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국과 배달국은 존재했나요? 내공100겁니다.

환국과 배달국은 존재했나요? 내공100겁니다.

작성일 2012.04.11댓글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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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국과 배달국이 존재했다는 이유와 증거(문명같은것?,문명이 있다면 문명의 설명도 해주세요.)

환빠나 증산도 같은 사이비 종교를 토대로 얘기하시면 신고들어갑니다.내공냠냠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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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 배달국이 중국 사서에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

중국인들이 역사를 쓰는 고유 필법을 춘추필법이라고 한다
. 중국에 영광스러운 일은 한껏 부풀려 쓰면서 수치스러운 일은 감춘다, 중국은 높이면서 주변 나라는 깎아내린다, 중국사는 상세히 쓰면서 이민족 역사는 간략하게 적는다, 이 세가지 원칙인데 표면적으로는 대의명분을 밝혀 세우는 역사 서술법이지만 사실은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중화주의에 충실한 필법이다. 자신들의 역사가 동이족에서 비롯되었다는 역사 콤플렉스를 이 춘추필법으로 덮으려 한 것이다.
 

공자(孔子)의 춘추필법(春秋筆法) - 중국의 역사 왜곡

존화양이(尊華攘夷) : 중국은 높이고, 상대국가는 깎아 내린다.

상내약외(詳內略外) : 중국 안의 일은 상세히 기록하고, 외국의 일은 간략하게 기록한다.

위국휘치(爲國諱恥) : 나라를 위하여 수치스러운 일은 철저히 감춘다


사마천 이하 역대 중국의 사가들이 춘추필법에 의거하여 역사를 기록한 결과
, 동북아 문명의 주체였던 한민족 역사는 중국 변방 오랑캐 족속의 하잘 것 없는 역사로 왜곡되고 말았다. 사마천 사기에 보면 조선에 대한 정확한 명칭도 안나온다. 숙신, 쥬신, 발 등등 애매하게 나온다. 동이족에 대해서. 사마천이 우리 민족 국가에 대해서 굉장히 깎아내리고 그 실체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고조선의 제후국 이름들로 썼다. 조선도 인정을 안하는 사마천은 배달국 또한 인정을 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중국역사기록에도 청구라는 기록은 등장한다. 청구는 동방의 나라라는 뜻으로, 치우천황께서 영토를 광대히 넓히신 이후 이전한 수도의 이름이다. 배달이란 단어가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청구를 통해 배달의 존재를 알 수 있다. 또한 1920년대 발견된 홍산문화는 배달국으로서만 해석이 가능하다. 국가형성의 기본 조건을 갖추고 있는 홍산문화를 설명하는 문헌이 다른 어떤 사서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고고학적 유물이 시간이 흐를수록 드러나며 환단고기를 점점 입증해 주고 있는 상황이다.
 

삼국유사에는 요나라가 생겼을 때 단군조선이 생겼다고 한다. 요나라 왕이 생기고, 고조선 단군이 즉위하고. 왕이 없다가 어느 순간 툭 튀어나오지 않는다. 먼저 왕이라든지, 어떤 국가의 세력이 존재했을 거다. 조직론적으로 보면 당연한거다. 서자환웅에서 서자를 무리로 해석할 수 있다. 아들의 모임 수장인 환웅. 환웅이 서자라는 조직의 우두머리이면 그 전에 또 어떤 조직이 있었다는 것이다. 조직학 하시는 분 입장에서는 그렇게 볼 수 있다.(배재대 손성태 교수)

그리고 환국에 대한 명칭은 우리나라 다양한 고전에 많이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배달은 신시神市라는 명칭으로 많이 언급된다.(환단고기 역주본 해제 150 페이지 참조)

 

 

* 청구(靑邱)는 '동방의 나라'라는 뜻이며 우리나라의 별칭인데 예로부터 중국인들은 동방의 우리나라를 가리켜 '청구국(靑邱國)'이라 불러왔다. 청구는 본래 배달국을 지칭하는 말이다. 초대 황웅천황이 백두산의 신시(神市)에 도읍한 이래 13세 환웅까지 계속되다가 14세 치우천황 때 도읍을 이곳으로 옮겼다. 신교의 오행철학에서 동방(3.8木)은 청(靑)색을 상징하므로 동방에 위치한 우리나라를 '동방의 나라'라는 뜻으로 청구국이라 한 것이다.

 

* 우리 민족을 예로부터 '배달'이라 불러온 까닭은 배달이라는 국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배달국은 전기의 신시시대와 후기의 청구시대로 나뉜다. 신시시대는 고고학적으로는 후기 신석기(홍산문화)시대로 체계적인 국가조직이 나타난 시대이다. 요녕성 능원현과 건평현 등에서 발굴된 유적에서는 정교한 옥기와 돌무지 무덤, 여신상, 사당  건물터가 발굴되었고 능원현 남성자와 적봉에서는 성터도 발굴되었다. 동일 문화권이라 할 수 있는 만주 좌가산 유적에서도 홍산문화의 그것과 흡사한 유물들이 출토되었고 신락 유적에서는 가장 오래된 봉황문(鳳凰紋)조각이 발굴되어 주목을 받앗다.

 

환국의 실존을 기록한 문헌들

 

환국을 기록한 문헌

 

<삼국유사三國遺事>

일연 1206~ 1289

古記云 昔有桓國(謂帝釋也) 庶子桓雄

<권1 기이1 고조선(왕검조선)>

 

<약천집藥泉集>

남구만南九萬 1629~ 1711

古記之說 云昔有桓國謂帝釋庶子桓雄

                <제29 잡저雜著 동사변증東史辨證 단군檀君>

 

<풍암집화楓巖輯話>

유광익柳光翼 1713~ 1780

古記說云爾者 有桓國帝釋庶子桓雄

 

<수산집修山集>

이종휘李種徽 1731~ 1797

朝鮮之初 有桓國帝釋庶子桓雄

권12 동사東史 지志 신사지神事志>

 

<해동악부海東樂府>

이복휴李福休 ?~?

古記云 昔桓國君庶子雄

<권1 환웅사桓雄詞>

 

   <환단고기>, 안경전 역주, 150쪽

 

배달의 실존을 기록한 문헌들

 배달국의 ‘신시’를 기록한 문헌

 <삼국유사>

일연 1206~ 1289

古記云 昔有桓國(謂帝釋也) 庶子桓雄 .....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권1 기이1 고조선(왕검조선)>

<표제음주동국사략標題音註東國史略>

유희령 1480~ 1552

檀君 姓桓氏 名 王儉 ..... 有神人桓因之子 桓雄 ..... 謂之神市 在世理化

<권1 전조선>

 <신증동국여지승람>

이행 홍언필 1530

太佰山(古記 昔有天神桓因 名庶子雄 ..... 謂之神市 主人間三百六十餘事)

<권54 평안도4 영변대도호부 고적 태백산)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권문해 1534~1591

昔有神人桓因 名世子桓雄 ..... 謂之神市將風伯雨師雲師 .....

