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민주정치사건 질문이요!(내공 30)

사회 민주정치사건 질문이요!(내공 30)

작성일 2021.10.24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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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2000~2009)에 있었던 민주정치 관련 사건이 어떤 것이 있는지, 그 사건의 배경/과정/민주정치에 이바지한 점까지 부탁드립니다...다른 곳에서 가져온 거면 출처도 꼭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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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시계 또는 사루(沙漏), 사루계(沙漏計)는 시계 중 하나로, 유리 등에 들어있는 모래를 이용해서 시간을 재는 도구이다. 8세기 프랑스성직자 라우트프랑이 발명하였다.

기원후 350년 경의 사르코파구스. 펠레우스와 테티스의 혼인을 나타낸다. (모피우스가 손에 모래시계를 들고있는 모습을 확대하였다)

모래시계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다. 전작인 물시계는 고대 인도에서 발명되었다 .American Institute of New York에 따르면, 모래시계는 기원전 약 150년 알렉산드리아에서 발명되었다.[1] Journal of the British Archaeological Association에 따르면 소위 모래시계는 St. Jerome (기원후 335년) 이전에 사용되었으며 최초의 모래시계의 표현은 기원후 350년 경 펠레우스와 테티스의 혼인을 나타낸 사르코파구스로 거슬러올라간다.[2] 이는 18세기 로마에서 발견되었고 요한 요아힘 빙켈만이 연구하였는데, 그는 그의 손에 모피우스가 들고있는 모래시계를 언급하였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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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시계는 위쪽과 아래쪽의 두 칸으로 나뉘어 있으며, 두 칸 사이는 좁은 통로(구멍)로 연결되어 있다. 모든 모래가 아래쪽에 놓여 있는 상태에서 모래시계를 뒤집으면, 중력에 의하여 모래가 통로를 향해 아래쪽으로 내려간다. 각 모래시계마다 모든 모래가 내려가는데 필요한 시간은 다르다. 그 시간은 30, 1, 2, 3분, 5분, 10분, 30분, 1시간, 1일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모래시계의 모든 모래가 내려가는데 필요한 시간은 모래시계 내부에 있는 모래알갱이의 크기와 두 칸 사이의 구멍의 크기에 따라 다르다. 모든 모래가 떨어지면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래시계가 정교하게 만들어진 경우 초 단위까지 정밀하게 측정이 가능하다. 비슷한 원리의 시계로는 물시계 등이 있다.

해적 크리스토퍼 무디의 "블러디 레드" jack, c. 1714

대부분의 다른 시간 측정법과 달리, 모래시계는 구체적으로 과거미래 사이로 현재를 나타내고, 이는 그것을 시간 자체의 지속적인 상징으로 만들었다.

모래시계는, 때로는 은유적 날개의 추가와 함께, 종종 인간의 존재가 순식간이며, "시간의 모래"는 모든 인간의 삶을 위해 떨어지는 것의 상징으로 묘사됐다.[4] 따라서 그것은 해적의 피해자의 마음에 두려움을 공격하는 해적기에 사용되었다. 영국에서, 모래시계는 때때로 관에 넣고,[5] 그들은 수 세기 동안 묘비를 축복했다. 모래시계는 시간의 상징으로 연금술에 사용되었다.

런던 그리니치의 전 도시 자치구GMT의 원점으로 그리니치의 역할을 상징하는 문장에 모래시계를 사용했다. 지구의 후계, 그리니치 구문장에 두 개의 모래시계를 사용한다.

시간의 상징으로서의 모래시계의 인식은 시간 기록기로서의 노후화에 인한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 텔레비전 연속극 우리 생애 나날들은 1965년 첫 방송 이후, 맥도널드 캐리가 말하는, "모래시계 속 모래처럼, 우리 생애 나날들처럼," 나레이션과 함께 그 오프닝 크레딧에 모래시계를 표시했다.

다양한 컴퓨터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프로그램 작업 중 기간에 모래시계 포인터로 변경되며, 사용자의 입력을 받아 들일 수 없다. 그 기간 동안 다른 프로그램, 예를 들어 다른 창에서는, 일반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이러한 모래가 사라지지 않을 때, 프로그램은 무한 루프에 있는 것이고 종료해야 하거나, 어떤 외부 사건 (사용자 CD 삽입 등)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유니코드 U+231B (⌛)에 모래시계 기호가 있다.

