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에관해서(내공100)

진시황에관해서(내공100)

작성일 2011.06.09댓글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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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시황에에대해서 조사한내용을 A4용지 한장정도 분량으로정리좀해주세요(30줄정도)

 

 

부탁좀드립니다..ㅜ정말급해요..ㅜㅜ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진시황에 관한 역사 기록은 많지 않으며 확실히 믿기도 어려운 점이 있다. 진왕조 자체의 역사기록이 전해지지 않는 상태에서 진시황 관련 자료는 사마천의 <사기>와 유향의 <전국책> 정도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책들은 모두 진시황의 시대보다 백 년 이상 지난 뒤에 씌어진데다 사실과 전설의 구분이 모호하고, 일부는 의도적인 왜곡을 했다는 의심마저 들기 때문이다. 이따금 출토되는 진나라의 죽간이 어느 정도의 실마리를 보태 주지만, 진시황이 실제로 어떤 인물이었고 어떤 일을 했는지 지금 정확히 알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아무튼 남아 있는 자료에 따르면, 진시황의 탄생은 매우 위태로웠는데다 모종의 음모까지 깃들어 있었다. 그는 기원전 259년에 조나라에 인질로 가 있던 진나라의 왕족 자초(子楚)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자초는 조국 진나라에서 그리 세력이 크지도 않았고 관례상 죽을 때까지 조나라에서 벗어나지 못할 가능성도 컸다.

 

운명의 장난이 아니었다면 자초나 그의 아들 영정(嬴政)이나 역사에 단 한 줄도 채우지 못한 채 쓸쓸히 사라져야 했을 것이다. 진나라의 상인인 여불위가 조나라에 갔는데, 우연히 자초를 만나보고는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특이한 상품(奇貨)이다. 사 놓으면 큰 이익을 보겠구나!” 그리고 한편으로는 자초에게 거금을 주어 조나라에서 인기를 끌도록 하고, 한편으로는 자초를 당시 진나라의 유력자였던 안국군의 양자로 들어가도록 공작했다.

 

여불위의 투자는 멋지게 성공, 안국군이 즉위하여(효문왕) 불과 사흘 만에 죽자 조나라에서 돌아온 자초가 왕위를 계승한다(장양왕). 이로써 최고권력의 으뜸가는 후원자가 된 여불위는 이후 3년 간, 그리고 다시 장양왕이 죽고 영정이 왕위에 오른 한동안 진나라의 최고실권자로서 세력을 떨친다.


 진시황의 상.
 그의 명성은 사실과 전설을 넘어 우뚝 서 있다

  

<사기>에는 여불위가 이처럼 대담한 도박을 했을 뿐 아니라 세상을 몽땅 속이는 음모까지 꾸몄다고 적혀 있다. 자초에게 자신이 총애하던 무희를 보냈는데, 그 무희는 이미 여불위의 자식을 잉태하고 있었다. 그리고 낳은 아들이 바로 영정, 미래의 진시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너무 교묘한 이야기로, 여불위와 자초의 긴밀한 관계, 그리고 한때 나는 새도 떨어트렸던 여불위의 세도에서 비롯된 뜬소문이 아닌가 하고 요즘에는 의심받고 있다. 사마천이 이를 <사기>에 기록한 것은 진시황을 폄하하기 위한 의도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또한 애초에 진나라 왕이 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고 하는 자초가 대권을 잡는 과정도 기이하다. 여불위의 억지스러운 음모가 그렇게 척척 통할 만큼 당시의 진나라 왕실이 허술했다면 과연 천하통일을 이룰 수 있었을까. 실제 역사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지 의문이 든다.

 

아무튼 13세에 왕이 된 영정은 10년 뒤에 태후(기록대로라면 본래 여불위의 애첩이었다고 하는)와 손잡고 역모를 꾀하던 노애를 처단하고 태후는 옹이라는 고을에 유폐시켜 버렸다.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여불위까지 숙청했다. 1년 뒤 여불위는 자살한다. 이제 진나라는 명실공히 영정의 천하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천하’가 진짜 ‘온 천하’로 확대되기까지는 불과 15년이 더 걸렸다.

