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부여의 유적지를 알려주세요

공주,부여의 유적지를 알려주세요

작성일 2010.10.25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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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학교에서 수학여행 비슷한거 하는데

공주하고 부여가거든요 그래서 말인데

공주하고 부여의 유적지 좀 알려주세요.

되도록 빨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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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의 유적지)

 

1.공산성

 

종 목 사적 제12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산성동 2외

시 대 삼국시대

 

공산성은 백제의 수도가 공주에 있을 때, 공주를 지키던 백제의 산성이다.

 

금강변 야산의 계곡을 둘러싼 산성으로, 원래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고쳤다. 쌓은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며, 백제 때에는 웅진성으로,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공산성으로,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렀다.

 

4방에 문터가 확인되는데,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가 남아있고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아있다. 암문·치성·고대·장대·수구문 등의 방어시설이 남아 있으며, 성 안에는 쌍수정·영은사·연지·임류각지, 그리고 만하루지 등이 있다. 또한 연꽃무늬 와당을 비롯하여 백제 기와·토기 등의 유물들과 고려·조선시대의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백제 멸망 직후에 의자왕이 잠시 머물기도 하였으며,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지이기도 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김헌창의 난(822)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며, 조선시대 이괄의 난(1623)으로 인조가 피난했던 곳이기도 하다.

 

백제 성왕 16년(538)에 부여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의 백제 도성이었으며, 이후 조선시대까지 지방 행정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역사적 가치가 크고 연구할 가치가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2.송산리 고분군

 

종 목 사적 제13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금성동 산5-1

시 대 백제

 

공주시 금성동에 있는 웅진 백제시대 왕들의 무덤이 모여있는 곳이다.

 

무령왕릉을 포함한 이 일대의 고분들은 모두 7기가 전해지는데, 송산을 주산으로 뻗은 구릉 중턱의 남쪽 경사면에 위치한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서쪽에는 무령왕릉과 5 ·6호분이 있고 동북쪽에는 1∼4호분이 있다. 1∼6호분은 일제시대에 조사되어 고분의 구조와 형식이 밝혀졌고, 무령왕릉은 1971년 5 ·6호분의 보수공사 때 발견되었다.

 

먼저 1∼5호분은 모두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무덤 입구에서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널방(현실)에 이르는 널길이 널방 동쪽벽에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1∼4호분은 바닥에 냇자갈을 깔아 널받침(관대)을 만들었는데, 5호분은 벽돌을 이용하였다. 이처럼 같은 양식의 무덤이면서 구조와 규모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나는 것은 시기 차이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5호분은 원형으로 남아 있으나, 1∼4호분은 조사되기 전에 이미 도굴되었다. 이외에 벽돌무덤(전축분)으로 송산리벽화고분이라고도 불리는 6호분과 무령왕릉이 있다.

 

6호분은 활모양 천장으로 된 이중 널길과 긴 네모형의 널방으로 되어 있는데, 오수전이 새겨진 벽돌로 정연하게 쌓았다. 널방 벽에는 7개의 등자리와 사신도 · 일월도 등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무령왕릉도 6호분과 같이 연꽃무늬 벽돌로 가로쌓기와 세로쌓기를 반복하여 벽을 쌓았다. 벽에는 5개의 등자리가 있고, 무덤주인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지석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6호분과 무령왕릉은 현재 남아있는 백제의 벽돌무덤으로, 모두 터널형 널방 앞에 짧은 터널형 널길을 가지고 있으며 긴 배수로도 갖추고 있다. 이러한 형식의 벽돌무덤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벽화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무령왕릉의 경우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어, 백제사회의 사회 ·문화상을 연구하는데 절대자료로 평가된다.

 

 

3.학봉리 도요지

 

종 목 사적 제333호

지 정 일 1990.08.21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산22-1외

시 대 조선시대

 

요지란 도자기, 기와, 그릇 들을 만들어 굽던 가마터를 말한다. 유성에서 동학사쪽으로 들어가면 신도안과 동학사로 가는 길이 있는데, 그 일대 계룡산 기슭에 여러 곳의 가마터가 분포한다. 그 중 이 학봉리 도요지가 중심이 되며, 15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시대에 조사된 보고서에 의하면 가마는 산록의 경사면에 여러 개를 축조하였고, 구조는 땅을 약간 파 길다란 구덩이를 만들고 천장과 벽을 진흙으로 둥글게 쌓아올린 형태라고 한다. 철화분청자·귀얄청자·백자 등이 출토되었고 그 가운데 철화분청자가 대표적이다. 그릇의 종류로는 대접·접시·술병·주전자 등 다양하며, 새겨진 무늬는 국화무늬·연꽃무늬·물고기무늬·새무늬 등 다양하다.

