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가 세계2차대전을 일으킨 이유좀 알려주세요

히틀러가 세계2차대전을 일으킨 이유좀 알려주세요

작성일 2013.06.10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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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그대로 세계2차 대전을 일으킨 이유,히틀러에 대한 소개,세계2차대전에 대해 알려주세요 ppt로 만들어야 돼거든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1889년 4월 20일 생으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국경지대인

브라우나우에서 하급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남

 

 

 

(어린 시절의 히틀러)

 

 

아버지는 알로이스 히틀러(Alois Hitler) (1837년 6월 7일~1903년 1월 3일)로 세관원이었다

[본명은 알로이스 시클크루버  Alois Schicklgruber]

(알로이스 히틀러)

 

어머니는 알로이스의 하녀였던 클라라 히틀러(Klara Hitler) (1860년 8월 12일~1907년 12월 12일)로

나중에는 알로이스의 세번째 아내로 들어온다.

 

[본명은 클라라 푈츨  Klara Poelzl]

(클라라 히틀러)

 

그리고 알로이스 시클그루버(아돌프 히틀러의 아버지)의 아버지는 지금까지 누군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현재 히틀러가문에 대한 조사에 의하면 알로이스의 아버지는

요한 게로으그 히들러라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다

 

그리고 요한 게오르그 히들러는 현재까지도 유태인설의 주인공으로 주목받고 있다

 

어쨋거나 알로이스 시클그루버는 초등학교만 졸업한 채 자신이

살던 고향에서 구두수선을 하며 조용히 살면서 지냈다

아돌프 히틀러의 자서전 [나의 투쟁]에 의하면

시클그루버는 13살때 도제공부를 위해 비엔나와 빈을 전전하며

 그곳에서 5년간 공부한 끝에 자격증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시클그루버가 자격증을 얻은 것은 17살이며 나의 투쟁의 오류다

 

그러나 알로이스는 당시로써는 고급 직무였던 공무원을 하기 위해 도제직을 포기하고

 대신에 오스트리아 정부에서 주최한 행정 사무직 선발에 합격하여

1855년 처음으로 재정부 국경 감시 세관원으로 임명됨에 따라 18세의 나이에 공무원이 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그는 군복 비슷한 제복을 입게 되었다.

공무원이 되면서 잦은 재배치로 그는 한 지역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사를 11번이나 해야했다.

 

이후 그는 계속 승진하여 1860년 국경 감시 하사관직에 올라 오스트리아 벨스(Wels)에서 근무하게 되고

(벨스는 Oberösterreich주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다) 

이후 1864년 재무부 수위 겸 보고자(Finanzwach Oberaufseher, 피난츠바흐 오버아우프제어) 를 시작으로 처음으로 정식 관리직을 맡게 되었다. 이후 린츠, 브라우나우(히틀러가 태어난 곳)를 배회하면서 1892년에는 임시 상급 상무관이 될 정도로 높은 승진을 거듭하면서 승승장구했다

 이는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알로이스에게는 크나큰 성공이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진급은 일정학 학력이 요구되었기에 더 이상은 진급을 할 수 없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1889년 4월 20일 브라우나우에 태어났는데

이 곳은 독일제국과 오스트리아의 국경지대에 잡힌 마을이었다

당시 몸이 약해진 클라라가 아돌프 히틀러의 낙태를 고려했다는 루머가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나는.....브라우나우가 운명적으로 나의 탄생지가 된 것을 행복하게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작은 도시는 두 개의 독일 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적어도 이 양국의

 재합병이야말로  우리들 청년이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실현하지 않으면

 안 될 필생의 사업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동일한 피는 공통된 국가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나에겐 이 작은 국경도시가 큰 사명의 상징처럼 여기진다.

아돌프 히틀러의 자서전 [나의 투쟁] 제1부 <민족주의적 세계관> 제1장 <생가에서>의 서문

 

 

 

히틀러가 태어난 출생지 임을 알리는 비석

Für Frieden, Freiheit und Demokratie. Nie wieder Faschismus. Millionen Tote mahnen

(평화, 자유, 민주주의를 위해, 수백만 명의 죽은 자가 경고한다.

 파시즘이 다시 일어나는 일이 절대 없기를)"

 

 

 

알로이스 시클그루버는 1873년 안나그라슬 회러(Anna Glassl-Hoeror)라는 여성과 결혼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6세 였다. 안나는 성실한 여성이었으며, 유복한 연초 감시관의 딸이었다.

그러나 안나는 결혼 직후에 병을 얻어 그들 사이는 원만하진 않았다

 

1875년 알로이스가 브라우나우에 발령받게 되면서 여인숙 꼭대기 층의 하숙집을 구했는데

그때 19살의 여인숙 고용인 프란치스카 "프라니" 마첼베르거 (Franziska "Franni" Matzelberger) 를 알게 되었다 

당시 프란치스카는 브라우나우 219번지 폼머(Pommer)여인숙에 취직되어

 일하고 있더 종업원중 한명이었다. 당시 프란치스카는 43살의 알로이스의 '여자친구'로 있었지만

 이혼을 허락하지 않은 로마 가톨릭교회 교회법에 의거해

안나그라슬과의 이혼신청이 철회됐으므로 알로이스와 프란치스카의 결혼은 당장 할 수 없었다

그 동안에 프란치스카는 알로이스와 함께 있던

 클라라 푈츨(아돌프 히틀러의 어머니)에게 다른 직업을 찾아 볼 것과 알로이스에게 클라라를

 보내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이것의 연유는 다음과 같은데, 1876년, 그러니까 알로이스가

 그의 첫 부인(안나)과 결혼 한 지 3년이 넘은 후에 그는 처음으로 자신과 6촌 관계이자

 그의 이종사촌이었던 클라라 푈즐을 집안의 '하인'으로 '고용' 했다.

 

그러나 하인이라고 하기보다는, 시중을 들어주기 위해 왔다고 할 수 있겠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16살이었고, 그녀에게 알로이스는 6촌이었고 네포무크 히들러에게는 증손녀였다.

그런데 만약 네포무크가 알로이스의 아버지라면, 클라라는 알로이스의 이복조카딸이 된다

. 그리고 알로이스의 부친이 요한 게오르그라면, 클라라는 알로이스의 직계 조카이다.