<권9 상성 지 지 신시>

 <기언記言>

허목 1595~1682

上古九夷之初 有桓因氏 桓因生神市 始敎生民之治 民歸之神市 生檀君.....

<권32 외편동사1 단군세가>

 <약천집藥泉集>

남구만 1629~1711

..... 云昔有桓國帝釋庶子桓雄 受天符印三箇 .....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제29잡저 동사변증 단군>

 <해동이적>

홍만종 1643~1725

..... 有桓因釋庶者 名庶子桓雄 ..... 民歸如市 因號神市 將風伯雨師雲師

<하(보)단군>

 <규원사화>

북애자 1675

神市氏旣爲君長 以神說敎 ..... 神市氏

<태시기>

<수산집修山集>

이종휘 1731~ 1797

..... 故桓雄爲神市天皇 而雄之子號檀君云 神市之世 以神說敎

<권12 동사 지 신사지>

 <동사강목>

안정복 1778

古記云 ..... 庶子桓雄下視三危太伯可以弘益人間 .....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

<부권상중괴설변증>

   

‘청구’를 기록한 문헌

<규원사화>

북애자 1675

神市氏 寔爲東方人類之祖 ..... 盖檀君以前 首出之聖人也 ..... 曰靑丘國 宅樂浪忽

<태시기단군기>

  <환단고기>, 안경전 역주, 150~151쪽

 

 배달국의 유물로서 현재 출토된 것이 없다?
 

대표적인 유적은 5500여년 전 만들어 진 것으로 밝혀진 홍산문화의 우하량 유적이다. 홍산문화는 요서지역(발해연안 지역)에서 발견된 신석기 청동기 문화이다. 1919년 프랑스인 에밀 리쌍이 내몽골의 적봉을 1차 방문하고, 1922년부터 그곳에서 신석기 유적지 22곳을 발견한 이후 요서에서는 현재도 대규모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다. 20세기 초부터 프랑스인 에밀 리쌍등이 발굴하기 시작해서 중국에 문화대혁명이 지난 1980년대부터 대대적인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우하량 유적에는 대형제단大型祭壇, 여신묘女神廟, 적석총군積石塚群이 나왔다. 총묘단塚廟壇이 함께 나왔다는 것과 최고 통치자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대묘를 주변의 작은 무덤들이 에워싸고 있는 것을 볼 때, 훙산문화는 이미 씨족사회를 넘어선 계급이 분화된 국가단계의 문명을 누렸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직경이
100m가 넘는 돌로 쌓은 대형 피라미드도 발견되었다. 홍산문화의 출현 연대는 지금부터 4천여년 전에서 최고 850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으로 꼽히는 수메르 문명이 약 55백년전에 시작한 것에 비하면 홍산문화는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유적에서 나온 돌무지무덤 양식등은 중국 내륙에서 발견되지 않는 우리민족의 무덤 양식이다. 신라의 도읍지 경주에서 발견되는 고분들도 돌무덤이다. 속에 목곽을 설치하고 그 위에 적석을 한 후 흙으로 덮은 적석목곽분이다. 가야의 무덤도 전부 돌무덤이다.(상생방송STB 역사특강,<발해연안문명, 한국고대문화의 기원>)

이밖에도 많은 부분들이 홍산문화의 주인공이 우리의 조상임을 설명해 주고 있다. 우하량에서 나온 여신전女神殿 터에서 여신상과 함께, 이 지역 사람들의 토템신앙을 보여주는 곰 소조상과 새 소조상이 발굴되었다. 그들의 곰 토템은 우하량만이 아니라 인근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출토되는 옥으로 만든 곰 형상물에서도 보인다. 이는 곰(웅족)과 호랑이(호족) 토템 문화로 우리 민족의 이야기임을 환단고기에서 전하고 있다.


세계 4대문명보다 오래된 문명 :  요하문명(홍산문화,발해연안문명)

 


 

세계 4대문명보다 오래된 문명의 등장으로 4대문명의 판도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역사 교과서는 황하-메소포타미아-나일-갠지스 강 문명을 세계 4대 문명으로 불러왔습니다. 중국은 중국의 뿌리는 황하문명이라고 주장을 해왔으며 만리장성 이북은 ‘오랑캐의 땅’으로 “문명이 없다”고 주장해왔습니다.

그런데 만리장성 서북쪽 1000여km 지점에서 실로 놀라운 고대 문명이 발견되었습니다.

요하 상류지역에 그보다  최소 1000년 이상  앞선 고대 문명이 존재했다고 합니다.

이를 근래 들어 ‘제5의 문명’이라고도 부르고 '요하문명'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나온 유물과 유적을 검토해보니 분명히 중국문명과는 확연히 다르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상식처럼 알았던 중국문명(황하문명)이 아니라 동아시아 문명이라고 해야 한다고 이 책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리장성을 늘리는 이유? 중국은 만리장성 이북은 ‘오랑캐의 땅’으로 “문명이 없다”고 주장해왔습니다. 이제 그 문명을 자기네 문명이라고 주장해야 하니 만리장성을 엿가락 처럼 늘릴 수 밖에없는 이유가 되는거죠

 


만리장성은 실제로 (중간에 갈라져 나온 가지를 모두 합하여) 6,400km 정도입니다.
8,851km라는 만리장성의 길이는 새로발표한 동단지점까지(원래는 고구려박작성임) 포함한 길이입니다. 즉, 중국의 동북공정의 논리를 몰랐던 방송국의 오류죠. 2011년 9월 18일 방영된 런닝맨 북경특집은 이런 커다란 오점을 남겼습니다.

 

홍산문화(요하문명)이 우리 한민족의 상고시대 도시국가라는 증거

 

1. 적석총 - 장례문화는 민족의 고유 사상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돌무지무덤'이라불리는 적석총은 우리 한민족 고유의 무덤형태입니다. 중국한족은 토광묘를 씁니다.

 

* 적석총, 고인돌 등 거석문화는 우리문화입니다. 근래 학자들은 거석문화가 태양신숭배와 연관되있다는 말을 합니다.

 



<우하량 적석총 복원도 :우하량 근처에서 발견된 한변 100m의 거대한 적석총, 이집트의 계단식 피라미드보다 천년이 앞선다. 거대한 건축믈들을 쌓으려면, 제사장을 중심으로 하는 계급과 사회분화가 이루어진 강력한 제정일치사회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2. 수암옥 - 홍산과 흥륭와 문화(BCE 6200)에서 발견된 옥기의 재질은 수암옥입니다. (압록강 바로 위, 수암) 같은 요하문명인 흥륭와에서 나온 옥귀걸이와 동일한 형태가 강원도 고성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기원전 6천년경으로 추정되는 발견된 흥륭와옥귀걸이, 사해옥귀걸이, 고성문암리 옥귀걸이의 모양이 모두 같은 것은 그 당시 이 세지역이 서로 단일 문화권이라는 증거이다

 

 

3. 웅녀상 - 곰을 大地 으로 인식한 것은 한민족 고유의 토템입니다.