 

철화분청자의 대표적인 생산지로서 그 의미가 크며, 자유분방하고 대담한 무늬를 새긴 것으로 유명한 가마터이다.

 

 

4.석장리 구석기유적

 

종 목 사적 제334호

지 정 일 1990.10.31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장기면 장암리 98외

시 대 석기시대

 

대전에서 공주로 가는 금강가에 있는 구석기시대의 유적이다. 구석기시대란 인류가 돌을 깨뜨려 도구로 사용하고 사냥이나 물고기잡이, 식물채집을 통해 생활한 문화단계를 말하는데, 인류가 태어나 1만년 전까지의 시기로 보고 있다.

 

찍개·긁개·주먹도끼·새기개 등의 석기류가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후기 구석기층의 집자리에서는 숯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으로 연대측정을 한 결과 약 2만 5천년에서 3만년전으 집터임이 확인되어, 당시에 사람들이 이곳에서 생활하였음을 알았고 전후 시기에도 살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꽃가루를 조사한 결과 이 일대에 소나무·전나무·목련·백합을 비롯한 다양한 식물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져 구석기시대의 자연환경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우리나라 구석기시대에 사람이 살았음을 처음으로 알게해 준 중요한 유적이다.

  

5.우금치 전적지

 

종 목 사적 제387호  

지 정 일 1994.03.17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금학동 산78-1외

시 대 조선시대

 

우금치 고개는 1894년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을 상대로 연합군을 상대로 최후의 격전을 벌인 장소이다. 공주에서 부여로 넘어가는 견준산 기슭의 고개로 우금고개, 우금재 또는 비우금 고개라고도 부른다.

 

1894년 9월,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과 경제적 약탈을 규탄하며 반봉건·반외세의 기치를 내걸고 재봉기를 했다. 일단 우금치를 장악하면 중부지역의 거점인 공주 점령의 기선을 잡을 수 있는 중요한 곳이었다. 공주를 중심으로 향후 전쟁을 이끌어 나가려던 동학농민군은 죽검으로 총에 맞서 싸우다 결국 거의 전멸하게 되었다.

 

우금치 싸움 후, 재기를 노리던 전봉준이 체포되어 이듬해 3월 처형됨으로써 1년 동안 전개된 동학농민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동학군의 넋을 달래기 위해 1973년에 이 고개의 동학혁명위령탑이 세워졌으며, 동학농민전쟁 100년이 지난 1994년 이르러 우금치는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동학농민전쟁은 비록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역사발전의 큰 계기가 되었다.

 

우금치는 동학농민군이 반봉건·반외세 기치를 걸고 마지막 항전을 이루어냈던 장소로, 한국 근대사의 한고비를 이루는 무대가 된 뜻깊은 장소이다.

 

 

6.수촌리 고분군

 

종 목 사적 제460호

지 정 일 2005.03.03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의당면 수촌리 201 외 일원

시 대 백제

 

공주수촌리고분군은 공주시에서 계획한 의당농공단지 조성 예정부지에 대한 지표조사 후 유적의 존재가 확인되어 해당지역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 각종유물이 발견되었다.

 

공주수촌리고분군 일대에서는 청동기시대 주거지, 초기철기시대 토광묘, 백제시대 부묘(대형토광목곽묘, 횡혈식 석실분, 수혈식 석곽묘)등이 조사되었다.

 

초기철기시대 토광묘는 세형동검과 검파두식(검자루끝장식) 등 다양한 청동제품과 점토대토기(점토띠토기), 흑고장경호 등 토기가 매장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 초기철기시대 묘제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백제시대 분묘는 공주지역 백제고분의 변천과정을 파악하는데 좋은 자료일 뿐만 아니라 출토된 유물이 백제의 웅진천도 이전에 조영된 것으로 짐작되어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 금동관과 금동신발, 금제이식, 환두대도(고리자루큰칼), 중국제 흑유도기, 흑유 계수호(닭머리모양 주전자)등 위세품으로 판단되는 유물들이 함께 부장되어 있어 피장자의 신분이 당시 공주지역 유력자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이는 한성 백제시대의 중앙과 지방의 상호관련성을 보여주는 백제사의 중요한 자료이다.

