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유럽은 왜 분열되고 통일되었나요?

중국과 유럽은 왜 분열되고 통일되었나요?

작성일 2009.01.23댓글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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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중국은 이제껏 엄청나게 거대한 영토를 가졌잖아요. 그런데도 자꾸만 분열하고해서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정복전쟁을 하기 힘들었잖아요(또, 중화사상 때문에 굳이 정복전쟁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후에는 통일이 되서 '중국'이라는 국가가 생겨났나요?

 

 

 

2.유럽은 항상 통일 되어있었잖아요. 전쟁도 중국보다는 적게 했지만 그렇다고 아예 안 하지는 않은 편이구요. 그런데 어째서 여러 유럽 국가들이 후에는 이렇게 분열되어 버리나요? 처음에는 대부분 뭉쳐있었잖아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1.중국은 이제껏 엄청나게 거대한 영토를 가졌잖아요. 그런데도 자꾸만 분열하고해서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정복전쟁을 하기 힘들었잖아요(또, 중화사상 때문에 굳이 정복전쟁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후에는 통일이 되서 '중국'이라는 국가가 생겨났나요?

 

 ☞ 중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분열과 통일의 연속입니다. 그럼 처음 부터 살펴보도록 하죠...

 

     하(夏)-상(商)-주(周)-춘추전국시대-진(秦)-한(漢)-신(新)-후한(漢)-삼국정립시대-위진남북조-수(隨)-

    

      당(唐)-5대 10국-송(宋)-요(遼),송(宋)-금(金),송(宋)-원(元)-명(明)-청(淸)-중화민국()-

  

      국공내전-중화인민공화국(國)

 

      중화인민공화국이 지금의 중국입니다. 역사를 보시면 중국역사 대부분이 통일왕조라는걸 보시게 되는데요..

    

      우리나라도 대부분이 통일왕조였죠? 그래서 하나의 조국을 인정하는 풍조가 있어서 북한과 남한이 서로가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중국도 대부분이 통일왕조 였기 때문에 하나의 조국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지도자들은 통일을 할려고 노력을 했고 지금의 중국이 됐다는 결론이 나오네요...

 

 

2.유럽은 항상 통일 되어있었잖아요. 전쟁도 중국보다는 적게 했지만 그렇다고 아예 안 하지는 않은 편이구요. 그런데 어째서 여러 유럽 국가들이 후에는 이렇게 분열되어 버리나요? 처음에는 대부분 뭉쳐있었잖아요.

 

     ☞유럽은 오히러 통일이 덜되있었죠..

 

        로마가 방대한 영토를 차지하고나선 로마에 대적할자가 없었죠... 하지만 게르만족이 대이동 이후로는 동로

 

        마와 서로마로 갈라집니다. 동로마는 후에 셀주크 투르크에게 멸망을 당하고 서로마는 여러나라로 갈라지

 

       는데요 로마 멸망하고 나서부턴 유럽을 완전히 통일한나라같은건 없습니다..  그래서 유럽나라들은 전쟁이

 

        터지면 강한나라에 맞서기 위해 다른 여러나라가 연합을 해서 계속 유지해 왔죠...

 

      예를 들면 나폴레옹 전쟁같이 매우 강력한 프랑스 하나를 막기위해서 영국-러시아-프러시아-오스트리아

 

       같은 나라들이 대프동맹을 결성해서 싸운것을 예로 들수 있습니다.

 

       따라서 유럽은 로마 이후 특별하게 강력한나라가 없었고 강해도 강한나라가 한나라 더있거나 약한나라들이

 

      대항해서 균형을 맞췄기 때문이라고 할수있겟네요.

 

   

 

     만약 제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하시는분은 의견을 달아주세요^^ 보고 제가 틀렸다면 고쳐야죠..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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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에서 서양 세력이 침투하기 시작하여 전통왕조 체제에서 새로운 체제로 전환하는 시기로서 중국은 1840년 아편전쟁부터 1919년 5·4운동까지를 근대사로 구분하고 있다.(『』, , 1983)  이는 청()나라 말기부터 중화민국() 초기까지에 해당한다. 
 
