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부여의 문화재좀요..

공주 부여의 문화재좀요..

작성일 2009.08.22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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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부여의 백제 문화재 좀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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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1.금제관식<왕>

 

종 목  국보  제154호  
지 정 일 1974.07.09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시 대 백제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백제 때 금으로 만든 왕관(王冠) 꾸미개(장식) 한쌍이다.

 

높이는 각각 30.7㎝, 29.2㎝이고, 너비는 각각 14㎝, 13.6㎝이다. 1971년 무령왕릉이 발견·조사되었을 때, 왕의 널(관) 안쪽 머리 부근에서 포개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금판을 뚫어서 덩굴 무늬를 장식했으며, 밑으로는 줄기가 있는데 아래위로 2, 3개의 작은 구멍이 있어 무엇인가에 부착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좌우로 벌어진 줄기 중간에는 꽃 무늬를 배치하였으며, 줄기가 길게 연장되면서 마치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모양새를 보여준다. 두 가닥은 아래로 향하게 하여 변화를 주고있다. 앞면에는 전체에 걸쳐 구슬모양 꾸미개를 금실로 꼬아서 달았다.

 

무령왕릉은 백제 25대 무령왕(재위 501∼522)과 왕비의 무덤으로, 벽돌을 이용해서 만든 벽돌무덤(전축분)이다. 출토된 유물들은 백제 문화의 수준과 풍속의 일면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 중 지석은 삼국시대 고분 가운데 최초로 무덤에 묻힌 주인과 만든 시기를 확실히 밝혀주는 자료가 되고있다.

 

2.금제관식<왕비>

 

종 목  국보  제155호 
지 정 일 1974.07.09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시 대 백제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백제 때 금으로 만든 관(冠) 장식으로, 모양과 크기가 같은 한 쌍으로 되어 있다.

 

높이 22.6㎝, 너비는 13.4㎝로 1971년 무령왕릉이 발견·조사되었을 때, 왕비의 널(관) 안쪽 머리 부근에서 포개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금판에 무늬를 뚫어서 장식하고 밑에 줄기를 달았다. 예리한 도구로 도려내어 무늬를 만들었는데 좌우대칭으로 정돈되어 매우 정연한 느낌을 준다. 중심부의 연꽃받침 위에 놓인 병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덩굴무늬가 있고 병 위에는 활짝 핀 꽃 한송이가 있다. 중간부터 위쪽의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가 표현되어 있다. 무령왕릉 안에서 같이 발견된 왕의 관(冠) 장식보다 규모가 조금 작고 구슬 등의 장식이 달려있지 않아 간결한 인상을 준다.

 

무령왕릉은 백제 25대 무령왕(재위 501∼522)과 왕비의 무덤으로, 벽돌을 이용해 만든 벽돌무덤(전축분)이며,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백제문화의 수준과 풍속의 일면을 알려주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으며, 이 가운데 지석은 삼국시대 고분 중 최초로 무덤에 묻힌 주인과 만든 시기를 밝혀주는 자료가 되고있다. 

 

3.금제심엽형이식<왕>

 

종 목  국보  제156호 
지 정 일 1974.07.09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시 대 백제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백제시대의 금 귀고리 한 쌍으로 길이는 8.3㎝이다. 왕의 널(관)안 머리 부근에서 발견되었으며, 호화로운 장식이 달려있다.

 

굵은 고리를 중심으로 2가닥의 장식을 길게 늘어뜨렸다. 하나는 속이 빈 원통형의 중간 장식 끝에 금판으로 된 커다란 나뭇잎 모양의 장식을 달았다. 이 장식은 무늬가 없어 간소하지만 앞·뒷면에 타원형의 작은 잎을 하나씩 붙여 변화를 주었다. 옆으로 보면 안이 굽은 모습을 하고 있다. 원통형의 중간 장식에는 금선과 금구슬을 이용해 장식한 마개가 있고, 서로 마주보게 나뭇잎 모양의 장식을 둘렀다. 다른 한 가닥은 여러 개의 작은 고리로 이루어진 구슬 모양의 장식에 나뭇잎 모양의 장식을 연결하고, 끝에는 금모자를 씌운 푸른 곱은 옥을 매달아 금색과 조화를 이루게 하였다. 이런 2줄의 귀고리는 경주 금령총에서도 발견된 적이 있다.

 

4.금제수식부이식<왕비>

 

종 목  국보  제157호 
지 정 일 1974.07.09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시 대 백제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백제 때 귀고리 2쌍으로 길이는 11.8㎝, 8.8㎝이다. 왕비의 귀고리로, 굵은 고리를 중심으로 작은 장식들을 연결하여 만들었다.

 

한 쌍은 복잡한 형식으로 길고 짧은 2줄의 장식이 달려 있고, 다른 한 쌍은 1줄로만 되어있다. 앞의 귀고리 중 긴 가닥은 금 철사를 꼬아서 만든 사슬에 둥근 장식을 많이 연결하였으며, 맨 밑에는 작은 고리를 연결하여 8개의 둥근 장식을 달고 그 아래 탄환 모양의 장식을 달았다.

 

짧은 줄의 수식은 다른 한 쌍의 것과 거의 같은 수법이나 탄환 장식은 달지 않고, 잎사귀 모양의 장식과 담록색의 둥근 옥을 달았다. 

 

5.금제경식<왕비>

 

종 목  국보  제158호 
지 정 일 1974.07.09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시 대 백제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백제 무령왕비의 목걸이로, 길이는 각각 14㎝, 16㎝이다. 9마디로 된 것과 7마디로 된 것 2종류가 있는데, 발굴 당시 7마디 목걸이가 9마디 목걸이 밑에 겹쳐져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활 모양으로 약간 휘어진 육각의 금막대를 끝으로 갈수록 가늘게 하여 고리를 만들고 다른 것과 연결시켰다. 고리를 만들고 남은 부분을 짧은 목걸이의 경우 10∼11회, 긴 목걸이는 6∼8회 감아서 풀리지 않게 하였다. 일정한 간격으로 연결된 금막대마다 고리를 만들고 마무리를 한 솜씨가 매우 뛰어나다.

