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2차대전 당시의 전투...

세계2차대전 당시의 전투...

작성일 2006.02.28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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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2차 대전 중 아무 전투에 대해 자세히 조사 좀 해야하는데요...

 

전 스탈린그라드 쪽으로 하기로 헀습니다...

 

내공 팍팍 걸테니 밑에 있는 17가지를 답해주시면 감사합니다.

 

영어/원문 있으면 더 좋아요, 감사내공 드립니다~

 

꼭 스탈린그라드 전투 말고도 세계 2차대전 에 대해 아래 17가지를 모두 완성 시킬 수 있으면 괜찮아요!

 

역사학 고수분들 부탁드려요!

 

1. 전투의 이름 (스탈린그라드 전투)

2. 전투 장소

3. 시작~끝 날짜

4. 공격쪽의 목표

5. 수비쪽의 목표

6. 공격쪽 사령관

7. 수비쪽 사령관

8. a) 공격쪽 주요 무기

    b) 수비쪽 주요 무기

9. 공격쪽의 전략 전술

10.수비쪽의 전략 전술

11. 양측 피해 (전사자, 부상자)

12. 결과, 승부

13. 전투에 대한 간략한 묘사

14. 승리쪽의 승전 이유

15. 패배쪽의 패전 이유

16. 세계2차대전에 있어서 이 전투의 중요성

17. 군사적 교훈(?)

 

 

저도 열심히 찾아봤는데 구글, 네버, 엠파스 등등 이 모든것을 포함한 것은 없더라구요...

 

역사 고수분들 최대한 성의 있는 답변 부탁드립니다 ^ㅡ^~ 보상은 내공 왕창으로...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1. 전투의 이름 : Battle of  Stalingrad

2. 전투 장소 : City of Stalingrad (which is today Volgograd in Russia)

3. 시작~끝 날짜 : August 21, 1942 ~ Feburary 2, 1943

4. 공격쪽의 목표

Capture of Stalingrad

Tactically it would secure the left flank of the German armies as they advanced into the Caucasus.

Strategically it would gain the control of the oil-rich Caucasus, as well as the Volga River, a backbone of Soviet transportation from Central Asia.

 5. 수비쪽의 목표

Defending of Stalingrad and Surrounding the Axis attacking forces

Both tactically and strategically, Stalingrad was so important to Soviet Union for a major Soviet's industrial city and a key point for transfering large amount of oil and food. Also Stalin knew its importance as an ideological propaganda in defending the city which bore his name.

6. 공격쪽 사령관 : Friedrich Paulus, Erich von Manstein

7. 수비쪽 사령관 : Vasily Chuikov, Georgy Zhukov

8. a) 공격쪽 주요 무기

Axis infantry : Mauser rifle, MP sub-machinegun, German flamethrower

Support : Panzer 3, 4 tank, German artillery, German bomber

    b) 수비쪽 주요 무기

Soviet infanrty : Mosin Nagant rifle, PPSH sub-machinegun, Soviet flamethrower

Support : T-34 tank and Soviet artillery including Katyusha rocket launcher

9. 공격쪽의 전략 전술

Operation Blau(파랑 작전)으로 다가오는 미국과의 전면전을 위해 빠른 시일내에 소련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Army Group South(남부 집단군)을 소련의 중요한 석유 산지인 코카서스 지방으로 진출시켜서 방대한 양의 석유자원을 확보하고 또한 볼가강의 교통을 막음으로써 소련의 전쟁 물자 생산을 위축시키려고 하였다.

10.수비쪽의 전략 전술

강력한 전력을 가진 추축군들을 시가전에 끌어들여 손실을 강요하는 전술을 폈다. 전략적으로는 스탈린그라드시에서 치열한 방어전을 수행하는 추이코프의 군대에 증원하는 대신 스탈린그라드를 공격하는 추축군들을 포위 격멸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비밀리에 예비대를 꾸준히 모았다. 이것을 모르고 있던 추측군들은 추이코프가 지휘하는 스탈린그라드의 소련군과의 격렬한 시가전에 휘말려들어 전력이 크게 소모되어 약해졌다. 마침내 소련군은 Operation Uranus(천왕성 작전)을 발동하여 동계 공세를 시작하였고 스탈린그라드의 측면에 위치했던 루마니아와 헝가리 군대를 격파하여서 수십만에 이르는 추축군들의 주력부대를 완전히 포위하는데 성공하였다.

