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와 이성은 논술에서 어떻게 다루어지나요?

신화와 이성은 논술에서 어떻게 다루어지나요?

작성일 2009.10.29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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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활동 후원제도를 통해 <지식활동대>로 선발되신 gsygy님께 드리는 미션 질문입니다.

 


신화와 이성은 논술에서 어떻게 다루어지나요?

gsygy님, 누구나 이해하기 쉽고 정성스러운 답변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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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신화(神話)

 1. 신화의 현재성

 2. 신화의 상징

 3. 신화 분석의 실제(1)-신화와 인간

 4. 신화 분석의 실제(2)-신화와 현대 사회

 5. 현대사회와 신비주의 그리고 환상

이성(理性)

 1. 이성의 개념

 2. 이성과 사회

 3. 이성과 자연

 4. 합리성과 현대사회

 

 

 

 Ⅰ.신화(神話)

 

1. 신화의 현재성

  신화학자인 미국의 조지프 캠벨(Joseph Campbell : 1904~1987)은 “지금 이 시각에도 현대판 오이디포스 및 ‘미녀와 야수’의 속편은 뉴욕의 41번가와 5번가가 만나는 네거리에서 교통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슈퍼맨’과 ‘스타워즈’도 영웅 신화의 속편에 지나지 않는다. 신화는 인간의 삶에 찍힌 영원한 도돌이표, 따라서 인간은 영원히 신화를 되산다고 주장하는 캠벨은 오이디포스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 인간은 동물 가운데서 가장 오래 어머니의 젖가슴에 매달려 유아기를 보내는 동물이다. 유아에게 이 어머니의 품 안은, 자궁 안과 똑 같은 상태로 재현된 천국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이 천국을 침범한다.…… 그래서 유아에게 어머니는 ‘좋은 것’, 아버지는 ‘나쁜 것’ 이다. …… 유아가 어머니에게 에로스 〔사랑〕에의 충동을 느끼고, 아버지에게 타나토스 〔죽음〕에의 충동을 경험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짝이 됨으로써 인간의 이러한 심층 심리를 대리체험한 비극적인 영웅의 이름 ‘오이디포스’는 ‘부은 발’이라는 뜻이다.

  캠벨은, 키민즈의 『어린이의 꿈, 그 미지의 땅』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글을 인용하면서 오이디포스의 체험이 ‘인간의 대리체험’이었던 까닭을 설명한다.

 ……… 어느 날 밤 소년은 꿈 속에서 발을 하나 보았다. 발은 방바닥에 놓여 있었다. 소년은 방을 가질러 가다가 이 발에 걸려 넘어졌다. 그 발은 소년의 발과 비슷했다. 소년은 달아났다. 방바닥의 발이 벌떡 일어나 소년을 뒤쫓기 시작했다. 소년이 이런 꿈을 되풀이해서 꾸고 있울 즈음, 뱃사람 노릇을 하던 아버지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이 날아 들었다. ………

  캠벨은 신화야 말로 인간이 지니는 집단적 무의식, 혹은 보편적인 무의식의 원형(原型)일 것이라는 의미에서 ‘대리체험’이라는 말을 쓰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상, 이윤기 ‘대속자 오이디포스’ 에서 인용『무지개와 프리즘』 180~187쪽

  오이디포스는 테에베왕의 아들이다. 그 전에 왕은 자신이 결국 친 아들의 손에 죽으리라는 신탁(信託)을 받았다. 왕은 아들을 낳지 않으려 했지만, 어느날 밤 술이 취해 실수를 하여 아들이 생기게 되었다. 왕은 그 아이의 두 발목에 못을 박아 산에 버렸지만, 아이는 폴리보스 Polybus왕의 양자가 되었다. 이 아기의 이름이 오이디포스, ‘부르튼 발’ 이라는 뜻이다.
  ‘발’이란 무엇을 상징하는가? 뽈 디엘(Paul Diel, 1893-1972)은 그것이 ‘국가와 영혼의 운명’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신화는 인간의 걸음걸이 모양을 심리적 행태와 비교한다. 발에 상처를 입었다거나, 신발이 안 맞다거나, 기독교 신화에서 발을 씻어 준다거나 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또한 잘 알려진 것 가운데, 아킬레우스는 그의 발에 약점이 있다. 그 약점은 영혼의 취약점과 관련된다.   유사하게, 어린 오이디포스의 발의 힘줄이 잘려진 것은 그의 전 생애를 특징짓는 정신적 기형을 상징한다.
  오이디포스 신화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 대한 원형적인 주제를 담고 있다. 프로이드는 이 관계를 앞에서 캠벨 또한 재론하고 있는 것처럼 성적(性的) 갈등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가장 널리 알려진 이른바 ‘오이디포스 컴플렉스’라는 상징이다. 그러나 P.디엘은 프로이드의 그러한 해석이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한다.(뽈 디엘 『그리스 신화의 상징성』)
  그에 의하면 프로이드는 정신적인 병을 설명하기 위해서 몇가지 에피소드를 작위적으로 연관시켜 오이디포스 신화를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컴플렉스 개념에 따르면, 아들은 그의 어머니와 짝이 되기 위한 질투 때문에 아버지를 죽이고 싶어하고 딸은 그녀의 아버지와 결합하기 위해서 어머니가 죽기를 원한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오이디포스는 성적 질투 때문에 그의 아버지를 죽인 것이 아니다. 그가 그의 어머니와 결혼하지만, 신화에 따르면, 살인과 근친상간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일 뿐이다. 따라서 이 신화에는 성적 동기가 나타나지 않는다.
 뽈 디엘의 해석에 따르면 오이디포스 신화의 주제가 되는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는, 성적 충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양육과 성장이라는 보편적인 차원에서 해석되어야 하는 성질의 것이다. 인간세상에서 부모는 신화가 말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부여된다. 즉, 이 신화는 부모가 자식들을 ‘도착’되지 않고 ‘순화’되도록 인도하는 사명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신화에서 나타난 것처럼 부모가 ‘자식의 영혼과 영을 육성하는 임무는, 성적 행위로 소모되는 것과는 달리, 그 풍요롭고 창조적인 행위가 영적인 차원까지 확장되어 성적인 결합에 심오한 의미를 부여하고, 위대한 문화적 의의의 특성을 모든 인간집단의 세포인 가정생활에 부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식의 완전한 창조’는 자식의 양육을 통해 실현된다.  
  이런 점에서 오이디포스 신화는 부모의 자식에 대한 가정교육이라는 원형적 상징을 담고 있다. 오이디포스가 풀어야 할 인생에 대한 수수께끼는 작은 어린아이를 동물과 비교함으로써(스핑크스가 제시한, 어릴 때 네발로 걷는 짐승을 말함) 어린아이의 영혼과 영의 특질이 아직 혼돈의 상태에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동물처럼 어린아이는 모든 욕망이 당장에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아이는 성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육체적 욕망을 통제할 능력을 습득해야 한다. 다시 말해 영의 힘으로 육체적 욕망들을 통제해야 한다. 이 때 부모들이 ‘하지 말라’고 하는 금지사항은 생명력 있는 발전적인 요구이다. 그러나 부모가 과도한 엄격함이나 사랑으로 아이를 포악하게 억압할 때나, 변덕이 심하고 부당한 요구를 통해서 아이의 영혼을 불구로 만들 때는 (라이오스가 오이디포스의 발목에 못을 박는 것), 어린아이는 폭군 부모에게 폭군같이 되어 버린다. 나아가, 어린 시절에 이런 식으로 불구가 된 사람은 부모에게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전 세상을 상대로 폭군이 된다.   (오이디포스가 길을 비켜주지 않는 노인-아버지-을 ‘홧김에’ 죽여 버린다거나, 어머니와 결혼한다거나 하는 것의 상징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상 오이디포스 신화를 사례로 살펴본 것처럼, 신화는 시대를 초월하여, 인간의 삶에 대한 통찰을 하고 있다. 그것이 성적인 것이든, 자식의 교육에 대한 것이든, 오이디포스 신화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 대한 일반적인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 모든 신화의 해석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상징으로서 열려 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영원히 신화를 되산다.’고 한 캠벨의 말을 음미

할 가치가 있다.

 

 

2. 신화의 상징

  특히, 뽈 디엘의 관점에 따르면, 신화란 기본적으로, 베일속에 감추어진 인간의 심리적 상황〔마음〕을 영웅과 악마, 그리고 신(神)과의 관계로 상징화시켜 놓은 것이다. 신화는 이런 점에서 인간 심리의 모든 상황이 투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으로서의 영웅은 신화의 중심적인 인물이며, 그는 영적인 존재와 악마 사이에서 갈등하고 투쟁한다. 즉, 지적 능력 〔의식〕을 가진 인간은 자신의 내부에 잠재된 악마적 유혹〔잠재의식〕에 빠질 가능성〔도착〕과 영적 존재인 신(神)의 의지에 따른 가능성〔승화〕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초의식[영적존재]의 기능과 그 기능의 다양한 특징은 이 세상의 높은 지점으로 나타난다. 하늘에 닿는 산의 정상은 영혼의 특질을 상징하는 태양신들이 거주하는 집이다. (제우스와 여타 신들이 거주하는 올림푸스 산). 잠재의식과 그 위험성은 지하 세계나 바다 밑, 크고 어두운 동굴이나, 굴에서 나오는 괴물로 나타난다. 지적 능력을 가진 존재인 인간〔영웅〕은 땅의 표면에서 산다. 신화적 용어를 쓰자면 인간은 신들을 섬기고 (적극적으로 본받으려 하고) 괴물들과 싸운다. 투쟁의 영역은 이 세상이 아니고, 내적 심리의 갈등의 영역이다. 그래서 신화의 세상 모두가 의식과 의식이 갈등을 겪고 있는 상황의 상징이 되고, 지상에서의 욕망과 승화(昇華) 혹은 도착(倒錯)에 대한 상징이 된다.
  신화에서 인간의 삶과 그 갈등을 일으키는 주체는 인간으로서의 영웅이다. 영웅 〔영웅 ‘의식’이나 ‘지성’〕이 괴물이나 세속적인 욕망과 결탁할 때 그것은 ‘도착’이 되고 신의 이름〔영〕으로 투쟁할 때 그것은 ‘승화’가 된다. 흔히 영웅들이 바다에서 항해하거나 표류하는 장면이 나온다. 바다의 광대한 표면과 심연은 상징하는 바가 다르다. 전자는 인생의 험한 행로를, 후자는 영웅을 좌절시키는 잠재의식을 상징한다. 다시 말하면 영웅들이 대양의 심연에서 올라온 괴물 때문에 신화에서 상징된 위험에 직면하여 싸우는 행위는 불안정한 존재로서 도착하느냐, 아니면, 숭고한 신의 본받음으로 승화하느냐는, 인생일반의 가치의 구현에 관한 내용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다음 이카로스 신화를 통해 신화의 상징에 대한 해석을 시도해 보자.

 

   다이달로스는 원래 아테네 왕가의 일족인데, 건축, 토목, 철공의 솜씨가 뛰어났다. 그는 조카 뻘되는 소년 탈로스(Talus)를 데려다가 일을 가르쳤는데 이 소년의 재주가 비상하여 나이 열두 살에 벌써 생선의 뼈에서 힌트를 얻어 톱을 발명하고 콤퍼스도 발명하여 다이달로스 못지 않게 명성이 자자했다.  여기에 시기와 불안을 느낀 다이달로스는 탈로스를 아크로폴리스 언덕에 있는 여신의 사당 지붕 꼭대기로 데리고 올라가서 먼 경치를 가리키는 척하다가 그를 밀어 떨어뜨려 죽였다. (T.불펀치 본(本)에 의하면, 탈로스는 죽어서 메추리과인 ‘페르딕스’ 새가 된다. 메추라기는 높이 나는 것을 피한다.) 그리고 그 시체를 몰래 파묻으려다가 발각되어 살인죄로 추방당했다. 다이달로스는 크레타 섬의 수도 크놋소스(Cnossus)로 가서 미노스왕의 후대를 받으며 잘 지냈다. 그러던 중 왕비 피시파에의 청에 못이겨 포세이돈(Poseidon)이 보낸 황소와의 간음을 도와 주었다. 여기에서 태어난 것이 몸은 사람이고 머리는 황소인 미노타우로스(Minotaur)이다. 미노스왕은 다이달로스로 하여금 이 괴물을 영원히 가둘 수 있는 지하 미궁(迷宮)을 축조하도록 했다. 그런데 후에 다이달로스가 왕비의 간음을 방조해 준 것이 발각되어 다이달로스는 아들 이카로스와 함게 미궁 라비린토스(Labyrinth)에 갇히고 말았다. (이에 앞서 그는 미노스 왕가의 여노예와 결혼하여 아들 이카로스를 낳았던 것이다.)
   다이달로스가 미궁 속에 갇히게 된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테세우스 (아테네의 왕 아이게우스(Aegeus)의 아들․미노스 왕이 선남선녀들을 괴물 미노타우로스의 제물로 바치자, 테세우스가 괴물을 죽이기 위해 자청해서 미궁에 들어간 사실을 말함)가 미궁속에 갇히게 되자 테세우스에게 반한 미노스 왕의 딸 아리아드네(Ariadne)가 그를 구하려고 다이달로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다이달로스는 그녀에게 실타레를 주면서 미궁에서 빠져 나오는 방법을 일러 주었다. 이 사실을 알게된 미노스는 다이달로스를 미궁에 가두어 버렸다.   (이 이야기는 테세우스편에 다시 나온다.) 미궁속에 갇히게 된 다이달로스는 깃털을 모아 날개 두 쌍을 만들어 밀랍으로 어깨에 붙이고 아들과 함께 공중으로 날아갔다. 다이달로스는 아들 이카로스에게 태양에 너무 가까이 올라가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이카로스는 공중을 나는 재미에 그만 아버지의 주의를 잊고 태양 가까이 올라갔다가 날개의 밀랍이 녹아 어께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바다 속으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그 시체를 건져 섬에 파묻었는데 그 섬이 이카로스 섬이다. 다이달로스는 나폴리 근처로 내려가서 날개를 아폴로(Apollo)신에게 헌납하고 나서 카미쿠스(Camicuss)로 가서 즐겁게 살았다 한다. 미노스왕이 다이달로스를 잡으려 왔다가 끓는 물에 데어 죽게된 것은 그 다음 이야기이다.   
- 이상, 뽈 디엘의 이야기 구성에 따름 -

 

 

  위에 제시한 신화 또한 다양한 상징적인 인간과 사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주요한 상징만을 간단히 다음과 같이 도식화해보았다.