 

2개의 목걸이 모두 한쪽 끝에 몸에 걸기 위한 작은 고리가 끼워져 있을 뿐 다른 장식은 하지 않은 간단한 구조를 하고있다. 현대적 감각과 함께 매우 세련되어 보이는 작품이다.

 

6.금제뒤꽂이<왕>

 

종 목  국보  제159호  
지 정 일 1974.07.09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시 대 백제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백제 때 금으로 만든 뒤꽂이 일종의 머리 장신구이다. 무령왕릉 나무널(목관) 안 왕의 머리에서 발견되었으며, 길이는 18.4㎝, 상단의 폭은 6.8㎝이다.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역삼각형 모양이며, 밑은 세가닥의 핀 모양을 이루고 있어 머리에 꽂았던 것으로 보인다. 역삼각형의 윗부분은 새가 날개를 펼치고 있는 모습이고, 3개의 꼬챙이쪽은 긴 꼬리처럼 되어 전체 모습이 날고 있는 새의 모습을 하고 있다. 양 날개쪽 좌우에는 꽃무늬를 도드라지게 찍었고, 그 아래는 서로 대칭으로 덩굴무늬를 빈틈없이 메꿔 놓았다. 새의 머리와 날개 부분의 테두리는 끌 끝으로 찍은 작은 점들이 열지어 있다. 여기서 사용된 문양은 모두 뒤에서 두들겨 솟아 나오게 한 타출법(打出法)을 사용하였고 ,세부 표현에는 선으로 새기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왕의 머리부분에서 발견되었고, 끝이 3개로 갈라진 점으로 보아 의례 때 쓰인 머리 장식품으로 보인다.

 

7.은제팔찌<왕비>

 

종 목  국보  제160호  
지 정 일 1974.07.09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시 대 백제


공주시 무령왕릉 왕비의 나무널(목관)내 왼쪽 팔 부근에서 발견된 한 쌍의 은제 팔찌로, 바깥지름 8㎝, 고리지름 1.1㎝이다.

 

팔목이 닿는 안쪽에는 톱니 모양을 촘촘히 새겼고, 둥근 바깥면에는 발이 셋 달린 2마리의 용을 새겼다. 용의 조각은 세밀하지는 않으나 힘이 있어, 묵직한 팔찌와 잘 어울리고 있다.

 

한 개의 팔찌 안쪽에 새긴 글로 보아 왕비가 죽기 6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만든 사람의 이름과 무게가 쓰여있다.

 

전체적인 윤곽이 깔끔하고 중후하며, 만든시기와 작가, 작품과 직접 관계된 글이 있는 예로, 고대 미술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8.청동신수경

 

종 목  국보  제161호 
지 정 일 1974.07.09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시 대 백제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청동거울로 청동신수경, 의자손수대경, 수대경 3점이다.

 

청동신수경은 ‘방격규구문경’이라는 중국 후한의 거울을 모방하여 만든 것이다. 거울 내부에는 반나체 인물상과 글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한나라의 거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의자손수대경은 중국 한대의 수대경을 본떠 만든 복제품이다. 거울 중앙의 꼭지를 중심으로 9개의 돌기가 있고, 안에는 크고 작은 원과 7개의 돌기가 솟아있다. 내부 주위의 테두리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으나 선명하지 못하여 알아볼 수 없다.

 

수대경 역시 한나라 때 동물 문양을 새겨 넣은 수대경을 본받아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한나라 거울에 비해 선이 굵고 무늬가 정교하지 못하다. 

 

9.공주 의당 금동보살입상

 

종 목  국보  제247호 
지 정 일 1989.04.10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시 대 백제


1974년 충청남도 공주시 의당면 송정리의 한 절터에서 출토된 보살상으로, 높이는 25㎝이며, 현재 국립공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머리에는 삼면보관을 쓰고 있는데, 가운데에 작은 부처가 표현되어 있어 관음보살을 형상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마는 머리카락이 반쯤 내려와 덮고 있으며, 양 옆으로 땋은 머리는 귀를 덮고 어깨까지 길게 내려왔다. 4각형에 가까운 얼굴은 눈·코·입을 큼직하고 시원스럽게 표현했으며, 입가에는 약간의 미소를 머금고 있다. 목에는 긴 목걸이를 하고 있는데, 그 목걸이에 연결된 구슬띠가 가슴 아래로 내려오다가 두 갈래로 갈라져 양쪽 무릎까지 이어지고 있다.

 

신체에 밀착된 얇은 옷은 넓은 양 어깨로부터 내려와 배 아래부근에서 X자로 교차되었다. 팔에 걸친 옷자락은 양 옆으로 내려와 대좌를 덮으면서 돌출되었다. 옷자락에 표현된 주름은 조각이 깊고 힘차게 되어있어 평온한 얼굴 표정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양 손에는 팔찌를 끼고 있는데, 오른손은 가슴부분까지 들어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연꽃봉오리를 잡고 있으며, 아래로 내린 왼손에는 보병을 쥐고 있다. 보살이 서 있는 대좌는 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표면에는 엎어놓은 8장의 연꽃무늬를 새겨 놓았다.

 

튀어나온 부분의 도금이 일부 벗겨졌을 뿐 금색이 우수하고 출토된 곳이 확실한 보살상으로 안정된 표현기법과 배꼽부분에서 교차된 구슬장식, 둥근 연꽃무늬 대좌 양식 등에서 7세기 백제 때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10.공산성

 

종 목 사적 제12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산성동 2외

시 대 삼국시대

 

공산성은 백제의 수도가 공주에 있을 때, 공주를 지키던 백제의 산성이다.

 

금강변 야산의 계곡을 둘러싼 산성으로, 원래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고쳤다. 쌓은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며, 백제 때에는 웅진성으로,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공산성으로,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렀다.

 

4방에 문터가 확인되는데,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가 남아있고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아있다. 암문·치성·고대·장대·수구문 등의 방어시설이 남아 있으며, 성 안에는 쌍수정·영은사·연지·임류각지, 그리고 만하루지 등이 있다. 또한 연꽃무늬 와당을 비롯하여 백제 기와·토기 등의 유물들과 고려·조선시대의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백제 멸망 직후에 의자왕이 잠시 머물기도 하였으며,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지이기도 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김헌창의 난(822)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며, 조선시대 이괄의 난(1623)으로 인조가 피난했던 곳이기도 하다.