청나라는 무역 개방을 요구하는 영국의 침략을 받았다(아편전쟁, 1840). 이로써 동양의 전통적인 대제국은 서양 근대국가의 침략을 받게 되었고, 중국의 근대사는 피침사로 시작되었다. 이 전쟁에서 패한 청은 반식민지화의 길로 접어들었고, 서양 자본주의의 침투로 전통적 전제사회는 혼란에 빠졌다. 이에 불만을 갖고 홍수전[]은 태평천국()을 건설한다는 이상으로 농민전쟁을 일으켜 세력을 형성하였다(태평천국의 난, 1850 ~ 1864). 그러나 결국 정부군에 의해 토벌되었다. 청나라는 1856년 애로호 사건으로 제2차 아편전쟁을 맞았고, 이로 인해 서양 열강의 반식민지화가 더욱 심화되었다. 청 황족이 거주하던 집단 거주지였던 원명원()은 영·불 연합군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베이징[]이 점령되었다. 이후 청나라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북경조약으로 화해하였다. 러시아는 영국, 프랑스와의 북경조약을 주선한 대가로 중국으로부터 연해주를 할양받았다.
 
열강의 중국 침략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중국 들 사이에서는 양무운동(, 1862)이 일어나 서양문물을 배우고 도입하자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그러나 서양의 물질문명을 수용하되 중국 전통의 정신과 철학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동도서기(西) 정신을 유지하였다. 열강들의 중국내 세력 강화와 청일전쟁의 패배 등에 자극받아 캉유웨이[], 량치차오[] 등 일부 선각자들은 국내 제도의 혁신을 통해 중국을 근대화시켜 난국을 타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변법자강()운동을 일으켰다. 그 결과 광서제()는 이들을 중용하고, 과거제 개혁, 근대 학교의 설립, 관보 발행, 입헌정치 계획 등 개혁정치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어린 광서제와 서태후(西)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개혁정치를 반대하는 서태후와 조정 보수파 관료들이 정변을 일으켜 개혁파를 축출하고 실권을 잡았다(무술정변, 1898). 그리고는 개혁정치를 중단하고 과거체제로 회귀하였다. 이는 중국이 보수화의 길을 택하여 근대화가 지연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열강의 침투로 중국은 일본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열강이 전국을 분할 관리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특히 중국이 청-불전쟁(1884~5)에서 프랑스에게 패하고 청-일전쟁(1894)에서 일본에게 패함으로서, 베트남(월남), 조선 등에서의 종주권을 상실하였고, 타이완마저 일본에게 내주어야 했다. 그 결과 청조는 그 동안 동양의 강자로 군림하던 패권을 일본에게 내주게 되었고, 동양의 국제질서가 일본 중심으로 전환되었다.
 
열강들의 약취에 대항하여 1900년 의화단()이 봉기하여 외국 공관에 방화하는 등 저항하였으나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청 정부의 위약과 열강세력의 침탈 속에서 중심으로 멸만흥한(滿) 운동이 일어났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쑨원[]이 주동이 되어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났다. 이로써 1912년 전통왕조인 청조가 망하고 중화민국()이 탄생하였다.


1914년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독일이 중국 경영에 소홀한 틈을 타 일본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대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곧 독일이 경영하던 지역인 산동반도 일대에 일본군이 상륙하고 항구도시인 청도()를 점령하였다. 일본은 중국 정부에 이권을 요구하는 내용의 21개조 요구를 하였고, 이에 대한 중국의 반일 감정이 일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되고 세계는 평화를 추구하게 되었다. 이때 한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 독립을 쟁취하려 하였고, 중국에서는 이러한 추세를 타고 1919년 일본의 21개조 요구에 반대하는 5·4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일본 군국주의의 적극적 공세로 중국은 일본의 침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유럽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은 포츠담협정에 의해 오데르-나이세선() 동쪽의 영토를 상실하였고, 미국·영국·프랑스·소련 4개 연합국의 점령하게 놓이게 되었다. 뉘른베르크군사재판에 이어 비()나치스화 정책을 강행한 연합국은 독일의 재건을 둘러싸고 동·서 냉전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⑴ 서독:서독을 형성하는 지역은 제2차 세계대전 후 1945년 8월 포츠담협정에 의해 결정된 미국·영국·프랑스 3국의 점령지구였다. 한편 베를린도 4개국 공동관리하에 놓여 있었으나 서방 3국과 소련 간의 점령 정책의 대립으로 관리이사회가 마비되어 동·서양 베를린으로 이분되었다. 1947년 6월 마셜플랜에 의해 서독이 미국의 경제 원조를 받아 1948년 6월 그 원조를 뒷받침으로 하여 통화개혁이 실시되었는데, 그 개혁은 서독 경제부흥의 계기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서독의 신통화()가 동독 내의 베를린에 흘러들어가 동독의 경제를 크게 혼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소련은 이른바 ‘베를린 봉쇄’를 감행하였다. 이에 맞서 서방 3국은 1949년 5월까지 약 1년간 200만 서(西)베를린 시민의 생활물자를 항공기로 수송하는 ‘베를린 대공수’를 실시하였다. 그것이 제2차 세계대전 후 경제 분야에서 전개된 최초이자 최대의 동·서 냉전이었다. 서독정부의 수립은 1948년 봄 런던에서 소집된 6개국회의(미국·영국·프랑스·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에 의해 추진되었다.

