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삼국시대,통일신라,후삼국시대,고려,조선의 역사적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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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5.07.20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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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인물 좀 가리켜 주세요

고조선:1명

삼국시대:2명

통일신라:1명

후삼국시대:2명

고려:1명

조선:1명

역사적 인물 좀  가리켜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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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단군왕검

 

삼국시대:김춘추(무열왕),김유신

 

후삼국시대:왕건,견훤

 

고려:서희,강감찬

 

조선:김종서,남이 등등

 

아 그리고 한명한명씩 설명들어갑니다.

 

단군왕검:(요약)고조선의 기록에서 보이는 정치적 지배자인 단군의 칭호.

 

단군왕검:(본문)최남선()은 이를 ‘엉큼’ 또는 ‘’‘’의 대역()이라 하여 대인() ·신성인()이라는 뜻으로 추정하였다. 따라서 ‘단군왕검’이란 칭호에서 ‘단군’은 제주(:)의 뜻이 있고 ‘왕검’은 정치적 권위와 권력을 표시하는 존칭으로 결국 단군왕검은 제사장과 정치장의 기능을 겸한 제정일치적인 사회의 우두머리로 해석된다.

 

김춘추: 김(). 휘 춘추(). 진지왕의 손자. 이찬(飡) 용춘(:)의 아들.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 천명부인() 김씨(). 무열왕()이라고도 한다. 642년(선덕여왕 11) 백제의 침입으로 대야성()이 함락되고 사위인 성주() 품석()이 죽음을 당하자, 고구려와 힘을 합하여 백제를 치고자 연개소문()을 만났으나, 국경의 영토문제로 감금당했다가 돌아왔다. 웅변에 능하고 외교적 수완이 뛰어나서 사신으로 일본과 당()나라에 다녀왔으며, 특히 당나라에는 여러 차례 왕래하면서 외교적 성과를 거두고 군사원조까지 약속받아 삼국통일의 토대를 닦았다.

654년 진덕여왕이 죽자 진골()의 신분으로 군신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함으로써 신라 최초의 진골출신 왕이 되었다. 즉위 후 이방부령() 양수()에게 명하여 율령()을 상정()하게 하고 이방부격() 60여 조를 제정하여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당나라와 계속 친교를 맺어 깊은 신뢰를 얻고 개부의동삼사() ·신라왕()에 책봉되었다.

660년(무열왕 7) 당나라에 청원하여 당나라가 백제 정벌의 대군을 파견하자, 왕자 법민(:)과 김유신 등에게 5만의 군사를 주어 당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이듬해 백제 부흥군을 격파하고, 이어 고구려 정벌의 군사를 일으키다가 죽었다.

그의 재위기간에 신라 왕권의 전제화()가 확립되었고, 또한 크게 성장한 귀족세력을 중심으로 당나라의 율령제도()를 모방한 관료체계가 정비되었으며, 구서당()이라는 9개 군단()의 설치로 군사조직이 강화되는 등 본격적인 국가체제가 확립되었다. 또, 김유신의 매부()가 됨으로써 경주김씨 왕실과 김해김씨와의 결합이 이루어졌고, 그의 직계자손으로 8대가 계속됨으로써 120년 동안 정치의 황금기를 맞게 되었다.

 

 

 

김유신:

본관 김해(). 아버지는 소판()·대량주도독()을 역임한 서현(), 어머니는 숙흘종(: 의 아들)의 딸 만명(). 본래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12대손으로, 증조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이라고도 함), 조부는 신주도 행군총관()을 지낸 명장 무력()이었다. 김유신은 609년(진평왕 31)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라 불린 낭도()를 이끌고 화랑정신을 길렀고, 611년과 이듬해 중악()과 인박산()에서 삼국통일을 기원()하고 무술을 닦은 뒤 국선()이 되었다.

629년(진평왕 51) 8월 이찬(湌) 임영리() 등이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할 때 중당()의 당주()로서 출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때 적군의 역습을 받은 아군의 사기가 떨어져 싸움이 불리해지자 아버지 소판 서현에게 "제가 벼리와 옷깃이 되겠습니다" 하고 홀로 적진으로 돌진하여 적장의 머리를 베어 옴으로써 승리의 기틀을 잡아 대승을 거두게 하였다. 642년(선덕여왕 11) 압량주(:지금의 ) 군주()가 되었고, 644년 소판 벼슬에 올랐다. 같은 해 9월 상장군()이 되어 백제의 가혜성() 등 7개 성을 쳐 이기고 이듬해 1월에 개선하였다.