 

 

기원전 230년에 진나라 군대가 한(韓)나라를 멸망시키고부터 221년에 제나라를 멸망시켜 천하를 통일할 때까지 약 10년 동안 한, 조, 위, 초, 연, 제 6개국이 잇달아 진나라에게 무너졌다. 평균 2년도 안 되는 기간에 한 나라씩. 이들 나라가 수백 년 동안 할거해 왔음을 생각하면 믿기 힘든 일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역시 기록에는 전하지 않는 사정이 있었으리라 여겨지지만, 기록으로만 볼 때 우선 진나라가 중국의 서쪽 외곽에 떨어져서 험준한 지형에 의존해 외침을 잘 받지 않으며 오랫동안 실력을 키웠던 점, 진효공 시절 상앙의 변법(變法)을 비롯한 과감하고 실용주의적인 개혁이 미친 부국강병의 효과를 들 수 있다. 그리고 진시황이라는 지도자가 보여준 리더십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사람됨이 몹시 잔인하고 냉혹했다고 한다. 그를 폄하하기 위한 역사왜곡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도, 모든 기록이 한결같이 지적하고 있는 점이라 실제 그런 성격의 소유자였으리라 여겨진다. 하지만 한편으로 헛된 명분에 얽매이지 않고, 인재를 소중히 여겼으며, 실수를 했다고 깨달으면 체면에 아랑곳없이 곧바로 시정했다. 운하 건설을 책임지고 있던 정국이라는 사람이 한나라의 첩자임이 밝혀지자 국내에 머물던 모든 외국인을 추방하도록 했지만, 후일 승상이 되어 천하통일의 일등공신 역할을 할 이사(李斯)가 “진나라는 대대로 외국인들을 우대하여 발전해왔다”고 반론을 올리자 곧바로 취소하며 전보다 더 외국의 인재를 중시했다. 한비자의 경우 그 한 사람을 얻으려는 마음으로 한나라와 전쟁을 벌였다고도 한다. 또 장군 왕전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를 좌천시켰다가, 왕전의 말이 맞았음을 알고는 곧바로 몸소 왕전의 거처로 달려가 용서를 빌고는 재기용했다고 한다.

 

진시황(진왕 정)은 이처럼 여러 국보급 인재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시켰고, 병사들에게도 전공을 세울 경우 최대한의 혜택을 보장함으로써 용맹하게 싸우게끔 부추겼다. 그리고 여러 나라의 정치에 은밀히 공작을 해서 안으로 내분에 휩싸이게 하고, 밖으로 여러 나라가 단합해서 진나라에 대항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한 번에 한 나라씩, 전력을 기울여 단번에 적의 수도를 함락시키는 방법으로 무너뜨려갔다. 또 자료를 잘 살펴보면 진시황이 잔인무도하다는 점에서 폭군이라는 비방은 숱하게 있지만, 사치향락을 일삼았다는 쪽의 비방은 별로 없다(적어도 통일 이전까지는 그랬고, 이후에도 죽기 직전까지는). 주지육림이나 삼천궁녀 같은 이야기는 전설로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반면 도무지 의심이 많아서 신하들이 일을 잘하나 계속 감시하므로 괴롭다는 푸념이 많이 보이고, 스스로는 죽간으로 지어진 공문서를 매일 120근씩 처리하지 않고는 먹지도 쉬지도 않았다고 하니, ‘일 중독자’로서 부하들을 매섭게 다그치는 ‘호랑이 같은 관리자’였으되 자기 개인의 쾌락을 위해 국가와 국민을 희생시키는 폭군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것은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고, 때로 비정한 결단도 숱하게 내려야 하는 정복-통일 군주에게는 적합한 성격이었다. 다른 나라들이 이런 진시황과 진나라를 막기 위한 방법은 두 가지뿐이었다. 서로 힘을 합쳐 공동 대응하는 합종(合縱)은 과거에 진나라의 야심을 저지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진시황 시대인 기원전 241년에 마지막으로 연나라를 제외한 5개국이 진나라를 공격했다가 패배한 후로 다시 합종이 성사되지 못했다. 남은 방법은 단숨에 진나라의 중추를 파괴하는 방법, 즉 암살이었다. 227년에 연나라의 형가(荊軻)가 암살에 거의 성공할 뻔 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나며 연나라의 멸망만 가져온다. 기원전 221년, 진왕 정은 천하통일을 선포하면서 스스로 전설의 성군들인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따온 ‘황제’라고 칭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위에 쓰신 분의 글이 정확함.
진시황은 진나라 왕실의 씨가 아니고 여불위라는 상인의 씨를 받아 태어났다고 하지만
씨도둑은 못 속인다고 아무리 의학이 발달하지 않는 옛날이라고 하더라도
아버지 집안 쪽에서 내새끼 남의새끼 구별도 못할까?
통일 진나라는 2대째 30년만에 끝나고 한나라 정권이 들어서서
진시황을 폄하하려고 의도적으로 꾸며낸 이야기 일수도 있고


어쨎든 통일과정에서 보여준 리드쉽과 용병술은 뛰어났음.
특히 첩보전에 관심을 갖고 그쪽 분야 전문가를 많은 돈을 주고 고용.

당시 군주들은 첩보전은 정당하지 못하고 비겁하다는 인식을 갖고 꺼려 했으나

진시황은 이런 고정관념을 깨고 적극 수용.
첩보전문가가 진시황의 포악함을 알고 토사구팽이 두려워 도망치려 했으나
진시황이 이를 눈치채고 극진히 대우.