< 홍산문화에서 출토된 여신상>        <여신묘 곰발바닥 소조>
 

* 웅녀상은 여러 개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조상신 숭배로 보여집니다. 웅녀국의 후예들이 아닌가 생각되며 특이한 것은 여신상이 너무나 사실적인 인간의 모습을 나타낸것인데, 이것은 '神化된 인간'을 숭배한 것으로 인격신을 섬겼던 우리 한민족의 정서와도 맞습니다.
 

4. 용봉문화 - 천자문화와 연관되있는 것으로 '채옹'도 인정했듯이 천자문화는 한민족으로부터 나온 문화입니다.
 

5. 역사기 - 요하문명이 나온 곳은 후에 고조선의 강역입니다. 고구려때까지 우리 땅이었던 곳으로 상고시대부터 우리 한민족의 주 활동무대입니다.
 
이 곳에 도시국가가 있었다는 기록은 너무도 당연히 환단고기에 나오는 배달국 신시밖에 없습니다.
 

6. 유전자분석 - 홍산문화에서 나온 유골을 mtDNA 분석한 결과, 가장 많은 분포를 나타낸 35.71% 16172라는 하위 변이에 속하며 이는 중국한족에서는 잘나타나지않고, 대부분 우리 현대 한국인과 일본인의 유전자에서 나타나는 변이입니다. 실제로 현대 한국인중 일부는 이 유전자변이와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만약, 'N9a-16172'라는 유전자변이형태를 가진 분이 있다면 이분들은 웅족의 직계후예입니다. ^^ 우리나라에는 6~7% N9a이라는군요.

홍산문화 우하량 유적 유골 mtDNA분석 결과 http://yayul.egloos.com/2426041


"
황허문명은 농업 중심의 왕권국가였고, 랴오허 문명(발해문명)은 복합적인 신권국가였던 것 같다. 차하이·싱룽와 문화(BC 6000년 전)에서 홍산문화(BC 4500~BC 3000)에 이르기까지. 용형 돌무더기와 옥결이 출현하고(차하이·싱룽와) 곰과 용, 새를 형상화한 옥문화가 꽃피고, 신전과 제단, 적석총 등 제사유적이 출현하고(훙산문화). 신권 중심의 문화였다.” - 徐子峰 교수
 

7. 빗살무늬토기
 

중국학자들은 황하 지역과 전혀 다른 요서 지방 토기의 가장 큰 특징이 빗살무늬(()자문) 토기라고 밝히고 있다.

중국학자 '왕혜덕'이나 조선족 대련대학 '유병호' 역시 요하문명의 특징은 빗살무늬 토기와 조상 숭배 풍속이며, 대련대학 '설지강' 역시 흥륭와 문화의 특징은 빗살무늬(()자문) 토기라고 주장하였다.

중국학자 '풍운학'은 지()자문(빗살무늬) 토기는 요서 일대(요서 문명)와 흑룡강 중·하류 지역, 한반도, 일본 등지에서 발굴되는데 이들은 모두 같은 문화권이라고 주장하였다.

요하 일대에서 발굴되는 빗살무늬 토기는 중국 중원의 황하 일대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북방 계통의 문화이다. 요하 문명의 주도세력들은 중원에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빗살무늬가 전파되는 길로 이동한 세력임을 알 수 있다.

결국 BC 6000년 당시 부터 만주와 한반도 그리고 요서 지방과 발해만 연안은 중원과 다른 독자적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이 문화는 결국 예·맥족(고조선과 고구려)으로 이어졌다

 


 

빗살무늬 토기들이 나온 곳들을 살피면 이른바 발해문명권, 다시 말해 중국인들이 말하는 동이족의 영역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인(人)자형은 한반도 압록강·대동강·재령강·한강유역은 물론 두만강과 동해안, 그리고 남해안 등 전국적으로 분포되고 있어요. 지(之)자형은 평북 의주읍 미송리 동굴유적, 경남 통영 상노대도, 김해 수가리 유적에서 보이고…. 빗점무늬는 대동강의 궁산·남경유적, 재령강의 지탑리 유적, 한강유역의 암사동 유적, 동북부의 서포항 유적 등에서 확인됩니다. 한반도 전역을 포함한 발해연안이 바로 빗살무늬 토기문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이형구 교수)

또한 한반도에서는 처음으로 옥결(옥귀고리)이 나온 강원 고성 문암리(BC 6000년)와, 양양 오산리(BC 5000년)에서는 초기 신석기 문화의 양대토기인 덧띠무늬 토기와 빗살무늬 토기가 함께 나오기도 했다. 문암리 유적을 발굴한 신희권 국립문화재연구소 연구관은 “차하이-싱룽와에서 나온 유물을 본 결과 문양을 그려넣은 기법이나 토기의 기형이 문암리와 상당히 유사하다”면서 “발해연안과 한반도가 같은 문화권임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고 보았다.

 

글출처 :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7) - 빗살무늬 토기문화 경향신문  2007년 11월 16일


 
 

배달국 14대 자오지환웅 치우천황은 우리민족과 관련 없는 사람이다. 묘족의 조상으로 모셔지고 있는 분이다?
 

환단고기에는 우리민족의 조상으로 나온다. 환단고기 이외에는 치우가 우리민족의 조상이라 전하는 고유사서가 거의 없다. 그것은 고유사서들이 강탈되어 그런것이다.

 

치우를 우리 민족이 모셔온 흔적은 [둑신사纛神祠]라는 절에서도 찾을 수 있다. <독 또는 도>라고도 읽는다. 일제시대 말까지 동대문밖 <뚝섬>에 있었다고 하는데 [뚝섬] <>는 바로 <>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치우蚩尤와 황제黃帝가 싸움을 한 [탁록전涿鹿戰]의 대형벽화가 있었는데 길이 36-높이 6자 정도라고 하니 크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해방을 전후해 사라지고 말았다.

