하였다. 조선군은 대마도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군대를 철수시켜 1420년 대마도를 경상도에 편입시킨다고 대마도 도주에게 통고했다. 그 대신 조선과의 무역을 허락하겠다고 했다. 이것은 왜구를 너그럽게 포용함으로써 노략질을 근본적으로 방지한 것이었다. 실제로 이같은 정책으로 오랫동안 왜구의 침입이 없어졌다.

1420년 중앙 집권 체제를 운영하기 위해 정책 연구 기관으로 궁중 안에 집현전을 설치하여 그들을 일반 관리보다 우대하였다.

1443년에는 북방 이민족인 여진족에 대한 강경책과 영토 확장에 대한 일환으로 최윤덕 장군과 김종서 장군으로 하여금 여진족을 토벌하여 평안도의 4군(四郡)과 함경도의 6진(六鎭)을 개척하게 하였다. 이로써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 급속히 축소되었던 영토가 두만강압록강 유역으로 확대되었다.

1443년 조선에 고유 문자가 없음을 개탄한 세종은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1446년 9월에 이를 반포하였다. 훈민정음은 이후 20세기에 들어 주시경에 의해 한글로 정리되고 발전되어 오늘날까지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문자로 쓰이고 있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는 그의 업적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손꼽힌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보급시키려고 여러 책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하거나 편찬하였다. 그리고 행정 실무에 이용할 수 있도록 관리 채용에 훈민정음을 시험으로 치르게 하기도 하였다.

또 세종은 정인지, 정초, 이천, 장영실 등에게 명하여 관측 기구인 간의, 해시계인 앙부일구와 물시계인 자격루,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강우량 측정기인 측우기 등 백성들의 생활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과학 기구를 발명하게 하였다.

 

말년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몸이 약했던 세종은 무리하게 국정을 돌본 탓에 집권 후반에 들어서면서 건강이 몹시 악화되어 병석에 누워 각종 질병에 시달려서 정무를 볼 수 없게 되었고, 결국 1445년부터 세자 향에게 섭정을 하도록 했다. 1450년 4월 8일 54살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능은 영릉(英陵)이다.

 

 

 

 

 

 

 

 

<율곡 이이 >

1536(중종 31)∼1584(선조 17). 조선 중기의 학자·정치가.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강릉 출생. 아버지는 증 좌찬성 원수(元秀)이며, 어머니는 현모양처의 사표로 추앙받는 사임당 신씨(師任堂申氏)이다.

아명을 현룡(見龍)이라 했는데, 어머니 사임당이 그를 낳던 날 흑룡이 바다에서 집으로 날아 들어와 서리는 꿈을 꾸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그 산실(産室)은 몽룡실(夢龍室)이라 하여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8세 때에 파주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花石亭)에 올라 시를 지을 정도로 문학적 재능이 뛰어 났다. 1548년(명종 3) 13세때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세 때에 어머니가 돌아가자,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 장례하고 3년간 시묘(侍墓)하였다, 그 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고 다음해 20세에 하산해 다시 유학에 전심하였다.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였다. 23세가 되던 봄에 예안(禮安)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했고, 그 해 겨울의 별시에서 〈천도책 天道策〉을 지어 장원하였다. 전후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6세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29세에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예조좌랑·이조좌랑 등을 역임, 33세(1568)에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부교리로 춘추기사관을 겸임해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 해에 19세 때부터 교분을 맺은 성혼과 ‘지선여중(至善與中)’ 및 ‘안자격치성정지설(顔子格致誠正之說)’ 등 주자학의 근본문제들을 논하였다. 34세에 임금에게 〈동호문답 東湖問答〉을 지어올렸다.

37세에 파주 율곡리에서 성혼과 이기(理氣)·사단칠정(四端七情)·인심도심(人心道心) 등을 논하였다. 39세(1574)에 우부승지에 임명되고, 재해로 인해 〈만언봉사 萬言封事〉를 올렸다.

40세 때 주자학의 핵심을 간추린 ≪성학집요 聖學輯要≫를 편찬했다. 42세에는 아동교육서인 ≪격몽요결 擊蒙要訣≫를, 45세에는 기자의 행적을 정리한 ≪기자실기 箕子實記≫를 편찬했다.

47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고, 어명으로 〈인심도심설 人心道心說〉을 지어 올렸다. 이 해에 〈김시습전 金時習傳〉을 쓰고, ≪학교모범 學校模範≫을 지었으며, 48세에 〈시무육조 時務六條〉를 올려 외적의 침입을 대비해 십만양병을 주청하였다.

49세에 서울 대사동(大寺洞)에서 영면, 파주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었다.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풍덕의 구암서원(龜巖書院), 황주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등 20여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1545년 을사사화가 발생해 수많은 사류(士類)가 죽고 유배되었다. 사림은 출사(出仕)를 포기하고 물러서서 학문을 닦을 수밖에 없었다. 1565년(명종 20) 문정대비(文定大妃)의 죽음과 20년간 정사를 전횡하던 권신 윤원형(尹元衡)의 실각으로 나라 안의 정세가 바뀌었다.

을사사화 이후 죄를 입은 사람들이 풀려나고, 사림은 다시 정계로 복귀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이이는 30세로서 출사 1년째 되는 해였다. 1567년에는 이황이 상경하였다. 그 해 6월, 명종이 죽고 선조가 즉위하면서 8월에는 을사사화 이후 피죄되었던 노수신(盧守愼유희춘(柳希春) 등이 서용(敍用)되었다.

선조 즉위 다음해인 1568년에는 조광조(趙光祖)에게 영의정을 추서, 이황이 일시에 대제학에 취임하고 남곤(南袞)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이황은 ≪성학십도 聖學十圖≫를 지어 올렸고, 1569년(선조 2)에는 이이가 〈동호문답〉을 지어 올렸다.

1570년에는 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의 신원이 이루어지는 등 정국이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면서 사림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그러나 오랜 구습이나 폐풍은 일시에 시정될 수 없었고 유림의 활동은 떨쳐 일어나지 못했다.

더구나 1575년부터는 동서의 분당으로 사림이 분열되고 정쟁이 심각해졌다. 연산군 이래의 폐법은 고쳐지지 않은 채 국가의 기강은 무너지고 민생의 곤고는 극도에 달하였으며, 군사적으로도 무력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1565년부터 1592년(선조 26)까지의 약 30년 간은 국정을 쇄신해 민생과 국력을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이는 16세기 후반의 조선사회를 ‘중쇠기(中衰期)’로 판단해 일대 경장(更張)이 요구되는 시대라 보았다.

이이는 〈만언봉사〉에서 “시의(時宜)라는 것은 때에 따라 변통(變通)하여 법을 만들어 백성을 구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는 조선의 역사에 있어서도 “우리 태조가 창업했고, 세종이 수성(守成)해 ≪경제육전 經濟六典≫을 비로소 제정하였다. 세조가 그 일을 계승해 ≪경국대전≫을 제정했으니, 이것은 모두 ‘시의(時宜)에 따라 제도를 개혁한(因時而制宜)’ 것이요, 조종(祖宗)의 법도를 변란(變亂)함이 아니었다. ”고 하였다. 그러므로 시대의 변천에 따른 법의 개정은 당연한 일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이에게 성리학은 단순한 사변적 관상철학(觀想哲學)이 아니었다. 그는 성리학의 이론을 전개함에 있어 시세(時勢)를 알아서 옳게 처리해야 한다는 ‘실공(實功)’과 ‘실효(實效)’를 항상 강조하였다.

그는 〈만언봉사〉에서, “정치는 시세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일에는 실지의 일을 힘쓰는 것이 중요한 것이니, 정치를 하면서 시의)를 알지 못하고 일에 당해 실공을 힘쓰지 않는다면, 비록 성현이 서로 만난다 하더라도 다스림의 효과를 거둘 수 없을 것이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이는 항상 위에서부터 바르게 하여 기강을 바로잡고 실효를 거두며, 시의에 맞도록 폐법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사화로 입은 선비들의 원을 풀어주고, 위훈(僞勳)을 삭탈함으로써 정의를 밝히며, 붕당의 폐를 씻어서 화합할 것 등 구체적 사항을 논의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기(國基)를 튼튼히 하고 국맥(國脈)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이는 성현의 도는 ‘시의와 실공’을 떠나서 있지 않으므로 현실을 파악하고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요(堯)·순(舜)·공(孔)·맹(孟)이 있더라도 시폐(時弊)를 고침이 없이는 도리가 없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이이는 진리란 현실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고, 그것을 떠나서 별도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여기서 이(理)와 기(氣)를 불리(不離)의 관계에서 파악하는 이이 성리설의 특징을 보게 되는 것이라 하겠다.

〔이황과 이이의 사상적 배경〕

이이와 성혼은 평상시에 경학이나 도학과 관련해 문답하는 서한을 교환하였다. 이황이 죽은 2년 뒤 이이가 37세가 되던 임신년(1572)에 성리설에 대한 본격적인 논란을 벌였다.

그것은 이황과 기대승의 논변처럼 오랜 세월을 두고 계속한 것이 아니라, 단 1년 사이에 9회에 걸쳐 주고받은 것이다. 대체로 성혼이 이이에게 질의하고 이이가 회답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성혼의 질의내용은 비교적 단순한 것으로, 주자학의 핵심 논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하였다.

성혼은 일찍이 이황과 기대승(奇大升) 사이에 오간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 대해 기대승의 논의를 존중하다가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의 도덕적 고민을 이해하고 그 취지에 수긍하게 되었다. 성흔은 이 문제를 과연 어떻게 정돈해야 하느냐고 이이에게 의견을 물었던 것이다.

‘호발설(互發說)’에 대한 성혼의 재론을 계기로 이이는 이황은 물론, 서경덕(徐敬德)과 나흠순(羅欽順)에 대한 논평뿐 아니라, 경전의 본의와 송대 제유(諸儒)의 성리설을 집약적으로 논술해 나갔다.

이 논쟁은 이이에게 성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정리하고 심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고, 후기의 저작인 ≪성학집요≫ 속의 성리설이나 만년작인 〈인심도심설〉의 내용의 핵심을 형성하고 있다.

이이는 선배인 이황의 이원적 이기론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황이 이기를 그처럼 분열적 대립으로 이해하게 된 것은 그 자신이 잇달은 사화를 겪으며 당시의 사회정치적 혼란과 부조리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던 데 연유한다.

그는 개인과 집단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가 공의(公義)와 사리(私利)의 분별이 명확하지 못한 데서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그가 천리와 인욕, 인심과 도심, 사단과 칠정, 그리고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을 대립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같은 자각의 반영이다.

이황에게 이발(理發)과 기발(氣發), 사단과 칠정, 그리고 도심과 인심은 각기 순수한 정신적 가치와 신체적·물질적 욕구의 두 방향을 의미하였다. 그는 이기가 왕신관계(王臣關係)에 있으며, 인심은 항상 도심의 명령을 순종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관계가 전도되면 개인적으로는 도덕성의 방기를,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윤리의 파멸과 정치의 타락을 초래하게 된다. 따라서 이황은 일체의 작위의 근원은 마음의 위미지간(危微之間)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혼탁한 정치현실을 떠나 학문을 닦음으로써 ‘입언수후(立言垂後)’하여 도(道)를 전해주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

이에 비해 이이의 경우는 상황이 달랐다. 1565년 이후로 사림이 다시 복귀하게 되면서 사회적 상황을 개선하고 민생의 문제를 해결하며 국맥을 바로잡을 수 있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이이는 현실의 개선 그 자체에 진리성을 찾았다. 이이가 이기를 불상잡(不相雜)의 대립이 아니라 불상리(不相離)의 묘(妙)에서 파악하는 것도 이같은 낙관을 반영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이의 사칠론이나 인심도심설에 대한 해석도 이황의 이원적인 논의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칠정을 형기(形氣)에 속한 것으로만 보지 않고 본연지성 또한 기질지성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와 기는 논리적으로 구별하는 것이지, 사실적으로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이에게 기란 단순히 혈기지기(血氣之氣)로서 타락의 가능성만을 지닌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기는 물질적인 것, 감성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영역, 심령이나 이성까지도 포괄한다.

여기서 기는 본연지성을 엄폐(掩蔽)하는 것일 뿐 아니라, 본연지성을 드러나게도 하고 나아가 회복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이는 “인심도심이 다 기의 발이요, 기에 있어 본연지리(本然之理)를 순(順)한다면 기가 본시 본연지기(本然之氣)이다.”라고 하며, “기의 청명여부(聽命與否)는 다 기의 소위(所爲)이니, 호발이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인심도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인심은 ‘구체(口體)’를 위한 것으로서 그리고 도심은 ‘도의(道義)’를 위한 것으로서 서로 구별된다.

그러나 그는 이황의 주장처럼 하나는 기발, 하나는 이발로 서로 다른 본질과 근원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하나의 심이 “단지 발하는 곳에 있어서 이단(二端)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인심은 성현이라도 면할 수 없으며, “먹을 때 먹고 입을 때 입는 것”은 바로 천리인 것이다. 이이는 인심이라 해도 그것이 알맞게 조절된 상태에서는 “인심 또한 도심이 된다.”고 하였다.

〔서경덕·이황·이이의 이기론적 차이〕

흔히 서경덕은 물론이요 이이까지도 ‘주기론(主氣論)’이라 하여 학문적으로 연관시켜 보는 경향이 있다. 서경덕과 이이는 다 같이 기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특히 기의 불멸성, 능동성을 강조해 기의 면을 전폭적으로 긍정한 점에서 그렇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이는 서경덕이 이기의 불리(不離)에 대한 이해는 깊고 투철하지만, 그 위에 뚜렷이 극본궁원(極本窮源)하는 이(理)의 면이 있음을 몰랐다고 비판했다. 서경덕이나 송대의 장재(張載)가 기에 치우치고 이기를 혼동해 성현의 뜻에 묘계(妙契)치 못하였다고 지적했다.

이이는 서경덕의 유기론적(唯氣論的) 입장에 대해 ‘이통기국(理通氣局)’을 모르는 소치라 하여 ‘한 모퉁이를 본 사람(見一隅者)’라 폄하했다. 이이 또한 이기지묘(理氣之妙)를 말하지만 그는 서경덕처럼 구극적 존재를 태허지기(太虛之氣)로 보지 않고, 태극지리(太極之理)로 이해한다.

그렇지만 이황이 이와 기가 각각 실질적 동력으로 발용한다는 호발설을 주창한 데 대해 이이는 이기는 이합과 선후가 없다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했다.

이이의 견해는 처음부터 이기를 이원적으로 파악하는 이황과 달리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현상 그 자체의 소이연으로서 이를 말하는 까닭에 이발(理發)이 따로 있을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이는 서경덕의 주기론에 대해서는 특히 ‘이통기국설’로, 그리고 이황의 이기이원적 경향에 대해서는 ‘기발이승일도설’로 대응했다.

서경덕은 실재하는 기의 생성변화를 떠나서 별도로 묘(妙)를 말하는 것은 진리를 모르는 자라 하였다. 그러나 이황은 이와 달리 이(理)야말로 가장 알기 어려운 것으로서 이로 말미암아 모든 학문 도술의 차이가 생기는 것이라 하였다.

이처럼 이황은 만유를 가능하게 하는 초월적 존재로소 이를 강조한 반면, 서경덕은 이를 기 자체와 작용상의 자율성 또는 내재율로 보아 기의 실재성과 사실성을 강조하였다.

서경덕은 유기론자로서 기를 중시하고 이황은 이우위설을 논해 이의 구극성을 강조하였다. 서경덕과 이황은 거의 동시대의 인물이면서도 이와 같이 매우 대조적인 견해를 견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이는 이의 세계와 기의 영역을 완전히 긍정 포괄하면서 동시에 양면을 아울러 지양시켰다. 이이는 기의 사실성과 이의 초월성을 체인(體認 : 충분히 납득함.)해 양자를 불리의 관계에서 파악하면서 ‘이기지묘’를 강조했다. 이이는 이기의 묘처(妙處)야말로 알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설명하기도 어렵다고 하였다.

이이는 태극과 음양, 이와 기의 관계는 일이이(一而二)요 이이일(二而一)이라는 기본 인식을 바탕으로 그의 이론을 대략 다음과 같이 집약하였다.

“전훈(前訓)을 고찰하면 이기는 일(一)이면서 이(二)요, 이(二)이면서 일(一)이다. 이기가 혼연무간해 원래 떨어지지 않으므로 정자는 ‘기즉도(器卽道)요 도즉기(道卽器)’라 했고, 떨어지지 않을지라도 혼연한 가운데 섞이지 않아서 일물(一物)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주자는 ‘이는 스스로 이요, 기는 스스로 기’라고 한 것이다.