 

1882년 1월 프란치스카 마첼베르거는 알로이스라고 이름이 붙여진 히틀러의 사생아를 낳았는데

그때까지 정식으로 결혼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아이의 성은 마첼버르거라 지어졌고

 따라서 '알로이스 마첼베르거(Alois Matzelberger)'가 되었다. 

 프란치스카는 이 아이에게 사생아라는 오명을 씌우지 않기 위해

 반드시 그 아이의 이름을‘알로이스 히틀러’로 명명할 필요가 있었다. 

알로이스 메첼베르거는 훗날 '알로이스 히틀러 주니어'로 개명된다

 

이후 아직 '합법적인' 아내인 안나에게 이 사실을 비밀로 해 두었고, 알로이스 마첼베르거 출산 한달 후

브라우나우에서 공무원 제복을 입고 45살의 나이에 두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프란치스카는 21살이었다

이후 안나는 알로이스 미첼베르거가 태어난 지 1년 후 사망했으며, 당시 이혼이 아닌

'별거'상태중이던 알로이스는 상당한 보험금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란치스카 미첼베르거는 결혼한지 2년여 뒤인 1884년 8월 10일 23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러나 프란치스카의 죽음은 알로이스에게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임신중이던 푈츨과 교제중이었다

1885년 1월 7일 아침 일찍 알로이스 히틀러와 클라라 푈즐은

폼머 여인숙 상층의 히틀러가 묵던 숙소에서 정식으로 결혼을 하였으며, 조촐한 식사가 몇 명의 손님들과

입회인들에게 주어졌다. 알로이스 시클그루버는 39세였던 1879년 여름 알로이스 히틀러로 개명했다

 

 

아돌프 히틀러가 태어나기 13년 전에 히틀러를 위한 처음으로 좋은 뜻밖의 행운이 일어났다.

 1876년, 그(아돌프)의 아버지가 될 그 남자(알로이스)는 그의 이름을

 알로이스 쉬클크루버에서 알로이스 히틀러로 바꾸었다.....

확실히, '하일 시클그루버'는 전쟁 영웅을 위한 빼어난 멍청한 소리로 들릴 것이었다.

-이언 커쇼의 [신화적 히틀러] 中

 

 

이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많은 추측을 했는데 일단 자료상으로

사생아였던 알로이스 히틀러가 어쩌면 자신의 생부일지도 모르는 자신의 삼촌 요한 네포무크 히들러를

자신의 법적 아버지로 내세우기 위해 개명했다는 것이고,

 이러한 개명으로 부자였던 네포무크의 유산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공식적으로 1877년 1월 6일 미스텔바흐(Mistelbach)의 사무소에서

'시클그루버'에서 '히틀러'로 개정했다

 

  하지만 자신이 법적으로 내세우고픈 히들러가 아닌 왜 히틀러라고 했을까

 

가장 유력한 정설로는 사무소 서기의 실수라는 것이다.

 어쨋거나 인류 역사상 '히틀러'라는 성씨가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알로이스 히틀러로 인해

'히틀러'라는 말이 표준화되었다

 

훗날 연합군은 이 사실을 거론하면서 히틀러의 성씨는

 본디 시클그루버(발트피르텔 방언으로 '우물 파는 사람)라면서 "하일 시클그루버를 외쳐라!" 라는

선전삐라를 독일 대도시에 뿌리기도 했다

 

 

역사학자 엘렌 블룩은 아돌프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를

 "무뚝뚝하고 동정심이 없으며, 감정이 없는" 사람 이라고 묘사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자서전인 [나의 투쟁]에는 자신이

 12살이 되었을 때 알로이스가 강제적으로 권하는 공무원대신

화가가 되고 싶어했다고 증언했다. 알로이스의 손에 이끌려 처음으로 관세국을 본 히틀러는

사무실 안에 갇혀 인생을 허비할 생각에 끔찍해졌다고 저술했다.

이후 아돌프 히틀러가 소망하는 직업이 화가라는 것에 알로이스는 극구 반대했다

 

 

 

나는 관리가 될 생각은 없었다. 어떠한 설득이나 진지한 훈계도 나의 이 생각을 바꿀 수 없었다.

나는 관리가 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싫었다. 무조건 싫었다.

 아버지는 관리로서의 생활을 얘기해주고...

직업에 대한 애착이나 가쁨을 눈뜨게 해주려고 여러 방법을 시도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자유가 없는 인간으로서 항상 사무실에 앉아 있어야 하고 자기 시간을 가질 수가 없을 뿐 아니라

 모든 생활의 내용을 서식용지에 써넣는 일을 강요당해야만

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하품이 나올 만큼 싫었다....

-아돌프 히틀러의 자서전 [나의 투쟁] 제1부 <민족주의적 세계관> 제1장 <생가에서>의 소제목 <관리는 질색이다>

 

 

 

실제로 히틀러는 1934년 총통이 되고 나서도 최대한 12시까지나 혹은 오후 4시까지 모든 일을 끝내고

개인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거나 베를린국립오페라극장에서 오페라를 감상하곤 하고

가끔씩 베를린 필하모닉 관현악단에서 푸르트뱅글러가 지휘하는 음악을 감상하였다.

그에 대한 '전설적인' 것으로 밤 늦게까지 일을 했다고 하는데

이 같은 날은 매우 적었으며 1943년부터 그런 습관을 가지기 시작했을 뿐이다.

 

 

 

나를 관리로 만들려는 아버지의 생각이 나의 원칙적인

관리 혐오증과만 대립하고 있을 동안은 이 충돌은 견딜 만했다....

그러나 내 계획이 아버지의 의견과 대립하게 되자 문제가 심각해졌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한 것은 이미 12세 때라고 할 수 있다.

그 일이 왜 발생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어느 날 화가, 즉 예술가가 되겠다는 결심이 섰다....

아버지가 원하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거부했을 때 처음으로 그러면 무엇이 되고 싶냐는 질문을

받았다. 다소 느닷없이 지금까지 마음에 굳게 다짐하고 있었던 내 결심을 말했을 때

아버지는 놀라 잠시 말문이 막혀버렸다. “화가? 예술가?” 그는 나의 이성을 의심했다....

이 점에 있어 그의 결심은 매우 단순했다. 그는 내게 실제 무슨 재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이다.

“예술가! 내가 살아 있는 한은 절대로 안돼!”....그러나 아들 또한....역시 같은 대답을 했다.

