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이이선생님과 퇴계이황선생님에대해서....

율곡이이선생님과 퇴계이황선생님에대해서....

작성일 2011.07.05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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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삼인문계학생입니다...

윤리수행평가를 해야되는데요.

전통 윤리 교과서에  나오는 동양 및 한국윤리 사상가들 중 사상적 라이벌로 분류되는 인물 두 명을 선택해서 그들 각자의 사상의 대표적내용과 두 사상가의 차이점을 비교,정리하고 마지막으로 개인의견을서술하시요.(비교 및 개인 의견란에는 두 사상가의 차이점 및 두 사상가를 선택한 이유와 시사점을 밝히도록 한다.)

선택한사상가:이이,율곡 

대표적내용

이이)

이황)

비교및개인의견은 제가적겠습니다^^

좀알려주세요ㅠㅠ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율곡의 정치사상

 

관직생활을 시작한 명종 말~선조 초는 명종대에 정치를 좌우한 척신이 제거되고 새로운 정치세력이 부상한 정치적 변동기였다.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가 죽자 윤원형() 등 그간 정사를 전횡한 권신이 차례로 쫓겨나고, 을사사화 때 죄를 입은 사람들이 신원되는 등 정세가 일변함에 따라 사림이 정계에 복귀하기 시작하였고, 곧이어 선조가 즉위하자 사림의 정계 진출은 더욱 본격화되어 그동안 훈척정치하에서 이루어진 폐정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방안이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중앙의 고위관직을 상당부분 차지한 구신()과 삼사()를 중심으로 포진한 사림이 대치한 정국의 구도 속에서 구체제 인물에 대한 처리 방식을 놓고 사림간의 견해차이가 드러났는데, 강온의 입장차이에 따라 동인과 서인으로 붕당이 갈렸다.

 

이이는 처음에는 훈척으로부터 사림 세력을 보호하기 위해 사림의 정치집단인 붕당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주장하였으나, 이 때에 사림이 분열하자 붕당의 지나친 분파활동이 수반하는 폐단을 경계하며 사림의 결속을 도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분열된 사림의 결합을 위한 그의 노력은 치열해져가는 정쟁()의 격화 속에서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그 자신마저 동인에 의해 서인으로 지목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그의 붕당관은 그가 가진 시국관과도 무관하지 않다. 당시 가장 시급한 문제는 훈척정치 아래에서 파생된 많은 사회적 모순과 폐정을 개혁하여 민생고를 해결하는 일이라고 판단하고, 이를 위해서는 이제 막 정권담당층으로 자리굳힌 사림의 총력을 결집시킬 필요성에서 그 분열과 소모적인 논쟁을 경계한 것이다.

 

자기가 살던 16세기의 조선 사회를, 건국 뒤 정비된 각종 제도가 무너져가는 '중쇠기()'라고 진단하고서, 시급한 국가의 재정비를 위해 일대 경장()이 요구되는 시대라고 판단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변통()을 통한 일대 경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동호문답》 《만언봉사》 등의 저술을 통하여 안민()을 위한 국정 개혁안을 선조에게 제시하였는데, 이것이 '경장론()'이다.

 

《만언봉사》에 의하면 '정치에 있어서는 때를 아는 것이 소중하고 일에 있어서는 실질적인 것에 힘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때에 알맞게 한다()는 것은 때에 따라 변통을 하고 법을 마련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시대가 바뀌면 법제도 맞지 않기 때문에 현실에 맞게 제도를 개혁해야 하며, 이러한 변통을 통해 경장이 이루어져야 안민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가 당시 조선 사회를 중쇠기로 파악한 구체적 증후로서 지배층의 기강 해이와 백성의 경제적 파탄을 들었는데, 그 원인은 각종 제도의 폐단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국가의 재정비를 위해서는 마땅히 잘못된 제도를 경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경장의 구체적인 방법은 국가의 통치체제 정비를 통해 기강을 확립하고, 공안()과 군정()등 부세()제도의 개혁을 통해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밖에도 서원향약(西)·해주향약()·사창계약속() 등을 만들어 향약과 사창법을 실시함으로써 향촌에서의 농민생활 안정과 사족중심의 향촌질서 유지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결국 그는 이러한 방법으로 안민을 이루어 중세사회의 동요를 막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경장론은 동·서인의 분쟁 격화와 선조의 소극적인 태도로 말미암아, 당대에는 거의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그의 정치사상은 시의를 쫓아 실공()과 실효를 강조한 현실적 면모를 보이는데, 진리란 현실 문제와 직결된 것이고 그것을 떠나서 별도로 구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한 점에서 일관되게 주장한 이기론, 즉 이()와 기()를 불리()의 관계에서 파악한 율곡성리설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16세기 전반기에는 성리학에 대한 깊은 연구 결과로 이기론·사단칠정론·인심도심설 등 이기심성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표출되어 이를 둘러싼 논쟁과 학문적 심화과정을 통해 조선 성리학이 정착되었다. 이황과 기대승() 간의 사칠논쟁, 이를 둘러싼 성혼과 이이와의 우율논변()이 벌어지고, 서경덕과 이황이 각기 기()와 이()를 둘러싸고 학설상의 차이를 보이는데, 이이는 이들의 주장을 아우르며 독특한 성리설을 전개하였다.

이황은 이기론에 있어서는 기뿐만 아니라 이도 발한다는 이기호발설을 견지하여 '이발이기수지 기발이이승지()'를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견해는 사단칠정론에도 그대로 이어져 순선()인 사단()은 이발()의 결과이고 유선악()인 칠정()은 기발()의 결과이므로, 결국 사단과 칠정을 별개로 취급하여 '사단대칠정' 논리를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이는 이발을 인정하지 않고 '발하는 것은 기이며 발하는 까닭이 이'라고 하여 '기발이이승지'의 한 길()만을 주장하면서 사단칠정이 모두 이것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라고 하였다. 단지 칠정은 정()의 전부이며, 사단은 칠정 중에서 선한 것만을 가려내 말한 것이라고 하여 칠정이 사단을 포함한다는 '칠정포사단'의 논리를 전개하여 기대승의 사단칠정론에 찬동하였다.

이이의 경우 이와 기는 논리적으로는 구별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사물에 있어 이는 기의 주재()역할을 하고 기는 이의 재료가 된다는 점에서 양자를 불리()의 관계에서 파악하고, 하나이며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이들의 관계를 '이기지묘()'라고 표현하였다.

이들이 이런 사상을 갖게된 현실적 배경을 살펴보면, 이황의 경우 이이보다 35년 연상으로 훈척정치하의 극심한 정치적 혼란기를 살면서 타락한 정치윤리와 도덕을 바로잡기 위해서 기보다는 이, 칠정보다는 사단, 인심보다는 도심에 역점을 두어 선()을 지향하는 이 위주의 이기이원론적 사고방식을 취한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 이이의 경우, 정권 담당층이 훈척에서 사림으로 교체되는 등 개선된 정치 여건속에서 시급한 민생문제 해결을 위해 현실에 적극 참여하고 개혁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의리와 실사()가 결합되고 이와 기가 통합된 일원론적 사고방식을 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이이의 이기론은 다양한 현상()속에 보편적 원리()가 존재한다는 것이며, 이러한 이가 현실 속에서는 구체적 기에 의해 규정되고 따라서 보편적 이는 구체적인 변화상을 떠나서는 추구될 수 없다는 점에서 그가 주장한 경장론의 변통논리와 일맥 상통한다. 이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변화하고 제한적인 기() 속에는 항상 보편적 이()가 존재한다는 '이통기국설()'을 제시하였다.

이를 서경덕의 주기론과 관련하여 살펴보면, 서경덕의 주기론에 대해 이이는 그가 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기불리를 주장하였다는 점에서는 동의하지만, 서경덕이 궁극적 존재를 기, 즉 태허지기()로 인식한 데 대해서는 비판을 가하여 궁극적 존재는 태허지기가 아니라 바로 이, 즉 태극지리()라고 주장하여 이의 중요성을 동시에 부각시켰다.

결국 이이는 서경덕의 기 위주의 주기론에 대해서는 이의 중요성을 들어 비판하고, 이황의 이 위주의 이기이원론 이기호발설에 대해서는 기의 중요성과 이기불리를 들어 기발일도설() 이기지묘를 주장하였다. 즉 이이는 서경덕과 이황 등 당대 성리학자의 상이한 주장을 균형있게 아우르며 그의 독특한 성리설을 전개시켜 나갔다.

-----------보충--------------

곡은 옛 성현들의 설을 참고하되 그것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자신의 독창적인 철학사상을 전개하였다. 즉, 율곡은 공맹(孔孟)이나 정주(程朱)의 학설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거나 전적으로 모방하지 아니하고, 객관적인 판단아래 종합적인 이해를 추구하였다.

