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은 논술에서 어떻게 다루어지나요?

자연과학은 논술에서 어떻게 다루어지나요?

작성일 2009.12.17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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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활동 후원제도를 통해 <지식활동대>로 선발되신 gsygy님께 드리는 미션 질문입니다.

 


자연과학은 논술에서 어떻게 다루어지나요?

gsygy님, 누구나 이해하기 쉽고 정성스러운 답변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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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과학과

 사회

 1. 과학시대의 개막

 2. 과학의 사회적 영향과 문제점

 3. 근대 과학의 성격 : 과학과 기술의 결합

 4. 근대 이후 과학기술의 발전과 생명공학

 5. 과학의 도덕성 문제

자연과

과학이론

 1. 자연·카오스(chaos)

 2. 과학이론의 본질

 3. 산업사회와 엔트로피(entropy)


 

 

          Ⅰ.과학과 사회

 

1. 과학시대의 개막

 

  모든 것의 정중앙에 태양이 자리잡고 있다. 도대체 누가 어떤 이유로, 전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전 안에, 우주전체를 단번에 볼 수 있는 장소이며 또한 가장 좋은 자리에 이 거대한 불을 놓았을까? (중략)  이렇듯 태양은 제왕의 자리에 앉아서, 정말로 자신의 주위를 둘러싼 별들을 통치하고 있다. (중략) 그러면서 지구는 태양에 의해 회임(懷妊)하고 해마다 열매를 맺는 것이다. - 코페르니쿠스 『천체의 궤도들에 관하여』에서 -

 

 

  신학과 과학사이의 최초의 본격적이고 가장 주목할만한 싸움은 현재 우리가 태양계라고 부르는 것의 중심이 지구냐 아니면 태양이냐에 관한 천문학적 논쟁이었다.  당시까지의 정통이론은 프톨레미우스의 지구 중심설이었다. 이에 따르면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정지해 있고 태양, 달, 행성 및 각 항성계가 각각 고유의 위치에서 그 주위를 돌고 있다. 그런데 새로운 이론, 즉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설에 의하면, 지구는 가만히 있기는 커녕 이중 운동을 하는데, 그것은 하루에 한 번 자전하고 또 일년에 한 번 태양의 주위를 공전한다는 것이다.
  이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기독교 신학자들의 거센 반발을 받았다. 구약 및 신약 성서에 의하면 인간은 매우 중요한 존재이다. 신이 우주를 창조하고 그 우주의 중심에 놓은 것이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은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지구를 우주의 중심적 위치에서부터 변방으로 끌어내렸던 것이다. 이것은 신학자들에게 인간이 우주의 목적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의 이 이론을 단지 가설로서 제안한 것일 뿐이라고 발뺌함으로써 공식적인 비난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갈릴레이는 이 이론을 이어받아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에 유리한 논증을 하였다. 그 결과 그는 두 번씩이나 종교재판소에 출두하게 되었고,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신념과는 달리 지동설을 부인하는 발언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지동설을 주장하였다 하여 교회로부터 파문 당한 갈릴레이는, 파문 당한지 359년만인 1992년에야 비로소 카톨릭 교회에서 공식 복권되었다.
  갈릴레이가 천문학에 관한 학설을 발표하던 당시 지동설은 대세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소수의견의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반대로는 더욱 강해졌다. 여기서, 우리는 천동설과 지동설의 충돌이 단순한 종교와 과학간의 대립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삶과 세계에 대한 패러다임(paradigm)의 대전환임을 알아야겠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말은, 법정을 걸어나오던 갈릴레이가 그렇게 중얼거렸든 않았든, 당시의 거부할 수 없는 과학의 시대를 예고한 것이다. 그것은 중세의 세계관과의 결별이며, 과학의 시대의 시작으로서, 존재의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이거나 신학적(神學的)인 자연관과 우주관, 세계관에서 벗어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인식과 사유의 시대를 연 것에 다름 아니다.  철학사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시대는 베이컨(Bacon, F. : 1561~1626)이 ‘지식은 힘(Scientia est Potentia)’이라 외치며 과학과 기술의 결합을 강조하였고, 한편으로 데카르트(Decartes, R., 1596~1650)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고 복창하며, 이성적 사유의 원리를 탐구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리하여 과학(이성)은 신의 섭리에 의해 가치가 부여되었던 세계를 인간 지식에 의해 파악할 수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해방과 진보를 약속하는 휴머니즘 실현의 길을 열고자 했다. 그렇다면 과연 과학이 인간성의 실현을 가져다주었는가?    문제는 20세기에 있어 과학에 대해서만큼 찬사와 단죄가 교차한 것이 없었다는 점이다. 과학은 인간해방과 진보를 가져다 주었지만, 그에 상응하는 것, 반대급부도 가져다 주었다.

 


2. 과학의 사회적 영향과 문제점

 

  과학의 발전이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묻는 논제는 모의고사나 실전 논술고사에서 자주 출제되고 있다. 1999년 고려대의 논술고사를 예를 들어보자.

 

 

◈< 문제>◈
※ 다음은 베를톨트 브레히트의 희곡 ‘갈릴레이의 생애’에서 뽑은 글이다. 글을 읽고 논제에 답하시오.
      

   (갈릴레이와 사제는 교황청의 지원 아래 천문학을 함께 연구하는 사람들이다. 목성의 위성과 금성의 위상에 관한 새로운 지식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당시의 통념을 깨뜨리는 것이었다.)
  사제 : 갈릴레이 선생님, 사흘 밤 동안 저는 한 잠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읽어 온 교황청의 법령과 제 눈으로 본 목성의 위성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아침 일찍  미사를 드리고 선생님을 방문하기로 결심했지요.
  갈릴레이 : 목성에는 위성이 없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서인가요?
  사제 : 아닙니다. 저는 법령의 지혜를 알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법령은 억제를 모르는 지나친 연구 안에 도사린, 인류에 대한 위험을 드러내 보여주었지요. 그래서 저는 천문학을 그만두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한 천문학자로 하여금 특정한 이론을 확장하는 일에서 등을 돌리게 만든 동기만은  선생님께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갈릴레이 : 그런 동기야 나도 익히 알고 있다고 말씀드려야겠소.
  사제 : 선생님의 노여움은 이해합니다. 교회의 저 엄청난 권력수단을 염두에 두고 계시는 것이겠죠.
  갈릴레이 : 맘놓고 고문 기구라고 말하시오.
  사제 : 그렇지만 저는 다른 이유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죄송하지만 제 개인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저는 캄파냐에 있는 농부의 아들로 자라났지요. 그곳 농부들은 소박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올리  브 나무에 관해서는 모르는 게 없지만 그 밖에는 아는 게 별로 없지요. 금성의 위성을 관측하면 서 저는, 누이동생들이랑 난롯가에 낮아 치즈 요리 를 먹는 저의 부모님을 눈앞에 떠올렸습니다.    수백 년 동안 연기로 새까맣게 그을린 그들 머리 위의 대들보며 밭일로 쭈글주글해진 그들의 손,  그 손에 쥐어진 숟가락까지 똑똑히 그릴 수 있습니다.
   그들이 비록 복된 삶을 누리진 못하지만, 그들의 불행 속에서도 일정한 질서가 감추어져 있습니        다. 땀방울을 떨어뜨리며 바구니를 끌고 돌길을 올라가는 힘, 어린애를 낳는 힘, 그리고 먹는 기 운까지, 그들은 어디서 그런 힘을 길어내는 지 아십니까? 땅을 볼 때, 해마다 새로이 푸르러지는  나무들과 작은 교회를 볼 때, 성경말씀에 귀기울일 때, 그들은 이 세계가 영원하고 필연적임을 느끼면서 힘을 얻습니다. 배려하면서 걱정스러운 듯 보살피는 하나님의 시선이 머리 위에 머물러 있 다는 확신이 그들에게 있는 겁니다. 또한 그들은 세계극장이 그들을 중심으로 세워져 있어서 크든 작든 맡을 수 있는 역할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만일 제가 그들이 서 있는 곳은 허공에서 다른 별 주위를 끊임없이 돌고 있는 한낱 작은 불덩이  위라고, 수많은 별들 중의 하나, 실로 아무 것도 아닌 별 위라고 말한다면, 저의 가족들은 뭐라고 할까요? ‘그러니까 우리를 굽어보는 눈길은 없구나’하고 그들은 말하겠지요. ‘우리는 무식하고 늙고  착취당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해야 한단 말인가! 주위를 도는 별을 갖지도 못하고 전혀 홀로 서 있지 못한 작은 별 위에서 비참하고 세속적인 일 외에는 아무도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부과 하지 않았단 말인가! 우리의 곤궁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이렇게 말하겠지요? 제가 교황청의 법령에서 일종의 어머니같은 고귀한 긍휼을, 위대한 자비심을 읽어낸 연유를 이제야 아시겠습니까?
  갈릴레이 : 자비심이라! 보아하니 당신은, ‘그들이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포도주는 떨어졌고 그들의 입술은 말랐다.’ 그런데도 그분더러는 ‘신부의 법의에 입맞춤이나 해라’이런 생각이시군요. 그렇다    면 도대체 왜 그들에겐 아무 것도 없습니까? 왜 이 땅의 질서는 텅 빈 금고(金庫)의 질서뿐이며,  이 땅의 필연성은 죽도록 일하는 것뿐이오? 무성한 포도원 사이에서, 밀밭을 바로 옆에 두고서!   자비심 깊은 예수님의 대리인이 스페인과 독일에서 벌이고 있는 전쟁 비용은 당신의 캄파냐 농부들이 치르고 있습니다. 왜 그 대리인이 지구를 우주의 중심점에다 갖다놓을까요? 베드로의 교권이  지구의 중심에 있도록 하기 위해서죠. 문제는 베드로의 교권이오, 역시 당신 말도 옳아요. 문제는 별들이 아니라 캄파냐의 농부들이니까, 그런데 당신은 시대가 도금해 놓은 그럴듯한 현상을 들고 내게 온 것이오.
   진주조개가 어떻게 진주를 만드는지 아시오? 목숨을 위협하는 병을 앓으면서 참을 수 없는 이물질, 이를테면 모래알 같은 것을 점액낭 속에 품고 있으면서 진주를 만드는 것이라오. 진주가 형 성되는 동안 진주조개는 거의 죽어간단 말입니다. 빌어먹을 놈의 진주 같으니라고. 나는 차라리 건강한 굴조개를 택하겠어요. 이것 보시오. 미덕이란 곤궁과 묶여있는 게 아니오. 당신의 농부들이 유복하고 행복하다면 유복과 행복의 미덕을 펼칠 수 있을 것이오. 피폐한 자들의 이러한 미덕은  바로 황폐한 밭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나는 그런 미덕을 사양하겠소. 보시오, 내가 만들어낸 새로운 양수기가 농부들의 우스꽝스럽고 초인적인 고통보다는 더 많은 기적을 행할 수 있단 말이오.  내가 당신의 농부들을 속여야 하겠소?
  사제 : (매우 흥분하여) 우리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더 없이 숭고한 동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불행한 자 들의 평안이지요.
  갈릴레이 : 벨라로민 추기경의 마부가 오늘 아침 선물로 여기에 갖다놓은 첼리니의 시계를 좀 보시겠  소? 여보시오. 예를 들어 내가 당신의 선량한 부모님께 영혼의 평안을 드리는 값으로 교황청에서 는 내게 포도주를 제공하고 있어요. 그것은 당신의 부모님이, 잘 아시다시피 하나님과 같은 형상대 로 만들어진 그 얼굴에 땀을 흘리며 짜낸 바로 그 포도주란 말이오. 혹시나 내가 침묵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것은 확실히 천박한 용기 때문일거요. 나 자신의 안락한 생활, 박해를 받지 않는 것 과 같은 이유 말이오.
  사제 : 갈릴레이 선생님, 저는 성직자입니다.
  갈릴레이 : 과학자이기도 하지요.