 

 

7.공북루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7호

지 정 일 1976.01.08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금성동 165

시 대 조선시대

 

공산성의 북문으로 강남과 강북을 오가는 남북통로의 길이다. 조선 선조 36년(1603)에 관찰사 유근이 쌍수산성을 고쳐 세우면서, 이 자리에 있었던 망북루를 다시 지어 공북루로 고쳐 부르고, 그 옆에 월파당을 지었다고 한다. 현종 4년(1663) 관찰사 오정위가 낡은 것을 다시 지었으며 기록은 송시열이 하였다. 월파당은 효종 5년(1654)에 붕괴되어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앞면 5칸·옆면 2칸으로 규모가 큰 누각 건축이어서, 윗층에는 누마루를 깔았고 아랫층은 통행로로 쓰고 있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고, ‘공북루’라고 쓴 현판은 성의 안쪽에 해당하는 추녀 밑에 걸려있다.

 

공북루는 송시열이 쓴 기록을 비롯해 여러 글이 걸려 있어 멋스러운 경치를 더해 주는 건물로 조선시대 대표적인 문루이다.

 

 

8.공주향교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75호

지 정 일 1978.03.31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교동 211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초기에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며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처음 지은 정확한 연대는 알지 못하나, 원래 웅진동 송산 기슭에 있던 것을 인조 원년(1623)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었다고 전한다. 그 뒤 여러 차례의 보수가 있었고, 1954년 문묘·명륜당·동재·존경각 등을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강당인 명륜당이 있고 그 양쪽에 동재와 존경각이 있다. 뒤쪽 한층 높은 곳에 있는 내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사당인 대성전이 있으며, 그 양쪽에 동무와 서무가 있다. 즉 교육공간은 앞쪽에, 제사공간은 뒤쪽에 구분하여 배치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급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경장(1894) 이후 교육기능은 없어지고 제사기능만 남아있다

 

 

9.선화당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2호

지 정 일 1980.12.29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웅진동 332-9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충청도 관찰사가 공무를 집행하던 곳이다. 도내의 일반 행정·군사·조세 및 중요한 재판이 행해졌다. 원래 태조 4년(1395)에 충주에 설치되었으나 선조 35년(1602)에 공주로 옮겨와 충청도 전체를 관장하는 지방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여지도서』에는 선화당을 비롯하여 50여 채의 건물과 칸수를 기록하고 있으나, 지금은 선화당과 포정사 및 삼문, 부속건물 1채만 남아있다. 지금의 선화당 건물은 순조 33년(1833)에 지은 것으로, 원래는 공주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자리에 있었으나 1932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었다.

 

앞면 8칸·옆면 4칸의 규모인데, 원래는 앞면 9칸·옆면 5칸이었던 것이 옮기면서 축소되었다. 지붕의 옆선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화려한 팔작지붕집이다. 내부는 칸을 막지 않고 전체를 통칸으로 하여 넓은 공간을 마련하였고 2열로 기둥을 세웠다. 중앙은 우물 정(井)자 모양의 천장으로, 주위의 퇴간은 서까래가 드러난 연등천장으로 꾸몄다. 임금의 덕을 드러내어 널리 떨치고 백성을 교화하는 건물임을 뜻하는 ‘선화당’이라는 현판을 앞면 중앙에 달았다.

 

조선 중기의 수법이 남아있는 조선 후기의 관아 건축으로 웅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0.포정사 문루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3호 

지 정 일 1980.12.29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웅진동 332-9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충청도 관찰사가 공무를 집행하던 선화당 앞에 서있던 정문이다.

 

공주는 충청도 전체를 관장하던 지방행정의 중심지로 감영에는 50여 채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선화당과 포정사 및 삼문, 부속건물 1채 만이 남아있다. 원래는 공주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옆에 있었는데, 옛 공주군청 옆으로 옮겨지어 공주 제2감리교회 등으로 사용되어 왔다. 1993년 선화당 앞 지금의 위치에 복원하였다.