그의 철학사상은 이기론(理氣論)과 심성론(心性論)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1. 이기론(理氣論)
가) 이기(理氣)의 개념
율곡의 철학사상을 살피는 데 있어서 먼저 그의 이기(理氣)에 대한 개념부터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는 주자와 마찬가지로 이기이원(理氣二元)의 존재관을 전제하였다. 즉, 이 세계의 모든 존재는 이(理)와 기(氣)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理)란 어떤 것이 그것으로 존재할 수 있는 이치요, 본래성이며, 기(氣)란 어떤 것의 이치가 실현될 수 있는 재료이자 실현될 힘이다.
이처럼 이(理)과 기(氣)는 전혀 다른 것이지만 이 세계 만사만물이 있기 위해서는 이 양자가 반드시 하나로 만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이(理)와 기(氣)는 그 존재적 역할과 기능에 있어 대등하고 상호의존적이며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다.
그는 '이(理)는 형이상자(形而上者)요, 기(氣)는 형이하자(形而下者)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개념적 구별이요, 가치적 구별이다.
"이(理)는 태극(太極)이요, 기(氣)는 음양(陰陽)이다."
"형이상(形而上)은 자연의 이(理)이고 형이하(形而下)는 자연의 기(氣)이다."
"유형 유위(有形 有爲)하여 동정(動靜)이 있는 것은 기(氣)이고, 무형 무위(無形 無爲)하여 동정(動靜)에 존재하는 것은 이(理)이다."
율곡은 태극(太極)과 음양(陰陽)은 동시적(同時的)임을 주장한다.
즉, 태극과 음양은 선후(先後), 주종(主從)관계가 아니라 그 소임(所任)이 다를 뿐이라고 한다.
또 이(理)는 무형 무위(無形 無爲)의 형이상(形而上)적 존재(存在)로서 순선(純善)한 것이며, 기(氣)는 유형 유위(有形 有爲)의 형이하(形而下)적 실재(實在)로서 청탁수박(淸濁粹駁)이 같지 않아 선악(善惡)이 공존하는 세계라고 보았다.
이는 우주와 인생에 대해 두루 적용이 가능한 이기(理氣)의 포괄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나) 이기(理氣)의 관계
율곡은 이와 같이 서로 다른 요소를 갖고 있는 이(理)와 기(氣)의 관계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을까?
그것을 그는 이기지묘(理氣之妙), 기발이승(氣發理乘), 이통기국(理通氣局)이란 말로 표현한다.
(1) 이기지묘(理氣之妙)
율곡 이전에 이언적, 퇴계 이황은 이(理)를 중시하는 관점에 있었고, 또 화담 서경덕은 기(氣)를 중시하는 관점에 있었다.
이에 대해 율곡은 이(理)와 기(氣) 중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묘합(妙合)의 논리를 주장한다.
그것이 이른바 '이기지묘(理氣之妙)'라고 불리는 것으로 율곡 이기설의 중심사상이다.
그는 "천하에 이(理) 밖의 기(氣)가 있겠는가? 이기지묘는 보기도 어렵고 말하기도 어렵다."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理)와 기(氣)는 두 가지 물건(二物)이 아니요, 또한 한 가지 물건(一物)도 아니다.
한 가지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이면서 둘이(一而二)요, 두가지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둘이면서 하나(二而一)이다.
"이(理)와 기(氣)는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이다.
이(理)와 기(氣)는 혼연하여 사이가 없어서 원래 떨어지지 않은 까닭에 두 가지 물건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정자는 말하기를 '그릇은 또한 도이고, 도는 또한 그릇이다.(器亦道, 道亦器)'라고 하였다.
또한 양자는 떨어지지 않을지라도 혼연한 가운데 실제로는 섞이지 않아서 한 가지 물건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주자가 말하기를 '이는 스스로 이요, 기는 스스로 기(理自理, 氣自氣)이기 때문에 서로 섞이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 두 말을 합하여 생각하면 이기지묘(理氣之妙)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내용에 이(理)와 기(氣)는 서로 떠나지 않는(不相離) 관계와 서로 섞이지 않는(不相離) 관계를 지속한다. 이것이 이른바 이기의 묘합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논리 체계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인 까닭에 율곡이 '이기지묘(理氣之妙)'라고 이름한 것이다.
중국유학에서는 기(氣)를 이(理)의 하위개념으로 보아 종속시킨 반면에, 율곡은 이(理)와 기(氣)를 똑같이 대등하게 두어서, 이 둘은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지도 않고 서로 분리되지도 않도록 한다. 그것을 묘합(妙合)이라 한다.
합이라 하지 않고 묘합(妙合)이라 하는 것은, 그냥 합이라 하면 분리됨이 없이 붙어있는 관계, 그러니까 다(多)가 없는 하나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묘합(妙合)이라고 말하는 원인은 구별(distinction)은 되어도 분리(separation)가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부부간에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구별은 되어야 한다. 만약 여자가 남자같고 남자가 여자같으면 부부생활이 재미가 없다. 부부유별(夫婦有別)에서 말하듯 여자는 여자답고 남자는 남자다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여자이고 나는 남자이니까 우리 분리(Seperation)하자고 하면 그것은 이혼이 된다.
따라서 구별은 되어져도 분리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기지묘(理氣之妙)의 의미는 이(理)와 기(氣)의 오묘한 관계성 뿐 아니라, 철학적 사유에 있어서 합해 보기도 하고 나누어 보기도 하는 양쪽의 관점이 아울러 그 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즉, 종합적 사유와 분석적 사유를 아울러 할 수 있는 입체적 사유라 할 것이다.
(2) 기발이승(氣發理乘)
그러면 율곡은 이(理)와 기(氣)가 묘합(妙合)의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각기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는가?
"대저 발(發)하는 것은 기(氣)요, 발(發)하는 까닭이 이(理)이다. 기(氣)가 아니면 발할 수 없고, 이(理)가 아니면 발(發)할 까닭이 없다."
그는 이기(理氣)의 기능에 대해, 기는 발동(發動)하는 기능을 갖고 있고, 이는 기(氣)가 발동하는 원인 내지 원리로서 존재한다고 인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기발이승(氣發理乘)'이라고 간단 명료하게 규정하여, 그 역할과 기능이 구별되는 까닭을 이렇게 말한다.
"이(理)는 작위(作爲)가 없고 기(氣)는 작위(作爲)가 있기 때문에 기(氣)는 발동(發動)하고 이(理)는 타는 것이다."
율곡은 자연세계나 인간세계를 막론하고 일체 존재의 존재구조를 기발이승(氣發理乘)으로 일관되게 설명한다.
기가 발(發)함에 이가 탄다고 할 때 기발(氣發)과 이승(理乘)은 동시적인 것이다. 또 공간적으로도 이합(離合)이 없는 것이다.
본래부터 하나로 있는 묘합(妙合) 구조를 기발이승(氣發理乘)이란 말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이승(理乘)의 승(乘)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그의 동정(動靜)을 주재하는 이(理)의 근저적 의미를 갖는 것이다.
따라서 기발이승은 존재 자체의 표현으로 이기지묘의 다른 표현이며 이통기국의 다른 표현이다.
(3) 이통기국(理通氣局)
율곡은 이(理)의 차원에서는 하나인데, 기(氣)의 세계에서는 나누어지게 되는 것은 이기(理氣)의 속성(屬性)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理)는 형체(形體)가 없고 기(氣)는 형체(形體)가 있기 때문에 이는 공통되고 기는 국한(局限)된다."
즉, 이(理)는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 보편성을 가졌다는 말이고, 기(氣)는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는 국한성을 가졌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理)는 언제 어디서나 두루 통하고, 기(氣)는 언제 어디서든지 한계지워지고 국한(局限)된다는 의미이다.
그의 이통기국(理通氣局)은 이일분수(理一分殊), 기일분수(氣一分殊)의 사고를 거쳐 창출된 이론이다.
이일분수(理一分殊)는 이기지묘(理氣之妙)하에서 이(理)를 중심으로 본체와 현상을 아울러 본 것이라면, 기일분수(氣一分殊)는 이기지묘(理氣之妙)하에서 기(氣)를 중심으로 본체와 현상을 아울러 본 것이다.
따라서 이기(理氣) 중 어느 한 면으로 치우쳐보는 관점을 지양하고, 이기지묘(理氣之妙)의 관점에서 이일(理一)과 기일(氣一), 이분수(理分殊)와 기분수(氣分殊)를 아울러 본 것이 이통기국(理通氣局)이다.
율곡은 이통기국을 설명하기를,
"인생(人生)이 물성(物性)이 아닌 것, 이것이 기국(氣局)이고, 사람의 이(理)가 곧 물(物)의 이(理)인 것, 이것이 이통(理通)이다"
라고 한다.
또한 모나고 둥근 그릇이 같지 아니하나 그릇 가운데의 물은 마찬가지이며, 크고 작은 병이 같지 아니하나 병 속의 공기는 마찬가지라 비유한다.
따라서 기(氣)가 만가지로 다른데도 근본(根本)이 하나일 수 있는 것은 이(理)의 통함(通) 때문이며, 이(理)가 하나인데도 만가지로 다를 수 있는 것은 기(氣)의 국한됨(局)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율곡의 이통기국은 이무형(理無形), 기유형(氣有形)의 개념을 통해 이기지묘(理氣之妙)의 관계성 속에서 이(理)의 체용(體用)과 기(氣)의 체용(體用)을 유기적으로 통찰한 표현이다.
