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고구려가 조그만한 남만주에서밖에 못 놀았는지 알았습니다!!!

왜 고구려가 조그만한 남만주에서밖에 못 놀았는지 알았습니다!!!

작성일 2007.02.04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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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한 남만주에서 논 고구려는 조그만한 소국에 불과하였다. 왜 중국을 넘지 못하였으며 북만주를 지배 못하였는가? 그들은 기병위주지만 대부분의 병사들은 보병들이다. 그리고 전술이란 없다. 무조건 뛰어나가 싸우는 것이다. 이러니 중국군과 싸울 때 수가 비슷할지라도 중국군이 정교한 진을 치고 공격해오면 그대로 박살나는 것이다. 그럼 왜 북만주는 불가능하였는가?북만주의 말갈족이나 거란족등은 기병위주로써 돌격형 기병이 아닌 화살을 퍼부으면서 전장을 누비는 유동적인 움직임으로 전투에 임한다. 이러니 기병저지법도 모르고 제대로 된 전투 대형도 안 갖추고 무조건 우르르 몰려가 싸우는 보병들과 소수의 기병들은 이들을 도저히 감당을 못하는 것이다.


#고구려가 왜 북경에 있을까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광개토대왕이 우리나라 역대 최고의 정복군주이긴 하지만,

당시 중국은 5호 16국시대의 중국역사상 최악의 혼란기였습니다.

당시 광개토대왕과 대결했던 왕조가 모용 선비족의 후연이라는 왕조인데..

건국한지 30년도 안되서 멸망할 정도로 중국은 그야말로 진흙탕이었죠.ㅡㅡ;

그런 혼란기를 틈타서 광개토대왕이 요동반도를 먹을수 있었던 겁니다.

이후 북중국은 북위라는 왕조가 통일을 하게 되는데 이 때부터는 고구려(장수왕)도

중국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화친을 맺은 다음 수도를 평양으로 옮겨서
 
애꿎은 백제,신라만 조지게 됩니다..ㅡㅡ;;

당시 고구려가 아무리 전성기라 하더라도 반쪽자리 중국 왕조인 북위도 상대하기가 버거

웠다는 반증입니다.

 

예를 들어 ‘광개토대왕’ 편에서는 마치 고구려가 동아시아의 최강국이며 당시 로마제국의 군사적 위상에 필적하는 나라로 묘사하고 있는데데 그런 광개토대왕의 정복사업이 가능했던 것은 고구려 군대가 강하기도 했지만, 당시 중국이 한족의 남조와 5호16국의 북조로 분열돼 서로 싸우는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냉정하게 보면 고구려의 위상은 당시 중국 동북부의 한 패자였던 북위와 겨루는 그런 수준이었음을 인정해야 할겁니다.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에 대한 이해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고구려와 수나라의 싸움하면 을지문덕의 살수대첩만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수나라 대군의 4차례에 걸친 침입 때 고구려는 두차례(1차와 4차 침입)나 명백히 항복했습니다.

서기 613년, 수나라 양제의 3차 고구려 침입 때 수나라는 국내의 반란 때문에 철군합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철군하는 수나라 군대를 국경 너머까지 쫒아가지 못했습니다. 수나라는 고구려를 침입할 수 있어도, 고구려는 중국 본토를 침입할만한 역량이 되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것은 고구려와 수나라의 군사적 역량, 국가적 역량의 차이를 극명히 드러내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같은 사실들은 제대로 살피지도 않은 채 을지문덕의 살수대첩만을 떠올리며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패자로서 수나라 대군을 항상 대파했다고만 생각하곤 합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글쓴놈이나 답변한놈이나 마찬가지구만...

 

그리고 글쓴놈. 너 확실히 해둘게 있는데

 

니말대로라면 만주도 중국땅이다.. 뭔뜻인지 알어??

 

중원을 못넘봤다고 확실히 해놓던지.. 그리고 고구려가 언제 중원을 섭렵 못했다는거냐..

 

최소한 지금의 북경 부근은 확실히 차지한 유적이 있거든?

 

그리고말이야.. 북만주와 남만주를 어디기준으로 잡는거냐? 좀 알려주지그래>?

 

그리고 말갈이나 거란도 고구려에 복속된 족속들이다.. 머리 비었구만

 

또한 고구려의 전술을 논한것 만으로도 니 머리 비었다는건 확실하다.

 

고구려에 관한 기록의 희박한 상태니 전술은 커녕 고구려가 쓴 역사서 하나 안남아있지.

 

그런데말이야... 고구려의 축성기술을 보나 수/당과의 전투기록을 보나

 

구체적으론 물론 모르지만 분명히 전술있었다는건 확실한 사실이다.

 

『주서』도 고구려의 전술은 ‘성안에 군량과 무기를 비축하여 두었다가 적군이 침입하면 성안으로 들어가 굳게 지킨다’고 기록했다...

 

주서는 누가 쓴글이냐?? 중국인들이,,정확히는 한족들이 쓴 책 아니냐.

 

이정도만 봐도 충분하지 않나?

 

내가 예를 든 전술이 청야전술이라는건 물론 알고있겠지 잘난머리로...

 

아 그리고.. 니가 보고 이해할만한 글 하나 찾아냈다

------------------------------------------------------ greenyds님의 지식이다 참고로..----

고구려와 로마가 붙는다고요.

전쟁을 말씀 하시는 거죠?

사실 너무 먼 두 나라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날 가능성은 없지만 군사적인 면만 가정해 볼 순 있겠지요.

먼저 두 나라의 군사력을 살펴봅시다.

로마는 최전성기 때 총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이 50만 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건 로마 전역에서 총 동원 시킬 수 있는 군사력이지 하나의 전쟁에 몰두 시킬 수 있는 병력은 아닙니다. 로마는 기본적으로 군단 단위로 군대를 통솔합니다. 군단 한개는 보통 5000명 정도의 군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중 주력은 로마의 자랑 중장보병입니다. 그리고 기마병은 군단 당 약 400명 정도 였습니다. 그리고 4~500명 정도의 경보병, 이들은 주로 가벼운 옷차림새로 투창을 던지거나 활을 쏘았습니다.
로마는 한 전투에 많으면 4~6 개의 군단을 참여 시켰습니다. 그러니까 한 회전에 40000명이 넘는 군대가 투입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많아야 2~30000 정도였습니다.