 

백제 성왕 16년(538)에 부여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의 백제 도성이었으며, 이후 조선시대까지 지방 행정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역사적 가치가 크고 연구할 가치가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11.송산리 고분군

 

종 목 사적 제13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금성동 산5-1

시 대 백제

 

공주시 금성동에 있는 웅진 백제시대 왕들의 무덤이 모여있는 곳이다.

 

무령왕릉을 포함한 이 일대의 고분들은 모두 7기가 전해지는데, 송산을 주산으로 뻗은 구릉 중턱의 남쪽 경사면에 위치한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서쪽에는 무령왕릉과 5 ·6호분이 있고 동북쪽에는 1∼4호분이 있다. 1∼6호분은 일제시대에 조사되어 고분의 구조와 형식이 밝혀졌고, 무령왕릉은 1971년 5 ·6호분의 보수공사 때 발견되었다.

 

먼저 1∼5호분은 모두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무덤 입구에서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널방(현실)에 이르는 널길이 널방 동쪽벽에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1∼4호분은 바닥에 냇자갈을 깔아 널받침(관대)을 만들었는데, 5호분은 벽돌을 이용하였다. 이처럼 같은 양식의 무덤이면서 구조와 규모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나는 것은 시기 차이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5호분은 원형으로 남아 있으나, 1∼4호분은 조사되기 전에 이미 도굴되었다. 이외에 벽돌무덤(전축분)으로 송산리벽화고분이라고도 불리는 6호분과 무령왕릉이 있다.

 

6호분은 활모양 천장으로 된 이중 널길과 긴 네모형의 널방으로 되어 있는데, 오수전이 새겨진 벽돌로 정연하게 쌓았다. 널방 벽에는 7개의 등자리와 사신도 · 일월도 등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무령왕릉도 6호분과 같이 연꽃무늬 벽돌로 가로쌓기와 세로쌓기를 반복하여 벽을 쌓았다. 벽에는 5개의 등자리가 있고, 무덤주인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지석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6호분과 무령왕릉은 현재 남아있는 백제의 벽돌무덤으로, 모두 터널형 널방 앞에 짧은 터널형 널길을 가지고 있으며 긴 배수로도 갖추고 있다. 이러한 형식의 벽돌무덤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벽화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무령왕릉의 경우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어, 백제사회의 사회 ·문화상을 연구하는데 절대자료로 평가된다.

 

 

12.수촌리 고분군

 

종 목 사적 제460호

지 정 일 2005.03.03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의당면 수촌리 201 외 일원

시 대 백제

 

공주수촌리고분군은 공주시에서 계획한 의당농공단지 조성 예정부지에 대한 지표조사 후 유적의 존재가 확인되어 해당지역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 각종유물이 발견되었다.

 

공주수촌리고분군 일대에서는 청동기시대 주거지, 초기철기시대 토광묘, 백제시대 부묘(대형토광목곽묘, 횡혈식 석실분, 수혈식 석곽묘)등이 조사되었다.

 

초기철기시대 토광묘는 세형동검과 검파두식(검자루끝장식) 등 다양한 청동제품과 점토대토기(점토띠토기), 흑고장경호 등 토기가 매장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 초기철기시대 묘제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백제시대 분묘는 공주지역 백제고분의 변천과정을 파악하는데 좋은 자료일 뿐만 아니라 출토된 유물이 백제의 웅진천도 이전에 조영된 것으로 짐작되어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 금동관과 금동신발, 금제이식, 환두대도(고리자루큰칼), 중국제 흑유도기, 흑유 계수호(닭머리모양 주전자)등 위세품으로 판단되는 유물들이 함께 부장되어 있어 피장자의 신분이 당시 공주지역 유력자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이는 한성 백제시대의 중앙과 지방의 상호관련성을 보여주는 백제사의 중요한 자료이다.

 

 

(부여)

 

1.정림사지 오층석탑

 

종 목  국보  제9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 
시 대 백제

부여 정림사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좁고 낮은 1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이다. 신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놓아, 한때는 ‘평제탑’이라고 잘못 불리어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워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목조건물의 배흘림기법을 이용하였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준다.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기법의 기둥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 등은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며, 전체의 형태가 매우 장중하고 아름답다. 익산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 격조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2.능산리 출토 백제금동대향로 

 

종 목  국보  제287호 
지 정 일 1996.05.30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산16-1 국립부여박물관 
시 대 백제


백제 나성과 능산리 무덤들 사이 절터 서쪽의 한 구덩이에서 450여점의 유물과 함께 발견된 백제의 향로이다. 높이 64㎝, 무게 11.8㎏이나 되는 대형 향로로, 크게 몸체와 뚜껑으로 구분되며 위에 부착한 봉황과 받침대를 포함하면 4부분으로 구성된다.

 

뚜껑에는 23개의 산들이 4∼5겹으로 첩첩산중을 이루는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피리와 소비파, 현금, 북들을 연주하는 5인의 악사와 각종 무인상, 기마수렵상 등 16인의 인물상과 봉황, 용을 비롯한 상상의 날짐승, 호랑이, 사슴 등 39마리의 현실 세계 동물들이 표현되어 있다. 이 밖에 6개의 나무와 12개의 바위, 산 중턱에 있는 산길, 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폭포, 호수 등이 변화무쌍하게 표현되어 있다.

 

뚜껑 꼭대기에는 별도로 부착된 봉황이 목과 부리로 여의주를 품고 날개를 편 채 힘있게 서 있는데, 길게 약간 치켜 올라간 꼬리의 부드러움은 백제적 특징이라 하겠다. 봉황 앞 가슴과 악사상 앞뒤에는 5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몸체에서 향 연기를 자연스럽게 피어오를 수 있게 하였다.

 

몸체는 활짝 피어난 연꽃을 연상시킨다. 연잎의 표면에는 불사조와 물고기, 사슴, 학 등 26마리의 동물이 배치되어 있다. 받침대는 몸체의 연꽃 밑부분을 입으로 문 채 하늘로 치솟 듯 고개를 쳐들어 떠받고 있는 한 마리의 용으로 되어 있다.