11. 양측 피해 (전사자, 부상자)

Axis suffered 850,000 casualties of all types among all branches of the German armed forces and its allies : 400,000 Germans, 200,000 Romanians, 130,000 Italians, 120,000 Hungarians were killed, wounded or missing. An unusually high proportion of total German casualties were killed and captured (96,000 of whom were prisoners).

Soviet Union suffered 478,741 men killed and 650,878 wounded  (for a total of 1,129,619). And more than 40,000 Soviet civilians died in Stalingrad.

12. 결과, 승부 : Decisive Soviet victory

13. 전투에 대한 간략한 묘사

Operation Blau

Army Group South including the 6th and 17th Armies and the 4th and 1st Panzer Armies was selected for a sprint forward through the southern Russian stepps into the Caucasus to capture vital Soviet oil fields. The summer offensive was code-named Fall Blau ("Case Blue"). 

The battle opens

Army Group South began its attack into southern Russia on June 28, 1942.

By the end of July the Germans had pushed the Soviets across the Don River. At this point the Germans established defensive lines using the Armies of their Italian, Hungarian and Romanian allies. The 6th Army was only a few dozen kilometers from Stalingrad, and the 4th Panzer, now to their south, turned north to help take the city. To the south, Group A was pushing far into the Caucasus, but their advance slowed. Group A's forces were deployed far to the south and provided no support to Group B in the north.

The battle in the city

Civilians including women and children were put to work building trenchworks and protective fortifications. A massive German air bombardment on 23 August caused a firestorm, killing thousands of civilians and turning Stalingrad into a vast landscape of rubble and burnt ruins.

By 1 September 1942, the Soviets could only supply their forces in Stalingrad by perilous crossings of the Volgar River. The Soviet 62nd Army formed defense lines, with strongpoints situated in houses and factories. Fighting in the city was fierce and desperate. Stalin's order of July 27, 1942 had decreed that all those who retreated or otherwise left their positions without orders to do so could be summarily shot. "Not a step back!" was the slogan. The Germans pushing forward into Stalingrad suffered heavy casualties. Soviet reinforcements were shipped across the river Volga from the eastern bank under constant bombardment by German artillery and planes. The life expectancy of a newly arrived Soviet private in the city dropped to less than twenty-four hours. With no end to the fighting in sight, the Germans started transferring heavy artillery to the city, including several gigantic 600 mm mortars. Soviet artillery on the Eastern bank of the Volga continued to place German positions under fire. The Soviet defenders used the resulting ruins as defensive positions. German tanks became useless in heaps of rubble up to eight meters high. If they still were able to move forward, they were taken under Soviet anti-tank fire from the rooftops.

For both Stalin and Hitler, the battle of Stalingrad became a question of life and death. 

In November, after three months slow and costly advance, the Germans finally reached the river banks, capturing 90% of the ruined city and splitting the remaining Soviet forces into two narrow pockets.

The Soviet counter-attack: Operation Uranus

In Autumn the Soviet general Georgy Zhukov concentrated massive Soviet forces in the steppes to the north and south of the city. The German northern flank was particularly vulnerable, since it was defended by Hungarian and Romanian units which suffered from inferior equipment and low morale. Zhukov's plan was to keep pinning the Germans down in the city, and then to punch through the overstretched and weakly defended German flanks and to surround the Germans inside Stalingrad. The operation was code-named "Uranus". November, 1942 the Red Army unleashed Uranus. Thinly spread, outnumbered and poorly equipped, the 3rd Romanian Army, which held the northern flank of the German 6th Army, was shattered after an almost miraculous one-day defense.

On November 20, a second Soviet offensive was launched to the south of Stalingrad, against points held by the Romanian 4th Army Corps. The Romanian forces collapsed almost immediately. About 250,000 German and Romanian soldiers, as well as some Croatian units and volunteer subsidiary troops found themselves trapped inside the resulting pocket.

Soviet victory

Generalefeldmaschal Paulus surrendered on Janurary 31, 1943. The remnants of the German forces in Stalingrad surrendered on Feburary 2, 1943. 96,000 Germans were taken captive included 22 generals by Soviet forces.