그런데 왕을 알현하기도 전에 매리포성(:)이 백제군의 맹공을 받고 있다는 파발에 곧장 상주(:) 장군이 되어 출전, 요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647년(진덕여왕 1) 1월 여왕을 폐하려고 난을 일으킨 귀족회의 수뇌인 상대등() 비담()과 염종()의 반군을 토벌하였고, 10월 무산(:무주) 등 3개 성을 공격해 온 백제군을 보병·기병 1만으로써 크게 격파하였다. 이듬해 압량주 군주로서 전날 백제에게 빼앗긴 대량성(:합천)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이어서 악성() 등 12개 성을 빼앗았으며, 그 공으로 이찬 벼슬로 승진하고 상주행군대총관()이 되었다.

649년 8월에는 석토성() 등 7개 성을 공격해 온 백제의 장군 좌평() 은상()을 무찔렀다. 654년 3월 진덕여왕이 후사 없이 죽자 재상으로 있던 이찬 알천()과 의논하여 이찬 김춘추(:)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듬해 9월 백제의 도비천성(: )을 공략하였으며, 이때 백제왕의 문란한 정치를 보고 백제를 멸할 것을 왕에게 건의하였다. 660년(태종무열왕 7) 1월 상대등에 올랐고, 7월 신라 정예군 5만과 소정방()이 이끈 당나라군 13만이 연합하여 사비성()을 함락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661년(문무왕 1) 7월 나당 연합군과 함께 고구려를 정벌하러 가는 도중인 9월 옹산성(:대전시 )에 있는 백제의 잔적()을 토벌하고, 12월 당나라군의 군량미를 실어다 주었으나 당나라군의 철수로 고구려 정벌은 실패로 돌아갔다. 663년 8월 백제의 부흥군()을 두솔성(:)에서 대파하였고, 665년 당나라 고종으로부터 봉상정경평양군개국공()에 봉해졌다.

667년(문무왕 7) 왕을 따라 당나라군과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나 실패하고 11월 환군하였다. 이듬해 9월 나당 연합군으로 평양을 칠 때 연합군 대총관이 되었으나 왕명으로 금성에 남아 국방을 도맡았다. 고구려 정벌 직후 태대각간(:)의 최고직위에 오른 후 당나라 군사를 축출하는 데 힘써 한강 이북의 고구려 땅을 수복함으로써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져 놓았다. 673년(문무왕 13) 7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금산원(:경주시)에 장사지냈고, 835년(흥덕왕 10) 흥무대왕()에 추존되고 경주 서악서원(西)에 제향되었다.

<!-- //본문 -->왕건:

본관 개성(). 자 약천(). 성 왕(). 휘 건(). 시호 신성(). 금성태수() 융()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위숙왕후(:) 한씨()이다.

895년(진성여왕 9) 아버지를 따라 궁예()의 휘하에 들어가 898년(효공왕 2) 정기대감()이 되고, 900년 광주()·충주() 등을 공취, 그 공으로 아찬()의 위계를 받았다. 903년에는 수군을 이끌고 전라도 지방을 공략, 궁예의 영토를 확장하여 알찬()에 승진되고 계속하여 전라도·경상도 지방에서 견훤()의 군사를 격파하는 한편 정벌한 지방의 구휼()에도 힘써 백성의 신망을 얻었으며, 913년 시중()이 되었다.

918년 세력이 강대해짐에 따라 난폭한 행동을 자행하는 궁예가 민심을 잃자 홍유(배현경() 등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라 정하였다. 이듬해 수도를 송악()으로 옮기고 융화정책·북진정책·숭불정책을 건국이념으로 삼아 정책을 펴나갔다. 즉, 지방 호족들을 회유·무마하는 한편, 서경(西)을 개척하고 여진을 공략했으며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아 각처에 절을 세웠다.