요컨대, 율곡의 이통기국은 "이(理)'만도 아니고 '기(氣)'만도 아니며, '이(理)'의 통함(通)과 기(氣)의 국한됨(局)이 하나로 묘융된 이기지묘(理氣之妙)의 세계, 이기지묘(理氣之妙)의 가치를 표현한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통기국이란, 이는 조금도 구애됨이 없이 통하여 어디에서나 관통하는 것이지만(理通), 기는 바름과 치우침, 맑고 흐림의 차별상을 이루어 구애됨이 많다(氣局)는 것이다.
즉 율곡은 만물의 보편성과 차별성을 이통기국의 개념으로 정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이통기국의 논리는 불교 화엄철학의 논리를 원용한 것으로 보인다.
2. 심성론(心性論)
율곡은 인간의 존재와 본질문제를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관점에서 심성론을 전개하였다.
그의 심성론을 기질지성(氣質之性)과 본연지성(本然之性), 사단(四端)과 칠정(七情),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가)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
성리학에 있어서 성(性)은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구별하여 설명된다.
율곡이 인간의 성(性)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는 이(理)와 성(性)의 개념 구별에서부터 시작된다.
율곡에 의하면 성(性)은 이기(理氣)의 합(合)이다.
"대개 이(理)가 기(氣) 가운데 있은 연후에 '성(性)'이 된다. 만약 형질 가운데 있지 않으면 마땅히 이(理)라 해야지 성(性)이라 하는 것이 옳지 않다. 다만 형질 가운데 나아가 단지 그 이(理)만을 가리켜서 말한다면 본연지성(本然之性)인 것이다. 본연지성은 기(氣)와 섞일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율곡은 성(性)을 이기지합(理氣之合) 내지 이기지묘(理氣之妙)로 보기 때문에 형질 중에서 성(性)을 파악하는 관점에 선다. 따라서,
"기질지성(氣質之性)과 본연지성(本然之性)은 결코 두 개의 성(性)이 아니라, 기질상(氣質上)에 나아가 단지 그 이(理)만을 가리켜 본연지성(本然之性)이라 하고 이(理)와 기질(氣質)이 묘합(妙合)된 것을 기질지성(氣質之性)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연지성(本然之性)은 기질(氣質)을 겸해 말할 수 없으나, 기질지성(氣質之性)은 오히려 본연지성(本然之性)을 겸할 수 있다."
즉 율곡의 견해는 인간의 성(性)에 본연의 성(性)과 기질의 성(性), 두 개의 성(性)이 있는 것이 아니고, 성(性)은 단지 하나 일 뿐인데, 이(理)만을 가리켜 말하느냐 아니면 이(理)와 기(氣)를 합하여 말하느냐에 따라서 그 표현상의 명칭을 달라진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율곡의 기질지성(氣質之性) 중심의 성론(性論)은 인간을 천지지리(天地之理)와 천지지기(天地之氣)의 묘합체로 이해하는 그의 입장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이것은 현실적인 인간을 중심으로 성(性)을 말하는 것이지 관념적인 성(性)이나 개념적인 성(性)을 일컫는 것은 아니다.
나) 사단(四端)과 칠정(七情)
중국 성리학에서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사단칠정(四端七情)의 문제가 한국 성리학에서는 중요한 논제로 대두되었다.
사단(四端)은 인간의 성정(性情)을 측은(惻隱) · 수오(羞惡) · 사양(辭讓) · 시비(是非) 등 네가지 단서(端緖)로 분류해 말한 것으로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편에서 처음 보이며, 칠정(七情)은 인간의 감정을 희(喜) · 노(怒) · 애(哀) · 구(懼) · 애(愛) · 오(惡) · 욕(欲)의 일곱가지 종류로 나누어 말한 것으로 「예기(禮記)」예운(禮運)편에 처음 나온다.
우리나라 성리학에서 논의의 초점이 되었던 것은 바로 이 사단칠정(四端七情)의 문제였으며, 사단과 칠정이 동일개념이냐 별개의 개념이냐 하는 것이 논란의 대상이었다.
율곡은 퇴계(退溪)와 고봉(高峰: 기대승)의 사단논변(四端論辯)에 대해 고봉(高峰)의 견해에 동의한다.
율곡에 의하면 사단칠정(四端七情)의 구조를 기발이승(氣發理乘)으로 본다.
"사단(四端)은 칠정(七情)의 선(善)한 일부분이고, 칠정(七情)은 사단(四端)을 종합한 것이다."
"칠정(七情)이외에 다른 정(情)이 없으며, 칠정(七情) 가운데서 인욕(人欲)이 섞이지 않고 순수하게 천리에서 나온 것이 사단(四端)이다."
율곡은 퇴계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 대해 비판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퇴계는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을 두 가지로 보는데 율곡은 사단(四端)을 칠정(七情) 속에 포함시켜 본다.
둘째, 퇴계는 사단(四端)의 구조를 '이발이기수지(理發而氣隨之)', 칠정(七情)의 구조를 '기발이이승지(氣發而理乘之)'라고 하여 이중의 존재구조로서 설명하는데, 율곡은 사단, 칠정을 모두 '기발이승(氣發理乘)'의 존재구조로 본다.
셋째, 퇴계는 사단(四端)을 이발이기수지(理發而氣隨之)라고 표현하는데 율곡은 이발(理發)을 부정하고, 또 이발이기수지(理發而氣隨之)의 표현형식이 시간적 이선기후(理先氣後)를 면치 못하기 때문에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넷째, 퇴계는 사단(四端)을 주리(主理), 칠정(七情)을 주기(主氣)라고 말한다. 하지만 율곡은 사단을 주리(主理)라고 하는 것은 옳지만 칠정(七情)을 주기(主氣)라고 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율곡은 사단이 칠정이외에 따로 존재하는 별개의 개념이 아니고 칠정가운데 포용되는 칠정(七情) 중의 선(善)한 부분으로 생각하였다.
다) 인심(人心)과 도심(道心)
인간의 마음을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으로 나누어 이야기한 내용은 「서경(書經)」대우모(大禹謨)편에 처음 보이는데, 여기에 대한 논의도 후일 성리학계의 주요한 논란거리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율곡의 견해는 인심과 도심에 있어 두 가지 이름(二名)은 있을 수 있지만, 두 가지 마음(二心)은 있을 수 없다는 유일심적(惟一心的) 입장이었다.
율곡에 의하면,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이 비록 두 가지 이름이지만 그 근원은 단지 하나의 마음일 뿐이다. 그것이 발함에 있어 이의(理義: 의리)를 위한 것과, 식색(食色: 욕망)을 위한 것이 있기 때문에 발함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도의(道義)를 위해 발한 마음이 도심(道心)이고, 식색(食色)을 위해 발한 마음이 인심(人心)이다."
 "인심과 도심이 다 性에서 발한다. 다만 氣의 가린 바가 되면 인심이 되고 기의 가린 바가 되지 않으면 도심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그 근원에 있어서는 한마음이지만, 마음이 어떠한 의지적 정향(定向)을 갖고 작용하느냐에 따라 구별된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퇴계가 도심(道心)과 인심(人心)을 각기 내출(內出:안으로부터 표출)과 외감(外感:밖으로부터 느낌)으로 보아 이발(理發), 기발(氣發)의 이원으로 보지만, 율곡은 인심(人心)이나 도심(道心)을 모두 기발이승일도(氣發理乘一途)로 이해하고 있다.
또한 그는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이 서로 시작과 끝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마음이 처음에는 도심(道心)이던 것이 사사로운 뜻에 의해서 인심(人心)으로 끝마치게 되기도 하고 또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은 고정된 게 아니라 인심(人心)의 도심화(道心化)와 도심(道心)의 인심화(人心化)가 가능하다.
그에 의하면 도심(道心)은 순전히 천리(天理)이므로 순선(純善)하지만 인심(人心)은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의 양면을 겸하므로 선(善)할 수도 있고 악(惡)할 수도 있다. 인심(人心)은 인욕(人欲)에 흐르기 쉬우므로 반드시 정밀하게 살펴서 도심(道心)으로 절제하여 항상 인심(人心)이 도심(道心)의 명령에 쫓도록 해야 인심(人心)의 도심화(道心化)가 가능하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그는 천인일관(天人一貫)의 입장에서 인심(人心), 도심(道心)을 이기설(理氣說)과 일체화시키며 그 논리를 전개함은 물론,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 사단(四端)과 칠정(七情), 나아가 의(意)에까지 연관시켜 정밀하게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율곡의 인생론적 심(心) · 성(性) · 정(情)에 대한 관점을 대강 요약해 본다면, 미발(未發)의 본체인 이(理)로 말하면 단지 일로(一路)일 뿐인데, 발현상의 경계에 따라 심(心) · 성(性) · 정(情)으로 나누어지고, 그것은 다시 그 발현경로와 과정에 대해 순선(純善)인 이(理)를 중심으로 하여 보느냐 아니면 선악이 공존하는 기(氣)를 위주로 하여 보느냐에 따라서 심(心)은 인심과 도심, 성(性)은 본연의 성과 기질의 성, 정(情)은 사단과 칠정 등으로 나뉘어 설명된다는 것이다.
다음의 내용은 이러한 그의 심성정의 일로적(心性情 一路的) 논리를 종합해서 전하고 있다.
"심(心)은 하나인데 도심(道心)이라고도 하고 인심(人心)이라고도 하는 것은 성명(性命) · 형기(形氣)의 구별이요, 정(情)은 하나인데 사단(四端)이라고도 하고 칠정(七情)이라고도 하는 것은 이(理)만을 말하느냐 기(氣)를 겸하여 말하느냐 하는 차이이다. …… 본연(本然)의 성(性)은 기질(氣質)을 겸하지 않고 말한 것이며, 기질(氣質)의 성(性)은 본연(本然)의 성(性)을 겸하여 말한 것이다."
 