이 두 설을 종합해 깊이 생각하면 이기지묘를 거의 알 수 있으리라. 그 대강을 말하면 이는 무형하고 기는 유형하다. 그러므로 이는 통(通)하고 기는 국(局)한다. 이는 무위하고 기는 유위하므로, 기는 발(發)하고 이는 승(乘)한다. 무형무위하면서 유형유위한 것의 주(主)인 것은 이이며, 유형유위하면서 무형무위한 것의 기(器)인 것은 기이다(聖學輯要).”

이이의 이통기국과 기발이승일도설은 보편적 원리와 특수한 사실을 상호관련 하에 파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사사물물을 관통하고 있으며, 본연지리는 스스로의 보편성을 가지는 것이지만, 변화하는 사실과 관련한 유행지리(流行之理)를 떠나서 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보편적 원리가 사사물물의 개별적 사실을 관통하고 있으며, 또한 구체적인 변화의 상을 떠나서는 추구할 수 없다는 논리로서, 성리와 실사가 혼융무간한 관계임을 통찰한 결과이다.

〔이이성리설의 현실적 의미〕

이이는 이른바 의(義)와 이(利)를 구별해 이원화하는 사고방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의리(義理)와 실리(實利)를 불가리(不可離)의 관계에서 보고 있다.

그는 〈시무칠조책 時務七條策〉에서 “도(道)의 병립할 수 없는 것은 시(是)와 비(非)이며, 사(事)의 함께 할 수 없는 것은 이(利)와 해(害)이다. 한갓 이해가 급하다고 하여 시비의 소재를 불고(不顧)한다면 제사지의(制事之宜)에서 어긋난다. 또한 시비를 생각해 이해의 소재를 살피지 않는다면 응변지권(應變之權)에서 어긋난다. …… 권(權)에는 정규(定規)가 없으니 중(中)을 얻음이 귀하고, 의(義)에는 상제(常制)가 없나니 의(宜)에 합함이 중하다. 중을 얻고 의에 합하면, 즉 시(是)와 이(利)가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

진실로 국가를 평안하게 하고 민중에게 이로우면 다 행할 수 있는 일이요, 나라를 평안하게 하지 못하고 민중을 보호하지 못하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옳고 그름을 가르는 규범의 문제와 이해 관계를 따지는 현실 문제가 ‘득중(得中)’, ‘합의(合宜)’함으로써, 보국과 안민이라는 차원에어서, 시(是)와 이(利)의 조화라는 하나의 사실로 지양됨을 볼 수 있다.

이이는 시대에 따라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이 각기 다르다고 보았다. 그는 시대를 ‘창업(創業)’과 ‘수성(守成)’ 그리고 ‘경장(更張)’의 과정으로 나누어 논했으며, 당시를 경장기라고 보았다.

이이는 〈동호문답〉에서 가장 큰 폐법으로 다섯 가지를 들어 설명하였다. 그것은 모두 민생에 관계되는 것으로서, ① 일가절린(一家切隣)의 폐, ② 진상번중(進上煩重)의 폐, ③ 공물방납(貢物防納)의 폐, ④ 역사불균(役事不均)의 폐, 그리고 ⑤ 이서주구(吏胥誅求)의 폐를 꼽았다.

이러한 그의 지적은 당시의 시대상과 민중의 질고(疾苦)를 가장 잘 나타낸 것이다. 또한 그는 국세조사와 같은 전국적인 규모의 조사를 실시해 실정에 알맞게 폐법을 개혁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밖에도 이이는 〈만언봉사〉·≪성학집요≫ 및 수많은 상소문을 통해 정치·경제·문교·국방 등에 가장 필요한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더 나아가 이이는 국정을 도모함에 있어서도 개인이나 일부 지도층으로부터 하향식으로 수행될 것이 아니라. 언로를 개방해 국민 모두가 말할 수 있게 하고, 위정자는 아래로부터의 중지(衆智)를 모아야 한다고 보았다.

조광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이에게 언로의 개색(開塞)은 국가 흥망에 관계된 중대한 일로서 강조되었다. 공론(公論)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국민의 정당한 일반 의사가 곧 국시(國是)가 된다고 지적하면서, 언로의 개방성과 여론의 중요성을 피력했다.

또한 이이는 경제사(經濟司)의 창설을 제의하면서 단지 기성 관료가 아니라, 시무를 밝게 알고 국사를 염려하는 사류로서 윤리성과 합리성을 겸비한 최고의 지성이 동원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렇듯 의리와 실리, 이념과 현실의 통합적 구상은 후기에 한국의 의리학과 실학으로 전개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도 조선 중기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 전개에서 이이의 성리설이 끼친 영향을 깊이 관찰해야 한다.

그의 성리사상은 오늘날에도 유심과 유물, 주체와 상황, 그리고 현실과 이상의 괴리로부터 양자의 조화와 발전을 도모하는 데에 새로운 방향을 던져주고 있다.

 

 

 

 

 

 

 

 

<퇴계 이황>

〔생 애〕

경상도 예안현(禮安縣) 온계리(溫溪里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좌찬성 식(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7개월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했으나, 현부인이었던 생모 박씨의 훈도 밑에서 총명한 자질을 키워 갔다.

27세(1527)에 향시(鄕試)에서 진사시와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고,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성균관에 들어가 다음해에 진사 회시에 급제하였다. 33세에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하고 ≪심경부주 心經附註≫를 입수, 크게 심취하였다.

이 해 귀향 도중 김안국(金安國)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34세(1534)에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 부정자(副正字)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37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자 향리에서 3년 간 복상했고, 39세에 홍문관수찬이 되었다가 곧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임명되었다.

중종 말년에 조정이 어지러워지매 먼저 낙향하는 친우 김인후를 한양에서 떠나 보냈다. 이 무렵부터 관계를 떠나 산림에 은퇴할 결의를 굳힌 듯, 43세이던 10월에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하자 성묘를 핑계삼아 사가를 청해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을사사화 후 병약함을 구실로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46세(1546)가 되던 해 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의 동암(東巖)에 양진암(養眞庵)을 얽어서 산운야학(山雲野鶴)을 벗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 생활에 들어갔다. 이 때에 토계를 퇴계(退溪)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그 뒤에도 자주 임관의 명을 받아 영영 퇴거(退居)해 버릴 형편이 아님을 알고 부패하고 문란한 중앙의 관계에서 떠나고 싶어서 외직을 지망, 48세에 충청도 단양군수가 되었다. 그러나 곧 형이 충청감사가 되어 옴을 피해 봉임 전에 청해서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

풍기군수 재임중 주자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부흥한 선례를 좇아서, 고려 말기 주자학의 선구자 안향(安珦)이 공부하던 땅에 전임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서적(書籍학전(學田)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해 조정에 청원, 실현을 보게 되었다.

이것이 조선조 사액 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1년 후 퇴임하고, 어지러운 정계를 피해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지어 다시금 구도 생활에 침잠하다가 52세(1552)에 성균관대사성의 명을 받아 취임하였다. 56세에 홍문관부제학, 58세에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고사하였다.

43세 이후 이 때까지 관직을 사퇴하였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20여 회에 이르렀다. 60세(1560)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했다. 이로부터 7년 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훈도하였다.

명종은 예(禮)를 두터이 해 자주 그에게 출사(出仕)를 종용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명종은 근신들과 함께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이라는 제목의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에 보내 그 풍경을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에다 송인(宋寅)으로 하여금 도산기(陶山記) 및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써넣게 해 병풍을 만들어서, 그것을 통해 조석으로 이황을 흠모했다 한다. 그 뒤 친정(親政)하게 되자, 이황을 자헌대부(資憲大夫)·공조판서·대제학이라는 현직(顯職)에 임명, 자주 초빙했으나, 그는 그때마다 고사하고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67세 때 명나라 신제(新帝)의 사절이 오게 되매, 조정에서 이황의 내경(來京)을 간절히 바라 어쩔 수 없이 한양으로 갔다. 명종이 돌연 죽고 선조가 즉위해 그를 부왕의 행장수찬청당상경(行狀修撰廳堂上卿) 및 예조판서에 임명하였다. 하지만 신병 때문에 부득이 귀향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황의 성망(聲望)은 조야에 높아, 선조는 그를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우찬성에 임명, 간절히 초빙하였다. 그는 사퇴했지만 여러 차례의 돈독한 소명을 물리치기 어려워 마침내 68세의 노령에 대제학·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무진육조소 戊辰六條疏〉를 올렸다.

노환 때문에 여러 차례 사직을 청원하면서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서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학십도 聖學十圖≫를 저술, 어린 국왕 선조에게 바쳤다. 이듬해 69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번번히 환고향(還故鄕)을 간청해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환향 후 학구(學究)에 전심하였으나, 다음해 70세가 되던 11월 종가의 시제 때 무리를 해서인지 우환이 악화되었다.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여 애도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영사를 추증하였다. 장사는 영의정의 예에 의하여 집행되었으나, 산소에는 유계(遺誡)대로 소자연석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새긴 묘비만 세워졌다.

죽은 지 4년 만에 고향 사람들이 도산서당 뒤에 서원을 짓기 시작해 이듬해 낙성, 도산서원의 사액을 받았다. 그 이듬해 2월에 위패를 모셨고, 11월에는 문순(文純)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학 문〕

이황이 ≪주자대전≫을 입수한 것은 중종 38년, 즉 그의 43세 때였고, 이 ≪주자대전≫은 명나라 가정간본(嘉靖刊本)의 복각본(復刻本)이었다. 가정간본의 대본(臺本)은 송나라 때 간행된 것을 명나라 때 복간한 성화간본(成化刊本)의 수보본(修補本)이었다.

그가 ≪주자대전≫을 읽기 시작한 것은 풍기군수를 사퇴한 49세 이후의 일이었다. 이황은 이에 앞서 이미 ≪심경부주≫·≪태극도설≫·≪주역≫·≪논어집주≫ 등의 공부를 통해 주자학의 대강을 이해하고 있었으나, ≪주자대전≫을 완미(玩味)함으로써 그의 학문이 한결 심화되었고, 마침내 주희의 서한문의 초록과 주해에 힘을 기울였다.

그의 학문이 원숙하기 시작한 것은 50세 이후부터였다고 생각된다. 50세 이후의 학구 활동 가운데서 주요한 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53세에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설 天命圖說〉을 개정하고 후서(後敍)를 썼으며, ≪연평답문 延平答問≫을 교정하고 후어 (後語)를 지었다.

54세에 노수신(盧守愼)의 〈숙흥야매잠주 夙興夜寐箴註〉에 관해 논술하였다. 56세에 향약을 기초, 57세에 ≪역학계몽전의 易學啓蒙傳疑≫를 완성, 58세에 ≪주자서절요≫ 및 ≪자성록≫을 거의 완결지어 그 서(序)를 썼다.

59세에 황중거(黃仲擧)에 답해 ≪백록동규집해 白鹿洞規集解≫에 관해 논의하였다. 또한 기대승(奇大升)과 더불어 사단칠정에 관한 질의응답을 하였고, 61세에 이언적(李彦迪)의 ≪태극문변 太極問辨≫을 읽고 크게 감동하였다.

62세에 ≪전도수언 傳道粹言≫을 교정하고 발문을 썼으며, 63세에 ≪송원이학통록 宋元理學通錄≫의 초고를 탈고해 그 서(序)를 썼다. 64세에 이구(李球)의 심무체용론(心無體用論)을 논박했고, 66세에 이언적의 유고를 정리, 행장을 썼고 ≪심경후론 心經後論≫을 지었다.

68세에 선조에게 〈무진육조소〉를 상서했으며, 〈사잠〉·≪논어집주≫·≪주역≫〈서명〉 등을 강의하였다. 또한 그간 학구의 만년의 결정체인 ≪성학십도≫를 저작, 왕에게 헌상하였다.

〈무진육조소〉의 내용은, 제1조 계통을 중히 여겨 백부인 선제(先帝) 명종에게 인효(仁孝)를 온전히 할 것, 제2조 시신(侍臣)·궁인의 참언(讖言)·간언(間言)을 두절하게 해 명종궁(明宗宮)과 선조궁(宣祖宮) 사이에 친교가 이루어지게 할 것,

제3조 성학(聖學)을 돈독히 존숭해 그것으로서 정치의 근본을 정립할 것, 제4조 인군(人君) 스스로가 모범적으로 도술(道術)을 밝힘으로써 인심을 광정(匡正)할 것, 제5조 군주가 대신에게 진심을 다해 접하고 대간(臺諫)을 잘 채용해 군주의 이목을 가리지 않게 할 것,

제6조 인주(人主)는 자기의 과실을 반성하고 자기의 정치를 수정해 하늘의 인애(仁愛)를 받을 것 등으로, 시무 6개 조를 극명하게 상주한 풍격(風格) 높은 명문이다.

≪성학십도≫는 제1도 태극도(太極圖), 제2도 서명도(西銘圖), 제3도 소학도(小學圖), 제4도 대학도(大學圖), 제5도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 제6도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제7도 인설도(仁說圖), 제8도 심학도(心學圖), 제9도 경재잠도(敬齋箴圖), 제10도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와 도설(圖說)·제사(題辭)·규약 등 부수문(附隨文)으로 되어 있다.

제5도의 규약은 주희의 글이고, 도는 이황의 작품이며, 제6도의 상도(上圖) 및 도설은 정복심의 저작이고 도는 이황의 작품이다. 제7도는 도 및 도설이 모두 주희의 저작이고, 제8도는 도 및 도설이 모두 정복심의 저작, 제9도에서 잠은 주희의 말이고 도는 왕백(王柏)의 작품이며, 제10도의 잠은 진백(陳柏)의 말이고, 도는 이황의 작품이다.

그러므로 제3·5·10도와 제6도의 중간 하도(下圖) 등 5개 처는 이황의 독자적인 작품이고, 나머지 17개 처는 상기한 선현들의 저작이다. 그러나 이들 유학 사상의 정수는 이황에 의해 독창적으로 배치되어 서로 유기적으로 관련됨으로써 생명 있는 전체적 체계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황의 학문은 일대를 풍미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를 통해 영남을 배경으로 한 주리적(主理的)인 퇴계학파를 형성해 왔다. 그리고 도쿠가와(德川家康) 이래로 일본 유학의 기몬학파(崎門學派) 및 구마모토학파(熊本學派)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쳐 왔다.

또한, 개화기 중국의 정신적 지도자에게서도 크게 존숭을 받아,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3국의 도의철학(道義哲學)의 건설자이며 실천자였다고 볼 수 있다.

≪언행록≫에 의하면, 조목(趙穆)이 이덕홍(李德弘)에게 “퇴계선생에게는 성현이라 할 만 한 풍모가 있다.”고 했을 때, 덕홍은 “풍모만이 훌륭한 것이 아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언행통술 言行通述≫에서 정자중(鄭子中)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선생은 우리 나라에 성현의 도가 두절된 뒤에 탄생해, 스승 없이 초연히 도학을 회득(會得)하였다. 그 순수한 자질, 정치(精緻)한 견해, 홍의(弘毅)한 마음, 고명한 학(學)은 성현의 도를 일신에 계승했고, 그 언설(言說)은 백대(百代)의 후에까지 영향을 끼칠 것이며, 그 공적은 선성(先聖)에게 빛을 던져 선성의 학(學)을 후학의 사람들에게 베풀었다. 이러한 분은 우리 동방의 나라에서 오직 한 분뿐이다.”

위에서 밝힌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그가 제자들에게서 성현의 예우를 받는, 한국 유림에서 찬연히 빛나는 제일인자임을 엿볼 수 있게 된다.

〔계승·평가·연구〕

이황의 학풍을 따른 자는 당대의 유성룡(柳成龍정구(鄭逑김성일(金誠一)·조목·이덕홍·기대승·김부륜(金富倫)·금응협(琴應夾)·이산해(李山海정탁(鄭琢정유일(鄭惟一구봉령(具鳳齡조호익(曺好益황준량(黃俊良이정(李楨) 등등을 위시한 260여 인에 이르렀다.

나아가서 그는, 성혼(成渾정시한(丁時翰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이익(李瀷이상정(李象靖유치명(柳致明이진상(李震相곽종석(郭鍾錫이항로(李恒老유중교(柳重敎기정진(奇正鎭) 등등을 잇는 영남학파 및 친영남학파를 포괄한 주리파 철학을 형성하게 했으니, 이는 실로 한국 유학 사상의 일대장관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이익은 ≪이자수어 李子粹語≫를 찬술해 그에게 성인(聖人)의 칭호를 붙였고, 정약용(丁若鏞)은 〈도산사숙록 陶山私淑錄〉을 써서 그에 대한 흠모의 정을 술회하였다.