 논제 : 예시문에 나타난 사제와 갈릴레이의 견해를 밝히고 이러한 견해가 현대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논술하시오.
< 작성요령 >
(1) 논제와 성명은 쓰지 말 것.
(2) 분량은 띄어쓰기를 포함하여 1천 6백자 안팎(±1백자)이 되게 할 것.

 


 ▣분석 & 해설▣
   사제는 성직자와 과학자의 입장 사이에서 고뇌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는 과학의 발전이 소박한 인간의 삶에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함을 역설한다. 사람들은 당장 가난하지만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살고 있으며, 자신들이 우주의 중심에 살고 있다는 데 보상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만약 과학이 그들의 믿음을 허물어 버린다면, 그들은 상실감에 빠지고 의지할 곳 없는 불행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갈릴레이는 가난이 미덕이 아님을 역설한다. 우주의 중심에 있는 것은 농부들이 아니라 교권이다. 그는 신의 섭리가 사람들의 가난한 현실을 은폐하는 교황청의 지배수단이 되고 있음을 통찰하고 있다. 그는 성경말씀이 아닌 과학기술[양수기]이 그들을 노동의 고역에서 벗어나게 해 줄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
  <제시문>의 논점은 ‘과학의 역할과 문제점’에 모아진다. 과학이 16세기 이후 중세기의 종교적 도그마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 자연의 과학적 이해를 통해 인간의 복지를 가져온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때까지 성경은 신의 의지이자 인간이 지켜야 할 도덕률로서, 삶의 모든 가치관이 성경에서 연역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도덕률로서의 종교가, 한때 지배권력의 수단이 되고 있었음도 익히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다. 마르크스가 종교를 민중에게 던지는 ‘아편’이라 말한 것도 이러한 역사적 맥락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도 있다.
  예수의 탄생은 억눌린 자의 해방이라는 의미가 부여된다.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하였을 때, 그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이유를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누가복음 1장 51절~53절)’
  예수는 평생의 대부분을 갈릴리 지방에서 보냈다. 갈리리 지방은 유대나라 중에서도 특히 차별받고,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방이었다. 당시 유대는 로마지배 아래 있었다. 그러나 로마 총독은 반란의 진압을 목적으로 한 군대의 관리나 세금의 징수, 그리고 반로마 정치범에 대한 재판 등만 관장했고 나머지는 최고법정에 위임하며 유태인의 자치에 맡겼다. 최고법정은 로마정부와 긴밀히 협력하는 대토지 소유자이며, 대행상인 사두가이파와 도시 소시민 대표인 바리사이파로 구성되었다. 그 외에 압도적인 다수인, 소농민, 소작인, 날품팔이 노동자, 매음녀, 노예, 불구자, 병자 등은 참정권이 없었으며, 차별받고 인권이 인정되지 않는, 소위 그 당시 말하던 ‘땅의 백성(암하레쯔)’이었다. 예수는 이 ‘땅의 백성’의 벗이 되어 평생을 바친 것이다. 예수가 전한 하나님의 복음은 현세의 행복과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육신을 가진 인간은 빵이 있어야 하며 몸이 건강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는 갈릴리 호수 옆에 있는 산에 모인 4천명 이상 되는 군중에게 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를 가지고 이들을 배불리 먹이는 기적을 보였다.
  예수의 ‘기적’에 사실성을 부여하자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행동 가운데서 서민의 입장에 선 초기 기독교의 면모를 확인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후, 기독교는 ‘역사적 과오’를 범했다. 기독교는 예수와 초기 교회가 그토록 사랑하고 도왔던 서민계층을 등한히 하고 중세 봉건적 지배계급을 비호하여, 결국 지배계층의 이데올로기가 된 것이다.  갈릴레이가 경계한 권력수단으로서의 교회는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후 프로테스탄트가 자본가 계급을 비호하고 노동자 계급을 등한히 한 것도 사실이다. 마르크스의 종교관은 여기에서 탄생한 것이다. 마르크스와 레닌은 기독교를, 지배계급의 착취에 대한 민중의 각성과 분노를 마취시키는 ‘아편’이라고 규탄하면서, 자기네야말로 억눌린 민중의 벗임을 자처하고 나섰다. 이런 점에서 공산주의는 일종의 종교였던 셈이다. 공산주의는 그 주의에 대한 맹신적 천국사상과, 타주의에 대한 무조건적인 증오와 배척이라는 점에서, 어떤 종교 신앙보다도 강력한 종교적 믿음에 기반하고 있다.
  갈릴레이는 종교가 지배권력이 되고 있음을 통찰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대한 믿음을 수단으로 하여 민중의 현실적 고통을 초월적인 방법을 통해 무마시켜, 결국은 지배자의 통치를 용이하게 하는 이데올로기를 갈릴레이는 문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과학자로서 교권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고 세계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통해 대중으로 하여금 ‘가난의 미덕’이 아닌 ‘행복의 미덕’을 펼칠 수 있게 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다.  결국 갈릴레이의 믿음과 실천은 과학혁명의 도화선이 되고, 이후 과학기술은 인류에게 자유와 복지를 가져다 주었다. 

 

 
3. 근대 과학의 성격 : 과학과 기술의 결합

 

   ‘아는 것은 힘’이라는 베이컨(1561~1626)의 말은 ‘과학은 자연에 대해 기술적 위력을 발휘한다.’는 말로 풀이된다. 여기서 우리는 과학과 기술이 별개가 아닌, 상호 밀접히 결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학과 기술의 역사적인 결합의 결과 오늘의 우리는  ‘과학기술’이라는 하나의 통합된 용어에 익숙해져 있다.  근대 과학의 본질은 베이컨을 떠나 논할 수 없다. 영국의 제임스 1세의 대법관이었던 그는 과학의 역사적 의의 및 인간 생활에 있어서의 과학의 역할을 인식하고 있던 최초의 사람이었다. 실험과학의 장(場)을 연 그는 과학의 일반적 방법론을 분석, 정의하고, 또 그 응용방법을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과학적 운용에 자극과 방향을 제시하려 했다. 베이컨은 아리스토텔레스류의 사변(思辨)철학의 전통을 ‘불모’의 것이라 믿고 있었다. 반면 당시의 ‘장인적(匠人的) 전통’도 과학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다. 전자는 실제 경험과의 접촉이 없고, 후자는 이론적 토대가 없기 때문이다. 베이컨은 과학적 원리와 기술적 발명이 결합하는날 ‘인류의 결핍과 비참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발명’을 낳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과학과 기술을 진보시키는 새로운 방법으로 맨 먼저 필요한 것은 새로운 원리, 과정, 사실을 탐구하는 일이라고 베이컨은 주장했다. 그러한 원리와 사실은 장인적 기술과 실험적 과학에서 이끌어낼 수가 있다. 그러한 것들이 이해되면 기술과 과학에 있어 새로운 응용을 낳을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원리가 일상적인 수공업과정 속에 숨겨져 있는데, 그것들이야말로 과학적 지식의 귀중한 원천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러한 과정은 자연물의 형태나 성질을 다양하게 바꾸는 적극적인 실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흥미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원리적 접근을 할 때, 자연은 숨은 작용을 드러내어 사람들이 주목할 수 있도록 만든다.  
   베이컨의 과학관은 근대 과학기술의 속성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그에게 있어 과학기술은 자연의 본질과 현상에 대한 탐구에 있었고, 이는 궁극적으로 과학기술의 이용을 통해 인간생활의 이익을 도모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그가 바라는 바, 과학기술이 인간사회에 가져다 준 혜택은 더 이상 나열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과학은 산업혁명을 가져와 인간의 절대적 궁핍을 해결해 주었으며, 또한 의학의 발전으로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주었다.

 


4. 근대 이후 과학기술의 발전과 생명공학

 