 

잠재의식 〔도착〕

의식 〔지성〕

초의식 〔승화〕

미궁(迷宮)

괴 물

다이달로스

이카로스

밀납날개

태 양

신(神)

 

  인간은 도착과 승화의 가능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승화란 도착된 에너지의 변형이다. 승화는 신의 의지에 따르는 것이고, 도착은 인간이 물질적 욕망에 빠져 타락함을 말한다. 인간의 정신적 에너지〔지성〕는 승화될 수도, 도착될 수도 있다. 이 에너지의 변형이 상징의 변화성에 의해서 신화적 표현에 반영된다. 신화는 ‘근원적 원인’을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내고 그것을 ‘창조의 신’으로 지칭하며, 절대 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인간이 수행해야 할 본질적인 과업은 인생의 의미를 완수하는 것이고, 인간을 영적 존재로 만듦으로써 최고의 품격을 계발하여 가능한 절대 영(靈)의 이미지와 동화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맹목적인 감정은 인간으로 하여금 꼭 해야할 일을 (상징적으로  말하면 신의 명령을) 게을리하는 수가 있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유혹이 수 없이 많다.  그 유혹은 반인반수(半人半獸)의 짐승이거나 뱀으로 상징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기독 신화-성경-에 나오는 인간을 유혹하는 ‘뱀’의 존재를 상기해 보자.)  때로 신화에서 인간은 투쟁적인 영웅의 모습으로 악과 싸우기도 한다. 욕망 때문에 감정이 고조되는 기질을 물리치기 위해서, 또 헛된 상상에서 나온 들뜬 마음 즉 악으로 유혹하는 괴물을 물리치기 위해서 싸워야 한다. 즉, 인간은 무서운 괴물(불건전한 기능, 정신 기능의 병적 훼손 등)을 영화(靈化)-승화(昇華) 시킬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화에서 영웅적인 투쟁은 영화-승화의 가능성과 도착(倒錯)의 가능성으로 이루어진 모든 인생의 본질적인 모험을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내고 있다. 모든 영웅적 투쟁담을 통해서 볼 때 신화적 모험은 삶에 나타난 정신, 즉 정신의 표현과 그 현상에 불과하다. 다이달로스ㆍ이카로스 이야기는 승화와 도착이라는 인생의 근원적인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 (다이달로스ㆍ이카로스 또한 ‘영웅’이다. 신화에서 말하는 영웅은 뜻이 큰 투쟁적인 영웅들 - 예컨대 헤라클레스나 테세우스 뿐만아니라 ‘신의 피붙이(神人)’로서 등장하는 인간 일반을 말한다.)
  이 신화는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이 지닌 ‘지성의 타락’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 그런가? 그리스 신화에서, 올림포스산에 사는 신들 가운데 지성을 상징하는 신은 헤르메스(Hermes)이다. 헤르메스는 제우스로 상징되는 영(靈)을 섬기는 지성이다. 반면 헤르메스는 도착된 지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는 도둑들의 보호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헤르메스는 지성의 양면성(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갖추고 있으며, 이는 결국 지성의 본질적 속성에 귀결하는 것이기도 하다. 헤르메스는 신〔제우스〕과 인간을 중재한다.
  상승(上昇)하는 힘을 나타내는 날개 달린 샌들은 헤르메스 〔지성〕의 상징적 속성이다. 이것은 다이달로스의 ‘밀납날개’의 근원이다. 그러나 강조해 두어야 할 것은 지성은 영에 비하면 상승의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다이달로스는 ‘도착된 지성’ (타락한 형태의 지성)을 사용하고 있다. 감옥 라비린포스와 밀납날개는 그러한 지성의 결과를 상징하고 있다. 라비린토스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그것은 부분별한 지성의 오용(誤用)이자 ‘자신의 감옥’이다. (다이달로스는 아무런 윤리의식이나 가치기준 없이 지성-기술을 사용하는데, 미궁 또한 그 오용된 지성의 결과물이고, 그 자신이 결국 거기에 갇힌다.) 괴물 미노타우로스는 미궁 라비린토스에 가두어져 있다. 그 괴물은 어쩌면 라비린토스의 악(惡)이 꿈틀대는 생명체 모습으로 생동화된 것일 수도 있다.
  다이달로스가 라비린토스에 갇혀버린 상황이 상징하는 바는 결국 지성의 오용으로 스스로 그 대가를 받는 것이다.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는 탈출을 시도한다.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는 밀납의 날개를 달고 비상을 시도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태양’에 너무 가까이 날지 말라고 충고한다. 인공의 날개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그것은 인간의 지성이며, 인간의 들뜬 욕망을 성취시킬 수 있다고 하는 악마의 유혹을 상징한다. 태양은 신(神)의 영역, 영(靈)의 영역이다. 지성의 날개는 신의 영역에 도달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결국 태양의 열기에 의해 녹아내릴 뿐이다. 지성의 날개는 그것의 한계를 스스로 알고 비극을 막기 위해서는 너무 높게 날려고 해서는 안 된다. 숭고함의 영역에 도달할 수 있는 생명력이 넘치는 충동은 자연이 부여한 그대로 신체에 붙어 있는 ‘진짜 날개’로 상징된다. 순결한 정령과 천사의 날개처럼, 진짜날개는 숭고함을 상징한다. 뮤즈가 부여한 날개달린 말 페가소스(Pegasus)는 숭고한 영감, 창조적 상상의 상징이다.
  빈틈없이 교활한 지성을 대변하는 다이달로스와는 달리 이카로스는 자만심 때문에 분별력을 잃은 이다. 그는 아버지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타산적인 지식이 영을 배반하면서 교활하게 사용될 때는 분별력을 잃는 자만심을 낳게 된다.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는 신화에서 전형적인 상징이 되는, 부자관계의 한 사례를 보여 준다. 그것은, 즉 영혼의 장점〔혹은 결점〕간의 직계비속이라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로 표현된다. 지성〔아버지〕의 도착 정도가 심할 수록 맹목적이고 들뜬 상상〔아들〕을 낳게 된다.
  다이달로스의 아들인 이카로스는 그의 날개로 태양까지 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태양은 영의 상징이니까, 태양을 향해 날아가는 것은 영화(靈化)를 상징한다. 그러나 밀납으로 만든 날개로 하늘을 난다는 것은 다만 영화의 무분별한 형태 즉, 허황하게 들뜬 마음일 뿐이다. 지성〔아버지〕이 도착된 상상〔아들〕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카로스가 태양, 즉 신의 세계에 다가가자 그의 날개가 그의 노력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든다. 사실 벌(罰)은 영이 과(課)한 것이다. 이카로스는 추락하여 바다 속에 가라 앉는다. 바다는 인생을 상징한다. 바다를 항해하는 것은 인생을 ‘여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화상의 괴물들이 사고 있는 바다 속은 잠재의식을 상징한다. 흔히 영웅들은 바다 위를 표류한다. 이 항해는 영웅들의 본질적인 투쟁, 즉 내적 갈등과 영을 지향하는 노력을 상징한다. 그들은 올림포스 신들의 도움을 받지만, 그들을 침몰시켜 바다 깊숙한 곳 〔잠재의식〕으로 가라앉히는 포세이돈 때문에 시달리기도 한다. 포세이돈은 제우스의 형이자 적으로서 악마의 속성인 삼지창(三枝槍)을 들고 있다.
  이 이야기는 이카로스가 포세이돈의 먹이가 됨으로써 벌을 받게 되는 것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적절치 못한 방법으로 태양, 즉 영이며 숭고한 영역에 이르고자 했기 때문에 이카로스는 대양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그가 무모한 탈출을 시도하기 전에 이미 붙들려 있던 곳(라비린토스)과 같은 잠재의식으로 침몰한 것이다. 이카로스의 무분별한 비상은 정신병의 한 형태인 과대 망상증(誇大妄想症)으로 통용되기도 한다.
  이 신화는 인간의 지성이 가진 속성에 대한 주제를 담고 있다. 지성의 신 헤르메스를 통해 살펴본 것처럼, 지성은 ‘영에 가까운 지성 〔지성의 건전한 면〕’이라는 면과 ‘도착된 지성 〔세속적 욕망과 결부된 지성〕’ 이라는 면, 양면성을 그 자체로 갖고 있다. 미비린토스를 축조한 다이달로스나, 밀납날개를 달고 날아올랐던 이카로스는 신(神)의 지배를 받지 않은 도착된 지성을 상징한다.
  지성은 ‘불’로 상징되기도 한다. 하늘로 향해서 올라가는 불길은 영화(靈化)하려는 충동을 나타낸다. 지성은 그 발전지향적인 형태로 영에 봉사한다. 그러나 불길이 가물거릴 때도 있는데, 이것은 불이 영을 망각한 지성을 나타낼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의 발견으로 인간은 이 세상을 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려고 하면서, 세속적인 욕구만을 주로 충족시키려 했다. 인간이 지성을 의의 있고 발전 지향적인 방향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점을 망각할 때 불은 반항적인 지성을 나타낸다. 영의 지배를 받지 않는 지성은 ‘너무 쉽게 흥분해 버리는 상상’에 의해 고양된 악(惡)의 원리가 된다. 이러한 상상은 밝은 불로 상징되는 선(善)의 원리와는 정반대되는 것으로, 연기가 나고 시들어 가는 불로 상징된다. 이때 불의 상징은 지옥의 불길이 타오르는 잠재의식 〔지하의 큰 동굴〕의 표현과 결국 일치한다.
  지성의 오류는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 신화에서 더욱 근원적으로 나타난다. 신화적인 차원에서 말하면 인간이란 영에 의해 창조된다. 그러나 점차 의식을 찾게 되기 때문에, 그리고 이지적으로 되어가고 개성화되어 가기 때문에, 인간은 다른 생명의 형태와는 다른 것이다. 이 특징은 프로메테우스로 상징되는 의식있는 존재, 의식 있는 지성의 출현이라는 특별한 원리로 창조의 원리(제우스가 다스리는 영과 영의 최고의 왕국)을 완성시키기 때문이다. 지성화의 결과로 초래되는 개성화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욕망을 배가시키고, 생명의 진보적인 의미, 즉 영에 저항하도록 사주한다. 인간은 도착의 가능성을 가진 존재다. (지성화는 인간의 욕망을 과도하게 증대하도록 고무시키거나, 이성에 벗어날 정도로 욕망을 부추긴다.) 인간이 도착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한, 신화가 나타내고 있는 바대로 라면, 인간은 영의 소산이 아니고 지성의 소산인 것이다.
  이카로스 신화는 오늘날 과학기술의 발달과 그 성격에 대한 원형적인 심상을 담고 있다. 바야흐로, 인류 지성의 모범인 과학자들이 인간의 정신적, 육체적 창조의 원리를 규명하기 위해, 이른바 인간 게놈프로젝트(여기에 대해서는 Ⅶ장 ‘과학과 사회’를 참조할 것)에 참가하고 있다. 인간의 이성〔과학〕은 이카로스처럼 신의 영역에 다가서고 있다. 이 현대판 ‘인공의 날개’가 태양열에 녹아 내릴지 여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과도한 발달과 인간의 삶을 위한 그 응용이, 지구적인 위기 〔생태계 위기 등〕를 현실적으로 가져 오고 있음을 볼 때, 과학 기술의 발달에 대해 낙관적인 전망만은 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과학기술이 초래한 문제점을 또 과학기술로 해결할 수가 있을까? 무엇보다도 다이달로스ㆍ이카로스 또한 지성이 부른 재앙〔미궁에 갇힘〕을 지성 〔밀납날개〕으로 해결하고자 했지만, 결국 아들이 바다에 침몰하고 말았다는 신화가 상징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또한 다이달로스가 날개를 아폴로신에게 ‘헌납’하고 나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이겠는가?
   

 

3. 신화 분석의 실제(1)-신화와 인간

 

◈< 문제>◈
다음의 두 제시문은 인간적인 삶과 그 의미에 대한 소설가와 철학자의 통찰을 담고 있다. <제시문 1.2>를 읽고 논제에 답하시오.(1998 한국외국어대 정시)

 <제시문 1>
  신들은 시지프스(고대 희랍 코린트의 왕)에게 바위를 쉬지 않고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는 벌을 내렸다. 산꼭대기에 올려놓은 바위는 자기 무게 때문에 저절로 굴러 내려온다. 신들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아무 희망도 가치도 없는 노동보다 더 무서운 처벌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여러분은 벌써 시지프스가 부조리의 영웅임을 눈치 챘을 것이다. 신들에 대한 경멸과 죽음에 대한 증오, 삶에 대한 정열이 무(無)를 성취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는 저 참혹한 처벌을 그에게 안겨준 것이다. 이것은 지상세계에 대한 정열의 대가로 치러야 되는 것이다.
  이 신화에는 혼신의 힘을 기울여서 저 커다란 돌을 들어올리고 굴려서, 수백 번이나 비탈길을 밀고 올라가는 이야기가 나올 뿐이다. 일그러진 얼굴, 바위에 찰싹 달라붙은 뺨, 흙 묻은 돌덩이를 떠받친 어깨, 바위를 버티는 발, 새 출발을 위해 한껏 내뻗은 두 팔, 흙투성이의 양손,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 가이 없는 공간과 시간의 오랜 노력 끝에 비로소 목적이 이루어진다. 그러자 시지프스는 바위가 잠깐 만에 저 아래 세상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목격한다. 그는 또다시 저 돌을 정상으로 밀어 올려야 한다. 그는 터덜터덜 평지로 내려간다.
  저 잠깐 동안의 멈춤, 저 내려감. - 그동안의 시지프스가 나의 관심을 끈다. 그렇게나 바위 가까이에서 애쓴 얼굴은 이미 바위 그 자체이다. 결코 끝을 알지 못하는 고통을 향해 무겁지만 단호한 걸음걸이로 내려가는 저 사람을 보라. 고통과 마찬가지로 확실하게 돌아오는 휴식시간과도 같은 저 시간은 의식의 시간이다. 고지를 떠나서 신들의 소굴로 차츰차츰 내려오는 저 모든 순간에 그는 자기의 운명을 넘어선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도 단단하다.
  이 신화가 비극이라면 그것은 이 신화의 영웅에게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의 걸음걸이마다 성공의 희망이 그를 뒤덮는다면 사실 어디서 그의 고뇌를 찾을 것인가? 오늘날의 노동자는 그 일생동안 날마다 같은 일을 한다. 이 운명도 마찬가지로 부조리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의식을 하게 되는 드문 순간에만 비극이다.
  힘없는 반항자, 신들의 프롤레타리아 시지프스는 자신의 장래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 그는 내려오는 동안에 바로 이것을 생각한다. - 알베르 까뮈, 「시지프스의 신화」

 

<제시문 2>
  왜 생쥐의 삶은 부조리하지 않은가? 물론 달의 운행 역시 부조리하지 않지만 그것은 달의 운행이 아무런 목적도 의도적 노력도 없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생쥐는 생존하기 위해서 일해야 한다. 그래도 생쥐의 삶은 부조리하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생쥐는 자신이 결국은 한 마리의 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줄 자기의식과 자기초월(자기 자신을 떠나 영원 또는 신의 관점에 섬- 역자 주)의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생쥐에게 이런 깨달음이 생긴다면 그의 삶도 부조리해질 것이다.
쥐가 자기의식을 한다고 해서 다른 것이 되는 것도 아니고 생쥐 이상의 삶을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새롭게 자기의식을 가지더라도 대답할 수 없는 의식들과 포기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삶의 목적들을 가득 안은 채 그는 여전히 미미하고 부산한 한 마리 생쥐로서의 삶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 중 략 )······
  부조리를 느끼는 것이 우리의 진정한 상황을 자각하는 한 가지 방법이라면 (그 상황을 부조리하다고 느끼기 전에는 부조리한 것이 될 수 없겠지만), 그렇다면 그 부조리를 우리가 증오하거나 회피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부조리를 느낄 수 있는 능력은 인간의 한계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에서 생기는 것이다.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보아 세상에서 의미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바로 그 생각조차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영웅주의나 절망 대신 아이러니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THOMAS NAGEL, MORTAL QUESTIONS

 

<논제>
 일반적으로 부조리란 자기의 바람이나 기대가 현실과 어긋나는 것이 내포된 상황을 말한다. 위 글들에 나타난 것과 같이 사람들은 때로 인생의 모든 것이 기대와는 달리 무의미하다고 느끼면서도 주어진 그대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이것이 삶의 부조리이다. 글쓴이들이 지적한 인간의 본성적 특징과 이에 관련된 일상적 경향을 토대로 하여, ⑴왜 사람들은 때로 인생의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지, ⑵어떻게 하면 그러한 생각들을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 논술하시오.

