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옛날의 중국은 대외팽창정책을 안했나요?

왜 옛날의 중국은 대외팽창정책을 안했나요?

작성일 2009.01.03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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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송나라때 그냥 나라안에서만 생활했고 

명나라때도 해외원정갔다가

여행만 하고 돌아와서 배뿌수고 끝내버리고

힘쎄면 나가서 땅을 넓혀야지 왜 그랬을까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중국의 왕조사는 통일되면 분열되고 분열되면 통일된다는 흥망사를갖고있습니다

그리고 해외원정이나 팽창 정책을 쓸수없는이유는 자체 영토가 워낙 광활하다보니 주변국 오랑캐들과 이민족과의 전쟁으로  세월을 보낸  왕조사 입니다 그리고 해외 원정은 곧 이민족이나 주변세력으로인해 왕조사의 멸망으로이어집니다 즉 군사력 이동으로 공백이 생기면  주변 국과 제후들의 반기로 왕조가 전복됩니다 팽창할 정신 겨를이 없는 집안 내부단속하기바쁜 천년이였습니다  명나라 정화의 원정도 해외팽창이란 측면이 아니고

반란에에 의한 집권으로  전황제의 세력 색출작전의 일부였습니다 그래서 정화의 원정이 서양의 대항해보다 훨씬 앞섰고 의미 있는것이지만 정치적 책략때문에 그 빛을 발할수없었든 것입니다

 

 

정화의 대항해의 한계(얼마전 답변인데 참고하세요)

항해목적

 

(1)건문제 색출목적

(2)영락제의 대의명분 수립

(3)해외시장확보를통한 교역 자금 확보

(4)동남아 해상 해적 평정

 

당시 명의 황제에 오른 연왕(燕王, 후에 영락제가 됨)에게서 찾을 수 있다. 연왕은 황제에 대한 모반을 꾀하여 건문제(建文帝)를 몰아내고 스스로 황제에 오른 인물이다. 연왕은 '정난의 변'을 일으켜 4년 간의 전쟁 끝에 건문제를 제거한 뒤 황제에 등극했다.

 

(정화는 정난의 변(1399~1402년) 당시 연왕을 따라 무공을 세웠다. 연왕이 건문제의 뒤를 이어 황제에 즉위한 뒤 환관의 장관인 태감(太監)에 발탁되었으며 정(鄭)씨 성을 하사받았다.)

 

황제 등극과 동시에 북경으로 수도를 옮긴 연왕은 스스로 명성조라 칭하고 연호를 영락(永樂)으로 정했다. 그런데 황제에 오른 뒤에도 영락제는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영락제의 군사가 남경성을 포위하고 맹공을 퍼부을 무렵 건문제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었다. 왕실과 조정은 건문제가 전쟁 중에 사망했을 것으로 여겼으나, 그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건문제는 연왕의 군사가 남경성을 포위하자 궁궐에 불을 지르고 스스로 분신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명사본기(明史本紀)>에는 신하들의 도움으로 은밀히 성을 빠져나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연왕은 비록 왕위를 차지하였지만 행방이 묘연한 건문제가 언젠가 흩어진 세력을 회복하여 다시 처들어올 것을 늘 염려하였다. 그런 연유로 연왕은 사방으로 사람을 보내 건문제의 행방을 쫓았다. 정화는 건문제를 찾기 위해 연왕이 파견한 여러 신하 중의 한 명이었던 것이다.

 

정화의 대규모 해외원정을 본래의 목적과 관계없이 조정과 황실에 막대한 경제적 파급 효과를 가져왔다. 이와 같은 대규모 원정에서 배제될 수 없는 것은 정치적 명분이다. 연왕은 왕위 찬탈이라는 불명예에서 탈피하여 군주로서의 위상을 세우고자 했다. 따라서 건문제를 색출하기 위한 처음의 의도에서 벗어나 정화를 꾸준히 해외에 보내 명조의 막강한 기세를 만방에 과시했다. 연왕은 자신이 이룩한 태평성세를 유지하는 한편 반대파의 정치 세력을 와해시키려는 두 가지 의도에서 정화에게 해외원정을 지시했던 것이다.

 

답변

서양보다 100년이상 앞선 해양 원정이였지만  그 원정이 정치적 목적이 깔려있었고  정화 자신이 이 정치적 희생물이 됬으며 중국황실의 지속적인 탐험이 뒤바침되지않아 세계사적 의미는 없습니다  즉 명나라 정치적 권력투쟁에 따른  상징물이였지  서양처럼 식민지 개발이나 교역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것입니다  그래서 왕조사에 한 부분이였고 국가발전에 도움된 사건이 아닙니다즉 국가발전을 위한 항해가 아니고 정치적 목적때문이기때문에 그한계가 분명한것입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중앙정부에서 뻗을 수 있는 통제력의 범위때문이라고 보는게 타당한 것 같군요.

 

어떤 중국의 왕조도, 심지어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조차도 중앙정부의 완전한 통제력이 중국전체를 장악한 적은 없습니다.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역시 지방군벌의 세력이 막강합니다. 그나마 중앙 공산당이 집권할 수 있는 것은 텐진 등에 위치한 전략핵무기와 그 발사시설덕분이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중국에서 지방군벌은 각각의 왕국이라 생각될 정도로 강력한 지방장악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한반도와 만주정도를 주활동무대로 성장한 우리로써 너무 넓어 중앙권력이 뻗치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지만.

 

중국은 그렇게 성장해왔습니다. 어떻게 보면, 황제라는 존재에 대한 중국인의 인식과 한국인의 인식차이로 얘기하면 쉽게 풀리겠군요.

 

한국인이 생각하는 황제, 혹은 왕은 우리를 다스리는 사람, 더 파고들어보면 직접적인 우리의 관리자 -서양의 영주개념이랄까요.- 가 되겠지만.

 

중국인이 생각하는 황제, 왕은 군림하는 자, 천외천, 우리 위에서 군림하지만, 막상 우리와는 동떨어진 세상의 사람 -중세중소지방영주가 생각하는 황제의 개념과 유사하겠군요.- 이 되겠습니다.

 

중국이 얼마나 넓은지 하나의 예를 들어보면.

 

중국의 쓰촨성-사천성-의 군벌이 베트남, 인근 군벌과 손을 잡고, 독립을 선포한다면.

 

중앙군이 가는 데 이르는 시간은 2주입니다.

 

말이 좋아 2주인거지, 온갖 군사대비와 외교적준비 등이 다 갖추어 질 수 있는 시간입니다.

 

송나라 당시, 송나라는 세계 경제력의 60%이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미국과 중국을 합쳐도 안나오는 비율입니다.

 

그런 송나라가 토번이나, 인근 국가들에게 정벌군이 아닌 공물을 오히려 보낼 수 밖에 없던 이유는

 

송나라 태조부터가 지방군벌이었고, 변경세력을 토벌하기 위한 명목으로 국경병력이 강화될 경우, 자신과 같은 인물이 또 나올 수 있다는 생각때문이었습니다.

 

중국은 이런 면에서 무척 폐쇄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이렇게까지 판을 벌려놓은 것도 청나라라는 역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로 유능한 황제가 많이 나온 황조덕분이지, 무리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얘기가 길어졌지만, 결론은 중앙정부의 필연적인 통제력부족으로 인해, 해외파병은 힘들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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