골동품 모래시계

대칭 때문에, 모래 시계를 닮은 그래픽 표시는 개체가 발생하지 않은 문화의 예술에서 볼 수 있다. 정점에 합류한 삼각형의 수직 쌍은 아메리카 원주민 기술 분야에서 일반적이다; 북미에서,[6] 그것은 천둥새나 (더 연장된 형태로) 적 두피의 본문을 나타낼 수 있으며,[7][8] 남미에서는, 춘추족 정글 거주자를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된다.[9] 줄루족에서 그것은 결혼한 남자를 뜻하며, 반대로 한 쌍의 삼각형이 아래에 결합된 것은 결혼한 여자를 뜻한다.[10] 신석기 예로는 스페인 동굴 벽화들 사이에서 볼 수 있다.[11][12] 전문가들은 심지어 북솔로몬에서 반복되는 원과 십자 패턴으로 더 복잡한 대칭을 가진 모양에 이름 "모래시계 동기"를 제공했다.[13]텔레비전 시리즈 타임 터널알 수 없는 도전자에서, 프로젝트 틱 톡의 회원들은 시간 여행이나 시간 촉박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모래 시계를 사용한다.

동굴벽화(洞窟壁畵)는 동굴이나 암벽(cliff, rock face)의 벽면 및 천장 부분에 그려진 그림의 총칭이다. 현존하는 인류 최초의 그림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벽화는 4만 년 전의 후기 구석기 시대부터 제작되었다.

벽화는 모두가 동굴 깊숙한 곳에 그려져있고 입구 부근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광물성의 안료(顔料)로 그려진 채화(彩畵)와 윤곽을 파 낸 선각화 두 종류가 있다. 가장 오래된 벽화는 오리냐크 초기의 손바닥의 음형(陰形)이나 양형(陽形)이다. 이 손모양과 병행하는 시기에, 점토질의 암반(岩盤)에 손가락으로 아무렇게나 그린, 평행하고 교차하고 굴곡된 이른바 '마카로니'가 그려졌다. 중기에는 데생풍(風)의 동물이 많지만 동물의 다리는 두 개만이 나타나 있고 형식은 부자연스럽다. 그러나 서서히 묘선(描線)에 비수(肥瘦)가 생기고 또 다리도 네개로 표현하게 된다. 후기에는 드물게 2채화(二彩畵)가 나타나지만, 그러나 오리냐크 회화는 본질적으로 데생이다.

솔류트레기(期)에서는 회화적 유품이 없고, 막달레니아 초기에 소묘풍(素描風)의 회화에서 다시 출발한다. 점차 선의 억양이 생기고 중기에는 동물의 털이 선영(線影)으로 처리되거나 찰필화(擦筆畵)와 같은 효과를 나타내는 평도(平塗)한 회화가 나타난다. 그리하여 후기에는 적색·갈색·황색·흑색 등 두 색 이상의 그림물감을 섞거나 분류해서 칠한다든지 하여 형상의 입체감과 현실감을 꾀하는 다채화(多彩畵)가 나오게 된다. 동물의 자태도 자연스럽게 되어 순간의 운동이 매우 리얼하게 그려지게 되었다. 막달레니아 최종기엔 적색의 반점이나 염주알 같은 도형적(圖形的)인 표현이 나타나서 구석기시대 미술은 그 막을 내리게 된다. 저명한 유적으로서 오리냐크기의 크냐크, 패슈 메를, 막달레니아기의 니오, 라스코, 알타미라, 폰 드 고옴 등이 있다.[1]

동굴(洞窟)은 자연적으로 땅 속에 생긴, 어느 정도의 크기가 있는 공간이다. 보통 인간이 들어갈 수 있는 정도 이상을 뜻한다. 흔히 동굴은 땅속에서 용식 작용에 의해 모암이 침식되거나, 화산활동으로 용암이 겉에서부터 식으면서 생성된다. 동굴 내부는 평평하거나, 경사지거나, 수직으로 내려갈 수도 있다.

보통 흔하게 볼 수 있는 동굴은 석회동굴이며, 화산이 있는 지형에서는 화산동굴이 발견 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석회동굴은 지질상으로 석회암 지층이 있는 곳에서 발견이 되며, 국내의 경우 고생대 캄브리아기 - 오르도비스기의 조선계 석회암지층에서 발견이 된다. 대부분의 동굴이 영월, 태백, 강릉, 삼척, 동해, 단양 등의 지역에서 발견이 된다.

동굴을 연구하는 학문을 동굴학(Speleology)라고 한다.

동굴에서만 사는 특별한 생명체들이 간혹 발견된다. 동굴 생물이 그것인데, 박쥐 등이 대표적이다.

