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 연가 7년명 여래 입상 (고구려) 사진

금동 연가 7년명 여래 입상 (고구려) 사진

작성일 2013.03.23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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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문화재 22가지를 올려드립니다.

 

(고구려의 문화재)

 

1.금동신묘명삼존불입상


종 목  국보  제85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한남동 747-18 (리움미술관) 
시 대 고구려


1930년 황해도 곡산군 화촌면 봉산리에서 출토되어 현재는 리움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불상으로 높이 15.5㎝이다. 하나의 커다란 광배(光背)에 본존불과 좌우보살상을 조각한 형태의 삼존불로 현존하는 같은 형식의 불상 중에서 가장 크다.


좌우의 보살상은 본존불보다 훨씬 작게 만들어 광배의 끝에 겨우 매달린 듯 보이는데, 이는 본존불을 한결 돋보이게 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 본존불의 가슴과 광배의 오른쪽 끝에 약간의 흠집이 있을 뿐,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본존불은 얼굴이 풍만하고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으며,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두껍게 표현되어 있으며, 옷자락은 양 옆으로 펼쳐지면서 발목까지 덮고 있다. 오른손은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손은 내려서 손끝이 아래로 향하면서 손바닥을 보이고 있다. 광배는 불상과 분리되며 본존불의 등 뒤에 달려있는 뾰족한 촉으로 고정시켜 준다.


배 모양의 광배는 본존불을 중심으로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표현하였고, 그 안에 연꽃무늬, 덩굴무늬, 인동초무늬를 새겼다. 머리광배와 몸광배의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를 새기고, 그 사이에는 작은 부처를 조각하였다. 광배의 아래쪽 끝부분에 새겨진 두 협시보살은 큼직한 얼굴에 원통형의 빈약한 체구를 지니고 있다. 가슴에는 X자형의 옷자락이 새겨져 있으며, 전체적으로 본존불에 비해 솜씨가 서툴러 보인다.


광배 뒷면에는 다섯 사람이 모여 그들의 스승과 부모를 위해 이 불상을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다. 글에 나타난 사람 이름이나 불상의 양식으로 보아 고구려 불상으로 보이며, 글에 나타난 ‘신묘(辛卯)’는 고구려 평원왕 13년(571)년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인 불상 형태는 큼직한 얼굴과 손, 추상적인 신체 표현 등에서 연가 7년명 금동여래입상(국보 제119호)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지만, 강인한 기품이 줄어들고 유연하면서 세련된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2.연가7년명금동여래입상

 

종 목  국보  제119호

지 정 일 1964.03.30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고구려


고구려와 관련된 글이 새겨져 있는 불상으로, 옛 신라 지역인 경상남도 의령지방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광배 뒷면에 남아있는 글에 따르면 평양 동사의 승려들이 천불을 만들어 세상에 널리 퍼뜨리고자 만들었던 불상 가운데 29번째 것으로, 전체 높이는 16.2㎝이다.

 

머리는 삼국시대 불상으로는 유례가 드물게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큼직한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있다. 얼굴은 비교적 작은데, 살이 빠져 길쭉한 가운데 미소를 풍기고 있다.

 

오른손은 앞으로 들어 손바닥을 정면으로 향하고 있으며, 왼손은 허리 부분에서 손바닥이 정면을 향하게 하여 아래로 내리고 있다. 왼손의 세번째와 네 번째 손가락을 구부리고 있는 모습은 삼국시대 불상에서 나타나는 특징적인 모습이다. 유난히 두꺼운 옷에 싸인 신체는 굴곡의 표현이 없지만, 전체적인 체구와 약간 보이는 어깨의 골격 등에서 강인한 힘을 느끼게 한다. 새의 날개깃 모양의 옷자락은 좌우로 힘차게 뻗쳐 있는데, 날카롭고 힘있는 모습이 중국 북위 이래의 양식을 보여준다. 불상과 함께 붙여서 만든 광배는 앞면에 거칠게 소용돌이치는 듯한 불꽃무늬가 선으로 새겨져 있다.