임진왜란 후 이황의 문집은 일본으로 반출되어 도쿠가와가 집정(執政)한 에도(江戶)시대에 그의 저술 11종 46권 45책이 일본각판으로 복간되어 일본 근세 유학의 개조(開祖) 후지와라(藤原惺窩) 이래로 이 나라 유학 사상의 주류인 기몬학파 및 구마모토 학파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고, 이황은 이 두 학파로부터 대대세세(代代世世)로 신명(神明)처럼 존숭을 받아 왔다.

기몬학파의 창시자 야마사키(山崎暗齋)는 그를 “주자의 직제자(直弟子)와 다름 없다.”며 ‘조선의 일인(一人)’이라 평가하였다. 그리고 그의 고제(高弟) 사토(佐藤直方)는 “그의 학식이 이룬 바는 크게 월등해 원명 제유(元明諸儒)의 유(類)가 아니다.”라고 찬양하였다.

이나바(稻葉默齋)는 ‘주자의 도통(道統)’에서 ‘주자 이래의 일인(一人)’이라고 존신(尊信)했으며, 구마모토 학파의 시조 오쓰카(大塚退野)는 “만약에 이 사람이 없었다면 주자의 미의(微意)는 불명해 속학(俗學)이 되어 버렸을 것이라 생각된다.”고 하였다.

도쿠가와 말기의 요코이(橫井小楠)는 그를 원·명시대를 통해 ‘고금절무(古今絶無)의 진유(眞儒)’라 절찬했고, 역시 이 계통에 속하는 막부(幕府) 말 메이지(明治)시대의 구스모토(楠本碩水)는 “명대의 대유(大儒) 설경헌(薛敬軒)·호경재(胡敬齋)와 명말청초의 육가서(陸稼書)·장양원(張楊園)과 비교하면 훨씬 탁월하다.”고 단언하였다.

마쓰다(松田甲)의 ≪일선사화 日鮮史話≫에 의하면, 요코이의 친구이자 제자로서 메이지 제일의 공신이며 교육 칙어(敎育勅語)의 기초자인 모토다(元田東野)는 “정주(程朱)의 학은 조선의 이퇴계(李退溪)에게 전해졌고, 타이야(退野) 선생이 그 소찬(所撰)의 ≪주자서절요≫를 읽고 초연히 얻은 바 있었으니, 내 지금 타이야의 학을 전해 이것을 금상황제(今上皇帝)에게 봉헌하였다”고 술회했다 한다.

뿐만 아니라, 1926년 중국의 북경(北京) 상덕여자대학(尙德女子大學)에서는 대학의 증축·확장기금에 충당하기 위해 ≪성학십도≫를 목판으로 복각(復刻)해 병풍을 만들어서 널리 반포(頒布)하였다.

이 때, 중국 개화기의 대표적인 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는 찬시(贊詩)를 써 그 제1연에서 “아득하셔라 이부자(李夫子) 님이시여”라며 거리낌없이 그를 성인이라 호칭하였다. 다음과 같은 조호익의 말은 이황의 학적 지위를 간결히 표현한 매우 적절한 평가라 볼 수 있다.

즉, “주자가 작고한 뒤……도(道)의 정맥은 이미 중국에서 두절되어 버렸다. 퇴계는 ……한결같이 성인의 학으로 나아가 순수하고 올바르게 주자의 도를 전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이 만한 인물을 볼 수 없다. 실로 주자 이후의 제일인자이다.”

1609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고, 그 뒤 그를 주사(主祀)하거나 종사하는 서원은 전국 40여 개 처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의 위패가 있는 도산서원은 제5공화국 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국비 보조로 크게 보수, 증축되어 우리 나라 유림의 정신적 고향으로서 성역화 되었다.

이황의 학덕은 그의 생시(生時)외 한·일 양국의 역사에서 크게 선양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 국제적 규모로 널리 부흥, 재검토되고 있다. 1970년 서울에 퇴계학연구원이 창립되었고, 1972년 퇴계 400주기 기념 논문집 ≪퇴계학연구≫가 간행되기 이전부터 발행된 계간 학술지 ≪퇴계학보≫는 2000년 3월 현재로 105집에 이르렀다.

경북대학교에 퇴계연구소가 부설되었는가 하면, 서울과 거의 같은 시기에 일본 동경에 이퇴계연구회가 설립되었다. 대만에도 국립사범대학 안에 퇴계학연구회가 부설되었고, 근래에는 미국의 워싱턴·뉴욕·하와이에 이퇴계연구회가 조직되었으며, 독일 함부르크 및 본에 퇴계학연구회가 생겼다.

1986년에는 단국대학교에서 퇴계 기념 중앙도서관이 낙성되어 그 안에 퇴계학연구소를 부설하였다. 또한, 국제퇴계학회가 창설되어 1976년 이래로 거의 해마다 한국·일본·대만·미국·독일·홍콩 등지에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 세계 각 국의 이 방면의 석학들이 회동해 주제 논문을 발표하며 진지한 토론을 거듭해 오고 있다.

 

 

 

 

 

 

 

 

 

 

 

<이순신>

1545(인종 1)∼1598(선조 31). 조선 중기의 명장.

〔성장배경〕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아버지는 정(貞)이며, 어머니는 초계 변씨(草溪卞氏)로 수림(守琳)의 딸이다. 서울 건천동(乾川洞:지금의 중구 인현동 부근)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가계는 고려 때 중랑장을 지낸 이돈수(李敦守)로부터 내려오는 문반(文班)의 가문으로, 이순신은 그의 12대손이 된다.

그러나 할아버지 백록(百祿)이 조광조(趙光祖) 등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주장하던 소장파 사림(少壯派士林)들과 뜻을 같이하다가 기묘사화의 참화를 당한 뒤로는 아버지 정도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던 만큼 이순신이 태어날 즈음에 가세는 이미 기울어 있었다.

그러하였음에도 그가 뒤에 명장으로 나라에 큰 공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유년시절에 어머니 변씨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던 때문이었다. 변씨는 현모로서 아들들을 끔찍이 사랑하면서도 가정교육을 엄격히 하였다.

그는 위로 희신(羲臣)·요신(堯臣)의 두 형과 아우 우신(禹臣)이 있어 모두 4형제였다. 형제들의 이름은 돌림자인 신(臣)자 위에 삼황오제(三皇五帝) 중에서 복희씨(伏羲氏)·요(堯)·순(舜)·우(禹)임금을 시대순으로 따서 붙인 것이다.

그는 사대부가의 전통인 충효와 문학에 있어서 뛰어났을 뿐 아니라 시재(詩才)에도 특출하였으며 정의감과 용감성을 겸비하였으면서도 인자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강한 정의감은 뒤에 상관과 충돌하여 모함을 받기도 하였으며, 용감성은 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에서 매양 선두에 나서서 장졸들을 지휘함으로써 예하장병의 사기를 북돋 워 여러 전투에서 전승의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또, 그의 인자한 성품은 홀로 계신 노모를 극진히 받들 수 있었고, 어버이를 일찍 여읜 조카들을 친아들같이 사랑할 수 있었다.

그의 시골 본가는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면 백암리이나 어린 시절의 대부분은 생가인 서울 건천동에서 자란 듯하다. 같은 마을에 살았던 유성룡(柳成龍)은 ≪징비록 懲毖錄≫에서 이순신이 어린 시절부터 큰 인물로 성장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었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순신은 어린 시절 얼굴 모양이 뛰어나고 기풍이 있었으며 남에게 구속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라치면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고 그것을 가지고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하였으며,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하여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그의 문앞을 지나려 하지 않았다. 또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하여 발신(發身)하려 하였다. 또 자라면서 말타고 활쏘기를 좋아하였으며 더욱이 글씨를 잘 썼다.”

〔관직생활〕

28세 되던 해에 비로소 무인 선발시험의 일종인 훈련원별과(訓鍊院別科)에 응시하였으나 불운하게도 시험장에서 달리던 말이 거꾸러지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져서 왼발을 다치고 실격하였다.

그 뒤에도 계속 무예를 닦아 4년 뒤인 1576년(선조 9)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鍊院奉事)로 처음 관직에 나갔다.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에 보직되고, 이듬해에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를 거쳐, 1583년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을 역임하고, 1586년에는 사복시주부가 되었다. 그러나 무관으로 발을 들여놓은 그의 진로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사복시주부에 이어 조산보만호 겸 녹도둔전사의(造山堡萬戶兼鹿島屯田事宜)가 되었는데, 이 때 그는 국방의 강화를 위하여 군사를 더 보내줄 것을 중앙에 요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던 차에 호인(胡人)의 침입을 받고 적은 군사로 막아낼 수 없어 부득이 피하게 되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그것이 오로지 그의 죄라 하여 문책하였다. 그러나 그는 처형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장(主將)의 판결에 불복하면서 첨병(添兵)을 들어주지 않고 정죄(定罪)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하여 끝내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서 중형을 면하기는 하였으나, 첫번째로 백의종군(白衣從軍)이라는 억울한 길을 걷게 되었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助防將)·선전관 등이 되고, 1589년 정읍현감으로 있을 때 유성룡에게 추천되어 고사리첨사(高沙里僉使)로 승진, 이어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만포첨사(滿浦僉使)·진도군수 등을 지내고, 47세가 되던 해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그는 곧 왜침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좌수영(左水營:여수)을 근거지로 삼아 전선(戰船)을 제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등 일본의 침략에 대처하였고, 나아가서 군량의 확보를 위하여 해도(海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할 것을 조정에 요청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시의 활동〕

이듬해인 1592년 4월 13일 일본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이 발발되었는데 일본의 대군이 침입해 왔다는 급보가 전라좌수영에 전달된 것은 이틀 뒤였다.

이 날은 국기일(國忌日)이었으므로 그는 공무를 보지 않고 있었는데, 해질 무렵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으로부터 왜선 350여 척이 부산 앞바다에 정박중이라는 통보에 이어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그 때 부산 앞바다의 방어를 맡은 경상좌수영의 수군은 왜선단을 공격하지도 않았고,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은 부산이 함락된 뒤에야 예하 장졸을 이끌고 동래 방면에 당도하였으나 동래가 함락되는 것을 보고는 군사를 돌려 육지로 도망하였다.

또, 거제도에 근거를 둔 우수사 원균은 적이 이르기도 전에 싸울 용기를 잃고 접전을 회피함으로써 일본군은 조선수군과 한번 싸우지도 않고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소식에 접한 그는 즉시 전선을 정비하고 임전태세를 갖추었지만, 적을 공략하기에 앞서 전황을 면밀히 분석하였다. 그의 휘하 전함대는 4월 29일 수영 앞바다에 총집결하여 매일 작전회의가 열리고 기동연습도 강행하여 완전한 전투태세에 임하게 되고, 그는 총지휘관으로 5월 2일 기함에 승선하였다.

4일 새벽 출진을 명하니, 이때의 규모는 전선 24척, 협선(狹船) 15척, 포작선(鮑作船) 46척, 도합 85척의 대선단이었다. 이틀 뒤 한산도(閑山島)에 이르러 경상우수사 원균의 선단을 만났는데, 그 규모는 전선 3척과 협선 2척에 불과하였으나 연합함대를 조직하지 않을 수 없었다.

7일 옥포(玉浦) 앞바다를 지날 무렵 척후선(斥候船)으로부터 적선이 있음을 알리는 연락이 왔다. 이 때 옥포에 정박중인 적선은 30여 척이었다.

왜군은 조선수군이 해상으로부터 공격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육지에 올라가서 불을 지르고 약탈을 자행하다가 아군의 공격 소식을 듣고 급히 배에 올라 도망하려 하였으나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순식간에 왜선 26척이 조선수군의 포화와 불화살〔火矢〕에 격파되고 많은 왜병이 궤멸되었다. 이 싸움이 옥포대첩으로 그의 최초의 해전으로 기록된다.

옥포해전이 있던 다음날에는 고성의 적진포(赤珍浦)에 정박중인 왜선 13척을 쳐서 불태웠다. 제1차 출동 후 전력을 보강하고 전선을 정비한 뒤 다음 출동에 대비하고 있던 그는 일본수군의 주력함대가 서쪽으로 나아간다는 정보가 계속 들어오자,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에게 합동으로 출동하여 왜선을 격파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왜선 10여 척이 사천·곤양 등지로 진출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예정출동일을 변경하여 적에게 선제공격을 가하기로 하였다.

5월 29일 그는 거북선을 앞세우고 23척의 전선으로 여수항을 출항하였다. 노량(露梁) 앞바다에 이르러 전선 3척을 인솔하고 있던 원균이 그의 전함에 올라와 적정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조선수군은 곧 일본수군이 정박중인 사천으로 달려갔다. 이 때 왜군은 대부분 상륙하여 있었고 해변에는 왜선 12척이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다.

그는 공격이 용이하지 않자 그들을 바다로 유인하여 섬멸할 계획을 세웠으며, 그 작전계획은 적중하여 왜선 12척을 파괴하고 많은 왜군을 섬멸하였다.

이 싸움에서 군관(軍官) 나대용(羅大用) 등이 부상하였고, 그도 적의 조총탄에 맞아 왼쪽어깨가 뚫리는 부상을 입었다. 이 싸움에서 최초로 출동한 거북선의 위력은 확고한 인정을 받았다. 6월 2일 왜선이 당포(唐浦)에 정박중이라는 보고를 받은 그는 곧 그곳으로 달려갔다.

당포 선창에는 일본수군장 가메이(龜井玆矩)와 구루시마(來島通元)가 인솔하는 대선 9척, 중·소선 12척이 정박하고 있었으며, 일본수군들은 성 안팎에서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다 조선수군을 보고 발포하였으나 거북선을 앞세운 조선수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대패하고 왜장 구루시마가 전사하였다.

당포해전 다음날 그의 함대는 가박지(假泊地)인 창신도(昌信島)를 떠났다. 다음날 당포 앞바다에서 왜선이 거제로 향하였다는 정보를 받고 즉시 전함대에 거제출격을 명하고 발선(發船)하려는 때에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전선 25척을 이끌고 이곳에 오자 그는 매우 반갑게 맞았다.

5일 아침 전선 51척과 중·소선 수십척의 연합함대는 일제히 거제로 향하였다. 이 때 피난민으로부터 거제로 도피하였던 왜선단이 다시 당항포로 도주하였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그와 이억기와의 연합함대는 바로 길을 바꾸어 당항포로 향하였다. 당항포 내만(內灣)에는 왜의 대선 9척, 중선 4척, 소선 13척이 정박 중이었다.

조선수군의 내습을 발견한 일본수군은 먼저 공격을 가해 왔다. 아군의 전선들은 적선을 포위하고 먼저 거북선을 돌입시켜 맹공을 가하였다. 이 싸움에서 왜군은 대패하였고 왜선은 모두 소실되었다.

이와 같이 이순신은 해전에서의 연전연승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계(陞階)되었다. 그 뒤 그는 다시 선제공격으로 거제·가덕에 출몰하는 일본수군을 격멸하기 위하여 우수사 이억기에게 작전을 전달하고 연합함대의 조직을 통첩하고, 7월 6일 전라좌·우수군이 일제히 출동한 뒤 노량해상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전선 7척과도 합세하였다.

이 때 일본군은 해전에서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하여 병력을 증강하여 견내량(見乃梁)에는 적장 와키사카(脇坂安治) 등이 인솔한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그는 견내량이 지형이 좁고 활동이 불편하다는 판단 아래 장소를 한산도로 물색하였다.

그는 약간의 판옥선(板屋船)으로 일본의 수군을 공격하면서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뒤 학익진(鶴翼陣)을 쳐 일제히 총통(銃筒)을 발사하는 등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층각선(層閣船) 7척, 대선 28척, 중선 17척, 소선 7척을 격파하였다.

이 싸움에서 와키사카의 가신(家臣) 와키사카사베에(脇坂左兵衛)·와타나베(渡邊七右衛門)를 위시하여 이름 있는 자들이 전사하였다. 그는 이 한산대첩의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승계되었다.

한산대첩 후 그는 다시 전진하여 안골포(安骨浦:창원군 웅천면)의 적선을 격파하였다. 와키사카와 합동작전을 하려던 구키(九鬼嘉隆)·가토(加藤嘉明) 등의 일본수군장은 와키사카의 수군이 전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안골포에 정박 중이었다.

그는 수심이 얕아서 적선을 유인하여 공격하려 하였으나 적선이 포구 밖으로 나오지 않자,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교대로 종일토록 적선을 공격하여 대선을 거의 분멸(焚滅)하였다.

