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오스트리아 린츠 근교 피슐람에 있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교우관계는 비교적 원만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원만하지 못하고 우울한 학생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수학과 스페인어를 제외하고는 성적은 매우 우수한 학생에 속하였지만 점차 아버지 알로이스와 마찰이 잦아졌으며 그 중 특히 진학문제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히틀러 평전에 따르면 히틀러는 자아가 강하고 상급학교 진학 이후의 학업성적은 전혀 우수하지 못하였다.[출처 필요]그의 어린 시절을 보여주는 사진은 그의 자기중심적인 자세를 잘 보여준다. 그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 나오는 유대인이 독일의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소년 시절[편집]
13세 때 오스트리아 빈에서 구두닦이로 시작해 세관 공무원 과장직까지 오른 아돌프 히틀러의 아버지는 아돌프 역시 자신과 같이 공무원이 되기를 희망했지만, 아돌프는 그러한 아버지의 희망과는 달리 열렬한 화가 지망생이었다. 아돌프는 당시 웅장한 건물을 스케치를 하는데 매료되어 있었으며 인문계 학교로 진학해 미대에 가길 원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에게 관대했던 어머니 클라라와는 달리 엄한 꾸중과 화가나면 손찌검도 마다않는 아버지의 강압에 의해 아돌프는 오스트리아 린츠의 실업계 학교에 진학하게 되고, 자신의 꿈을 짓밟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반항으로 학업에 매우 불성실해졌다. 끝내 화가의 꿈을 접지 못한 그가 좋아하는 일이라곤 그저 린츠의 건물을 스케치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독일어: Mein Kampf 마인 캄프[*])'에서 히틀러는 자신이 반유대주의, 독일 민족주의에 입각한 레오폴드 푓슈라는 역사 선생님의 수업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술회하고 있으며 비교적 주위에 그러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가 마치 역사에 관해서 만큼은 조예가 깊은 것처럼 잘못 알려진 경우가 종종 있으나, 《나의 투쟁》(Mein Kampf)은 부분적으로 정치적 선전 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해 쓰여졌다는 견해가 통설이며 실제로 역사 시험에서도 낙제를 면치 못할 수준의 실력을 보여줬기 때문에 자신의 독일 민족주의자로서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부풀려진 점이 없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03년 1월에 아돌프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가 사망하게 되는데 당시 15세였던 아돌프는 막상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장례식 내내 펑펑 울 정도로 누구보다도 가장 슬퍼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는 더욱 학업에 대한 의욕을 잃었으며 성적은 바닥을 밑돌았다. 자취나 하숙을 하며 학교를 다녔으며 주말에는 어머니가 계신 집에 돌아왔다. 후에 그는 린츠의 학교에서 쫓겨나게 되고 스테이르라는 곳에 있는 작은 학교로 전학한다. 하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16세 되던 해 병으로 1년 간 학교를 쉬게 된 것을 계기로 그 학교를 자퇴했다. 병이 완쾌된 것을 기념하여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길 옆에서 누워서 자던 아돌프 히틀러는 지나가던 한 아주머니가 깨워 겨우 일어나게 되고 이에 크게 느낀 바가 있어 이후 죽을 때까지 금주하였다고 한다. 히틀러의 어머니 클라라는 유방암으로 고통 받다가 1907년 사망했다.
비엔나와 뮌헨에서의 생애[편집]
1903년부터 고아연금자로서 살다가, 어머니의 후원으로 1905년부터는 경제적으로 독립을 하게된다. 1907년 9월부터는 비엔나에서 살다가 1913년 5월에 뮌헨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안타깝게도 히틀러의 이 기간 동안의 삶은 잘 밝혀져 있지 않다. 1차 세계대전 이전의 삶은 자료가 거의 없다. 그저 구술증거가 전부일 뿐이다.
1907년 비엔나로 여행을 떠나, 비엔나 예술대의 일반 미술학교에서 112명의 후보와 함께 시험을 치르게 된다. 준비해 간 미술화보집으로 79명의 응모자와 함께 2차 시험을 치르게 된다. 결국 28명만이 최종시험을 합격하게 되고 히틀러는 여기에 들지 못하게 된다. 우선 비엔나에서 살았다. 10월 24일에 가족 중 한 유대인 의사 에드워드 블로흐는 어머니가 불치병에 걸려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통보한다. 히틀러는 린츠로 다시 가게 되고, 어머니는 결국 1907년 12월 21일에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어머니의 사망 후에 점점 더 친척들과 멀어지게 된다.
아돌프 히틀러의 유년시절의 자료에서와는 달리 비교적 고아연금으로 잘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스스로 그린 그림과 우표 판매로 더 나아지는 그의 수입은 심지어 교사의 초봉보다 많았다고 한다. 한 지인의 추천서는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만다. 1908년 가을 예술학교의 두 번째 응모에서 견습기간이 없이 정식으로 자격을 얻게 된다. 그 다음에는 직업과 실습을 하는데 거의 노력을 하지 않게 된다. 히틀러는 두 번째 거절을 한 후에는 점점 재정이 바닥나게 되고, 병역징집에 대한 두려움에 떨게 된다.