-> 중장보병에 대해서 약간 설명을 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이들은 '글라디우스'라고 불리우는 60cm정도의 짧은 검을 이용합니다. 로마군과 적대관계였던 켈트(갈리아)족이 긴 검을 이용하는 것과는 다르죠. 이유는 대강 이렇습니다. 켈트족들은 규칙적인 대열을 이용하지 않았던 바에 비해서, 로마군은 팔랑크스라고 불리는 방진을 이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공간이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좁은 공간에서 잘 사용할 수 있는 짧은 검이 필요했던 것이죠. 그리고 갑옷은 '로리카 세그먼타타에'라고 하는 것으로서 '플레이트 아머'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플레이트 아머가 아니라 가슴만 보호하는 하프 플레이트에 가깝다고 볼 수 있죠. 그리고 방패는 '스큐툼'이라는 것을 썼는데, 이는 두께 2mm가량의 얇은 판자를 3장 접어서 고정시킨 목제 방패입니다. 이렇게 중무장 한 중장보병은 팔랑크스라고 불리는 대형을 이루었고, 싸웠습니다.

기마병은 '스파타'라고 불리는 칼을 이용하였습니다. 이는 말 위에서 사용하기 위해서 한 손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가볍고 가늘게 만들어 졌으며, 찌르기에도 적당하도록 날 부분이 일직선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셔츠 모양의 갑옷을 입었습니다.

경보병의 무기는 '필룸'을 주로 이용하였습니다. 이는 투창으로서 창날은 50~70cm이고 손잡이는 1~1.5m정도로 전체 길이는 1.5~2m가량입니다. 무게는 1.5~2.5kg정도이죠. 그리고 '필라'라고 하는 창도 쓰였는데, 이는 전체 길이가 70~150cm정도이고, 무게는 1~1.5kg정도입니다. 필룸과 필라의 차이점은 필라의 사정거리가 더 길다는 것과, 필룸은 주로 가까운 거리에서 던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의 경보병은 이 두가지를 다 가지고 있었는데, 우선은 필라를 던져서 상대방에게 겁을 주고는, 가까운 거리에서 필룸을 던지는 방식으로 싸웠습니다.


로마의 군대 구성은 그리스의 군대와 유사성이 많습니다.

장창을 이용하는 팔랑크스는 그리스의 방진입니다. 로마는 짧은 양날 검을 이용합니다.

로마의 전쟁은 대개 평지에서의 회전이었습니다. 양측이 서로 진형을 구축한 후 진형의 이동이나 전술을 이용하여 전투를 치루었습니다. 공화정 중기까지만 해도 별다른 전술 없이 주력부대인 중장보병이 앞으로 돌진하여 전투를 하는 식이었습니다. 기병과 경보병은 워낙 소수라 그다지 활용 되지는 못했습니다.

이런 로마군에 본격적으로 전술이 사용되고 기마병의 중요성이 부각된 것은 흔히 한니발 전쟁이라고 부르는 2차 포에니 전쟁을 통해서 였습니다. 1차 포에니 전쟁에서도 누미디아 기병을 백분 활용한 카르타고 군에 애를 먹지만 그때만 해도 별다른 감상이 없었죠. 그런데 한니발이 정작 이탈리아 본토 내를 휘젖고 다니자 공포에 휩싸인 거죠. 시칠리아 섬에서 전쟁이 벌어졌던 1차 전쟁과는 달리 한니발 전쟁은 공포 그 자체였죠.

한니발은 로마 군에 비해 기병의 비율이 월등히 높았습니다. 기병의 기동성을 이용하여 측면과 후면에서 동시에 공격해 로마의 밀집 진형을 깨뜨리는 식이었습니다. 이런 한니발의 전술을 습득한 스키피오 역시 로마 기병대의 비율을 끌어 올립니다.

로마는 전통적으로 시민 스스로 군비를 부담했습니다. 그래서 노예나 무산층은 병역의 의무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민은 보병을 하였고 말과 갑옷이 비싼 기병은 소수의 귀족만 하였습니다. 따라서 자연히 기병의 비율이 작을 수 밖에요. 스키피오는 이런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갈리아와 누미디아에서 기병을 수입하죠.

그리고 스키피오 이후 로마는 기병을 활용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 이전에 비해 비약적인 발전이지만 그래도 로마의 주력은 중장보병이었습니다. 기병은 기동성을 이용해 포위하여 진형을 흐트리는 역할을 할 뿐이지요.

-> 이게 고구려군과 로마군의 가장 큰 차이입니다. 고구려군은 기병 중심입니다. 반면 로마군은 보병 중심이죠. 물론 보병이 기병에게 무조건 진다는 것은 아니지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기병이 훨씬 유리합니다.


이런 로마 부대에 고구려 군대는 쥐약이지요.

고구려의 주력은 보병이 아닌 기병입니다. 말에까지 갑옷을 입힌 철갑기병의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역사 스페셜에서 보니 광대토대제가 한번에 동원한 최대 병력은 기병만 10만 이었습니다. 몽골 군이 13만의 몽골 기병으로 세계를 재패하였습니다. 보병 중심의 부대에게 기병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아시겠죠?

-> 여기서 언급은 안 되었지만 몽골군과 고구려군의 기병 사이에는 한가지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몽골군의 기병은 주로 경장기병 중심이지만, 고구려군의 기병은 주로 중장기병, 즉 개마기병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전술상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지요.


또 광개토대왕은 전략 전술에 매우 능했습니다. 로마처럼 하나 배우면 그대로따라하는 게 아니라 상화에 적절한 다양한 전술을 구사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투 전의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 습득을 중시하였습니다

한번은 적의 군대가 이미 겁을 먹고 있고 두려워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전 기병대에게 방울과 구슬 그리고 나뭇가지를 매달게 하고 달려서 그 엄청난 말발굽 소리에 더하여 엄청난 흙먼지와 요란한 방울 소리에 스스로 겁을 먹어 군대가 성에 채 도착하기도 전에 항복을 받아내었다고 합니다.

