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우천황 및 배달국이 우리나라민족??(내공)

치우천황 및 배달국이 우리나라민족??(내공)

작성일 2006.05.14댓글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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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버디버디 대화명에 한글을 단군이 만들었다  라고 이렇게 올렸는데 거기에 대해서

 

어떤얘가 어째서 그러냐고 반론은 제기했어요.. 그래서 여러가지 근거를 설명해서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것은 아니다란 결론을 이해시켰지만 걔가 이번에는 치우천황과

 

배달국이 중국민족이라는 주장을 펼치면서 삼묘족과 구려족이 모두 우리나라 민족이 아

 

니었다고 주장하는데 제가 도무지 반박할수가 없더라구요.

 

아무튼 제가 물어보고 싶은것은 치우천황이 우리나라 사람이라는 근거 여러가지와  배달

 

국이 우리나라 영토라는 근거를 좀 정확한 근거를 대서 써주셨으면 합니다.

 

빨리 써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좋은 일 하시는데 어려움이 많으십니다.

 

부족하지만 일단 자료 몇가지 올리겠습니다.

 

보시고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를 모르면 전 인류 시원의 역사를 결단코 알 수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 민족의 역사는 세계 인류의 뿌리역사이고, 뿌리는 언제나 잊혀지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또한 천운(天運)이었고, 앞으로 오는 신시대또한 천운입니다.

 

 

힘내십시오.

 

 

中, 역사왜곡 넘어 ‘文明 훔치기’ 시도

으랏차차 치우천왕 / 국회의원 정 문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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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악마, 그리고 치우천황

어제(8월 7일-일요일) 한일전, 붉은 악마의 열띤 응원이 있었지만 일본에 1:0으로 지고 말았습니다.
경기 결과는 안타깝지만, 붉은 악마의 응원은 열정, 희망 그 자체였습니다.

3년 전,
한일월드컵의 해에 붉은 악마만큼 우리들에게 벅찬 감동을 안겨준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새로운 스포츠문화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뜨거운 열정, 그리고 무엇보다 민족의 얼과 뿌리를 되찾는 희망을 안겨주었습니다.

우리는
펄럭이는 붉은 악마의 깃발에 그려진 치우천황(蚩尤天皇)을 통해
우리 민족의 뿌리와 기원을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흔히 치우천황은
올림푸스의 아테나 여신처럼 용맹하고
병기를 잘 다루었던 군신(軍神) 또는 전쟁의 神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재야사학자들이나 붉은 악마는 치우천황이 ‘배달국의 14대 천황으로
『한단고기(桓檀古記)』에 따르면 기원전 2707년에 즉위,
109년간 나라를 통치했으며 자오지환웅(慈烏支桓雄)이라고도 불리며, 한민족의 선조’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 내부에서도 정리되지 못한 上古史


그런데,
문제는 ‘단순히 신화와 전설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과연 치우천황이 역사상 실존했던 인물인지, 과연 한민족의 조상인지’에 있습니다.

이 문제를 두고
우리 역사학계와 재야사학계는 서로 다른 시각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치우천황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는『한단고기』에 대한
위서(僞書) 논쟁은 양측의 대립된 시각의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양측의 논박에 대한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상고사에 대한 연구와 정리입니다.
우리 상고사 연구를 통해 민족의 뿌리를 되찾고,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은
세대가 바뀌고 세상이 바뀌어도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정부ㆍ여당이 적극 나서야 할 것은 현대 과거사보다 민족 상고사에 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상고사에 대한 정립 없이는 첫째로 대외적으로 한민족의 기원을 내세울 수도 없으며,
우리 조상들의 역사와 신화까지도 영원히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는
대내적으로는 뿌리에 대한 혼돈이 지속될 것이고,
앞으로 다음 세대에 대한 교육에 있어서도 명확한 잣대를 제시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국사에 편입되고 있는 치우천황

지난 7월 중국 베이징에서 북서쪽으로 차량으로 세 시간여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
허베이성(河北省) 쟝쟈커우(張家口)市 줘루(탁록)현 일대를 둘러보고 왔습니다.

현재 중국은
이 일대에 남아있는 치우(蚩尤)와 황제(黃帝), 그리고 염제(炎帝)의 유적지를 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
그들만을 위한 역사를 복원하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그간 중국은
사마천의『史記』를 토대로 황제헌원(黃帝軒轅)을 자신들의 시조로 삼고,
또 황제의 자손으로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20여년 전부터 염제 신농(炎帝 神農)을 자신들의 선조로 삼더니
10여년 전부터는 아예 치우까지 포함시켜 “염황치자손(炎黃蚩子孫)”이라 떠들고 있습니다.

즉,
황제(黃帝), 염제(炎帝), 그리고 치우(蚩尤)가 중화민족의 공동시조라는 것입니다.

그에 따라
황제와 치우천황이 결전을 벌였던 탁록에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까지 만들어 두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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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화삼조당 정문: 내부에는 황제, 염제, 치우상을 모셔놓고 자신들의 조상으로 알리고 있습니다.


『史記』에는
치우천황과 황제헌원과의 탁록대전이 기술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각종 중국사서에는 ‘치우가 구려(九麗)의 군주이며, 구려는 곧 동이(東夷)에 속한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기』는 치우천황에 대해 난폭하기 이를 데 없다는 식의 곱지 않은 시선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날에는 황제와 신농에 치우까지 끼워넣어 그들의 할아버지라고 하고 있으니,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때는 물론 한(漢)나라 유방(劉邦)이 승리를 기원하며 치우에게 제사를 올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남의 집에서 우리 조상 제사도 지내주고 사당처럼 지어놓고 모시고 있는 것을
우리는 강건너 불구경하듯 팔짱끼고 구경만 하는 것은 자식된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독도를 일본에 내줄 수 없듯이 치우천황을 중국에 내줘서는 안 될 것

중국이 동북공정이라 해서
고구려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하려 하고 있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역사와 신화 속의 조상까지 자신들의 조상으로 끌어 당기고 있다는 사실은
아직 잘 모르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중국이
최근 역사문제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공을 들이고 신경을 쓰는 이유 중의 하나는
소수민족에 의한 독립을 미연에 방지함으로써
분열없는 ‘하나의 중국’을 유지해 나가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경제발전과 민주주의의 확대,
그리고 민족주의의 확산이 심화될 경우,
중국으로서는 민족분열의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릴 위험을 안고 있기도 합니다.

따라서
가능한 중화민족을 하나로 결집시키고,
또 이를 위해 매개체를 바로 역사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중국에서는
이러한 커다란 맥락 하에서 중국의 신화와 역사가 모두 새롭게 단장되고 있습니다.

즉,
중국은 신화와 역사를 중화인의 자존심과 정체성을 유지관리하기 위해
놀라울 정도로 공을 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 탁록현 황제성 구역의 입구. 사진처럼 ‘귀근원(歸根苑)’이라 적어놓았는데,
중국의 모든 민족의 뿌리가 하나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치우천황까지 중국에 내주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
과거 정말 힘이 없어서 땅을 빼앗긴 적도 있습니다만,
지금처럼 조상을 빼앗길 지경이니 참 요지경이기도 합니다.

선조를 잃고, 할애비를 빼앗긴다면 도대체 무슨 낯으로 후손을 대하겠습니까?


天地人의 기운을 모아야 할 때

19세기말 20세기초 우리 역사는 수탈과 이에 대한 항쟁,
그리고 고난의 역사로 점철되었습니다.
그 사이 빼앗긴 것은 나라뿐만 아니라, 역사까지도 잃었습니다.

간도협약으로 만주지역이 중국의 영토로 넘어가버린 것뿐만 아니라,
만주의 역사도 고구려의 역사도 도적질 당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2천년대에 들어와서도 유사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이야기를 남이 자기 이야기라 하고,
우리 조상을 자신의 것으로 우기고,
우리의 역사를 이미 자신의 역사로 만들어 세계에 홍보하고 있습니다.

과거와 다른 점은 총칼이 보이질 않을 뿐, 한민족의 역사는 심각한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天地의 기운에 힘을 얻고,
人의 하나된 마음으로 이러한 위기에 대응해야 할 때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과 우리 조상에 대한 모든 이야기들에 더 큰 관심을 기울어야 하겠습니다.

역사학자인 E. H. Carr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 했습니다.
그 대화를 위해서 우리 상고사에 대해서도 마음을 열어보면 어떨까요?

으랏차차 치우천왕 / 국회의원 정 문헌(2) <!-- badtag filtered -->[2]

최휘성 : 치우 천황!! 우리의 위대한 조상님 이시다!(07.13 03:05) 

 

 

 

 

 

붉은악마의 상징 치우는 우리들의 조상입니다
치우천황을 살려야 민족의 뿌리가 살아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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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 살아 숨쉬고 있는 치우천황



  
  도깨비가 아닌 실존 인물, 치우
 

  치우천황은 지금껏 동북아시아 특유의 군신신앙(軍神信仰)으로 살아남아 있으며, 치우상·도깨비상·장승·귀면와(鬼面瓦, 도깨비기와)·단오부적 등에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귀면와에 도깨비를 그려 넣을 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이 치우천황의 형상이다. 도깨비의 가장 큰 특징은 뿔인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소뿔이다. 이 뿔의 기원은 동두철액(銅頭鐵額, 구리 머리에 무쇠 이마)란 별칭이 붙은 치우천황의 투구 모양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분명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치우천황을 형상화한 것이 도깨비 문양이지 도깨비 그 자체가 치우천황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배달의 치우천황은 분명 우리 역사 속에 엄연히 살아 숨쉬고 있는 실존 인물이다.
  
  
  배달의 14대 자오지 환웅천황, 치우
 

  ‘환국(환인)-배달(환웅)-조선(단군)…’으로 내려오는 한민족사의 국통을 보면, 3301년간 일곱 분의 환인천제가 다스린 환국을 이어 배달 환웅천황이 배달국을 건국한다. 그 배달국 당시, 서기전 2707년에 즉위하여 109년간 배달국을 다스린 14대 자오지(慈烏支) 환웅천황이 곧 치우천황이다. 치우(蚩尤)란 세속의 말로 ‘우뢰와 비를 크게 지어 산천을 바꾼다’는 뜻이다,
  
  당시 염제 신농씨 나라의 8대 마지막 임금인 유망이 쇠퇴의 길을 걷자 치우천황은 웅도(雄圖)의 대망을 품고 서방으로 출정하여 모든 제후들을 정벌하고 유망의 수도를 함락시킨다. 이 때 유망의 제후로 있던 헌원이 치우천황의 입성소식을 듣고, 대신 천자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군사를 일으켜 이에 대항해 온다. 그리하여 동방 고대사에서 저 유명한 탁록 대전투(동방 최초의 국제전쟁)가 벌어져, 10여 년 간 무려 73회의 치열한 공방전이 오고간다. 치우천황은 도술로 큰 안개를 지으며 최초로 제작한 금속병기를 동원하여 마침내 대승을 거두고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는다.3)
  
  중국인들이 동방 배달민족을 동이(東夷)라고 부른 것도 치우천황이 큰 활을 만들어 쓴 이 때부터이다. 이후 치우천황은 동방 무신(武神)의 시원이 되어 수천년 동안 동방의 조선족은 물론 한나라 진나라의 백성들에게까지 위력적인 숭배와 추앙의 대상이 된다.   
  
  
  
  치우에 대한 역사왜곡, 사마천의 『사기』
 

  탁록의 대결전 중에 치우천황의 장수 치우비(蚩尤飛)가 헌원군에게 성급히 공격을 시도하다 몰살당한 사실이 있다. 이것을 두고 훗날 고조선과의 대전쟁에서 크게 패한 한무제와 그의 사관 사마천은 『사기』에서 “금살치우(擒殺蚩尤)”, 즉 ‘헌원이 치우천황을 사로잡아 살해했다’고 사실을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 놓았다.
  
  또 당시의 상황을 “치우작란”(蚩尤作亂), 즉 치우가 헌원에게 복종하지 않고 난을 일으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후의 위치에 있었던 헌원이 천자가 되겠다는 야망을 품고 군사를 일으켜 천자인 치우천황에게 도전해온 것이니, “황제작란”(黃帝作亂)이라 함이 역사의 진실인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헌원은 황제로 격상되어 지존의 존재, 하늘과 같은 존재로 떠받들어 놓고, 치우는 수신인어(獸身人語, 짐승 몸에 사람 말을 함)로 묘사되어 짐승 같은 존재, 요술부리는 아주 하찮은 존재로 격하시켜 놓았다. 근원적인 역사왜곡의 첫 페이지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신시 배달국 역대 요약표 (18대 환웅천황 알아보기) 클릭

붉은 악마 사이트 치우천황 설명 바로가기



 

 치웅천황 살리기에 나섰다고 하는 기사를 보고서 반가움을 금할수 없습니다
물론 말뿐인것을 기사화한 것일 수 있지만 이런 말조차 할 수 있는 국회의원이 드물다는 점에서는 역사의식이 있는 분이겠다는 생각은 듭니다 .
모두 우리 역사를 바로보는 안목을 가지신 분들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여의도 24시] '치우천황 살리기' 나서

 한나라당 정문헌(속초-고성-양양) 의원이 '한단고기(桓檀古記)'에서 한민족의 선조로 기술하고 있는 치우천황(蚩尤天皇) 살리기에 나섰다. 정 의원은 중국이 치우천황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등 자신들의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것과 관련해 "역사와 신화 속의 조상까지 자신들의 것으로 끌어 당기고 있다"며 중국을 맹비난했다. 정 의원은 "간도협약으로 만주지역이 중국의 영토로 넘어가버린 것뿐만 아니라, 만주의 역사도 고구려의 역사도 도적질을 당했다"며 "19세기말∼20세기초 수탈과 항쟁, 고난의 역사로 점철되고 있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펄럭이는 붉은 악마의 깃발에 그려진 치우천황을 통해 민족의 뿌리와 기원을 되돌아 봐야 한다"고 촉구했다.  서울/강승훈  강원도민일보 기사입력일 : 2005-08-12 21:49

 

 

 

 

 
 
박성수 / 민족사바로찾기연구원 원장


 
 환웅은 삼신교의로 민족을 통일하였다


 신시神市란 환웅이 세운 나라를 말한다. 일연의『삼국유사』에는 환웅을 환인의 서자라 했고 단군을 환웅의 서자라 했다. 왜 하필 환웅이나 단군이 적자가 아닌 서자란 말인가. 하필이면 서자라고 한 까닭이 있었을 것이다. 서자란 적자가 아니란 말이기도 하고 장자가 아니라 차자 이하란 뜻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삼국유사에서 서자란 말을 쓴 것은 “새로 나라를 세운 건국자”란 뜻으로 해석하고 싶다. 바꾸어 말해서 건국자란 뜻이다.
 
 만일 환웅과 단군이 적자도 장자도 아닌데 왕위에 올랐다면 그것은 아버지의 뜻을 거슬리면서 왕위에 올랐다는 것이고 왕조가 교체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태백일사』에서는 환웅이나 단군이 모두 서자라 한 것이며 그들은 스스로 왕위에 올라 정권을 잡았던 것이다. 『환단고기』에서는 환인도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이며 환웅도 하늘에서 지상에 내려왔다고 한다. 단군도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니 이 세 분은 제위를 위양(委讓) 받은 것이 아니라 왕조를 교체한 분들이었다고 해석된다.
 
 환국 말기에 호족과 웅족 사이에 갈등이 생겨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 이 혼란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무력보다도 정신의 통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환웅은 양편에 삼신숭배의 가르침을 권고하고 호족이 환웅의 권고에 응하지 않자 마침내 호족을 제거하기로 결심하였다.
 
 『삼성밀기』에 말하기를 “환국 말기에 다스리기 어려운 강한 족속이 있어 우환이 되었다. 우환은 원주민인 호족虎族과 이주민인 웅족熊族 사이의 갈등으로 비롯되었다. 환웅은 이 두 족속을 화합하기 위해 먼저 삼신교의三神敎義를 믿도록 권고하였다. 그러나 호족은 이를 듣지 않았고 웅족만 환웅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위의 글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원문을 간추린 것이다. 신시본기의 원문은 아주 복잡하여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자세히 검토해 보면 그 내용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호랑이와 곰 이야기를 다른 차원에서 다시 쓴 것이다. 가령 호족과 웅족의 성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웅족의 성품은 어리석고 괴팍하며 스스로 잘난 채 하고(우퍅자긍愚愎自肯) 서로 어울리기를 싫어한다(불긍화조不肯和調). 그에 반해 호족은 욕심이 많고 잔인하여(기탐잔인嗜貪殘忍) 약탈을 일삼았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호랑이와 곰의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여 여기서 다시 반복할 필요가 없으나 이 신화는 웅족과 호족간의 싸움을 신화적으로 묘사한 데 지나지 않다. 글귀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일이다. 환국에서는 말기에 호족과 웅족 간에 서로 잘났다고 싸웠는데 이것은 요즘에 한동안 영호남이 대립하여 정치적 갈등을 빚은 것과 같다. 남북이 갈라진 것도 억울한데 동서가 갈리어 싸운다면 언제 통일할 것인가. 자칫 잘못하다가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사국시대가 다시 올지 모를 일이다. 이럴 때 가장 긴요한 과제는 신앙의 통일이요 정신의 통일일 것이다.
 
 지난 날 냉전시대에는 민족을 분열시키는 것도 종교요 통일시키는 것도 종교였다. 우리는 최근 반세기 동안 남북으로 갈리어 북은 사회주의, 남은 자유주의로 갈리어 싸웠는데, 사회주의와 자유주의는 무엇인가. 정치학자들은 그것을 세속종교라 말하고 있다. 한 민족인데 서로 정치이념이 다르고 신앙이 다르니 통일은 멀고 먼 곳으로 떠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 환웅의 말씀을 익히 들어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 홍익인간하자. 홍익인간하기 위해서 개천시교開天施敎하여 우리 모두 천신제天神祭을 지내자. 그리하여 환인의 재세이화在世理化를 믿어야 한다.
 
 
 평화시대는 가고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해서 오랜 환인의 시대, 즉 환국시대는 가고 새로운 환웅의 시대 즉 신시시대가 도래하였다. 아래의 표에서 볼 수 있듯이 환인의 나라 환국은 7대로 끝났고 신시는 18대까지 지속되었다. 그 뒤의 단군조선은 47대까지 계속되었으니 날로 왕조의 수명은 길어졌다. 한 왕조가 오래 계속되었다고 해서 나쁜 것은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오랜 정치적 안정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그 나라 백성들에게는 좋은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맥의 『태백일사』는 「환국본기」에 이어 「신시본기」를 싣고 있다. 환국시대는 평화의 시대였다. 풀라톤의 ‘이상국가’, 즉 유토피아를 연상케 하는 지상천국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해서 환국시대가 전설의 시대 신화시대라는 뜻은 아니다. 환국이란 나라가 있긴 있었으나 후대인에 의해 상당 부분 분식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제 환웅이 정권을 잡아 신시를 세우고 새 역사를 시작하였으니 이때부터 사나운 인간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흔히 단군을 신화라 곡해하고 있지만 단군 이전의 환웅의 이야기도 신화가 아니라 역사인 것이다. 『환단고기』의 특색은 단군뿐만 아니라 환웅까지도 역사적 사실로 기술하고 있다는데 있다. 이 점에 유의하면서 이 글을 읽어주기 바란다.

 

고시씨가 불을 신지씨가 글자를 발명하였다


 환국시대와 신시시대는 어떻게 다른가 하면, 첫째 환국시대는 유목시대였지만 신시시대는 농경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그래서 고시씨가 백성들에게 농경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이다. 고시씨는 농경을 전담하는 장관이었다. 유목시대에는 농경을 맡는 장관이 필요 없다. 그러나 이제 농경을 주업으로 하게 되었으니 환웅이 농경을 맡을 장관을 임명하였는데 그를 고시례라 하였다. 즉 『진역유기』(震域留記)의 「신시기」(神市記)에 의하면,
 
 환웅천황께서는 고시례高矢禮를 시켜서 백성을 먹여 살리는 사무를 맡게 하였는데 이를 주곡主穀이라 하였다. 고시례는 불을 만드는 기술을 발명하여 이를 백성들에게 가르쳤다.
 