제3차 출동의 결과로 가덕도 서쪽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 그는 왜침의 교두보인 부산포공격의 결단을 내렸다. 전라좌·우도의 전선 74척, 협선 92척은 8월 24일 좌수영을 떠나 가덕도 근해에서 밤을 지냈다. 공격 전날은 밤을 새우며 원균·이억기와 작전회의를 하여 부산포공격에 따른 작전을 구상하였다.

9월 1일 오전 몰운대(沒雲臺)를 지나 파도를 헤치고 다대포를 바라보며 절영도(絶影島:지금 影島)에 이르렀을 때, 왜의 대선 수 척이 아군함대를 보고 도주하였다.

절영도에서는 수 척의 적선을 쳐부수고 척후선을 부산포에 보내어 적정을 탐지하게 한 결과, 왜선 약 500척이 선창 동쪽 산기슭 해안에 줄지어 정박해 있고 대선 4척이 초량(草梁) 쪽으로 나오고 있다는 보고였다.

적이 부산포를 요새화한 것을 알게 된 여러 장수들은 부산포로 깊이 들어가기를 꺼렸으나, 그는 이를 거부하고 독전기(督戰旗)를 높이 들고 진격을 재촉하였다. 우부장(右部將) 정운(鄭運) 등이 선두에 서서 먼저 바다로 나오는 왜군의 대선 4척을 공격하여 불사르니, 뒤에 있던 여러 전선들도 함께 돌진하였다.

그러나 3진으로 나누어져 정박 중인 일본수군의 대·중·소선 470여 척은 아군의 위용에 눌려 나오지 못하고 있다가 아군이 돌진하며 맹공을 가하자, 배의 안과 성 안, 굴 속에 있던 왜군은 모두 산으로 올라가 아군에게 총통과 화전을 쏘았다. 아군은 이에 맞서 더욱 맹공을 가하며 종일토록 교전하여 적선 100여 척을 격파하였다.

날이 어둡자 그는 육지로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전함을 돌리게 하였다. 이 싸움에서 적의 피해는 말할 수 없이 컸으며, 아군도 이 해전에서 30여 명의 사망자를 냈으며 특히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이 전사하였다. 1593년 다시 부산과 웅천의 적 수군을 궤멸, 남해안 일대의 적군을 완전히 소탕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으로 삼고, 그 뒤 최초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내원(來援)하자, 죽도(竹島)로 진을 옮기고, 이어 장문포(長門浦)에서 왜군을 격파, 적군의 후방을 교란하여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왜군의 전진을 막아 이들의 작전에 큰 차질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 뒤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회담이 진행되면서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그는 후일에 대비하여 군사훈련, 군비확충, 피난민 생업의 보장, 산업장려 등에 힘썼다.

〔정유재란시의 활동〕

1597년 명·일 사이의 강화회담이 결렬되자, 본국으로 건너갔던 왜군이 다시 침입하여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그러자 그는 적을 격멸할 기회가 다시 왔음을 기뻐하고 싸움에 만전을 기하였다. 그러나 그는 원균의 모함과 왜군의 모략으로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고니시(小西行長)의 부하이며 이중간첩인 요시라(要時羅)라는 자가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에게 가토(加藤淸正)가 어느날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수군을 시켜 이를 사로잡을 것을 은밀히 알려오자, 조정에서는 통제사 이순신에게 이를 실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이것이 적의 흉계인 줄 알면서도 부득이 출동하였으나, 가토는 이미 수일 전에 서생포(西生浦)에 들어온 뒤였다. 이 때 마침 조정에서도 영의정 유성룡을 몰아내려는 자들이 있었다. 그는 유성룡이 전라좌수사로 추천한 사람이라 이를 구실로 먼저 그가 모함당하게 되었다.

또, 그 중에서도 경상우수사 원균 같은 이는 한층 더 노골적인 불만을 가졌던 터라 이순신을 모함하는 소를 올리게 되었다. 상소를 받은 선조는 돌아가는 실정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여 원균의 상소만을 믿고 크게 노하여 이순신이 명령을 어기고 출전을 지연하였다는 죄를 들어 그에게 벌을 주고 원균으로 하여금 그 직을 대신하게 하였다.

그러나 유성룡은 끝까지 “통제사의 적임자는 이순신밖에 없으며, 만일 한산도를 잃는 날이면 호남지방 또한 지킬 수 없습니다.” 하고 간청하였지만 정세판단에 어두운 선조가 그것을 받아들일 리 없었기에, 이순신을 잡아들이라는 명령만을 내렸다.

이 때 그는 전선을 거느리고 가덕도 앞바다에 있었는데, 이러한 소식을 듣고 바로 본영인 한산도로 돌아와 진중을 정리하고 원균에게 직위를 인계하였다. 당시 한산도에는 밖에 있는 군량미를 제외하고도 9,914석의 군량이 있었으며, 화약은 4,000근, 총통은 각 선척에 적재한 것을 제외하고도 300자루나 되었다.

이 때, 영남지방을 순시하던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은 그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왜군이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수군인데, 이순신을 바꾸고 원균을 보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는 치계(馳啓)를 올렸지만 허사였다.

그가 서울로 압송되자, 지나는 곳곳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백성들이 모여들어 통곡을 하며 “사또는 우리를 두고 어디로 가십니까. 이제 우리는 모두 죽었습니다.” 하였다.

서울로 압송된 그는 이미 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였지만, 그러한 공로도 아랑곳없이 가혹한 고문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는 남을 끌어들이거나 헐뜯는 말은 한마디도 없이 자초지종을 낱낱이 고하였다. 죽음 직전에서 그는 우의정 정탁(鄭琢)의 변호로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도원수 권율(權慄)의 막하(幕下)로 들어가 두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다.

남해안으로 향하던 그는 중도에서 어머니의 부고를 받고 “세상천지에서 나 같은 일을 겪는 수도 있을까. 일찍이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한탄하면서 잠시 들러 성복(成服)을 마친 다음 슬픔을 이기고 다시 남쪽으로 향하였다.

그 해 7월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적의 유인전술에 빠져 거제 칠천량(漆川梁)에서 전멸당함으로써 그가 힘써 길러온 무적함대는 그 형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한산도의 군비는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초계(草溪)에서 이 소식을 들은 그는 “우리가 믿은 것은 오직 수군인데 그같이 되었으니 다시 희망을 걸 수 없게 되었구나.” 하며 통곡하였다.

원균의 패보가 조정에 이르자 조야(朝野)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고, 왕은 비국대신(備局大臣)들을 불러 의논하였으나 당황하여 바로 대답도 못하였다. 오직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만이 그를 다시 통제사로 기용할 것을 주장하였을 뿐이었다.

이리하여 조정을 기만하고 임금을 무시한 죄, 적을 토벌하지 않고 나라를 저버린 죄, 다른 사람의 공을 빼앗고 모함한 죄, 방자하여 꺼려함이 없는 죄 등의 많은 죄명을 뒤집어씌워 죽이려고까지 하였던 그를 다시 통제사로 기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선조도 변명할 말이 궁하였던지 교서(敎書)에서 “지난번에 경의 관직을 빼앗고 죄를 주게 한 것은 또한 사람이 하는 일이라 잘 모르는 데서 나온 것이오, 그래서 오늘날 패전의 욕을 보게 된 것이니 그 무엇을 말할 수 있겠소.” 하며 얼버무렸다.

통제사에 재임용된 그는 남해 등지를 두루 살폈으나 남은 군사 120인에 병선 12척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조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전에서 적을 맞아 싸울 것을 결심하였다.

명량해전(鳴梁海戰)에 앞서 장병에게 필승의 신념을 일깨운 다음 8월 15일 13척(일설에 12척)의 전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하여 31척을 부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 싸움은 재차 통제사로 부임한 뒤의 최초의 대첩이며 수군을 재기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싸움이었다.

명량대첩으로 제해권을 다시 찾은 그는 보화도(寶花島:목포의 高下島)를 본거로 삼았다가, 다음해 2월에 고금도(古今島)로 영(營)을 옮긴 다음, 군사를 옮겨 진(鎭)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널리 둔전을 경작시키고 어염(魚鹽)도 판매하였다.

이로 인하여 장병들이 다시 모여들고 난민(難民)들도 줄을 이어 돌아와서 수만 가를 이루게 되었으며, 군진(軍鎭)의 위용도 예전 한산도시절에 비하여 10배를 능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단시일에 제해권을 회복하고 수군을 재기시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의 개인적 능력에 의한 것이었다.

1598년 11월 19일 그는 노량에서 퇴각하기 위하여 집결한 500척의 적선을 발견하고 싸움을 기피하려는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陳璘)을 설득하여 공격에 나섰다. 그는 함대를 이끌고 물러가는 적선을 향하여 맹공을 가하였고, 이것을 감당할 수 없었던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와 선척을 잃었다.

그러나 선두(船頭)에 나서서 적군을 지휘하던 그는 애통하게도 적의 유탄에 맞았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라.” 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운명을 지켜보던 아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그대로 통곡하려 하였으나, 이문욱(李文彧)이 곁에서 곡을 그치게 하고 옷으로 시신을 가려 보이지 않게 한 다음, 북을 치며 앞으로 나아가 싸울 것을 재촉하였다.

군사들은 통제사가 죽은 사실을 미처 모른 채 기운을 내어 분전하여 물러나는 왜군을 대파하였으며, 모두들 “죽은 순신이 산 왜군을 물리쳤다.”며 외쳤다. 부음(訃音)이 전파되자 모든 백성들이 애통해 하였다.

〔사후평가〕

그는 지극한 충성심, 숭고한 인격, 위대한 통솔력으로 보아 임진왜란 중에 가장 뛰어난 무장으로 큰 공을 세워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족사에 독보적으로 길이 남을 인물이다.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도 그를 평하여 “유경천위지지재 보천욕일지공(有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이라 하여 높이 평가하였고, 그의 부음을 접하자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선조실록≫에서 사관(史官)은 그의 죽음에 대하여 “그의 단충(丹忠)은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쳤고, 의를 위하여 목숨을 끊었네. 비록 옛날의 양장(良將)이라 한들 이에서 더할 수가 있겠는가. 애석하도다! 조정에서 사람을 쓰는 것이 그 마땅함을 모르고,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주를 다 펼치지 못하게 하였구나. 병신년·정유년 사이 통제사를 갈지 않았던들 어찌 한산도의 패몰(敗沒)을 초래하여 양호지방(兩湖地方:忠淸·全羅道)이 적의 소굴이 되었겠는가. 그 애석함을 한탄할 뿐이로다.”라고 평하였다.

그는 당대에는 죽음으로써 나라를 구하였고, 사후(死後)에는 그 정신으로써 민족의 나아갈 길을 일깨워 주었다. 해전사연구가(海戰史硏究家)이며 이순신을 연구한 발라드(G.A.Ballard) 제독은 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이순신 제독은 서양 사학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그로 하여금 넉넉히 위대한 해군사령관 가운데서도 뛰어난 위치를 차지하게 하였다. 이순신은 전략적 상황을 널리 파악하고 해군전술의 비상한 기술을 가지고 전쟁의 유일한 참정신인 불굴의 공격원칙에 의하여 항상 고무된 통솔정신을 겸비하고 있었다. 어떠한 전투에서도 그가 참가하기만 하면 승리는 항상 결정된 것과 같았다. 그의 물불을 가리지 않는 맹렬한 공격은 절대로 맹목적인 모험이 아니었다. 그는 싸움이 벌어지면 강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나, 승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신중을 기하는 점에 있어서는 넬슨(Nelson)과 공통된 점이 있었다.……중략……영국사람으로서는 넬슨과 어깨를 견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시인하기란 항상 어렵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인정할 만한 인물이 있다면 그는 한번도 패배한 일이 없고 전투중에 전사한 이 위대한 동양의 해군사령관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것이다.”라고 평하였다.

그가 전사한 데 대하여는 후대인들의 많은 의문을 자아내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리에 불과한 것이며 확실한 근거는 없다. 그는 글에도 능하여 ≪난중일기 亂中日記≫·시조(時調) 등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진중(陣中)에서 읊은 시조들은 우국충정이 담긴 걸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그가 전사했다는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선조는 관원을 보내 조상하고 우의정에 추증하였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녹훈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좌의정에 추증, 1793년(정조 17) 다시 영의정이 더해졌다.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於羅山)에 있으며, 왕이 친히 지은 비문과 충신문(忠臣門)이 건립되었다. 충무의 충렬사(忠烈祠), 순천의 충민사(忠愍祠), 아산의 현충사(顯忠祠) 등에 제향하였는데, 이 중에 현충사의 규모가 가장 크다.

현충사는 조선 숙종연간에 이 고장의 유생들이 그의 사당을 세울 것을 상소하여 1707년(숙종 33)에 사액(賜額), 현충사가 입사(立祠)되었다.

그 뒤 일제강점기 때에 동아일보사가 주관하여 전국민의 성금을 모아 현충사를 보수하였고, 제3공화국 때 대통령 박정희(朴正熙)의 특별지시에 의하여 현충사의 경역을 확대, 성역화하고, 새로이 전시관을 설치하여 종가에 보존되어 오던 ≪난중일기≫와 그의 유품 등을 전시하였다.

그리고 그의 일생과 중요 해전을 그린 십경도(十景圖)가 전시되어 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저서로는 ≪이충무공전서≫가 전한다. 또, 그를 대상으로 삼은 작품으로는 신채호(申采浩)의 〈이순신전 李舜臣傳〉 등이 있으며, 〈성웅 이순신〉이라는 제목으로 영화가 제작되어 그의 행적과 공로를 일반에 널리 알리기도 했다.

 

 

출처 : http://ko.wikipedia.org/wiki/%EC%A1%B0%EC%84%A0_%EC%84%B8%EC%A2%85

출처 : http://100.empas.com/dicsearch/pentry.html?s=K&i=251870&v=44

출처 : http://100.empas.com/dicsearch/pentry.html?s=K&i=266705&v=47

출처 : http://100.empas.com/dicsearch/pentry.html?s=K&i=284927&v=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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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세종(世宗, 1397년 음력 4월 10일/양력 5월 15일~1450년 음력 4월 8일/양력 5월 26일, 재위 1418년~1450년)은 조선의 제4대 이다. 는 도(裪), 는 원정(元正), 시호는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다. 태종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이다. 흔히 세종대왕이라 부른다.

세종대왕은 재위 기간 동안 국방과 과학 및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찬란한 업적을 많이 남겨 위대한 성군으로 추앙받고 있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했고, 10월 9일 한글날로 정해졌다. 현재 대한민국의 10,000권에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출생

세종대왕은 1397년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1408년 12살에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고, 1413년 16살에 충녕대군(忠寧大君)이 되었다. 그 뒤 1418년에 맏형 양녕대군이 태종이 '법을 존중하지 않는 양녕이 군주가 된다면 무고한 사람들이 죽을 것'이라고 혀를 찰 정도로 심각한 비행[1]으로 왕세자에서 폐위되자 충녕대군의 학문과 높이 평가되여 일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종에 의해 22살에 새 왕세자로 책봉되었다가 같은 해 8월에 조선의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재위

먼저 황희, 맹사성 등과 같은 유능한 인재를 많이 등용하여 정치를 맡겨 깨끗하고 참신한 정치를 펼쳐 나갔다. 그러면서도 인사와 군사에 관한 일은 세종 자신이 직접 처리함으로써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었다. 아울러 국가의 행사를 오례에 따라 유교식으로 거행하였으며, 사대부에게도 주자가례의 시행을 장려하여 유교 윤리가 사회 윤리로 자리 잡게 만들었다.

세종은 학문적인 사업뿐만 아니라 국토 개척과 확장을 통하여 국력을 신장하는 일에도 힘을 기울였다. 1419년 6월 19일 이종무 장군으로 하여금 삼도에 소속된 9명의 절제사들과 전함 227척, 군사 1만 7천 명을 이끌고 거제도의 마산포를 떠나 왜구의 근거지인 일본 대마도를 정벌하게 하였다. 대마도에 상륙한 조선군은 섬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왜구를 죽이고 집에 불을 질렀다. 그렇게 보름쯤이 지나자 대마도의 도주가 항복을 하였다. 이때 이종무는 왜구에게 잡혀갔던 조선 사람과 함께 붙잡혀 있던 명나라 사람도 구출하였다. 조선군은 대마도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군대를 철수시켜 1420년 대마도를 경상도에 편입시킨다고 대마도 도주에게 통고했다. 그 대신 조선과의 무역을 허락하겠다고 했다. 이것은 왜구를 너그럽게 포용함으로써 노략질을 근본적으로 방지한 것이었다. 실제로 이같은 정책으로 오랫동안 왜구의 침입이 없어졌다.