조류에서 베네수엘라의 왕쏙독새와 같이 동굴 속에 둥지를 만드는 것이 있다. 이들 동물은 야행성이기 때문에 거의 암흑 세계에서 일생을 지내며, 음향을 이용하여 날아서 먹이를 잡는 구조가 발달되어 있다. 일생을 동굴 내의 암흑 속에서 지내는 동물들은 동굴 밖에 서식하는 근연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들 동물은 양서류보다도 하등한 동물로 몸은 작고 가늘며 색소가 결핍되어서 엷은색을 띠고 있다. 아드리아 해안 가까이에 있는 동굴의 물 속에 사는 양서류인 올챙이는 몸이 흰색이고 장님이다. 북아메리카에는 2종 이상의 동굴생 도롱뇽이 살고 있다. 어류로는 카라신과의 장님동춘고기가 있다. 이것의 눈은 퇴화되었고 몸은 흰색이며, 동굴생활을 하는 다른 어류와 마찬가지로 몸길이가 7.5cm 이상 되는 일은 드물다. 갑각류인 징거미 새우 등 새우류에는 동굴생이 많다.[1]

동굴학(洞窟學)은 동굴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학문을 말하며, 동굴형태학, 동굴육수학, 동굴생물학 등이 동굴학에 포함된다.[1] 19세기부터 발달하여 제2차 세계대전 후 최초의 국제동굴학회가 개최되었다. 주요 연구분야는 동굴의 생성원인과 모습, 동굴내부의 2차적으로 생긴 생성물들과 생물들을 비롯하여 고대에 동굴에서 서식하던 생물들까지 포함한다. 동굴의 생성원인은 주로 화산활동에 의한 것들이 대부분이므로 이와 연계되어 연구하는 학문이다.

한국동굴환경학회동굴카르스트 관련 분야의 학술적 조사 연구로 산업, 경제, 교육, 문화, 환경 및 국방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2010년 5월 7일 설립허가된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 소관의 사단법인이다. 사무실은 서울특별시 광진구 화양동 1 건국대학교 과학관 210호에 있다.

한국의 천연문화재 관련 동굴카르스트에 대한 조사 및 연구개발

동굴과 카르스트지역에 연계된 문화재의 발굴 및 자연보존에 관한 연구

북한지역의 동굴 및 카르스트 관련 자료의 수집 및 연구 활동

제주 화산 동굴지대의 세계문화유산 지정에 따른 홍보 및 학술연구

동굴의 지속가능한 보전과 관광화를 위한 U-Cave의 보급

카르스트 지형(독일어: Karst)이란 석회암 등의 물에 녹기 쉬운 암석으로 구성된 대지가 빗물 등에 의해서 용식되어서 생성된 지형이다.

암석은 극히 미량만 물에 용해되지만, 그 용해성은 암석의 화학 구조에 의해서 크게 다르다. 석회암은 탄산칼슘으로 되어있어 다른 암석에 비해 물에 대한 용해성이 높다. 거기서 물의 흐름에 의해서 침식되어, 바위가 조금씩 물에 녹아 돌리네, 종유동(석회동굴) 등의 특수한 지형이 형성되며, 이러한 특징적인 지형을 카르스트 지형이라고 한다.

《카르스트》라는 말은, 슬로베니아크라스(Kras) 지방의 독일어 명칭에 유래한다. 이 지방에는 중생대에 형성된 석회암이 두텁게 분포하여, 용식에 의한 지형을 많이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연구가 최초로 진행되어, 후에 같은 종류의 지형을 나타내는 통칭으로서 《카르스트》가 유럽에서 널리 사용되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경우 고생대의 조선계 석회암 지층에 집중적으로 분포하는데, 구체적으로 강원도 남부의 지형 중 삼척, 영월충청북도 단양, 경상북도 문경 등에 걸쳐 있다. 이 지역에 매장되어 있는 석회석은 시멘트 공업의 원료로 사용되기도 하며, 앞서 언급한 지역에 석회석 광산이 다소 많이 분포한다.

강원도 정선군 백복령의 카르스트 지형은 학술적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 제440호로 지정되었다.

정선 백복령 카르스트 지대(旌善 白茯嶺 카르스트(Karst) 地帶)는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직원리에 있는 지질지형이다. 2004년 4월 9일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 제440호로 지정되었다.[1]

한반도의 캄브리아기-오르도비스기의 조선누층군의 석회암 지대에는 카르스트 지형이 발달한다. 이들 중 백복령 카르스트 지대는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로서 백두대간 상에 놓여 있어 큰 의미를 갖는다. 이곳에는 카르스트 지형의 특징 중 하나인 돌리네폴리에가 분포한다. 대부분의 돌리네는 대체로 넓이에 비해서 깊이가 아주 얕은 형태이며, 폭은 수 m를 갖는 작은 규모로부터 수십여 m에 달하는 것까지 발달된다.