 양쪽 모두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아돌프 히틀러의 자서전 [나의 투쟁] 제1부 <민족주의적 세계관> 제1장 <생가에서>의 소제목 <오히려 화가다>

 

알로이스는 그의 아들이 공직 내에서 그와 유사한 직업을 탐색하는 것을 원했으나

아돌프는 이를 계기로 아버지를 상당히 멀리하게 되어서 알로이스가 원하는 그 어떤 것이라고 거절했다.

알로이스가 공무원의 임무를 찬양할 때 히틀러는 일생을 보잘것 없는 임무에 강요받으며

 소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알로이스의 생각을 조소했다고 말한다.

알로이스는 아돌프가 그의 말에 복종하도록 위압하였으나

아돌프는 알로이스가 원하는 모든 것의 반대편에서 최선을 다했다.

알로이스는 히틀러에게

실제적이고, 분별있고, 현실적이며, 비종교적이고, 비정치적이며, 안정적이고 근면한

 

시민 공무원이 되기를 원했으나,

그러기에는 아돌프가 매우 게으르고, 낭만적이며, 몽상주의자이기도 했다.

 또한 알로이스는 타인이 보기에는 매우 근면하고 성실하였으나, 가족에게는 거만한데다가 폭력적이기도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종종 히틀러도 그에게 극심한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그래서 히틀러는 아버지를 꽤 존경하기는 했지만 되도록이면 멀리 했고,

대신 이런 이유로 온화한 성품의 어머니를 매우 좋아했다.

 

훗날(1933년) 독일 수상이 되고 나서 그가 비서에게 말하기를

히틀러는 아버지의 매일같이 계속되는 매질 속에서 더 이상 울지 않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자신의 인내심을 시험하며 조용히 매질의 횟수를 세어나갔다고 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히틀러. 매우 거만한 표정을 짓고있다

왼쪽 두번째 줄의 아이는 세계적인 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1903년 1월 3일 알로이스는 '슈티에플러'라는

선술집에서 와인을 마시다 돌연 정신을 잃고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졌다

히틀러 가문의 주치의 에드바르트 블로흐는 뇌일혈이라고 진단을 내렸으나

아돌프 히틀러 자신도 자서전 [나의 투쟁]에서 그렇다고 적어놓았다. 

 

 

13세 때 돌연 아버지를 잃었다. 평소 매우 건강했던 아버지에게 갑자기 뇌일혈이 일어났던 것이다.

 가족 모두를 슬픔에 몰아넣은 채 그는 아무런 고통도 없이 지상의 생을 마쳤던 것이다.

아버지가 더할 나위 없이 바랐던 일,

자신의 고달팠던 인생에서 자식을 지키고 생계를 함께 마련하려 했던 일은

 당시 그로서는 외견상 달성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무의식 속에서도 당시 아버지도

나도 몰랐던 장래에 대한 맹아를 심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히틀러, 《나의 투쟁》 제 1부 <민족주의적 세계관> 제1장 <생가에서> 의 소제목 <양친의 죽음>

 

 

 

아돌프 히틀러는 자서전에서 아버지가 죽은 뒤 매우 빈곤한 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실제 그는 대학 졸업자가 취직하여 얻을 수 있는 수입보다 더 많은 연금을 받고 있었으며

알로이스 히틀러 본인이 3번의 결혼을 통해 상당한 결혼 지참금과 유산을남겼다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다

 

즉 히틀러는 자기자신의 생애를 고의적으로

비참하게 만듦으로써 자신을 더욱 신화적 존재로 '형성' 하려 하는 왜곡을 적어놓은 것이다.

생애 알로이스 히틀러의 월급은 당시 학교 교장이나 심지어 대학 교수보다도 높았다

 

그러던 1907년 아돌프 히틀러의 어머니

클라라 히틀러가 유방암에 걸렸고 유방암을 치료하기 위한 요오드포름 중독으로

오스트리아 린츠에서 47세 나이로 1907년 12월 12일 아돌프 히틀러 곁에서 사망하게 된다

당시 아돌프 히틀러에게 자신이 유일하게 사랑한 가족의 죽음은 크나큰 충격이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빈에서 미술공부를 하다가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모든 일을 팽개치우고

린츠로 돌아와 클라라 히틀러를 간호했을 만큼 지극 정성이었다.

히틀러는 클라라를 끝까지 간호해 준 당시 클라라의 의사이자 가족의 전문 주치의였던

 유대인 에드바르트 블로흐를 고맙게 여겼으며, 실제로 히틀러는 1935년 오스트리아 합병 당시

독일군에게 이례적인 엄명을 내려  유대인 의사였던 에드바르트 블로흐를 안전하게

프랑스로 떠날 수 있게 하였다. 에드바르트 블로흐는 1941년 자신이 출간한 저서에 이렇게 적은 바 있다.

 

 

 

나는 그때까지 임종을 지켜본 적이 많았지만, 아돌프 히틀러만큼 슬픔 때문에 그렇게 기진맥진해 있는 사람을 본 적은 없었다.

-에드바르트 블로흐, 나의 환자 히틀러 [My Patient Hitler]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의 자서전 [나의 투쟁]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를 언급하고 있다

 

 

...내겐 특히 큰 충격이었다. 난 아버지를 존경했지만 어머니를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히틀러, 《나의 투쟁》 제 1부 <민족주의적 세계관> 제1장 <생가에서> 의 소제목 <양친의 죽음>

 

 

 아돌프 히틀러가 맏이로써 숙모인 요제프 로메더(Josef Romeder)의 유산 대부분을 상속받게 되는데

이 중의 유산의 반 정도를 여동생에게 양보했다고 한다. 실제로 히틀러가

'정말로 힘들었던' 것은 바이에른으로 가기 전

1년 동안만이었으며, 그럼에도 싼 하숙집을 빌려 생활할 정도였다.

  

히틀러가 그린 비엔나 카를 성당

 

히틀러는 어머니가 죽기전인 1907년 10월 미술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빈에 위치한 미술학교로 두번 지원했으나

전부 거절당한다. 교수들은 히틀러의 건축적 재능이 뛰어난 것을 보고 건축가가 되라고 조언해준다

그래서 히틀러는 건축가가 되기 위한 꿈을 가지고 건물 스케치와 여러가지의 도안을 완성한다.

 그렇지만 건축가가 되기위해선 높은 학력이 필요했다.