935년 투항해 온 신라 경순왕을 맞아 평화적으로 합병하고 이듬해에는 앞서 항복해 온 견훤과 함께 신검()의 후백제를 공격, 이를 멸망시켜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이 해 《정계()》 《계백료서()》를 저술하여 정치의 귀감으로 삼게 하고 943년 후세의 왕들이 치국의 귀감으로 삼도록 〈훈요십조()〉를 유훈으로 남겼다. 서예에 뛰어났으며, 능은 현릉(:개성)이다.

 

 

견훤:

황간견씨()의 시조. 본성은 이(). 아자개()의 아들이다. 상주() 가은현(: )에서 태어났다. 신라에 태어나 서남해(西) 지방 방위에 공을 세워 비장()이 되었는데,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서 892년(진성여왕 6) 반기를 들고 일어나 여러 성을 공략하고, 무진주(: 광주)를 점령하여 독자적인 기반을 닦았다.

900년(효공왕 4) 완산주(: )에 입성하여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나라이름을 후백제라 하였다. 관제를 정비하는 한편, 중국에도 사신을 보내어 국교를 맺으면서, 궁예()의 후고구려()와 자주 충돌하며 세력 확장에 힘썼다. 그 뒤 왕건()이 세운 고려와도 수시로 혈전을 벌여 군사적 우위()를 유지했다.

926년 신라의 수도인 금성(: 경주)을 함락하여 친려()정책을 쓰던 경애왕()을 살해한 후, 김부()를 왕(경순왕)으로 세워놓고 철수하여 신라인의 원한을 샀다. 929년 고창(: 안동)에서 왕건의 군사에게 크게 패한 후부터 차츰 형세가 기울어 유능한 신하들이 계속 왕건에게 투항하고, 934년 웅진(: 공주) 이북의 30여 성이 고려에 귀속했다.

이듬해 왕위계승문제로 맏아들 신검()이 금산사()에 유폐했으나 탈출하여, 고려 왕건에게 투항하여 상부() 칭호와 양주()를 식읍()으로 받았다. 936년 왕건에게 신검의 토벌을 요청하여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고려의 왕건이 신검 등을 우대하는 것을 보고 분을 못이겨 앓다가 얼마 뒤 황산(: 충남 논산시 연산면) 불사()에서 등창이 나서 죽었다.

 

 

 

서희:

본관 이천(). 자 염윤(). 시호 장위(). 960년(광종 11) 문과에 급제, 광평원외랑()에 이어 내의시랑()이 되었다. 982년 송나라에 가서 중단되었던 국교를 트고 검교병부상서()가 되어 귀국했다.

993년(성종 12) 거란()의 내침 때 중군사(使)로 북계()에 출전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조정에서는 항복하자는 안()과 서경(西) 이북을 할양하고 강화하자는 안 중에서 후자를 택하기로 했으나 이에 극력 반대, 자진해서 국서를 가지고 가 적장 소손녕()과 담판을 벌였다.

이때 옛 고구려 땅은 거란 소유라는 적장의 주장에 반박, 국명으로 보아도 고려는 고구려의 후신임을 설득, 거란군을 철수시켰다. 994년 평장사()로 청천강 이북의 여진족()을 축출, 장흥진() ·곽주() 등을 축성, 압록강 진취의 전략기지로 삼았다. 또 압록강 문제를 전담할 압강도구당사(使)를 두게 했으며, 이듬해 안의진(: ) 등지에 축성하고 선주(: ) 등지에 성보()를 쌓아 지금의 평북 일대의 국토를 완전히 회복했다.

태보내사령()을 지내고 신병으로 개국사()에서 죽었다. 성종 묘정()에 배향, 덕종 때 태사()가 추증()되었다.

 

강감찬:

본관 금주(:서울 관악구 봉천동), 초명 은천(). 983년(성종 2)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예부시랑이 되었다. 1010년(현종 1)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으로 침입하자, 조신()들은 항복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이를 반대하고 하공진()으로 하여금 적을 설득하여 물러가게 하였다. 그 뒤 한림학사·승지·중추원사(使)·이부상서·서경유수·내사시랑평장사를 역임하였다.