14. 승리쪽의 승전 이유

막대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계속 전투를 수행하여 스탈린그라드를 지키는 데 성공했던 소련군과 소련 민간인들의 노력이 가장 큰 이유이다. 또한 시가전에서 이들을 지휘한 츄이코프의 리더쉽과 결정적인 승리를 가능하게 했던 쥬코프의 전략이 주요 승리의 이유였다. 

15. 패배쪽의 패전 이유

독일군 수뇌부는 계속하여 소련군의 전투 의지와 전력을 과소 평가하였다. 전략적으로는 본국에서 멀리 떨어져 보급이 힘들었고 보유한 병력에 비해서도 너무 광대한 지역에 걸쳐 작전이 실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정된 병력으로 소모적인 전투에 말려들어 결국 주요 부대가 전멸에 이르는 파멸의 결과를 맞았다.  

16. 세계2차대전에 있어서 이 전투의 중요성

The battle of Stalingrad was a major turning point in World War 2, The Axis powers lost huge numbers of men and equipments and never fully recovered after the defeat. It marked the start of the liberation of Soviet Union. For all Allied counrties It led to eventual victory over Nazi Germany in 1945.

17. 군사적 교훈

정보면에서 상대의 전력과 전체적인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것에 맞는 적절한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전술적으로 원거리로 떨어져 있어서 증원과 보급이 힘든 상황에서 시가전과 같은 소모전에 말려드는데 대해서 신중했어야 한다. 소련과 같이 광대하고 혹독하게 추운 겨울을 가진 나라에서의 전쟁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다시 한번 보여 주었다.

 

출처 : stalingrad로 검색하였습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독일군은 바바롯사작전의 최종 종료시간을 넘겼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 소련군은 동부전선에서는 550만의 병력이 독일군에게 잡혔다. 그중 3/4이 1941년에 잡혔다. 그리고 400만명이 전쟁이 끝날 때 까지 죽었다. 거의 1,000만명의 피해를 당했었다. 그러나 독일의 빛나는 승리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지속되었다.

1941년에 겨울을 보내고 1942년 가을이 다가왔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모스크바는 점령하지 못했으며 레닌그라드에서도 고전을 면하지 못했다. 독일 참모본부에서는 모스크바 공략에 실패한 후 후퇴를 히틀러에게 강하게 건의하였지만 무시당하였다. 독일은 현재의 전선을 유지하여야 했다.



스탈린그라드 점령 그 자체가 독일군의 관심의 대상이 아니 였다.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에 무저항으로 진입을 할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상황이 변하여 히틀러는 결심하였다. 스탈린의 도시는 반드시 점령해야 했다. 그러나 이미 그때는 소련군도 만반의 준비를 완성하고 있었다. 구식의 늙은 장군들 대신에 젊은 장군들을 기용하자 상황은 과거와 같이 전개되지는 않았다.



스탈린은 주코프를 1941년 10월 레닌그라드로 보냈다. 3일동안 기민한 활동으로 방어조직을 완성하였다.
레닌그라드에서는 900일 동안의 포위를 버텨냈다. 주코프는 다시 모스크바로 소환되었으며 소련의 대공세를 준비하였다. 독일이 비록 1941년에 중앙부에서 대타격을 당했지만 아직도 강력하며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1942년 1월의 공세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부족한 병력으로 전 전선에서 실패를 거듭하였다. 독일군은 격파하는데 실패하였다.





그 뒤 소련군 티모센코원수는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 요새를 탈환하고 바르펜코보 돌출부와 그 북쪽에서 대대적인 공세를 계획하였다.
목표는 하르코프 탈환이었다. 그러나 독일군의 배치에 속아 버렸다. 공격을 늦추어야 한다는 티모센코의 주장은 묵살당했다.
하르코프 탈환은 지상의 과제가 되었다. 그러나 포위를 당해 29개 사단이 분쇄되고 기타 부대들도 치명타를 입었다. 소련군 제6군과 57군은 사령관까지도 전사하였으며 제9군의 하르트노프 소장만이 겨우 탈출했다. 전차도 2/3을 잃었다. 그러나 아직도 소련군은 건재했다.



고민이 생겼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도 위기를 당면했다. 미국과 소련이라는 거대 공업국과의 전쟁이 장기화되면 독일에게는 불리했다. 소련은 피해에도 불구하고 미국, 영국의 원조를 받고 있었으며 공장지대를 미리 후퇴시켜 지속적인 무장이 가능했다.
히틀러는 소련의 약점을 공격하려고 했다.
유전지대, 코카서스였다. 마이콥, 그로즈니, 바쿠등의 유전지대로부터 국내로 보급하는 수송로가 조금밖에 없었다.