잘 알려진 첩보전으로 조나라를 멸망시킬때
조나라에서 실전경험이 풍부한 노련한 노(老)장군을 보냈는데
진나라 군대와 몇번 부딪쳐보니 워낙 강군이라 수비위주로 장기전을 펼쳤다.
진나라에서 이를 도저히 깨뜨리지 못하자 첩보전을 펼쳐
노장군이 진나라에 뇌물 받아 먹고 저런다 젊은장군인 조괄??을 보내면
단번에 진나를 멸망시킬 수 있다 이런 거짓소문을 퍼 뜨려
노장군을 해임하고 실전경험없이 입으로 병서만 달달 외우는 젊은장수를 투입.
무모한 공격으로 40만명이 포로로 잡혀 생 매장 당하는 것으로
멸망하기 시작.

 

왕이 해야 될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업무는?

1. 백성들을 잘 보살 피기

2. 외적의 침입을 잘 막아내기

3. 부하들의 쿠데타를 잘 감시하기.

 

정답은 3번 - 내 맘대로 정함.

진시황은 쿠데타를 일으킬 만한 부하들을 한 곳에 모아 일부러 쿠데타 일으키도록

유도 한 뒤 몰살시킨 일이 있음.

그 외 쿠데타 모의가 있으면 자신이 직접 군대를 몰아 몰살시키는 것으로

쿠데타 감시 능력이 아주 뛰어났음.

이런 능력은? 느낌이나 육감에 의존하지 않고 첩보전문가를 적극 활용.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진시황제는 최초로 중국을 통일하는 과업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중국역사상 독보적인 존재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통일제국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인해 폭군으로 부각되는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중국이 전국 7웅에 의해 분열되어 서로 각축을 벌일 때는 기원전 259년에 태어난 그는 불과 13세의 어린 나이에 진왕에 즉위하였으나 親政(친정)에 들어가 본격적인 영토 확장작업에 착수한 것은 23세 때였다. 놀랍게도 그의 통일사업은 기원전 230년부터 221년까지는 아주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다. 기원전 8세기부터 분열된 중국이 하나의 통치체제 밑에서 역사를 전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그는 중앙집권적 전제정치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그는 황제라는 존호를 최초로 제정하고 二世(이세)나 三世(삼세)는 물론 萬世(만세)까지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스스로 始皇帝(시황제)라 칭했다. 또한 전국을 하나의 통치체제로 편입시키기 위해 郡縣(군현)제도를 실시했다. 황제를 정점으로 西周(서주)(기원전 1122-1771)시대의 봉건체제를 대신하게 됐다. 이후 중국은 2천년 이상 군현재를 운영하기에 이르렀다.그의 不老長生(불로장생)에 대한 집착은 너무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이 영원하기를 원하듯, 통일제국이 영구히 존속하도록 온갖 노력을 경주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집념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가 기원전 210년 50세의 나이로 사망한후 얼마 못되어, 진제국의 長壽(장수)도 그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왜 진이 이렇듯 단명하고 말았는가 ? 우리선 통일과업을 완성시킨 진시황제가 사망한 후, 왕위계승을 둘러싼 혼란이 지속됐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뒤를 이었던 泰二世(태이세)황제는 정통성 시비에 말려들기도 했다.



더욱이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은 탄생했지만, 아직도 봉건제가 여전히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춘추전국시대의 오랜 세월을 거쳐 중국은 봉건적인 정치질서에서 중앙집권적인 체제로 전환해왔다. 또한 통일후 진은 전국시내에 서울 자웅을 겨루던 나머지 6국의 지배층 1만호를 강제로 수도 咸陽(함양)으로 이주시켜, 제국이 분열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건제는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 결국 진제국 말기 지방 토호와 6국의 귀족세력이 전국각지에서 봉기하여 진왕조를 전복시켰다.



진시황제부터 시작된 무리한 토목공사도 진의 단명을 설명하는 데 빼놓을 수 없다. 지금도 인공위성에서 욱안으로 관찰 할 수 있는 유일한 인공 구조물이라는 1만2천7백리의 만리장성, 사치의 상징으로 거명되는 길이 6백90m, 폭 1백14m의 아방궁, 무수한 호화유적을 남긴 진시황제 무덤(높이 약 70여m, 동서 약 6백m, 남북 2뱍여m), 그 외에도 무수한 건축물이 조성됐다. 당연히 이를 위해 과다한 세금을 징수하게 되어, 통일된 후에는 세부담이 무려 20배로 늘었다고 백성들이 불평할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국토나 도량형, 문자 따위의 통일 뿐 아니라 사상의 통일까지 이루려고 했던 진은 결국 「통일작업」의 무리한 추진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단명을 초래했다. 焚書坑儒(분서갱유)애 말로 사상통제가 낳은 불행한 사건이었다. 모두 4백60여명의 선비를 생체로 매장하여 반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들을 단숨에 제거했다. 또한 진나라 외에 다른 나라의 역사를 다룬 역사서는 물론, 농업등 실용적인 목적을 지닌 책을 체외하고 거의 모두 책을 불사르는 문명파괴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행위는 지식분자, 특히 유학을 신봉하는 선비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 일으키는 직접적 원인이 됐다.