  근대 이후 과학의 연구는 질적․양적인 면에서 놀라운 정도로 발전해 왔으며, 새로운 과학기술이 쏟아져 나와서 인간의 생활양식을 급격하게 변화시켰다. 산업의 측면에서는 온갖 종류의 제품이 생산되고, 기존 제품의 생산과정이 혁신되었다. 농업이나 수산업과 같은 제1차 산업에서도 여러 가지 혁신이 이루어졌으며,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이나 물품의 범위가 확대되었다. 과학기술은 또한 의학의 발달을 가져와, 인간의 질병을 치료해 주고 건강을 증진시켰으며, 수명의 연장에 기여하였다. 교통통신의 발달이란 면에서도, 과학기술이 가져 온 교통통신수단의 발달로 막대한 양의 상품 유통과 인간의 교류 범위가 확대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자 통신과 자료처리 능력이 혁신되고, 대중매체가 확산되어 우리의 생활에 더욱 새로운 미래상이 열리고 이제 인간은 우주로 진출할 수 있는 가능성까지 보여 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과학 발달의 총아는 정보기술과 생명공학 분야라 할 수 있다. 전자(前者)의 경우 전자계산기술을 사용한 자료처리능력이 발전하여, 이제는 ‘컴퓨터혁명’이나 ‘컴퓨토피아(computopia)란 말이 새삼스럽지 않게 되었다. 후자의 경우 바야흐로 인간게놈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를 통해 인간 생명의 비밀을 완전히 ‘해독’하려고 하는 정도에 이르렀다. 인간이 동물처럼 자연에 육체적으로 맞부딪히며 살아가는 육체적 기능이 퇴화하고, 대신 이성이 ‘과도하게 발달’(하이젠베르크)하여 과학을 발전시키고, 과학을 통해 육체적 수고를 덜 수만 있다면, 과학적으로 사고하고, 과학을 최대한 이용하고, 그리고 과학기술을 끊임없이 발전시키면 그만이다. 그러나 과학기술이 숭배의 대상이 되고, 인간을 육체적․정신적으로 해방시켜 줄 구원자와 같은 것으로 화하면 인간은 그리스 신화의 이카루스처럼 기술의 궁극적 약속에 눈이 멀어 결국 파멸의 위험까지 감수하게 된다.  밀랍(蜜蠟)으로 붙인 날개를 단 이카루스는 땅의 중력에 붙들려 있을 수밖에 없는 운명으로부터 비상하여 완전한 해방을 맞았다고 생각한 순간, 태양열에 밀납이 녹아 자신의 본래 자리로 추락하지 않았던가.
  이제 과학기술은 지구상의 모든 생물과 무생물을 무차별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했고 과학기술의 발달은 자연 전체의 변화를 불가피하게 만들게 되었다. 이와 같이 자연에 대한 무한한 힘을 제공해 줄 것 같은 과학기술의 유혹에 저항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이 점에서 인간의 과학기술에 대한 열광은 운명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학은 미세 세계에서부터 거대 우주공간에 이르기까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실험 대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 자신도 그 대상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이미 과학기술은 우주공간을 활보하고 있다. 과학기술은 극미의 물질 세계에 침투하여 핵발전과 핵무기를 내놓았고, 사이버 공간 속의 가상 사회를 건설했다. 이제 과학기술이 모든 생물의 중심으로 여겨져 온 인간 속으로 들어가 인간을 마음대로 조작하고 변형할 수 있게 되면, 자연에 대한 과학기술의 지배는 ‘완성’되는 셈이다.
  그러나 바로 이 완성의 순간, 인간이 진화의 ‘지배자’가 되는 그 순간에 인간은 지금까지 간직해 온 자신의 정체를 상실하고, 그럼으로써 지구상에서 사라져버릴지도 모를 위험에 처하게 된다. 현재 인간은 지구 도처에서 과학기술의 완성을 위해 돌진하고 있다. 인간을 복제할 수 있는 기술은 이미 수년 전에 등장했고 호기심과 명예욕을 억제하지 못한 몇몇 과학기술자들은 많은 사람들의 공포와 우려에도 불구하고 인간 복제를 시도하고 있다. 복제 기술의 노하우는 널리 알려진 것이고, 복제에 필요한 난자는 인공수정 센터에서 손쉽게 얻을 수 있으니 기술자들이 마음만 먹으면 인간복제는 금방 현실로 나타낼 수 있다.
  다행인지, 1998년에 있었던 ‘복제양 돌리’소동은 세계각처에서 복제인간의 탄생가능성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키면서 유전공학 전반에 대한 사회적 성찰을 이끌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당장 전 세계의 들은 한 목소리로 인간복제의 가능성과 그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윤리적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종교권과 정치권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만큼 신속하게 이 가시화된 위험에 대응하고 있다.  로마 교황청은 ‘결혼과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침해를 근거로 생명복제 연구에 대해 강력한 반대를 천명하였고, 다른 종교 단체들로 앞다투어 생명복제를 ‘신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여 규탄하였다. 또한 미국의 대통령은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면서 ‘국가생명윤리 자문위원회’에 대책 마련을 지시하였으며, 다른 선진국들도 생명복제 연구에 대한 연구비 지원 중단을 선언하고 나섰다. 그러나 유전공학을 ‘21세기 최고의 고부가가치를 갖는 첨단산업’, ‘선진국 도약 첨단산업’등의 경제적 측면에서 평가하여, 유전공학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무색하게 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각국 정부는 유전공학 연구에 대한 규제조치들을 내놓으면서도 국가전략 산업으로 이에 대한 집중 투자를 유도하는 모순적인 정책을 구사한다.  우리 정부도 1992년부터 유전공학을 국가 선도기술 개발사업(G-7 project)의 과제로 삼아 집중 지원하고 있다.
  여하간에 위의 ‘선언적(宣言的)’인 조치들은 분명히 복제인간의 탄생이 우리의 삶에 미칠 영향에 대한 사람들의 불안과 당혹스러움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현실화된 ‘복제양 돌리’소동은 유전공학의 발전이 사회와 자연에 미치는 부정적 결과에 대한 표피적인 인식과 대응에 그친 단막극으로 끝나는 인상을 준다. 더욱이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정부차원에서 대외적으로 선언한 것과는 달리 이면에서는 유전공학 연구에 지원비를 투자하고 있다는 사실은, 유전공학이 가져오는 폐단을 아직은 실감하고 있지 못한 결과일 것이다. 포유류 복제는 현재 유전공학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연구의 폭과 깊이에 비추어 볼 때,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모든 생물을 대상으로 무차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유전자 조작과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는 인간게놈프로젝트는 인류의 미래에 엄청난 위협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인간게놈프로젝트는 1990년 미국 국립보건연구소(NIH)와 에너지부의 지원으로 수립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인간의 DNA에 들어 있는 모든 유전형질의 기제를 해독하고 통제하는 작업이 본격화되고 있다. 조만간 유전자 지도가 완성되면 왜, 어떻게 질병이 생겨나고 노화가 진행되며 사망에 이르게 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에 따라 생명과학은 전염병, 에이즈를 비롯하여 각종 질병과 정신질환, 그리고 암, 치매, 비만, 고혈압, 당뇨병, 심장병, 혈우병 등 유전병의 발병 유전자를 밝혀내어 그 예방과 치료까지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치명적인 질병을 대상으로 도입된 유전자 치료가 지능, 성격, 취향, 체격, 외모 등 ‘치명적이지 않은 인간의 정신적, 신체적 특성’에 관계되는 유전자에까지 확대되는 사태를 우려하고 있다.  인류가 세포들을 마음대로 이합집산시킬 수 있고, 유전자들을 분리 합성시킬 수 있으며, 세포 본래의 지시를 제어해서 인류가 직접 고안한 유전지시를 내릴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인류가 자기자신을 재창조해 내는, 즉 인간의 의지, 희망, 꿈을 반영하는 새로운 모습의 이상적 인간을 제조해 내는 방법을 개발하지 못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유전자 치료는 건강, 노화방지, 생명연장에 대한 생물학적 욕구의 충족을 넘어서 사회적 욕구의 충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전체 유전자가 해독되어 완전한 유전자 청사진이 제공될 경우 요즈음 유행하는 태아의 성감별 정도가 아니라 배아(embryo)의 유전자에 대한 감별이 자행될 가능성이 크다. 임의적으로 생식세포, 배단계에서 유전자를 조작하여 지능과 신체적 특성을 개선하는 인간의 주문생산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인류의 미래는 경제력에 좌우되는 유전자 조작을 통해 ‘우월한 집단’과 ‘그렇지 못한 집단’으로 나뉠지도 모른다.  이런 우려는 첨단공학 기업들이 대학과 연구소에 대한 연구비 지원을 통해 유전공학의 발전방향을 경제적으로 효용성이 높은 방향으로 조절하고 있기 때문에 야기된다. 그 결과 인간의 건강, 질병과 관련된 과학적 연구의 형태 속에 합목적적 이윤추구가 점점 더 긴밀하게 녹아들면서 생명과학은 유전공학 산업과 긴밀한 유대 속에서 시장경제의 원리에 의해 지배되어 가고 있다. 따라서 인간개량에 대한 우려가 현실로 드러날 개연성은 언제나 있는 것이다.

 


5. 과학의 도덕성 문제

 