수송로는 로스토프를 통과하는 철도와 스탈린그라드로 가는 철도 그리고 카스피해를 따라 바쿠에서 그로즈니 아스트라한를 통과하여 중앙러시아로 이어지는 철도 그리고 유조선이 활동하는 볼가강이었다. 로스토프의 점령은 첫 번째 수송로를, 코카서스산맥을 넘어 마이콥과 그로즈니를 점령하면 제2, 제3의 철도를 끊을 수 있었다. 볼가강의 서쪽에 교두보를 확보하면 모든 유전으로 통하는 보급로를 끊을 수 있다. 그렇다면 소련의 공장들은 멈추고 경제는 붕괴할 것이며 독일은 귀중한 연료를 얻을 수 있었다.
장기전을 대비할 수 있으며 소련의 파멸은 분명했다. 이러한 이유로 남부지역에 대한 공격을 준비했다.





시가전에 투입된 독일군.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무시무시한 시가전이었다.



1942년 3월 28일 할더 육군참모총장은 히틀러에게 여름작전계획을 제출하였다. 이른 바 "푸른계획"이었다.
제1단계는 서쪽으로 후퇴한 부대에서부터 시작하여 쿠르스크-하르코프 지구에서 돈강을 따라서 돌격하며 남부에 위치한 부대는 티모센코원수의 소련군을 돈강에서 몰아낸다. 남부와 동부에 있는 부대는 동쪽을 향하여 공세를 취하여 소련의 남방면군을 북쪽과 서쪽으로 추격한다. 소련의 남서방면군과 남방면군 전부를 포위 섬멸시킨다.
제2단계로 코카서스와 유전지대로 진격한다였다. 그런데 히틀러는 동계공세 이후 장군들을 신임하지 않았다. 따라서 세세한 작전을 직접 지시하겠다고 주장했다. 이로서 임무형전술은 종말을 고하기 시작한 것이다.



히틀러는 할더의 제안에 변화를 가하여 A집단군은 바쿠를 B집단군은 스탈린그라드를 목표로 삼았다.
1942년 6월 28일 포크 원수의 독일 남방군집단이 행동을 개시하였다. 공격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7월 25일 로스토프가 함락 당했다. 이 후 스탈린그라드는 소련방어에 중요한 지점으로 부각되었다. 스탈린그라드는 소련의 산업모델로서 선택되어 중요한 공업중심지로서 볼가 강변을 따라서 40Km로 퍼져 있었다.



60만의 인구를 가지고 붉은 10월 제철공장, 바리케이트 병기공장, 스탈린그라드 트렉터공장이 있었으며 이는 전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 하게 된다. 로스토프가 함락됨에 따라서 볼가강의 중요성이 증가되었다. 철도수송과 도로수송 그리고 선창은 중요했다. 따라서 소련군은 독일군에게 순순히 넘겨 줄 수는 없었다. 8월 23일 오전 4시 30분 파울루스장군이 지휘하는 제6군은 스탈린그라드로 총공세를 감행했다. 제16기갑사단과 제3, 제60자동차화 사단을 비텔스하임 제14군단장 지휘아래 선봉으로서 벨차지 양편의 교두보로서 돌진시켜 돈강과 볼가강 사이에 돌파구를 뚫는다. 스탈린 북부지역에 도달하면 남으로 시내에 돌입한다. 이 돌파구를 확대한다였다.



제14 기갑군단은 공격을 시작하여 오전까지 시외각에 도달 저녁에는 바리케이드 공장의 부인노동자들이 설치한 방어선도 격파하였다.
루이노크의 북쪽에서 볼가강 서면에 도착하였다. 이튿날 공격을 재개하려고 하였다. 스탈린그라드는 이제 독일군에게 점령당한 것과 같았다. 독일군은 폭격을 시작하였다. 독일의 폭격을 정확한 목표가 없이 도시 그 자체에 폭격을 하였다. 그리고 24일 아침에 시의 북쪽에서 비텔스하임의 기갑부대가 공격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훼크렌코 소장의 혼성 증원부대의 완강한 저항에 전진을 할 수가 없었다.