특히 임계면 가목리 북쪽 능선 주위에는 50여개의 크고 작은 돌리네가 있다. 이 지역에 발달한 돌리네를 비롯한 카르스트지대의 영향으로 지하에 스며든 유수나 빗물들은 산계리 지역으로 흘러나와 계곡수 또는 용천수와 같은 샘물을 이루는 것으로 추정된다. 백복령일대는 다른 카르스트 지대와 달리 경작지로 이용되기보다는 식생으로 덮혀 있다. 그러나 부근에 석회석 광산이 성업 중에 있어 이 지역이 훼손될 우려가 있다.

백복령 카르스트 지대는 지질학적 특징이 일정한 면적에 집중적으로 발달하고 있어 학술적 가치뿐 만 아니라 자연학습장으로서 가치도 높다.

임계면(臨溪面)은 대한민국 강원도 정선군이다. 면적은 140.94 km2, 인구는 2015년 12월 말 주민등록 기준으로 3,667명이다.

임계면은 정선군청 소재지에서 북동쪽으로 36 km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면적이 244km2로 군내 9개 읍면 중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지역이다. 또한 국도 제35호선국도 제42호선이 교차하는 지역으로 북쪽으로는 강릉시, 동쪽으로는 동해시삼척시, 남쪽으로는 태백시와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해발 1,130m의 괘병산과 1,055m의 석병산, 1,354m의 고적대 등의 산이 있다. 정선군 농산물 생산량의 26%를 차지하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지역으로 비옥한 농토에서 질 좋은 농산물인 고랭지 채소와 감자 등을 주로 생산하고 있다.

명승지로는 천연기념물 제440호인 백복령 카르스트 지형과 국가지정 민속자료인 외재 이단하 부부의 옷과 이를 보관하는 있는 강원도지정 지방기념물인 《이종후 가옥》과 장찬성(송계산성)과 구미정 등 다양한 관광자원을 갖추고 있는 고장이다.[1]

신라 경덕왕 : 9주로 명주군에 속함

1018년 : 강릉군에 속함

1906년 9월 24일 (조선 고종 43년) : 행정구역 개편으로 강릉군에서 정선군으로 편입

1973년 7월 1일 : 삼척군 하장면 가목리와 도전리를 편입함[2]

1989년 1월 1일 : 임계면 봉정리를 북면(현재 여량면)으로 이관

2009년 11월 1일 : 골지리(骨只里)가 문래리(文來里)로 명칭 변경[3]

가목리(柯木里)

도전리(道田里)

직원리(稷院里)

임계리(臨溪里)

송계리(松溪里)

봉산리(蓬山里)

낙천리(樂川里)

용산리(龍山里)

문래리(文來里)

덕암리(德岩里)

고양리(高陽里)

반천리(盤川里)

국도 제42호선 (인천 ~ 동해선, 國道第四十二號 仁川東海線)은 인천광역시 중구 인천역사거리에서 강원도 동해시송정동 동해항 교차로까지 연결하는 대한민국의 일반 국도이다. 이 중에서 인천광역시 남동구 장수서창동에서 수원역까지 구간은 수인로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국도 제35호선 (부산 ~ 강릉선, 國道第三十五號 釜山江陵線)은 부산광역시 북구 덕천 교차로와 강원도 강릉시 중앙동 옥천오거리를 연결하는 대한민국의 일반 국도이다.

경덕왕(景德王, ? ~ 765년, 재위: 742년 ~ 765년)은 신라제35대 왕이다. 성은 (金)이고, 휘는 헌영(憲英). 효성왕의 친동생이며, 아버지는 제 33대 왕 성덕왕. 어머니는 이찬 순원(順元)의 딸 소덕왕후(炤德王后)이며, 왕비는 서불감 김의충(金義忠)의 딸 만월부인(満月夫人, 경수왕후(景垂王后))이다. 효성왕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742년 5월에 효성왕이 사망하자 왕위에 올랐다. 경덕왕대는 신라가 극성기에 달하던 시기였다.

성덕왕(聖德王, ? ~ 737년)은 신라의 제33대 왕(재위: 702년 ~ 737년)이다. 신문왕의 둘째 아들이며 효소왕의 친동생이다.