 

 

▣분석 & 해설▣

  오늘날, 그것도 도시의 복잡한 군중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고독하게 혼자 있는 것을 싫어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사람들과 어울리며 떠도는 온갖 잡다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왁자지껄하게 웃으며 산다. 마치 잡답이 끝나면 의식이 자기 자신에게로 향할까 봐서, 한 시도 틈을 주지 않고 떠들다가 누군가 심각한 표정을 지을 때마다 ‘골치 아픈 생각 말고 즐기라구!’ 라고, 늘 준비된 이런 충고를 던지면서 어울리며 사는 것이 제대로 된 사회적 인간인 것처럼 생각한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카뮈 식으로 말한다면 사람들은 아마도 자신의 삶을 ‘의식’하기를, 그리하여 자신의 삶이 무의미하고 부조리함을 의식하기를 애써 회피하고자 하는 심리적 방어기제를 작동시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그들은 시지프스의 하산하는 시간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내가 왜 살지?’ 생각하는 순간 삶이 부조리하다는 생각이 떠올라, 그들은 <제시문2>에서 말하는 ‘생쥐’처럼 자기를 의식하지 않고 끊임없이 먹이를 찾아 몰려다니기만 하려는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의 아버지와 어머니들은 자식들 키우고 결혼시키느라고 평생을 보낸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아버지는 퇴근하는 길은 시지프스가 하산하는 길과 오버랩된다. 문득 어머니는 거울 앞에 비친 잔주름 가득한 얼굴을, 시지프스가 산을 터덜터덜 내려오는 모습을 본다. 우리들 부모님의 삶은 어떻게 보면 부조리하기가 그지없다. 평생 ‘돈버는 기계’나 자식 뒤치다꺼리하느라고 보낸 대가가 더욱이나 어떤  소설에나 나오는 것처럼 불치병으로 되돌아온다거나 돌이킬 수 없는 청춘의 상실로 주어진다면, 그들은 한순간 자신이 왜 살아왔는지, 정말 자식을 공부시키고 출세시킨 것이 희생에 대한 보상이 되는 것인지, 심각한 회의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들은 어쩌면 최소한 가지 자신을 위한 인생에 있어서는, 시지프스처럼 산정을 향해 끊임없이 돌을 굴러 올리며 살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의식을 가진 존재이다. 인간은 생쥐처럼 자신을 의식하지 않고 살 수가 없다. 카뮈의 말에 따른다면, 의식을 가진 인간은 자신의 삶이 부조리함을 의식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부조리한 것이 삶의 본질이라면 우리 인간은 인간인 이상 이 부조리한 삶을 벗어날 수가 없다. (나)글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부조리를 느끼는 것이 우리의 진정한 상황을 자각하는 한 가지 방법이라면  그 부조리를 우리가 증오하거나 회피할 이유가 없다. 부조리는 인간의 삶 바로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부조리한 삶을, 시지프스에게처럼 외부에서 강제된 노역(勞役)으로 생각하지 말고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는, 자기 자신의 자발성으로 영위하는 삶을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행복과 부조리는 같은 하나의 대지로부터 탄생한 두 아들(카뮈 같은 글)’임을 안다면 우리는 불행한 시지프스가 아닌 행복한 시지프스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카뮈의 다음 글을 음미해 보자.

 

  나는 시지프스를 산기슭에 남겨 두자!  사람들은 언제나 거듭거듭 자기의 무거운 짐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지프스는 신들을 부정하고, 바위를 들어올리는 보다 차원 높은 충실함을 사람들에게 가르친다. 그도 또한 모든 것이 좋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이후로 이미 지배자를 갖지 않는 이 우주는, 그에게는 무익하다고도, 시시하다고도 생각되지 않는다. 이 돌 위의 결정(結晶) 하나하나가, 밤으로 채워진 이 산의 광물질 조각의 하나하나가 그것만으로서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정상을 목표로 하는 투쟁, 그것만으로 인간의 마음을 채우는 데 충분한 것이다. 바야흐로 시지프스는 행복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카뮈 (권오석 역)『시지프의 신화』

 

 


4. 신화 분석의 실제(2)-신화와 현대 사회

 

◈< 문제>◈

※ 다음 제시문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피그말리온 이야기이다. 현대인의 삶에 비추어 볼 때 피그말리온 신화는 여러 가지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이 신화가 현대 사회에서 시사하는 바를 분석하고, 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서술하시오. (1998, 연세대 자연계열 정시/1600자 안팎)

   피그말리온은 여자의 결점을 너무나도 많이 본 나머지 마침내 여성을 혐오하게 되어 평생 결혼하지 않고 지내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조각가였다. 어느 날 빼어난 솜씨로 상아(象牙) 조각상을 만들었는데, 그 작품이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살아 있는 어떤 여자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이 조각상은 부끄러워서 움직이지 않을 뿐이지 정말 살아 있다고 여겨질 만큼 완벽한 처녀의 모습이었다. 그의 기술이 완벽했기 때문에 그 조각상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자연이 만든 것처럼 보였다. 피그말리온은 자신의 작품에 감탄하여 자연의 창조물 같은 이 조각상과 사랑에 빠졌다. 그는 조각상이 살아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때때로 그 위에 손을 얹어 보기도 하였다. 그럴 때면 조각상이 단지 상아에 불과하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조각상을 끌어안기도 하고, 반짝이는 조개껍질이라든가 반들반들한 돌, 또는 조그만 새나 갖가지 꽃, 구슬과 호박 등 젊은 처녀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을 선물로 가져다 주기도 하였다.   
  그는 조각상에 옷을 입히고, 손가락에는 보석을 끼우고, 목에는 목걸이를 걸어 주었으며, 귀에는 귀걸이를 달아 주고, 가슴에는 진주타래를 늘어뜨려 주었다. 옷은 조각상에 참 잘 어울렸으며, 옷을 입은 맵시는 옷을 입지 않았을 때나 매한가지로 매력이 있었다. 그는 그녀를 튀로스 지방에서 나는 염료로 물들인 천을 덮은 침상 위에 눕히고, 그녀를 자기의 아내라고 불렀다. 그리고는 그녀가 마치 깃털의 부드러움을 마음껏 즐길 수 있기라도 하듯, 그녀의 머리를 가장 보드라운 깃털을 넣어 만든 베개 위에 뉘었다.  
  아프로디테의 제전이 다가왔다. 이 제전은 키프로스 섬에서 굉장히 호화롭게 거행되었다. 제물이 바쳐지고, 제단에서는 향을 피워 향내음이 대기에 가득했다. 피그말리온은 이 제전에서 자기가 맡은 일을 끝내고 난 뒤에, 제단 앞에 서서 머뭇거리며 말했다.
  “전능하신 신들이시여, 바라옵건대 제게 상아 처녀와 같은 여인을-그는 ‘저의 상아 처녀를’이라고는 감히 말하지 못했다-아내로 점지해 주소서.”
  제전에 참석해 있던 아프로디테는 그 말을 듣고 그가 말하려고 한 참뜻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의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표시로 제단에서 타오르고 있는 불꽃을 공중으로 힘차게 세 번 솟아오르게 하였다. 집에 돌아온 피그말리온은 자신의 조각상을 보러갔다. 침상 위로 몸을 기울여 조각상에 입맞추니 조각상의 입술에 온기가 있는 듯 느껴졌다. 다시금 조각상의 입술에 입맞추고 팔다리에 손을 얹어 보았더니 상아가 부드럽게 느껴졌다. 손가락으로 눌러 보니 마치 히메토스 지방에서 나는 밀초처럼 들어갔다.  피그말리온은 자기가 혹시 잘못 안 것은 아닐까 의심하고 걱정하면서도, 기쁨과 놀라움 속에서 그의 희망인 조각상을 사랑의 열정으로 거듭 만져 보았다.
  조각상은 정말 살아 있었다!  손가락으로 핏줄을 가만히 누르니 들어가고, 손을 떼자 부드럽게 원상태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나서야 마침내 아프로디테의 숭배자인 피그말리온은 여신에게 감사의 말을 드리고, 살아있는 처녀의 입술에 입맞추었다. 입맞춤을 받자 처녀는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수줍은 듯이 눈을 뜨고는 사랑하는 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프로디테는 자신이 맺어준 이 한 쌍에게 축복을 내려 주었다. 이들로부터 아들 파포스가 태어났는데, 아프로디테에게 바쳐진 도시 파포스의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분석 & 해설▣
    조각상을 사랑한 피그말리온 신화가 상징하는 바는 무엇인가? 간절한 소망 끝에, 여신이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고, 마침내 피그말리온이 조각상을 아내로 삼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한 편의 몽환적인 사랑 이야기의 속성을 잘 갖추고 있다. 이 신화에는 조각상에 대한 피그말리온의 ‘자기도취적인 소망’이 주조(主調)로 나타나 있다. 그 열망은 너무나 진지해서, 신(神)도 감응한 것이다.  이렇게 진지하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이기에, 이 이야기는 최근까지도 널리 알려져 있으며, 또한 여러 가지 번안물로 각색되는 듯도 하다. (조지 버나드쇼의 <Pygmalion>과, 이 연극의 브로드웨이판인 <My Fair Lady>를 예로 들 수 있다.)  
  나아가 피그말리온 신화는 그 상징성이 심리학에 차용되어(신화는 통상 인간심리의 반영) 이른바 ‘피그말리온 효과 (Pygmalion Effect)'-소망이 간절하면 그 만큼의 결과를 얻는다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열렬히 소망하는 대신 쉽게 포기한다. 그리고 소신을 버리고, 현실과 타협한다. 피그말리온 이야기를 통해 현대인들은 꺼져가는 열정을 다시 지펴 올려야 한다는 교훈을 얻어 낼 수 있지나 않을까?
    피그말리온 신화는 ‘예술적 승화’라는 점에서 해석할 수도 있다. 심리학에서 승화란 성적(性的) 에너지나 무의식의 억압이 사회적으로 가치있는 문화적 활동으로 바뀌는 일이다. 피그말리온은 여성에 대한 갈망을 예술활동을 통해 승화시켰다. 오늘날 특정부류의 사람들은 세속적인 결핍요인을 여타의 문화활동이나 연구, 또는 예술활동을 통해 창조적으로 극복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피그말리온 이야기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 대한 원형적 이미지를 담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피그말리온 신화는 이상과 같은 류의 긍정적 의미로만 해석할 수 있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피그말리온을 부정적인 의미의 인간형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현실 속의 여성을 거부하고 조각된 여성에 맹목적으로 집착하는 피그말리온에게서 우리는 어떤 편집증적인 심리를 발견할 수 있다. (당시 키프로스의 여성들 중에 창녀가 많았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은 현실을 부정할 수 없으며, 어떤 가치도 삶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점으로 볼 때, 피그말리온은 현실의 인간 관계를 부정하고, 자기의 폐쇄적인 세계 가운데 소외된 존재인 것이다.   오늘날 청소년들 가운데 이른바 ‘매니아’라는 부류들은 현실 속에서 인간 관계를 찾기 보다는 컴퓨터를 통한 사이버 공간 (Cyber Space)에 칩거하여, 자기 만족을 구하기도 한다. 이런 부류들을 현대판 피그말리온들이라 볼 수는 없을까?
  그러나 이런 해석은 어떤 점에서 볼 때, 본래적 신화에 대한 현재적 관점이 과장되게 작용한 것일 수도 있다.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이 신화는 한 인간의 사랑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담은 이야기이고, 좀더 일반화된 해석을 내리더라도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믿으면 좋은 결과가 오리라는 의미 그 이상을 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피그말리온 신화에 대한 부정적 해석은 어떻게 타당성을 얻게 되는가? 무엇보다도 신화는 끊임없이 ‘재해석’ 된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신화는 ‘화석처럼 굳어진 우화라기보다는 하나의 미래의 모습 (바슐라르)’ 이라는 말은, 이런 관점에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역사가 궁극적으로 현재의 역사여서, 동일한 역사적 사건이 시대에 따라 긍정적 또는 부정적으로 해석되는 것처럼, 신화 또한 그것을 읽는 당대적 가치의 렌즈가 끼워지는 것이다. 위의 연세대 논제에서 이 신화가 ‘현대 사회에서 시사하는 바를 분석’ 하라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이 논술은 피그말리온  신화가 특히 현대사회의 가치의식에 비추어 볼 때, 특히 두드러지는 시사점이 있다는 출제자의 의도를 담고 있다. 이후 대학측이 출제의도의 해설에서 특히 피그말리온 신화의 의미를 ‘현대 기술 산업 사회에서 파생되는 인간관계의 문제와 기술 문명의 문제에 적용하여 재해석’ 하라는 의도가 있었다고 한 점은 신화가 갖는 이러한 현재적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이 신화를 예컨대 현대의 기술 문명의 측면에서 해석한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점을 부각시킬 수 있을까?  신화에 나타난 피그말리온의 태도에 착안해 볼 때, 우리는 이 신화를 ‘가상과 현실’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이 신화에 접근할 수도 있다. 피그말리온은 먼 미래 사회에 일어날 인간 사회의 새로운 현상에 대한 원형적인 이미지를 이미 담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고대인들은 가상과 현실이 미분화된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었다. 라스코 동굴 벽화에는 정교하게 그려진 들소가 있고, 들소의 등에는 창살이 박혀 있다. 원시인들은 창살이 박힌 들소를 그리면서, 직접 들소를 사냥했다고 믿었다. 그리 오래지 않는 시절에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사진을 찍는 것이, 영혼을 빼앗아 가는 것이라 믿고 사진찍기를 두려워 했다. 솔거가 그린 소나무에도 학이 날아들었다 하지 않는가? 이들의 사고방식에는 가상과 현실이 미분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근대문명(Modernism)은 분명한(Cleare et distincte) 개념을 바탕으로 해서 발전해 왔다. 서구인들은 존재하는 것(Being)과 존재하지 않는 것(Non-being) 사이의 경계를 분명히 해 왔고, 감각자료를 기반으로 사물을 정의하고 설명해 온 것이다. 이른바 서구 근대 문명의 이분법적 사고 〔과학적 사고〕이다.
  그렇다면 최근의 가상-현실에 대한 관념은 어떻게 바뀌고 있는가?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또 다시 모호해지고 않지 않은가?  현실과 가상에 대한 현대인의 관념을 시사하는 하나의 사례를 다음 글에서 알아보자.