히틀러는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였고 21살 되던 해에는 받았던 보조금마저 끊기게 된다

 이후 그는 몇 년 동안 엽서에 담긴 그림들을 그대로 다시 그려 상인에게 되파는 일개 그림장이 신세가 된다

. 당시 그는 여전히 집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복지시설인 매너하임에 살고 있었고 매우 힘들게 생계를 이어간 것으로 알려져있다

일하고 남은 시간에는 종종 리하르트 바그너의 게르만 민족신화에 관련된 오페라를 감상하였다

 

히틀러가 활발한 반 유태주의자가 된 것도 빈에 있을 때부터였다

(어린 시절 레오폴드 푓슈라는 역사 선생님의 반유대주의와 게르만 민족주의를 배운 것에 대한 영향도 있을 지 모른다)

히틀러는 빈에 있을때 정치 평론가 란츠 폰 리벤펠스나 정치가이자 빈의 시장이었던 카를 루거, 비엔, 게오르히 리터 폰 쇠너러의 반유대주의에 영향을 받아 후에 그의 정치관념의 밑바탕인 아리아 인종 우월주의를 배웠다.

이런 빈의 분위기로 인해 결국 히틀러는 유태인은 아리아인의 적이며, 독일 경제적 문제의 핵심 원인이라고 믿게 되었고

후에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청년기에 그는 종종 언론사에 칼럼을 투고하기도 했는데, 이때

자신의 어릴 적 별명이었던 '볼프'라는 이름을 예명으로 썼다 한다.

그러나 그의 주변에 누구도 그가 볼프라는 이름으로 글을 투고하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볼프는 늑대란 뜻이다)

 


 

 


 


 

실제 히틀러가 그린 그림들  히틀러가 그린 기린 그림

 

그래도 빈 시절의 히틀러는 평범한 오스트리아의 시민이었고, 그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현재 그가 남긴 그림들은 한화로 10억에 넘는 금액에 경매 낙찰되었다

그의 그림은 화가로서도 상당한 경지에 이른 작품인데도, 사람들은 작품성보단 독재자의 그림이라는 점에 흥미를 갖는다

2012년 1월 29일에 아돌프 히틀러 작 바다의 야상곡(1913)은 슬로바키아에서 온라인 경매에 올라왔는데

 한화로 4천7백만원에 낙찰되었다. 이는 최초경매가 1천6백만원의 3배에 달하는 금액이다

 

바다의 야상곡 (1913)

 

1913년에 바이에른 주의 뮌헨으로 갔다. 히틀러가 뮌헨으로 간지 얼마 안 됐을 무렵이었다.

오스트리아로부터 체포 영장을 들고 온 수사관들이 히틀러를 찾은 것이다.

이유는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군 징집을 거부하고 독일로 도망갔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이때 "몸이 허약하여 도저히 군복무를 할 수 없다"고 말하였고 면제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히틀러가 병역을 거부한 것은 몸이 허약해서가 아니었다.

진짜 이유는 슬라브족과 유태인으로 혼탁한 오스트리아군에서 군복무를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오스트리아는 그에게 조국이 아니었고, 그의 조국은 순수 독일인들로 구성된 독일 제국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오스트리아의 징집을 거부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이새끼 대처능력 보소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뮌헨 오데온 광장에서 전쟁을 선포하는 장교 앞에서 환호하는 군중들 사이에

 기쁨에 겨운표정을 짓고 있는 히틀러가 우연히 촬영되었다. 히틀러는 즉시 바이에른 16 보병연대 입대를 자원했다.

 그에게 진정한 마음의 조국인 독일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데온 광장에서의 히틀러

 

가장 왼쪽의 카이저 수염을 한 남자가 히틀러 상병이다
 
그는 즉시 즉시 바이에른 16 보병연대 입대를 자원했다.
그에게 진정한 마음의 조국인 독일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0년 9월 영국의 토머스 위버 교수에 의하면 아돌프 히틀러는 포탄이 휘날리는 위험한 전선이 아닌
평화로운 후방전선에서 편지나 나르는 후방 연락병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전선 후방에서의 아돌프 히틀러 연락병. 카이저 수염이 일치한다
아돌프 히틀러는 상병으로 전역했다고 전해지나 일설에는 병장, 일병 등등 여러 설이 존재한다
상사나 병장이라는 설이 있으나 아돌프 히틀러는 일반사병으로 복무를 마쳤기에 불가능하다
 

상병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의 제1차 세계 대전 패배로 받은 충격으로 인한 히스테리성 실명에서 회복되자 독일 육군에 입대하여 통신병으로 복무했다. 뮌헨의 제4군 사령부로 복귀해 활발히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다가 1919년 9월 전후의 혼란 속에서 싹트고 있던 수많은 민족주의 운동 중 하나를 조사하라는

 군 정보작전참모부의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히틀러는 오히려 1919년 9월 국가 노동자당(Deutsche Arbeiterpartei)이 자신의 이념과 일치함을 느끼고 입당

당원증 555번을 받았다. 55미

 

히틀러가 받은 당원증

 

히틀러는 곧 당내에서 가장 유능한 연설가가 되었고 지도위원회의 위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1920년 초, 히틀러는 독일노동자당 선전부 책임자가 되었다.

1920년 2월 24일, 뮌헨의 커다란 맥주홀인 호프브로이하우스에 모인 2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 앞에서

 히틀러는 그의 동지들이 추구하고 있는 운동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했다.

 짧게 나치당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이 바로 그것이다.

 

(나치당의 심볼마크 하켄크로이츠 Hakenkrouz)

 

그리고 그는 국가 노동자당(Deutsche Arbeiterpartei)를 국가 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 (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NSDAP)로 이름을 바꿨다

국가 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의 창시자 안톤 드렉슬러 (Anton Drexler) 그는 열쇠 수리공이다

 

드렉슬러는 히틀러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존중하지 않으며 개인적 권력만을 추구한다는 비난이 담긴 공격적인 소논설을 배포하도록 지시하였다. 히틀러는 그에게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였고 드렉슬러는 공식 모임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그는 단순한 상징적 위치인 명예회장으로 물러나게 되었으며, 1923년 탈당하였다.

