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역대왕조의 개혁들

중국역대왕조의 개혁들

작성일 2003.12.03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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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오랜 역사를 가졌으며 수많은 왕조가 생겼다 사라졌다를

반복하였습니다..

이러한 중국역대 왕조에서의 개혁들을 알고싶으며

또한

그러한 개혁들이 실패했다고 보면 그 이유와

성공했다고 보면 그 이유를 알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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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나라

주 왕조 창시 후 무왕의 동생 주공이 봉건제를 확립하고 정전제를 제정하여 실시하면서 주 왕조의 국력은 점차 번성되어 갔다. 주공은 봉건제에 따른 제후들의 반역 가능성에 따라 예사상을 확립하여 제례를 중요시 하였으며 왕실 제사에 제후들이 참석하도록 하여 통제하였다. 봉건제는 왕권이 닿지 않는 지방에 제후를 봉함으로써 통치를 용이하게 하였고 정전제는 지배층이 농민의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하였다.

진나라

정왕은 자신을 시황제라 칭하여 역사상 최초의 황제가 되었다. 진시황은 중앙의 최고관리로 승상, 어사대부, 태위의 3공을 세우고 그 밑에 9경을 두어 정무를 관장하게 하였으며 전국을 36개의 군현으로 나누어 군수와 현령을 파견하여 다스렸다. 이것은 중앙의 관제와 지방 행정까지 황제가 모두 통괄하는 것으로 진나라의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전국적인 도로와 관개수로를 건설하는 등 국가 기반을 다졌으며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하였다.

한나라

전한

한 왕조의 통치조직은 대체로 진을 이어받은 군현제가 중심이었으나 한 왕조 건설에 공이 큰 공신들은 제후왕과 열후로 봉해졌다. 이것이 이른 바 군현제와 봉건제를 병합시킨 군국제이다. 하지만 유방 생전에 공신들이 모두 멸망함으로써 제후왕은 모두 유씨가 봉해지게 된다. 그후 제후황은 한왕일족 출신자에 한정된다는 것이 불문율이 되었다.



5대 문제는 여씨 외척세력을 모두 축출해내고 백성을 위한 통치에 힘써 사마천으로부터 인제라는 평가를 들었다. 6대 경제 때에 이르러서는 내정이 안정되어 국고가 풍족해졌으며 조착을 등용하여 제후권력을 통제하고 왕권을 강화했다. 이로 인해 오초7국의 난이 일어났으며 난이 평정된 이후에는 제후왕의 세력을 삭감하였다. 7대 무제 때에는 제후왕의 통치 권력이 완전히 없어지고 군국제는 군현제와 다를 바 없게 되었다.



7대 무제는 수많은 북벌을 단행하여 한제국의 영역을 최대로 넓혔다. 수많은 원정 끝에 흉노세력을 고비사막으로 내쫒았으며 한반도에도 한사군을 설치하였다. 서방으로는 장건의 원정을 통해 서역제국들을 복속시켰으며 장건에 의해 실크로드가 개척되었다. 그러나 많은 원정과 궁정의 사치, 토목 사업 등으로 문제, 경제 때 비축되었던 국고를 많이 소진하였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증세, 화폐제도 개선, 소금, 철, 술의 전매제 등의 재정 정책이 취해졌다. 이로 인해 백성들의 부담이 늘어나게 되어 무제의 뒤를 이은 소제, 선제 때에는 내정 안정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오랜 시간 계속된 무제의 독재적 통치기간 동안 황제의 측근들은 정치적 실권을 잡게 되었다. 그리하여 10대 원제 이후 황실은 급속히 약해지기 시작하였으며 13대 평제는 외척 왕망에게 독살당하게 된다.

