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역사,문화재등좀 써주세요!! ㅠㅠ (매우급함)

고구려의역사,문화재등좀 써주세요!! ㅠㅠ (매우급함)

작성일 2010.04.19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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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6학년인 000이라고 합니다

내일 쌤이 고구려의대한 책을 만든데요.. 그레서 오늘 까지 조사해야 하는뎁

좀 부탁드릴께요 좀 길게요~!! 그리고 정확하게!! 참!! 문화재도 ㅠㅠ

고구려에 대한 모든걸 써주세요 문화재만..;;

역사는 좀 길~~~~게~~~~ ^^;;

 

최대한 빨리!!!!!!!!!!!!!!!!!!!!!!!!!!!!!!!!!!!!!!!!!!!!!!!!!!!!!!!!!!!!!!!!!!!!!!!!!!!!!!!!!!!!!!!!!!!!!!!!!!!!!!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1. 역사

 : 기원전 2세기 이전에 성읍국가로 출발한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동부여에서 내려온 기마민족 주몽 일파에 의해 한층 규모가 큰 연맹왕국으로 발전했으며, 정치적 주도권은 계루부가 장악했다. 그러나 계루부 이외에도 소노부 혹은 비류부, 절노부 혹은 연나부, 순노부 혹은 환나부, 관노부 혹은 관나부 의 4족이 있어, 서로 연맹을 맺었다.

 고구려는 기본적으로 토양이 척박하여 약탈경제가 경제를 주도하였는데, 때문에 기름진 남쪽으로  영토를 넓히지 않으면 안됐다. 때문에 기원후 3년, 수도를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겼다.

1세기 무렵의 왕인 태조왕(53~146)은 근 100여년간 집권하면서(말이안되지만...)계루부 고씨의 왕위세습권을 확립하여 태조왕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함경도의 옥저를 복속시켜 후방기지를 확보하고 서쪽으로 요동과 현도군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공세를 취했다.

 2세기 후반 고국천왕(179~197)때에 이르러, 왕권은 더욱 안정되고 중앙집권도 한층 강화되었다. 이것은, 부족적 성격의 5부(지방구역..일종의 전라도, 충청도..이런것)를 행정적 의미의 5부로 개편하고 과거 5부족의 족장들을 중앙귀족으로 편입했다. 왕위 계승도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변했으며 절노부의 명림씨가 왕비족으로 정해졌다. 또한 을파소라는 재상을 영입하여 진대법을 실시하여 농민이 귀족의 노예로 전락하는 것을 막았다.

 내치가 안정되면서, 3세기 동천왕(227~248)은 압록강 입구의 서안평을 공격하여 중국과 낙랑군을 차단하려 했는데 실패하고, 위(魏)의 비위를 건들여(당시 한나라 이지만, 한황제는 위나라 조조의 수중에 있었다.)244년에 위의 관구검의 침입을 받아 환도성이 함랍대는 사태가 벌어져 왕은 옥저로 피난가고, 우유와 밀우의 활약으로 국난을 극복한다.

 이후 위가 멸망하고 3세기 후반 진이 들어섰지만, 4세기 초부터 5호16국이 들어서 국경을 위협하자, 고구려는 이를 기회로 요동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는 한편, 4세기초 미천왕 14년(313)에 대동강 유역의 낭락군을 공격하여 차지하는데 성공했다.

 중국과의 공방전을 하던 고구려는 4세기 중엽 고국원왕(331~371)때, 북방족의 하나인 전연의 모용황의 침입을 받아 궁궐이 불타고 미천왕의 시체가 도굴당하고, 왕의 생모와 남녀 5만 명이 포로로 잡혀가는 국난을 당했다.(342) 뒤이어 371년에 백제의 근초고왕의 침입으로 고국원왕이 평양에서 전사하는 비극이 생겼다.

 그 뒤를 이어 소수림왕(371~384)이 재위하여 전진의 순도에게 불교를 수용하고(372), 유교 교육기관인 태학을 설립했으며, 율령을 반포했다.(373) 이후, 5세기초 광개토왕(391~413)은 대규모정복사업을 일으켜 후연을 공격하여 요동을 확보하고 북쪽으로 숙신을 정벌했으며, 남쪽으로 백제를 쳐 한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왜국의 침입을 받은 신라를 도와 남해안까지 진출하였다. 이는 광개토대왕릉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어, 장수왕(413~491)이 즉위하여 정복사업을 계승하였다. 이 당시 중국은 남북조시대(439~589)로 분열되어 있어, 이를 이용한 등거리외교를 펼치면서 중국을 견제했다. 그리고 427년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하였는데, 이 때문에 신라와 백제는 433년 동맹을 맺고, 472년엔 개로왕이 북위에 원군을 요청하기도 한다. 그러나 475년에 장수왕은 한성을 함락하여 개로왕을 죽이기에 이른다. 그리고 죽령일대와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충북 중원에 중원고구려비를 세운다.

