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때의 우리나라 외교사

6.25때의 우리나라 외교사

작성일 2012.07.28댓글 1건
    게시물 수정 , 삭제는 로그인 필요

 6.25전쟁때 우리나라의 외교사좀 알려주세요ㅜㅜ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외교사라고 할것없었으며

미국주도하에 모든것이 이루어진현실였으므로  우리정부의단독외교사란  주미대사(장면)의 한국전쟁 지원과 원조사업따온것 그리고 전쟁중 식량지원등입니다

 

 

 

정부수립이후 유일한 외교활동한 장면 전 총리 업적입니다

 

 

정부 수립, 외교 활동 (1948 ~ 1949)

프랑스 파리에서 열릴 제3차 국제 연합 총회(1948년 12월)에 대표단의 대표로 지명되었고(1948년 9월), 9월 9일 대표단의 수석 대표로 선출되어 파견되었다. 파리로 출발하기 전 장면은 은사 패트릭 번 신부를 방문했는데, 패트릭 번은 프랑스 파리 주재 교황청대사와 유럽·중남미 국가의 가톨릭국가 대표 및 가톨릭 지도자들에게 보내는 소개장 10여 장을 작성해 주었다. 동시에 패트릭 번은 교황 비오 12세에게 “유엔 총회에 참석하는 한국 대표 장면을 적극 도와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교황 앞으로 보내기도 했다. 11월에는 프랑스 파리에 도착, 11월 13일 장면은 네덜란드헤이그를 방문하면서 이준 열사 묘소를 들러 참배하였다.

 

 

장면은 유엔 총회 의장으로 선출된 오스트레일리아 외무장관인 에버트를 만나려 했지만 실패하였다.

1948년 12월 대통령 바티칸 특사로 임명되어 로마 교황청을 방문하였고, 바티칸로마 교황 비오 12세를 알현하고 한국에 대한 정신적 후원을 청하여 승락을 받았다. 교황 비오 12세는 제3차 유엔 총회 당시에 한국 대표단을 지원하라는 지시를 교황청에 내렸는데, 허 교수는 “장면이 유엔총회에 파견된 것은 바티칸의 영향력을 활용하려는 대통령 이승만의 정치적 복선이 작용한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초기에는 한국은 어디에 있는 나라이냐며 냉담한 반응을 보이던 각국 대표자와 관계자들은 패트릭 번 주교의 소개장을 받고 적극적으로 대표단 일행을 도와주었고, 총회 의장 에버트도 만나게 되었다.

실제로 교황 비오 12세는 일본에 체류 중인 전 평양교구장 번(Byrne, J. Patrick) 주교를 이미 1947년에 교황사절로 한국에 파견했다. 교황청의 사절파견은 국제공법과 외교관례상 한국이라는 국가의 존재를 외교적으로 승인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이후 50여개 국 대표를 돌아가며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1948년 12월 7일부터 12월 12일에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3차 국제 연합 총회에 한국 수석 대표단으로 참석하였다. 대표단은 장면 이외에도 장기영, 김활란, 조병옥, 정일형, 전규홍, 김우평, 김준구로 구성되었다.장면은 국제 연합 총회에서 신생 대한민국 정부의 승인을 요청하였다

 

 

 

외교 사절 활동 (1950)

1950년 1월 20일 그는 미국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 버터워스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장면은 1월 19일 경제협력처의 대한(對韓)원조에 우호적인 법안이 통과되지 않았다는 점이 한국내에 미칠 영향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국무부에서 이에 대해 재검토해 줄 수 있는가를 질문했다. 버터워스 차관보는 국무장관대통령이 곧 이 문제에 대해서 성명을 낼 것으로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현재 시점에서 행정부가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지만 현재 고려중인 방안이 의회로부터 하나 혹은 다른 형태의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버터워스 차관보는 장면 대사의 질문에 대한 답변 중 대통령의 재량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중국 지역에 대한 상호방위원조계획(MDAP) 예산으로 책정된 7500만 달러 중 한국 원조에 전용할 수 있는 예산은 1월 19일에도 밝혔듯 하원의 동의를 이끌어 내지 않는 한 1달러도 없다는 점을 확실히 했다.