 

광배의 일부분이 손상되었으나 도금까지도 완전히 남아 있는 희귀한 불상으로, 광배 뒷면에 남아있는 글과 강렬한 느낌을 주는 표현 방법 등으로 볼 때 6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고구려 불상으로 보인다.

 

3.중원고구려비

 

종 목 국보 제205호

지 정 일 1981.03.18

소 재 지 충북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부락 280-11

시 대 고구려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석비로,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개척한 후 세운 기념비로 추정된다. 1979년 입석마을 입구에서 발견되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기도 했지만 비의 중요성을 몰랐던 동네 주민들이 우물가의 빨래판으로 사용하기도 하여 발견된 당시 비문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석비는 돌기둥 모양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4면에 모두 글을 새겼는데, 그 형태가 만주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와 비슷하다. 비문은 심하게 닳아 앞면과 왼쪽 측면 일부만 읽을 수 있는 상태로, 내용 중 처음에 ‘고려대왕’이라는 글자가 보이는데 여기에서 고려는 고구려를 뜻한다. ‘전부대사자’·‘제위’·‘사자’ 등 고구려 관직 이름과 광개토대왕 비문에서와 같이 ‘고모루성’등의 글자가 보이고, ‘모인삼백’·‘신라토내’ 등 고구려가 신라를 불렀던 말들이 쓰여 있어 고구려비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고구려 영토의 경계를 표시하는 비로,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하고 한반도의 중부지역까지 장악하여 그 영토가 충주지역에까지 확장되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신라, 백제 3국의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4.성석편

 

종 목  보물  제642호  
지 정 일 1978.12.07
소 재 지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 11-1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시 대 고구려


이것은 고구려의 평양성을 쌓을 당시 비교적 평평한 자연석 위에 글자를 새긴 것이다.

 

평양성은 고구려의 도성으로 외성, 중성, 내성, 북성 등 4성으로 나누어져 있다. 성의 길이는 전체 15㎞로 성곽주변은 강으로 둘러싸여 평양시의 중심부를 이루고, 주로 내성벽은 돌로, 외성벽은 흙으로 축성되어 있다. 성의 내부에는 당시 고구려의 도시구획터가 아직도 남아있다. 이 성곽에서 현재까지 글자가 새겨진 4개의 성석(城石)이 발견되었는데 그 가운데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성석편은 두 번째로 발견된 것이다. 성석에 새겨진 글자 수는 모두 7행 27자로, 그 내용은 ‘기유년 5월 21일 이곳으로부터 아래쪽 동쪽을 향하여 12리 구간을 물성소형 배 ■백두(物省小兄 俳 ■百頭)가 구축한다’라고 풀이되어지고 있다.

 

이 성석의 현재 상태는 두 번째 행의 깨어져 나간 부분과 함께 전체 9조각으로 균열되어 있어 석고로 고정시켜 놓은 상태이다. 

 

5.광개토대왕릉비

 

중국 지린성 지안현 퉁거우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 비신 높이 5.34m. 각 면 너비 1.5m. 호태왕비라고도 한다.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이고, 각 행이 41자(제1면만 39자)로 총 1,802자인 이 비문은 상고사, 특히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 주는 금석문이다.

 

 

6.연꽃과 짐승얼굴무늬 수막새

 

전형적인 고구려시대의 짐승얼굴무늬 기와이다. 중국에서 짐승얼굴무늬가 기와에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북위시대이며,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짐승얼굴의 모습을 하였다.

 

이러한 짐승얼굴무늬 기와는 평양부근을 중심으로 출토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고구려 중기부터 본격적으로 유행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짐승얼굴무늬 기와는 강력한 힘을 느낄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 특징이다. 특히 짐승얼굴무늬 기와는 부릅뜬 눈, 두 눈썹 사이의 혹, 힘을 준 코, 위로 올라간 수염, 크게 벌린 입 등에서 고구려적인 역동감을 느낄 수 있다.