1909년 7월에 룸메이트인 아우구스트 쿠비첵과 헤어진 후 숙소를 여러번 바꾸게 된다. 그 다음에 얻은 방은 시내 중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여기서 그는 겨우 3주 동안만 방을 얻게 되는데 그 후의 3개월 동안은 그의 거취가 불분명하다. 여러 자료를 근거로 볼 때 그가 그 때 거주자 신고를 안한 것에 대해 노숙자 생활을 한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그가 실제로 노숙자 생활을 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1910년 초에 멜데만가에 있는 남자들 기숙사로 옮긴다.
청년 시절[편집]
미술학교 입학 거부와 실직자 생활[편집]
아돌프는 그가 19세 되던 해인 1907년 10월 미술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빈으로 떠나 그곳에서 고아들을 위한 약간의 보조금을 받고 이어 빈의 미술학교에 두 번 지원했지만 두 번 모두 학교 측으로부터 입학을 거절당한다. 하지만 교수가 히틀러의 건축적 재능이 뛰어난 것을 보고 건축가가 되라고 조언을 해준다. 그래서 히틀러는 건축가가 되기 위한 꿈을 가지고 건물 스케치와 여러가지의 도안을 완성한다. 그렇지만 건축가가 되기 위해선 높은 학력이 필요했다. 히틀러는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였고 21살 되던 해에는 받았던 보조금마저 끊기게 된다. 대신 아주머니로부터 약간의 돈을 물려받게 되는데 이마저 곧 바닥이 나게 되고 이후 그는 몇 년 동안 엽서에 담긴 그림들을 그대로 다시 그려 상인에게 되파는 일개 그림장이 신세가 된다. 당시 그는 여전히 집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복지시설에 살고 있었고 매우 힘들게 생계를 이어가며 일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을 하고 남는 시간에는 종종 리하르트 바그너의 게르만 민족신화에 관련된 오페라를 감상하였다.
히틀러가 활발한 반유대주의자가 된 것은 빈에 있을 때부터였다. 반유대주의는 히틀러가 자랐던 오스트리아의 기독교 문화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다. 빈에는 기독교의 한 종파인 동방정교회 신도를 포함한 큰 유대인 사회가 있었다. 빈 사람들은 이 유대인들을 멸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히틀러는 정치 평론가 란츠 폰 리벤펠스나 정치가 카를 뤼거, 비엔, 게오르히 리터 폰 쇠너러의 영향을 받아 후에 그의 정치관념의 밑바탕이 되는 아리아 인종 우월주의를 배웠다. 이런 빈의 분위기로 인해 결국 히틀러는 유대인들이 아리아인의 적이며, 독일의 경제적 문제의 핵심 원인이라고 믿게 되었고, 후에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청년기에 그는 종종 언론사에 칼럼을 투고하기도 했는데, 이때 자신의 어릴 적 별명이었던 '볼프'라는 이름을 예명으로 썼다 한다. 그러나 그의 주변에 누구도 그가 볼프라는 이름으로 글을 투고하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화가로서의 히틀러[편집]
히틀러는 그림을 그리기를 좋아했다. 히틀러는 비엔나 콩쿨 대신 린츠 실업학교로 진학하면서 화가로서의 그의 생활이 단절되는 듯 싶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그 이후에도 꾸준히 '아돌프 히틀러의 자화상', '성모 마리아와 유년 시절의 예수(1913)', '바다의 야상곡(1913)' 등의 다수의 그림들을 남겼다. 현재 히틀러의 작품 중 한 점이 한화로 10억원에 해당되는 금액에 경매 낙찰되기도 했다. 그의 그림은 화가로서도 상당한 경지에 이른 작품인데도, 작품성이 아니라 독재자가 그린 그림들이라는 화가의 인물적 특징이 더 관심을 받았다.[1][2][3]
이에 유대인들은 히틀러가 그린 그림들을 나치의 잔재로 인정하였으며 이 때문에 유대인들은 히틀러가 그린 그림을 경매에 올리지 못하도록 법으로 제정하는 것을 시도하기도 했다. 또한 유대인들은 히틀러가 남긴 작품들을 모두 소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2012년 1월 29일에 아돌프 히틀러 작 바다의 야상곡은 슬로바키아에서 온라인 경매에 올라왔는데 한화로 4천7백만원에 낙찰되었다. 이는 최초경매가 1천6백만원의 3배에 달하는 금액이다.
제1차 세계 대전[편집]
독일 제국으로[편집]
1913년에 바이에른 주의 뮌헨으로 갔다. 히틀러가 뮌헨으로 간지 얼마 안 됐을 무렵이었다. 오스트리아로부터 체포 영장을 들고 온 수사관들이 히틀러를 찾은 것이다. 이유는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군 징집을 거부하고 독일로 도망갔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이때 "몸이 허약하여 도저히 군복무를 할 수 없다"고 말하였고 면제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히틀러가 병역을 거부한 것은 몸이 허약해서가 아니었다. 진짜 이유는 슬라브족과 유대인으로 혼탁한 오스트리아군에서 군복무를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오스트리아는 그에게 조국이 아니었고, 그의 조국은 순수 독일인들로 구성된 독일 제국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오스트리아의 징집을 거부한 것도 그 때문이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뮌헨 오데온 광장에서 전쟁을 선포하는 장교 앞에서 환호하는 군중들 사이에 기쁨에 겨운 표정을 짓고 있는 히틀러가 우연히 촬영되었다. 히틀러는 즉시 바이에른 16보병연대 입대를 자원했다. 그에게 진정한 마음의 조국인 독일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군복무 시절[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