1948년 9월 각주()의 대표에 의한 헌법 제정회의가 본에서 열렸으며, 1949년 5월 8일 헌법초안이 답변확정되었다. 이 헌법 초안은 통일독일의 헌법제정회의가 보다 영구적인 헌법을 제정·시행하게 될 경우 효력이 상실된다는 이유로 헌법(Verfassung)이라 하지 않고 기본법(Grundgesetz)이라고 하였다. 그 기본법에 의해 8월에 연방의회 선거가 실시되었고 9월 7일 연방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초대 총리인 아데나워 정권은 1949년 11월 3국 고등판무관과 상트페테르부르크협정을 체결하여 국제기관에의 참가, 외국과의 영사관계 개설, 중요공업의 해체면제() 등을 승인받았고 다시 1950년 9월 외국과의 정식 외교관계 수립 및 전독일을 대표하는 권리를 승인받았다.

특히 미국은 소련에 대항해 서독을 부흥시켜서 서방 블록에 편입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서독은 1949년 10월에 유럽경제협력기구(OEEC), 1951년 4월 유럽 석탄철강공동체(ECSC)에 가맹하였고, 또 1952년 5월 26일에는 미국·영국·프랑스·서독 사이에 평화협정이 체결되어 점령체제가 정식으로 종결되었다. 1954년 10월 23일 서방 9개국에 의한 파리협정(1955.5.5 발효)이 체결되어 서독의 주권이 회복되었고, 뒤이어 NATO(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북대서양조약기구서유럽연합(WEU)에 가입하였다. 1969년 서독 브란트 총리는 ‘동방정책(Ostpolitik)’을 제시, 평화공존을 모색하여 1973년 동·서독이 동시에 UN(국제연합)에 가입하였다.

⑵ 동독:1945년 8월 포츠담협정은 구()독일령 중 동()프로이센 북부를 소련령으로, 오데르·나이세 두 하천 동쪽의 기타 지역을 폴란드령으로 하고, 그 서쪽의 독일 영토의 약 1/3을 소련군의 점령하에 둘 것을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독일 서부의 여타 지역을 분할 점령한 미국·영국·프랑스를 합친 4대국에 의한 독일은 점령·관리 되었으나, 소련과 서방 3국 사이의 의견대립, 특히 소련의 배상요구로 인하여 공동관리의 기능은 처음부터 마비상태에 빠졌다.

1947년 트루먼독트린·마셜플랜 등 서방측의 정책이 발표되자, 소련의 지시를 받은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은 1949년 10월 7일 인민회의를 인민의회로 바꾸고, ‘전()독일국가로서의 독일민주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하였다. 소련도 1953년 5월 관리위원회를 고등판무관부로 대체하여 민정이관을 완료하고 동독정부를 강력하게 측면 지원하였다. 그 동안 1952년 7월에는 3권을 통합하는 헌법상의 수정이 이루어졌고, 농업의 집단화, 산업국유화의 확대 등이 실시되었으며, 1955년 5월 서독이 NATO에 가맹하자, 동독도 같은해 9월 소련과의 사이에 주권 회복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고, 바르샤바조약기구에 가입함으로써 서로 대립하는 집단방위기구의 멤버가 되어 ‘두 개의 독일’을 굳히는 길로 나가게 되었다. 국민적인 동의가 없이 바르샤바조약기구에 가입한 동독에서는 1953년 6월 동베를린에 노동자 폭동사건이 발생하였으며, 또 종전 후 동독을 기피하여 서독으로 도피한 인구가 약 300만 명에 달했다. 1972년 12월 동·서독은 ‘동·서독기본조약’을 체결, 관계정상화에 성공한 데 이어 1973년에는 UN에 동시 가입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도 2개의 국가로 승인받기에 이르렀다.