 『진역유기』는 고려시대의 사서로서 조선후기의 역사가 북애北崖가 『규원사화』를 쓰면서 참고하였다는 책이다. 우리 나라 국어사전에 보면 고수례라는 단어가 있는데 그 뜻을 사람들이 “굿을 할 때나 들에서 음식을 먹을 때 먼저 음식을 조금 떼어 던지면서 ‘고수례!’ ‘고수례!’ 라고 하는데 그 소리”를 고수례라 한다고 해설하고 있다. 이 고수례가 바로 고시례이다.
 
 우리 국어사전은 고수례의 역사적 유래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고 있다. 모르기 때문이다. 고수례는 신시시대의 농경 담당 장관이었던 고시례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풍습으로 남아 내려 온 우리 고유의 민속인 것이다. 이렇게 귀한 풍습이 어디 있는가. 김교헌의 『신단실기』(神檀實記)에는 고시례의 역사적 유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고 있다.
 
 농가의 농사꾼이 들에서 밭을 갈다가 점심을 먹을 때면 반드시 먼저 한 숟갈을 떠내고 빌기를 “고시례” 라고 한다. 이것은 단군 때 고시라는 사람이 밭과 땅을 맡아 백성들에게 농사를 가르쳤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그 근본을 잊지 않고 밥 먹기 전에 먼저 제사지내는 것이다.
 
 김교헌은 고시씨를 단군시대의 인물이라 하였으나 『태백일사』 「신시본기」에서는 그 보다 앞의 신시시대의 인물로 보고 있다. 단군시대냐 신시시대냐 하는 점에 관한 견해 차이는 대종교大倧敎와 단단학회檀檀學會의 견해차에서 비롯된 것이다. 대종교는 단군시대를 단단학회는 환웅의 신시시대를 각각 역사의 상한선으로 잡기 때문에 생긴 의견차이인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차이로 인해서 두 단체가 갈라서게 되었다. 물론 또 다른 견해 차이도 있지만.
 
 『신시본기』에는 고시씨가 또 불을 발명한 사람으로 기록되고 있다. 불에 관한 신화는 민족에 따라 다르다. 불의 신을 화신이라 하며 화신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불을 켰다. 우리 나라에도 화신이 있어 오랫동안 부엌 신인 조왕신을 모셔왔다. 불의 사용은 이미 40만년 전부터였다고 하는데 불의 신을 믿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시대 이후였다. 그것은 불의 발명으로 사람이 생식에서 화식火食을 하게 되고 도자기를 굽는 기술 그리고 쇠를 녹이는 기술(鑄冶之術)까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의 발명을 인류 역사상 ‘제1의 산업혁명’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고시씨는 어떻게 불을 지피는 방법을 알아냈을까. 고시씨는 산에서 우연히 마른 나뭇가지와 나뭇가지가 강풍에 부디 쳐서 불이 나는 것을 보고 사람도 불을 지필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고 한다. 이것 역시 신화가 아니다. 다른 나라의 화신火神이야기는 불을 신으로부터 훔쳤다느니 여성의 음부에서 불을 꺼냈다느니 하는 완전한 신화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의 고시씨 이야기는 너무나 사실적이다.
 
 
 신지씨가 글을 발명하였다
 『신시본기』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신시시대부터 옛 글이 있었는데 신지씨가 이 글자를 발명하였다고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기까지 우리 문자가 없었던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환웅천황은 또다시 신지神誌 혁덕赫德에게 명하여 문자를 짓게 하였다. 신지씨가 어느날 사냥에 나갔다가 사슴의 발자국을 따라가다가 글자를 만들게 되었다. 이것이 태고문자太古文字의 시작이라 한다. 그런데 후대에 연대가 까마득히 흘러서 태고문자는 다 사라져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 증거는 무엇인가. 경상남도 남해와 저 백두산 북쪽의 경박호와 선춘령의 바위에 이상한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이것이 신지씨가 발명한 글자라는 것이다.
 
 일찌기 듣기로는 “남해도南海道의 낭하리郎河里 계곡 그리고 경박호鏡珀湖와 선춘령先春嶺의 저 오소리烏蘇里 암석에 언젠지 모르지만 조각한 글씨가 있음을 발견하였는데 범자梵字도 아니고 전자篆字도 아니어서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것”이라 했다. 이것이 혹시 신지씨가 만들었다는 옛 문자가 아닌지 모르겠다.
 
 
 남해도 낭하리란 지금의 경상남도 남해의 이동면을 말하는 것이며 여러 개의 바위에 그림인지 글씨인지 알 수 없는 형상이 아직도 잘 보존되어 있다. 이것을 남해각서라고 하는데, 오랫동안 그것이 진시황을 위해 불로초를 찾아다닌 서씨徐氏의 글이라 전해 왔다.
 
 그러나 위당 정인보는 남해각서를 단군 때부터 내려오는 옛 글씨로서 그 내용을 “어떤 제왕이 수레의 뒤에 사냥개를 달고 짐승과 새를 쏘면서 가는 형상인데 앞에 물이 있고 그 물 건너에 다 깃대를 꽂았으니 이것은 제왕이 사냥에 나서면서 물을 건너 깃발을 세워 국경을 긋는 공덕비임에 틀림이 없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북한산에 진흥왕순수비가 있는데 그와 같은 순수비라는 것이었다.
 
 이 글을 남긴 사람은 누구였을까. 정인보 선생은 고조선인이 상용하던 글이라고 단정하였다. 그 글자 모양이 새 발자국처럼 생겼는데 이것은 고려 성종의 조칙 가운데 나오는 ‘조적현문鳥跡玄文’이란 글이다. 조적현문이란 중국의 성어成語를 따서 표현한 것으로 보기 쉬우나 우리 나라 고대 문자가 실제로 새 발자국과 같았다고 한다. 정인보는 『신시본기』를 보지 못하고 우리의 옛 글이 새 발자국 같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선춘령은 지금의 연변조선자치구 안에 위치하고 경박호는 그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니 실제로 찾아가 보기 어렵다. 그 곳 모두가 발해 땅이었고 고려 때 윤관이 선춘령까지 쳐들어가서 우리 영토로 만들려고 한 일이 있다. 그러나 허약한 고려왕조가 여진의 요구에 못 견디어 내어주고 말았다. 국력이 약하면 영토뿐만 아니라 문자와 신앙까지도 모두 버리고 남의 나라 글자(한자)와 종교(불교)를 자기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한 때 대학 입시에 국, 영, 수가 중요하다고 했었는데 요즘에는 영, 수, 국으로 역전되었다고 한다. 우리의 국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신시본기』는 이렇게 개탄한다.
 
 이에 우리 나라가 떨치지 못하고 우리 민족이 강하지 못하여 옛 문자를 잊어버린 것이 아닌지 새삼 한탄하지 않을 수 없도다.
 
 그밖에도 환웅은 풍백, 우사, 운사 그리고 치우 등을 시켜서 사회발전에 이바지하게 하였다.
 
 환웅천황은 풍백 석제라釋提羅를 시켜 새와 짐승과 벌레와 물고기의 해를 제거하도록 하였다. 환웅천황은 또한 우사 왕금王錦을 시켜 사람의 살 곳을 만들게 하고 목축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또 운사 육악비陸若飛로 하여금 남녀의 혼례법을 정하게 하고 치우로 하여금 병마도적兵馬盜賊을 관장케 하였다.
 
 
 환웅의 신시는 선진국이었다


 위의 신시역대표에서 보았듯이 치우는 14세 자오지 환웅이었다. 치우에 관해서는 중국의 사마천 『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사마천은 공자의 『춘추』를 비롯한 여러 중국 문헌과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구전)을 듣고 치우(동이족의 시조)와 헌원(한족의 시조)의 싸움을 기록하였다고 한다. 그러니 치우환웅이 전설상의 인물이 아니라 역사적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마천은 어디까지나 중국인이어서 자기네 조상으로 추정되는 황제를 치켜올리고 치우천왕을 역사의 악역惡役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에 반해 우리측 기록인 『신시본기』에는 헌원을 악역으로 몰고 있다. 서로 보는 입장이 다르니 할 수 없는 일이다. 『신시본기』에서는 『삼한비기』(三韓秘記)를 인용하면서, 먼저 치우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번개와 비를 내리게 하여 산천을 바꾼다”는 뜻이라 한다. 치우는 마치 수퍼맨과 같은 초인이었다고 한다.
 
 또 몇 대 지나 자오지慈烏支 환웅시대가 되었다. 자오지(치우) 환웅은 그 용맹이 몹시 뛰어났고 그 머리와 이마는 구리와 쇠로 되었다. 능히 큰 안개를 일으키고 구치九治를 만들어 주석과 쇠를 캐내어 무기를 만들고 돌을 날려 목표물을 맞추는 기계(飛石迫擊之機)를 만들었다. 천하가 모두 이를 두려워하여 함께 받들어 천제天帝의 아들, 치우라 하였다. 저 치우란 말은 속어로 번개와 비가 크게 내려 산과 강을 바꾸는 것을 뜻한다.
 
 당시 동방의 신시는 쇠를 달구어 농기구를 만들고 창 칼, 그리고 갑옷을 만들 수 있는 선진국이었다. 서방의 한족漢族보다 훨씬 앞서가는 선진국이었던 것이다. 이 같은 발전에 기여한 세력은 치우씨와 고시씨와 신지씨 그리고 풍백 운사 우사였다. 그 때문에 이들 성씨의 세력이 점점 강성해지고 있었다. 치우가 등장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때부터 치우, 고시, 신지의 후손들이 지극히 왕성하게 번영하였다. 치우천왕이 등극함에 이르러 구리와 쇠를 캐서 쇠를 달구어 칼과 창 그리고 대노大弩를 만들었고 그것으로 사냥하고 정벌함으로서 멀리 떨어져 있는 외족外族들이 치우를 신으로 알고 심히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치우가 만든 대궁大弓의 위력을 풍문에 듣고 간담이 서늘한 자가 많았다.
 
 이처럼 치우의 명성이 멀리까지 알려지자 한족漢族들은 우리 민족을 동이東夷라 부르기 시작했다. 동이란 말은 본시 저들이 우리를 매우 두려워하고 부러워하였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는데 공자孔子(전 552∼전479) 이후로는 동이가 오랑캐란 멸칭으로 바뀌었다.
 
 이 때문에 저들은 우리 종족을 가리켜 ‘이夷’라고 했다. 『설문』說文에 의하면 ‘이夷란 글자는 큰 대大자와 활 궁弓자로부터 나온 글로 동쪽에 사는 사람을 뜻한다’(ㅆ大ㅆ弓爲東方人者)고 되어 있었다. 그러나 공자의 『춘추』春秋에 이르러서는 이夷 자를 가리켜 마침내 융적戎狄과 같은 뜻인 오랑캐의 호칭이 되고 말았으니 애석한 일이다.
 
 그것은 우리 나라가 선진국이었다가 뒤에 차츰 국력이 약화되어 후진국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신시와 단군조선시대 까지는 결코 후진국이 아니었는데 그 뒤 한족의 나라가 앞서나가더니 한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중국이 조선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치우환웅은 황제와 싸워 이겼고 중원을 석권하였다


 그러면 치우환웅은 어떤 인물이었으며 그의 활동 상은 어떠하였는가. 『신시본기』는 고기의 하나인 『대변경』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대변경』大辯經에 말한다.
 우리 치우천왕은 신시의 옛 힘을 받으시어 백성과 더불어 새롭게 태어나셨다. 유망楡罔의 정권이 쇠약해지니 군대를 보내어 정벌하였다. 갈로산의 쇠를 캐내어 도개刀鎧, 모극矛戟, 대궁, 호시弧矢같은 무기를 대량으로 제작하여 탁록琢鹿(지금의 북경 일대)을 함락하고 구혼九渾에 올랐다. 연전연승하는 그 위세는 질풍과 같아서 만군萬軍을 겁에 질려 굴복케 하고 위세는 천하에 떨치었다. 한 해 동안에 아홉 제후의 땅을 점령하고 양수洋水를 건너 재빨리 공상空桑에 이르렀다. 공상은 유망이 도읍했던 곳이다. 이 해에 12제후의 나라를 점령하고 죽이니 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가득 메웠다. 이에 서토西土의 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해 도망쳐 숨지 않는 자가 없었다.
 
 
 치우환웅의 진격은 중원을 석권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회수와 대산 사이의 땅까지 차지하였다.
 
 이때 유망은 소호少昊로 하여금 맞서 싸우게 하였으나 대왕(치우)은 큰 안개를 일으켜 적의 장병으로 하여금 혼미케 하여 스스로 혼란에 빠지게 하였다. 소호는 대패하여 변방으로 도망치더니 공상으로 들어가 유망과 함께 도망쳐버렸다.


 치우천왕은 즉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천하의 태평을 맹세하였다. 다시 군대를 진격시켜 탁록을 에워싸 일거에 이를 멸망시켰다. 『관자』(管子)에 말하는 바 “천하의 임금이 전장에서 한번 화를 내자 쓰러진 시체가 들판에 그득했다”는 대목이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상의 기록은 사마천 『사기』의 「오제본기」에 나오는 말들이다. 치우환웅의 활약으로 유망이 망하고 삼황三皇 시대가 마감된다. 그리고 나타나는 인물이 헌원(軒轅, 후의 황제黃帝)인데 치우와 싸운 헌원은 뒷날 황제가 되어 한족(중국인)이 그를 자기네 시조라고 숭모한다. 그에 반해 치우환웅은 우리 민족의 시조인데 우리는 치우가 우리 시조인줄 모르고 있다. 그뿐 아니라 치우마저도 현재 중국인의 시조로 이적되어 가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시조를 도둑 맡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치우는 우리의 환웅이었으므로 치우의 헌원과의 싸움은 저들 한족漢族과 우리 한족韓族의 일대 천하쟁탈전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과연 우리의 시조인 치우가 중국인의 시조인 헌원에게 졌는가. 아니면 이겼는가.
 
 사마천 『사기』에는 치우가 지고 죽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측 기록인 『신시본기』에는 우리가 이긴 것으로 되어 있다. 왜 두 나라 기록이 다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만일 헌원이 사실대로 졌다고 기록하면 영원히 중국이 동이족에게 패했다는 오명을 남기게 되기 때문에 저들이 역사를 위작한 것이다. 『신시본기』에는 싸움의 승패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때에 공손헌원公孫軒轅이란 자가 있었으니 토착 주민의 괴수였다. 처음 치우천왕이 공상空桑에 입성하여 크게 신정新政을 포고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엄하게도 크게 병마를 일으켜 공격해 왔다. 자기가 즉위하여 천자를 대신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에 치우천왕은 앞서 항복해 온 소호少昊를 시켜 탁록에서 적을 전멸시켰다. 헌원은 그래도 굴하지 않고 감히 백 번이나 도전해 오는지라. 치우천왕은 구군九軍에 명을 내려 네 갈래로 길을 나누어 출동케 하고 자신은 기병 3,000명을 이끌고 탁록의 유웅有熊에서 헌원과 싸워 적을 사방에서 압축하여 참살하니 그 숫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또 치우천왕은 큰 안개를 일으켜 지척을 분간치 못하게 만들어 싸움을 독려하니 헌원의 군대는 두려워 달아나 숨었다. 그때 상황이 “백리 안에 병사와 말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百里兵馬不相見)고 할 정도였다. 이에 치우천왕은 회대淮垈 지방을 모두 점령하고 탁록에 성을 쌓으니 헌원의 무리들은 모두 신하되기를 원하여 조공을 바쳤다.
 
 이와 같이 헌원과 치우의 싸움 즉 중국민족과 한국민족의 전쟁은 압도적으로 우리의 우세 속에 진행되었다. “백 리 안에 병사와 말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고 할 정도였다면 완전한 패배였다. 왜 그렇게 치우의 군대가 강했는가 하면 무기가 월등히 우수하였기 때문이다. 치우는 안개를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갑옷을 만들어 적의 화살을 무력화시켰다. 그래서 중국인은 치우를 사람이 아니라 “머리가 구리요 이마가 쇠로 된 도깨비”라고 생각했다.
 
 대저 서방에 살던 사람들은 함부로 활과 돌의 힘을 믿고 갑옷의 쓸모를 알지 못하였는데 치우천왕의 법력이 높고 세어 싸울 때마다 패했다. 『운급헌원기』에 보면 치우가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었는데 당시의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치우를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銅頭鐵額)라고 썼으니 그 낭패한 모습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치우환웅은 백전백승하였는데, 그가 만든 무기 가운데에는 지남차와 비석박격기가 있었다.
 
 치우천왕은 더욱 더 군용軍容을 정비하여 사면으로 진격한 바 10년 동안에 헌원과 73회나 싸웠으나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었고 군은 물러설 줄 몰랐다. 헌원은 여러 차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자 원한이 쌓여만 갔다. 헌원은 군을 일으켜 우리 신시를 본 따서 무기와 갑옷 그리고 지남차指南車를 만들어 도전하였다. 치우천왕은 크게 성을 내어 형제종당兄弟宗黨으로 하여금 전쟁 준비를 갖추어 위엄을 세웠으며 헌원의 군대가 감히 도전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렇게 시종 치우가 우세하였는데 어떻게 해서 사마천 『사기』에는 치우가 헌원에게 죽었다고 기록하였는가. 그것은 사마천이 중국인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한국인이었다면 사실을 사실대로 기술했을 것이다.
 
 
 치우환웅은 영원한 군신으로 추앙되었다.
 그러면 사실은 어떠했는가. 사실은 치우환웅 자신이 싸움터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치우비라는 한 장수가 전사한 것이다. 사마천 『사기』에는 치우비의 죽음을 치우의 죽음으로 바꿔 썼다. 그러나 『신시본기』에는 사실대로 쓰고 있다.
 
 그런데 한 바탕 큰 싸움이 벌어졌는데 우리측 장수 치우비蚩尤飛가 급히 공을 세우려 서둘다가 불행히도 전사하였다. 사마천이 『사기』에서 “치우를 잡아 죽였다”(擒殺蚩尤) 한 것은 치우비의 죽음을 두고 한 말이지 치우천왕의 죽음을 말한 것이 아니다. 이에 치우천왕은 격노하여 새로 비석박격기飛石迫擊機를 만들어 진을 치고 서로 연합하여 진격하니 적진은 감히 맞서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치우천왕은 정예부대를 둘로 나누어 한 부대는 서쪽의 땅을 지키도록 하고 다른 한 부대는 동쪽으로 진격하여 회대淮垈의 땅을 취하여 성읍으로 삼게 하였으며 헌원의 반격에 대비하였다.
 
 그러므로 치우환웅은 헌원에게 잡혀 죽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살아서 훌륭하게 신시를 지켰다. 그러기에 치우환웅의 능이 중국 산동성에 남아 있으며 치우의 이름이 치우기蚩尤旗라는 별 이름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패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양 3국의 군신軍神으로 추앙 받고 있는 것이다.
 
 치우천왕이 돌아가신 지 수천 년이 되었으나 지금까지 만장의 광열이 있어 능히 후대인으로 하여금 흥분케 하여 떨쳐 일어나게 하는 듯 하다. 『한서』漢書지리지에 의하면 치우천왕의 능은 중국 산동성 동평군 수장현 관향성 안에 있다고 하며 높이가 7척으로 진한시대의 주민들은 매년 10월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제사 때는 반드시 붉은 기운이 있어 한줄기 붉은 띠 모양의 연기가 뻗었는데 이를 치우기蚩尤旗라 하였다고 한다.
 
 치우천왕의 영명한 혼과 웅장한 육체는 보통 사람과 아주 달라 수천 년이 되도록 오히려 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에 반해 헌원은 쓸쓸히 잊혀져 갔고 유망 또한 영구히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치우천왕의 공덕은 세상에 전하여 능히 떨치고 그윽한 푸르름 속에 그 위엄이 살아 있다. 그러나 헌원의 경우는 다르다. 헌원 이후의 세상은 안정되지 못하고 헌원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편안히 베개를 베고 눕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사기』에 이르기를 “산을 뚫고 길을 내어도 한번도 편안한 적이 없었다. 탁록의 강에 도읍하고 옮겨 다니며 항상 거처를 안정시키지 못하고 장수와 사병을 시켜 지키게 하는 등 마치 전장터와 같은 곳에서 살아야만 하였다”라고 한 것은 아마도 헌원이 생존시에 전전긍긍하던 모습을 역력히 보여주는 기록이라 할 것이다.
 