 

이 향로는 중국 한나라에서 유행한 박산향로의 영향을 받은 듯 하지만, 중국과 달리 산들이 독립적·입체적이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창의성과 조형성이 뛰어나고 불교와 도교가 혼합된 종교와 사상적 복합성까지 보이고 있어 백제시대의 공예와 미술문화, 종교와 사상, 제조기술까지도 파악하게 해 주는 귀중한 작품이다.

 

3.백제 창왕명 석조사리감 

 

종 목  국보  제288호 
지 정 일 1996.05.30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산16-1 국립부여박물관 
시 대 백제


백제 때 사리를 보관하는 용기로, 능산리 절터의 중앙부에 자리한 목탑 자리 아래에서 나왔다.

 

출토 당시 이미 사리감은 폐기된 상태였으므로 사리 용기는 없었다. 사리감은 위쪽은 원형, 아래쪽은 판판한 높이 74㎝, 가로·세로 50㎝인 터널형이다. 감실 내부의 크기는 높이 45㎝ 정도로 파내어 턱을 마련하였는데 내부에 사리 장치를 놓고 문을 설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감실의 좌·우 양 쪽에 각각 중국 남북조 시대의 서체인 예서풍의 글자가 10자씩 새겨져 있는데, 명문(銘文)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백제창왕십삼년태세재 정해매■공주공양사리(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 丁亥妹■公主供養舍利)로서, 이 사리감은 성왕(聖王)의 아들로 554년 왕위에 오른 창왕(昌王)[위덕왕(威德王)]에 의해 567년 만들어 졌으며, 성왕의 따님이자 창왕의 여자 형제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하였다는 내용이다.

 

이 사리감은 백제 역사 연구에 새로운 금석문 자료로서 백제와 중국과의 문화교류의 일면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며, 사리를 봉안한 연대와 공양자가 분명하고, 백제 절터로서는 절의 창건연대가 당시의 유물에 의해 최초로 밝혀진 작품이다.

 

4.석성산성

 

종 목 사적 제89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석성면 현내리 산83

시 대 삼국시대

 

연산의 황산성, 노성의 노성산성 및 금강 건너의 성흥산성, 뒤쪽의 금성산성과 연결되는 백제의 수도 사비 남쪽 외곽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산성이다.

 

이 산성은 안쪽에 성을 세운 후, 다시 성 밖에 2개의 골짜기를 따라 성을 쌓았다. 현재는 성문터와 성문 밑으로 개울물이 흐르게 하던 수구문, 그리고 우물터와 건물터들이 남아있다. 6세기 전반에 세워진 것으로 둘레 약 1,600m, 폭 약 5m, 높이 4m 정도로, 바깥쪽은 돌을 쌓아 올리고 안쪽은 흙을 파서 도랑(호)처럼 만들어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성벽은 모두 무너졌고, 성벽이 통과하는 계곡의 입구에 설치되어 있던 수구(水口)도 파괴되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다. 오른쪽의 수구에 해당하는 부분은 좌우로 성벽과 연결되도록 돌덩이들을 3∼4m정도의 높이로 쌓아 올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성 안의 가운데 산등성이에는 토기조각과 기와조각들이 많이 널려있어 건물터로 추정되고 있다.

 

이 성은 사비성이 함락된 뒤에도 당나라군과 신라 및 백제부흥군이 치열한 전투를 했던 곳으로 유서 깊은 유적이다.

 

5.성흥산성

 

종 목 사적 제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임천면 군사리 산1-1

시 대 백제

 

성흥산성은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성과 사비성을 지키기 위하여 금강 하류 부근에 쌓은 석성이다. 산 정상에서는 강경읍을 비롯한 금강 하류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며, 백제 동성왕 23년(501)에 위사좌평 백가가 쌓았다고 전하는데, 당시 이곳이 가림군이었으므로 가림성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성을 쌓은 백가는 동성왕이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것에 앙심을 품고 동성왕을 살해하고 난을 일으켰으나 무녕왕이 왕위에 올라 난을 평정하고 백가를 죽였다고 전한다. 높은 관리인 위사좌평으로 하여금 성을 지키도록 하였다는 사실은 이 성의 전략적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성의 형태는 산꼭대기를 빙둘러 쌓은 테뫼식으로, 돌과 흙을 함께 사용하여 성벽을 쌓았다. 성 안에는 남·서·북문터와 군창터, 우물터 3곳과 돌로 쌓았던 방어시설인 보루가 남아있다. 또한, 백제 부흥운동군의 거점지이기도 한 이곳에는 고려 전기의 장수 유금필이 이곳에 들러 빈민구제를 하였다고 하여 해마다 제사드리는 사당이 있다.

 

이 성은 백제 때 쌓은 성곽 가운데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일한 성이고, 옛 지명을 알 수 있는 유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6.부소산성

 
종 목  사적  제5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산4 
시 대 삼국시대


백마강 남쪽 부소산을 감싸고 쌓은 산성으로 사비시대의 도성이다.『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사비성·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 부른다.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기던 시기인 백제 성왕 16년(538)에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성왕 22년(500)경에 이미 산 정상을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 있던 것을 무왕 6년(605)경에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한 것으로 짐작되어 백제 성곽 발달사를 보여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성곽의 형식은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빙 둘러싼 테뫼식과 다시 그 주위를 감싸게 쌓은 포곡식이 혼합된 복합식 산성이다. 동·서·남문터가 남아 있으며, 북문터에는 금강으로 향하는 낮은 곳에 물을 빼는 수구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성 안에는 군창터 및 백제 때 건물터와 영일루·사자루·고란사·낙화암 등이 남아있다. 성 안에 군창터와 건물터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사시에는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고, 평상시에는 백마강과 부소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이용하여 왕과 귀족들이 즐기던 곳으로 쓰인 듯하다.

 

이 산성은 사비시대의 중심 산성으로서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를 방어한 곳으로 역사적 의의가 있다.

 

7.능산리 고분군

 

종 목  사적  제1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15 
시 대 백제


부여 능산리산의 남쪽 경사면에 자리잡고 있는 백제 무덤들이다. 무덤은 앞뒤 2줄로 3기씩 있고, 뒤쪽 제일 높은 곳에 1기가 더 있어 모두 7기로 이루어져 있다.

