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의대해서

통일신라의대해서

작성일 2006.09.10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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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거 너무너무 급합니다

1시간내에 답변주실수있죠?

 

통일신라인물.역사등을 조사해야 하는데요~~

3ㅇ분내에 해주시면 정말정말 고마워요~~

 

 

빨리    해 주세요         A4용지에 3장이 꽉채우도록 좀 짧게요   그럼 부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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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신라시대

 

통일신라의 발전과 포천

 

당의 침략의지를 분쇄하는 과정에서 신라는 일종 민족융합정책을 착실히 다져 나갔다. 이는 종래 서로의 영역을 다투는 삼국시대의 그것과는 다른 것으로서 우리 민족에 있어서 새로운 변화였다. 사실 한민족(韓民族)이라는 의식이 신라의 삼국통일, 그리고 당나라와의 항쟁으로부터 상정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라고 할 것이다.

 

먼저 무열왕은 백제를 멸한 동왕 7년(660)에 백제의 관리들을 신라의 관직에 임용하였다. 곧 좌평 충상(忠常)과 상영(常永), 달솔 자간(自簡)에게 일길찬의 관등을 내려 총관(總管)에 임명하고, 은솔 무수(武守)와 인수(仁守)에게는 대나마의 관등을 내려 각각 대감(大監)과 제감(弟監)의 관직에 보하였다. 또한 문무왕 1년(661)에는 신라가 우술성(雨述城)을 공격하였을 때 무리를 이끌고 항복해온 조복(助服)에게 급찬의 관등을 내려 고타야군(古陀耶郡)의 태수에 임명하고 파가(波伽)에게도 급찬의 관등과 전택(田宅) 의물(衣物)을 내리는 등 자못 백제의 인재를 신라의 정치체제에 수용하려 하였다.

 

백제인에 대한 융화정책은 고구려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신라는 당나라와의 전쟁을 벌이는 가운데 오히려 적극적으로 고구려 부흥군을 원조하거나 함께 힘을 합해 당나라 군대와 싸우는 한편으로, 신라에 합류하는 고구려 유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하였다. 곧 670년 3월에는 신라의 설조유(薛鳥儒)와 고구려부흥군의 고연무(高延武)가 힘을 합쳐 압록강 너머 말갈군과 당군을 공격하였는가 하면, 같은해 6월에 고구려 검모잠(劍牟岑)이 많은 유민을 거느리고 내부해오자 이들을 금마저(金馬渚, 전북 益山)에 안주시키고, 8월에는 안승(安勝)을 고구려왕에 봉하여 이들 고구려 유민을 다스리게 하였다. 그 후 674년에 안승을 다시 보덕국왕(報德國王)에 봉하고 680년에는 왕의 조카딸을 그에게 시집보내는 등, 이들 유민을 융화시키는 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처럼 백제 고구려유민을 융화시키고자 하는 노력은 신라가 고구려유민과 합세하여 당나라와 싸우는 과정에서 당시 신라의 중추적 군사조직인 9서당(九誓幢)을 백제 고구려 말갈민으로 구성한 것이나, {삼국사기} 직관지 외관조에 실린 백제 고구려 관등에 관한 기사에 잘 나타난다.

 

곧 9서당은 진평왕대에 설치된 서당(誓幢, 綠衿誓幢)과 낭당(郎幢, 紫衿誓幢)만의 조직을 당나라와 싸우는 과정에서 확대 개편한 것으로서, 앞의 두 부대(녹금서당, 자금서당)와 장창당(長槍幢, 緋衿誓幢)은 신라인으로, 그리고 문무왕 12년(672)에 설치한 백금서당(白衿誓幢)은 백제민으로, 신문왕 3년(683)에 설치된 황금서당(黃衿誓幢)과 흑금서당(黑衿誓幢)은 각각 고구려민과 말갈인으로, 신문왕 6년(686)년의 벽금서당(碧衿誓幢)과 적금서당(赤衿誓幢)은 보덕성민(報德城民)으로, 그 이듬해의 청금서당(靑衿誓幢)은 백제민으로 구성하였음을 주목할 수 있다. 이들 9서당은 처음에 신라민 중에서 모집한 군사들로써 조직된 부대였으나, 뒤에 백제 고구려를 병합하는 과정에서 병합 지역의 백성들로 조직된 부대를 증설하여 9서당을 완성하였던 것이다. 이는 앞에서 살핀 백제 고구려민을 신라의 통치권역에 통섭하려는 신라 중대 왕권의 의지이기도 하려니와, 기왕의 귀족적 성격이 강한 6정 군단의 그것과는 달리 귀족의 세력과 관련이 없는 이들 군단을 강화함으로써 중대의 강력한 왕권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백제 고구려 관직자 등에 대해서도 신라의 관등 관직을 사여함으로써 새로이 복속된 양국의 유민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인의 경우 문무왕 13년(673)에 백제에서 온 사람들에게 내외의 관직을 수여하였는데, 그 관등의 서열은 백제에서 누렸던 관직에 준한 것이었다. 고구려인의 경우에도 신문왕 6년(686) 고구려에서의 관직에 준하여 모두 경관직을 내렸지만, 백제의 경우보다는 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이러한 조치는 신라의 핵심부대인 9서당의 2/3를 새로이 정복한 지역의 백성들로 구성한 것과 흐름을 같이 하는 것으로서, 고구려 백제인을 막론하고 신라가 이들을 통치권역 안에 이끌어들이려는 의도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통일 이후에 신라사회에 팽배한 삼한일통의식(三韓一統意識)은 바로 그러한 반영이었다.

