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의 대외교류에 대해서 .. 내공 75

통일신라의 대외교류에 대해서 .. 내공 75

작성일 2007.06.06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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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통일신라인의 활발한 대외교류와 신라인의 활동내용,  국제무역항위치

2.통일신라, 발해의 무역로 지도    3. 문화재

4, 원측. 혜초, 최치원, 의상, 원효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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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통일신라의 무역대상 나라 

- 주로 당나라와 왜와 배로 교류를했습니다.

공식 사절을 비롯한 유학생, 승려, 상인 등의 왕래가 빈번해
졌으며, 해상 무역도 번성했습니다.
또한 아라비아 상인과도 교류가 있었습니다.

 

2. 통일신라의 무역 수출, 수입품

- 당과의 무역에서

수출품 : 인삼, 금은 세공품 등

수입품 : 당으로부터 비단, 책, 차 등

- 왜와의 무역에서

수출품 : 실, 황금, 수은 등

수입품 : 담비나 호랑이 등의 가죽, 꿀, 인삼 등의 토산물

 

3. 무역으로 알려진 인물

- 누구보다 장보고가 유명하죠

 9 세기 이후에 해적들의 약탈 행위가 극심해지자

장보고는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적 소탕, 무역 보호를 했습니다.

또 황해의 해상권을 장악하면서 당, 일본과의 무역도 독점했습니다

 

무역항은..  울산 하고.  청해진 밖에 기억이없내요..

 

울산은  아라비아 상인들이 자주 들락날락 햇던 항구 이구요...

 

다음엔  청해진..  장보고가 설치한 세계최초의 무역항이에요..  일본. 중국 심지어  동남아시아 쪽에서도 왓다는 것을 들은 기억이 있내요..

 

(필자두 울산 사라욥 ㅋㅋ)

안녕하세요

당,신라,일본과의 무역 관계에 대해서...

우선 발해는 초기에는 당과 전쟁을 치르면서

무역이 활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문왕대에 이르러

문물이 정비되고 문물의 교류가 활발해졌습니다.

그래서 당나라의 문화도 많이 받아들이고

관리들의 관복, 통치 기구 등을 당나라의 것으로 많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대로가 아니라 발해식에 맞게 바꿔서 말이죠)

또 당나라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시험을 치르는 빈공과에서 신라와

수석자리를 다툰 것으로 보아 학문교류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과의 관계...

발해는 특히 일본과의 무역관계가 활발했습니다.

발해는 일년에도 수 차례씩 일본으로 사신을 보내 교류를 많이 했습니다.

이는 발해의 필요도 있었지만 주로 일본이 요청해서였습니다.

발해 사신은 가져가는 품목보다 일본에서 훨씬 많이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한때 발해 사신의 파견수를 줄여달라고 했으나

결국 그대로 내버려 두었습니다.

발해 사신의 품목 중에 일본에서 가장 인기있는 발해품목은 모피였습니다.

모피는 일본 귀족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여 당시 정권을 잡고있던

막부는 (이름은 정확히 기억이 안나서;;) 귀족들에게 무분별한 모피의

사용을 금지했다고 합니다.(그러나 잘 지켜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신라와의 무역은, 그리 활발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남경남해부를 지나 발해의 수도와 신라 간의 무역로가 설치되었고

어느 정도 무역이 있었을 것 같지만, 일본과의 무역보다는 훨씬 규모가

적었을 것입니다.

또 당나라의 이이제이 전술, 즉 오랑캐를 동원해 오랑캐를 다스리는

전술로 인해 발해와 신라의 관계는 항상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당나라가 뒤에서 신라를 조절해 발해와의 관계는 험악했습니다.

한때 신라도 발해를 공격하려 했고(추위로 인해 실패) 발해의 공격에 대비해

국경지대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상은 제 생각에서 나온 답변이었습니다.

최근 고구려재단에서 발간한 "새롭게 본 발해사" 라는 책을 보시면

더욱 더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그 책은 아마도 모든 학교에 무료로 나누어

주는 것 같으니 학교 도서관에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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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불국사다보탑

 

 

종 목 국보 제20호

분 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탑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 불국사

시 대 통일신라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과거·현재·미래의 부처가 사는 정토, 즉 이상향을 구현하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정신세계가 잘 드러나 있는 곳이다.『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 짓지 못하여 그 후 나라에서 완성하여 나라의 복을 비는 절로 삼게 되었다.