 

오래 전부터 왕릉으로 알려져 왔던 곳으로 일제시대에 1∼6호 무덤까지 조사되어 내부구조가 자세히 밝혀졌고, 7호 무덤은 1971년 보수공사 때 발견되었다. 고분의 겉모습은 모두 원형봉토분이고, 내부는 널길이 붙은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뚜껑돌 아래는 모두 지하에 만들었다.

 

내부구조와 재료에 따라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1호 무덤(동하총)은 네모형의 널방과 널길로 이루어진 단실무덤으로 널길은 비교적 길고 밖으로 갈수록 넓어지는 나팔형이다. 널방의 네 벽과 천장에는 각각 사신도와 연꽃무늬, 그리고 구름무늬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고구려 고분벽화의 영향으로 보인다. 2호 무덤(중하총)은 무령왕릉과 같이 천장이 터널식으로 되어 있으며,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3호 무덤(서하총)·4호 무덤(서상총)은 천장을 반쯤 뉘어 비스듬히 만든 후 판석을 덮은 평사천장이고 짧은 널길을 가졌다. 이 형식은 부여지방에 많으며 최후까지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능산리 무덤들은 일찍이 도굴되어 두개골 파편·도칠목관편·금동투조식금구·금동화형좌금구 등 약간의 유물만 수습되었다. 최근 무덤들 서쪽에서 절터가 발굴되어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와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국보 제288)이 출토되었는데, 이로 인해서 능산리 무덤들이 왕실 무덤지역라는 것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8.청마산성

 

종 목  사적  제3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산1-1 
시 대 삼국시대


부여 능산리 월명산에 있는 백제 산성으로, 당시 수도였던 사비를 방어하기 위하여 쌓았다.

 

골짜기를 성안에 두고 산 능선을 따라 돌로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전반적으로 성벽이 많이 무너져 있으나, 서쪽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계곡의 물이 흐르는 서쪽 성벽에 수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방어를 목적으로 쌓은 성이라 남문이 없다. 현재 성안에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기 위해 높이 쌓은 망대와 각시우물이라 전하는 우물터, 경룡사터, 의열사터와 건물터가 남아있다.

 

백제 산성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산성으로, 석성산성·성흥산성·증산성과 함께 부여를 보호하기 위한 외곽 방어시설로서 의미가 크다.

 

9.군수리사지 

 

종 목  사적  제4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군수리 19 
시 대 백제


부여 군수리에 자리하고 있는 백제의 절터로, 절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1935년 일본 사람에 의해 조사되었는데, 그 결과 중문·목탑·금당·강당 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배치된 1탑 1금당의 구조임이 밝혀졌다. 백제 사찰에서의 1탑 1금당의 가람배치는 이 절터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었는데, 이후 계속된 조사를 통해서 백제의 기본적인 가람배치로 알려졌다.

 

금당터의 기단은 기와를 쌓아 만든 것이 특징이며, 유물은 절터에서 골고루 출토되었다. 먼저 강당터 남쪽에서 금동관 조각이 나왔고, 금당터 주위와 탑터에서는 약 1,150점의 옥과 금당 서쪽에서는 금동제방울·구두 모양의 금구가 출토되었다. 또한 연꽃무늬·덩굴무늬가 아름답게 조각된 상자 모양의 벽돌과 금제고리·작은 구슬을 비롯한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목탑의 중심부에서는 군수리 금동미륵보살입상(보물 제330호)·군수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329호)과 칠지도·철못·삼족토기를 비롯한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이 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칠지도이다. 칠지도는 중심에서 양쪽으로 각각 세가지씩 칼이 뻗어있어 7개의 칼날을 가지고 있는 칼이다. 이와 비슷한 백제 칠지도 하나가 일본에 있어 백제와 일본의 문화교류의 한 단면을 말해주고 있다. 

 

10.부여 나성

 

종 목  사적  제58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염창리 565 
시 대 삼국시대


백제의 수도 사비를 보호하기 위해 쌓은 둘레 84㎞의 성이다. 부소산성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부여시가지 외곽을 둘러싸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평양에 있는 나성과 함께 가장 오래된 나성 중의 하나이며,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긴 538년경에 쌓은 것으로 보인다. 성벽은 부소산성의 동문이 있던 자리에서 시작하여 금강변까지 흙으로 쌓아만든 것으로, 지금은 약간의 흔적만 남아있다.

 

성의 바깥쪽 벽은 급한 경사를 이루고 안쪽 벽은 완만하여, 성위에서 말을 달릴 만한 길이 있고 곳곳에 초소가 있다. 가장 높은 산봉우리인 필서봉에는 횃불을 올리던 봉수터와 건물터가 남아있다. 성안에는 백제의 왕궁을 비롯하여 관청·민가·절·상가 및 방어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나성의 전체적인 구조는 남쪽과 서쪽으로 금강이 흐르고, 또 물길도 파놓아서 자연적인 2중구조를 이루고 있다. 부여나성은 청산성·청마산성과 함께 수도보호를 위한 외곽방어시설로 중요한 성이었다. 

 

11.청산성

 

종 목  사적  제59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6 
시 대 삼국시대


부소산 동쪽 500m 지점의 낮은 구릉 위에 있는 백제 산성으로, 흙으로 쌓아만든 산성이다.

 

백제 무왕 6년(605)에 사비에서 웅진으로 통하는 길목을 지키기 위하여 나성과 함께 쌓았다. 외성의 북쪽 성벽은 나성과 연결되어 있어, 나성의 취약점을 보강하고 방어력을 높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의 독립된 산성이라기보다는 백제의 수도 사비를 보호하기 위해 부소산성과 연결하여 쌓았던 보조산성으로 보인다.

 

약 300m 정도의 내성과 500m 정도의 외성으로 이루어진 2중구조의 산성으로 보이지만, 내성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산봉우리를 빙 둘러쌓은 테뫼식산성으로, 동북쪽 성벽의 윤곽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성안 서부와 북부에 당시의 건물터로 보이는 곳이 남아있다. 