 

  일본 애니메이션 시리즈  『비디오 걸』과 『오 나의 여신』이 꽤 오랫동안, 그리고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다. 이 두 작품은 스타일이나 톤에 있어서 적지 않은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이한 공통점을 가지는데, 그것은 지금에 이르러서는 현대 기술 문명 〔테크놀로지〕의 산물인 미디어로부터 지루한 일상을 구원할 천사가 찾아 온다는 발상이다.  『비디오 걸』에서는 고등학생쯤 되는 주인공이 기묘한 분위기의 비디오숍에서 테이프 하나를 빌려다 작동시키는 순간 그 속에서 진짜 사람이 튀어나온다. 『오 나의 여신』도 마찬가지인데,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비디오 걸이 작동된 것에 반해 여신은 전화를 통해 호출되었다는 것 정도이다.  (중략) 이것은 기실 『우렁이각시』와 같은 옛날이야기에 등장하는 것과 놀랍도록 유사한 모티브이다. 『비디오 걸』은 현대판-좀더 정확하게는 매스미디어판 또는 테크놀로지판 『우렁이각시』인 셈이다. 똑 같은 종류의 욕망이 단지 서로 다른 대상, 즉 한쪽은 농경 사회에서 가장 익숙하게 접하는 사물에, 다른 한쪽은 테크놀로지의 가장 보편적인 발명품에 투영되었을 뿐이다. - 신주영 『테크놀로지와 문화적 상상력』 버전업 창간호(1996) 72~73쪽

 

  현실과 가상이 헛갈리는 오늘날 디지털 문화 현상에 대하여, ‘시뮬라크르의 소외’를 이야기하면서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는가 하면,  현실과 가상을 이분화하지 않은 이런 감수성을 두고 시뮬라크르가 장악한 현대 사회의 병리 현상으로 이해하는 것을 적절하지 않다고 말하는 논자도 있다. 특히 후자에 따르면 현대 문명사회는 미디어가 만들어낸 복제 이미지의 판 위에 놓여져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환각이 아니라는 것, 만약 나 혼자만이 그 이미지의 세계에 둘러 싸여 있다면 그것은 물론 환각에 불과할 것이지만 세계 전체가, 적어도 지배적인 부분이 미디어 이미지로 채워져 있다면 그것은 실재가 된다고 강조한다.
  고대 신화에는 신과 인간과 조각상이 서로 대화를 나누었다면, 현대판 신화에는 정교한 컴퓨터가 창조해 낸 사이버 스타(Cyber Star)와 인간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미지에 둘러싸인 오늘날 문화 현상을 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고 하는 논자들도 있지만, 우려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도 사실이다. 이들이 걱정하는 것은 오늘날 디지털 문화는 현실에 구체적으로 접근하는 문화가 아니라, 기호화〔숫자〕의 언어로 모든 것을 추상화해내는 문화이기 때문에, 디지털 문화는 우리를 현실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신세대, 즉 컴퓨터 언어에 익숙한 세대는 기성세대보다 현실의 속박을 덜 받으며, 기성세대가 비현실로 보는 무한정한 가상공간을 경험하면서 가상현실에 쉽게 접근하고 이를 그대로 현실로 받아들인다. 텔레비전이나 CD-ROM, 비디오 같은 영상매체가 청소년에 미치는 나쁜 영향을 조사해 온 많은 연구자들은 정보화 시대의 청소년 범죄가 그토록 잔혹하게 저질러지는 것은 바로 신세대가 범죄의 심각성에 대해 현실감을 가지지 못하는 데서 발생한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서 영상매체가 야기하는 현실감각의 쇠퇴는 컴퓨터 매개 커뮤니케이션을 더욱 더 반인간적으로 작용하게 만들어 특히 폭력적인 내용을 많이 담게 되는데 이것이 신세대에게 악영향을 미친다고 보는 것이다.
  피그말리온은 ‘사이버 결혼’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컴퓨터 공간뿐만이 아닐 것이다. 피그말리온이 그러한 것처럼, 현대 기술문명시대의 인간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낸 과학기술로 모든 것을 얻으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화의 단계에 이르렀다고 믿는다. 조만간에 남성과 여성의 영적(靈的), 육체적 관계없이 〔이러한 관계는 이제 비위생적이고 번거로운 절차가 된다.〕 인간을 복제(Cloning) 할 수도 있다고 한다. 복제양 돌리처럼, 암컷의 세포를 떼어내서 다른 암컷의 난자와 결합해서, 암수간의 성적 교배나 수컷의 정액이 없이 유전적으로 똑 같은 자식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인간 복제가 완전히 허용되면 새로운 인간 소외의 문제가 생길 것이다. 남성의 성적 역할이 거의 필요 없어지기 때문에 (예컨대, 쾌락적인 성적 관계는 ‘사이버 섹스’로, 출산은 ‘무성생식’으로 대치) 남성이 소외될 것이며 그 결과 남녀가 서로 멀어지는 현상이 생길 수도 있다.
   현대 기술문명의 시각을 투영할 때, 우리는 이카로스와 피그말리온 신화를 통해, 그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결국 유사한 맥락의 교훈을 읽어낼 수 있다. 즉, 이 두 신화는 인간이 스스로 발전시켜 온 과학 기술문명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볼 계기를 환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과학기술에 맹목적인 신뢰를 보이며 그 만능성에 집착하는 것은 인간 자신에게 유익하지도 않을뿐더러 결국 재앙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5. 현대사회와  신비주의 그리고 환상

 


◈< 문제>◈
<논제> 아래의 글은 신비의 미학적 복권과 신비주의의 과학화 현상을 기술하고 있다. 현대 문화에서 이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원인을 설명하고, 20세기 과학사의 맥락에서 과학과 신비주의의 상관관계를 논하시오.(2002 동국대학교 정시)

  (가) 현대 문화는 인간의 사고를 지배하던 신화적 관념을 과학적 지식으로 대치함으로써 성립되었다. 그러나 신화를 통하여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는 관행은 과학의 눈부신 발전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고 있다. 자연의 마법(魔法)에 호소하는 신화적 상상력은 문학과 예술에서 빈번하게 등장한다. {반지의 제왕}, '해리 포터' 시리즈 같은 대중 서사물은 과학이 인간 세계로부터 추방한 신비를 미학적으로 복권시키고 있다.

 

  (나) 현대 과학은 자연과 인간을 둘러싼 많은 의문을 해결했음은 물론, 생명의 본질과 기원을 해명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과학적 성취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고 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도교(道敎) 사상과 현대 물리학의 접합과 같은 신비주의의 과학화가 시도되고 있다. 그 결과, 다양한 신비적 관념들이 과학주의(scienticism)적 해석을 통하여 과학(science)의 지위를 차지하기도 한다.


※ 과학주의(scienticism) :  통상적으로 물리학에서 이용되는 과학적 방법과 기준이 모든 지식 영역과 인간행위에 적용될 수 있다는 사고 방식 내지 신조를 가리킨다.

 

 

▣분석 & 해설▣
-(가)에 대하여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이상적(理想的)인 것은 모두 인간적이지 않다. 하지만 인간이 이해력은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천국이 있을 까닭이 있겠는가?(Raymond H. Thompson, Modern Fantasy and Medieval Romance)” 라는 말이 (다)에 대한 답변의 단서가 될 것 같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신화적 상상력’을 문화상품에 접목 시켜 판매하고 또 즐기고 있음을 보게 된다. 컴퓨터 온라인 게임에서부터 영화, 그리고 중 고등학생들이 심취하고 있는 판타지 소설류들이 그러하다. 물론 문화에 신화적 상상력을 접목한 것은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그 상상력을 바로 우리의 눈앞에서 생생하게, 그것도 움직이는 영상으로 재현하게 된 것은 디지털 영상 기술의 덕분이다. 신화적 상상력과 디지털 기술의 행복한 만남이 오늘날 우리가 즐기는 문화를 잉태한 것이다. 그렇다면 문학과 예술 등 문화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는 신비의 미학적 복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이성에 바탕을 둔 합리성을 추구하는, 이른바 ‘탈마법화’의 현대사회에서 왜 사람들은 신화에 매력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신화의 현대적 의의에 대한 원론적인 답변을 담고 있는 한 글을 소개하면서 이 문제에 대한 답변에 접근해 보고자 한다. (이하, 남진우, ‘신화 속에 숨은 인간의 뿌리를 찾는다>에서 발췌함)


  신화의 힘은 무엇보다도 나와 인류, 우주에 대한 근원적인 진실을 보여 준다. 신화는 삶의 무수한 다양성을 보여준다. 신화 속의 신들은 인간 세계에서 원초적 의미를 갖고 있는 총체적 경험을 형상화한 것이다. 인간은 신화를 통해 삶의 뿌리를 찾으며 고립된 개체를 넘어선 집단적 정체성을 부여받는다. 학문을 연구하거나 문학예술을 창작하는 사람들이 과거의 신화를 뒤적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대 그리스 신화가 문학·철학·인류학·정신 분석학·사회학 등 여러 분야에 소진(消盡)될 줄 모르는 해석과 논쟁의 진원지 역할을 해 온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오이디푸스는 현대 심리학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개념으로 부활하였고, 자신을 본 남자들을 돌로 변화게 하는 메두사는 현대 페미니즘 담론의 발전을 이끌어 왔다. 신화는 이처럼 인류 정신문화의 토양을 형성하며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신화가 지니는 또 다른 힘은 신화가 현대인의 사고방식과는 다른 인식의 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이 우주는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에 대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는 아주 부분적인 해답을 제공할 뿐이다. 현대인의 심리 근저에 자리잡고 있는 자기존재에 대한 불안감은 여기에서 연유한다. 그런 면에서 뇌성과 더불어 번쩍이는 번갯불에서 제우스를 보고, 기다리던 봄을 맞이하면서 페르세포네의 귀환을 보았던 고대 그리스인들이 현대인들보다 더 풍성하고 총체적인 인식의 틀을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신화적인 인식은 비(非)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전(前)이성적이라거나, 신화는 생명 연대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신화학자들의 언급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의 틀만으로 불안하게 버티고 있는 현대인들로 하여금 그동안 자신들이 비워두었던 인식의 틀이 무엇인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나)에 대하여
  답변과 아울러 이 질문의 배경이 된 것으로 보이는 프리초프 카프라의 저서 『물리학의 도(道), The Tao of Physics』의 내용성격을 함께 살펴볼 필요성을 느낀다.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을 연관시켜 서술한 카프라의 이 책은 책의 제목만큼이나 서양의 과학과 동양의 신비주의(저자는 이 책에서 힌두교, 불교, 도교 등 동양사상을 통틀어서 신비주의라고 명명한다.)에서 볼 수 있는 세계에 대한 인식상의 공통점을 천착한 책이다. 그럼 서양의 과학이 동양의 신비주의 사상에 관심을 두고, 양자간의 접점을 찾게 된 과학사적 배경을, 역자(譯者)의 글을 통해 알아보기로 한다.

 

  현대 물리학은 20세기에 나타난 상대성 이론과 양자 물리학을 말하는 것으로 그 자연관은 이전의 고전 물리학의 그것과는 극히 대조적이다. 뉴턴 이래 물리학[고전물리학]의 위대한 발전과 그 물리학의 방법에 의하여 각 분야에서 빛나는 성과를 거둔 과학은 18, 19세기의 서양인들에게 물리학적 방법에 대한 무한한 자신감을 가지게 하였다. 이 자신감은 19세기의 라플라스(Laplace)의 호언장담, 즉 인간이 우주의 현재의 모든 상태와 그 운동을 다 알게 되는 날에는 우주의 미래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말로 대변된다.
  고전물리학은 인간이 자연의 모든 현상을 합리적인 논리로 이해할 수 있으며 언젠가는 인간이 전지자의 위치에 오를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만만하던 고전물리학은 현대물리학의 혁명에 의하여 산산조각이 났으며, 이 과정에서 고전물리학에서 말하는 분석적 자연, 입자 환원론적 자연은 다시 신비의 자태를 되찾게 되었던 것이다. 고전 물리학의 기본개념들, 즉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 인과율, 질량적 물질 등등의 개념들은 현대 물리학에 의하여 모조리 파기되어 버린 것이다.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의 개념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의하여 그 허구성이 드러났으며, 고전물리학의 철칙이었던 인과율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를 도입하여 양자역학을 수립함으로써 원자의 세계에서는 통용될 수 없는 개념으로 전락하였다. 그리고 고전 물리학에서 생각했던 단순한 정량적 물질은 양자 물리학에서는 합리적 이해를 초월하는 자기 모순에 가득찬,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로운 것으로 보이게 된 것이다.
   자연을 관찰함에 있어서 고전물리학의 기본 태도는 순수한 객관주의였다. 관찰의 대상체는 주관과는 관계없이 ‘거기 존재해’ 있는 것이므로 그러한 객관적 존재의 불변적 특성인 수량적 속성들의 파악에 물리학은 전력을 기울여 왔던 것이어서, 따라서 관찰의 과정에서 가변적이요 불확실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주관은 배제되어야 했다. 그리하여 주관적인 감각에 속하는 색(色)이나 음의 본질은 객관적인 파장이나 진동의 수로 대체되고 감각 작용은 사진기, 진동막, 한란계 등등으로 대체된다.
  19세기 말경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전자장 현상의 이론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아인슈타인은 관찰의 대상과 관찰자의 관계를 세밀히 분석함으로써 상대성 이론을 수립하기에 이른다. 시간이란 다른 위치에 있는 각기의 관찰자에 따라서 동시성과 흐름을 달리하는 상대적인 것이며, 따라서 모든 관찰자에게 공통되는 절대 시간이란  없는 것임을 상대성 이론을 통해 입증했다. 또한 물체를 담고 있는 각기의 공간은 각각 다른 곡률(曲率)에 의하여 왜곡되어 있는 것이며, 모든 공간이 유클리드적 동질의 공간이 아니라는 것, 즉 절대 공간은 없다는 것을 밝혔다. 순수 객관주의의 물리학에 처음으로 관찰자의 입장, 즉 주관적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상대성 이론은 더 깊고 더 넓은 진리를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양자물리학은 여기에서 한 발 더 주관주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원자와 원자를 구성하는 소립자를 관찰하는 데 있어서는 그 입자들을 공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체로서는 파악할 수 없으며, 그것은 존재와 비존재 시이에서 천변만화하는 에너지[氣]의 일시적 형태, 또는 에너지 장(場)의 변화의 ‘과정’이나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석된다. 그리고 그 변화는 관찰자의 설문에 따라서 다른 대답을 주고,  어떠한 대답과 대답 사이에는 논리적 일관성이 없다. 따라서 양자 물리학은 그 관찰의 대상을 일관성 있는 ‘존재’로서 취급할 수 없으며, 그 ‘존재’의 기술(記述)로써 양자물리학이 성립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그 관찰의 경험을 정리하고 인식하는 수단으로써 성립되는 것이다. 또한 관찰자는 그 설문의 방식을 통하여 관찰 대상의 현상에 참여하게 되므로 관찰자는 자연의 연극에 있어서 관객이며 동시에 배우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객관적 존재의 문제는 주관적 인식의 문제와 밀착하게 되며, 주관과 객관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로서 작용한다.
  현대물리학이 순수 객관주의에서 주관주의의 방향으로 접근해 옴에 따라 본질적으로 주관주의인 동양의 사상에 흥미를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보어나 하이젠베르크 등 양자 물리학의 거장들이 그 탐구의 과정에서 종래 물리학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인과율을 본의 아니게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됨에 따라 그들은 허탈감에 사로잡혔던 것이며, 이 심각한 사상적 고민 속에서 그들은 일찍부터 동양 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고전 물리학을 뒤따른 제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물질의 풍요를 가져왔지만 그에 수반한 결정론적·기계론적 세계관은 인간의 마음과 정서를 경시하는 풍조를 일게 하였으며, 시대가 흐를수록 심화되는 이 물심(物心)의 불균형은 드디어 현대 문명에 난치의 중병을 초래한 것이다. 동양의 현인들이 정적(靜寂)의 시간을 찾아 스스로의 마음의 수련에 주력한 데 반하여 현대인들은 자기와의 대면 시간인 고독을 두려워하며, 매스컴과 광고의 홍수 속에서 불어만 가는 물욕과 갈등으로 마음의 평정을 찾을 길 없고, 공간적·시간적 사회의 분열과 단층은 갈수록 심화되어 불안과 고독감은 가중되며, 마음은 더욱 어지러워져서 진정제와 수면제의 판매량과 정신 분석의 치료를 받아야 할 환자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가고 있다. 이러한 현대문명의 중병을 진단한 어떤 사람들은 자연으로 돌아가서 조화를 되찾으라고 충고하지만, 이미 분별지(分別智)를 발전시켜 고도의 기술 사회를 이루어 놓은 현대인에게 낙원을 지키는 불칼이 없다 해도 자연 동산으로 돌아가는 단순회로는 봉지 않는다. 물심의 조화의 달성이 지난(至難)한 것이며 이 달성의 지름길은 없을지라도 물질관의 새로운 검토가 그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상,  프리초프 카프라(이성범·김용정 옮김)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 8~14쪽의 ‘역자 서문’에서)