신문왕신목왕후의 차남으로, 초명(初名)은 천중(天中)이며, 휘(諱)융기(隆基)였으나 당나라(唐)로부터 현종(玄宗) 황제와 휘가 같다는 항의를 받고 흥광(興光)으로 고쳤다.[1]

자식을 두지 못한 효소왕이 죽은 뒤 백성들에 추대되었으며, 즉위 3년(704년) 여름 5월에 승부령(乘府令) 소판 김원태(金元泰)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

원년(702년) 9월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문무 관리들에게 작 1급씩을 올려 주었으며, 여러 주와 군의 1년간 조세를 면제하였다.[2] 이를 시작으로 5년(706년) 12월과 7년(708년) 여름 4월, 6년(707년) 봄 2월, 8년(709년) 가을 8월, 9년(710년), 12년(713년) 겨울 12월, 14년(715년) 겨울 12월, 15년(716년) 여름 6월, 26년(727년) 봄 정월, 30년(731년) 여름 4월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죄수들에 대한 사면령을 내렸다.(《삼국유사》에는 태종 무열왕을 위해 봉덕사를 짓고 이레에 걸쳐 인왕도량을 열면서도 또 대사면령을 내렸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훗날 안정복으로부터 「지나친 남발이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3]

왕의 치세에는 4년(705년)과 6년(706년)에 걸쳐 거듭 흉작이 들었고, 누리의 피해와 가뭄, 산사태 같은 숱한 천변지이가 있었다. 왕은 즉위 4년(705년) 가을 8월과 30년(731년)에 여름 4월에 노인들에게 술과 밥을 내려 주었으며, 겨울 10월에 나라 동쪽의 주(州)와 군(郡)에 흉년이 들어 많은 유랑민이 생기자 친히 사자를 보내어 진휼하게 했다. 5년(706년)에는 창고를 열어 진휼하였는데, 곡식이 여물지 않아 기근이 이듬해까지 이어졌고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하자, 6년(707년) 정월 초하루부터 7월 30일까지, 한 사람에게 하루에 벼 3되씩을 나누어 주었다. 이때 소요된 쌀은 모두 30만 5백 석에 달했다고 전한다. 2월에는 대사면령과 함께 백성들에게 오곡 종자를 나눠 주었다고 한다. 17년(718년) 2월에는 왕이 직접 나라 서쪽 지방의 주와 군을 두루 돌며 위문하고, 나이 많은 이와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늙은이들을 몸소 위로하고 물건을 내려 주기도 했다. 21년(722년) 가을 8월에는 처음으로 백성들에게 정전(丁田)을 지급하였는데, 이는 나라 안의 모든 땅은 모두 왕의 땅이라는 왕토사상(王土思想)에 근거한 것으로, 백성들이 기존에 소유하고 있던 사유지에 대한 소유권을 법제상으로 추인하고, 토지가 없는 백성들에게 국유지를 지급하는 조치가 뒤따랐던 것으로 여겨진다.

중앙 관료 기구도 정비되어, 12년(713년)에는 예부 아래에 전사서(典祀署)를 새로 설치하고, 13년(714년)에는 왕의 제칙과 조서 및 당이나 일본에 보내는 표문(表文)과 첩장 작성을 맡은 상문사(尙文舍)를 통문박사(通文博士)로 고쳤으며, 16년(717년)에는 의박사(醫博士)·산박사(算博士)를 창설하는 등 섬세한 정비를 진행시켰다. 또, 신라의 중앙 귀족의 대표인 상대등에 대해서, 종래는 왕의 재위중의 퇴임이 인정받지 못했지만, 27년728년에는 성덕왕은 상대등 배부(裵賦)의 퇴임을 허가해, 신라에 있어서의 상대등의 최초의 해임 예가 되었다. 왕권을 지지하는 중앙집권적 관료 기구가 정비되어 가는 것과 동시에, 귀족 연합의 약체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11년(712년) 가을 8월에는 태대각간(太大角干) 김유신(金庾信)의 출가한 미망인 김씨를 부인(夫人)으로 삼고, 김유신의 공을 기려 부인에게 해마다 남성(南城)의 조(租) 1천 석을 지급하도록 명하고, 32년(733년)에는 김유신의 손자 김윤중(金允中)을 직접 월성(月城)으로 불러 대아찬을 제수하고 절영산(絶影山)의 명마 한 필을 하사하였다. 국왕 스스로 백관들의 지침서인 《백관잠(百官箴)》을 지어 여러 신하들에게 보였는데, 신하로서 왕에게 충성할 것을 강조함으로써 왕의 권위를 높이고 중앙집권제를 더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문화적인 면에서는 성덕왕 3년(704년)에 한산주총관(漢山州摠管)이 된 김대문(金大問)이 《화랑세기(花郞世記)》·《계림잡전(鷄林雜傳)》·《한산기(漢山記)》·《고승전(高僧傳)]]》·《악본(樂本)》 등의 저술을 남긴다. 또한 17년(718년)에는 누각(漏刻)을 설치하고 누각전(漏刻典)이라는 관서를 두었다. 연사전(煙舍典)이라는 관청도 이 해에 설치되었다. 31년(732년)에 경성주작전(京城周作典)을 설치하였는데, 이는 성곽 수리를 관장하는 관청이었다. 33년(734년) 봄 정월에는 백관에게 북문(北門)으로 들어와 진언(進言)토록 명하고 있다.