 글쓴이 박성수 씨는 서울대 사대 역사학과를 거쳐 고려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서울대 성균관대 이화여대 등 각 대학에서 연구활동을 하며 후학들을 길렀으며,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실장을 역임한 후 한국정신문화원 편집부장으로서 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찬을 주도하였다. 아울러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으로서 중국 속의 독립운동사적지 및 백두산, 발해사적지 등을 탐방하였다. 현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명예교수이며 민족사바로찾기연구원 원장으로 왕성한 연구 및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치우천왕’과 “구역질나는 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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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천왕’과 “구역질나는 삼국사기”
우리는 왜 긍지를 덮고 치욕의 역사를 가르쳐왔나
권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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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우천왕의 형상으로 꾸민 2003경주세계문화엑스포의 주제전시관. (경주=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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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국사 책에서 가장 궁금했던 부분이 고조선이다.
 

국사 책에는 단군이 조선(朝鮮)을 개국한 것이 BC 2333년인데, 갑자기 BC 108년 중국 한나라에 왕검성이 함락된다는 망국 이야기로 끝맺는다. 반만년 역사 중 고조선 이후 오늘날까지의 역사(2113년)보다 그 이전 고조선(2225년)의 역사가 더 길다. 그런데 고조선과 관련해 내가 학교에서 배운 것은 단군신화, 홍익인간·재세이화(在世理化), 3개 밖에 전하지 않는다는 8조법금, 그리고 멸망. 그게 끝이다. 그나마 고등학교 국어 고문 시간에 배운 백수광부(白首狂夫·흰머리 미치광이)의 처가 지었다는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2천년 뒤, 가수 이상은의 노래로 되살아나기도 했다)가 고조선 시대에 지어졌다는 게 내가 학교에서 배운 고조선에 대한 전부다.

의심했다. 우리나라 역사가 반만년이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론 2천년 남짓이 고작 아닌가 하고.

그러다 1985년 소설 (丹)을 접했다. 은 그해 베스트셀러 1위였다. 은 삼국시대 이전에 환인-환웅-단군 시대가 각각 존재해 우리나라의 역사가 5천년이 아닌 9천년이며, 단군은 고유명사가 아닌, 임금을 뜻하는 보통명사로 고조선 시대 47대에 걸친 단군(임금)이 있었다고 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대 우리 역사의 강역이 이 좁아터진 한반도가 아니라, 저 북방 바이칼 호수에서 저 남방 파미르 고원에 이르기까지 중국 대륙을 거의 장악했다는 것 아닌가? 긴가민가 했지만, 일단 뻐근한 감격이 올라왔다. 말 그대로 웅혼한 기상이 마음 속에 일었다.

처음 을 읽을 때, 다분히 창작인 줄 알았던 그 내용이 실은 (桓檀古記·‘한단고기’라는 주장도 있다)를 중심으로 한 내용이었다는 것을 안 건 나중이었다.

1. 우리 역사는 9천년인가, 7천년인가, 5천년인가, 2천년인가?

<!--ⓘ AD kisa banner include 시작--><!--ⓘ AD kisa banner include 시작-->
<!--ⓘ AD kisa banner include 끝--><!--ⓘ AD kisa banner include 끝-->는 옛부터 전해내려오는 동이족의 비사(秘史)인 , , , 등 4권의 책을 묶은 것이다. (三聖記)는 신라 승려 안함로가 쓴 책으로, 고조선 이전 환인-환웅 시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는 고려시대 문정공이 쓴 책으로, 1세 단군 왕검부터 47세 단군 고열가까지 고조선 2096년 왕조사를 담고 있다. 그리고 는 고려말 학자 범장이 전한 책으로, 동명성왕의 아버지이자, 부여의 시조인 해모수로부터 부여 멸망까지의 부여 300년사다. 는 조선 연산군때 학자 이맥이 전한 책으로, 환국-신시(神市·환웅시대)-고조선에서 마한, 변한, 고구려, 고려때까지의 역사를 드문드문 전하고 있다.

이 를 보면, 우리 역사는 BC 7199년에 시베리아 바이칼호수 근처에 세워진 환국(桓國)이 7세, 3301년 동안 지속되고, 이어 환웅이 BC 3898년 산동반도 근처에 배달(倍達)국을 세우고, 신시(神市)에 도읍을 정했다. 배달국은 18세, 1565년동안 이어진다. 그리고 BC 2333년 단군 왕검이 조선을 세워 47세 단군 고열가까지 전한다. 그러나 이 책에는 BC 131년이 끝이다. 그다음 부여와 고구려로 이어지는 것으로 전개된다. 굳이 언급하자면, BC 108년까지의 빈 공간인 위만조선(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할 무렵, 연나라가 망하자 연나라 망명객인 위만이 진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조선 서쪽 지방에 살다 쿠데타를 일으켜 조선의 왕이 되었다고, 중국 역사서인 (前漢書)에 쓰여져 있음. 그리고 위만조선은 4대까지 왕위가 이어졌으나, 한반도에 위치한 진(辰·삼한의 전신)나라의 중국 소통을 막다가 한나라와 전쟁이 일어나 BC 108년 망하고, 한나라는 이곳에 한4군을 설치했다고 전함. 우리 역사는 중국 역사서인 를 따르고 있는 것임)이 빠져 있다.

태초에 가까운 환인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역사는 오늘날까지 무려 9204년이 되는 것이고, 배달국부터 따지면 5903년이며, 단군부터 따지면 올해가 단기 4338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사(正史)로 인정받는 에는 신라(BC 58년), 고구려(BC 37년), 백제(BC 18년) 이전의 이야기가 없어 에 따르면, 우리 역사는 2천년을 겨우 넘으며, 가 스치듯 언급한 기자조선(BC 1122년)을 더해도 우리 역사는 3127년에 그친다.

 

 

2. 환국(桓國)(BC 7199~BC 3898)

“오래전 한 신이 하늘에서 내려와 사백력(斯白力:시베리아)의 하늘에서 홀로 변화한 신이 되시니, 밝은 빛은 온 우주를 비추고 큰 교화는 만물을 낳았다. 어느 날인가 동남동녀 800이 흑수(黑水:흑룡강) 백산(白山:백두산)의 땅에 내려왔는데 환인(桓因)은 또한 감군(監郡:중생을 돌보는 직책)으로서 천계(天界)에 계시면서 돌을 쳐 불을 일으켜서 날음식을 익혀 먹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치셨다. 이를 환국(桓國)이라 하고 그를 가리켜 천제환님(天帝桓因)이라고 불렀다. 환님은 일곱 대를 전했는데 그 연대는 알 수가 없다.”

“파나류산(중국 하얼빈 남쪽 완달산/소설 은 이를 파미르 고원으로 봤다) 밑에 환님의 나라가 있으니 천해(바이칼호) 동쪽 땅이다. 그 땅이 넓어 남북 5만리요, 동서가 2만여리니 통틀어 환국이요. 7세, 3301년 동안 지속됐다” 환산하면 강역이 대략 북으로는 바이칼 호수, 남으로는 양쯔강 북쪽, 동으로는 만주와 백두산 지역, 서로는 몽고가 다 속한다.

황제의 나라인 환국은 그 아래로 비리, 양운, 구막한, 구다천(캄차카), 일군, 우루, 객현한, 구모액, 매구여, 사납아, 선비(퉁구스), 수밀이 등 12개의 나라를 둔 일종의 연방체(?)였다. 일본 학자인 가지마 노모루는 수밀이국과 중동 지방에서 최초의 도시문명을 이룩한 수메르 문화와의 연관 가능성을 언급한 바 있다.

3. 배달국(BC 3898~BC 2333)

환국 말기에 환인이 서자 환웅을 삼위와 태백에 보내, 홍익인간의 뜻을 펴도록 한다. 이에 환웅이 3천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중국 감숙성이라고도 하고, 백두산이라고도 한다) 꼭대기에 신시를 세우니, 그가 곧 배달국 제 1대 환웅천왕이다. 이때 배달국 인근에는 곰을 숭상하는 족속과 호랑이를 숭상하는 족속이 살며 서로 다투었는데, 웅씨족의 여추장이 일종의 정략결혼으로 환웅과 혼인했는데, 이것이 후세에 단군신화로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한단고기에는 이 장면을 “환웅이 웅(熊)씨 여인을 거두어 아내로 삼으시고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고 시장을 열어 교환하도록 했다”고만 전하고 있다. 배달국은 18세 거불단 환웅까지 이어진다.

4. 조선(BC 2333~BC 108?)

는 중국 역사서인 (魏書)를 참조했다며, “단군 왕검이 중국의 요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고 일컬었다. 그리고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 주나라 무왕(武王)이 기묘(BC 1122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이 되었으니, 수(壽)가 1908세였다 한다”고 전해 단 1명의 신화 속 단군만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를 보면, 47명의 단군(고조선 임금)이 나온다. 또 이때 문명이 크게 발달해 쌀 되와 저울을 통일하는 도량형 통일이 진시황보다 1900년 전인 2대 단군 부루(BC 2238년) 때 이뤄졌고, 세종대왕의 훈민정음과 거의 똑같은 글자인 정음 38자 ‘가림다’도 3대 단군 가륵 때 만들어진다.(BC 2181년,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들 때도 완전창작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전해내려오는 글을 재구성해 만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글자가 만들어진 뒤, 이전까지 구술로 전해오던 옛일을 글로 적어 첫 역사서인 (BC 2180년)가 지어진다.(고구려 영양왕 때(AD 600년) 때 이문진이 를 요약해 5권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때의 가 바로 이 책은 혹시 아닐까? 지금은 도 도 전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밖에 인삼, 돈, 배 등이 4대 단군 오사구 때 발견되거나 만들어진다.

그리고 또하나 주목할 것은 BC 1987년 8대 단군 우서한 때 대궐로 날아왔다는 ‘세 발 달린 까마귀’다. 그 까마귀는 넓이가 석자나 되었다고 한다. 이 삼족오(三足烏)는 나중에 고구려 벽화에도 나타나는데, 우리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에서 이 ‘삼족오’는 일본의 신화 속 동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일본 국가대표 축구팀 서포터즈인 울트라니폰의 상징물이 바로 이 ‘삼족오’이다. 우리가 우리 옛 역사(또는 신화)에 무관심한 사이, 우리 것들을 다른 나라에 다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5. 치우천왕(蚩尤天王, BC 2748~BC 2598)

환단고기에서 특히 주목한 임금(황제)이 바로 배달국의 14대 환웅인 ‘자오지환웅’(치우천왕)이다.

치우천왕은 외에도 , 등 우리 역사서에 언급돼 있을 뿐 아니라, 중국의 정사인 사마천의 와 , , 등에도 실려 있다.

를 보면, 치우천왕은 BC 2706년(42살) 환웅의 자리에 올라 BC 2598년(151살)까지 재위 109년 동안 동아시아 일대를 호령했다.

그는 10년 동안 중국의 황제 헌원(BC 2692~BC 2592)과 73번 싸워 모두 이겼다. 헌원은 중국 하나라 이전 삼황오제의 삼황(三皇) 중 태호복희에 이은 2번째 황제다.(삼황 다음은 오제(五帝, 요순 임금 등)가 이어지고, 이어 우(禹) 임금이 세운 하(夏)나라, 그리고 은(殷)나라, 주(周)나라, 진(秦)나라, 한(漢)나라로 이어진다. 현재 은나라부터 역사시대로 인정하고, 그 이전은 아직 역사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은나라도 은허 유적이 쏟아지기 전까지는 역사로 인정받지 못했다. 얼마전 중국에서 하나라 시대 것으로 보이는 유적이 발굴됐다는 보도가 있었다)

치우천왕은 수레와 투석기(돌을 날려 보내는 기계)를 만들어 전쟁에 사용하기도 했다. 우리 역사서는 치우천왕이 탁록(오늘날 하북성) 벌판에서 헌원을 끝내 사로잡아 신하로 삼았다고 전한다.

그러나 중국 역사서인 사마천의 는 이와 다르다.

“제후가 모두 다 와서 (치우에게) 복종하여 따랐기 때문에 치우가 극히 횡포하였으나 천하에 능히 이를 벌할 자 없을때 헌원이 섭정했다.”

에 따르자면, 치우는 중국 산동성(산둥반도 지역) 일대에 거주하던 구려(九黎·동이족의 나라)라는 신족(神族)의 우두머리였다. 그는 중국 조상인 신농이 다스리던 영역 안에서 가장 강력한 족장이었다. 치우는 세력이 점점 커지면서 신농의 후계자인 유망(楡罔)을 무찌른다. 그러자 유망이 황제 헌원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중원을 놓고 헌원과 치우가 대결전을 벌인다. 고대의 세계대전인 셈이다. 그리고 치우는 전군을 동원해 헌원과 10번을 싸워 9번을 모두 이긴다. 여기까지는 우리 역사서와 같다. 헌원은 폭풍우 속에서 치우에게 쫓기다 딸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구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후 세력을 회복해 용맹하던 치우의 형제(아마도 신하 장군으로 추정) 81명이 하나씩 하나씩 스러지고, 마지막 탁록 대전에서 치우는 종국에는 혼자 남아 싸우다 헌원의 병사에게 사로잡힌다. 그리고 황제가 지켜보는 가운데 목이 잘려 처형된다. 이후 동이족은 중원에서 밀려나 중국 동쪽 변방(만주)으로 옮겨갔다.

중국 역사서를 따르더라도, 우리 민족의 무대가 만주벌판에서 한반도로 축소된 단절점이 신라의 3국통일이었다면, 우리 민족의 무대가 중국대륙에서 만주와 한반도 등 대륙 변방으로 밀려난 것이 치우천왕의 패전이니, 우리 상고사의 중요한 한 순간이다.

중국 역사에서 치우는 악마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머리가 구리와 쇠로 돼있고(아마도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로 접어들면서 치우가 휘두르는 강력한 청동 신병기에 놀란 고대 중국인들의 눈에 치우가 그렇게 비춰졌을 지도 모른다), 폭풍우를 뿌리기도 한다.

치우천왕의 능은 능은 산동성 동평군 수장현 관향성에 있었던 것으로 에 전해지는데, 춘추전국시대에는 이곳 제(濟)나라의 군신(軍神)으로 추앙됐고, 이어 진나라, 한나라 때는 주민들이 제를 지냈다. 또 봉선서에는 한나라를 세운 유방(劉邦)이 전쟁에 나가기 앞서 언제나 치우에게 제를 올린 다음에 출전했다고 한다. 특히 치우의 능에서 붉은 연기같은 것이 깃발처럼 휘날리면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조짐으로 믿었다고 한다. 치우천왕은 신화시대인 그때 뿐 아니라, 고구려 백제 신라 세나라 역대 왕릉 모두에 도깨비상의 모습으로 조각된다.

그런데 탁록의 마지막 전투 이후, 역사 속에서 사라진 비극적 인물인 치우(정사로 인정받는 를 따를 때)는 수천년이 흐른 뒤인 1999년 또다시 깨어난다. 붉은 악마의 캐릭터로.

붉은 악마는 당시 회원이던 한 축구디자이너의 권고로 1999년 치우천왕을 공식캐릭터로 정한다. 그리고 그해 3월29일 한국-브라질 전이 열린 잠실경기장에 가로 4m, 세로 3m의 대형 치우천왕 깃발이 첫 선을 보인다. 이날 한국은 한국 축구역사상 처음으로 히바우두가 뛴 세계 최강 브라질을 1 대 0으로 물리친다. 4500년 만에 깨어난 치우천왕이 ‘불패의 신화’를 또 한번 보여준 걸까?

그리고 붉은 악마는 이후, 경기에 앞서 애국가가 울릴 때는 대형 태극기를 펼치고, 한국 팀이 골을 넣으면 치우천왕기를 펼치는 것이 공식화 돼 있다. 그리고 치우천왕이 등장한 이후, 처음 맞은 월드컵에서 한국팀은 4강 신화를 창조해냈다.

그리고 또다른 치우가 있다. 만화가 이현세는 이보다 앞선 97년 고대 동아시아 전설을 집대성해 완전히 새로운 창작물로 다시 표현해낸 에서 치우와 헌원의 이야기를 새롭게 만들어냈다. 치우는 천족(天族·동이족)의 영웅으로, 그리고 헌원은 화족(華族·한족)의 영웅이다. 에서 치우는 ‘까치 오혜성’, 황제 헌원은 ‘마동탁’의 이미지다.

이 만화에서 치우는 천족의 임금인 천군의 두번째 부인 발기달의 아들로 태어난다. 왕비가 아들이 없어 자연스럽게 천족의 왕위 계승자로 부상하나, 이를 시기한 왕비가 벌인 왕실 다툼에서 어머니 발기달이 살해당하는 와중에 부하들이 그를 안고 도망치다 밀림에 홀로 버려져 산속에서 호랑이에게 키워진다. 나중에 나라의 칼을 만드는 충신 손돌이 치우를 발견해 몰래 데려다 손자로 키운다. 치우는 아무 것도 모른채 평화롭게 자라나고, 그 사이에서 동네 여자친구 미리내(은하수의 순 우리말)와 연정을 키워가기도 한다.

그러면서 천족(天族)이 그동안 제후국이었던 화족(중국 민족)의 황제 헌원의 세력이 커지면서 존폐의 위기에 처하자,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다 스러져가는 천족의 나라, 배달국을 지키는 적통 왕세자, 메시아로 부상하고, 황제 헌원과 탁록에서 치열한 다툼을 벌이며 부족을 지켜낸다. 그러나 이 와중에 미리내가 교활한 헌원에게 사로잡히고, 헌원이 미리내를 이용해 치우를 괴롭히자, 치우는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가 돼 부하들을 찔러 죽이는 등 정신착란 증세를 일으킨다. 자신의 죽음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옴을 느끼는 가운데, 치우는 결국 잠들어 있는 사이 부하들에 의해 목이 잘린다. 이현세는 치우천왕을 , 등에서 나온 ‘까치 오혜성’과 너무나 흡사한 인물로 그려냈다.(개인적으로는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은 불패의 승리자 치우천왕()보다 에 나오는, 단 한 번의 패배로 죽음에 이른 ‘비극적인 치우’가 애잔해 마음이 더 끌립니다. 또 우리 역사를 돌이켜보건대, 실제 치우는 후자 쪽이 더 맞을 것 같기도 합니다)

6. 그리스 신화는 알면서 자기네 신화는 모르는 한민족

이런 내용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주지 않는 이유는 이런 내용들이 관련 유적들이 발굴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료적 가치도 떨어지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경우는 가 엮은 책들이 신라~조선초기에 걸쳐 쓰여졌는데, 이전까지는 전혀 언급도 되지 않다가 구한말에 들어 갑자기 등장한 것으로 미뤄 혹 이것이 어떤 의도를 가진 위서(爲書)라는 주장까지 있다.

그러나 외에도 1675년에 쓰여진 (揆園史話)도 고조선 47대 1195년의 역사가 소개돼 있고, 신라의 박제상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도 환국-배달국-조선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또 우리 역사서가 아닌 , , 등에서도 비록 조각조각난 것이긴 합니다만, 배달국과 조선, 그리고 치우천왕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다.

백번을 양보해 이 모든 이야기가 모두 사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신화로는 왜 전할 수 없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초등학교 아이들이 제우스, 헤라, 아테네, 아프로디테, 아폴론, 큐피트, 헤라클레스, 아킬레스 등 그 복잡한 그리스 신화 속 인물은 줄줄 외우면서 우리 동이족의 영웅들에 대해서는 들은 바도 없다는 것은 서글픈 일 아닌가? 게다가 역사로 인정받는 은나라 이전에 대해서도 요순 시대, 삼황오제 등 그 이전시대의 일화나 용어가 우리 일상생활 속에 불쑥불쑥 등장하는데 그 옛날 중원을 호령했을 치우천왕은 어디에다 내평겨쳤단 말인가?

7. 화근은 김부식의

를 읽으면서 몇 번이나 구역질이 날뻔한 적이 있었다. 어떨 때는 머리가 어질어질하기도 했다. 우리 역사가 이토록 수치스러운 것인가 하고.

“거룩할사 당나라 큰 업을 개발하여/황가의 정치 경륜 높고도 창성하구료/싸움을 끝맺어 천하를 안정하고/전임금 잇받아 문교를 닦았도다/(…)/산악의 기운받아 재상들 태어나고/임금님은 충량한 신하만을 믿으시네/삼황으로 뭉치어 한 덕이 되니/길이길이 빛나리 우리 당나라”

650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해 승리하자(아직 백제 멸망은 아니었다), 진덕여왕이 비단에 써 당 태종에게 올린(?) 글이다.