 

 

이듬해 1950년 4월 10일 호주·뉴질랜드·필리핀 파견 대통령 특사로 임명되어 “태평양 동맹” 체결에 관련된 사항을 의논하였다. 4월 12일 황창하 등을 대동하고 하와이를 순방, 재 하와이 교포들에게 강연( ~ 18일)하였다. 4월 18일 하와이를 떠나 뉴질랜드를 방문해 뉴질랜드 총독 및 수상을 예방하고 외상 등을 만나 4월 23일까지 회담하였다. 4월 24일 호주를 방문, 호주 총독과 수상, 그리고 외무상 등과 회담하고, 호주상공회의소를 방문하여 한국과의 무역교류 관련내용을 협의하였으며, 호주 이민상·농업상 등을 만나 5월 2일까지 회담하였다. 1950년 5월 3일에는 필리핀을 방문하면서 필리핀 대통령 등을 예방하였다. 5월 9일에는 필리핀을 떠나 일본 도쿄를 경유하여 대한민국에 입국, 서울에 도착하였다.

한국 전쟁 파병 노력 (1950 ~ 1951)

1950년 6월 3일 부인 신병 치료차 자녀 2인을 동반하여 출국, 미국에 건너갔다. 6월 25일 미국에 체류 중인 새벽에 한국 전쟁이 발생하자 대한민국 정부의 긴급훈령을 받아 미국 국무성에 알려 사태의 절박성을 전하였다. 6월 25일 저녁 이승만과 통화 후, 미국의 상·하원을 찾아다니며 한국 파병을 역설하였고, 이후 UN과 국제사회에 북한군의 남침을 알리고 한국 전쟁에 참전해줄 것을 설득하여 미군과 UN군의 한국 파병을 이끌어냈다. 1950년 6월 25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연설하였다.

 

6월 26일 백악관으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을 만나 미군의 한국 파병을 요청하였고, 6월 27일의 미국의 대북한 선전 포고와 UN에 대한민국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여 UN군의 한국 전쟁 참전결정을 이끌어냈다.

 

 

6월 27일에는 UN안전보장이사회에 참석하였고 다음날인 6월 28일 서울은 조선인민군에게 함락당하였으나 장면은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을 통해 유엔 결의 사항 등을 본국에 방송하였다. 1950년 6월 말 장면은 병석에 있는 서재필에게 서신을 보내 입원 중인 서재필의 빠른 완쾌를 비는 한편, 당시 전쟁 상황을 전하며 “지금 상황이 좋지 않더라도 반드시 승리 할 것이다”라는 것과 “자유로운 분위기 내에서 제2대 총선거가 진행되었음”을 전하였다. 그러나 서재필은 휴전을 못보고 사망했다. 한국 전쟁 직후 미국의 정치인들 중에는 남한의 서울이 3일만에 점령당하여 가망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장면은 미국내 정치인들을 찾아다니며 한국에 파병해줄 것을 설득하였다. 소련과 중국이 안보리에 불참하는 동안 그는 줄곧 UN안보리 이사회에도 참석하여 회의 내용을 청취하였다. 전쟁발발 15일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인 7월 10일, "38선은 의미를 상실했으며 전한국의 해방과 통일은 필수적"이라고 주장하였다

 

 

 

UN에서의 설득 작업

8월 1일, 안보 이사회의 8월 의장국인 소련 대표 말리크는 이사회에 출석했다. 의장석에 앉은 소련측 대표 말리크는 한국 사태에 대한 안보 이사회의 그동안의 모든 결의가 모두 무효임을 선언하였다. 그는 “안보 이사회의 상임 이사국인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또 상임 이사국으로서 당연히 참석해야 할 중공 대표가 없는 동안에 통과된 결의안은 하나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장면은 8월의 유엔 안보리 회의에도 옵서버 자격으로 자리 잡고 앉으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말리크는 끝내 장면의 착석을 거부했다 또한 말리크는 “6‧25 동란은 북괴군의 남침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반대로 한국군의 북침”이라며 “미국이 한국군을 배후에서 조종했다”고 주장하였다. 소련측 대표의 이런 역선전을 미리 예상한 장면은 미국측 대표 오스턴과 짜고 한국 전선에서 노획한 소련제 소총 한 정을 증거물로 제시하고 반박하였다. 말리크는 “이번 싸움은 한국 사람끼리의 싸움이지 소련은 전혀 아랑곳이 없다”며 “소련군은 이미 1947년에 완전히 북한에서 철수했고, 이번 동란에 소련서는 총 한 자루 보내 준 일이 없다”고 단언했다. 미국측 대표 오스틴은 장면이 한국 전선에서 가져온 ‘1950년 소련제라는 철인’이 찍힌 소총을 증거물로 제시하였고, 남한의 북침 주장과 소련의 불개입 주장은 논파당하였다.