   

 

7.짐승얼굴무늬 수막새


짐승얼굴무늬(귀면문)는 짐승의 얼굴을 표현한 것으로 주로 건축물이나 공예품에 사용되어 나쁜 것을 물리치는 상징으로 표현되었다. 고구려 기와에 나타나는 짐승얼굴무늬는 지안 퉁거우 지역의 무덤 주변에서 발견되고 있어 상당히 일찍부터 기와무늬로 이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고구려의 짐승얼굴무늬 수막새는 무늬의 선이 예스럽고 소박한 멋이 있으면서도 예리하고, 부릅뜬 눈, 두 눈썹 사이의 혹, 힘을 준 코, 위로 올라간 수염, 크게 벌린 입 속에 앙증맞게 튀어나온 이 등에서 전체적인 조형감각의 힘과 해학성이 느껴진다.

  


8.기마인물도 벽화


쌍영총 널길 서쪽 회벽 위에 그려졌던 벽화편이다. 쌍영총 널길 벽에는 수레와 말 탄 사람, 악대 등 풍부한 벽화가 그려져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없어졌다. 이 벽화편은 1913년 일본인에 의해 쌍영총이 조사될 때에는 벽면에 부착되어 있었지만, 그 후 떼내어져 조선총독부박물관에 보관되어 오늘에 전한다.

 

2개의 편으로, 중앙의 연결부분은 조사 당시 유리건판 사진을 토대로 복원한 것이다. 말 탄 사람의 모습이 그려져 있어, 당시 고구려의 복식과 말갖춤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9.금동관

 

세 개의 세움장식이 남아 있는데, 중앙의 세움 장식은 상부가 없어 그 원형을 알 수 없다. 중앙을 중심으로 좌우의 세움 장식은 서로 대칭된다. 세움장식 내부는 역하트 모양의 구멍(투창)을 내면서, 내부에 세고리잎(삼엽) 무늬를 표현하였다. 이 세고리잎 무늬에는 무엇인가를 매달기 위한 한 쌍의 못 구멍이 상하로 뚫려 있다.

 

또한 세움장식 가장자리를 촘촘히 오려낸 다음, 하나씩 꼬아서 새의 깃털처럼 표현하였다. 이런 표현 기법은 다분히 고구려적인 것으로, 경주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은관과 의성 탑리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에서도 보이고 있어 직접적인 비교가 가능하다.

 

개마총 널방 천장 동측 제1층 평행고임 측면에 그려진 행렬도에서 이러한 금속 관을 관모인 절풍(折風)에 꽂고 있는 모습이 확인된다.

  

 

10.봉황모양 꾸미개

 

평안북도 운산군 동신면 용호동 1호 무덤은 고구려 돌방무덤의 하나로, 1918년 세키노 타다시에 의해 조사되었다. 조사 당시 무덤은 중앙부가 무너져 내려앉은 상태였다. 봉황모양꾸미개는 무덤의 널방(현실)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부뚜막, 토기 등과 함께 출토되었다.얇은 금동판을 오려서 봉황의 옆모습을 만들었다. 역S자로 휜 몸에, 커다란 꼬리깃이 뻗어있는 모습으로, 날개는 별도로 만들어 결합하였지만, 온전하게 남아있지 않다.

 

표면에는 별다른 장식이나 무늬가 없어 단순한 느낌을 준다. 일직선으로 뻗은 두 다리 끝에 각각 하나의 못구멍이 있어 어딘가에 부착하였던 장식으로 생각된다. 비록 단순한 형태이지만, 봉황 특유의 당당함이 느껴진다.

 

 

11.산모양장식품


관 장식의 하나로 추정되는 것으로, 중앙과 하부가 일부 떨어졌다. 금동판을 산山자 모양으로 오린 후, 구멍(투창)을 내어 장식하였다. 내부는 역하트 모양의 구멍(투창)을 내면서, 내부에 세고리잎(삼엽) 무늬를 표현하였다. 이 세고리잎 무늬에는 한쌍의 못 구멍이 상하로 뚫려 있는데, 금실로 둥근 금동판을 매달았다. 이러한 방식은 고구려 깃털모양 금동관의 장식 모티브와 유사하다.