1420년 중앙 집권 체제를 운영하기 위해 정책 연구 기관으로 궁중 안에 집현전을 설치하여 그들을 일반 관리보다 우대하였다.

1443년에는 북방 이민족인 여진족에 대한 강경책과 영토 확장에 대한 일환으로 최윤덕 장군과 김종서 장군으로 하여금 여진족을 토벌하여 평안도의 4군(四郡)과 함경도의 6진(六鎭)을 개척하게 하였다. 이로써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 급속히 축소되었던 영토가 두만강 압록강 유역으로 확대되었다.

1443년 조선에 고유 문자가 없음을 개탄한 세종은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1446년 9월에 이를 반포하였다. 훈민정음은 이후 20세기에 들어 주시경에 의해 한글로 정리되고 발전되어 오늘날까지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문자로 쓰이고 있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는 그의 업적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손꼽힌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보급시키려고 여러 책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하거나 편찬하였다. 그리고 행정 실무에 이용할 수 있도록 관리 채용에 훈민정음을 시험으로 치르게 하기도 하였다.

또 세종은 정인지, 정초, 이천, 장영실 등에게 명하여 관측 기구인 간의, 해시계인 앙부일구와 물시계인 자격루,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강우량 측정기인 측우기 등 백성들의 생활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과학 기구를 발명하게 하였다.

 

말년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몸이 약했던 세종은 무리하게 국정을 돌본 탓에 집권 후반에 들어서면서 건강이 몹시 악화되어 병석에 누워 각종 질병에 시달려서 정무를 볼 수 없게 되었고, 결국 1445년부터 세자 향에게 섭정을 하도록 했다. 1450년 4월 8일 54살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능은 영릉(英陵)이다.

 

 

                                                                                                                                                        

 ㅋㄷ

<율곡 이이 >

1536(중종 31)∼1584(선조 17). 조선 중기의 학자·정치가.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강릉 출생. 아버지는 증 좌찬성 원수(元秀)이며, 어머니는 현모양처의 사표로 추앙받는 사임당 신씨(師任堂申氏)이다.

아명을 현룡(見龍)이라 했는데, 어머니 사임당이 그를 낳던 날 흑룡이 바다에서 집으로 날아 들어와 서리는 꿈을 꾸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그 산실(産室)은 몽룡실(夢龍室)이라 하여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8세 때에 파주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花石亭)에 올라 시를 지을 정도로 문학적 재능이 뛰어 났다. 1548년(명종 3) 13세때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세 때에 어머니가 돌아가자,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 장례하고 3년간 시묘(侍墓)하였다, 그 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고 다음해 20세에 하산해 다시 유학에 전심하였다.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였다. 23세가 되던 봄에 예안(禮安)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했고, 그 해 겨울의 별시에서 〈천도책 天道策〉을 지어 장원하였다. 전후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6세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29세에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예조좌랑·이조좌랑 등을 역임, 33세(1568)에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부교리로 춘추기사관을 겸임해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 해에 19세 때부터 교분을 맺은 성혼과 ‘지선여중(至善與中)’ 및 ‘안자격치성정지설(顔子格致誠正之說)’ 등 주자학의 근본문제들을 논하였다. 34세에 임금에게 〈동호문답 東湖問答〉을 지어올렸다.

37세에 파주 율곡리에서 성혼과 이기(理氣)·사단칠정(四端七情)·인심도심(人心道心) 등을 논하였다. 39세(1574)에 우부승지에 임명되고, 재해로 인해 〈만언봉사 萬言封事〉를 올렸다.

40세 때 주자학의 핵심을 간추린 ≪성학집요 聖學輯要≫를 편찬했다. 42세에는 아동교육서인 ≪격몽요결 擊蒙要訣≫를, 45세에는 기자의 행적을 정리한 ≪기자실기 箕子實記≫를 편찬했다.

47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고, 어명으로 〈인심도심설 人心道心說〉을 지어 올렸다. 이 해에 〈김시습전 金時習傳〉을 쓰고, ≪학교모범 學校模範≫을 지었으며, 48세에 〈시무육조 時務六條〉를 올려 외적의 침입을 대비해 십만양병을 주청하였다.

49세에 서울 대사동(大寺洞)에서 영면, 파주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었다.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풍덕의 구암서원(龜巖書院), 황주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등 20여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1545년 을사사화가 발생해 수많은 사류(士類)가 죽고 유배되었다. 사림은 출사(出仕)를 포기하고 물러서서 학문을 닦을 수밖에 없었다. 1565년(명종 20) 문정대비(文定大妃)의 죽음과 20년간 정사를 전횡하던 권신 윤원형(尹元衡)의 실각으로 나라 안의 정세가 바뀌었다.

을사사화 이후 죄를 입은 사람들이 풀려나고, 사림은 다시 정계로 복귀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이이는 30세로서 출사 1년째 되는 해였다. 1567년에는 이황이 상경하였다. 그 해 6월, 명종이 죽고 선조가 즉위하면서 8월에는 을사사화 이후 피죄되었던 노수신(盧守愼유희춘(柳希春) 등이 서용(敍用)되었다.

선조 즉위 다음해인 1568년에는 조광조(趙光祖)에게 영의정을 추서, 이황이 일시에 대제학에 취임하고 남곤(南袞)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이황은 ≪성학십도 聖學十圖≫를 지어 올렸고, 1569년(선조 2)에는 이이가 〈동호문답〉을 지어 올렸다.

1570년에는 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의 신원이 이루어지는 등 정국이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면서 사림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그러나 오랜 구습이나 폐풍은 일시에 시정될 수 없었고 유림의 활동은 떨쳐 일어나지 못했다.

더구나 1575년부터는 동서의 분당으로 사림이 분열되고 정쟁이 심각해졌다. 연산군 이래의 폐법은 고쳐지지 않은 채 국가의 기강은 무너지고 민생의 곤고는 극도에 달하였으며, 군사적으로도 무력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1565년부터 1592년(선조 26)까지의 약 30년 간은 국정을 쇄신해 민생과 국력을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이는 16세기 후반의 조선사회를 ‘중쇠기(中衰期)’로 판단해 일대 경장(更張)이 요구되는 시대라 보았다.

이이는 〈만언봉사〉에서 “시의(時宜)라는 것은 때에 따라 변통(變通)하여 법을 만들어 백성을 구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는 조선의 역사에 있어서도 “우리 태조가 창업했고, 세종이 수성(守成)해 ≪경제육전 經濟六典≫을 비로소 제정하였다. 세조가 그 일을 계승해 ≪경국대전≫을 제정했으니, 이것은 모두 ‘시의(時宜)에 따라 제도를 개혁한(因時而制宜)’ 것이요, 조종(祖宗)의 법도를 변란(變亂)함이 아니었다. ”고 하였다. 그러므로 시대의 변천에 따른 법의 개정은 당연한 일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이에게 성리학은 단순한 사변적 관상철학(觀想哲學)이 아니었다. 그는 성리학의 이론을 전개함에 있어 시세(時勢)를 알아서 옳게 처리해야 한다는 ‘실공(實功)’과 ‘실효(實效)’를 항상 강조하였다.

그는 〈만언봉사〉에서, “정치는 시세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일에는 실지의 일을 힘쓰는 것이 중요한 것이니, 정치를 하면서 시의)를 알지 못하고 일에 당해 실공을 힘쓰지 않는다면, 비록 성현이 서로 만난다 하더라도 다스림의 효과를 거둘 수 없을 것이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이는 항상 위에서부터 바르게 하여 기강을 바로잡고 실효를 거두며, 시의에 맞도록 폐법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사화로 입은 선비들의 원을 풀어주고, 위훈(僞勳)을 삭탈함으로써 정의를 밝히며, 붕당의 폐를 씻어서 화합할 것 등 구체적 사항을 논의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기(國基)를 튼튼히 하고 국맥(國脈)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이는 성현의 도는 ‘시의와 실공’을 떠나서 있지 않으므로 현실을 파악하고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요(堯)·순(舜)·공(孔)·맹(孟)이 있더라도 시폐(時弊)를 고침이 없이는 도리가 없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이이는 진리란 현실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고, 그것을 떠나서 별도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여기서 이(理)와 기(氣)를 불리(不離)의 관계에서 파악하는 이이 성리설의 특징을 보게 되는 것이라 하겠다.

〔이황과 이이의 사상적 배경〕

이이와 성혼은 평상시에 경학이나 도학과 관련해 문답하는 서한을 교환하였다. 이황이 죽은 2년 뒤 이이가 37세가 되던 임신년(1572)에 성리설에 대한 본격적인 논란을 벌였다.

그것은 이황과 기대승의 논변처럼 오랜 세월을 두고 계속한 것이 아니라, 단 1년 사이에 9회에 걸쳐 주고받은 것이다. 대체로 성혼이 이이에게 질의하고 이이가 회답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성혼의 질의내용은 비교적 단순한 것으로, 주자학의 핵심 논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하였다.

성혼은 일찍이 이황과 기대승(奇大升) 사이에 오간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 대해 기대승의 논의를 존중하다가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의 도덕적 고민을 이해하고 그 취지에 수긍하게 되었다. 성흔은 이 문제를 과연 어떻게 정돈해야 하느냐고 이이에게 의견을 물었던 것이다.

‘호발설(互發說)’에 대한 성혼의 재론을 계기로 이이는 이황은 물론, 서경덕(徐敬德)과 나흠순(羅欽順)에 대한 논평뿐 아니라, 경전의 본의와 송대 제유(諸儒)의 성리설을 집약적으로 논술해 나갔다.

이 논쟁은 이이에게 성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정리하고 심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고, 후기의 저작인 ≪성학집요≫ 속의 성리설이나 만년작인 〈인심도심설〉의 내용의 핵심을 형성하고 있다.

이이는 선배인 이황의 이원적 이기론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황이 이기를 그처럼 분열적 대립으로 이해하게 된 것은 그 자신이 잇달은 사화를 겪으며 당시의 사회정치적 혼란과 부조리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던 데 연유한다.

그는 개인과 집단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가 공의(公義)와 사리(私利)의 분별이 명확하지 못한 데서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그가 천리와 인욕, 인심과 도심, 사단과 칠정, 그리고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을 대립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같은 자각의 반영이다.

이황에게 이발(理發)과 기발(氣發), 사단과 칠정, 그리고 도심과 인심은 각기 순수한 정신적 가치와 신체적·물질적 욕구의 두 방향을 의미하였다. 그는 이기가 왕신관계(王臣關係)에 있으며, 인심은 항상 도심의 명령을 순종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관계가 전도되면 개인적으로는 도덕성의 방기를,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윤리의 파멸과 정치의 타락을 초래하게 된다. 따라서 이황은 일체의 작위의 근원은 마음의 위미지간(危微之間)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혼탁한 정치현실을 떠나 학문을 닦음으로써 ‘입언수후(立言垂後)’하여 도(道)를 전해주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

이에 비해 이이의 경우는 상황이 달랐다. 1565년 이후로 사림이 다시 복귀하게 되면서 사회적 상황을 개선하고 민생의 문제를 해결하며 국맥을 바로잡을 수 있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이이는 현실의 개선 그 자체에 진리성을 찾았다. 이이가 이기를 불상잡(不相雜)의 대립이 아니라 불상리(不相離)의 묘(妙)에서 파악하는 것도 이같은 낙관을 반영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이의 사칠론이나 인심도심설에 대한 해석도 이황의 이원적인 논의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칠정을 형기(形氣)에 속한 것으로만 보지 않고 본연지성 또한 기질지성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와 기는 논리적으로 구별하는 것이지, 사실적으로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이에게 기란 단순히 혈기지기(血氣之氣)로서 타락의 가능성만을 지닌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기는 물질적인 것, 감성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영역, 심령이나 이성까지도 포괄한다.

여기서 기는 본연지성을 엄폐(掩蔽)하는 것일 뿐 아니라, 본연지성을 드러나게도 하고 나아가 회복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이는 “인심도심이 다 기의 발이요, 기에 있어 본연지리(本然之理)를 순(順)한다면 기가 본시 본연지기(本然之氣)이다.”라고 하며, “기의 청명여부(聽命與否)는 다 기의 소위(所爲)이니, 호발이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인심도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인심은 ‘구체(口體)’를 위한 것으로서 그리고 도심은 ‘도의(道義)’를 위한 것으로서 서로 구별된다.

그러나 그는 이황의 주장처럼 하나는 기발, 하나는 이발로 서로 다른 본질과 근원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하나의 심이 “단지 발하는 곳에 있어서 이단(二端)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인심은 성현이라도 면할 수 없으며, “먹을 때 먹고 입을 때 입는 것”은 바로 천리인 것이다. 이이는 인심이라 해도 그것이 알맞게 조절된 상태에서는 “인심 또한 도심이 된다.”고 하였다.

〔서경덕·이황·이이의 이기론적 차이〕

흔히 서경덕은 물론이요 이이까지도 ‘주기론(主氣論)’이라 하여 학문적으로 연관시켜 보는 경향이 있다. 서경덕과 이이는 다 같이 기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특히 기의 불멸성, 능동성을 강조해 기의 면을 전폭적으로 긍정한 점에서 그렇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이는 서경덕이 이기의 불리(不離)에 대한 이해는 깊고 투철하지만, 그 위에 뚜렷이 극본궁원(極本窮源)하는 이(理)의 면이 있음을 몰랐다고 비판했다. 서경덕이나 송대의 장재(張載)가 기에 치우치고 이기를 혼동해 성현의 뜻에 묘계(妙契)치 못하였다고 지적했다.

이이는 서경덕의 유기론적(唯氣論的) 입장에 대해 ‘이통기국(理通氣局)’을 모르는 소치라 하여 ‘한 모퉁이를 본 사람(見一隅者)’라 폄하했다. 이이 또한 이기지묘(理氣之妙)를 말하지만 그는 서경덕처럼 구극적 존재를 태허지기(太虛之氣)로 보지 않고, 태극지리(太極之理)로 이해한다.

그렇지만 이황이 이와 기가 각각 실질적 동력으로 발용한다는 호발설을 주창한 데 대해 이이는 이기는 이합과 선후가 없다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했다.

이이의 견해는 처음부터 이기를 이원적으로 파악하는 이황과 달리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현상 그 자체의 소이연으로서 이를 말하는 까닭에 이발(理發)이 따로 있을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이는 서경덕의 주기론에 대해서는 특히 ‘이통기국설’로, 그리고 이황의 이기이원적 경향에 대해서는 ‘기발이승일도설’로 대응했다.

서경덕은 실재하는 기의 생성변화를 떠나서 별도로 묘(妙)를 말하는 것은 진리를 모르는 자라 하였다. 그러나 이황은 이와 달리 이(理)야말로 가장 알기 어려운 것으로서 이로 말미암아 모든 학문 도술의 차이가 생기는 것이라 하였다.

이처럼 이황은 만유를 가능하게 하는 초월적 존재로소 이를 강조한 반면, 서경덕은 이를 기 자체와 작용상의 자율성 또는 내재율로 보아 기의 실재성과 사실성을 강조하였다.

서경덕은 유기론자로서 기를 중시하고 이황은 이우위설을 논해 이의 구극성을 강조하였다. 서경덕과 이황은 거의 동시대의 인물이면서도 이와 같이 매우 대조적인 견해를 견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이는 이의 세계와 기의 영역을 완전히 긍정 포괄하면서 동시에 양면을 아울러 지양시켰다. 이이는 기의 사실성과 이의 초월성을 체인(體認 : 충분히 납득함.)해 양자를 불리의 관계에서 파악하면서 ‘이기지묘’를 강조했다. 이이는 이기의 묘처(妙處)야말로 알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설명하기도 어렵다고 하였다.

이이는 태극과 음양, 이와 기의 관계는 일이이(一而二)요 이이일(二而一)이라는 기본 인식을 바탕으로 그의 이론을 대략 다음과 같이 집약하였다.

“전훈(前訓)을 고찰하면 이기는 일(一)이면서 이(二)요, 이(二)이면서 일(一)이다. 이기가 혼연무간해 원래 떨어지지 않으므로 정자는 ‘기즉도(器卽道)요 도즉기(道卽器)’라 했고, 떨어지지 않을지라도 혼연한 가운데 섞이지 않아서 일물(一物)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주자는 ‘이는 스스로 이요, 기는 스스로 기’라고 한 것이다.

이 두 설을 종합해 깊이 생각하면 이기지묘를 거의 알 수 있으리라. 그 대강을 말하면 이는 무형하고 기는 유형하다. 그러므로 이는 통(通)하고 기는 국(局)한다. 이는 무위하고 기는 유위하므로, 기는 발(發)하고 이는 승(乘)한다. 무형무위하면서 유형유위한 것의 주(主)인 것은 이이며, 유형유위하면서 무형무위한 것의 기(器)인 것은 기이다(聖學輯要).”