 

  이어서 역자는 카프라의 이 저서가 고전물리학의 유물인 메마른 기계론적 자연관이나 유물론적 세계관으로부터 해방되고 더욱 윤택하며 친화력 있는 전일적 우주관을 가지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말하면서 글을 마치고 있다.
  위 논술의 논제로 돌아가 보자.
  먼저 제시문 (나)에서 말하는 ‘도교(道敎) 사상과 현대 물리학의 접합과 같은 신비주의의 과학화’는 카프라의 저서를 염두에 두고 한 것임에 두말할 나위 없다. 특히 (나)에만 해당하는 내용으로 논제를 간추리면, 그것은 신비주의의 과학화 현상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설명하고 20세기 과학사의 맥락에서 과학과 신비주의의 상관관계를 논하라는 것이다.
  우선 신비주의의 과학화 현상이 나타나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물론 과학사의 내부에서 그 원인을 찾으면 위에서 잠깐 살펴본 고전물리학의 한계가 그 원인이다. 그러나 이 논제는 이와 같은 원인 규명만을 요구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논제는 그것을 과학사 내부에서 있었던 과학패러다임이 변화로만 논술하라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포괄적인, 즉 ‘현대 문화’의 맥락에서 논술하기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원인은 무엇보다도 범박하게 말하면 과학에 신비주의가 들어선 것은 인간 이성의 메마름에 대한 반동의 결과이며, 인간 이성이 발전시킨 과학에 대한 반동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 과학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은 물론 그 이론적 체계 속에 모든 것을 물질화하고, 경험적으로 감각될 수 있는 물질만을 인정하고,  인간의 존재론적 문제조차도 계량화하는 고전물리학의 전통이다. 이와 같은 과학의 전통은 삶이란 무엇이며, 왜 사는가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이나 신(神)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과 같은 물음에는 답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인간은 과학을 통한 물질문명의 엄청난 진보 가운데서 물질적 풍요를 향수하면서도 뭔가 텅 빈 공간을 느낀 것이다. 인간은 사고를 통해서 현재를 넘어서 과거와 미래를 생각할 수 있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의 문제와 신비를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피조물이다. 그런데 과학은 인간에게서 그와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꿈꾸는 성향을 미신적인 것으로 단죄하고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 이 모든 인간적인 요소들을 추방시켜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 문화에서 신비주의가 부활한 것은 과학이 인간세계에서 추방한 삶의 의미와 목적, 신의 섭리와 같은 것들을 되찾고자 하는 인간들의 욕구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이 지금까지 인간의 분별지를 키워온 과학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앞으로 인간 세계에서 실현되어야 할 과학은 인간적인 요소, 주관적·정신적인 요소가 제거된, 물질 환원론적 고전물리학의 패러다임이 아니라, 그 안에서 인간의 존재의 문제에 대한 의문까지도 해소해 줄 수 있는 새로운 물리학이어야 할 것이다. 
 

 


 

◈< 문제>◈

(가), (나), (다)는 환상, 신화, 축제와 같은 비일상적인 것들의 의미를 기술하고 있다. 제시문 (라)에 대한 찬반의 입장을 정하여 현대 사회 안에서 비일상성이나 비현실성이 지니는 기능을 논하시오. (2005 이화여대/1400~1600자)

  (가) 환상문학은 문화적 질서가 의존하고 있는 토대를 제시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질서, 불법적인 것, 법과 지배적 가치체계 바깥에 놓여있는 것들을 짧은 순간 열어 보이기 때문이다. 환상적인 것은 문화의 말해지지 않은 부분, 보이지 않는 것, 즉 지금까지 침묵을 강요당하고 가려져 왔으며 은폐되고 부재하는 것으로 취급되어온 것들을 추적한다. 다시 말해 환상문학은 꺾이지 않는 욕망, 즉 이미 존재하거나 실제로 보일 수 있도록 허용된 것들과는 대립되는, 아직 존재하지 않거나 또는 존재하도록 허용된 적이 없는 것, 들어보지 못한 것, 보이지 않는 것, 상상적인 것에 관한 열망에 대해 말한다. 나아가 환상문학은 거부나 전복을 통해 급진적인 문화적 변형의 가능성을 확립하려 한다.

 

  (나) 신화가 없다면 모든 문화는 건강하고 창조적인 자연적 능력을 잃게 된다. 신화로 둘러싸인 지평선 속에서 비로소 문화의 움직임 전체는 하나로 통일, 완결되는 것이다. 상상력과 아폴로적 꿈의 모든 힘들은 신화를 통해서야 비로소 정처없는 방랑에서 구제된다. 신화의 형상들은 보이지 않게 어디에나 존재하는 마적(魔的)인 파수꾼이어야 한다. 이 파수꾼의 비호를 받으며 젊은 영혼은 자라나게 되고, 어른은 자기 삶과 투쟁을 그 표식에 비추어 해석한다. 국가에 있어서도 신화적 토대보다 더 강력한 힘을 지닌 불문율은 없다. 왜냐하면 신화적 토대는 국가를 신화적 표상으로부터 자라나게 하고, 국가와 종교와의 관계를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이제 신화에 의한 이끌림이 없는 추상적 인간, 추상적 교육, 추상적 풍습, 추상적 법률, 추상적 국가를 상상해 보라. 그 어떤 고유한 신화에 의해서도 제어되지 않는 무절제한 예술적 상상력의 방황을 눈앞에 그려보라. 확고하고 신성한 근원을 갖지 못하여 자신의 모든 가능성을 고갈시키고, 그리하여 다른 문화에 기생할 수밖에 없는 어떤 문화를 상상해 보라. 이것이 오늘날의 모습으로서, 신화를 말살하려 했던 저 소크라테스주의가 초래한 결과이다. 이제 신화를 상실한 인간은 영원히 굶주리며 모든 지나간 것들 사이에 서서 자신의 뿌리를 찾아 땅을 파헤치고 있다.

 

  (다) 중세의 엄숙성은 한편으로는 두려움, 허약함, 비하, 굴종, 거짓, 위선의 요소들로, 다른 한편으로는 폭력, 위협, 협박, 금지로 채워져 있었다. 이 엄숙성은 탄압과 강제와 금지를 통해서 권력을 대변했다. 그러한 까닭에 중세의 엄숙성은 민중의 불신을 불러일으켰다. 엄숙성은 공식적인 분위기를 담고 있었으며, 공식적인 모든 것처럼 거역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억압적이었고, 두려움을 불러일으켰으며, 제약적이었고, 왜곡했으며, 위선의 마스크를 썼다. 엄숙성은 금식(禁食)의 순간에도 탐욕스러웠다. 그러나 축제의 광장과 주연(酒宴)의 식탁에서 그 가면이 벗겨지면 웃음, 바보스러움, 무례함, 욕설, 패러디, 풍자를 통해서 다른 진실이 드러났다. 모든 두려움과 거짓은 세속적이고 육체적인 축제의 원리 앞에서 스러졌다.

           

  (라) 소설에는 세 가지 의혹된 바가 있다. 헛것을 내세우고 빈 것을 천착하며, 귀신을 논하고 꿈을 말하였으니 지은 사람이 첫 번째 의혹이요, 허황된 것을 감싸고 비루한 것을 고취시켰으니 논평한 사람이 두 번째 의혹이요,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경전(經典)을 등한시했으니 탐독하는 사람이 세 번째 의혹이다. 소설을 지은 것도 옳지 못한 일인데 무슨 심정으로 평론까지 붙여 놓았단 말인가? 평론한 것도 옳지 못한 것인데 『삼국지』 또는 『수호전』을 속집(續集)까지 만든 자가 있었으니, 그 비루함을 더욱 논할 나위가 없다. 슬프다! 더욱 심한 자는 음란한 더러운 일을 늘어놓고 괴벽한 설을 부연하여 보는 사람의 눈을 기쁘게 하기에 힘쓰면서 부끄러워할 줄을 모른다. 내가 일찍이 보건대, 소설들 서목(書目) 중에 연의(演義)를 개척한 것도 있는데, 비록 펼쳐 보지는 않았지만 그 명목만 보아도 너무 괴상하다.

 

▣분석 & 해설▣

   (라)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소설’은 (가), (나), (다)에서 각각 말하고 있는 환상, 신화, 축제가 복합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현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결국  (라)의 소설을 긍정한다면 (가), (나), (다)의 환상, 신화, 축제와 같은 비일상적인 것을 긍정해야 할 것이고, 부정한다면 이들 비일상적인 것 또한 부정해야 할 것이다(물론 달리 문제를 풀어나갈 수도 있다). 이 문제는 소설에 대한 우리 전통 사회 어떤 의 평가를 대한 각자의 입장 표명을 통해 특히 오늘날 우리 사회 문화 전반에서 그 개성적인 색채를 드러내고 있는 환상, 신화, 축제와 같은 비일상적인 것의 의미를 논하게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전통 사회, 특히 조선의 유교 사회에서 소설은 공식적으로는 전혀 환영받지 못할 존재였다. 물론 그렇게 된 이유는 유교가 지닌 철저한 현실주의적 세계관 덕분이다. 유교는 이른바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하지 않도록 했던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다)의 필자가 소설은 ‘헛것’고 ‘빈 것’이며 ‘허황’하고 ‘비루’하다고 평가한 것은 그 당시로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가)에서는 환상문학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이 글에 따르면 환상문학이란 일상을 지배하는 법칙 바깥에 존재하는 혼란스럽고 비일상적이고, 그 존재성이 의심스런 어떤 것을 소재로 하여 거부나 전복을 통해 실현되는 문화적 변형의 일종이다. 환상문학, 또는 판타지라는 이름으로 읽히고 있는 서사물들의 본질에 대한 비평적 언급은 대동소이하면서도 때로 더 명쾌한 것들도 있다. 환상문학은 ‘우리의 관습적인 현실 개념에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기준과 사실을 고의적으로 위반하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는다.(S.C 프레드릭스)’거나 ‘환상문학은 반(反)사실이라는 특성을 가지며 가능하다고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을 공공연하게 위반하는 것에 기초하고 통제되는 이야기(W,R. 어윈)’라고 하는 것들이 그러하다.

-환상문학의 개념은 'Gary K.  Wolfe, The Encounter with Fantasy'『The Aesthetics of Fantasy Literature and Art』에서 인용함.
   (나)에 따르면 신화는 특정한 문화가 창조되고 완결되는 근원이며, 한 국가로 하여금 강력한 힘을 가지게 하는 불문율이다. 자기만의 신화가 없는 문화는 구심점을 잃고 다른 문화에 기생할 수밖에 없다. 이 글과 같은 논지에 따르면 신화는 특정한 민족문화나 국가가 유지되고 발전하게 하는 정신적 샘물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의 단군신화에서 나온 ‘홍익인간’ 개념이 대대손손 우리의 정신 속에서 전승되어 오는 것이나, 단군신화에 나오는 웅녀가 동굴 속에서 겪은 시련의 통과의례가 『춘향전』에서 옥중 춘향의 모습으로 재현되고, 또 당시,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춘향이라는 여인이 우리의 여성상(女性像) 한가운데 우뚝 서 있으며 대대로 우리 민족의 여성관 형성에 원형을 제공한 것도 신화의 힘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신화가 국가의 정치적 힘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조선은 건국과 함께 『용비어천가』라는 신화를 만들었던 것이다.
   (다)에서 축제가 인간의 근엄함과 허위를 폭로해 버리는 것은 굳이 중세만의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평소에 근엄하던 사람들도 축제에서는 웬만큼 그 근엄한 가면을 벗지 않는가? 그 가면은 일상의 인간관계에서 어쩔 수 없이 바꿔가며 써야 할 페르소나인 것이다. 특히 내가 남에게 어떻게 보일까에 대해 더 신경 써야 하는 시대인 오늘날, 우리는 하루하루 더 잦게 가면을 바꿔 써가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면도 축제의 현장에서는 여지없이 벗겨지고 인간은, 인간이라는 천사에 훨씬 못 미치는 부족한 이 존재는 그 우스꽝스럽고 바보스러운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그리고 문제는 그 바보스러움이 사실은 그 사람의 진실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가),(나), (다)글의 분석을 통해 보건대, 환상, 신화, 축제와 같은 비일상적인 것은 인간과 사회를 그 얽매인 구속과 한계로부터 일탈하게 해주고 가능성을 열어주는 기능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라)에 나타난 소설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의 『홍길동전』이나 『전우치전』을, 더구나 그 안에 주인공이 부리는 호풍환우(呼風喚雨)하는 신기한 도술을 ‘헛것’고 ‘빈 것’이며 ‘허황’하고 ‘비루’하다고 평가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홍길동전』이나 『전우치전』은 당시 봉건사회의 제도적 모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개인이나 계층들에게, 허구를 통해서나마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을 열어보였고, 그 한편의 소설에서 작가가 소망한 이상은 다음 세대에서 조금씩, 조금씩 허구 밖으로 걸어 나와서 결국 근대라는 세계를 열고 인간해방의 역사를 열어보였던 것이다.
   문화는 크게 보아 현실적인 것(사실적인 것, 리얼리즘)과 환상적인 것으로 나눠 볼 수도 있다. 사실 오랜 유교의 현실주의 가치관에 따라 살아온 우리에게는 환상적인 것, 비일상적인 것을 폄훼하여 왔으며, 환상이나 비일상적인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은 의 표상인 것처럼 생각해 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문화 현실을 보자. 이제 현실적인 것, 사실적인 것은 한계에 다다른 것 같다. 물로 더 사실적이고 극사실적인 것으로 돌파구를 찾아볼 수도 있겠지만. 이쯤해서 비일상적이고 환상적인 데로 눈을 돌려야 한다고 본다. 비일상적인 것의 가치는 추상적인 문화현상에 국한되어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디지털 기술은 사람들이 머릿속으로만 그리던 환상을 비주얼하게,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것으로 우리 눈앞에 재현해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문화산업이 되고 있다. 유럽이나 미국에는 오늘날 우리가 ‘환상’ ‘판타지’로 알고 있는 소설을 쓴 작가들도 많았고, 그들이 쓴 작품들의 인물들이 게임의 온라인 게임의 주인공으로 재탄생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에게는 아직은 우리 고유의 비일상의 전통문화, 환상의 전통문화를 현대적으로 살리는 데 눈을 주지 않는 것 같다. 우리에게도 환상문화의 전통은 물론 있다. 물론 우리의 환상문화의 전통은 널리 알려진 서구적 개념의 환상이나 판타지와 성격이 다른 점도 있다. 그러나 이것들도 현대적으로 변용하여 화려하게 부활시킬 문화컨텐츠로 손색이 없다. 우리의 전통설화에 나오는 용의 전설을  현대적 블록버스터로 재탄생시킨 영화를 두고 수준 낮고 구성력 없는 엉성한 아동영화로만 막무가내 폄훼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참고한 책
  ․ 이윤기 『무지개와 프리즘』 생각의 소나무
  ․ P.디엘 (안 용철 역) 『그리스 신화의 상징성』미학사
  ․ J.캠벨 (과학세대 옮김) 『신화의 세계』까치 

  ․ 토도로프 (이기우 옮김) 『환상문학 서설』 한국문화사
  ․ 마이클 매크론(정성호 옮김) 『일목요연 그리스 로마 신화』서해문집
  ·  Albert Camus (권오석 옮김) 『시지프의 신화』홍신문화사 

  ․ 계간 『버전업』 창간호. 1996 토마토
  ․ Roger. C. Schlobin, editor 『The Aesthetics of Fantasy Literature and Art』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AND THE HARVESTER PRESS

  ` 프리쵸프 카프라(이성범.김용정 옮김)『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범양사 출판부


 


 

 Ⅱ.이성(理性)

 

1. 이성의 개념

  그리스인에게 이성의 개념은 암시적인 것이면서도 명확한 것이었다. 로고스(Logos)라는 그리스어는 이성과 담론(discours)을 동시에 의미한다. 그리고 이 로고스라는 용어 안에는 ‘한데 그러모으고 연결시킨다.’라는 관념이 있다. 이러한 연결의 개념이야말로 가장 기초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성이란 항시 통일과 종합의 능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정신의 올바른 행로는 관념의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는데 있다. 플라톤적 의미의 이성은 근본적으로 거짓임에도 인간을 현혹시키는 허망한 감각적 인식에 대립되는 것으로서 정확한 사유능력을 의미한다.     