진시황제의 분서갱유는 중국은 물로 동양문화 전체에 너무나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무엇보다도 국가권력에 의해 사상과 학문의 자유가 억업되는 최초의 선례가 됐던 셈이다. 이로 말미암아 동양인은 전통적으로 획일적인 사고에 길들여졌으며, 2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중국인은 물론 동양인 전체가 다원화 사회를 실현시키기 위해 진통을 겼고 있다.



진시황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괴물(怪物)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지 않았다면 중국은 현재의 유럽처럼 여러 나라로 나뉘어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대륙을 통일하기 이전에는 중국(中國)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이전의 역사서에 나타나는 중국이라는 단어는 단지 '나라의 중앙' 또는 '수도'라는 뜻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대륙 통일 이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같은 나라의 사람'이라는 인식이 대륙의 사람들에게 생겨났다. 그로 인해 삼국(三國) 분립시대나 남북조((南北) 분열시대의 중국인들은 '이것은 이상사태(異常事態)다. 언젠가 하나로 통일되는 것이 본래의 모습이다' 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가졌던 것이다. 창작으로 가공할 괴물이 아니었다면 이러한 대사업을 이룩하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으로 황제(皇帝)의 칭호를 쓰다
'황제' 라는 말은 영어로 emperor라고 한다. emperor는 로마 제국의 황제 emperialt에서 유래된 말이나 '皇帝' 라는 두 개의 한자로 칭호를 최초로 쓴 사람은 진시황제(秦始皇帝)였다. 시황제의 시대, '전국칠웅(戰國七雄;중국 전국시대의 일곱 제후)' 이라고 해서 중국에는 일곱 개의 강국이 있었고, 진(秦)은 그 중의 한 나라였다. 시황제는 나머지 여섯 개 나라를 잇따라 멸망시켰는데 BC 221년에 최후까지 남아 있던 산동(山東) 반도의 제(齊)나라를 멸망시킴으로써 비로소 천하통일을 이룩하였다. 진시황은 태황의 태(泰)를 떼어내고 황(皇)만을 취하고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오제(五帝)에서 제(帝)를 택해서 '황제'로 칭하기로 했던 것이다.



삼황오제(三皇五帝)란 중국 고대 전설에 나오는 것으로 삼황(三皇)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대체로 복희(伏羲)씨, 여와(女蝸)씨, 신농(神農)씨 세 사람의 지도자를 말한다. 이들은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친 왕으로 전해진다. 이들은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친 왕으로 전해진다. 오제(五帝)는 황제, 전욱, 곡, 요, 순이라는 다섯 사람의 성군을 가리킨다. 따라서 '황제'라는 말에는 진시황 자신이 3황 5제의 덕을 겸비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동문(同文)--문자의 통일
진시황은 여러 가지 새로운 제도를 제정했는데, 그 중에서도 누구의 생각에나 쉽게 떠오르는 것은 '동문(同文;문(文)을 같이 하는 것)' 즉 문자를 하나로 통일시킨 것이다. 전국시대의 7웅은 각 나라마다 글자의 형태가 달랐었다. 그 근본은 은(殷)나라의 갑골문자(甲骨文字)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지역에 따라서 약간씩 자체(字體)가 달랐고 제각기 다른 문자가 있었던 것이다. 시황제는 진나라의 소전(小篆)이란 글자의 형태를 천하의 문자로 정하고, 나머지 문자들을 폐지시켰다. 그 폐지된 문자를 육국문자(六國文字)라고 부른다. 이 육국문자는 분서(焚書;죽간(竹簡)등의 책을 불태운 사건)으로 소멸되었다. 진시황제의 사후에 항우(項羽)가 함양(咸陽)으로 들어왔을 때 문서들을 버렸기 때문에 사료(史料)는 그다지 남아 있지 않다.그러나 가끔 지하에서 특히 사막에서 출토되는 인장에서 이 육국문자를 찾아 볼 수가 있다. 인장이 돌로 만들어지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며, 그 당시는 모두 금속을 썼다. 훌륭한 사람은 금, 그 다음 사람은 은이나 구리를 썼다. 이것을 끈으로 매서 목에 걸었다. 전생시에는 이것이 인식표(認識票) 역할을 했다. 전사한 유체(遺體)를 판별할 수 없을 때에는 목에 걸었거나, 혹은 어딘가에 지니고 있는 금속의 인장에 의해서 그가 누구인가를 알 수 있었다. 이 인장에는 읽을 수 없는 문자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것이 육국문자 즉 진시황제에 의해서 폐지되었던 문자였던 것이다. 같은 문자가 전국에서 통용된다는 것은 전국적으로 의사소통을 도모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단순히 국토통일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참된 뜻으로의 천하통일을 이루게 된 것이다.