 

 

 

우리 민속 곳곳에 남아 있는 [치우蚩尤]에 대한 신앙이 돋보이고 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를 보면 단오 날 <적두적설赤舌의 부적符籍>으로 백병百病을 쫓는다는 기록이 있다. 바로 [치우부적蚩尤符籍]으로 [둑신묘纛神廟-둑신사纛神祠]에서 전달되었다. 조선 조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조상으로 특별하게 인식한 군신軍神 치우蚩尤에게도 꾸준하게 제사를 올렸다. 이름 하여 [둑제纛祭] [둑소제纛所祭]의 준말이다. 일 년에 두 차례 정기적으로 지냈는데 무장武將들 또한 임지任地로 떠가기 전에는 반드시 둑신纛神에게 제사를 올렸다. 고려시대에도 [둑제纛祭]를 지냈다는 기록을 <고려사高麗史>에서 심심치 않게 찾을 수 있다.그리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祠堂이 바로 둑신묘(纛神廟-둑신사纛神祠)로서 <둑도纛島> [뚝섬]에 있었다. [뚝섬]이란 명칭은 바로 이런 까닭에서 유래되었다. 이렇듯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여전하게 군영軍營을 대표하는 대장기大將旗로서 [치우蚩尤]의 상징이라고 전해지는 []이라는 깃발을 [둑소纛所]에 둔 뒤 매년 갑옷을 입고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묘족은 <머리채를 삼끈으로 묵은 상투쟁이로서 마치 싹이 돋은 듯하여 라 했다-회남자淮南子 11 제속훈> 라는 구절과 <산해경> 17 대황북경에 <서북해 밖 흑수 북쪽에 날개달린 사람(鳥夷系)이 있으니 이름하여 苗民이다>란 기록에 비추면 이족이면서 머리에 상투를 튼 민족이다. 그리고 <삼묘족三苗族의 나라를 구려九黎라 하고 구려의 임금을 치우라 한다-왕동령王桐齡 중국민족사>라는 구절이 있다. , 묘족은 우리와 공통의 조상을 가진 민족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오히려 묘족이 있던 영역까지 배달국의 영역이었다고 추정해 볼 수도 있고, 환단고기에 의하면 이러한 모든 추정들이 사실임이 밝혀진다.
 

또한 산해경에는 양자강 이남의 동정호와 팽려호 일대에는 구려九黎의 후예인 유묘有苗혹은 삼묘三苗라고 불리는 부족이 있었는데 단주(요임금의 아들)와 사이가 매우 가까웠다. 마침 요임금이 순에게 제위를 넘겨준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승복하지 않고 있던 삼묘의 족장은 단주가 오자 곧바로 세력을 연합하여 요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요의 군대는 단주와 삼묘의 연합군을 궤멸시켰고, 이 싸움에서 삼묘의 족장이 피살당하고 단주도 전사하였다. 이것이 묘족이 남쪽으로 옮겨가게 된 배경이라고 했다.(이재석,인류원한의 뿌리단주,상생출판,2008)

 

중국의 사학자 추군맹은

 

華夏族是在我國原始社會末期, 以中原炎黃集團爲基礎, 融合了東方一部分夷人集團(主要是蚩尤和少昊這一支) 和南方一部分苗蠻集團(主要是女氅和槃瓠這一支) 而形成的(華夏族起源考論)”

화하족시재아국원시사회말기, 이중원염황집단위기초, 융합료동방일부분이인집단(주요시치우화소호저일지) 화남방일부분묘만집단(주요시여창화반호저일지) 而形成的(화하족기원고론)”

 

이라고 한 바와 같이 중국민족 곧 화하족은 이른 시대에 이미 東方 蚩尤(치우) 少昊(소호)가 지배하던 이인집단이 융합되었다고 역설하였다.

 

蚩尤에 대해서도 추씨(鄒氏)는 역대 학자들의 고증을 들어 구려(九黎)의 군장으로서 동이집단에 속한다고 주장하였다. 少昊에 대해서는 확실히 蚩尤의 후예로서 새를 토템으로 한 씨족부락이었으며, 그 발상지는 산동성의 곡부 일대이며, 5000여년전의 유적지인 대문구문화(山東省)는 곧 少昊의 집단인 東夷族 문화의 중심지였다고 고증하였다.

蚩尤에 대하여 우리 나라 역사에서는 별로 연구된 바 없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거의 없으며, 少昊에 대해서도 中國 五帝의 한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반하여,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그 무덤까지 확인하고 분명히 東夷集團 君長이었음을 역설하고 있음은 우리의 역사지식을 반성하게 한다.


참고 : 뚝섬의 유래

 


 

 

서울시, 뚝섬에 ‘유래비’ 설치 서울시 한강사업본부는 시민들에게 뚝섬의 유래를 알려주기 위해 19일 뚝섬 한강공원에 뚝섬 유래비를 설치했다고 21일 밝혔다.
뚝섬은 한강과 중랑천으로 둘러싸인 살곶이벌(箭串坪) 일대로 무신(武神)을 상징하는 `치우천왕'의 모습을 본떠 큰 창에 소의 깃털을 꽂아 만든 깃발인 독 또는 둑(纛)과 관련된 지명이다. 뚝섬은 조선시대 국왕이 군대를 사열하거나 출병할 때 이곳에 둑기(纛旗)를 세우고 둑제(纛祭)를 지냈던 곳이라 뚝섬으로 불리게 됐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둑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난중일기에 기록돼 있다. 뚝섬 유래비는 지하철 7호선 뚝섬유원지역 2번 출구에서 내려 뚝섬 한강공원 광장으로 가면 바로 볼 수 있다 2007년 09.21

 

이순신 장군 임진왜란중 3번 치우천황께 둑제를 올렸다. (난중일기)

 

① 癸巳(1593)年 2月 初4日 : 경칩날이라 둑제를 지냈다.
② 甲午(1594)年 9月 初8日 : 장흥부사로 獻官을 삼고, 홍양현감으로 典祀를 삼아 초아흐레 둑제를 지내기 위해 入齋시켰다.
③ 乙未(1595)年 9月 20日 : 새벽 2시에 둑제를 지냈다.

 

<역사사전>과 <국어사전>에 보이는 '둑'에 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大駕의앞또는軍中에서大將앞에세우는旗의일종.큰三枝槍에붉은삭모를많이달았으며,행진할때에말을탄장교가받들고,군사두사람이나혹은네사람이벌이줄을잡고다녔다.」

자세한 내용은 http://blog.daum.net/hanchosun/642

 

배달의 14대 자오지 환웅천황, 치우

 


 
  ‘환국(환인)-배달(환웅)-조선(단군)…’으로 내려오는 한민족사의 국통을 보면, 3301년간 일곱 분의 환인천제가 다스린 환국을 이어 배달 환웅천황이 배달국을 건국한다. 그 배달국 당시, 서기전 2707년에 즉위하여 109년간 배달국을 다스린 14대 자오지(慈烏支) 환웅천황이 곧 치우천황이다. 치우(蚩尤)란 세속의 말로 ‘우뢰와 비를 크게 지어 산천을 바꾼다’는 뜻이다,
  
  당시 염제 신농씨 나라의 8대 마지막 임금인 유망이 쇠퇴의 길을 걷자 치우천황은 웅도(雄圖)의 대망을 품고 서방으로 출정하여 모든 제후들을 정벌하고 유망의 수도를 함락시킨다. 이 때 유망의 제후로 있던 헌원이 치우천황의 입성소식을 듣고, 대신 천자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군사를 일으켜 이에 대항해 온다. 그리하여 동방 고대사에서 저 유명한 탁록 대전투(동방 최초의 국제전쟁)가 벌어져, 10여 년 간 무려 73회의 치열한 공방전이 오고간다. 치우천황은 도술로 큰 안개를 지으며 최초로 제작한 금속병기를 동원하여 마침내 대승을 거두고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는다.3)
  
  중국인들이 동방 배달민족을 동이(東夷)라고 부른 것도 치우천황이 큰 활을 만들어 쓴 이 때부터이다. 이후 치우천황은 동방 무신(武神)의 시원이 되어 수천년 동안 동방의 조선족은 물론 한나라 진나라의 백성들에게까지 위력적인 숭배와 추앙의 대상이 된다.      
  