후한

한 왕조를 재건한 광무제는 여러 개혁을 단행하여 통일 왕조의 기틀을 다졌으며 후한 2대 명제부터는 다시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펼쳐 북으로는 흉노를 압박하고 서로는 카스피해 동쪽까지 세력이 미치었다. 그러나 그 이후 다시 외척과 환관세력이 득세함에 따라 정치의 문란이 심화된다. 이를 현신들이 비판하자 두 번에 걸쳐 탄압을 받게 되는데 이것을 당고의 옥이라 하며 이후 한 왕조는 국력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수나라

문제는 북주를 이었으나, 그 제도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북주의 여러 법령을 근간으로 개혁을 단행하여 개황율령을 공포하였다. 중국 법제의 모법이기도 한 당나라의 율령제는 거의 이 때 그 기초가 다져진 것이다.



관제(官制)로는 상서·문하·내사·비서·내시의 5성, 어사·도수의 2대, 태상·광록·위위·종정·태복·대리·홍로·사농·대부·국자·장작 등 11시(寺)를 두었다. 그러나 정치의 중추적 기능은 상서·문하의 2성에 집중되어 있어, 상서성에는 이부·예부·병부·도관·탁부·공부 등 6조(曹)를 두었는데, 이는 당나라 6성·1대·9시·5감제의 기초가 되었다.



지방에는 주(州)·군(郡)·현(縣)을 두어 그 장관을 각각 자사·태수·영이라 하였다. 그러나 주와 군은 그 넓이에 있어 차이가 없었으므로 군을 폐지하고 주에 현이 직속하게 하였다. 또한 자사가 그 때까지 장악하고 있던 병권을 빼앗아 지방행정에서 병제를 분리하여 부병제를 따로 두었으며, 지방의 관리는 모두 중앙에서 직접 파견하여 중앙집권을 꾀하였다.



토지제도로는 북위에서 비롯된 균전제를 북제 때 보완한 제도를 근간으로 해서 시행하였으나, 그 세부적인 것은 밝혀지지 않은 것이 많다. 수나라는 중앙의 지배권력을 말단 백성에까지 침투시키기 위해 북위 이래의 인보제를 두어 500가(家)를 향, 100가(家)를 이, 25가를 여, 5가를 보라 하여 각각 그 장(長)을 두었다. 특히 옛 북제 지방에서는 모열이라 해서 백성의 머릿수를 일일이 확인하여 나이 등의 부정신고를 엄중하게 단속하였다. 이 같이 제도를 정비한 결과 인구의 장악수가 증대하여 609년에는 호수 890만 7,549, 인구 4,601만 9,956명에 이르러, 이후의 당나라 초기 때보다 월등히 많은 인구수를 나타냈다.



또한 문제는 구품관인법이라 해서 그 때까지 귀족의 출세의 발판이 되어온 관리임용법을 폐지하였고, 양제는 관리임용법으로서 진사과를 두었는데, 이것은 뒤에 당나라에 과거제라 불리어 성행하게 된 관리임용제의 창시로, 고려에서도 이를 실시하였다. 양제는 즉위 후 문제의 율령을 개정하여 대업율령을 발포하였는데, 후에 당나라가 제정한 율령은 문제의 개황율령을 근간으로 한 것이다.

양제는 문제의 뒤를 이어 대운하 공사를 계속 하여 중국의 남북을 수로로 이었으며 남북의 통일을 추진하여 동도를 낙양에 조성하고, 토욕혼과 돌궐을 토벌하였다. 또한 돌궐과 손을 잡을 수 있던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3번에 걸쳐 대군을 일으켰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당나라

정관의 치

태종은 제위에 오른 후 돌궐, 설연타, 위구르 등을 압박하여 조공을 바치게 하였다. 그는 내정에도 힘써 수나라의 균전제, 조용조, 부병제를 개선하여 효율적인 통치체제를 마련하였으며 민생안정에도 힘썼다. 이에 나라가 안정되어 태평성대를 누리게 되었으며 태종의 연호를 따 이 시기를 '정관의 치'라고 한다.