 이후 삼국의 정세는 신라의 주도로 돌아가는데, 고구려는 한강유역을 되찾기 위해 590년 온달장군을 보내 한강유역을 공격하다가 아차산성에서 전사하고 만다. 백제는 538년 부여로 천도한뒤 더욱 위축되어 신라와 고구려 양자간의 각축전이 된다.

 신라는 혼자만의 힘으로 고구려를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수와 당과 밀월관계를 유지한다. 때문에 수나라는 정복사업과 더불어 신라를 도와주기 위해 고구려를 공격하였다가 612년의 살수대첩 등을 계기로 국력이 소진되어 618년에 멸망하고 만다. 이후, 당나라 역시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번번이 실패를 거듭하다 668년애 고구려를 멸하고 만다.'

 2. 문화재

고구려 문화재

.국내성:고구려 초기 도읍지 현재 중국 지린 성(길림성) 지안 현 퉁거우입니다.

유물 유적 : 장군총,무용총,광개토대왕릉비가 있습니다.

 

장군총 : 3세기 초부터 427년까지 고구려가 도읍한 지안현 퉁거우평야[通溝平野]에는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와 고구려 최대형 무덤인 태왕릉(太王陵)·사신총(四神塚) 등 석릉과 토분(土墳) 1만 기(基)가 있으나 외형이 거의 완존(完存)한 석릉은 이것뿐이다.

 

 

무용총

중국 둥베이[東北]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있는 고구려의 고분벽화(古墳亨?/SPAN>

 

비신(碑身) 높이 5.34m. 각 면 너비 1.5m.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도 한다.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평양성:국내성이후 고구려 도읍지

유물 유적 : 을밀대,대동문,최승대가 있습니다.

 

을밀대: 북한 사적 제7호. 사허정(四虛亭)이라고도 한다. 6세기 중엽 고구려시대에 평양성의 내성장대로 처음 건립되었다.

 

대동문 : 북한 국보급 문화재 제1호이다. 높이 19m, 축대높이 6.5m, 길이 26.3m, 폭 14.25m이다. 문루는 앞면 3칸, 옆면 3칸이며, 석축 위에 2층으로 된 누각을 갖춘 성문이다. 6세기 중엽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성 내성의 동문으로 최초 건립되었다. 고려 초 947년과 조선 초 1392년에 복원되었으며 1635년(조선 인조13년)에 재건되었다

 

 

강서 대묘 벽화평안 남도 대안시 삼묘리(옛 이름은 강서군 강서면 삼묘리)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고분의 하나인 강서 대묘의 벽화인 '현무도'이다.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신선도】장천 1호분 벽화. 자포(紫袍)에 백색 목도리를 두르고 백포(白布)의 건(巾)을 쓴 사자(死者)의 수호신인 신선이 흰 학을 타고 햇빛에 물든 하늘을 비상(飛翔)하고 있다. 가학신선도(駕鶴神仙圖)·학탄신(鶴誕辰)이라고도 부른다. 5∼6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벽화로, 신비감이 감도는 조용한 분위기에 고구려인의 기풍이 엿보인다. 월신도 왕족의 묘로 추정되는 지안 4호분의 널방[玄室]에 그려진 신선도. 선녀신(仙女神)인 월신이 달을 이고 나는 용을 타고 비상하는 형상인데 달 속에는 두꺼비가 있다. 생동감 넘치는 구도에 수려한 색채, 선조가 유동하고 변화가 있는, 6세기경의 원숙미를 보여주는 벽화이다. 일신도 역시 지안 4호분의 신선도의 하나. 월신도와 대칭을 이루는 해의 신선이며 남신이다. 청룡을 타고 있는 듯한, 반인반수(半人半獸)로 보이는 형상의 남신이 삼족오(三足烏:不死烏)가 들어 있는 해를 이고 구름에 싸여 비상하는 내용이다. 생동감 있는 구도는 고구려인의 기상을 강조하고 있고,선조 또한 유동성이 넘치며, 색채 역시 화려하여 중국의 둔황[敦煌]벽화보다 더 수려하다.

청룡도 지안 4호분 벽화. 긴 꼬리가 둘인 청룡이 가로질렀고 용머리위쪽에 날개깃을 단 신선이 연꽃을 타고 있다. 거침없이 유창한 선과 화려한 색채가어우러진 그림이다. 나는 용과 변화를 이룬 연화무늬들이 조화를 이루어 강한 생동감을 주고 있으며, 널방 내 벽화면의 전(全) 공간을 대담하게 구성하고 있다. 다채로운색조와 자유분방한 창조력이 비범하며, 조형기법이 고구려벽화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데, 벽화의 양식화한 연속문양 또한 특이하다. 농신도지안 5호분의 벽화.머리는 소, 몸은 사람 모습을 한 반인반수의 농신이 나무 숲 공간을 날고 있는 형상의 그림이다. 손발의 율동적인 표현과 옷·옷고름의 동적(動的)인 선의 움직임 등 매우 추상적이면서도 생동감이 넘치며, 발에는 신을 신고 있어 특이한 인상을 준다. 고구려벽화예술의 정상을 이루는 그림으로, 이 벽화에 잇대어 복희(伏羲)·여와(女綾) 등의 형상도 보인다.