오후에는 반격을 당하여 도리어 2Km 후퇴하였다. 스탈린그라드 북쪽에서 저지된 독일 제6군은 서쪽으로 진입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것도 코바렌코소장이 지휘하는 전차 1개 여단과 보병 1개 여단에 실패하였다.
소련군 지휘관이었던 예레멘코는 스탈린그라드 방어전을 1차로 막았으므로 반격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강력한 독일공군과 빈약한 포병의 지원 그리고 협동작전의 결함으로 실패로 끝났다. 남쪽에서는 독일 제4기갑군이 방위선을 돌파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피해만이 컸을 뿐이었다. 그래서 공격을 중지하였다. 새롭게 작전을 구성하여 소련군 제64군 제126사단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여 소련군 제64군의 좌익을 끊고 64군의 우익을 격파할 기회를 얻었다. 제62군도 격파할 수 있었다. 스탈린그라드의 왹곽방어선에서 소련군은 후퇴했다. 소련 제64군의 우익은 후퇴를 개시하고 제62군은 전장에서 탈출했다. 소련 에레멘코장군은 겨우 부대를 살릴 수 있었다.





시가전에 투입된 독일군



소련군 사령관이었던 로파틴이 해임되었다. 새롭게 추이코프가 임명되자 새로운 모습으로 전쟁형태가 바뀌었다.
제62군은 막대한 보급으로 재건되었다. 그러나 독일군이 선수를 쳤다. 독일 제51군단이 공격했다. 소련군의 진지는 붕괴되고 트렉터공장은 점령당하고 주택지구 그리고 비행장의 건물지구가 점령당했다.

볼가강은 간신히 지킬 수 있었다. 9월 14일 오후 3시경 소련군은 반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반격은 실패했다. 독일군은 전진을 계속했으며 제1정거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독일군 자동차화보병이 기갑부대의 뒤를 따라서 시의 중앙까지 왔을 때 스탈린그라드의 운명은 풍전등화였다. 만신창이가 된 소련군 제62군의 각 사단들은 지원으로 오는 로짐스에프 사단이 도강할 때 까지 버텨야 했다.



참모와 사령부의 위병들 까지도 싸웠다. 독일군은 마마에프 묘지에서 소련군과 쟁탈전을 벌렸다.
로짐스에프 사단은 독일군과 필사의 전투를 지속했다. 포화가 난무하는 가운데 육탄전으로 고지를 점령하고 지켜야 했다. 독일군과 소련군은 시내에서 각 지점을 빼앗고 빼앗기는 혈투가 지속되었다.
독일군은 볼가강까지 진출하여 소련의 제62군을 고립시키고 나룻배의 작업을 지연시키며 소련군의 보급을 제한시켰다.



독일군은 전차를 앞세워 지속적으로 공격을 했다. 소련군은 계속 밀려나갔다. 피아간의 반격과 반격이 이어졌으나 결정은 나지 않았다. 24일부터 전투의 열기는 식어갔지만 결과적으로 추이코프의 제62군은 절단되어 버렸다. 이후 마마에프에 대한 소련군의 반격이 있었으나 좌절되었고 독일군의 포병은 폭탄의 비를 마마에프에 부었다.



독일군은 붉은 10월 제철공장까지 진출했다. 또한 독일군이 트렉터 공장과 바리케이트 공장을 공격했다. 소련군 제39 친위사단이 도착하자 방어가 이어졌지만 제62군의 약화는 지속되었다. 다행이 볼가강의 건너 편으로 시베리아에서 온 증원부대가 모여들었다.
시 중앙에서는 바츠크와 로짐쯔에프 사단이 겨우 독일군의 공격을 막아 내고 있었고 스메호트보로프 사단은 밀려나서 독일군은 점점 붉은 10월 제철공장으로 육박해 들어갔다. 시의 각 부분에서 소련군의 진지는 점점 좁아져 갔으며 독일군은 트렉터 공장에 대한 공격을 준비했다. 소련군의 증원부대는 계속 도착하였으며 독일 제14 기갑사단과 제60 자동차화사단, 제389 보병사단이 공격을 시작하자 제37 친위사단의 필사적인 저항으로 막아내자 독일군의 공격도 점차로 줄어들 게 되었다.