외교적으로는 당에 대한 조공 및 하정사절을 빈번하게 파견하고 왕자나 왕제를 당에 숙위시키고 혹은 국학에 입학시키기도 했다. 11년(712년)에 당에서 현종이 즉위한 뒤, 당에서는 노원민(盧元敏)을 사신으로 보내와 왕의 이름을 고칠 것을 요청했고, 이때를 전후해 왕은 이름을 융기에서 흥광으로 고쳤다. 12년(713년) 10월에는, 표기장군(驃騎將軍) 특진(特進) 행좌위위대장군(行左威衛大將軍) 사지절(使持節) 대도독계림주제군사(大都督雞林州諸軍事) 계림주자사(雞林州刺史) 상주국(上柱國)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의 작위를 받았다. 2년(703년)에 당에 파견되었던 아찬 김사양(金思讓)은 이듬해 3월에 귀국하면서 《최승왕경(最勝王經)》을 당으로부터 들여왔고, 13년(714년)에 숙위로 당에 파견된 왕자 대감(大監) 김수충(金守忠)은 3년 뒤인 16년(717년) 가을 9월에 귀국하여 문선왕(文宣王)과 10철(十哲) 및 72제자의 초상화를 바쳤고 이는 신라의 태학(太學)에 안치되었다.(《삼국사기》) 안정복은 이를 두고 김인문(金仁問) 이래로 끊어졌던 숙위가 다시 이어진 것이라고 평가했다.

당에 들어간 신라 사신은 현종으로부터 환대를 받았는데, 12년(713년) 당에 파견된 사신은 현종이 문루(門樓)에 나와 접견하였으며, 숙위로 간 김수충은 현종으로부터 당에서 머무를 저택과 비단을 상으로 내리고 조당(朝堂)에서 잔치를 열어 주었다. 13년(714년) 윤2월에 파견된 급찬 박유(朴裕)는 당으로부터 조산대부(朝散大夫) 원외봉어(員外奉御)의 관작을 받아 돌아왔다. 겨울 10월에 당 현종이 내전(內殿)에서 신라의 사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었을 때, 이 잔치에는 당의 재신(宰臣)과 4품 이상의 청관(淸官)들만이 참여하도록 허락된 것이었다. 14년(715년) 봄 3월에 파견된 김풍후(金楓厚)는 이듬해 원외랑(員外郞) 관직을, 17년(718년)에 파견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신은 수중랑장(守中郞將)의 관작을 받아 돌아왔다고 한다. 25년(726년) 여름 4월과 5월에는 김충신(金忠臣)과 왕제 김근질(金釿質)을 당에 보내 각각 새해를 축하하고 또한 조공하였는데, 김근질은 당으로부터 낭장(郞將)의 관작을 받았다. 27년(728년) 가을 7월에 파견된 왕제 김사종(金嗣宗)은 과의(果毅) 관작과 함께 당에서 숙위하였다. 35년(736년) 겨울 11월에 왕의 종제(從弟)로서 파견된 대아찬 김상(金相)은 도중에 죽었는데, 현종은 애도의 뜻으로 그에게 위위경(衛尉卿)의 관작을 추증하였다.