  여기서 우리는 과학의 도덕성, 혹은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게 된다. 혹자는 과학의 지식이 ‘가치 중립적’이라는 사실을 들어 과학자가 자신의 연구결과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하기도 한다.
  인류의 문명사는 자연 속에 내팽개쳐진 고립무원의 인간이 이성능력에 의지하여 자연을 효과적으로 지배해왔던 과정의 역사라 할 것이다.  그런데 자연을 지배하는 또 다른 힘이 있다고 믿었던 전근대인과는 달리, 근대인들은 자연에 작용하는 어떤 외적인 원인을 설정하지 않고도 자연 그 자체를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설명하고 재구성할 수 있다고 보았던 신념에서 근대과학의 정신이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과학은 철저히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이고 엄밀한 방법을 신봉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자연연구에는 인간의 어떤 사적인 관심이나 외적인 영향도 개입할 수 없다고 믿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과학의 도덕성’이란 말은 어쩌면 모순으로 들리는 개념을 접합시킨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과학은 대량자본의 뒷받침 없이는 절대 발전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현대과학은 여러 과학 분야가 대단한 변화를 겪어 ‘거대과학(big science)'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연구개발은 많은 인원과 비싼 설비를 요구한다. 이것은 이제 연구의 방향과 자금에 대해서도 어려운 선택을 해야함을 의미한다. 연구에 막대한 비용을 필요로 하고 연구 규모도 커져서 과학자는 기관의 통제를 받으며 연구에 전념해야 한다. 정부도 점차 이 계획에 개입해 이제는 정치적 요소가 가장 순수한 과학연구에서조차도 결정권을 가지게 되었다. 과학이 사업화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과학자의 전문분야는 오직 인간 지식을 증진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을지라도, 연구 자금이 정부나 기업에 의해 과학자들 모르게 군, 산업, 의료분야 등에 지원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과학자는 이런 조건하에서 연구를 해야할지 말아야할지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다. ‘프랑켄슈타인 이미지’는 이런 점에서 경계해야 하는 부정적인 과학자상(像)이다. 국가나 기업의 지원을 받은 연구를 수행할 경우, 물론 양심적인 학자도 있겠지만, 자신의 연구가 사회에 끼칠 영향을 고려하지 않고 권력과 이익을 추구하는 ‘프랑켄슈타인’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로 볼 때도, 특히 현대 과학은 정부나 기업의 대규모 자금지원에 따라 이루어져 왔다. 앞서 유전공학이 ‘국가전략 산업’으로 지원된 것도 그 중의 하나다. 이 경우 과학 연구 자체에 이미 기업의 이해관계나 정부의 정책 이데올로기에 따른 사용방향이 정해져 있다. 이런 경향은 2차대전 중 미국의 ‘맨해튼 계획’(1943년)에서 본격화되었다. 맨해튼 계획은 비밀리에 원자탄을 만들려는 군사 계획으로 그 예산에 있어서도 20억달러라는 유례 없는 막대한 자금이 투입됐다. 과학자들은 국가적 목표를 위해 동원되었으며, 그들의 연구에는 이미 국가 이데올로기에 따른 원자탄의 사용이 전제되어 있었다. 이 계획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오펜하이머가 미국이 결국 원자탄을 사용했을 때 엄청난 후회를 했으며, 이후 반핵운동에 일생을 바쳤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제 과학자들은 알프레드 노벨처럼 혼자서 연구하고 싶은 분야를 스스로 결정해서 하기보다는 국가의 인력수급 계획에 따라 대량으로 양산되었으며, 그 많은 과학자들이 국가의 필요성에 따라 큰 연구의 극히 작은 일부분을 떠맡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 사실은 과학자가 정부의 정책을 수용하여 연구할 뿐, 개인적으로는 과학의 사용방향 대해 무기력해 질 우려가 있음을 말한다. 이 때 과학자 개개인의 각성과 비판적 태도가 더욱 절실해 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신의 연구결과에 대해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이 책임은 개인적, 집단적, 그리고 사회적 차원에서 질 수 있다.
  우선 과학자 개인의 차원에서 볼 때 책임은 개인의 양심과 관련을 갖는다. 예컨대 과학자가 연구 과정에서 유독물질을 외부로 배출할 수밖에 없다면, 그는 유독물질을 모았다가, 정화처리를 하여 배출할 수도 있다. 둘째, 과학자 집단이 사회적 책임을 느끼고, 과학활동의 바람직한 방향과  결과에 대해서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 특히 오늘날 과학자들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국가나 기업의 지원에 따라 연구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지원주체의 이해관계에 따라 연구를 해야 하게 된다. 이 때 특정 과학자가 잘못된 연구방향에 비판을 할 경우, 불이익을 당하거나 해고될 우려도 있을 것이다. 이 때 그의 비판에 동조하고 지원하는 과학자 집단이 있다면, 과학자 개인은 양심에 따라 비판적 견해를 자유롭게 개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비판적 과학자 집단은 세계적 차원으로 확대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이른바 과학자의 책임론, 즉 그의 연구가 가져올 사회적 결과에 대해서는 과학자 개인(집단)의 양심에 맡긴다는 것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반성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과연 우리는 과학자들의 연구를 그들의 양심에만 맡긴 채 안심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오늘날 유전공학에서 인간복제를 염려하는 사람이 ‘양심적인 과학자라면 그런 반인간적인 연구는 안 할 것’이라고 ‘희망’하고 있을 수만 있겠는가? 더욱이 국가적, 기업적 차원에서 광범위한 유전자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과학자 개인의 양심이 작용하기 힘든 경우도 많아졌다. 이 때 필요한 것이 과학자 집단 외부의 감시와 그것을 통한 여론의 조성이다.
  이미 거세게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종교계나 비판적 집단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비판이 과학에 대한 교양이 부실한 중구난방의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우선 그러한 비판은 설득력이 없고, 결국 지속적인 사회적 공감대도 형성하기 어렵다. 따라서 과학연구에 대한 감시기능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인문학과 자연과학 모두를 깊이 이해할 줄 아는 지성인이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그러한 소양을 갖춘 감시자를 찾기는 매우 어려운 형편이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교육풍토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선 중․고등학교부터 문과․이과로 나누기 시작해서, 대학에 입학하면 학생들을 서로 넘나들 필요가 없는 ‘무지한 전문가’로 양성해 놓는다. 과학의 발달과 함께 앞으로 과학연구의 감시문제는 더욱 절실해질 것이며, 결국 이 기능은 담당하게 될 바람직한 , 그 저변이 장기적으로 확충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끝으로 과학의 사회적 책임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교훈이 될만한 한 사람의 노력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 장(章)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그는 1932년에 「불확정성 원리」로 노벨상을 수상했던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W․K․Heigenberg : 1901~1976)이다. 그의 저서 『부분과 전체』는 ‘과학이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과학자의 고뇌로 일관되고 있다. 우선 ‘부분과 전체’라고 하는 책이름을 통해서, 그의 과학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오늘날 과학자들이 각자 자신의 분야라는 ‘부분’만 보고, 과학과 연관된 사회전체를 보지 못함을 지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도대로 이 책은 ‘과학과 종교’, ‘과학과 철학’, ‘과학과 정치’ 등 과학이 인접 학문 혹은, 사회일반과 맺고 있는 전체적인 맥락에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그가 책의 서문에서 말한 것처럼 이 책에는 ‘인간적이고 철학적이며 정치적인 문제들이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자연과학이 이와 같은 일반적인 문제들과 분리되어서는 성립되기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나타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물리학자인 그가 몸소 체험하고 도전했던 사실의 생생한 기록(대화체)이라는 점에서, 과학의 사회적 악용과 관련하여 오늘날 과학자들은  물론 모든 지성인들에게 크나큰 교훈을 준다.
  하이젠베르크가 가장 고뇌한 것은 자신이 직․간접으로 관여하기도 했던 원자폭탄개발에 대한 문제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류에게 미치는 영향, 과학자의 책임에 관한 문제였다고 하겠다. 그의 고뇌는 1939년, 미국 시카고 대학의 교수로 있었던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페르미와의 토론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발발을 앞두고 미국을 방문한 하이젠베르크에게 페르미는 미국에 머물 것을 간곡히 권했다. 하이젠베르크는 강압적인 나치 정권 밑에서 신음하고 있던 학자였고, 더욱이 누구든 독일이 전쟁에 이길 승산이 없음을 알고 있었으므로, 페르미는 그렇게 만류를 한 것이다. 그러나 하이젠베르크는 페르미의 만류를 뿌리치고 조국 독일로 마치 ‘순교자’처럼 돌아갔다. 그리고 그는 조국 독일에 끝까지 남아서 원자력의 무기로서의 개발을 저지하려고 했다. 인류전체라는 ‘컨텍스트’를 항상 머리에 넣고 있는 하이젠베르크는 미국이 원자탄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했다는 소식을 듣고 ‘25년이라는 긴 세월을 통하여 우리가 심혈을 기울이던 원자물리학의 발전이 지금 10만명을 훨씬 넘는 인간의 죽음의 원인이 될 수밖에 없는 엄연한 사실과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자책하고 있다.  
  종전(終戰)후에 독일이 다시 핵무장을 하려고 했을 때도, 하이젠베르크는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과학자 모임인 「괴팅텐 18인회」를 결성하여, 신문지상에 반대성명을 공표하기도 하였다. 그러자 당시 수상 아데나워는 각료 입각까지 요청하며 하이젠베르크를 회유했지만 그는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가 전화통화를 통해 아데나워와 벌이는 노기를 띤 설전(舌戰)은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이 얼마나 절실한 것임을 웅변으로 말해 주고 있다. 하이젠베르크는 정작 자신이 과학자이면서도 때로 과학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과학을 냉철하게 바라보는 인문적(人文的)인 지성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의식 있는 과학자 개인 그리고 양심적 과학자 집단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과학을 외부에서 보기도 하는 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한 사람이었다. 그의 노력과는 달리, 미국이 원자탄을 개발하여 투하하는 일이 벌어진 것은 과학이 정치 이데올로기에 좌우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과학의 사회적 악용을 막기 위해서는, 과학자 개인과 집단의 양심, 그리고 사회 일반 의 감시뿐만이 아니라, 국가권력의 도덕성이 총체적으로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  참고한 책
    。 스티븐 에프 메이슨(박성래 역)   『과학의 역사 I』까치
    。 노진철 <유전공학의 사회학적 의미> 『계간 철학과 현실』 ‘98겨울호
    。 L. 스티븐슨 외 (이상빈 역) 『과학의 양심선언』10101
    。 W.K. 하이젠베르크(김용준 역) 『부분과 전체』 지식산업사

 

 

 

 

 

 

 

 

Ⅱ.자연과 과학이론

 

 

   제비는 물을 차고 기러기는 무리져서 거지 중천(中天)에 높이 떠서 두 나라 훨씬 펴고, 펄펄 백운간(白雲間)에 노피 떠서 천리강산(千里江山) 머나먼 길을 어이갈꼬 슬피 운다  원산(遠山)은 첩첩(疊疊), 태산(泰山)은 주춤, 기암(奇巖)은 층층(層層), 장송(長松)은 락락(落落), 에이 구부러져 광풍(狂風)에 흥(興)겨워 우줄우줄 춤을 춘다. 층암절벽상(層巖絶壁上)에  폭포수(瀑布水)는 콸콸,  수정렴(水晶簾) 드리운 듯,  이 골 물이 주루룩, 저 골 물이 콸콸,  열의 열골 물이 한데 합수(合水)하야  천방벼 지방져 소쿠라지고 펑퍼져, 넌출지고 방울져 저 건너 병풍석(屛風石)으로 으르릉 콸콸 흐르는 물결이  은옥(銀玉)같이 흩어지니.
- 작자 미상 『유산가(遊山歌)』에서 -

 

  

1. 자연․카오스(chaos)

 