          - 자클린 뤼스 『지식과 권력』예하 49 쪽-

 

  그러나 이성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은 본질적으로 데카르트에서 시작된다.  데카르트는 이성적 논리규칙을 모든 지식의 기초로 보는 이성론(理性論)의 전통을 세운 사람으로 평가된다. 이성의 본격적인 시대가 열리는 시점은 그의 『방법서설』(1637)에서 부터라고 할 수 있다.『방법서설』의 설명처럼 이성이란 ‘올바르게 판단하고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능력’인데, 이는 ‘천성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균등하게 배분되어 있다.’ 이 명제는 현대적 ‘인식 민주주의’의 초석이 되었다.  이로써 자유롭게 이성을 발휘하면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는 이른바 ‘현대의 약속’이 그 철학적 뼈대를 드러냈다.
  물론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대 그리스인들도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의미를 강조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고 했을 때 동물과 자연적으로 구별되는 ‘속성’으로서의 이성은 일찍부터 인간실존의 특징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고대 그리스 시대를 ‘이성의 시대’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때의 이성은 들이 힘써 연마해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특출한 재능’이자, ‘무술’처럼 갈고 닦아야 할 ‘덕(德)’이었으며, 결국에는 지식, 비지식, 인간․반인간을 차별짓는 정신적인 근거였다.
  데카르트가 말하는 이성은 ‘개개의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선천적으로 주어진 능력’이지만, 불행하게도 인간 모두가 그것을 정확하게 사용하는 것은 아닌 선천적 능력이다.  그에 의하면 이성이 유용하게 사용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방법(méthode)를 세워야 한다. 데카르트는 말한다. ‘우리들의 의견이 서로 다르고 갖가지인 것은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보다 이성을 더 많이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우리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생각을 해 나가거나, 우리가 동일한 것을 생각하지 않은 데에 기인한다. 무릇, 좋은 정신을 갖는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며, 오히려 보다 진보적인 것은 정신을 잘 응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방법서설』 제 1 부 -
  즉, 이성은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성이 동일하지 않는 것은 단지 이성의 적용에 따른 문제일 뿐이다. 인간들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서로 다른 차이는 방법에 따른 차이이지 결코 이성의 차이는 아닌 것이다.

 

 

2. 이성과 사회

  인간의 이성(理性)과 관련한 논술은 다양한 각도에서 출제되었고, 또 출제될 수 있다. 지금까지는 주로 이성에 대한 반성적(反省的) 검토를 요구하는 논제들이 다수 출제되었다.  ‘인간의 이성이 자연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 (서울대), ‘인간의 이성이 인간의 해방을 가져다 주었는가?’ (연세대), 그리고 ‘인간은 이성적 존재인가, 생물학적 존재인가?’ (이화여대) 등의 논제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
  나아가 학생들은 ‘이성개념’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는 물론이고, 이성이 역사적으로 수행해 온 긍정적인 역할, 그리고 그 이면에 이성이 인간과 사회, 그리고 자연에 초래한 폐단 등에 대한 배경지식도 쌓아두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른바 ‘이성 = 진보’의 등식이 과연 옳은 것인지, 과거-현재-미래의 통시적인 관점에서 살펴 볼 필요도 있다. 다음의 기출문제를 통해서 이 문제에 대한 하나의 실제적인 사고를 해보자.

 

◈< 문제>◈

※ 다음 세 글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사고방식의 특성을 설명하고 그것이 20세기 한국사회와 한국인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쳐 왔으며 그 한계가 무엇인지 1800자 안팎으로 논술하시오.  (1999. 연세대 자연계 정시)

 (가) 가장 어려운 증명에 도달하기 위해 기하학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아주 간단하고 쉬운 일련의 논증에 대해 성찰한 끝에, 인간이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와 유사한 논리적 방식으로 얻을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로 보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논증에 요구되는 순서를 신중히 따르기만 한다면, 감추어진 진리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어디에서부터 시작할 것인가를 찾는 데 별로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가장 간단하고 또 가장 알기 쉬운 것부터 시작해야 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전에 여러 학문에서 진리를 찾았던 사람들 가운데 수학자들만이 확실하고 분명한 추리와 논증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나도 수학자들이 출발한 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확신했다.  <중략>
   나는 가장 간단하고도 가장 일반적인 원리로부터 출발했으며, 내가 발견한 각각의 진리들은 다른 진리를 발견하기 위한 하나의 규칙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옛날에 내가 매우 어려운 것으로 여겼던 여러 난제를 해결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결국에 가서는 미해결의 문제가 어느 정도 풀릴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는데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를 결정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 나는 주어진 문제에 하나의 해답만이 있으며, 누가 발견하든지 다른 모든 사람도 그것을 알 수 있음을 감안할 때, 내 방법이 전혀 헛되어 보이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예를 들면, 산술을 배운 아이가 산술의 규칙에 따라서 올바로 덧셈을 했을 때, 그 아이는 자신이 계산한 덧셈의 합계에 대해서는 인간의 정신이 발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발견했다고 확신할 것이다. 왜냐하면 올바른 절차를 따르고 또 우리가 탐구하고자 하는 것의 모든 여건을 정확하게 진술하는 방법이야말로 산술의 규칙에 최상의 확실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법이 내게 가장 만족스러웠던 것은 바로 그 방법을 통해서, 완벽하지는 않지만 내 능력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 내가 모든 것에 대해 이성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데카르트『방법서설』)

 (나) 1830년대에 레옹 쉐포가 작성한 <파리 소년감화원을 위한 규칙>은 다음과 같다.
 제17조  재소자의 일과는 겨울에는 오전 6시, 여름에는 오전 5시에 시작한다. 노동시간은 계절에 관계없이 하루 9시간으로 한다. 하루 중 2시간은 교육에 충당한다. 노동과 일과는 겨울에는 오후 9시, 여름에는 오후 8시에 끝낸다.
 제18조  기상. 첫 번째 북소리가 울리면, 재소자는 조용히 기상하여 옷을 입고, 간수는 독방의 문을 연다. 두 번째 북소리가 울리면, 재소자는 침상에서 내려와 침구를 정돈한다. 세 번째 북소리가 울리면 아침기도를 하는 성당에 가도록 정렬한다. 각 신호는 5분간격으로 한다.
 제19조  아침기도는 감화원 소속 신부가 주재하고, 기도 후에 도덕이나 종교에 관한 독송을 행한다.   이 일은 30분 이내에 마치도록 한다
 제20조  노동. 여름에는 5시 45분, 겨울에는 6시 45분에 재소자는 마당으로 나와 손과 얼굴을 씻고 빵 배급을 받는다. 뒤이어 즉시 작업장별로 정렬하여 일을 하러 나가야 하는데, 여름에는 6시, 겨울에는 7시에 시작해야 한다.
 제21조  식사. 10시에 재소자는 노동을 중단하고 마당에서 손을 씻고 반별로 정렬하여 식당으로 간다.  점심식사 후 10시 40분까지를 휴식시간으로 한다.
 제22조  학습. 10시 40분에 북소리가 울리면 정렬하여 반별로 교실로 들어간다. 일기, 쓰기, 그림그리기, 계산하기의 순서대로 한다.
 제23조  12시 40분에 재소자는 반별로 교실을 나와 마당에서 휴식을 취한다. 12시 55분에 북소리가 울리면 작업장별로 다시 정렬한다.
 제24조  1시에 재소자는 작업장에 도착해 있어야 한다. 노동은 4시까지 계속한다.
 제25조  4시에 작업장을 나와 안마당으로 가서, 손을 씻고 식당에 가기 위해 반별로 정렬한다.
 제26조  저녁식사 및 휴식은 5시까지로 하고, 재소자는 다시 작업장에 들어가야 한다.
 제27조  여름에는 7시, 겨울에는 8시에 작업을 종료하고, 작업장에서 하루의 마지막 빵 배급을 받는다.   교훈적인 뜻이나 감화8적인 내용을 담은 15분간의 독송을 재소자 1인 혹은 감시인 1인이 하고, 이어서 저녁기도에 들어간다.
 제28조  여름에는 7시 반, 겨울에는 8시 반에 재소자는 마당에서 손을 씻고 복장 검사를 받은 뒤 독방 안에 도착해 있어야 한다. 첫 번째 북소리가 울리면 옷을 벗고, 두 번째 북소리가 울릴 때 침상에 들어가야 한다. 각 방의 문을 잠근 후 간수들은 질서와 침묵을 지키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복도를 순회한다.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다) 섬에 도착하고 10일쯤 지났을 때, 필기도구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의 경과를 알 수 없어서 노동일과 안식일의 구별조차 못하게 되지 않나 하는 걱정이 생겼다. 그래서 이런 일을 방지하려고, 커다란 나무기둥에 주머니칼로 크게 “나는 1659년 9월 30일 이 곳에 상륙했다.”라고 새기고, 그 나무기둥으로 커다란 십자가를 만들어 첫발을 디딘 해변에 세웠다. 이 나무기둥의 옆면에다 매일 V자형의 눈금을 새기고 7일째 되는 눈금에는 나날의 눈금보다 두 배로 길게, 달의 처음 눈금은 다시 주의 눈금보다 두 배로 길게 새겨 두었다. 이런 식의 달력, 즉 시간의 흐름을 요일, 달, 해에 맞추어 기록했던 것이다.
   다음에 기록해 두고 싶은 것은, 배에서 옮겨 온 많은 물건들 중에 그다지 값진 것은 아니나 유용성에 있어서는 딴 물건들 못지 않게 중요한 것들이 약간 있었다는 일이다. 그것은 펜․잉크․종이, 그리고 선장․항해사․포수․목수 등의 소지품이었던 약간의 작품과 자석 몇 개, 계측기, 나침반․망원경․해도․항해술에 관한 책 등이었는데, 그런 것들은 필요가 있건 없건 전부 한데 뭉쳐싸서 따로 두었다. 또 영국에서 보낸 내 짐속에서 딴 물건들과 함께 포장되어 있던 아주 고급스러운 성경책 세 권을 발견했다. 포르투갈어로 된 책도 몇 권인가 있었고, 또 그 외의 책들도 약간 있었다.   그것들은 전부 소중하게 챙겨 두었다. <중략>
   전술한 대로 펜과 잉크 그리고 종이를 발견하자 나는 이것을 소중하게 사용했다. 지금부터 보여 주게 될 것이지만 잉크가 떨어질 때까지 나는 엄밀하게 모든 사물을 계속 기록했다. 그러나 잉크가 다 떨어지자 그것마저 못하게 되고 말았다. 아무리 연구를 해 봐도 잉크를 만드는 일만은 불가능했던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그처럼 많은 물건을 끌어 모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갖추지 못한 것이 적지 않음을 알았다. 잉크의 결핍도 그 중의 한 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지만, 땅을 파거나 흙을 나르는 데 쓰는 삽․곡괭이 등과 바늘․실․속옷, 이런 것들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없어도 그럭저럭 견디어 나갈 만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연장이 부족했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해도 좀처럼 능률이 오르지 않았다. 나의 보잘 것 없는 울타리, 즉 주위를 둘러싼 오두막집을 완성하는 데만도 1년이란 세월이 걸렸으니까. 울타리에 쓴 나무는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 최대의 것을 사용했는데, 이것을 숲속에서 베어 넘어뜨리고 알맞게 깍아서 집에까지 옮겨오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 모른다. 어떤 때는 그 기둥감 한 개를 옮겨오는데 이틀이 걸린 때도 있었고, 그것을 땅 속에 처박는데 다시 하루가 걸리기도 했다. 기둥을 박는 데도 처음에는 무거운 나무를 썼으나, 나중에야 쇠지레 생각을 해내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을 사용해도 역시 기둥을 박는 일은 고되고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작업이 지겹다고 생각할 필요가 나에게 있었을까. 시간은 얼마든지 있는데, 그리고 나 자신이 예측한 범위에서도 이 작업이 끝나면 별달리 할 일도 없었던 것인데 식량을 구하러 섬 안을 찾아 다니는 일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나는 이제 겨우 내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 내가 빠져 있는 이 현실에 대하여 좀 더 진지하게 생각을 해 보았다. 우선 지금 상황을 정리하여 펜으로 적어 보았다. 그것은 뒤를 따르는 자를 위한다기보다는-나의 후속자 같은 것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오히려 이것저것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들로 인해서 괴롭기 짝이 없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 볼까 해서였다. 이성이 차차 우울을 눌러 주었기 때문에 될 수 있는 한 나 스스로 위안토록 노력하고, 자신의 상황을 더 나쁜 상황과 구별하는 하나의 기준을 삼고자, 나를 둘러싸고 있는 현상을 길(吉)과 흉(凶)의 두 가지로 나누어 대비해 보았다. 나는 그것을 극히 냉정하게, 그리고 회계장부에 있는 대차대조표처럼 내가 기쁘게 받아들이는 행운과 내가 당하고 있는 불행을 대조하는 식으로 써 본 것이다. <중략>  
  다음에는 내가 꼭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한 필수품, 특히 테이블과 의자를 만드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것은 테이블이나 의자 없이는 내가 이 세상에서 누리는 얼마 되지도 않는 즐거움조차 맛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을 쓴다든지 먹는다든지, 그 외 몇가지 일들은 테이블 없이는 곤란하다는 걸 다 알고 있으리라.
  그래서 일을 시작했던 것인데, 여기서 나는 다음과 같은 일도 말해 두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즉 이성이라는 것이 수학의 본질이요 원형이므로, 모든 일을 이성적으로 정리하고 조정하고 판단한다면 아무리 어렵고 복잡한 일이라도 끝내는 완수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지금까지 공작 기구를 손에 쥐어 본 일이 없었지만 그래도 세월이 흐르는 동안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일에 열중하며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결과, 마침내 나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이라면 무엇이든지 만들어 내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그것도 연장도 없이 때로는 손도끼만으로 오늘날까지 그 누구의 손에 의해서도 만들어진 일이 없을 것 같은 물건들을 수없이, 그리고 굉장한 노력을 기울여 만들어 냈다.
  예를 들면 두터운 판자가 필요한 경우, 나무를 베어 넘어뜨려서 내 앞에 가로 눕혀 놓고 도끼로 양쪽을 필요로 하는 두께가 될 때까지 깎아 내고도 손도끼로 곱게 마무리하는 그런 방법을 썼다. 하긴 이런 방법을 쓰다 보니 나무 한 개로 판자 한 장 밖에는 만들지 못했지만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참을 도리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내 시간이나 노력은 아낄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쓰건 별로 문제될 일은 아니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우선 테이블과 의자를 만들었는데 이것에는 배에서 가져온 널빤지를 사용했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방법에 의해 널빤지를 만들어 그것을 포개서 폭 1피트 반의 선반으로 꾸민 뒤 동굴 한쪽 벽에 걸어 보았다. 나의 공작도구, 못, 쇠붙이 등 그 위에 얹고 흩어져 있던 물건들을 제각기 일정한 자리에 배치해서 필요한 때에 언제든지 손쉽게 찾아낼 수 있도록 했다. 또 벽에다가 못을 박아서 총을 걸어 놓고 그 밖에 걸 수 있는 것은 모두 걸어 놓았다.
  고심한 결과 나의 동굴은, 보여 주지 못하는 것이 유감스럽기 그지 없지만, 언뜻 흝어보건대 마치 필수품을 넣어 놓은 금고 같은 꼴이 되었다. 모든 물건들은 손쉽게 찾아 쓸 수 있도록 정리되어 있었고, 그리고 모든 필수품이 풍부하게 저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바라 볼 때마다 만족감과 즐거움을 느끼곤 했다.
매일의 작업에 관한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부터이다. (대니얼 디포 『로빈슨 크루소』)