 

다보탑과 석가탑(불국사삼층석탑,국보 제21호)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10.4m로 같다. 절내의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동쪽탑이 다보탑이다. 다보탑은 특수형 탑을, 석가탑은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석가탑을 보면 2단의 기단위에 세운 3층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다보탑은 그 층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십자 모양 평면의 기단에는 사방에 돌계단을 마련하고, 8각형의 탑신과 그 주위로는 네모난 난간을 돌렸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된다. 목조건축의 복잡한 구조를 참신한 발상을 통해 산만하지 않게 표현한 뛰어난 작품으로, 4각, 8각, 원을 한 탑에서 짜임새있게 구성한 점, 각 부분의 길이·너비·두께를 일정하게 통일시킨 점 등은 8세기 통일신라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안타깝게도 다보탑에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설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1925년경에 일본인들이 탑을 완전히 해체, 보수하였는데, 이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또한 탑 속에 두었을 사리와 사리장치, 그 밖의 유물들이 이 과정에서 모두 사라져버려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기단의 돌계단 위에 놓여있던 네 마리의 돌사자 가운데 보존상태가 가장 좋았을 듯한 3마리가 일제에 의해 약탈되어, 이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아직까지 그 행방을 알 수가 없다.

 

2.불국사삼층석탑(석가탑)

 

 

종 목 국보 제21호

분 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탑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 불국사

시 대 통일신라

 

불국사삼층석탑과 불국사다보탑(국보 제20호)은 절의 대웅전 앞 뜰 동서쪽에 각각 세워져 있는데, 서쪽탑이 삼층석탑이다. 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으로, ‘석가탑’이라고 줄여서 부른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것을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이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에 따른 것이다.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석탑으로, 감은사지삼층석탑(국보 제112호)과 고선사지삼층석탑(국보 제38호)의 양식을 이어받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훌륭한 작품이다. 탑 전체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2층의 기단이 튼실하게 짜여 있으며, 목조건축을 본따서 위·아래층 기단의 모서리마다 돌을 깎아 기둥 모양을 만들어 놓았다. 탑신에도 그러한 기둥을 새겼으며, 지붕돌의 모서리들은 모두 치켜올려져 있어서 탑 전체에 경쾌하게 날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더한다. 탑의 머리장식(상륜부)은 파손되어 1973년 남원 실상사삼층석탑(보물 제37호)의 머리장식을 본따서 복원하였다. 탑 주위로 둘러놓은 주춧돌 모양의 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이를 부처님의 사리를 두는 깨끗한 곳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되며, 그 후 원래 모습대로 잘 보존되었으나, 안타깝게도 1966년 9월 도굴꾼들에 의해 탑이 손상되는 일이 있었다. 그해 12월 탑을 완전하게 복원하면서 2층 탑신의 몸돌 앞면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던 사각형의 공간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기서 여러가지 사리용기들과 유물을 찾아냈는데, 그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 제126호)이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 닥나무 종이로 만들어졌으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탑은 ‘무영탑(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여기에는 석가탑을 지은 백제의 석공 아사달을 찾아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온 아사녀가 남편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연못에 몸을 던져야 했던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

 

3.불국사연화교칠보교

 

 

종 목 국보 제22호

분 류 유적건조물 / 교통통신/ 교통/ 교량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 불국사

시 대 통일신라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연화교와 칠보교는 극락전으로 향하는 안양문과 연결된 다리로, 세속 사람들이 밟는 다리가 아니라, 서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연화교와 칠보교는 극락전으로 향하는 안양문과 연결된 다리로, 세속 사람들이 밟는 다리가 아니라, 서방 극락세계의 깨달은 사람만이 오르내리던 다리라고 전해지고 있다.

 

전체 18계단으로, 밑에는 10단의 연화교가 있고 위에는 8단의 칠보교가 놓여있다. 청운교·백운교보다 규모가 작을 뿐 구조나 구성형식 등이 매우 비슷한데,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성이나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한 점, 다리 아래가 무지개 모양을 그리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비슷한 구성 속에도 이 다리만의 독특한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연화교의 층계마다 연꽃잎을 도드라지게 새겨놓았다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오랜 세월동안 스쳐간 사람들의 발자국 탓에 많이 닳아서인지 조각이 희미해져 있어, 지금은 통행을 금지하고 있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창건 당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다리를 오르내리며 극락왕생을 기원하였고, 비구니가 된 신라 헌강왕비도 이곳을 오가며 왕의 극락왕생을 빌었다고 전해진다.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가 웅장한 멋을 보여주는데 비해, 섬세한 아름다움을 내보이고 있어, 불국사의 조형에 조화와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4.불국사청운교백운교

 

 

종 목 국보 제23호

분 류 유적건조물 / 교통통신/ 교통/ 교량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 불국사