 

포정사는 앞면 5칸·옆면 2칸의 2층 건물로, 문루건물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우진각지붕집이다. 우진각 지붕은 지붕면이 4면으로 경사진 지붕을 말하며, 이 건물에서 지붕 모양 이외에는 문루 건축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찾아볼 수 없다. 1층의 양 옆은 판자벽으로 막고 가운데 3칸만 문을 만들어 출입할 수 있게 하였으며, 2층은 누마루로 난간을 돌리고 서쪽에 오르내리는 계단을 만들었다. 교회·사무실 등으로 사용되어 내부와 창틀 등이 개조되었으나, 겉모습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삼문은 솟을지붕 형태로 공포를 짜지 않은 소박한 민도리집 계통이며, 양 옆칸은 민가로 사용되고 있다. 교동에 있던 것을 1993년 선화당 앞에 복원하였다.

 

포정사 및 삼문은 다른 용도로 사용되면서 변형이 있었지만 조선 후기 관아건물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부여의 유적지)

 

1.석성산성

 

종 목 사적 제89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석성면 현내리 산83

시 대 삼국시대

 

연산의 황산성, 노성의 노성산성 및 금강 건너의 성흥산성, 뒤쪽의 금성산성과 연결되는 백제의 수도 사비 남쪽 외곽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산성이다.

 

이 산성은 안쪽에 성을 세운 후, 다시 성 밖에 2개의 골짜기를 따라 성을 쌓았다. 현재는 성문터와 성문 밑으로 개울물이 흐르게 하던 수구문, 그리고 우물터와 건물터들이 남아있다. 6세기 전반에 세워진 것으로 둘레 약 1,600m, 폭 약 5m, 높이 4m 정도로, 바깥쪽은 돌을 쌓아 올리고 안쪽은 흙을 파서 도랑(호)처럼 만들어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성벽은 모두 무너졌고, 성벽이 통과하는 계곡의 입구에 설치되어 있던 수구(水口)도 파괴되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다. 오른쪽의 수구에 해당하는 부분은 좌우로 성벽과 연결되도록 돌덩이들을 3∼4m정도의 높이로 쌓아 올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성 안의 가운데 산등성이에는 토기조각과 기와조각들이 많이 널려있어 건물터로 추정되고 있다.

 

이 성은 사비성이 함락된 뒤에도 당나라군과 신라 및 백제부흥군이 치열한 전투를 했던 곳으로 유서 깊은 유적이다.

 

2.성흥산성

 

종 목 사적 제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임천면 군사리 산1-1

시 대 백제

 

성흥산성은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성과 사비성을 지키기 위하여 금강 하류 부근에 쌓은 석성이다. 산 정상에서는 강경읍을 비롯한 금강 하류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며, 백제 동성왕 23년(501)에 위사좌평 백가가 쌓았다고 전하는데, 당시 이곳이 가림군이었으므로 가림성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성을 쌓은 백가는 동성왕이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것에 앙심을 품고 동성왕을 살해하고 난을 일으켰으나 무녕왕이 왕위에 올라 난을 평정하고 백가를 죽였다고 전한다. 높은 관리인 위사좌평으로 하여금 성을 지키도록 하였다는 사실은 이 성의 전략적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성의 형태는 산꼭대기를 빙둘러 쌓은 테뫼식으로, 돌과 흙을 함께 사용하여 성벽을 쌓았다. 성 안에는 남·서·북문터와 군창터, 우물터 3곳과 돌로 쌓았던 방어시설인 보루가 남아있다. 또한, 백제 부흥운동군의 거점지이기도 한 이곳에는 고려 전기의 장수 유금필이 이곳에 들러 빈민구제를 하였다고 하여 해마다 제사드리는 사당이 있다.