신라에서는 당에 토산물을 바쳤지만 여자를 바친 때도 있었다. 22년(723년) 봄 3월에는 나마 천승(天承)의 딸 포정(抱貞)과 대사 충훈(忠訓)의 딸 정완(貞菀) 두 사람을 당 현종에게 바쳤는데, 현종은 이들이 멀리 고향을 떠나온 것을 감안해 차마 머무르게 할 수 없다며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 해 여름 4월에 다시 당에 사신을 보냈을 때, 신라에서 가져간 물품은 과하마(果下馬) 한 필과 우황, 인삼, 미발(美髢), 조하주(朝霞紬)·어아주(魚牙紬) 등의 비단, 매를 아로새긴 방울[鏤鷹鈴], 해표피(海豹皮), 금은 등을 바쳤다. 당에서 신라에 보낸 물품은 23년(724년) 봄 2월에 김무훈(金武勳)을 당에 보내 새해를 축하하였을 때, 귀국하는 무훈에게 현종이 부쳐보낸 글에서는 비단 두루마기[錦袍]와 금띠 및 채색 비단과 흰 비단 합쳐 2천 필[4] 이었다고 했다. 또한 29년(730년) 봄 2월에는 왕족 지만(志滿)을 보내 당에 조회하면서, 신라산 물품으로 작은 말 다섯 필, 개 한 마리, 금 2천 량(兩), 두발(頭髮) 80량, 바다표범 가죽 10장을 바쳤는데, 현종은 지만에게 태복경(太僕卿)의 관작을 주고 명주 1백 필, 자줏빛 두루마기, 비단으로 만든 가는 띠[錦細帶]를 내렸으며 머물러 숙위하게 하였다고 《삼국사기》는 적고 있다.[5] 30년(731년) 봄 2월에는 하정사로 김지량(金志良)을 파견했는데, 이때 신라에서 바친 물품에는 금은과 함께 우황도 포함되어 있었다. 현종은 김지량을 태복소경원외치(太僕少卿員外置)의 관작을 제수하고 무늬없는 비단[帛] 60필을 주어 돌려 보냈으며, 따로 왕에게는 무늬있는 채색비단[綾綵] 5백 필과 무늬없는 비단[帛] 2,500필을 주었다.[6] 32년(733년)에는 흰 앵무새 암수 각 한 마리씩과 자주색 얇은 비단에 수놓은 두루마기[紫羅繡袍], 금은으로 세공한 그릇, 상서로운 무늬가 있는 비단, 다섯 가지 색깔로 물들인 얇은 비단[五色羅綵] 등 도합 300여 단(段) 등의 물품을 당 현종이 신라왕에게 보냈다. 이를 감사하러 보낸 사신 지렴(志廉)에 대해서도 현종은 비단 다발[束帛]을 내리고 있다.[7]

이때는 발해(勃海)와 당 사이의 대립이 심화되고, 발해의 무왕(武王)이 수군을 일으켜 당의 등주(登州)를 선제공격하면서 당은 신라를 끌어들여 발해를 견제하고자 했던 때였다. 32년(733년) 현종은 앞서 신라에서 파견되어, 당에서 좌령군위원외장군(左領軍衛員外將軍)의 관직을 받아 오랫동안 숙위하고 있던 김충신을 통해 신라와 군사적인 연락을 계속 주고받는 한편[8],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으로 당에 머무르고 있던 김사란(金思蘭)을 신라에 귀국시키면서(《삼국유사》에는 이때 당에서 온 객사는 모두 604명이었다고 한다.[9]) 왕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영해군사(寧海軍使)의 작호를 주고, 각간 사공(思恭)과 이찬 정종(貞宗), 윤충(允忠), 사인(思仁) 등의 4명의 장군으로 하여금 군사를 일으켜 발해의 남쪽을 치게 하였으나, 계획이 실행되기도 전에 발해를 치러 갔던 당군이 폭설을 만나 산길이 막히고, 얼어죽은 병사가 반을 넘자 당은 발해를 공격하는 것을 그만두었고 신라도 출병하지 않았다. 겨울 12월에 왕은 조카 지렴을 당에 보내 조회하고, 앞서 물품을 받은 것에 사은하였다. 이때 신라에서 당에 보낸 물품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작은 말 두 필과 개 세 마리, 금 500량, 은 20량, 베 60필, 우황 20량, 인삼 200근, 두발 100량, 바다표범 가죽 16장이었다.[10] 또한 앞서 당에서 좌령군위원외장군(左領軍衛員外將軍)의 관직을 받아 오랫동안 숙위하고 있던 신라의 김충신과 교대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11]

군사적인 측면에서 신라의 경계 대상은 발해 그리고 일본이었다. 발해의 팽창에 맞서 신라는 20년(721년) 가을 7월에 하슬라(何瑟羅) 지역의 정부(丁夫) 2천 명을 뽑아 북쪽 국경에 장성(長城)을 쌓았는데, 33년(734년)에 이르러 당은 왕에게 영해군대사(寧海軍大使)의 관작과 함께 정절(旌節)을 주어 발해의 견제를 맡겼다. 김지렴과 교대하게 된 김충신은 이때 현종에게 표를 올려 부사(副使)의 직책을 임시로 내려줄 것을 현종에게 요청하고 있다. 여름 4월에 신라에서는 대신인 김단갈단(金端竭丹)을 보내 새해를 축하하였고, 현종은 그를 내전에 불러 잔치를 열어준 뒤 위위소경(衛尉少卿)의 관작을 내리고, 비색 난포(襴袍)와 평만은대(平漫銀帶) 및 명주 60필을 하사했다. 지렴은 이때에 이르러 홍려소경원외치(鴻臚少卿員外置)의 관작을 제수받았다. 이듬해(735년) 다시 김의충(金義忠)을 당에 하정사로 보냈는데, 2월에 부사(副使) 김영(金榮)이 당에서 죽어 당으로부터 광록소경(光祿少卿) 벼슬을 추증받았다. 돌아오는 의충에 부쳐 당은 패강(浿江) 이남에 대한 신라의 영유권을 완전히 승인했다. 이는 신라와 당 사이에서 세력을 키운 발해에 대한 대항이라는 이해관계에서 나온 것이다. 왕은 이듬해(736년) 여름 6월에 당에 사신을 보내 새해를 축하하고 아울러 표문을 올려 감사의 뜻을 보냈다.