용승신·기린승신도 용을탄 신선과 기린을 탄 신선이 비상하는 형상을 나란히 그린 그림. 벽화의 윗면에는 해를 상징하는 원이 그려져 있고, 아래에는 달을 상징하는 원이 그려져 있는데, 용을 탄신선은 왕이 쓰는 면류관과 같은 것을 쓰고 있어 이 무덤도 역시 왕족의 무덤임을 추정하게 한다. 그림은 수려한 색상과 함께 세밀한 기법을 보이고 있으며, 구도의 박진감은 고구려벽화의 특징을 이루는데, 유려한 선의 꼬리와 날카로운 발톱이 대조를 이루면서 비상하는 청룡의 생동감 넘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평양은 그 기나긴 역사와 더불어 명소 ,고적이 많기로도 이름이 높다.학술과 종교의 도시이고, 특히 한국 그리스도교의 중심지이다.

평양 6문대동문은 조선시대 태종(太宗) 때 창건하여 선조(宣祖) 때 개축한 것이며 결구(結構)의 웅대함과 기교의 정묘함은 조선시대 전기의 예술품으로써 높이 평가된다. 보통문(普通門)은 대륙의 영빈문(迎賓門)인 대동문과 같이 특히 웅장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현존하는건축물은 고려시대 성종(成宗) 때 건조된 것으로 전한다. 대동문과 보통문 중간에 단군과 기자를 제사지내는 숭령전(崇靈殿)과 숭인전(崇仁殿)이 있다.칠성문(七星門)이 서 있다. 상부는 누각을 이루고 있으나 대동문 ·보통문에 비하면 규모가

훨씬 작다. 칠성문에서 경사가 느린 넓은 언덕길을 약 1 km쯤 올라가면 언덕 위에 유명한 을밀대(乙密臺)와 6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고풍스러운 사허정(四虛亭)이 서 있다. 을밀대에 올라서면 모란봉(牧丹峰)이 가까이에 있고 굽어보면 현무문(玄武門) ·영명사(永明寺) ·부벽루(浮碧樓) 등이 푸른 수림 사이로 바라보이며, 맑게 흐르는대동강에는 능라도(綾羅島) ·반월도(半月島)가 떠 있다.

 2)태왕릉

 중국 지린성 지안현 여산 남쪽 기슭에 있는 고구려의 기단식 돌무지무덤.

 현재는 분구의 대부분이 무너져내린 기단부와 그 위층의 방단부 일부만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무덤의 동북 500m 거리에는 유명한 광개토왕릉비가 있다.

명문전의 내용, 무덤의 규모, 근처의 건물터, 광개토왕릉비 등을 근거로

광개토왕의 능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3)광개토대왕릉비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제19대왕으로서 재위 391∼412동안 영락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으므로 재위 시에는 영락대왕이라 일컬어졌으며,

사후의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다.

재위기간 동안 고구려의 영역을 크게 확장시켜

서로는 요하, 북으로는 개원∼영안, 동으로는 훈춘, 남으로는 임진강 유역에 이르렀다.

대왕은 내정의 정비에도 노력하여, 중앙 관직을 신설했는가 하면,

역대 왕릉의 보호를 위해 수묘인 제도를 재정비하였으며,

393년에는 평양에 9개의 절을 창건하여 불교를 장려하는 한편,

 아들 장수왕 때 단행되는 평양 천도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러한 대왕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아들인 장수왕이

414년에 세운 비석이 광개토대왕비이다.

이 비석은 사면석 비로서 높이가 약 6.39m인데,당시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 동쪽 국강상에 대왕의 능과 함께 세워졌다.

 

 

4)각저총

 중국 지린성 지안현 여산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벽화고분.

 이 벽화고분은 다른 고분과는 달리 청룡 ·백호 ·주작 ·현무와 같은

사신그림이 없지만, 앞방에 들어가면 왼쪽과 오른쪽 벽에 커다란 나무 두 그루가 그려져 있고,

앞쪽 벽에는 눈동자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듯한 사나운 개가 그려져 있다.

널방의 동쪽 벽에는 이 이름이 붙여지게 된 씨름그림이 나무를 중심으로 그려져 있고,

북쪽 벽에는 묻힌 사람의 생전의 실내모습을 연출한 듯 지붕과 커튼을 친 집안에

여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서쪽 벽에는 소가 끄는 수레와 안장을 얹은 말이 그려져 있으며,

천장은 화려한 불꽃문양과 인동당초문으로 장식되어 있다. 무늬 사이로 삼족오가 있는

해와 두꺼비가 있는 달이 있다. 벽의 네 모서리에는 두 팔을 치켜 들고

천장을 떠받치는 형상의 역사상을 배치하였다. 축조방식이나 시기 ·벽화의 내용 등이 무용총과 비슷하다.

 

문화재등좀 써주세요!! ㅠㅠ (매우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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