1018년 거란의 소배압()이 10만 대군으로 침입해 오자 이듬해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상원수()가 되어 군사 20만 8000명을 이끌고 흥화진()에서 적을 무찔렀다. 그 위에 쫓겨가는 적을 귀주에서 크게 격파하고 개선할 때 영파역()에서 왕의 영접을 받았으며, 검교태위()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 식읍 3백호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의 호를 받았다.

그 이듬해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가 1030년 왕에게 청하여 성을 쌓고 문하시중이 되었으며, 이듬해 특진검교태사시중 천수국 개국후()에 봉해졌다. 현종 묘정()에 배향, 수태사중서령에 추증되었다. 저서에 《낙도교거집()》 《구선집()》 등이 있다.

 

 

김종서:

본관 순천(). 자 국경(). 호 절재(). 시호 충익(). 1405년(태종 5) 문과에 급제, 1419년(세종 1) 사간원우정언()으로 등용되고, 이어서 지평() ·집의() ·우부대언()을 지냈다. 1433년 함길도도관찰사(使)가 되어 야인()들의 침입을 격퇴하고 6진()을 설치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1435년 함길도병마도절제사(使)를 겸직하면서 야인들의 정세를 탐지 ·보고하고, 그 대비책을 건의하였다.

1440년 형조판서로 승진하고, 예조판서 ·우참찬()을 역임하다가, 1449년 권제(踶) 등이 고친 《고려사()》가 잘못되었다 하여 왕명으로 개찬()하게 되자 춘추관지사()로 총책임을 맡아 1451년 간행하였다. 평안도도절제사(使)를 거쳐 1450년 좌찬성()으로 평안도도체찰사(使)를 겸하였다. 다음해 우의정에 오르고, 1452년 《세종실록》의 총재관()이 되었으며, 《고려사절요()》의 편찬을 감수하여 간행하였다.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죽자 영의정 황보 인(), 우의정 정분(苯)과 함께 좌의정으로, 유명()을 받아 12세의 단종()을 보필하였다. 대호()라는 별호까지 붙은 지용()을 겸비한 명신()이었으나, 왕위를 노리던 수양대군(:후의 )에 의하여 1453년(단종 1) 두 아들과 함께 집에서 격살()되고 대역모반죄()라는 누명까지 쓰고 효시()됨으로써 계유정난()의 첫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1746년(영조 22) 복관()되었으며, 시조 2수가 전해지고 있다. 저서에 《제승방략()》이 있다.

 

 

남이:

본관 의령(). 시호 충무(). 태종의 외손()이다. 1457년(세조3) 약관의 나이로 무과()에 장원, 세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1467년(세조13) 이시애()가 북관()에서 난을 일으키자 우대장()으로 이를 토벌, 적개공신() 1등에 오르고, 의산군()에 봉해졌으며 이어서 서북변(西)의 건주위()를 정벌하고 28세의 나이로 병조판서에 올랐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한 후 대궐에서 숙직하던 중 혜성()이 나타난 것을 보고, 묵은 것이 없어지고 새 것이 나타날 징조라고 말하자, 그에게 항상 질투를 느껴오던 유자광()이 엿듣고 역모를 획책한다고 모함하였다. 또한 남이가 여진토벌() 때 읊은 시 ‘, 滿, , ’ 속의 ‘미평국()’이란 글귀를 ‘미득국()’이라 하였다고 조작한 사실은 유명하다. 즉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을 ‘나라를 얻지 못하면’으로 왜곡하여, 반역의 뜻이 있다고 모함받아 영의정 강순() 등과 함께 주살()되었다. 1818년(순조18) 관작()이 복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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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단군왕검(고조선을 세우신 분)

 

삼국시대: 을지문덕 (살수대첩으로 적군을 격파) ,   김유신(삼국통일의 주역)

 

후삼국시대: 궁예(후고구려의 왕) 견훤(후백제의 왕)        참고로 후고구려,후백제,신라

 

이렇게 후삼국시대입니다

 

고려: 태조왕건(고려를 세웠지요), 그밖에도 서희(거란에게 강동6주를 받음)

   

강감찬(거란족이 쳐들어오는데 3차 거란침입때 귀주대첩으로 격파하지요)

  

조선: 세종대왕(한글창제,북방개척 등등 많은 공헌)

         빠질수 없는게 바로  임진왜란때 큰 활약을 하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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