신라는 법흥왕 때부터 중국과 다른 별도의 연호를 써왔다. 그러나 진덕여왕 때에 이르러 신라 연호를 버리고, 당나라 연호를 사용하기로 했다. 이를 두고 김부식은 에서 이렇게 말했다.

“천자의 나라에 소속된 편방 소국은 사사로 연호를 이름지어 쓸 수 없는 것이다. 신라의 경우는 일심으로 중국을 섬기어 사행과 조공이 길에 끊이지 아니하면서도 법흥왕이 연호를 자칭하였으나 의심스러운 일이다. 태종의 꾸지람을 듣고서도 오히려 머뭇거리다가 이제와서야(진덕여왕) 비로소 당의 연호를 시행하였으니 비록 마지못해 한 일이기는 하나 돌이켜 생각하면 허물을 지었지만 능히 고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태종 무열왕 김춘추에 대해 를 읽기 전까지만 해도, 그저 삼국통일의 주역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에 보면, 김춘추는 왕이 되기 전, 고구려를 공격할 원군을 요청하러 신라의 사신으로 당에 갔을 때, 당 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중국 옷을 입게 해달라”고 요청한 뒤, 중국 옷을 입고 아뢰었고, “신의 자식이 7형제가 있으니, 원컨대 성상(당 태종)의 곁을 시위케 하여 주소서”라며, 자기가 스스로 청해 아들을 중국에 사실상 볼모로 남겨두고 온다. 또다른 역사서에는 김춘추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 연개소문을 만났을 때, 연개소문이 “신라와 우리 고구려가 함께 하면 당나라가 무서울 게 무어냐?”며 “우리가 서로 싸우지 말고, 힘을 합쳐 당나라를 공격하자”고 할 때, 아무 말도 않고 이를 거절했다. 그의 머리 속에는 당나라에 빌붙어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린 뒤, 당나라에 충성을 맹세하는 ‘노예의 평화’만이 있을 뿐이었다.

또 삼국통일을 이룩했고, 동해바다의 용이 되어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며 바다에 자기를 묻게 한 문무왕. 그러나 문무왕편을 보면, 문무왕은 “교서를 내려 부인들도 중국 의상을 입게 했다”고 한다. 또 에는 갑자기 뜬금없이 “문무왕 8년, 당으로부터 이후로는 여자를 헌납하지 말라는 칙지가 있었다”고 전한다. 그 이전까지는 당에 바치는 조공에 여자까지 포함됐던 것이다.

참으로 수치스런 역사요, 너무나 낯뜨거운 신라 왕들의 행태다.

또 는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뒤, 백제 땅에서 당나라 장수들과 함께 잔치를 열면서 항복한 의자왕을 데려와 옛 백제 신하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상에서 술을 따르게 했다고 전한다. 당시 신라는 정말 최소한의 예의도 없는 나라였단 말인가?

삼국시대 이전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에 대해 김부식은 에서 또 이렇게 말한다. “해동에 나라가 있은 지는 오래다. 기자가 주실(주나라)에서 수봉(受峰)함으로부터(BC 1122년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뒤, 주나라의 신하 기자(箕子)를 조선의 왕으로 봉했다는 중국 역사서를 이야기한다) 위만이 한초에 참호할 때(연나라 망명객 위만이 조선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왕이 된 뒤, 한나라와 맞섰을 때)까지는 연대가 막연하고 문자가 소략하여 상전할 수가 없다”는 한 마디로 끝맺었다. 김부식은 그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 땅 곳곳에 흩어져 있었을 고대 역사서, 고조선의 옛 이야기들을 단칼에 다 생략해 버린 것이다.

김부식이 를 쓸 때는 신채호가 ‘일천년래 최대 사건’이라는 ‘묘청의 난’(?)을 진압한 직후다. 김부식은 유교사상을 나라의 이념으로 삼고, 중국을 숭상하는 것으로 정권의 안정을 도모코자 했다. 이때 이미 고려 초기의 자주적이고 웅혼한 기상은 사라진 때이다. 김부식은 를 쓰기 전에 다섯번이나 중국을 다니면서 중국의 역사서를 섭렵했다. 참으로 한심하지 않은가? 제 나라의 역사를 쓰면서 중국의 시각에서 그저 귀퉁이에 조금 흘려쓴 것을 무슨 신주단지 모시듯 주워담아 얼기설기 엮어 역사로 만들다니.

그러나 어쨌든 는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책이 됐고, 또 정사(正史)로 인정받고 있다.

가 엮었다고 전해지는 각종 역사서들이 구한말 이전에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위서 논란을 빚고 있으나, 일각에서는 김부식 이후 조선시대까지 중국 중심의 모화사상이 이어지는 와중에 중국과 일합을 겨룰 뿐 아니라, 중국을 제후국으로 삼아 다스렸다는 치우천왕이나 환국-배달국의 이야기를 누가 할 수 있었겠느냐고 반론한다.

숨죽여 고이고이 전해질 뿐이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우리 역사의 진실은 아마도 중국 역사와 우리 중심 역사인 , 그 중간 어디쯤일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안타까운 것은 가 중국 역사서와 내용은 물론 중국 중심의 관점조차(우리를 준오랑캐 나라로 스스로 자칭하는) 똑같다는 것이 실로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고조선을 사실상 계승한 고구려를 자기네 역사로 우기는 중국의 동북공정이 날로 더해지는 이때, 치우천왕의 신화만이라도 최소한 “우리네 역사 속에 이런 신화도 있다”라고 하는 정도로 자라나는 아이들(초등학생들이 혼동스러워한다면 최소한 중고생에게라도)에게 알려주는 것, 그것도 안되는가?

치욕의 역사서 를 읽기 전에 치우천왕을 먼저 알게 하는 것이 정신건강면에서도 좋을 것 같다.

참조:(임승국 번역·주해), (김부식), (일연), (이현세), (지승), 등.

경제부 권태호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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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치우천왕 이야기를 쓴 권태호 기자입니다.

자신이 쓴 글이나 말 뒤에 ‘내 의도는 그건 아니었다’고 하는 것은 비겁한 행동이라 생각합니다.

비겁함을 무릅쓰고 다시 글을 띄웁니다.

경제부 기자가 뜬금없이 치우천왕 이야기를 쓴 이유는 개천절을 맞아 개천절의 진짜 주인공들을 한 번 알아보자는 생각에서 쓴 것입니다.

제가 치우천왕 이야기를 쓴 목적은 (물론 아시겠지만) 치우천왕 고사를 국사교과서에 올리자거나, 정사로 인정하자는 게 아니었습니다. 다만 우리네 신화 속 인물 중에 이런 이도 있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치우천왕 이야기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대학교 때였습니다. 그때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왜 초등학교 때, 중고등학교 때, 우리 역사와 신화에 대한 밑그림이 그려지기 전에 이 이야기를 알지 못했던가 하고 말입니다. 그랬더라면 우리네 역사를 보며 늘 패배의식에 젖어있기 보다 (비록 마취제 성격이 있었을 진 몰라도) 더 큰 상상력과 창의력, 자긍심을 키울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말입니다. 제가 글을 쓴 첫번째 이유는 제 후배들이 그때 제가 느꼈던 그 안타까움을 똑같이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신화시대의 이야기인 치우천왕이 실존인물이냐 하는 문제는 논란거리가 아니라 생각됩니다. 최소한 동이족의 신화 속 영웅인 치우천왕(중국은 치우천왕을 악마로 묘사합니다)을 우리들이 좀더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 문화는 또 얼마나 더 풍부해 질 수 있겠습니까?

저는 치우천왕을 역사로 받아들이자는 게 아니라, 묻혀진 우리의 신화를 끄집어내보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물론 이에 대한 반론으로 치우천왕이 속한 민족인 구려족이 우리 민족이 아닌, 지금은 사라진 중국의 소수민족이었다고 이야기하면 원인무효가 되기도 합니다. 구려족이 동이족의 한 분파이며, 그런 사실과 상관없이 이미 치우천왕은 우리 역사와 문화 속에서 도깨비 등으로 이미 자연스럽게 자리잡고 있고, 이미 붉은 악마의 캐릭터로도 등장합니다. 그것마저 정사가 아니라며, 내쫓아야 합니까? 고구려 벽화에 있는 삼족오를 일본이 자기네 신화 속 동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둘째, 또다른 문제의식은 를 읽으면서 나온 것입니다.

자기네 역사란 대개 자기네 나라가 가장 강성할 때, 실제보다 조금 부풀려서 쓰여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를 보면, 있는 역사도 잘라버리고, 굴욕적인 부분(물론 현대적 관점과 시각에서 판단한 것입니다)을 당연했다는 시각으로 쓰여지는 것을 보고 참담함을 느꼈습니다.

한단고기가 위서라는 주장도 한편으론 일리가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한단고기가 완벽한 창작물이라는 주장에도 선뜻 동의하기 힘듭니다. 아마도 숨겨진 역사서를 유교 사상이 위축된 시점에서야 다시 엮었던 게 아닌가 생각하는 게 오히려 더 합리적이라고 봅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일종의 첨삭도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한단고기의 내용들이 중국의 역사서에도 일치하는 흔적이 드러나고 있다는 점에서 최소한의 가치, 아니면 최소한의 연구가치라도 인정할 수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하는 점입니다.

덧붙일 점은 제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위 2가지이나, 우선 그 전제로 되는 한단고기의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먼저 언급해야 했기에 한단고기 이야기를 처음에 장황하게 썼습니다. 물론 한단고기를 이미 읽으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혹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먼저 관련 정보와 전제를 제시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글의 비중이 한단고기 소개에 치우친 점은 인정합니다.

그 다음, 글에서 몇 가지 틀린 부분이 있었습니다.

5. 치우천왕 편에서 99년 3월29일 호나우두가 뛴 브라질을 1 대 0 으로 꺾었다고 했는데, 호나우두는 그때 뛰지 않았고, 히바우두가 뛰었습니다.

6. 그리스 신화는 아는데 제나라 신화는 모르는 한민족 편에서

주지육림(하나라)라고 썼는데, 주지육림은 은나라 마지막왕 주왕과 달기의 고사인데, 제가 그 직전 나라인 하나라로 잘못 썼습니다.

7. 화근은 편에서

김춘추가 고구려 사신으로 간 것은 백제 멸망 전인데, `백제 멸망 뒤'라고 잘못 썼습니다.

이 내용들은 수정했습니다. 넓은 이해 바랍니다.

권 태 호 올림

 

‘치우=동이족’, 역사적 근거 있다
이덕일씨,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3」에서 중국학자 주장 소개

 

이종태 기자 [email protected]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붉은 악마’의 공식 캐릭터였던 치우(蚩尤)와 관련, 중국 역사학자도 그를 동이(東夷)족으로 주장했다고 역사학자 이덕일씨가 최근 발간한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3」을 통해 밝혔다.

치우는 중국의 ‘삼황오제’에서 오제(황제-전욱-제곡-요-순) 중 1대 임금인 황제(黃帝)와 동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싸고 싸운 인물로,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그를 동이족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이 「환단고기」 등 주류 사학계에서 위서로 간주하는 사료에 주로 기반, 폭넓은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중국 학자가 역사학적 방법론에 따라 치우의 민족적 정체성을 동이족으로 설명한 내용을 이덕일씨가 소개한 것이다.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3」에 따르면 중국의 역사학자인 서욱생 교수는 1940년대에 출간한 「중국고대사적 전통시대」에서 “치우는 묘만족이 아니라 동이족의 영수”라고 주장했다. 이는 치우가 묘만족의 지도자였다는 종래 중국 학자들의 견해를 뒤엎은 것이다.
이덕일씨에 따르면 상고 시대 동북아시아엔 산동성 일대의 동이(東夷)족, 섬서성 황토고원의 화하(華夏)족, 중국 남부의 묘만(苗蠻)족이 할거했는데, 중국 학자들은 치우를 남방 묘만족의 지도자로 간주해왔다는 것이다. 화하족은 현대의 한족(漢族)으로 이어진다.

서욱생 교수 주장의 근거는 우선 산동성에 있었던 제(齊)나라에서 치우가 팔신(八神) 중의 하나로 존숭되었다는 점이다. 산동성은 동이족의 거주지였다.
또한 전설에 따르면 황제는 치우를 죽인 뒤 시신을 쪼개어 매장하는데, 그 무덤이라는 치우총과 견비총(치우의 어깨와 넓적다리)이 각각 산동성의 동평현과 거야현에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이덕일씨는 “남방의 묘만족이 북쪽의 산동성까지 올 리가 없으니까 산동성에 치우의 무덤이 있다면 그는 묘만족이 아니라 동이족이라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서교수가 치우를 동이족으로 보는 또 다른 근거는 치우가 ‘구려(九黎)족의 대표’라는 서경(書經), 사기(史記) 등의 기록이다. 구려족의 거주지는 산동, 하남, 하북성 등으로 동이족의 거주지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치우가 남방 묘만족의 우두머리로 알려져온 이유는 무엇일까. 이덕일씨는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3」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서욱생 교수는 고거에 화하족과 남방 묘만족 사이의 투쟁은 잘 알려졌지만 동이족이 화하족과 격렬하게 다툰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1920년대 이래 출토된 금석(金石)이나 갑골문을 연구한 결과 동이족과 화하족이 크게 싸운 사실이 드러났다며 이런 정황으로 볼 때 치우를 동이족의 우두머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동이족과 화하족의 큰 싸움’은 치우가 황제(黃帝) 공손헌원과 맞섰다는 ‘탁록 대전’을 가리키는 것으로, 중국측 사서들은 공손헌원이 치우를 붙잡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치우가 공손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아 동이족의 강역을 굳게 지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1.한글은 세종대왕이 만들었다.

지금 우리가 쓰고있는 한글은 물론 세종이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전연 無에서 만든 것이 아니고 옛 글자를 모방해서 만들었다고 했다.(世宗實錄,字倣古篆) 그리고 訓民正音 반포후 이를 적극 반대하던 집현전 학사 최만리등의 상소문을 참고해보면


2. 원시한글이 있었다는 부분

* “언문은 다 옛자를 근본으로 했음으로 새로운 글자가 아니라 하시는데 글자의 모양은 비록 옛것을 모방했다고 하나 소리를 사용하는 것이나 글자의 조합은 옛것과 달라서 실로 근거한바가 없사옵니다” (諺文皆本古字非新字也則字形雖倣古之篆文用音合字盡反於古實無所據)

* 전 조정(고려?)때 부터 있었던 언문을 빌려 썼다고 하나 지금 같은 문명의 치세에는 오히려 글자를 분별하여 도에 이르게 하는데 뜻을 두어야 하는데 지나간 것을 따르려 하시오니까? (借使諺文自前朝有之以今日文明之治變魯至道之意尙肯因循而襲之乎)

* 대왕께서 상소문을 다 보시고 최만리 들에게 말씀 하셨다. ‘너히들이 말하기를 소리를 사용하는 것이나 글자의 조합이 옛것과 다르다 했는데 설총의 이두역시 소리가 다르지 않더뇨? (上覽䟽謂萬里等曰汝等云用音合字盡反於古薛聰吏讀亦非異音乎)

* 지금 언문은 모든 (옛) 글자를 합하여 아울러 쓰고 그 소리의 해석만 변경하였으니 (한문)글자의 형태가 아닙니다. (今此諺文合諸字而並書變其音釋而非字形也)

* 훈민정음이 반포된지 불과 50일만에 최만리 등의 상소문이 올라오는데 이 상소문에 벌써 19개의 언문(諺文)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만약 훈민정음이 사상 초유의 문자였다면 언문이라는 단어대신 ‘훈민정음’ 이라는 단어가 대신 올라 있엇을 것이다. 그러므로 언문은 훈민정음 반포 이전부터 유치한 형태로나마 백성들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그 증거는 최만리등 상소문중 다음 글귀가 증명한다.

* 전 조정(고려?)때 부터 있었던 언문을 빌려 썼다고 하나...(借使諺文自前朝有)
* 하물며 언문은 문자(한자)와는 맹세코 서로 아무런 상관됨이 없는 시골것들이 전용하는 말일뿐 이옵니다. (况諺文與文字誓不干涉專用委巷俚語者乎)


3.옛 글자는 단군 3세때 만든 加臨土

* 원시한글인 가림토(또는 加臨多)가 만들어 졌다는 기록은 ‘환단고기’에 처음 등장하는데 이 환단고기를 위서로 보는 학자가 많아 이것만 가지고 원시한글이 있었다고 주장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영인술이 없어 필사본에 의해 전하던 이 기록이 더러 가필의 흔적은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 위서라고할 수는 없다.

즉 동립선언서의 원문은 “吾等은 玆에....”인데 국립극장 아래 비석에 “우리는 이에”라고 써 놓았다 하여 그것이 한글세대가 이해하기 좋으라고 써진것이지 위서는 아닌거와 같다.
그러나 그렇다고 가림토가 실재했다는 증거는 되지 못하므로 다음글을 보자.


4. 가림토가 있었다는 논리적 증거

* 가림토(加臨土)가 있었다는 기록은 고려말 충정왕을 받들기 위해 원나라에 다녀와서 천성사를 거쳐 좌정승이 되고 홍건적 난으로 서북면 도원수가 되어 활약한 杏村 이암(李嵒)선생이 그간 수집한 고서들을 인용해 찬술한 ‘단군세기’에 있고

* 한편 기림다(加臨多) 라는 말은 위 이암의 현손으로 연산군때 문과에 급제 하였으나 강직한 성품으로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 유배를 당하여 유배지에서 우리의 상고사 만을 탐독 하다가 중종때 복위되어 찬수관이 됬으므로 내각에 비장되어있던 수많은 책을 얽어볼 기회를 가졌던 十一堂 主人 이맥(李陌)이 지은 太白逸史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에 있다.

* 그런데 그 내용은 모두 3세단군 가륵이 삼시랭이 을보륵에게 시켜 만들었다는 것인데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점은 가림토와 가림다의 표현이 다르다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가림토가 실재 했다는 증거거 된다.

* 즉 이 글들이 모두 위서가 가 쓴 위서라면 가림토건 가림다건 한목소리를 내야 했을것이고 이암의 현손인 이맥이 자기 조상인 이암의 글을 베껴 썻더라도 기림토건 가림다건 한목소리를 내야 했을 것이다.

* 그러나 이맥은 전술한 바와같이 성격이 강직하여 조상의 글이라고 무조건 베껴쓰지 않고 자기가 본 다른 기록에 의하여 ‘가림다’ 라고 썼을 것이다.

* 그렇다면 이암과 이맥이 본 기록들은 서로 다른것인데 바로 이것이 가림토가 실재했다는 증거가 된다는 이유는 다음을 보자.


5.가림토와 가림다는 같은 말이다.

* 필자는 어떤 학위는 없지만 20여년간 우리말의 뿌리를 찾아 우리말과 한글은 결국 하느님의 선물인 천부인으로 만들었다는 제자 원리의 이론을 확립한 사람이다.

1940년 안동 이한걸의 집에서 나타난 유네스코 보존물이며 우리 국보 70호인 훈민정음 해례본의 제자원리에 의하여 만들어진것이 아니라 이 해례본은 사실상 우리 한글이 중국의 성리학이나 음양오행설에 의하여 만들어 졌다고 정인지등이 해례본을 썻지만 이는 사실상 한글을 모독하는 글이므로 그 해례본은 국보에서 폐기되야 한다.

* 세종대왕은 옛 글자를 모방하여 한글을 만들었다고 했지만 그 글자들이 가지고 있는 音까지는 분명히 취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의미는 취하지를 못했다.