 

흔히 사람들은 나치당이 앞글자 NA와 뒷글자 ZI를 합쳐서 나치(NAZI)가 됬다고 하는데 이는 루머에 불과하다

사실 나치는 히틀러의 반대파가 히틀러를 얕잡아 부르기 위한 단어인 이그나츠(ignatz)로 앞뒤 막힌 수구꼴통이란 뜻이다

(근데 히틀러는 수구꼴통 맞다)

(하지만 국가 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이란 표현은 쓰기 어려우니까 그냥 이하 나치당으로 씀)

 

1923년 당시 히틀러의 초상화

 

히틀러는 나치당의 지도자가 된 후 민주공화제 타도와 독재 정치 강행, 베르사유 조약 타도, 민족주의와 반(反)유대주의

그리고 백화점과 다국적 기업 공격 등을 포함한 25개 조항으로 된 나치당의 당 강령을 발표했다.

 

베르사유 조약 서명 1919년

http://ko.wikipedia.org/wiki/%EB%B2%A0%EB%A5%B4%EC%82%AC%EC%9C%A0_%EC%A1%B0%EC%95%BD

(베르사유 조약에 대해선 여기)

 

 


(히틀러의 연설 연습장면)

 

그는 국가전복을 위해 뮌헨의 반동파들에게 무기 지원을 받고

1923년 11월 8일 밤 바이에른 주지사 구스타브 리터 폰 카르가 연 바이에른 맥주홀 대집회에 쳐들어갔다

나치당원들이 이끄는 SA돌격대 단원 600여명이 무기로 맥주홀을 포위하고 히틀러가 등장한다

 

그리고 군중을 헤치고 8시 30분 경 프록코트를 입은 히틀러가

 회장에 등단하여 천장을 향해 권총을 발사하면서 선언했다.

 

국민혁명이 시작되었다. 회관은 6명의 사람들도 가득 차 있다. 베를린과 바이에른 정부는

 지위를 잃었고 새 정부가 형성된다. 독일국방군과 경찰이 이들을 점유하고 있다.

 

 그리고 히틀러는 루돌프 헤스, 아돌프 렌크, 울리히 그라프와 함께 총으로 위협해 어안이 벙벙해 있는 카르, 세이서, 로소를 옆방으로 데리고 가 쿠데타 계획을 설명하고 반란 지원을 요구했다.

 결국 루덴도르프 장군의 중재로 카르와 히틀러는 협력을 약속했으며 계획은 성공할 것처럼 보였다.

 

한편 괴링은 바이에른 실력자들에게 떠나지 말라고 연설을 하나 일부는 주방을 통해 탈출했으며 하인츠 페르네, 요한 아이그너, 스퀘부너 리히터 등이 루덴도르프를 데리러 파견되고

룀은 도시의 주요 건물들을 점령하도록 명령했으며 공범자 게르하르트 로스바흐가 보병 학교의 학생들을 동원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우선 국방군이 히틀러를 지지하지 않았다.

베를린으로 진격하게 됨으로써 국방군들끼리 싸우게 되는 사태를 기피했기 때문이다.

관료들 역시 일치해서 카르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고 이렇게 해서 카르는 국방군의 보호하에

11월 9일 오전 2시 55분 반란을 부인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일이 이쯤에 이르자 히틀러는 루덴도르프의 제안으로

민중의 지지를 받아 카를에게 압력을 가할 작정을 하고 데코행진을 계획했다.

 

11월 9일 오전 11시 30분 본거지인 뷰르가브로이케라에서 약 2000명의 데모 대열이 출발해

도중에 번번이 무장경찰대로부터 저지를 당했지만 경찰대는 그리 단호한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해서 시청 앞의 광장에 도착하였고 여기에서 기세를 올린 뒤 여세를 몰아 국방군사령부에

빽빽이 들어찬 SA와 합류하려고 했다.

 

오디온 광장에서 이러고 있는 사이 저지하고 있던 무장경찰대에서 일발의 총성을 계기로 일제사격이 시작되면서

 데모대는 쫓겨나고 말았다. 이 때의 일발은 우연한 폭음이었고 일제사격이라 해도 일분간 진행된데 불과했지만

 19명의 나치 당원들이 사망했다.

 

그리고 히틀러는 함께 스크럼을 짜고 있던 스퀘부너 리히터가 총에 맞아 즉사하는 바람에

같이 끌려넘어지면서 왼쪽 어깨가 탈구되었고 결국 다른 나치당 지도부들과 함께 경찰에 체포되었다

 

1935년 나치당이 집권하던 때에 뮌헨 폭동을 기념하기 위해 발행한 우표

 

1924년 2월 26일 히틀러, 루덴도르프 등은 대역죄로 고소되어 특별법정에 섰고 히틀러는 자진하여 공화국 정부 전복의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나서 공화정을 격렬하게 비난하고 카르를 비판했다.

 

4월 1일 히틀러는 금고 5년형, 룀은 1년 3개월의 실형, 브뤼크너는 1년 6개월의 실형, 루덴도르프는 무죄 석방에 처해졌다.

 그 밖에 아돌프 휜라인도 6개월간 투옥되었고 오스트리아의 지휘자 카를 뵘은 폭동을 지지했으며

하인리히 힘러도 봉기에 가담했다.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는 히틀러가 수감되는 동안 잠시 나치당을 이끌었고

 괴링은 오스트리아로 도주했다가 1925년 독일로 귀국했다.

 한편 히틀러는 《나의 투쟁 Main Kampf》의 초고를 집필하고 9개월 후에 석방되었다.

 

(히틀러는 감옥에 수감될 동안 자신의 방안에 승리의 상징인 월계관을 장식할 정도로 쿠데타를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히틀러는 석방되었지만 나치당은 사실상 불법으로 낙인 찍이고 산산조각이 난 상태였다

히틀러는 흩어진 당원들을 다시 모으고 재건에 나섯으나, 쉽지는 않았다

독일 경제가 조금씩 되살아나면서 좌파, 우파로 정당이 나뉘고 독일은 민주적인 발판을 마련해 나갔다

 

그러나 1929년 검은 목요일로 시작된 경제 대공황으로 기업들이 도산하면서

살아나던 독일 경제는 부서직 실직자 수가 6백만명을 육박하게 되는 등, 독일은 큰 타격을 입었다

 

민주주의 정당들은 속수무책인 가운데 미래를 약속한 나치당은 18.3%의 득표율로 독일 사회민주당(좌파 )에 이어

제 2당이 되었다. 연립내각에 입각하기를 거절하고 나치당의 단독 집권을 요구했다

 

히틀러는 1932년 4월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로 출마하여 1,340만 표(36.8%)까지 득표했으나

파울 폰 힌덴부르크 후보에게 패하였다

 

그러나 1928년 2.8%였던 득표율이 36.8%까지 솟은 것은 큰 성장이었다

 

또한 7월 총선거에서는 37.3%를 득표하여 압도적인 당세를 과시하면서 여전히 연립내각에 참가할 것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11월 총선거에서는 33.1%로 지지율이 떨어지면서 당세가 쇠퇴해졌으나,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자본가나 농업계를 비롯한 지배세력의 많은 사람들이 히틀러를 지지하게 되었다

 

대통령 힌덴부르크는 경제와 정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1933년 1월 30일에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였다.