 

한편 1세기에 걸친 삼국의 통일전쟁은 신라 사회에 있어서 지방민의 역할을 크게 증진시켰다. 곧 계속되는 전쟁의 과정에서 신라 군단의 핵심을 이루는 왕경인의 중앙군으로만은 전쟁에 필요한 인적 자원을 충당할 수 없었던 까닭에, 촌주들을 중심으로 하여 많은 지방민을 군대에 동원하였다. 그러나 주지하듯이 중고기 무렵 신라의 지방민은 왕경인과는 구별되는 신분체계에 놓여 있었다. 군대는 진골 귀족들의 특권을 보장하는 의미에서 왕경인만으로 조직되었고, 지방민은 이를 대신하여 부역이나 각종 조세를 바치는 존재였으며, 사회적 출세를 보장하는 관등의 체계에 있어서도 왕경인이 경위를 받는 데 대해 지방민은 외위를 받음으로써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엄격히 구분되었다. 이른바 골품체제하에서 신분의 규제는, 중앙과 지방의 경우에도 매우 차별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통일전쟁에 수많은 지방민이 참여하여 군공을 세우고, 이미 전쟁 중인 7세기 중엽에 지방의 촌주층 가운데 외위 대신에 경위를 받는 이들이 생겨났다. 이러한 현상은 결국 외위제의 소멸이라는 결과를 빚어냈고, 그것은 통일전쟁으로 말미암아 신라 사회 자체에서 중앙민과 지방민을 차등하는 규제가 해소되고 있음을 의미하며, 중앙과 지방의 갈등을 없애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변화는 불교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종래 귀족이나 왕실의 특권을 보장하는 이념으로서 기능을 하였던 불교는, 마음이 곧 부처이며 모든 중생은 성불할 수 있다는 이념을 제공함으로써 신앙적으로 신분을 뛰어넘게 하는 사상체계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곧 7세기 이후의 보살사상에 입각한 보살계와 불성론, 아미타신앙 등은 종래의 업설 등과는 사유체계를 달리하는 것이었으며, 특히 불상의 조성 등과 같은 공덕을 쌓지 않고도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염불만으로도 윤회하지 않고 극락에 왕생할 수 있다는 아미타신앙은 일반민들에게 폭넓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불교사상의 유포는 통일 직후 민심을 수습하려는 국가의 의지와도 짝하는 것이었고, 사실 이러한 국가적 노력들이 있어 왔다. 곧 문무왕의 서제(庶弟)인 거득공(車得公)이 재상의 직위를 사양하고 민심을 알아 본 뒤에 재상직에 나아가겠다는 것이나, 문무왕이 도량형을 개혁한 일, 그리고 부세를 면제하고 농상을 장려한 것 등은 모두 그러한 국가의 의지의 표현이었다.