이이의 이통기국과 기발이승일도설은 보편적 원리와 특수한 사실을 상호관련 하에 파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사사물물을 관통하고 있으며, 본연지리는 스스로의 보편성을 가지는 것이지만, 변화하는 사실과 관련한 유행지리(流行之理)를 떠나서 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보편적 원리가 사사물물의 개별적 사실을 관통하고 있으며, 또한 구체적인 변화의 상을 떠나서는 추구할 수 없다는 논리로서, 성리와 실사가 혼융무간한 관계임을 통찰한 결과이다.

〔이이성리설의 현실적 의미〕

이이는 이른바 의(義)와 이(利)를 구별해 이원화하는 사고방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의리(義理)와 실리(實利)를 불가리(不可離)의 관계에서 보고 있다.

그는 〈시무칠조책 時務七條策〉에서 “도(道)의 병립할 수 없는 것은 시(是)와 비(非)이며, 사(事)의 함께 할 수 없는 것은 이(利)와 해(害)이다. 한갓 이해가 급하다고 하여 시비의 소재를 불고(不顧)한다면 제사지의(制事之宜)에서 어긋난다. 또한 시비를 생각해 이해의 소재를 살피지 않는다면 응변지권(應變之權)에서 어긋난다. …… 권(權)에는 정규(定規)가 없으니 중(中)을 얻음이 귀하고, 의(義)에는 상제(常制)가 없나니 의(宜)에 합함이 중하다. 중을 얻고 의에 합하면, 즉 시(是)와 이(利)가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

진실로 국가를 평안하게 하고 민중에게 이로우면 다 행할 수 있는 일이요, 나라를 평안하게 하지 못하고 민중을 보호하지 못하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옳고 그름을 가르는 규범의 문제와 이해 관계를 따지는 현실 문제가 ‘득중(得中)’, ‘합의(合宜)’함으로써, 보국과 안민이라는 차원에어서, 시(是)와 이(利)의 조화라는 하나의 사실로 지양됨을 볼 수 있다.

이이는 시대에 따라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이 각기 다르다고 보았다. 그는 시대를 ‘창업(創業)’과 ‘수성(守成)’ 그리고 ‘경장(更張)’의 과정으로 나누어 논했으며, 당시를 경장기라고 보았다.

이이는 〈동호문답〉에서 가장 큰 폐법으로 다섯 가지를 들어 설명하였다. 그것은 모두 민생에 관계되는 것으로서, ① 일가절린(一家切隣)의 폐, ② 진상번중(進上煩重)의 폐, ③ 공물방납(貢物防納)의 폐, ④ 역사불균(役事不均)의 폐, 그리고 ⑤ 이서주구(吏胥誅求)의 폐를 꼽았다.

이러한 그의 지적은 당시의 시대상과 민중의 질고(疾苦)를 가장 잘 나타낸 것이다. 또한 그는 국세조사와 같은 전국적인 규모의 조사를 실시해 실정에 알맞게 폐법을 개혁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밖에도 이이는 〈만언봉사〉·≪성학집요≫ 및 수많은 상소문을 통해 정치·경제·문교·국방 등에 가장 필요한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더 나아가 이이는 국정을 도모함에 있어서도 개인이나 일부 지도층으로부터 하향식으로 수행될 것이 아니라. 언로를 개방해 국민 모두가 말할 수 있게 하고, 위정자는 아래로부터의 중지(衆智)를 모아야 한다고 보았다.

조광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이에게 언로의 개색(開塞)은 국가 흥망에 관계된 중대한 일로서 강조되었다. 공론(公論)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국민의 정당한 일반 의사가 곧 국시(國是)가 된다고 지적하면서, 언로의 개방성과 여론의 중요성을 피력했다.

또한 이이는 경제사(經濟司)의 창설을 제의하면서 단지 기성 관료가 아니라, 시무를 밝게 알고 국사를 염려하는 사류로서 윤리성과 합리성을 겸비한 최고의 지성이 동원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렇듯 의리와 실리, 이념과 현실의 통합적 구상은 후기에 한국의 의리학과 실학으로 전개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도 조선 중기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 전개에서 이이의 성리설이 끼친 영향을 깊이 관찰해야 한다.

그의 성리사상은 오늘날에도 유심과 유물, 주체와 상황, 그리고 현실과 이상의 괴리로부터 양자의 조화와 발전을 도모하는 데에 새로운 방향을 던져주고 있다.

 

 

 

 

ㅋㄷ 

 

<퇴계 이황>

〔생 애〕

경상도 예안현(禮安縣) 온계리(溫溪里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좌찬성 식(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7개월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했으나, 현부인이었던 생모 박씨의 훈도 밑에서 총명한 자질을 키워 갔다.

27세(1527)에 향시(鄕試)에서 진사시와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고,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성균관에 들어가 다음해에 진사 회시에 급제하였다. 33세에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하고 ≪심경부주 心經附註≫를 입수, 크게 심취하였다.

이 해 귀향 도중 김안국(金安國)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34세(1534)에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 부정자(副正字)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37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자 향리에서 3년 간 복상했고, 39세에 홍문관수찬이 되었다가 곧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임명되었다.

중종 말년에 조정이 어지러워지매 먼저 낙향하는 친우 김인후를 한양에서 떠나 보냈다. 이 무렵부터 관계를 떠나 산림에 은퇴할 결의를 굳힌 듯, 43세이던 10월에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하자 성묘를 핑계삼아 사가를 청해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을사사화 후 병약함을 구실로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46세(1546)가 되던 해 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의 동암(東巖)에 양진암(養眞庵)을 얽어서 산운야학(山雲野鶴)을 벗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 생활에 들어갔다. 이 때에 토계를 퇴계(退溪)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그 뒤에도 자주 임관의 명을 받아 영영 퇴거(退居)해 버릴 형편이 아님을 알고 부패하고 문란한 중앙의 관계에서 떠나고 싶어서 외직을 지망, 48세에 충청도 단양군수가 되었다. 그러나 곧 형이 충청감사가 되어 옴을 피해 봉임 전에 청해서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

풍기군수 재임중 주자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부흥한 선례를 좇아서, 고려 말기 주자학의 선구자 안향(安珦)이 공부하던 땅에 전임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서적(書籍학전(學田)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해 조정에 청원, 실현을 보게 되었다.

이것이 조선조 사액 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1년 후 퇴임하고, 어지러운 정계를 피해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지어 다시금 구도 생활에 침잠하다가 52세(1552)에 성균관대사성의 명을 받아 취임하였다. 56세에 홍문관부제학, 58세에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고사하였다.

43세 이후 이 때까지 관직을 사퇴하였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20여 회에 이르렀다. 60세(1560)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했다. 이로부터 7년 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훈도하였다.

명종은 예(禮)를 두터이 해 자주 그에게 출사(出仕)를 종용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명종은 근신들과 함께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이라는 제목의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에 보내 그 풍경을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에다 송인(宋寅)으로 하여금 도산기(陶山記) 및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써넣게 해 병풍을 만들어서, 그것을 통해 조석으로 이황을 흠모했다 한다. 그 뒤 친정(親政)하게 되자, 이황을 자헌대부(資憲大夫)·공조판서·대제학이라는 현직(顯職)에 임명, 자주 초빙했으나, 그는 그때마다 고사하고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67세 때 명나라 신제(新帝)의 사절이 오게 되매, 조정에서 이황의 내경(來京)을 간절히 바라 어쩔 수 없이 한양으로 갔다. 명종이 돌연 죽고 선조가 즉위해 그를 부왕의 행장수찬청당상경(行狀修撰廳堂上卿) 및 예조판서에 임명하였다. 하지만 신병 때문에 부득이 귀향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황의 성망(聲望)은 조야에 높아, 선조는 그를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우찬성에 임명, 간절히 초빙하였다. 그는 사퇴했지만 여러 차례의 돈독한 소명을 물리치기 어려워 마침내 68세의 노령에 대제학·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무진육조소 戊辰六條疏〉를 올렸다.

노환 때문에 여러 차례 사직을 청원하면서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서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학십도 聖學十圖≫를 저술, 어린 국왕 선조에게 바쳤다. 이듬해 69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번번히 환고향(還故鄕)을 간청해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환향 후 학구(學究)에 전심하였으나, 다음해 70세가 되던 11월 종가의 시제 때 무리를 해서인지 우환이 악화되었다.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여 애도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영사를 추증하였다. 장사는 영의정의 예에 의하여 집행되었으나, 산소에는 유계(遺誡)대로 소자연석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새긴 묘비만 세워졌다.

죽은 지 4년 만에 고향 사람들이 도산서당 뒤에 서원을 짓기 시작해 이듬해 낙성, 도산서원의 사액을 받았다. 그 이듬해 2월에 위패를 모셨고, 11월에는 문순(文純)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학 문〕

이황이 ≪주자대전≫을 입수한 것은 중종 38년, 즉 그의 43세 때였고, 이 ≪주자대전≫은 명나라 가정간본(嘉靖刊本)의 복각본(復刻本)이었다. 가정간본의 대본(臺本)은 송나라 때 간행된 것을 명나라 때 복간한 성화간본(成化刊本)의 수보본(修補本)이었다.

그가 ≪주자대전≫을 읽기 시작한 것은 풍기군수를 사퇴한 49세 이후의 일이었다. 이황은 이에 앞서 이미 ≪심경부주≫·≪태극도설≫·≪주역≫·≪논어집주≫ 등의 공부를 통해 주자학의 대강을 이해하고 있었으나, ≪주자대전≫을 완미(玩味)함으로써 그의 학문이 한결 심화되었고, 마침내 주희의 서한문의 초록과 주해에 힘을 기울였다.

그의 학문이 원숙하기 시작한 것은 50세 이후부터였다고 생각된다. 50세 이후의 학구 활동 가운데서 주요한 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53세에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설 天命圖說〉을 개정하고 후서(後敍)를 썼으며, ≪연평답문 延平答問≫을 교정하고 후어 (後語)를 지었다.

54세에 노수신(盧守愼)의 〈숙흥야매잠주 夙興夜寐箴註〉에 관해 논술하였다. 56세에 향약을 기초, 57세에 ≪역학계몽전의 易學啓蒙傳疑≫를 완성, 58세에 ≪주자서절요≫ 및 ≪자성록≫을 거의 완결지어 그 서(序)를 썼다.

59세에 황중거(黃仲擧)에 답해 ≪백록동규집해 白鹿洞規集解≫에 관해 논의하였다. 또한 기대승(奇大升)과 더불어 사단칠정에 관한 질의응답을 하였고, 61세에 이언적(李彦迪)의 ≪태극문변 太極問辨≫을 읽고 크게 감동하였다.

62세에 ≪전도수언 傳道粹言≫을 교정하고 발문을 썼으며, 63세에 ≪송원이학통록 宋元理學通錄≫의 초고를 탈고해 그 서(序)를 썼다. 64세에 이구(李球)의 심무체용론(心無體用論)을 논박했고, 66세에 이언적의 유고를 정리, 행장을 썼고 ≪심경후론 心經後論≫을 지었다.

68세에 선조에게 〈무진육조소〉를 상서했으며, 〈사잠〉·≪논어집주≫·≪주역≫〈서명〉 등을 강의하였다. 또한 그간 학구의 만년의 결정체인 ≪성학십도≫를 저작, 왕에게 헌상하였다.

〈무진육조소〉의 내용은, 제1조 계통을 중히 여겨 백부인 선제(先帝) 명종에게 인효(仁孝)를 온전히 할 것, 제2조 시신(侍臣)·궁인의 참언(讖言)·간언(間言)을 두절하게 해 명종궁(明宗宮)과 선조궁(宣祖宮) 사이에 친교가 이루어지게 할 것,

제3조 성학(聖學)을 돈독히 존숭해 그것으로서 정치의 근본을 정립할 것, 제4조 인군(人君) 스스로가 모범적으로 도술(道術)을 밝힘으로써 인심을 광정(匡正)할 것, 제5조 군주가 대신에게 진심을 다해 접하고 대간(臺諫)을 잘 채용해 군주의 이목을 가리지 않게 할 것,

제6조 인주(人主)는 자기의 과실을 반성하고 자기의 정치를 수정해 하늘의 인애(仁愛)를 받을 것 등으로, 시무 6개 조를 극명하게 상주한 풍격(風格) 높은 명문이다.

≪성학십도≫는 제1도 태극도(太極圖), 제2도 서명도(西銘圖), 제3도 소학도(小學圖), 제4도 대학도(大學圖), 제5도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 제6도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제7도 인설도(仁說圖), 제8도 심학도(心學圖), 제9도 경재잠도(敬齋箴圖), 제10도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와 도설(圖說)·제사(題辭)·규약 등 부수문(附隨文)으로 되어 있다.

제5도의 규약은 주희의 글이고, 도는 이황의 작품이며, 제6도의 상도(上圖) 및 도설은 정복심의 저작이고 도는 이황의 작품이다. 제7도는 도 및 도설이 모두 주희의 저작이고, 제8도는 도 및 도설이 모두 정복심의 저작, 제9도에서 잠은 주희의 말이고 도는 왕백(王柏)의 작품이며, 제10도의 잠은 진백(陳柏)의 말이고, 도는 이황의 작품이다.

그러므로 제3·5·10도와 제6도의 중간 하도(下圖) 등 5개 처는 이황의 독자적인 작품이고, 나머지 17개 처는 상기한 선현들의 저작이다. 그러나 이들 유학 사상의 정수는 이황에 의해 독창적으로 배치되어 서로 유기적으로 관련됨으로써 생명 있는 전체적 체계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황의 학문은 일대를 풍미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를 통해 영남을 배경으로 한 주리적(主理的)인 퇴계학파를 형성해 왔다. 그리고 도쿠가와(德川家康) 이래로 일본 유학의 기몬학파(崎門學派) 및 구마모토학파(熊本學派)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쳐 왔다.

또한, 개화기 중국의 정신적 지도자에게서도 크게 존숭을 받아,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3국의 도의철학(道義哲學)의 건설자이며 실천자였다고 볼 수 있다.

≪언행록≫에 의하면, 조목(趙穆)이 이덕홍(李德弘)에게 “퇴계선생에게는 성현이라 할 만 한 풍모가 있다.”고 했을 때, 덕홍은 “풍모만이 훌륭한 것이 아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언행통술 言行通述≫에서 정자중(鄭子中)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선생은 우리 나라에 성현의 도가 두절된 뒤에 탄생해, 스승 없이 초연히 도학을 회득(會得)하였다. 그 순수한 자질, 정치(精緻)한 견해, 홍의(弘毅)한 마음, 고명한 학(學)은 성현의 도를 일신에 계승했고, 그 언설(言說)은 백대(百代)의 후에까지 영향을 끼칠 것이며, 그 공적은 선성(先聖)에게 빛을 던져 선성의 학(學)을 후학의 사람들에게 베풀었다. 이러한 분은 우리 동방의 나라에서 오직 한 분뿐이다.”

위에서 밝힌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그가 제자들에게서 성현의 예우를 받는, 한국 유림에서 찬연히 빛나는 제일인자임을 엿볼 수 있게 된다.

〔계승·평가·연구〕

이황의 학풍을 따른 자는 당대의 유성룡(柳成龍정구(鄭逑김성일(金誠一)·조목·이덕홍·기대승·김부륜(金富倫)·금응협(琴應夾)·이산해(李山海정탁(鄭琢정유일(鄭惟一구봉령(具鳳齡조호익(曺好益황준량(黃俊良이정(李楨) 등등을 위시한 260여 인에 이르렀다.

나아가서 그는, 성혼(成渾정시한(丁時翰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이익(李瀷이상정(李象靖유치명(柳致明이진상(李震相곽종석(郭鍾錫이항로(李恒老유중교(柳重敎기정진(奇正鎭) 등등을 잇는 영남학파 및 친영남학파를 포괄한 주리파 철학을 형성하게 했으니, 이는 실로 한국 유학 사상의 일대장관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이익은 ≪이자수어 李子粹語≫를 찬술해 그에게 성인(聖人)의 칭호를 붙였고, 정약용(丁若鏞)은 〈도산사숙록 陶山私淑錄〉을 써서 그에 대한 흠모의 정을 술회하였다.

임진왜란 후 이황의 문집은 일본으로 반출되어 도쿠가와가 집정(執政)한 에도(江戶)시대에 그의 저술 11종 46권 45책이 일본각판으로 복간되어 일본 근세 유학의 개조(開祖) 후지와라(藤原惺窩) 이래로 이 나라 유학 사상의 주류인 기몬학파 및 구마모토 학파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고, 이황은 이 두 학파로부터 대대세세(代代世世)로 신명(神明)처럼 존숭을 받아 왔다.