 

12.쌍북리 요지 

 

종 목  사적  제99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산30 
시 대 백제


충남 부여군 쌍북리에 있는 백제 때 토기 및 기와를 굽던 가마터로, 1941년 5월에 부여 시가지 계획도로 공사 중에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가마는 땅에 묻힌 상태여서 분명하진 않지만, 폭 135㎝, 높이 90㎝ 정도의 크기였다. 굴뚝 부분에서 아래로 3㎝ 정도가 남아 있고 아궁이 부분은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은 도로가 완성되면서 가마의 앞부분이 잘려져 낭떠러지로 되어 있으며, 시멘트로 석실을 만들어 보호하고 있다. 소나무숲에 둘러싸인 이 부근에서는 토기조각이나 가마에서 버린 물건들이 발견되지 않지만, 산등성이 너머의 경작지에서는 많은 수의 토기조각과 기와조각이 널려져 있다.

 

지금은 가마의 일부만 남아있지만 부여읍 안에 남아있는 유일한 토기 및 기와 가마터로서 그 의의가 크다.

 

13.궁남지 

 

종 목  사적  제135호 
지 정 일 1964.06.10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117 
시 대 삼국시대


부여 남쪽에 위치한 백제의 별궁 연못이다. 백제 무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궁궐의 남쪽에 연못을 팠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궁남지라 부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20여 리나 되는 긴 수로를 통해 물을 끌어들였고,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연못 가운데에 방장선산을 상징하는 섬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수로와 물가·연못 속의 섬이 어떤 모양으로 꾸며져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못의 중앙부에 석축과 버드나무가 남아있어 섬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주변에서 백제 토기와 기와 등이 출토되었다. 연못의 규모 또한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당시에 뱃놀이를 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크기를 짐작할 뿐이다.

 

고대 중국사람들은 동해바다 한가운데에 일종의 이상향인 신선이 사는 3개의 섬으로 삼신산이 있다고 생각하여, 정원의 연못 안에 삼신산을 꾸미고 불로장수를 희망했다고 한다. 궁남지는 이것을 본떠 만든 것으로 신선정원이라 불린다.

 

연못 동쪽에 당시의 별궁으로 보이는 궁궐터가 남아 있다. 현재 연못 주변에는 별궁 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우물과 주춧돌이 남아있고, 연못 안에는 정자와 목조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14.증산성 

 

종 목  사적  제156호 
지 정 일 1967.03.25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규암면 신성리 산86 
시 대 백제


흰 돌을 사용하여 쌓은 성이 마치 시루를 올려놓고 시루테를 바른 듯 하다고 하여 시루메산성이라고도 부르는 백제 산성이다.

 

성왕 16년(538) 수도를 사비로 옮기고 나서 수도를 보호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둘레는 약 600m이고 높이는 2∼3m 정도로 거의 무너진 상태이지만, 성의 남쪽부분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서쪽·남쪽·북쪽에 각각 문이 있던 흔적이 남아있다. 성벽은 자연 지세를 이용하여 쌓았지만 다른 성에 비하면 정교하지 못한 편이다. 성 안에는 백제토기와 기와조각이 많이 남아 있으며 동쪽에는 우물터가 있다. 은산면에 있는 이중산성·서쪽의 옥녀봉산성과 서로 바라 보면서 연결 되어있다.

 

증산성은 신라 문무왕 12년(672) 정월에 백제 고성성을 쳐서 이겼다는 기록에서 나타나는 고성성으로도 여겨지이며, 백제 부흥운동군의 한 거점으로도 여겨지는 중요한 산성이다.

 

15.정림사지 

 

종 목  사적  제301호 
지 정 일 1983.03.26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 
시 대 백제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시기(538-660)의 중심 사찰이 있던 자리다. 발굴조사 때 강당터에서 나온 기와조각 중 ‘태평 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라는 글이 발견되어, 고려 현종 19년(1028) 당시 정림사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즉 고려시대에 백제사찰의 강당위에 다시 건물을 짓고 대장전이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림사의 주요 건물 배치는 중문, 오층석탑, 금당, 강당에 이르는 중심축선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놓이고, 건물을 복도로 감싸고 있는 배치를 하고 있다. 그러나 특이하게 가람 중심부를 둘러싼 복도의 형태가 정사각형이 아닌, 북쪽의 간격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으로 되어있다.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절앞의 연못이 정비되어 있고, 석불좌상을 보호하기 위한 건물은 1933년에 지어졌다. 백제 때에 세워진 5층석탑(국보 제9호)과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다. 출토유물로는 백제와 고려시대의 장식기와를 비롯하여 백제 벼루, 토기와 흙으로 빚은 불상들이 있다.

 

16.능안골 고분군 

 

종 목  사적  제420호 
지 정 일 2000.07.22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75-7외 
시 대 백제


백제 능산리 무덤 동쪽에 있는 백제나성(사적 제58호)이나 청마산성(사적 제34호)과 함께 있는 백제 무덤이다.

1995∼1996년 사이에 조사되어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 30여기, 돌덧널무덤(석곽묘) 20여기, 독무덤(옹관묘) 4기 등을 발견하였다. 홑무덤(단장묘)이나 합장묘, 어린아이 무덤 등 다양한 형태로 매장되었는데, 주·사 등의 옷감 및 금귀고리, 은제관장식과 띠드리개장식(요대장식)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무덤의 형식과 출토된 유물을 통해 6∼7세기경 백제 귀족층의 무덤으로 추정되며, 백제 후기 무덤형식과 의복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17.부여 석조 

 

종 목  보물  제19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산16-1 국립부여박물관 
시 대 백제


부여현의 동헌건물 앞에 있었던 것을 일제시대에 옛 박물관 뜰로 옮겼다가 현재의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부여석조는 왕궁에서 연꽃을 심어 그 꽃을 즐겼다는 전설이 있는 백제시대의 유물로, ‘工’자형의 받침대 위에 둥근 꽃망울 형태로 올려져 있다. 받침대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간결한 모양이다. 그 위에 놓인 석조는 입구가 약간 오므라들면서 밖으로 둥글게 원호를 그리며, 바닥은 평평한 듯 하나 완만한 곡선이다. 표면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8개의 세로줄이 새겨져 있고,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제9호)의 1층 탑몸돌에 새겨진 당나라가 백제를 평정했다는 내용과 같은 글을 새기려던 흔적이 보인다.