로마 군대와 고구려 군대가 전쟁이 잃어났습니다. 고구려가 침략했다고 봅시다. 저 첫 전투가 벌어지겠지요. 로마가 더 이상 영토 확장을 중지하고 방어 체제로 돌아서고는 약 25개 군단을 한 번에 운영했습니다. 군사 요지에는 약 2, 3개의 군단이 있었습니다. 제정 시대에는 공화정 시대보다 군단의 수가 더 늘어 있었습니다. 약 8000명 정도로 생각하시면 될 듯 합니다. 러면 첫 전투에서 2, 3만의 로마 부대와 고구려 군대의 전투가 있겠지요. 모든 걸 떠나서라도 그 압도적인 머릿수로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 여기서 사실 좀 복잡하게 생각하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ljm5763님은 고구려군대가 쳐들어 간다고 가정하셨는데, 사실 이렇게 되면 고구려의 전략은 바뀌어집니다. 개마기병 중심이 아닌 경장기병 중심으로 말이죠. 즉 고구려군의 전형적인 전술 보다는 훈족 전술이나 몽골의 전술과 비슷하게 나올 것입니다. 전쟁에서의 생명은 병참입니다. 이 병참을 생각을 해야 하지만 한판 맞짱 뜬다고 생각을 하도록 하여서 이를 제외하겠습니다. 즉 가정은 이렇게 하겠습니다. 로마와 고구려의 거리를 가깝다고 설정하고, 고구려는 그들 고유의 전술을 이용한다로 말입니다.


로마는 공화정 후기까지 징병제였습니다. 시민인 이상 병역의 의무가 있어서 자비로 군대에 입대하여야 했습니다. 군대가 되는 것은 추첨이었으니 재수 좋으면 오랫동안 입대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후기부터는 모병제가 되었습니다. 직업 군인이 등장한 거지요. 하지만 그래도 위기 시마다 정부는 군을 징집했습니다. 로마의 모든 시민은 군인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지요.

위기를 느낀 로마는 급히 많은 병력을 고구려 군대가 있는 쪽으로 이동시킬 거고 징병도 할 것입니다.
로마가 워낙 넓어서 전선이 꼭 하나라는 법은 없습니다. 고구려는 의도적으로 군대를 분산시킬 가능성이 있습니다. 10만의 기병과 20만의 보병이 고구려의 전체적인 전력이라고 봅시다.

고구려는 로마의 병력이 한 곳에 집결하지 못하도록 로마 전역에서 전투지역으로 이동하는 로마군을 먼저 공격할 수도 있습니다. 고구려가 5개의 부대로 나누었다고 해도 6만 입니다. 기병 2만에 보병 4만.
비슷비슷한 전력차에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로마의 군대는 앞서서도 말했지만 중장보병 중심의 군대입니다. 전투도 기병이 상대편 주력을 포위하여 진형을 흐트리면 용맹스런 로마 중장보병이 돌진해 가는 식입니다. 그런데 이 전술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편 기병을 먼저 제압하고 상대 주력 뒤와 옆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고구려군에게는 저 건술이 먹힐 수가 없습니다. 십분 양보하여 로마 기병이 고구려 주력을 포위하였다고 쳐도 고구려는 주력 자체가 기병이고 기병이니 만큼 병사간의 거리가 넓고 진형이 유동적입니다. 별로 진형이 흐트러졌다고 큰 피해를 보진 않습니다. 중장보병의 돌진에도 고구려 군은 별로 무서울 게 없습니다. 그리ㅡ 군 같으면 3, 4m나 되는 장창을 이용하지만 로마는 짧은 칼을 쓰기 때문에 기병에게는 치명적이지 못합니다.
그보다 앞서 로마 기병을 선 제압하고 고구려 기병이 로마군을 포위할 것입니다. 로마 군은 포위에 유독 약합니다. 포위되면 진다라고 보시면 될 듯합니다.

-> 여기서 잠시 보병이 기병을 이기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은 제가 예전에 철기병을 상대하는 방법에 대해서 정리해 놓은 글입니다. 이 글을 올리는 이유는 로마군이 제가 말하는 전술을 잘 이용하느냐라는 것을 보기 위해서 입니다.

"철기병을 상대하는 방법은 4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장창(長槍)을 이용하는 방법 : 이는 영화 브레이브하트에도 나왔던 방법입니다. 긴 창(서양에서는 pike라고 부릅니다.), 즉 장창을 가지고 공격하는 방법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무경총요에도 나왔는데 장창을 이용하는 방법은 2명의 병사가 한 사람은 창의 끝을 잡고 다른 한 사람은 창의 중간쯤을 잡습니다. 그래서 땅에 준을 꽂아 공격태세를 갖춘 다음 철기병, 즉 개마기병이 돌진해 오면 찌르게 됩니다. 이때 개마기병의 경우 아무리 세다고 해도 이 창에는 소용이 없습니다. 결국 장창으로 인해 죽게 됩니다. 말이 돌진해 올때 가속력으로 인하여 그 속도를 줄일수 없으므로 창에 찔려서 죽게 되는 것이지요.

2) 극(戟)을 이용하는 방법 : 이것은 조금 단거리에서 쓰는 방법입니다. 극이나 구겸창(鉤鎌槍)이라는 무기는 창날에 가지가 달려 있습니다. 이 가지로서 상대방을 끌어 내려 공격하는데 우리나라 삼국시대때 주로 쓰인 갑옷은 찰갑입니다. 이 찰갑은 철과 철을 이은 갑옷이기에 그 틈이 있습니다. 그러니 극이나 구겸창이라는 무기로서 상대방을 끌어 내립니다. 이런 끌어내리기 전용인 무기로 갈고리(鉤)라는게 있긴 합니다만 주로 극이나 구겸창을 쓰죠. 상대방을 말에서 끌어내리면 적은 타격을 받게 됩니다. 무거운 갑옷을 입고 있기에 더욱 그러죠. 그렇기 때문에 그때 다른 무기로 공격하면 개마기병을 손쉽게 없앨 수 있습니다.