후일 율곡의 친구인 우계 성혼은
"율곡은 도체(道體)에 대하여 그 근원을 환히 꿰뚫어 보았다. 그가 말한 '천지의 조화가 두 근본이 없다'는 것과, '인간의 마음이 발함이 두 근원이 없다'는 것과, '이(理)와 기(氣)는 서로 발할 수 없다'는 것 등의 논리는 참으로 나를 일깨워 준 스승이었다."
고 피력한 바 있다. 율곡 철학의 진수를 깊이 있게 평가한 내용이라 하겠다.
율곡의 조화와 균형을 중시한 이기지묘(理氣之妙)의 철학사상은 당시의 학자들도 이해하기 힘들었던 시대에 앞선 뛰어난 사상으로서, 특히 이원성(二元性)의 극복은 오늘날 우리시대에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퇴계 이황

 

 

1. 생애와 저서

 

- 이름은 滉황, 자는 景경浩호, 退溪퇴계, 陶翁도옹, 陶도叟수

- 연산군 7년(1501) 12월, 경북 예안현 온계리(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서 출생

- 7개월 때 부친사망, 어머니와 숙부에게 훈육받음,

- 12세 때 「논어」 배움. 그 당시 일화, “모든 일의 옳은 것이 理이입니까” 물은 적이 있음.

- 19세 때부터 서리대전, 주역 등을 읽음

- 28세, 사마시 합격

- 34세,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시작, 홍문관 修撰수찬

- 45세, 홍문관 典翰전한에 임명

- 48∼49세, 단양‧풍기 군수

- 54세, 홍문관 校理교리, 대사성, 부제학, 공조 참판 등의 직책을 받았으나 은둔함

- 1790년 운명(선조3년), 「문순동」이라는 익호가 내려짐

- 저서로는 「주저서절요」, 「계몽전의」, 「성학십도」 등이 있음

 

 

2. 철학 사상

 

(1) 理氣이기論론

 

- 주자의 예기설 수용

   0 삼라만상은 「理이」와 「氣기」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으며, 이와 기에 의해서 우주가 형성되고 만상이 나타남. 여기서 「理이」: 사물고 관련있는 모든 법칙을 일반화 하는 것, 형이상의 초감각적 보편자 ex) 無무內外내외, 無무定義정의 등. 「氣기」: 사물의 현상 자체를 가리킴, 형이하의 사물의 구체적, 현상적 성질 ex) 輕重경중, 淸濁청탁 등

- 理이優位우위論론的적 理氣二元論이기이원론

  0 퇴계는 주자의 理氣이기二元論이원론을 심화시켜 理이優位우위論론的적 理氣二元論이기이원론을 주장

  0 퇴계는 주자의 理氣이기互호發발設설을 부정

  0 인간 존재의 이성(道心도심)과 감성(人心인심)의 양면을 理이와 氣기로 분배

  0 四端사단七情칠정 통하여 理이와 氣기를 四端사단(純순善선)과 七情칠정에 속하게 함

          ↳ 인간에 있어 이성과 감성의 양면

 

 

(2) 퇴계의 현실인식

- 동양정치사상에서 정치란

 

   0 서양에서 정치란 권력관계나 가치배분과 같은 단일 의미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복학적인 의미를 가짐

   0 정치란 바르게(正정)하고 고르게(平평) 한다는 의미임. 즉, 성리학적 관점에서 정치란 정치사회의 무질서와 바르지 못함을 고르게, 바르게 교정한다는 의미임

   0 유학에서 최고의 정치적 실천은 「平天下평천하」인데 밝은 덕을 천하에 밝히는 것이다.

- 퇴계에 있어 정치란

  0 사방을 사랑하고 편안히 하는 것

  0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공정하게 하는 것. 이를 위해 통치자의 도덕적 수양이 중요함  0 따라서 정치에 있어 중요한 것은 인간을 외부로부터 규제하는 객관적 규범이나 법,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나 인간의 내면적 도덕성을 확충시켜 나가는 것이 중요함

  0 정치가 잘못된 것은 법이나 제도가 잘못 되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운영하는 주체인 인간이 도덕성을 견지하고 못하고 사사로움(私益사익p에 빠지기 때문임

- 정치사회란 가족관계의 확대로 봄

   0 가족은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임

   0 정치사회를 제대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가족관계를 정상적으로 규율해야

   0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효도, 공손, 자애에 근원을 두고 이를 충성과 같은 것에 파급시키는 것으로 봄. 즉 정치사회의 규범질서와 운영원리가 가족적 질서를 벗어나지 않음

 

 

3. 정치사상

(1) 성현정치(성인정치)

 

- 유교정치사상의 治平치평, 즉 爲人위인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니고 修身수신, 즉 爲위己기에 치중함

- 퇴계에 의하면, 성인이란 天地천지와 德덕을 合一합일하는 사람이고 賢人현인은 여러 사람 중에 뛰어난 사람이다. 성인은 학문이 깊고, 천리를 아는 덕망을 가진 자로 수신하며 천명을 깨달아 公공과 私사를 구분하여 공을 위주로 행동하며, 정치에 임하는 군왕(聖王성왕)이나 지도자라 함

    “하늘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으나 스스로 사랑을 베풀지 못함으로 반드시 영명한 사람 중에서 가장 성스럽고(聖성), 밝고(哲철), 으뜸(元원)이 되고, 착(良량)하고 덕이 神신人인에 協和협화한 사람을 군주로 삼아 그에게 백성을 司牧사목하는 일을 부탁하여 仁愛인애의 정치를 행하게 하여야 한다.”⇒敬天愛人경천애인의 유교이상의 실현⇒어린 선조를 위한 「성학십도」를 남김

- 현인이란 성군을 보좌하여 治民치민의 道도를 실천할 수 있는 치자계급. 즉 「무진육소조」에서 현인계금은 대신, 대간인데, 현실적으로 군왕과 백성 사이에서 실제 통치를 담당하는 관료계급인 百官백관과 賢士현사를 지칭함

- 이황의 성현정치란, 군왕은 자성하여 천명에 거역함이 없어야 하며, 천명에 거역하는 폭정을 해서는 안된다.

   0 군왕은 천명의 대항자 역할에 충실해야

   0 군왕은 天心천심을 仁愛인애

   0 군왕은 성학을 돈독히 해서 정치의 근원을 세워야 함

   0 군주와 관료의 도덕적인 의무 강조→천명의 대행자로서 역할

- 성현정치의 특성은?

   ㉮ 天理천리, 天命천명, 天道천도로서 理이를 중시하였다.

      0 天천의 직접통치가 아니라 有德유덕者자를 통해 정치하는 것

      0 천명은 군왕 권력의 원천이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

      0 따라서 군왕은 천명을 귀히 여겨 이에 순응하는 것으로 천명에 어긋나고 백성을 다스림에 힘에 호소하여 民意민의를 무시할 때는 天천은 천명을 거두어 간다는 것이다.

    ㉯ 군왕은 人性인성을 중시하였다.

       0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는 전제하에 정치를 함에는 선한 본성을 발휘하는 것이라 함. 즉, 道術도술을 밝혀 人心인심을 바르게 한다.

       0 군왕은 천도에 어긋남이 없는 정치를 행하여 邪術사술(사악한 술책)에 현혹됨이 없으면 인심은 바로 잡혀진다고 하였다.

       0 말하자면 백성을 천도로 다스리면 사악한 무리와 간특한 잡배들도 장차 신령스러운 감명을 받아 善化선화, 선하게 된다는 것이다.