  치우에 대한 역사왜곡, 사마천의 『사기』
 
  탁록의 대결전 중에 치우천황의 장수 치우비(蚩尤飛)가 헌원군에게 성급히 공격을 시도하다 몰살당한 사실이 있다. 이것을 두고 훗날 고조선과의 대전쟁에서 크게 패한 한무제와 그의 사관 사마천은 『사기』에서 “금살치우(擒殺蚩尤)”, 즉 ‘헌원이 치우천황을 사로잡아 살해했다’고 사실을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 놓았다.
  
  또 당시의 상황을 “치우작란”(蚩尤作亂), 즉 치우가 헌원에게 복종하지 않고 난을 일으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후의 위치에 있었던 헌원이 천자가 되겠다는 야망을 품고 군사를 일으켜 천자인 치우천황에게 도전해온 것이니, “황제작란”(黃帝作亂)이라 함이 역사의 진실인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헌원은 황제로 격상되어 지존의 존재, 하늘과 같은 존재로 떠받들어 놓고, 치우는 수신인어(獸身人語, 짐승 몸에 사람 말을 함)로 묘사되어 짐승 같은 존재, 요술부리는 아주 하찮은 존재로 격하시켜 놓았다. 근원적인 역사왜곡의 첫 페이지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생각해보라~ 만약 치우가 황제에게 패했다면 패한 장군을 전쟁의 신(군신)으로 받들고 추앙하고 전쟁터에 나갈때 치우천황에게 제를 지낸다는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가를..!

    

환단고기 위서? 무료 천문 관측프로그램으로 직접 검증해보세요

 

과거 박창범 교수가 93년도에 검증을 할때는 천문학자만이 쓸 수 있는 프로그램을 이제는 누구든 다운받아서 검증해볼 수 있습니다. 

 

제가 써본 천문학 프로그램(유틸)은 스텔라리움입니다.
(첨부파일은 용량이 커서 안되고 링크를 타고 다운받으시기 바랍니다)
마우스를 왼쪽 메뉴로 가져가면 두번째에 날짜 창을 띄우고 기원전 1733년이니까 -1733년으로 잡고 7월 13일 17:30분 부터로 해서 분을 올리면 됩니다. 관측장소는 서울로 하시면 되고 하늘은 서쪽하늘을 보시면 됩니다. 손쉽게 오행성 결집 현상을 확인할수 있고 마우스를 밑으로 가져가면 지평선을 없앨수도 있고, 밤하늘형식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스텔라리움 사용방법과 다운로드 -> http://blog.naver.com/broskay/130067312441
 
 
戊辰 五十年 五星聚婁

 

단군조선시대, 13대 단군이신 흘달단군 때에
흘달단군 재위 오십년되던 무진년에 다섯 별이 28수의 하나인 루에서 결집하였다는 환단고기 단군세기에 적힌 기록입니다. 환단고기에 있는 이 내용을 어떻게 검증할 수 있을까요?

 

 
천문관측 프로그램 스텔라리움으로 직접 해봤을때 나온 모습입니다. 오성취루는 13세 흘달단군때의 천문현상이었습니다.
 

 
스태리 나잇(Starry Night)이라는 프로그램입니다.  환단고기에 나온 오성취루(오행성결집) 현상을 검증하게 위해  기원전 1734년 7월 13일 오후 5시 30분경으로 설정했습니다. 오성취루 현상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둘다 정확도가 뛰어난 프로그램이구요 .. 누구든 검색해서 다운받아서 직접 실행해볼 수 있습니다.


또다른 천문학 박사 박석재 위원도 한국 상고사에 대한 책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 나온 "무진 오십년 오성취루(戊辰 五十年 五星聚婁)"라는 기록에 주목했다. 이는 무진 50년(기원전 1733년) 다섯 행성이 루(婁)라는 별자리에 모였다는 기록이다. 그는 천문 소프트웨어 '별바라기'를 이용해 그해 7월 저녁 하늘에 화성, 수성, 토성, 목성, 금성이 나란히 늘어서는 우주쇼를 연출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환단고기의 기록이 천문학적으로 옳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몇백 년에 한 번씩 일어나는 이런 천문현상을 임의로 맞춘다는 것은 확률적으로 불가능하다....(생략)

29세 단군 마휴 시절 썰물 현상 검증

29세 단군 마휴 단제의 기사를 보면

"마휴 9년(기원전 935년) 남해에 썰물이 세 척이 물러갔다"

이 썰물현상은 달이 불규칙한 궤도운동을 하며 조석력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박창범 교수는 기원전 935년을 기준으로 전후한 200년간 해와 달의 위치를 계산하고 이들이 지구에 미친 조석력의 세기를 조사해 보았다고 합니다. 그 결과 4년 후인 기원전 931년에 가장 강한 조석력이 발생했음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이 썰물 기사가 사서에 임의로 삽입될 수 있는 확률은 0.004라고 합니다. 옛 기록과 실제현상이 이 정도로 맞아떨어지기란 역시 어렵다는 것입니다.

 