⑶ 통독():1972년 동·서독간 기본조약이 조인된 이후 양국관계는 평화공존체제로 전환되어 상호방문과 이산가족결합 등 인도주의적 차원뿐 아니라 경제적 협력과 문화적 교류를 통해서도 양국은 상호관계를 증진해왔다. 1민족 2국가를 주장하는 동독과, 통일독일을 우려하는 주변 국가와 강대국의 기본 인식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서독정부는 작위적인 통일을 지양하고 ‘유럽평화질서구축의 일환으로서의 통일’을 지향하는 대외온건노선을 택하였다. 따라서 독일의 통일은 대외적인 국제정치적 변동에 의해서만 가능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속된 냉전구도에 지각변동을 가져오는 계기는 바로 1985년 시작된 소련의 당서기장 M.고르바초프의 개방·개혁정책이었다. 이는 사회주의 동맹국가의 운명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많은 동구국가는 소련의 개방·개혁정책을 수용하였으며 그 여파는 동독에까지 미쳤다. 동독의 정치지도부가 개방을 거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동독주민의 저항운동은 점차 거세졌다. 1988년 교회에 의한 평화운동이 억압당하는 등 동독의 정치현실에 실망한 동독주민들은 1989년 동베를린에 있는 서독 상주대표부에 대거 몰려들어 출국신청을 하였다.

동년 9월 서독정부는 동·서독 간 직접충돌을 막기 위해 헝가리와 정치적 협상을 벌여 동독인이 헝가리를 경유 서독으로 이주할 수 있도록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을 개방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와 더불어 1989년 10월 동독의 건국 40주년 기념일에 대규모의 시위가 드레스덴에서 발생하였고 이러한 저항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따라 당서기장 E.호네커는 사임을 할 수밖에 없었고 후계자인 E.크렌츠는 무혈혁명을 시도하여 기존의 사회주의 체제에 입각한 당과 국가기관은 마비사태에 이르렀다.

1989년 11월 9일 동베를린 주민의 대규모 국경탈출을 동독정부는 아무런 통제도 하지 않았고 급기야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1989년 12월 동독정부는 베를린 장벽을 공식적으로 개방함과 동시에 특별전당대회를 열어 당서기장제 폐지, 당명 개정의 신강령을 답변확정하고 동독의회의 헌법상 권력독점조항을 폐지하는 등 정치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러한 동독의 몰락과정은 동독주민이나 서독정부에 통일의 호기로 여겨졌다. 동독의 신정부 총리 모드로프는 조속한 개혁을 전제로 하여 동독의 국가유지를 희망한 반면, 서독정부는 연방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10개항 프로그램을 제안하였다. 이에는 물론 동독과의 정치적 협상이 전제되었고 EC(유럽공동체)나 유럽안보협력회의(CSCE) 체제를 고려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관련국가의 태도는 초기에 매우 조심스러웠다. 프랑스와 영국은 동독사태 발전을 통일문제와 직접 관련시키려는 서독정부의 태도에 우려를 표명하였으며, 소련의 고르바초프도 인위적 통일노력에 대해 경고하고 바르샤바조약기구가 건재함을 선언하였다. 미국 또한 독일통일에서 주변국의 합당한 불안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문제는 동독주민의 신정부에 대한 불신과 사회적 불안이 증대됨에 따라 동독주민의 서독에 의한 흡수통일의 요구가 거세어졌다는 점이다. 폴란드·헝가리의 정치지도부가 퇴진하고 루마니아차우셰스쿠 정권이 몰락함에 따라 바르샤바조약기구도 급속히 와해되었다.

이러한 사태발전에 직면하여 서독의 H.콜 정부는 통일하더라도 현존 국경을 변동하려는 의도가 없으며, NATO에 동독지역을 포함시키지 않고 독일군대도 축소할 것이라고 천명하였다. 미국도 마침내는 독일이 NATO에 잔류한다는 전제하에 독일통일을 지지한다고 선언하였다. 통일문제가 현실적 정치현안이 됨에 따라 동독에서는 민주적인 통일협상을 할 민주정부의 구성을 위해 1990년 3월 18일 40년 만에 최초로 다당제 자유총선거를 실시하였다. 이 선거에서 서독에의 조기흡수통합을 공약으로 내건 재야의 ‘독일연합’이 승리하여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L.드 메지에르가 총리로 선출되었다.