개원의 치

이어 현종이 제위에 올라 통치를 하게 된다. 현종은 부병제를 모병제로 바꾸어 실시하고, 과다한 관리를 해고시키는 등 내정과 사회안정에 힘쓰었다. 이에 당나라는 당 태종의 '정관의 치'이후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이를 '개원의 치'라 부른다. 그러나 현종은 환관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고, 말년엔 여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아 당의 멸망을 초래하게 된다.

송나라

태조 조광윤은 즉위 후 최우선급무로 천하통일을 내세웠으며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지방군사 세력을 억제하고 절도사의 권한을 빼앗았으며 지방의 관료들도 문관만 임명하는 정책을 폈는데 이것이 이른 바 '문치주의'이다

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신종은 왕안석을 등용하여 신법을 시행하였다.

신법개혁의 목적은 대지주 및 대상인의 기득권을 뺏고 중소농민 및 상인의 경제적 지위향상에 있었다. 신법에는 청묘법, 시역법, 방전균세법, 보갑법, 모역법 등이 있는데, 이에 따라 연리 2할의 저리 융자를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노역의 의무를 화폐로 대신할 수 도 있게 되는 등 농민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획기적인 조치들이 많았다. 또한 매년 토지를 측량하여 그간 탈세해온 토지를 적발하여 세수를 늘리는 방법 등으로 재정은 적자에서 흑자로 전환되었다.

왕안석의 신법개혁은 대지주 및 귀족, 관료층 등의 기득권층의 이익에 반(反)하는 것으로 기득권층 세력의 반대가 심했다. 1085년 왕안석을 등용했던 신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하자 왕안석의 신법개혁에 반대하던 사마광이 문하시랑에 임명돼어 신법을 폐기하고 구법을 다시 시행하였다. 이후 철종이 장성하여 친정을 선언하고 구법당의 관리를 물리치고 신법당의 관료를 등용하였지만 그 뒤를 이은 휘종이 중도정치를 위해 구법당 관료도 등용하였다. 이후 신법당과 구법당 관료사이의 당쟁이 계속되었다.

명나라

태조는 민생안정을 위해 인구과밀한 강남에서 황폐한 강북으로 농민을 이주시키고, 부유층을 수도로 불러들여 경제부흥에 주력하였다. 이로써 사상 최초로 남에서 북으로의 인구이동현상이 일어나고, 윈난·구이저우의 호구도 늘어나서 총인구는 처음으로 6,000만을 넘어섰다. 이 호구를 군호·민호·장호·조호 등 4종류로 구분하여 각각 군사·농상·장작·제염에 종사하게 하였다.

이 호구는 그 대부분이 민호로서, 주현의 이갑제라는 자치조직에 편성되었다. 이갑제는 110호를 1리로 하고, 이 가운데 부유호 10호를 이장호로, 나머지 100호를 갑수호로 해서 10호씩 10갑으로 나누어 1년 교대로 이장 1명과 갑수 10명이 출역하도록 되어 있었다.



태조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전국 토지의 실지측량을 시행하여 ‘어린도책’이라는 토지대장을 만들고, 이장으로 하여금 부역황책이라는 조세 겸 호적대장을 만들게 하였다. 또한 이(里)에서 덕망 있는 연로자를 뽑아 이를 이노인(里老人)이라 하여 이민의 교화 및 쟁송을 맡도록 하고, 육유라는 교육강령을 공포하여 사학 등을 세워 교육시켰다.

태조는 권농에도 힘써 처음에 곡물의 자급생산을 주로 한 농업도 후에는 상업적 작물의 생산으로 발전시켰다. 특히 목화는 전국적으로 보급되었으며, 면직공업은 송강부를 중심으로 발달되어 전국적 시장을 형성하였고, 도시에는 고급품도 출하하였다. 또한 뽕나무 재배도 장쑤의 태호 주변과 쓰촨 등지에서 성행하였고, 면직물공업도 쑤저우·항저우 등에서 발달하였다. 이 밖에 장사의 도자기, 푸젠·저장의 칠기, 광동의 철기, 후광의 쌀, 광둥·푸젠·장시의 설탕, 푸젠의 쪽 등 지방의 특산물이 상품으로 생산된 것이 특징을 이루었다.