박창범 교수는 그의 저서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한 점들(오성취루,썰물현상 검증 등)로 미루어볼때 단군조선 시대의 일을 기록한 위 사서들에는 일부 내용이라도 사실이 들어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이 책들을 마냥 무시할 것이 아니라 옥석을 가리는 마음으로 책의 내용을 진지하게 재고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세상 사람들은 환단고기에서 말하는 역사의 진실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어요. 왜 그럴까요? 단순히 환단고기만의 문제가 아니라 복잡한 배경이 있습니다. 환단고기 속에는 지금 역사학계가 말하지 못하던 엄청난 역사가 있습니다. 그걸 결코 현재 강단 사학자들은 이야기 할 수 없는 역사의 진실들이거든요. 단군조선도 신화니 실재니 하는 것이 현재 강단사학인데, 환단고기에는 단군조선 이전에 5천년의 역사가 더 있다는걸 말해주고 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서 운운하며, 그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 것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가장 큰 이유는 고려 이후로 우리나라 주류 정치집단의 주체성 없는 사상이 문제입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모두 황제라고 칭했고, 백제를 제외한 고구려와 신라도 별도의 연호를 썼었습니다. 그런데 고려 초기만 하더라도 독자적인 연호를 쓰며 황제라 칭했던 우리나라가 외세의 잦은 침략과 더불어 스스로 독립 자존의 주체성을 비하하며, 스스로 중국의 연호를 쓰고, 황제 칭호를 왕으로 바꾸는등 비굴한 모습을 역사서에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그것도 모자라 대놓고 중국 황제를 모시며, 임금을 좌지 우지 하던 사람들이 당시 노론등 주류 정치세력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덕일의 『조선왕 독살사건』 및,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우리 역사를 왜곡되게 할 수 있느냐 물을 수 있지만, 고려때 쓰여진 우리나라 최초 정사라고 하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우리 민족의 독립 자존을 이야기하는 부분이 대부분 사라졌어요. 바로 주체성을 상실한 역사관으로 쓰여졌다는것이죠. 이를테면, 삼국사기에는 삼국시대 이후를 주로 다루고 그 이전은 거의 다루지 않고 있고, 중국을 높이고 우리나라는 낮추는 기록이 많습니다. 삼국유사는 불교 일색으로 불교가 들어오기전의 우리나라 지명들을 불교식 지명으로 바꾸고, 고대사가 불교식 신화요소로 장식이 되어 버렸어요. 우리 민족을 외래 종교인 불교 나라로 만들고, 중국을 우리나라보다 더 우선시 하고, 우리민족의 시작이 어떻게 비롯되었는지 모른다면 어떻게 자존감을 세울 수 있겠어요?

 

고려말 공민왕때 재상이었던 행촌이암은 당시 이러한 사정에 분개하는 내용을 단군세기 서문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삼신 상제님을 모시며, 환인으로부터 비롯된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인데, 이러한 역사를 잃어 버려, 국가의 근본이 흔들리고, 정치의 법도는 갈라져서, 부여시대에는 한漢의 침략을 받았고, 고려때는 몽고의 침입을 받았다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 들어서서는 세조부터 예종 성종까지 3대에 걸쳐 유교적 사상에 맞지 않는 사서를 조정에서 수거하게 됩니다. 수거하지 않고, 보유할 경우에는 참수까지 처한다 할 정도로 강경한 정책이었죠. 이런 분위기에서 유교적 사상에서 벗어나는 서적은 살아남기 어려웠고, 그 당시 수거령에 포함된 책을 인용해서 글을 쓴다는것은 상식밖의 일이었습니다. 그때 수거된 책들에 우리 고유의 정신 문화가 담겨 있는 사서들이 포함되었었습니다. 우리가 천자의 나라였으며, 삼신 상제님을 모시는 천자의 나라라는 것은 당시 우리나라에서 용납될 수 없는 무서운 내용이었거든요.

 

잘못해서 명나라등 중국이 그런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화를 감당하기 어려웠던것이 국내 사정이었으니까요.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천자는 오직 한명만이 존재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그런 사서 수거를 일정한 장소에 모아 놓아서, 그런 사서들이 훗날 외세의 침략으로 화를 당하면서 지금은 거의 자취를 찾아 보기 어려운 상황이 된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환단고기를 언급하는 교차 검증 사료가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 된것입니다. 이걸 두고, 위서론자들은 환단고기를 지어낸 책이라 하지만, 아무 근거 없이 그렇게 방대한 내용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요? 만약 신채호의 조선 상고사를 베끼고, 당시 대종교 김교헌이 쓴 신단실기등이나 규원사화등을 보고 베낀거라면, 일제시대이후에 나온 조선 상고사, 신단실기등의 내용은 무얼 보고 베꼈을까요? 이 책들을 보면, 당시에는 단군조선 이전의 유구한 역사를 나타내는 사료들이 존재했다는걸 알게 해주죠. 결코 환단고기에서 말하는 유구한 한민족의 역사는 환단고기에서만 말하는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일제 식민통치를 맞이하면서, 이러한 국내 사정은 아주 좋은 먹잇감이 되어서, 남아 있던 사서마저 모두 강탈당해 소각되는 사태를 맞이 하게 됩니다. 일제는 강제병합 즉시 우리 역사를 기술한 모든 서적을 대대적으로 수색 압수 분훼하였고, 한국의 역사책을 지니고 있거나 읽는 한국인은 엄벌에 처해졌습니다. 이런 정황은 당시 취재차 국내에 들어와 있던 상해에서 발행되던 영자신문 『대륙보大陸報』기자인 내다니엘 페퍼의 생생한 목격담으로 보도 되었습니다. [내다니엘 페퍼, 한국독립운동의 진상, 1920, 11쪽(국가 보훈처 1994)]

그의 보도 내용은 10일간 연재 되었고, 독립신문에도 번역되어 개재되었습니다.

 

그러니 유일하게 고대역사를 다룬 사서는 삼국사기,삼국유사만이 살아 남을 수 있었던거죠. 이 두 책은 굳이 수거하지 않아도 될만한 주체성을 상실한 책이었고, 우리나라를 침략했던 중국이나 일본도 이 두 책은 건드릴 필요가 없었기에 살아 남은것이죠. 덕분에 우리나라에 고대역사를 다루고 있는 사서는 이 두 권외에는 찾기 힘든 상황이 된 것입니다. 물론 환단고기가 그 역사속에서 간신히 맥을 이어오며, 전해오다가 이제야 세상에 드러나긴 했지만요. 그래서 환단고기가 세상에 나오게된 과정은 눈물이 없이는 볼 수 없는 힘겨운 과정이었습니다. 일제는 철저히 우리 역사를 숨기고, 그들이 주장하는 역사를 심어 놓기 위해 애를 썼거든요.

 

당시 일본은 우리나라를 자기 나라와 병합할 목적으로 역사 연구를 하게 되는데, 조선사학회등이 조선총독부 주관하에 전문적이고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1923년 조직된 조선사 편수회가 사료의 수집 및 사료집 발간을 담당하였다면, 조선사학회는 강좌와 저술을 통해 일반에게 식민사학의 전파를 담당한 실행기구로 볼 수 있습니다. 식민시대 당시 역사관련 학술 단체로는 그밖에 청구학회, 조선사학동고회등이 있는데, 이들 학술지 발간의 취지는 “...우리 일본인들이 조선사를 연구하는 것은 첫째, 국사(일본사)를 위한 것이요, 이미 국사의 일부가 된 조선사를 위함이다.”[조선사학,창간사,1926]

, “...반도의 문화적 연구는 결코 반도 자체만을 위함이 아니고, 아국 전반의 문화사적 발전을 살핌에 중대한 의의와 역할을 지닌 것이며, 대륙 발전기지로서의 새로운 사명 앞에 선 반도로서는...”[청구학회,종간사,청구학총, 1939,1쪽]

등의 표현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일제가 그 학술 단체를 만든 것은 우리나라가 반도안의 협소한 지역을 살았던 민족이었으며, 고대사를 부정하기 위함이 주된 목적이었습니다.그리하여 일본이 조선보다 위대한 민족임을 드러내어 식민통치를 합리화시키는 도구로 사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조선사학회에서 1920년대까지 그들의 연구 결과를 종합한 『일반사』는 1927년 『조선사대계朝鮮史大系』로 개칭했습니다. 조선사대계 연표의 범례를 보면