3) 노(弩)를 이용하는 방법 : 여기서 말하는 노는 노포를 말합니다. 장거리를 나가는 이 노포라는 무기의 화살은 그 길이가 1m가량 되는 창 같은 것입니다. 이 노는 힘이 세기 때문에 아무리 두꺼운 갑옷을 입고 있더라고 공격해서 그 갑옷을 뚫어버릴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이런 노는 기계적인 것이어서 활 보다 그 위력이 강합니다. 이는 공성전에도 주로 쓰였으며 야전에서도 많이 쓰였다고 합니다.

4) 부(斧)를 이용하는 방법 : 부라는 것은 도끼를 말합니다. 여기서 부는 그냥 타격무기의 대표명사로 썼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타격무기라는 것은 공격속도가 더뎌도 상대방을 공격했을때 그 타격이 상당히 강합니다. 그래서 타격무리라고 하는 것이지요. 도끼가 그 대표적인 예 입니다. 도끼를 든 군사를 부월수라고 하는데 이 부월수는 주로 개마기병을 상대 하였죠. 그밖에 간, 편이라는 당나라의 무기가 있기도 합니다만 너무 길면 어지러울 듯 하니 제외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처럼 4가지 방법이 있는데 보통 전투에서는 이를 결합하여서 싸웠습니다. 그럼...

greenyds : 쩝... 몇가지 수정을 하려고 했는데...
greenyds : 참고로 당시 대표적인 전투의 예를 들자면 당의 20만과 신라의 3만이 싸운 매소성전투가 있습니다.
greenyds : 그때 신라의 노포는 그 유명한 천보노라는 것을 썼죠.
greenyds : 그때 신라는 장창과 천보노라는 것을 이용하여 당나라의 중장기병, 즉 철기병을 상대하였습니다.
greenyds : 결국 신라는 대승을 거두게 되죠.
greenyds : 참고로 수호지에도 앞에서 언급한 구겸창이라는 것에 대해 나옵니다. 참고하시길...
tantaluos : 내가쓴 20자평이 지워졌다......크흥....
tantaluos : 고구려와 백제,신라의 접경지역에는 산이 많으니 산악 전술도 .....흠.. "

글 주소 : http://kin.naver.com/browse/db_detail.php?dir_id=110101&docid=28566

ljm5763님께서 쓰신 글에 보면 그리스군의 장창을 언급하셨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제가 철기병을 막는 방법 첫번째를 굳이 장창으로 한 것이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로마군은 짧은 칼에다가 단창을 주로 씁니다. 즉 초반에는 이때문이라도 깨지게 되어 있습니다.

ljm5763님께서 말씀하신 "기병이 상대편 주력을 포위하여 진형을 흐트리면 용맹스런 로마 중장보병이 돌진해 가는 식"이라는 것은 사실 일반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전술입니다. 고구려의 전술도 사실 알고보면 이와 비슷하죠. 로마기병이 고구려의 개마기병(이하 개마기병이라고 부르겠습니다.)을 이길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로마기병은 개마기병에 비해 경장인데다가, 무기 또한 개마기병에 미치지 않습니다. 즉 로마기병이 고구려 진영으로 군사를 보내는 것이 아닌 고구려 군 중에서 개마기병이 측면으로 돌진을 할 것입니다.

그럼 고구려군이 로마군과 싸우는 장면을 상상해 봅시다. 우선 물소의 뿔(고구려때도 이를 썼을지는 모르지만, 썼다고 가정하고)에 사슴의 힘줄을 연결시켜 만든 강력한 '맥궁(貊弓)'을 쓰는 궁전수(弓戰手 : 활을 쓰는 병사)들이 로마군으로서는 상상도차도 할 수 없는 거리에서 활을 퍼 붇습니다. 이에 로마군은 당황 할 것입니다. 그러나 피해는 그리 크지 않겠죠. 이에 궁전수들은 조금 더 근접하게 되고, 스큐툼 중에서 어떤 것들은 뚫어지는 것들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수는 적을 것입니다만 말입니다.

이때 효시(소리가 나는 화살)이 하나 쏘아집니다. 그것을 신호로 개마기병이 전손력으로 돌진합니다. 거대하고 두꺼워 보이는 '맥도(貊刀)'라고 불리우는 대도를 들거나 아주 긴 창인 '삭'을 가지고 그대로 밀고 들어오는 개마기병... 이들은 말부터 사람까지 모두 갑옷으로 중무장 되어 있으며, 말은 크고 건장하며 가속도마저 붙습니다. 이런 개마기병을 보고 겁을 내지 않을 이들이 얼마나 되겠습니다. 게다가 측면공격이니, 측면이 부실한 로마군으로서는 바로 진열이 엉망이 됩니다. ljm5763님의 말씀을 따른다면 이들 중에는 고구려의 전차부대까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구려의 부월수(도끼를 이용하여 싸우는 병사), 환두수(환두대도 같은 칼을 이용하는 병사), 단창병(짧은 창을 이용하여 싸우는 병사) 등이 밀고 들어옵니다. 로마군은 당황하게 되고 얼마간 싸울지도 모르지만 결국엔 깨지게 됩니다. 결국 도망을 가게 되죠. 이때 고구려의 경장기병이 추격을 합니다. 이들은 주로 긴 창이나 활을 이용하죠. 결국 로마군은 상당한 피해를 입고, 남은 병사들도 얼마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고구려가 승리하면 로마는 뭔가 다른 방법이 필요함을 느낄 것입니다. 그래서 유능한 장수가 있다면 로마군은 얼른 무기를 교체할 것입니다. 그리고 궁병을 대폭 증강시킬 것입니다. 하지만 고구려군의 활은 정말 멀리 날라갑니다. 역사 스페셜에서 고구려의 활을 직접 제작하여 날려봤는데 정말 멀리 날라가더군요. 당시 기록에도 중국의 활은 고구려 활의 사정거리에 미치지 모사혔다고 써있는게 있습니다.

고구려는 이런 활의 우수성을 이용하여 로마 궁병의 사정거리 밖에서 활을 쏠 것입니다. 하지만 중장보병의 방패가 왠만한 것은 다 막아낼 것입니다. 서로 다가가지 못하고 시간만 끌 수도 있습니다. 만약 고구려 군이 전차부대를 데리고 왔다면 전차 부대를 쓰면 될 것입니다. 고구려는 전차의 나라였습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항상 마차가 등장합니다. 그 기능도 우수했죠. 그 수가 적은 편이었지만 그 위력은 무시를 못합니다.