 

이 석조에는 연꽃무늬 장식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사찰과 관계된 유물은 아닌 것으로 보이며, 본래 이 석조가 있었던 장소가 백제시대의 왕궁터로 전해지고 있어 당시 왕궁에서 쓰이던 석련지가 아니었나 짐작된다. 형태가 풍만하면서도 깔끔한 곡선으로 처리된 석조로, 백제인의 간결하고 소박한 미적 감각이 잘 나타나 있다.

 

18.금동석가여래입상 

 

종 목  보물  제196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산16-1 국립부여박물관 
시 대 삼국시대


하나의 광배에 불상·보살상을 함께 주조한 삼존불로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광배의 뒷면에는 정지원이라는 사람이 죽은 아내를 위하여 금으로 불상을 만들어 저승길을 잘 가게 했다는 내용의 글이 적혀있다.

 

본존불의 얼굴은 갸름하면서 살이 오른 모습으로 눈·코·입의 윤곽이 큼직해서 시원해 보인다. 양 어깨를 감싼 옷은 U자형의 주름을 지으면서 묵중하게 흘러내렸는데, 양 팔에 걸친 옷자락은 새의 날개깃처럼 양 옆으로 길게 뻗쳐있다. 손은 손바닥이 정면을 향하고 손끝은 아래로 향하고 있다. 부처의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의 양쪽 끝에는 합장하고 있는 두 협시보살이 있다. 오른쪽 협시보살은 본존불과 동일한 수법이며 길게 날리고 있는 옷자락은 광배의 가장자리를 이루고 있다. 왼쪽 협시보살은 얼굴만 남아 있고 신체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머리광배 위에는 연꽃속에 앉아 공양하고 있는 모습의 작은 부처 1구가 새겨져 있다.

 

이 불상은 조각양식이나 표현 수법이 고구려의 연가 7년명 금동여래입상(국보 제119호)과 같은 계통으로 중국 북위시대에 유행한 불상양식을 수용한 것이다. 금동계미명삼존불(국보 제72호)이나 금동신묘명삼존불(국보 제85호)과 같은 양식에 속하지만 그보다 조각수법이 약간 떨어지고 무늬가 간략화 되었으며 조형적인 탄력도 많이 감소되었다. 

 

19.태양리 백제 석실고분

 

종 목 충청남도 기념물 제45호

지 정 일 1984.01.1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구룡면 태양리 산281-1

시 대 백제

 

작은 구릉의 남쪽 경사면에 있는 백제무덤이다.

 

1983년 국립부여박물관에서 실시한 발굴조사에 의하면 이 무덤의 구조는 풍화된 자연암반층을 판 후 그 안에 다듬은 화강암 판석으로 내부를 만들고 무덤의 뚜껑까지 완전히 묻히도록 한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이다. 널길(연도)은 남벽면 가운데 있고 천정은 무덤의 횡단면이 윗면의 모서리를 죽인 6각이 되도록 동서 벽면의 윗부분을 안으로 꺾은 이른바 꺾임천정(평사천장)이다.

 

널길의 입구는 할석과 흑갈색 부식토로 막아 이중폐쇄하였다. 널방(현실) 바닥에는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납작한 잡돌을 정교하게 귀를 맞추어 깔았다. 이 바닥돌의 아래층은 두께 10∼15㎝ 가량의 모래층으로, 특수한 배수시설이 없이도 자연배수가 되도록 하였다. 껴묻거리(부장품)은 처음부터 넣지 않아서 관 못이외의 유물은 수습되지 않았다.

 

부여 태양리 돌방무덤과 같은 판석조의 굴식돌방무덤은 백제가 공주에서 부여로 도읍을 옮긴 후 많이 성행한 무덤으로서, 이 무덤 또한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의 것으로 추정된다.

 

20.용당리 우물

 

종 목 문화재자료 제387호

지 정 일 2004.04.10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구룡면 용당리 858-1

시 대 백제

 

우물이 자리한 지역은 부여 두리라는 자연마을로서, 부여 왕씨의 하나인 부여서씨가 거주한 지역으로 전해지며 오래전부터 이 지역은 만가대라 불리어져 왔다.

 

우물 깊이는 5.2m이며, 지상부는 정자형으로 결구되어 있는데 석재가구 한변의 길이는 180cm이고 높이는 45cm이다. 동리 이장에 의하면, 우물은 5∼6m 깊이를 굴광하여 밑바닥에는 잘 다듬은 석판을 깔아 놓았다 하며, 그 위에 잘 다듬은 각재석을 장방형으로 결구하여 겹쳐 쌓아 올리다가 중간부터는 크기가 다른 자연석 단면을 이용하여 원형으로 쌓았으며 지상부의 맨 윗쪽에는 부정형 장대석을 십자맞춤으로 결구하여 정자형을 이루었다.

 

이 우물은 매우 정교하게 다듬은 석재를 이용하여 축조한 수준 높은 공법의 우물이며, ’96년경에 조사된 굴광후 목재를 이용하여 만든 ‘구아리 백제우물 유적’과 매우 흡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 당시 유행했던 백제우물 양식의 하나로 추정케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정자형으로 결구한 우물 상단의 석재부분은 매우 심하게 닳아 있어 오랜 세월 동안 이용되어온 우물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잘 다듬은 석재를 이용하여 축조한 수준 높은 공법의 우물로서, 백제시대의 우물로 전해지며 당시 상태를 지금까지 유지하며 최근까지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더욱 중요시 되고, 부여구아리백제유적에서 발견된 우물과 관련하여 백제시대 우물의 형식을 밝힐 수 있는 귀한 자료이므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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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유래