1항(단군조선의 부정),

2항(기자,위만조선으로부터 한국사가 출발한다는것),

3항(일본기년에 의혹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냥 역사서술의 자료로 인용한다는 것),

4항(삼국사기가 ‘신라왕의 후예’,‘신라당’에 의해 정리된 것이라 신라의 건국 기년을 믿을 수 없다는 것),

5항(조선반도에서 건국된 제국의 국호 계통은 물론 가장 관계가 깊은 중국 본토와 만주, 몽고에서 건국된 제 국조의 계통을 기술하고 이와 동시에 조선의 것을 병기하여 대조표를 만든다는 것),

6항(연호도 조선과 만주제국의 것을 기록하과 색인표를 만들어 조선과 만주는 물론 일본,중국본토,몽고,신강,안남,운남등에 건국된 제국의 것을 모두 모아 세계 연호를 망라한다는것),

7항(이외에 왕가 계보와 역대표를 만든다는 것)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발해 건국기사에서도 ‘말갈추장 대조영’이라 하여 말갈계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일제시대 주요 연구 활동을 했던, 이병도와 같은 식민사학자들이 해방과 더불어 추방은 커녕 서울대 사학과 교수가 되면서 우리나라 주류 학계를 장악하게 됩니다. 결국 그 이후 우리나라는 60년간 역사 교육을 그들의 손에 맡겨 왔던겁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이병도가 진단학회등을 만들어 일제시대 우리 민족의 주체적인 역사 연구를 주도했다며, 민족 사학자로 둔갑시켜 소개하기도 합니다.

 

진단학회는 1934년에 창립되어 실증사학을 주도한 학술 단체였습니다. 또한 식민사학회인 청구학회는 진단학회 설립에 대해서 ‘...우리는 그 장래를 축복하는 동시에 반도학도의 더욱 분진할 것을 기망해 마지 않는다.’[청구학회,「진단학회의 창립」『청구학총』18,1934,185~186쪽]며 축사를 해준 사례가 있습니다.

 

실제로 진단학회 회원들은 식민사학회인『사학잡지』와『청구학총』과도 관련을 가졌으며, 일제 관학자들과 밀접한 관계 하에서 역사를 전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해방이후 그들이 저술한 저서들을 비롯하여, 그 제자들이 쓴 논문들은 일본의 식민 사학자들의 주장을 반박하기는 커녕 부합되는 이야기들이었으니, 과연 진단학회가 식민사학을 벗어난 학술단체였는지 의심이 되겠죠?

 

일제식민사학자들이 주류세력으로 자리 잡은것은 친일 정치인들이 주류 세력으로 자리잡는것과 별반 차이는 없어 보이지만, 역사라는 분야는 더욱 그래서는 안되는 분야입니다. 지금까지 그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홍산문화와 같은 단군조선시대 이전의 배달국등의 유물이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지금도 학계에서는 한반도를 넘어선 강역이라는 이유로 우리 민족과 관계 없다는 학설을 내놓고 있는게 현실입니다.

 

이밖에도 역사 인식이 왜곡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주변 국가에도 있는데, 우리 사료는 이렇듯 찾기 힘들 정도로 소멸되고, 그러면 주변국가의 사료를 찾아 봐야 하는데 중국은 중국 중심으로 역사를 기록을 하고, 일본은 일본 중심으로 기록을 했습니다. 사마천 사기에 나오는 대표적인 왜곡은 치우천황과 황제 헌원의 전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곡의 핵심은 전쟁의 승자를 패배자로 둔갑 시켜 놓았다는 것입니다. 자세한것은 환단고기에 나와 있으니 책을 통해 알아 보기를 바라구요.

 

일본은 일본서기에서 일본 천황이 모두 명을 내려 고구려 백제 신라까지 전쟁없이 복속시킨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거의 믿는 사람이 없지만, 일제시대에는 골수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실제 사건으로 둔갑되었었습니다. 이를테면, 철기만 하더라도, 일본은 6세기에 와서야 생산이 되었다는게 정설인데, 우리나라는 한반도 남부에서도 철을 자유롭게 생산했던 시기가 3세기입니다. 그런 일본이 3~4세기경에 고구려 백제 신라를 전쟁 없이 속국으로 만들었다는 내용이 일본서기에 나옵니다. 어처구니 없는 내용들이지만, 그렇다고, 일본 서기 전부를 위서로 내모는 사람은 없습니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있는 역사마저도 애써 감추며, 그 진실을 밝히는 환단고기를 위서로 몰아가고 있는 대부분 사람들이 주류 역사학계이죠.

 

중요한것은 이런 주위 나라들의 역사서에 대한 이런 노력들이 과연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요? 그것은 바로 독립 자존을 찾기 위해서 자신들만이 유일한 천자 나라였다고 하기 위해 조작한 것입니다. 환단고기를 보면, 중국의 역사도, 일본의 역사도, 모두 우리 민족이 문물을 전수해줬으며, 우리나라를 천자국으로 섬겨왔었다는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나라도 왜곡한 것이 아니겠느냐 할 수도 있겠지만, 한중일 나라가 각국의 역사서 속에서 모두 자신들이 천자의 나라라고 외칠때 우리나라 역사학자라면, 우리나라 역사서를 중심에 놓고, 독립 자존의 주체성을 가진 학설을 연구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학자들은 유일하게 우리나라가 원래 천자(황제)국이라 하는 환단고기는 위서로 몰아 붙이며, 일본에서 만들어주고, 중국에서 만들어준 역사관을 바탕으로 학설을 정하니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홍산문명이나, 환단고기가 증명하는 역사를 살펴 볼때, 우리나라가 최초의 천자국이었다는것은 자명하게 밝혀지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병도같은 식민 사학자가 우리나라 학계의 주류가 되었을까요?

 

일제 식민지 통치하에 독립운동을 하던 대부분 의식있는 사람들은 정식적인 제도권교육을 받지 못했고, 일제에 편승한 친일파는 제도권안에서 많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해방과 동시에 2년간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미국은 미국의 입장을 대변할 한국인 정치가를 물색했고, 그 적임자는 이승만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에서 대중적인 지지를 받았던 김구 선생이나, 여운형 선생 등은 강력한 민족주의자로 미국입장에서는 탐탁지 않았던 인물이었습니다. 반면 이승만은 친미주의자로, 미국에 살면서 독립운동을 하고 미국에서 박사학위 다섯개를 받을 정도의 이었습니다. 게다가 부인도 미국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지지세력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친일파를 대거 등용하게 됩니다.