하지만 전차 부대를 안 가지고 왔다면 로마가 선제 공격을 하기 전에는 이기기 힘들듯 합니다. 로마는 고구려 군이 선뜻 공격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고무되어서 중장보병이 방패를 앞세우고 천천히 공격해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보병이 받쳐줄 수도 있지요. 고구려는 설설 물러서는 듯이 하여 좀더 로마군을 가까이 접근을 시키고 깊숙히 들어왔다고 생각되면 화살을 날리는 겁니다. 비오듯.

중장보병은 큰 방패로 방어를 할 수 있다고 쳐도 이렇다할 방어구가 없는 궁병은 후퇴할 것입니다. 뒤에서는 궁병이 계속 화살을 멀리 날려 로마 궁병의 접근을 막고 기병과 보병은 로마 중장보병을 포위하면 전멸도 가능합니다. 다만 로마가 선제공격하지 않으면 그냥 둘다 퇴각할 수도 있지요.

고구려 군은 원정군이기 때문에 피해를 최소한으로 해야합니다. 특히 인명 피해는요. 원정군임에도 지속적으로 전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전투의 승리가 아닌 전쟁의 승리로 이을 수 있는 법입니다. 그리고 광개토대왕은 원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전략을 택하였습니다. 광개토 대왕은 주로 해외원정을 하였기에 그런 점도 있지만, 고구려 군인은 자국의 백성이라고 생각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감상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할 이유는 충분하지만요. 또 될 수 있으면 적군의 피해도 줄이면서 전투에서 승리하였습니다. 포로의 숫자를 늘릴 뿐 아니라 사로잡은 적군을 이용하여 아군의 전력을 증강시킬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언제까지나 화살 따위로 고구려 군을 지연시킬 수는 없습니다. 화살은 원래 소모성 물자입니다. 한없이 화살을 쏴댈수는 없지요. 뿐만 아니라 당시 화살은 살상력이 매우 낮았습니다. 화살이 날라온다고 해도 그 화살이 갑옷을 뚫고 몸에 박힐 확률조차 낮았습니다. 그리고 몸에 박힌다 하더라도 그것이 전사로 이어지기는 힘들었습니다. 재수 없으면 죽지요.

고대 전쟁에서 화살을 주무기로 한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고구려 군이나 몽골 기병같은 경우가 대표적이지만 다른 예는 찾기 힘들군요. 그만큼 두 나라가 화살의 성능과 궁술 솜씨가 뛰어났다는 말입니다.
고대 전쟁에서는 원거리 무기는 언제나 보조무기 였습니다.

심지어 임진왜란에서도 조총은 일본군의 보조무기였을 뿐입니다. 주력은 일본도를 든 보병이었습니다. 해전에서도 일본은 조선과 달리 원거리 무기인 조총과 활은 보조무기로 사용되었습니다. 항상 중요한 공격은 배를 붙이고 일본 무사가 배를 건너가 직접 칼로 베어죽였습니다.
고구려군 입장에서 로마군의 화살은 그다지 위협적이지 못합니다.

어떤 분이 로마의 참호와 가도를 말씀하셨습니다.(다른 질문에서)
하지만 현대적인 의미의 참호는 세계 대전 후에나 만들어진 것입니다. 로마 시대의 참호는 진정한 참호라기 보다는 구덩이에 불과했습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갈리아에서 반란군 진압시 참호를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요새에 가까운 구덩이였기 때문에 고립되는 상황이 발생했죠. 현재처럼 보급 통로와 요새로서 두가지 역할을 수행하는 참호는 아니었습니다.
또 참호는 총처럼 현재적인 원거리 무기가 본격화되고 나서야 효과가 생깁니다. 과거에는 활을 주력으로 하는 우리 나라같은 나라나 요새에서 숨어서 공격하는 것이 효과가 있었죠.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참호는 그다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합니다.

스키피오나 카이사르 같은 희대의 명장이 나타나서 귀신 같은 전술를 구사한다면 몰라도 군대 시스템상 고구려가 이길 것입니다.

게다가 로마는 회전을 중시합니다. 매복이나 기습 공격 배후 공격은 비겁한 짓이라 여겼습니다. 한니발이 로마에 공격해 왔을 때에도 한니발은 지형을 이요하여 매복 기습 공격을 하였는데 로마 사람들은 그것을 패배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속임수에 당했을 뿐이라고 여깁니다.
이런 상태라면 전략 전술의 달인 광개토대제의 귀신 같은 전술에 당하고 말겁니다.



greenyds 님의 문제제기가 있었습니다.

"고구려 전차병에 대해서는 저로서는 처음 듣는 말입니다. 사실 전차라는 것은 등자라는 것이 존재하기 전에나 쓰이던 것이죠. 그래서 중국에서는 전한시대부터 전차라는 존재가 사라지게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등자를 단 기병에 비해 전투력이 떨어지기 때문이죠.

고구려라면 아마도 개마기병과 경장기병을 효율적으로 이용해서 싸웠으리라고 전 생각합니다. 비록 기록은 없지만 경장기병을 운용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병법의 상식인데 그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고, 대신 전차를 언급하였군요. 제가 어리석어서 그런지 모릅니다만 이에 대해서 답변을 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그럼..."



먼저 고구려 전차병에 대해서 말하겠습니다.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전차군단을 지위하는 사령관)
거기대장군은 고구려의 한 관직입니다. 거기란 표현에서도 아시겠듯이 말을 이용한 수레로 구성된 병과를 총관리하는 직책입니다. 이런 직책명에서도 보이듯이 전차는 당시까지 사용되었습니다.
고구려 고분 벽화 행렬도에서 보면 거기에는 수많은 병과가 등장합니다. 그 행렬도를 통하여 고구려의 무기나 장갑에 대해 많은 정보를 알 수 있었죠. 고구려의 철갑기병에 관한 가장 확실한 정보도 그곳에서 얻었죠.