시 대 통일신라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청운교와 백운교는 대웅전을 향하는 자하문과 연결된 다리를 말하는데, 다리 아래의 일반인의 세계와 다리 위로의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전체 33계단으로 되어 있는데, 33이라는 숫자는 불교에서 아직 부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33가지의 단계를 의미한다. 즉, 다리를 통해 깨달음에 다다르고자 하는 ‘희망의 다리’, ‘기쁨과 축복의 다리’로의 표현의지인 것이다. 아래로는 17단의 청운교가 있고 위로는 16단의 백운교가 있는데, 청운교를 푸른 청년의 모습으로, 백운교를 흰머리 노인의 모습으로 빗대어 놓아 인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으며, 오르는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하여 정교하게 다듬었다. 다리 아래는 무지개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직선으로 딱딱해졌던 시선을 부드럽고 생동감있게 풀어주고 있다. 다리가 있는 석축 아래쪽으로 연못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지금도 계단 왼쪽에 물이 떨어지도록 만들어 놓은 장치가 남아 있다. 이곳에서 물이 떨어지면 폭포처럼 부서지는 물보라에 의해 무지개가 떴다고 전하고 있어, 무척이나 아름다웠을 옛 불국사를 그려보게 된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신라시대의 다리로는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또한, 무지개모양으로 이루어진 다리 아래부분은 우리나라 석교나 성문에서 보여지는 반원아치모양의 홍예교의 시작점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5.불국사금동비로자나불좌상

 

 

종 목 국보 제26호

분 류 유물 / 불교조각/ 금속조/ 불상

수량/면적 1구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 불국사

시 대 통일신라

 

경주시 토함산 기슭에 자리잡은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삼국유사』에 의하면 김대성은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 석굴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불국사 비로전에 모셔져 있는 높이 1.77m의 이 불상은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의미를 지닌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기교있게 붙여 놓았으며, 얼굴은 위엄이 있으면서도 자비로운 인상을 풍기고 있다.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은 매우 얇게 표현되어 당당한 신체의 굴곡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며,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는 옷주름의 표현은 매우 사실적이다. 손모양은 오른손 검지를 왼손으로 감싸고 있어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과는 반대로 표현되었다.

 

떡 벌어진 어깨, 양감있는 당당한 가슴, 잘록한 허리 등에서 이상적이면서 세련된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제28호)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린다.

 

6.불국사금동아미타여래좌상

 

 

종 목 국보 제27호

분 류 유물 / 불교조각/ 금속조/ 불상

수량/면적 1구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 불국사

시 대 통일신라

 

경주시 토함산 기슭에 자리잡은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 경주시 토함산 기슭에 자리잡은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삼국유사』에 의하면 김대성은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 석굴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은 불국사 극락전에 모셔진 높이 1.66m의 불상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기교있게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다. 원만하고 자비스러운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있으며, 눈썹은 반원형이고 콧날은 오똑하다. 떡 벌어진 어깨, 당당한 가슴, 늘씬한 몸매 등은 장대하고 건강한 남성의 체구를 연상시키며, 두 무릎은 넓게 퍼져서 매우 안정된 느낌을 준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에는 거침없는 주름이 새겨져 있는데, 특히 옷깃 안쪽에서 밖으로 늘어지는 옷 접힘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어깨 높이로 들어 약간 오므린 왼손은 손바닥을 보이고 있으며, 오른손은 무릎에 올려 놓고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약간 구부리고 있다.

 

떡 벌어진 어깨, 양감있는 당당한 가슴, 잘록한 허리 등에서 사실적이면서 세련된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26호),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제28호)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린다.

 

7.법주사쌍사자석등

 

 

종 목 국보 제5호

분 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석등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209 법주사

시 대 통일신라

 

 법주사 대웅전과 팔상전 사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사자를 조각한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으며 매우 특수한 형태를 하고 있다.

 

넓다란 8각의 바닥돌 위에 올려진 사자 조각은 두 마리가 서로 가슴을 맞대고 뒷발로 아래돌을 디디고 서서 앞발과 주둥이로는 윗돌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아랫돌과 윗돌에는 각각 연꽃을 새겨 두었는데, 윗돌에 두 줄로 돌려진 연꽃무늬는 옛스러운 멋을 풍긴다. 사자는 현재 남아있는 사자조각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 머리의 갈기, 다리와 몸의 근육까지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은 8각으로 높직하며, 네 곳에 창을 내어 불빛이 새어나오도록 하였다. 지붕돌은 처마밑이 수평을 이루다가 여덟 귀퉁이에서 위로 살짝 들려 있는데, 꾸밈을 두지 않아서인지 소박하고 안정되어 보인다.

 

석등을 세운 시기는 성덕왕 19년(720)으로 추측되며, 조금 큰 듯한 지붕돌이 넓적한 바닥돌과 알맞은 비례를 이루어 장중한 품격이 넘친다. 신라의 석등이 8각 기둥을 주로 사용하던 것에 비해 두 마리의 사자가 이를 대신하고 있어 당시로서는 상당히 획기적인 시도였을 것으로 보이며, 통일신라는 물론 후대에 가서도 이를 모방하는 작품이 나타났다. 같은 절 안에 있는 법주사 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과 함께 신라 석등을 대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8.중원탑평리칠층석탑

 

 

종 목 국보 제6호

분 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탑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북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 11

시 대 통일신라

 

 남한강의 아름다운 경관과 잘 어우러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당시에 세워진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우리나라의 중앙부에 위치한다고 해서 중앙탑이라고도 부르는 이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7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

 

높은 탑신을 받치기 위해 넓게 시작되는 기단은 각 면마다 여러 개의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 역시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은 네 귀퉁이 끝이 경쾌하게 치켜올려 있어 자칫 무겁게 보일 수 있는 탑에 활기를 주고 있으며, 밑면에는 5단씩의 받침을 새겨 놓았다. 탑 정상의 머리장식은 보통 하나의 받침돌 위에 머리장식이 얹어지는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이중으로 포개어진 똑같은 모양의 받침돌이 머리장식을 받쳐주고 있다.