그는 보수파와 군부의 협력을 얻어

좌파 세력,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파 인사 등 반대파를 감금, 납치, 암살, 고문, 불법적인 재판과 처벌 등의 방법으로 탄압하고 기존 바이마르 공화국의 무능함을 강조하여 인기를 모은 뒤 1933년 7월 일당독재(一黨獨裁) 체제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1934년 8월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죽자 국민투표를 실시해서 총리가 대통령의 지위를 겸하게 되었고

그 지위를 총통 및 총리(Führer und Reichskanzler) 약칭 총통(Führer)이라 칭하였으며 보통 총통으로 불리게 되었다.

 

의회에서 전권 위임법의 제정을 촉구하는 아돌프 히틀러

 

히틀러의 자필 서명

 

 히틀러는 전권 위임법에 의거해 바이마르 공화국을 폐지시키고 제3제국 (Zeit des Nationalsozialismus)을 시작시켰다 

지방 의회가 해산되고 사민당은 불법화되었다. 그리고 각종 단체와 조합들이 나치당의 하부조직으로 바뀌었다. 

 동시에 나치 조직 내부의 권력 재편에 착수하면서 "긴 칼의 밤" 사건을 일으킨다(1934년 6월30일)

 

히틀러의 권력을 굳히기 위해 나치당 내의 불순분자를 제거하기 위한 이 작업으로

히틀러의 오른팔 중 하나였던 돌격대 참모장 에른스트 룀(Ernst Röhm)이 사형당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의 전직 수상이던 쿠르트 폰 슐라이허(Kurt von Schleicher)가 자택에서 암살당했으며

 

쿠르트 폰 슐라이허

 

반나치파였던 에리히 클라우제너와 룀의 부관이던 에드문트 하이네스

그리고 나치당의 2인자였던 그레고어 슈트라서, 과거 뮌헨 폭동을 진압했던 구스타브 리터 폰 카르가 암살당했다

 

반(反)나치파 에리히 클라우제너의 묘비

 

에른스트 룀과 SA돌격대원들은 바이에른 주의 바트비스제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는데

그 날(6월 30일) 오후 6시 30분 히틀러와 그의 경호원이 호텔로 들이닥쳐 룀과 SA지도자들을 끌어냈고

그들을 뮌헨의 슈테델하임 감옥에 가뒀다

 

사실 히틀러의 이 숙청작업은 히틀러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한 것이 아니다

애초에 SA돌격대는 나치당 제1의 준군사조직이었고 그들은 자신들이 독일의 군사조직 장악을 요구했고

일부는 사회주의 혁명을 주창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에른스트 룀 이외의 SA돌격대원들이 숙청당했고 SA의 세력은 히틀러의 친위조직인 SS에게 넘어간다

 

그 후 독일 국방군은 나치당원에 융합되었고, 이러한 권력 인수와 더불어 명실상부한 독일의 독재자가 된 그는

 민주공화제시대에 비축된 국력을 이용하여 민족의 발전을 꾀하였다.

그리고 외교계, 경제계, 군부 요인들의 협력을 얻어 외교상의 성공을 거두었고, 경제의 재건과 번영을 이루었으며

군비를 확장하여 독일을 유럽에서 최강국으로 발전시켰기 때문에 국민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 결과로 1936년 올림픽이 베를린에 개최된다

 

 

 
 

(1936 베를린 올림픽 8월 1일~16일)

 

히틀러가 인종주의자라는건 초등학교 졸업하신 분들이라면 당연한 상식

하지만 히틀러는 나치독일은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 라는 인식을 세계에 심어주기 위해

올림픽 기간동안만은 유태인 및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을 없앤다

 

인종차별한다는 나라를 방문했더니 오히려 환영해주니 많은 사람들은 "구라네 ㅋ"했을 정도

하지만 인종차별이 없어졌다고 해도 베를린 올림픽은 평가가 극렬하게 나뉘는 올림픽 축제였다

 

제 11회 올림픽(베를린 올림픽)이 세계적으로 대단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 올림픽은 당시 시대가 경제 대공황이었고 또한 깨끗하고 정직해야 될 축제가 정치로 얼룩졌다는 점

세상에 정치 안묻는 올림픽이 어딨냐

 

제9회 올림픽(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 5월17일~8월12일)에서 최초로 성화가 도입됐지만

그것은 성화 불만 피우는 것이고 올림픽 개최국부터 불을 가져와 성화를 피우는 것은 베를린 올림픽이 최초다


성화를 가져오는 중

 

그리스 아테네부터 무려 3000km가 달하는 거리를 직접 운반해서 성화 봉송 이벤트가 진행되었으며

최초로 텔레비젼 생중계가 시작된 올림픽이란 점에서 베를린 올림픽은 매우 점수가 높은 올림픽 축제였다

 

또한 농구, 카누, 핸드볼이 이 올림픽에서 처음으로 정식종목으로 답변확정 되었으며

 폴로(구기의 일종)는 이 대회를 마지막으로 없어졌다

 

하지만 정치적, 군사적인 느낌을 어필하게 위해 경기장에 하켄크로이츠를 개양했으며

시내 곳곳에도 하켄크로이츠로 도배를 했으며 히틀러 자신은 물론 관계자들 까지 군복을 입히고

 로마식 경례(Deutscher Gruß)를 하도록 했다

 


오른팔을 드는 나치당원과 히틀러

 

철저히 히틀러의 계산으로 만들어진 베를린 올림픽은 아리아인의 우수성을 강조하긴 충분다

 

 

 

스포츠적이고 기사다운 시합은 인간의 최고의 자질을 깨웁니다.

그것은 이해와 존중 안에서 전투원(선수)들을 분리시키지 않고, 오히려 단합시킵니다.

그것은 또한 평화의 정신 안에서 국가들을 결속시키는 것을 돕습니다.