기몬학파의 창시자 야마사키(山崎暗齋)는 그를 “주자의 직제자(直弟子)와 다름 없다.”며 ‘조선의 일인(一人)’이라 평가하였다. 그리고 그의 고제(高弟) 사토(佐藤直方)는 “그의 학식이 이룬 바는 크게 월등해 원명 제유(元明諸儒)의 유(類)가 아니다.”라고 찬양하였다.

이나바(稻葉默齋)는 ‘주자의 도통(道統)’에서 ‘주자 이래의 일인(一人)’이라고 존신(尊信)했으며, 구마모토 학파의 시조 오쓰카(大塚退野)는 “만약에 이 사람이 없었다면 주자의 미의(微意)는 불명해 속학(俗學)이 되어 버렸을 것이라 생각된다.”고 하였다.

도쿠가와 말기의 요코이(橫井小楠)는 그를 원·명시대를 통해 ‘고금절무(古今絶無)의 진유(眞儒)’라 절찬했고, 역시 이 계통에 속하는 막부(幕府) 말 메이지(明治)시대의 구스모토(楠本碩水)는 “명대의 대유(大儒) 설경헌(薛敬軒)·호경재(胡敬齋)와 명말청초의 육가서(陸稼書)·장양원(張楊園)과 비교하면 훨씬 탁월하다.”고 단언하였다.

마쓰다(松田甲)의 ≪일선사화 日鮮史話≫에 의하면, 요코이의 친구이자 제자로서 메이지 제일의 공신이며 교육 칙어(敎育勅語)의 기초자인 모토다(元田東野)는 “정주(程朱)의 학은 조선의 이퇴계(李退溪)에게 전해졌고, 타이야(退野) 선생이 그 소찬(所撰)의 ≪주자서절요≫를 읽고 초연히 얻은 바 있었으니, 내 지금 타이야의 학을 전해 이것을 금상황제(今上皇帝)에게 봉헌하였다”고 술회했다 한다.

뿐만 아니라, 1926년 중국의 북경(北京) 상덕여자대학(尙德女子大學)에서는 대학의 증축·확장기금에 충당하기 위해 ≪성학십도≫를 목판으로 복각(復刻)해 병풍을 만들어서 널리 반포(頒布)하였다.

이 때, 중국 개화기의 대표적인 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는 찬시(贊詩)를 써 그 제1연에서 “아득하셔라 이부자(李夫子) 님이시여”라며 거리낌없이 그를 성인이라 호칭하였다. 다음과 같은 조호익의 말은 이황의 학적 지위를 간결히 표현한 매우 적절한 평가라 볼 수 있다.

즉, “주자가 작고한 뒤……도(道)의 정맥은 이미 중국에서 두절되어 버렸다. 퇴계는 ……한결같이 성인의 학으로 나아가 순수하고 올바르게 주자의 도를 전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이 만한 인물을 볼 수 없다. 실로 주자 이후의 제일인자이다.”

1609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고, 그 뒤 그를 주사(主祀)하거나 종사하는 서원은 전국 40여 개 처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의 위패가 있는 도산서원은 제5공화국 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국비 보조로 크게 보수, 증축되어 우리 나라 유림의 정신적 고향으로서 성역화 되었다.

이황의 학덕은 그의 생시(生時)외 한·일 양국의 역사에서 크게 선양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 국제적 규모로 널리 부흥, 재검토되고 있다. 1970년 서울에 퇴계학연구원이 창립되었고, 1972년 퇴계 400주기 기념 논문집 ≪퇴계학연구≫가 간행되기 이전부터 발행된 계간 학술지 ≪퇴계학보≫는 2000년 3월 현재로 105집에 이르렀다.

경북대학교에 퇴계연구소가 부설되었는가 하면, 서울과 거의 같은 시기에 일본 동경에 이퇴계연구회가 설립되었다. 대만에도 국립사범대학 안에 퇴계학연구회가 부설되었고, 근래에는 미국의 워싱턴·뉴욕·하와이에 이퇴계연구회가 조직되었으며, 독일 함부르크 및 본에 퇴계학연구회가 생겼다.

1986년에는 단국대학교에서 퇴계 기념 중앙도서관이 낙성되어 그 안에 퇴계학연구소를 부설하였다. 또한, 국제퇴계학회가 창설되어 1976년 이래로 거의 해마다 한국·일본·대만·미국·독일·홍콩 등지에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 세계 각 국의 이 방면의 석학들이 회동해 주제 논문을 발표하며 진지한 토론을 거듭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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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1545(인종 1)∼1598(선조 31). 조선 중기의 명장.

〔성장배경〕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아버지는 정(貞)이며, 어머니는 초계 변씨(草溪卞氏)로 수림(守琳)의 딸이다. 서울 건천동(乾川洞:지금의 중구 인현동 부근)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가계는 고려 때 중랑장을 지낸 이돈수(李敦守)로부터 내려오는 문반(文班)의 가문으로, 이순신은 그의 12대손이 된다.

그러나 할아버지 백록(百祿)이 조광조(趙光祖) 등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주장하던 소장파 사림(少壯派士林)들과 뜻을 같이하다가 기묘사화의 참화를 당한 뒤로는 아버지 정도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던 만큼 이순신이 태어날 즈음에 가세는 이미 기울어 있었다.

그러하였음에도 그가 뒤에 명장으로 나라에 큰 공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유년시절에 어머니 변씨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던 때문이었다. 변씨는 현모로서 아들들을 끔찍이 사랑하면서도 가정교육을 엄격히 하였다.

그는 위로 희신(羲臣)·요신(堯臣)의 두 형과 아우 우신(禹臣)이 있어 모두 4형제였다. 형제들의 이름은 돌림자인 신(臣)자 위에 삼황오제(三皇五帝) 중에서 복희씨(伏羲氏)·요(堯)·순(舜)·우(禹)임금을 시대순으로 따서 붙인 것이다.

그는 사대부가의 전통인 충효와 문학에 있어서 뛰어났을 뿐 아니라 시재(詩才)에도 특출하였으며 정의감과 용감성을 겸비하였으면서도 인자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강한 정의감은 뒤에 상관과 충돌하여 모함을 받기도 하였으며, 용감성은 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에서 매양 선두에 나서서 장졸들을 지휘함으로써 예하장병의 사기를 북돋 워 여러 전투에서 전승의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또, 그의 인자한 성품은 홀로 계신 노모를 극진히 받들 수 있었고, 어버이를 일찍 여읜 조카들을 친아들같이 사랑할 수 있었다.

그의 시골 본가는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면 백암리이나 어린 시절의 대부분은 생가인 서울 건천동에서 자란 듯하다. 같은 마을에 살았던 유성룡(柳成龍)은 ≪징비록 懲毖錄≫에서 이순신이 어린 시절부터 큰 인물로 성장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었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순신은 어린 시절 얼굴 모양이 뛰어나고 기풍이 있었으며 남에게 구속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라치면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고 그것을 가지고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하였으며,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하여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그의 문앞을 지나려 하지 않았다. 또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하여 발신(發身)하려 하였다. 또 자라면서 말타고 활쏘기를 좋아하였으며 더욱이 글씨를 잘 썼다.”

〔관직생활〕

28세 되던 해에 비로소 무인 선발시험의 일종인 훈련원별과(訓鍊院別科)에 응시하였으나 불운하게도 시험장에서 달리던 말이 거꾸러지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져서 왼발을 다치고 실격하였다.

그 뒤에도 계속 무예를 닦아 4년 뒤인 1576년(선조 9)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鍊院奉事)로 처음 관직에 나갔다.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에 보직되고, 이듬해에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를 거쳐, 1583년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을 역임하고, 1586년에는 사복시주부가 되었다. 그러나 무관으로 발을 들여놓은 그의 진로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사복시주부에 이어 조산보만호 겸 녹도둔전사의(造山堡萬戶兼鹿島屯田事宜)가 되었는데, 이 때 그는 국방의 강화를 위하여 군사를 더 보내줄 것을 중앙에 요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던 차에 호인(胡人)의 침입을 받고 적은 군사로 막아낼 수 없어 부득이 피하게 되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그것이 오로지 그의 죄라 하여 문책하였다. 그러나 그는 처형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장(主將)의 판결에 불복하면서 첨병(添兵)을 들어주지 않고 정죄(定罪)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하여 끝내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서 중형을 면하기는 하였으나, 첫번째로 백의종군(白衣從軍)이라는 억울한 길을 걷게 되었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助防將)·선전관 등이 되고, 1589년 정읍현감으로 있을 때 유성룡에게 추천되어 고사리첨사(高沙里僉使)로 승진, 이어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만포첨사(滿浦僉使)·진도군수 등을 지내고, 47세가 되던 해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그는 곧 왜침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좌수영(左水營:여수)을 근거지로 삼아 전선(戰船)을 제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등 일본의 침략에 대처하였고, 나아가서 군량의 확보를 위하여 해도(海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할 것을 조정에 요청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시의 활동〕

이듬해인 1592년 4월 13일 일본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이 발발되었는데 일본의 대군이 침입해 왔다는 급보가 전라좌수영에 전달된 것은 이틀 뒤였다.

이 날은 국기일(國忌日)이었으므로 그는 공무를 보지 않고 있었는데, 해질 무렵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으로부터 왜선 350여 척이 부산 앞바다에 정박중이라는 통보에 이어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그 때 부산 앞바다의 방어를 맡은 경상좌수영의 수군은 왜선단을 공격하지도 않았고,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은 부산이 함락된 뒤에야 예하 장졸을 이끌고 동래 방면에 당도하였으나 동래가 함락되는 것을 보고는 군사를 돌려 육지로 도망하였다.

또, 거제도에 근거를 둔 우수사 원균은 적이 이르기도 전에 싸울 용기를 잃고 접전을 회피함으로써 일본군은 조선수군과 한번 싸우지도 않고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소식에 접한 그는 즉시 전선을 정비하고 임전태세를 갖추었지만, 적을 공략하기에 앞서 전황을 면밀히 분석하였다. 그의 휘하 전함대는 4월 29일 수영 앞바다에 총집결하여 매일 작전회의가 열리고 기동연습도 강행하여 완전한 전투태세에 임하게 되고, 그는 총지휘관으로 5월 2일 기함에 승선하였다.

4일 새벽 출진을 명하니, 이때의 규모는 전선 24척, 협선(狹船) 15척, 포작선(鮑作船) 46척, 도합 85척의 대선단이었다. 이틀 뒤 한산도(閑山島)에 이르러 경상우수사 원균의 선단을 만났는데, 그 규모는 전선 3척과 협선 2척에 불과하였으나 연합함대를 조직하지 않을 수 없었다.

7일 옥포(玉浦) 앞바다를 지날 무렵 척후선(斥候船)으로부터 적선이 있음을 알리는 연락이 왔다. 이 때 옥포에 정박중인 적선은 30여 척이었다.

왜군은 조선수군이 해상으로부터 공격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육지에 올라가서 불을 지르고 약탈을 자행하다가 아군의 공격 소식을 듣고 급히 배에 올라 도망하려 하였으나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순식간에 왜선 26척이 조선수군의 포화와 불화살〔火矢〕에 격파되고 많은 왜병이 궤멸되었다. 이 싸움이 옥포대첩으로 그의 최초의 해전으로 기록된다.

옥포해전이 있던 다음날에는 고성의 적진포(赤珍浦)에 정박중인 왜선 13척을 쳐서 불태웠다. 제1차 출동 후 전력을 보강하고 전선을 정비한 뒤 다음 출동에 대비하고 있던 그는 일본수군의 주력함대가 서쪽으로 나아간다는 정보가 계속 들어오자,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에게 합동으로 출동하여 왜선을 격파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왜선 10여 척이 사천·곤양 등지로 진출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예정출동일을 변경하여 적에게 선제공격을 가하기로 하였다.

5월 29일 그는 거북선을 앞세우고 23척의 전선으로 여수항을 출항하였다. 노량(露梁) 앞바다에 이르러 전선 3척을 인솔하고 있던 원균이 그의 전함에 올라와 적정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조선수군은 곧 일본수군이 정박중인 사천으로 달려갔다. 이 때 왜군은 대부분 상륙하여 있었고 해변에는 왜선 12척이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다.

그는 공격이 용이하지 않자 그들을 바다로 유인하여 섬멸할 계획을 세웠으며, 그 작전계획은 적중하여 왜선 12척을 파괴하고 많은 왜군을 섬멸하였다.

이 싸움에서 군관(軍官) 나대용(羅大用) 등이 부상하였고, 그도 적의 조총탄에 맞아 왼쪽어깨가 뚫리는 부상을 입었다. 이 싸움에서 최초로 출동한 거북선의 위력은 확고한 인정을 받았다. 6월 2일 왜선이 당포(唐浦)에 정박중이라는 보고를 받은 그는 곧 그곳으로 달려갔다.

당포 선창에는 일본수군장 가메이(龜井玆矩)와 구루시마(來島通元)가 인솔하는 대선 9척, 중·소선 12척이 정박하고 있었으며, 일본수군들은 성 안팎에서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다 조선수군을 보고 발포하였으나 거북선을 앞세운 조선수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대패하고 왜장 구루시마가 전사하였다.

당포해전 다음날 그의 함대는 가박지(假泊地)인 창신도(昌信島)를 떠났다. 다음날 당포 앞바다에서 왜선이 거제로 향하였다는 정보를 받고 즉시 전함대에 거제출격을 명하고 발선(發船)하려는 때에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전선 25척을 이끌고 이곳에 오자 그는 매우 반갑게 맞았다.

5일 아침 전선 51척과 중·소선 수십척의 연합함대는 일제히 거제로 향하였다. 이 때 피난민으로부터 거제로 도피하였던 왜선단이 다시 당항포로 도주하였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그와 이억기와의 연합함대는 바로 길을 바꾸어 당항포로 향하였다. 당항포 내만(內灣)에는 왜의 대선 9척, 중선 4척, 소선 13척이 정박 중이었다.

조선수군의 내습을 발견한 일본수군은 먼저 공격을 가해 왔다. 아군의 전선들은 적선을 포위하고 먼저 거북선을 돌입시켜 맹공을 가하였다. 이 싸움에서 왜군은 대패하였고 왜선은 모두 소실되었다.

이와 같이 이순신은 해전에서의 연전연승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계(陞階)되었다. 그 뒤 그는 다시 선제공격으로 거제·가덕에 출몰하는 일본수군을 격멸하기 위하여 우수사 이억기에게 작전을 전달하고 연합함대의 조직을 통첩하고, 7월 6일 전라좌·우수군이 일제히 출동한 뒤 노량해상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전선 7척과도 합세하였다.

이 때 일본군은 해전에서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하여 병력을 증강하여 견내량(見乃梁)에는 적장 와키사카(脇坂安治) 등이 인솔한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그는 견내량이 지형이 좁고 활동이 불편하다는 판단 아래 장소를 한산도로 물색하였다.

그는 약간의 판옥선(板屋船)으로 일본의 수군을 공격하면서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뒤 학익진(鶴翼陣)을 쳐 일제히 총통(銃筒)을 발사하는 등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층각선(層閣船) 7척, 대선 28척, 중선 17척, 소선 7척을 격파하였다.

이 싸움에서 와키사카의 가신(家臣) 와키사카사베에(脇坂左兵衛)·와타나베(渡邊七右衛門)를 위시하여 이름 있는 자들이 전사하였다. 그는 이 한산대첩의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승계되었다.

한산대첩 후 그는 다시 전진하여 안골포(安骨浦:창원군 웅천면)의 적선을 격파하였다. 와키사카와 합동작전을 하려던 구키(九鬼嘉隆)·가토(加藤嘉明) 등의 일본수군장은 와키사카의 수군이 전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안골포에 정박 중이었다.

그는 수심이 얕아서 적선을 유인하여 공격하려 하였으나 적선이 포구 밖으로 나오지 않자,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교대로 종일토록 적선을 공격하여 대선을 거의 분멸(焚滅)하였다.

제3차 출동의 결과로 가덕도 서쪽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 그는 왜침의 교두보인 부산포공격의 결단을 내렸다. 전라좌·우도의 전선 74척, 협선 92척은 8월 24일 좌수영을 떠나 가덕도 근해에서 밤을 지냈다. 공격 전날은 밤을 새우며 원균·이억기와 작전회의를 하여 부산포공격에 따른 작전을 구상하였다.