 

기단에서의 기둥조각 배치,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의 짜임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8세기 후반에 세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전체적으로 규모가 커서 웅장하기는 하나 너비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듯 하여 안정감은 덜하며, 세부수법이 약화되고 섬약해져 있어 당시의 경향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1917년 탑을 보수할 때 6층 몸돌과 기단 밑에서 사리장치와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6층 몸돌에서 발견된 거울이 고려시대의 것으로 밝혀져 탑 조성 이후 고려시대에 와서 2차 봉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9.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종 목 국보 제8호

분 류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80-2

시 대 통일신라

 

 성주사터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낭혜화상 무염의 탑비이다. 낭혜화상은 무열왕의 8세손으로, 애장왕 2년(801)에 태어나 열세 살 되던 해에 출가하였다. 헌덕왕 13년(821)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수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문성왕 7년(845)에 귀국하여 당시 웅천(지금의 보령)에 있던 오합사(烏合寺)의 주지가 되었다. 이 절에서 선을 널리 알리어 절이 점점 크게 번성하게 되자, 왕은 ‘성주사’라는 절 이름을 내려주었으며, 진성여왕 2년(888) 89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낭혜’라 하고, 탑 이름을 ‘백월보광’이라 내리었다.

 

절터 서북쪽에 세워진 이 비는 거북 모습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로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받침돌이 심하게 부서진 채 흙에 묻혀 있던 것을 1974년에 해체·보수하였다.

 

얼굴의 일부분이 깨져 있는 거북은 머리 위쪽에 둥근 뿔이 나 있고, 뒤로 째진 눈에는 눈썹이 휘말려 있으며, 입은 마치 불을 내뿜으려는 기세이다. 등에는 선명한 이중의 육각무늬를 새기고, 중앙에는 제법 굵직한 구름무늬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구름무늬 위로는 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을 높게 마련하여 각 면을 장식하였다. 길다란 비몸은 앞면에만 비문을 새기고, 위쪽 양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 놓았다. 맨 위에 올려진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을 두르고, 그 위로 구름과 용이 서로 뒤엉킨 장면을 입체적으로 조각하였는데, 힘찬 용틀임과 웅장한 기상이 잘 나타나 있다. 앞면에는 받침돌의 거북머리와 같은 방향으로 용머리가 툭 불거져 나와 있어 흥미를 자아낸다.

 

비문에는 낭혜화상의 업적이 자세히 적혀 있는데, 진골이던 낭혜화상의 가문이 아버지 대에 이르러 6두품의 신분으로 낮아지는 대목도 나타나 있어 당시 신라골품제도의 연구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최치원이 글을 짓고 그의 사촌인 최인곤이 글씨를 썼으며, 비를 세운 시기는 적혀 있지 않으나, 낭혜화상이 입적한 지 2년 후인 진성여왕 4년(890)에 그의 사리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이 때 비도 함께 세웠을 것으로 본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탑비 중에서 가장 거대한 풍채를 자랑하며, 화려하고 아름다운 조각솜씨가 작품속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어 통일신라시대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10.실상사백장암삼층석탑

 

 

종 목 국보 제10호

분 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탑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전북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974 실상사 백장암

시 대 통일신라

 

 실상사는 지리산 천황봉 서편에 위치한 절로,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이 창건하였다. 이 곳에서 북쪽으로 얼마쯤 가다보면 백장암이 나타나는데, 실상사에 딸린 소박한 암자로, 그 아래 경작지에 이 탑이 세워져 있다.

 

낮은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각 부의 구조와 조각에서 특이한 양식과 수법을 보이고 있다. 즉, 일반적인 탑은 위로 올라갈수록 너비와 높이가 줄어드는데 비해 이 탑은 너비가 거의 일정하며, 2층과 3층은 높이도 비슷하다. 층을 이루지 않고 두툼한 한 단으로 표현된 지붕돌의 받침도 당시의 수법에서 벗어나 있다. 또한 탑 전체에 조각이 가득하여 기단은 물론 탑신에서 지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조각이 나타난다. 기단과 탑신괴임에는 난간모양을 새겨 멋을 내었고, 탑신의 1층에는 보살상과 신장상을, 2층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천인상을, 3층에는 천인좌상을 새겼다. 지붕돌 밑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3층만은 삼존상이 새겨져 있다.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는 이 탑은 갖가지 모습들의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하는 등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구조가 돋보이고 있어, 당시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석탑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1. 통일신라의 무역대상 나라 

- 주로 당나라와 왜와 배로 교류를했습니다.