동궤(同軌)-차륜(車輪) 폭의 통일
진시황의 통일정책으로 또하나 유명한 것은 '동궤(同軌;궤(軌)를 같이 한다)' 즉 바퀴 폭의 통일이다. 당시 각국은 제각기 다른 나라의 수레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퀴의 폭을 달리 하고 있었다. 수레는 대부분 전차(戰車)였다. 말이 끄는 전차는 도로에 깊은 바퀴자국을 만들고 그것이 레일같이 되어 있었다. 그 레일에 차륜을 넣어서 수레를 달리게 했던 것이다. 전차는 싸움을 위한 것이므로 타국의 전차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퀴자국의 폭을 다르게 해 두면 적의 침입을 막는데 효과가 컸다. 그런데 이제는 천하가 통일된 것이다. 바퀴자국의 차이는 전국적인 교통의 흐름을 저해시킨다고 여긴 시황제는 전국에 '치도(馳道)'라는 도로를 만들고 차륜의 폭을 통일시켰다.




치도(馳道)의 건설
치도에 대해서는 진(秦)나라가 멸망하고 30년이 채 되지 않은 무렵 한(漢)나라의 문제(文帝) 시대의 가산(賈山)이란 사람이 글을 남겼다. 그것이 도폭은 50보(步)였다고 한다. '보(步)란 길이의 단위이며, 1보는 지금의 1.35m 정도이며, 50보의 폭이면 67m 정도이다. 그리고 3장(丈)마다(당시의 1장은 2.25m이며, 3장은 6~7m) 수목이 심어져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성들이 동원되어 도로가 만들어지고, 그 도로가 비에의해 유실되면 보수를 해야 했다. 그리고 백성들은 관리가 파견되어 오면 그 관리의 식량이나 주거의 뒷바라지도 해야 했다. 역(驛)에는 말을 비치하여 그 말을 사육하는 것도 모두 그 지역 백성들의 일이었다. 따라서 백성들의 고통이 대단했다고 한다. 한(漢)나라 때 다시 길을 만들자는 제안이 나왔으나 이것을 간(諫)한 사람이 가산(賈山)이다. 가산은 진나라의 시황제가 길을 개척했으니 다시 만들 필요가 없으며 진나라는 그 때문에 멸망한 것이라고 말했다. 시황제가 죽자 갑자기 나라가 멸망한 것은 도로 건설로 시달렸던 백성들의 원한이 컸기 때문이며 한나라는 그것을 모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진나라가 멸망한 지 30년이 지난 때였으므로 그 당시는 시황제가 만들었던 길이 남아 있었다. 치도는 정말 훌륭한 도로였다. 폭이 67m, 그리고 6m마다 큰 가로수가 심어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북쪽으로는 구원(九原), 만리장성 근처에서부터, 동쪽으로는 황해 연안까지, 남쪽은 양자강(揚子江)에 이르기까지 길이 뚫려 있었다. 그래서 어느곳이든지 하나의 수레로 갈 수 있게 길이 연결되어 있었다. 진시황 이전에는 강소성(江蘇省)이나 절강성(浙江省)까지 가려면, 한(韓)나라에서 수레를 바꾸어 타고, 위(魏)나라에서도 바꾸어 타야만 했다. 그외에도 곳곳에서 바꾸어 타야 했지만 진시황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번거로움이 없어졌고 한 대의 수레로 전국 방방곡곡을 갈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도로로 인해 각지의 교역(交易)이 번창하게 되었고 산업경제가 활성화되는 데도 큰 힘이 되었다.




도량형(度量衡)의 통일
진시황은 도량형을 통일시켰다는 점도 아주 중요하다. 한 홉[合], 한 되[升], 한 말[斗]이라든가, 길이의 단위인 보(步), 장(丈) 등이 각국에서 약간씩 달랐다. 되나 말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한 말이 어느 나라에서는 한 말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생겼다. 그래서 전국의 도량형을 엄격히 통일시켰던 것이다. 이것은 천하를 통일했던 바로 그 해에 실시되었다. 한 홉이라는 표준 용기를 제작하여, 전국에 그것을 따르도록 명령했다. 중앙에서 보내온 한 홉짜리 용기가 동북 지방 근처에서 출토(出土)된 것으로 보아 사실상 전국에 배당되었던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산업과 경제가 발달했다. 이제까지는 각지에서 다시 하나하나 환산해야만 했던 것이 그러한 수고를 면하게 되었다. 화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진(秦)의 화폐가 전국에서 통용되었다.