   혼돈(chaos)이론은 흐르는 물이나 기후와 같은 커다란 계(係)의 작용을 설명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뉴턴으로부터 꽃피우기 시작한 물리학은 최근까지도 규칙적인 운동을 하는 계만을 연구대상으로 생각하여 왔고, 불규칙한 운동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아 왔다. 예를 들어 유체(기체와 액체를 아울러 이르는 말)의 난류현상(turbulence : 유체흐름의 한 종류․불규칙하게 움직이면서 서로 섞이는 흐름)을 뉴턴은 어디까지 설명할 수 있을까?
   뉴턴이 남긴 지적 유산은 우주가 탄생한 시점부터 작동을 시작해, 그 이후 충실한 기계처럼 미리 정해준 홈을 따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작동해 온 시계장치 우주라는 상(像)이다. 그것은 완전히 결정론적인 시계, 우연성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그래서 그 미래가 현재에 의해 완벽하게 결정된다는 세계관이다. 이러한 결정론은 18세기 후반의 프랑스의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인 라플라스(pirrre Laplce : 1749 - 1827)의 ‘신의 계산기’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그는 어떤 순간에 우주에 있는 모든 입자들의 위치와 속도를 알 수 있다면 우주를 기술하는 방정식으로부터, 그 운동 방정식을 풀면, 미래의 모든 시점에 있어서 그 물질의 위치와 속도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고 하였다. 불규칙해 보이는 운동은 우리가 계(係)의 운동방정식과 초기조건을 모르기 때문이지 물리학이 더 발전하면 이러한 운동도 결국 방정식의 규칙운동의 일부분이고, 따라서 태양계의 운동과 같이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고 믿었다. (여기서 태양계의 운동은 뉴턴의 만유 인력의 법칙에 의한 태양계에 있어서 별들간의 상호작용에 대한 설명을 말한다.)
   그러나 라플라스가 말한 방정식에 의한 예측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왜 그런가? 요점은 우리가 그 계(係)의 초기상태를 절대로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물리적 계를 대상으로 지금까지 이루어진 가장 정확한 측정도 고작 소수점 이하 10 또는 12자리에 불과했다. 우리가 무한히 정확하게, 소수점 이하 무한한 자리까지 측정을 계속할 수 있다면 라플라스의 주장은 옳은 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그렇게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가령 수도꼭지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을 생각해 보자. 처음 3개의 물방울이 떨어지는 시간 간격을 소수점이하 10자리의 정확도를 알고 있다고 하자. 그러면 다음 물방울이 떨어지는 시간간격은 소수점 이하 9자리까지 예측할 수 있다.   그 다음 물방울은 소수점 이하 8자리,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매단계마다 오차는 10배씩 늘어나고, 미래 방향으로 10단계가 지나면 그 다음 물방울이 얼마 후 떨어질 지에 대해서는 전혀 예측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오차의 증폭이야말로 라플라스의 완전한 결정론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논리적 틈새인 셈이다. 완벽한 측정이 불가능한 한 아무리 작은 오차도 같은 결과를 초래한다. 가령 소수점 이하 1백자리까지 물방울 시간 간격을 측정했다 하더라도 결국 우리의 예견은 1백번째 물방울부터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런 현상을 ‘초기 조건에 대한 민감성(sensitivity to initial conditions)’, 좀더 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한다면 ‘나비효과(the butterfly effect)’라고 한다. (동경에 있는 나비가 날개를 치면 한달 후에 그 영향으로 플로리다에서 허리케인이 발생한다.)
   이 현상은 행동의 고도의 불규칙성과 뗄 수 없이 민감하게 연결되어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규칙적인 것은 예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초기 조건에 대한 민감성은 그 움직임을 예측 불가능한 - 따라서 불규칙한 - 무엇으로 바꾸어 놓는다. 이처럼 초기 조건에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는 계를 혼돈계(chaos system)라고 한다. 자연은 이와 같은 혼돈계가 더욱 풍성하며, 이 혼돈계에 리듬이 있고 그 리듬에 감정을 이입하고 흥(興)이 나는 존재가 우리 인간이다.
   뉴턴의 시계같은 우주관념이나 라플라스의 신의 계산기 관념은 뉴턴의 만유인력법칙에 의한 태양계에 있어서 별들간의 상호작용에 대한 설명을 통하여 입증할 수 있다. 물론 태양계만 하더라도 그 복잡성 때문에 오늘날 발달된 컴퓨터의 고속 계산력을 빌리지 않고서는 그 중력의 상호작용을 충분히 해명할 수 없다고 한다. 라플라스의 말이 함축하는 바는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으나 분명한 것은 우주에는 질서정연한 보편법칙이 존재하며 그 법칙의 초기 조건만 알면 우주 전체를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라플라스만의 생각이 아니라 모든 과학자들의 공통적인 견해다. 그러므로 『혼돈(chaos)』의 저자인 글라이크(James Galeick)는, 라플라스의 이 낙관적인 생각은 아이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나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를 알고 있는 현대인에게 웃음거리로 보이겠지만, 실은 현대 과학의 대부분이 오로지 라플라스의 꿈을 추종하여 온 것이라고 부연하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혼돈계’의 ‘난류현상’의 사례에서 본 바와 같이 역학계를 구성하는 부분들 중 독립하여 운동하는 것들은 각각 하나의 변수이며 또한 각각의 자유도를 갖고 있어 위상공간 내에 새로운 별개의 차원을 갖는 것이다, 폭포의 낙하에서 일어나는 난류의 소용돌이나 폭풍우를 동반한 난기류의 소용돌이에서 나타나는 자유분방한 자연의 모습은 그것이 무한한 자유도를 갖는 계인 만큼 그 위상공간은 무한한 차원을 갖게 되는 것이다. 소용돌이 치는 물의 분자와 기체분자 하나하나가 각각 독립된 다른 궤도를 따라 운동할 때, 그 하나하나를 다 임의적으로 계산한다는 것은 전통적인 선형방식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비록 유체의 비선형 방정식을 사용하더라도, 다시 말해서 세계 최고의 속도를 자랑하는 슈퍼컴퓨터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단지 1 제곱센티미터의 난류를, 그것도 겨우 2,3초내에 일어나는 유체를 정확히 측정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현대 과학은 앞서 사례로 든 라플라스의 꿈을 통해 본 것처럼, 이러한 혼돈의 자연에서도 어떤 보편 법칙을 찾아내는 것을 추구해마지 않았으며, 그러한 노력은 다양한 과학 이론으로 정립되어 가고 있다.

-이상, 스튜어트『자연의 수학적 본성』동아출판사 141~165에서 주로 정보를 얻었음.

 

 

2. 과학이론의 본질

 

   과학이론과 관련된 논제는 다양한 각도에서 출제되고 있다. 이러한 논제는 크게 다음 두 방향이 지배적이었다. 첫째는 과학원리의 성격 자체에 중심을 둔 논제이다. 예컨대, 과학이론에 상응하는 것이 실제 자연계에 존재하느냐, 아니면 과학이론은 자연현상을 체계적으로 분류하는 도구일 뿐이냐? (’98 고대 자연계열 모의) 과학이론이 만들어지는 경로를 구체적 사례를 통해 설명할 수 있는가? (’98 고대 자연계열)  실제 적용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상화된 모델과 그에 따르는 과학이론은 왜 필요한가? (’97 고대 자연계열 기출문제)  자연과학의 지식은 객관적인가? (’97 서강대 기출문제) , 과학법칙에 있어 수학의 역할은 무엇인가? (’98 이대 자연계열)  과학자의 발견과 발명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97 이화여대 자연계열) 등이 대표적이다. 두 번째는 특정한 과학법칙을 주어진 현실에 연계․적용시키는 논제이다.  예컨대 과학법칙을 원용하여 현실의 어떤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안을 제시할 수 있는가? (’97 , ’98 이대 자연계열), 과학혁명이라고 부를만한 요소를 특정시기 현실에서 논할 수 있는가? (’98 한양대 자연계열) 등이 대표적인다.
   논제의 다양한 접근방식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은 있다. 그것은 ‘과학원리 - 구체적 사례 적용’이라는 점이다. 이는 교과과정에서 배운 과학의 기본방법과 원리를 단순 암기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현장적인 사례를 통해 설명하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고등학교 교육의 정상화에 기여하려는 취지라 보면 될 것이다. 앞에 예로 든 카오스 이론을 자연현상과 연관시켜 설명해 보는 것도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이러한 논제 가운데 대표적인 사례만 골라  살펴보기로 하자.

   ’98 고려대(자연계열 모의고사)에서는 과학이론의 본질에 관한 질문을 하고 있다. 과학이론이 자연계의 실제와 대응하느냐, 아니면 자연계를 분류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느냐 하는 물음이다. 이 논제는 학생들이 학교에서 무심코 배우고 외워왔던 과학법칙 혹은 과학공식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유도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학생들이 잘 알고 있는 몇가지 과학공식을 그것이 설명하고 있는 실제 자연현상과 대응시켜 본다면, 논의를 충분히 펼칠 수 있는 문제이다. 예컨대, 낙하법칙(S = ½gt², V = gt)이 실제 자연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우주에서 일어나는 낙하현상의 일부분의 설명에 불과한지에 대한 성찰로부터 이 문제의 논의의 핵심을 잡을 수도 있다. 논제를 직접 읽어보자.

 

 ◈< 문제>◈

 <관점 1> 

  과학이론은 실제로 존재하는 자연계를 설명하고 예측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따라서 과   학이론은 자연계를 제대로 설명하는가 혹은 그렇지 못한가에 따라 맞는 이론이 아니면 틀린 이론인 것이다. 자연계를 설명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이론적 실재(理論的 實在)’를 상정한다. 예를 들어 모 든 물질이 원자로 이루어졌다는 가정을 하면 자연현상을 잘 설명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책상’개념이나 ‘의자’개념에 대응하는 물체가 객관 세계에 존재하듯이, ‘원자’와 같은 이론적인 실재      에도 그 대응물이 자연계에 실제로 존재한다고 본다.

 

<관점 2>

  과학이론은 그 자체로서 맞거나 틀리다고 단정할 수 없다. 과학이론이란 단지 우리가 경험  한 자연현상을 분류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과학이론의 의의는 자연현상들을 체계적으로 분류 하고, 이들 사이에서 논리적인 연관관계를 찾아내어 일관성 있는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데에 있다. 과학이론은 이러한 목적에 유용할 때에만 받아들여질 수 있으며, 따라서 과학이론은 단지 가설에 불과하거나 한시적인 진리일 뿐이다. 과학이론의 가치는 자연현상을 체계적으로 분류하는 유용성이라는 기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문제◎
위의 예시문을 참고하여, 다음을 논제로 삼아 논술하시오.
논제 : 과학의 특성에 대한 성찰에 입각하여, 과학이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논술하라.

※ 유의사항
1.  구체적인 예를 들 것.
2.  논제와 성명은 쓰지 말 것.
3.  글의 길이는 빈 칸을 포함하여 1,600자 안팎이 되게 할 것.
4.  예시문 속의 문장을 그대로 쓰지 말 것.
5.  수험생 개인의 가치관은 원칙적으로 평가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분석 & 해설▣
   <관점 1>은 과학이론이 실제로 존재하는 자연계와 바로 대응한다는 것이고, <관점 2>는 과학이론이 단지 자연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편의적 도구라는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관점 1>의 내용에 익숙한 사람들은 <관점 2>의 내용을 의외로 받이들일지도 모른다.   과학이론이 실재(實在)와 대응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그러나 과학이론에 대한 이러한 논란은 그간에 많이 일어난 것이다. 논란은 특히 현대 물리학 이론이 가지고 있는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과학 특히 물리학은 인간의 감각을 통해 인식될 수 있는 물질세계에 대해 가장 합리적이고 신뢰할만한 지식을 제공하는 학문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현대 물리학 그 중에서도 양자역학이 완성된 이래 물리학이 보여주는 자연상과 관련하여 매우 특이한 형태의 문제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것은 곧 물리학이 자연의 실상을 밝혀내는데 어떤 본질적인 제약을 지닌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이다. 예컨대 물리학자들은 현재 초끈이론(superstring Theory)에 ‘매우 흥분’하고 있는데, 이 이론은 우리가 소립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실제는 끈으로 된 작은 고리의 여기(Exoitatian)나 진동이라고 주장한다. 이 끈들은 너무 작기 때문에 관찰할 수 없다. 그러면 그것들은 ‘실체’일까, 아니면 단지 이론적 구조일 뿐일까? 이러한 문제는 현대 물리학(특히 양자역학) 이론 자체의 성격이면서, 근원적으로는 철학적․인식론적 성격의 문제라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논술은 어떤 논제이든 이와 같은 광범위한 문제의 작은 한 가닥을 이루고 있다. 물론 논제는 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 논제의 각도를 가능한 한정해 주고 있다. 그러나 같은 논제라도 그 논제를 얼마나 풍요롭고 창의력있게 풀어나갈 수 있는가 하는 관건 중의 하나는, 그 논제와 관련된 배경지식이라 할 수 있다.