부여 땅이 역사의 전면에 그 이름을 휘황하게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백제 역사와 긴밀히 연계되면서부터다. 475년에 백제가 고구려의 급습을 받아 수도인 한성(지금의 서울시 송파구 일대)을 상실하고 지금의 공주인 웅진성으로 천도함에 따라 그 서남방에 소재한 사비성(泗비城)이라는 이름의 부여 땅이 역사 기록에 나타나게 되었다. 백제 동성왕이 사비성 일원으로 자주 사냥을 나갔기 때문이다. 동성왕은 겨울철에 사비 벌판으로 사냥을 왔다가 큰 눈을 만나 길이 막혀 부여 땅에서 묵었는데, 이 때 가림 성주 백가가 보낸 자객의 칼에 찔려 숨을 거두었다.
이러한 선상에서 백제는 무녕왕대를 거치면서 부여로의 천도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천도는 일조일석에 이루어지는 게 아닌 국가적 중대사였다. 웅진성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는 귀족 세력들의 반발을 제압할 수 있을 정도의 왕권 확립이 전제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지혜와 식견이 영매(英邁)하였고, 일을 잘 결단하였다”는 통치권자 성왕의 능력에 따라 천도가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대통(大通) 연간(527∼528)에 웅진성에 창건된 대통사(大通寺)에서 출토된 대통 명문의 와당과 동일한 것이 부여의 부소산성에서도 출토되었다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즉 사비성으로의 천도가 538년이었으므로 천도와 관련해 이미 10년 전에 사비도성의 배후 산성인 부소산성이 축조되었음을 뜻한다. 천도가 치밀하게 준비되었음을 암시해 주는 대목이다. 아울러 궁성의 축조를 필두로 하여 반듯하게 구획된 조방제(條坊制)에 의한 시가지가 정비되어 갔다. 사비도성 전체를 에워싼 나성 축조도 시작되었다.
성왕 즉위 초부터 야심차게 추진된 사비성 천도는 16년째 되는 해인 538년에 마침내 이루어졌다. 기록에는 그 시점이 봄[春]이라고만 되어 있다. 그러나 국호를 새로 제정하는 등 국가 분위기를 일대 쇄신하려 했고, 오랜 기간에 걸쳐 준비되었던 만큼 춘정월에 천도가 단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사비성은 일명 소부리(所夫里)라고 했다. 소부리의 ‘소’는 ‘수리’, ‘부리’는 ‘벌’ 곧 ‘도회’를 가리킨다. 소부리는 ‘으뜸 가는 도회’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므로 백제 수도가 된 이후에 생겨난 지명인 것 같다.
그러면 성왕이 사비성으로의 천도를 단행한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그 이유는 먼저 당시 수도인 웅진성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웅진성은 방어하기에는 유리했지만 너무 협착해 웅비의 나래를 펼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현실적으로는 좁은 도성에 강물이 범람하는 등 홍수로 인한 피해가 거듭되었다. 그리고 웅진성 도읍 기간 동안에 두 명의 국왕이 살해되고 귀족들의 반란이 연이어 일어나는 등, 음모의 칙칙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내분을 종식시키고 국가 분위기를 일대 쇄신하기 위해서는 도읍을 옮길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국립부여 박물관...

 

*요약

 

백제의 문화유산을 수집·보존하고 전시하기 위하여 설립된 국립박물관.

 

설립연도 : 1929년

소재지 :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16-1

규모 : 부지 1만 9084평, 연건평 2,538평, 전시면적 695평

관람시간 : 오전 9시∼오후 6시(동절기에는 오후 5시까지)

 

* 본문

 

1929년 부여고적보존회가 발족되어 옛 객사 건물에 백제관을 개관하면서 박물관으로 발전하였다. 1939년 4월 일제 총독부박물관 부여분관이 되고, 1945년 8·15광복과 함께 한국의 국립박물관 부여분관이 되었다. 1975년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승격하고, 1993년 8월 현재의 건물로 이전하였다. 2002년 1월 현재 1만 3000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였으며, 그중 1,000여 점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건물 설계 당시 한국의 전통양식을 도입하여 8각형의 중정을 중심에 두고 상설전시실인 선사실·역사실·불교미술실과 야외전시실을 배치하였다. 선사실에는 부여지방을 중심으로 충남지역에서 출토된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 유물들을, 역사실에는 사비시대의 백제 유물과 삼국시대 유물들을 전시하였다. 불교미술실에는 사비시대 백제의 불교미술품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야외전시실에는 불상과 석탑 등의 조각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매년 유물 관련 조사보고서와 학술자료를 간행·배포하며, 성인 문화강좌·청소년 문화학교·모범장병 유적답사·어머니 박물관교실 등의 사회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관람시간은 오전 9시∼오후 6시(동절기에는 오후 5시까지)이며, 월요일과 1월 1일은 휴관한다.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16-1번지에 있다.

 

 

 

부여의 유적지...

 

[부여의 유물]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 - 국보 9호

부여능산리출토백제금동대향로 - 국보 287호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 - 국보 288호

당유인원기공비 - 보물 21호

보광사대보광선사비 - 보물 107호

부여정림사지석불좌상 - 보물 108호

부여장하리삼층석탑 - 보물 184호

무량사오층석탑 - 보물 185호

부여석조 - 보물 194호

금동석가여래입상 - 보물 196호

 

대조사석조미륵보살입상 - 보물 217호

무량사석등 - 보물 233호

군수리석조여래좌상 - 보물 329호

군수리금동미륵보살입상 - 보물 330호

무량사극락전 - 보물 356호

무량사미륵불괘불탱 - 보물 1265호

오덕사괘불탱 - 보물 1339호

부여세탑리오층석탑 - 시도유형문화재 21호

현내리부도 - 시도유형문화재 22호

금성산석불좌상 - 시도유형문화재 23호

 

부여석목리석조비로자나불좌상 - 시도유형문화재 24호

무량사김시습부도 - 시도유형문화재 25호

부여홍량리오층석탑 - 시도유형문화재 29호

의열사비 - 시도유형문화재 46호

부산각서석 - 시도유형문화재 47호

무량사당간지주 - 시도유형문화재 57호

김시습영정 - 시도유형문화재 64호

부여동헌 - 시도유형문화재 96호

홍산객사 - 시도유형문화재 97호

무량사오층석탑출토유물 - 시도유형문화재 100호

 

[부여의 유적지]

부여성흥산성 - 사적 4호

부여부소산성 - 사적 5호

부여능산리고분군 - 사적 14호

부여청마산성 - 사적 34호

부여군수리사지 - 사적 44호

부여나성 - 사적 58호

부여청산성 - 사적 59호

부여석성산성 - 사적 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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