 

이와 유사한 장식품이 북연의 풍소불묘에서도 발견되어 고구려 문물교류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12.충주장미산성

 

종 목 사적 제400호

지 정 일 1997.11.11

소 재 지 충북 충주시 가금면 장천리 산77-1외

시 대 고구려

 

충주시 가금면에 있는 장미산의 능선을 따라 둘러 쌓은 둘레 약 2.9㎞의 삼국시대 산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14권에 보면 ‘하천 서쪽 28리에 옛 석성이 있다’라는 기록과 『대동지지』에 ‘장미산의 옛 성의 터가 남아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1992년 조사결과 성 안에서 발견된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들을 통해 백제·고구려·신라가 차례로 이 성을 점령, 경영하였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북쪽에 있는 절인 봉학사 지역 일부를 빼고는 성벽이 원래 모습대로 남아 있다. 성벽은 돌을 대강 다듬어 직사각형으로 쌓았는데, 서쪽과 서남쪽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북쪽 정상부분의 성벽을 따라 있는 좁고 긴 군사용 참호는 주변 성벽의 재료를 이용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남쪽의 대림산성과 강 건너편 탄금대의 토성, 충주산성과 서로를 보호하며 도왔을 것으로 보인다.

 

파주의 오두산성(사적 제351호)과 지형조건이 비슷해 성을 쌓은 시대나 배경 등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유적이다.

 

13.포천반월성지

 

종 목 사적 제403호

지 정 일 1998.02.20

소 재 지 경기 포천시 군내면 구읍리 산5-1외

시 대 고구려

 

 포천시 군내면에 있는 산성이 있는 자리로 길이는 1,08포천시 군내면에 있는 산성이 있는 자리로 길이는 1,080m이다. 산성은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가 쌓았다고 전해지나, 조사결과 고구려 때 쌓은 성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여러 책에 고성(古城), 산성, 반월산성 등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대동지지』를 통하여 광해군 10년(1618)에 고쳐 쌓고, 인조 1년(1623)부터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연려실기술』, 『포천군읍지』, 『견성지』에서도 돌로 쌓았다는 기록과 함께 여러 가지 당시 성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현재 성의 옛 자취를 엿볼 수 있는 시설물로는 남쪽과 북쪽의 문터, 성벽 바깥쪽에 사각형 모양으로 덧붙여 만든 치성 4개소, 건물터 6곳, 배수시설이었던 수구터, 장수의 지휘대였던 장대터, 적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세웠던 망대터 등이 있다.

 

14.연천 신답리 고분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210호

지 정 일 2005.10.10
소 재 지 경기 연천군  전곡읍 신답리 17-42,17-43 
시 대 고구려


봉토석실분은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묘제이다. 고구려 봉토석실분은 평양으로 천도 이후 지배층의 묘제 양식이 적석총에서 석실봉토분으로 변화하면서 보편화되기 시작한다. 남한지역에서 나타나는 고구려계 봉토석실분은 그 수가 얼마되지 않아 그 정확한 성격을 알 수는 없으나 고구려의 남진과 관련한 중요한 자료로 인식되고 있다. 

 

15.동수묘

 

황해도 안악군 용순면 유순리에 있는 고구려시대 벽화고분. 북한 국보 제28호. 안악 제3호분이라고도 하며, 북한의 지정 명칭은 ‘하무덤’이다. 높이 7m, 남북 길이 33m, 동서 길이 약 30m에 이르는 방대원형의 토분으로, 1949년에 발굴 조사하였다. 널방 안에 진나라 때 사경체로 쓴 묵서가 있어 이 고분이 357년(고국원왕 27)에 조성된 한국 최고의 벽화고분임이 밝혀졌다.

 

 

16.장군총

 

중국 지린성 지안현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석릉. 3세기 초부터 427년까지 고구려가 도읍한 지안현 퉁거우평야에는 광개토왕릉비와 고구려 최대형급의 무덤인 태왕릉, 사신총 등 석릉과 토분 1만 기가 있으나 외형이 거의 완존한 석릉은 이것뿐이다.

 

 

17.태왕릉

 

중국 지린성 지안현 여산 남쪽 기슭에 있는 고구려의 기단식 돌무지무덤.