 

 


2 -1. 과학이론의 ‘실재론’과 ‘도구론’

  결론적으로 말해서 현대 물리학 이후 특히 논란이 되는 과학이론의 본질에 대해서는 대개 두 가지 관점이 있다. 그 하나는 <관점 1>에 나타난 것처럼, 과학이론이 자연계와 대응한다는 이른바 실재론(realism)이고, 다른 하나는 <관점 2>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과학이론이 자연계를 분류하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라는 이른바 도구론(Instrumentalism)이다. 먼저 실재론은 우리가 가장 익숙해져 있는 과학이론의 성격이다. 이는 뉴턴류(類)의 고전 역학의 특수성을 무의식적으로 일반화하는 데서 온 결과라 할 수 있다. 고전 역학의 입장에서는 서술세계[이론․이론적 실재]는 현실세계[자연계]를 단순히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 본다. 말을 바꾸면, ‘상태’[이론]가 ‘사건’[자연계]을 일의적(一意的)으로 대표하는 것이다. 뉴턴류의 물리학에서, ‘원자’와 같은 이론적 실재에도 그 대응물이 자연계에 실제로 존재한다고 본 이유는, 이러한 물리학이 대상으로 하고 있는 이른바 ‘물질주의’ 때문이다. 물질주의는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5세기 데모크리투스(Democritos)는 모든 물질이 아주 작아 파괴될 수 없는 단위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하고, 이 단위를 원자(Atom)라고 불렀다. 크기나 모양 등의 고정된 특징을 가진 원자 그 자체는 불변하지만 그들은 공간에서 움직일 수 있고 여러 방법으로 결합될 수 있어서 원자로 이루어져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물체들은 변화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영구성과 불안정성이 조화될 수 있고, 세상의 모든 변화는 공간 속에 존재하는 원자들의 재결합에 의한 것으로 설명될 수 있었다. 이것이 곧 물질주의 사상의 시작이다. 
  물질주의는 뉴턴(Isaac Newton)으로 이어진다. 뉴턴은 저서 『원리론(principia)』에서 그의 유명한 운동법칙을 기술하였다. 그 이전의 고대 그리스 원자론자들처럼, 뉴턴은 물질을 수동적이고 관성적인 것으로 여겼다. ‘관성(Inertia)'은 그의 이론 세계에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뉴턴의 법칙에 의하면 물체는 멈춰 있을 경우, 다른 외부의 힘이 작용하기 전까지는 멈춰 있어야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만약 물체가 움직이고 있다면,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그 물체는 같은 속력과 같은 방향으로 계속 움직여야 한다. 따라서 물질은 완전히 수동적인 것이다. 이에 관해서 뉴턴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물질은 딱딱하고, 질량이 있고, 투과될 수 없으며 움직일 수 있는 입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뉴턴과 그의 동시대인들에게는, 일상에서의 물체와 그 본질이 된다고 생각되는 기본 구성 입자들 간에는 차이가 없었다. (기본입자들이 투과될 수 없다는 특성은 제외). 실재론의 근거가 여기에 있다.
  도구론은 앞에서 잠깐 소개한 현대 물리학의 특성과 관련되어 있다. 물리이론과 물리적 실재와의 관계는 20세기초 양자이론이 처음으로 등장했을 때부터 많은 관심과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초기에는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실체가 입자적 성격을 가졌는가 파동적 성격을 가졌는가 하는 것이 커다란 문제로 대두했으며, 특히 이것이 입자와 파동 양쪽의 성질을 함께 지닌다고 하는 이른바 ‘입자-파동 이중성’이 커다란 수수께끼로 등장하였다. 이후 이 문제는 주로 대상의 상태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의 문제로 귀착되었다. 즉 이러한 양자역학적 상태가 자연대상 실체에 관한 어떤 객관적 실재를 반영한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 논의의 핵심을 이루게 된다. 그리하여 물리이론이 대상의 실체를 어떠한 방식으로 얼마만큼 나타내고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대략 다음의 세 가지 가능한 해석방식이 취해지게 되었다.
  첫째는 그 물리적 행위가 완벽하게 서술 또는 예측될 수 있는 ‘객관적 상태’가 존재할 것으로 보고, 양자역학의 이론 [양자역학적 상태함수]은 이 ‘객관적 상태’에 대한 부분적인 정보만을 지닌 것으로 해석하는 입장이다. 이 경우 양자역학적 상태함수가 미처 담고 있지 못한 정보를 담당할 한 무리의 변수가 더 있을 것으로 보아 이를 ‘숨은 변수(hidden variable)'라 부르기도 한다. 이 관점에 의하면 대상 자체는 그것의 행위가 완벽하게 서술될 어떤 형태의 상태를 지니고 있으나, 이론의 불완정성 또는 인간의 본질적 한계성 등 그 어떤 이유 때문에 적어도 현 단계의 학문적 상황에서는 이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가능한 해석으로는 양자역학적 상태[이론] 그 자체가 곧 객관적 실재로서의 대상의 상태를 나타낸다고 하는 관점이 있을 수 있다.  양자역학적 상태 그 자체가 대상의 행위에 대한 완벽한 예측을 가능하게 해주지는 않지만 이러한 사실은 양자역학적 상태가 대상을 불완전하게 서술해서가 아니라, 객관적 실재의 성격 자체가 이러한 본성을 지닌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논란의 여지가 많은 관점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많은 물리학자들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많이 취하고 있는 관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세 번째 생각할 수 있는 관점은 객관적 실재에 대한 가장 조심스런 해석으로서, 양자역학적 상태는 객관적 실재와 아무런 직접적 관련이 없으며, 오직 이것을 통해 해석되는 ‘사건’들과 그것이 일어날 확율적 예측만으로 객관적 실재와의 연관을 맺을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 입장에 따르면 우리가 상태함수만으로 대상을 서술하는 기간에는 객관적 실재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으며, 오직 어떠어떠한 관측을 수행하면 어떠한 결과가 관측되리라는 것만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상태함수 자체는 대상의 행위 예측을 위하여 인식주체가 고안해 낸 하나의 편의적인 장치일 뿐, 객관적 실재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것의 ‘사건’발생에 관계되는 해석 이상의 것을 취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2 - 2. 현대물리학 이론의 성격

  이상 고전 물리학과 현대 물리학의 이론상의 특징을 ‘실재대상 - 이론’의 관계 속에서 살펴 보았다.  다시 이를 ‘직접서술’과 ‘간접서술’로 나누어 설명할 수도 있다. 직접서술은 이론 자체가 현실세계의 존재양상을 일단 있는 그대로 서술해 주는 것으로 보는 방식이다. 간접서술은 서술의 내용이 현실세계의 그 무엇을 있는 그대로 그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독자적인 존재양태를 지니는 것이며, 오직 그 서술의 해석방식에 의해서만 현실세계와 연결을 갖는 방식이다. 앞의 논제와 관련시켜 볼 때, 고전 물리학의 이론은 직접서술 방식으로서, <관점 1>의 실재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 다음 잠정적으로 현대 물리학 그 중에서도 양자역학은 간접서술의 양상을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양자역학은 실재론인가, 아니면 도구론인가? 이 문제는 주어진 논술의 논제 해결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 한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위에서 살펴 본 현대 물리학 이론의 세 가지 해석 중 가장 타당한 입장을 골라야 한다. 이른바 ‘과학적 모형[이론]’과 실제 계(係) 사이에는, 앞서 든 현대 물리학의 ‘초끈이론’이나 ‘원자’의 사례만 보더라도, 직접 대응시킬 수 없는 뭔가가 있다. 하나 더 예를 들면 호킹(stephen Hawking)이 블랙홀(Blackhole)은 검은 것이 아니라 열을 방출한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아직까지 블랙홀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더욱 블랙홀로부터의 열방출을 탐지하지도 못한 데 있다.   그래서 세 번째 입장에 많은 물리학자들이 지지를 보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 번째 입장을 지지하는 것은 이른바 ‘아인슈타인 인과율’에 의한 타당성 분석의 결과에 의존한 결과이기도 한다.   (아인슈타인의 인과율이란 ‘두 사건 사이의 인과 관계는 오직 ‘시간성’간격을 지닌 경우에 한하여 허용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장회익, 책 125~129)
  세 번째 입장은 논술의 <관점 2>에 나타난 것처럼, 과학이론이 단지 자연현상을 분류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도구론에 해당될 수도 있다.  사실 세 번째 입장은 ‘지나친 도구주의’라는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을 취한다고 하여, 객관적 실재에 대한 모든 주장을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세 번째 입장에 따르면 상태 그 자체의 객관적 실재성은 인정하지 않으나, 상태의 양자역학적 해석에 의해 연결되는 ‘사건’의 실재성은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엄격한’ 도구론에 대한 ‘제한된’ 실재론을 설정할 수 있다. 도구론의 입장은 설혹 ‘직접서술’방식에 의해 표상되고 있는 내용들이라 하더라도 이것을 실재를 반영한 것으로 보기 보다는 경험 사실들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예측하기 취한 지적 방편으로 보는 관점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실용적인 면에서 볼 때 객관적인 실재가 존재하며 우리가 직접서술방식에 의해서 표상해내는 세계상[이론]이 바로 이 실재를 반영하는 하나의 모형이라고 보는 것이 과학을 위한 좋은 작업 가설을 이룬다. 그리고 이러한 모형은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 더 완전한 모형이 항상 추구될 수 있고 또 추구되어야 한다는 유보사항이 전제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이러한 점이 전제될 경우, 설혹 이러한 제한된 실재론의 입장을 취한다 하더라도, 도구론이 제기하는 중요한 쟁점, 즉 서술내용을 객관적 실재와 동일시함에서 오는 ‘지적 경직성’(예컨대 고전 물리학의 한 측면)에 대한 경고가 충분히 수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과학의 목적이 단순히 현상을 설명하고 예측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세계관을 구축하고 이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어떤 의미를 찾아내려는 데에도 있다면,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순수한 도구론적 관점을 취하기 보다는 제한된 실재론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 합당한 자세라 할 수 있다.

-이상, 과학이론의 실재론과 도구론은 장회익  '과학의 인식론적 구조와 객관적 실재' 『과학과 메타과학』 지식산업사, 119~142에 나오는 개념임.

 

 


3. 산업사회와 엔트로피(entropy)

 

  다음은 과학이론의 이해를 통해 사회의 어떤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안을 묻고 있는 논제이다.

 

◈< 문제>◈
※ 과학기술의 발달과 이에 따른 산업화는 인류 사회에 많은 편의성을 제공하여 왔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인류의 미래에 끼칠 영향에 관하여서는 부정적 견해가 존재한다. 이 비판적인 견해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열역학 법칙에 의거하는 것이다. 열역학 법칙과 관련된 다음의 지문에 의거하여, 과학 기술의 발달과 산업화가 인류의 미래에 끼치는 부정적 영향을 서술하고 이들의 역기능을 줄일 수 있는 가능성이나 그 방법에 대해 논술하시오.   < 1999학년도 이화여대 자연계열/정시  >

  * 열역학의 법칙은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어떤 물체계를 외부와 고립시켜 놓았을 때, 그 물체계 내의 에너지의 총량은 일정하게 보존되고 [제1법칙], 그 물체계 내에서의 모든 현상들은 항상 그 물체계 내의 분자들이 더욱더 무질서한 운동을 하게 되는 방향, 즉 엔트로피(무질서도)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제2법칙].”    