 

이 성은 백제 때 쌓은 성곽 가운데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일한 성이고, 옛 지명을 알 수 있는 유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3.부소산성

 
종 목  사적  제5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산4 
시 대 삼국시대


백마강 남쪽 부소산을 감싸고 쌓은 산성으로 사비시대의 도성이다.『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사비성·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 부른다.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기던 시기인 백제 성왕 16년(538)에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성왕 22년(500)경에 이미 산 정상을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 있던 것을 무왕 6년(605)경에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한 것으로 짐작되어 백제 성곽 발달사를 보여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성곽의 형식은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빙 둘러싼 테뫼식과 다시 그 주위를 감싸게 쌓은 포곡식이 혼합된 복합식 산성이다. 동·서·남문터가 남아 있으며, 북문터에는 금강으로 향하는 낮은 곳에 물을 빼는 수구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성 안에는 군창터 및 백제 때 건물터와 영일루·사자루·고란사·낙화암 등이 남아있다. 성 안에 군창터와 건물터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사시에는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고, 평상시에는 백마강과 부소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이용하여 왕과 귀족들이 즐기던 곳으로 쓰인 듯하다.

 

이 산성은 사비시대의 중심 산성으로서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를 방어한 곳으로 역사적 의의가 있다.

 

4.능산리 고분군

 

종 목  사적  제1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15 
시 대 백제


부여 능산리산의 남쪽 경사면에 자리잡고 있는 백제 무덤들이다. 무덤은 앞뒤 2줄로 3기씩 있고, 뒤쪽 제일 높은 곳에 1기가 더 있어 모두 7기로 이루어져 있다.

 

오래 전부터 왕릉으로 알려져 왔던 곳으로 일제시대에 1∼6호 무덤까지 조사되어 내부구조가 자세히 밝혀졌고, 7호 무덤은 1971년 보수공사 때 발견되었다. 고분의 겉모습은 모두 원형봉토분이고, 내부는 널길이 붙은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뚜껑돌 아래는 모두 지하에 만들었다.

 

내부구조와 재료에 따라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1호 무덤(동하총)은 네모형의 널방과 널길로 이루어진 단실무덤으로 널길은 비교적 길고 밖으로 갈수록 넓어지는 나팔형이다. 널방의 네 벽과 천장에는 각각 사신도와 연꽃무늬, 그리고 구름무늬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고구려 고분벽화의 영향으로 보인다. 2호 무덤(중하총)은 무령왕릉과 같이 천장이 터널식으로 되어 있으며,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3호 무덤(서하총)·4호 무덤(서상총)은 천장을 반쯤 뉘어 비스듬히 만든 후 판석을 덮은 평사천장이고 짧은 널길을 가졌다. 이 형식은 부여지방에 많으며 최후까지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능산리 무덤들은 일찍이 도굴되어 두개골 파편·도칠목관편·금동투조식금구·금동화형좌금구 등 약간의 유물만 수습되었다. 최근 무덤들 서쪽에서 절터가 발굴되어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와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국보 제288)이 출토되었는데, 이로 인해서 능산리 무덤들이 왕실 무덤지역라는 것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5.청마산성

 

종 목  사적  제3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산1-1 
시 대 삼국시대


부여 능산리 월명산에 있는 백제 산성으로, 당시 수도였던 사비를 방어하기 위하여 쌓았다.

 

골짜기를 성안에 두고 산 능선을 따라 돌로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전반적으로 성벽이 많이 무너져 있으나, 서쪽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계곡의 물이 흐르는 서쪽 성벽에 수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방어를 목적으로 쌓은 성이라 남문이 없다. 현재 성안에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기 위해 높이 쌓은 망대와 각시우물이라 전하는 우물터, 경룡사터, 의열사터와 건물터가 남아있다.

 

백제 산성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산성으로, 석성산성·성흥산성·증산성과 함께 부여를 보호하기 위한 외곽 방어시설로서 의미가 크다.

 

6.군수리사지 

 

종 목  사적  제4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군수리 19 
시 대 백제


부여 군수리에 자리하고 있는 백제의 절터로, 절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1935년 일본 사람에 의해 조사되었는데, 그 결과 중문·목탑·금당·강당 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배치된 1탑 1금당의 구조임이 밝혀졌다. 백제 사찰에서의 1탑 1금당의 가람배치는 이 절터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었는데, 이후 계속된 조사를 통해서 백제의 기본적인 가람배치로 알려졌다.