 

현재는 분구의 대부분이 무너져내린 기단부와 그 위층의 방단부 일부만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무덤의 동북 500m 거리에는 유명한 광개토왕릉비가 있다. 명문전의 내용, 무덤의 규모, 근처의 건물터, 광개토왕릉비 등을 근거로 광개토왕의 능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8.각저총

 

중국 지린성 지안현 여산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벽화고분.

 

이 벽화고분은 다른 고분과는 달리 청룡 ·백호 ·주작 ·현무와 같은 사신그림이 없지만, 앞방에 들어가면 왼쪽과 오른쪽 벽에 커다란 나무 두 그루가 그려져 있고, 앞쪽 벽에는 눈동자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듯한 사나운 개가 그려져 있다. 널방의 동쪽 벽에는 이 이름이 붙여지게 된 씨름그림이 나무를 중심으로 그려져 있고, 북쪽 벽에는 묻힌 사람의 생전의 실내모습을 연출한 듯 지붕과 커튼을 친 집안에 여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서쪽 벽에는 소가 끄는 수레와 안장을 얹은 말이 그려져 있으며, 천장은 화려한 불꽃문양과 인동당초문으로 장식되어 있다. 무늬 사이로 삼족오가 있는 해와 두꺼비가 있는 달이 있다. 벽의 네 모서리에는 두 팔을 치켜 들고 천장을 떠받치는 형상의 역사상을 배치하였다. 축조방식이나 시기 ·벽화의 내용 등이 무용총과 비슷하다.

 

19.무용총

 

광개토왕릉비의 북서쪽 약 1km 지점에 있으며 각저총과 나란히 있다. 기저의 한 면이 약 15m인 방추형 분구이며 높이는 3m 내외이다. 널방은 약 3m 사방의 널방과 가로로 긴 앞방, 이것들을 연결하는 통로 및 널길로 되어 있는데, 널방의 바닥면에는 오른쪽 벽에 치우쳐서 4장의 판석을 배열한 널받침시설이 있다.

 

널방은 괴석을 쌓았고, 모줄임천장이며 회반죽을 두껍게 칠한 벽면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주실 정벽의 접객도는 이 무덤의 주인공인 듯한 인물이 상궤에 앉아 있고 그와 대화하듯 두 사람의 삭발한 승려가 역시 상궤에 앉아 있으며, 이밖에 시동) 세 사람이 그려져 있다.

 

오른쪽 벽은 수렵도가 대부분의 면적을 차지하고, 왼쪽 벽에는 주인을 표현한 인물의 기마도와 주방 등의 가옥 2동 외에 5명의 남녀 군무상, 9명의 합창대상이 그려져 있다. 이 장면의 특이함에서 무용총이라고 명명되었는데, 천장에는 연화문 등의 장식문, 사신도·일월상도를 포함한 그림이 있다. 앞방의 벽화는 박락되어 가고 있다.

 

20.을밀대

 
종 목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9호 
소 재 지  평양시 중구역 경산동 금수산 
시대  고구려시대 

 
북한의 사적 제7호로 지정되었다가 국보 문화유물 제19호로 변경되었다. 금수산의 을밀봉에 있는 평양성 내성의 북장대로, 6세기 중엽에 처음 건립되었다. 평양성 중 가장 북쪽에 있기 때문에 사방이 트여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다는 의미에서 '사허정'이라고도 한다. 원래 이 자리에는 최승대가 있었는데 1714년(조선 숙종 40)에 축대를 보수하면서 최승대는 모란봉으로 옮겨 가고 누정을 다시 지었다. 


을밀대는 고구려 때 쌓은 높이 11m의 축대 위에 세운 단층 누정이다.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석축은 경사지를 절벽으로 이용하여 쌓은 단애성벽이다. 이는 산이 많은 우리나라의 지연 지형을 잘 이용한 성벽 축조기술로, 평지성과 산성 등지에 자주 사용되었다. 축대 위에는 3면에 여장(성벽 위의 담)을 쌓고 총구멍을 냈다.