절대자 시황제(始皇帝)
시황제는 현실주의자였다. 현실주의자가 아니었다면 천하통일 같은 것은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누구나 신선을 믿고 있었다. 시황제도 믿고 있었다. 그는 천하를 통일하여 황제가 되었으며 '황제'라는 말 그자체가 그가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칭호였다. 또 그때까지 누구나 다 쓰고 있던 '짐(朕)'이라는 말을 황제 외에는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등 황제의 절대화를 도모했다. 황제의 절대화는 국가를 운영해 가는데 필요한 것이었지만 시황제는 스스로 절대적인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천하통일의 대사업을 완수한 자신은 보통인간이 아니며 절대자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절대자란 구체적으로 말하면 불로불사의 인간, 즉 신이나 선인과 같은 존재이다. 스스로를 절대자라고 자임했던 시황제는 이제 자기 자신이 선인(仙人)이 되겠다,신선(神仙) 되겠다고 원하게 되었다. 신선이 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은가. 시황제는 여러 사람에게 물어 보았는데 도사(당시는 방사(方士)라고 불렀다)가 여러 가지로 수상한 짓을 가르쳐 주었다. 예컨대 신선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모습을 너무 보여 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인주(人主)는 미행(微行) 하여 체중(體中)의 사기(邪氣)를 피(避)하라.'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의 사기(邪氣)가 몸에 들어와서 신기(神氣;몸 속에 있는 신의 기운)에 해가 된다고 해서 시황제에게 당분간 사람을 만나지 않도록 말했다. 더구나 자신이 있는 곳을 아무에게도 가르쳐 주지 않도록 하고 있었는데, 우연한 계기로 거처가 알려지고 말았다. 시황제는 매우 노하여 누가 알렸느냐고 조사했지만 알 수 없었다. 그러자 그 때 곁에 있던 자들을 모조리 죽였다고 한다. 그리고 <사기(史記)>에는 아니지만 다른 사료 등에 나와 있는 이야기에 의하면 금릉(金陵;지금의 남경)에 갔을 때 역시 방사(方士)였겠지만 '이 근방에는 왕의 기운이 감돌고 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왕기' 즉 왕의 기운이 감돌고 있다는 것은 그 지방에서 왕이 나온다는 것이다. 왕은 나 혼자면 충분하지 않는가. 그런데도 왕이 나온다는 것은 자기를 대신하는 자가 이 지방에서 나올 것 같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지방의 기맥에 의한 것이므로 기맥을 단절해야겠다고 시황제는 산을 파서 무너뜨렸다. '연강굴단(連岡掘斷;연속되어 있는 언덕을 잘라 버림)'해 버리면 왕기가 없어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장소는 진회(秦淮)라고 일컬어지며 지금도 남아 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진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수로라고 전해지고 있다. 지리학자의 관찰에 의하면 그것은 인공의 하천이 아니고 자연의 하천이라고도 하지만 이런 에피소드가 생긴 것은 역시 시황제의 인품에 의한 것이리라.



소주(蘇州)에 호구(虎丘)라는 산이 있는데 그곳에는 춘추시대 오(吳)나라 왕의 무덤이 있다. 오(吳)나라와 월(越)나라는 명검이 많이 나왔던 곳으로 왕이 사망하면 검을 무덤 속에 넣었다. 그런 명검이 몇 천 개나 있다고 들은 시황제가 그곳을 파헤치게 했다는 것이다. 파헤친 자리가 검지(劍池)라는 곳이다. 파 보았지만 범이 나타나서 그만 두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파헤치려 했던 곳에 범이 있어서 검으로 바위를 쳤던 그 자리가 지금도 남아 있다고 설명서에 쓰여 있기도 한다. 검을 차지하려 했던 것 역시 검이 갖는 영력이 탐이 나서 그랬을 것으로 생각된다.



진시황의 출생

대상인이었던 여불위는 교묘한 정치공작을 펴서 진나라의 서출공자 자초의 후원자가 된다. 결국 기원전 249년 자초를 진나라 왕위에 오르게 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이렇듯 진왕 정은 여불위와 자초의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관계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자초가 어느날 여불위에 집에 초대되었는데, 여불위의 애첩을 보고 반해서 자신에게 달라고 하였다. 여불위는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큰 일을 앞두고 작은일을 양보하자는 심정으로 자초에게 재가 시킨다. 후에 그녀는 자초사이에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의 이름이 정(政)이며, 이 정이야말로 6국을 평정하고 천하를 통일하였으며 뒤에 호랑(虎狼)이라 불리운 진시황이었던 것이다.