즉, ㄱ ㄴ ㄷ ...ㅎ 속에는 그져 발음기호 노릇밖에 못하는 알파벳과는 달리 분명한 의미가 들어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로 현재 엉터리인 우리 한글의 맞춤법 교정은 물론 고대에서 쓰던 말 까지도 복원해야 우리 말이 제대로 살아난다는 엄청난 사건이다.(엉터리라는 현재 맞춤법의 이론은 홈페지 에서)

* 우선 ‘ㄱ’속에는 갓(邊)의 뜻이 있다. 우리말에 ㄱ 으로 발음되는 말들은 모두 ‘갓’ 가장자리의 뜻밖에 들어있지 않아 가죽, 가지(나무 줄기의 갓), 가시, 기시네(男을 알맹이 女를 껍데기로본... 女는 원래 겨집여, 훈몽자회) 겨(왕겨,알맹이의 갓) 겉(外) .....등 또 겨울은 여름을 알맹이로 보는 원시에서 껍데기 계절. 게으르다는 “겨울이다”에서 나온말... 하여간 기름(油)까지도 ‘갓’에서 진화한 말이다 (더이상 설명 생략)

* 위를 근거로 가림토나 가림다를 한자가 아닌 우리말로 보자.

우선 ‘가림’부터 본다. 위에서 ‘가’는 가지(枝),또는 가람(川)은 가지를 치고 그 가지가 커지면
가랑이(가지랭이)처럼 갈라지게 되어 원 줄기와 비교하게 되는데 이것을 ‘比較,分別’ 한다고 하여 ‘앞가림’ 이나 아기가 대소면을 ‘가린다’, 낯가림을 한다, 말이있다.

* 한편 이 분별과 비교는 ‘대신’한다는 말로도 쓰여져 “이것으로 인사말을 가름 하겠습니다” 한다면 인사말을 대신 한다는 말이 된다.

* 이상으로 위 가림토와 가림다의 ‘가림’은 분별, 비교, 대신의 뜻이 들어잇다. 그러면 土와 多 가 다르고 그렇다면 어느것이 맞는말인가?
이는 둘다 같은 말인데 우리 말로는 ‘다’가 맞는다.
즉 土는 土臺 그러니까 땅이다.

‘다’는... 현재 地는 따지 이지만 소주가 쏘주가 되고 번데기가 뻔데기가 되듯 말이 강해진 연유이므로 훈민정음 배포 100년만에 쓰여진 최세진의 한자사전 訓蒙字會 만 하더라도 ‘따지’가 아니라 ‘다지’이다
그러니까 결국 다(多)는 “많다”가 아니라 땅이다.

* 결론은 위 加臨土나 加臨多는 둘다 무엇 무엇을 가림 한다는 토대 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가림 했을까? 이는 말이나 어떤 사건이나 사물을 분별 비교 대신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 ‘가림다’ 라는 말은 한자가 생기기전 즉 文字라는 말이 있기도전 그 말이나 사건을 대신, 분별 한다는 우리의 순수한 말이다.

이것이 후에 우리 가림다는 없어지고 한자로 적자니 가림은 그래로 加臨이라 음을따고 加臨土의 土는 땅의 의미를 딴것이며 ‘다’는 음까지 그대로 한자로 기록하여 加臨多라 한것이다.

* 이 좋은 가림다가 왜 없어졌는가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는 중국에 대한 사대사상으로 인한 한자 사용이다. 즉,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고도 우리 민족이 한글을 제대로 쓴 것은 6.25 이후로 불과 50년 남짖인데 지금 한글은 어느새 영어로 대치되어 길거리의 간판이나 상장주식 회사 모두 영어이고 언론계나 학자 정치가 교수 작가 모두가 영어를 쓰지 않으면 행세를 못하니 써붙인 글씨도 “개업”이 아니라 “open" 이라 써 붙였고 천철간 비디오 카메라 선전문구에는 한글은 한마디도 없다.

필자가 단언 하건데 한글을 만들어 50년 썻으니 이대로 가다가는 50년 후에는 완전히 없어진다. 그래도 가림토는 단군때 만들어지고 4천년이 지난 세종때까지는 가림토는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위대한...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하다는 우리 한글은 우리들의 잘못으로 100년 500년 후에는 타임캡술 속에서나 찾아야 하다.

* 다음 가림토가 위서가 아니라는 증거는 가림토 가림다의 기록이 있다고 쓴 이암이나 이맥도 우리말의 뿌리를 찾아보지 않은한 가림토의 의미를 몰랐을 것인데 어느 위서가들이 이 모르는 소리를 위서로 쓴다는 말인가?

* 이외 실증적 증거로 중국 山東省 桓台市에서 출토된 BC1580년후로 추정되는 뼈에 새겨진 가림토 문자의 사진이 있고 부산일보에서 2003.3/31자로 발표된 경북 경산시 와촌면 명마산성에 암각화된 가림토와 경남 산청군 단속사 터에서 발견된 가림토 비석 사진이 있다.

* 그러므로 가림토는 3세단군 加勒 46년(BC2181) 당시 별직의 제사장 으로 두었던 화랭이 乙普勒을 시켜 만든 것이 확실한데 요는 이 글자를 3세 단군과 삼시랭이 을보륵이 창제 했느냐는 것이다.

* 이는 세종의 한글이 완전 창작이 아니고 모방 이드시 이 3세 단군도 1대 단군(단군은 개인 이름이 아니라 ‘밝은 잇큼’ > 밝은 임금을 후세에 한자로 檀君으로 표시한 왕의 명칭. 단군은 고조선때 48분이 통치했음)이나 그 아버님 황웅때부터 원시적으로 전해지던 말고 글자를 보강 정리 했음이 어원뿌리로 보면 밝혀지는데

* 여기서 필자가 말과 글자가 동시에 만들었다는 근거 한가지만 예를 든다. 즉, 석가래, 사타구니, 손가락, 쑥, 삼(인삼) ....등등의 말들은 전혀 그 뜻이 상관없고 세종이 만든 말도 아니다.

그런데 이 말을 쓸려면 반드시 ‘ㅅ’을 써야 한다. 이는 세종이 옛 글자를 모방했다는 또하나의 증거도 되는데 그 이유는 우리 한글이 표음문자 이면서도 상형문자 이었음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위에서 말한 서가래 사타구니.등은 그모양이 ㅅ 같고 손가락이나 쑥 등도 그 사이가 ㅅ 같다.

* 이 ㅅ은 위로 솟는 것 같아 ‘솟다’ 라고도 쓰고 한편 서(立) 잇을수도 있어 ‘사람’ 등에도 ‘ㅅ’을 쓴다. (생략)
이는 말과 글자가 동시에 만들어 졌다는 증거이다.

* 결론- 이렇게 우리 말과 우리 한글은 우리 단군과 그 조상님인 환웅, 환인 하느님께 까지 올라가고 우리는 지금 그 말과 글자를 쓰고 있다.

* 그런데 우리 하느님은 현재 옷을 여호아에게 빼앗겻다. 아이들에게 물어보라 하느님이 누구냐고? 아마 십중팔구 여호아 라고 대답할거이다.
이러다가는 먼저 말했드시 “동해물과 백두산이....여호아가 보우하사....”가 될것이다.

* 이렇게 자기 민족의 뿌리를 짤라버린 일부 종교에서는 단군을 거론하면 특정종교 선전이라고 비판 하고 있는 것이 우리 실정이다.

* 한글학회에서는 대통령 갈릴때마다 달라지는 맞춤법 몇 개만 가지고 따질것이 아니라 우리 한글의 원류를 찾아 우리 말과 우리 뿌리부터 확립해야 할 것이다. 즉, 고정관녕에 사로잡힌 기존 이론만 고집하지 말고 새로운 이론도 받아드려 함께 연구해 활기찬 한글학회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한자는 한국인이 만들었다.

 

한자가 우리의 글이라는 사실을 설명한 책을 인용해서 설명드린다면...

 

1.기록상 전해지는 중국의 고대사는 기원전(BC)841부터 시작한다. 사마천이 쓴 [사기]에는 BC 841년이전에 있었던 은왕조에 대한 역사와 사건 기록은 거의 없다. 다만 갑골문의 발굴로 은왕조가 수백 년 동안이나 중국땅에 실존했던 국가였음이 밝겨진 것이다.  한편 은왕조때에 널리 쓰였던 갑골문은 문자체계가 완전하게 갖추어진 글자이다. 은왕조에 대한 역사적 사실이 전무한 상태에서 문자체계가 완전하게 갖추어진 갑골문을 중국인이 발명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갑골문을 중국인이 발명한 문자라고 말할 수 없는 첫번째 이유다

실제 고고학적 유물이나 고문헌상아로도 거북이 등에 새겨진 점범이전에 소의 뻐에 의한 점법이 있었음이 증명되고 있다. 그리고 동이족이 소뼈에 점을 쳤다는 것솨 우골에 의한 점법이 중국의 것이 아니라 상고시대 동이족이 사용하던 것으로서 은대보다 앞선다는 사실도 이미 증명되고 있다.

 

2.반면 중국에서는 전설로만 전해 내려오는 고대사의 모호한 기록이 한국의 환단고기와 단기고사등에서도 사건연대,사건내용,인물의 배경들이 상헤하게 밝혀져 있다. 또한 한국에는 지금부터 약 6처년 정환히는 5897년전에 제 1대 배달환웅 천황께서 신지 혁덕에게 명하여 만든 '녹도문자'가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인류 최초의 문자는 BC 3500년 경 인류문명의 시원지로 파악된 메소포타미아 지방 수메르의 설형문자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설형문자가 제5대 황웅당시 태호복희가 만든 팔괘부호와 비슷하고 수메르어는 한국어와 같이 교착어이며,이주민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건 다 아는 바이다. 그리고 수메르문자는 완벽한 문자체계를 갖춘 것으로 알려져 이상. 문자가 완벽한 체계를 갖출 정도가 되려면 그 이전에 상당시일의 문화벌전과정이 필요한 것이니, 그것이 곧 녹도문자이다.

 녹도문자는 세계 최초의 문자이다. 환단고기 태백일사에는 사슴 발자국의 흔적을 보고 만들었기 때문에 녹도 문자라고 부른 그 닻제경위에 상세하고도 분명하게 적혀 있기까지 하다.

 천부경은 우리나라에서는 물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경전이다. 처음에는 말로만 전해지던 것을 환웅천황께서 녹도문자로 기록하게 하였다고 되어있다. 이것은 갑골문이 시작된 시기보다도 약2500년 전의 일이었다. 그후 기록에 의하면, 옛 비석에 새겨진 것을 통일신라시대 최치원이 발견, 한문으로 옮겨서 알렸다고 한다. 현재까지 전해진 천부경은 모두 한자로 번역된 것이다. 계연수 선생이 묘향산 시내 위의 석벽에서 최초로 발견,탁본을 떠서 알려진81자의 천부경중 갑골문과 동일한 글자는 15자나 된다.

이제 갑골문을 한국인이 만들었다고 입증하는 두번째 이유가 밝혀졌다.

 

3.배달국 시대의 녹도문자는 단군조선때까지 진서라는 이름으로 널리 쓰여졌으며 상.은.주왕조가 모두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서 동이족(한국이)이 통치하였던 국가였음을 감안할때, 갑골문은 단군조선이  중원대륙 천체를 통치하고 있을때 널리 사용하던 녹도문자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녹도문자는 이미 문자체계가 문자체계가 완성된 문자였다. 중구의 첫 개국시조의 황제헌원이 배달국 제 14대 치우천황에게 패하여 신하가 된 후, 치우천황의 국사였던 자부선생으로부터당아간 삼황내문경도 논도문자로 기록한 3권의 책이었다.

 위와 같은 기록으로 살펴볼 때, 녹도문자는 제1대 배달환웅때 창제되어 제14대 치우 천황 당시에는 이미 많은 쳔찬사업을 통해 녹도문으로 된 책자까지 중궁에 전해졌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녹도문은 단군 조선시대에는 진서라고 불리면시 당시 고조선의 제후국이었던 상.은.주왕조에서 널리 쓰여졌던 것이다. 주나라 무왕 3년에 당시 고조선에 망명해 있던 기자가 고조선의 홍범구주의 한자 65자를 중국으로 가져가 전한 사실은 중국의 정사인 사마천의 사기. 서경. 한나라 예문지에 수록되어 있다.

 따라서 갑골문은 단군조선이 중원대륙의 전체를 통치하고 있을때 널리 사용하고 있어었다. 녹도문자(진서)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갑골문에 수없이 나오는'帝(제)',즉 상제는 당시 중국이 동이족의 신교사상을 배워 삼신 상제님를 믿고 하늘에 천제를 지낸 기록인 것이다.

 중국 역사상 최초로 통일 구가를 이룩한 지시황제는 대대적인 동이족 박멸정책을 취하였다.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확립한 그는 만리장성과 아방궁을 지었으며, 자기 정책에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세력을 가차없이 처벌하였다. 비판적인 제자백가의 서적을 불사르고 유생들을 생매장한 역사상 악명높은 분서갱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또한 스스로 황제의 칭호를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모든 것을 자신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으로 만들었다. 우리 문자를 송두리째 뺏어 자기 것으로 만들었으며, 모든 문자를 통일하여 소전이라고 부르게 하였다.

 갑골문을 오늘날 한자라고 부르는 것은 과거 없던 글자를 한(漢)나라 사람들이 만들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사날 배달국 및 단군조선이고 동이 겨레의 나라인 은나라에서 사용되어 도던 글과 글자를 지나랑서 소전이라 고친 것을 다시 한나라가 자기의 글과 글자로 삼았다는 의미에서 한문(漢文)또는 한자(漢子)라고 이름을 바꾼 것 뿐이다. 따라서 '한자(漢子0'라는 명칭은 옳지않으며.'한자(韓子)'라고 불러야 한다.

 우리는 중죽의 진과 한으로부터 국툐를 많이 빼앗기고 우리의 문자까지 약탈당하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 무자는 중국의 문자가 되어갔으면 수백년 후에 우리는 다시 이를 역수입하여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4. 한자를 우리가 만들었다고 하는 네번째 이유는 집 가(家),날 일(日), 씨앗 씨(氏),가을 추(秋),곳집 창(倉),다할 진(盡)등과 같이 한민족의 특성이 아니면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특징과 어원을 갖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한자가 상당수 있기 때문이다.

[家]

집 가家자는 집안에 '사람 人'자가 들어 있어야 당연한데 '돼지 豕'자가 들어 있다. 고대 한민족은 제줃의 똥돼지 습속에서 보듯이 뱀을 피하기 위해 집 밑에 돼지를 키웠다. 따라서 '집 가'자는 집아래에 돼지를 키웠던 한민족만이 만들 수 있는 글자이다.

[日]

날 일자는 해를 둥글게 그리면 그만인데. 해 속에 까마귀 그림이 들어있다. 수천년 전부터 해속에는 까마귀(삼족오)가 살고  달에는 두꺼비가 살고 있다는 신화를 가진 민족은 한민족 뿐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발셋 달린 검은 까마귀(삼족오)가 나온다. 여기에는 해의 신과 달의 신 별화에 삼족오와 두꺼비가 함께 그려져 있다.

[氏]

씨자는 씨앗에서 유래되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종자를 나타낼 때는 씨氏를 쓰지 않으며'씨'는 그런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다. 종자를 의미할 때는 종種자를 싹이나 눈을 의미할 때는 아자를 쓴다. 반면 , 우리말의 씨는 종자와 성씨 모두에 사용된다. 氏자 역시 한민족의 글자다.

 

5. 결국 한자는 중국 사람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져 사용하던 문자를 중국에서 받아들여 계속 사용해오다가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문자의 창조도 사람이 하는 일인 만큼 중국의 갑골문은 한국인이 만들었음이 분명하다.

 

음양(태극)이론에 통달했던 우리 선조들은 음과 양의 글자를 함께 만들어 썼던 것이다. 녹도문은 세상 만물의 형사을 본?떠서 만든 뜻글자니 음陰이요, 땅의 글자다. 가림토 문자는 하늘의 소리기관의 모양을 본떠서 만든 글자니 양陽이요. 하늘의 글자이다. 한문은 녹도문자가 뿌리가 되어 탄생한 문자이며, 한글은 가림토 문자가 원형이 된것이다. 한문은 뜻 글자요, 한글은  소리 글자이다.

우리 선조들은 녹도문자로 문자는 통일되었으나 언어가 통일되지 않아 서로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자 이를 바로 잡고 한문 글자 그대로 정확하고 바른 음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가림토 문자를 만드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한글사전은 거의 모두가 한자음이다. 그러므로 한자를 쓰지 않는다고 해서 한자를 안쓴ㄴ 것은 력코 아니다. 우리나라 말은 모두가 한자 발음에서 언어가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한글과 한문 두 문자를 함께 써야만 모든 소리를 완벽하게 말할 수 있고 그 뜻을 확실히 알수 이상. 한글은 양의 글자, 한문은 음의 글자다. 하늘에서 울리는 소리와 만물의 형사을 본든 모양을 함께 써야 완전한 언어체계가 된다. 이 둘을 합하여 쓸때 가장 합리적이고 완벽한 언어가 된다.

 한자나 한글 어는 하나만 사용하면 음양의 조화가 깨어져서 반쪽 글의 대혼란이 일어난다 중국을 보라 각 지방마다 사투리가 달라 현대 표준어인 보통화가 아니면 일상적인 대화조차 통역을 세워야 한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한글만을 전용하면 단어와 문장의 진정한 의미를 잘 모르게 되고 완전환 지적활동이 불가능하다. 반면 한자 2천자만 습득하면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지적능력이 크게 발전된다. 또한 소리로 표현해도 뜻이 전해지지 않을 때는 한문으로 토를 다렴 바로 이해가 간다. 그러나 한자가 우리 것이기 때문에 중국말을 모르는 한국인도 한문책을 보면 그 뜻을 알 수 있다. 반면 중국인을 한글을 전혀 알 수가 없다. 한자를 누가 만들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는 것처럼.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치우천황(한단고기에서는 자오지천황)이니, 배달국 등등 국수주의적 역사인식 즉 민족주체사관이라는 것인데 일제 강점기 시절에는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어느정도 긍정적인 면을 보인측면도 있지만 대부분의 내용들이 환단고기(또는 한단고기) , 규원사화 등 조작과 위작된 책들을 근간으로 하고 있으므로 역사라고 말하기에도 부끄러운 것들입니다.

님이 어떻게 그런 역사인식을 받아들였는지 모르지만 보통 중고등학교 시절 교과서와는 다른 우리민족의 자긍심이나 광활한 영토에 대한 얘기에 엉뚱한 곳에 학구열을 불태우는 것을 종종 보았습니다.

 

저도 한때 십수년전에 맥이, 한단고기(정신세계사 出), 규원사화 대동이, 다물 등 10여권에 가까운 민족주체사관 책들을 보았습니다만 지금은 그저 웃음만 나올뿐입니다.

 

그들(민족주체사관)이 주장하는 또하나의 문제는 기존의 역사학자나 역사적 성과는 모두 무시한다는 거죠. 자기들만이 모든 역사의 비밀과 진실을 알고있는 듯한 편견에 빠져서 이런 허무맹랑한 것들을 가지고 역사에 관심은 있으나 제대로 알지 못하는 많은 이들을 현혹케 합니다. 그리고 대상자들은 마치 사이비종교에 빠지는 신도들과 같이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맹신하게 되죠

 

한국고대사산책 <역사비평사> 을 한번 읽어 보실 것을 추천합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제발 부탁입니다

 

그런거에 속지 말기 바랍니다

 

괜히 그런거 믿었따가

 

손해일뿐입니다

 

아는 선생님한테 물어보십시요

 

국사선생님이 대부분 하는말

 

지식은 대부분 뻥이다

 

그 근거로 첫번째가

 

님이 질문하신 내용입니다..ㅡㅡ..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도시(都市)라는 용어의 기원
『漢書』都市
『周書』都市部(백제의 관직명) 등이 나타남.
都는 군주의 거처인 王都를 뜻하나, 원래의 뜻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가리킨다. 중국
문헌에 나타나는 도시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상업이 번성한 곳을 뜻한다. 따라
서 고대의 도시는 首都를 의미하는 都와 市場을 의미하는 市를 합쳐 놓은 단순한 명칭이었
을 것으로 봄.
이와 같이 고대의 우리 나라와 중국의 도시란 용어는 오늘날과 같이 도시 그 자체를 가리
키는 말이 아니라 도읍지의 시장 혹은 시장이 있어 번성한 곳을 나타내는 말로서 지금의 도
시와는 다른 것이다. 근대적 의미의 도시란 용어는 20세기 이후 사용되기 시작했고, 농촌과
구별되는 도시란 개념은 주로 邑內, 城內 등의 용어를 사용했다.