 

금당터의 기단은 기와를 쌓아 만든 것이 특징이며, 유물은 절터에서 골고루 출토되었다. 먼저 강당터 남쪽에서 금동관 조각이 나왔고, 금당터 주위와 탑터에서는 약 1,150점의 옥과 금당 서쪽에서는 금동제방울·구두 모양의 금구가 출토되었다. 또한 연꽃무늬·덩굴무늬가 아름답게 조각된 상자 모양의 벽돌과 금제고리·작은 구슬을 비롯한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목탑의 중심부에서는 군수리 금동미륵보살입상(보물 제330호)·군수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329호)과 칠지도·철못·삼족토기를 비롯한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이 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칠지도이다. 칠지도는 중심에서 양쪽으로 각각 세가지씩 칼이 뻗어있어 7개의 칼날을 가지고 있는 칼이다. 이와 비슷한 백제 칠지도 하나가 일본에 있어 백제와 일본의 문화교류의 한 단면을 말해주고 있다. 

 

7.부여 나성

 

종 목  사적  제58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염창리 565 
시 대 삼국시대


백제의 수도 사비를 보호하기 위해 쌓은 둘레 84㎞의 성이다. 부소산성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부여시가지 외곽을 둘러싸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평양에 있는 나성과 함께 가장 오래된 나성 중의 하나이며,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긴 538년경에 쌓은 것으로 보인다. 성벽은 부소산성의 동문이 있던 자리에서 시작하여 금강변까지 흙으로 쌓아만든 것으로, 지금은 약간의 흔적만 남아있다.

 

성의 바깥쪽 벽은 급한 경사를 이루고 안쪽 벽은 완만하여, 성위에서 말을 달릴 만한 길이 있고 곳곳에 초소가 있다. 가장 높은 산봉우리인 필서봉에는 횃불을 올리던 봉수터와 건물터가 남아있다. 성안에는 백제의 왕궁을 비롯하여 관청·민가·절·상가 및 방어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나성의 전체적인 구조는 남쪽과 서쪽으로 금강이 흐르고, 또 물길도 파놓아서 자연적인 2중구조를 이루고 있다. 부여나성은 청산성·청마산성과 함께 수도보호를 위한 외곽방어시설로 중요한 성이었다. 

 

8.청산성

 

종 목  사적  제59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6 
시 대 삼국시대


부소산 동쪽 500m 지점의 낮은 구릉 위에 있는 백제 산성으로, 흙으로 쌓아만든 산성이다.

 

백제 무왕 6년(605)에 사비에서 웅진으로 통하는 길목을 지키기 위하여 나성과 함께 쌓았다. 외성의 북쪽 성벽은 나성과 연결되어 있어, 나성의 취약점을 보강하고 방어력을 높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의 독립된 산성이라기보다는 백제의 수도 사비를 보호하기 위해 부소산성과 연결하여 쌓았던 보조산성으로 보인다.

 

약 300m 정도의 내성과 500m 정도의 외성으로 이루어진 2중구조의 산성으로 보이지만, 내성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산봉우리를 빙 둘러쌓은 테뫼식산성으로, 동북쪽 성벽의 윤곽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성안 서부와 북부에 당시의 건물터로 보이는 곳이 남아있다. 

 

9.쌍북리 요지 

 

종 목  사적  제99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산30 
시 대 백제


충남 부여군 쌍북리에 있는 백제 때 토기 및 기와를 굽던 가마터로, 1941년 5월에 부여 시가지 계획도로 공사 중에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가마는 땅에 묻힌 상태여서 분명하진 않지만, 폭 135㎝, 높이 90㎝ 정도의 크기였다. 굴뚝 부분에서 아래로 3㎝ 정도가 남아 있고 아궁이 부분은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은 도로가 완성되면서 가마의 앞부분이 잘려져 낭떠러지로 되어 있으며, 시멘트로 석실을 만들어 보호하고 있다. 소나무숲에 둘러싸인 이 부근에서는 토기조각이나 가마에서 버린 물건들이 발견되지 않지만, 산등성이 너머의 경작지에서는 많은 수의 토기조각과 기와조각이 널려져 있다.

 

지금은 가마의 일부만 남아있지만 부여읍 안에 남아있는 유일한 토기 및 기와 가마터로서 그 의의가 크다.