한편, 일본과는 2년(703년) 204명에 달하는 일본국 사신을 받아들일 정도[12] 로 초기에는 우호관계였지만 후반에 이르러 갑자기 대립 구조가 조성되었다.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는 성덕왕 19년(720)에 신라가 일본의 서쪽 변방을 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21년(722년) 10월에 모화군(毛火郡)에 모벌군성(毛伐郡城)을 쌓아 관문으로 삼고, 일본의 적들의 길을 막았다. 성의 둘레는 6,792보(步) 다섯 자에 동원된 역도(役徒)는 39,262인이었으며, 책임자는 원진(元眞) 각간이 맡았다.[13][주 1][14] 이는 경주의 동남쪽 경계였다. 30년(731년)에는 동쪽 해안으로 쳐들어온 일본의 병선 300척을 격퇴하고, 가을 9월에 백관에게 명하여 적문(的門)에 모여 수레 쇠뇌[車弩] 쏘는 것을 관람하는 등의 군사훈련을 실시했다.[15] 패강 이남 지역의 영유권을 승인받은 뒤인 35년(736년) 이찬 윤충과 사인 영술(英述)을 시켜 평양(平壤)·우두(牛頭) 두 주(州)의 지세를 살펴보게 하였다.

재위 36년(737년) 2월에 승하하였다. 성덕왕으로 시호가 추봉되고, 이거사(移車寺) 남쪽에 묻혔다. 당으로부터 태자태보(太子太保)의 관직이 추증되었다. 신라 중대, 그리고 하고(下古) 왕대의 국왕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 재위한 국왕으로 기록된다.

신문왕(神文王, ? ~ 692년, 재위: 681년 ~ 692년)은 신라의 제31대 이다.

(金)이고, 휘는 정명(政明)이며, 자는 일소(日怊)이다.[1] 문무왕(文武王)의 차남이며, 어머니는 자의왕후 김씨(慈儀王后 金氏)이다. 665년 태자에 책봉되었고, 681년 7월에 선왕(문무왕)이 사망하면서 즉위하였다. 삼국 통일 후에 국내의 통치 기반을 굳히고 귀족들의 노동력 징발권을 회수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행정구역을 정비하였다.

문무왕(文武王, 626년~681년 7월 21일 (음력 7월 1일))은 신라 제30대 (재위: 661년 음력 6월 ~ 681년 음력 7월 1일)이다.

태종무열왕문명왕후(김유신의 둘째 누이)의 맏아들로, (金)이고, 이름은 법민(法敏)이다. 660년태종무열왕을 대신하여 현지에서 신라 정예군을 총지휘하여 백제를 정복하였고, 668년에는 고구려를 정복하였으며, 신라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하여 한반도 전 지역을 차지하려 했던 당나라의 군대를 나당 전쟁에서 격퇴함으로써 676년삼국통일을 이루었다. 왕후는 파진찬 김선품의 딸 자의왕후이다.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602년[1] ~ 661년 음력 6월)은 신라(新羅)의 제29대 임금(재위: 654년~661년)이다. 무열왕(武烈王)으로 불리기도 한다.

성은 (金)이고, 는 춘추(春秋)이다. 진골(眞骨) 출신으로 이찬(伊飡)에 이르기도 했던 김용춘(金龍春)과 진평왕의 차녀 천명공주(天明公主)의 아들이다.

선덕(善德) · 진덕(眞德) 두 조정에 걸쳐 국정 전반, 특히 외교 문제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특히 진덕여왕 때는 이찬(伊飡)에 이르게 되고 진덕여왕 사후 대리청정으로서 국인의 추대를 받은 알천의 사양으로 진골 출신 최초의 신라 국왕으로 즉위하였으며, 그렇게 신라 중대왕실(中代王室)의 첫 왕이 된 김춘추는 아들 김문왕(文王), 김지경(智鏡)과 김개원(愷元)을 각각 이찬(伊湌)으로 관등을 올려줌으로써 권력기반을 강화시켰다. 이후 660년 백제를 멸망시켰다.

661년 재위한 지 8년 만에 죽으니 나이는 59세였다.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를 지냈다. 시호는 무열(武烈)이며, 한반도 최초로 묘호를 사용하였다. 묘호(廟號)는 태종(太宗)이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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