진시황의 꿈

겨우 열세살의 나이에 왕이된 진시황은 39세의 젊은 나이에 드디어 천하를 평정하여 중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통일 국가를 건설하였다. 진시황은 자신의 크나큰 업적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서 제왕이라는 호칭을 새롭게 바꾸길 원했다. 따라서 신하들과의 논의 끝에 "태황의 황과 오제의 제"를 따서 황제(皇帝)라고 칭하게 된 것이다. 진시황은 자신은 최초로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시황제(始皇帝)라고 부르기도 하고, 후대에는 2세, 3세등으로하여 이를 천만세까지 이어 나가도록 하자는 원대한 꿈을 품었지만, 겨우 2세에 이르러 멸망당해 15년의 짧은 왕조로 끝나버렸다.


분서갱유(焚書坑儒)

천하통일이 이룩된 후 진시황의 통치 기간 중 이사는 승상이라는 최고의 벼슬에 올라 막강한 권세는 누렸다. 이사는 황제가 천하를 몸소 다스리는, 서른 여섯 개의 군으로 나라를 구분하고 그 밑에 현을 두어 조직적으로 일사분한하게 통치하는 제도를 추천했다. 그러나 이사는 학자들이 사사로이 학문을 전수하며 법을 비난하고 자기가 배운 것만을 기준으로 시비를 따진다고 모함하여, 또한 황제를 비방하는 말을 퍼뜨린다고하여 학자들을 난관에 빠뜨렸다. 결국 사관이 갖고 있는 자료 중 진나라의 기록이 아닌 것은 모두 불태우고 개인이 『시경』과 『서경』 그리고 제자백가의 책은 모조리 몰수되어 불태워 졌고 옛것을 언급해 현실 정치를 비판하는 모든 사람은 처형당했다.


불로장생의 꿈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진시황도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어떻게든 죽음을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진시황은 서시(徐市)에게 어린 소년 소녀 3천명과 많은 보물을 실은 배들을 거느리게하여 동해에 있다는 신선이 사는 섬에 가서 불로장생의 약초와 약을 구해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서시는 몇 년이 지나도록 약을 구하지 못하자 돌아와 거짓말로 둘러댔다. 그러나 서시일행은 끝내 영약을 구하지 못하고 일본쪽으로 도망쳐 버렸다. 그 후 진시황은 스스로 신선이라 자칭하는 노생과 후생이라는 사람들을 불러들여, 자신의 거처를 모르게 하였다. 그러나 필사적인 진시황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노생과 후생은 불로장생의 약을 찾지 못했다. 그래도 있다가는 틀림없이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한 그들은 진시황을 비방하고 도망쳐 버렸다. 진시황은 자신을 비방했을 것으로 자신을 비방한 사람들은 주로 유생들이었다. 결국 460여명이나 되는 유생들을 붙잡아 구덩이를 파고 생매장해버렸다. 이것이 바로 갱유(坑儒)사건이다.


아방궁과 시황릉

진시황은 죽음을 그렇게 피하려 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열세살 즉위 할 때부터 자기가 죽어서 들어갈 묘자리를 파고 있었다. 시황릉(일명 여산릉)은 높이가 116m, 주위의 길이가 2.5m, 사방이 각각 600m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로 무려 70여만 명의 죄수가 동원되어 공사를 했다. 관은 동으로 주조하였으며 무덤 내부는 궁전과 누각 등의 모형과 각종 진귀한 보물들로 가득 채웠던 것이다. 그리고 수은으로 황하, 양자강 및 바다를 본 떠 만들고 수은을 계속 흐르게 하였으며 천장에는 진주로 아로 새긴 해와 달과 별들이 반짝이게하여 지상의 세계를 그대로 펼쳐보이도록 했다. 아울러 고래기름으로 초를 만들어 조명시설도 해놓았다. 또한 내부에는 활을 설치하여 도굴자가 침입할 때는 즉시 자동 발사 될 수 있게 만들었다. 진시황이 죽어 시황릉에 매장되게 되자 후궁들도 모조리 생매장되었으며 매장 직후에는 비밀유지를 위하여 능 안의 모든 문을 걸어 잠그어 매장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그 안에서 생죽음을 당하도록 하였으며 무덤 위에는 나무를 심어 산처럼 보이도록 위장하였다. 또한 무덤 안에는 진시황을 모시는 시중과 신하 그리고 호위병과 군마 등 수만개의 도용을 배치하였으며 심지어 산채로 끊는 구리물을 뒤집어 씌워 만든 것도 있었다. 아방궁의 규모는 동서의 길이가 약700m, 남북의 길이가 115m로서 만명 정도의 사람들이 앉을 수 있고, 아래층에는 약 11.5m높이의 깃발을 세울 수 있을 만큼이나 높았다. 그리고 그 안에는 곧바로 남산으로 통하는 고가도로를 만들었으며 수위를 건너 함양으로 연결되는 복도도 만들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아방궁이 완성되기도 전에 진나라는 멸망하였다.