그것이 올림픽 성화가 죽어서는 안되는 이유입니다."

-히틀러가 연설한 올림픽 개회사

(이 글은 나치의 선전부 장관인 요제프 괴벨스가 작성했다)

 

이 대회에는 빠질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당시 조국이 일본에 손아귀에 넘어간 마라톤 금메달 리스트

손기정 선수를 말이다

 

 

그는 베를린 올림픽 동메달리스트 남승룡선수와 함께 출전했고 2시간 29분 19초 라는 신기록을 세우고 금메달을 딴다

 

하지만 그는 친구에게 보낸 엽서에는 일제 치하라는 슬픔으로 인해 "슬프다"(엽서에는 슬푸다 라고 써져있음)라고 썻다

 

 

 

슬푸다!!?

 

그리고 여담으로 손기정선수는 히틀러와 공식적인 자리에서 만난 유일한 한국인으로 알려져있다

 

'160센티인 내 키에 비해 그의 손은 크고 억셌으며 체구는 우람했다.

그리고 독일을 이끌어가는 통치자답게 강인한 체취를 풍겼다'

-히틀러와 악수를 나눈 후 손기정

 

어쨋든 올림픽은 끝났고 나치의 인종탄압은 리턴하게 된다

어서와 인종차별은  익숙하지?

 

 

 

그리고 히틀러는 1938년 오스트리아를 병합한다 

일명 오스트리아 병합(Anschluss Österreichs 오스트리히 안슐루스) 사건이다

 

1938년 3월 12일 독일 국방군은 오스트리아로 진군하였다.

한편 쿠르트 슈슈니크 오스트리아 총리는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로

 오스트리아의 독립 유지 여부를 묻기 위한 국민투표를 3월 13일에 실시하기로 계획했으며

국민투표에서 대다수를 확보하기 위해 나치 관념론을 크게 동정한 청년 투표자를 제외시켜 투표 연령을 높였다.

 아돌프 히틀러는 국민투표가 중요한 시기에 지배를 받을 것이며 나치 독일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한편 독일 내각은

"오스트리아에서 폭동이 발생했으며 오스트리아 국민 대다수가 독일 군대의 오스트리아 진주를 요구하였다."는 내용이 담긴 신문을 발행했다.

절망에 빠진 슈슈니크는 그날 저녁 총리직을 사퇴했으며

빌헬름 미클라스 오스트리아 대통령은 새로운 총리를 임명하는 것도 거절하였다.

그러나 독일은 불과 하루 만에 내각을 포함한 빈의 대다수 의석을 차지했으며 1938년 4월 10일에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일부가 되었다. 독일은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를 오스트리아 총리로 임명했다.

오스트리아의 민주주의 체제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오스트리아가 1955년에 독립을 선언하기까지 복원되지 않았다

 

 

 
 

독일군이 대놓고 경비하는 투표소에서 진행되었다

 

(병합을 찬성합니까?)

(           아니오)

 

 

 

 

그리고 히틀러는 독일계 주민이 많이 산다는 이유로 주데텐란트 영토분쟁을 일으킨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영국 등 강대국의 밀실 야합인 뮌헨 회담을 통해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란트를 양도받고 더 이상의 영토욕심을 내지 않겠다고 회담에서 밝혔으나

히틀러는 결국 체코슬로바키아 전부를 병합시킨다

피해국인 체코슬로바키아는 정작 회담에 참가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나치의 인종주의가 겉으로 표출되는 사건이 터지는데

그것은 바로 수정의 밤(die Kristall nacht  디 크리스탈 나흐트)사건이다

 

 파리 주재 독일 대사관의 3등 서기관이었던 에른스트 폼 라트가 헤르셸 그린슈판이라는 17세의 독일계 유태인 청년의 암살로 사망한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사건 당시 수많은 유리창이 깨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1월 9일 저녁부터 다음날까지 요제프 괴벨스가 라트의 죽음에 항의하는 독일 국민들의 "자연발생적 항위 시위"였다고 선전매체를 동원해 보도한 이 사건의 결과로 대략 점포 815개소, 주택 171동, 유대인 예배당 시나고그 193개소가 불에 타거나 파괴되었다. 유대인 2만명이 체포되었고 하나 정확한 수치는 기록에 없다.

 

11월 10일 새벽 1시 20분에 제국보안본부의 수령 하이드리히는 전국의 경찰 및 SS보안방첩부(SD)에 시위 운동의 조직을 협의하라는 내용의 지령이 담긴 훈령을 내렸다.

이 훈령에는 유대인 상점 및 집은 파괴할것, 유대인 예배당은 주변에 불이 번질 염려가 없으면 소각할 것

경찰은 시위를 저지하지 말 것, 가능한 부유한 유대인을 우선 순위로 체포할 수 있는 만큼 체포하라는 등의 명령이 들어 있었다.

 

유대인의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라트가 유대인에게 살해당한 죄값을 치르라는 의미에서 일단 피해 입은 유대인이

보험사로부터 보험금을 수령하자 당시 경제부 장관이었던 괴링이 이들 유대인의 보험금 및 재산을 라트의 암살에 대한

 보상을 국가에 한다는 명분으로 모두 몰수해간 것이다. 이 조치를 확립한 것은 11월 12일이었다.

 

이 사건으로 91명의 유태인들이 죽었으며 3만여명이 체포되었습니다

 

 

히틀러는 옛 독일의 영토를 되찾기 원했다. 그는 폴란드의 단치히(Danzig)항구를 내놓으라고 요구를 했지만

폴란드는 단호히 거절했다. 후에 나치는 단치히, 나아가서 독일민족의 생활권 확보를 위해 폴란드를 침공하기로 한다

 

히틀러는 1939년 9월 1일에 선전 포고도 없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이는 스탈린이 히틀러와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었고 폴란드를 히틀러에게 나눠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1939년 9월 1일 폴란드를 일명 전격전(Blitzkrieg)로 6주만에 점령하고

영, 불, 폴 군사방위 조약을 맺은 영국과 프랑스는 곧바로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하지만

1939년 9월 부터 1940년 5월까지 선전포고만 했지 사실상 서로간의 교전이 없었던

앉은뱅이 전쟁(Stizkrieg)라고 불린다

 

이 앉은뱅이 전쟁의 결과는 결국 프랑스 침공으로 이어져 1940년 6월22일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프랑스는 독일의 영토로 귀속된다