10월 6일 독일군이 기진맥진해진 틈을 타서 반격을 하려고 하였으나 독일군이 선수를 쳐서 2개 보병사단과 기갑부대가 공격하였다.
그러나 트렉터공장의 한 부분을 점령하는 것으로 끝났다. 소련군의 카츄사 로켓트포는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였다. 메체트카강 철교 서쪽에 있던 독일군 대대 전부를 단 한번의 공격으로 격파했다. 독일은 이 로켓트포로 4개 대대가 전멸했다.



파울우스장군의 제6군은 공격을 멈추고 대책을 궁리했다. 전투의 중단은 이틀이나 지속되었고 독일군이 공격을 재개하였을 때 상황은 불리했다. 소련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독일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독일 제6군은 2개 기갑사단을 포함하는 5개 사단을 투입하여 트렉터 공장과 바리케이트 공장에 대하여 공격을 했다. 10월 14일은 소련군 62군에게 가장 어려운 때였다. 독일공군은 연 3,000대의 공군기를 동원했으며 180대의 전차가 소련군을 향하여 공격해 들어 갔다. 온종일 혼전이 벌어 졌다.



소련군의 62군은 분단되고 고립되었다. 독일군을 저지하던 사단들은 부대의 70%~80%를 잃었다.
추이코프는 드디어 최초로 후퇴명령을 내렸다. 10월 21일 독일군이 다시 공격을 하려고 하였으나 소련의 제62군은 공장노동자, 양복직공, 창고계원등등을 보충대로 편성하였고 강을 건너 투입하였다. 22일 독일군 제79 보병사단이 전선에 투입되었다. 독일군의 압박은 가중되었으며 공장지대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었으며 트렉터 공장과 바리케이트 공장이 점령당했다.

붉은 10월 제철공장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10월 27일에 독일군은 도시의 9/10을 점령하였다. 나머지 1/10은 독일군의 포화 속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소련군은 버텼다. 긁어모은 전차 3대로 반격도 감행했다. 그러나 독일군은 갈수록 약해졌다. 추이코프의 제62군은 독일군 보다도 강한 인내력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 제6군은 공격을 계속 하였지만 독일군이 더 이상 봄에 세웠던 "푸른계획"을 밀고 나갈 수 없음은 분명했다.
히틀러는 스탈린그라드와 코카서스전선의 일부를 제외하고 모든 공세작전을 중단시켰다.
소련군의 반격은 점차 가시화되었다. 소련은 병력 100만명, 화포 13,451문, 전차 894대, 비행기 1,115대를 보유한 총 5개 군을 돈강 유역과 볼가강 유역에 배치하였다.

소련군은 비교적 약한 루마니아군에 대해서 공격을 했다. 루마니아군은 장비도 신통하지 않고 사기도 낮았으며 독일군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또한 바로 서쪽에 위치해 있던 이탈리아 제8군도 약체였으므로 위기에 처한 루마니아군을 지원할 수 없었다. 약한 루마니아군 이었지만 감시는 게을리 하지 않아 드미트레스크 루마니아 총사령관은 독일군에게 소련군의 교두보에 대한 위험을 알리고 독일 전차와 대전차포를 루마니아 제3군지역에 배치하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를 무시하였다. 하지만 히틀러는 루마니아군에게 탱크와 대전차포 부대를 사용하도록 허락하기는 하였다.
첫 눈이 내리는 가운데 제48 기갑사단을 루마니아 제3군 지역으로 파견하였다. 겨울이 오자 독일군은 전선에 투입하지 않은 제 44보병사단을 공격에 참가시키려고 하였다. 겨울이 오자 강이 얼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기까지는 영하 15도로 내려가야 했는데 그 사이에는 유빙으로 시내로 보급품의 수송이 어려웠다. 따라서 소련군은 보급품 수송에 열중하였다.



11월 11일 오전 6시 30분 독일군은 마지막 공격을 시도했다. 총 7개 사단으로 구성된 공격부대에 대하여 추이코프는 정면으로 부딪쳤다.
5시간에 걸쳐 백병전이 이어졌으며 격렬한 전투는 있었으나 독일 공군의 폭격은 심하지 않았다.





시가전은 독일군에게도 부담스러운 전투였다.



리히트호펜 제8 항공군단은 전에는 하루에 연 3,000대라는 대대적인 공습을 했지만 이제는 1/3로 줄었다. 소련군이 이 것이 독일군의 마지막 몸부림임을 알고 있었다. 11월 11일과 12일 사이에 소련군의 피해는 막심했지만 독일군의 공격에는 종말이 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12일 저녁이 되자 독일군의 공격은 점차 약해졌으며 곧이어 소련군의 반격이 이어졌다.