      0 성현정치는 인군이 덕을 닦고, 덕에 의해 정치를 해야 하는 왕도적 덕치주의임

      0 이에 관료를 등용함에 있어

        # 인성과 능력에 따라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

        # 모든 정사는 백성들의 의사에 따라 최종적으로 결정을 내려야 함(여론을 반영해야)⇒군왕과 관료는 결국 백성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백성들의 의사가 위정자에게 최대한 반영되어야 함

        # 공직자는 위로는 상관,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지탄을 받았을 때나 재능이 부족하거나 적합하지 않을 때와 노쇠해서 정무를 감당할 수 없을 때는 물러나야 함

 

<참고사항> 이황의 국가유기체론(삼위일체론)

- 국가를 인체에 비유하여 군왕의 만능과 전제를 배격함

- 원수(뇌): 군왕, 治本치본을 세워 정치를 하여야

- 복심(위): 大臣대신, 보필을 잘 해야

- 이목(귀와 눈): 大諫대간, 직언을 잘 해야

- 삼자가 서로 자가의 맡은 바 소임을 충실해야 성현정치가 실현됨

 

 

(2) 민본정치

- 민의 의미와 민본의 개념

 

  0 民민에 대하여, 맹자: 다른 나라에서 도래한 亡人망인

                 시경: 주나라에 의해 정복된 은나라의 亡人망인

  0 民민은 피정복민 혹은 피지배계층을 의미함. 동의어로 中人중인, 庶民서민, 百姓백성 등

  0 民本민본: 「서경」에 “백성을 가까이 하는 것은 옳으나 아래에 두는 것은 옳지 못하다. 백성은 오로지 나라의 근본이나 근본이니 근본이 견고하여야 나라가 편안하다.”

  0 퇴계: 백성이 나라의 근본임을 말함

    “군왕의 인성이 백성들에게 미쳐 백성이 부유하게 되고, 모든 통치가 백성들을 근본으로 하여 행하여지는 것”, 이에 “군왕이 天意천의, 즉 民意민의에 의해 추대되었으니 결코 민심(천심)을 거역하지 말며 항시 모든 治民치민의 법은 민을 위하고(爲民위민), 민에 근본을 두어(民本민본) 행하여야 한다.”

- 민본의 실현: 鄕約향약

   0 향약: 중앙으로부터의 통제와 교화보다는 지방자치의 도덕적 조직체로서 민간자치규약임. 미풍양속을 바로잡고, 사회통제기능과 협동단결의 기능을 통해서 鄕里향리를 고도의 정치적, 윤리적, 사회적 공동체 의식으로 다져간 것이다.

   0 퇴계는 ‘예안향약’을 완성하고, 「향립약조서」와 「약조」를 만들었다.

   0 중심 내용은?

     # 향리의 집결과 해체가 지도자의 도덕적 감화력에 달려있음을 강조

     # 사회적 부조리를 비판하면서 사회악과 대결하기 위해 향리가 단결하여 도덕적 견제력을 할 것을 권고함

     # 서로 협동하고, 가난한 자와 곤궁한 자를 相律상률할 것을 권함

     # 특히, 형리 자체 조직체가 관료의 부정부패를 규제하도록 함

     # 이는 향리자치적, 사회보장제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민본적 정치‧사회적 윤리관의 전형이라 할 수 있음

 

 

(3) 정책론

- 국방론

 

  0 당시 상황은?

    # 직선제 폐지, 토지겸병 및 수탈 관행 성행, 대역납포 및 방군수포의 전개 등으로 관기문란

    # 전제 및 군제의 파탄, 농민의 유랑

    # 거듭되는 사화를 통한 훈척세력과 사림세력간의 권력투쟁 ⇒ 국방체제 붕괴

  ※ 따라서 왜침 등에 소극적 대처(1592년 임진왜란, 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

  0 이에 대여진, 왜인과의 국교에 가능한 우호적인 통교를 유지하기 위한 양보 주장→ 그  이유는 내정 및 국방체제에 대한 위기 의식에 기인함

  0 국방, 군사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백성들의 안정이 화급함을 피력

 

 

- 대외정책

  0 유화정책→夷狄이적을 다스리는 방법

 

    ex) 倭人왜인의 사량진 침입(중종39년, 1544) 시에 조정이 삼포 일대의 왜관에 거주하는 倭人왜인들을 축출하고 倭왜와의 通交통교를 단절하는 보복적 조치에 대하여, 삼포의 왜인들과 倭왜舍사가 통교 복구와 왜관에의 다시 허락하여 달라고 요청→ 이에 대하여 이황은 부득이한 경우에만 무력을 써야 하며, 스스로 용서를 빌며 왜관에의 거주와 通交통교를 청하여 오는 왜인의 요청을 거절하지 말 것을 주장함

  0 夷狄이적 和親화친하는데는 우리가 주도권을 잡고 조종을 하고, 신축성 있게 대처하기도 하고, 可否가부를 결정하는 和親화친指導지도의 권한을 올바르게 행사하라.

  0 和親화친하는 이유는 왜와 여진 침략에 대한 불안감에서 비롯된 것임

※ 결론적으로 대외관계에서 청해 온 화친을 멀리하지 말 것→이를 통해 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함

<참고사항> 퇴계의 정치론

① 군주의 德性덕성 함양

- 완전한 인격을 구비한 성인이 군주가 되어 도덕적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최선책→조선의 세습군주제에서는 불가능

- 따라서 군주가 학문과 수양을 통해 성인이 되거나 혹은 그 경지에 가깝게 되도록 하는 현실적인 차선책 선택

② 賢能현능한 인재의 등용

- 정치는 군주 혼자 힘으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여러 신하들과 함께 해야 한다.

- 교만한 군주는 어진 이를 업신여기고 스스로 성인인체 하며, 혼자만의 지혜로 세상을 다스리려 한다고 함

- 따라서 현능한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정이 문란해진다. 정치의 성공여부는 인재등용에 있다.

③ 民生민생에 대하여

- 나라의 흥망이 백성의 불평에 달려 있고,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킬 대책을 세워야 한다.

- 정치란 백성들의 형편을 고려하면서 정책을 수행하는 것이다.

- 국가적 차원에서 인력을 동원하고 병적을 정비하는 것은 항상 급하고 중요하지만 흉년에 그것을 실행하는 것은 실효성이 없고 백성들의 부담만 가중한다. 민생의 배려 차원에서 풍년이 들고, 백성이 편안해질 때까지 연기하는 것이 의리에도 맞다.

이 시기에 23세의 이 율곡이 방문하여 道도를 물음사욕을 수잔한 유선악임

 

 

 

이이의 도학연구

 

도학은 송대 이후에는 인간의 심성을 온전하게 발현해 인격적으로 완성함으로써 성인을 이루는데 목표를 두고 있었다. 이른바 염락관민(濂洛關閩)의 학(성리학)이다. 퇴계는 이러한 성리학(주자학)을 대체로 그의 도학의 모본으로 삼았다. 율곡이 퇴계의 도학을 의양지미(依樣之味)가 있다고 말한 것도 그 때문이다.

퇴계의 도학은 철저히 수양론(修養論)으로부터 출발한다. 부정부패․부조리를 일삼는 훈구파들을 제어하고, 도학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원시유학에서처럼 말로 실천을 내세우는 것만으로는 설득력이 약하다고 보았다. “왜 그래야 하는가”를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늘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이에 심성론은 우주론과 연계시킨 것이다. 동양에서는 하늘을 ‘좋은 것’ ‘착한 것’으로 치부하고 그 착한 천도(天道)․천리(天理), 천성(天性), 천륜(天倫)을 인간의 심성에 끌어들여 이를 보존하고 악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存天理’, ‘遏人欲’해야 한다는 것이다. 존천리, 알인욕하려면 ‘경’(敬)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이란 마음이 한 군데로 전일해 이리 저리 헤매지 않는 것을 말한다. 주자는 이것을 ‘主一無迪’이라 했다. 인간은 천리와 인욕이 마음(方寸) 속에서 싸우는 존재이고, 그러므로 인간으로서 도덕적 완성을 기하려면 인욕을 제거하고, 본성 속에 있는 천리를 순조롭게 실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서경』의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대학』의 ’格致‘ ’誠正’, 『중용』의 ‘明善’ ‘誠信’ ‘眞知’ ‘實踐‘ 등도 그러한 목적으로 강조된 것이다.

퇴계의 주리론(主理論), 리동론(理動論)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며, 그 바탕에는 성선설(性善說)이 자리잡고 있었다. 퇴계는 선학들의 구구한 이론들을 일일이 검증해 보고, 되도록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되, 이치에 어긋나면 가차없이 배격했다. 퇴계는 철저히 주돈이(周敦頤)․장재(張載)․정호(程顥)․정이(程頤)․주희(朱憙) 등 송나라 유학자들의 이론을 조술하되, 자기의 기준에 맞지 않을 경우에 한해 독자적인 견해를 내놓았지 처음부터 뽀족한 주장을 내세우지 않았다. ‘博學’․‘審問’․‘愼思’․‘明辯’․‘篤行’의 학문태도를 견지한 것이다. 그가 주자학설을 수호하고, 불교나 양명학․노장 등을 이단으로 철저히 배격한 것도 그러한 결과였다.