만리장성

한편 통일 천하를 이룬 진시황에게도 계속 부담을 주는 세력이 있었으니 바로 흉노족이었다. 그래서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북쪽 국경에 거대한 장성을 쌓도록 하고 몽염장군에게 30만 병사를 주어 그 임무를 맡도록 했다. 몽염은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요새를 구축했으며, 그리하여 10여년만에 임조(臨兆)에서 시작하여 요동에 이르는 총 길이 1만여 리의 대장성을 완성하였다. 이 공사를 위하여 30만 명의 군사 아닌 잡역부들이 동원되어 길거리에서 잠을 자야 했으며 몽염 자신도 10여 년 동안 밖을 나오지 못했다. 이 대공사는 백성들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고 결국 그렇게 무리한 사업이 원인이 되어 진나라에서는 각 지방에 반란들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후에 진나라 멸망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진승·오광의 난도 사실은 만리장성을 쌓은 고통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진시황의 죽음

사실 진시황은 대단한 인물이었다. 어린 나이에 왕이 되어 강력한 추진력으로 역사상 가장 거대한 통일 국가를 실현시켰던 것이다. 진시황의 왕성했던 정력은 대단해서 하루에 1석(약30kg)의 서류를 결재하지 않으면 잠을 자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전국시찰만 해도 통일 후 다섯 번이나 강행군하였다. 교통편도 변변치 못했던 그 시대에 중국 대륙을 다섯 번 시찰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라 할 것이다. 시황제 37년 10월, 황제는 다섯 번째 지방 시찰에 나서 회계산에 다녀오는 길에 해안을 끼고 북상하고 있었다. 황제의 시찰에는 승상 이사와 환관 조고가 수행하였으며 조고가 옥새를 관리하는 일을 겸임하고 있었다. 시황제는 20여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맏아들 부소(扶蘇)는 황제가 하는 일에 여러번 반대한 적이 있어 멀리 북쪽의 상군 지방으로 쫓겨나 변경 지방의 군대를 감독하고 있었다. 당시 상군 지방의 군사를 지휘했던 사람은 명장 몽염이었다. 한편 시황제는 작은 아들 호해(胡亥)를 귀여워하여 이번 시찰에도 아들 중 유일하게 동행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시황제가 사구 지방에 이르자 갑자기 병이 깊어져 위독하게 되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오자 그래도 믿을 건 장남뿐이었든지 황제는 조고를 시켜 맏아들 부소에게 편지를 쓰게 했다. 편지는 봉해졌으나 사자를 보내기도 전에 황제는 죽고 말았다. 황제의 편지는 옥새와 함께 조고가 쥐게 되었다.

시황제의 죽음은 일체 비밀에 부쳐졌으며 오직 호해와 이사, 조고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사는 여행 중에 황제가 죽었고 또 태자도 정식으로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죽음을 발표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비밀에 부치게 했던 것이다. 유해는 수레에 안치된 채 시찰이 계속되었다.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신하가 정사를 아뢰고 황제의 수라상도 올려졌다. 결재도 수레 안에 있는 환관이 수행하였다.


진시황은 중국 역사상 가장 두드러진 인물로써, 군현제도를 확립한 절대적 왕권 중심의 통치자였다. 진나라 멸망이후에도 역대 중국의 왕조들이 모두 답변확정한 탁월한 행정제도 였다. 후대의 관점에서 진시황을 보는 시각은 다분히 여러면이 부각되지만 가장 많이 얘기 되어지는 면은 불로장생을 꿈꾸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 아방궁과 시황릉을 세우고, 분서갱유를 일으킨 유례없는 독재자의 모습일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진시황의 진면목이 많이 가려있는 것이 사실이다. 진시황은 중국 전역을 36개 군으로 나누고, 각 군에 황제가 임명한 관리를 파견하여 행정을 담당하게 해 권력의 중앙 집중화를 꾀하였으며, 동시에 도량형, 화폐, 거궤, 문자를 통일하는 등 사회, 경제, 문화제도까지 정비 통합하였다. 이렇듯 강력한 정책을 시행함에 따라 7국으로 병립해 있던 전국시대의 분열에 종지부를 찍고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전면적 개편을 단행함으로써 중앙집권 대제국을 탄생시킨 것이다. 아마도 탁월한 합리주의자이자 가능주의자인 시황제가 아니었더라면 이런 대업적을 단기간에 이룩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진시황은 극단적인 합리성과 동시에 극단적인 비합리성이 기묘한 형태로 어우러져서, 아주 꼼꼼하게 정무에 힘쓰는 반면에, 거대건축을 세우거나 선약찾기에 막대한 재정을 쏟아부어 부질없이 낭비를 거듭하는 양극단을 오고가는 극과 극의 이중성을 지닌 인물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꼬옥답변확정부탁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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