공식 사절을 비롯한 유학생, 승려, 상인 등의 왕래가 빈번해
졌으며, 해상 무역도 번성했습니다.
또한 아라비아 상인과도 교류가 있었습니다.

 

2. 통일신라의 무역 수출, 수입품

- 당과의 무역에서

수출품 : 인삼, 금은 세공품 등

수입품 : 당으로부터 비단, 책, 차 등

- 왜와의 무역에서

수출품 : 실, 황금, 수은 등

수입품 : 담비나 호랑이 등의 가죽, 꿀, 인삼 등의 토산물

 

3. 무역으로 알려진 인물

- 누구보다 장보고가 유명하죠

 9 세기 이후에 해적들의 약탈 행위가 극심해지자

장보고는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적 소탕, 무역 보호를 했습니다.

또 황해의 해상권을 장악하면서 당, 일본과의 무역도 독점했습니다

 

무역항은..  울산 하고.  청해진 밖에 기억이없내요..

 

울산은  아라비아 상인들이 자주 들락날락 햇던 항구 이구요...

 

다음엔  청해진..  장보고가 설치한 세계최초의 무역항이에요..  일본. 중국 심지어  동남아시아 쪽에서도 왓다는 것을 들은 기억이 있내요..

 

(필자두 울산 사라욥 ㅋㅋ)

안녕하세요

당,신라,일본과의 무역 관계에 대해서...

우선 발해는 초기에는 당과 전쟁을 치르면서

무역이 활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문왕대에 이르러

문물이 정비되고 문물의 교류가 활발해졌습니다.

그래서 당나라의 문화도 많이 받아들이고

관리들의 관복, 통치 기구 등을 당나라의 것으로 많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대로가 아니라 발해식에 맞게 바꿔서 말이죠)

또 당나라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시험을 치르는 빈공과에서 신라와

수석자리를 다툰 것으로 보아 학문교류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과의 관계...

발해는 특히 일본과의 무역관계가 활발했습니다.

발해는 일년에도 수 차례씩 일본으로 사신을 보내 교류를 많이 했습니다.

이는 발해의 필요도 있었지만 주로 일본이 요청해서였습니다.

발해 사신은 가져가는 품목보다 일본에서 훨씬 많이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한때 발해 사신의 파견수를 줄여달라고 했으나

결국 그대로 내버려 두었습니다.

발해 사신의 품목 중에 일본에서 가장 인기있는 발해품목은 모피였습니다.

모피는 일본 귀족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여 당시 정권을 잡고있던

막부는 (이름은 정확히 기억이 안나서;;) 귀족들에게 무분별한 모피의

사용을 금지했다고 합니다.(그러나 잘 지켜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신라와의 무역은, 그리 활발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남경남해부를 지나 발해의 수도와 신라 간의 무역로가 설치되었고

어느 정도 무역이 있었을 것 같지만, 일본과의 무역보다는 훨씬 규모가

적었을 것입니다.

또 당나라의 이이제이 전술, 즉 오랑캐를 동원해 오랑캐를 다스리는

전술로 인해 발해와 신라의 관계는 항상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당나라가 뒤에서 신라를 조절해 발해와의 관계는 험악했습니다.

한때 신라도 발해를 공격하려 했고(추위로 인해 실패) 발해의 공격에 대비해

국경지대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상은 제 생각에서 나온 답변이었습니다.

최근 고구려재단에서 발간한 "새롭게 본 발해사" 라는 책을 보시면

더욱 더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그 책은 아마도 모든 학교에 무료로 나누어

주는 것 같으니 학교 도서관에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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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불국사다보탑

 

 

종 목 국보 제20호

분 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탑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 불국사

시 대 통일신라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과거·현재·미래의 부처가 사는 정토, 즉 이상향을 구현하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정신세계가 잘 드러나 있는 곳이다.『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 짓지 못하여 그 후 나라에서 완성하여 나라의 복을 비는 절로 삼게 되었다.

 

다보탑과 석가탑(불국사삼층석탑,국보 제21호)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10.4m로 같다. 절내의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동쪽탑이 다보탑이다. 다보탑은 특수형 탑을, 석가탑은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석가탑을 보면 2단의 기단위에 세운 3층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다보탑은 그 층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십자 모양 평면의 기단에는 사방에 돌계단을 마련하고, 8각형의 탑신과 그 주위로는 네모난 난간을 돌렸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된다. 목조건축의 복잡한 구조를 참신한 발상을 통해 산만하지 않게 표현한 뛰어난 작품으로, 4각, 8각, 원을 한 탑에서 짜임새있게 구성한 점, 각 부분의 길이·너비·두께를 일정하게 통일시킨 점 등은 8세기 통일신라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안타깝게도 다보탑에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설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1925년경에 일본인들이 탑을 완전히 해체, 보수하였는데, 이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또한 탑 속에 두었을 사리와 사리장치, 그 밖의 유물들이 이 과정에서 모두 사라져버려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기단의 돌계단 위에 놓여있던 네 마리의 돌사자 가운데 보존상태가 가장 좋았을 듯한 3마리가 일제에 의해 약탈되어, 이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아직까지 그 행방을 알 수가 없다.