【Ⅰ】  에너지 수준이 가장 높고 사용 가능한 에너지가 최대인 상태가 최소 엔트로피의 상태이며 또한 가장 질서있는 상태이다. 반면에 사용 가능한 에너지가 완전히 분산되고 흩어져 있는 상태는 엔트로피가 최대인 상태이며 최고로 무질서한 상태이다. 한 벌의 카드를 예로 들어 보자. 숫자와 그림이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는 상태가 최대의 질서도, 즉 최소의 엔트로피 상태이다. 카드를 휙 바닥에 내어 던지면 제멋대로의 무질서한 상태가 되어 있다. 이 흩어진 카드들을 하나하나 주워 모아서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려면 카드를 던졌을 때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해야 할 것이다.
【Ⅱ】  금속 광물 한 덩어리를 캐어서 연장을 하나 만들었다고 가정하자. 이 연장을 사용하는 동안 금속 분자는 닳거나 부서져서 끊임없이 공중으로 날아가 버린다. 이러한 금속 분자들은 결코 소멸되지 않으므로 결국 지하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땅 전체에 고루 퍼져 있기 때문에 원래의 광물과는 달리 유용한 일을 하는 데 사용될 수가 없다. 이렇게 멋대로 분산된 분자들을 재활용하는 방법을 고안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엔트로피를 더 증가시키는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런 금속 분자들을 다시 모을 수 있는 장치가 꾸며지고 그것을 작동시킬 수 있는 에너지원이 마련되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그 장치 자체도 지구의 금속 광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 금속 분자도 앞에서와 꼭 마찬가지로 마모, 파쇄 등의 원인으로 흩어지게 된다. 동시에 이런 재활용 장치를 작동시키는데 사용되는 에너지도 결국은 엔트로피를 증가시키게 된다.
【Ⅲ】  어떤 에너지가 높은 수준의 상태로부터 낮은 수준의 상태로 옮겨 갈 때 일이 이루어진다. 중요한 점은 에너지가 옮겨 갈 때마다 다음 번에 사용 가능한 에너지 양은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댐 위의 물이 아래로 떨어지는 경우를 예로 들어 보자. 물이 높은 곳으로부터 아래로 떨어지는 동안 물은 전기를 일으키거나 수차를 돌리거나 또는 다른 종류의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바닥에 떨어져 버린 물은 더 이상 일을 수행할 수 없다. (이들 두 상태를 가리켜 각각 ‘사용 가능한 에너지’ 그리고 ‘사용 불가능한 에너지’의 상태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러므로 엔트로피의 증가는 이러한 사용 가능한 에너지의 감소를 뜻한다. 자연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때마다 얼마간의 에너지는 더 이상 사용이 불가능한 에너지 상태로 되어 버린다. 

 유의사항
⑴ 띄어쓰기를 포함하여 1,500자 내외(1,400자~1,600자)로 서술할 것.
⑵ 시험 시간은 150분임.
⑶ 제목은 쓰지 말고 본문부터 시작할 것.
⑷ 수험 번호, 성명 등 자신의 신상에 관련된 사항을 답안지에 드러내지 말 것.
⑸ 반드시 검은 펜이나 연필로 쓸 것.

 


 ▣분석 & 해설▣
  【Ⅰ】은 엔트로피의 개념 설명으로, 엔트로피 증가는 곧 에너지 소모[소비]임을 말해주고 있다.【Ⅱ】는 이미 소비된 에너지를 다시 활용하려 해도 결국 에너지에 의존해야 하므로, 결국 엔트로피를 증가시킨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Ⅲ】은 엔트로피가 증가함으로써 ‘사용 가능한 에너지’가 ‘사용 불가능한 에너지’로 바뀌는 현상을 설명하고 있다.
  엔트로피 법칙이 인류의 에너지사용에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가? 제시문에 나타나 있듯이, 에너지의 변화에는 거스를 수 없는 방향성 즉, 저(低)엔트로피의 농축된 에너지로부터 고(高)엔트로피의 분산된 에너지로 바뀌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쉽게 말하자면 쓸모 있는 에너지를 태워 이산화탄소라는 쓸모 없는 형태, 즉 쓰레기를 만드는 변환만이 가능할 뿐인 것이다.【Ⅱ】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에너지 재활용도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장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다른 예를 들면, 도시의 거대한 마천루나 복잡한 도로망(【Ⅱ】의 사례로 볼 때는 ‘광물연장’)은 일견 질서의 증가로 보일 수도 있으나 그러한 형태의 엔트로피의 감소를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외부에 그 보다 더 큰 엔트로피의 증가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 부조물을 보수․관리․유지하는 데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엔트로피 법칙은 우주의 어느 곳에 질서가 더 생기는 것은 다른 곳에서 더 큰 무질서가 생긴다는 것을 절대 진리로 천명한다.

 


3 - 1. 에너지 사용의 역사

   인류는 에너지 사용을 통해 생존을 유지해 왔다. 산업혁명 이전에는 주로 자연력(自然力)을 사용했다.  불이나 태양열은 태고적부터 사용되었다. 원시시대부터는 야생동물을 가축으로 길들여 인력 이외의 동력으로 쓰고 있었다. 인간이 인력, 축력(畜力) 다음으로 이용하게 된 것은 물과 바람의 힘을 빌리는 수차(水車)와 풍차(風車)였다. 수차는 기원전 수백년경에 중국과 인도에서 처음 나타났다. 로마에서는 서기 536년대에 수차의 회전이 톱니바퀴에 의해 맷돌로 전달되도록 만든 물에 뜨는 수차가 개발되었다.(이 수차는 동력 용량이 약 0.3w 정도였다.) 수차가 널리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기술수준이 전반적으로 향상되어 생산력이 증대된 시기였던 10세기 이후였다. 수차는 초기에는 주로 곡물을 제분하는 용도로 사용되다가, 11세기말부터는 직물 공장에도 보급되기 시작했다. 수차는 16세기에 이르자 서부 유럽의 가장 중요한 동력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풍차는 수차보다 늦은 10세기말에 11세기초에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등지에 출현하였다. 풍차는 곡물의 제분, 광산으로부터 광물의 운반 및 양수(揚水) 등의 여러 가지 용도에 사용되었다, 풍차는 최고 12Kw 정도까지로 출력이 큰 편이었으나 바람이 있을 때에만 돌릴 수 있다는 한계 때문에 수차만큼 널리 보급되지는 못했다.
   산업혁명(18세기 후반부터 약 100년)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동력원은 주로 수차와 풍차에 의존하고 있었다. 따라서 공업 중심지나 도시의 위치는 주로 이들 동력원의 이용이 가능한가의 여부에 따라 결정되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에너지원(原)은 변형을 가하지 않은 자연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에너지 고갈(또는 에너지 사용에 따른 환경오염)은 문제시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증기기관(외연기관)의 출현은 인류의 에너지 사용의 양상을 바꾸어 놓기 시작했다.  증기기관의 발명은 동력원을 지리적․자연적 제약조건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근대산업이 발달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특히 1784년 와트(J.Watt)가 복동회전(復動回轉 : 하나의 원동기를 사용하여 여러 개의 작업기를 동시에 가동시킴)증기기관을 발명하면서 서구의 산업발전은 속도를 더해 갔다. 그러나 증기기관이 그 에너지원으로 목탄과 석탄을 사용하게 됨으로써 에너지 고갈의 단초를 열었다. 벌목(伐木)으로 산림이 황폐화되고 목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되자 석탄을 대량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석탄은 화석연료(석탄․석유․천연가스) 중에 가장 먼저 발견된 에너지원이었다. 이후 전기기술과 내연기관의 발명은 에너지 고갈의 본격적인 시대를 열었다. 
   19C에 들어서면서 이전에 볼 수 없던 전기기술이 새롭게 등장했다. 전기산업의 출현은 과학이론에 힘입은 바가 컸다. <예를 들어 볼타(A.C Volta)의 금속전기 현상의 발견과 그 응용에 의한 전지의 발견, 그리고 주울(J.P. Joule)의 전류와 열과의 관계에 대한 법칙의 발견 등> 이러한 과학적 성과에 바탕을 두고 많은 사람들은 전류를 발생시키는 발전기를 만들려고 노력했으며, 그 결과 1867년 독일의 지멘스(W.Siemens)와 1873년 프랑스의 그람(I.Gramms)이 발전 장치를 제작하는 결실을 거두게 되었다. 발전기는 기계적 에너지를 전기적 에너지로 바꾸는 장치이다. 따라서 발전기에 기계적 동력을 공급하는 원동기가 필요했으며, 초기에는 증기기관이 이용되고 있었다.   1878년 에디슨(T.Edison)이 발명한 백열전등이 보급되기 시작하고, 뉴욕․런던 등의 대도시에 화력 발전소가 건설되면서 전력 생산은 현실화되기에 이른다. 전력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증기기관의 출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게 되자 터빈(고압의 물, 증기, 가스 등을 노즐로 내뿜게 하여 그 충격으로 회전동력을 얻는 원동기)이 개발되었다. 전기 기술에 있어서 발전기술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전력을 수송하는 기술이다. 결론적으로 19C후반 전기 수송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전류를 통한 말소리의 수송, 이른바 ‘전화(電話)의 세기’라는 20C가 열린 것이다.  
   내연기관을 제작하려는 시도는 19세기 초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내연기관의 원조는 1876년 독일의 다이믈러(G.W. Daimler)가 제작한 4 사이클 기관이다. 다이믈러는 이어서 1883년에 가솔린(석유의 휘발성분을 이루는 무색 액체 휘발유)기관의 제작에 성공하고, 1887년 이 기관을 부착한 최초의 4륜 화물자동차를 만들어 냈다. 비슷한 시기에 독일의 벤츠(K.F.Benz)와 미국의 포드(H.Ford)도 자동차의 제작에 성공하였다. 이러한 내연기관의 개발과 더불어 자동차가 보급되어감에 따라 20세기초부터 석유, 천연가스 등 화석 연료의 사용이 급증하게 되었음은 물론이고, 드디어 이들은 대기오염을 비롯한 환경오염의 주범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원자의 핵분열 반응에 의한 원자력 에너지의 사용은 20세기 중반의 일이다. 1954년 구소련, 1956년 영국에서 원자력 발전을 시작한 이후 현재에는 다양한 방식의 원자로가 개발되어 가동되고 있다. 1989년말 시점에서 전 세계의 원자력 발전소는 26개국에서 425기가 가동되고 있어 전 세계 에너지 생산량의 3%, 발전량의 약 20%를 공급하고 있다. 이렇듯 원자력에 의한 발전이 널리 퍼지는 상황에서 원전의 안전성에 대한 문제는 중요한 과제로 여전히 남아 있다. 원전사고는 체르노빌 사례에서 보듯이 사고가 일어나면 그 피해가 다른 환경사고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고 광범위하며 오래 계속된다. 뿐만 아니라 발전하고 남은 방사성 폐기물의 처리는 아직도 고심거리가 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인류는 자연의 힘을 직접 이용하는 것으로부터 원자력의 이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에너지원을 개발해 왔다. 이처럼 에너지원의 개발이 꾸준히 진행된 것은 일차적으로 산업혁명 이후 산업면에서 에너지 수요가 증가한 데 기인한다. 산업체에서의 에너지 이용은 세계경제가 팽창하기 시작한 20C중반 이후 급격히 증가되었다. 1970년대에는 두차례 석유파동을 거치며 에너지 위기까지 겪었다. 석유위기로 대표되는 자원의 위기는 그 내막이 어떻든지간에 인류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로 떠올랐고, 선진국은 물론 개도국도 대체에너지 개발에 주력해야 하는 실정이다.
   엔트로피 법칙은 19세기 중반의 시대적 소산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엔트로피 법칙은 진화론이 사회현상에 확대 적용되어 사회적 다원주의(social Darwinism)을 낳았던 것처럼, 사회현상에 적용되어 현존 과학기술 문명에 깔린 발전개념을 비판하고 새로운 세계관을 모색하는데 원용되고 있다. 우리의 상황 또한 앞 뒤 가릴 것 없이 선진국을 발전모델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허다한 부작용을 빚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엔트로피 이론에 근거한 성장한계론이 상당히 호소력을 지니게 되었다.