 

당을 축출하고 새로이 정복한 지역의 민심을 아우르는 한편 신라는 신문왕 원년(681) 김흠돌(金欽突)의 난을 평정하고 귀족들에 대한 일대 숙청을 단행하였다. 이는 전제적 성격의 강력한 왕권의 확립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중고기의 통치방식 곧 귀족중심의 합의제적 정국운영 방식을 고수한 김흠돌 등의 세력에 대하여 중대의 왕권이 삼국통일 이후에 일어난 각종 사회적 변동을 수용하기 위해 이들 세력을 배제하고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변혁을 모색하기 위한 조처였다고 생각된다. 신문왕대에 취해진 개혁 정치의 일단은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곧 신문왕 원년(681) 시위부를 확대 개편하여 6명의 장군(將軍)을 새로이 설치한 것이나 신라의 중앙 핵심군단으로 9서당을 점차적으로 정비한 것 등은 김흠돌의 난을 평정한 바탕위에서 가능했던 것으로서, 종래의 진골 귀족의 귀족적 전통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신문왕은 군사조직을 왕권 직속으로 만드는 한편,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국학을 정비하고 이들을 관료로 선발하는 관사로서 위화부(位和府)를 설치하였으며, 저들에게 문무관료전을 지급하고 다시 귀족들의 경제적 바탕이라 할 수 있는 녹읍(祿邑)을 혁파하였다. 관료의 양성과 선발제도의 정비 및 일단의 토지개혁은, 귀족들의 특권을 아우르고 학문적 소양에 바탕을 둔 새로운 관료군을 양성함으로써 왕권의 지지기반을 보다 확충시키고자 한 때문이었다.

 

 

한편 신문왕은 지방제도에 있어서도 개혁을 단행하였다. 곧 신문왕은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정비하였는데, 이는 중고기 신라의 주군제를 확대 개편한 것으로서 이해되고 있다. 먼저 소경(小京)은 통일 이전부터 아시소경(阿尸小京, 安康, 514), 국원소경(國原小京, 忠州, 557), 북소경(北小京, 江陵, 639)은 이미 설치한 바 있었으나, 왕경(경주)이 동쪽 한쪽 끝에 너무 치우쳐 있다는 결함을 보완하기 위하여 다시 정비한 것이었다. 곧 신문왕 5년(685)에 이르러 진흥왕 때에 충주지방에 설치된 국원소경을 중원소경(中原小京)으로 이름을 바꾸는 한편, 문무왕 때의 북원소경(北原小京, 原州, 678) 및 금관소경(金官小京, 金海, 680)과 함께 서원소경(西原小京, 淸州), 남원소경(南原小京)을 새로이 설치함으로써 여타 관제개혁과 함께 동 서 남 북 중의 방향에 맞추어 정리하였다. 이에는 중앙의 귀족 뿐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한 국가의 중앙 귀족들을 강제로 사민시킴으로써 지방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담당케 하였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한편 5소경의 정비와 함께 전국을 9주로 나누어 지방통치기반을 정비하였다. 곧 9주는 중국의 옛 우왕(禹王) 때의 9주에서 모범을 취한 것으로서, 옛 신라 고구려 백제의 3국을 기준으로 하여 각각 그 땅에 3개의 주(州)를 설치한 것이었다. 이들 주에는 총관(摠管)이 임명되었으며, 주 밑에는 전국에 117개 내지 120개의 군과 293 내지 305개의 현이 있었다. 군과 현에는 그 장관으로 각각 군태수(郡太守)와 소수(少守) 혹은 현령(縣令)이 임명되었는데, 모두 중앙으로부터 파견된 이들이었다.

 