그 행렬도에는 전차도 등장합니다. 말이 끄는 밀폐된 수레 안에 병사가 타고 있죠.
기록에 따르면 수-당 전쟁 당시에도 전차가 사용된 듯 합니다. 물론 중국 기록이지만요.
전차는 기병에 비해 방향전환등이 어렵고 다루기가 어려워서 계속 쇠퇴하는 입장에 있긴 하였지만 그래도 역시 상대의 주력은 보병이었기 때문에 돌파력이 뛰어난 전차는 여전히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고구려는 전차를 잘 활용한 듯 싶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고구려는 수레의 나라입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륜 수레는 고구려의 군사, 경제를 이끄는 축이었습니다. 농경은 물론이고 수레를 통한 상업과 유통의 활성화가 있었기에 고구려가 대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전차는 기병에 비해 전투력이 떨어집니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기동력과 기민성이 떨어지죠. 어떻게 보면 살상력도 떨어진다고 할 수 있죠. 그렇지만 2~4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는 직선 돌진에서는 기병보다 훨씬 뛰어난 돌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레 자체의 발달(바퀴를 크게 만들고 무기를 장착하는 등)에 따라서 그 능력도 훨씬 좋아집니다. 또 궁병에 상대적으로 약한 기병에 비해 궁병에 대해 전차병은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죠.

밀집된 보병 진형을 공격할 때 전차 부대로 일단 뚫고 나서 공격하면 효과가 좋아지겠죠. 전차의 약점은 상황 대응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사용하는 장수에 따라서 그 능력치가 바뀝니다. 신중하게 사용하면 소강상태를 풀 수 있는 해결책이 되겠지요.


고구려에 경기병이 있다는 기록이 없다고 하셨는데 위에 언급한 행렬도에 보면 경기병이 있습니다. 철갑기병은 고구려 수많은 기병 중의 한 병과입니다. 경기병은 철갑기병과 비슷한 혹은 더 많은 수가 고구려 전력내에 있었을 것입니다.

고대 전투에서 기병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가 없지만 골치아프게도 장갑과 속도는 반비례의 관계에 있었습니다. 장갑이 가벼우면 가벼울수록 기병의 속력은 빨라지고, 장갑이 두꺼우면 두꺼울수록 속도는 떨어집니다.

그래서 과거 장수들을 딜레마에 처하게 했지요. 장갑을 버리고 속도를 택한 가장 대표적인 기병이 바로 몽골기병이고, 속도를 버리고 장갑을 택한 대표적인 기병이 여진족 금나라 기병입니다. 금나라의 기병은 장갑을 세겹이나 했다고 합니다.

고구려 기병은 몽고와 금의 중간 정도지요. 몽고 기병에 비해 전신을 감싸는 장갑을 하고 있지만 금나라처럼 3겹이나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장갑은 찰갑이어서 움직임이 기민하고 판갑에 비해 가벼우면서도 충격이 흡수되어 장갑능력이 오히려 좋았습니다. 참고로 로마는 판갑이 더 많이 쓰였습니다.

궁병을 상대하는 기병에 있어서 장갑과 속도중 무엇을 선택하느냐는 전쟁의 승패는 물론이고 인명이 달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사실 고대의 활과 화살은 그리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궁병이 잘 쓰이지 않던 로마 같은 곳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화살의 사정거리는 많으면 수백미터까지 되지만 그것이 도달한다고하여 목표에 꽂힐 확률은 현저하게 낮습니다. 한국의 활이 우수한 이유도 단순한 사정거리가 아니라 먼거리에서 과녁에 꽂힐 확률이 높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살상력을 갖는 실제적인 활의 사정거리는 50m 정도 됩니다. 로마처럼 활이 발달하지 않은 나라는 30m 안팍으로 예상됩니다.

상대 기병이 돌진해옴에 따라 화살을 쏘아대도 사실상의 사정거리인 30m 안에 상대편이 들어오면 궁병은 사실 화살을 쏠 기회가 없습니다. 기병의 속도가 아무리 늦는다고 해도 시속 50Km 정도는 될 것입니다. 그러면 50m 정도는 4초면 돌파합니다. 그러니까 궁병은 사실상의 사정거리안에 기병이 들어왔을 때 얼른 진을 정비해서 배후로 빠질지 아니면 마지막 한 방을 쏠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대부분의 전술이 그렇듯이 상대방의 선봉이 돌진해 올 때까지 원거리 공격을 날리다가 적군이 접근하면 얼른 기병이나 보병의 배후로 빠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궁병에게는 기회가 많아봤자 한번 목숨을 걸면 두번의 기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수동으로 사격하는 궁병에게 있어서 3초와 3.6초의 차이는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무장한 철갑기병의 속도를 시속 50Km 로 보고, 경기병을 시속 60Km 로 보았을 때) 속도의 문제는 궁병을 상대할 때 보다는 적군에 대한 포위공격을 실행할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궁병은 궁사 기회를 얻기 위해 돌격하는 적군 앞에 저지선을 설치하기도 합니다. 나무나 돌 같은 장애물 같은 거요. 로마군처럼 병참에 능통한 군대라면 충분히 실현 가능성이 있죠. 적군의 돌격을 지연시켜서 궁사기회를 한번이라도 더 얻겠죠.

이런 경우에는 경기병보다는 무장이 더 두꺼운 철갑기병이 유리하겠죠.

경기병이 쓸모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어찌보면 철갑기병보다 경기병이 더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고구려 고분 벽화 수렵도에서 말달리면서 뒤에 있는 사냥감에 활을 쏘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것은 매우 고난이도의 기술로 전세계에 드물다고 합니다. 항상 활을 휴대하면서 활을 주력 무기로 사용하기도 하는 고구려 기병의 경장기병은 어쩌면 몽고기병의 선배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제가 경기병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제 실수입니다.
경기병은 철갑기병보다 적어도 시속 10Km는 빠릅니다. 이런 기동성과 민첩성을 이용하여 우회 포위전수에 아주 유용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빼먹은게 있는데 어떤 님은 스키피오이후 로마도 기병을 활용한 전술에 눈을 떳으며 누미디아와 갈리아에서 수입한 상질의 기병이 있다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군의 기병과 고구려 기병이 부딪혔을 때(로마는 항상 기병을 측면에 배치하였으며 동양에서도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기병을 측면에 배치하는 것이 기본형이다.) 고구려 기병이 절대 이길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님께서 문제 제기하신 등자 때문입니다. 서양에서는 8세기 경에나 등자가 보편화되어 일반 병사들도 사용하였지 그 이전에는 동양에서 수입한 몇개만 있어서 고위 관리나 하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말 위에 앉은 병사들은 행동에 제약을 받았으며 고구려 기병처럼 강한 공격을 할 수 없었습니다.