 

2.불국사삼층석탑(석가탑)

 

 

종 목 국보 제21호

분 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탑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 불국사

시 대 통일신라

 

불국사삼층석탑과 불국사다보탑(국보 제20호)은 절의 대웅전 앞 뜰 동서쪽에 각각 세워져 있는데, 서쪽탑이 삼층석탑이다. 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으로, ‘석가탑’이라고 줄여서 부른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것을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이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에 따른 것이다.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석탑으로, 감은사지삼층석탑(국보 제112호)과 고선사지삼층석탑(국보 제38호)의 양식을 이어받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훌륭한 작품이다. 탑 전체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2층의 기단이 튼실하게 짜여 있으며, 목조건축을 본따서 위·아래층 기단의 모서리마다 돌을 깎아 기둥 모양을 만들어 놓았다. 탑신에도 그러한 기둥을 새겼으며, 지붕돌의 모서리들은 모두 치켜올려져 있어서 탑 전체에 경쾌하게 날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더한다. 탑의 머리장식(상륜부)은 파손되어 1973년 남원 실상사삼층석탑(보물 제37호)의 머리장식을 본따서 복원하였다. 탑 주위로 둘러놓은 주춧돌 모양의 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이를 부처님의 사리를 두는 깨끗한 곳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되며, 그 후 원래 모습대로 잘 보존되었으나, 안타깝게도 1966년 9월 도굴꾼들에 의해 탑이 손상되는 일이 있었다. 그해 12월 탑을 완전하게 복원하면서 2층 탑신의 몸돌 앞면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던 사각형의 공간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기서 여러가지 사리용기들과 유물을 찾아냈는데, 그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 제126호)이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 닥나무 종이로 만들어졌으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탑은 ‘무영탑(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여기에는 석가탑을 지은 백제의 석공 아사달을 찾아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온 아사녀가 남편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연못에 몸을 던져야 했던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

 

3.불국사연화교칠보교

 

 

종 목 국보 제22호

분 류 유적건조물 / 교통통신/ 교통/ 교량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 불국사

시 대 통일신라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연화교와 칠보교는 극락전으로 향하는 안양문과 연결된 다리로, 세속 사람들이 밟는 다리가 아니라, 서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연화교와 칠보교는 극락전으로 향하는 안양문과 연결된 다리로, 세속 사람들이 밟는 다리가 아니라, 서방 극락세계의 깨달은 사람만이 오르내리던 다리라고 전해지고 있다.

 

전체 18계단으로, 밑에는 10단의 연화교가 있고 위에는 8단의 칠보교가 놓여있다. 청운교·백운교보다 규모가 작을 뿐 구조나 구성형식 등이 매우 비슷한데,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성이나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한 점, 다리 아래가 무지개 모양을 그리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비슷한 구성 속에도 이 다리만의 독특한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연화교의 층계마다 연꽃잎을 도드라지게 새겨놓았다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오랜 세월동안 스쳐간 사람들의 발자국 탓에 많이 닳아서인지 조각이 희미해져 있어, 지금은 통행을 금지하고 있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창건 당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다리를 오르내리며 극락왕생을 기원하였고, 비구니가 된 신라 헌강왕비도 이곳을 오가며 왕의 극락왕생을 빌었다고 전해진다.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가 웅장한 멋을 보여주는데 비해, 섬세한 아름다움을 내보이고 있어, 불국사의 조형에 조화와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4.불국사청운교백운교

 

 

종 목 국보 제23호

분 류 유적건조물 / 교통통신/ 교통/ 교량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 불국사

시 대 통일신라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청운교와 백운교는 대웅전을 향하는 자하문과 연결된 다리를 말하는데, 다리 아래의 일반인의 세계와 다리 위로의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전체 33계단으로 되어 있는데, 33이라는 숫자는 불교에서 아직 부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33가지의 단계를 의미한다. 즉, 다리를 통해 깨달음에 다다르고자 하는 ‘희망의 다리’, ‘기쁨과 축복의 다리’로의 표현의지인 것이다. 아래로는 17단의 청운교가 있고 위로는 16단의 백운교가 있는데, 청운교를 푸른 청년의 모습으로, 백운교를 흰머리 노인의 모습으로 빗대어 놓아 인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으며, 오르는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하여 정교하게 다듬었다. 다리 아래는 무지개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직선으로 딱딱해졌던 시선을 부드럽고 생동감있게 풀어주고 있다. 다리가 있는 석축 아래쪽으로 연못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지금도 계단 왼쪽에 물이 떨어지도록 만들어 놓은 장치가 남아 있다. 이곳에서 물이 떨어지면 폭포처럼 부서지는 물보라에 의해 무지개가 떴다고 전하고 있어, 무척이나 아름다웠을 옛 불국사를 그려보게 된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신라시대의 다리로는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또한, 무지개모양으로 이루어진 다리 아래부분은 우리나라 석교나 성문에서 보여지는 반원아치모양의 홍예교의 시작점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5.불국사금동비로자나불좌상