 

10.궁남지 

 

종 목  사적  제135호 
지 정 일 1964.06.10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117 
시 대 삼국시대


부여 남쪽에 위치한 백제의 별궁 연못이다. 백제 무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궁궐의 남쪽에 연못을 팠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궁남지라 부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20여 리나 되는 긴 수로를 통해 물을 끌어들였고,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연못 가운데에 방장선산을 상징하는 섬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수로와 물가·연못 속의 섬이 어떤 모양으로 꾸며져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못의 중앙부에 석축과 버드나무가 남아있어 섬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주변에서 백제 토기와 기와 등이 출토되었다. 연못의 규모 또한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당시에 뱃놀이를 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크기를 짐작할 뿐이다.

 

고대 중국사람들은 동해바다 한가운데에 일종의 이상향인 신선이 사는 3개의 섬으로 삼신산이 있다고 생각하여, 정원의 연못 안에 삼신산을 꾸미고 불로장수를 희망했다고 한다. 궁남지는 이것을 본떠 만든 것으로 신선정원이라 불린다.

 

연못 동쪽에 당시의 별궁으로 보이는 궁궐터가 남아 있다. 현재 연못 주변에는 별궁 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우물과 주춧돌이 남아있고, 연못 안에는 정자와 목조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11.증산성 

 

종 목  사적  제156호 
지 정 일 1967.03.25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규암면 신성리 산86 
시 대 백제


흰 돌을 사용하여 쌓은 성이 마치 시루를 올려놓고 시루테를 바른 듯 하다고 하여 시루메산성이라고도 부르는 백제 산성이다.

 

성왕 16년(538) 수도를 사비로 옮기고 나서 수도를 보호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둘레는 약 600m이고 높이는 2∼3m 정도로 거의 무너진 상태이지만, 성의 남쪽부분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서쪽·남쪽·북쪽에 각각 문이 있던 흔적이 남아있다. 성벽은 자연 지세를 이용하여 쌓았지만 다른 성에 비하면 정교하지 못한 편이다. 성 안에는 백제토기와 기와조각이 많이 남아 있으며 동쪽에는 우물터가 있다. 은산면에 있는 이중산성·서쪽의 옥녀봉산성과 서로 바라 보면서 연결 되어있다.

 

증산성은 신라 문무왕 12년(672) 정월에 백제 고성성을 쳐서 이겼다는 기록에서 나타나는 고성성으로도 여겨지이며, 백제 부흥운동군의 한 거점으로도 여겨지는 중요한 산성이다.

 

12.정림사지 

 

종 목  사적  제301호 
지 정 일 1983.03.26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 
시 대 백제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시기(538-660)의 중심 사찰이 있던 자리다. 발굴조사 때 강당터에서 나온 기와조각 중 ‘태평 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라는 글이 발견되어, 고려 현종 19년(1028) 당시 정림사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즉 고려시대에 백제사찰의 강당위에 다시 건물을 짓고 대장전이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림사의 주요 건물 배치는 중문, 오층석탑, 금당, 강당에 이르는 중심축선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놓이고, 건물을 복도로 감싸고 있는 배치를 하고 있다. 그러나 특이하게 가람 중심부를 둘러싼 복도의 형태가 정사각형이 아닌, 북쪽의 간격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으로 되어있다.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절앞의 연못이 정비되어 있고, 석불좌상을 보호하기 위한 건물은 1933년에 지어졌다. 백제 때에 세워진 5층석탑(국보 제9호)과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다. 출토유물로는 백제와 고려시대의 장식기와를 비롯하여 백제 벼루, 토기와 흙으로 빚은 불상들이 있다.

 

13.능안골 고분군 

 

종 목  사적  제420호 
지 정 일 2000.07.22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75-7외 
시 대 백제


백제 능산리 무덤 동쪽에 있는 백제나성(사적 제58호)이나 청마산성(사적 제34호)과 함께 있는 백제 무덤이다.

1995∼1996년 사이에 조사되어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 30여기, 돌덧널무덤(석곽묘) 20여기, 독무덤(옹관묘) 4기 등을 발견하였다. 홑무덤(단장묘)이나 합장묘, 어린아이 무덤 등 다양한 형태로 매장되었는데, 주·사 등의 옷감 및 금귀고리, 은제관장식과 띠드리개장식(요대장식)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무덤의 형식과 출토된 유물을 통해 6∼7세기경 백제 귀족층의 무덤으로 추정되며, 백제 후기 무덤형식과 의복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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