9월에 열린 UN안보리 이사회에도 참석하였고 영국이 안보 이사회 의장국이었다. 9월 1일, 글랜드윈 접 영국측 대표가 안보 이사회의 사회를 맡자 장면은 착석과 발언권을 달라고 미리 요구했다. 의장은 “당사자 국인 대한 민국을 대표하는 장 대사에게 착석을 허한다”고 선언하여 무난히 착석하였다. 의장으로부터 발언권을 얻은 나는 “그동안 갖은 모욕을 당하면서도 나는 할말을 못하고 참아 왔다”고 말문을 열어 소련을 공박하였다. 소련 대표 말리크는 “규칙 발언!”이라며 그의 발언을 제지하려 들었다. 이어 말리크는 그에게 “도대체 저자가 누군데 무슨 자격으로 저 자리에 감히 앉아서 발언을 하는 것이냐?”며 “저자는 이승만 도당의 괴뢰”라고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장면은 말리크의 욕설에 대해 취소하라고 항변하였다.

 

 

제2대 국무총리 시절 (1950 ~ 1952)

 UN 총회 참석
 

1950년 10월 9일, 주한 미국 대사로 재직 중 제5차 UN 총회 한국대표단의 수석대표로 선임되어 서울에 소환되었다.

11월 6일 장택상 등과 함께 프랑스 파리로 출발하였다. 제5차 국제 연합 총회에 한국 대표단으로서 임병직(단장), 장택상, 김동성, 임영신과 함께 참석하였다. 11월 23일 주미 한국대사 재직 중 제2대 대한민국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 1950년 12월 미국에 체류 중 포덤 대학교로부터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5]

이승만은 그가 UN에 대한민국 정부의 승인을 얻은 것과 한국 전쟁 직후 미군과 UN군의 파병설득에 성공한 것을 높이 평가했다

 

 

6.25때의 우리나라 외교사

6.25전쟁때 우리나라외교사좀 알려주세요ㅜㅜ 외교사라고 할것없었으며 미국주도하에 모든것이 이루어진현실였으므로 우리정부의단독외교사란 주미대사(장면)의...

미국, 중국이 김정일 사망시 한반도 내에...

... 이게 우리나라 입장에선 좋은 건가요? 미국은 만약... 그러나 6.25 전쟁 대는 중국과 미국이 사웠지요. 이제는... 여기서 러일전쟁사를 논하려는 것도 아니며 러일 외교사를...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 ······ 해방직후의 혼란기와 6.25전쟁 등 중대위기에 직면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발표했는데, 우리나라의 모든 사람이 반길 이승만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의구심을...

전후 일본 자위대의 막강한 군사력...

... 그리고 6.25 전쟁을 통해 미.소의 완충지대로 한반도를... 러일 외교사를 소개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 전쟁을... 이 시점에서 우리나라 정국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기만...

역사 왜곡

... 대한 우리나라의 대응에 대해선 아는 것이 없습니다.... 정치외교사 연구와 구별되면서도 그를 보완하는 측면이... 동족상잔의 6.25동란을 겪은 후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이승만은 좋은사람입니까;;

... ······ 해방직후의 혼란기와 6.25전쟁 등 중대위기에 직면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발표했는데, 우리나라의 모든 사람이 반길 이승만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의구심을...

일제강점기는 우리의 근대화를 도왔다...

... 포함) 우리 나라의 근대화의 밑바탕이 돼지 않았을까?... 어떻게 6.25전란 중에 재주도 좋으셔서 군복무를... 정치외교사 연구와 구별되면서도 그를 보완하는 측면이 있다고...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알려주세요

... 이 사건을 겪은 뒤 정부는 전국민에게 단일 형태의 신분증을 나눠주어 필요할 ... 그 당시 우리 나라 과수 중 재배면적이 5천ha를 상회하는 5대 과수는 사과, 복숭아, 배...

고 박정희 전 대통령에관해

... 그리고 윤보선과 민간인 신분으로 다시 투표를 한 이유는 박정희 대통령이 5.16 ... 그 당시 우리 나라 과수 중 재배면적이 5천ha를 상회하는 5대 과수는 사과, 복숭아,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