※도시(都市)의 사전적 의미
①상공업을 중심으로 한 경제 및 행정·문화·교통망·편의시설 따위의 중심지가 되며, 인
구가 집중하여 그 밀도가 현저하게 높은 지역. ↔ 농촌, 촌락
②도회지(都會地)↔ 시골

※고대도시의 개념 -수 천명 이상의 주민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비교적 큰 규모의 취락이
며 주로 비 농업적 기능, 즉 상업·공업·정치·경제·문화·군사적 기능을 보유하거나 부
문적으로는 농업중심지로서의 기능도 보유한 취락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는 취락의 대다수
주민이 비농업적 직업에 종사하고 일련의 통합된 건축물들이 존재하며, 단일 정부에 의하여
통치되고 그 영향력이나 지배력이 주변지역까지 확대 될 경우, 그 취락의 규모와 상관없이
고대도시로 확대해석 한다.


[도시의 발생 배경]

① 수렵채집경제에서 농업경제로의 전환(신석기혁명)은 이동생활에서 정착생활로의 주거 형
태의 변화를 가져와 취락의 형성을 가져오고 농업은 수렵에 비해 더 많은 인구를 필요로 하
게 되어 취락의 규모를 커지게 하였다.
② 농업을 위한 치수 사업(수리 관개 시설)은 주민간의 협력 및 대규모 인원의 동원을 필요
로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지혜(토목, 측량, 수학, 천문 등)의 발달을 가져온다.
③ 농업의 발달은 잉여 생산물을 낳고 잉여 생산물의 발생은 인구의 출산력을 높이고 인구
흡인력을 발휘하게 된다. 나아가 잉여 생산물은 빈부의 격차와 교환 경제를 낳고 직업 및
계급의 분화를 가져 옴.
④ 지배계급(신관, 전사), 상인, 장인, 농민, 노예 등의 사회계층 분화 진행
⑤ 취락에는 주택, 창고, 왕궁, 신전, 성곽, 상점, 도로, 공중 목욕탕 등이 건설됨.
⑥ 의사전달 수단으로써의 문자 발명 사용.
⑦ 금속기(청동기, 철기)의 사용과 교통 수단(수레, 돛단배)의 발달-도구, 무기의 혁신, 교역
과 정복 사업 활발, 부족 통합 촉진
⇒ 도시 형성

[고대도시의 발생 지역]


① 최초의 도시들이 발생한 지역은?
B.C. 3000~400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 조성된 비옥한 초
승달 지대(Fertile Crescent)로서, 오늘날의 이라크 지역이다.

② 이유(배경)
-.비옥한 초승달 지역은 주변지역에 비해 수목이 잘 생장하는 비옥한 지역으로 잉여생산이
빠른 시기에 달성될 수 있었다. 이 일대의 주민들은 B.C 8000년경에 그들이 채집하고 사냥
하던 동식물을 작물화 하고 가축화 하기 시작했다. (밀, 보리 등의 화본과 식물-돼 지·
소·말·낙타 등에 대한 지식 축적)
-.지금부터 약 5000~8000년 전 지구상의 큰 기후 변동 : 사하라 일대의 사막화 진행으로 주
민의 대하천(나일강,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강) 주변으로 이동하게 됨.
-.인구의 집중에 따른 식량증산의 필요성과 강의 범람을 막기 위한 치수관개 사업 진행.
-.비옥한 초승달지대의 농업혁명은 잉여생산물을 낳고, 인구 집중을 가져옴.
나아가 직업의 분화, 계급의 발생, 문자의 발생, 지적수준의 향상 등 고대도시와 고대 문명
이 일어나게 되었다.

③ 그 밖의 도시 발생 지역은?
-메소포타미아, 나일강 유역, 인더스강 유역, 황하 유역, 중앙 아메리카 등 고대문명 발생지
와 일치함. 인류의 문명은 도시에서 비롯된 것임을 시사함.

④ 세계의 주요 고대도시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강 사이의 땅)
: 아르메니아 산지의 지형성 강우5월경 홍수 관개시설 필요, 대추야자, 돼지, 들새, 물고기
풍부 ⇒ 에리두(Eridu). 우르(Ur). 아카드(Akkad). 바빌론(Babylon)

-.나일강 유역
: 비옥한 충적 평야 형성, 홍수조절 위한 수로 공사로 협력, B.C.3200년경 고대도시 발생
⇒ 멤피스(Memphis), 텔엘아마라나(TellelAmarana), 테베(Thebes)

-. 인더스강 유역
: 계획적으로 설계된 계획 도시 등장( B.C. 2200년경 문자, 바퀴달린 수레, 성채, 하수로, 목
욕탕, 창고, 집회소 등을 갖춤.)
⇒모헨조다로, 하라빠

-. 황하 유역
: 황하 유역의 강 언덕(비옥한 황토 지대)에 정착농경이 이루어지면서 취락 발생. 자연제방
은 대규모 취락 입지 장소 제공, B.C. 1500년경, 殷 왕조 성립.
⇒안양(은허), 쳉조우

- .중앙 아메리카
: 북미 대륙과 남미 대륙을 연결하는 비교적 좁은 띠모양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지역, 메소
아메리카라고 부른다. B.C.100년경 멕시코 계곡과 마야 지역에 고대도시가 형성
⇒테오티우칸(Teotihucan)-계곡의 저지대 비옥한 충적평야, 항상 솟는 샘, 종교활동의 중심
----아즈텍 문명 탄생.
⇒마야(Maya)지역 -열대 우림기후의 저지대, 많은 인구포용, 주식이 수수와 콩, 옥수수는
다른 작물에 비해 노동력이 적게들고 손쉽게 잉여식량 확보


2. 한국의 도시발달

[고대도시의 발생]

① 우리 나라 최초의 도시는?
: -.고조선의 왕검성으로 추정(그 위치와 규모 등이 정확히 밝혀지지 못함)
-.우리 민족 고유의 도시로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고구려의 초기 수도였던 국내성을 들
수 있음. 이 도시는 산성과 궁궐을 갖춘 전형적인 성곽도시의 성격을 띰.
-.한강 이남 지역은 한강 이북보다 도시의 발생 시기가 늦음(우리나라의 고대 문화는 북부
지방에서 먼저 발달하고 남부 지방으로 확대되기 때문)

② 고대(삼국시대~남북국 시대)
-.대체로 5세기 전후 삼국은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확립함에 따라 수도와 지방행정 중심지
에 관아 및 군인과 그 예속민, 상공인이 모이고 시장을 형성하게 되자 성곽을 축조함 으로
써 정치행정의 중심도시가 형성되었다. (예; 고구려의 3경, 백제의 22담로, 신라의 수도와 2
소경)
-.통일 신라는 당나라의 주군(州郡)제도를 모방 9주 5소경제도를 두어 오늘날의 주요도 시
를 형성함.<5소경-충주, 청주, 원주(←강릉), 남원, 김해. 9주-尙州, 良州(양산), 康州(진주),
漢州(광주), 朔州(춘천), 熊州(공주), 溟州(강릉), 全州, 成州(광주)>
-.오늘날의 우리 나라의 도시 가운데 신흥공업도시나 신도시를 제외한 대부분의 주요도시
는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고 봄.

[중세의 도시]

① 고려
- .송악(개성)에 도읍(태조), 12목 설치(성종), 5도호부 8목으로 개편(현종)
- .5도호부 : 안남(수주, 부안), 안서(해주), 안북(영주, 안주), 안동(경주), 안변(등주)
- .8목 : 광주(경기도), 충주, 청주, 진주, 상주, 전주, 나주, 황주
- .3경 : 개경, 서경(평양), 동경(경주)→남경(한양)
⇒ 이상의 도시들은 정치와 군사적 거점으로 대개 성곽도시의 형태를 갖춤

② 조선(근대 이전)
-.건국(1392), 한양천도(1394)
-.태종 : 지방제도 개혁 ⇒ 전국을 8도-부, 목, 대도호부, 군, 현 등의 약 330개 행정구역으
로 개편, 여기서 대도호부 이상은 도시적 성격이 강하였다.
-.조선후기 : 농업 생산성의 향상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전반의 활성화는 도시의 상업적 기
능을 증대시킴. (대동법의 시행, 사상의 대두, 지방 장시의 발달 등.) 그러나, 20세기 이전 전
산업시대에는 市域 내에서도 농업 인구가 상공업 인구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함.

⇒ 근대 이전의 우리 나라의 취락은 대체로 80리 간격으로 분포, 고대의 이집트나 메소포
타미아에서도 취락간의 간격이 대체로 30km로 밝혀짐.(운송수단을 수레에 의존하던 육상의
경우는 곡물이나 물자수송에 있어 30km 내외의 거리가 유리함.)
※ Blache의 「인문지리 원리」에 의하면 도시는 일반적으로 어떤 장애물이 나타나거나 새
로운 조건과 타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장소에 발생한다. 즉, 산악지대로부터 벗어나는 출구,
하천의 도하지점, 사막의 관문, 해안과의 접촉점 등과 같이 새로운 교통수단을 이용해 야 하
는 곳에 도시가 형성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③ 19세기 말엽의 도시
* 10부 : 한성부- 수원부, 광주부, 개성부, 강화부(수도방위의 요충지)
전주부, 경주부, 함흥부, 평양부, 의주부(지방의 요지)
* 20목 : 지방행정의 중심지로 성곽도시를 이룸
경기도 - 여주, 파주, 양주
충청도 - 충주, 청주, 홍성, 공주
경상도 - 상주, 진주, 성주
전라도 - 광주, 능주, 나주, 제주
강원도 - 원주
평안도 - 안주, 정주
함경도 - 길주
* 5대도호부 : 안동, 창원, 강릉, 영흥, 영변(군사적 요충지)
* 기타 : 75도호부, 77군, 148현 (지방행정중심지)
* 대외무역 관련 상업도시 : 부산포(동래),염포(울산),의주,회령, 경원

※ 이상에서 살펴 본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의 우리 나라의 도시형성과 발달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대도호부 이상의 市級에 해당하는 도시의 7할 정도가 아래의 [그림1-2]처럼 X축에
분포하였다는 것이다. X축이라 함은 조선시대 6大路 가운데 4大路인 서울-의주간의 의주
로(西路), 서울-동래간의 영남로, 서울-경흥간의 경흥로(北路), 서울-해남간의 호남로 (三南
路)에 인접한 지대를 가리킨다. 이 축은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것으로, 4대로 가운데 의
주로와 영남로가 한반도의 主軸에 해당하며, 경흥로와 호남로가 副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근대 이후의 도시]

① 일제 침략기~일제 강점기
* 강화도 조약 이후 부산·인천·원산·마산·목포·군산 등의 개항, 이를 근간으로 우리
나라의 근대도시가 발달하기 시작함.
* 우리 나라의 근대도시는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의하여 일본이 필요로하는 자원의 개발과
대륙 침략의 기지 확보 등을 위해 이루어졌다.
* 대일 무역항구로 발달한 도시 : 부산· 인천· 원산 ·목포
* 신설 철도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도시 : 대전 ·이리 ·천안 ·신의주

---도시 발달은 그 하부구조의 하나인 교통로의 발달과 관련이 깊다. 특히 철도는 근대국가
에 있어 정치·경제·사회 및 기능의 제측면에 걸쳐 필요불가결한 시설인 동시에 경제 발전
과 도시발전의 혈관 역할을 담당한다. 우리 나라에서의 철도는 한반도의 치안유지와 일제의
대륙침략을 뒷받침하기 위한 군사철도로서의 기능과 자원수탈을 위한 수단으로 출발하였다.
일제에 의한 우리 나라 철도 건설은 도로 교통시대를 거치지 않고 바로 철도 교통시대로 돌
입함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지역 격차를 유발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국유철도로 운영되어 국
가 자본주의의 발달이 민간 자본주의 발달보다 앞섬으로써 경제발전 과정에 있어서 파행성
과 비정상적 도시발달을 초래하였다.

(그림4-10)우리 나라 철도망의 발달과 도시












* 대륙침략을 위한 광공업 도시 : 원산·흥남·함흥·북청·성진·길 주·청진·나진·평
양·남포·송림·신의주·사리원·해주·강계
* 식량수탈정책에 따른 미곡 집산지와 적출항으로 발달한 도시
: (집산지)전주, 광주, 이리, 정읍, 대전, 청주, 조치원, 논산, 대구, 김천, 밀양, 진주, 평양, 함
흥, 신의주, 사리원, 선천(적출항)군산, 목포, 부산, 마산, 남포, 원산, 성진,
청진
이들 도시에는 한반도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수탈하고 토지 약탈을 위한 동양척식회사의
지점·출장소·사업소 등이 설치됨.
전체인구에 대한 도시 인구의 비율 1925년 4%→1944년 13%로 증가

② 해방이후의 도시 성장

<특징>
-해외 동포의 귀환과 북한 동포의 월남에 따른 남한의 도시인구 급증.
-6·25 전쟁 중 피난민의 영남지방 이동으로 대구·부산·마산 등의 도시인구 급증
-1960년대 초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추진으로 離村向都 현상으로 기존 대도시와 남동 임
해지역 신흥 공업도시의 인구급증(울산, 창원, 마산), 1963년 부산이 직할시가 되었고, 전체
인구에 대한 도시인구비율은 42.6% 에 이름.
-서울·부산·대구·인천·광주·대전 등 지방 중심도시와 울산·묵호·장성 등의 광업 도
시, 제천·영주·천안 등의 교통도시, 동두천·의정부의 군사도시의 증가가 뚜렷이 타남. 반
면, 전주·충주·경주·여수는 인구증가율 저하, 군산·충무·김천·강릉·순천은 인구 정체
상태, 마산은 오히려 감소-1970년대 수도권의 전철화와 공업화로 서울 위성도시의 급성장
(부천, 안양, 성남, 광명)과 지방 대도시의 계속적 성장 지속
-1990년대 주택난과 인구분산 정책에 따른 신도시 건설정책(분당, 일산, 중동, 평촌, 산본
등)


3. 도시의 기능

고대의 도시는 방어적 성격이 강했다. 따라서 도시 전체를 성곽으로 둘러싸고 때로는 해자
(垓字)를 둘러 외적의 방어에 대비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도 일제시대 이전에는 대부분의 도
시에 성곽(읍성)이 둘러처저 있었다. 고대에는 이러한 도시가 하나의 국가를 이루어 성읍 국
가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중세 유럽의 도시도 이민족(훈족, 게르만, 마쟈르족, 이슬람
족, 노르만)의 침략에 대한 방어적 기능이 강하여, 봉건 영주의 성곽을 중심으로 도시가 형
성되었다. (---burg : 함부르크, 아우크스부르크, 룩셈부르크, 등) 근대의 도시는 중심지 기
능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주변 지역에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능을 중심지 기능이라
하고, 중심지 기능이 자리잡고 있는 장소를 중심지라고 한다. 도시는 크든 작든 중심지 기능
을 수행한다. 중심지에서 주변의 배후 지역에 공급하는 재화나 서비스가 도달하는 공간적
범위를 도시권·서비스권·시장권·영향권 이라 하는데, 상품이나 서비스의 종류에 따라 그
범위가 다르며, 도시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기능의 종류가 더 많고 또한 더 멀리까지 영향
이 미친다.


※ 심화 학습


1. 중심지 이론


도시는 하나만이 고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서로 어느 정도의 관련을 가지고 존재한
다. 소규모 도시는 기능적으로 하위의 단계에 있고 도시권도 좁으며 더 상위 도시의 지배하
에 놓여 있다. 이리하여 도시는 기능적·규모적으로 보다 상위의 도시에 통합되고 최종적으
로 한 개의 최상의 도시에 통합된다. 이 가설적 전제에 의한 도시의 규모와 도시권과 그 배
치 관 계에 관한 일반적인 개념이 중심지 이론이다.


2. 중심지 이론의 구성 내용


① 최소 요구치 : 중심지가 그 기능을 유지하고 계속 존립하기 위해서는 이윤이 발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요 수준(판매 수준)이 요구된다. 이와 같이 이윤을 발생시키는 최소한의 수
요 수준을 최소 요구치(threshold)라고 한다.
② 재화와 서비스의 도달 범위 : 중심지로부터 거리가 증가함에 따라 중심지가 제공하는 재
화와 서비스의 가격이 증가되면 수요는 줄어들게 되어 결국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는 수요가
발생하지 않는다. 이 지점을 재화와 서비스의 도달 거리 또는 범위(range of a goods and
services)라고 한다.
③ 중심지의 계층 구조 : 중심지간에는 중심지 기능의 보유 정도에 따라 계차가 나타난다.
이 계차를 중심지 계층이라 한다.

⇒ 우리 나라의 도시를 중심지 계층구조에 비추어 살펴보면 전 국토를 영향권으로 하는 서
울 이 최상위의 중심지이고, 그 아래 계층의 중심지는 부산·대구·광주·대전 등으로 광역
생활권의 중심지이다. 이보다 하위 계층의 중심지는 전주·청주·춘천 등의 도청 소재지와
지방 중심 도시이고, 보다 하위 계층은 군청 소재지와 면 소재지 등이다.


3. 기능에 의한 도시 분류


일반적으로 도시를 기능적 특색에 따라 분류할 때에는 산업별 취업 인구의 비율 혹은 산업
별 생산액의 비율을 지표로 해서 구분한다. 도시는 대체로 복합적 기능이 많은데 그 중에서
탁월한 기능에 의해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① 생산 도시 - * 공업도시 : 창원·안산·구미(신흥 공업 도시), 울산·여천(석유
화학공업), 포항·광양(제철 공업),안양·부천·인천 등
* 광산도시 : 태백·사북·도계
* 수산도시 : 속초·주문진·사천
* 임업도시
② 소비 도시 - * 정치도시 : 서울·과천
* 주택도시 : 분당·평촌·일산·산본
* 교육도시 : 청주·경산
* 군사도시 : 진해·연무·오산·원주
* 종교도시
* 관광보양도시 : 경주·부여·서귀포
③ 교역 도시 - *상업도시 : 김천·안동·원주·진주·충주·여수
*교통도시 : 대전·익산·군산


<도시화>
대도시로 인구가 집중함으로써 도시 지역은 계속해서 교외로 확대되고 있다. 도시 근교의
농촌에서는 농지가 점차로 주택지나 공장 용지로 전용되고, 농촌의 주민들은 도시의 상·공
업 등의 노동력으로 고용되며, 생활 양식도 도시적으로 변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을 도시
화라고 한다.


<학생용 학습지>


1. 도시의 발생

도시란 무엇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는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서 발전했을까? 세계사
적 관점에서 도시라는 용어의 개념 변천과 도시 발생의 시기와 배경을 알아보자.

■ 도시란 무엇인가? 에 대하여 각자의 의견을 아는 대로 적어보자.
예):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




■ 고대의 도시는 ( )를 의미하는 都와 ( )을 의미하는 市를 합쳐 놓은 용어로, 도읍지의 시
장 혹은 시장이 있어 번성한 곳을 가리키는 단순명칭으로 사용되었다.


■ 도시란 용어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자.

②도회지 ↔ 시골

※ 고대 도시 : 수 천명 이상의 주민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비교적 큰 규모의 취락이며, 주
로 비 농업적 기능 즉 상업·공업·정치·경제·문화·군사적 기능을 보유하거나 부문적으
로는 농업중심지로서의 기능도 보유한 취락을 가리킨다.

■ 도시발생의 배경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인구 집중을 가져오는 요인들을 나열해 봅시다.)

-.수렵채집경제에서 생산경제로의 전환 : 농업은 수렵에 비해 더 많은 인구를 필요로 함.
- .농업을 위한 치수관개 사업 : 많은 인구와 협동작업의 필요성 증대, 지혜의 발달을 가져
옴. - .농업 발달에 따른 잉여 생산물은 인구의 출산력과 흡인력을 높여 줌 : 인구 집중
- .인구의 증가는 계급의 분화, 직업의 분화를 가져옴.
- .지배계급은 의사전달 수단으로 문자 발명.
- .금속기의 사용과 교통수단의 발달은 교역과 정복사업을 활발하게 하고 부족통합을 촉진
시 킴.

이상과 같은 요인으로 도시(국가) 발생이 나타남.

■ 고대도시의 발생지역은 어디일까?
-. 세계 최초의 도시 발생지역은?
- .그밖의 고대 도시 발생지역은?
a.
b.
c.
d.



2. 한국의 도시 발달


우리 나라의 도시 발달에 대하여 알아보고 다음의 각 질문에 알맞는 답을 적어보자.