퇴계는 본래 가문이 두드러진 사람도 아니며, 처음부터 도학만을 공부한 사람도 아니다. 처음에는 한적한 시골에서 자연을 벗삼아 풍월을 즐기던 시인이요, 문학도였다. 도연명(陶淵明)을 존경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런 그가 도학에 경도하게 된 것은 19세가 되던 1519년(중종 14)부터였다. 그는 이 때 『성리대전』의 첫째 권(「태극도설」)․마지막 2 권(「시」) 을 처음으로 얻어 읽고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즐겁고 눈이 열려 오래 읽을수록 점점 그 의미를 알게 되고, 마치 그 속으로 들어가는 길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고 한다. 그리고 1523년 (중종 18) 퇴계가 성균관 하재(下齋)에 유학했을 때 황상사에게서 『심경부주』 한 질을 종이를 주고 사서 반복 숙독해 의리의 학을 터득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 후 퇴계가 43세 되던 1543년(중종 38) 8월에 중종이 교서관에 명해 『주자대전』을 인간하라고 명했다. 이에 퇴계는 이를 옥당(玉堂)에서 철저히 교열한 다음에 출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 일을 전담했다. 퇴계는 더운 여름에도 문을 닫아걸고 종일토록 교정을 보았다. 주위 사람들이 그러다가 병이 나면 어쩌려느냐고 걱정하자 “이 책을 읽으면 문득 가슴이 시원해져서 스스로 더운 것을 알지 못하는데 병은 무슨 병이냐?”고 했다고 한다. 즉 『성리대전』․『심경부주』․『주자대전』 세 책을 정독하고 도학에 심취하게 된 것이다. 시골에서 태어나 별로 훌륭한 스승이나 친구도 없이 공부하다가 서울에 올라와 도학서를 접하고 심취해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공부를 하고자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다.

그의 도학 이론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우주론

퇴계는 주돈이의 ‘無極而太極’(무극이면서 태극이다)을 백세 도술의 연원이라고 했다. 그래서 「성학십도」에도 제 1도로 「태극도」와 「태극도설」을 실었고, 문생들에게도 늘 도학공부의 근거로 이를 강조했다. 또한 퇴계는 주자의 주장을 따라 태극은 리이고, 음양은 기이며, 리인 태극이 기인 음양을 생한다고 했다. 그러니 리와 기는 일물이 아닌 서로 다른 것(二元)이라 했다.

한편 퇴계는 리를 ‘所以然’과 ‘所當然’으로 나누고, 리는 ‘形而上者’로서 ‘聲臭’도, ‘方體’도, ‘內外’도, ‘情意’도, ‘計度’도, ‘造作’도, ‘作爲’도 없으나, 기는 ‘形而下者’로서, ‘輕重’․‘淸濁’․‘粹駁’․‘聚散’․‘屈伸’․‘至歸’가 있다고 했다. 리는 ‘無爲’인데 기는 ‘有爲’․‘有欲’이며, ‘生滅’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퇴계는 사물현상이 리와 기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둘 중에서 사물의 현상적 존재의 측면을 가리키는 것은 기이다. 그러므로 우주의 존재는 결국 기의 총화라고 할 수 있다. 기가 생멸하는 것이라면 기는 그 보다 앞선 기에 의해 생겼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一元之氣’, 또는 ‘開闢之氣‘라고 한다. 퇴계는 이 ’일원지기‘가 태극에 의해 탄생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기는 不相離, 不相雜이라고 한다. 그런데 리는 치우치지 않는데 비해 기는 치우치기 쉽고, 리가 기의 작용을 주재한다는 점에서 리우위설(理優位說), 리귀기천설(理貴氣賤說)을 부르짖었다. 리는 기가 있기 전에 있을 수 있지만 리가 없이 기만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퇴계는 리가 동(動)하면 기가 따라서 동한다고 했다. 그러나 리는 무위(無爲)라 했는데 리가 어떻게 동하느냐는 문제가 생긴다. 이에 대해 퇴계는 리의 체용설(體用說)을 제기한다. 리가 무위라고 하는 것은 리의 체(體)를 말한 것 뿐이요, 그 용(用)으로 말하면 리도 ‘動靜’,‘ 能’發, ‘能生’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주자의 리유동정설(理有動靜說)을 근거로 리동(理動)을 주장했다. 그러나 ‘理無爲’라 했는데도 불구하고 ‘理動’을 주장하는 근거는 충분치 못하다. 그런데도 ‘理動’을 무리하게 주장한 까닭은 무엇인가? 그의 수양론을 뒷받침하기 위해서였다.

2) 리기심성론

리기론은 수양론의 바탕인 심성론의 근원을 밝히기 위해 연구되었다. 천지의 리가 만물에 품부된 것이 ‘性’이라 한다. 따라서 천지의 리가 하나이므로 사람과 사물의 ‘性’은 다 같다. 그러나 기의 ‘偏正’에 따라 만물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인간은 ‘正氣’를 타고난 데 비해 사물은 ‘偏氣’를 타고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퇴계는 마음(心)은 ‘合理氣’요, ‘統性情’이라 했다. “고요하여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것이 ‘性’이나, 이 성을 담고 있는 것은 심이요, 활동해 만사를 대응하는 것은 ‘情’이나, 이 정을 베풀어 쓰는 것은 역시 심이다” 이 심통성정설(心統性情說)은 장횡거(張橫渠)에게서 유래한다. 그리고 마음에 ‘體用’이 있으니 ‘虛靈’은 ‘體’요, ‘知覺’은 ‘用’이라 한다. 성인은 리를 따르며 성을 실현하고 ‘靜’으로서 ‘動’을 제어하는데 비해 중인은 리가 기에 의해 지배당하고 동에 빠져 정을 무너트린다는 것이다. 이는 주련계(周濂溪)의 주정설(主靜說)을 따른 것이다. 마음에는 ‘未發의 性’이 갖추어져 있고, ‘已發의 情’이 나타날 때 ‘意’가 선․악이 갈리는 계기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사칠론(四七論)이다. 퇴계는 기고봉과 이 문제를 가지고 8 년 간 논쟁했다. 퇴계는 1553년(명종 8)에 추만(秋巒) 정지운(鄭之雲)의「천명도설」 중 천명도를 교정하면서 추만이 “四端發於理 七情發於氣”라 한 것을 “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로 고쳤다. 이에 고봉은 사단과 칠정이 다같이 ‘情’에 속하는 것인데, 4․7을 리․기에 상대시켜 보는 것은 ‘理氣不相離’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이라 공격했다. 퇴계는 제 1서에서 『주자어류』에 “四端是理之發 七情是氣之發”이라고 한 말을 들어 자기의 말이 맞을 뿐 아니라 정지운의 말도 틀린 것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고봉의 이론은 정암(整菴) 라흠순(羅欽順)의 리기일원론(理氣一元論)에 빠진 것이고, 기를 성으로 보는 폐단이 있다고 비판했다. 리기호발설(理氣互發說)과 리기일원론(理氣一元論)의 대결이다.

그러나 퇴계는 제 2서에서 고봉의 의견을 참작해 “四則理發而氣隨之 七則氣發而理乘之”라고 고쳤다. 고봉은 4․7을 “실지는 같으나 명칭만 다르다”고 했고, 퇴계는 차이가 없는데 명칭만 다를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고봉이 주자의 말까지 무시한데 대해 “성현의 글을 그대로 순순히 받아들이고, 자기의 고집을 버리도록 충고했다.

고봉은 제 3서에서 주자의 말은 좌우를 상대시켜 말하는 ‘對說’이 아니라, 사단을 칠정 속에 서 발라내어 상․하로 말하는 ‘因說’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서는 4․7을 “情之發也 或理動而氣俱 或氣感而理乘”으로 하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이에 대해 퇴계는 고봉이 기를 리로 보는 병통이 있다고 비판하고 더 이상 논전하지 말 것을 제안했다. 지나친 논쟁이 도학의 실천에 보탬이 되지 않고, 더 이상 주장하거나 양보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퇴계가 반론이 분분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리론을 고집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4대 사화로 혼탁해진 사회에서 훈구파를 제압하고 사림들이 정치를 주도해 갈 수 있는 도학정치의 이데올로기를 확립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천리가 인간에게 품부된 인성을 사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수양론을 확립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우주론과 심성론의 결합을 통해 하늘의 권위를 인간세계에 연결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군․사․부의 권위를 확립해주는 강력한 통치논리가 되기도 했다. 16세기 유학이 리기심성론을 중심으로 발달한 것도 그 때문이다.