9월 1일 오전 몰운대(沒雲臺)를 지나 파도를 헤치고 다대포를 바라보며 절영도(絶影島:지금 影島)에 이르렀을 때, 왜의 대선 수 척이 아군함대를 보고 도주하였다.

절영도에서는 수 척의 적선을 쳐부수고 척후선을 부산포에 보내어 적정을 탐지하게 한 결과, 왜선 약 500척이 선창 동쪽 산기슭 해안에 줄지어 정박해 있고 대선 4척이 초량(草梁) 쪽으로 나오고 있다는 보고였다.

적이 부산포를 요새화한 것을 알게 된 여러 장수들은 부산포로 깊이 들어가기를 꺼렸으나, 그는 이를 거부하고 독전기(督戰旗)를 높이 들고 진격을 재촉하였다. 우부장(右部將) 정운(鄭運) 등이 선두에 서서 먼저 바다로 나오는 왜군의 대선 4척을 공격하여 불사르니, 뒤에 있던 여러 전선들도 함께 돌진하였다.

그러나 3진으로 나누어져 정박 중인 일본수군의 대·중·소선 470여 척은 아군의 위용에 눌려 나오지 못하고 있다가 아군이 돌진하며 맹공을 가하자, 배의 안과 성 안, 굴 속에 있던 왜군은 모두 산으로 올라가 아군에게 총통과 화전을 쏘았다. 아군은 이에 맞서 더욱 맹공을 가하며 종일토록 교전하여 적선 100여 척을 격파하였다.

날이 어둡자 그는 육지로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전함을 돌리게 하였다. 이 싸움에서 적의 피해는 말할 수 없이 컸으며, 아군도 이 해전에서 30여 명의 사망자를 냈으며 특히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이 전사하였다. 1593년 다시 부산과 웅천의 적 수군을 궤멸, 남해안 일대의 적군을 완전히 소탕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으로 삼고, 그 뒤 최초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내원(來援)하자, 죽도(竹島)로 진을 옮기고, 이어 장문포(長門浦)에서 왜군을 격파, 적군의 후방을 교란하여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왜군의 전진을 막아 이들의 작전에 큰 차질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 뒤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회담이 진행되면서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그는 후일에 대비하여 군사훈련, 군비확충, 피난민 생업의 보장, 산업장려 등에 힘썼다.

〔정유재란시의 활동〕

1597년 명·일 사이의 강화회담이 결렬되자, 본국으로 건너갔던 왜군이 다시 침입하여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그러자 그는 적을 격멸할 기회가 다시 왔음을 기뻐하고 싸움에 만전을 기하였다. 그러나 그는 원균의 모함과 왜군의 모략으로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고니시(小西行長)의 부하이며 이중간첩인 요시라(要時羅)라는 자가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에게 가토(加藤淸正)가 어느날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수군을 시켜 이를 사로잡을 것을 은밀히 알려오자, 조정에서는 통제사 이순신에게 이를 실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이것이 적의 흉계인 줄 알면서도 부득이 출동하였으나, 가토는 이미 수일 전에 서생포(西生浦)에 들어온 뒤였다. 이 때 마침 조정에서도 영의정 유성룡을 몰아내려는 자들이 있었다. 그는 유성룡이 전라좌수사로 추천한 사람이라 이를 구실로 먼저 그가 모함당하게 되었다.

또, 그 중에서도 경상우수사 원균 같은 이는 한층 더 노골적인 불만을 가졌던 터라 이순신을 모함하는 소를 올리게 되었다. 상소를 받은 선조는 돌아가는 실정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여 원균의 상소만을 믿고 크게 노하여 이순신이 명령을 어기고 출전을 지연하였다는 죄를 들어 그에게 벌을 주고 원균으로 하여금 그 직을 대신하게 하였다.

그러나 유성룡은 끝까지 “통제사의 적임자는 이순신밖에 없으며, 만일 한산도를 잃는 날이면 호남지방 또한 지킬 수 없습니다.” 하고 간청하였지만 정세판단에 어두운 선조가 그것을 받아들일 리 없었기에, 이순신을 잡아들이라는 명령만을 내렸다.

이 때 그는 전선을 거느리고 가덕도 앞바다에 있었는데, 이러한 소식을 듣고 바로 본영인 한산도로 돌아와 진중을 정리하고 원균에게 직위를 인계하였다. 당시 한산도에는 밖에 있는 군량미를 제외하고도 9,914석의 군량이 있었으며, 화약은 4,000근, 총통은 각 선척에 적재한 것을 제외하고도 300자루나 되었다.

이 때, 영남지방을 순시하던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은 그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왜군이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수군인데, 이순신을 바꾸고 원균을 보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는 치계(馳啓)를 올렸지만 허사였다.

그가 서울로 압송되자, 지나는 곳곳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백성들이 모여들어 통곡을 하며 “사또는 우리를 두고 어디로 가십니까. 이제 우리는 모두 죽었습니다.” 하였다.

서울로 압송된 그는 이미 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였지만, 그러한 공로도 아랑곳없이 가혹한 고문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는 남을 끌어들이거나 헐뜯는 말은 한마디도 없이 자초지종을 낱낱이 고하였다. 죽음 직전에서 그는 우의정 정탁(鄭琢)의 변호로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도원수 권율(權慄)의 막하(幕下)로 들어가 두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다.

남해안으로 향하던 그는 중도에서 어머니의 부고를 받고 “세상천지에서 나 같은 일을 겪는 수도 있을까. 일찍이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한탄하면서 잠시 들러 성복(成服)을 마친 다음 슬픔을 이기고 다시 남쪽으로 향하였다.

그 해 7월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적의 유인전술에 빠져 거제 칠천량(漆川梁)에서 전멸당함으로써 그가 힘써 길러온 무적함대는 그 형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한산도의 군비는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초계(草溪)에서 이 소식을 들은 그는 “우리가 믿은 것은 오직 수군인데 그같이 되었으니 다시 희망을 걸 수 없게 되었구나.” 하며 통곡하였다.

원균의 패보가 조정에 이르자 조야(朝野)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고, 왕은 비국대신(備局大臣)들을 불러 의논하였으나 당황하여 바로 대답도 못하였다. 오직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만이 그를 다시 통제사로 기용할 것을 주장하였을 뿐이었다.

이리하여 조정을 기만하고 임금을 무시한 죄, 적을 토벌하지 않고 나라를 저버린 죄, 다른 사람의 공을 빼앗고 모함한 죄, 방자하여 꺼려함이 없는 죄 등의 많은 죄명을 뒤집어씌워 죽이려고까지 하였던 그를 다시 통제사로 기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선조도 변명할 말이 궁하였던지 교서(敎書)에서 “지난번에 경의 관직을 빼앗고 죄를 주게 한 것은 또한 사람이 하는 일이라 잘 모르는 데서 나온 것이오, 그래서 오늘날 패전의 욕을 보게 된 것이니 그 무엇을 말할 수 있겠소.” 하며 얼버무렸다.

통제사에 재임용된 그는 남해 등지를 두루 살폈으나 남은 군사 120인에 병선 12척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조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전에서 적을 맞아 싸울 것을 결심하였다.

명량해전(鳴梁海戰)에 앞서 장병에게 필승의 신념을 일깨운 다음 8월 15일 13척(일설에 12척)의 전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하여 31척을 부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 싸움은 재차 통제사로 부임한 뒤의 최초의 대첩이며 수군을 재기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싸움이었다.

명량대첩으로 제해권을 다시 찾은 그는 보화도(寶花島:목포의 高下島)를 본거로 삼았다가, 다음해 2월에 고금도(古今島)로 영(營)을 옮긴 다음, 군사를 옮겨 진(鎭)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널리 둔전을 경작시키고 어염(魚鹽)도 판매하였다.

이로 인하여 장병들이 다시 모여들고 난민(難民)들도 줄을 이어 돌아와서 수만 가를 이루게 되었으며, 군진(軍鎭)의 위용도 예전 한산도시절에 비하여 10배를 능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단시일에 제해권을 회복하고 수군을 재기시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의 개인적 능력에 의한 것이었다.

1598년 11월 19일 그는 노량에서 퇴각하기 위하여 집결한 500척의 적선을 발견하고 싸움을 기피하려는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陳璘)을 설득하여 공격에 나섰다. 그는 함대를 이끌고 물러가는 적선을 향하여 맹공을 가하였고, 이것을 감당할 수 없었던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와 선척을 잃었다.

그러나 선두(船頭)에 나서서 적군을 지휘하던 그는 애통하게도 적의 유탄에 맞았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라.” 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운명을 지켜보던 아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그대로 통곡하려 하였으나, 이문욱(李文彧)이 곁에서 곡을 그치게 하고 옷으로 시신을 가려 보이지 않게 한 다음, 북을 치며 앞으로 나아가 싸울 것을 재촉하였다.

군사들은 통제사가 죽은 사실을 미처 모른 채 기운을 내어 분전하여 물러나는 왜군을 대파하였으며, 모두들 “죽은 순신이 산 왜군을 물리쳤다.”며 외쳤다. 부음(訃音)이 전파되자 모든 백성들이 애통해 하였다.

〔사후평가〕

그는 지극한 충성심, 숭고한 인격, 위대한 통솔력으로 보아 임진왜란 중에 가장 뛰어난 무장으로 큰 공을 세워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족사에 독보적으로 길이 남을 인물이다.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도 그를 평하여 “유경천위지지재 보천욕일지공(有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이라 하여 높이 평가하였고, 그의 부음을 접하자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선조실록≫에서 사관(史官)은 그의 죽음에 대하여 “그의 단충(丹忠)은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쳤고, 의를 위하여 목숨을 끊었네. 비록 옛날의 양장(良將)이라 한들 이에서 더할 수가 있겠는가. 애석하도다! 조정에서 사람을 쓰는 것이 그 마땅함을 모르고,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주를 다 펼치지 못하게 하였구나. 병신년·정유년 사이 통제사를 갈지 않았던들 어찌 한산도의 패몰(敗沒)을 초래하여 양호지방(兩湖地方:忠淸·全羅道)이 적의 소굴이 되었겠는가. 그 애석함을 한탄할 뿐이로다.”라고 평하였다.

그는 당대에는 죽음으로써 나라를 구하였고, 사후(死後)에는 그 정신으로써 민족의 나아갈 길을 일깨워 주었다. 해전사연구가(海戰史硏究家)이며 이순신을 연구한 발라드(G.A.Ballard) 제독은 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이순신 제독은 서양 사학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그로 하여금 넉넉히 위대한 해군사령관 가운데서도 뛰어난 위치를 차지하게 하였다. 이순신은 전략적 상황을 널리 파악하고 해군전술의 비상한 기술을 가지고 전쟁의 유일한 참정신인 불굴의 공격원칙에 의하여 항상 고무된 통솔정신을 겸비하고 있었다. 어떠한 전투에서도 그가 참가하기만 하면 승리는 항상 결정된 것과 같았다. 그의 물불을 가리지 않는 맹렬한 공격은 절대로 맹목적인 모험이 아니었다. 그는 싸움이 벌어지면 강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나, 승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신중을 기하는 점에 있어서는 넬슨(Nelson)과 공통된 점이 있었다.……중략……영국사람으로서는 넬슨과 어깨를 견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시인하기란 항상 어렵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인정할 만한 인물이 있다면 그는 한번도 패배한 일이 없고 전투중에 전사한 이 위대한 동양의 해군사령관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것이다.”라고 평하였다.

그가 전사한 데 대하여는 후대인들의 많은 의문을 자아내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리에 불과한 것이며 확실한 근거는 없다. 그는 글에도 능하여 ≪난중일기 亂中日記≫·시조(時調) 등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진중(陣中)에서 읊은 시조들은 우국충정이 담긴 걸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그가 전사했다는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선조는 관원을 보내 조상하고 우의정에 추증하였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녹훈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좌의정에 추증, 1793년(정조 17) 다시 영의정이 더해졌다.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於羅山)에 있으며, 왕이 친히 지은 비문과 충신문(忠臣門)이 건립되었다. 충무의 충렬사(忠烈祠), 순천의 충민사(忠愍祠), 아산의 현충사(顯忠祠) 등에 제향하였는데, 이 중에 현충사의 규모가 가장 크다.

현충사는 조선 숙종연간에 이 고장의 유생들이 그의 사당을 세울 것을 상소하여 1707년(숙종 33)에 사액(賜額), 현충사가 입사(立祠)되었다.

그 뒤 일제강점기 때에 동아일보사가 주관하여 전국민의 성금을 모아 현충사를 보수하였고, 제3공화국 때 대통령 박정희(朴正熙)의 특별지시에 의하여 현충사의 경역을 확대, 성역화하고, 새로이 전시관을 설치하여 종가에 보존되어 오던 ≪난중일기≫와 그의 유품 등을 전시하였다.

그리고 그의 일생과 중요 해전을 그린 십경도(十景圖)가 전시되어 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저서로는 ≪이충무공전서≫가 전한다. 또, 그를 대상으로 삼은 작품으로는 신채호(申采浩)의 〈이순신전 李舜臣傳〉 등이 있으며, 〈성웅 이순신〉이라는 제목으로 영화가 제작되어 그의 행적과 공로를 일반에 널리 알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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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켜주삼,알켜주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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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렸을 때 성격

이순신은 어린 시절에 여러 아이들과 더불어 놀았으며 그 중에서도 전쟁놀이를 즐겼고, 그 때마다 아이들은 이순신을 대장으로 올려 세웠다.
그리고 언제나 활과 화살을 즐겨 차고 다녔다. 마을에서 어른들이라 하더라도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게 되면, 곧장 바른 말을 했기 때문에 어른들도 이순신을 어렵게 여겼다.
그만큼 이순신은 어려서부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지녔던 것이다.

 

2. 전쟁에 썼던 무기

임진왜란 중의 무기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의 주무기는 활과 화살ㆍ총통ㆍ비격진천뢰ㆍ화차 등이었다. 특히 조선의 활은 정교함과 성능의 우수함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총통은 화약을 이용하여 화살이나 탄환을 발사하였는데 밀집된 적군의 살상이나 함선 파괴에 대단히 효율적이었다. 신무기인 비격진천뢰는 둥근 탄환 모양으로 속에 화약ㆍ철편ㆍ신관을 장치하고 겉을 철로 둥글게 싼 다음 포에 넣고 쏘아 목표물을 파괴하는 것이 었다. 화차는 일종의 전차로서, 수레 위에서 백 개의 신기전(神機箭)을 장착하여 연발로 발사하는 무기로 행주대첩에서 위력을 발휘하였다.

 

 

3. 돌아가실 때 나이(연세)

54살

 

출처 : http://www.e-sunshin.com/e-sunshin/main/main.jsp

등등...

그런데 다른인물들은 못구했어요.... 죄송합니다

이순신 장군이라도 쓰시길...(제발...제 답변 답변확정좀 해주시길...)

장군,퇴계 이황,율곡이이,세종대왕에...

... 제발 참여 좀 해 주셍요.>ㅁ< 내공 마니 드링 <세종대왕... ㅋㄷ <율곡 이이 > 1536(중종 31)∼1584(선조 17). 조선 중기의... ㅋㄷ <퇴계 이황> 〔생 애〕 경상도 예안현(禮安縣)...

퇴계이황율곡이이가 지폐에 나올만큼...

... 이순신장군 역시 왜적을 어려운상황에서 전승으로 이겨낸 명장중의 명장이고 인지도 또한 높습니다만. 율곡이이퇴계이황이 한업적이 무엇이냐 대뜸물어보면 아는사람이...

율곡이이퇴계이황 업적..

... 퇴계이황율곡이이의 업적을 짧고 간단하게 써주세요... 이 때 그는 대마도주에 보내는 답서와 일본군 장군에게... 워낙 방대하여 읽기도 힘들지만 아직 다 찾아내지...

퇴계이황에 대해 & 율곡이이~~~

헬로~~ 방가루~~~ 퇴계이황에 대해서 아주 간략!!!!!!하게... 율곡이이~~~~해주세영~~~~간략~~ 질문자인사 ㅠㅠ 정말감사합니다~~ 많은 도움 되었네요 ㅠㅠ 이름 : 이황 출생...

세종대왕 이미지

... 어진이 아닌 이상 실제 모습과는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습니다. 당장 세종대왕을 비롯해 이순신, 율곡 이이, 퇴계 이황, 신사임당 등도 다 현대에 상상일 뿐 실존 모습은 아닙니다.

율곡이이선생님과 퇴계이황선생님에대...

... 선택한사상가:이이,율곡 대표적내용 이이) 이황)... 적극 참여하고 개혁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의리와... 성혼은 "율곡은 도체(道體)에 대하여 그 근원을 환히 꿰뚫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