■ 우리 나라 최초의 도시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언제 어느 곳에 있었던 도시일까?


■ 오늘날 우리 나라 도시의 근간이 된 고대 도시는?

①고구려(3경):
②백제(22담로):
③신라(2소경):
④통일신라(9주 5소경):

■ 고려 시대의 우리 나라 주요 도시들을 생각해 보자.

①도읍지 및 3경 :
②5도호부 :
③8목 :

■ 삼국시대∼조선시대의 도시형성과 발달 과정에서 나타나는 특징인 X축이란 무엇인가?
다음의 지도상에 X축을 그려보고 주요 도시들을 표시해 보자.





■ 일제 침략기∼일제 강점기의 도시 발달의 특징을 열거해 보시오.

1. 일본의 경제적 침투에 따른 개항장(무역항)의 발달 :
2. 한반도 자원수탈과 대륙침략을 위한 철도역을 중심으로 도시 발달 :
ㄱ. 대륙침략을 위한 광공업 도시-
ㄴ. 식량수탈을 위한 쌀의 집산지 및 적출항-
ㄷ. 철도 건설에 따른 교통 중심지로 발달한 도시-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1) 도시의 발달





1) 도시의 개념

① 주민의 대부분이 2, 3차 산업에 종사 → 직업과 생활이 다양, 유동성이 큼

② 제한된 범위의 공간에 인구와 기능이 밀집된 곳

③ 주변 지역에 대해 중심지 기능을 수행하는 곳

④ 지역과 직역을 결합시키는 매체

⑤ 우리 나라에서는 인구 5만명 이상을 시로 정함.





2) 도시의 입지와 발달 과정

① 입지

a. 지형조건과 도시 분포 : 하천 연안의 평야지대, 해안 (관문 도시)

b. 교통조건과 도시 분포 : 유리한 교통위치, 교통축의 발달 (중간 거점 도시)

② 발달 과정 : 이동 생활에서 정착 농경 생활로 촌락 발달 → 잉여 농산물 생산 가능

→ 노동의 분업과 사회의 분화 → 도시의 발생

a. 선형 분포 → 균등 분포

b. 밀집 분포 : 특정 자원의 분포 지역





3) 근대 이전의 도시 발달

① 삼국 시대 : 평양, 경주, 부여 등 왕궁 소재지

② 통일 신라 : 9주 5소경을 세워 지방 도시가 발달

③ 고려 시대

a. 개경, 3경(평양, 경주, 한양), 도호부 , 목 → 정치, 군사 도시로 발달

b. 역원, 향시 발달

④ 조선 시대 : 주로 미로형의 성곽 도시

a. 한양 : 풍수지리설, 방어·통치를 고려한 계획 도시

b. 지방 행정 도시의 발달 : 지방관찰사 주재지

→ 충주, 공주, 전주, 대구, 원주, 해주, 함흥, 평양

c. 특수 기능 도시

시장 : 대구, 전주, 원주 등의 약령시

역원 :

무역 : 울산, 부산, 웅천, 회령, 경원

군사 도시 : 병영, 수영





4) 일제 강점기

① 항만 도시 발달 : 초기 개항장 중심

부산, 인천, 목포, 군산, 마산, 원산, 청진, 성진

② 철도 교통 도시 : 신의주, 익산, 대전 등

③ 광공업 도시 : 1930년 이후 발달 → 청진, 흥남 등

④ 도시 내부 구조 : 이중 구조

→ 구시가지(한국인 거주지, 미로형), 신시가지(일본인 거주, 직교형)





5) 광복 후 (60년대 이전)

① 귀환동포, 월남민, 피난민 → 도시에 정착 → 대도시의 과밀화와 슬럼화

② 서울과 일부 대도시의 성장

③ 소비 도시 발달





6) 1960년대 이후

① 급격한 도시 성장 : 경제 개발에 따른 이촌 향도 현상

② 신흥 공업 도시 성장 : 울산, 포항, 창원 등

③ 거대 도시(서울, 부산), 수도권 위성 도시 발달

④ 지방 도시의 쇠퇴

⑤ 도시 형태의 변화(가로망 정비, 주거지 교외확산, 건물의 고층화,

아파트 단지 조성)와 도시 기능의 변화(소비도시 ⇒ 생산도시)

⑥ 1987년 57개 市, 2900만명, 도시인구율 70%로 증가

※ 60년대는 이촌 향도 현상에 의한 대도시의 급속한 팽창,

70년대는 수도권 위성도시와 임해 공업 도시의 급속한 성장이 특징





7) 도시의 분포와 계층 체계 : 중심지 이론

도시 분포의 규칙성, 도시의 계층 구조를 밝힌 이론, 크리스탈러

① 주요 개념

a. 중심지 : 주변 지역에 상품과 서비스를 공급하는 기능들이 모여 있는 지역

b. 중심 기능 : 도·소매업, 교통, 금융, 교육, 행정, 각종 서비스업,

- 공장, 주택 등은 제외

c. 배후지 : 주변지, 영향권, 세력권, 상권, 중심지를 이용하는 주변 지역

d. 최소요구치 : 중심 기능이 존속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수요, 상권

e. 중심지 성립 조건 : 최소요구치 < 재화의 도달 범위

f. 재화의 도달 범위 - 판매량이 '0'이 되는 범위

② 이론 전개

a. 중심지의 형성 : 최소 요구치가 재화의 도달 범위 내에 있을 때 형성됨.

b. 중심지의 형태 : 단일 중심지는 원형이나 여러 개의 중심지는 경쟁을 최소화하기 위해

정육 각형구조를 이룸.

c. 중심지 계층 : 중심지가 갖는 기능의 보유 정도에 따라 고위 중심지와 저위 중심지로 구











<중심지 이론>

① 전제 조건

a. 대상지역은 동질적인 평야이다. 따라서 이동은 어떤 방향으로든 가능.

b. 구매력을 의미하는 인구는 연속적으로 균등하게 분포한다.

c. 소비자는 최소 거리 이동 원칙에 따라 합리적으로 행동한다.

② 내용

a. 중심지 기능이란 배후지역에 재화와 용역을 제공하는 기능으로

일반적으로 모든 도시는 이 중심지 기능을 수행한다.

b. 중심지 기능이 위치하기 위해서는 최소요구치가 충족되어야 한다.

c. 즉 재화의 도달범위가 최소요구치보다 커야 한다.

d. 이때 상품의 판매지역(배후지역)은 전제조건에 의해 원형이 된다.

e. 그러나 수많은 중심지가 경쟁하게 되면 육각형이 된다.

f. 중심지 기능은 각 기능별로 그 배후지역이 다르다.

g. 최소요구치와 재화의 도달범위가 큰 것을 고차 중심 기능, 작은 것을 저차 중심 기능이
라 한다.

h. 크기가 다른 육각형(배후지역)을 중복시켜 보면 차수가 다른 중심지가 서로 겹쳐 나타나


되는데 이곳이 고차 중심지가 되며 이 고차중심지는 그 아래 차수의 모든 기능도 갖는다.

: 중심지 계층 구조의 형성 → 단지 저차 중심 기능만을 갖는 중심지를 저차중심지라고 한
다.

i. 도시의 규모, 수, 도시간의 거리에는 일정한 분포법칙

(차수에 따라 일정한 비율로 증가 또는 감소)이 존재한다.

j. 즉 도시의 규모가 클 수록 그 수는 적고 도시간 거리는 멀어지며 기능의 수도 많아진다.

(배후지역도 넓다)

도시의 규모가 작으면 그 수는 많으며 도시간 거리는 가깝고 기능 수가 적다(배후지역 좁
다)





(2) 도시의 형태와 기능





1) 도시의 형태

① 교통 수단과 도시 형태의 변천

a. 도보·우마차 시대 : 근대적 교통 수단이 등장하기 이전의 모든 도시(원형)

b. 철도·전차 시대 : 시가지가 철도나 전차 노선축을 따라 확대 (별형)

c. 자동차 시대 : 전차 노선축에서 소외된 공간 지역까지 자동차 교통이 확산,

원형 확대·발전

d. 최근 : 고속도로망, 순환도로망을 따라 도시의 형태 확장

→교통의 원활한 소통, 주거 지역의 교외화, 기능 지역의 분산

② 도시의 평면형태(가로망)

a. 불규칙형 : 자연발생적 도로망(미로형). 역사가 오래된 자연 발생적 도시

b. 규칙형 : 직교형, 방사형, 직교 방사형

ㄱ. 직교형 : 바둑판 모양의 격자상 도로, 계획, 건설 및 확장이 쉬움

(신의주, 대전, 이리, 군산)

ㄴ. 방사형 : 미관상 좋고 주변 지역에서 도심부로의 접근이 쉬우나 복잡,

중앙 광장이나 시청 등을 중심 (진해, 나진, 나남)

ㄷ. 직교 방사형 : 도시 미관도 좋고 교통의 효율성도 높음, 계획· 건설·확장 용이,

최근 건설된 공업도시 (창원, 안산)

c. 혼합형 : 오랜 역사를 가진 대도시 → 미로형(구시가지) + 계획형(신시가지)

③ 도시의 입면형태 : 건물 높이와 건물 밀도로 구분

a. 도심: 건물의 집중화와 과밀화로 집약적 형태

b. 주변부: 도심에서 멀어질수록 건물 높이와 밀도가 낮아짐





2) 도시의 기능적 분류

① 도시의 기능 분류 (주 기능)

a. 기반 활동 : 외부 지역에 재화, 서비스를 제공하는 활동

→ 생산도시(공업, 광업, 수산도시)

b. 비기반 활동 : 도시 자체 주민의 수요를 충족시켜 주는 기능

교육, 행정, 의료, 교토 및 서비스업

→ 소비도시(군사 , 관광도시)

c. 교역도시 : 교통, 상업도시

d. 종합기능도시

② 도시의 유형 분류 (주민의 직업)

a. 종합 기능 도시 : 행정 중심지를 이루면서 상공업 기능도 고루 수행

(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 인천, 청주, 전주 )

b. 공업 도시 : 부천, 구미, 창원, 울산, 여천, 포항, 안산, 안양, 마산 등

c. 광업 도시 : 상동, 사북, 도계, 태백 등(자원의 성쇠에 따라 인구변동 大)

d. 수산업 도시 : 속초, 주문진(성어기의 인구유입이 많다)

e. 군사 도시 : 원주, 진해, 동두천, 의정부, 오산 등

f. 관광 도시 : 경주, 부여, 제주, 서귀포(계절과 휴일에 따라 인구이동 大)

g. 교통 도시 : 제천, 영주, 천안, 김천, 이리(철도의 분기점에 위치)










< H. J. Nelson의 도시 기능 분류 >

먼저 전국 각 도시마다 9개 기능별로 고용 비율을 계산하고 이 비율을 다시 9개 기능별로
전국 평균을 구한 다음 각 도시의 기능별 비율이 평균치 보다 얼마나 많은가( 1 표준편차
이상 ) 그 정도를 이용하여 도시 기능의 특화 정도를 평가. 특화된 기능이 3개 이상일 때
종합 기능 도시, 2-3개일 때 복합 특화 도시, 1개일 때 단일 특화 도시로 분류





(3) 도시의 구조





1) 도시의 지역분화

: 도시의 내부가 사회 계층, 도시 기능의 분화로 여러 개의 기능 지역으로 나누어지는 현상

① 지역 분화의 요인

a. 접근성 : 다른 모든 지점과의 상대적 관계에서 나타나는 총체적 거리의 정도, 도심부 최


b. 지대 : 토지 이용에서 얻어지는 수익으로 지가가 비싸면 지대도 높음,

도시의 기능은 경쟁에 의해서 지대가 높은 업종이 우선적으로 입지함

② 접근성과 지가 → 토지 이용의 차이 발생 → 지역 분화

a. 집심현상 : 도시 기능이 접근성과 지대가 높은 도심으로 집중하려는 경향

→ 중추 관리, 고급 서비스 기능

업무 관리 기능, 서비스 기능은 접근성과 지가가 높은 도심으로 집중

b. 이심현상 : 넓고 값싼 토지가 필요한 공장, 주택, 학교는 외곽으로 이동

③ 도시의 토지 이용을 용도 지정(용도 지역제) ⇒ 인위적인 지역 분화

④ 도시의 각 기능은 상호경쟁하여 높은 지대를 지불하는 업종이 우선 입지

※ 도시가 성장하면 도심의 기능이 전지역에 골고루 미치지 못하게 된다.

이 때 도심 기능을 분하는 부심이 교통의 결절점에 조성되어 도심의 과밀난을 완화시키기도
한다.





2) 도시 내부 구조

: 중심 업무 지구 → 부도심 → 주거지역 → 개발 제한 구역 → 도시 근교 및 위성 도시

① 중심업무지구(Central Business District) : 도심

a. 접근성과 지가 최대 : 토지 이용이 집약적 → 건물의 고층화와 과밀화

b. 중심 업무 기능(관청, 회사, 금융기관),

서비스 기능(고급 전문 상가, 백화점, 유흥가) 밀집

c. 주간 인구는 많으나 야간(상주) 인구는 감소 ⇒ 도심 공동화 현상

d. 교통이 혼잡(rush hour, 병목 현상)하고 공해가 심함.

② 중간 지역 : 주택 및 공장이 혼재하는 지역

a. 도심 주변부 : 서비스 기능, 저급 주택, 경공업이 혼재한 점이 지대

b. 점이지대 → 주택지역 → 공업지역

c. 부심 : 지가가 도심 다음으로 높으며 건물도 고층화. 상업, 서비스업,

유흥가 발달(도심 기능의 일부 분담 : 도심의 과밀화와 교통난 해소)

중추 관리 기능 미약: 상업, 오락 기능 발달

도시 문제의 대책으로 부심을 개발하여 도시 내부 구조가 다핵화됨

③ 외곽 지역 : 도시적 경관과 농촌적 경관이 혼재

a. 신흥 주택가, 아파트 단지가 조성됨

b. 개발제한구역을 설정하여 도시의 무질서한 팽창(sprawl 현상)을 억제, 녹지 보전

④ 도시권의 확대 : 인구 증가와 교통의 발달로 주변 농촌 지역의 교외화 촉진

→ 위성 도시의 발달, 대도시권 형성( 연담 도시화 현상)





3) 도시 내부 구조 이론

① 동심원 이론 : 버제스

중심 업무 -- 점이 -- 노동자 주택 -- 중산층 주택 -- 통근자 주택 지구

② 선형 이론 : 호이트

도심에서 외부로 뻗은 간선 교통로를 따라 부채꼴의 지역 분화 진행(교통로를 중시)

③ 다핵심 이론 : 해리스, 울만

→ 핵 : 동종 업종의 집중, 특정 기능의 특정 지역 입지





(4) 도시화와 도시 문제





1) 도시화

① 도시화 : 도시의 수, 인구, 면적, 도시적 생활 양식의 확대

② 도시화 단계


a. 초기 단계 : 도시화율 30% 이하, 농업 중심 사회



b. 가속화 단계 : 이촌향도현상 심화, 공업화 초기 단계



c. 종말 단계 : 도시인구율 70% 이상, 신장률 둔화











③ 우리 나라 도시화의 특색 : 대도시의 확대 현상, 수도권의 과밀화

a. 대도시(서울, 부산)의 과대 팽창, 중소도시의 정체 → 지역차 발생, 국토의 불균형 발전

b. 수도권의 과도한 팽창과 위성도시의 급성장으로 거대 도시권을 형성( 역도시화 현상)





2) 도시 문제 : 인구의 도시 집중 → 도시의 과밀화, 거대화 → 각종 생활상의 문제

① 주택문제 : 인구 집중과 핵가족화로 주택 부족, 지가 상승, 불량 주택 지구

② 교통문제 : 좁은 도로, 주차 곤란 → 경제적 손실 초래

③ 도시의 무질서한 팽창 : 녹지 및 경지 잠식, 시가지 확장으로 통근거리 연장, 지가 앙등

④ 공해 문제

⑤ 공공 서비스 시설의 부족(상하수도, 교육, 의료, 문화)





3) 대책

① 대도시의 인구 및 기능의 지방 분산

: 자족 기능의 신도시 건설, 지방 도시 육성 및 기능의 지방 분산

② 도시 계획

a. 대도시의 팽창 억제 : 개발제한구역 설정 및 실시

b. 도시 재개발 : 용도지구제

도시 기반 시설 확충(주택 개량, 상하수도 시설 및 교통 시설 확충, 공원·녹지의 조성)



@-도시의시초.(이것부터아세야,합니다.)




도시는 어떻게 생겨나고 발전했을까?


1. 도시의 발생

[도시의 의미]

※도시(都市)라는 용어의 기원
『漢書』都市
『周書』都市部(백제의 관직명) 등이 나타남.
都는 군주의 거처인 王都를 뜻하나, 원래의 뜻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가리킨다. 중국
문헌에 나타나는 도시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상업이 번성한 곳을 뜻한다. 따라
서 고대의 도시는 首都를 의미하는 都와 市場을 의미하는 市를 합쳐 놓은 단순한 명칭이었
을 것으로 봄.
이와 같이 고대의 우리 나라와 중국의 도시란 용어는 오늘날과 같이 도시 그 자체를 가리
키는 말이 아니라 도읍지의 시장 혹은 시장이 있어 번성한 곳을 나타내는 말로서 지금의 도
시와는 다른 것이다. 근대적 의미의 도시란 용어는 20세기 이후 사용되기 시작했고, 농촌과
구별되는 도시란 개념은 주로 邑內, 城內 등의 용어를 사용했다.

※도시(都市)의 사전적 의미
①상공업을 중심으로 한 경제 및 행정·문화·교통망·편의시설 따위의 중심지가 되며, 인
구가 집중하여 그 밀도가 현저하게 높은 지역. ↔ 농촌, 촌락
②도회지(都會地)↔ 시골

※고대도시의 개념 -수 천명 이상의 주민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비교적 큰 규모의 취락이
며 주로 비 농업적 기능, 즉 상업·공업·정치·경제·문화·군사적 기능을 보유하거나 부
문적으로는 농업중심지로서의 기능도 보유한 취락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는 취락의 대다수
주민이 비농업적 직업에 종사하고 일련의 통합된 건축물들이 존재하며, 단일 정부에 의하여
통치되고 그 영향력이나 지배력이 주변지역까지 확대 될 경우, 그 취락의 규모와 상관없이
고대도시로 확대해석 한다.


[도시의 발생 배경]

① 수렵채집경제에서 농업경제로의 전환(신석기혁명)은 이동생활에서 정착생활로의 주거 형
태의 변화를 가져와 취락의 형성을 가져오고 농업은 수렵에 비해 더 많은 인구를 필요로 하
게 되어 취락의 규모를 커지게 하였다.
② 농업을 위한 치수 사업(수리 관개 시설)은 주민간의 협력 및 대규모 인원의 동원을 필요
로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지혜(토목, 측량, 수학, 천문 등)의 발달을 가져온다.
③ 농업의 발달은 잉여 생산물을 낳고 잉여 생산물의 발생은 인구의 출산력을 높이고 인구
흡인력을 발휘하게 된다. 나아가 잉여 생산물은 빈부의 격차와 교환 경제를 낳고 직업 및
계급의 분화를 가져 옴.
④ 지배계급(신관, 전사), 상인, 장인, 농민, 노예 등의 사회계층 분화 진행
⑤ 취락에는 주택, 창고, 왕궁, 신전, 성곽, 상점, 도로, 공중 목욕탕 등이 건설됨.
⑥ 의사전달 수단으로써의 문자 발명 사용.
⑦ 금속기(청동기, 철기)의 사용과 교통 수단(수레, 돛단배)의 발달-도구, 무기의 혁신, 교역
과 정복 사업 활발, 부족 통합 촉진
⇒ 도시 형성

[고대도시의 발생 지역]


① 최초의 도시들이 발생한 지역은?
B.C. 3000~400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 조성된 비옥한 초
승달 지대(Fertile Crescent)로서, 오늘날의 이라크 지역이다.