 

▣분석 & 해설▣

(가)에서 데카르트는 수학에서 사용하는 추리나 논증의 방법으로 인간이 알고자 하는 모든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예컨대 기하학에서도 그러한 논증을 한다. 기하학의 증명은 이미 누구나 알 수 있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 공리(公理)로부터 아직 진리인가, 아닌가 의심스러운 어떤 정리(定理)를 추리하는 과정을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추리와 논증을 통해 주어진 문제는 단 ‘하나의 대답’만이 있을 뿐이라고 칸트는 말하고 있다.
  (나)에는 파리 재소자(在所者)들의 일정(日程)이 제시되어 있다. 여기에는 아침 기상시간부터 시작하여 노동과 교육을 마치고 저녁에 취침에 들기까지의 일정이 빡빡하게 짜여 있다. 여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엄정한 시간의 구획과 절차라는 매커니즘일 것이다.
  (다)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무인도에 혼자 남게 된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다. 제시문에는 주인공이 섬에 도착하여 달력을 만들고 집을 짓고 가재도구를 만드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주인공은 펜과 잉크, 그리고 종이에 유달리 집착을 하고 있음을 본다. 제시문에 근거해 보건대, 이 필기구는 글을 쓴다는 그 이상의 의미를 함의(含意)하고 있다. 그것은 기록을 통해서 이성적 판단을 가다듬어 간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주인공이 가재도구를 만드는 작업에서 물리적 도구나 힘의 부족을 수학적 이성을 통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대목도 눈여겨 볼만하다.
  세 가지 제시문에는 이성적 존재자로서의 인간의 모습과 그것에 기반하고 있는 사회현상으로서의 합리주의가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다. 즉, (가)의 『방법서설』에서는 이성개념이 (나)에서는 이성적 사고에 바탕을 둔 사회제도로서의 합리주의가, (다)에서는 인간이란 것이 사회를 떠나서도 이성적 사고를 통해 집과 가재도구 등 문화와 제도를 형성해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이 드러나 있다고 볼 수 있다. 논제는 이와 같은 이성주의가 한국사회와 한국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쳐왔는지 논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20세기 초엽부터 한국은 이식문화(移植文化)라는 파행적인 방법으로 서구의 학문을 배우고 그 제도를 받아들였다.  특히 우리의 들은 서구의 ‘진짜이론’을 추수하기에 급급했고 일본으로 혹은 바다 건너 ‘종주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칸트주의자가 되어 돌아왔으며, 그럴 형편이 못되는 들은 ‘현해탄 컴플렉스’에 빠지거나 ‘엽전’의 처지를 자괴(自愧)해야 했다. (오늘날 한 해외 유학생의 고백, ‘오랜 외국 생활을 끝내고 오는 비행기 안에서 인식에 바쳐진 삶이 어떠한 것인지, 언어란 왜 있는지를 일깨워 준 독일어, 독일 지성인 문학의 결별이 서러워 몹시 울었다.’ <조혜정 , 『글 읽기와 삶 읽기』>는 말도 이전 들의 내면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어쨌든 우리의 들은 서구의 이성적․합리적 학문과 사고를 받아들였고, 그것은 20C이후 한국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문학 작품에서부터 나타났다. 장편 『무정』(1917)의 대단원 ‘삼랑진 수해’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자연의 폭력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벌벌 떨고만 있는 수해민들을 보며, 이형식은 세 처녀(선형, 영채, 병욱)을 앉혀놓고 ‘지진이 날 듯’ 부르짓지 않았던가? ‘저들을 어떻게 구해야 할까요? 과학! 과학!’ 그만큼 과학〔이성〕은 우리에게 절실한 것이었고, 따라서 (가) 제시문에 나오는 논증과 추리라는 이성을 배워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효과는 1970년대 ‘한강의 기적’으로 결실을 거두었다. ‘교육입국(敎育立國)’, ‘기술입국(技術立國)’이라는 슬로건은 서구적 이성의 동곡이음(同曲異音)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서구적 이성이 한국사회와 한국인에게 긍정적인 결과만 가져 온 것은 아니다. 예컨대 그것은 서구적 이성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동양적 사고의 덕목(德目)을 희생해야 했다.  (가)에 나타난 것처럼 서구적 이성은 ‘주어진 문제에 대한 하나의 해답’만을 요구한다. 이성은 수학적 도식 안에 갇힌 것이며, 동양적 사고 특유의 퍼지(puzzy:‘1’ 아니면 ‘2’ 라는 이항 대립이 아닌 유동적인) 한 사고방식을 잃게 했다. 그것은 사고의 경직성과 인간관계의 냉혹성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고 했을 때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제 인간 존재의 주인은 신이 아니라 바로 이성적으로 사유하는 그 자신이다. 따라서 인간은 인간을 구속하는 모든 불분명한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모든 것에 자신을 관철해야 한다. 인간은 세계의 주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성적 존재자인 인간은 다음과 같은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때가 왔다고 오늘날의 데카르트들[철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즉, ‘이제부터 우리는 자기의 유일한 존재만을 확신하는 이성적이기만 한 자아가 아니라 통째로 위협받는 종(種)으로서 인류 전체의 생명이 자기 활동의 원천임을 자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은 더 이상 고립적이고 자아 중심적인 욕망에 포로가 된 세계의 주인이어서는 안 된다. '나는 더불어 산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발상이 필요할 때이다.’( ‘이성은 계속 흔들릴 것인가’ 홍윤기)
  나무칼 차고 ‘쑥대머리’를 부르던 춘향이가 갇힌 감옥에 익숙했던 한국인들에게 (나)에 나타난 파리 소년감화원의 규칙적인 하루는 어쩌면 경이롭고 흠모할만한 대상이었는지 모른다. 사실 우리는 해방후 파리 소년감화원에 상응하는 서구의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였다. 프랑스의 경우도 이른바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 : 구체제, 프랑스혁명 전의 절대 군주제)시절에는 춘향이가 갇힌 감옥과 그 신체형(身體刑)이상의 ‘야만적인’제도를 갖고 있긴 했다.  
  (나)제시문은 본래는 ‘감옥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다. 여기에서 푸코는 국가권력의 가장 중요한 기구이자 장치로서의 감옥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는 프랑스에 있어서의 범법자에 대한 처벌양식의 변화에서 글을 시작하고 있다. 그것은, 앙시앵 레짐 시대의 ‘사지를 절단’하는 형벌로부터 18세기 후반의 이른바 인간적인 개량주의자들이 고안한 합리적인 법적제재로의 변화를 말한다.  그러나, 푸코는 감옥이라는 권력의 처벌수단이 어떻게 변모해 왔는지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감옥을 통해서 인간-신체에 관한 ‘정치적 기술론’이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외형적으로 감옥이 현대화되고, 형벌이 완화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죄수에 대한 권력의 인간적 처벌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권력의 전략이 바뀐 현상일 뿐이다.
  이 논제는 감옥의 역사나 정치권력의 유지수단으로서의 감옥에 대한 논의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논제는 이성주의적 사고방식과 여기에 기반하고 있는 제도의 문제라는 논점에 관한 것이다. (나)의 제시문에서 범법자는 하나의 사물처럼 대상화되어 있다. 격리수용된 감옥에서 엄격한 일과 시간표에 따라 움직이고 끊임없이 감시받는 죄수들은 자동인형처럼 메커니즘의 육체가 되어 길들여져 있다. 이 감옥의 일과가 계산적인 이성과 합리주의의 산물이라면, 이러한 제도가 사회전반의 집단으로 확산될 것임을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즉, 합리화라는 미명하에 사회구성원들은 공간적으로 격리될 뿐만 아니라, 개인의 신체에는 시간의 의미가 주입되어, 개인의 능력이 최대한 효과적이 되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현대사회에는 이성적 사고의 부산물인 관료제라는 조직이 있다.  관료제란 ‘모든 행위의 연속이 조직체의 목표에 기능적으로 연관되도록 명백히 규정된 활동 유형을 지닌, 공식적․합리적으로 조직된 사회구조’이다. 관료제는 현대사회에서 거대해 진 각 조직의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조직 내부에 상(上下)의 명확한 지휘계통과 그 지휘계통에 따른 조직성원 각자의 지위와 역할, 권한과 책임의 한계를 분명하게 규정한 계서적(階序的)인 피라미드(pyramid)형의 조직이다.  
  이러한 관료제는 근대화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 왔고, 특히 개발도상국의 경우에는 관료제가 근대화의 필연적인 요소로 인식되기도 했다.  우리 나라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관료제는 이른바 ‘관료주의’라는 역기능을 낳았다. 형식주의․획일주의․책임전가․독선적 권위주의․규칙만능주의․선례주의(先例主義)․분파주의․번문욕례(繁文褥禮, red-tape:번거로운 절차와 과정)등 한 마디로 비인간화된 병리현상(病理現象)을 드러내게 되었다.
  관료제는 좀 더 포괄적인 현상으로서 인간소외를 초래했다고 볼 수 있다. 조직의 효율성을 위한 규칙과 절차를 중시하여 업무의 분화가 세밀해지면, 성원 개인들은 자신이 하는 일과 자신이 속한 조직체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소외감을 느낀다. 즉 인간이 업무를 계획하고 이끌어가는 주체이기 보다는 주어진 규칙과 절차만 지키면 되는 객체로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실감할 수 밖에 없는 (다)제시문을 볼 때, 사회를 살아감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합리적인 제도 자체를 거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작은 정부’라는 말이 있다. 필요 이상으로 비대해진 조직을 구조적으로 축소조정하고, 제도에 대한 운영의 묘(妙)를 살리는 것이, 제도가 인간에게 주는 폐단을 최소화하는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에 이르러 인간의 이성에 대해서 만큼 찬사와 단죄가 교차한 것은 없다고 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이성(理性)’이라는 개념과 관련된 논제를 통해 조금은 알 수 있는 것처럼, 이성은 인간사회에 빛과 어둠의 양면적인 영향을 미쳐 왔다. 예컨대 장 프랑수아 료타르가 ‘이성=폭력’을 부르짖는 데 대해 위르겐 하버마스는 비합리주의와 신비주의야말로 폭력의 주범이라며 기술적․계산적 이성을 넘어 타인과의 의사소통과 연대 속에서 이성을 실현하자고 맞서고 있다. 이러한 학자들의 논쟁에 대해서도 논술을 통해 어느 한 쪽의 입장을 지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3. 이성과 자연

 

 

  ‘97 서울대 논술모의고사는 독일의 철학자 피히테(Johan Gottlieb Fichte, 1762~1814)의『인간의 소명』에서 발췌한 제시문으로 출제되었는데, 여기에는 ‘자연에 대해 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방식’의 하나가 서술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인간의 이성이 자연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에 대한 해석으로부터 논의를 전개할 수 있는 논제이다. 다음 그 내용을 살펴보자.

 

 

◈< 문제>◈ 
아래의 텍스트는 독일 철학자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1814)의 저서『인간의 소명』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이 글은 자연에 대해 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 방식의 하나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텍스트를 잘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텍스트
  (1) 노동자가 일을 마치고 자신의 피땀어린 노고의 결실들이 계속 영속되기를 기대하려 할 때, 적개심을 품은 듯한 날씨가 수 년에 걸쳐 신중히 마련해 온 것을 한순간에 파괴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 결과 부지런하고 사려 깊은 그 사람을, 그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기아와 빈곤 속에 내맡겨 버리는 일이 여전히 가끔 일어난다.

  (2) 홍수와 태풍과 화산이 전 국토를 피폐화시키고, 이성적인 정신의 숱한 각인을 담고 있는 작품들을 그 제작자와 함께 죽음과 파괴의 야만적인 혼란 속으로 휘몰아 버리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아직도 질병은 인간들을 때가 되지 않았는데도 무덤으로 낚아채 가고, 한창 기운이 왕성할 나이의 젊은이들과 어린 아이들 - 어린 아이의 생명은 공포 없이, 흔적없이 사라져 가고 있다 - 을 무덤 속으로 몰아넣는다.

  (3) 여전히 전염병은 번창하는 나라들을 휩쓸고 지나가, 소수의 남은 사람들을 고아로 만들어 버리고, 친숙해진 동료들의 보좌마저 앗아가 버려 홀로 남도록 만들어 버린다. 전염병은 인간의 피땀으로 일구어 놓은 땅을 미개지로 황폐화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못된 짓거리를 다하는 것 같다.

  (4) 사태는 이렇다. 그러나 언제나 이런 상태로 남아 있을 수는 없다. 이성의 각인을 지니고 있는 어떤 작품도, 그리고 이성의 위력을 확장시키기 위해 시도된 어떤 작품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냥 그렇게 없어져 버릴 수는 없다.

  (5) 예기치 않게 찾아드는 자연의 폭력이 이성에게 입히고 있는 그 희생은 적어도 자연의 폭력을 완화시키고 화해시켜 최대 한도로 줄여야 한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해를 끼치고 있는 자연의 힘을 항상 피해를 주는 차원에만 머물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힘은 그 실력 행사에서 스스로의 자제력을 원래부터 규정받고 있지 않지만, 이제부터 그것은 자신의 힘을 통해 영원히 소멸되도록 해야 한다.

  (6) 인간의 능력을 무력하게 무(無) 속으로 사라져 버리게 하는 자연적 폭력들, 즉 황폐화시키는 허리케인들, 지진들 그리고 화산들은 다른 것이 아니고 물질들의 마지막 발악이다. 그것들은 자신들의 충동에 따라 멋대로 행동한다. 그것들은 다른 것이 아니고 우리의 지구가 이제 비로소 스스로를 완성시키고 있는 그 마지막 몸부림침이다. 이 저항은 점차 약해질 것이고 마침내는 기진해 버릴 것이다.   왜냐 하면 법칙에 따른 진행 과정에서 그 힘을 충전시켜 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7) 지구의 형성은 마침내 완료되어야 하며, 우리에게 규정된 주거도 완성되어야 한다. 자연은 점차 그 규칙적인 발걸음을 확실하게 계산해 내어 숫자로 표기할 수 있는 정도까지 이르러야 하며, 자신의 힘이 자연의 힘을 지배하도록 규정되어 있는 능력 - 즉 인간의 능력 - 과 일정한 관계 속에 견지되도록 해야 한다.

  (8) 어느 정도 그러한 관계에 와 있는지, 그리고 합목적적인 자연의 형성이 이미 확고한 지반을 획득했는지 등은, 인간의 작품 자체가 그 작품의 단적인 존립과 그것의 제작자의 의도와는 무관한 그 작품의 영향력을 통해 다시 자연을 장악하여 자연 속에 생동하는 새로운 원칙을 정립해 놓는 데에 달려 있다.