이 무렵 우리 포천 지방은 한산주(漢山州) 마홀군(馬忽郡)으로서 내을매현(內乙買縣)과 양골현(梁骨顯)의 두 개 영현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 후 경덕왕 16년(757) 한화정책(漢化政策)으로 그 명칭이 한주(漢州) 견성군(堅城郡)으로 바뀌고 영현 또한 사천현(沙川縣)과 통음현(洞陰縣)으로 각각 개칭되었다. 신문왕의 지방제도의 장비나 경덕왕 때의 한화정책은 전제주의의 강화, 중앙집권의 강화를 뜻하는 것이지만, 우리 포천 지방으로서는 북방에 대한 일종 전진 기지로서의 성격을 띠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신라가 문무왕 15년(675)의 매초성전투와 그 이듬해의 지벌포해전을 획기로 하여 당나라의 침략야욕을 분쇄함으로써 원산만에서 대동강을 잇는 국경을 확정하였다고는 하나, 임진강 이북으로부터 예성강 이남에 이르는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한 것은 통일 후 상당한 기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곧 신문왕대에 새로이 편성한 9주 5소경제나 9주의 행정구획에 따라 일종 군관구적 조직으로 짜여진 10정(停) 군단에 있어서도 대체로 임진강 이북 지역은 방치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신문왕 이후 효소왕 3년(694) 송악(松岳, 황해도 開城?) 우잠(牛岑, 황해도 金川)의 두 성을 쌓고 성덕왕 12년(713) 12월에 개성(開城)을 쌓은 것, 그리고 성덕왕 17년(718) 한산주 도독의 관내에 여러 성을 쌓았다는 것은 7세기 말 8세기 초엽에 이르러서야 이들 지역에 대한 지배권이 확립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라가 당을 축출한 이후에 그 지배권이 미치는 지역은 대체로 예성강 이남 지역에 한정된 것이었고, 여기에서 황해도로부터 한산으로 향하는 길목에 해당하는 연천 포천 지역은 당시의 북방기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성덕왕 34년(735) 당으로부터 패강 이남의 땅에 대한 영유권을 인정받게 되는데, 이는 732년 발해의 무왕이 당나라 산동성 등주(登州)에 침공하자 당 현종의 청에 의하여 일시 신라의 군대를 파견한 데 대한 대가로서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성덕왕 35년 이찬 윤충(允充)과 사인(思仁) 영술(英述) 등으로 하여금 평양(平壤, 北漢山郡, 楊州) 우두(牛頭) 2주의 지세를 살피도록 한 것은 이와 같이 새로이 영유권을 확보한 북경 일선 지역에 대한 점검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그 후 경덕왕 7년(748) 예성강 연안 일대에 대곡군(大谷郡, 平山) 등 4개 군현을 설치하고, 다시 동왕 21년(762)에 그 북쪽 지역에 6개 군현을 증설한 신라는, 선덕왕 3년(782)에 종전의 북변 수비의 중심이었던 대곡성(大谷城)을 승격하여 패강진을 설치하고, 왕이 직접 한산주에 순행하여 민호를 패강진(浿江鎭)에 옮기게 하였다. 그런데 패강진은 대체로 신라 통일기의 9서당이나 6정에 준하는 군관조직으로 이루어졌지만, 지역 단위로서의 행정적 성격을 지니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패강진의 설치는 새로운 위협세력으로 등장한 북방의 발해 말갈족에 대한 방위책으로서 이루어진 것이며, 일시적인 군대의 파견이 아닌 개척 농민을 투입하여 평화 무장케 하는 형태로 유지 운영하였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신라는 헌덕왕대에 다시 북방으로 진출하여 취성군(取城郡, 黃州) 및 그 영현 3개을 신설함으로써 신라의 국경을 대동강 남안까지 확장하였다. 사실 헌덕왕 18년(826) 7월에 "우잠(牛岑, 황해도 金川) 태수 백영(白永)에게 명하여 한산(漢山) 이북의 제 주군 인민 1만 명을 징발하여 패강(浿江, 禮成江) 장성(長城) 300리를 쌓게 했다"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사는, 신라가 이제는 예성강 이북 북방경영을 마무리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특히 경문왕 5년(865)에 조성된 철원군 [도피안사비로자나불조상기(到彼岸寺毗盧遮那佛造像記)]의 "신라국 한주 북계 철원군 도피안사(新羅國 漢州 北界 鐵原郡 到彼岸寺)"란 구절에서 철원을 한주의 북계로 명시하고 있어서, 패강진은 한주와는 별도의 행정구역으로 취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철원이 한주에 속하였다면, 그와 인접한 포천 지역은 이미 북방 경영이 마무리된 헌덕왕 18년 북방 장성의 축성을 위한 역역동원을 마지막으로 종래의 북방 전진기지로서의 임무를 끝내고 이제는 한주의 소속 군현으로서의 역할을 하면 될 뿐이었다.


(출처 : '통일신라의 발전과 포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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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신라란..

 

 

삼국을 통일한 676이후의 신라.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 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뒤 당나라 군사를 축출 하여 삼국을 통일 하엿다.

통일 신라를 완성 시킨 왕은 무무왕이다...(무열왕의 아들)...

통일신라때의 문화재는..

성덕 대왕신종(에밀레종)

불국사(다보탑, 석가 탑등)

설굴암 본존불

무구정광 대다라니경

강은 사지 석탑 등이 잇다^^..

(660년 백재 멸망),(668년 고구려의 멸망),.

 

 

 

            

 

 

 

          ㅈㅅ.. 전 숙제 이렇게 해갓거든요??ㅎㅎ

님아 힘내세요..

화이티이잉.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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