위에서 말했듯이 로마의 기병은 사대편 진형을 포위하고 측면과 배후에서 공격하여 진형을 흐뜨리는 일만 담당하는 보조부대일 뿐입니다.


jjh1081327 님의 문제제기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질문하신분 께서 전성기라고 하시지 안았습니까 그럼 두영웅인 스키피오와 카이사르 등도 다 포함되겠지요...


로마의 전성기때는 절대 스키피오와 카이사르가 없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로마의 전성기라 함은 기원전 27년부터 서기 180년까지 로마 제정 초기의 약 200여년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스키피오와 카이사르는 모두 공화정 로마 시대의 사람입니다. 모두 대단한 영웅이고 전략가지만 로마의 전성시대에는 안타깝게도 부재했지요.
특히 大스키피오(일반적으로 유명한 스키피오)와 카이사르는 시간적으로 약 200여년의 차이가 있기때문에 동시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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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제기 1

jahleena님께서 제 답변을 읽으시고 문제제기를 해 주셨습니다. 우선 부족한 제 답변을 읽어 주시고 문제제기를 해 주신 것에 대해서 상당히 감사하게 생각해고 성심 성의껏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jahleena님의 문제제기는 ""으로 표시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님의 이야기는 진짜 흥미 진진 하게 잘잃었습니다. (너무많이 참고되었습니다)
하지만 로마가 본토를 중심으로한 방어전을 펼친다면 어떤 결과가 발생 될까요?
로마의 본토는 이탈리아 반도로 그 위는 알프스 산맥이 가로 막고 있으며 삼면은 바다 입니다."

-> 사실 위의 답변 중에서는 제 의견도 있지만 대다수가 ljm5763님의 의견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력이 없는 제가 답변을 드리게 된다니 조금 부끄럽습니다. 그래도 한번 능력껏 답변들 드리겠습니다.

로마의 영토를 더욱더 세세히 말하자면 갈리아와 이베리아반도, 그리고 브리타니아 일부와 북아프리카 위쪽, 그리고 이탈리아반도와 그리스 반도 등 넓은 영토가 되겠지요. 여기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이탈리아 반도이니 이를 중심으로 한번 답변을 드려보도록 하겠습니다.


"고구려군이 로마를 친다면 지중해를 건너가거나 알프스를 넘어야 합니다. 지중해를 건너가기 위해선 주변국들의 도움이(배의 건조, 물자수송등) 필요하지만 당시 반도를 중심으로한 로마의 주변국은 대부분 로마의 속국이었으며 친로마적 성격이 강했습니다. 특히 처음보는 이민족에게 그들이 순순히 응할리는 없습니다.(언어장벽, 문화차이, 이국적모습등) 이런 상황에서 지중해를 건넌다는것은 거의 불가능 합니다."

-> 님 같으면 어디를 택하시겠습니까? 사실 기마병으로 알프스 산맥을 넘기 힘들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입니다. 결국 길은 지중해인데, 이 지중해를 건너서 이탈리아 본토로 진격하는 것이 어찌보면 가장 빠르고 현명한 방법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제가 만약 고구려인이라면 지중해를 통해 로마로 진격하겠습니다. 그러기 전에 우선 한가지 해 두어야 할 것이 있죠. 지중해 연안의 나라들이 고구려에게 부정적으로 대할 것을 대비해서 해 둬야 할 것이죠. 그것은 바로 '공포'를 이용하는 것, 즉 심리전입니다. 용병에서 심리전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지요.

과거 훈족과 몽골족이 했던 것처럼 고구려는 똑같은 심리전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몽골족이 치룬 바미얀 전투가 그 예라고 볼 수 있죠. 이 바미얀 전투에서 칭기즈칸은 자신의 손자인 카이두의 죽음을 보고 비미얀성을 맹렬히 공격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목적은 헤리타의 자랄 웃딘 군과 아프가니스탄 군들에게 자신들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확실히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밖에 팔레스타인인들이 피정복민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 머리로 피라미드를 쌓는 것 등 심리전을 이용한 전술 활용은 상당하죠.

즉 지중해 연안 국가 중에서 몇몇 국가를 희생양으로 삼고, 로마군과 정면대결을 해서 고구려군이 크게 이기게 된다면 지중해 국가들은 로마군의 무능함과 고구려군의 무서움을 가지고 고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 경우 7할 정도는 고구려에 붙는다고 치고, 나머지 국가들에게 철저히 응징한다면, 고구려로서는 해상루트를 확보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순순히 되지 않으면 칼을 쓰는 것이 전통적인 전투 방법이죠. 이것을 생각하신다면 고구려가 지중해를 넘는 것은 그리 크게 어려운 게 아니라고 봅니다.


"다음은 알프스를 넘어가는 방법인데 이 방법 역시 한계가 있습니다. 하니발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본토를 치긴 했지만 그 역시 그곳토착민들에게 3년동안 공을들여 그곳지리를 습득한다음 병력의 10/3이나 잃은뒤에 알프스를 넘을수 있었습니다. 알프스를 넘어도 물자의 공급이 끊기기 때문에 수월한 진격은 불가능 합니다.
또한 고구려의 원정은 장기간동안 펼쳐질수 없으며 로마에 큰피혜를 입히진 못할것입니다.
왜냐하면 10만의 기마부대는 50만이상의 인원(말관리인원, 전쟁물자수송인원, 전쟁물자 관리인원)이 필요한다는 소리이며 엄청난 량의 식량과 건초가 필여합니다. 말이 1일 이상 버틸려면 사람이 하루동안 먹는 식량의 7배나 더큰 부피를 차지하는 건초를 먹어야 합니다. 전투가 치뤄질때는 더많은량의 건초가 필요하겠죠. 특히 고구려른 산악국가로 대부분의 식량을 비축하기 힘듭니다. 전쟁식량을 비축하더라도 도 많은량을 비축하긴 힘들것입니다."