② 이유(배경)
-.비옥한 초승달 지역은 주변지역에 비해 수목이 잘 생장하는 비옥한 지역으로 잉여생산이
빠른 시기에 달성될 수 있었다. 이 일대의 주민들은 B.C 8000년경에 그들이 채집하고 사냥
하던 동식물을 작물화 하고 가축화 하기 시작했다. (밀, 보리 등의 화본과 식물-돼 지·
소·말·낙타 등에 대한 지식 축적)
-.지금부터 약 5000~8000년 전 지구상의 큰 기후 변동 : 사하라 일대의 사막화 진행으로 주
민의 대하천(나일강,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강) 주변으로 이동하게 됨.
-.인구의 집중에 따른 식량증산의 필요성과 강의 범람을 막기 위한 치수관개 사업 진행.
-.비옥한 초승달지대의 농업혁명은 잉여생산물을 낳고, 인구 집중을 가져옴.
나아가 직업의 분화, 계급의 발생, 문자의 발생, 지적수준의 향상 등 고대도시와 고대 문명
이 일어나게 되었다.

③ 그 밖의 도시 발생 지역은?
-메소포타미아, 나일강 유역, 인더스강 유역, 황하 유역, 중앙 아메리카 등 고대문명 발생지
와 일치함. 인류의 문명은 도시에서 비롯된 것임을 시사함.

④ 세계의 주요 고대도시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강 사이의 땅)
: 아르메니아 산지의 지형성 강우5월경 홍수 관개시설 필요, 대추야자, 돼지, 들새, 물고기
풍부 ⇒ 에리두(Eridu). 우르(Ur). 아카드(Akkad). 바빌론(Babylon)

-.나일강 유역
: 비옥한 충적 평야 형성, 홍수조절 위한 수로 공사로 협력, B.C.3200년경 고대도시 발생
⇒ 멤피스(Memphis), 텔엘아마라나(TellelAmarana), 테베(Thebes)

-. 인더스강 유역
: 계획적으로 설계된 계획 도시 등장( B.C. 2200년경 문자, 바퀴달린 수레, 성채, 하수로, 목
욕탕, 창고, 집회소 등을 갖춤.)
⇒모헨조다로, 하라빠

-. 황하 유역
: 황하 유역의 강 언덕(비옥한 황토 지대)에 정착농경이 이루어지면서 취락 발생. 자연제방
은 대규모 취락 입지 장소 제공, B.C. 1500년경, 殷 왕조 성립.
⇒안양(은허), 쳉조우

- .중앙 아메리카
: 북미 대륙과 남미 대륙을 연결하는 비교적 좁은 띠모양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지역, 메소
아메리카라고 부른다. B.C.100년경 멕시코 계곡과 마야 지역에 고대도시가 형성
⇒테오티우칸(Teotihucan)-계곡의 저지대 비옥한 충적평야, 항상 솟는 샘, 종교활동의 중심
----아즈텍 문명 탄생.
⇒마야(Maya)지역 -열대 우림기후의 저지대, 많은 인구포용, 주식이 수수와 콩, 옥수수는
다른 작물에 비해 노동력이 적게들고 손쉽게 잉여식량 확보


2. 한국의 도시발달

[고대도시의 발생]

① 우리 나라 최초의 도시는?
: -.고조선의 왕검성으로 추정(그 위치와 규모 등이 정확히 밝혀지지 못함)
-.우리 민족 고유의 도시로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고구려의 초기 수도였던 국내성을 들
수 있음. 이 도시는 산성과 궁궐을 갖춘 전형적인 성곽도시의 성격을 띰.
-.한강 이남 지역은 한강 이북보다 도시의 발생 시기가 늦음(우리나라의 고대 문화는 북부
지방에서 먼저 발달하고 남부 지방으로 확대되기 때문)

② 고대(삼국시대~남북국 시대)
-.대체로 5세기 전후 삼국은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확립함에 따라 수도와 지방행정 중심지
에 관아 및 군인과 그 예속민, 상공인이 모이고 시장을 형성하게 되자 성곽을 축조함 으로
써 정치행정의 중심도시가 형성되었다. (예; 고구려의 3경, 백제의 22담로, 신라의 수도와 2
소경)
-.통일 신라는 당나라의 주군(州郡)제도를 모방 9주 5소경제도를 두어 오늘날의 주요도 시
를 형성함.<5소경-충주, 청주, 원주(←강릉), 남원, 김해. 9주-尙州, 良州(양산), 康州(진주),
漢州(광주), 朔州(춘천), 熊州(공주), 溟州(강릉), 全州, 成州(광주)>
-.오늘날의 우리 나라의 도시 가운데 신흥공업도시나 신도시를 제외한 대부분의 주요도시
는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고 봄.

[중세의 도시]

① 고려
- .송악(개성)에 도읍(태조), 12목 설치(성종), 5도호부 8목으로 개편(현종)
- .5도호부 : 안남(수주, 부안), 안서(해주), 안북(영주, 안주), 안동(경주), 안변(등주)
- .8목 : 광주(경기도), 충주, 청주, 진주, 상주, 전주, 나주, 황주
- .3경 : 개경, 서경(평양), 동경(경주)→남경(한양)
⇒ 이상의 도시들은 정치와 군사적 거점으로 대개 성곽도시의 형태를 갖춤

② 조선(근대 이전)
-.건국(1392), 한양천도(1394)
-.태종 : 지방제도 개혁 ⇒ 전국을 8도-부, 목, 대도호부, 군, 현 등의 약 330개 행정구역으
로 개편, 여기서 대도호부 이상은 도시적 성격이 강하였다.
-.조선후기 : 농업 생산성의 향상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전반의 활성화는 도시의 상업적 기
능을 증대시킴. (대동법의 시행, 사상의 대두, 지방 장시의 발달 등.) 그러나, 20세기 이전 전
산업시대에는 市域 내에서도 농업 인구가 상공업 인구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함.

⇒ 근대 이전의 우리 나라의 취락은 대체로 80리 간격으로 분포, 고대의 이집트나 메소포
타미아에서도 취락간의 간격이 대체로 30km로 밝혀짐.(운송수단을 수레에 의존하던 육상의
경우는 곡물이나 물자수송에 있어 30km 내외의 거리가 유리함.)
※ Blache의 「인문지리 원리」에 의하면 도시는 일반적으로 어떤 장애물이 나타나거나 새
로운 조건과 타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장소에 발생한다. 즉, 산악지대로부터 벗어나는 출구,
하천의 도하지점, 사막의 관문, 해안과의 접촉점 등과 같이 새로운 교통수단을 이용해 야 하
는 곳에 도시가 형성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③ 19세기 말엽의 도시
* 10부 : 한성부- 수원부, 광주부, 개성부, 강화부(수도방위의 요충지)
전주부, 경주부, 함흥부, 평양부, 의주부(지방의 요지)
* 20목 : 지방행정의 중심지로 성곽도시를 이룸
경기도 - 여주, 파주, 양주
충청도 - 충주, 청주, 홍성, 공주
경상도 - 상주, 진주, 성주
전라도 - 광주, 능주, 나주, 제주
강원도 - 원주
평안도 - 안주, 정주
함경도 - 길주
* 5대도호부 : 안동, 창원, 강릉, 영흥, 영변(군사적 요충지)
* 기타 : 75도호부, 77군, 148현 (지방행정중심지)
* 대외무역 관련 상업도시 : 부산포(동래),염포(울산),의주,회령, 경원

※ 이상에서 살펴 본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의 우리 나라의 도시형성과 발달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대도호부 이상의 市級에 해당하는 도시의 7할 정도가 아래의 [그림1-2]처럼 X축에
분포하였다는 것이다. X축이라 함은 조선시대 6大路 가운데 4大路인 서울-의주간의 의주
로(西路), 서울-동래간의 영남로, 서울-경흥간의 경흥로(北路), 서울-해남간의 호남로 (三南
路)에 인접한 지대를 가리킨다. 이 축은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것으로, 4대로 가운데 의
주로와 영남로가 한반도의 主軸에 해당하며, 경흥로와 호남로가 副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근대 이후의 도시]

① 일제 침략기~일제 강점기
* 강화도 조약 이후 부산·인천·원산·마산·목포·군산 등의 개항, 이를 근간으로 우리
나라의 근대도시가 발달하기 시작함.
* 우리 나라의 근대도시는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의하여 일본이 필요로하는 자원의 개발과
대륙 침략의 기지 확보 등을 위해 이루어졌다.
* 대일 무역항구로 발달한 도시 : 부산· 인천· 원산 ·목포
* 신설 철도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도시 : 대전 ·이리 ·천안 ·신의주

---도시 발달은 그 하부구조의 하나인 교통로의 발달과 관련이 깊다. 특히 철도는 근대국가
에 있어 정치·경제·사회 및 기능의 제측면에 걸쳐 필요불가결한 시설인 동시에 경제 발전
과 도시발전의 혈관 역할을 담당한다. 우리 나라에서의 철도는 한반도의 치안유지와 일제의
대륙침략을 뒷받침하기 위한 군사철도로서의 기능과 자원수탈을 위한 수단으로 출발하였다.
일제에 의한 우리 나라 철도 건설은 도로 교통시대를 거치지 않고 바로 철도 교통시대로 돌
입함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지역 격차를 유발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국유철도로 운영되어 국
가 자본주의의 발달이 민간 자본주의 발달보다 앞섬으로써 경제발전 과정에 있어서 파행성
과 비정상적 도시발달을 초래하였다.

(그림4-10)우리 나라 철도망의 발달과 도시












* 대륙침략을 위한 광공업 도시 : 원산·흥남·함흥·북청·성진·길 주·청진·나진·평
양·남포·송림·신의주·사리원·해주·강계
* 식량수탈정책에 따른 미곡 집산지와 적출항으로 발달한 도시
: (집산지)전주, 광주, 이리, 정읍, 대전, 청주, 조치원, 논산, 대구, 김천, 밀양, 진주, 평양, 함
흥, 신의주, 사리원, 선천(적출항)군산, 목포, 부산, 마산, 남포, 원산, 성진,
청진
이들 도시에는 한반도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수탈하고 토지 약탈을 위한 동양척식회사의
지점·출장소·사업소 등이 설치됨.
전체인구에 대한 도시 인구의 비율 1925년 4%→1944년 13%로 증가

② 해방이후의 도시 성장

<특징>
-해외 동포의 귀환과 북한 동포의 월남에 따른 남한의 도시인구 급증.
-6·25 전쟁 중 피난민의 영남지방 이동으로 대구·부산·마산 등의 도시인구 급증
-1960년대 초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추진으로 離村向都 현상으로 기존 대도시와 남동 임
해지역 신흥 공업도시의 인구급증(울산, 창원, 마산), 1963년 부산이 직할시가 되었고, 전체
인구에 대한 도시인구비율은 42.6% 에 이름.
-서울·부산·대구·인천·광주·대전 등 지방 중심도시와 울산·묵호·장성 등의 광업 도
시, 제천·영주·천안 등의 교통도시, 동두천·의정부의 군사도시의 증가가 뚜렷이 타남. 반
면, 전주·충주·경주·여수는 인구증가율 저하, 군산·충무·김천·강릉·순천은 인구 정체
상태, 마산은 오히려 감소-1970년대 수도권의 전철화와 공업화로 서울 위성도시의 급성장
(부천, 안양, 성남, 광명)과 지방 대도시의 계속적 성장 지속
-1990년대 주택난과 인구분산 정책에 따른 신도시 건설정책(분당, 일산, 중동, 평촌, 산본
등)


3. 도시의 기능

고대의 도시는 방어적 성격이 강했다. 따라서 도시 전체를 성곽으로 둘러싸고 때로는 해자
(垓字)를 둘러 외적의 방어에 대비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도 일제시대 이전에는 대부분의 도
시에 성곽(읍성)이 둘러처저 있었다. 고대에는 이러한 도시가 하나의 국가를 이루어 성읍 국
가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중세 유럽의 도시도 이민족(훈족, 게르만, 마쟈르족, 이슬람
족, 노르만)의 침략에 대한 방어적 기능이 강하여, 봉건 영주의 성곽을 중심으로 도시가 형
성되었다. (---burg : 함부르크, 아우크스부르크, 룩셈부르크, 등) 근대의 도시는 중심지 기
능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주변 지역에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능을 중심지 기능이라
하고, 중심지 기능이 자리잡고 있는 장소를 중심지라고 한다. 도시는 크든 작든 중심지 기능
을 수행한다. 중심지에서 주변의 배후 지역에 공급하는 재화나 서비스가 도달하는 공간적
범위를 도시권·서비스권·시장권·영향권 이라 하는데, 상품이나 서비스의 종류에 따라 그
범위가 다르며, 도시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기능의 종류가 더 많고 또한 더 멀리까지 영향
이 미친다.


※ 심화 학습


1. 중심지 이론


도시는 하나만이 고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서로 어느 정도의 관련을 가지고 존재한
다. 소규모 도시는 기능적으로 하위의 단계에 있고 도시권도 좁으며 더 상위 도시의 지배하
에 놓여 있다. 이리하여 도시는 기능적·규모적으로 보다 상위의 도시에 통합되고 최종적으
로 한 개의 최상의 도시에 통합된다. 이 가설적 전제에 의한 도시의 규모와 도시권과 그 배
치 관 계에 관한 일반적인 개념이 중심지 이론이다.


2. 중심지 이론의 구성 내용


① 최소 요구치 : 중심지가 그 기능을 유지하고 계속 존립하기 위해서는 이윤이 발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요 수준(판매 수준)이 요구된다. 이와 같이 이윤을 발생시키는 최소한의 수
요 수준을 최소 요구치(threshold)라고 한다.
② 재화와 서비스의 도달 범위 : 중심지로부터 거리가 증가함에 따라 중심지가 제공하는 재
화와 서비스의 가격이 증가되면 수요는 줄어들게 되어 결국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는 수요가
발생하지 않는다. 이 지점을 재화와 서비스의 도달 거리 또는 범위(range of a goods and
services)라고 한다.
③ 중심지의 계층 구조 : 중심지간에는 중심지 기능의 보유 정도에 따라 계차가 나타난다.
이 계차를 중심지 계층이라 한다.

⇒ 우리 나라의 도시를 중심지 계층구조에 비추어 살펴보면 전 국토를 영향권으로 하는 서
울 이 최상위의 중심지이고, 그 아래 계층의 중심지는 부산·대구·광주·대전 등으로 광역
생활권의 중심지이다. 이보다 하위 계층의 중심지는 전주·청주·춘천 등의 도청 소재지와
지방 중심 도시이고, 보다 하위 계층은 군청 소재지와 면 소재지 등이다.


3. 기능에 의한 도시 분류


일반적으로 도시를 기능적 특색에 따라 분류할 때에는 산업별 취업 인구의 비율 혹은 산업
별 생산액의 비율을 지표로 해서 구분한다. 도시는 대체로 복합적 기능이 많은데 그 중에서
탁월한 기능에 의해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① 생산 도시 - * 공업도시 : 창원·안산·구미(신흥 공업 도시), 울산·여천(석유
화학공업), 포항·광양(제철 공업),안양·부천·인천 등
* 광산도시 : 태백·사북·도계
* 수산도시 : 속초·주문진·사천
* 임업도시
② 소비 도시 - * 정치도시 : 서울·과천
* 주택도시 : 분당·평촌·일산·산본
* 교육도시 : 청주·경산
* 군사도시 : 진해·연무·오산·원주
* 종교도시
* 관광보양도시 : 경주·부여·서귀포
③ 교역 도시 - *상업도시 : 김천·안동·원주·진주·충주·여수
*교통도시 : 대전·익산·군산


<도시화>
대도시로 인구가 집중함으로써 도시 지역은 계속해서 교외로 확대되고 있다. 도시 근교의
농촌에서는 농지가 점차로 주택지나 공장 용지로 전용되고, 농촌의 주민들은 도시의 상·공
업 등의 노동력으로 고용되며, 생활 양식도 도시적으로 변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을 도시
화라고 한다.


<학생용 학습지>


1. 도시의 발생

도시란 무엇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는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서 발전했을까? 세계사
적 관점에서 도시라는 용어의 개념 변천과 도시 발생의 시기와 배경을 알아보자.

■ 도시란 무엇인가? 에 대하여 각자의 의견을 아는 대로 적어보자.
예):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




■ 고대의 도시는 ( )를 의미하는 都와 ( )을 의미하는 市를 합쳐 놓은 용어로, 도읍지의 시
장 혹은 시장이 있어 번성한 곳을 가리키는 단순명칭으로 사용되었다.


■ 도시란 용어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자.

②도회지 ↔ 시골

※ 고대 도시 : 수 천명 이상의 주민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비교적 큰 규모의 취락이며, 주
로 비 농업적 기능 즉 상업·공업·정치·경제·문화·군사적 기능을 보유하거나 부문적으
로는 농업중심지로서의 기능도 보유한 취락을 가리킨다.

■ 도시발생의 배경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인구 집중을 가져오는 요인들을 나열해 봅시다.)

-.수렵채집경제에서 생산경제로의 전환 : 농업은 수렵에 비해 더 많은 인구를 필요로 함.
- .농업을 위한 치수관개 사업 : 많은 인구와 협동작업의 필요성 증대, 지혜의 발달을 가져
옴. - .농업 발달에 따른 잉여 생산물은 인구의 출산력과 흡인력을 높여 줌 : 인구 집중
- .인구의 증가는 계급의 분화, 직업의 분화를 가져옴.
- .지배계급은 의사전달 수단으로 문자 발명.
- .금속기의 사용과 교통수단의 발달은 교역과 정복사업을 활발하게 하고 부족통합을 촉진
시 킴.

이상과 같은 요인으로 도시(국가) 발생이 나타남.

■ 고대도시의 발생지역은 어디일까?
-. 세계 최초의 도시 발생지역은?
- .그밖의 고대 도시 발생지역은?
a.
b.
c.
d.



2. 한국의 도시 발달


우리 나라의 도시 발달에 대하여 알아보고 다음의 각 질문에 알맞는 답을 적어보자.

■ 우리 나라 최초의 도시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언제 어느 곳에 있었던 도시일까?


■ 오늘날 우리 나라 도시의 근간이 된 고대 도시는?

①고구려(3경):
②백제(22담로):
③신라(2소경):
④통일신라(9주 5소경):

■ 고려 시대의 우리 나라 주요 도시들을 생각해 보자.

①도읍지 및 3경 :
②5도호부 :
③8목 :

■ 삼국시대∼조선시대의 도시형성과 발달 과정에서 나타나는 특징인 X축이란 무엇인가?
다음의 지도상에 X축을 그려보고 주요 도시들을 표시해 보자.





■ 일제 침략기∼일제 강점기의 도시 발달의 특징을 열거해 보시오.

1. 일본의 경제적 침투에 따른 개항장(무역항)의 발달 :
2. 한반도 자원수탈과 대륙침략을 위한 철도역을 중심으로 도시 발달 :
ㄱ. 대륙침략을 위한 광공업 도시-
ㄴ. 식량수탈을 위한 쌀의 집산지 및 적출항-
ㄷ. 철도 건설에 따른 교통 중심지로 발달한 도시

치우천황 및 배달국이 우리나라민족??(내공)

... 이번에는 치우천황배달국이 중국민족이라는 주장을 펼치면서 삼묘족과 구려족이 모두 우리나라 민족이 아 니었다고 주장하는데 제가 도무지 반박할수가 없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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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공70) 치우천황에 대해서 물어봅니다...

... 전투를 안져서 무신이란 말이 붙엇다 해도 치우천황님은 무술실력도 강한분이엿을까요 ???? ㅋㅋㅋ 우리 나라는 고조선이전에 이미 환국과 배달국이라는 민족국가가...

치우천황에관해서..

우리민족 배달국 14대?? 환웅이신 치우천황에 대한 질문입니다.. 저도 역사에 관심이... 그렇게 되면 우리나라의 반만년 역사가 1만년으로올라갈것이고 중국과 동등한 역사를...

환국과 배달국은 존재했나요? 내공100겁...

... 신고들어갑니다.내공냠냠XXX 신시 배달국이 중국... 16일 배달국 14대 자오지환웅 치우천황은 우리민족과 관련... 蚩尤에 대하여 우리 나라 역사에서는 별로 연구된 바 없기...

고조선 이전에나라 배달국 환국

... 치우천황이 중국 헌원과 싸워 이순신처럼 패하지도... 답해주시길바랍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는 배달국... 실은 토착민(웅족)이 밝은무리(하는민족)에 합류되는 과정을...

치우천황은 실존인물인가요?

... 치우천황은 실존인물인가요? 실존인물이라면 우리민족은... 한웅이 배달국을 세운 일등공신이었습니다. 치우천황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