독일군 제6군과 제4 기갑군의 독일병사들은 11월 19일의 새벽을 평소와 같이 맞이하였다.





오전 7시 30분 보로노프 포병대장이 이끄는 화포 대군, 3,500문이 일제히 포문을 열었다. 루마니아군을 향하여 맹사를 퍼부었다. 탄착이 후방으로 이어지자 소련군 보병과 T-34전차가 나타났다. 소련 제5군의 200대의 전차군이 루마니아 좌익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동시에 치스챠코프장군의 제21군 제4전차군단이 우익을 공격했다.

루마니아군은 붕괴되었다. 부대는 풍지박살이 나고 병사들은 공포에 질려 도망쳤다. 그 뒤를 소련의 대규모 추격 부대가 뒤를 따랐다. 소련군은 독일군 후방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제48 기갑군단만이 유일하게 소련군에게 반격하였지만 전차들은 대부분 고장 나고 빈약했으며 무한궤도에 제설장치를 장착하지 않아 움직일 수 있는 전차들도 얼어붙은 벌판 위에서 미끄러졌다.





소련군은 독일 B집단군을 포위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제6군의 뒤를 공격하려고 하였다. 독일의 반격으로 일시적인 중지가 있었으나 예정대로 공격을 지속했다. 독일군 제6군은 양익을 잃어 버렸다. 스탈린그라드는 포위되었다. 독일의 장점이었던 정세변화에 즉흥적으로 반응하며 처리의 기민함을 가졌으나 제6군은 전력을 지나치게 투입하였고 소련군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였다.

위기의 상황에서 히틀러는 바이에른에 있는 베르히스가든의 산장에 있었으며 동부전선을 담당했던 각 부의 지휘관들은 이 도시의 외각에 이사 왔으며 작전 막료들도 오스트리아의 짤쯔부르그에 있는 역의 특별열차에 기거하였다. 따라서 기민하고 빠른 대응이 어려웠다.

한편 대소련 작전을 담당한 육군 총사령부는 거기에서 1,000Km나 떨어진 동 프러시아의 숲속에 있었다. 공군 총사령부도 같이 있었는데 공군 총사령관 헤르만 괴링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더군다나 제6군 사령부도 이전 중에 있었다. 그러므로 과거와 같은 지휘는 바랄 수도 없었다.



소련군은 독일군을 포위했다. 최초 8만 5천명 정도로 알고 있었으나 사실은 독일군 200개 사단, 루마니아 2개 사단과 소수의 특수부대등 33만명이 있었다.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를 끝까지 사수하느냐 아니면 후퇴하느냐를 두고 대립하였다. 그래서 B집단군 와이크스 사령관은 이 양쪽 의견을 모두 수용하는 작전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연료가 부족했다. 연료의 부족이 기동전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탄약도 식량도 부족했다. 괴링은 공군으로 제6군에게 보급물자를 공수하겠다고 공언하였지만 실행할 수송기가 부족했다.

파울르스장군은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할 것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남쪽에 전선을 펼 수 있어야 하고 공수에 의해서 충분한 보급이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그리고 탈출이 필요하면 행동의 자유를 B집단군 사령관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히틀러는 무조건 현재 위치를 사수하라고만 명령했다.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고만 말했을 뿐이었다.



반격하는 소련군.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파울르스장군은 23일 아침에도 요청을 하였다. 와이크스장군도 공수에 의한 보급이 불가능하다고 역설했으며 파울르스장군을 지지하였다. 파울르스장군은 군단장회의를 열고 히틀러에게 전보를 쳤다. 물자는 버리더라도 병력의 대부분을 구할 수 있다고 믿었으므로 거듭 자유로운 행동권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히틀러의 대답은 "후퇴불가" 뿐이었다.

포위된 병력을 작전참모들은 40만정도로 보았는데 제6군 보급부장 와그너는 대략 30만으로 보고 있었다.

제6군의 지휘를 받는 병력은 20만으로 보았다. 공수로 보급을 하려면 하루에 약 600톤이 필요했다. 이는 융커스52 삼발기가 최소 300대가 필요했다. 작전 중에 손실을 대비하여 500대가 필요했지만 비행기를 사용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괴링은 호언장담했고 히틀러도 기적을 진정으로 바랬다. 그리고 제6군 구출을 위하여 새로운 돈집단군을 만들도록 에리히 폰 만슈타인원수를 임명했다.