-> 이는 저또한 동감하는 바 입니다. 그래서 제가 위에서 지중해를 통해 본토진격하는 것을 상세히 소개해 보았습니다. 전술이라는 것은 그때그때 응용하면서 쓰는 것이 최고입니다. 님과 제 의견이 조금 상반되는 듯 하는데, 어쩌면 제 의견은 저돌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당시 전투적 성격을 보면 아마 그럴 것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물론 일반 전투에선 고구려의 전투력이 훨씬 앞섭니다. 그러나 두세력의 공식적 전쟁은 먼저 공격하는 쪽이 절대불리한 입장으로 현실적입장에서 어느쪽이 앞선다고 할수 없습니다. 만약 로마라는국가가 고구려와 붙어있으면서 서로 경쟁하는 관계를 가졌다면 고구려보다 훨씬 강력한 군사력을 가질수도 있습니다"

-> 보병과 기병의 차이를 생각해 본다면 조금 생각해 봐야 겠습니다. 그러나 로마도 머리가 돌아가는 한 자신들도 이기기 위해서 기병을 양성하게 될 터이니 이런 저런 면에서 재검토 해 봐야 할 사안으로 생각되는 군요. 로마나 고구려나 상업대국이니 말입니다. 제 의견은 그럼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이 답변이 좋은 답변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럼...



문제제기 2

park881010님께서 제 글을 읽으시고 문제제기를 해 주셨습니다. 우선 부족한 제 글을 다 읽으시고 문제제기를 해 주신 바에 대해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상당히 내용을 보니까 이상한 내용이 많네요..

에... 먼저 로마의 1개 군단의 병력은 제정 당시 군단병 1만, 보조병 1만 해서 도합 2만에 달했습니다. 그리고 한 회전에서 3~4만 정도가 최대라고 하셨는데 칸나에 회전 같은 경우에는 로마군 8만에 카르타고군 5만이 붙었습니다.

게다가 기마병은 군단 당 약 400명은 공화정 시대 얘기로서 제 1 계급이 적었을 때의 일입니다. 최전성기에는 갈리아 지방에는 상당히 많은 기병력을 보유하고 있는 군단도 많았습니다.

대부분 공화정 이야기만 하신 것 같은데요.. 게다가 최전성기 때 총동원 병력이 50만이라고 하였는데 이건 좀 오류가 있습니다. 23~4개 군단으로 이루어져 현역만 50만 정도였습니다. 현역만 50만, 즉 예비병력은 추산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물론 총동원에는 예비 병력까지 포함되기 때문에 좀 오류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갈리아 족이 밀집된 형태의 진형을 짜지 못했다고 했는데 이 것은 사실무근입니다. 공화정 당시 갈리아 족이 로마에 침공해왔을 때 그들의 방진 형태를 로마군이 모방하여서 정착된 것입니다.

가상 전쟁의 결론을 떠나서 글에 오류가 좀 있다고 생각되기에 문제 제기를 보냅니다.


솔직히 말해서 당혹스럽군요. 저는 사실 로마사를 그리 잘 아는 작자도 아니고, 그냥 동양의 전쟁사나 무기에 관심이 조금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핑계로 들리시겠지만 위의 글도 ljm5763님의 답변에다가 제가 약간 보충을 가한 것이지, 그 세부내용에 대해서는 저또한 지식이 부족해서 뭐라고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그런데 다른 것은 몰라도 님의 문제제기를 읽고 약간 의문이 가는 사항이 있군요. 제가 지식이 부족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로마가 쓰던 방진, 즉 팔랑크스는 그리스 때부터 있었던 전술로 알고 있습니다. 이를 로마가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전 알고 있죠. 그런데 갈리아로부터 팔랑크스가 전수됬다라... 솔직히 그에 대해서 저도 그리 잘 모르겠군요.

다만 제가 아는 것은 무기의 형태상 롱소드를 쓰는 갈리아족은 방진이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롱소드라는 것은 로마군이 쓰는 글라디우스 같은 검 보다 더 긴 것으로, 무기는 길면 길수록 사정거리를 생각하여 공간이 충분히 확보되어야 하죠. 사실 '진'이라는 것은 그런 공간확보에 질서가 있기 위해서 만들어 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로마군의 경우 주로 스큐툼으로 방어를 하면서 글라디우스로 싸우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서 갈리아족은 분산되어서 공격해 오는 것으로 알고 있죠. 그래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인지로 말입니다. 언제 때가 되면 '갈리아 전기'라도 읽어보고, 이에 대해서 알아봐야 해야 할 듯 하군요. 아무튼 문제제기를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우리나라의 삼국 시대 때 삼국은 각각...

... 가(加) : 부여·고구려 시대의 부족장의 이름 또는 관직명. 부여의 제가(諸加 ; 馬加... 뒤, 남만주 철도 부설권, 무순(憮順) 탄광개발 등 4대 이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를...

고구려와 로마의 성과 비교?

... 화려했는데 왜 고구려는 고작 남만주밖에 지배를 못하며... 성과도 거두었을까요??? 게다가 로마는 중국과... 솔직히 고구려 역시 아주 조그만한 나라였습니다...

야만족 고구려 너무 과장된 거 같음

... 고구려가 그토록 강력했다면 삼국을 통일 못했을까요??? 참고로 삼국은 서로를... 아무튼 고구려는 그냥 조그만한 한반도와 남만주에서 놀았던 그저 티벳 부분에 있던...

거짓말쟁이 한국인들 고구려 고조선 부여...

... ㅋㅋ 왜 고구려 애가 할려는 겁니까 ?? 고구려는 한국인... 그리고 훗날 한은 조그만한 마을단위의 78개의... 그당시 한반도 북쪽과 남만주 일대에 예맥민족이 살았었는데 그럼...

사회공부입니다.용

... 많은 분들이 왜 고구려는 만리장성을 넘지않았는가에 대해 의문이 많은데... 뒤, 남만주 철도 부설권, 무순(憮順) 탄광개발 등 4대 이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