3) 의리의 행

4단은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미루어 알 수 있는 인간의 본성이다. 이는 본능적인 ‘食色의 性‘과 구별되는 ‘善한 本性’이다. ‘性善’이 그것이다. 퇴계가 덕성 중 ‘仁’만이 의리의 행을 실현한다고 한 것은 ‘인’이 대표적인 ‘元德’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동중서(董仲舒)는 인의예지에 ‘信’을 보태 ‘五常’으로 하고, 주자가 ‘오상’을 ‘五倫’의 도리로 삼았다. 퇴계는 ‘오륜’을 ‘오상’의 본성(덕성)에서 나왔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본성(자연성)은 의리행의 도리라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윤리행위를 필연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사고이다. 다시 말하면 ‘所以然之理’와 ‘所當然之則’을 동일시하는 견해요, 인간의 도덕적 수양을 ‘純善’인 하늘(천도)로부터 연원하는 것으로 설정하고자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원래 본성=의리행의 도리라는 사고는 이미 이천(伊川) 정이(程頤)의 ‘性卽理’에서 정식화된 것이었다. 퇴계는 바로 이 이천의 주장을 계승해 리의 의미를 ‘所當然’과 ‘所以然’이 일치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本然之性’은 하늘에서부터 품부받은 것으로 본래부터 선하다. 그러나 ‘氣質之性’은 기질에 의한 본능적 욕구에 가려 ‘의리의 행‘과 반대되는 악으로 떨어질 수 있다. 퇴계는 기질 자체를 악하다고 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기의 ’有爲‘․’有欲’ 때문에 선․악으로 갈릴 수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存天理’ ‘遏仁欲’이 심학의 기본목표라는 것이다.

4) 거경궁리(居敬窮理)

그러면 어떻게 해야 ‘存天理’ ‘遏人欲’ 할 수 있는가? ‘敬’(居敬․持敬)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敬’은 주돈이의 ‘主靜’과 정이의 ‘主敬’에서 연원한다. 퇴계는 또한 ‘精一’을 하면 ‘존천리’ ‘알인욕’ 할 수 있다고 했다. ‘精一’(主一․集一)이란 정신집중을 뜻한다. ‘敬’의 태도이다. 그러므로 ‘경’은 ‘一心의 主宰’라는 것이다. ‘정일’을 하면 ‘誠’의 상태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 성실하고 반성할 때 리의 능력이 들어나서 ‘존천리’ ‘알인욕’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은 『서경』의 ‘惟精惟一 允執厥中’, 『中庸』의 ‘中’에서 비롯되었다. ‘중’은 심성의 미발(=本然之性)을 의미한다. 이것은 천하의 대본이다. ‘본연지성’은 태극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존천리’란 단순히 인간의 감성적, 합례적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주질서와 맞물려 있는 당위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리로서 하늘과 인간을 합일하는 ‘天人合一’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의리의 행‘으로서의 인륜을 실행하면 그 결과는 사회질서만 바로잡는데 그치지 않고, 자연질서와도 합치될 수 있다는 것이다.

퇴계는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에서 수신과 성찰을 강조했다. 인간을 공경하는데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공경하고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이 재해를 내려 견책한다는 것이다. 동중서(董仲舒)의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이 그것이다.

‘敬’은 ‘動時’와 ‘靜時’에 따라 실천방법이 다르다. ‘戒懼’는 마음이 아직 발동하기 전의 공부요, ‘體察’은 마음이 활동할 때의 공부이다. 경은 양자를 관통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고요함이 지나쳐 선(禪: 불교)이나 허무(虛無: 도교)에 빠지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퇴계는 수양방법으로서 ‘求放心’ ‘養德性’을 중시했다. 이는 내적인 마음의 수양이요, ‘三省’ ‘三貴’ ‘四勿‘ ’九容’ ‘九思‘는 외적인 마음의 수양이다. 이러한 ’경‘의 태도는 ’整齋嚴肅‘의 절도이며, ’主一無適‘의 자세요, ’其心收斂‘ ’常惺惺‘ ’求放心‘의 방법이다.

‘窮理’는 사물이나 일에 있는 리를 인식하는 것이다. 인식한다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 가지고 있는 지각능력으로 사물에 내재해 있는 법칙․원리로서의 리를 깨닫는 것이다. 마음은 ‘虛靈’과 ‘知覺’으로 나눌 수 있는데 ‘虛’는 리요, ‘靈’은 리기의 결합이라 한다. 마음의 허령한 본체가 사물에 기뜰여 있는 리를 인식한다는 것이다. ‘格物致知’가 그것이다. 이 때 마음의 지각작용을 ‘能覺’이라 하고, 지각대상이 되는 사물의 리를 ‘所覺’이라 한다. 퇴계는 처음에 마음의 지각활동이 사물의 리를 궁구하는 것이요, 대상의 리는 수동적으로 마음의 지각을 기다리는 것으로 이해했으나, 뒤에 기대승이 리자도설(理自到說)을 제기하자 ‘格物’은 내가 궁구해서 사물의 극처(極處)에 이르는 것을 말하지만, ‘物格’은 물리(物理)의 극처가 나의 궁구하는 바에 따라 인식되는 것이라고 바꾸었다. 이러한 인식론은 퇴계가 리의 주관성, 능동성을 인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철저한 객관적 관념론이다. 그런데 이 때의 사물의 리는 자연법칙적, 객관적 리라기 보다 시비․선악을 밝히는 가치론적인 리, 곧 도덕리(道德理)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퇴계의 인식론은 수양론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본체론까지 포괄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5) 양명학비판

퇴계의 철학은 주자학을 모본으로 했다. 따라서 주자학에 저촉되는 다른 사상은 철저히 배격했다. 무속․불교․도교는 말할 것 없고, 같은 유학 중에서도 육상산(陸象山)․왕양명(王陽明)의 ‘心’學과 라정암(羅整菴)․서화담(徐花潭)의 ‘氣學’도 배격했다. 무속은 고려 말에 안향(安珦) 등에 의해 배격되었고, 불교는 국초에 정도전(鄭道傳) 등에 의해 배척되었으며, 도교는 중종 조에 조광조(趙光祖) 등의 소격서 혁파로 배제되었다. 여기에 퇴계는 명나라에 유행하고 있는 양명학까지 배격한 것이다.

퇴계는 육상산의 학문을 “頓悟의 학문”이라 매도하고, 육상산이 窮‘理‘는 정신을 피로하게 한다고 하고 ‘問學’의 공부는 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그러니 “不立文字” “見性成佛”을 내세우는 선학(禪學)과 같은 이단이라고 했다. 퇴계는 백사(白沙) 진헌장(陳獻章)에 대해서도 그가 성현의 훈계를 완전히 저버린 것은 아니나 끝내 선학의 방법으로 전락했다고 부분적으로 비판했다.

이에 비해 양명학은 크게 잘못 되었다고 비판했다. 퇴계는 양명에 대해 “그 마음은 강하고 사나우며, 스스로 자기 주장을 내세우니, 말이 장황하고 휘황찬란해 사람으로 하여금 현혹되어 지키는 바를 잃게 하니, 인의를 해치고 천하를 현란시킬 자는 반드시 이 사람이 아니라 하지 못하리라”고 했다.퇴계는 「전습록논변」(傳習錄論辨)에서 양명의 심즉리설(心卽理說)을 맹열히 공격했다. 퇴계는 양명이 궁리공부는 하지 않고 곧바로 실천과 공효(功效)를 추구한다고 비판했다. 퇴계는 양명이 심의 본체에 입장에서 ‘心卽理’를 주장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공부와 인식의 과정을 무시하고 직접 본체로 나아가 두 가지를 뒤섞어 놓은 이론이라고 비난했다. 아울러 양명의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반대하고 지행병진(知行竝進說)을 지지했다.

 

 도통(道統)의 확립

 

도통이란 도학의 학통을 말한다. 도학이란 좁은 의미로 주돈이-장재-정호-정이-주희로 이어지는 송대의 성리학통을 의미한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는 한유(韓愈)의 「원도」(原道)에서 거론된 ‘堯-舜-禹-湯-文王-武王-周公-孔子-孟子’까지를 포함하고 그 이후에 도통이 끊어졌다가 주돈이에 의해 다시 이어진 것으로 되어 있다. 전자를 도학적 도통론이라 하고, 후자를 전통적 도통론이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도통론은 전자를 의미한다.

고려시대에는 최치원(崔致遠)․설총(薛聰)․안향(安珦) 등 세 사람만 문묘에 종사되었다. 그리고 1409년(태종 9)에는 성균관에서 이제현(李齊賢)․이색(李穡)․권근(權近)의 문묘종사가 논의되었다. 여기까지는 도학과 무관하다.

도학자의 문묘종사가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趙光祖 등 士林派가 정권을 잡았던 중종 초부터였다. 즉, 1510년(중종 5) 10월에 正言 李膂가 鄭夢周의 문묘종사를, 1517년(중종 12) 8월에 성균생원 권전이 金宏弼의 문묘종사를 요구한 것이 그것이다.