그리고 히틀러는 영국과의 화합을 원했으나 당시 영국의 수상인 처칠은 결사항쟁을 외쳤고

히틀러는 영국 본토 상륙작전인 바다사자 작전을 계획하고 독일이 제공권을 장악하기 위해

독일공군(Luftwaffe)과 영국공군(Royal air Force)과의 교전인 배틀 오브 브리튼(Battle of Britain 영국 항공전)을 개시하지만

 영국의 기적적인 승리로 나치독일은 1,887대의 항공기를 잃었고 영국상륙작전을 무기한 보류(사실상 포기)했다

 

그리고 히틀러는 소련 침공작전을 대비하기 위해서도 바다사자작전을 포기해야만 했다

 

나치독일은 1941년 6월22일 동맹국이었던 소련을 공격하였고 장비의 운용법을 잘 알고있었던 독일에 비해

실전경험이 없었고, 갑작스럽 기습으로 인해 소련은 일방적으로 밀릴 수 밖에 없었고

소련의 모스크바, 스탈린 그라드등 소련의 내부 깊숙히까지 점령했으나 나치의 코카서스 유전지대 확보를 위한 전투인

  스탈린 그라드전투에서 대패하였고 소련은 역전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그 후 독일군은 이렇다 할 전과를 내지 못한 채 연합군의 상륙작전과 소련군의 하계공세에 밀려

정복한 영토를 잃고 본토까지 후퇴하게 된다

 

결국 독일은 패전에 패전을 거듭하고 결국 1945년 4월29일 자신의 여자친구인 에바 브라운과 결혼하고

 다음날 베를린에 입성한 소련군이 오기 직전 지하벙커 안에서 권총자살로 죽음을 맞이한다

 

 

 

-무솔리니와의 관계

 

히틀러의 나치당은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의 마이너버젼으로 시작된 것이 시초이다

히틀러는 무력으로 정권을 얻은 무솔리니를 자신의 멘토로 삼고 그를 존경했고, 그것은 자살하기 직전까지 그랬다. 히틀러는 젊은시절 무솔리니의 초상화를 얻기위해 무솔리니에게 부탁을 했으나, 무시당했다.

무솔리니는 히틀러를 평하길

 

인종!

그건 실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느낌을 갖는 것일 뿐이다. 최소한 95 퍼센트는 그렇다.

나는 오늘날 어디에서도 순수한 혈통을 지닌 인종을 찾을 수 없다고 본다.

독일 사람 중에 자신이 순수한 튜턴 족이라 자신있게 말할 사람이 어디있나?

고비노는 프랑스 사람이고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은 영국 사람이고 볼트만은 유대인이고

라푸즈는 또 다른 프랑스 사람이고 그런거지.

 





히틀러의 인종차별주의를 간접적으로 비판했다

 

1933년 나치독일이 무솔리니의 우군인 오스트리아 지도자 엥겔베르트 돌푸스를 암살하자

독일과 이탈리아의 관계가 악화기도 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1943년 무솔리니를 도와 살로공화국 건국에 도움을 주는 등 힘써주기도 했다

 

 

 

 

 

-유태인 학살

 

 그는 크고 작은 절멸수용소에서 정치사범, 반동분자, 동성애자, 유색인종을 처넣고

밤낮 가리지 않고 강제노동을 시켰다

 

아우슈비츠 말고도 6개의 수용소가 세워졌고 전부 폴란드 영내에 세워졌다

나치는 그곳에서 매우 정교하고도 조직된 학살을 저질렀고 그 수는 이루 말 할수도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잘못 아는 사실이 있는데 할리우드 영화에서 보여지는 것 처럼 수용소에선 유태인만 있던 것이 아닌 독일인들도 상당수가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히틀러는 그들을 낙오자로 판단하고 집어넣은 것이다

 

하지만 나치의 수용소는 인종이 최 우선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처우는 좋았던 편이다

 

나치 히틀러가 유색인종에게 이런 야만적인 만행을 저지른 이유는 히틀러 자신이 인종주의자이며

게르만인만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우수한 인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 1차세계대전 당시 무려 1만2천명에 달하는 유대계 독일군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받쳤다

 


 

 

 

 

  

 

나치는 그들에게 바이러스를 투입해 의학품 연구를 하였고 그들을 부려먹었다

 

현재까지 내려오는 음모론은

'유태인 600만 학살은 진실인가'

'유태인의 신체를 이용한 용품을 만들었나'

 

특히 죽음의 천사 '요제프 멩겔레(Josef Mengele)는 마취는 실험을 방해한다며

 

마취없이 늑골 채취

어린 아이의 안구에 염색약을 주사해 눈 색깔을 바꾸는 일

이러한 과정에서 숨을 거둔 피실험자들의 눈은 멩겔레의 수집품이 되었다

 

또한 남녀 쌍둥이를 근친교배(...)하거나, 왜소증 환자들을 대상으로 실험하기도 했고 샴쌍둥이에 대한

 집착도 보여서 쌍둥이들의 몸의 일부를 잘라서 꿰매어 인공 샴쌍둥이 비스무레 한 것을 만들고

얼마나 살아남는지 관찰하기도 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1 제 2차세계대전이 일어난 원인:히틀러가 천년제국(범게르만주의)범게르만주의란? 범게르만주의는 독일이 세계를 재패한다는 쓸떼기 없는 거죠암튼 히틀러가 천년제국을 건설하기 위해서

2 히틀러의 대한 소개: 히틀러는 은근 싸이코죠 어렸을 때 부터 아빠한테 학대를 많이 받았고 그나마 버팀목이었던 엄마가 일찍 죽었고 그 때 유태인의 대한 나쁜생각이 들어 히틀러가 나치당을 세워 독일의 권력을 다 잡았을 때 유태인을 대학살 했죠 특히 독가스로 죽이거나 죽인사람으로 비누를 만들엇죠

3:2차세계대전은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일어났죠 근데 사람들은 2차세계대전의 변환점을 노르망디상륙작전이라고 생각한는데 그건 틀린겁니다 2차세계대전 때 연합국의 승리의 변환점은 스탈린그라드 전투 입니다

1944년 미친 일본놈이 미국의 진주만을 공격해 일본과 미국도 싸우죠 그리고 미국의 원자폭탄 공격으로 전쟁이 끝났죠

 

 

더 자세한 건 책이나 인터넷 ㄱ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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