 

 

종 목 국보 제26호

분 류 유물 / 불교조각/ 금속조/ 불상

수량/면적 1구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 불국사

시 대 통일신라

 

경주시 토함산 기슭에 자리잡은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삼국유사』에 의하면 김대성은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 석굴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불국사 비로전에 모셔져 있는 높이 1.77m의 이 불상은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의미를 지닌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기교있게 붙여 놓았으며, 얼굴은 위엄이 있으면서도 자비로운 인상을 풍기고 있다.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은 매우 얇게 표현되어 당당한 신체의 굴곡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며,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는 옷주름의 표현은 매우 사실적이다. 손모양은 오른손 검지를 왼손으로 감싸고 있어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과는 반대로 표현되었다.

 

떡 벌어진 어깨, 양감있는 당당한 가슴, 잘록한 허리 등에서 이상적이면서 세련된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제28호)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린다.

 

6.불국사금동아미타여래좌상

 

 

종 목 국보 제27호

분 류 유물 / 불교조각/ 금속조/ 불상

수량/면적 1구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 불국사

시 대 통일신라

 

경주시 토함산 기슭에 자리잡은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 경주시 토함산 기슭에 자리잡은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삼국유사』에 의하면 김대성은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 석굴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은 불국사 극락전에 모셔진 높이 1.66m의 불상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기교있게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다. 원만하고 자비스러운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있으며, 눈썹은 반원형이고 콧날은 오똑하다. 떡 벌어진 어깨, 당당한 가슴, 늘씬한 몸매 등은 장대하고 건강한 남성의 체구를 연상시키며, 두 무릎은 넓게 퍼져서 매우 안정된 느낌을 준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에는 거침없는 주름이 새겨져 있는데, 특히 옷깃 안쪽에서 밖으로 늘어지는 옷 접힘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어깨 높이로 들어 약간 오므린 왼손은 손바닥을 보이고 있으며, 오른손은 무릎에 올려 놓고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약간 구부리고 있다.

 

떡 벌어진 어깨, 양감있는 당당한 가슴, 잘록한 허리 등에서 사실적이면서 세련된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26호),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제28호)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린다.

 

7.법주사쌍사자석등

 

 

종 목 국보 제5호

분 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석등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209 법주사

시 대 통일신라

 

 법주사 대웅전과 팔상전 사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사자를 조각한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으며 매우 특수한 형태를 하고 있다.

 

넓다란 8각의 바닥돌 위에 올려진 사자 조각은 두 마리가 서로 가슴을 맞대고 뒷발로 아래돌을 디디고 서서 앞발과 주둥이로는 윗돌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아랫돌과 윗돌에는 각각 연꽃을 새겨 두었는데, 윗돌에 두 줄로 돌려진 연꽃무늬는 옛스러운 멋을 풍긴다. 사자는 현재 남아있는 사자조각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 머리의 갈기, 다리와 몸의 근육까지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은 8각으로 높직하며, 네 곳에 창을 내어 불빛이 새어나오도록 하였다. 지붕돌은 처마밑이 수평을 이루다가 여덟 귀퉁이에서 위로 살짝 들려 있는데, 꾸밈을 두지 않아서인지 소박하고 안정되어 보인다.

 

석등을 세운 시기는 성덕왕 19년(720)으로 추측되며, 조금 큰 듯한 지붕돌이 넓적한 바닥돌과 알맞은 비례를 이루어 장중한 품격이 넘친다. 신라의 석등이 8각 기둥을 주로 사용하던 것에 비해 두 마리의 사자가 이를 대신하고 있어 당시로서는 상당히 획기적인 시도였을 것으로 보이며, 통일신라는 물론 후대에 가서도 이를 모방하는 작품이 나타났다. 같은 절 안에 있는 법주사 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과 함께 신라 석등을 대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8.중원탑평리칠층석탑

 

 

종 목 국보 제6호

분 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탑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북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 11

시 대 통일신라

 

 남한강의 아름다운 경관과 잘 어우러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당시에 세워진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우리나라의 중앙부에 위치한다고 해서 중앙탑이라고도 부르는 이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7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

 

높은 탑신을 받치기 위해 넓게 시작되는 기단은 각 면마다 여러 개의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 역시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은 네 귀퉁이 끝이 경쾌하게 치켜올려 있어 자칫 무겁게 보일 수 있는 탑에 활기를 주고 있으며, 밑면에는 5단씩의 받침을 새겨 놓았다. 탑 정상의 머리장식은 보통 하나의 받침돌 위에 머리장식이 얹어지는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이중으로 포개어진 똑같은 모양의 받침돌이 머리장식을 받쳐주고 있다.