이 특산물은 북방 및 내륙의 쌀·보리·무명 등과 교환되기도 하고 수도와 구변진 등 큰 소비지에도 유통되었다. 이들 상품의 중개자는 산시와 신안의 상인들로, 이들은 16세기 후반 이후 중국의 상권을 양분한 형태로서 동향의 동업자가 결합하여 요지에 설치한 회관·공소를 거점으로 활약하였다. 활발한 상품유통에 대해서 정부는 전국 수백 개소에 세과사국을 설치하여 과세를 하고, 특히 보초의 유통을 위해 수도의 성문이나 대운하의 연안에 초관을 설치하여 보초로써 징세하였다.



보초는 주요 통화이고 동전은 보조통화였으나, 불환지폐인 보초는 유통이 잘 안 되고 민간에서는 은을 많이 사용하여 1436년에는 조세의 은납도 공인되어 금화은이 유통되기 시작하였으며, 16세기에는 요역의 은납도 시행되어 은의 화폐적 기능이 확립되었다. 대외무역은 처음에 배외·국수정책에 따라 거의 단절되었으나 영락제의 외정 및 정화의 서정 이후 여러 나라와의 조공무역이 열려, 북변에서는 마시·목시가 번창하였고, 남동연해에서는 닝보·취안저우·광저우·운둔에 시박사를 설치하여 일본과 류큐 및 남해 여러 나라와 교역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무역은 모두 정부통제하의 이민족 회유책의 색채가 짙었고, 왜구의 방해도 있었으며 이익을 정부가 독점한 것 등으로 쇠퇴하였다.



15세기 후반 이후에는 이에 대신해서 저장·푸젠·광둥 등의 향신(퇴직관리) 등에 의한 밀무역이 정부의 통제무역·해금책에 저항하면서 번영하였고, 그 저항은 중소 상인과 고용인 등에까지 파급되어 1567년 해금령을 해제하였다. 이에 앞서 17년 이후 포르투갈인이 내항하여 마카오에 무역근거지를 잡고, 이보다 조금 늦게 에스파냐도 마닐라시를 건설하여 극동 무역을 시작하게 되어 명의 생사·견직물·면포·자기·철기 등이 많이 수출되고, 대신 대량의 은이 수입되었다. 이러한 상공업의 발달에 따라 도시도 새로이 일어나고 경제도시라 할 수 있는 것도 주로 강남을 중심으로 속출하였는데, 대도시 가운데에는 상공업 노동자만 수만에 이르는 곳도 있었다.

청나라

강희제는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였고 조선과는 백두산 정계비를 세워 국경 경계 문제를 확실히 하였다. 그는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고, 사서삼경은 물론이며 서양의 선교사들에게 서양의 학문도 배워나갔다. 또한 궁중의 화장품과 향응비를 모두 없애고 환관, 궁녀의 수를 대폭 줄였으며 자신의 옷 치장도 매우 검소하게 하였다. 치국에도 힘써 황하 치수 공사를 완성하였으며 흉년이 들었을 때 토지세와 소작료를 감면하게 하는 등 사회 안정에 힘썼다.

강희제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5대 옹정제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마련하였으며, 그 뒤를 이은 건륭제는 선대 2대에 걸친 선정 덕에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건륭제는 티벳, 미얀마, 베트남 원정 등을 통하여 청나라의 영토를 최대로 만들어 동아시아 전역을 지배했으며, 사고전서의 편찬 등의 문화 사업과 내정에도 충실하여 선대 2대에 이어 청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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