  (9) 영원한 숲, 황야, 늪 등과 같은 땅을 개간해야 하고, 대기권을 살려야 하며 생기롭게 해줘야 한다.  정돈된 다양한 경작지는 생명력과 결실력을 온 세상에 확산시켜 주고, 태양은 자신의 가장 생동력 있는 광선을 건강하고 근면하고 예술감이 풍부한 민족이 숨쉬고 있는 그 대기 안에 가득 채워 넣어 준다.

  (10) 학문은 처음엔 위기에 몰리더라도 나중에는 깨어나서 좀 더 신중하게, 그리고 여유를 갖고 평온하게 요지부동의 자연 법칙들로 파고 들어야 하며, 이 자연의 그 모든 폭력을 개괄하고, 그 가능한 전개를 계산해 내야 한다. 즉 새로운 자연이 개념으로 형성되어 나와야 하고 생동적이고 활동적인 자연에 가깝게 자신을 밀착시켜, 그 발꿈치를 뒤좇아야 한다.

  (11) 그리고 이성이 자연으로부터 어렵게 획득해 낸 모든 인식은 시간의 경과와 함께 보존되어야 하며, 우리 인류 공동의 지성을 위한 새로운 인식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 이렇듯 우리는 자연을 갈수록 더욱더 간파할 수 있어야 하며, 자연의 가장 신비스러운 내면에 이르기까지 갈수록 더욱더 투명하게 만들어야 한다.

  (12) 발견을 통해 무장하고 깨우친 인간의 힘이 어려움 없이 이 자연을 지배해야 하며, 한번 이룩한 정복은 물론 계속 견지돼야 한다. 또한 점차 인간은 노동을 해야 할 필요가 갈수록 줄어들어야 하며, 그래서 인간의 육체가 자신의 발전과 형성과 건강을 위해 필요한만큼만 노동해야 한다. 노동은 이제 더 이상 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 하면 이성적인 존재는 짐꾼이 되도록 규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음>
  1) 위의 글을 600자 내외로 요약하시오.
  2) 저자가 주장하는 논지의 귀결을 간략하게 추론하고, 그 주장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논술문의 형식을 갖추어 1,200자 내외로 정리하시오.

 

 

▣분석 & 해설▣

  피히테는 독일 관념론의 거봉으로서, 칸트를 이어 받아 헤겔에의 길을 연 철학자이다.  특히 그는, 자신의 저서 『모든 지식학의 기초』(1794)를 중심으로 인간의 모든 인식을 기초지우려고 하는 ‘지식학’의 체계를 제시하고 있다.
  지식학은 인류가 그 자유를 자각해가는 역사를 철학적으로 재구성한다. 피히테는 지식학을 “인간정신의 실용적 역사”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그의 지식학의 구성에는 명백한 난점이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자연은 늘 부정되고 극복되어야 할 장애물에 불과하고, 인간과 자연은 영원히 대립한 채 있다. 제시문으로 주어진 『인간의 소명』(1800)에는 이러한 그의 관념이 잘 나타나 있다.  자연 재해와 같은 자연의 폭력이 인간을 기아와 빈곤 속으로 내몬다. 이때 인간의 이성은 ‘요지부동의 자연법칙’을 파고들어 자연의 가능한 전개를 계산해 내서 어려움없이 이 자연을 지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이성주의와 자연관은 물론 데카르트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오는 이성의 역사라는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논제는 저자의 주장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정리하라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이 오늘날 과학의 엄청난 진보를 가져와 준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갈릴레이(1564~1642)는 이성적 추리를 통해 ‘낙하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과학의 진보는 인간에게 유례없는 삶의 자유와 복지를 가져다 주었고 그것이 또한 역사의 진보로 이해되기도 했다.  그러나 20C에 들어서면서 이성과 과학은 그 폐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자연정복에 따른 생태계 파괴는 물론, 핵무기가 개발되고 전쟁이 자행되는 등 인간해방의 근거였던 이성과 과학이 이른바 ‘광기의 도구’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인간은 자기의 유일한 존재만을 확신하는 이성적인 자아로서 자연을 지배하려 했다. 이때 이성은 자연을 착취하는 기술로 바뀐다. 경제발전의 과정에서 우리 나라가 생태계 파괴라는 반대급부를 받은 사실도, 이 경우에 다름 아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성과 과학 그 자체의 덕목(德目)이 열어갈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것은 독단적인 이성의 의미를, 현대라는 상황에 맞게 재정립하는 데서부터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은 더 이상 고립적이고 자아중심적인 욕망에 포로가 된 ‘세계의 주인’이 아니라 ‘그 이성의 씀씀이가 휠씬 성숙한 책임있는 이웃’으로서 서로를 마주하는 도덕적 주체여야 한다” (홍윤기, 앞의 글)는 말을 새겨 들을 만 하다.

 


4. 합리성과 현대사회

 

◈< 문제>◈ 
<논제> 아래의 글 (다)는 현대 사회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합리성이 잘 드러난 예이다. (가)와 (나)를 참조하여 (다)에 나타난 합리성이 갖는 특성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현대 사회의 합리성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논술하시오.-2002 고려대/1,600자 안팎(±100자)-

  (가) 독일의 사회학자 베버는 서구 근대 사회의 진행 과정을 합리화의 과정으로 파악하고 있다. 베버에게서 합리화는 두 가지 차원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문화적 합리화이다. 이 경우 합리화는 탈마술화, 즉 미신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이성적인 사고가 확대되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하나는 사회적 합리화이다. 이것은 주어진 목적에 가장 적합한 수단을 선택하는 경향의 확대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자본주의 경제 구조와 관료적 근대 국가가 모두 이 합리화의 결과로 파악되고 있다. 합리화의 결과 근대 사회에서는 자율적인 인간과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직접적이고 자의적인 지배로부터 해방된 인간이 출현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합리화가 항상 긍정적인 측면만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 고등학교 교과서 『사회·문화』

 

  (나) 우리의 의지는 실제로 소망과 가치에 의해 이미 확정되어 있다. 그것은 오직 수단 선택 및 목표 설정 대안들의 측면에서만 더욱 상세하게 규정될 수 있다. 관건이 되는 것은 ― 자전거 수리이든 아니면 병의 치료이든 간에 ― 오직 적당한 기술과 돈을 마련하는 전략이며, 휴가 계획과 직업 선택을 위한 기획이다. 예를 들면 합리적 선택 이론의 형태가 그것이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의 물음이 실용적 과제들과 관련될 경우에는 효율성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관찰과 연구, 비교와 계산이 적절하다.
― 위르겐 하버마스, 『담론윤리의 해명』

 

  (다) 맥도날드는 들어오는 것에서부터 나가는 것에 이르기까지 속도를 높이기 위한 모든 것을 갖추었다. 인접한 곳에 설치된 주차장은 고객이 차를 쉽게 댈 수 있도록 해 준다. 계산대까지는 몇 발자국이 채 안 되며, 가끔 줄을 서기도 하지만 음식은 대체로 빨리 주문되고 전달되고 계산된다. 그리고 매우 제한된 메뉴는 먹는 사람의 선택을 쉽게 하여, 다른 식당에서의 다양한 선택과 대조를 이룬다. 음식을 받으면 식탁까지 몇 걸음 걸어가서는 곧바로 식사를 할 수 있다. 식사를 마치면 머뭇거릴 여지가 없기에 고객은 남은 휴지, 스티로폼, 플라스틱 쓰레기를 모아 가까운 휴지통에 버리고 자동차로 돌아가서는 다음 활동(대개의 경우 맥도날드화된) 장소로 이동한다.
   근래에 패스트푸드점 경영자들은 이 모든 과정에 있어서 운전자용 창구의 설치가 좀더 효율적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맥도날드는 최초의 운전자용 창구를 1975년 오클라호마 시에 설치했고, 4년 만에 전체 점포의 절반 정도에 설치하였다. 주차를 하고, 카운터까지 걸어가서 줄을 서고 주문하고 계산하고, 식탁으로 음식을 가져가서 식사하고, 또 식사 후 쓰레기를 휴지통에 버려야 하는 귀찮고 비효율적인 과정을 거치는 대신, 운전자용 창구에서는 고객이 창구에 차를 세우고(물론 차도 줄을 서야 할 때가 있다) 주문과 계산을 마친 후, 음식을 받는 대로 다음 목적지로 향하면 된다. 보다 효율적이기를 원한다면 운전하면서 먹으면 된다. 운전자용 창구는 패스트푸드점의 입장에서도 효율적이다.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주차 공간, 식탁, 종업원의 필요성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더욱이 고객이 쓰레기를 가지고 떠나기 때문에 별도의 쓰레기통을 설치하거나 정기적으로 쓰레기통을 비우는 사람을 고용할 필요도 없다.
― 조지 리처,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

 

▣분석 & 해설▣
  논제의 내용에 따라 우선 (다)의 글을 보자. 이 글은 세계적인 프랜차이즈 음식점인 맥도날드 가게에서 일어나고 있는 효율성, 그 가운데서도 속도를 높이기 위한 효율성에 관한 내용이다. 그것은 고객들이 가게에 들어서서 가능한 빨리 제한된 메뉴에서 음식을 주문하고 계산을 하고 또 가능한 빨리 음식을 먹고 가게를 나가게 하도록 고안된 합리적이 단순화된 라인에 관한 내용이다. 게다가 근래에는 고객들이 가게에 들어올 필요 없이 차 안에서 음식을 주문해서 각자 갈 길을 서둘러 갈 수 있게 한 운전자용 창구(‘Mcdrive'라고 명명된 것)도 있다.
  맥도날드 가게의 이 효율성을 (가)에 나타난 개념으로 바꾸어 말하면 ’합리성‘, 그 가운데서도 ‘사회적 합리화’(혹은 ‘도구적 합리성). 이 사회적 합리화(사회적 합리성)는 주어진 목적에 가장 적합한 수단을 선택하는 경향을 확대하는 것이며, 자본주의 경제 구조와 관료적 근대 국가가 모두 이 합리화의 결과로 파악되고 있음을 (가)는 말하고 있다.
잠깐 여기서 맥도날드에 대한 다음 글을 읽어보자.

 

  ‘(······)크록[맥도날드의 프랜차이즈화를 이끈 레이 크록Ray Kroc을 가리킴]은 새로운 것을 발명하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그는 맥도날드 형제의 특정 제품과 기술에 다른 프랜차이즈의 원리, 관료제, 과학적 원리, 그리고 조립 라인 등과 결합시켰다. 그의 천재성은 이미 잘 알려진 개념 및 기술들을 가져와 패스트푸드업에 영향을 끼친 점과 여기에 그의 야망을 더해 맥도날드를 프랜차이화함으로써 전국적, 나아가 전세계적 기업으로 바꾸어 놓은 데 있다. 따라서 맥도날드와 맥도날드화(McDonaldization)는 새로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20세기 전반에 걸쳐 진행된 일련의 합리화 과정의 절정을 의미하는 것이다.’(조지 리처 지음/김종덕 옮김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 시유시, 74~75쪽)

 

  이와 같은 내용을 두루 참고해 보면, (가)와 (나)글, 특히 (가)에서 말하는 사회적 합리화와 (다)의 맥도날드와는 밀접한 연관성을 역사적으로 가지고 있음을 알 게 된다. 논제는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한 설명을 바탕으로 현대 사회의 합리성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논술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니까 논술의 내용은 맥도날드 가게의 효율성, 혹은 합리성 이야기를 일반화하여 현대 사회 전반의 합리성에 대한 논의로 확장되어야 한다.
  한 사회가 합리화하는 것에는 물론 장점과 단점이 있다. 그 장점은 (가)에서 말하는 사회적 합리화의 측면이라 하겠다.  예컨대 관료제는 현대사회에서 거대해진 각 조직의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합리성을 대표하는 제도이다.  관료제는 ‘모든 행위의 연속이 조직체의 목표에 기능적으로 연관되도록 명백히 규정된 활동영역을 지닌, 공식적 합리적으로 조직된 사회구조’ 그 자체인데. 이 관료제가 복잡하고 거대한 현대사회가 효율적으로 작동되도록 한 수단이 되어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합리화가 얼마나 인간 개개인을 구속하고 비인간화시키는가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합리적 절차 속에서 개인은 일을 계획하고 향유하는 주체이기보다는 주어진 규칙과 절차를 지켜야 하는 하나의 객체로 전락한다. 잠깐 맥도날드 가게로 돌아가 보자. 맥도날도로 대표되는 잘나가는 프랜차이즈 음식점은 늘 손님들로 북적댄다. 고객들은 마치 빨리 먹고 나가라는 컨셉으로 만든 듯한 조악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파트타임 종업원이 내놓는 햄버거나 피자를 쫓기듯 입에 구겨 넣고 나오곤 한다. 이는 제도적으로 합리성을 추구하는 맥도날드화가 결국에는 비인간화를 초래한 결과라 할 것이다.  그뿐인가. 패스트푸드점들은 하나같이 파트타임 종업원들을 많이 고용하고 있는데, 이는 물론 식사제공의 라인이 단순하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이들 종업원들이 일 자체에 자부심이 있을 리 만무하다. 또한 시간당 수당을 계산하는 이들에게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받겠다는 기대 또한 할 수 없을 것이다.  맥도날드화가 사회전반의 합리화 현상을 상징한다고 할 때, 우리는 맥도날드화, 관료화, 합리화의 틈바구니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자존심과 여유를 잃고 일상을 보내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 아닐까? 부시맨이라는 영화에는 사막에 사는 부시맨이 문명인이 비행기에서 떨어뜨린 빈 코카콜라병을 신주처럼 모시는 장면이 나온다.  코카콜라는 프랜차이즈 가게의  햄버거 옆에 늘 놓여 있다.  한 세기전 서구의 종교를 고등종교로 받아들였던 우리가, 이제 미국의 패스트푸드를 새로운 고등 식품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게다가 세상은 갈수록 빠른 것을 원하고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도 모든 일에 필요이상의 속도와 페이스가 유지되기를 바라고 있다.  햄버거를 우겨넣으며 코카콜라를 서둘러 들이키는 청소년들에게 ‘남으로 창을’낸 어느 시인(김상용)이 자신의 밭에 자라고 있는 ‘강냉이’가 익기를 기다렸다가 와서 먹으란다면 그들은 먹으러 갈까?
  장단점은 이상에서 살펴 본 것처럼 사회적 합리화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가)에서 말하는 문화적 합리화는 어떨까? 이 문화적 합리화란 (가)에 따르면 탈마술화, 즉 미신적 사고에서 벗어나 이성적 사고가 확대되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문화적 합리화란 (가)글에 의지하건대, 인간 개개인이 이성적 사고방식을 계발해 가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인간의 이성적 사고는 예컨대 근대 과학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이 이성적 사고가 합리적 제도를 만들고, 무기를 만들어 전쟁을 일으켰다는 점에서는 부정적이다. (※이성적 사고가 가진 더 이상의 장단점에 대해서는 앞의 ‘2. 이성과 사회’에서 논한 것을 참고할 것.)
  이렇게 보면 문화적 합리화와 사회적 합리화는 별개의 물건이 아니다. 서로 긴밀하게 원인과 인과로 맞물린 개념이라고 할까. 어쨌든 어떤 현상이든 빛과 그늘에서 예외일 수가 없고, 문제는 인간이 이 양면적인 것들을 어떻게 현실적으로 유익하고 윤리적으로 도리에 맞게 사용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참고한 책

․자클린 뤼스 (황수원 역)  『지식과 권력』 예하
․조혜정 『글 읽기와 삶 읽기』 도서출판 또 하나의 문화
․홍윤기 '이성은 계속 흔들릴 것인가?' 중앙일보
․미셀 푸코 (오생근 역)  『감시와 처벌』 나남출판
·조지 리처(김종덕 역)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시유시

·피히테(황문수옮김) 『독일국민에게 고함』범우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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