 


3 - 2. 세계관으로서의 엔트로피

   엔트로피 법칙이 출현하게 된 배경에 관해 간단히 살펴보자. 프로메테우스가 하늘에서 불을 훔친 이래, 인류의 열[에너지]에 대한 관심은 지대한 것이었다.  그러다 19세기에 들어 열기관의 효율성에 관한 정량적 접근에 성공한 프랑스의 과학자들과 실험과학에 특출했던 영국 과학자들의 손을 거치면서, 그리고 독일 자연철학 사조의 영향을 받게 되면서, 비로소 열에 대한 연구는 그 기틀을 잡게 된다. 그 결과로 에너지는 물리학의 기초개념으로 자리잡고 자연계의 불변성의 원리이자 변환 속에서의 통일적 역할을 맡은 원리로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우주의 갖가지 형태의 에너지들은 역학적 에너지의 변형의 형태로서 인식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배경아래, 1865년 클라우지우스(Rudolf Clausius, 1822~1888)는 열의 역학적 이론에 관한 두 가지 기본 법칙으로서, "⑴ 우주의 에너지는 일정하다.   ⑵ 우주의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한다."라는 결론을 맺게된다. 당시의 이러한 선언은 열역학의 제1,2법칙의 탄생이자 물리학의 성립을 공포하는 것을 의미했다. 여기서 엔트로피 법칙은 자연세계의 변화의 방향성을 규정하는 것이었다. 클라우지우스에 의해 창안된 엔트로피(Entropy)라는 용어는 계의 무질서한 정도를 나타내는 물리적 개념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그는 『‘열역학의 역학적 이론에 관하여 (On the Mechanical Theroy of Heat)』란 논문에서 모든 언어에 두루 쓰이도록 그리스어의 ‘변형(tropy)’이라는 단어를 빌어 ‘energy’라는 용어에 유사하게끔 ‘entropy’라고 명명했노라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엔트로피 이론에 근거해 볼 때, 과학기술의 발달과 산업화가 인류의 미래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은 어떤 것일까?  
   클라우지우스 등 당대의 석학들은 다같이 우주종말의 비관론에 휩싸였다. 클라우지우스는 엔트로피 법칙의 우주론적 결과로써 ‘열죽음(heat death)’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우주는 결국 최대 엔트로피 상태에 이르러 사용 가능한 에너지가 사용 불가능한 형태로 바뀌게 될 것이고, 따라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영원한 정지상태에서 이 세상은 시간이란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종말에 이를 것이라 보았던 것이다. 1877년 볼츠만에 의해 증명되었듯이, 엔트로피 법칙은 확률적 법칙이다.  ‘맥스월의 도깨비’를 등장시킨 사고실험(思考實驗)에서 추론되었던 것처럼, 이 법칙에 위배되는 과정이 일어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가능성이란 ‘한 떼의 원숭이들이 타자기 위로 멋대로 돌아다녀 영국 박물관에 소장된 모든 책을 찍어낼 수 있는 가능성’보다 못한 것이다.
   슈뢰딩거(Schrödingur)는 『생명이란 무엇인가? (What is life?) 』라는 유명한 저술에서 생명에 관한 물리학적 성격들을 다루고 있는데, 그가 생명의 본질을 나타내는데 도입한 개념 중의 하나가 ‘부 엔트로피(negative entropy)’이다. 그는 생명과 엔트로피를 다음과 같이 연관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살아있는 유기체는 지속적으로 그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며 또는 정 엔트로피를 생산하며, 따라서 최대 엔트로피의 상태, 즉 죽음이라는 위험한 상태에 접근하는 경향을 지닌다. 이것은 오직 주위로부터 지속적으로 부 엔트로피를 끌어들임으로서 그 상태의 모면, 즉 생존을 취할 수 있다. 유기체는 부 엔트로피를 먹고사는 존재이다.” 슈뢰딩거가 생명현상에 도입한 네겐트로피(negentropy)개념은 부분계에 국한되는 것일 뿐, 어떤 이론이나 기술에 의해서도 계 전체의 엔트로피를 감소시킬 수 있는 길은 없다. 이 방면의 석학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건대, 결국 인류는 에너지 고갈과 특히 화석연료의 과다소비로 인한 환경문제의 심화로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엔트로피의 증가와 그에 따른 미래에 대한 어두운 전망 앞에서, 엔트로피 증가가 초래하는 역기능을 줄일 수 있는 가능성이나 방법은 없는 것일까?  에너지의 확보와 사용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세계 모든 나라가 고도의 산업화를 추구하는 한 공통된 문제이다. 현재로는 산업사회의 선진화에 비례하여 화석연료(석탄, 석유, 천연가스)와 원자력 에너지에 의존하는 경향이 큰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화석연료는 고갈과 환경오염이라는 문제에, 원자력 에너지는 안전성 문제에 걸림돌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사회현실 비판 운동의 구체적 쟁점으로서 공해추방이나 원전 건설 반대가 자주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공해추방과 원전 반대라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데 사안의 어려움이 있다. 그렇다면 재생 에너지(아무리 소비해도 무한히 공급되는 자연 에너지)의 사용은 어떤가? 태양열, 지열, 풍력, 조력(潮力), 해양열 등은 환경 문제나 안전성 차원에서 가장 바람직한 에너지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 에너지원은 아직 우리의 일상 생활에 널리 보급될만큼 실용화 단계에 들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원인은 그들 자원의 실용화가 상당한 과학 기술적 난제(難題)라는 데 있다.  
   그렇다면 방법은 어디에 있는가? 세기의 전환점에 서서 인류 사회가 또 다른 단계의 문명을 존속시키고자 한다면, 그 단계에 부응하는 사고의 질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문명이 야기하는 엔트로피를 처리하는 데는 자연의 메카니즘을 이용하는 것이 최상의 지속적 방법으로 밝혀져 있다. 그러므로 인위적인 변화는 자연의 일부로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귀결점에 이르게 되고, 이런 맥락에서 엔트로피 법칙은 동양의 전통적인 과학사상 또는 서양의 근대 이전의 자연관에서 암시를 얻는다. 엔트로피 개념이 제시하는 ‘성장 한계론’ 또는 ‘반성 성장론’이 얼마나 강력하고 적절한 도구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지 않겠으나, 그 법칙의 골자가 현대의 과학 기술 문명에 대해 시사하는 바에 대해서는 누구나 한 번쯤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 시각에 대해 예를 들면, 리프킨(J. Rifkin)은 역사상의 기술 혁신에 의해 인류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잃는 것은 무엇인가, 선진산업 사회의 모순은 무엇인가 등의 문제를, 경제․에너지․제도․가치관․과학․교육․종교․군사 등의 분야로 세분하여 구체적 데이터로 실감있게 제시함으로써 현대 문명에 탐닉해 있는 사람들에게 반성의 계기를 준다. 리프킨은 엔트로피 법칙을 문명 비판의 시각에 도입하고 있는 배경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른바 세계관의 변혁을 촉구한다.   세상은 ‘끊임없는 수선과 짜집기의 연속’으로 위기를 넘겨 왔는데, 이러한 문제는 최고 권력자나 대단한 사상가라도 해결할 수 없다고 그는 말한다. 그리하여 붕괴 일로의 상황에 있는 인류는 무엇보다도 현존하는 세계관에 대해 진지하게 따져 보아야 하는데,  그것은 세상을 병들게 하고 그 속의 모든 것을 오염시킨 주범이 바로 우리들의 세계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굳이 엔트로피 법칙에 대한 이해의 기반이 없더라도 뜻있는 사람들은, 물질 만능주의에 빠져 어찌되었건 물질적인 진보를 추구한다든가 ‘클수록 좋다’는 식의 고(高) 엔트로피적 개념이 헛되고 뜻없는 것임을 탄식하곤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성의 목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의 사고체계였으면서도, 잊어버렸던 동양적 자연관을 되돌아 보게 된다. 그것이 결국 저(低) 엔트로피 사회의 추구를 의미하는 것임을 깨달으면서. 아마 저 엔트로피 사회를 지향하는 발전의 개념은 동양의 전통적인 사상 가운데 천인합일사상(天人合一思想)과도 잘 부합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고 체계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서로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 ‘옴살스런’(전체론적) 모습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서양의 근대 이후의 과학과 동양의 오늘날의 과학은 그러한 원초적인 유기성(有機性)과 통일성을 깨뜨린 상태에서, 오로지 인간의 실리적인 관점에 탐닉하여 기술을 발전시킴으로써, 결국 자연을 무모하게 착취하였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다.
   현대인의 삶에서 과학과 기술은 결코 버릴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사람의 삶을 지배하게 함으로써 삶의 의미와 목적을 망각하는 어리석음을 더 이상 범해서는 안 된다. 이때 동양의 전통사상과 서양의 근대이전의 여러 사상을 현대의 과학기술 사회에 가져와 재해석하는 것은, 현대문명이 초래한 부정적인 측면에 대한 돌파구를 마련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과 자연이 현대의 새로운 맥락에서 다시 유기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는 한 오늘날의 문명의 피폐현상은 치유될 길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상, '산업사회와 엔트로피'에 대한 배경지식은 김명자 『동서양의 과학전통과 환경운동 』161~166의 내용을 주로 참고함.

      


* 참고한 책
  。  이언 스튜어트(김동광 역) 『자연의 수학적 본성』동아출판사
  。  김명자 『동서양의 과학전통과 환경운동』동아출판사
  。  폴 데이비스외(안성청외 역) 『과학혁명의 뉴패러다임』세종대학교 출판부        
  。  김용정 『과학과 철학』 범양사 출판부
  。  장회익 『과학과 메타과학』 지식산업사

 

 


 

문제는 논술에서 어떻게 다루어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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