1990년 7월 1일 동·서독 정부는 경제·통화·사회 통합에 합의하였다. 소련을 설득하기 위한 콜-고르바초프 회담이 7월에 열렸다. 여기에서 소련은 통일독일이 ABC무기를 포기하고, 군대를 37만으로 축소하며, 소련군대의 1994년 말 철수 전까지 NATO의 동독지역 확대를 포기한다는 조건하에 통일에 동의하였다. 이로써 통일의 장애요소는 모두 제거된 셈이고 형식적인 절차만 남게 되었다. 1990년 8월 동독의 인민위원회는 조속한 흡수통합을 선언하였고, 8월 31일에는 동독의 국가서기 크라우제와 서독의 내무성장관 셔이블레는 마침내 통일조약에 서명하였다.

통일독일의 인정을 위해 동·서독 당사자와 4대 전승국(미·영·프·소)의 회담이 1990년 9월 12일 모스크바에서 열렸고, 오데르-나이세 국경선을 통일독일이 존중한다는 원칙하에 통일을 인정하는 ‘2+4 조약’이 체결되었다. 마침내 1990년 10월 3일 통일조약과 서독기본법 23조에 의거 동독은 서독에 편입되어 통일과정이 완료되었다. 또한 ‘2+4’조약의 발효와 더불어 독일은 대외적 주권을 완전히 회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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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질문이 좀 이상한거 갓습니다..

중국이라는 대륙은 초기에는 여러나라가 분열되서 싸웟지만 시대가 지나면 지날수록 통일국가가 많앗죠

그래서 청이라는 만주족(?)이 새운나라가 있는데 아시다 시피 청은 19세기~20세기에 쇠퇴를 합니다. 그래서 태평천국 운동이나 양무운동 변법 자강 운동 의화단 운동등 여러가지 운동이 일어나 청을 멸망 시키거나 청을 부흥시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19세기에 아편전쟁으로 인해 많이 쇠퇴한 청은 부흥을 시킬려면 힘들엇죠 그때

등장한 사람이 쑨원이라는 사람입니다. 다 아시다 시피 쑨원은 3민주의를 내세워 신해혁명을 일으켜 성공을 시켯죠 신해 혁명을 성공시킨다음 청의 위안스카이가 쑨원에게 청을 바치는 대신 총독(?)의 자리를 주는걸로 약속을 해 쑨원은 중국을 통일하는데 이 쑨원이 죽은후 쑨원의 제자중 한명인 장제스와 시골에서 여러가지 일을 하고 있는 마오쩌둥이서로의 이념 때문에 싸우게 되죠 그래서 장제스는 타이완(?)으로 도망을 가게 되고 마오쩌둥이 중국의 통치권을 가지는데 사회주의 사상으로 중화 인민 공화국이 수립이 됫구요

 

2.유럽은 초기에 통일된 국가 였지만 후시대가 지날수록 여러나라로 분열 했습니다.

그이유는 처음 유럽에 로마제국이 들어서고 나서 옥타비아누스시대 이후 200년이 지나서 게르만족이 훈족(흉노족) 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남쪽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그래서 이미 콘스탄티누스의 성상숭배 금지령 때문에 이미 분열된 로마제국이 게르만 족의 대이동으로 인하여 서로마 제국이 멸망을 하죠 그래서 게르만족이 세운 여러국가가 있엇는데 반달왕국,프랑크왕국등 여러나라가 세워지게 되죠 그중에서 가장 번성했던 프랑크왕국은 서로마 교황의 크리스트교를 국교로 삼고 독일,프랑스,이탈리아 부근을 정복하게 되죠 그러나 카를로스대제 사후 그의 손자(?)3명이 분열을 하는데 훗날 프랑스,이탈리아,독일의 초석이 되죠 또한 십자군원정이나 신항로 개척,이슬람세력의 공격,등이 유럽을 여러국가로 분열 한거 갔습니다.

 

근대 내가쓴거지만 어쩨 좀 이상한거 갓네요 체택만 해주신다면야 ㄳ

 

 

중국과 유럽은 왜 분열되고 통일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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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되는 유럽은 왜 통일 못했나요? 중국이 시황제의 진나라 이후 여러번 통일 국가를... 때문에 제국이 분열되고 망한 이후 각 민족과 각 지방마다 다양성을 지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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