축대 위에 세운 누정은 정면 3칸(7.5m), 측면 2칸(5.3m)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상부구조는 5량가 형식이다. 비바람의 피해를 줄이기 위하여 높이 1m 정도의 4각 돌기둥 위에 흘림기둥을 세우고 2익공 공포를 얹었다. 기둥 위 화반은 귀면무늬와 연꽃무늬로 장식했다. 내부 천장은 통천장이다. 세련된 부재의 장식과 누정에 입힌 화려한 모로단청이 잘 어울리는 건물이다.


을밀대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는 평양팔경의 하나인 ‘을밀상춘(을밀대에서 바라보는 봄 경치)‘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을밀대는 ‘을밀선인‘이 자주 하늘에서 내려온 장소 또는 ‘을밀장군(을지문덕 장군의 아들)‘이 싸워서 지켰던 곳이라고 한다.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칠성문루와 규모는 비슷하지만 그 의장의 격식이 한층 높다고 평가받는다.



21.보통문 
 

종 목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3호 
소 재 지  평양시중구역 보통문동 
시 대  고구려시대 


6세기 중엽 고구려가 평양성을 쌓을 때 성의 서문으로 세웠으며, 현재 건물은 조선시대인 1473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이 문은 평양성 서북쪽 방향으로 통하는 관문으로 국방상·교통상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시대부터 고려·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중요시되었다.


축대는 화강암을 다듬어 쌓은 축대 위에 문루가 있는 형태이다. 축대 중심부에는 높이 4.55m, 너비 4.4m의 홍예문(무지개문)이 있고 2층 문루는 정면 3칸(14.8m), 측면 3칸(9.15m)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바깥기둥은 모두 1층 지붕에 이어지고 안쪽의 네 기둥은 1층에서 2층까지 관통하여 세웠다.


바깥기둥과 안기둥 사이에 연결된 툇보 위에는 짧은 2층 기둥이 놓여 있다. 두공은 1·2층 안팎이 모두 3포로 되어 있고, 두공첨차의 간격은 바깥쪽보다 안쪽이 더 크다. 다른 성문들에 비하여 전체 높이가 조금 낮고 1층 면적에 비하여 2층 면적이 상대적으로 좁다.


또한 측면에서 1층 양쪽 바깥기둥의 밑둥과 마룻도리를 연결하는 3각형, 그리고 정면에서 축대바닥 양쪽 끝과 문루의 용마루 중심을 연결하는 3각형은 거의 정3각형에 가깝게 되어 있어 더욱 장중하고 안정된 느낌을 준다.


현존하는 한국 성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며, 고구려의 건축양식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22.평양성  
 
종 목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호 
소 재 지  북한 평양시 중구역과 평천구역 
시대  고구려 후기 


고구려가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때는 427년(장수왕 15)이다. 이 당시의 왕궁은 평양시 대성산 기슭의 안학궁이었다. 안학궁 뒤편에 대성산성을 축조해 전쟁 때는 이곳으로 옮겨갔다. 이러한 평지성과 산성이 한 조를 이루는 것은 고구려 도성의 특징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 산성으로 피란하면 평지성은 불타 없어지게 된다.


그래서 586년(평원왕 28)에 수도를 장안성으로 옮기는데, 이곳이 현재 평양 시가를 둘러싸고 있는 평양성이다. 안학궁과 대성산성을 전기 평양성, 장안성을 후기 평양성이라고도 한다. 


평양성은 평지성의 장점과 산성의 장점을 종합해 축성했다. 내성·외성·북성·중성으로 이루어졌으며, 성벽의 길이는 약 23km이다. 내성은 대동문 아래에서 서북쪽으로 남산고개를 지나 만수대까지이고, 외성은 대동강과 보통강을 둘러싼 평지성이며, 북성은 만수대 북쪽으로 모란봉을 둘러싼 부분이고, 내성 남쪽으로 대동교에서 안산까지 연장된 성이 중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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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  여래 입상

 

 

금동 미륵보살 반가상

 

 

석조미륵보살입상

 

 

 

은진 미륵

 

금동 연가 7년명 여래 입상 (고구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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