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당시에 우리 나라 군사력은 세계에서 손가락안에 들 정도의 강대국의
집합체 였습니다.
당시 세계 최강국은 병력으로 보나 무기, 전술, 전법면에서 중국을 따를 국가가 없었습니다(서양에선 로마가 최강이었다고는 하지만 로마의 군대가 만약 중국이나 우리 나라 군을 맞이했다면 무적 신화는 여지 없이 무너졌을 것입니다. 그들이 페르시아와 전투에서 기마궁사들에게 여지없이 패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강력한 원거리 요격무기를 보유한 중국이나 우리 나라에게 이길 재간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당시 최강이라는 중국을 상대로 대등할 정도의 국력을 자랑했던 고구려나 백제는
물론 이거니와 삼국중 약체로 불리는 신라 조차도 무기면에서는 중국과 비견될 정도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만 통일 신라 시대에 들어서면서 부터 동북아 자체의 평화시기가 오래되다 보니
국가 안보에 대해서 헤이해지게 됩니다. 군대는 와해되어지고 각 지방에선 지방의 군벌들이 일어나고 도적에 해적이 난무하게 됩니다.
후삼국시기 역시 이들 군벌이나 도적의 무리가 하나로 통합되거나 정벌되면서 이루어진 국가라 할 수 있습니다
무기나 전술, 전법면에선 삼국시대에 비해서 크게 발전하진 못했지만 고구려로 부터 이어지던 강력한 기마군단의 중요도가 점차적으로 감소하게 되었고 보다 보병 중심의 전쟁양상을 띄게 되던 시기입니다.
고려시대 초기에는 아직 통일전쟁중이었기에 군에 대한 관심과 군력 양성이 주였기 때문에 강건한 국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초창기에는 동북아 최강국을 자랑하던 금(여진)과의 분쟁으로 인하여 검차 등 대기마병 전술의 무기가 많이 발전하였고 여전히 강력한 활인 각궁을 바탕으로 세계에서 알아주는 국력이었습니다.
(이 당시에 중국은 송대를 맞이 하여 사실상 군사력만 따진다면 고려보다 못한 정도의 국력이라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금국이 강력한 기마궁사를 바탕으로 동북아 뿐만아니라 비단길 전체에서 강대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고려 역시 오랜 평화시기를 접하게 됨에 따라 국가 안보에 위기가 닥치게 되고 무신난
이후는 극에 달할정도로 위기에 처합니다
(변방에 적이 침입하여도 대군이 아닌데 보고하였다 하여 변방의 장수를 처벌한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로 국방에 대한 태도가 타락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몽고와 항쟁을 하게 되고 고려가 몽고의 부마국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하지만 몽고와의 항쟁으로 인하여 그간 발전이 더디었던 무기가 다시금 발전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 화약을 이용한 신무기가 발전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끝으로 조선시대는 흔히 생각하는 문약의 국가가 아니라
신무기를 바탕으로 한 최소의 군대를 유지한 국가로 변모하게 됩니다.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는 끊임없는 외세에 대한 방비가 우선시 되었기 때문에 병력의 증강이 주된 군사력 신장이었지만 조선에 들어오면서 동북아의 정세는 지극히 안정적 사태를 맞이 하게 됩니다. 따라서 병력의 증강이 아닌 신무기 개발을 통한 군사력 증강이 주 목표가 되었던 것입니다.
고려말 최무선 이후로 부터 시작한 화포의 끊임없는 개발을 통해 조선은 뛰어난 화포와 함께 최초의 폭발식 함포를 사용할 정도였고 신기전 등 수십발의 화살을 동시에 발사가능한 무기를 개발하는 등 강력한 무기를 가진 국가였습니다
(단지 이러한 전투 무기를 왜란이나 호란 당시 이외에는 사용할 수 없었기에 조선이 약해 보이는 것이지 당시 서양과 견준다면 서양 강대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군사 강국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왜란 역시 오랜 평화로 인한 국가 안보 태세가 약화되었기 때문에 급작스럽게 당한 것이지 결코 조선이 약해서 당한 것이 아니고 호란은 왜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에서 인조반정 이후 조선이 제대로 자리잡히기 전에 당한 것인데다 인조의 강력한 항쟁 정신이 부족했기 때문에 항복했던 것입니다)
왜란, 호란 이후 조선의 사회의 기반은 약해졌을 뿐만 아니라 급격하게 변화하게 되어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시기가 오래 지속 되는 동안 점차 군사적 방면은 뒤전이 되었고 서구 열강과의 접촉이 어긋남에 따라 일제에게 무릎 꿇는 안타까운 사태가 일어났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