이 이후로 사림파들은 관학파를 제치고 정몽주-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를 조선도학계보(朝鮮道學系譜)로 부각시켰다. 정몽주와 길재는 절의로서, 김굉필과 조광조는 도학으로 거론되었다. 김종직은 사장(詞章)에 치우치고 ‘弔義帝文’을 지어 훈구파들의 배격을 받아 종사 대상에서 빠졌다. 김숙자는 길재와 김종직을 연결시키기 위해 일시 들어갔고, 김굉필은 조광조의 스승이라 들어갔으며, 정여창은 뒤에 김굉필의 친구로서 비슷한 공적이 있다고 해 들어갔다. 그러나 국왕과 훈구파들이 이들의 문묘종사에 소극적이어서 1517년(중종 12) 9월 17일에 정몽주만 문묘에 종사되었다.

그 후 1567년(선조 즉위년) 10월에 선조가 즉위하고 사림의 세상이 돌아오자 奇大升은 김굉필 이외에 조광조와 이언적을 표창․추존하자고 했고, 11월에 퇴계는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 등 이른바 4현을 현창할 것을 제안했다. 정여창은 훈구파와의 협상카드로 들어간 것 같다. 퇴계는 김굉필 조차도 ‘道問學’ 공부에 미진하다고 했고, 조광조도 학문이 충실치 못한데 개혁을 조급하게 서둘다가 사림파를 낭패하게 했다고 평하고 있다

그러나 조광조는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뜻이 좋다고 해 스스로 행장을 지어 그 업적을 높이 평가했으며, 이언적은 을사사화 때 재판관을 했다는 등 사림의 비난을 받는 사람인데도 역시 행장을 자진해 지어 도학에 기여한 공로를 높이 평가했다. 주자가 주돈이의 「태극도설」을 그의 주리론의 출발로 삼은 것처럼 퇴계는 이언적의 무극태극설(無極太極說)을 그의 주리론의 출발로 삼았다.

그러다가 1570년(선조 3)에 퇴계가 죽자 4현종사는 5현종사로 바뀌었다. 그러나 동서분당이 된데다가 선조의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610년(광해군 2) 7월에 드디어 5현종사가 실현되었다. 광해군은 정통성이 약한 군주였다. 적자도 장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림의 지지까지 받지 못하면 왕통을 지키기 어렵다고 여긴 것이다. 그리하여 정인홍(鄭仁弘)의 회퇴변척(晦退辨斥)이 있었기는 했지만 5현이 문묘에 종사되었고, 이로써 퇴계가 의도했던 대로 도통이 확립되었다. 그 결과 김안국(金安國), 노수신(盧守愼) 등 당대의 명유들은 도통에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퇴계가 살던 16세기 조선사회는 훈구파에서 사림파로 정권이 바뀌는 과도기였다. 퇴계는 조광조가 주창하던 도학정치가 기묘사화로 좌절되자 사림세력을 결집하고 재훈련시키기 위해 도학 이론을 정립하고, 도통을 확립하며, 鄕約을 실시하고 서원을 설립했다. 물론 이러한 일은 퇴계 혼자 한 것은 아니다. 김굉필․정여창․조광조․조식 등은 도학 실천에, 이언적․이황․이이․기대승 등은 도학 이론을 정립하는데 공헌했다. 그리하여 사림정치의 이론적 틀이 정립된 것이다. 훈구파의 부정부패를 비판하고 사림들의 청신한 선비문화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리기심성론의 정립이 필요해서였다. 착한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마음에 품부된 착한 마음을 ‘敬’을 통해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는 스스로 천도를 실천에 옮기는 ‘修己’를 우선해야겠지만, “왜 그래야 하는지를 이론적으로 밝힐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퇴계가 일찍부터 도학 연구에 앞장 선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시골에 있는 한미한 가문에 태어난 문학도로서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과거시험을 보아 벼슬살이를 한 과거관료였다. 그러나 벼슬을 하기 위해 서울을 드나드는 길에 『성리대전』․『심경부주』․『주자대전』 등의 도학서를 구해보고 도학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43세 되던 1543년(중종 38)부터 벼슬을 버리고 도학 연구에 몰두하려 했으나, 사림정치를 구현하려는 국왕과 유신들에 의해 유종(儒宗)으로서 계속 관직에 부뜰려 있었다. 그리하여 정 1품 벼슬까지 지내면서, 사직과 출사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뜻은 이미 고향에 물러나 도학 연구와 제자양성, 저작활동에 몰두하는데 있었다. 퇴계는 37년 간 관직세계에 있으면서 부단히 사직소를 올렸다. 병 때문이기도 하지만 도학 탐구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70 평생 많은 책을 썼고, 많은 제자를 길렀다. 도산서당은 그 중심지가 되었다. 이에 퇴계는 관직의 극품을 받았고, 두 세 번 위기는 있었으나 귀양 한 번 간 적이 없으며, 당쟁이 있기 전이라 전국의 인재를 제자로 맞아들일 수 있었다. 도산서당과 같은 경치 좋은 곳에 교육장을 마련해 제자들과 함께 청량산(淸凉山)을 오르내리며 도산12곡을 부를 수 있었다. 이만하면 퇴계는 ‘完人’이라 할 수 있다.

퇴계의 도학은 수양론으로부터 출발한다. 문치주의, 사림정치의 근본은 심성을 깨끗이 하는 것이었다. 본래 마음은 천리를 품부받아 착하다고 본다. 성선설이다. 이 착한 마음이 하늘에서 온 까닭에 주리론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심성론을 우주론에 연결시킨 것이다.

퇴계의 도학은 주돈이-장재-정호-정이-주희를 잇는 송대 도학자들의 이론을 이어받았다.(도학적도통론) 그 중에서도 특히 주희의 이론을 조술했다. 자기의 이론과 다르지 않는 한 그러했다. 율곡이 퇴계의 유학을 ‘依樣之美’가 있다고 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적 성리학을 확립하는데 필요한 부분은 과감하게 자기 이론을 개진했다.

퇴계는 주렴계의 ‘無極而太極’(무극이면서 태극이다)을 백세 도술의 연원이라고 했다. 그리고 태극은 리이고, 음양은 기라고 한 주자의 말을 지지했다. 퇴계는 리에는 ‘所以然’과 ‘所當然’이 있으며, 리는 ‘形而上者’로서 ‘無爲’인데 비해, 기는 ‘形而下者’로서 ‘有爲’라고 했다. 또한 리기는 ‘不相雜’, ‘不相離’라고 해 리기가 섞여 있어서 분개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리는 치우치지 않는데 기는 치우치기 쉽고, 리는 기의 작용을 주재한다는 점에서 리우성론(理優位論), 리귀기천론(理貴氣賤論)을 주장했다.

퇴계는 ‘理動’을 주장한다. ‘四端’은 리가 발한 것으로 ‘純善’이요, ‘七情’은 기가 발한 것으로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사단칠정론이다. 그런데 고봉이 리는 ‘無爲’인데 어떻게 동하느냐고 비판하자, 리의 ‘體用論’을 내세운다. 즉, 리가 ‘無爲’라는 것은 리의 ‘體’를 말한 것이요, 그 ‘用’으로 말하면 리도 ‘動靜’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퇴계가 반론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주리론, 리동론을 주장한 까닭은 무엇인가? 훈구파의 부정부패를 바로잡기 위해 수양론을 강화할 필요가 있어서이다.

착한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敬’을 해야 한다고 했다. ‘存天理’ 遏人欲‘이 과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경의 태도는 ’整齊嚴肅‘의 절도이며, ’主一無迪‘의 자세요, ’其心收斂‘․’常惺惺‘․’求放心‘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경은 인간을 공경하는데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공경하고 두려워해야 하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이 그것이다. 임금이 실덕하면 하늘이 재이를 내려 ’天譴‘을 한다는 것이다. ’敬天‘, ’畏天‘ 사상이다. ‘戒懼’는 마음이 동하지 않은 고요할 때의 공부요, ‘體察’은 마음이 동할 때의 공부이며, 경은 양자를 관통한다고 했다.

‘窮理’는 사물이나 일에 있는 리를 인간의 마음이 가지고 있는 지각능력으로 인식하는 것이라 한다. 퇴계는 처음에 마음의 지각활동이 사물의 리를 궁구하는 것이고, 대상의 리는 수동적으로 마음의 지각을 기다리는 것으로 이해했으나 고봉의 리자도설(理自到說)을 듣고는 ‘格物’은 내가 궁구해서 사물의 극처에 이르는 것을 말하지만, ‘物格’은 물리의 극처가 나의 궁구하는 바에 따라 인식되는 것이라고 바꾸었다.

퇴계는 주자학에 반대되는 무속․불교․도교 뿐 아니라 같은 유교 중에서도 육왕학, 서경덕의 ‘氣學’, 라흠순의 리기일원론 등을 이단으로 몰아 배격했다. 이러한 순정주자학은 주자학을 이데올로기로 확립하는데는 성공했으나, 주자학의 독선화, 교조화가 조선후기 사상의 유연성을 떨어트려 근대화에 적응하는데 저해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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