그러나 만슈타인에게 부대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독일군은 일명 "겨울 폭풍작전"을 수립하였다. 작전을 다양하게 준비했으나 제6군은 "천둥"이라는 암호를 받으면 지체없이 구출부대를 향하여 전진하여 합류하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천둥을 울리기에는 너무나도 힘들었다. 호트대장이 맞은 제4기갑군이 주어진 임무를 수행할 수도 없었으며 제6군이 호트집단을 향하여 전진하는 것도 상상 속에나 가능했다.

만슈타인은 12월 12일 이곳저곳에서 끌어 모은 혼성 부대인 돈집단군을 이끌고 공격을 시작했다.





최초 공격에서 소련군의 저항은 미미했으나 12월 18일 소련의 제2 친위군에게 막혀 버렸다. 호트집단군이 제6군의 전선에서 불과 35Km 까지 접근을 하였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수일 동안 호트집단군의 사기는 높았으며 22일에는 최후의 노력을 기울였다.

12월 24일에는 소련군 제2 친위군이 공격을 해왔다.

호트집단군은 조직적인 후위전투를 전개하였지만 100Km나 후퇴하고서야 겨우 멈출 수가 있었다.

이 것을 끝으로 제6군 병사들은 더 이상 밤하늘에 번쩍이는 포화를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소련군은 독일군에게 항복을 권고했지만 파울르스장군은 거부했다. 히틀러는 파울르스장군을 원수로 진급시켰다. 소련군은 마지막 조임으로 쇠고리작전을 실시하였다.

독일군의 전선은 계속 줄어들었으며 16일까지 확보하고 있던 1,400 평방킬로의 절반인 640평망킬로 이하로 좁혀졌다.



24일 오후 4시 45분에 만슈타인은 파울르스로부터 전보를 받았다. "시내에는 무시무시한 상태에 있음. 간호도 받지 못하는 약 2만명의 부상병이 폐허 속에 누워 있음. 또한 그와 동일한 수의 배고프고 동상에 걸린 병사와 무기를 갖지 않은 낙후자가 있음......스탈린그라드 남부 교외에서의 최후의 반격전은 1월 25일 감행하겠음.......트렉터 공장은 좀 더 견딜 수 있을지 모름......"





공수되는 물량은 계속 줄어들었고 겨우 기아만 모면할 수 있었다. 독일군은 양분되어 남부의 독일군은 1월 31일에 북부에 있던 독일군은 2월 2일까지 모두 항복하였다. 이로서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은 독일군의 패배로 종결되었다. 푸른계획과 관련하여 추축군은 1942년 8월부터 1943년 2월까지 대략 150만명을 잃었다. 스탈린그라드 시내에서는 독일군 14만 7천여명이 발굴되었다.

장비들은 돌격포 3,500대(독일 생산량 7개월분) 비행기 3,000대 (독일생산량 4개월분)을 잃었다. 8월부터 2월까지 잃은 장비를 모두 합치면 약 75개 사단을 장비시킬 수 있는 양이었다. 추축군은 5개 군의 거의 전부가 봄까지 괴멸했다.

독일 제6군의 전부와 제4기갑군 대부분 루마니아군 7개 사단 중 5개 사단,독일 제4군의 거의 전부 그리고 이탈리아 제8군이 괴멸 당했다. 이러한 양은 독일이 승리를 통하여 얻은 전과에 비하면 크지 않은 양이었다.





그러나 소련군의 보급이 원활했지만 독일은 피해를 복구할 만한 능력이 소련만큼 본국에는 없었다. 스탈린그라드의 패배 이후 만슈타인장군이 히틀러가 실의에 빠진 약간의 틈을 이용하여 무너진 전선을 회복하고 소련군으로부터 스탈린그라드에서 받은 피해만큼의 손실을 소련군에게 입혔다. 그러나 겨우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독일이 전시 경제체제를 가동 시켰기 때문에 입은 피해를 복구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최초의 전략적인 목적에서 점차 히틀러의 개인적인 고집의 영향을 받았고 보병에 의한 육박전과 시가전을 통한 전투를 취하였다. 결국에는 기동작전을 수행하지 못했으며 보유한 전력에 비하여 과도한 투입으로 포위되어 전멸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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