 

해방직후 친일파 숙청의 건의가 거세게 들어오고 반민족 행위자 특별처벌법을 만들어 반민특위를 만들었지만, 이승만 대통령 직권으로 테러를 하며 1년만에 유야무야 없던 일로 해버립니다. 관용의 나라 프랑스의 경우 4년간 나치에 협력한 반민족자 100만명을 체포하여 1만명의 넘는 사람을 즉결처형합니다. 친에 있어서는 관용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단한명의 친일파도 처형당하지 않았습니다. 해방 후 독립운동에 대한 훈장을 받은 사람은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이시영뿐이었습니다.

 

친일파가 그대로 기득권을 유지하며 친미파가 되었고, 그들은 반공을 외치며 민족주의자들을 빨갱이로 몰았습니다. 때문에 어떤 사학자는‘우리나라는 친일청산이 된 것이 아니라, 친일파에 의해 민족주의자들이 청산당했다’라고 합니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운동을 하느라 변변한 직업도 기술도 없는 상태에서, 이미 기득권을 차지한 친일파에 눌려 공로가 인정되지 않아 표창을 받지 못했고, 때문에 나라에서 지원하는 연금도 받지 못했습니다. 진정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 중 대다수는 현재도 경제적으로 궁핍한 삶을 살고 있으며, 창씨개명을 거부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은 무국적자로 국적도 되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역사가 청산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의가 사라졌습니다.

 

일제가 우리 역사를 말살하고 왜곡하기 위해설치한 ‘조선사편수회’에서 이마니시류의 수사관보로 일을했던 친일파 역사학자 이병도 역시 중요한 자리에 등용이 됩니다. 서울대 사학과 초대교수가되고 60년도에는 문교부장관까지 합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백남운 같은 사회경제학자 계열의 사학자들이 월북하고, 안재홍, 정인보 등 민족사학의 거목들이 납북되자, 이병도와 그 제자들은 식민사학을 실증사학으로 위장시켜 한국 역사학계를 독차지합니다. 그러한 이병도도 죽기 직전인 1989년에는 조선일보에 단군은 신화가 아닌 실존했던 조상이라고 기고를 하게 됩니다. 환단고기는 잃어버린 조선 고대 역사를 밝히는 몇 안되는 소중한 책입니다.

 

그리고 지금 위서론자들이 말하는 환단고기에 대한 위서논쟁은 이미 끝나가고 있습니다. 근대어라던 평등,문화등도 이미 고대부터 쓰이던 언어라는걸 모르고 위서론자들이 그런 얘기를 한거였으며, 일제시대 독립운동사를 조금만 알게 되더라도, 환단고기 출간과정의 의문점들이 대부분 해결됩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환국은 잘 모르겠지만 배달국은 존재 가능성이 약간 남아있습니다. 환국은 영토가 수만리에 이르렀는데 그건 칭기스칸이 정복한 영토랑 비슷한 정도입니다. 그러니 환국은 배재하는 게 낫겠습니다. 그치만 배달국은 존재할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환국과 배달국에 관한 역사책이 별로 없습니다. 환단고기랑 단기고사 등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단편적으로는 배달국에 대한 이야기가 중국 사기 등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약간 외곡되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위서 자체가 시간만 안 맞을 뿐이지 맞는 내용이 존재 가능합니다. 그리고 치우천황이 싸웠던 곳이 탁록이라는 곳인데 그곳은 현재 중국 하북성이나 산서성 등으로 나뉘는데 그 지역들은 모두 옛 동이족의 세력범위와 비슷합니다. 그리고 동이족과 한족은 서로 사이가 별로 좋은 편이 아니어서 싸움이 꽤 흔한 편이었습니다. 배달국은 영토가 고구려 북쪽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되는데 황하까지 진격하는 건 그냥 단순 점령이 아닌 이상 가능합니다.

 

 

허접한 답변 죄송하고... 확실한 정보는 그냥 에 환국이나 배달국이라고 검색하면 됩니다.(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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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Vakyrie 입니다.

 

환국과 배달국은 신화 일뿐 입니다.

 

하지만, 거짓이라는 것도 아닙니다.

 

환국과 배달국이 존재 했다면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역사가 제일 길고, 문명도 우리나라가 제일 빠를 것 입니다.

 

신화로는 환국에 있던 연맹 부족들이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인더스, 황하로 건너가 문명이 탄생했다고는 합니다.

 

예)옛날에 은나라가 신화로만 전해져 왔지만, 갑골문자 출토 된후, 실제로 은나라가 존재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처럼 환국과 배달국에 관한 유물이나, 문서는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는 이야기죠.

  

이상 Vakyrie 엿습니다.

 

배달국은 존재했나요? 내공100겁니다.

환국과 배달국존재했다는 이유와 증거(문명같은것?... 신고들어갑니다.내공냠냠XXX 신시 배달국이 중국 사서에... 게다가 직경이 100m가 넘는 돌로 쌓은 대형 피라미드도...

환국과배달국에대한 질문(내공60)

... 대략만년으로 환국-배달국-고조선-부여,고구려,옥저... 신고들어갈꺼입니다..내공60이니..감사내공까지 할꺼니..... 나올겁니다. 황제란 중국의 왕을 나타내는 말이므로...

고조선 이전에나라 배달국 환국

... 그리고 환국왕과 배달국 왕 이런 말도 안되는 근데 옛날 사람이 100년 넘게살수있다는게 말이되요? 요즘에도... 입장일 겁니다. 미흡하나마 간단하게 적어 봅니다. 자세한...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배달국환국...

... 하는겁니다. 얼마전에 환단고기라는 책을 읽은 적이... 역사는 100% 아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연한... 즉, 환국과 배달국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시면 됩니다....

[내공검]환국-신시-배달국-고조선

... 있을 겁니다. 거기서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존재했었다고 믿을 수 있는 거죠. 그런데 환단고기의 경우에는??????????? 그 어느 나라의 사서에도 환국, 배달국에...

환국 배달국에서 궁금한점이있습니다...

... 고조선은 그렇다치구요 배달국 환국 누가 존재한다고... 한단고기의 내용이 100% 사실이라면 우리가 그 동안... 1위 ~10위까지 써주세요^^ 내공 35 겁니다 성실하게 답변...

환국,배달국이 실존하다는 근거,증거좀...

... 잘 상세하게 답변해주신분께는 내공 70을드리겠습니다!... 보면 배달국이나 환국존재는 "굉장히 의심스럽다(is... 믿는 겁니다. 특정 종교인들의 믿음을 볼모로 잡고...

환국이라..

... 그러나 100프로 거짓말이라고도 하지는 못합니다.... 치우천황의 존재조차 몰랐고, 배달국이라는 것도 거의 몰랐을겁니다. 환국이나 배달국 이나 둘다 아직 명확한...

환국 진짜 실존햇나요?

... 내공이 제가 얼마없어서요 ㅜㅜ 40드립니다. 내공적다고 형편없는 답변이나... 더 거대한 아마 역사적으로따지자면 세계 1위영토 엿을겁니다 7. 환국과 배달국존재햇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