 

기단에서의 기둥조각 배치,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의 짜임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8세기 후반에 세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전체적으로 규모가 커서 웅장하기는 하나 너비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듯 하여 안정감은 덜하며, 세부수법이 약화되고 섬약해져 있어 당시의 경향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1917년 탑을 보수할 때 6층 몸돌과 기단 밑에서 사리장치와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6층 몸돌에서 발견된 거울이 고려시대의 것으로 밝혀져 탑 조성 이후 고려시대에 와서 2차 봉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9.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종 목 국보 제8호

분 류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80-2

시 대 통일신라

 

 성주사터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낭혜화상 무염의 탑비이다. 낭혜화상은 무열왕의 8세손으로, 애장왕 2년(801)에 태어나 열세 살 되던 해에 출가하였다. 헌덕왕 13년(821)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수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문성왕 7년(845)에 귀국하여 당시 웅천(지금의 보령)에 있던 오합사(烏合寺)의 주지가 되었다. 이 절에서 선을 널리 알리어 절이 점점 크게 번성하게 되자, 왕은 ‘성주사’라는 절 이름을 내려주었으며, 진성여왕 2년(888) 89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낭혜’라 하고, 탑 이름을 ‘백월보광’이라 내리었다.

 

절터 서북쪽에 세워진 이 비는 거북 모습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로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받침돌이 심하게 부서진 채 흙에 묻혀 있던 것을 1974년에 해체·보수하였다.

 

얼굴의 일부분이 깨져 있는 거북은 머리 위쪽에 둥근 뿔이 나 있고, 뒤로 째진 눈에는 눈썹이 휘말려 있으며, 입은 마치 불을 내뿜으려는 기세이다. 등에는 선명한 이중의 육각무늬를 새기고, 중앙에는 제법 굵직한 구름무늬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구름무늬 위로는 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을 높게 마련하여 각 면을 장식하였다. 길다란 비몸은 앞면에만 비문을 새기고, 위쪽 양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 놓았다. 맨 위에 올려진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을 두르고, 그 위로 구름과 용이 서로 뒤엉킨 장면을 입체적으로 조각하였는데, 힘찬 용틀임과 웅장한 기상이 잘 나타나 있다. 앞면에는 받침돌의 거북머리와 같은 방향으로 용머리가 툭 불거져 나와 있어 흥미를 자아낸다.

 

비문에는 낭혜화상의 업적이 자세히 적혀 있는데, 진골이던 낭혜화상의 가문이 아버지 대에 이르러 6두품의 신분으로 낮아지는 대목도 나타나 있어 당시 신라골품제도의 연구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최치원이 글을 짓고 그의 사촌인 최인곤이 글씨를 썼으며, 비를 세운 시기는 적혀 있지 않으나, 낭혜화상이 입적한 지 2년 후인 진성여왕 4년(890)에 그의 사리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이 때 비도 함께 세웠을 것으로 본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탑비 중에서 가장 거대한 풍채를 자랑하며, 화려하고 아름다운 조각솜씨가 작품속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어 통일신라시대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10.실상사백장암삼층석탑

 

 

종 목 국보 제10호

분 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탑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전북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974 실상사 백장암

시 대 통일신라

 

 실상사는 지리산 천황봉 서편에 위치한 절로,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이 창건하였다. 이 곳에서 북쪽으로 얼마쯤 가다보면 백장암이 나타나는데, 실상사에 딸린 소박한 암자로, 그 아래 경작지에 이 탑이 세워져 있다.

 

낮은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각 부의 구조와 조각에서 특이한 양식과 수법을 보이고 있다. 즉, 일반적인 탑은 위로 올라갈수록 너비와 높이가 줄어드는데 비해 이 탑은 너비가 거의 일정하며, 2층과 3층은 높이도 비슷하다. 층을 이루지 않고 두툼한 한 단으로 표현된 지붕돌의 받침도 당시의 수법에서 벗어나 있다. 또한 탑 전체에 조각이 가득하여 기단은 물론 탑신에서 지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조각이 나타난다. 기단과 탑신괴임에는 난간모양을 새겨 멋을 내었고, 탑신의 1층에는 보살상과 신장상을, 2층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천인상을, 3층에는 천인좌상을 새겼다. 지붕돌 밑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3층만은 삼존상이 새겨져 있다.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는 이 탑은 갖가지 모습들의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하는 등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구조가 돋보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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